![[가톨릭 문화산책]<34> 건축(7) 세례당과 세례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자리](//cpbc.co.kr/CMS/newspaper/2013/09/rc/474992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건축(7) 세례당과 세례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자리씻음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특별한 장소 이탈리아 오르비에토 대성당 세례대. 건축물과 특별히 관계가 깊은 세 성사는 성체성사, 고해성사, 세례성사다. 성체성사를 제외하면 건축적으로 가장 많은 고려를 해야 하는 성사가 세례성사다. 성체성사가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이라면, 세례성사는 첫 번째 성사이며 근본적인 성사다. 물론 오늘날에는 세례당이나 세례반을 어디에 둬야 하고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률적인 규정은 없다. 그렇지만 세례당이나 세례반은 성당의 중요한 초점이며 도상(圖像)이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는 징표이며 교회 일원이 되는 문이다. 그래서 세례당이나 세례대는 성당으로 들어가는 곳에 많이 놓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이 첫 세례성사였듯이 우리는 세례대를 지나 성당에 들어간다. 이탈리아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세례대 덮개는 대성당 형태를 하고 있고 그 위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다. 이것은 우리가 세례를 받아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세례당과 세례반 우리가 쉽게 잘 구별하지 못하고 쓰는 용어가 세례반(洗禮盤)과 세례대(洗禮臺)다. 세례반은 욕조처럼 바닥을 내려서 만든 것이고, 세례대는 받침을 두고 그 위에 성수를 담는 그릇을 올려놓은 것이다. 영어로는 모두 'baptismal font'(piscina)이다. 비교적 큰 세례반에는 흔히 물 안에 들어가기 위한 계단과 물에서 나오기 위한 계단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죽음과 부활을 나타낸다. 세례반이 낙원과 관련된 도상으로 장식돼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성수대(aqua benedicta fontana)는 신자들이 마귀를 쫓는 의식으로 손에 찍어 십자성호를 그으며 기도할 때 쓰는 성수를 담아 성당 입구에 놓아두는 그릇이 받침 위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세례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니 잘 구분해야 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세례반이나 세례대가 없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신 것을 연상하기 위해 자연에 흐르는 물에 몸을 담가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점차 세례반 속에서 몸을 담게 해 세례를 주었으므로 세례반도 상당히 컸다. 이때 세례반에는 어른용과 유아용 두 가지가 있었는데, 어른용은 바닥보다 낮게 하고, 유아용은 바닥보다 약간 높게 해 영세자가 쉽게 몸을 담그거나 머리에 물을 붓기 쉽게 했다. 초기의 세례반은 사방 2m이고 바닥이 대략 70㎝ 내려가 있었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이 서 있으면 넓적다리까지 잠기고, 무릎을 꿇고 앉으면 가슴까지 잠겼다. 세례는 기본적으로 장소를 선택하지는 않지만 많은 성당에는 전용 세례 영역, 곧 독립한 세례당(洗禮堂, baptistery)이 있었다. 세례당은 세례반을 둘러싸는 독립된 중심형 구조물이다. 세례당이 따로 독립해 지어졌다는 것은 당시에 세례성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보여준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모든 세례대는 세례성사의 면모,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많은 교회에서는 세례대가 별도의 방이나 경당 또는 교회 내부의 독립적인 공간에 설치됐다. 오래된 세례당의 대부분은 성인 세례 지원자를 많이 수용하는 독립된 건축물로 돼 있었다. 세례당이 따로 있는 성당에서 세례반은 세례당에 설치됐지만 보통은 성당 안에 설치됐다. 또 어떤 세례당은 남녀를 구별하기 위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기도 하며, 간혹 남녀를 구별하려고 두 개의 세례당을 지은 경우도 있다. 성인 신자라도 자신의 탄생을 재현하기 위해 벌거벗은 몸으로 세례를 받는 수가 많았다. 세례는 사회적으로도 중요했다. 일부 도시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례를 받지 않으면 시민권을 얻을 수 없었을 정도였으므로 세례당은 눈에 잘 보이게 설계했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주교가 모든 세례 지원자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것도 1년에 3번뿐이었다. 세례가 없는 몇 달 동안은 세례의 정통성을 위해 세례당의 문이 주교의 인장으로 봉해져 있었다. 따라서 세례당은 그리스도교 초기 수 세기에는 도시 중심부의 주교좌 성당에만 있었고 교구 성당에는 없었다. 여행하다가 이런 세례당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공적으로 매우 중요한 건물이었음을 기억해 둬야 한다. 세례당은 씻음을 상징하는 로마의 공중 목욕탕과 죽음을 상징하는 영묘(mausoleum)라는 당시 두 개의 중심형 건물 유형을 본떴다. 이스라엘 쉬브타(Shivta)에 있던 성당의 십자형 세례반(5세기)처럼, 세례반은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는 것이므로 대개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었다. 특히 초기 세례반은 사각형이었으나, 유명한 사탑이 있는 피사 대성당의 왼쪽에 있는 거대한 원형 세례당처럼 원형은 삼위일체와 다시 태어남(요한 3,3)을 나타냈고, 6각형은 일주일의 여섯 번째인 금요일과 아담이 창조된 날에서 오는 죽음을 나타냈다. 세례당에는 8각형 평면이 많았다. 그것은 '창세의 7일간' 다음의 시간을 나타내며, 그리스도께서 일주일의 첫날, 곧 구약의 7일로 이뤄진 일주일을 지나 제8일에 부활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8각형의 세례당은 세례를 받는 사람의 영적인 미래를 나타냈다. 로마의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 있는 세례당은 5세기에 지어진 첫 번째 세례당으로, 많은 세례당이 이것을 모델로 했다. 3개의 단을 두어 세례반에 내려가며, 세례반의 물은 자연의 샘물에서 받았다. 위에는 금이나 은으로 된 비둘기가 매달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밖에서는 정사각형으로 보이지만, 안에 들어가야 8각형으로 보이는 것도 있고 12각형 또는 원형인 세례당도 있다. 세례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유럽의 모든 성당에는 세례를 위한 세례대가 있다. 세례를 위해 축성된 물이 세례를 받는 사람의 이마나 머리 위에 부어질 때 세례대 안으로 흘러내리게 된다. 12세기의 세례반은 유아의 온몸을 물에 담그기 위해 8각형이 아닌 긴 사각형으로 돼 있었다. 세례반 밑에는 세례에 사용된 물을 흘려보내기 위한 배수관이 연결 돼 있다. 이 물은 성별된 거룩한 물이므로, 땅속에 마련된 특별한 구멍에 직접 흐르게 했다. 일반적으로 세례대에는 정교하게 장식을 했으며 예술성이 풍부한 덮개가 있었다. 세례대는 작으면서도 세련된 상징으로 장식돼 있는 것이 많으므로, 성당을 찾아갈 때에는 반드시 이것을 자세히 봐야 한다. 유럽에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지자 성인 영세자가 줄어들었다. 7세기 무렵에는 성인세례 대신에 유아세례가 일반화되면서 따로 떨어진 큰 세례당이나 세례반을 둘 필요가 없어지고, 세례반도 유아 한 사람을 물에 담글 정도까지 작아졌다. 또 어린이는 세례대 위로 들어 올려 물을 부었고, 어른은 세례대 위로 허리를 굽힐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적은 물을 영세자 머리에 붓게 되면서 세례반도 점차 축소됐고, 받침을 둔 세례대가 생겼다. 그러자 세례대는 점차 성당 안에 자리잡게 됐다. 그렇지만 이 세례대의 중요성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 닫집(cibirium)을 그 위에 덮거나 덮개를 장대하게 장식했다. 중세 성당의 세례대에 있는 목재 덮개는 세례용 성수를 먼지 같은 것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때로는 아름다운 조각을 새긴 덮개를 위에 매다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넓은 성당 안에서 세례대의 존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세례반을 강조하는 성당이 지어지고 있다. 미국 유타 주 솔트 레이크 시티의 막달레나 대성당의 세례반(1991년)은 침례라는 오랜 전통을 살린 것이며, 성경에 나오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천상의 도시를 상기시겼다. 1990년대에 만들어진 어떤 성당의 경우에는 무려 3만 8000ℓ의 용량을 가진 세례반을 만든 경우도 있다. 이 세례반은 천연석을 촘촘하게 깔아 호수나 강에서 세례를 받는 듯한 느낌을 주게 하고, 원시 그리스도교의 소박한 세례를 상기시키기 위해 건축적인 상징을 쓰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나라 성당은 어떤가? 우리의 성당에는 세례당도 없고 세례반, 세례대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시대가 바뀌고 방식이 바뀌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세례성사를 위해 세례당까지 따로 지었던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세례반이나 세례대에 담겨 있는 본원적인 의미를 살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도 세례성사에서는 적어도 주전자로 머리에 성수를 붓고 이를 플라스틱 용기로 받아내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대신할 오늘날의 세례대와 세례반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야 한다. 김광현(안드레아, 건축가,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cpbc2013.09.24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7. 주님 세례 축일](//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7387_1.0_titleImage_1.jpg)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7. 주님 세례 축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사명의 시작"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제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이자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수락하시고 시작하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사진은 색유리화로 표현한 예수님의 세례 장면. [CNS 자료사진]◇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세례(535~6, 1223~4항) : 예수님은 요르단 강에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요한 세례자는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해 파견된 주님 직전의 선구자입니다. 요한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자청하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당신의 '비우심'을 나타냅니다. 