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내- 침착하고 오래 참는 것](//cpbc.co.kr/CMS/newspaper/2010/08/rc/346343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83) 인내- 침착하고 오래 참는 것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미국 발명가 에디슨(1847~1931)은 오늘날 우리 생활에 도움을 주는 전등, 인쇄 전신기, 전화기, 자력선광법(磁力選鑛法), 알칼리 축전지, 축음기, 영화 촬영기 등을 발명했다. 미국 오하이오주 가난한 제재소 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3개월 다닌 것이 학교교육의 전부였다. 어머니에게서 교육을 받은 그는 시간을 쪼개 발명 연구에 몰두해 1300가지가 넘는 특허를 얻어 발명왕이라 불린다. 어린 시절, 그가 발명가가 되리라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에디슨이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담임 선생님이 그의 어머니를 학교로 불렀다. "저는 이 아이를 더 이상 못 가르치겠습니다. 에디슨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지능이 너무 모자랍니다. 이 아이에게 가능성은 조금도 없어요." 결국 에디슨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에디슨은 학교에 가는 대신 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러 가지 실험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어머니가 그를 격려하고 믿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디슨은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기차 안에서 신문이나 과자를 파는 일을 했다. 에디슨은 짬만 나면 기차 화물칸에서 실험을 했는데 실험 중 불이 나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이 사고로 차장에게 심하게 매를 맞아 고막이 터져 한쪽 귀가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에디슨의 열정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게 되자 연구에만 몰두하게 됐다. 에디슨은 '발명의 천재'라고 불리지만 그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피와 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인내한 댓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땀으로 이뤄진다"는 명언을 남겼다. 성경에서 인내의 대표적 인물은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이라 할 수 있다. 야곱은 끈기와 열정의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인내의 소유자였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나 세속적인 삶, 모두에 인내로웠다. 야곱의 삶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의지와 노력, 인내 없이는 절대로 열매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의 열매도 인내의 시간을 요구한다(창세 25,19-33,15 참조). 성경에서 인내란 침착하고 오래 참는 것으로, 지혜나 겸손을 나타내기도 한다. "일의 끝이 그 시작보다 낫고 인내가 자만보다 낫다"(코헬 7,8). 또한 인내란 참는 것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또한 인내는 항상 열매를 맺는다.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히브 6,12). 특별히 인내는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낼 때 아주 극적으로 사용되는 덕목이다. 하느님 사랑은 죄인들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며, 그 근거가 인내로 제시된다. "주님께서는 이와 달리 다른 민족들에게는 그들의 죄가 가득 찰 때까지 벌을 내리시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리신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달리 다루시기로 결정하셨다"(2마카 6,14).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언제나 희망을 간직하고 인내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로마 15,4). 우리 신앙의 깊이는 인내와 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조은일2010.08.10
![[성경 속 상징] (79) 꿈- 하느님 계시 전달 수단 중 하나](//cpbc.co.kr/CMS/newspaper/2010/03/rc/328733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79) 꿈- 하느님 계시 전달 수단 중 하나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고대인은 꿈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들에게 꿈은 하느님 목소리와 같았으며, 꿈을 하느님 뜻을 전달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꿈을 풀이하는 해몽 전문가가 있었고, 이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서양에서는 근대 계몽사상의 영향으로 꿈에 대한 해석을 미신이라 여겨 배척함으로써 해몽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꿈이 또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들어 심리학이 발달하면서부터다. 특히 프로이드가 꿈을 인간 마음속에 숨겨진 측면이 표출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불가사의한 현상인 꿈은 각 문화마다 다양하게 해석됐다. 고대 인도에서는 잠자고 있는 사람을 갑자기 깨우면 혼이 육체로 돌아오지 못해 큰 병에 걸리게 된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는 제우스 신이 꿈을 보낸다고 생각했다. 또한 고대 이집트 왕도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 성경에서는 파라오의 꿈에 대한 요셉의 해석(창세 41~45장)과 야곱의 꿈이 잘 알려져 있다(창세 28~32장). 꿈과 관련된 상징은 성경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성경에서 꿈은 하느님 계시를 전달하는 수단 중 하나였다. "그날 밤 꿈에, 하느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네가 데려온 여자 때문에 너는 죽을 것이다. 그 여자는 임자가 있는 몸이다.'"(창세 20,3). 이처럼 성경 속에 꿈이 자주 언급되고 또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꿈이 특별한 개인에게 하느님 계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꿈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성경은 꿈을 하느님 뜻을 전하는 방법 중 하나로 언급한다.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2사무 7,4-5). 성경의 어떤 꿈은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의미가 명백하다. 예를 들면 요셉 형제들이 요셉의 꿈속 상징을 이해하는 대목이다(창세 37,8). 그런데 다른 어떤 꿈들은 그 의미를 비유 속에 감추고 있어서 해석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요셉이 감옥에서 꾼 꿈같은 것이다(창세 40,5-19). 또한 꿈은 하느님 신탁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신성한 장소에서 잠을 잠으로써 신탁을 구하려 했다. 앗시리아 왕들도 하느님 신탁을 받기 위해 성전 안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사무엘은 주님 말씀이 드물게 내리고 환시도 자주 있지 않았을 때 스승인 엘리처럼 숙소에서 자지 않고 성전에서 잠을 잤다(1사무 3,4-5). 하느님 뜻을 전해줄 꿈을 꾸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꿈속에서 하느님 메시지를 천사들이 전하는 것이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성경에서 하느님은 꿈을 통해 말씀하시지만 모든 꿈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 꿈은 지각없는 사람이 거짓된 희망을 갖게 하며, 미련한 자를 흥분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집회 34,1).조은일2010.03.09
