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의 순교자들]<23> 루페르트 (요셉) 클링자이스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3/12/rc/490218_1.1_titleImage_1.jpg)
[덕원의 순교자들] 루페르트 (요셉) 클링자이스 신부 한국인 사제 양성 못자리 일군 학자 수도자 루페르트(요셉) 클링자이스 신부 (Rupert Klingseis)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1890년 1월 5일 뮌헨 마리아 힐프 ▲세례명: 요셉 ▲한국명: 길세동(吉世東) ▲첫서원: 1911년 10월 8일 ▲종신서원: 1914년 10월 11일 ▲사제수품: 1915년 7월 16일 ▲한국파견: 1930년 11월 9일 ▲소임: 덕원신학교 철학 교수 ▲체포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9일, 덕원수도원 ▲순교일자 및 장소: 1950년 4월 6일, 평양 인민교화소 하느님의 종 루페르트 요셉 클링자이스 신부는 독일에서도 저명한 철학자로 한국인 사제 양성에 평생을 바친 수도자였다. 그는 특히 한국인 신학생들의 학문적 식견을 넓히고 이들을 교수 요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유럽 유학 주선에 노력했고 해방 후 우리말로 강의하기 위해 50이 넘은 나이에도 한국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학자였다. 철학ㆍ신학 박사인 명석한 수도자 클링자이스 신부는 1890년 1월 5일 독일 바이에른 뮌헨의 외곽마을 마리아 힐프에서 태어나 '요셉'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가 굶어 죽었을 만큼 궁핍했지만, 그의 가정은 신앙심 깊은 성가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명석했던 클링자이스는 14살이 되던 해인 1904년부터 마인 강변에 있는 상트 루드비히 소신학교에서 공부했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김나지움으로 옮겨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다. 1910년 가을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입회한 그는 '루페르트'라는 수도명으로 성직 지망 수련기를 시작, 1911년 10월 8일 첫서원을 했다. 그 후 로마 성 안셀모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이어 1914년 10월 11일 종신서원과 1915년 7월 16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1918년 뮌헨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클링자이스 신부는 1922년부터 1930년까지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철학대학 학장직을 맡아 철학 강의를 했고,수도원 부원장직도 함께 수행했다. 1930년 덕원신학교 철학 교수로 있던 크리소스토모 슈미트 신부가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보좌 아빠스로 선출돼 독일로 돌아오자 그를 대신해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가 1930년 11월 9일 덕원수도원으로 파견됐다. 그는 1931년 1월 2일 엘리지오 콜러 신부와 함께 입국해 덕원신학교에서 15년 동안 철학과 윤리신학, 교회사, 라틴어를 강의했다. 그는 한국 이름 '길세동'(吉世東)처럼 한국인에게 조금이나마 더 보탬이 되고자 신학생 양성과 함께 피정 지도도 활발히 했다. 덕원신학교의 수업이 대부분 라틴말로 진행됐지만 그는 한국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요즈음 학교 강의 외에 달마다 한 번꼴로 한국어 강론을 하고 있습니다. 강론 원고를 독일어로 작성해 내가 한국어로 번역한 다음, 곧 사제품을 받을 제자(노규채 아우구스티노)에게 넘겨 주면, 그는 한국인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일일이 문장을 고쳐 줍니다. 그렇게 원고가 완성되면, 유창하게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저 혼자 맹연습을 해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이 일이 조금씩 쉬워질 것입니다"(클링자이스 신부 1938년 12월 4일자 편지 중에서). 그 와중에도 1940년에는 국민 계몽 총서 제1권으로 「인간의 영혼은 물질인가 정신인가」를 펴내기도 했다. 영혼의 불멸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그리스도교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결코 타협할 수 없음을 주장한 이 책은 5000부나 출간됐다. 1945년 8ㆍ15 광복과 함께 북한 땅을 점령한 공산군은 덕원수도원에 극심한 제약을 가했다. 전기는 물론 연료와 음식마저 단절되거나 제한됐다. 덕원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속옷가지가 누더기로 변해 가도 여벌이 없었다. 소련군의 진주와 북한 공산당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는 계속 운영됐고, 그 역시 철학강의를 계속했다. "내게는 수건이나 손수건조차 멀쩡한 것이 하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석탄을 때 본 것이 4년 전이었습니다. 아무튼 나는 얼어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셔츠 두 개에 내의까지 껴입었습니다. 창문도 종이로 막아 뒀습니다"(클링자이스 신부 1949년 1월 14일자 편지 중에서).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는 매우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 시간전례(성무일도)를 바치다가 갑자기 정전돼 성당이 깜깜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그가 외우는 시편 소리만 성당에 울려 펴졌다. 반면, 그는 일상사에 대한 상식은 전혀 없었다. 물품이 귀해 덕원신학교에서 교수 신부나 손님들을 위해 짚신을 실내화로 대신 비치해 놓았는데, 그는 짚신을 어떻게 신는지 몰라서 항상 거꾸로 신고 다녔다. 일은 몹시 서툴렀지만 공동체 의식이 투철해 공동 소임에 절대로 빠지는 일이 없었다. '나쁜 사상' 유포죄로 체포돼 순교 1949년 5월 9일 밤 11시에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이 덕원수도원에 난입해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아르눌프 슐라이허 부원장 신부,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를 원산으로 압송했다. 이들은 5월 11일 다른 수도자와 함께 평양인민교화소로 이송됐고 감옥에서 재판을 받았다.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는 영혼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반공산주의 저술을 출판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돼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모든 것은 이른바 '나쁜 사상' 때문이었다. 나쁜 사상이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대치되는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이념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루치우스 로트 신부, 1950년 10월 편지 중에서).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는 11개월간의 힘든 수감생활 끝에 1950년 4월 6일 성목요일에 평양인민교화소에서 가혹한 학대와 영양실조로 순교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동료 수도자들 증언 "루페르트 신부는 수업 시간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늘 기분 좋게 생활하고 성인처럼 기도합니다. 그는 강의를 잘하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매우 인기가 좋습니다"(엘리지오 콜러 신부, 아달리코 뮐레바흐 신부에게 보낸 1940년 7월 14일자 편지 중에서). "밀을 수확하는 시기가 오면, 공동체 전체가 수도원 농장으로 나가 밀을 베었는데, 그도 항상 밀 수확을 도왔다. 6월 하순이라 날씨가 더워서 멱을 감을 정도로 땀을 흘려가면서도 그는 싫은 내색하지 않고 일을 했다. 서투른 일을 너무나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다른 형제들이 아무리 말려도 공동 소임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수도 형제들은 하는 수 없이 그가 일하도록 놔두었고, 한 명이 뒤를 따라다니며, 그가 해놓은 일을 다시 고쳐 놓곤 했다. 덕원 수도원에서 그와 함께 생활했던 수도형제들은 그를 두고 기도하고 일하는 전형적인 베네딕도회 회원이라고 평했다. 그는 기도에 열심이었고, 학문 연구에도 매진했다. 그는 학식으로 쌓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살면서 모든 이들에게 친절했다"(덕원수도원 연대기 중에서). "두달 뒤(1950년 10월), 나는 장 안토니오 수사와 오영길 이멜다 수녀와 함께 삽을 들고 다시 묘지로 가서, 신학교 교수이자 철학박사인 루페르트 신부님의 시신을 찾았다. 그분의 얼굴에는 빨래번호 273이 새겨진 손수건이 덮여 있었다. 바지는 원장 신부님 것을 입고 있었다. 루페르트 신부님은 임종 때 죄수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차림새로 매장되는 것을 루치우스 원장 신부님이 원치 않아 당신 바지를 그분께 입혀 드렸던 것이다. 루페르트 신부님은 나쁜 일이라곤 정말 하나도 한 적이 없다"(임근삼 콘라도 수사 증언 중에서). cpbc2013.12.31