강생 곧 거룩한 성탄을 통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아들이 자신을 낮추고 비워 사람이 되신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한 점의 죄도 없는 거룩한 분이시지만 죄인들이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고 비우신 것입니다. 이는 죄인인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따라서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예언된 '고난받는 종'(이사 53장 참조)이라는 당신 사명을 수락하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명은 "죽음의 '세례'"(536항)로 완성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겪으셔야 할 일 곧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당신이 받아야 할 '세례'라고 말씀하십니다(마르 10,38 참조). 이 죽음의 세례는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들을 위해 수난을 겪고 죽어야 한다는 아버지 뜻을 수락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수락에 성부께서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소리로 화답하십니다. 또 성령께서는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어 머무르십니다. 하늘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고 성령께서 예수님께 내려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다시 한 번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는 동방박사들의 아기 예수 경배와 마찬가지로 '주님 공현'입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다'(3,21)고 전합니다. 아담의 죄로 닫혔던 하늘이 예수님의 세례로 다시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따라서 "새로운 창조의 서막"(536항)이기도 합니다. ◇알아둡시다 ㉠세례의 예표(1217~1222항) :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약에서부터 이 세례의 예표(豫表)를 여러 가지로 보여줍니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이 홍수와 노아 방주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방주 덕분에 홍수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홍수를 통하여, 죄를 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주셨나이다."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 또한 세례로 이뤄지는 해방을 예고합니다. 교회는 부활 성야 때에 세례수를 축복하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홍해를 건너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세례 받은 새 백성의 예표로 삼으셨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을 건너는 것 또한 세례의 예표입니다. "요르단 강을 건넘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된 땅을 선물로 받는데, 이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이 복된 상속의 약속은 새 계약 안에서 성취된다"(122항).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약의 예표(1223~1225항) : 구약의 이 세례 예표들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성취됩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파스카 신비, 곧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통해서 죄에 죽고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의 샘'을 모든 사람에게 열어주십니다. 성경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병사가 찌르자 "곧 피와 물이 나왔다"(요한 19,34)고 전하는데, 교회는 물과 피가 "새로운 생명의 성사들인 세례와 성체성사의 예형"(1225항)이라고 봅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니코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 비로소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 부활하신 후에는 사도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태 28,19)고 분부하십니다. ㉢교회 안의 세례(1226~1228항) : 그리스도의 이 명령에 따라 교회는 오순절 그날부터 거룩한 세례를 거행하고 베풀어왔습니다. 이 세례는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결부돼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 2,38). 이렇게 믿는 이들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 성령을 통하여, 세례는 깨끗하게 해주고 거룩하게 해주고 의롭게 해주는 목욕이다"(2227항).◇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로써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겪으셨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내려오셨고 아버지께서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공생활의 중심은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는 것,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했습니다. 성령을 받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모습은 어떠한지요? '내 사랑하는 아들 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딸'로서 살고 있는지요?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퇴사자22013.01.08
![[아! 어쩌나] 201. 풍랑 속의 영혼들](//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3226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201. 풍랑 속의 영혼들 Q. 루카복음 8장 22절을 보면 주님께서 풍랑 속에서 주무시면서 마치 제자들을 시험하시려는 듯한 느낌을 주는 행동을 하십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왠지 주님께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일부러 제자들을 조롱하듯 시험하신 것일까'하는 불편한 생각 때문에 이 복음을 묵상하기를 일부러 피할 정도입니다. 성당 선배 신자 분들에게 이런 제 생각을 말했더니 "그것은 불경죄에 해당된다"고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자들이 조롱당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문제가 있나요? A. 루카복음 해당 구절에는 주님과 제자들의 미묘한 감정이 잘 묘사돼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 가서 흔들어 깨우며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다 어떻게 되었느냐?'하시며 책망하셨다. 그들은 두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데 바람과 물결까지도 그 명령에 복종하는가?'하고 서로 수군거렸다"(루카 8,22-25). 얼핏 보면 주님께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일부러 모른 체하시다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은 성장심리 관점, 생존심리 관점에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선 제자들은 평범한 신앙인들이 역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죽음에 임박했을 정도로 위기의식을 느끼자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겸손함을 보입니다. 즉, 자신의 힘과 머리만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자신들을 내려놓고 주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그게 무슨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려운 일, 앞날이 캄캄할 정도로 힘겨운 일이 닥쳤을 때는 대부분 기도하지 않고, 불안한 생각에 휘말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머리로 해결하려고 하다 결국은 좁은 늪과 같은 불안감에 빠져 심리적 질식사를 당하곤 합니다. 평소 자신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이에 반해 제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낮은 자의 겸손함을 보입니다. 또 제자들은 주님을 부를 때 혼자 하지 않고 함께 몰려가 도움을 청하는 기도의 자세를 보입니다. 자폐 성향이 있는 사람 혹은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힘든 일이 생겼을 때 혼자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 해결이 안 되면 극단적 방법으로 자기 파괴적인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럿이 함께 가서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건강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교회는 여럿이 모여 하는 미사야말로 기도 중의 기도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제자들 모습은 '미사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에 대해 시범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조용히 깨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화를 내든 말든 소리치면서 주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죽게 됐는데 왜 책임 있게 대응하지 않느냐고 주님을 몰아세우는 듯한 말을 합니다. 많은 분이 청원기도를 할 때 '내가 죄를 많이 지었는데,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하는 의문과 갈등을 품고 기도합니다. 소위 이것을 신경증적 기도, 눈치꾸러기 기도라고 하지요. 이러한 기도는 불안한 마음으로 하기에 기도 결과에 대해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의 불안함을 떨어버리려는 의도와 확실한 결과를 얻고자 하는 의도로 주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청합니다. 바로 신앙인들이 본받을 만한 자세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책망했을까요? 만약 당신을 흔들어 깨운 사람들이 제자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그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당신의 대를 이을 사람들,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줄 미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가르침을 주었고, 기적을 목격하게 해준 제자들이 위기에 닥치자 어린아이처럼 흔들리는 것을 보시고, 공동체 책임자가 지녀야 할 자세를 보여주지 못한 것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가르침을 주신 것이 아니라, 병자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의지처로 내어주시고 치유자 역할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 뒤를 이어 수많은 사람의 정신적 지도자가 돼야 할 제자들에게는 엄격한 내적 훈련, 역경 속에서도 잘 버티는 훈련, 즉 특수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님은 주님의 이러한 깊은 뜻을 잘 이해하며 성경을 읽어야 왜곡된 해석을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홍성남 신부 (서울대교구 영성생활상담소장) 상담전화: 02-776-8405 cpbc2013.05.14
