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2.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1>하느님이 누구신지, 나는 누구인지](//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4997_1.0_titleImage_1.jpg)
[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2.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하느님이 누구신지, 나는 누구인지하느님 손길 깨닫기 위한 '사랑의 대화'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신앙의 해를 맞아 서울대교구 가족 모두는 다섯 가지 표어에 따라 신앙생활의 기초를 강화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을 주제로 기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하느님의 함께하심을 기억해보겠습니다. 많은 분이 김수환 추기경님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으시겠지만, 저 역시 기도와 연관해 소중한 기억이 있습니다. 사제수품을 위한 면담에서 김 추기경님은 "조 부제, 사제로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여기는가? 어떤 사제로 살고 싶은가?"하고 물으셨습니다. 짧은 순간 고민하다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대로 답했습니다. '기도하는 사제….' 저의 입에서 기도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탁자를 손바닥으로 치시며 "그래, 기도하는 사제가 되게!"하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기도는 사제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제로서 삶을 올곧게 살기 위해서, 또 공동체 식구를 위한 사목자로서 성실히 살아가기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사실 사제가 된 뒤 가장 많이 듣고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기도 부탁드려요' '기도하겠습니다'하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기도는 사제인 저뿐 아니라 신앙인 모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씀한 것처럼 기도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나는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목표를 둡니다.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 삶의 목표는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하느님 뜻에 맞는 삶의 방식을 택하고 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며 하느님을 체험하고, 기도의 힘으로 일상생활에서 다가오시는 하느님 손길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 안에서의 삶의 모범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바라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완성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언제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 삶은 기도 안에서 이뤄진 삶이었습니다. 외딴곳에서, 큰 결정을 앞두고, 아버지 안에서 쉴 때, 병자들 치유와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 당신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신앙인들도 자기 삶의 처지와 전례 시기에 맞게 어느 곳이든 어떤 시간이든, 자신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방법으로 기도하든지 그 목적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나는 누구인지'를 깨닫고 깊이 새기며 하느님의 함께하심을 온전히 체험하는 데 있습니다.#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기도는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하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기억하도록 도와줍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을 깊이 깨닫기 위함입니다. 내가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을 입었기에 이제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사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전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우리 사랑을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대화의 길 예로니모 성인이 말한 것처럼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대화입니다. 일반적 대화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둘 이상의 인격적 존재의 만남에 의해 이뤄집니다. 그들은 열정적 마음, 함께 있고 싶은 마음으로 서로 뜻을 존중하며, 의견을 듣고 말하며 서로의 마음을 공유하며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대화 습관에 대해 돌아보고, 앞으로 더 적절한 대화를 나눌 결심을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기 위해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삶에서 겪는 여러 가지 일들, 성경 말씀, 영적 독서 내용을 중심으로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하느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 다음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말씀드리는 데에 소홀함은 없었는지 돌아보며 다음 기도 때는 더 깊고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청원을 드리는 길 성경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많은 인물을 만납니다. 그들은 자녀 탄생과 혼인, 재앙 극복, 속죄, 치유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또한 감사와 자비, 탄원을 올립니다. 자신뿐 아니라 친구와 백성을 위해서도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한다는 것, 기도드린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부족한 존재이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일과 건강, 학업, 혼인뿐 아니라 삶에서 만나는 구체적인 것들을 청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바치는 기도를 살펴보면 이런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거나 현세적 유익만을 청하는 것은 미성숙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인 만족과 행복의 바람을 넘어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바람을 청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느님 뜻을 따르는 길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뜻을 올바로 알아듣고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일과 하느님을 위한 일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뜻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족이나 체면, 다른 사람의 의견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하느님의 일을 올바르게 하려면 기도 중에 지속해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뜻을 따르는 방향성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지속적인 믿음의 길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뤄주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을 조르던 과부처럼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하는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기도에 대한 응답은 우리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적합한 때에 더 적합한 방식으로 주신다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받아들이신다"(시편 6,10)는 믿음 안에서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 신앙인인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6)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따라 기도 생활을 충실히 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기도가 잘되지 않고, 이런저런 걱정과 욕구에 빠지거나 때로는 죄짓는 우리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 모습에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면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하느님을 