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물 협력의 해]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ㆍ평화신문 공동기획- 목마른 하느님 1](//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3372_1.0_titleImage_1.jpg)
[세계 물 협력의 해]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ㆍ평화신문 공동기획- 목마른 하느님 1물은 생명이다 / 가톨릭교회 가르침과 프란치스칸 영성 안에서 바라본 물국내에서 몇 안되는 모래강인 내성천. 사진은 경북 예천군 회룡포마을 전경. 평화신문은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와 함께 새 기획 '목마른 하느님'을 시작한다. 전문가 기고와 현장 취재를 통해 인간 생명의 근원인 물의 소중함과 그 안에 깃든 영성적 가치를 전한다. 유엔(UN)은 세계 각국의 물 부족 상황을 전 지구적 차원의 협력으로 극복하자는 취지로 올해를 '세계 물 협력의 해'로 정했다. <연재 순서> 1. 물은 생명이다 2. 생물학적 관점으로 본 물 3. 물에서 배운다 4. 동양사상에서 바라보는 물 5. 물은 모두의 것이다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승은 물이 인간에게 주는 이로움에 관해 가르침을 준다. 물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중요한 실제 순간과 상징적 순간에 함께한다. 구약 예언자들은 영적인 물과 지상의 물이 함께 흘렀던 한 장소를 영적 상징으로 여겨 지상의 물을 사용해 마음속에 그렸다. 이사야는 "내가 목마른 땅에 물을, 메마른 곳에 시냇물을 부어 주리라. 너희 후손들에게 나의 영을,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주리라"(이사 44,3), 그리고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이사 55,1)하고 선포한다. 에제키엘(47,1-12 참조)은 성전 밑에서 솟아올라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둑을 따라 흐르는 강이 되는 물을 봤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 47,9).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의 흐르는 물로 세례를 받으셨다(마르 1,9).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하고 외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가하고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수를 주신다(요한 4,4-15).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상징적 의미로 가득하다. 돌아가실 때에 이르자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요한 19,31-37). 우리 영혼을 위해 예수님이 주신 생명수와 우리 몸을 위해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주어진 살아 있는 물은 하나는 자연적인 것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초자연적인 것을 위한 것이다. 둘 다 생명을 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그리스도 전통에서 중요한 상징이다. 물이 없으면 모든 것이 죽는다. 물은 모든 생명체가 그것을 통해 생겨나고 존재하고 번성하는 기본 요소다. 물은 지구의 활력소이면서 40억 년간 진화해왔다. 또 정교하고 복잡하게 균형 잡힌 순환계를 유지시킨다. 공동선에 기여할 뿐 아니라 공동선의 일부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신선한 물 자원은 유한하며, 이제는 공공재화가 아니라 상품이 되고 있다. 현재 안전한 식수 부족은 10억이 넘는 사람들 복지를 위협한다. 또 24억 명이 적절한 위생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 가난한 나라의 도시 빈민들은 같은 도시의 중상류층보다 4~100배나 더 많은 물값을 지불해야 한다. 빈민들에게 물이 '생존권 문제'가 되고 있다. 본성상 물은 상품 가운데 하나로 취급돼서는 안 되며, 합리적이며 공동으로 사용해야 한다. 물은 공공의 선이기에 물 분배는 전통적으로 공공기관 책임에 속한다. 물 분배를 민간영역에 맡기더라도 물은 계속 공공의 선으로 간주해야 한다. 물에 대한 권리는 모든 인간 권리와 마찬가지로 인간 존엄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물을 경제적 효용 가치로만 여기는 단순한 양적 평가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 물이 없으면 생명은 위협받는다. 그러므로 안전한 식수에 대한 권리는 보편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쓰임 많고 값진 물을 통해 하느님을 찬미했다. 쓰임이 많은 것은 인류는 물론 모든 생명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생명을 기르고 자라게 하는 물 만큼 쓰임이 많은 것은 없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뜻에 따라 생명을 기르기에 값진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뜻에 맞갖게 자신의 쓰임과 값을 살아가는 것을 가난(무소유)이라고 가르치셨다. 물질적 결핍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갖게 쓰이고 값을 내는 것이다. 물을 더 쓰임 많고 값지게 사용하는 것은 모든 생명을 위한 공공의 선을 지향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3년 사순 담화에서 예수님께서 물과 목마름을 자주 언급하시며 성서적 측면을 말씀하셨다. 때로는 인간 활동이 불모지를 만들고 수질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된다. 당장 이를 그만둬야 한다. 해결책은 이러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돕는 기관들의 헌신적 지원과 협력에서 찾을 수 있다. 김정훈 신부(작은형제회, 주교회의 환경소위 위원) cpbc2013.03.12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9>칼 라너(하)](//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2615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칼 라너(하)자신의 한계 넘어 하느님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고찰칼 라너는 시대가 제가하는 문제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중심의 신학으로 초월론적 방법론을 펼치며 현대 신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라너는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때때로 그러한 질문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부하는 민감한 것이기도 했지만 라너는 이러한 도전을 피하지 않았다. 1968년에 반포된 윤리 회칙 「인간 생명」은 인공피임을 단죄했다. 라너는 교도권 입장을 존중했지만, 회칙이 개인의 양심적 결정을 더 존중했어야 한다고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그렇다고 그가 자유로운 성문화와 피임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성문화에 대한 회칙의 강경한 입장은 정당한 것이라고 보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돼 심각한 문제였던 사제 독신제에 관해서도 라너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라너는 사제 독신제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신제를 없애면 사제직이 속물적이게 되는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론상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사제 독신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엔 강하게 반대했다. 진지한 실천 없이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려는 싸구려 성향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의 눈엔 사제 독신제를 폐지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라너는 오히려 독신제를 '십자가의 우둔함'이라고 표현하며 옹호했다. 1970년 교황의 무류권 문제를 제기한 한스 큉(1928~ )을 향해 라너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큉은 계시된 진리와 이 진리를 교의적인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다. 인간 개념으로 규정된 것은 언제나 왜곡이 일어나기에 계시 진리를 온전히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교의적인 문장은 계시 진리라고 할 수 없기에 절대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나아가 교회 가르침을 보호하고 때론 교리를 선포하는 교황에겐 신앙에 대한 무오류성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미 인간의 사고로 개념화되는 순간 계시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교황이 정한 교의를 신자에게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신자들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했다. 라너는 이러한 큉의 주장을 위험하게 여겼다. 