 제4화 한국 교회 건축의 오늘-성미술과 성당건축](//cpbc.co.kr/CMS/newspaper/2012/09/rc/427122_1.1_titleImage_1.jpg)
[교회건축을 말한다](19) 제4화 한국 교회 건축의 오늘-성미술과 성당건축하느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움, 군더더기 덧칠해선 안 돼 오래 전 한국가톨릭미술가회 모임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우리 미술가회 수호자인 이탈리아 화가 프라 안젤리코를 말씀하시면서 그가 산마르코수도원 벽에 그린 '수태고지'(受胎告知) 그림의 성모님 얼굴을 보면 화가가 자신을 한껏 낮춰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렸기에 그 성모님이 더 없이 아름답다고 하셨다. 이 프레스코 연작은 수사들이 묵상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제작됐는데 오랜 세월 많은 화가들이 정성을 쏟아 그린 성모상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그의 그림이 그렇게 감동적인 것은 그가 화가로서의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때 추기경님이 회원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신 것은 매우 적절하고도 단순명료한 설명이었다.앙리 마티스가 도미니코수도회 성당에 그린 14처(그림1). 교회미술, 소위 성미술품을 다루는 화가와 조각가와 공예가, 그리고 건축가들에게 프라 안젤리코의 성모님 이야기는 하나의 귀중한 가르침이다.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낮춰야 성립되는 일이다. 프라 안젤리코는 화가이기 이전에 수도자였다. 저명한 미술평론가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는 "안젤리코는 열정적으로 기도한 다음에야 그림을 그렸다. 기도 없이는 절대로 붓을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프라 안젤리코는 기도 행위로 그림을 그렸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그릴 때는 눈물을 흘렸고, 자주 무릎을 꿇고 그림을 그렸다. 앙리 마티스는 말년에 그가 은퇴해 살고 있던 프랑스 남부 방스(Vence)에서 도미니코수도회 수녀님들 부탁으로 개보수하는 수도회 성당에 성모자상과 14처를 그리게 됐다.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부유한 노년을 보내고 있던 그는, 그때 갑자기 자신이 그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종교화를 그려온 노(老)대가가 갑자기 십자가에 이르는 고난의 길에서 보인 예수 모습을 자기 마음대로 상상해 그린다는 것에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극심한 고통에 신음하는 예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마치 자기가 본 듯이 그린다는 일은 나름의 과장된 생각을 남들에게도 강요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거나, 아무리 좋게 말해도 마티스 자신의 생각(상상력)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그는 14점의 예수님 그림을 단순한 몇 개의 선으로 추상화할 수밖에 없었다.(그림 1) 그는 성모자상에서도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 얼굴을 윤곽선만으로 그렸다. 그는 십자가상 예수님과 그 아래 성모님 얼굴을 그리지 않았다.(그림 2) 그는 자신의 예술을 종교에 양보했다. 누구든지 그 추상화된 선화(線畵)들에서 스스로, 마음대로, 각자의 예수님과 성모님을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됐고, 오늘날 방스의 도미니코수도회 성당의 성모자상과 14처 그림은 마티스의 어떤 걸작보다도 더 유명한,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다. 위대한 화가 지오토는 '오직 자연의 제자일 뿐'이라고 불릴 만큼 철저히 사실적인 화가였다. 그는 파도바(Padova)의 스크로베니 소성당 벽면과 천장을 가득 채운 36개의 성경 장면들을 그리면서 모든 인물을 그린 다음 대부분의 프레스코 화면 배경을 파란 하늘과 푸른 색깔로 그려 자신의 하느님을 표현했다. 성경의 이야기들 중에서도 예수의 신적(神的) 면모를 보여주는 기적 장면들을 대폭 축소하고 성모 마리아의 일생, 예수의 어린 시절과 수난을 강조해 초자연적 현상보다는 인간적 기록에 관심을 뒀다. 성경 장면을 마치 우리가 보는 듯이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그림으로 형상화하지 않고 푸른 하늘색으로 추상화했다. 그 하늘색은 파도바 지방에서 늘상 보게 되는 가장 평범한 푸른색이었다. 건축은 본질적 구조 요소들로 이뤄진다. 4개의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건축의 기본형은 어떤 대규모 성전에서도 같다. 그 뼈대 위에 외벽을 바르고 내벽을 씌우고 그것을 디테일로 마감하는 것은 사실상 건축의 구성과 구조에서 본질이 아니다. 따라서 그 벽 위에 프레스코(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로 성화를 그려 성당 내부를 장식하는 일은 건축을 구성하는 본래적 요소가 아니다. 건축은 벽화 없이도 서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그런 여분의 장식으로 벽화를 그려왔기에 그것에 식상해지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는 벽화 대신에 그림을 그린 액자를 벽에 걸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벽화보다 간편하게 그림을 바꾸거나 치울 수 있어서 좋았다. 단순하고 명쾌한 순수성을 강조하는 현대 성당건축에서 그런 장식 그림들은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특히 '현대적'이라고 이야기되는 미니멀 시대 건축에서는 오히려 아무 장식 없는 흰 벽만이 순수한 느낌을 준다는 의미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흰 벽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스스로,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는 여백으로 남는다. 그래서 어쩌면 아시시에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작은 기도방은 아무런 장식이 없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기도하기 좋은 방은 아무 장식도 없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조용한 채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자유로운 느낌 속에서 기도하는 분위기가 보장되려면 성당 벽을 장식하는 성미술품들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종교는 하느님이 만드신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군더더기 덧칠이 되지는 않을지 생각해야 한다.김원(안드레아, <주>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조은일2012.09.25
![[성경 속 궁금증] (5) 유다인은 왜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했나?](//cpbc.co.kr/CMS/newspaper/2011/09/rc/38898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5) 유다인은 왜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했나?순수 혈통 보존 못했기 때문유다인들은 혼혈민족이라는 이유로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다.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착한 사마리아인'(1890년).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땅 제일 북쪽에는 갈릴래아가 있었고, 중간에는 사마리아, 남쪽에는 유다 지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북쪽 갈릴래아에서 남쪽 유다 지역으로 가는데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면 사흘밖에 걸리지 않지만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고, 요르단 강을 건너 두 배나 되는 먼 길을 돌아다녔다. 당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대화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방인 지역이라 알고 있는 사마리아 지역도 본래는 유다인들 땅이었다. 사마리아인들도 이스라엘 중부 팔레스티나 지방에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분파였다. 어쩌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그토록 적대시하게 됐을까. 본래는 통일 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이후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으로 분열됐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으며, 오늘날 북이스라엘을 부르는 통칭이기도 하다. 사마리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교통 요지였으며, 주변 평지보다 100m 정도 솟아오른 해발 430m에 있는 천혜의 요새 도시였다. 또 왕궁을 상아로 꾸미고 값비싼 향유를 맘껏 쓸 정도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아모 6,4-6). 이러한 사마리아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에 점령당한다. 아시리아는 타민족 정복정책으로 정복한 민족의 씨를 말려버리는 정책을 사용했는데, 그 방법으로 타민족과 혼인, 즉 혼종(混種)정책을 썼다. 북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한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 유다인들 일부를 자기들이 정복한 타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타정복지 민족들을 북이스라엘로 이주시켜 서로 혼인하게 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순수한 혈통 유다인들은 자취를 감추고, 예수님 시대 이방인이라 일컬어지던 혼혈민족 사마리아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순수한 혈통을 지닌 유다인들은 남쪽 유다왕국 후손들뿐이었다. 이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약속받은 땅을 공유하는 자신들 민족으로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았다.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지 못한 사마리아인들을 심지어 '개 같은 놈'이라 부르며 멸시하고 천대했다(요한 4,1-42). 사마리아인들 역시 아시리아 임금 보호를 받으며 나라를 유지한 유다왕국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이방인처럼 대하자 원한을 품었고, 결국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지간처럼 지내게 됐다. 