의식하며, 하느님 뜻에 따라 살지는 못하더라도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잊지 않는 겸손한 신앙인이 돼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뛰어나서 기도를 충실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에 기도할 수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꼿꼿이 서서 스스로 의롭게 여기며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느님 앞에 자신의 부족을 고백하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열매를 맺는 길 기도하는 사람은 삶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기도 따로, 삶 따로인 모습은 미성숙한 신앙생활입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이고 또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삶이 신앙인 모습에 적합하지 않다면 참다운 기도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습관에 따라 형식적으로, 의무감으로 기도하는 모습일 수 있고, 이런 모습에서는 신앙의 기쁨도, 사랑의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뜻에 따라 올바르게 기도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기도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신앙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나는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이시고, 그 사랑을 체험한 신앙인은 그 사랑을 살아내야 합니다. 기도는 신앙인으로 하여금 하느님 뜻을 잊거나 잃지 않으면서 자신과 공동체의 성장과 성숙, 실현과 완성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므로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하심을 깊이 체험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신앙의 해를 충실히 지내기 위해 하느님 뜻에 맞는 적합한 기도, 성실한 신앙생활을 간청해봅시다. "하느님, 제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 저의 간청을 외면하지 마소서"(시편 55,2).조성풍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일반교육부)퇴사자22013.03.27
![[덕원의 순교자들]<5>-카누트 (베네딕토) 다베르나스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053_1.2_titleImage_1.jpg)
[덕원의 순교자들]-카누트 (베네딕토) 다베르나스 신부백작 아들, 모든 것 하느님께 바친 열정적 사제로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Canut Graf des Enffans d'Avernas)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 1884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쉬름도르프 ▲세례명 : 베네딕토 ▲첫서원 : 1912년 7월 28일 ▲사제수품 : 1914년 8월 13일 ▲종신서원 : 1915년 8월 27일 ▲한국 파견 : 1921년 1월 16일 ▲소임 : 원산대목구 내평ㆍ고산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0년 11월 6일, 만포수용소"누가 백작 아들의 그런 최후를 예상했겠습니까? 그보다 먼저 간 여섯 분 중 누구도 그렇게 참혹하게 죽지는 않았습니다." "수도생활 내내 가난을 사랑하셨던 카누트 신부님은 죽을 때도 온전히 가난하게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 시신은 대충 자루에 싸여 한국인 피랍자들이 들고 갔습니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의 임종을 지켜본 제르트루다 링크ㆍ디오메데스 메페르트ㆍ아르사시아 아이그너 수녀들의 증언이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1884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그라츠-세카우 교구 쉬름도르프에서 태어났다. 쉬름도르프는 현재 슬로베니아 무르스카 소보타 교구 아프체이다. 그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2세로부터 1805년 작위를 받은 하인리히 엉팡 다베르나스 백작이고, 어머니는 안나 플라이다. 세례명은 베네딕토, 한국명은 나국재(羅國宰)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자기 재산을 버리지 못해 예수의 제자가 되길 포기했지만 카누트 다베르나스는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거적 한 장에 싸여 묻힌 그리스도의 참 제자다. #삼형제 신부 그는 티롤 황제 사냥대 소위로 인스부르크대학 법학과 3학기를 다니던 1906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 청원서를 냈다. 그리고 내적으로 수도생활을 잘 준비했던 펠트키르크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11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청원기를 거쳐 덴마크 임금으로 성인품에 오른 '카누트'를 수도명으로 받고 수련기를 시작, 1912년 7월 28일 유기서원을 했다. 이어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친 후 1914년 8월 1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듬해 1915년 8월 27일에 종신서원을 한 후 1921년 1월 16일 한국 선교사로 파견됐다. 카누트 신부의 두 형제도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었다. 형 레오폴드 다베르나스 신부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회 소속으로 그보다 먼저 한국에 와 덕원수도원 부원장 겸 덕원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다 1944년 12월 20일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또 그의 동생 하인리히 다베르나스 신부는 세카우 수도원에 입회해 1952년 브라질의 한 보이론 연합회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영하 30℃에도 난방 안 되는 사제관에서 1921년 4월 9일 빈첸시오 슈스터ㆍ마르코 바잉거 신부와 함께 서울에 도착한 다베르나스 신부는 한국말을 채 배우기도 전인 그해 6월 13일 압록강 건너 간도 지역 한국인 본당을 인수하러 가는 선발팀에 소속돼 연길로 갔다. 그는 이질에 걸려 1923년 봄 서울 수도원으로 후송되기 전까지 삼원봉과 팔도구 성당에서 사목했다. 그는 영하 30℃가 넘는 날씨에도 난방이 안 되는 사제관과 창호지가 찢어지고 무너질 듯한 삼원봉성당에서 1921년 겨울을 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새벽 미사부터 밤 10시까지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를 줄 만큼 열정적으로 사목했다. "미사 중에 성작 속의 얼음을 세 번이나 녹여야 했습니다. 위만 살짝 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작 밑바닥까지 꽁꽁 얼었습니다. 미사 경본대 옆에 있는 촛불로 얼음은 쉽게 녹였지만, 미사의 경건함은 반감됐습니다. 손가락이 얼얼해 미사 내내 신경이 쓰였습니다"(다베르나스 신부 보고서 중에서). 수도원에서 건강을 회복한 다베르나스 신부는 1923년 10월 내평 선교기지 책임자로 부임했다. 1930년 그는 옹색하고 외딴 마을에 신자라고는 열다섯 가구밖에 없는 내평을 떠나 인근 소읍인 고산으로 본당을 옮겼다. 고산이 제대로 된 본당 모습을 갖추자 1931년 원산수녀원 첫 분원을 설립, 유치원을 운영했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신자들을 위해 살았다. "정말 영웅적이며 가없는 희생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단순히 개인적으로 편안한 삶을 포기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사에 필요한 용품들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제대포, 사제복, 제대 장식 등은 없으며 늘 가난에 짓눌려 살아야 했습니다"(제르트루다 링크 수녀, 1935년 보고서 중에서). #심장ㆍ신장 약화, 다리부종도 앓아 그의 '희생적 삶'은 건강을 앗아갔다. 심장과 신장이 크게 나빠졌고 다리 부종을 앓았다. 하지만 그는 매일 수녀원 미사를 집전하고 수녀들의 영성 지도를 맡아 했다. 공동 기도에도 참여했고, 또 신자들에게 힘닿는 데까지 고해성사를 줬다. 건강 악화로 덕원수도원에서 한 달 남짓 요양 중이던 다베르나스 신부는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1949년 5월 11일 공산당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를 거쳐 옥사덕 수용소로 끌려갔다. 심장병을 앓던 그는 세 시간 동안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무리가 돼 심장마비로 쓰러져 소 등에 실려 옮겨졌다. 건강이 나쁜데도 그는 담배 수확과 가공 등 농사일과 부엌일을 도왔다. 1950년 10월 유엔군의 북진과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인민군은 옥사덕 수용자들을 압록강 연안 만포 수용소로 옮겼다. 미군의 공습이 더욱 거세지자 수용소 경비병들은 만포 수용자들을 압록강 넘어 중국 땅 들판으로 내몰아 추위와 굶주림, 사람들의 조롱에 내던져진 채 끔찍한 3일을 보내게 했다. "날씨가 몹시 추웠다. 새벽 흰 서리에 옷이 흠뻑 젖었다. 배가 몹시 고팠으나 먹을 것은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빙 둘러서 있었다. 우리는 너덜너덜한 죄수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우리를 비웃고 조롱했다. 대부분 우리를 미군 포로로 알았다"(「북한에서의 시련」 중에서). #고결한 평온함 속으로 결국 들판에서 살을 에는 사흘 밤을 보낸 후 걸어서 만포수용소로 돌아온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1950년 11월 6일 병자성사를 받고, 단발마의 고통도 없이 조용히 사망했다. 수도자들은 그를 품위 있게 안치할 그 어떤 방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음날까지 수도자들은 그가 짧은 잿빛의 죄수복을 입고 머리엔 통나무를 벤 채 빈 옆방의 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봐야만 했다. "우리는 외적인 상황이 그렇게 궁핍했음에도 그의 얼굴에 퍼져있는 고결한 평온함과 숭고한 기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 증언). 다음날인 7일에 한국인 포로들이 와서 다베르나스 신부의 시신을 넝마에 담아 들고 나갔다. 수도자들은 그의 시신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나중에 그의 시신을 옮긴 포로 중 한 사람이 수도자들에게 매장지를 정확하게 알려줬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조은일2013.06.18