큉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업적 즉, 하느님의 강생은 신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생이 신자들에게 의미를 준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의 이해 방식과 능력에 상응해 이뤄진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라너는 진리에 대한 결정은 언제나 개념이나 문장을 통해 정리돼야 한다고 보았다. 교회가 하느님의 계시 진리를 이해하고 있고 그것을 참되게 전달할 수 있다는 데 반대한다면, 즉 하느님의 구원 진리에 대한 교회의 인식과 전달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모든 인간에게 향하는 하느님 계시가 의미 없고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류성의 거부는 결국 성경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오류 없이 하느님 말씀을 인지하고 바르게 기록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기록한 성경이 계시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물론 언어를 통한 개념적 정리가 진리의 심연을 다 열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라너는 하느님의 계시 진리가 인간의 이해 능력을 멀리 뛰어넘어서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칼 라너 신학의 핵심은 초월론적 방법론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인간의 정신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을 추구하는 초월 행위를 숙고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라너는 경험되는 구체적 사물 또는 사건을 뛰어넘어 그 사건과 사물이 존재 가능하도록 하는 전제인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을 고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의 출발점은 인간에 대한 이해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 내의 정신'이다. 세계 내에서 정신적 존재로 자신을 성취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그 안에서 타인들과 '함께 하는 존재'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제한성을 벗어나 궁극적인 존재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자이며 참된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묻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자기 스스로에서 오지 않고 타자로부터 선사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 한계를 넘어선 무한한 그 어떤 존재, 세상의 모든 존재를 허락하는 알 수 없는 어떠한 절대자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분이 곧 하느님이다. 모든 존재자에게 그 존재를 허락하고 빛을 비추는 최종 근거, 즉 하느님은 인간에게 무한한 현실이자 무한한 지평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은 현실이지만 무한하기에 인간에게는 신비로 다가온다. 절대자 하느님은 무한한 존재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의 인식능력에 상응해 진리의 빛을 비추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해부하듯이 사물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느님의 무한한 현실은 인간에겐 신비로운 존재이자 그 심연을 알 수 없는 존재다.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은 인간의 궁극적 질문조차도 삼켜버리는 어두운 심연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하느님 존재는 결국 모든 존재자들의 의미를 부여하는 무한의 현실이고 세계와 인간의 궁극적 기원이 되는 절대적 신비인 것이다. 칼 라너의 신학은 가톨릭교회의 전통 신학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신학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제기되는 질문에 새로운 답을 내놓으려 했다. 그는 교회의 권위적 방법론을 탈피하고 '아래에서 위로'라는 인간중심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의 인간 이해의 핵심은 하느님을 찾아 자신을 끊임없이 초월하는 인간이다. 이를 위해 라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과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의 통합을 시도한 요셉 마레샬의 철학을 수용했다. 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인간 이해를 제공한 마틴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을 수용하기도 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질문은 구체적으로 현시점을 살아가는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히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현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제한돼 있음에도 무한한 현실인 하느님에 대해 무한히 개방된 존재다. 인간은 무한한 신비인 하느님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해 나아간다. 이러한 가운데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지며 더욱 책임 있는 존재로 성장한다. 인간은 무한한 현실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가졌고, 역사 내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인간은 자신이 사는 세상을 하느님의 사랑에 상응해 구성하도록 노력한다. 1984년 초 칼 라너는 매우 바쁜 시기를 보냈다. 2월 11~12일 프라이부르크대교구 가톨릭 학술원에서 '하느님의 신비 앞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주제로 강연했고, 며칠 지난 2월 17일 런던에서 강연한 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와 대화'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것이 라너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었다. 2월 22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한 그는 3월 5일 인스브루크 공동체에서 생일 축하연을 가졌다. 그 이후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을 일으켜 코피를 흘렸다. 3월 9일 입원한 그는 중간에 회복하는 듯 했지만 상태가 악화돼 3월 30일 밤 11시 26분에 선종했다. 그는 4월 4일 인스브루크 예수회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연구는 근대주의 개념을 긍정적으로 수용해 근대주의 도전을 극복하려 한 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자신의 신학으로 인간을 강조함으로써 현대 신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그는 인격의 세 가지 특징을 잘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는 '본연성', 자신의 주인이 되는 '주체성', 그리고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되지 못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독자성'이 그것이다. 물론 라너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격적인 하느님의 무한성과 독자성 그리고 주체성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제한적이라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라너의 신학적 기획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라너는 자신의 신학을 통해 인간의 인간됨을 영성적이자 체계적으로 그리고 사목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행했다. 그에게 인간은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그리고 절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면에서 주체적인 존재다. 