![[성경속 상징]78-재- 덧없음과 무상, 슬픔과 재회](//cpbc.co.kr/CMS/newspaper/2010/02/rc/327145_1.2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78-재- 덧없음과 무상, 슬픔과 재회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사순시기가 시작되는 것과 함께 거행되는 참회 전례는 많은 상징을 갖고 있다. 예로부터 재의 수요일에는 재에 성수를 뿌린 다음 그 재를 신자들 머리에 얹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다된 밥에 재 뿌린다'는 속담처럼 재는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재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던 교회의 공적 참회 제도가 10세기 말께 없어졌지만 재를 뿌리는 의식은 그대로 보존됐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1년 이 관습을 모든 교회에서 보존하기를 권고했다. 이 예식에서 성직자들이나 남자들에게는 머리 위에 재를 얹었고, 여자들에게는 재로 이마에 십자표를 그었다. 재는 덧없음과 무상, 슬픔과 참회의 상징이므로 사순절 회개의 전례에 안성맞춤이다. 재를 뿌리는 일은 구약성경이나 고대 이방인 문화권에서는 낯익은 의식으로, 슬픔과 속죄를 표현한다. 재를 축성하는 기도문은 12세기에, 그 전 해의 성지를 태워 재를 만들라는 지침으로 명문화된다. 재를 머리에 얹을 때 사제는 전통적으로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참조 창세 3,19) 혹은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등을 외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회개를 할 때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 머리에 쓰고 베옷을 입는 관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옷을 찢고 크게 통곡하며, 머리에 재를 뿌리고 나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리고 나팔 소리를 신호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다"(1마카 4,39-40). 머리에 재를 쓴 사람은 슬픔에 빠진 비천한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구약에서 예언자들은 선포한 회개의 메시지를 특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는 행동을 했다. 또한 예수께서도 갈릴래아 호수 주변 도시인 코라진과 베싸이다를 향해 그들의 뉘우치지 않는 마음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질책하실 때 참회의 표시인 이 상징을 인용하신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21). 이처럼 재는 정화를 의미한다. 실제로 재는 태울 것을 다 태우기에 무균의 상태를 뜻한다. 아울러 재는 먼지와 같이 미소한 존재를 상징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창세 18,27). 재는 탈 수 있는 것은 다 태워서 제거하기에 순수와 정결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황소의 나머지는 모두 진영 밖 깨끗한 곳에 있는, 재를 쌓아 두는 정결한 곳으로 내다가 장작불 위에 올려놓고 태운다. 그것은 재를 쌓아 두는 곳에서 태워야 한다"(레위 4,12). 성경에서 재는 인간의 죽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몸, 뒷날 우리는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다. 우리의 콧숨은 연기일 뿐이며 생각은 심장이 뛰면서 생기는 불꽃일 따름이다. 불꽃이 꺼지면 몸은 재로 돌아가고 영은 가벼운 공기처럼 흩어져 버린다"(지혜 2,2-3). 재는 불로 태운 것이다. 따라서 재를 받고 살아가는 사순시기는 불로 자신을 태우듯이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정으로 자신을 온전히 태워버리고 살아야 하는 기간이다. 재는 자연으로 돌아가 훌륭한 거름이 되고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성장을 돕는다. 따라서 사순시기는 부활이라는 새 생명을 희망하는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다. 조은일2010.02.23
![[성경 속 상징] 72- 돌- 신적 능력이나 강한 마음](//cpbc.co.kr/CMS/newspaper/2009/12/rc/321051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72- 돌- 신적 능력이나 강한 마음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예로부터 돌은 단단함과 특이한 형태로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돌은 일상생활의 도구로 이용됐다. 청동기가 등장하기 전에는 생활도구 대부분을 석기에 의존했다. 또한 돌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양식의 무덤의 중요한 재료가 됐다. 원시인들은 돌은 생명과 생산력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돌은 생명의 탄생, 풍요와 수호 등 신비로운 권능을 가진 존재로서 신앙의 대상이 돼왔다. 이집트에서도 돌은 영원의 상징이었다. 인간 육체는 사멸해도 돌에 새겨진 모습과 이름이 생명의 지속을 보증한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형상의 암석은 생식력을 가진 것으로 믿었다. 당산과 선돌은 마을을 수호하고 사람들의 안녕을 지켜주는 신석(神石)으로 사용됐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돌이 병을 낫게 하거나 마귀를 쫓는 행운을 가져온다는 신앙은 보석을 몸에 지니는 풍습을 낳게 했다. 하늘의 돌,즉 운석(雲石)에는 초인간적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성경에도 돌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구약에서는 돌을 숭배하는 유다인들의 잘못된 믿음을 비난하고 있다.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거나, 신상이나 기념 기둥을 세워서는 안 된다. 또 조각한 돌을 너희 땅에 놓고 그것에 절해서도 안 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26,1). 성경에서 돌은 자주 신적 능력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창세 28,11-12).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도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돌로 제단을 만들려거든, 다듬은 돌로 쌓아서는 안 된다. 너희가 정을 대면 제단이 부정하게 된다"(탈출 20,25). 또한 성경에서 돌은 강한 마음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들에게 다른 마음을 넣어 주고, 그들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에제 11,19).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집의 건축에 빗대 살아 있는 돌에 비유하기도 한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2,5). 예수님께서도 스스로를 집 모퉁이 머릿돌에 비유하신다(루카 20,17-18).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흰 돌은 장차 천국에서 맞게 될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묵시 2,17). "승리하는 자에게 흰 돌을 준다"는 것은 최후의 심판 앞에서 무죄 선언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와 함께 영적 승리,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하는 상급을 의미한다. 그래서 교부들도 성경주해에서 '흰 돌'을 세례성사로 깨끗해진 하얀 몸을 의미한다고 했다. 우리는 매일 어떤 돌로 어떤 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는가?조은일2009.12.29