![[젊은이여, 신앙의 근본을 재발견하라!] YOUCAT으로 묻고 답하기 <6>](//cpbc.co.kr/CMS/newspaper/2012/11/rc/431926_1.0_titleImage_1.jpg)
[젊은이여, 신앙의 근본을 재발견하라!] YOUCAT으로 묻고 답하기 제1권 무엇을 믿고 있는가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 말 발표한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몸바친 성 빈센트 드 뽈 등 몇몇 수도회 설립자들을 하느님 사랑의 참된 증거자로 소개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성 빈센트 드 뽈, 복자 마더 데레사, 성 루이즈 드 마리약, 성 요한 보스코. 31. 하느님이 자신의 이름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말씀을 드릴 수 있도록 당신의 이름을 만드셨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03-213항, 230-231항) 하느님은 익명인 채로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단지 느껴지거나 추측할 뿐인 '더 높은 존재'로 추앙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알려지길 바라시고, 실제적이고 활동적인 존재로 불리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모세에게 당신의 거룩한 이름 '야훼'를 알려주셨습니다(탈출 3,14 참조). ※ 야훼 :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나는 있는 나"(탈출 3,14)라는 의미입니다. 유다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이 이름은 온 세상의 유일한 하느님, 세상의 창조주, 수호자, 계약의 상대자,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분, 판관, 구원자 등을 가리킵니다.32. '하느님은 진리이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나요?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1요한 1,5). 그분의 말씀은 진실이며(잠언 8,7; 2사무 7,28 참조) 그분의 가르침도 진실입니다(시편 119,142 참조).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심으로써 당신 스스로 하느님의 진리를 보증하십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요한 18,37) (214-217항). 하느님은 검증할 수 있는 학문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을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분의 고유한 방식을 통해 당신을 입증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진실한'분이 아니시라면 신앙과 이성은 동시에 논의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진리이시고, 진리는 신성하기 때문에 신앙과 이성 사이의 소통이 가능합니다. 33.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모든 피조물이 무한한 자비로움에 의해 떠받쳐지고 둘러싸여 있음을 의미합니다.(218-221항)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16)이시라는 그리스도교 고백은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악 때문에 하느님이 정말 사랑이신지 믿지 못한다 할지라도, 교회의 신앙은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굳건하게 믿습니다. "참된 사랑은 아픕니다. 그것은 예외없이 아픈 것임이 분명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애타는 일이고, 그와 헤어진다는 것은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고 싶어합니다. 결혼한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고, 자식에게 생명을 건네준 어머니는 많은 고통을 감수합니다. '사랑'이란 단어는 매우 잘못 이해되며 잘못 사용되고 있습니다." (복자 마더 데레사) 34. 하느님을 알게되었다면 무엇을 행해야 하나요?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면 이제 그 분을 자기 삶의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자기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222-227항, 229항)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나를 지으시고 원하셨으며 매 순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고 내 삶을 축복하시며 지켜주시는 분이 바로 여기에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당신 손안에 두시고 나를 애타게 기다리시며 나를 충만하게 하시고 완성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 바로 여기에 나와 함께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35.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한 분이신가요, 아니면 세 분이신가요? ▶우리는 한 분이지만 세 가지 위격을 지닌 하느님(삼위일체)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혼자가 아니시며,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고 계십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2005년 5월 22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 분의 서로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모습을 지녔지만 여전히 하나인 유일한 존재를 섬깁니다.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심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아드님이신 그분이 하늘에 계신 당신 아버지에 관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에게 기도하셨고,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인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세례를 받습니다. ※삼위일체(Trinity, 라틴어로 '셋이 한 벌이 되는 것'을 뜻하는 'trinitas'에서 유래) :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현존하십니다. 영어에서 똑같이 '삼위일체'의 실재를 가리키는 'Triune God'과 'Trinity'가운데, 전자는 하느님 안에서의 일치를, 후자는 세 위격의 구별을 강조합니다. 이는 설명하기 어려운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드러냅니다. 36.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심은 신비에 속합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심을 알고 있습니다.(237항)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심을 추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신비가 지닌 합리성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깨우쳐주신 대로 우리는 이미 구약성경(창세 1,2; 18,2; 2사무 23,2 참조)과 모든 피조물에서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는 흔적을 발견합니다.평화신문·가톨릭출판사 공동기획퇴사자22012.11.20
![[서석희 신부의 영화 속 복음여행] (21.끝) 하느님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슬픈 사람-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 감독판'](//cpbc.co.kr/CMS/newspaper/2012/11/rc/431910_1.2_titleImage_1.jpg)