그리고 인간이 주체적인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규성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퇴사자22013.07.09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주님의 종, 로마노 과르디니(하)](//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054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주님의 종, 로마노 과르디니(하)근대 문명의 한계,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통찰하다퀵보른 청년운동의 중심이었던 로텐펠스성에 모인 청년들. #예수 그리스도, 과르디니의 신앙과 신학의 중심 과르디니의 '가톨릭 세계관' 강좌는 그가 처음 시도한 강의라 수업을 하면서 완성해 가야 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그가 교수 취임강연에서 분명하게 밝혔듯, 그의 사상 중심에는 구체적 역사의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세상을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세상과 거리가 필요한데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아닌 근본적인 거리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거리는 세상과 다른 존재, 세상을 초월한 존재만이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존재는 세상에 대한 거리를 확보해 줘야 할 뿐 아니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세상의 가치를 확인시켜 주고 세상을 온전히 채워줄 수도 있어야 한다. 과르디니에게 이 존재는 강생을 통해 세상 일부가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는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신앙으로 예수에게 다가가고, 그의 관점을 나의 관점으로 공유해야 한다. 그의 이러한 견해를 이해하면 그가 전 생애에 걸쳐 강의나 강론을 통해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내려 노력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과르디니는 다른 강의 외에 신약성경에 관한 강의도 병행했다. 문학작품을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역사비판학적 방법론의 도움 없이 성경을 하느님 말씀으로 읽고 이해하려 했다. 그는 베를린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노년 시절 뮌헨에서까지도 늘 젊은이들을 상대로 정기적으로 강론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기쁜 일로 여겼다.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고 또한 그가 가장 아끼던 작품 중 하나인 「주님」(Der Her, 남현욱ㆍ박재순 역/바오로딸)은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슐뤼터가에 있는 베네딕토경당에서 매주 했던 강론을 모아 엮은 책이다. 예수의 유년시절 기록부터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주님 모습을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로 나눠 구분하지 않고, 묵상을 통해 독자들 마음 안에 주님을 생생하게 현재화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세상과 관계에 대한 충분한 신학적 바탕을 갖추고 있지 않았기에 과르디니는 이를 보완한 「신약성서 속에서의 그리스도상」(김몽은 역/신태양사 세계기독교사상전집9)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상(像)이 개개인 안에 생생하고 힘차게 살아 있는가, 아니면 낡고 무기력하게 있는가에 따라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것이 좌우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상을 더욱 생생하게 밝히려는 그의 노력은 「주님의 인간적 실제」, 「바오로와 요한 문헌들 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상」 발간으로 이어졌다. 또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는 그리스도교 본질은 특정한 진리 체계나 삶의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 예수의 구체적인 삶과 활동 그리고 운명, 다시 말해서 예수라는 역사의 인물에 있다고 단언한다. 구체적인 역사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을 함께하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리스도교적인 존재와 행위, 가르침 등 모든 것을 규정하는 범주다. 과르디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학문적 접근과 함께 일상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주님과 가까워지고 그분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교회 공동체가 지키는 규범적 전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신자들 감성과 느낌 그리고 개인 사정이 결합돼 있는 일상 기도와 신심생활을 돕기 위한 책들도 저술했다. 「우리 주 구세주의 십자가길」, 「주님의 어머니」, 「사랑스런 우리 어머니의 묵주기도」 그리고 「주님의 해」 등은 십자가의 길 또는 묵주기도를 통해 주님 삶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데 도움을 주는 저서들이다. 특히 「주님의 해」에서는 전례력 전체를 관통해 매 주일의 주제를 다섯 개씩 만들어 묵주기도와 연결하는 실험적 제안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빛의 신비를 추가해 주님 일생을 묵상할 수 있도록 한 일과 일맥상통한다. #베를린을 떠나는 50대 과르디니 과르디니 강의는 1933년경부터 나치 정권의 감시를 받았고 결국 1939년 폐지됐다. 대학교수로서 활동은 금지됐고 퀵보른 청년운동의 중심이었던 로텐펠스성이 몰수됐다. 과르디니는 이 강제 휴직 기간 동안 강의 부담에서 벗어나 얼마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미뤄뒀던 원고를 정리해 여러 책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베를린에 있을 수 없게 되자, 1943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오스하우센에 있던 60년 지기 동창 신부 요셉 바이거의 사제관으로 숙소를 옮겼다. 이 시기에 그는 국가사회주의의 이면과 해악을 밝히는 저서 「신화와 계시 그리고 정치에 나오는 구원자」, 자서전적인 기록 「나의 생애에 관한 보고」 등을 저술했다.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조언 전쟁이 끝나고 과르디니는 1945년부터 튀빙겐대에서 '세계관 강의'를 새롭게 시작한다.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곳에서 이제는 그리스도교 세계관 교수로 강의하게 된 것이다. 그의 강의실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과르디니는 1948년 과르디니 개인 이름을 건 세계관 강좌를 맡아달라는 뮌헨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곳에서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전쟁 이후에는 윤리학과 인간학에 관한 강의를 주로 했고, 문화비판과 사회비판적인 저서인 「근대의 종말」(한국어판 제목은 「불안전한 인간과 힘」, 전헌호 역/성바오로), 「힘」, 「윤리학」 등을 저술했다. 기술과 기계 문명의 실체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지나치게 확장된 인류의 힘을 어떻게 제어하고 올바르게 이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이에 대한 조언을 그리스도교 신앙 관점에서 제시했다. 물론 과르디니의 현대문명에 대한 진단과 조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염려는 그의 활동 초기부터 학문적 활동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미 1927년에 출간한 「코모 호숫가에서 보낸 편지」에서 시대 변화에 대한 그의 예리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이탈리아 북부 아름다운 휴양지 코모 호수에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책에서 과르디니는 기계문명으로 인간과 자연이 점점 괴리되어 가는 현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적하며 균형 잡힌 발전을 제안했다. 빠른 경제 성장과 IT 강국 급부상 등으로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황폐해지는 현실을 걱정하는 우리에게도 현대의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염려와 조언은 아직도 그 현실성을 잃지 않고 있다. 현대문명의 위험성에 대한 그의 경고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조언들이 1972년 로마클럽이 발표한 환경보고서 '성장의 한계'보다 거의 50년 앞서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예언자적 통찰력을 짐작하게 한다. #마지막 말 생애 마지막 10여 년은 교회 안팎에서 인정해준 명예와 육체적 고통이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 그는 1952년 독일서적협회에서 평화상을 받았고, 교회에서는 몬시뇰 칭호를 받는 명예를 얻었다. 1961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고 1962년에는 브뤼셀에서 에라스무스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70세가 되던 해인 1955년 네지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얻은 신경통은 그의 인생 후반부를 늘 따라다녔다. 질병과 노령에도 불구하고 저술 활동은 계속했지만, 1962년 대학교수직을 내려 놓았다. 그의 강좌는 칼 라너(Karl Rahner)가 이어받았다. 1968년 8월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고향에 다녀온 그해 10월 1일 83세를 일기로 뮌헨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과르디니는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꿨던 꿈 이야기를 전해준다. 