![[성경속 상징]38-관[冠]- 최고 영예와 권력 나타내](//cpbc.co.kr/CMS/newspaper/2009/03/rc/286714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38-관[冠]- 최고 영예와 권력 나타내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왜 추기경님 입관 할 때 주교관을 안 쓰셨죠? 아침에 한 브리핑 내용이랑 다른데요." 2월 19일 김수환 추기경님 입관예절을 마친 직후 기자들이 몰려와 질문을 쏟아냈다. 김수환 추기경님 장례기간 내내 각 언론사 취재진은 한 순간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전반적 장례일정은 물론 관의 소재, 크기, 입관 예절 순서와 동선, 수의 종류, 운구과정 등 쏟아지는 질문은 끝이 없었다. 김수환 추기경님 입관 예절이 있던 날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추기경님께서 영원히 안식하시게 될 관에 대해 설명을 했다. "평소 소박하게 장례를 부탁했던 김 추기경님 유지에 따라서 특별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삼나무 소재 관을 쓰시게 된다. 다만 일반적인 관의 길이보다 30cm정도가 길다. 머리에 쓰시는 주교관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입관 과정에서는 주교관은 빠졌다. 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주교십자가와 반지도 빠졌음은 물론이다. 장례위원회가 김수환 추기경의 평소의 검소한 삶과 모든 장례 절차를 간소하게 할 것을 당부하셨던 뜻을 따라 부장품 없이 입관하기로 최종 결정했기 때문이다. 추기경과 고위성직자라는 무게에서 벗어나 하느님 품안에 '자연인 김수환'으로 돌아가고 싶으실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대신 신자나 신부님들 장례 때와 마찬가지로 평소 기도할 때 사용하던 나무묵주 하나만 손에 쥔 채 김수환 추기경님은 흙으로 돌아가셨다. 설명을 듣는 기자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예로부터 유럽에서는 국왕이나 성직자나 군인 등이 관을 쓰는 풍습이 있었다. 신분제도와 더불어 발달했으며, 의례적인 경우에 주로 사용한다. 왕이나 지배자들이 쓰는 관은 그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외적 표시이다. 관은 보통 보석과 진주로 호화스런 장식을 한다. 관 자체가 강대한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관을 받은 자는 신들의 보호 아래 있다. 이집트에서 황금으로 만든 관은 그 자체가 신성한 것으로서 태앙과 빛의 상징이 됐다. 신화에서 신들이 쓰는 관은 우주를 지배하는 힘을 나타낸다. 유다인 전승에도 태양과 달 등으로 장식된 다윗의 관에 대한 것이 있다. 이처럼 왕이 머리에 쓰는 관은 그 권력과 위엄의 상징이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은혜로운 복으로 맞으시고 그의 머리에 순금의 왕관을 씌우셨습니다"(시편 21,4)라며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대목이 나온다. 순금 왕관은 최고 영예와 권력을 상징한다.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불충한 자들에게 내리는 징벌과 몰락을 왕관을 벗기는 것에 비유했다(예레 13,18). 또한 면류관은 대제사장, 왕, 왕후,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 등이 썼던 관으로 영광, 권위, 위엄, 승리를 상징했다. 면류관은 존엄과 명성을 주는 것으로, 영예를 잃으면 존엄과 명성도 잃게 된다(애가 5,16). 사도 바오로는 운동선수들이 화관을 얻기 위해 열심히 훈련하듯 신앙면에서 영생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을 강조했다(1코린 9,25).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예수님은 가시로 만든 관을 쓰셨다(마태 27,29). 가톨릭교회의 주교관(Mitra)도 특별한 품위의 상징으로 주교가 전례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쓴다. 이 주교관은 고대 페르시아에 등장하는 빛과 진리의 신인 미트라스(Mitras)의 모자에서 온 것이다.조은일2009.03.10
![[성경 속 상징]36-반지- 사회적 신분과 지위의 징표](//cpbc.co.kr/CMS/newspaper/2009/02/rc/284849_1.4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36-반지- 사회적 신분과 지위의 징표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한국이 낳은 '피겨 퀸' 김연아 선수는 2월 7일 4대륙 피겨선수권대회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사회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김연아 선수 금메달 소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이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세계적 피겨 요정으로 도약한 김연아 선수는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음은 물론이고 그의 모든 것은 팬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됐다. 최근 언론 보도 때마다 화면에 잡히는 김연아 선수 오른손 검지손가락에 낀 반지가 팬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커플링이다', '의상과 맞춘 패션 반지다', '수천만 원짜리 명품이다' 등 네티즌들 추측이 난무했다. 피겨 퀸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는 묵주반지다. 지난해 5월 바다의 별이신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스텔라'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한 김연아 선수는 경기에 나설 때, 연습할 때는 물론 평상시에도 항상 묵주반지를 끼고 있다고 한다. 반지는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이면서 또한 권위ㆍ충성의 상징,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반지를 주는 것은 권력을 위임함과 진실을 맹세하고 상대편의 인격과 하나를 이루는 일치를 상징한다. 또한 반지는 영원, 연속, 생명을 상징한다. 하나로 묶어서 연결함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결혼반지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결혼반지는 정절의 징표, 진실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오늘날에도 연인들이 커플링을 약속의 표시로 이용한다. 반지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고대 이집트 때부터라고 추정한다. 