그러다 기원전 587년 유다왕국도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하고, 유다인들은 유배 후 반세기만에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은 성벽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폐허가 된 도시였다. 귀향한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 성전 재건 작업을 시작한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도 성전 건설 작업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거룩한 성전 건설 작업에 함께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이 사건으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놓인 적개심의 골은 더 깊어졌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을 계속 적대시했고,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미친 백성, 비열한 백성으로 철저히 무시하고 천대했다. 이러한 관계가 예수님 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퇴사자22011.09.06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5대 대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 축복식-이모저모수도회 쇄신과 새로운 선교사명으로 이끌 지도자 맞아 20일 거행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5대 대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 축복식은 베네딕도회다운 수도생활 쇄신을 통해 새로운 노래를 부르며 선교사명에 투신하겠다는 전 회원들의 일치된 다짐의 자리였다. 동시에 제5대 덕원 자치 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직 승계 승인 발표를 통해 1949년 5월 폐쇄된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께 연길교구에 대한 깊은 연대를 표명한 자리였다.주례주교인 조환길 대주교와 이형우 아빠스의 안내를 받아 공동집전 사제석의 첫 자리에 선 박현동 아빠스.덕원 자치구장 서리직 승계 ○…말씀전례 후 열린 축복예식은 본원장 김종필 신부가 지난 5월 7일 선출된 박 신임 아빠스를 주례인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에게 소개하고 덕원 자치 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 승계 승인 공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개막. 교황청은 이 공문에서 2005년 왜관수도원 장상이 덕원 자치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직을 당연 승계토록 한 바 있어 박 아빠스는 5월 7일 선출과 동시에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승인을 받아 서리직을 승계, 한국 주교회의에 정식회원으로 참가하게 됐음을 선포. 이어 박 아빠스는 조 대주교 앞에서 교회법과 수도규칙에 명시된 장상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서약하고, 수도형제들과 사제단, 주교단, 평신도 등 1500여 명이 성인호칭기도를 바치는 가운데 제대 앞에 엎드려 천상 교회에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왜관수도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로서, 덕원 자치 수도원구를 책임진 사목자로서 참된 수도생활의 여정을 걸어갈 것을 다짐.수도형제들과 일일이 평화의 인사 ○…조 대주교는 축복예식의 절정인 축복기도를 통해 새 아빠스에게 장상직 수행에 필요한 지혜와 열정, 사랑을 내려주실 것을 하느님께 간구한 후 사부 성 베네딕토의 가르침이 담긴 수도규칙을 수여하고 중용의 정신과 분별의 지혜로 수도형제들을 돌볼 것을 당부. 또 성 베네딕도회 아빠스들이 사도좌 특전으로 11세기부터 주교 복장을 착용해온 관례에 따라 박 아빠스에게 수도공동체와의 신의를 표시하는 반지와 교회 상급 장상임을 표시하는 모관을 수여. 전임 수도원장인 이형우(시몬 베드로) 아빠스도 목자의 책임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박 아빠스에게 물려주고 포옹. 축복예식은 박 아빠스가 조 대주교를 비롯해 함께한 주교단 20여 명 및 사제단 80여 명, 수도형제들과 일일이 포옹하며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끝나고, 계속해서 성찬전례가 거행됐다. 수도원 최고령자 이석철(미카엘) 수사와 막내 문정재(베드로) 지원형제, 박 아빠스의 부친 박팔수(암브로시오, 70)씨와 모친 김순연(데레사, 69)씨는 전례에 쓰일 제병과 포도주를 봉헌. 수도원의 밑거름으로 ○…미사에 이은 축하식은 왜관본당 순심유치원생들이 박 아빠스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는 것으로 시작. 아빠스의 출신 본당인 대구대교구 울릉도 도동본당 사목회 김영윤(아나니아, 55) 부회장은 도동본당 신자들의 영적 선물을 담은 기념패를 증정. 축복식은 젊은 수도형제들이 새 아빠스를 모신 기쁨을 시편 23편을 모티브로 삼아 더글라스 놀만 곡 '목자의 노래'에 담아 노래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 「분도통사」를 집필한 요한네스 마르(72) 독일 뷔르츠부르크대 종신교수는 축사에서 "덕원과 연길수도원 순교자들의 빛으로부터 큰 힘은 받은 왜관수도원은 앞으로도 지역 교회 안에서 선교 베네딕도회로서 역할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당부.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재단사무국장 유영희(막달레나) 수녀도 "신임 아빠스님의 인간적 풍요로움과 포용력, 훌륭한 성품이 선교베네딕도회로서 왜관수도원이 제 역할을 하는데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박현동 아빠스가 걸어온 길 울릉도 '섬 소년'이 아빠스가 됐다. '영적 스승 내지 아버지, 지도자'를 뜻하는 아빠스직을 맡게 된 박현동 신임 아빠스는 1970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44세에 불과하다. 젊은 만큼 '새로운 노래'가 기대된다. 1992년 1월 왜관수도원에 입회하기까지 박 아빠스는 경북대 응용화학과를 다니며 아마추어 무선통신에 취미를 둔 평범한 공학도였다. 대학시절 대구 대명동성당에서 주일학고 교리교사를 지냈는데, 그곳에서 성소를 느꼈다. 한국 인권 운동의 대부 허창수(본명 Herbert Erich Wottawah) 신부, 평생을 성경과 수도생활 강의와 피정 지도, 수도자 양성에 바친 진문도(Joseph Wilhelm Timpte) 신부 등이 삶의 모범으로 그에게 성소의 씨앗을 뿌린 것. 왜관수도원을 찾자마자 '여기가 내가 살 곳이구나' 싶었을 만큼 수도회에 반한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수도자의 길을 걷는다. 1997년에 첫 서원을, 2001년 종신서원을 하고 그해 10월 사제품을 받은 박 아빠스는 6년간 비서와 청ㆍ지원장으로 재임했다. 1996년엔 수도회 봉쇄구역을 소개하려는 취지로 웹사이트를 만들어 한국 가톨릭단체로는 최초로 인터넷 누리방을 개설하기도 했다. 대기업도 누리방을 안 만들 때였다. 이어 로마로 유학을 떠난 그는 교황청 라테라노 대학에서 교회론을 전공했으며, 수도회 요청에 따라 시복시성청원인 양성 과정을 이수했다. 유학 이전까지만 해도 '일 중독자'였던 그는 로마 성 안셀모수도원에 살며, 또 방학이면 유럽 각국 수도원으로 다니며 수도생활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2007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830㎞ 순례여정은 그를 수도자적 삶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끈다. 2011년 귀국한 박 아빠스는 대수도원장 피선 직전까지 왜관수도원 수련장과 유기서원자 책임자, 시복시성 위원을 맡았고,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연합회 평의원과 시복시성 조정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한국 남자수도회 장상협의회 수련자교육전문위원장도 지냈다. 한국 베네딕도회의 새 영적 아버지로서 박 아빠스는 왜관수도원이 '영적 오아시스'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또 소임보다는 수도생활에 집중하자는 이덕근(1985~95년 재임) 아빠스 이래의 수도생활운동의 결실을 거두겠다고 한다. 나아가 '경청하는 아빠스'로서 회원들의 중지를 모아 사부 성 베네딕토의 영성을 전파하겠다는 포부도 전했다. 오세택 기자 cpbc2013.06.25
![[성경 속 상징] 양털](//cpbc.co.kr/CMS/newspaper/2011/02/rc/367978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양털좋은 값어치를 갖고 있는 상품 지난 1월 21일 성녀 아녜스 축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어린 양 두 마리를 축복했다. 교황이 축복한 이 어린 양의 털은 교황이 해마다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전 세계 신임 대주교를 로마로 불러 그들에게 입혀주는 팔리움(pallium)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팔리움은 대주교가 목과 어깨에 둘러 착용하는 좁은 고리 모양 양털 띠로 주교 임무의 충실성과 교황 권위에 참여함을 상징한다. 양은 다른 동물에 비해 우리에게 친근성이 덜한 동물이다. 아무래도 농경민보다는 유목민과 가까운 동물이기 때문이다. 양은 인간에게 젖과 고기, 털을 제공하는 등 버릴 것 없이 쓰임이 많은 동물이다. 특히 양털은 예로부터 옷, 이불, 신발 등의 재료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이러한 양털은 성경에서도 좋은 값어치를 갖고 있는 무역상품으로 등장한다. "너에게는 제품도 많고 온갖 재물이 많아, 다마스쿠스도 헬본 포도주와 차하르의 양털을 가져와 너와 무역을 하고, 단과 야완 머우잘도 너와 상품을 교환하였는데, 그들이 네 물품 값으로 가져온 것은 망치로 두드린 쇠, 계피, 향초였다"(에제 27,18-19). 이스라엘 민족은 유목생활을 했기에 성경에는 양털을 깎는 일이 자주 등장한다. "라반이 마침 양털을 깎으러 간 틈을 타서, 라헬은 아버지 집안의 수호신들을 훔쳐 냈다"(창세 31,19). "마온이라는 곳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는 카르멜에 목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나 되는 큰 부자였다. 마침 그는 카르멜에서 양털을 깎고 있었다"(1사무 25,2). 하지만 양털을 아무 때나 깎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1년에 한 번 양털을 깎게 되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때 양들을 함께 돌보았던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 며칠 동안 먹고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간교한 지혜가 많았던 압살롬은 양털을 깎는 때를 복수에 이용했다. 압살롬이 다윗의 왕자 모두를 초대해 남김없이 죽이려 했던 것도 양의 털을 깎은 후 축하연에 사람들을 초대한 자리에서였다(2사무 13,18-33). 우리가 일반적으로 목장에서 보는 양은 털이 더러운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러한 양들의 더러운 털을 헤치고 속을 보면 안에는 뽀얀 흰털이 있다. 그래서 양털의 흰색을 하느님의 자비에 비유하기도 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다니엘의 환시에서 하느님을 연상시키는 연로하신 분을 언급할 때 양털에 비유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다니 7,9). 흰 양털은 무구함의 상징이다(레위 14,49-53). 성전에서 하느님을 섬길 때 대제사장은 가는 베로 만든 옷을 걸쳐야 하며, 양털로 만든 의복을 입는 것은 엄히 금지됐다. "그러나 그들이 안뜰 대문으로 들어올 때에는, 아마포 옷을 입어야 한다. 