![[성경 속 궁금증] (13) 주님은 언제 다시 오는가](//cpbc.co.kr/CMS/newspaper/2011/11/rc/395827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13) 주님은 언제 다시 오는가그날과 그시간은 아무도 몰라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림은 '최후의 심판'(조토 작, 1306년). 몇 년 전 어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이 세상에 곧 종말이 올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이들은 세상 종말의 때가 되면 휴거(携擧), 즉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할 때 구원받는 사람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그 날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부 맹신도들은 종말론에 세뇌돼 학업과 생업을 그만뒀고, 전 재산을 교회에 바쳤다. 가족을 버리고 가출해 가정이 파탄난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종말론에 대한 주장은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하며 늘 존재했다. 이는 종말이 사람들의 큰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 종말은 영화나 소설 등에서 아주 흥미로운 주제로 자주 등장한다. 성경을 보면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그리스도 재림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기본 신앙이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코린 1,7). 부활해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세가 끝나는 마지막 시기에 다시 세상에 오신다는 것이 재림사상이다. 재림의 때가 곧 세상 종말의 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재림은 세상 마지막 때인 종말에 일어날 여러 현상들과 연관돼 있다. 그리스도 재림은 그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 무렵 환난이 지난 뒤 곧바로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 24,29-30). 이런 믿음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바로 예수님께서 잡히기 전날 밤에 사도들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그래서 그리스도의 열성적 제자들 가운데는 자기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돌아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재림이 잘못 이해되지 않을까 경계하면서도 반드시 이뤄질 것임을 강조하셨다(마태 24,4-31).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희망을 간직한 채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도록 요청받았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2-13). 재림의 때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 재림은 악이 최종적으로 멸망하고, 하느님의 영원한 통치가 시작되는 때라는 것이다(1코린 15,22-25).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퇴사자22011.11.15
![[특집-신천지, 무엇이 문제인가] 치밀하고 교묘하게 포교... 가출 등 가정파괴 속출](//cpbc.co.kr/CMS/newspaper/2012/07/rc/420834_1.1_titleImage_1.jpg)
[특집-신천지, 무엇이 문제인가] 치밀하고 교묘하게 포교... 가출 등 가정파괴 속출 김 바오로(51)씨는 5년 전 이혼해 두 아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간 아내와는 연락이 끊겼다. 화목했던 가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아내가 성경 공부를 시작하면서다. 언제부턴가 성경 강의를 들으러 간다던 아내는 자주 집을 비웠다. 수상한 낌새를 챈 남편은 아내가 공부하는 성경과 자료를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아내는 신천지(공식명칭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신천지가 사이비 종교라고 알고 있던 남편은 아내를 말렸지만 이미 늦었다. 아내는 벌써 신천지에 깊이 빠져 있었다. 신천지 신자라는 것을 들킨 아내는 이후 남편과 아이들에게 신천지 신자가 될 것을 강요했다. 또 신천지를 반대하는 가족들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신천지 신자들 말만 들었다. 교회에 못 다니게 하면 집을 나가겠다는 아내를 남편은 더 말릴 도리가 없었다. 김씨처럼 가족이 신천지에 빠져 가정이 파괴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최근에는 50대 남편이 신천지에 빠진 아내를 말리다 홧김에 목을 졸라 살해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 같은 극단적 사건이 아니더라도 신천지에 빠진 이들의 가출과 폭력, 학업 포기, 직장 퇴사 등과 같은 문제가 속출하고 있다. 잘못된 신앙에 빠지는 것도 문제지만 신천지 때문에 가족을 등지고 생업과 학업을 포기하는 등 반사회적, 가정 파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기독교 이단상담소협회 한 관계자는 "이혼과 가출을 종용하고 집을 나온 이들을 영웅 대접을 해주는 종교가 제대로 된 종교냐"면서 "신천지는 이단도 아닌 사이비 종교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폐해가 심각한 수준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천지에 빠진 딸이 가출했다며 한 여성이 신천지 신학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1983년부터 이만희 통해서만 14만 4000명 구원 주장신천지 감추고 1~3년간 접근… 사제·수도자 사칭도개신교, 10년 전부터 이단상담소 개설 등 적극 대응 이만희씨가 1983년 설립한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은 전국을 12지파로 나눠 선교를 펼쳐왔다. 신천지는 신자 14만 4000명이 되는 날 새 세상이 열리고 이들만이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최근 신자가 10만 명을 넘어, 올해를 구원의 해로 삼고 한층 공격적으로 선교에 나서고 있다. 14만 4000명은 요한 묵시록 7장에 나오는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이들'로 신천지는 이 숫자가 선택받은 신천지 신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천지 교리는 종말론을 다루고 있는 마태오복음 24장과 요한 묵시록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며 신자들에게 왜곡된 성경 지식을 주입하고 있다. 신천지는 또 성경이 모두 상징과 비유로 이뤄져 있기에 '계시받은 자'만이 이를 완벽하게 풀이할 수 있다며 '계시받은 자'가 바로 이만희씨라고 말한다. 삼위일체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은 하느님, 이삭은 예수님, 야곱은 이만희씨라고 주장한다. 세상 끝날에 예수 영혼이 이만희씨에게 들어와 오직 이만희씨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신천지는 성경 내용을 알고 있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를 선교 대상자로 삼는다. '추수꾼'이라 불리는 신천지 신자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로 둔갑해 1~3년간 신천지 신자임을 숨기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주변 사람들과 신뢰를 쌓는다. 이후 신심이 흔들리는 이들이나 전도사, 집사, 사목회장, 분과장 등과 같은 핵심 인물들에게 접근해 신천지 성경 공부로 유도한다. 선교 대상자 관리가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이뤄져 있어 한 번 발을 들이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게 돼 있다. 신천지 신자였던 박 미카엘(30)씨는 "강의실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성경을 잘 모른다며 이것저것 물어와 나처럼 성경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를 전담하는 신천지 신자였다"면서 "나를 관리하는 사람이 최소 5~6명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천지 신자들은 선교 대상자가 신천지 교리에 완전히 빠질 때까지 자신이 신천지 신자임을 들키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받는다. 선교를 위해서라면 온갖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요새 신천지처럼 거짓된 성경을 가르쳐 주는 곳이 많으니 조심하라"고까지 이야기 한다. 이 밖에도 신부와 주교에게 인정받은 성경 강의라고 홍보하고 신천지 교회로 끌어들이거나, 신부와 수도자를 사칭해 신자들을 유인하기도 한다. 개신교회는 10여 년 전부터 신천지 문제에 적극 대응해 왔다. 신천지 신자들이 교회 신자들을 선동, 목사를 쫓아내 교회가 통째로 신천지에 넘어가는 일이 생기는 등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교계 방송을 통해 신천지 선교 전략과 피해 사례를 지속적으로 보도, 신자들이 처음부터 신천지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또 이단상담소를 개설해 신천지에 빠진 가족으로 고민하는 가정을 돌보며 신천지에서 다시 교회로 돌아온 이들이 올바른 신앙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상대적으로 신천지 피해가 적었던 가톨릭교회는 지난해부터 주교회의와 각 교구에서 신천지 활동에 주의를 당부하는 공문을 발표하고 신천지 피해 예방에 나섰다. 또 구역장ㆍ반장 월례교육에서 신천지 선교 전략을 알려줘 신자들이 신천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특히 성당이나 가톨릭교회 공식 기관이 아닌 장소에서 열리는 성경 공부에 참석하지 말고, 의심되는 성경 공부는 즉시 사목자에게 알릴 것을 당부했다. 주교회의 홍보국장 이정주(광주대교구) 신부는 "교구 홍보국장단 회의 때 신천지 문제를 논의하면서 각 교구 피해 사례를 공유하기로 했다"면서 "또 천지일보 등 신천지와 관련된 매체 및 단체와는 일체 접촉하지 않도록 결정했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신천지 예방대책* ▶가톨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경공부 및 통신교리를 통해서 공부한다. -각 교구 성서 40주간/성서못자리(서울)/여정 -통신성경(성경 100주간/성바오로 딸 수도회/가톨릭교리신학원) -청년성서모임 -가톨릭회관 -각 본당 ▶소공동체 모임 때 본당에서 제공한 반모임 교재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가톨릭 공식 기관이 아닌 외부 장소에서 성경 공부를 권유하는 사람이 본당에서 활동하면 사목자에게 알린다. ▶성당에서 발각돼 퇴출당한 '추수꾼'들이 사목자에 대해 온갖 유언비어를 퍼트리니 이에 주의한다. 박수정2012.07.17
