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 신약 성경이 틀을 갖추다[저는 믿나이다] (21) 신약 성경이 쓰이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되는 신약 성경이 쓰였다. 귀도 레니 작 ‘성 마태오와 천사’, 유화, 1635~1640년, 바티칸 박물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 제국 곳곳에 전파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되는 책들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그분의 지상 생활과 가르침, 수난과 죽음, 부활, 승천, 세상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주님,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탄생한 교회, 그리스도인의 생활 등을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러한 글을 처음으로 쓴 이가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50년 말에서 51년 초 그리스 코린토에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을 시작으로 자신이 세운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1세기 후반에 이미 네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 성경의 경전 대부분이 헬라어로 쓰였습니다. 신약 성경 정경 가운데 가장 늦게 집필된 경전인 「베드로의 둘째 서간」도 120년께 쓰였습니다. 신약 성경이라 함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새로운 계약을 말합니다. 이 새 계약은 하느님께서 교회와 맺으신 약속입니다. 신약 성경이 계시하는 핵심 주제어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마태 16,16 참조)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이 쓰인 목적도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입니다. 이처럼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생명과 은총·진리 등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고,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으며,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요한 1장 참조) 그래서 교회는 “성경 전체는 단 하나의 책이며, 그 하나의 책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라고 선언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4항)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입니다. 사도 시대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두 가지 방식으로 전했습니다. 하나는 ‘입으로 전승되었고’, 다른 하나는 ‘글’로 기록되었습니다. 입으로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분과 함께한 공동생활에서 받은 것과 성령의 조언에 힘입어 배운 것을 설교와 모범과 제도로써 전달해 주었습니다. 글로는 사도들과 그 직제자들이 성령의 감도로 구원의 소식을 기록하였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76항) 우리는 이를 ‘성전’(聖傳)과 ‘성경’(聖經)이라 합니다. 교회는 성전 안에서 성경을 통해 하느님 계시를 모든 세대에 제대로 전하고 이해하며 그것을 믿고 따르게 이끕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며 ‘살아계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교회의 책’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사도 시대 때부터 성전 안에서 신·구약 성경의 단일성을 천명해왔습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단일성은,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과 그분 계시의 단일성에서 비롯된다.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을 준비하며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을 완성한다. 둘은 서로를 밝혀 주며, 둘 다 참된 하느님의 말씀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40항) 이에 교회는 하느님께서 강생하신 당신 아드님의 인격 안에서 이루신 일들의 예형을 구약의 하느님 업적에서 식별해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으며,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신약 성경 경전 곧 정경 목록화는 2세기 중반부터 시작됩니다. 경전 목록 작업은 「70인역 성경」 곧 헬라어 구약 성경 구조를 토대로 분류되었습니다. 「70인 역 성경」은 △토라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로 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신약 성경은 △복음서 △사도행전 △서간 △요한 묵시록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의 뿌리는 구약의 토라(율법)와 견줄 수 있는 예수님의 네 복음서입니다. 중간에는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인간 역사 안에 실현되는 과정을 다룬 구약의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처럼 신약에선 사도행전과 서간들이 그 몫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계시하는 구약의 예언서처럼 신약의 묵시록은 종말에 그리스도 왕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계시합니다. 교회는 ‘사도 전승’을 기준으로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어느 정도 신약 성경 경전 범위를 잡습니다.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오로 사도의 13개 서한은 이때 경전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한과 가톨릭 서간(야고보 서간, 베드로의 첫째·둘째 서간,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 유다 서간)과 요한 묵시록은 지역 교회별로 다르게 평가되었습니다. 성 다마소 교황은 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처음으로 신약 성경 경전 27권을 선포합니다. 네 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카·요한)와 사도행전, 바오로의 14개 서간(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 포함), 가톨릭 서간 7개, 요한 묵시록이 신약 성경 경전으로 확정됐습니다. 신약 성경 경전은 397년 제3차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재천명됐고, 405년 성 인노첸시오 1세 교황이 재확인했습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5.04.01

김대건 신부 후손이 일군 부안본당, 100년 기린다17일 100주년 기념미사 봉헌 1926년 이기수(가운데) 신부가 부안본당 주임으로 부임하며 찍은 단체사진. 전주교구 부안본당 제공 1800년대 박해를 피해 숨어든 교우촌에서 시작된 부안 천주교의 역사가 한 세기를 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전주교구 부안본당(주임 김정훈 신부) 설립 100주년 기념미사가 17일 오전 10시 30분 교구장 김선태 주교 주례로 봉헌된다. 부안 지역 천주교의 최초 기록은 18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해를 피해 충청도에서 건너온 신자들이 변산 일대에 교우촌을 이뤘고, 최양업 신부와 김대건 신부 일가친척의 만남이 공식적인 출발점이 됐다. 이후 불무동·납티·만석동 등 13개 공소가 부안 각지에 형성됐다. 본당 설립의 핵심 인물은 김대건 신부의 후손 김양배(요한) 회장이다. 그는 하서면 등룡리 갈대밭 2만 4000평을 매입해 교우촌을 개척했고, 1918년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등용리공소 경당이 봉헌됐다. 이후 드망즈 주교는 1926년 5월 30일 이기수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고,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신자 수 500여 명이었다. 1963년 제8대 주임 지정환 신부 송별행사 후 성당 앞에서 본당 신자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전주교구 부안본당 제공 본당은 1935년 부안읍으로 이전하며 지역 중심 본당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4년제 초등학교를 운영하는 등 교육활동에도 힘썼다. 1950년대 들어 신자들은 새 성당 건립이라는 과제를 스스로 떠안았다. 가톨릭 구제회 지원을 받으면서도 각 공소 신자들이 날짜를 정해 성당에 나와 직접 모래와 자갈을 씻고 블록을 찍는 등 노동 봉사로 공사를 이어갔다. 1961년 130평 규모의 성당이 완공됐고, 1963년 현재의 위치(성당길 10)로 이전해 새 성당 봉헌식을 거행했다. 1960년대에는 간척사업을 통해 농지를 마련하고 청호·신복·마포 공소를 신설하는 등 교세가 크게 확장됐다. 1980~1990년대에는 매년 100명 이상 영세자를 배출하는 등 전교 활동이 활기를 띠었다. 신자 수는 1999년 2663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농과 고령화 여파로 2025년 현재 1090명으로 줄었다. 부안본당은 100주년을 맞아 본당 100년사 발간, 사제관과 수녀원 리모델링, 성당 보수 등 시설 정비를 마쳤다. 또 100주년 기도문을 함께 바치며 신자 재교육 특강, 성지순례, 성경쓰기와 성경통독, 묵주기도 봉헌 등도 전개했다. 지난해에는 본당 신학생을 배출하며 새로운 성소의 희망을 밝혔다. 설립 이후 역대 26명의 주임 신부가 사목했으며, 현재는 창북·돈지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박민규2026.05.12