꿈에서 그는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말'(word)을 받고 태어난다는 메시지를 듣는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푸는 비밀번호와도 같은 말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은 이 말의 결과이고, 이 말은 세월과 함께 점점 뚜렷해지고 그 의미가 채워진다. 중요한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에 동의하며 살아야 하고, 언젠가는 이를 근거로 각자의 삶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주님을 받들어 모시며 한평생을 살았던 과르디니는 자신의 묘석에 다음의 '말'을 부탁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분의 자애로운 심판을 믿으며."김영국 신부(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퇴사자22013.06.18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주님의 종, 로마노 과르디니(하)](//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953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주님의 종, 로마노 과르디니(하)근대 문명의 한계,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통찰하다퀵보른 청년운동의 중심이었던 로텐펠스성에 모인 청년들. #예수 그리스도, 과르디니의 신앙과 신학의 중심 과르디니의 '가톨릭 세계관' 강좌는 그가 처음 시도한 강의라 수업을 하면서 완성해 가야 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그가 교수 취임강연에서 분명하게 밝혔듯, 그의 사상 중심에는 구체적 역사의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세상을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세상과 거리가 필요한데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아닌 근본적인 거리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거리는 세상과 다른 존재, 세상을 초월한 존재만이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존재는 세상에 대한 거리를 확보해 줘야 할 뿐 아니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세상의 가치를 확인시켜 주고 세상을 온전히 채워줄 수도 있어야 한다. 과르디니에게 이 존재는 강생을 통해 세상 일부가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는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신앙으로 예수에게 다가가고, 그의 관점을 나의 관점으로 공유해야 한다. 그의 이러한 견해를 이해하면 그가 전 생애에 걸쳐 강의나 강론을 통해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내려 노력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과르디니는 다른 강의 외에 신약성경에 관한 강의도 병행했다. 문학작품을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역사비판학적 방법론의 도움 없이 성경을 하느님 말씀으로 읽고 이해하려 했다. 그는 베를린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노년 시절 뮌헨에서까지도 늘 젊은이들을 상대로 정기적으로 강론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기쁜 일로 여겼다.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고 또한 그가 가장 아끼던 작품 중 하나인 「주님」(Der Her, 남현욱ㆍ박재순 역/바오로딸)은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슐뤼터가에 있는 베네딕토경당에서 매주 했던 강론을 모아 엮은 책이다. 예수의 유년시절 기록부터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주님 모습을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로 나눠 구분하지 않고, 묵상을 통해 독자들 마음 안에 주님을 생생하게 현재화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세상과 관계에 대한 충분한 신학적 바탕을 갖추고 있지 않았기에 과르디니는 이를 보완한 「신약성서 속에서의 그리스도상」(김몽은 역/신태양사 세계기독교사상전집9)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상(像)이 개개인 안에 생생하고 힘차게 살아 있는가, 아니면 낡고 무기력하게 있는가에 따라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것이 좌우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상을 더욱 생생하게 밝히려는 그의 노력은 「주님의 인간적 실제」, 「바오로와 요한 문헌들 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상」 발간으로 이어졌다. 또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는 그리스도교 본질은 특정한 진리 체계나 삶의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 예수의 구체적인 삶과 활동 그리고 운명, 다시 말해서 예수라는 역사의 인물에 있다고 단언한다. 구체적인 역사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을 함께하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리스도교적인 존재와 행위, 가르침 등 모든 것을 규정하는 범주다. 과르디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학문적 접근과 함께 일상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주님과 가까워지고 그분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교회 공동체가 지키는 규범적 전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신자들 감성과 느낌 그리고 개인 사정이 결합돼 있는 일상 기도와 신심생활을 돕기 위한 책들도 저술했다. 「우리 주 구세주의 십자가길」, 「주님의 어머니」, 「사랑스런 우리 어머니의 묵주기도」 그리고 「주님의 해」 등은 십자가의 길 또는 묵주기도를 통해 주님 삶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데 도움을 주는 저서들이다. 특히 「주님의 해」에서는 전례력 전체를 관통해 매 주일의 주제를 다섯 개씩 만들어 묵주기도와 연결하는 실험적 제안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빛의 신비를 추가해 주님 일생을 묵상할 수 있도록 한 일과 일맥상통한다. #베를린을 떠나는 50대 과르디니 과르디니 강의는 1933년경부터 나치 정권의 감시를 받았고 결국 1939년 폐지됐다. 대학교수로서 활동은 금지됐고 퀵보른 청년운동의 중심이었던 로텐펠스성이 몰수됐다. 과르디니는 이 강제 휴직 기간 동안 강의 부담에서 벗어나 얼마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미뤄뒀던 원고를 정리해 여러 책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베를린에 있을 수 없게 되자, 1943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오스하우센에 있던 60년 지기 동창 신부 요셉 바이거의 사제관으로 숙소를 옮겼다. 이 시기에 그는 국가사회주의의 이면과 해악을 밝히는 저서 「신화와 계시 그리고 정치에 나오는 구원자」, 자서전적인 기록 「나의 생애에 관한 보고」 등을 저술했다.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조언 전쟁이 끝나고 과르디니는 1945년부터 튀빙겐대에서 '세계관 강의'를 새롭게 시작한다.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곳에서 이제는 그리스도교 세계관 교수로 강의하게 된 것이다. 그의 강의실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과르디니는 1948년 과르디니 개인 이름을 건 세계관 강좌를 맡아달라는 뮌헨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곳에서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전쟁 이후에는 윤리학과 인간학에 관한 강의를 주로 했고, 문화비판과 사회비판적인 저서인 「근대의 종말」(한국어판 제목은 「불안전한 인간과 힘」, 전헌호 역/성바오로), 「힘」, 「윤리학」 등을 저술했다. 기술과 기계 문명의 실체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지나치게 확장된 인류의 힘을 어떻게 제어하고 올바르게 이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이에 대한 조언을 그리스도교 신앙 관점에서 제시했다. 물론 과르디니의 현대문명에 대한 진단과 조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염려는 그의 활동 초기부터 학문적 활동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미 1927년에 출간한 「코모 호숫가에서 보낸 편지」에서 시대 변화에 대한 그의 예리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이탈리아 북부 아름다운 휴양지 코모 호수에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책에서 과르디니는 기계문명으로 인간과 자연이 점점 괴리되어 가는 현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적하며 균형 잡힌 발전을 제안했다. 