[서석희 신부의 영화 속 복음여행] (21.끝) 하느님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슬픈 사람-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 감독판'사랑 없는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 은총을 이기려 하는가모차르트와 살리에리. 1. 영화에는 '거리두기'(반환영주의)라는 이론이 있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인물이나 사건에 빠지지 않도록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영화다'라는 것을 배우들의 연기나 카메라 워킹을 통해 알려주는 것이다. 흔히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하게 되면 자기 자신을 영화 속 인물이나 이야기와 동일 선상에 두게 된다. 그런 가운데 나름 재미와 보람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볼 때 영화를 더 폭넓게 이해하기도 한다. 특히 영화를 복음적 시각에서 보려면 이런 자세가 필요한데, 영화 속 인물이나 이야기와 성경 속 인물이나 이야기의 유사성을 찾을 때가 그러하다. 그러고 나서 영화 속 인물이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면 영화가 주는 풍요로움이 더해질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 감독판'(Amadeus Director's Cut, 2002)에 주목해 보자. 2.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살을 시도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한 '살리에리'라는 늙은 음악가가 가톨릭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보면서 지난날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플래시백 형식으로 진행된다. 살리에리는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달라는 지극히 순수하고도 감동적인 소망을 가지고 자란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바람대로 당시 음악가로서 성공을 말해주는 오스트리아 빈의 궁정악장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그를 능가할 작곡가도 그 만큼 성공한 작곡도 없을 즈음에 갑자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Amadeus) 란 뜻의 이름을 가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나타난다. 그때부터 살리에리는 자신만이 알고 겪어야 하는 극적인 삶의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하느님 은총과 인간의 노력에 관한 것으로, 인간 행위인 노력은 하느님의 선택과 은총 앞에선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비범함은 살리에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그리고 이후 여러 번 실제로 체험하면서 그의 감정은 모차르트에 대한 단순한 질투심을 넘어 결국 하느님을 향한 분노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영화는 살리에리의 시선으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을 아주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여주면서 평범(=인간의 영역)과 비범(=하느님의 영역)의 차이가 그 깊이와 거리에 있어서 건널 수 없는 강이라는 것을 냉정하게 인식시킨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대면할 당시 이미 궁정음악가로서 최고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모차르트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젊은 작곡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처음 만나는 순간 그의 비범함을 알아차리게 된다. 아마 영화를 본 관객 대부분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악보를 몰래 훔쳐보면서 거의 경악에 가까운 환희의 표정으로 떨고 있는 것을 차라리 고통스럽게 느꼈을 것이다. 그 이후로도 경탄 장면은 여러 번 더 나오는데 그때마다 살리에리의 표정은 두 가지로 엇갈린다. 하나는 '이게 한 번도 고치지 않은 원본이라고요?'하고 묻는 그의 얼굴에 드리운 경탄의 표정이고, 다른 하나는 시선을 위로 향하며 '하느님, 그토록 원했는데 저는 열정만 주셨지 왜 재능은 주지 않았습니까?'하고 절망 섞인 분노를 표출하는 표정이다. 결국 살리에리는 그 분노의 표정으로 벽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 불에 던지며 하느님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다. 불타는 십자가를 노려보며 하느님이 자신보다 사랑하는 모차르트를 반드시 파괴할 것을 맹세한다. 마침내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두 사람의 운명은 다르게 나아간다. 모차르트는 '이보다 더 완벽한 작곡은 없다'고 여길 만큼 열정을 쏟았던 그의 음악이 환영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마저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더구나 모차르트 음악의 진가를 아는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재능이 알려지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방해한다. 반면에 살리에리는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하여 왕에게서 금세기 최고 음악가란 칭호를 받으며 '이보다 더 큰 인기는 없다'는 영예를 얻는다. 그러한 영예를 얻으면서 그는 모차르트의 반응을 곁눈질하다가 하느님을 향해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선 더 절망적인 슬픔이 묻어난다. 한편 모차르트는 '어떻게 저런 사람에게서 저런 음악이 나올 수 있을까?'하고 샬리에리가 의문을 가질 만큼 하느님 은총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음악들을 작곡해낸다. 그는 도덕적 이유로 '피가로의 결혼'이 상연되는 것을 반대하는 황제 앞에서 '저는 비록 저질스럽지만 제 음악은 아닙니다'고 함으로써, 자신이 작곡한 음악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다른 '신성한 힘'(?)'에서 온 것으로, 자신의 작품을 자신과는 다른 작품이라는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길 원한다. 자신의 영역이나 감정을 넘어서 작품에만 몰두하고, 주변 반응이나 인기를 고려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눈치 보지 않고 그대로 악보에 옮기는 데 주력하는 우매한 천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평범(=인간)과 비범(=하느님)의 싸움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절묘하게 보여준다. 살리에리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모차르트가 점차적으로 죽어가는 과정에 일조한다. 또한 마지막까지 모차르트의 옆에서 마지막 걸작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레퀴엠)'의 완성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한다. 그런 그의 이중적 태도는 관객으로 하여금 '왜?''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바라던 대로 모차르트를 파멸시켜가면서도 통쾌해 하거나 기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또 모차르트의 임종을 지키며 그의 마지막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기도 하고, 모차르트 장례식에서는 우울하고도 씁쓸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 답변은 그가 훗날 사제에게 고백하는 부분에서 밝혀진다. 살리에리는 하느님을 이기려고 했지만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살리에리는 하느님에 대한 분노 때문에 모차르트를 반드시 파멸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걸작을 쏟아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살리에리는 어느새 하느님에 대한 분노에 빠진 '평범'이 아니라, 하느님이 선보인 '비범' 앞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순수한 평범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인기와 명성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고, 나아가 모차르트라는 인간마저도 파멸시킬 수는 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시대를 넘어선 영원성과 천재성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며 우리는 살리에리의 강력한 몰입연기(메소드연기)에 빠져들게 되고, 모차르트보다는 그의 내면 연기에 빠져들게 된다. 그가 이 영화를 통해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것만 봐도 그의 연기에 대한 흡입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관객으로 하여금 살리에리야말로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만큼 그의 연기는 관객을 압도한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뒤로 다소 물러나서 거리감을 두고 그를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성경 속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의 모습에서, 혹은 성경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를 통해 보자. 