안뜰 대문 안에서나 주님의 집 안에서 예식을 거행할 때, 양털 옷을 걸쳐서는 안 된다"(에제 44,17).cpbc2011.02.22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18·끝>요한서간·요한묵시록](//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6889_1.0_titleImage_1.jpg)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요한서간·요한묵시록요한서간- 베드로 수위권 받아들여 공동체 내 갈등 극복, 요한 묵시록- 환시 통해 말씀 기록하며 구원의 희망 표현사진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으셨다는 곳에 지어진 갈릴래아 베드로 수위권 기념 성당. 평화신문 자료사진 ▨요한서간 사랑에 대한 계명은 요한복음과 요한서간을 관통하는 근원적 주제다. 요한 공동체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요한서간에 나타난 문제를 알아야 한다. 요한서간에는 반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다. 이들은 세 가지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올바른 그리스도 신앙을 왜곡하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그리스도와 인간 예수를 구분한다. 요한의 첫째서간은 이들을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요한의 첫째서간은 공동체 구성원에게 이들을 경계하라고 쓴 편지다. 문제는 요한 공동체는 교계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님과의 직접적 친교 안에서 저마다 성령을 안내자로 삼아 독립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공동체였다. 요한의 셋째서간은 디오트레페스라는 인물을 거명하면서, 디오트레페스가 우두머리 노릇을 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디오트레페스와 요한서간의 저자 요한 원로 사이에 교의적인 문제에 대한 갈등은 없다. 디오트레페스가 주도권을 갖고 우두머리 행세를 하려는 것이 쟁점이 됐다. 디오트레페스는 요한 공동체에서 성령을 모시고 스스로 성령 안에서 올바른 식별을 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거부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거부하고, 성령만 유일한 스승이라고 고집하는 분리주의자 문제와 우두머리 노릇을 하려는 디오트레페스라는 사람으로 인한 갈등이 요한 공동체 안에 드러나게 됐다. 과연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됐을까. 이를 요한복음 21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21장은 부록이다. 요한복음은 본래 20장으로 끝난다. 21장은 요한의 첫째ㆍ둘째ㆍ셋째서간 모두 작성된 다음 최종적으로 첨가됐다. 요한 공동체가 겪고 있는 이단의 문제, 새 우두머리로 등장하는 디오트레페스에 대해 요한 공동체는 21장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복음 21장 내용은 두 가지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발현하시는 것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목권을 부여하시는 이야기다. 요한 21장에서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는 대목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뒤집어서 질문하시고는,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하고 사목권한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신다. 요한복음은 20장까지 베드로에게 주어진 수위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질문하며 당신 양들을 맡기신다는 이야기를 21장에 넣은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요한 공동체는 그동안 지도자 없이 성령 안에서 저마다 신비한 방식으로 예수님과 일치하며 살았는데 이단 문제가 발생하고,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요한 공동체에도 지도체제가 필요했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부여하신 보편적 목자의 권한을 요한 공동체가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뜻한다. 베드로의 수위권이 최종적으로 요한복음 21장에 첨가된 것이다. 요한의 문헌은 요한복음 21장을 첨가함으로써 완성됐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의 영적 지도력을 계승하고 있다. 베드로의 보편적인 사목권한을 수용하면서 요한 공동체는 보편교회 안에 통합됐다. 요한 공동체에 싹튼 이단적인 움직임을 단죄할 수 있고, 보편교회 안에서 요한 공동체가 받은 심오한 계시 진리를 나눌 수가 있게 됐다. ▨요한 묵시록 환시를 통해 하느님 말씀을 보고 듣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묵시록이다. 순교자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보상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새롭게 해주시리라는 희망이 표현된 것이 묵시문학이다. 요한 묵시록 배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 치하에서 박해를 받고 있을 때다. 묵시록은 도미티아누스 치세 말엽(92~95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한다. 묵시록은 로마 제국 하에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고난을 겪는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고 마침내 사탄을 암시하는 용과 같은 존재들이 영원히 파멸돼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드러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을 노래한다. 문제는 묵시록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있었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는 없었다. 60년대 네로 박해를 회상하며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묵시록이 박해 상황을 묘사하고, 구원의 시간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는 이유는 로마 제국주의로 대표되는 악의 세력에 저항하려는 의식 때문이다. 1세기 말 소아시아와 유럽은 평화로웠다. 로마 황제는 제국을 지배하면서 유연한 정책을 썼다. 자율성과 지역특수성을 허용하면서 로마 제국에 대해 각을 세우게 하는 정책은 가급적 피했다. 그런데 에페소 주변의 소아시아에서는 지방 귀족들이 황제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황제 숭배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황제 숭배 사상에 대해 묵시록의 저자 요한은 저항한다. 요한 묵시록은 사탄의 도구로 전락한 제국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요한 묵시록은 각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게 한다. 묵시록은 선교의 완성이자 신앙의 최고 증언이다. 요한 묵시록은 말씀의 사회적 육화를 가장 치열하게 추구한 묵시문학이다.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은 평화방송 TV 홈페이지(www.pb c.co.kr) 강좌/성경 꼭지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퇴사자22013.06.04
 장신구- 거룩한 하느님 경배 상징](//cpbc.co.kr/CMS/newspaper/2011/07/rc/382440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122) 장신구- 거룩한 하느님 경배 상징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구석기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고인돌 가족'을 보면 등장 인물들이 조개, 뼈, 돌멩이 등을 화려하게 엮은 장신구를 하고 나온 것을 볼 수 있다. 영화에선 희화적으로 묘사했지만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착용한 장신구는 단순히 몸을 치장하는 의미 이상이다. 당시 장신구는 인간 생존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사냥이나 고기잡이 등에 있어서 자신이 얼마만큼 재주가 있느냐를 보여주는 도구적 의미가 강했다. 장신구는 주술적 또는 종교적 의미도 갖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투구풍뎅이가 케프리라는 신으로 불렸으며, 다산과 풍작을 상징한다고 해서 매우 신성시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투구풍뎅이 모양 도장을 만들고, 부적이나 장신구를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녔다. 장신구 주재료가 되는 보석은 불가사의한 힘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난 달을 상징하는 보석을 정해놓고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여겼는데, 이는 탄생석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장신구는 늘 착용을 하고 있어야 하기에 미(美)적 요소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기 위해 장신구를 사용하는 것처럼 과거 사람들도 장신구로 한껏 치장해 자신의 능력과 외모를 돋보이게 했다. 성경시대 이스라엘 민족, 특히 사제들은 정갈한 몸과 외적 장식으로 하느님 앞에 나가야 했다. "그들이 만들 옷은 가슴받이, 에폿, 겉옷, 수놓은 저고리, 쓰개, 허리띠다. 이렇게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거룩한 옷을 만들어 주어, 그들이 사제로서 나를 섬기게 하여라"(탈출 28,4). 사제가 장식을 하는 자체가 거룩한 하느님을 경배하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장신구의 내용 즉, 왕관이나 팔찌 등은 그것을 지닌 사람의 지위를 상징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트리폰이 나이 어린 안티오코스와 함께 돌아왔다. 안티오코스는 임금이 되어 왕관을 썼다"(1마카 11,54). 물론 성경에서도 장신구는 몸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도구로 쓰인다(에제 16,11). 성경은 비유적 의미로 천지창조를 하느님 장식품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지극히 위대하십니다. 고귀와 영화를 입으시고 빛을 겉옷처럼 두르셨습니다.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시고"(시편 104,1-2).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은 외적 치장이 아니라 사랑과 선행 같은 내적 가치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얌전하고 정숙하게 단정한 옷차림으로 단장하기를 바랍니다. 높이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이 아니라,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고백하는 여자답게 선행으로 치장하십시오"(1티모 2,9-10).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 치장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머리를 땋아 올리거나 금붙이를 달거나 좋은 옷을 차려입거나 하는 겉치장을 하지 말고, 온유하고 정숙한 정신과 같이 썩지 않는 것으로, 마음속에 감추어진 자신을 치장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앞에서 귀중한 것입니다"(1베드 3,3-4).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묵상해보자.조은일2011.07.05