빠른 경제 성장과 IT 강국 급부상 등으로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황폐해지는 현실을 걱정하는 우리에게도 현대의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염려와 조언은 아직도 그 현실성을 잃지 않고 있다. 현대문명의 위험성에 대한 그의 경고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조언들이 1972년 로마클럽이 발표한 환경보고서 '성장의 한계'보다 거의 50년 앞서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예언자적 통찰력을 짐작하게 한다. #마지막 말 생애 마지막 10여 년은 교회 안팎에서 인정해준 명예와 육체적 고통이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 그는 1952년 독일서적협회에서 평화상을 받았고, 교회에서는 몬시뇰 칭호를 받는 명예를 얻었다. 1961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고 1962년에는 브뤼셀에서 에라스무스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70세가 되던 해인 1955년 네지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얻은 신경통은 그의 인생 후반부를 늘 따라다녔다. 질병과 노령에도 불구하고 저술 활동은 계속했지만, 1962년 대학교수직을 내려 놓았다. 그의 강좌는 칼 라너(Karl Rahner)가 이어받았다. 1968년 8월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고향에 다녀온 그해 10월 1일 83세를 일기로 뮌헨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과르디니는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꿨던 꿈 이야기를 전해준다. 꿈에서 그는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말'(word)을 받고 태어난다는 메시지를 듣는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푸는 비밀번호와도 같은 말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은 이 말의 결과이고, 이 말은 세월과 함께 점점 뚜렷해지고 그 의미가 채워진다. 중요한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에 동의하며 살아야 하고, 언젠가는 이를 근거로 각자의 삶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주님을 받들어 모시며 한평생을 살았던 과르디니는 자신의 묘석에 다음의 '말'을 부탁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분의 자애로운 심판을 믿으며."김영국 신부(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퇴사자22013.06.18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7> 고의적 살인, 하느님 공경하는 행위](//cpbc.co.kr/CMS/newspaper/2013/06/rc/460185_1.1_titleImage_1.jpg)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고의적 살인, 하느님 공경하는 행위살인의 기원은 '분노와 시기'... 죄인의 죽음보다 회개가 중요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시작하며 사기꾼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경찰이요? 물론 그렇겠지만, 모든 사람이 부정직해진 세상이 아닐까요? 살인을 밥 먹듯 하는 살인마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요? 역설적으로, 살인 전문가에게 자신이 살인당할 일인가 봅니다. 정남규(40세)가 구치소 안에서 자진(自盡)했다는 3년 전 기사를 보고는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 사형을 집행하라는 여당 의원들의 요구가 일었고 연말이 다가오자 불안감을 못 이겼던 것 같다고 합니다. 자그마치 13명의 부녀자를 살해한 간 큰 살인마조차도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살인행위', 그 실체가 궁금해집니다. ♂♀생명봉사자 : 신부님, 죄송하지만… 죽어 마땅한 사람은 죽어야 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당연하지요. 하지만 누가 죽어 마땅한 사람인지, 그리고 누가 죽일 수 있는지의 문제가 또 남습니다. 성 암브로시오에 의하면, "죄인을 죽이기보다는 바로잡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살인이 또 다른 살인행위를 통해서 처벌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9항 §3). 예고드린 대로 회칙 본론인 제1장으로 들어가 '인간 폭력의 기원'에 대해 신학적 숙고를 해봅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먼저 생명의 세상에서 죽음의 기원이 '악마의 시기'(7항)라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분노와 시기'가 작동해 살인행위가 이어진다는 것을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맥을 같이해 설명하십니다(8항). ♂♀생명봉사자 : 왜 카인을 차별하셔서 '분노와 시기'를 촉발시키셨을까요? 인류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피할 수 없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카인의 봉헌보다 아벨의 봉헌을 반기셨는지 성경은 설명하지 않는다"고 일부러 지적하시는 것을 보면, 교황님께서도 아쉬움을 느끼셨나 봅니다. 필자의 속마음도 무척 아쉽습니다. 필자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첫 부모의 타락으로 죽음이 인간성 안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인간성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손해 등에 대한 '과장된 피해망상'이 심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인간 각자의 정성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당연히 하느님께서 더 반기실 수도 덜 반기실 수도 있겠지요. 문제는 덜 반겨진 인간이 더 반겨진 인간과 동일한 대우를 기대하도록 '악마의 속임수'가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인간의 완전한 친교를 향한 '악마의 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떡도 아닌데 먼저 김칫국물부터 마시도록 착각하게 합니다. 정성이 적으면 적게 얻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차별로 인식하도록, 자기 몫도 아닌데 손해보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그래서 분노를 일으키도록 만듭니다. 정성이 적어서 덜 반가운 카인이지만 그래도 그와의 '대화를 단절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조차도 의심하게 해 하느님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도록 합니다. 이간질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시기와 속임수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마침내 인류 최초로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였습니다"(창세 4,8; 7항 참조). 교황님께서는 이 가족살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살인행위가 인류의 '영적 친족관계에 대한 침해'(8항 §3)라고 하시며, 생명의 원천인 피를 흘리게 하는 고의적 살인이 "하느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9항 §1)이라고 규정하십니다. 그래서 살인자 카인조차도 살해당하지 않도록 "표를 찍어주셨음"(창세 4,15)을 잊지 않고 애써 강조하십니다(9항 §3). 마치며 전 세계 197개국 가운데 미국과 대부분 개발도상국인 57개국만이 사형을 집행한다는데 우리나라는 다행히 10년 이상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의 사형제 폐지국가'랍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노골적인 사형집행보다도 생명의 초기와 마지막 단계에 대한 위협입니다. 이것은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이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교육분과장, 가톨릭대 윤리신학 교수)cpbc2013.06.25
![[출판]예수님은 초능력을 갖고 계섰을까? 궁금하면~](//cpbc.co.kr/CMS/newspaper/2012/11/rc/431229_1.0_titleImage_1.jpg)