“자연은 하느님 작품”… 가우디의 삶과 건축가우디 서거 100주년 맞아 시복 조사 맡은 신학자가 쓴 전기...방대한 자료·신학적 해설 독보적 스페인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정 대성전) 전경. 레오 14세 교황은 지난 6~12일 스페인 사목 방문 기간 중 144년 만에 완공된 이 성당의 중앙 첨탑 봉헌식을 주례했다. 가톨릭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1852~1926)가 설계했으며, 올해는 그의 서거 100주년이다. OSV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 / 아르만드 푸치 신부 / 송병선 옮김 / 한스미디어 레오 14세 교황이 지난 6~12일 스페인을 사목 방문했다. 방문 기간 중 교황은 바르셀로나 성가정 대성전(바실리카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중앙 첨탑인 ‘예수 그리스도 탑’ 봉헌식을 주례하고, 설계자인 가경자 안토니 가우디(1852~1926) 서거 100주년 장엄 미사를 주례했다. 144년 만에 성가정 대성전이 완공(내부는 미완)된 데다 가우디 서거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다룬 책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은 산 푸시아대학 아테네오(바르셀로나) 신학부 학장 및 총장을 지낸 아르만드 푸치 신부가 쓴 책이다. 가우디의 고향 카탈루냐 레우스 인근 지역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스스로를 가우디가 살았던 땅의 풍경과 신앙, 언어와 감각을 몸으로 알고 있는 연구자라고 말한다. 실제로 성가정 대성전을 장식하는 상징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해온 학자며, 가우디의 시복 절차에 필요한 생애와 신앙, 영적 여정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맡기도 했다. 가우디는 생전에 말과 글을 많이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세속적인 작품과 종교 작품은 대부분 보존되어 있다. 저자는 교회의 공식적인 지원 하에 수집한 방대한 실증 자료, 동시대 기록과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가우디를 종합적으로 복원한다. 특히 그를 단순한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빛과 공간, 재료와 형태를 자신만의 미학으로 다루는 독특하고 유일한 존재’로 바라본다. 가우디는 자연을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작품’으로 보았고, 자신의 건축이 주변 환경과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기를 바랐으며, 자연 속에서 건축의 원리를 발견하려 노력했다. “가우디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아름다움이니, 진리가 없으면 예술도 없다. 그리고 진리를 찾으려면 창조된 존재들을 잘 알아야 한다.’ 가우디는 자연이 하느님의 계시를 보여주는 첫 번째 방식이며, 두 번째는 성경, 곧 성서의 글이라고 여긴다. 자연과 성경 속에서 하느님은 말씀하시고 자신을 드러낸다.”(147쪽) 책은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구엘 공원, 콜로니아 구엘 교회, 마요르카 대성당 복원 작업 등 가우디의 주요 작품을 하나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다. 작품 곳곳에 숨어 있는 십자가와 묵주, 복음서의 상징, 자연과 빛의 의미, 카탈루냐 문화와 건축적 전통까지 세밀하게 추적한다. “가우디는 삼위일체의 신비, 곧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위격에서는 세 분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숫자 ‘3’과 그 배수들, 즉 3×2.5인 7.5, 3×4인 12, 3×3인 9에 2를 곱한 18, 12×2인 24는 대성당 내부와 외부 공간의 치수를 조화롭게 규정한다. 그래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삼위일체에 대한 찬가이다.”(290쪽) 1894년 사순절의 단식과 정신적 위기를 겪은 이후 가우디는 자신의 작품 안에 가톨릭 신앙과 상징을 더욱 깊이 담아내기 시작했다. 말년에는 성가정 대성전 공사에만 전념하다시피 했고, 직접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한 모금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책은 제목대로 가우디의 삶과 일에 대한 방대한 자료와 신학적인 해설이 독보적이다. 다만 모든 이미지가 흑백으로 처리돼 가우디가 담아낸 지중해의 찬란한 색감을 확인할 수 없는 점은 아쉽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6.06.09
![[생활속의 복음] 전능하신 하느님](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5/26/DDc1779786243600.jpg)
[생활속의 복음] 전능하신 하느님 헨리 오사와 태너 작 ‘지붕 위의 그리스도와 니코데모’. 장남에 대한 편애에 불만을 가진 차남이 엄마에게 물었다. ‘아들 맞나요?’ 엄마는 ‘너는 아들이지’라고 답한다. 두 아들의 엄마에게 장남·차남은 더한·덜한 아들로 가를 수 없는 똑같은 아들이다. ‘장남’, ‘차남’, 둘의 연결고리인 ‘형제’는 삼위일체 이해에 유익하다. 장남·차남·형제에 성부·성자·성령을 대입하면, 다음의 진술이 가능하다. ‘장남이 아닌’ 차남·형제가 ‘장남과 똑같이’ 아들인 것처럼, ‘성부가 아닌’ 성자·성령은 ‘성부와 똑같이’ 하느님(주님)이다. 단 아들보다 선재(先在)한 엄마 편에는 복수형 ‘아들들’인 반면, 선재를 구상할 수 없는 ‘창조되지 않은’ 성부·성자·성령은 단수형 ‘하느님’이다. 초대 교회는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삼위일체를 ‘믿을 교리’로 정립하였다. 이 과정 중 두 반론이 등장했다. 하나는 유다교의 경직된 유일신론에 입각한 성자·성령의 신성에 대한 부정이다. 이는 성부가 옷을 바꾸어 입듯이 성자와 성령으로 변형하여 한시적으로 활동했다는 견해와 연계한다. 다른 하나는 신성의 정도로 서열을 매긴 종속 관계다. 이는 다신론 배경의 선교지에서 신성이 공인된 성자·성령이 성부보다 덜한 신성을 가진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그리스 철학 용어를 도입하여 장남·차남·형제처럼 ‘서로 똑같지 않은’ 성부·성자·성령을 ‘위격’으로, 아들처럼 ‘서로 다르지 않은’ 하느님을 ‘실체’로 지칭하였다. 유일신론의 기조(1티모 2,5 참조)를 고수한 신약성경은 성자·성령의 신성을 명백히 진술한다. 성자의 육화로 출현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다.(콜로 2,9 참조) 그리스도는 아버지-하느님을 ‘들려주고’ 아들-하느님을 ‘보여주며’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주듯 영-하느님을 ‘보내준다.’ 성자를 통해 성부로부터 파견된 성령은 하느님이다.(1코린 2,10 참조) 성령은 아버지-하느님을 ‘부르게’ 하고 아들-하느님을 ‘기억하고 고백하게’ 하며 성부와 성자를 증언할 힘을 부여하여 ‘활동하게’ 한다.(사도 1,8 참조) 현대 교회는 삼위일체에 대한 연역적 설명보다 세 위격을 표본으로 교회가 중시하는 공동체성을 해명하는 귀납적 설명을 선호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핵심은 공동체성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력 행사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의 협업·분업 양식이 아니라 세 위격의 ‘사랑에 기초한 자기 비움’(필리 2,7 참조)이 창출한 전능성의 표출 양식이다. 아들에게 권한·책임을 전적으로 맡긴 아버지(요한 3,17 참조)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려고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마태 26,42 참조), ‘아버지와 똑같이’ 영에게 권한·책임을 전적으로 맡긴 아들(요한 15,26 참조)과 ‘아들과 똑같이’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하는 영(티토 3,6 참조)이다. 경청과 소통이란 감투에 숨겨진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 행태, 대화와 친교란 명패에 가려진 ‘꼰대’(훈계·지시) 행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력 행사 방식에 부합될 수 없다. 조직 문화와 서열 구조의 편 가르기, 줄 세우기에 능숙한 이는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왜곡할 수 있다. 삼위일체는 인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경험할 수 없기에 ‘신비’이지 않을까? cpbc2026.05.26
![[제13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찾아서](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3/10/uC21773128300186.jpg)