복음서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슬픈 사람들이다. 애정과 자비가 없는 법을 만들어 자신들만이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자신들만이 하느님으로부터 충분히 인정받아야 하고, 사람들 중에 '비범한 사람'이란 인물로 인정받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 복수를 꿈꿨던 그들이다. 하느님 자비보다도 법을 지키는 자신들의 힘과 노력만으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들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느님 은총 앞에서 자신들 노력은 너무도 작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슬픈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는 있었지만, 하느님 은총으로부터 오는 힘은 거역할 수 없었던 이들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이다. 어쩌면 그들 모습 안에서 살리에리의 어두운 모습을, 그리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질투심을 보게 되는 것이다. 4. 1984년에 전 세계에 개봉한 영화 아마데우스 극장판은 160분이었는데 2002년에 다시 개봉한 이 영화 감독판(Director's Cut)은 180분이다. 삭제된 부분이 무려 20분이나 되살아났다. 그래서 영화가 가진 본래 의미도 더 많이 드러나게 됐다. ※이번 호로 '서석희 신부의 영화 속 복음여행' 연재를 마칩니다. 집필해 주신 신부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cpbc2012.11.20

'신앙 안에서 반쪽 찾기' 교회가 돕는다예수회 '선남선녀 만남의 장' ·오상철 신부의 '천생연분 피정' 등 지속적 호응결혼 적령기 청년들에게 다양한 만남의 장을 제공하는 피정과 프로그램이 늘고 있다. 사진은 지난 해 4월 선남선녀 만남의 장 첫 모임에서 탄생한 커플들. "전국 방방곡곡에서 물밀 듯이 밀려옵니다." 결혼 적령기 청년들에게 배우자를 찾는 만남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는 최영민(예수회) 신부는 "반응이 폭발적"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최 신부가 소장으로 있는 예수회 이냐시오 미디어커뮤니케이션즈는 지난해 4월부터 서울 마포구 예수회센터에서 '선남선녀 만남의 장'을 열고 있다. 지금까지 300여 명의 젊은 남녀가 참가해 진지한 마음으로 짝을 찾아 나섰다. 기수마다 참가하는 30~40명 중 탄생하는 커플 수는 6~7쌍. 2011년부터 오상철(춘천교구 원로사목자) 신부가 진행하고 있는 천생연분 피정에도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470여 명(26기)이 참가해 총 10쌍이 하느님 앞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올 8월에는 11번째 부부가 탄생한다. 결혼 적령기 젊은이들에게 가톨릭 신자 배우자를 만날 수 있도록 돕는 피정과 프로그램이 늘고 있다. 연애ㆍ결혼ㆍ출산 세 가지를 포기해 '삼포세대'라 불리는 20~30대 젊은이들에게 신앙인의 눈으로 배우자를 찾고, 혼인에 대한 참된 가치를 알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오 신부는 천생연분 피정을 통해 스펙과 학벌, 외모로 쏠린 배우자를 보는 가치 기준을 내려놓게 한다. 인간적 잣대와 지식을 하느님께 반납하고, 상대방을 조건이 아닌 내면을 바라보도록 이끈다. 참가자들은 세속적 잣대를 접어 두고, 1대1 만남을 통해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다. 예수회 이냐시오 미디어커뮤니케이션즈가 진행하는 선남선녀 만남의 장 역시 단순히 남녀 간 만남을 주선하지 않고, 인간의 존재론ㆍ결혼의 목적과 의미를 주제로 한 강의를 마련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고찰 없이 배우자를 찾는 청년들에게 예방주사 같은 강의다. 사목현장에서 노총각, 노처녀가 많은 현실을 보고 선남선녀 만남의 장 프로그램을 기획한 최영민 신부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사랑은 '주는 것'"이라며 "요즘 젊은이들은 섬김을 받고 싶어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최영민 신부는 "사회가 너무 스펙과 외모, 물질만능주의로 흐르고 있다"며 "성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이며, 수도ㆍ사제 성소와 마찬가지로 결혼성소도 '봉사로의 초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젊은이들 의견은 분분하다. 한 피정 참가자는 "밖에서 소개팅으로 만나면 직업과 학벌 등을 서로 호구조사하듯 대놓고 물어보는 게 불편했는데, 피정을 통해 상대방의 내면의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 같아 좋았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한 젊은이는 카페 익명게시판에 "사람 자체가 좋아도 모임이 끝나고 돌아와 바로 현실 앞에 서면 당장 뭘 해서 먹고 살지…. 당장 둘이 벌어도 자녀 교육비에 노후자금에 걱정이 산처럼 쌓여 있다"면서 "사람도 좋고 프로그램의 좋은 취지도 이해하지만 (이렇게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혼인교리 강사 염석환(요한 세례자)씨는 "젊은이들이 배우자를 찾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사랑이 무엇인지 스스로 깊이 있게 물어봐야 한다"며 "사랑에 관한 연구가 너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수원교구 안산대리구 청소년국장 김우정 신부는 "혼인에 대한 피정을 비롯해 비슷한 프로그램이 늘어나는 것은 혼인에 대한 교회의 인식이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라면서 "상대의 조건을 보고 많은 것을 결정하면서 혼인의 근본적 의미가 잊혀지고, 혼인관계가 언제든 맺고 끊을 수 있는 관계로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건을 따지는 사람은 받는 것에 익숙한 경우가 많다"고 밝힌 김 신부는 "가톨릭교회에서 말하는 혼인의 본질은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내어줌으로써 상대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좋은 사람 찾기보다 좋은 사람이 되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묻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행복할까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렇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돼주어야 할까요?" 결혼에서 행복해지는 비결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십시오. 결혼은 찬란한 연애의 기간을 지나 너무도 평범한 '세상' 속으로, 때로는 너무도 비참한 현실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구름 위에 있다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을 결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결혼을 하는 걸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름 속에 있던 경험만을 추구합니다. 찬란했던 기억만을 추억하며 힘들어 합니다. 삶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다른 이보다 더 훌륭한 배우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훌륭한 배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것에 모든 의미를 둘 때 행복을 바로 곁에 두게 됩니다. 남편 분에게 부탁합니다. 언제나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십시오. 성경 창세기에 보면 남자의 갈빗대를 하나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은 모두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남성들은 부족하지 않은 척하고자 하는 부족함만 보더라도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남성은 여성을 통해서만 완전해질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갈빗대 하나만큼 내가 부족함을 인식할 때 내 마지막 완전함을 가진 배우자를 진심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아내 분께 부탁합니다. 평생 '모성'을 연구하며 살아가십시오. 여성 안에 감춰진 모성은 하나의 씨앗과 같아서 잘 보살피고 관심을 기울일 때만 피어나고 자라납니다. 그 모성으로 모두를 끌어안아 주십시오. 특히 '가족'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만나는 모든 분들을 더욱 안아주십시오. 그럴 때 아내는 가족뿐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미래에 부모가 될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아이'를 내 것이라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부모님의 것이 아니듯, 여러분 아이도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내 아이가 아닌, 이 세상 모두의 아이로 키우면 아이는 세상을 품을 것입니다.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단 하나, 부부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뿐임을 잊지 마십시오. 교육도, 재산도, 안전함도 부모가 마음 먹는다고 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부부 사이의 관계가 아름답고 성숙할 때 자녀는 여러분이 원하는 이상으로 아름답게 자라납니다. 바라는 것보다 더 크게 자라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면 세상이 여러분의 아이를 키우게 될 것입니다.염석환 혼인교리 강사(요한 세례자, 42)퇴사자22013.07.02