![[평화신문·가톨릭출판사 공동기획] 젊은이여, 신앙의 근본을 재발견하라 <14>](//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5192_1.0_titleImage_1.jpg)
[평화신문·가톨릭출판사 공동기획] 젊은이여, 신앙의 근본을 재발견하라 <1>무엇을 믿고 있는가?두치오 디 부오닌세냐(1255~1319)의 '광야에서 유혹받으시는 예수'. 77.예수님이 30년 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사셨고, 그로써 우리의 일상을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31-534항, 564항) 78.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도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나요?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은 인류 전체가 속해 있는 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세례를 통해 그분은 표징을 남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범한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언젠가 죽음 속으로 빠져들겠지만, 당신 아버지의 권능으로 다시 부활하실 것입니다.(535-537항, 565항) 79.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유혹받는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했나요? ▶예수님이 실제로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분이 진정한 인간이셨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히브 4,15) 구세주를 발견하게 됩니다.(538-540항, 566항) 80.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시나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변화되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입니다.(541-546항, 567항) 81.예수님은 실제로 기적을 행하셨나요? 아니면 그저 신앙심을 강조하기 위해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한가요? ▶예수님은 실제로 기적을 행하셨고, 사도들도 기적을 행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실제 사건들을 전합니다.(547-550항) 82.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시며 당신에게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퇴사자22013.03.27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3>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중)](//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4195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중)신앙 고백, 진리에 대한 결단과 투신으로 드러나야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해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아 신앙의 해를 선포했다. 사진은 베네딕토 16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 미사 집전을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들어서는 모습. 오늘날 신앙의 상태와 신학 흐름에 관한 문제 제기는 과연 무엇인가? 지난 호에서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서문에 나오는 '행운의 한스' 이야기를 소개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계속해서 미국 개신교 신학자 하비 콕스(1929~ )가 「세속도시」에서 인용한 바 있는,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어릿광대와 불타는 마을'이라는 비유를 제시한다. 덴마크를 순회하던 어느 곡예단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곡예단 단장은 출연 준비를 하던 광대를 이웃 마을로 보내 도움을 청한다. 추수가 끝난 논과 밭에 불씨가 옮아 그 마을에도 화재가 번질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광대의 이러한 호소를 구경꾼을 끌어들이려는 기발한 수법의 광고나 일종의 홍보로만 생각해 손뼉을 치고 웃기만 한다. 결국 불길은 마을에까지 번져 손 쓸 겨를도 없이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 두 가지 비유 이야기는 오늘 시대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이 마주하는 심각한 위기 상황을 설명한다. 현대인에게 신앙 의미와 가치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임무와 역할이 여러 측면에서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교인이 내적으로는 소중한 신앙 유산과 교회의 영적 자산을 스스로 포기해 버릴 위험에, 그리고 외적으로는 종교와 신앙 자체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종교적 무관심', 또는 모든 종교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무차별주의'에 직면해 무력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메시지다. 사실,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의 유산을 오늘날 교회 공동체적 차원에서 어떻게 다시 생생하게 체험하며 살아갈 것인가는 신앙의 해를 맞이해 우리에게 주어진 핵심 질문이자 과제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뒤이어, 이제 믿음의 근본적 의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오늘날 인간의 믿음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사도신경의 첫 시작인 '나는 믿나이다'라고 하는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서 베네딕토 16세는 믿음이란 한 마디로 인간의 한 실존적 태도와 자세, 즉 자신의 존재론적 근원과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인간의 선택과 결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즉, 신앙이란 새로운 존재론적 안목과 전망으로써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신앙이 세상의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차원을 넘어서 인간 자신의 존재론적인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인식과 자각임을 말해준다. 문제는 믿음의 이러한 존재론적 구조와 성격이 오늘날 현실주의적이며 행동 지향적인 경향 속에서 쉽게 간과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물론이나 물신사상의 결정적 오류는 물론이고, 철학적 실증주의와 현상주의 그리고 상대주의적 흐름이 현대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경향은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초월적 능력을 부인하면서 진리에 대한 인식을, 행하고 직접 경험하는 것에만 한정시키려 한다. 인간의 믿음에 관한 기본 성찰은 신론의 문제로 연결된다. 오늘의 믿음이 드러내는 하느님 표상은 과연 무엇인가? 베네딕토 16세는 성서적 신(神) 신앙에는 위격과 존재라는 두 가지 측면이 나뉠 수 없이 결합돼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역사 안에서의 위격적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 체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는 존재론적 초월성에 의해 조화로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역사의 예수님이 요한복음서에서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초월적 말씀(로고스)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이렇듯 성서적 신 신앙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측면의 조화와 통합이 초기 그리스도교 발전 단계에서도 역시 반복돼 나타남을 강조한다. 