[제13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찾아서강남년(마리아, 마산교구 금산본당) 구글 제미나이 제작 6년 전 늦은 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항암과 수술 후유증으로 몸이 좋지 않아 산행을 하면서 체력을 회복하려고 했었다. 그날도 산에 올랐다가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해서 서둘러 하산을 하는 중이었다. 우산도 비옷도 없이 서둘러 내려오는 길목에 동네 성당이 보였다. 늘 스쳐 지나가던 건물이었는데, 그날은 팔을 벌리고 누군가를 안아줄 것 같은 높은 벽 앞쪽에 있는 성상의 모습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 손짓 때문이었는지 비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처음으로 성당이라는 곳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사가 한참 진행 중이던 성당 안 2단으로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긴 의자의 맨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보았다. 맨 뒤에 앉으면 아무도 나를 눈치 채지 못할 것 같았다. 이렇게 눈에 띄는 등산복 차림이라도. 강론 중이던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느님은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가 아니라 가장 약해졌을 때 우리를 부르십니다.” 무슨 말씀일까?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이 마음속에 덜컥 떨어져 내려앉았다.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니실 테지. 나는 성당 사람이 아닌데⋯ 나는 여기 안 보이는 구석에 앉아 있는데⋯.’ 신부님의 강론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소탈한 화법에 마음이 편했다. 산행 가는 길목에 있는 그 성당을 나는 매주 들렀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성당에 들어가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미사에 참여한다기보다 그 맨 뒷자리에 앉아 있기 위해 성당에 갔다. 신부님의 강론이 시작되기 전까지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기도하는 방법도 몰랐고 성당 예식과 절차도 몰랐지만, 다른 사람들이 일어서면 따라서 일어서고 앉으면 따라 앉았다. 독서와 강론 시간에 다들 책을 보고 있기에 「매일미사」 책도 따라 사보았다. 앞사람의 등을 유심히 바라보며 “아멘”도 따라 말해보았다. 매번 뒷자리에 앉아 있으니 자릿세라도 내야 할 것 같아서 사람들을 따라서 봉헌금도 내보았다. 어느 날, 나는 여전히 그 긴 의자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한 어르신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성사 보실 건가요?” 그때 처음으로 성사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렇지만 성사가 뭔지 몰라서 나름 정중하게 대답했다. “어르신 먼저 하세요.” 어르신은 내 뒤에 있는 두 개의 문 중 하나를 열고 들어갔고 어르신이 들어가자 그곳의 불이 켜졌다. 너무나도 무지했던 나는 그곳을 화장실로 생각한 채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봤다. 늘 앞만 보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신부님이 그곳을 들어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내가 늘 앉던 그 자리는 신부님께서 미사 전 고해소에 들어가기 전에 앉으시는 자리였고 암묵적으로 신자들이 양보하고 있던 자리였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나는 그곳이 화장실 앞이어서 사람들이 앉지 않는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가끔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분들도 있었지만, 이전 치료에서 한참 무균실 신세를 졌던 기억에 사람들을 조금 피하고 있었다. 선뜻 말을 걸어 주셨던 선한 신자분들에게 나는 벽을 치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성당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때였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느낌만은 어렴풋이 있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매주 독서와 강론을 통해서 말씀을 조금씩 전해 들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65년간 교회와 인연이 없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초보적인 궁금증도 생겨났다. ‘하느님은 정말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시는 분일까?’ 아직 스스로에게도 ‘성당을 다닌다’고 하지 않고 ‘성당에 앉아 있다가 온다’고 하고 있던 나는, 신자분들에게도 신부님께도 말을 걸기가 멋쩍었던 터라 이런 궁금증을 한가득 쌓아가며 성당에 ‘앉아 있으러’ 매번 가고 있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자 본당 신부님께서 조심스럽게 말을 거시며 세례를 받지 않겠느냐고 물으셨다. “세례를 받기 전과 후가 차이가 있나요?” 나의 당돌한 질문에도 신부님께서는 웃으시며 성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몸으로 오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때의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겁이 났다. 당시 나는 병으로 인해 음식 하나도 조심하던 때였고 밀가루 음식은 전혀 먹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밀로 만든 성체는 받아 모실 수 없을 것 같다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엄한 말들이 내 입에서 마구 튀어나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지한 말이었는지 모른다. 거룩한 하느님의 몸을 앞에 두고 그것을 밀가루로만 생각했으니 말이다. 몰라서 한 말이었고, 몰라서 지은 죄였다. 그렇게 세례 이야기는 잠시 멀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성당에 나왔다. 잘 모르면서도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고 싶었다. 그러다 얼마쯤 지나 다시 세례를 권유받았다. 이번에는 확신이 있어서라기보다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비가 오던 날 처음 성당 안으로 나를 불렀던 성상의 하느님 손짓을 참 좋으신 신부님을 통해서 느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세례를 받기로 했다. 강 마리아. 나는 예순여섯에 강 마리아로 다시 태어났다. 세례를 받고 났지만 모든 것이 단번에 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개월이 지나고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성당에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겨우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데 성당을 나갈 수 없는 상황이, 하느님을 뵈러 가는 길이 막히는 상황이 너무 답답하여 신부님께 여쭤봤더니 성경을 읽으라고 권해주셨다. 성경이 곧 하느님이자 가르침과 말씀이라고 하셨다. 사전보다 두꺼운 책, 성경. 나는 왜 성경을 읽을 생각을 못 했던가? 성경을 읽으면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세속적인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었다. 성당에 다니는 지인에게 연락해가며 겨우겨우 1년 만에 1독을 끝낼 수 있었다. 2독으로는 신약을 중심으로 신약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 등을 읽으면서 공부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성경 속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궁금증만 쌓여가고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성경을 완독했는데도 나는 왜 아무것도 모르는가? 이 갈증이 나를 말씀으로 이끌었다. 유튜브를 찾다 보니 가톨릭평화방송을 비롯해 많은 신부님의 강론이 있었고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듣는 날도 많아졌다. 강론을 듣다 보면 자주 같은 말씀이 반복되었다. “성체조배를 해보십시오.” “미사보다 큰 기도는 없습니다.” 그 말이 처음에는 잘 와 닿지 않았는데, 또 한 번 고백하자면 성체조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당 안에 조용히 앉아 있는 시간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성체조배를 시작했다. 잘은 모르지만 감실 앞에 앉아 보기로 한 것이다. 시간은 잘 가지 않았고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밀려들었다. 아픈 몸, 치료 일정, 가족 걱정, 세상 일들이 쉼 없이 떠올랐다. ‘기도가 이렇게 어려운 건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냥 자리를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도 일단 정한 시간만큼은 앉아 있기로 했다. 잘 집중하지 못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해도, 감실 앞에 머무는 것 자체가 좋다고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겨울 내내 하루에 30분씩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이 없는 시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이면 더 조용하지 않을까, 아무도 없는 시간에 혼자 앉아 있으면 덜 산만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새벽에 성당을 가기 시작했다. 새벽 3시, 감실 앞에 앉으면 낮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흘렀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때도 나는 여전히 기도를 잘하지 못했다. 분심은 여전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날도 많았다. 그래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만은 기다려지기 시작했고, 내가 찾고 있던 것이 ‘잘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었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새벽 3시면 성당으로 향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굳은 결심을 한 것도 아니었다. 2시 30분이면 눈이 떠졌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예외는 없었다. 아파서 서울 병원에 가야 하는 날에도 새벽 버스를 타기 전 먼저 성당에 들렀다. 치료 때문에 서울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할 때에도 병원 원목실이나 근처 성당을 찾아 성체 앞에 앉았다. 그 자리에 앉지 않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 것 같았다. 