[출판]예수님은 초능력을 갖고 계섰을까? 궁금하면~가톨릭출판사, 신앙의 해 맞아 청소년 교육도서 출간 예수님 궁금증 62가지(샤를 델레 글/에릭 퓌바레, 플로랑스 방데르마를리에르 그림/고선일 옮김/가톨릭출판사/1만 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선포한 '신앙의 해'를 알차게 보내기 위한 교회 내 움직임이 활발하다. 교구와 본당마다 신앙의 해 관련 행사와 교육 등을 마련하며 신자들이 하느님을 새롭게 체험하고, 신앙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깨닫도록 이끌고 있다. 하지만 정작 교회 미래인 청소년을 위한 신앙의 해 맞춤 교육이나 프로그램을 찾아보긴 어렵다. 이에 가톨릭출판사(사장 홍성학 신부)는 신앙의 해를 맞아 청소년 교육도서로 「예수님 궁금증 62가지」를 펴냈다. 가장 예민하고 혼란스러운 사춘기 시절, 신앙의 참맛을 느끼지 못해 교회를 떠나는 청소년을 위해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서다. 책은 복음서를 토대로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예수에 관한 궁금증을 명확하고 또 친절하게 해결해 준다. 이와 함께 각 질문에 삽화를 곁들여 청소년들이 흥미를 갖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가톨릭 청소년 잡지 「사무엘」을 창간한 샤를 델레(예수회) 신부다. 잡지를 만들며 청소년과 교류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청소년들이 예수에 관해 궁금해 하는 질문 62가지를 뽑아냈다. 예수 탄생부터 어린 시절, 외모, 말씀과 행적, 죽음과 부활까지 예수 생애와 관련된 모든 부분을 다뤘다. △예수님은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특별했나요? △예수님은 학교에 다녔나요? 또 읽기와 걸음마, 이런 것들도 배웠나요? △예수님에게 여자 친구도 있었나요? △예수님은 초능력을 갖고 계셨나요? △우리도 죽은 후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수 있나요? 등 다소 엉뚱하지만 청소년들이 실제로 궁금해 하는 부분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여느 아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말하기와 걸음마를 배웠고, 민족의 종교를 익히셨습니다"(예수님은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특별했나요? 중에서).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고쳐 주셨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적'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태도랍니다"(예수님은 초능력을 갖고 계셨나요? 중에서). 델레 신부는 성경을 토대로 질문에 답해주고 있어, 청소년들이 자연스레 성경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아마도 복음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라며 "청소년들이 평소 갖고 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박수정2012.11.13
![[아! 어쩌나?] (177) Q. 이스라엘이란 나라에 대해 궁금합니다](//cpbc.co.kr/CMS/newspaper/2012/11/rc/431918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177) Q. 이스라엘이란 나라에 대해 궁금합니다Q. 이스라엘이란 나라에 대해 궁금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 유독 이스라엘을 편애하고 다른 민족들을 미워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왜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런 사리에 맞지 않는 처사를 하셨는지 늘 마음에 걸립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들은 주님께서 유다인으로 태어나셨으니 우리는 이스라엘을 우리 신앙의 선조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가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축복받은 땅이라서 그곳에 가야 진정한 신앙인이 된다고 강조하는데, 저는 왠지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그분들은 말끝마다 이스라엘을 본받아야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정말 그래야 하나요? A. 형제님 말고도 많은 분이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어서 나름의 대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선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심리 치료적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민이란 하느님께서 선택한 민족이란 개념인데, 이런 생각은 건강한 생각이 아니라 병적 콤플렉스, 그중에서도 우월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개념이라는 게 심리 치료적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우월 콤플렉스는 열등감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잘난척하는 사람을 볼 때가 있지요. 자기 학벌을 자랑한다든가 혹은 자기 외모, 자기가 가진 것 등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우월감을 가진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우월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밑에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열등감이 깔려 있습니다. 그 열등감을 어떻게든 숨기려 하다 보니 역으로 우월감을 갖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선민의식 즉, 하느님께서 자기 민족만을 선택하셨다는 생각은 건강한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일까요? 이스라엘 민족은 중동지역에서 거대 제국이 아니라 늘 떠돌아다니던 유목민 부족이었습니다. 더욱이 주변 제국들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나라 없이 헤맸던 아픈 역사를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족적 열등감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자칫 나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정체성마저 없어질 위기에 처하게 됐는데,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극단적 처방으로 선민의식이라는 신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주님은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고, 모든 이를 당신 품으로 부르길 원하셨다고 말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될 것이다." 이 말씀처럼 선민에 뽑힌 백성이란 개념은 현대에 와서 신약의 관점에서 재해석돼야 합니다. 즉, 이스라엘만이 선민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선민의 대열에 든다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민이란 개념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알아들었다는, 깨달았다는 정신적 차원의 것으로 이해돼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하필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것일까요? 이스라엘을 한 번이라도 순례한 분은 아시겠지만, 이스라엘은 옛날에는 물을 둘러싸고 살육이 벌어진 곳이었고, 현대에 와서는 미국을 비롯한 기독교 국가들이 석유를 둘러싸고 이슬람 국가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곳입니다. 즉, 세계적 갈등의 핵심지역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겉으로는 국가 간 문제 혹은 종교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된 곳으로 비쳐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탐욕, 나누고 상생할 줄 모르는 성향이 문제임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이스라엘에 보내시어 당신 뜻을 알리려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본받으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봐야 할 듯 합니다. 간혹 외국 이스라엘 청년이 자진해서 자기 군대에 입대했다는 미담이 전해져 감동을 주곤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다른 나라에서 살다 난민처럼 밀려나서 이스라엘에 정착한 이들이 많고, 또 불안감과 두려움을 갖고 살면서 돈을 벌면 어떻게든 미국 같은 나라로 이민가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삼천리 금수강산에 사는 형제님이 굳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 발자취, 그분의 흔적을 더듬어 성경 묵상에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순례를 가시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드립니다.홍성남 신부(한국가톨릭상담심리학회 1급 심리상담가, 그루터기영성심리상담센터 담당) cafe.daum.net/withdoban퇴사자22012.11.20