그리스에서 반지는 자유로운 신분을 지닌 남자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로마 시대 때도 반지는 특별한 지위를 나타내는 징표였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은 금반지를 끼었다. 중세 시대 대관식에서 반지는 왕과 그 나라의 결합을 나타냈다. 오늘날에도 주교 반지는 주교 품위와 관할권의 표지를 나타낸다. 성서 시대에도 인장, 혹은 봉인과 인장이 딸린 반지는 접촉해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의미와 존경 받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이집트 왕 파라오는 요셉을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며 옥새 반지를 끼워준다(창세 41,41-42). 이처럼 권력을 위임할 때 인장 반지를 손에 끼워줬다(에스 3,10 참조). 신약에서도 사회적 신분과 지위의 징표로 사용했다. 반지를 다시 끼는 것은 그 사람 권리를 회복하는 의미를 지녔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루카 15,22).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는 그림이 새겨진 일명 '어부의 반지'는 교황 권위를 상징하며 성 베드로 사도 후계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새 교황이 선출되면 교황청은 역시 그의 라틴어 이름이 새겨진 새 반지를 제작하고, 교황은 선종 때까지 이 반지를 끼게 된다. 예전에는 교황이 공문서를 봉인할 때 이 어부의 반지를 사용했으며 교황을 알현하는 신자들은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무릎을 꿇고 이 반지에 입을 맞췄다. 교황이 선종하면 반지를 부수게 되는데 이는 전 세계 가톨릭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에 대한 그의 권위가 끝났음을 상징한다. 부서진 반지는 교황 관속에 넣어지는데 위조를 막기 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은일2009.02.24
![[성경속 상징]35-어둠- 무지나 어리석음, 거짓말로](//cpbc.co.kr/CMS/newspaper/2009/02/rc/283096_1.2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35-어둠- 무지나 어리석음, 거짓말로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어둠은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를 뜻한다. 어둠은 자연의 실재이고 영적 실재이며 동시에 심오한 인간 체험의 어떤 부분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기도 하다. 어둠은 그림자와는 구별된다. 어둠은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상태를 비유하는 경우에도 쓰인다. 고대 사람들은 인생을, 심지어는 우주를 빛과 어두움 사이 투쟁으로 생각했다. 어둠의 이미지는 문학, 예술 등에 많이 쓰인다. 성경의 첫 장에 어두움과 빛이 함께 등장한다. 하느님은 첫 번째 창조물로 빛을 만드신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3-5).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5 공동번역).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미래에 다가올 심판을 예고할 때 어두움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내가 보니 땅은 혼돈과 불모요 하늘에는 빛이 사라졌다"(예레 4,23).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어두움은 항상 빛과 대조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어두움으로부터 빛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구원을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 밤의 어두움에 함축된 의미는 사악함이다.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서는 시각적 판별이 어렵다. 어두움은 악한 행위를 숨겨 모든 것을 더욱 사악하게 만든다. 사도 바오로는 이 같은 어두움의 특성을 잘 요약하고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 사실 그들이 은밀히 저지르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에페 5,11-12). 비유적 의미로 어두움은 무지나 어리석음, 선지자적 계시의 침묵, 거짓말 등으로 나타난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1요한 1,6). 또한 어두움은 죽음이나 무덤과 같은 이미지로 사용된다. "제가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어둠과 암흑의 땅으로 가기 전에. 칠흑같이 캄캄한 땅, 혼란과 암흑만 있고 빛마저 칠흑 같은 곳으로 가기 전에 말입니다"(욥 10,21-22). 비록 실제적인 감옥은 아니지만, 어두움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기력한 상황으로 감옥을 연상하게 한다. 영적 힘으로서 어두움의 세력은 너무도 생생해서 상징 이상의 의미로, 영적 실재를 나타냈다. 예수님께서 직접 "어둠의 권세"(루카 22,53)라는 언급을 하셨다. 사도 바오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라고 했다(에페 6,12). 어두움은 인간 사회와 우주 속에서 선함과 질서의 하느님께 대적하는 사악함과 연관된다. 어두움도 사실 하느님 통제 아래 존재할 뿐이다(욥 38,19). 하느님께서는 어두움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셨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둠 속에 살지 말 것을 단호하게 선언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2,8).조은일2009.02.10
![[성경 속 상징]33-소- 경제 변영과 쇠퇴 비유에 사용](//cpbc.co.kr/CMS/newspaper/2009/01/rc/27972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33-소- 경제 변영과 쇠퇴 비유에 사용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2009년은 기축년(己丑年) 소의 해다. 성별과 나이에 따라 송아지, 황소, 암소 등으로 부르고 용도에 따라 육우, 일소, 젖소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성실과 근면, 우직함과 충성심의 상징인 소는 우리민족에게 단순한 가축 이상 존재였다. 농사일을 위한 필수적 노동력이었고, 일상 생활에서는 운송 수단이었으며, 급한 일이 생겼을 때는 목돈을 장만할 수 있는 비상 금고 역할까지 했다. 고대 문명국은 일찍부터 일소를 사육했는데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4500년, 인도는 기원전 2500년, 중국은 기원전 2200년 께 소가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농경생활을 해온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인 502년 소를 이용한 우경(牛耕)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우경의 발달은 소와 관련된 농기구 발달을 가져왔는데 삼국사기를 보면 백성들이 우차법을 이용해 수레를 끌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으면서는 효율적 밭갈이를 해 생산력이 크게 향상됐다. 당시에는 농업 기술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근동에서 황소는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었고 강한 힘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는 맏이로 난 소, 그에게 영예가 있어라. 그의 뿔은 들소의 뿔. 그 뿔로 민족들을 땅 끝까지 모두 들이받으리라. 에프라임의 수만 명이 그러하고 므나쎄의 수천 명이 그러하리라"(신명 33, 17). 