기도를 잘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분심이 많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두 시간을 보내는 날도 있고 아직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그런데 내 삶에 조그만 변화들이 하나둘 스며들기 시작했다. 놀기만 하는 모임은 점점 마음이 가지 않았고, 그렇게 좋아하던 텔레비전도 어느 순간부터 켜지 않게 되었다. 천 원도 아끼던 내가 성당에 필요하다는 말이 들리면 계산하지 않고 내게 되었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옷을 사주고 누군가 아프다 하면 먼저 마음이 쓰였다. 내 안의 성격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아프면 주위에 짜증부터 냈었는데,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떠올리며 참는 횟수가 많아지게 되었고 늘 부정적으로만 보이던 일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나를 설득한 것도 가르친 것도 아닌데, 성체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내 마음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지난 추석, 가족들이 모여 앉아 모두가 보고 싶어 하던 임영웅 콘서트 방송을 보던 날이 있었다. 나도 보고 싶었지만 성경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서 결국 울면서 방으로 들어가 성경을 펼쳤다. 그 일을 두고 아이들은 그렇게 울 정도면 같이 보지 그랬냐고 아직도 나를 놀린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보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성당 안 자매들은 내가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고, 성당 밖 친구들은 내가 예수님께 미쳤다고 했다. 어느 쪽 말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체조배는 나를 특별하게 만들지 않았다. 다만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하느님 앞에 나를 내려놓게 했다. 그 시간이 쌓여 어느덧 5년이 되었고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내가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이었다. 구글 제미나이 제작 어느 날은 성체 앞에 앉아 있다가 복음이 더 이상 나 혼자만의 위로로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하느님을 만나서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었지만, 항암을 받을 때, 수술을 받을 때,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맬 때에도 하느님을 알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뒤늦게 밀려왔다. 내 평생 가장 후회되는 일이 하느님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것이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신 당부가 그때는 유난히 또렷하게 마음에 남았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셨는데 그 땅끝이 꼭 먼 곳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가장 가까운 자리, 가족과 오랜 친구들, 신앙에서 멀어져 있던 이들부터가 내가 서 있는 땅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설득하기보다 먼저 그들 곁에서 살아내는 쪽을 택했다. 복음은 말보다 삶으로 먼저 건네질 수 있다는 것을, 그분께서 성체 앞에서 차분히 가르쳐 주고 계셨다. 남편은 평생 신앙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기독교 재단과 관련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안 좋은 기억이 있었는지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성당에 다니는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함께 가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고 나 역시 먼저 권하지 않았다. 괜히 설득하려 들면 오히려 마음이 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매일 새벽, 성체조배를 위해 성당에 다녀오는 일상을 그대로 살아갔고 남편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어느 날, 남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성당에 가? 새벽마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힘들지 않아?” 남편의 질문에는 비난도, 호기심도, 설득의 의도도 없었다. 그저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성당이 좋아서 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만나는 예수님이 좋을 뿐이라고. 이 말은 설명이라기보다 고백에 가까웠다. 나 자신도 아직 그 마음을 온전히 말로 옮길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왜 좋은지,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말로 풀어낼 수는 없었다. 그분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좋았고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다시 정돈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얼마 뒤 아무 예고도 없이 남편이 말했다. 한 번 같이 가보자고. 특별한 이유도 결정적인 계기도 없었다. 남편은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고, 내가 그랬듯이 어느새 그 자리에 익숙해졌고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이 되었다. 신앙에 대해 길게 말한 적도 없고 성경 말씀을 들이민 적도 없었기에 그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하느님께서 직접 부르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요즘 우리는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문을 낭송하고 미사를 간다. 물론 남편은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따지고 들고 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음이 나는 이런 상황이 되면, 나는 남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요셉 씨, 우리 그냥 성경 큰 소리로 읽읍시다. 그리고 말씀을 믿으면 돼요.” 딸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닮아 고집이 센 딸은, 흔히 말하는 가방끈이 긴 딸은 엄마 말을 순순히 따르는 타입은 아니다. 성당을 다니는 엄마를 응원해줬지만, 본인이 하느님을 알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봄날, 전화로 하느님은 어디 계시냐고, 왜 성당에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는 만큼만 답했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다 딸도 동네 성당에서 입교하게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가족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을 조금씩 배워갈 무렵 나는 레지오 마리애에 참여하며 곁에 머무르는 신앙을 실천하려고 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이 은총을 혼자만 품고 있기에는 마음이 불편해지는 감각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먼저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신앙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묻는 쪽을 선택했다. 성당에 오기까지의 망설임, 다시 멀어지게 된 이유, 혹은 아직도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에 대해 묻고, 듣고, 판단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앉아 있어 주는 일이었다. 방향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제시해주심을 알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자연스럽게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이어졌다. 오랜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은 나보다 훨씬 먼저 하느님을 알게 되었지만 냉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동창 모임 식사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앉아 큰소리로 성호경을 그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불러주며 하느님 앞에서 그들이 받은 은총과 믿음을 기억했다. 머뭇거리던 친구들도 하나둘 소리 내며 성호경을 그었고, 그들은 그렇게 하나 둘 교회로 돌아오고 있었다. 성당 공동체 안에서도 비슷한 시간이 있었다. 작년 초,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자매가 눈에 들어왔다. 늘 혼자 다니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성당 생활도 아직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가벼운 이야기로 웃기도 하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미사와 성당 생활에 대해 물으면 아는 만큼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어느 날 그 자매는 남편이 투병 중인데, 자신이 성당에 나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늘 불편한 마음으로 겨우 미사에 온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어서 포기하지 않고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그리고 나 역시 투병을 겪으며 하느님 앞에 서 있었던 시간과, 누구도 살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던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나누었다. 