청년들, 바오로 사도 따라 전도여행서울 서원동본당 청년, 특별한 여름캠프에 호응서울대교구 서원동본당(주임 김찬회 신부) 청년들이 '사도 바오로 전도여행'을 다녀왔다. 본당 청년회는 14~15일 서울과 경기 일대 지정 장소에서 미션을 수행하는 형식의 여름캠프를 진행, 청년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디모 4,7)를 주제로 한 이번 캠프는 바오로 사도가 여러 곳을 누비며 복음을 전파한 것에 착안했다. 청년회는 캠프 목적지를 경기도 가평의 한 펜션으로 정한 뒤 절두산ㆍ남한산성ㆍ구산 성지를 비롯해 보라매ㆍ서울숲 공원, 남산 등을 미션 장소로 지정했다. 그리고 청년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하기, 체조하기, 사진찍기, 깃발 꾸미기 등 각 장소에서 정해진 미션을 성공해야 다음 장소로 이동하도록 했다. 스마트폰 세대답게 스마트폰을 십분 활용한 점도 눈에 띈다. 모든 미션 지령과 답을 문자를 통해 주고 받았고, 성경 구절 맞추기 문제는 '성경'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토록 했다. 캠프에 참가한 80명은 5인 1조가 돼 청년회가 마련한 자동차로 이동했다.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움직이는 기존 캠프에 식상했던 청년들은 공중파 예능 방송을 방불케 하는 프로그램에 환호했다. 청년들은 "여러 곳을 다니며 미션을 수행하다 보니 혈혈단신 먼 길을 떠났던 사도 바오로 성인의 고충을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면서 "재미와 감동을 모두 갖춘 최고의 캠프였다"고 입을 모았다. 청년회 정희수(예로니모) 회장은 "3주 동안 미사 시간마다 캠프 홍보를 했는데, 그동안 전혀 단체 활동을 하지 않던 청년들이 30여 명이나 신청했다"면서 "색다른 캠프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벌써 교리교사와 청년단체 활동을 하겠다는 청년들이 생겼다"고 말했다. 캠프 기획단계부터 청년들과 함께 한 임창재 보좌신부는 "청년공동체 일치와 화합을 위해 고심 끝에 마련한 캠프가 성공적으로 끝나 기쁘다"면서 "이번 캠프를 통해 청년공동체가 한층 활성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조은일2012.07.17

'가톨릭표' 아름다운 가게 더 늘어나야강북 평화의집 재활용 매장 5호점 개설1일 문을 연 서울 강북구 삼양동 '살림' 5호점에서 지역 주민들이 깨끗하게 정리된 옷을 고르고 있다. "급여는 적지만 이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자신감도 생겼고, 좋은 사람도 많이 알게 됐어요." 차상위계층 지원을 받던 김영희(가명, 65)씨는 나이 제한으로 올해부터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나이가 들어서도 스스로 일해 즐거움을 찾을 곳이 필요했다. 서울 삼양동 선교본당(주임 안광훈 신부) 부설 강북 평화의집이 운영하는 재활용 공동체 매장 '살림'이 김씨 같은 지역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김씨는 매일 오전 9시 서울 강북구 송천동 매장 본점으로 출근해 가장 먼저 기도를 한다. 물건을 모아 준 분들을 위해서다. 성경을 읽고나면 재활용품을 싣고 온 화물차에서 짐을 내려 분리 및 정리 작업을 시작한다. 도시락 점심을 먹은 뒤에는 담당 매장으로 가서 오전에 분리한 재활용품을 진열한다. 품목은 의류와 책, 각종 생활용품 등이다. '살림'은 쓸 만한 물건들을 기증받아 손질한 뒤 시중보다 싼 가격에 판매하는 협동조합매장으로 2000년에 1호점을 열었다. 강북 평화의집 실무책임자 곽희자(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 수녀는 "옷을 수거해 고물상에 넘기면 보통 1㎏에 750원 정도 받는데, 손질해서 팔면 값을 많이 받을 뿐 아니라 환경보호에도 좋다"고 재활용품 매장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곽 수녀는 재활용물품 수집을 위해 서울대교구 주보에 한 달에 한 번 물품기부 공지를 낸다. 또 서울대교구 각 본당 사회복지분과장에게 편지도 써서 1년에 한번이라도 옷, 책, 신발, 가방 등 재활용할 수 있는 물건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수익금은 전액 지역 주민의 일자리 공동체 운영, 강북 평화의집 청소년 멘토 프로그램 후원, 독거노인ㆍ외국인 이주노동자ㆍ새터민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쓴다. 곽 수녀는 "아름다운 가게(중고품 판매 수익을 공익사업에 쓰는 자선단체)처럼 서울대교구에도 재활용품 매장이 늘어나야 한다"며 "내가 쓰지 않는 물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의식이 확산되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강북 평화의집은 1일 강북구 삼양동에 '살림' 5호점을 열었다. 5호점은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어 문구용품과 도서전집, 의류 등을 주로 판매한다. 재활용품 기부 문의: 02-987-3978. 강성화 기자 michaela25@pbc.co.kr강성화2012.12.05
![[생활 속의 복음] 주님 승천 대축일 (루카 24,46ㄴ-53)](//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2098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주님 승천 대축일 (루카 24,46ㄴ-53)"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주님승천대축일이자 홍보주일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 동안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들과 함께 지내시다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기념하는 대축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시자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루카 24,52).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하늘만 유심히 바라봤다(사도 1,10)고 한다. 그러자 흰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라고 그들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주님 제자이자 하느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이 되는가? 하늘만 멍청히 쳐다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 그분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과 다시 오심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홍보해야만 한다. 승천하신 분께서도 당신께서 오시고 사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실들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라고 당부하셨지 않는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8-20). 21세기는 역사상 유례없이 과학이 발달하고 첨단 대중매체가 활보하는 시대다. 그러한 시대에 걸맞게 교회는 각 교구와 본당, 수도회마다 디지털 첨단 매체들을 동원해 승천하신 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선포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발달한 과학기기를 총동원해 주님 말씀을 선포함에도, 과연 그 효능은 아날로그 시대보다 더 효과적일까? 단순 비교만으로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겠지만 회의적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홍보하는 일에 첨단 과학기재들이 어느 정도 도움은 될 수 있으나, 거기에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태도는 금물이다. 복음 선포는 첨단 과학기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주님 뜻에 부합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첨단 과학 시대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어떻게 홍보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박해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찬란하고 아름다운 선교 역사를 신앙 선조에게서 상속받았다. 예를 들면 1785년 이 땅의 최초 신앙대회(을사추조적발) 때는 불과 10명 남짓이던 일꾼들에 의해 무려 1000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모진 박해의 칼날 속에 심산유곡에 숨어들어서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홍보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 1970~80년대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아래에서 오히려 교회를 찾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모든 것이 과거와는 달리 넘쳐나게 갖춘 것이 21세기 한국교회 모습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에는 점점 '위기의식론'을 주창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왜일까? 해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물질만능주의에서 속히 벗어나는 것이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증인'의 역할을 세상 안에서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한국교회 안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길거리 미사'는 이제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봉헌하는 미사에 제대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하느님의 절박한 호소에 응답하는 것인데, 왜 길거리 미사가 교회 안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주님께서는 길 위에 오셨고, 길 위에 사셨으며, 길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또 승천하셨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길을 버리고 거대하고 화려하게 꾸며졌으며 모든 것에서 안정되고 보호받는 성전 안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 시대의 십자가는 누가 질 것이며, 길거리에 내쫓겨 아파하고 신음하는 가난하고 작은이들의 눈물은 누가 닦아 줄 것인가? 교회이며 길이신 분이 그러하셨으니, 이제 그분 지체인 우리가 그분이 하신 대로 따라함은 참으로 당연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성경은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기록하지 않았을까? 주님의 승천 대축일이자 홍보주일인 오늘, 우리가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새롭게 되새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도리다.cpbc2013.05.07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6. 주님 공현 대축일](//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6651_1.0_titleImage_1.jpg)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6. 