성경에서 소는 경제적인 면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소들은 밭갈기나(1사무 11,5) 타작이나 수레 끌기(1사무 6,7), 우유와 고기 등 식량 공급원이었다. 또한 소는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됐다(레위 3,1). 그래서 소는 경제 번영과 쇠퇴를 이야기할 때 적절한 비유로 사용됐다(창세 41,1-13). 또한 소는 풍요의 상징이었기에 반대로 하느님 진노하심의 표시가 가축 감소나 소멸로 나타나기도 했다(예레 5,17). 아모스 예언자는 사마리아 귀부인들의 지나친 무절제와 게으름을 비난하면서 그들을 "바산의 암소들"로 비유했다(아모 4,1). 바산의 암소는 그 우량함으로 유명했다. 또한 송아지가 제멋대로 뛰는 특성으로 주님의 날에 압제로부터 풀려 나온 하느님 백성의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말라 3,20). 하느님께서 소를 보호하신다는 이미지는 하느님 축복으로서 소 이미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침략자 곡의 멸망을 언급할 때 그들 잔치가 바산의 살진 짐승을 먹는 잔치와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너희는 용사들의 살을 먹고 세상 제후들의 피를 마실 것이다. 그들은 숫양과 어린 양, 숫염소와 송아지, 모두 바산의 살진 짐승이다"(에제 39,18). 시편 저자도 이스라엘 적들을 "바산의 힘센 소"(시편 22,13)로 비유한다. 또한 성경에서 송아지가 우상숭배라고 하는 나쁜 이미지에 사용된 것(탈출 32,1-6)은 아마도 이집트 신 아피스나 황소나 송아지를 타고 나타나는 가나안 신들에 대한 관습 때문으로 보인다. 소는 값비싼 가축이었기에 송아지를 먹는다는 것은 가장 특별한 경우에만 허용되는 일이었다(루카 15,23). 올 한해 우리도 소의 인내와 충직함을 닮아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 어떨까.조은일2009.01.13

그리스도의 세례[월간 꿈CUM] 성화로 읽는 신약 성경 (06) 피에트로 페루지노, 그리스도의 세례, 1482년경, 프레스코, 335x540cm,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시국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45~1523)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움브리아 출신 화가이다. 그는 1481년 여름에 코시모 로셀리, 산드로 보티첼리,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루카 시뇨렐리 등과 함께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부름을 받아 시스티나 성당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다. 벽화의 구성은 식스투스 4세 교황이 직접 구상했고, 교황이 직접 화가들에게 성당 벽에 재현될 장면의 주제를 선정해주었다. 그림의 주제는 구약에서 예고되고 신약에서 계시되어 성 베드로의 계승자들을 통해 영존하게 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찬양하는 것이었다. 화가들은 이 의미를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재현된 장면과 상징적 암시를 통해 구약과 신약의 일치를 명백히 부각해야 했다. 그에 따라 벽화에는 모세의 생애 일곱 개의 장면을 전면에 배치했고, 그 반대편에 예수님의 생애 일곱 개의 장면을 대칭으로 장식했다. 시스티나 성당 정문은 서쪽에 있고, 제단은 동쪽에 있으며, 모세의 생애는 제단에서 볼 때 오른쪽인 남쪽 벽에 배치되어 있는데, ‘모세의 발견’ ‘모세의 귀환과 그의 아들의 할례’ ‘모세의 시련과 소명’ ‘갈대 바다를 건넘’ ‘십계명과 금송아지’ ‘코라의 징벌’ ‘모세의 유언과 죽음’이 그 순서이고, 예수님의 생애는 제단에서 볼 때 왼쪽인 북쪽 벽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스도의 세례’ ‘그리스도의 유혹’ ‘제자들을 부르심’ ‘산상설교와 나병환자를 고치심’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시는 그리스도’ ‘최후의 만찬’이 그 순서이다. 그런데 제단에 그려진 ‘모세의 발견’과 ‘그리스도의 탄생’은 1536년에 제단 벽 전면을 채운 ‘최후의 심판’ 때문에 지워졌고, 제단 위 양쪽 벽에 그려진 첫 번째 장 면은 페루지노가 그의 조수 핀투리키오와 함께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와 반대쪽에 그린 ‘모세의 귀환과 그의 아들의 할례’가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가 한 쌍을 이루는 것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하여 많은 교부가 할례에 의해 예고된 세례가 ‘영적 할례’를 나타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세례 장면은 마태오복음 3장 13-17절, 마르코복음 1장 9-11절, 루카복음 3장 21-22절이 그 배경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9-11)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성부 하느님께서 보주를 들고 오른손을 들어 외아들을 축복하고 있으며,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예수님 머리 위에 내려앉고 있다. 성자와 성령과 성부가 그림 중심부 일직선상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머리 위에 물을 부어 세례를 주고 있는데, 광야에서 생활했던 요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고, 요한의 왼손에는 갈대로 만들어진 십자가가 들려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높은 곳에 서 있지만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혀 예수님께 경의를 표한다. 요한이 말한 대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요한은 점점 작아져야 하기 때문이다.(요한 3,30 참조) 예수님은 두 손을 합장하고 세례를 받으신다. 성부의 사랑스러운 외아들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요르단강 한 가운데 서서 세례를 받는 것이다. 예수님 뒤로는 세 천사가 예수님의 겉옷을 들고 있는데, 이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세 천사를 연상시키고,(창세 18,1 참조) 이들이 겸손하게 무릎을 꿇은 것은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고 완전히 비우는 케노시스(Kenosis)의 겸손을 실천한 것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배경의 푸른 하늘에서는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듯 새벽빛이 비치고, 그 앞에 개선문과 콜로세움과 교회와 성벽이 있는 로마가 보이고 강과 산과 골짜기가 있는데, 이는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루카 3,5) 하고 외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연상시킨다. 세례자 요한 뒤로는 세례를 받기 위해 한 남자가 돌 위에 앉아 옷을 벗고 있고,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주변에는 화가가 살던 시대의 사제와 귀족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세례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세례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요르단강을 경계로 왼쪽 배경에는 세례자 요한이 설교하고 있는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높은 언덕배기 주위에 몰려들어 세례자 요한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오른쪽 배경에는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 설교하고 계시는데,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십계판을 받았듯이 예수님께서도 산꼭대기에 올라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계신다. 하지만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 청중의 반응은 여러 가지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글 _ 손용환 신부 (요셉, 원주교구 북평본당 주임) 1992년 사제 서품. 원주교구 소속으로 16년간 군 사목을 한 후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였으며, 현재 북평본당 주임으로 있다. 저서로 「오색의 기도」 「하느님의 가장 좋은 선물」 「사제의 향기」 「맹 신부」 「어리석음의 승리」 「천주교 군종교구사」 등이 있다.cpbc2026.08.12