그것은 성서적인 위격-존재적 신관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존재론적 신관과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베네딕토 16세는 탈출기 3장 14절에 나오는 "나는 있는 나다"라는 존재론적 신적 언명이 그리스 철학적 배경에서 자라난 초세기 교부들에게 호소력 있게 작용해, 성서적 신 개념과 그리스 사상 연계를 이룩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 모든 역사를 이어받은 초기 그리스도교는 철학자의 신을 받들고 이교의 신들에 역행함으로써 자신의 선택과 정화를 과감히 단행하였다"(140쪽). 그리고 이러한 신앙과 존재론의 결합은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 체계 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이미 성경 자체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선택과 결단 과정의 핵심은 바로 '모든 신화에 반대되는 로고스(Logos)의 선택'이었다. 그 대표적 예로 요한복음 1장 1-18절의 로고스 찬가를 들 수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진리' 개념과 '로고스' 개념은 히브리 전통과 그리스 사상의 균형 있는 결합을 보여주는 매우 좋은 예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신관의 통합 과정, 즉 성서적인 위격-존재적 신관과 그리스 철학자들의 존재론적 신관의 결합 과정은 그리스도교의 성립을 통해 유다이즘과 헬레니즘의 결합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알리는 가장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표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관의 결합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신비를 통해 결정적으로 구체화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이제는 유다-그리스적 사고 지평의 확장을 통해 전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로서 선포되는 과정을 밟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 본래의 '원체험'이 초기의 '증언' 단계를 거쳐 '역사적 해석'의 단계에 접어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니케아(325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381년)와 에페소(431년)를 거쳐 칼케돈(451년)에 이르기까지 제1~4차 보편공의회에서 이뤄진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의 핵심 교의 정립 과정에서 그리스 철학 개념과 용어들이 많이 도입돼 사용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지평에서 볼 때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해석과 선포의 발전 과정을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전승 본연의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로 포함시키는가, 아니면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필요성에 따른 하나의(첫 번째) 토착화 과정으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판단에 관한 논쟁이다.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서는 전자(前者)의 입장이 드러나고 있으며, 제3세계 일부 신학자들은 후자(後者)의 입장을 취한다. 전자의 입장을 성경과 전승에 기초하면서 그리스 철학적 사고에 영향을 받아 논리적 분석과 성찰을 중시하는 서구 스타일의 고전적 신학이라 한다면, 후자의 입장은 신앙의 역사적 차원을 중시하여 공동선과 토착화를 추구하는 맥락에서 신학적 성찰을 전개하는 제3세계 중심의 신학 흐름이라 할 수 있겠다. 2006년 9월 12일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교에서 행한 베네딕토 16세의 연설에서도 이 주제가 다뤄진다. 베네딕토 16세는 로고스 개념의 성서적 등장으로 말미암아 "성서적 신앙의 그 모든 힘들고 구불구불한 길이 목적에 이르게 되고 그 종합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사상의 만남을 볼 때, 그리스도교가 동양에서 발원하고 중요한 발전을 이루기는 했어도, 궁극적으로 유럽에서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베네딕토 16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탈(脫)헬레니즘' 필요성을 내세우는 제3세계 신학자들의 신학적 주장에 대해 '토착화'(inculturation)라는 말 대신에 '상호문화성'(inter-culturality)이라는 용어 사용을 제안한다. 이러한 진술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유럽 문화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사실상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 제기다. 그리스도교 자체가 수없이 많은 역사적 조정 과정을 거쳐 이뤄진 종교적ㆍ사상적ㆍ문화적 가치와 그 표현의 총화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교로부터 서구 문화적 요소를 분리하려 시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다른 문화를 만났을 때 발생하는 상호작용의 실제 과정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복음 가치의 발견에 주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라는 논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2000년 신판의 머리말은 말한다. "토착 그리스도교에 대한 요구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어디까지나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모든 위대한 문화는 서로에 그리고 진리에 열려 있다." 베네딕토 16세의 '토착화'에 관한 논지는 이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완성론' 혹은 '성취론'적 전망으로 연결된다.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2000년 신판 머리말에서는 특히 아시아적 맥락이 고려된 함축적 표현이 이뤄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아시아 문화의 복음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식별과 정화 작업이 반드시 선행돼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 겨레들이 그 민속 신앙에 있어 이미 그리스도 신앙의 적지 않은 부분을 제 나름대로 표출해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특히 고통받는 하느님과 자애로운 어머니가, 성경의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주는 신앙의 중심적인 표상이 되고 있다는 점은 오늘의 우리들도 일깨우는 바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음은 물론이다"(33쪽).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진리를 향한 결단과 투신으로 드러나야 함을 강조한다. '나는 하느님을 믿나이다'라는 신앙고백은,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실재 중 가장 우선적인 가치와 의의, 그리고 진리에 대한 선별적이고 선택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온갖 우상숭배를 거슬러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듯, 그리고 초대교회 교부들이 여러 이단적 주장과 싸우며 신앙 진리를 찾아나간 것처럼, 오늘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참다운 진리를 향한 결단의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처럼 로고스라는 핵심 개념을 통한 통합적 신 신앙이야말로 베네딕토 16세의 신학 사상의 기본을 구성한다.박준양 신부(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퇴사자22013.05.21