![[가톨릭 문화산책]<41>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9)](//cpbc.co.kr/CMS/newspaper/2013/11/rc/483870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9)피로 얼룩진 얼굴, 못박혀 비틀어진 손발...어린양 위해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사도 2,28) 작품 : 마티스 그뤼네발트 작 '십자가 처형' (이젠하임 제대화 일부, 269×307㎝, 1512~16년, 목판에 유채, 프랑스 알자스 주 콜마르 운터린덴 미술관) ● 고통의 신비 5단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십자가, 생명, 사랑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십자가 처형'을 주제로 한 그림은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십자가 처형' 작품이 일반화하기 시작한 것은 13~14세기께다. 성 프란치스코의 신앙심,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수난에 대한 신비주의적 경향의 문헌이 널리 확산하면서였다. 많은 화가가 예수의 죽음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고통을 초월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우아하기까지 한 예수의 모습부터 예수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격정적으로 묘사한 그림까지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주제로 다룬 그림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고, 오른쪽에는 요한 사도가 배치되곤 한다. 화가 마티스 그뤼네발트(1470?~1528년)는 알사스 지방의 이젠하임에 있는 안토니오 수도회 의뢰로 수도원 소속 병원을 위해 '이젠하임 제대화'를 제작했다. 병자들을 간호하는 사도직 활동을 했던 수도회는 그림을 통해 질병과 고통스러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은총을 병자들에게 심어주려는 목적으로 제대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그래서 제대화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진 고통을 극복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듯이 환자들 역시 병마의 고통을 이겨내리라는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림 '십자가 처형'은 '이젠하임 제대화'의 중앙 패널의 일부다. 그림 중앙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보고 혼비백산한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를 부축하는 요한 사도, 무릎을 꿇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다. 오른쪽에는 요한 세례자가 서 있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병사들이 죄목으로 '유다인의 왕 예수'를 나타내는 라틴어 약자 'IㆍNㆍRㆍI(Iesus Nazarenus Rex Iudaeorum)'가 적혀 있다. #사랑의 징표 :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 황량한 골고타 언덕에서 이뤄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비참한 슬픔으로 재현돼 있다. 예수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끔찍한 고통을 말하고 있다. 말라 비틀린 팔과 다리, 머리 깊숙이 박힌 가시관으로 피로 얼룩진 얼굴, 못에 박혀 비틀린 두 손의 손가락들, 선연한 채찍 자국, 몸의 무게로 찢어질 듯한 겨드랑이, 가시 박힌 몸의 표현 등은 예수가 죽어가는 순간의 고통을 보다 강렬하게 드러낸다. 어찌할 수 없는 처참한 고통에 몸을 비틀다 예수는 막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그뤼네발트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을 통해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림의 전체 구성에서 예수는 다른 주변 인물보다 더 크게 묘사돼 수난의 육체적 고통이 두드러진 '사람의 아들'로 나타난다. 동시에 화가는 예수의 인체를 고통의 흔적과 함께 르네상스 미술의 해부학적 조형성에 맞춰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묘사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육체적 이상미는 경외감과 장엄함을 불러일으켜 예수의 신성을 느끼게 한다. 화가는 십자가에 매달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예수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림의 중심은 죽음의 고통이 아니다. 화가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 예수의 사랑을 표현한다. 예수의 손발과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인류에게 흐르는 사랑의 표징이다. 마치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던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듯이"(창세 2,6-7) 창으로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와(요한 19,34) 세상 모든 사람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성령의 표징과도 같은 예수의 피와 물을 내어주신다.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다"(요한 7,38-39).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어두운 하늘에 황폐한 돌투성이 바닥에 박힌 커다란 십자가 위에 처참하게 매달려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요한 3,16). #한없는 슬픔 :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에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크나큰 슬픔에 젖어 있다. 흰색 옷이 눈에 띄는 성모 마리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의 모습에 넋을 잃은 듯 몸을 가누지 못한다. 비통한 표정의 요한 사도가 성모 마리아를 부축한다. 그림 전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성모 마리아의 흰옷은 순결한 여인의 상징으로,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는 듯 예수의 몸에 흐르는 피땀과 대조를 보인다. 찢긴 아들의 몸을 바라보는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찬 절규는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다. 또한 십자가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예수를 바라보며 비탄에 빠져 있다. 예수의 발치에 있는 것은 향유가 담긴 옥합으로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붓고 회개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상징물이다. #구원과 희생 : 요한 세례자와 어린 양 이 작품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등장하는 인물, 곧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 외에 요한 세례자가 나타난다. 성경에 따르면, 요한 세례자는 예수가 못 박히기 전에 벌써 살로메와 헤로데에게 처형당했다. 요한 세례자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에게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줌으로써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그뤼네발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 요한 세례자를 왜 등장시킨 것일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에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비통해하는 모습과는 달리 요한 세례자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 표정이다. 그는 단지 자신의 검지를 들어 예수를, 엄지는 그의 발아래에 어린양을 가리키고 있다. 요한 세례자의 팔 윗부분 배경에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성구가 쓰여 있다. 예수가 구세주로서 오셨다는 것을 증명하며, 우리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도록 인도한다. 요한 세례자의 등장은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성작에 피를 쏟는 어린양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희생으로 한 몸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요한 세례자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신 예수가 하느님께 피의 제물로 바쳐진 구세주임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예수는 인류가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어린양이다.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물은 인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묘약'이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윤인복 교수(아기예수의 데레사,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cpbc2013.11.19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7>가난에 영적 가난이 따로 있는 것일까](//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4085_1.0_titleImage_1.jpg)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가난에 영적 가난이 따로 있는 것일까현실 외면한 영적 가난은 위험 우리는 연중시기를 보내며 요즘 주일미사 때, 루카복음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복음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가 않다. 