무덤- 죽음 넘어서는 새로운 생명](//cpbc.co.kr/CMS/newspaper/2011/06/rc/381633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121)무덤- 죽음 넘어서는 새로운 생명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시신을 묻은 무덤은 본래 주검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무덤은 죽은 이를 오랫동안 기리기 위한 상징적 성격이 강해졌다. 그래서 무덤 양식들도 여러 가지로 나타나게 됐다. 특히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풍수사상이 발달해서 조상 무덤은 자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다. 요즘에도 좋은 묏자리를 찾아 이장을 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따라서 무덤 양식을 통해 당시 생활상이나 믿음이나 풍속을 이해할 수 있다. 무덤은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상당히 넓고 길게 퍼져 있어 여러 가지 낱말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 능은 임금 무덤을 일컫는 것이고, 총은 흙으로 봉토를 쌓은 다음 나무를 심어놓은 무덤을 가리킨다. 묘는 흙으로 봉토를 만드는 대신 구조물을 세워 무덤을 보호하는 것이다. 유다인들 매장 방식이나 무덤 모양은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후에도 일종의 생존이 지속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덤을 죽은 이들 집으로 여기고 준비했다. 무덤을 유택(幽宅)이라고 부르는 동양과 비슷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덤은 죽은 이가 거처하는 공간을 상징한다. 이러한 무덤을 어디에 어떻게 마련하는지는 해당 지역 지형이라든가 망자의 사회적 신분, 그 시대 사고방식 및 문화와 밀접히 관련된다. 이스라엘인들이 살던 팔레스티나는 바위가 많은 산악 지방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자연 동굴이나 인공으로 판 굴을 집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죽은 이들 집도 이와 비슷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죽음 뒤 생존이 매장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고 생각했기에 화장을 하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화형에 처할 때나(창세 38,24) 전염병이 돌 때는 시신을 화장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죽은 이를 당일에 묻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다. 더운 지방이어서 시신이 빨리 부패하고 또 주검과 접촉하면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주검, 곧 죽은 사람의 몸에 닿은 이가 자신을 정화하지 않으면, 그는 주님의 성막을 부정하게 만든다. 그런 자는 이스라엘에서 잘려 나가야 한다. 정화의 물을 자기 몸에 뿌리지 않아, 그가 부정한 그대로이며 그의 부정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민수 19,13). 주검은 물론 무덤도 부정한 것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따라서 묘지는 일반적으로 성이나 동네 밖에 마련했다. 그러나 주요 인물들은 예외적으로 성이나 마을 안에 묻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임금들 무덤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다윗성에 묻혔다(1열왕 2,10). 신약에서 무덤은 예수님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생명의 상징이 된다. 예수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빈 무덤을 만난다. 예수님 빈 무덤은 역설적으로 영생의 희망을 상징한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루카 24,5-6). 이제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무덤은 죽음과 어둠의 상징이 아니라 산 이와 죽은 모든 이의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의 상징이다. 조은일2011.06.28
이혼- 하느님이 싫어하는 행위](//cpbc.co.kr/CMS/newspaper/2011/05/rc/377054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116)이혼- 하느님이 싫어하는 행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우리나라 이혼율이 가장 높다고 한다. 정서적 이혼율까지 포함한다면 전 세계 최고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혼사유에 대한 통계청 자료를 보면 부부 간 성격차이, 경제문제, 가족 간 불화 및 자기중심적 삶의 지향 등 가치관 변화가 이혼율 증가의 원인임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성격차이가 이혼사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결혼을 앞둔 사람들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중요한 조건으로 가장 많이 꼽는 것이 바로 성격이다. 결혼을 결심하는 중요 조건도 성격이고, 이혼하는 가장 큰 이유도 성격이라니 인간 삶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구약성경은 부부 사이 사랑과 정절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잠언 5,15-19) 이혼을 하느님이 싫어하는 행위로 표현한다(말라 2,16).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인들은 가정을 중시해 이혼이 실제로 이뤄지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 성경에서는 이혼사유를 여자가 추한 일을 행했을 경우만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후 유다인 사회에서는 추한 일의 범위에 대한 논쟁이 계속됐고, 남자에게 유리하게 해석됐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 이스라엘에서 부부가 갈라지는 것이 허락됐지만 이혼할 수 있는 주도권은 남편에게만 있었다(집회 7,26). 이혼사유가 있는 아내를 내보낼 때 먼저 남편이 부부 인연을 끊음을 선언하고(호세 2,4),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장을 써줬다(이사 50,1). 이혼을 당해 내쫓긴 여자는 이혼장이 있어야 다른 남자와 혼인할 수 있었다. 본래 성경에서 언급한 이혼규정은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남자들 권리를 행사하는 편리한 도구로 변질됐다. 그래서 간단히 이혼장만 써주면 남편은 자기의 아내를 내쫓을 수가 있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대해 엄격하게 가르치신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마태 5,32). 이혼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은 인간의 근본적 존엄성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예수님은 결혼의 인격적 결합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결혼이란 단순히 남녀의 인간적 선택과 행동을 넘어선 거룩한 행위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조은일2011.05.17