![[성경 속 궁금증] (12) 모세 오경은 모세가 썼나요](//cpbc.co.kr/CMS/newspaper/2011/11/rc/395120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12) 모세 오경은 모세가 썼나요모세의 전승을 토대로 기록교회는 모세에서부터 전해오는 전승을 토대로 기록됐다는 뜻에서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로 본다.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모세 대리석상(1515년). 모세오경은 창세기와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권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모세가 이 다섯 권의 저자라고 알려져 있다. 유다인들은 모세오경을 토라(Torah)라고 부른다. 히브리어로 토라는 지시, 또는 '인도하다, 길을 가리키다'를 뜻한다. 이 토라를 칠십인역(七十人譯/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 중 가장 오래된 번역본)에서는 법으로 번역한 까닭에, 이 부분을 율법서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성경의 주요 법률 대부분이 토라에 수록돼 있어 이스라엘 민족의 의무사항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서라는 말은 지나치게 법률을 강조하는 인상을 주기에 토라의 참뜻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모세오경은 법보다는 가르침과 지침을 함께 전하고 있다. 유다인들은 토라의 기록을 비슷한 길이로 구분해 두루마리 다섯 개에 나눠 기록하고 보관했다. 그래서 오경이라는 책 이름이 나왔다. 오경의 어원은 희랍어로 펜테터이코스인데, 펜타(penta : 다섯을 뜻함)와 테우케(Teuche : 도구, 또는 글을 쓴 두루마리를 넣어두는 상자)가 합쳐진 말이다.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각각 5개의 두루마리로 나눠 5개의 항아리 같은 상자에 보존했다는 데에서 펜테터이코스라는 명칭이 유래한 것이다. 유다인들은 책의 첫머리가 시작되는 단어로 오경의 각 권을 불렀다. 그러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에서는 각 권의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명칭을 창안했다. 후대 번역본들도 칠십인역의 명칭을 따라 창세기(시작, 기원의 뜻), 탈출기(출발, 탈출의 의미), 레위기(레위인들에 관한 규정), 민수기(인구조사 및 숫자가 많이 취급됨), 신명기(제2의 율법이란 뜻)라 했다. 구약성경에서 모세오경은 신약성경에서 복음서와도 같다. 모세오경 전체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약속한 땅으로 인도하시는 구원계획 기록이다. 모세오경에 모세를 붙여 부르는 이유는, 모세가 이 오경의 저자라 믿는 데에 기인한다. 실제 어떤 종류의 법이나 일부는 모세가 기록했다.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웠다"(탈출 24,4). 성경에서는 한 번도 오경이 모세가 기록한 것이라고 언급하지 않았지만,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 필로나 플라비우스 요셉, 그리고 그리스도교 교회는 모세가 오경을 기록한 것으로 전했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모세가 직접 썼다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모세가 오경을 다 썼다는 것이나, 모세오경이 모세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극단적 주장이다. 그래서 교황청 성경위원회와 많은 가톨릭 학자들은, 오경은 모세가 직접 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모세에서부터 전해오는 전승(예컨대 십계명)을 토대로 기록됐다는 뜻에서 모세를 저자로 본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퇴사자22011.11.08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2>앙리 드 뤼박(중)](//cpbc.co.kr/CMS/newspaper/2014/01/rc/493307_1.2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앙리 드 뤼박(중)그리스도교의 새로움과 그 신앙의 보편적 가치 제시 칼 라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앙리 드 뤼박(오른쪽).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작업을 하면서 젊은 독일 신학자 칼 라너와 요셉 라칭거 등과도 만났다. 사진출처=www.karl-rahner-archiv.de 암흑기와 불교 연구 그리고 명예회복 「초자연성에 대한 연구」(1946)로 예수회 제재를 받은 앙리 드 뤼박은 예수회 총장의 지시에 순종하고 1950년부터 1959년까지 리옹을 떠나 파리에서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이 암흑기에 불교에 관한 연구에 몰두해 세 권의 책을 냈다. 「불교의 관점들 I」(1951), 「불교와 서양의 만남」(1952), 「불교의 관점들 II, 아미타불」(1955). 동양의 신비주의 불교에 대한 연구는 드 뤼박에게 인류의 영성사가 제공해주는 방대함 속에서 '그리스도 사건'의 위대한 유일성에 대해 점점 더 분명한 확신을 갖게 했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이해의 보편성을 확인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영성 사상를 숙고하게 했다. 1954년에는 교회에 관한 아름다운 저서 「교회에 관한 묵상」(Me'ditation sur l'Eglise)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지금도 인용되는 유명한 저서로 그가 얼마나 교회를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1958년 그는 프랑스 학술원(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추대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1960년 8월 복자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위원'으로 임명됨으로써 그의 사상은 교회로부터 공인받게 됐다. 그는 공의회 개최 기간(1962~1965)에 신학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의회 모든 문헌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이때 드 뤼박은 젊은 독일 신학자 칼 라너와 요셉 라칭거(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 등과도 만났다. 공의회는 계시헌장에 나타난 성경과 성전의 유일한 원천, 무신론, 교회헌장, 비그리스도인 선언 등에 그의 사상을 수용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드 뤼박은 공의회 결과로 설립된 교황청 그리스도교일치평의회 산하 '비그리스도교인의 사무국' 위원으로 5년간 활동했다(1969~1974). 이 사무국은 유다교를 제외한 타종교와의 대화와 우호적 관계를 위해 생긴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공의회의 근본 정신에 대한 해설서를 내고 강연했다. 계시헌장과 사목헌장 등에 대한 그의 해설은 유명하다. 마침내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3년 2월 2일 드 뤼박을 이브 콩가르와 함께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그의 깊고도 위대한 신학사상이 교회에서 정통한 것으로 공인받게 됐다. 그가 87세에 사제에서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신학적 공로 때문이다. 드 뤼박 추기경은 1989년 93세 때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한 역사적 상황과 주요 주제를 다룬 책을 발행한 후, 곧바로 몸이 쇠약해져 파리의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했다. 몇 년간 병원 신세를 진 그는 1991년 9월 4일 생을 마감했다. 인품과 학문적 열성 앙리 드 뤼박과 함께 살던 동료와 제자들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우 얌전하고 꼼꼼하며 신중한 성격이었다. 평생 연구에만 몰두했던 학자로서 공부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 날 수도원의 공동 방에 동료들이 모두 나가고 혼자 남게 됐는데, 방을 나서려는 순간 드 뤼박은 라디오가 켜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라디오를 끌 줄 몰라 한참을 씨름하다 결국은 포기했다고 한다. 그가 유일하게 다룰 줄 알던 기계는 타자기뿐이었다. 드 뤼박의 제자로 은퇴 후 많은 신학책을 펴내고 있는 세스부에 신부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자주 뒷목 통증을 호소하면서 저녁이면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방에 들어가서도 쉬기는커녕 다시 열심히 타자기를 두드려 동료들은 이런 그의 학문적 열성에 혀를 내둘렀다. 그의 천재성은 탁월하다. 그는 많은 교부의 책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유명한 사상가나 철학자의 책을 읽곤 했는데, 그때마다 중요한 구절을 편지봉투 뒷면에 메모해 두곤 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쓸 수 있는지 궁금해하던 세스부에 신부는 어느 날 그의 방에 들렀다가 글씨가 빼곡한 편지봉투를 하나하나 넘기면서 직접 타자를 치는 스승 앙리 드 뤼박을 봤다. 이렇게 탄생한 원고가 곧 책으로 발행된 것이다. 사실 그의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많은 교부의 글을 인용하고, 체계적인 목차도 생략하는 경우가 허다해 읽기가 지루하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지 않으면 무슨 주장을 펴는지 알기도 어렵다. 그저 한 주제에 대한 교부들의 진술을 모아둔 것 같은 인상이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그 모든 교부의 언급이 자신의 주장을 펴는 중요한 신학적 논거로 정리돼 있다. 드 뤼박은 또한 쉬운 글을 써야 한다는 이유로 어떤 사상에 대해 단순화해서 말하기를 피한다. 그만큼 신중의 신중을 기한다. 이러한 학문적 열성과 철저함으로 그의 책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도 인용되고 재판되며 중요한 참고서가 된다. 한편으로 그의 작품을 읽는 프랑스 독자들은 그의 프랑스어 문체에 혀를 내두른다. 그의 문체는 프랑스어의 분위기를 잘 살린다는 평가를 받아 프랑스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만큼 외국인에게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품세계와 신학적 공헌 그의 신학 작품세계는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폭넓고 다양하며 심오하다. 이탈리아에서는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전집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출간했다(1979).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를 추모하는 국제협회가 생기면서 Cerf 출판사를 통해 전집이 나오기 시작됐다. 