![[성경 속 상징] (124-끝) 하느님-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신 분](//cpbc.co.kr/CMS/newspaper/2011/07/rc/38394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124-끝) 하느님-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신 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성경에서 하느님처럼 다양한 상징으로 표현되는 존재가 또 있을까? 물론 많은 사람들 생각처럼 하느님에 대한 비유나 상징은 대부분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이미지들이다. 거룩한 장소나 사람, 성물들과 관련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실 어떤 특정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 분이시다. 온 세상과 모든 이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의 하느님도 성스러운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 속 하느님에 대한 언급은 대체로 은유적이다. 그래서 목자(시편 23,1), 설계자이시며 건축가(히브 11,10), 농부(요한 15,1), 혹은 불(신명 4,24)이나 반석(시편 19,15) 등 아주 다양하다. 가장 일반적인 하느님 상징은 왕이나 임금이다. "하느님, 당신께서 바로 저의 임금님이십니다.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시편 44,5). 하느님은 또 종종 율법을 제정하신 분이나 재판관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나는 간음하고 살인한 여자들을 재판하듯 너를 재판하고, 분노와 질투로 너에게 살인죄의 벌을 내리겠다"(에제 16,38). 신약성경에서 가장 인상적인 비유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비유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아버지로 소개해주셨다. 여기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인격적이고 더없이 친밀한 생명의 관계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또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랑으로 상징된다. 이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통해 맺어진 독특한 관계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의 신을 섬기는 것을 불륜을 저지른 관계에 비유하신다고 전한다(에제 16).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고 회개하도록 엄청난 노력을 하신다(호세 2,4). 여기서 하느님은 사랑하는 이에게 깊이 헌신하고 상처받고, 배신당한 애인으로 그려진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신 분, 위로자로 상징된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주 가난한 자, 겸손한 자, 가족을 잃은 자, 여자, 노동자, 외국인, 노예, 고아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 보호자로 묘사된다.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시며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는 분. 주님은 소박한 이들을 지켜 주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시편 116,5-6). 성경은 상징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또한 재밌고 흥미롭다. 이와 같은 상징들은 생활의 모든 영역과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성경의 상징들은 우리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상징은 사람들 생각과 소통의 기본이 된다. 상징 없이 우리는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동안 '성경 속 상징'의 글들이 누군가의 신앙생활에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매우 감사한 일이다. 다음부터는 이 지면을 통해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느꼈던 궁금증을 찾아 함께 풀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조은일2011.07.19
![[문화]가톨릭미술상 본상 박수철 명예교수, 특별상 남용우 작가](//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9533_1.1_titleImage_1.jpg)
[문화]가톨릭미술상 본상 박수철 명예교수, 특별상 남용우 작가 주교회의 문화위 제18회 미술상 수상자 선정, 시상식 13일 제18회 가톨릭미술상 본상 수상자로 공예부문 박수철(보나벤투라, 67) 동아대 섬유미술학과 명예교수가 선정됐다. 또 특별상 수상의 영예는 유리화 작가 남용우(마리아, 83)씨에게 돌아갔다. 박수철 명예교수 주교회의 문화위원회(위원장 손삼석 주교)는 1월 25일 회화ㆍ조각ㆍ공예ㆍ건축 등 4개 부문 가운데 공예부문에서만 박 교수를, 특별상 부문에서는 남씨를 각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심사는 위원장 손삼석 주교를 비롯해 총무 이영춘 신부, 김성규ㆍ김형주ㆍ변진의ㆍ엄혜실(이상 회화), 김유선ㆍ이춘만(이상 조각), 권녕숙ㆍ문미영ㆍ임정렬(이상 공예), 이재영ㆍ임근배ㆍ정귀원ㆍ황원옥 수녀(이상 건축) 등 15명이 맡았다. 시상식은 13일 오후 4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1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가톨릭미술상은 종교미술 발전과 토착화를 독려하고자 1995년에 제정돼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주관으로 해마다 현역 미술가들 근작 가운데 우수작품을 선정 시상해오고 있다. ▨본상(1명) ▶공예부문=수상작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시는 분- 고(故) 김수환 추기경 초상화'와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이갑수 주교 초상화',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고 정명조 주교 착좌식', '탄생 ⅠㆍⅡ' '생명 ⅠㆍⅡ' '하느님의 몸 ⅠㆍⅡ' 등이다. 모두 사진 이미지를 기반으로 섬유라는 물성을 활용해 사실성(Reality)를 극대화한 태피스트리(Tapestry) 작품이다. 변화하는 장면을 인위적으로 연출하지 않고 재빨리 촬영해 기록하는 스냅숏(Snapshot)처럼 정지된 화면이 태피스트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성직자로서 고뇌나 심성 등이 전달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작업 대상의 사실성과 정확성을 우선시하는 제직(製織)기법을 잘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홍익대 공예과, 같은 대학 산업미술대학원을 나온 박 교수는 1981년 제30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대상을 받았으며, 지난해까지 37년 동안 동아대에 재직하면서 홍임섬유조형회와 부산공예가협회, 부산섬유예술가회 회장을 지냈다. 태피스트리 작품 외에도 부산가톨릭대 앞 가톨릭 특성화 거리 프로젝트에 참여, 가톨릭이 한국에 들어와 박해기와 부흥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실을 상징화하는 디자인ㆍ설치 작업을 함으로써 교회미술의 외연을 넓히기도 했다. ▨특별상(1명)='성 라자로마을 성당 유리화'(1975년), '노틀담 수녀회 본원 성당 유리화'(1984년), '서울 흑석동성당 납골당 제대 배경 모자이크'(2005) 등이다. 외국 미술사조를 그대로 들여오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토착화를 통해 한국 현대가톨릭미술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이다. 현대적 선과 색을 적용하되 우리 심성에 맞는 구성을 찾고자 했다. 초창기에는 '삼위일체' 등에서 보여지듯 색면 분할을 통해 추상적으로 화면을 구성했지만, 차차 한옥 창살을 활용한 납선을 구사하는가 하면 연한 푸른색의 한복을 입은 성모 형태를 유리화 화면에 구현하기도 했다. 대부분 작품에 반투명한 유리를 썼고, 직선과 곡선의 반전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같은 종류의 유리를 사용해 제작하는 모자이크도 유리조각을 적절하게 배합, 회화적 화면을 연출했다. 근래 들어서는 성경 내용 등을 주제로 구상적이고 회화적인 탐구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대 응용미술학과를 나온 작가는 1954년 제3회 국전에서 특선을 받았으며, 이후 뮌헨미술대학에서 유리화를 전공하고 18년간 뒤셀도르프에 있는 데릭스 유리화공방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성 남종삼(요한, 1817~66)의 증손으로, 한국교회 최고령 수도자인 남형우(요한 세례자, 105) 수녀의 동생이기도 하다. 현재 하느님의 종 순교자 124위 중 한 사람인 최여겸(마티아, 1763~1801)이 신유박해 당시 순교한 개갑성지(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 조성되는 유리 모자이크 십자가의 길 14처와 순교탑 등을 제작 중이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13.01.29
![[명동성당 사순특강] 4. 미사로 하나되는 신앙](//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3345_1.0_titleImage_1.jpg)