![[성경 속 상징] (115) 씨앗- 무게와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cpbc.co.kr/CMS/newspaper/2011/05/rc/375610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115) 씨앗- 무게와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할 때 겨자씨를 본 적이 있다. 성경에서 비유로 자주 등장하는 겨자씨의 크기는 1~2mm로 정말 작았다. 이렇게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2m가 넘는 겨자나무가 된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겨자씨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씨앗은 그 크기가 매우 작고, 무게가 얼마 안 나간다. 그 모양은 바람과 물, 동물 등에 의해 쉽게 옮겨질 수 있도록 생겼다. 씨앗의 수명은 매우 다양하다. 짧게는 몇 주일밖에 살지 못하는 것도 있고, 길게는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을 사는 것도 있다. 실제로 지난 2007년 경남 창녕 우포늪 바닥에서 창포씨앗이 발견됐는데, 이 씨앗은 탄소연대 측정 결과 1100여 년 전인 후삼국시대 것으로 밝혀졌다. 이 창포씨앗은 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생명력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고,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다. 씨앗은 생명과 생식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씨앗이 지니는 가장 큰 상징적 의미는 그 크기가 매우 작다는 점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씨앗 중에서 겨자씨가 가장 작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가장 작은 것의 상징으로 비유하신 이유는 갈릴레아 호수 근처에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식물이 바로 겨자나무였기 때문이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2). 바오로 사도는 부활 때 완성되는 인간의 구원을 설명하면서 다 자란 식물과 씨앗을 비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1코린 15,37). 성경에서 씨앗은 귀중함을 상징한다. 씨앗은 농업에 의존했던 고대사회에서 물물교환의 주요 수단이었고, 양식과 미래 곡물로서의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씨앗은 생산품이면서 동시에 생산자의 가치를 가진다. 또한 씨앗은 무게와 가치를 측량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모세오경은 씨앗 양에 따른 가치와 크기를 기록하고 있다. "누가 자기 소유의 밭을 주님에게 봉헌하고자 하면, 씨앗의 분량에 따라 그 값이 매겨진다. 보리 한 호메르의 씨앗 분량이면 은 쉰 세켈이다"(레위 27,16).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선 토양과 물, 정성어린 돌봄이 필요하다. 하느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제대로 자라도록 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서 가시나무나 돌밭에 뿌려진 씨앗들은 제대로 자라는 데 실패했지만 좋은 땅의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마태 13,1-8). 예수님은 또 하느님을 씨앗과 비유하기도 하셨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1요한 3,9).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씨앗의 죽음과, 그 후에 뿌리가 나고 싹이 트는 것을 신자들의 죽음과 연관지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조은일2011.05.03
 동굴- 짐승의 처소나 사람의 도피처](//cpbc.co.kr/CMS/newspaper/2011/01/rc/36459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102) 동굴- 짐승의 처소나 사람의 도피처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이스라엘 베들레헴에 가면 주님 탄생 성당이 있고, 그곳에는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라 전해지는 예수님 탄생 동굴이 있다. 베들레헴은 해발 777m 산악지대에, 동굴이 벌집처럼 많은 석회암 언덕의 비탈에 있다. 그렇기에 당시 베들레헴 사람들은 동굴을 손질해 물건 저장고, 마구간, 임시 가옥 등으로 일상에서 많이 활용했다. 또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은 밤에는 양들을 동굴로 데려가 짐승들에게서 보호하곤 했다. 우리나라에선 동굴이 흔치 않아 마구간과 동굴의 연결이 어색하지만 그곳 사람들에겐 그것이 일상이었던 것이다. 실제 성경에서도 동굴은 짐승의 처소, 또는 사람의 거주지나 도피처로 등장한다. "그 굴에는 사자가 일곱 마리 있었는데, 날마다 사람 몸뚱이 두 개와 양 두 마리를 먹이로 주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사자들이 다니엘을 잡아먹게 하려고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다니 14,32), "오바드야는 이제벨이 주님의 예언자들을 학살할 때, 예언자 백 명을 한 동굴에 쉰 명씩 숨기고 빵과 물을 대 주었다"(1열왕 18,4). 성경에서 동굴은 무덤으로도 많이 등장한다. "그 동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맞은쪽 막펠라 밭에 있는 것으로, 아브라함께서 그 밭을 히타이트 사람 에프론에게서 묘지로 사 두셨다"(창세 49,30),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요한 11,38). 이스라엘은 전 지역에 많이 분포된 석회암이 산과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땅을 파 시신을 매장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대신 주변 낮은 산에 석회석으로 된 천연 동굴이 많아 유다인들은 시체를 동굴에 매장하거나 바위를 파 인공 동굴을 만들어 무덤으로 사용했다.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신 후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묻히신다. "요셉은 아마포를 사 가지고 와서, 그분의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시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마르 15,46). 유다인들은 무덤 입구 바닥에 홈을 파고 둥근 돌로 막았는데, 이는 사람들이나 짐승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유다인들 장례식은 무덤 입구를 막고 인봉을 한 뒤 회칠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유다인들은 죽으면 동굴에 묻혔기에 동굴은 죽음과 암흑의 세계를 상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동굴은 생명이 깃들어 언젠가는 새롭게 탄생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됐다. 우리가 부활절에 나누는 달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동굴을 상징하기도 한다. 교회에서 동굴은 성인들과 관계가 깊다. 동굴의 성자라 불리는 안토니오 페체르스키 성인은 생애 절반 이상을 동굴에서 지내며 기도와 묵상, 극기의 삶을 살았다. 베네딕토성인도 동굴에서 은수자로 3년간 혼자 살았다. 이냐시오 성인도 화려한 옷을 벗고 고행의 복장을 한 채 10개월 정도를 동굴에서 기도와 극기의 생활을 했는데, 이때 영신수련의 기본 원리와 요점을 기술했다.조은일2011.01.18