주님 공현 대축일 사람을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이 되신 하느님캐나다 토론토 주교좌성당의 동방박사 방문 색유리화. 【CNS 자료사진】 "그들은…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12).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세상에 드러나심을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초라한 구유에 누운 아기가 민족들의 빛으로 떠오릅니다. ◇살펴봅시다 ㉠주님 공현 : 공현(公顯)이란 공적으로 드러남을 뜻합니다. 주님 공현은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이심이 공적으로 드러난 사건을 기념합니다. 그 중 하나가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사건입니다(마태 2,1-12). 교회는 이 경배 사건을 특별히 '주님 공현 대축일'로 기념합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를 경배한 이 사건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동방 박사들은 주변 이교(異敎) 민족들을 대표합니다. 이 이교인들이 유다인의 왕에게 경배하러 예루살렘으로, 나아가 베들레헴으로 왔다는 것은 단지 유다인뿐 아니라 만백성의 왕이 되실 분을 이스라엘에서 찾았음을 보여줍니다. 동방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으로 왔고, 아기가 있는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이 별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별, 곧 다윗의 별입니다(민수 24,17 참조). 이 다윗의 별이 가리키는 메시아는 구약에서 예언된,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 곧 유다인들에게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입니다. 그렇다면 동방 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했다는 것은 "구약에 담겨 있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일 때만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자 온 세상의 구원자로 경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528항)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는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528항 참조). ㉡이집트 피난과 죄없는 아기들의 학살 : 마태오복음서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에 이어 아기 예수와 그 부모의 이집트 피신(2,13-15), 죄없는 아기들의 살해(2,16-18) 그리고 이집트에서에 돌아옴(2,19-23)에 관한 기사들을 전합니다. 이집트 피신과 죄없는 아기의 살해, 두 사건은 빛에 대한 어둠의 저항을 나타냅니다. 실제로 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전 생애를 통해 많은 박해를 받으셨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십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돌아오신 일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출애굽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 모세가 출애굽으로 이스라엘의 해방자가 됐듯이 예수님을 온 인류를 구원하실 결정적 해방자로 제시합니다(530항 참조). 하느님의 아들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는가(470~478항) : 지난호(1196,1197호)에서는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심을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더 제기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강생의 신비스러운 결합에서, 성자는 인간 본성을 취하셨지만 소멸시키지는 않으셨다"(470항).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어 참으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 죄 말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셨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22항).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셨다'는 것은 인간 조건, 곧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지닌 역사적 인간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지혜와 키가 자랐다"(루카 2,51)는 성경 대목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람이 되심으로써 예수님의 신성은 소멸되고 만 것일까요? 아닙니다. 451년 칼케돈에서 열린 공의회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한 분이시며 같은 그리스도이신 외아들 주님은, 우리가 두 본성(곧 신성과 인성)을 혼동하거나, 변질시키거나, 분할하거나, 분리하지 않고 인정해야 한다. 두 본성의 차이점은 그 결합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본성의 고유함이 그대로 보전되어…결합되었다"(467항, 칼케돈공의회 신경). 같은 취지에서 230년 후인 681년에 열린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는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 두 의지가 작용하며 이 두 의지는 서로 대립하지 않고 협력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는 당신의 신적 의지에 저항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이 전능한 의지에 순종한다"고 밝힙니다(475항). 하지만 바오로 사도가 노래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필리 2,6-8 참조).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 온전히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해 사람이 되셨다는 것, 이것이 강생의 위대한 신비입니다. ◇정리합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의 신비에 관한 교리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영원한 말씀이요 성부의 실체적 모습이신 성부의 외아들께서 강생하셨다. 그분은 신성을 잃지 않으시면서 인성을 취하셨다"(479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신적 위격의 단일성 안에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시다"(480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을 지니신다.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 않으면서, 하느님 아들의 단일한 위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481항).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 지성과 의지를 가지신다. 이 지성과 의지는 성부와 성령과 공유하시는 당신의 신적 지성과 의지에 온전히 일치하고 종속된다"(482항). -"그러므로 강생은 '말씀'의 유일한 위격 안에 결합된 신성과 인성의 놀라운 일치의 신비이다"(483항). ◇생각해 봅시다 강생의 신비에 대한 교리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함께 생각해 봅시다. 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을까요? 하느님이 사람으로 낮아지셨다는 것은 거꾸로 보면 사람이 하느님의 품위로 들어 높여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만큼 존엄합니다. 못나고 가난하고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일지라도 더없이 존엄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강생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퇴사자22012.12.31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17>요한복음(하)](//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5673_1.0_titleImage_1.jpg)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요한복음(하)사랑의 근원과 하나인 참사랑의 구현자 예수렘브란트 작 '라자로의 부활', 1630년. 요한복음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함께 이 세상에서 황홀한 말은 생명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과 사랑이다. 사랑이 먼저일까, 생명이 먼저일까. 두 가지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사랑이 생명을 낳고, 생명이 사랑을 낳는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 그를 믿는 사람은 심판받지 않고 구원받게 하셨다고 요한복음은 말한다.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공부하고자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어떻게 새로운 계명일까. 예수님은 이것이 왜 새롭다고 하셨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이다. 사랑의 모델을 예수님이 제시하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계명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 예수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고 말씀하신다. 생명을 얻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고, 생명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으려면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친구들에게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웃과 친구를 위해 어떻게 목숨을 내놓으셨나. 카나의 혼인잔치에 술이 동났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확신으로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 예수님 답변은 "아직 제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였다. 예수님이 거부하는 듯한 발언을 하신 것이다. 이 '때'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때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아들에게 위임한다. 어머니의 신뢰를 받은 아들은 행동에 나선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예수님은 빵의 기적(오병이어)에 이어 없어질 빵에 만족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으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 하셨다. 말씀 자체이신 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빵으로 먹힌다는 것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것을 비유한다. 우리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 이야기를 알고 있다. 