사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을 꺼렸었다. 그런데 나를 닮은 이 자매에겐 그 이야기들이 술술 나왔다. 이후 우리는 종종 함께 기도했고 결과를 앞당기기보다 하루하루를 하느님 뜻 안에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뒤 성당에 나오는 것을 말리던 그 자매의 남편도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 세례를 받았다. 또 한 번 누군가를 설득하기보다는 곁에 머물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자리가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돌아보면 성체조배는 나를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만들어 준 시간이었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하느님 앞에 나를 내려놓게 했고, 말씀을 생각하며 내 말과 선택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알게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천천히 배워가는 시간이었다. 하느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삶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더 많이 말하기보다 덜 판단하게 되었고, 앞서기보다 기다리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신앙이란 결국 하느님을 설명하는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태도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흔둘, 나는 여전히 서툰 신자이고 나이 많은 아기이다.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조금씩 찾아가며 하느님 앞에 머무는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요즘 나는 성경 10독 중인데, 오늘도 성경의 이 두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이 말씀들은 외침이라기보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나를 다시 바로 세우는 문장에 가깝다. 성당의 마당만 밟고 지나가는 신자가 아니라, 말로만 “주님, 주님”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그분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성체 앞에서, 그리고 일상의 자리에서 이 마음을 조용히 되새기며 하루를 연다. “주님, 주님.” 이 고백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강남년 마리아cpbc2026.03.10

원죄 이야기 속 하느님의 온유[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2) 어릴 적 동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키곤 했습니다. 만일 하느님 앞에서 거짓을 말하면 크게 분노하실 것이라고 겁을 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참말을 끌어내는 데는 효과가 있었습니다만, 심각한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동생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원죄를 지은 인간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처분은 영원한 저주도 돌이킬 수 없는 천벌도 아닙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느님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하느님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시고는 치미는 분을 참지 못하여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신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전지(全知)하십니다. 그러니 선악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숨은 인간 앞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첫 말씀은 이러합니다. “너 어디에 있느냐?”(창세 3,9) 이 질문은 하느님의 염려를 드러냅니다. 경찰이 잠적한 범죄자를 수색하는 것이 아니라 제 딴엔 큰 사고를 치고 어딘가 숨어버린 자녀를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얘야 어디 있니? 괜찮으니 어서 나에게로 오렴.” 물론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은 아이가 어떤 잘못을 하든 마냥 오냐오냐하는 아버지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자녀와 갈등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실을 부정하는 거짓 온유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온유는 진실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인간의 잘못을 꾸짖으시지만, 인간을 단죄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봅시다“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창세 3,17)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는 아담과 하와(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 부조) 여기서 하느님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땅을 저주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땅의 저주는 오로지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하여 재난이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고통의 책임을 하느님께 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비록 인간이 자초한 고통이지만, 그것을 겪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으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창세 3,21) 알몸은 연약함을 상징하고, 가죽옷은 영속적인 보호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두렁이 따위로는 알몸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직접 질긴 옷을 지어 인간을 입히십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러도 하느님은 인간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더 큰 은총이 내립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신 일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마치 하느님께서 매정하게 인간과의 관계를 끊어내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 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 3,22). 이것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신 이유입니다. 얼핏 듣기에 하느님께서 자신처럼 된 인간을 질투하여 내쫓으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들어보면 사실 이것은 추방이 아니라 인간을 보호하는 조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OSV 인간은 이미 성숙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소화할 수도 없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하느님과의 사랑의 친교 안에 제대로 들어가기도 전에, 즉 감당할 수도 없는 생명의 열매마저 따 먹을 판이었죠. 영원한 삶 자체가 아니라 그 삶이 어떠한 삶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는 생명의 열매는 먹으면 안 되는 것이죠.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알아서 선물로 주실 열매들이지만, 인간이 참지 못하고 스스로 따 먹으면 독이 든 과일이 될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사탄이 바란 것입니다. 사탄이 인간이 잘 되기를 바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을 보호하려는 조치로 아담과 하와를 생명나무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에덴동산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천사들에게 불 칼을 들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 단호한 조치는 하느님의 온유함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즉, 이로써 하느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하신 것, 인간을 포기하고 놓아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인간이 생명의 열매마저 따 먹는 치명적인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온유함은 우유부단하고 물러터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글 _ 함원식 신부(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cpbc2025.02.17