총 50권으로 계획된 전집은 각 권이 600쪽을 넘는다. 현재까지 20여 권이 나왔다. 그의 작품은 주로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신학적 숙고를 담아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새로움과 그 신앙의 보편적 가치를 제시한 것이었다. 유명한 작품은 인본주의 무신론, 하느님에 대한 신학적 인식론, 신학적 인간학, 초자연성, 교회론, 불교에 관한 연구, 테이야르 드 샤르댕에 관한 저서 및 당대의 신학자나 철학자(모리스 블롱델, 에티엔느 질송, 쟈크 마리탱)와 교류한 사상교류집 등이 있다. 그의 신학 전반에 흐르는 사상은 당연히 인류에게 유일한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 그리스도의 새로움이다. 그리스도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신비나 인간의 신비, 그리고 역사의 신비를 읽어낸다. 그의 신학적 독특성이 드러나는 작품과 신학적 공헌도가 높은 것만을 추려 소개하도록 하겠다. 프랑스 기초신학의 선구자 1929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리옹가톨릭대 교수로 임명된 그는 교수 임용 기념 교내 학술대회에서 '신학과 호교론' 논문을 발표했다. 이때 그는 당시엔 생소했던 '기초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 신학의 변화와 쇄신을 예고했다. 그 당시 신학은 주로 호교론(護敎論)과 신학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호교론은 가톨릭 신앙이 믿을만하다는 것을 믿지 않은 이들을 향해 제시하는 학문이다. 호교론은 신앙에 도전하는 유럽의 이성적 합리주의자들에게 왜 종교가 필요한지, 왜 그리스도교 신앙을 참된 진리로 믿어야 하는지를 '순수 이성적으로' 제시하는 데 몰두했다. 반면, 신학은 일종의 교의신학으로서 호교론을 통해 믿음의 정당성이 제시됐다고 전제하고, 교회가 믿고 있는 교의들을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드 뤼박은 이러한 호교론과 신학의 '외재적 관계'를 비판하면서 앞으로의 신학은 믿음을 전제로 하거나, 수동적으로 변론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봤다. 보다 적극적으로 왜 믿어야 하는지를(호교론) 믿음의 내용(신학)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그 믿음의 내용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실천)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드 뤼박은 1930년 '종교의 역사'라는 새로운 교과목을 맡게 돼 타종교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특히 힌두교와 불교에 심취했다. 사실 역사학의 발전은 '종교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는데, 많은 경우 종교의 역사적 탐구는 본연의 학문적 특성 때문에 많은 새로운 사실을 제공했지만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고유성과 새로움을 간과하고 심지어 계시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상대화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종교가 인간의 근본적인 나약성에서 기원한다든가(심리학적 기원론), 사회와 문화의 발전과 함께 원시종교에서 고등종교로 발전해(사회-정치적 기원론) 훗날 없어질 것이라든가, 모든 종교가 근본은 하나라든가(신비주의적 관점) 하는 주장들에 맞서 드 뤼박은 신학자로서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초월성을 역사성 안에서 고려하면서 그 고유성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특히 1950년부터 불교에 대한 그의 심층적 연구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초월적 본성을 더욱 확신하게 했으며, 신비주의에도 관심을 갖게 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 신비사상의 독특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는 데 노력했다. 이와 같이 드 뤼박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어떤 신앙신조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인문학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신학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그리스도교 계시나 역사, 교회의 생활 전체를 일관성 안에서 다시 숙고하는 기초신학적 자세를 정초했다. 곽진상 신부 (수원가톨릭대 교수) cpbc2014.01.21
![[성서주간에 만난 사람] "말씀의 단맛, 써보지 않곤 몰라요"](//cpbc.co.kr/CMS/newspaper/2011/11/rc/395733_1.0_titleImage_1.jpg)
[성서주간에 만난 사람] "말씀의 단맛, 써보지 않곤 몰라요"다섯 번째로 성경 필사 중인 서정희씨 벌써 다섯 번째다. 구약 열왕기 상권 20장 7절을 써내려가는 손가락엔 굳은살이 단단히 박였다. 굳은살이 보기 흉하지 않으냐는 말에 서정희(마리나, 80, 청주교구 부강본당) 할머니는 "어차피 쓰다보면 또 박일텐데 뭘 빼냐"고 눙친다. 하루 일고여덟 시간 투자 "왜 쓰시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처음엔 멋모르고 썼는데, 기도를 드리며 말씀을 쓰다보니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됐다"고 필사 소감을 전한다. 40년간 한복과 이불, 수의를 바느질하느라 잔뼈가 굵은 할머니가 성경 필사에 폭 빠지게 된 것은 지난 2000년이다. 손에서 바느질 일을 내려놓은 뒤 우연히 여고 동창이자 친정 고모인 서옥례(아폴리나, 81)씨가 성경을 필사하는 걸 보고 도전을 느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기노트를 사서 이듬해 1월부터 '죽을 둥 살 둥' 매달렸다. 청주교구 부강본당 서정희 마리나 할머니가 딸 이현주 요세파씨에게 자신이 필사한 성경쓰기노트를 보여주며 정다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밥 먹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잠 자는 것 외엔 오롯이 필사만 했다. 하루 일고여덟 시간은 족히 투자했다. 처음엔 깨알 같은 글씨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속도가 나지 않아 속도 많이 상했다. 그렇지만 쓰다보니 점차 가슴이 벅차 올랐다. 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도 그런 기쁨 속에서 딱 일주일 모자라는 10개월이 걸려 공동번역성서 구약 2430쪽 1215장, 신약 505쪽 258장을 모두 썼다. "침대 위에 상 하나 펴놓고 성경을 올려놓은 뒤 말씀을 한 대목 한 대목씩 새기며 옮길 때가 얼마나 행복한지,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써보시지 않은 분들은 모르실 거예요. 또 하느님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늦게나마 성경을 쓸 수 있게 도전과 용기를 주신 신부님과 수녀님들, 신자분들께도 감사를 드리곤 해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느님 말씀과 함께한 세월이 11년이 다 돼간다. 두 번째 필사는 1년, 세 번째는 3년, 네 번째도 1년이 걸렸다. 그 사이 성경도 공동번역성서에서 새 성경으로 바뀌었다. 한때는 퇴행성관절염으로 수술을 받고 치료하느라 필사가 늦어지기도 했다. 네 번째 필사 뒤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도 필사했다. 필사로 받은 청주교구장과 주임 신부 축복장도 네 개나 되고, 성경(Bible)을 뜻하는 두 영문 알파벳 'BL'이 새겨진 필사기념반지도 받았다. 그렇지만 축복장이나 반지보다 더 기쁜 건 말씀의 단맛을 알게됐다는 것이다. 그 열심에 지난 2007년 선종한 남편 이윤우(요셉)씨도 신약을 1년에 걸쳐 모두 썼다. 신ㆍ구약성경을 필사할 때마다 생기는 필사노트 20권은 자녀들에게 선물하기도 하고, 본당 사제 등에게 선물했다. 할머니의 꿈은 오늘도 성경필사다. "죽을 때까지 남은 여생,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성경필사와 봉사만 하며 하느님과 함께하고 하느님과 더 가까이 살겠다"고 다짐하는 서 할머니의 얼굴엔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 같은 기쁨이 가득하다.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이지혜2011.11.15