[명동성당 사순특강] 4. 미사로 하나되는 신앙교회, 하느님 안에서 일치 이루는 공동체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올해 사목교서에서 신앙의 기초를 든든히 하기 위한 다섯 가지 방책을 제시했다.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 △미사로 하나 되는 신앙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이 그것이다. 교회는 믿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신앙으로 한 분이신 주님을 믿으며 그분을 섬기는 공동체다. 갖가지 빛깔의 유리조각이 합쳐져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이루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돼야 한다. 가톨릭교회 중심 전례인 미사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안에 하나 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성호경 미사는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로 이뤄져 있다. 말씀전례 전 시작예식에서 사제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하면 신자들은 "아멘"으로 답한다. 미사 시작 때 하느님 아버지 이름을 부름으로써 모두 하느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고 부른다. #고백의 기도 우리는 성호경과 사제 인사말에 이어 고백의 기도를 바친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중략)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우리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 뜻을 외면한 채 이웃을 무관심과 미움으로 대하며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나서기에 앞서 그분의 큰 은혜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자신의 허물을 먼저 고백하는 것이다. 이 고백으로 우리는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되고, 하느님과 다시 원만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회개는 자기 탓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말씀전례 우리는 말씀전례에서 성경 말씀을 경청하며 하느님 사랑에 대해 듣는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귀담아듣길 원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카 8,15)이 되라고 하셨다. 사실 남의 말을 제대로 듣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한 사람의 벗은 한 쌍의 귀를 의미한다"는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말을 새겨두면 좋겠다. 조용한 경청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신앙고백 사제와 신자는 강론 후 다 함께 신앙을 고백한다. 독서와 복음, 강론을 통해 하느님 구원 업적을 듣고 그 응답으로 우리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마치 부모 사랑을 깨달은 자녀가 감사와 효도로 응답하는 것과 같다.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에 앞선 신앙선조들과 일치를 이루고, 공간적으로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과 일치를 이룬다. 개인의 믿음이 촛불 하나 정도라면, 각 개인이 모인 공동체의 믿음은 등대에 비유할 수 있다. #예물 준비 예물 준비로 시작하는 성찬전례에서 사제는 교우들이 들고 온 빵과 포도주를 받아 제대 위에 놓고 예물준비기도를 바친다. 이때 신자들은 제대 앞으로 나와 각자 예물을 봉헌한다. 예물봉헌은 가진 바를 나눠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셨다. 그 덕분에 우리는 죄와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감사송 예물기도 후 감사송을 통해 사제와 신자들은 한마음으로 성부께서 사랑으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성자를 통해 인간을 구원해주시며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를 거룩하게 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감사와 찬미는 미사의 핵심정신 중 하나다. 감사와 찬미를 근본정신으로 삼는 미사에 매주 참례하는 신자라면 평소 감사의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자. #영성체 그리스도는 성체 안에 현존하신다. 우리는 성체를 영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 예수께서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고 하셨다. 성체를 영함으로써 2000년 전 인간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오시어 머무신다. 하느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고, 부활하시어 계속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자.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퇴사자22013.03.12
![[문화]성 바오로딸수도회 김옥순 수녀, 28일~12월 4일 평화화랑서 개인전 가져](//cpbc.co.kr/CMS/newspaper/2012/11/rc/431890_1.0_titleImage_1.jpg)
[문화]성 바오로딸수도회 김옥순 수녀, 28일~12월 4일 평화화랑서 개인전 가져'신앙의 해' 맞아 28일~12월 4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내 1층 평화화랑 제2전시실서 기도 중에 만난 주님 주제로 31점 선봬 수도생활과 그림은 둘이 아니다. 수도자로서의 삶이 곧 그림이고, 그림이 곧 기도다. 그림은 기도에서 빚어지고, 기도는 그림으로 구현된다. 성 바오로딸수도회 김옥순(막달레나, 사진) 수녀. 바오로딸에서 나온 책이나 달력, 카드 등을 펴면 접하게 되는 그림을 그린 주인공 격인 김 수녀의 그림은 해바라기처럼 오롯이 주님을 향해 있다. 황톳빛 대지와도 같은 거친 표면질감을 보여주는 화면에 굵고 짧은 붓터치를 통해 옅은 물감을 반복해 얹어 형상을 드러낸 예수와 복음서의 주역들은 깊은 묵상거리를 안긴다.김옥순 수녀 지난해 9월, 독일 출국을 앞두고 왼팔 어깨 힘줄이 다섯 가닥이나 끊기는 시련을 딛고 지난 3월 작업을 재개한 김 수녀가 다시 그림을 들고 돌아왔다. 28일~12월 4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내 1층 평화화랑 제2전시실. '신앙의 해'를 맞아 기도하면서 만난 주님의 이야기인 '저는 믿나이다'가 주제이자 전시회 표제다. 향토색 짙은 정감어린 화면으로 보여주던 그의 화풍은 변함이 없지만 이번 출품작 31점은 거기에 덧보태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구원 사건을 담아냈다. 24시간 내내 주님 얼굴만 떠올리며 예수의 깊은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렇게 복음서의 장면 장면이 붓끝에서 되살아났다. '치유하시는 예수'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심' '소경을 눈뜨게 하신 예수님' '성모영보(주님 탄생 예고)'…. "붓을 들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게 주님 얼굴이었어요. 내내 주님 얼굴만, 주님 이미지만 품고 그림을 그렸지요. 그림이 곧 기도의 연속일 수밖에요. 아버지 자비를 온몸으로 살아낸 예수 모습에 사로잡혀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람들과 음식을 잡수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어울리기를 몹시도 좋아하셨던 주님 얼굴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뵙고 놀라며 감사드리고 떨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림을 그릴 때마다 내 안에 굳어진 생각은 아닐까, 고민하며 작업했다는 김 수녀는 "제 그림을 통해 관람객들이 주님의 깊은 내면을 바라보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굳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한다. 1977년 입회한 김 수녀는 1986년 종신서원을 받고나서 우연히 삽화를 그리게 된 것을 계기로 이듬해 그림에 입문, 1994~95년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에오로페오 디 디자인(유럽디자인학교)과 에토레 롤리(회화학교)에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바오로딸 삽화와 그림을 주로 그려왔으며, '성서이야기' '말씀과 함께' '그림이 있는 성경' '십자가의 길' 등 연작을 제작해왔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12.11.20
![[나눔의 기적]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 최종태 작 '성 요셉상 기증'](//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7362_1.0_titleImage_1.jpg)