유다인 율법에 따르면 간음하다 잡힌 여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 로마법은 간음을 사형죄로 판단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다. 이 동작은 침묵으로 자신을 돌아보라는 무언의 요구다. 예수님은 고발자들을 자극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이 물러났고 고발은 무효가 됐다. 이 여자에 대한 고소는 취하되고 여자는 자유로운 몸이 됐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를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비와 인간의 죄가 가진 비참함만이 남아 있다고 해석했다. 예수님이 여자를 용서하신 것은 여자가 져야 할 죄의 대가를 당신이 짊어지겠다는 뜻도 있다. 예수님이 보여준 일화로 라자로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면서 베타니아에 들른다. 유다 지방 베타니아는 위험한 지역이다. 제자들 만류에도 예수님은 라자로를 소생시키기 위해 라자로가 사는 베타니아에 갔다.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는 일은 당신으로선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린 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늘었고, 유다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최고의회가 소집됐고, "많은 표징을 일으키는 저 자를 그대로 두면 모두가 그를 믿는다"며 대사제 가야파가 나서서 예수님을 죽이자고 선동했다. 예수님은 라자로를 살리신 대신 당신은 죽음의 길을 가셨다. "나는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씀을 실천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한 유다를 포함해 당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사랑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랑의 기원이 바로 당신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생명과 진리,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권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받으셨다. 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전폭적인 사랑에 보답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당신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진리를 세상에 증언하는 것이 당신이 세상에 온 목적이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으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에로 초대를 받았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고 말씀하신다.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은 평화방송 TV 홈페이지(www.pb c.co.kr) 강좌/성경 꼭지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퇴사자22013.05.29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21)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성체성사](//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5670_1.1_titleImage_1.jpg)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21)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성체성사그리스도 희생 기억하며 현재화하는 감사의 제사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이다. 사진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찬례에서 축성된 성혈을 들어 올리고 있다. [CNS]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당신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을 기념하고 되새기는 축일입니다. 일곱 성사 중 하나인 성체성사에 대해 알아봅니다.◇살펴봅시다 세례성사로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신자들은 견진성사로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아 그리스도의 힘찬 증인이 됩니다. 그리고 성찬례 곧 성체성사를 통해 온 공동체와 함께 주님의 희생 제사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를 완결짓는 성사입니다. 교회는 성찬례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1324항)이라고 가르칩니다. ㉠감사와 찬미의 제사(1328, 1359~1361항) : 성찬례는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입니다. 성찬례는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 창조와 구속과 성화로 이루어주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교회가 드리는 찬미"(1360항)입니다. 성찬례로 번역되는 라틴어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라는 말 자체가 '감사'를 의미합니다. 성찬례는 또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여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미의 제사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이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제사(1330, 1362~1367항) :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를 기념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전례 안에서 이 십자가 희생 제사를 현재화하는 제사입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기념은 단지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는 것"(1363항)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전례 안에서 과거 사건을 기념할 때 그 사건은 현재 실제로 일어나게 됩니다. 곧 그 사건이 현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를 위해 흘릴 내 피다' 하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성찬례는 이 희생제사를 기념하고 현재화(재현)하는 성사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희생 제사(1368~1372항) : 성찬례는 또한 교회의 희생 제사이기도 합니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인 신비체인 교회는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봉헌되기 때문입니다. 또 신비체인 교회의 지체들이 바치는 제사이기도 합니다. 곧 "신자들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노동 등은 그리스도의 그것들과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봉헌과 결합되며, 이로써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된다"(1368항)는 것입니다. 성찬례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지체들뿐 아니라 하늘의 영광 중에 있는 지체들, 곧 천국의 성인들도 그리스도의 봉헌에 결합됩니다. 교회는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을 기억하며 또 그분들과 일치하여 성찬의 제사를 봉헌합니다. 나아가 이미 세상을 떠나 정화 중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 "그들이 그리스도의 빛과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바치는"(1371항) 제사이기도 합니다. ㉣성찬례에서의 그리스도 현존(1373~1377항) :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찬례에서 특히 성체의 형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교회는 성체성사 안에는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담겨 계신다"(1374항)고 고백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 성사에 현존하시게 되는"(1375항) 것입니다. 16세기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성체성사 안의 그리스도 현존에 대한 가톨릭 신앙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써 빵의 실체 전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실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적절하고도 정확하게 '실체변화'라고 불러왔다"(1376항)(「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 또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의 두 가지 형상 곧 빵과 포도주 안에 각각 온전히 현존하실 뿐 아니라 그 각 부분에도 현존하시므로 빵을 나누고 포도주를 나눠도 그리스도께서는 나뉘지 않고 그대로 온전히 현존하신다고 교회는 믿고 가르칩니다. ◇알아둡시다 ㉠영성체와 그 효과(1384~1401항) : 신자들은 성찬례에서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중한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성체를 모시기 전에 먼저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또 교회가 전한 공복재(영성체 한 시간에는 물과 약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을 먹고 마시지 않음)를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주일과 의무 축일에는 물론 더 자주, 매일 같이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모실 것을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렇게 성체를 받아모시는 영성체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일치를 증진시켜 주며 △세례성사 때 받은 은총의 생명을 보존하고 성장시키고 새롭게 해주고 △우리를 죄에 멀어지도록 지켜 주며 △소죄를 없애줍니다. 또 신자들이 세례로써 이미 교회와 이룬 결합을 더욱 새롭게 하고 굳건하게 해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신하게 해줍니다. ㉡성체 공경(1378~1381항) : 성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실제로 현존하시기에 교회는 각별한 정성으로 성체께 대한 공경을 표시합니다. 미사 전례 중에는 특히 무릎을 꿇거나 몸을 깊이 숙여 절함으로써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계신다는 믿음으로 표현합니다. 또 축성된 성체는 정성스럽게 보존하고, 신자들이 장엄하게 흠숭을 표현하도록 성체를 현시합니다. 또 행렬 중에 함께 모시기도 합니다. 성체를 모셔둔 곳을 감실, 성체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흠숭을 드리는 것을 성체조배, 성체를 모시고 장엄하게 행렬하는 것을 성체거동이라고 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퇴사자22013.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