'하느님 나라의 복음' 처음 선포된 '생명의 땅'[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10. 갈릴래아이스라엘 생명의 젓줄인 갈릴래아 호수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과 은혜로움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사진은 갈릴래아 호수 전경. 이창훈 기자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23). 예수께서 기쁜 소식 '하늘 나라의 복음'을 처음으로 선포하셨던 생명의 땅 '갈릴래아'. 예수께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가르침과 기적을 이곳 갈릴래아에서 행하셨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군중에게 참행복을 선언하고 여러 비유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다. 병자들을 치유하고 빵의 기적을 행하셨다. 부활하신 다음 사도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셨다. 예수님의 갈릴래아 설교에 대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에 대해 선포하신다. 그 하느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이며 세상과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지금 벌써 행동하시는 하느님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계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정말로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신다. 달리 말하면 그분은 세상의 고삐를 손에 쥐고 계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의 메시지는 매우 간결하다. '하느님은 지금 행동하신다'"(「나자렛 예수」 1권, 111~112쪽 참고). ▨갈릴래아 지방 1세기 유다계 로마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갈릴래아 지방 경계를 동쪽으로 요르단, 서쪽으로 아코와 카르멜산, 남쪽으로 사마리아와 베트셰안, 북쪽으로 비카 지역 일대라고 기록했다. 지금의 이스라엘과 레바논 국경 인근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예수 시대 때 갈릴래아 호숫가 크고 작은 마을은 204개나 됐다. 예수의 주요 활동지로 성경을 통해 잘 알려진 카파르나움, 벳사이다, 겐네사렛, 티베리아스, 막달라, 타브가와 같은 어촌과 산중에 있는 코라진, 쿠르시 등이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던 마을이었다. 1세기 당시 가장 작은 마을도 1500여 명의 주민이 있었다 하니 예수 시대 갈릴래아 지방에는 대략 30여만 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갈릴래아는 원래 구약 가나안 사람 땅이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뒤 즈불룬ㆍ아세르ㆍ납탈리 지파 유다인들이 가나안 사람과 갈릴래아에서 어울려 살았다(판관 1,30-33). 이후 단 지파 유다인들도 갈릴래아에 정착했다. 휴경지가 없을 만큼 비옥한 갈릴래아 지방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로마 등 열강의 지배를 받았다. 이런 이유로 유다인들은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이사 8,23; 마태 4,15)라고 멸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가 이스라엘은 1948년부터 2년에 걸친 시리아와 레바논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갈릴래아 지방 전역을 차지했다. ▨갈릴래아 호수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160여㎞, 나자렛에서 30여㎞ 올라가면 갈릴래아 호수가 나온다. 갈릴래아 호수는 하프 모양의 유다인 전통 악기 '키네레트'를 닮았다 해서 히브리 사람들은 "얌 키네레트"라 불렀다. 이를 로마인들은 '갈릴래아'라 했고, 오늘날 영어로 '갈릴리'라 표현한다. 또 마르코(1,16; 3,7)ㆍ마태오(4,18; 14, 25)는 '갈릴래아 바다'라 하고, 루카는 '겐네사렛 호수'(5,1), 요한은 '갈릴래아 바다''티베리아스 바다'(6,1)를 혼용해 표기하고 있다. 이는 바다와 호수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얌'으로 표기하는 히브리말을 헬라어로 옮기면서 생긴 혼선이다. 지중해 해수면보다 약 212m 낮은 갈릴래아 호수는 남북 길이21㎞, 동서 폭 12㎞, 둘레 52㎞, 넓이 170㎢, 깊이 49m로 호수라기보다 바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풍광도 수려하다. 3~4월이면 야생 양귀비가 호숫가를 주홍색 꽃빛으로 물들이고, 한여름에는 대추야자나무와 수초들이 초록의 싱그러움을 뽐낸다. 가을에는 황금 갈대의 고고함과 겨울에는 북풍의 성난 파고를 잠재우는 햇살의 넉넉함이 순례자들을 여유롭게 한다. 갈릴래아 호숫물은 헤르몬 산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들어온 것으로 요르단 강을 따라 사해로 흘러들어간다. 갈릴래아 호수는 평화로운 주변 풍광과 달리 무척 변덕스럽다. 한낮에는 잔잔하다가도 일교차가 심한 날이나 기온이 내려가는 일몰 때는 풍랑이 거세진다. 호수 북동쪽에 자리잡은 골란고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푄현상을 일으켜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큰 파도를 만들어 낸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랬듯이 주로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숫가를 두루 다니셨다. 배에 올라 앉아 호숫가에 있는 군중들에게 설교하셨고(마태 13,1),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가서 기도하기도 했다(마르 6,32). 또 물 위를 걸으시기도 하고(마태 14, 22-33), 풍랑을 잠재우신 기적도 행하셨다(마르 4,35-41).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 평화방송여행사 협찬 / 02-2266-1591~2 cpbc2013.09.10
![[성경 속 궁금증] (22) 하느님은 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까?](//cpbc.co.kr/CMS/newspaper/2012/02/rc/405203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22) 하느님은 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까?카인의 질투와 살해에 주목해야"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창세 4,1-5).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사는 거부하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카인의 질투가 결국에는 동생인 아벨을 살해하게 만든다. 하느님께서는 왜 카인의 제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을까?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왜 카인의 제물을 거절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그래서 추측만 할 뿐이다. 이 질문에 많은 학자들이 해답을 시도했다. 이 이야기 배경에는 가나안지역의 민족들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더 높이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당시 가나안지역 사람들은 농경문화를 이루며 부유한 경제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목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지역 사람들에 비해 경제적 부를 누리지 못해 열세를 면치 못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신들은 그래도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우월감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성경 원어를 보면 카인이 바친 예물은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바치는 예물이다. 그것은 속죄 제사도, 축제 제사도, 안식일 제사도 아니었다. 본래 속죄 제사 때 바치는 제물은 코르반(korban)이라고 한다. 본문대로 보면 카인은 자신이 수확한 것 중에서 맏배를 바치지 않았던 것이다. 맏배를 바치는 것은 인간이 취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첫 소출을 정성껏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다. 아벨은 카인과 달리 맏배를 정성껏 바쳤고, 그 결과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아들이셨다.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아벨은 예물과 함께 자기 자신을 바쳤던 것으로 묘사된다. 아벨은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물을 기꺼이 굽어보시고,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하느님께서는 장자 특권을 지닌 카인보다 오히려 기득권에서 밀린 아벨에게 더 호의를 보이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굽어보셨다고 해서 카인을 미워하거나 내치신 것은 아니다. 또 하느님께서 한쪽을 선택하셨다고 해서 다른 쪽을 버리신 것도 아니다. 카인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자기 제물을 받아 주시지 않은 것에 화를 내며 죄 없는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죽였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냐가 아니라 미움과 질투, 폭력의 문제다. 이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기본 자세다.퇴사자22012.02.14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9> 마르코(상)](//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5046_1.0_titleImage_1.jpg)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마르코(상)'메시아 비밀' 담고 있는 마르코복음서마르코복음은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전승과 사상을 종합하는 교회일치 신학을 제시했다. 그림은 바티칸 박물관 '지도의 방' 벽면에 그려져 있는 마르코 성인화. 날개 달린 사자는 마르코 성인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전승을 문자로 기록한 최초의 복음으로, 초대교회에 큰 공헌을 했다. 고대교회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 주교 증언에 따르면 복음서를 쓴 마르코는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출신 요한 마르코이다. 그는 예루살렘 가정교회 유지의 아들이었다.