복음 말씀이 지나치게 부와 가난을 이분법적으로 대립ㆍ대조시키며 평가에 대한 선택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루카복음은 다른 복음에는 없는 예수님의 출생 배경과 유년시기를 다룬다.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압권은 '마리아'다. 그 마리아가 부른 노래는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아기를 가진 여인이 부른 노래치고는 너무나 무겁다. 통치자와 부유한 사람이 들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이다. 통신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었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또 어떤가? 바로 성경(이사 61,1-2)을 인용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 말씀에서 아무리 (좁은 의미의) 영적ㆍ종교적 메시지를 찾으려 해도 비껴갈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는 당대의 보통 유다인들이 그렇게 철학적이며 영적이며 종교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 가난하고 배고프며 식민 지배를 받으며 고통을 겪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식민지 동족을 아끼고 사랑해 헌신하려는 이들에게도 당신 뜻을 분명히 전한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마리아의 노래도, 예수님의 말씀도 루카복음은 구원과 해방이 아무리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해도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그것을 배제한, 혹은 그 고통과 억압을 간단히 초월한 구원이 아님을 보여준다. #복음이 전하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루카복음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그 이유로 복음이 지나치게 이분법적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했다"(루카 6,24-26). 예수님께서 어찌 그렇게 사람을 편 갈라서 한편은 행복하다 하고, 다른 한편은 불행하다고 하실까? 앞에서 인용한 마리아, 자애로우신 어머니 마리아가 어찌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 '통치자','부유한 자'를 그렇게 철저하게 배제할까? 우리는 그 불편함을 모면하기 위해 타협을 시도한다. 바로 영적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 말이다.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쯤으로, 통치자는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쯤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쯤으로, 굶주리는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리는 사람쯤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은 자기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쯤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쯤으로 말이다. 그러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결코 예수님과 마리아가 꾸짖으려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갈망하는 사람이라고 위로 삼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 그러니까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정말로 배고프고, 정말로 잡혀가고, 정말로 앞을 못 보고, 정말로 묶여 갇혀 있고, 정말로 비천한 사람이 늘어간다.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아져 버렸다. 통치자들은 그 교만이 끝이 없고, 부유한 사람들은 그 부를 주체하지 못하는데, 영적 해방 덕분에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우리가 부와 가난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그동안 실제 부와 가난 사이의 불균형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퇴사자22013.07.16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6>반생명적 범죄에 무감각한 사회](//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088_1.0_titleImage_1.jpg)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반생명적 범죄에 무감각한 사회교회, 생명 기본권 억압받는 사람들 대변해 줄 의무 지녀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생명봉사자 : '새롭고 사악한 문화 사조'가 무엇인가요? 이미 서론을 읽으신 분은 벌써 간파하셨겠습니다만, 교황님께서 심각하게 우려하며 지목하시는 새로운 형태의 위협들이 만드는 '문화 사조'는 이렇습니다. 첫째는 각 분야 언로(言路)의 직무 남용으로 형성되는 문화 사조입니다. "개인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반생명적 범죄들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처벌의 면제뿐 아니라 국가의 공인까지" 그리고 "보건 제도의 무료 봉사까지 받아가면서" 그런 범죄들을 "완전히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하려는 사회적 경향 말입니다(4항 §1). 둘째는 반생명적 범죄를 합법화하려는 각국의 경향으로 형성되는 것인데, "헌법의 기본 원칙을 벗어나면서까지… 합법화"하려는 경향을 말합니다(4항 §2). 셋째는 그런 이유로 도덕적 타락을 촉발시키고 양심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만, "범죄라고 만장일치로 내려진 결정과 상식적인 도덕 판단에 의해 거부된 것들이 사회적으로 점차 용인되게 하고"(4항 §2) "그 결과로 양심 자체가 어두워져서 인간 생명의 기본적인 가치에 관한 문제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겪게"(4항 §3) 하는 그런 사조 말입니다. 넷째는 그래서 의료업의 성격마저 일부 왜곡하게 만드는 문화 사조입니다. '그 종사자들의 품위'마저도 떨어지게 하는 그런 사조 말입니다(4항 §2). ♂♀생명봉사자 : 아직 위기감의 실체가 다가오지는 않는데… 뭘 해야 할까요? 아직 서론인지라 구체적 사례들을 다루지 않아서 그렇겠습니다만, 먼저는 "1세기 전에 노동자 계층이 기본권을 억압당하고 있을 때"처럼 "생명의 기본권을 억압당하고 있을 때에 교회는 그와 똑같은 용기로써 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의무"(5항 §3)를 공감해야 하겠습니다. 그것도 그저 이념적 의무로서가 아니라 "연약하고 방어능력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의 생명"의 '불쌍함'에 대한 공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 호소하신 것처럼, "가정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생명의 성역'으로 남게 되기를"(6항 §2), 그리고 "진리와 사랑의 참된 문화를 건설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구체적 방법들은 나중에 제시될 것입니다. 나가며 "…노부부의 사랑과 존엄사를 다룬 프랑스 영화 '아모르'의 여자 주인공을 연상시켰다." 최근 국내 한 유력 주간지가 웰다잉(well-dying)을 위한 죽음 체험 프로그램을 소개하면서 쓴 기사 내용입니다. 작년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라는데, 검색해보니 웬걸, 고통스러워하는 할머니를 지극히 간병하던 할아버지가 마침내 할머니 얼굴을 베개로 눌러 숨 막혀 죽게 한다는 줄거리였습니다. 이제 위기감이 슬슬 잡히십니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상대로 봉사하고 대항해야 하는지 감이 오시는지요. 많은 장면과 대화가 담겨 있겠지만, 그래서 큰 상도 받았겠지만, 그러나 '아모르'(사랑)도 '존엄'도 아닌데, 그저 '배우자 살인극'을 존엄사로 소개하다니….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또 한 번 의노(義怒)하실 일입니다. '새롭고 사악한 문화 사조'의 한 전형이 아닐런지요. 기자의 개인적 무지의 소치인지, 아니면 의도적 혼용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고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작년 12월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제도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으로 이어지는 기사의 의도가 또 '생사람' 잡으려는 건 아닌지, 나도 우리도 '무의미한 인간'으로 내몰려는 것은 아닌지 사뭇 걱정스럽습니다. 다음에는 본론으로서 제1장을 시작하는데 먼저 '인간 폭력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인용되는 성경말씀에 대한 교황님의 예지(叡智)를 감상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입니다. 감사합니다.이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교육분과장 가톨릭대 윤리신학 교수)퇴사자22013.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