[나눔의 기적]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 최종태 작 '성 요셉상 기증'"몽골교회에 값진 성금 전하고 싶어"… 1월 30일 입찰 마감 나눔의 기적 제11호 자선경매 물품은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님께서 기증한 성 요셉상(21.5x19.5x74.4㎝)입니다. 한국 가톨릭 미술계를 이끌어온 원로 조각가 최종태(요셉,81) 서울대 명예교수가 2006년 청동으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기증 사연 평화신문 '나눔의 기적'에 동참하기 위해 내놓을 기증품을 고민한 끝에 최종태 교수님의 성 요셉상을 선택했습니다. 최 교수님께서는 2006년 당시 서울대교구장을 맡고 있던 정진석 추기경님과 총대리였던 저에게 각각 이 성상을 선물해주셨습니다. 최 교수님의 성 요셉상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부자(父子)상이기도 합니다. 최 교수님께서 이 요셉상을 선물해주실 때 저 개인에게 주신 것으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교구에 기증해 주신 것으로 여겼기에, 이렇게 뜻깊은 나눔의 자리에 최 교수님 작품을 내놓게 됐습니다. 요셉 성인은 세상과 인류를 위한 하느님 계획이 실현되도록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으신 분입니다. 특히 묵묵한 순명을 보여주시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에서 요셉 성인이 말씀하신 내용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톨릭교회가 요셉 성인을 성가정의 주인이며, 노동자의 모범으로,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자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로 공경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침묵의 순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요셉 성인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한국교회 수호자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수호성인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 북경교구에 속해있던 조선교구는 북경교구를 따라 조선교구 수호자로 요셉 성인을 공경해왔습니다. 이후 1838년 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님께서 조선교구의 새로운 수호자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로 정해줄 것을 교황청에 청했고, 184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 이 요청을 수락하면서 성 요셉과 함께 두 분을 수호자로 모실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나눔의 기적을 통해 받게 될 성금은 몽골교회를 위해 쓰고 싶습니다. 몽골지목구장 웬체슬라오 파딜랴 주교님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학교를 짓는 데 물자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고 싶었는데, 이런 좋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요셉 성인처럼 하느님 뜻이 이뤄지는 데 앞장서실 분이 나타나길 기대합니다. 한국교회 역시 여러 나라 교회에서 도움을 받아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받은 사랑을 되갚는 마음으로, 한창 성장하고 있는 몽골교회에 이 값진 성금을 전하고 싶습니다. ▨최종태 교수= 1958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그 해에 세례를 받았다. 오롯이 성미술에 헌신하며 수많은 성상을 조각했다. 특히 한복 입은 성모상 등 한국 고유의 형태와 정서가 담긴 성상을 조각하며 국내 성미술 토착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서울가톨릭미술가회, 한국가톨릭미술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가톨릭 미술인들 활동을 독려했고, 2011년 22번째 개인전을 열어 꺼지지 않은 창작 열의를 보여줬다. ▲참여방법 : 전화(02-2270-2513, 2516) 또는 전자우편(pbclove@pbc.co.kr)으로 접수. 입찰가ㆍ성명ㆍ세례명ㆍ소속 본당ㆍ주소ㆍ전화번호(휴대전화 포함) 명기 ▲입찰 시작가 : 2000만 원 ▲마감 : 1월 30일(수) 오후 6시 ▲기타 -경매 기간 중 입찰 현황을 평화신문 누리방(web.pbc.co.kr/newspaper) '나눔의 기적' 코너에 게시 -경매 종료 후 최고가 희망자에게 낙찰. 낙찰자 개별 통보 -낙찰 결과는 2월 10일자 평화신문에 발표박수정2013.01.08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7주일](//cpbc.co.kr/CMS/newspaper/2012/09/rc/427135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7주일둘이 한 몸이 되려면 상생과 협력으로 조화 이뤄야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 신학원장) 고대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거인들이 제우스신 앞에서 반역을 일으키자 제우스신은 그 벌로 그들을 둘로 갈라놓았다. 그렇게 해서 남자와 여자가 태어났는데, 절반이 된 둘은 서로 하나가 되려고 항상 나눠진 한쪽을 그리워하며 찾는다. 인간은 근원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성의 유기적 균형을 이룰 때 완전한 존재가 되는 듯하다. 신화 이야기지만 요즘 의학이 말하는 양성 호르몬을 지닌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한편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 이론에 가까운 영적 가르침의 가설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담이 낙원에서 천사와 같이 창조됐다면, 남성과 여성 양성을 지닌 존재였을 거란다. 양성을 지닌 인간이 죄를 지어 남성과 여성의 두 가지 성으로 나뉘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가죽 옷을 입혔다. 그리스도교 진리와 거리가 있는 가설이지만 왠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인간은 이같이 누구도 혼자서 완벽할 수 없다. 다른 사람 안에서 완성된다는 의미일 게다. 인간은 다른 존재 안에서 성장하고 다른 이들 안에서 자신을 만난다. 요즘 많은 멘토가 젊은이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젊은이여, 많은 사람을 만나라! 젊은이여, 마음을 다해서 사귀어 보라!"는 것이다. 사람을 많이 만나봐야 자신을 진정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외경인 토마스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안다 해도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고 하셨다. 남녀 존재도 서로를 통해 다름의 차이와 이중성을 지니고, 서로 동일하다는 일치성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양성 차이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하느님 눈에 남자와 여자는 똑같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어떻게 하라고 명령했냐고 되물으시자, 그들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했다"고 대답했다. 이어 주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라며 마음이 무딘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하신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혼인 불가해소성을 강조하셨다. 둘은 둘이고 하나는 하나일 텐데, 복음은 왜 남자와 여자가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남자와 여자 관계뿐 아니라 세상의 발전은 분리와 일치를 통해 이뤄진다. 사회에서도 변화는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라는 '둘'과 남녀의 똑같은 '한' 인간은 동전 양면처럼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을 담고 있다. 둘은 남자와 여자가 지닌 차이와 특성, 그리고 다양성이라는 이중성을 말한다. 하지만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남녀가 동일하다는 일치를 말한다. 둘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자유를 지향하고, 한 몸이 되는 가치는 질서와 책임을 말한다. 그러니 둘이 지닌 자유의 의미, 그리고 하나가 담고 있는 질서와 책임은 서로 경쟁하거나 반대하지 말고 상생과 협력으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와 책임은 실천과 적용에서 타이밍을 잘 발휘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유를 누려야 할 때 책임과 질서로 그것을 압박하고, 책임을 져야할 때 자유를 내세운 방임으로 그것을 무질서하게 한다면 남자와 여자의 둘은 한 몸이 되지 못하고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어린이처럼 오늘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혼인의 불가해소성이 위기에 처해있고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다. 복음적 충고는 꿈같은 이상이 돼버렸고, 모든 이에게 무력한 가치가 됐다. 성경이 지속적으로 세상에 보여주는 것은 인간은 하느님 계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완성하시고, 믿음과 마음의 힘을 주신다. 어린이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 어린이의 영적 특성은 은총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아기는 첫 걸음을 뗄 때 땅에 발을 딛고 조심스럽게 내디딘다. 영성생활도 마찬가지다. 영성생활은 늘 성장이 필요하다. 왜냐면 하느님 은혜는 기준치와 끝이 없기 때문이다. 퇴사자22012.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