교황청 종교간대화부 장관 쿠바카드 추기경, 8월 방한 제1회 유교- 그리스도교 국제 콜로키움(토론회) 참석 교황청 종교간대화부 장관 조지 제이콥 쿠바카드 추기경을 비롯한 인사들이 8월 1~7일 한국을 찾아 유교 지도자들과 두 종교의 가치와 공동선의 의미를 나누고, 오늘날 윤리 교육을 위한 지혜를 모은다.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는 8월 4~5일 서강대학교 정하상관에서 ‘이상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교와 유교의 기여를 위한 대화 : 새 하늘, 새 땅과 대동(大同)’을 주제로 제1회 유교-그리스도교 콜로키움(토론회)을 개최하고, 이 자리에 교황청 장관과 인사가 함께한다고 밝혔다. 콜로키움 첫날에는 대만 푸런 가톨릭대학교의 움베르토 브레시아니 박사와 미국 산타클라라 대학교의 안 Q. 트란 신부가 「그리스도교-유교 대화 지침서」를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아울러 학회에서는 △성경적 및 고전적 기초 △이상 사회를 증진하는 시민으로서의 신앙인 △역사적 구현과 제도적 표현 : 이상에서 실천으로 △리더십, 권위, 공동선 △도덕적 수양과 사회적 결속 : 다원주의 사회를 위한 구체적인 교육적 시사점 △생태학, 세계적 위기, 지속 가능한 미래 : 조화, 창조, 생태적 책임 △공유된 지평과 협력적 참여를 향하여 등을 주제로 논의한다. 일주일간 방한하는 교황청 종교간대화부 장·차관은 2~3일 불교와 성균관, 서울대교구청을 잇달아 방문하고, 4~5일 학회에 참석한다. 주교회의는 “이번 콜로키움은 이상적 인간 및 사회 질서를 정립하는 데 근본적 주제를 탐구한다”며 “그리스도교의 ‘새 하늘과 새 땅’ 개념과 ‘위대한 조화’, ‘대통합’으로 번역되는 유교의 대동 이상에 초점을 맞춰 보편적 형제애, 생태적 책임 등 규범적 주제들을 함께 탐구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준태 기자 ouioui@cpbc.co.kr이준태 2026.07.22
![[생활속의 복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5/13/8tR1778639936660.jpg)
[생활속의 복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주님 승천 대축일 마태 28,16-20 피에트로 페루지노 작 ‘그리스도의 승천’ ‘하늘’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는 천문학의 탐구 대상인 ‘천체 우주’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종교에서 거론되는 상징 언어인 ‘천상 낙원’이다. 자연 현상에 일방적으로 종속됐던 인류는 생존의 필수 요소인 빛과 비를 제공하는 태양과 구름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였다. 호의를 베푸시는 하느님과 풍요와 안정의 토대를 마련해 주는 하늘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타 종교와 대조되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하늘에 대한 양면적 접근이다. 한편으로, “하늘”(창세 1,8)과 하늘에 펼쳐진 “빛물체들”(창세 1,14: 해·달·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고대 종교의 하늘에 대한 신성화를 부정하려는 방편으로 하늘이 상대화되었다.(1열왕 8,27; 시편 148,1-3 참조) “천지의 창조주”(사도 신경) 고백을 통해 만물을 존재케 하는 바탕인 하늘조차도 하느님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다른 한편으로, 주님의 기도 첫 문구 “하늘에 계신”이 의도하는 바와 같이, 하늘은 ‘하느님의 거처’(신명 26,15 참조)다. 구약 성경은 ‘죽음을 겪지 않은’ 이의 하늘을 향한 공중 부양을 보도한다.(에녹: 창세 5,24 / 엘리야: 2열왕 2,11) 이 하늘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룬 지복직관에 도달한 이가 진입하는 ‘특정 공간’(천국)으로 이미지화되었다.(2코린 5,1 참조) 상하 개념과 연계하여 반대말로 추정되는 하늘과 땅은 ‘땅 위 하늘’과 ‘하늘 아래 땅’ 차원에서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관계 언어다. 만물을 포괄하는 개념인 ‘천지’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에페 1,23)의 ‘새로운 피조물’(새 하늘과 새 땅: 묵시 21,1)이다. 성경은 하늘과 땅 사이의 하강과 상승 구도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전개한다. ‘첫 번째 오심’(성탄)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있던 아들의 인류를 위한 ‘하늘에서 내려오심’(강생)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하늘로 올라가심’(승천)은 ‘두 번째 오심’(재림)의 시작이다.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죽음을 겪은’ 그리스도의 승천은 ‘하늘과 땅’(성과 속)의 분리를 전제로 땅에서 탈출하는 공중 부양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는 약속을 구현하는 ‘새로운 현존’에 대한 공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라는 빈 무덤에 등장한 눈부시게 차려입은 두 남자의 물음처럼, 승천을 시각화한 사도행전은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을 통해 묻는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1,11) 그리스도가 승천한 하늘은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올라가신’ 하늘은 미지의 특정 구역이 아니라 하늘과 맞닿은 ‘내려오신’ 땅을 암시한다. 부활은 ‘언제나’(죽음 후에도), 승천은 ‘어디나’(하늘 아래에도) 현존하고 활동하는 하느님을 입증한다. 둘째, ‘올라가신’ 하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내려오신’ 땅에 대한 구체적 집중으로 교정된다. 하느님의 거처는 땅 위의 ‘저 하늘’이 아니라 하늘 아래의 ‘이 하늘’(땅)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1요한 4,12 참조)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묵시 21,3) cpbc2026.05.13
![[생활속의 복음] 명사의 사랑, 동사의 사랑](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5/06/ZLW1778042453852.jpg)
[생활속의 복음] 명사의 사랑, 동사의 사랑부활 제6주일 요한 14,15-21 장 밥티스트 드 샹페뉴 작 '선한 목자' ‘정보의 홍수’ 시대에 부각하는 현안은 ‘노아의 방주’(창세 6,18 참조) 역할을 위한 정보의 진위 판별과 우선순위의 배열이다. 획일적 원칙을 제안할 수 없는 판별과 배열은 공통으로 ‘신뢰’를 기반으로 구축된다. 신뢰의 두 가지 근간은 명확한 ‘가치’ 설정과 이에 수반되는 ‘책임’ 이행이다. 조직·기관의 권위를 신뢰의 토대로 간주했던 과거와 달리, 현대 사회에선 신뢰와 권위가 분리되었다. 전통적 권위가 신뢰를 보증하지 않고, 검증된 신뢰가 권위를 창출한다. 정보의 홍수와 더불어 등장한 ‘표현의 홍수’ 현상 중 하나인 한국 사회의 사랑 표현은 과거와 달리 매우 개방적이다. 엄지와 검지를 교차하거나 양손과 양팔로 연출하는 ‘사랑의 상징 기호’(하트), 문자 메시지에 빈번히 입력하는 하트 이모티콘이 이를 대표한다. 사랑의 확산이라는 긍정적 진단 이면에, 이 양상이 간과하는 측면에 대한 숙고가 필요해 보인다. 사랑은 가벼운 유쾌함과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동반한다. 언어와 기호로 굳이 표현되지 않더라도, 사랑은 책임 있는 실천을 통한 무언(無言)의 힘과 향으로 전파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사랑은 ‘명사’(고백 언어)이며 ‘동사’(수행 언어)다. 다양한 형태를 취하기에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랑’은 중압감 있는 인내와 희생을 요청하는 ‘사랑한다’로 증명된다. 동사의 사랑은 과거-현재-미래를 포괄하는 시간적 구성으로 전개된다. 과거의 행적을 종합한 신뢰의 축적으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 상대에 대한 신뢰는 사랑의 요람이다. ‘신뢰할 만함’(과거)으로부터 귀결된 ‘사랑 고백’(현재)은 상대와 ‘함께 있고’, 상대 ‘안에 있는’ 국면으로 진입한다. 나아가, 사랑은 ‘책임 있는 미래’를 설계한다. 상대의 선(善)을 지향하는 사랑은 ‘너와 나’(우리)의 공동선을 기획한다. 미래적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희망’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구현된 하느님의 사랑을 기술하는 성경은 ‘세상 창조’(시작)부터 약속에 성실했던 ‘신뢰할 만한’ 하느님을 소개한다. 이 약속은 ‘어디서나 우리 옆에 있는 하느님’(성자: 부활하신 그리스도), ‘언제나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성령: 진리의 영)을 통해 ‘여기서 지금’ 성취되고 있다.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세상 종말’(마침)까지 책임지는 시작이요 마침인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이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1베드 3,15)하는 태도를 갖추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압축적 서사가 신앙이 선사된 근거인 “그리스도를 통하여”(로마 1,8)와 사랑으로 생명을 보장받은 상태인 “그리스도와 함께”(필리 1,23), “그리스도 안에서”(1코린 15,22)란 문구로 고백된다. 이 신앙과 사랑은 “그리스도를 향한”(2코린 11,3) 우리의 희망을 통해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성경의 형성 과정 중 후기에 집필된 요한계 문헌의 저자는 ‘하느님의 사랑’(동사)을 ‘하느님인 사랑’(명사)으로 제시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cpbc2026.05.06