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빠져나와 마리아의 집으로 향하는데, 이 마리아가 마르코의 어머니다. 마르코는 당시 국제공용어인 그리스어에 능통해 베드로 사도를 수행하며 그의 설교를 통역했다. 또 바오로 사도의 제1차 전교여행에 동행했기에, 마르코복음서에는 두 사도의 영향이 반영됐다. 때문에 복음서는 두 사도의 전승과 사상을 종합하는 교회일치 신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 의미를 갖는다. 복음서는 주님의 여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사야서와 즈카르야서, 시편 등 구약성경을 인용했다. 그중에서도 이사야서는 복음서의 기본 구조를 이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사야서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돼 본토로 귀환하게 되리라는 예언으로, 폐허에서 일어서야 하는 귀향민에게 희망을 고취했다. 마르코서는 이러한 이사야서의 시대적 배경을 이용해 예수가 선포한 기쁜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틀로 차용한다.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와 바빌론 종살이에서 해방돼 귀환할 때 광야를 거친다(이사 40,3). 마르코복음서 역시 광야를 서두로 삼고 있다. 요한 세례자는 예언서에 나타난 대로(1,2~3)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설교 듣는 이들에게 함께 주님의 길을 마련하도록 촉구한다. 이처럼 광야를 거쳐 주님이 오신다는 점에서 이사야서의 본토 귀환 여정은 마르코복음의 지리적 여정과 일치한다. 또 이사야서는 귀향민에게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신다고 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마르코복음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새 하늘이 열리고, 예수가 광야에서 유혹을 받거나 5000명의 유다인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킬 때 광야가 초원으로 변하며 새 땅이 열리는 것을 보여줬다. 하느님 초대에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이 참여해 기쁨을 나눈다고 한 이사야적 전망 역시 반영돼 있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며 공생활을 시작했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물속에서 나올 때 하늘이 갈라졌다(1,10). 이는 이사야서의 한 대목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63,19)을 암시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과 고통 속에 있는 자신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무엇인가 행동을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예수 세례 때 실현된 것이다. 복음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는 대목에서 예수는 하느님 아들로 선언된다. 구약성경에서 '아들'은 메시아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특히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외아들'(창세 2,22)로 표현된 이사악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이사악이 하느님 말씀에 따라 제헌(祭獻)됐듯 예수 역시 스스로 바쳐져야 한다는 소명이 있음을 암시한다. 복음서는 예수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가 하느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예수 한 명이다. '너는'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계시가 예수에게만 들린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점에서 복음서는 '메시아 비밀'이라고 하는 특유의 주제를 드러낸다. 복음서 곳곳에서 마귀가 예수를 하느님 아들이라는 점을 폭로하려고 하지만 예수는 이를 막는다. 왜 예수의 신원이 비밀로 지켜져야 했는가. 예수는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많은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뛰어난 능력을 드러냈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가 메시아이자 하느님 아들인 것은 놀라운 능력을 통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하느님 아들이라는 근거는 인간적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리셨다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아들이라는 결정적 근거다. 이는 어떠한 인간도 개입하거나 흉내낼 수 없는 하느님만의 역사다. 하느님은 예수를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부활시키고 오른편에 앉게 함으로써 당신과 같은 권능과 권한, 영광으로 이끄셨다. 하느님의 이러한 역사하심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비로소 하느님 아들임을 깨닫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마르코복음서는 '메시아 비밀'이라는 모티브로 구성돼 있다. 이것은 예수의 신원이 단박에 알려질 수 없다는 원초적 사실에 근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를 함부로 고백하기보다는 침묵속에서 그분이 가신 길을 따르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김은아 기자 euna@pbc.co.kr※평화방송 TV 방송시간: 월요일 오전 9시(본방송), 화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목요일 오후 3시, 일요일 저녁 10시퇴사자22013.03.27

'부득이한 경우' 구체적 기준 만들어 주세요서울 공항동본당, 주일미사 참례와 고해성사 의무 등 신자 토론회 전경표 신부가 신자들 의견을 듣고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기도나 선행으로 주일미사 참례 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고 하는데, '부득이한 경우'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주일미사 의무를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고해성사 부담이 덜어져)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이 더 늘어날 것입니다." '주일미사 참례와 고해성사 의무, 주일미사 전례 활성화'를 위한 신자 토론회가 열린 12일 서울 공항동본당 강당. 전경표 주임신부, 김광두 보좌신부를 비롯해 사목위원, 단체장, 구역ㆍ반장 등 1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토론회의 열기는 뜨거웠다. 전 신부가 주일미사에 관한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지침과 이에 대한 주교회의 해석을 소개하고 신자들 의견을 듣는 것으로 토론이 시작됐다. 지침서는 "미사나 공소예절에 참례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묵주기도, 성경 봉독, 선행 등으로 그 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 신자는 "집안에 워낙 행사가 많아 주일미사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고해성사를 봐야 해서 껄끄러운 마음이 있었다"며 "주일미사 참례 의무를 대신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이 있다면 주일미사를 자주 거를 수밖에 없는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신자는 "각자 양심에 따라 정말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미사에 빠졌을 때는 평일미사 참례로 의무를 대신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주일미사에 빠졌는데도 죄의식이 생기고,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으로 신자들 냉담이 많아진다"고 지적했다. 판공(고해)성사에 대한 토론에서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과 "의무를 대신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충훈(도미니코, 34)씨는 "미사참례율, 고해성사 참여율이 낮아진다고 해서 오랫동안 지켜왔던 원칙을 바꾸는 것은 교회의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라며 "그동안 해왔던 대로 원칙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화정(스텔라, 46)씨는 "판공성사의 취지는 좋지만 부활ㆍ성탄 때마다 길게 줄을 서서 짧은 시간에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너무 형식적"이라며 "형식적인 판공성사보다는 1년에 한 번 진지하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으로 판공성사 의무를 대신하자"고 제안했다. 한 신자는 "언제든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면 신자들이 부담을 덜 가질 것"이라며 "본당마다 은퇴 신부님을 모셔서 상설고해소를 운영하면 좀더 많은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사 전례 활성화를 위해서는 "본당에서 전례음악에 신경을 더 썼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cpbc2013.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