붉은 말처럼 힘차게 영성의 초원 달리자병오년 새해 결의를 다지는 책교회 밖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됐다. 병오년, ‘붉은 말의 해’라고 한다. 불의 기운과 말의 역동성이 더해져 어느 때보다 에너지 넘치는 한 해가 기대되는 2026년. 다방면에서 새로운 결의를 다질 수 있는 책들과 함께 달려보자. 평화가 모두와 함께 / 레오 14세 교황 / 가톨릭출판부 편집부 옮김 / 한영만 신부 감수 / 가톨릭출판사 레오 14세 교황 초기 연설과 강론 「평화가 모두와 함께」는 레오 14세 교황이 목자로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이후 초기 연설과 강론을 엮은 책이다. 교황이 어떠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으며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지 명확한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전 세계를 향한 당부는 물론 각국의 지도자에게 보내는 호소, 주교단과 추기경단을 향한 촉구, 새 사제들에 대한 권고, 청년들에게 건네는 격려 등 폭넓은 청중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모두에게 일관되게 강조하는 점은 바로 ‘평화·일치·사랑·경청’이다. 즉 인간 존엄의 회복, 평화를 위한 실질적인 행동,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경청, 그리고 가장 약한 이들과의 연대로, 오늘의 인류가 가장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가치들이다. 교황은 신앙의 테두리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도록 요청한다. “루카 복음사가가 표현한 바와 같이(루카 2,19.51 참조) ‘신발레인(synballein, 마음속에 간직하다-편집자 주)’의 역량, 곧 생각의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피상적인 것을 경계하고, 삶의 조각들을 기도와 묵상 안에서 하나로 모으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지금 살아가는 이 삶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내 여정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나를 어디로 이끌고 계시는가?”(190쪽) 한영만(라디오바티칸 담당) 신부가 감수했고, 글마다 한 신부의 해제를 더해 교황의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지구 수도원 / 크리스틴 발터스 페인트너 / 맹영선 옮김 / 생각비행 자연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삶으로의 초대 “나무와 꽃들은 창조된 자기 모습 이외의 다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어떻게 성도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본질적인 본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우리의 소명을 실현하는 길입니다.”(107쪽) 「지구 수도원」은 빠른 속도와 소비주의, 산만함이 지배하는 삶에서 벗어나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삶으로 독자들을 초대하는 책이다. 가톨릭 신자이며 영성 신학 박사로 수도원 영성을 현대인의 삶과 연결하는 작업을 해온 저자는 이번 책에서 지구를 우리의 원초적인 수도원, 즉 최초의 성전으로 간주한다. 인류가 야기한 기후위기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관상’을 언급했다. 관상 수행의 열매 중 하나는 ‘전체성(wholeness)’을 기억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 사랑 안에서 존재하고 그 사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지구 수도원」은 창조세계를 마주하는 일상에서 관상을 수행하고, 자연과의 친밀함을 통해 경이와 감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품격 있는 황혼 / 브라이언 그로간 신부 / 김학준 신부 옮김 / 바오로딸 나이듦은 쇠퇴가 아니라 무르익음 만 나이가 통용되고 있지만, 해가 바뀌면 자연스레 한 살이 더해진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특히 어느덧 황혼에 접어들었다면 새로운 한 해가 더욱 남다를지 모르겠다. 「품격 있는 황혼」은 늙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되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주체적으로 만들어나갈 것을 당부한다. 책은 나이 듦이 쇠퇴가 아니라, 지난 세월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더 무르익어야 하는 때라고 강조한다. 특히 하느님께서 그 여정에서 함께하신다는 위로와 희망을 전한다. 아일랜드의 더블린 밀타운 신학교 학장을 지냈고 현재 영성학 명예 부교수인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시·기도문·일화 등을 통해 나이 듦·죽음·죽음 이후의 영광까지, 하느님 나라로 옮겨가는 여정을 어떻게 준비하고 받아들일지 깊이 묵상하도록 이끌어 준다. “너는 늙어가지만 여전히 나의 사랑이다. 나는 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한다. 너의 주름진 손, 앙상한 다리, 하얗게 센 머리카락, 깜박깜박 잊어버리거나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조차 사랑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너의 마음을 사랑한다. 산만함 속에서도 나를 향해있는 너의 마음을!”(60쪽) 영혼과 육신을 살리는 음식이야기 / 노봉수 / 한마음문화사 신앙의 식탁에 차려진 성경 속 음식 탐구 새해의 시작과 함께 가장 많이 하는 다짐은 건강관리,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다이어트일 것이다. 식품에 대해 다양한 책을 집필해온 서울여대 식품공학과 노봉수(야고보) 명예교수가 「영혼과 육신을 살리는 음식이야기」를 펴냈다. ‘신앙의 식탁’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그간의 책과는 달리 식품과학자의 시선으로 성경 속의 음식을 조명한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늘의 양식 : 성경 속 음식이야기’에서는 성경에 등장하는 음식들의 의미를 탐구하고, ‘신앙과 음식의 만남’에서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 삶과 밀접한 토마토, MSG 등을 통해 신앙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빵은 성경에서 매우 일상적인 음식으로 등장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통해 깊은 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빵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기본적인 주식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음식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일상적인 빵을 하느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사용하셨다.”(62쪽) 저자는 “책을 집필하며 구약을 비롯한 성경 해석에 대한 미숙한 부분을 많이 느꼈다”며 “식품이라는 친숙한 소재를 통해 성경을 이해하는 색다른 접근법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5.12.23
![[전문] 대전교구장 김종수 주교 부활 담화](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4/01/blC1775029666406.jpg)
[전문] 대전교구장 김종수 주교 부활 담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상 죽음으로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다시 화해시켜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알렐루야! 유다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예수님께서 로마 병사들에게 붙들려 가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베드로 사도만이 예수님 뒤를 따라갔지만, 밤새 세 차례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언을 듣고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또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처음 건네신 말씀이 평화의 인사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세 차례 축복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진 구원을 평화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평화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 상태를 잘 보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숨을 받아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죄와 연루되지 않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하는 한 형제로 서로 사랑하며 살면서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세상을 잘 돌보는 것이 평화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스스로 하느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른다는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을 떠난 인간에게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시작하신 구원경륜은 죽음이 지배하는 죄의 역사를 다시 하느님 품 안으로 회복시키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긴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메시아를 약속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와 그분이 맺어주실 새 계약을 기다렸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시어, 이제 그분이 가시는 길은 우리도 갈 수 있게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의 죄를 당신 몸에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태초에 원하셨던 하느님 닮은 인간의 모습을 회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일은 예수님이 오시기 수백 년 전 이사야 예언자가 이미 알려준 소식입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 53,4-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화에 이르셨고, 그 평화를 사도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사도들을 통하여 주님의 평화를 받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미하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평화의 은총을 받으신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평화의 사도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과의 화해이며, 이웃 형제자매들과의 화해는 물론 모든 피조물과의 화해를 의미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희생하여 우리와 화해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한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싸움과 전쟁은 화해와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의 삶이 아닙니다. 기뻐하는 이와 함께 기뻐해 주시고, 슬퍼하는 이웃과 함께 울어 주십시오. 지금도 국제사회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혹은 권력자가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 평범한 시민 특히 어린아이들까지 희생시키면서도 아무런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 춘계주교회의에서도 이런 상황에 아픈 마음으로 동참하면서, 신자 여러분에게 단식과 기도로 세상의 평화를 위해 함께 해주실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지구 생태계 역시 우리 인간과 화해를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며, 당신을 닮은 우리에게 모든 피조물을 맡기셨습니다. 생태계 파괴의 주된 원인은, 보다 편리한 삶에 대한 욕망과 그에 상응하는 돈벌이입니다. 우리는 조금 천천히 조금 불편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삶을 위해서도 유익합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피조물을 돌보아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모습을 보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로 구원받은 부활의 증인이며 평화의 사도입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부활의 기쁨을 전하고 진정한 형제애로 평화를 이루십시오. 지구 생태계도 하느님 자녀들의 자비로운 손길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님 부활을 온 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2026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이준태 2026.03.30

온유[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1) 신학생 시절 들은 학장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종종 함께 탁구 게임을 하는 성격이 아주 온유한 신부님이 계시는데, 급한 성격의 학장 신부님께서 그 성격대로 아무리 매서운 공격을 퍼부어도 공격은 하지 않으면서 공을 슬슬 받아넘기기만 하는 신부님을 한 번도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계속 공격하다가 결국 힘이 빠져 헛손질해서 지고 만다는 것이었죠. 온유는 나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유는 강한 내적 힘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온유는 단지 불편한 말을 하지 않고 찡그린 얼굴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하려 택하는 손쉬운 태도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온유한 분입니다. 비록 하느님의 온유한 속성이 명시적으로 언급되는 구절은 얼마 되지 않고, 성경의 많은 부분은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의 온유함은 성경의 첫 장에서부터 발견됩니다.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이 가운데 두 번째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염려와 배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창세 2,7) 우리말 성경이 흙먼지로 번역한 히브리 단어 ‘아다마’는 찰흙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찰흙을 빚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작업은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찰흙을 거칠고 투박하게 다루었다간 원하는 형상을 만들지 못하고 낭패 보기 십상이죠. 이렇게 인간 창조는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이 아니라 부드러운 손길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하느님 온유의 결정적 증거입니다. 이탈리아 카프리 섬, 산 미켈레 성당 바닥의 마졸리카(도자기 타일화) ‘에덴동산’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소작농에게 땅을 배당하는 지주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에 ‘데려다’로 번역된 단어는 직역하면 ‘잡다’가 되는데, 어머니가 갓 태어난 아기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는 것과 같은 몸짓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우리말 성경에 ‘명령’으로 번역된 단어는 ‘처방’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명령과 처방은 다릅니다. 주차 금지구역에서 차를 빼라는 경찰의 명령과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게 해주려는 의사의 처방은 명확히 다르죠. 명령은 무뚝뚝하지만, 처방에는 온유함이 있습니다. 흔히 이 말씀을 엄격한 금지 명령으로만 생각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선악과의 금지가 아니라 인간이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대부분 열매의 허용이 우선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주처럼 보이는 금지 명령도 단어 자체보다 그 어조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아직은 소화할 능력이 없어서 크게 탈이 날 수 있는 음식을 주의하라고 강하게 경고하는 것과 같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엄청난 지식을 주는 열매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튼튼한 위장을 갖기 전까진 먹어선 안 됩니다. 아직 어린 인간에게는 이 열매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인간이 성장하게 되면 그 열매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원죄 이야기에서 어떤 이들은 당신의 명을 거스르는 죄를 지은 인간을 저주하시는 하느님의 무서운 모습만을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태도를 온유에서 분노로 바꾸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저주 밑에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온유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저주 이후에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 저주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포기하시거나 버리시기 위해 내리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원죄로 손상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려는 훈육을 위한 조치였습니다. 회초리가 사랑의 매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하느님의 온유는 단순히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분노조차도 그분의 온유를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누군가는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시고는 인간이 먹는 것을 금지하신 것은 덫을 놓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덫을 놓고 인간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며 사악한 웃음을 짓는 하느님의 모습에서 온유함을 찾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이 또한 하느님의 온유를 드러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아버지의 온유함입니다. 언젠가는 결국 자신의 모든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겠지만, 단계별로 자녀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선물하는 아버지의 온유함 말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단번에 차 열쇠를 선물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인간이 성장하면 하느님은 언젠가는 선악과를 그에게 허락했을 것입니다. 글 _ 함원식 신부(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cpbc2025.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