![[성경 속 상징] 99- 악수- 상대를 안심시키는 호의적 표현](//cpbc.co.kr/CMS/newspaper/2010/12/rc/361625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99- 악수- 상대를 안심시키는 호의적 표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나라마다 인사말도 인사법도 각양각색이지만 가장 보편적인 인사법이 있다. 바로 두 사람이 손을 마주 내어 잡는 악수다. 악수는 여성이 남성에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기혼자가 미혼자에게 먼저 청하는 것이 예의다. 그리고 악수할 때 시선은 상대방 눈을 쳐다보는 것이 좋다. 한국에서는 상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무례하고 도전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서구에서는 눈빛이 마주치는 것을 정직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기에 외국인과 악수할 때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상호대등하게 악수를 나누는 것이 좋다. 악수를 할 때는 보통 서로의 오른손을 내밀어 마주 잡는 것이 일반적이나 양손을 내밀어 왼쪽 손을 상대방 손등에 얹거나 오른쪽 팔이나 어깨를 만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친밀감과 환영,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악수는 원래 인사보다는 적의가 없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중세시대 기사들은 칼을 왼쪽 허리에 차고 있다가 오른손으로 뽑아 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적으로 의심해 칼에 오른손을 대고 경계하며 다가가다가 상대방이 적의가 없음을 알게 되면, 칼을 잡는 오른손을 내밀어 서로의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의 표현으로 오른손을 마주잡았다고 한다. 악수는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하는 인사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 화해, 친밀감 등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인사법인 것이다. 성경에서도 악수는 상대를 안심시키는 호의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악수를 하는 당사자는 적의가 없음을 드러내며, 화해의 표시로 사용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에서 이러한 악수의 의미를 역이용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메넬라오스는 안드로니코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오니아스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안드로니코스는 오니아스를 찾아가 속임수로 그를 안심시키고 악수하며 맹세까지 하였다. 그래도 계속해서 의심하는 오니아스를 설득하여 신성 도피처에서 나오게 한 다음, 정의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바로 죽여 버렸다"(2마카 4,34). 성경에는 사도들이 악수를 나눈 것이 기록돼 있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함께 했던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등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정통적 사도로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과거 바리사이파였고, 그리스도교의 열렬한 박해자였다. 그런 관계로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곳에는 항상 많은 유다인들이 따라와 그의 사도권과 복음을 전하는 것을 문제 삼는 일이 많았다. 그러한 바오로 사도에게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사도가 친교의 악수를 청하며 바오로 사도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갈라 2,9). 이 악수에는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친교 표시가 담겨 있다. 또 바오로 사도를 예수님 제자로 인정함과 동시에 그가 전하는 복음이 자신들이 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조은일2010.12.21
![[성경 속 상징] 98-피- 그리스도의 피는 완벽한 정화](//cpbc.co.kr/CMS/newspaper/2010/12/rc/360830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98-피- 그리스도의 피는 완벽한 정화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피는 몸 속의 세포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고 세포의 신진대사에 의해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회수해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혈액량은 어떤 조건에서도 일정량을 유지하려 하며, 사람과 같은 척추동물의 피가 붉은 색인 것은 적혈구 안의 철분이 산소와 결합해 붉은 색을 띠기 때문이다. 이처럼 피는 우리 몸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피는 다양한 의미와 상징을 갖고 있다. 고대인들은 붉은 피가 생명,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피는 불안과 공포, 경외감을 느끼게 했으며, 폭력과 부정함, 죄, 임박한 심판에 대한 불길한 상징으로도 간주됐다. 반면에 희생제물을 언급할 때는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성경에서 피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상징한다. 피는 인간 생명의 원천으로 인간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다(1코린 15,50). 따라서 피가 없으면 인간은 흙으로 돌아간다. 피가 없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덧없음과 죽어서 썩어질 특성을 나타낸다(1코린 15,49). 반대로 피는 생명이 위태로움(2사무 23,17), 생명이 몸을 빠져나감의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또 피는 범죄로서 상징도 갖고 있다. 이는 폭력에 의한 죽음으로서 피의 이미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남의 피를 흘리게 한다는 것은 살인을 뜻한다. 그래서 살인자를 '피의 사람'(2사무 16,7)이라 부르고, 살인죄를 그냥 '피'라고 부르기도 한다(호세 1,4). 인간이 피를 흘리는 것을 더러운 죄라고 여기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죄하게 흘린 피는 그 땅까지 더럽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은 그러한 더러움이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거룩한 땅에서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민수 35,33-34). 피를 종교의식에서 사용하면 인간에게 속죄와 정화, 보호와 해방, 곧 생명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피는 성소와 성전 자체를 정화하고 속죄하는 데 쓰인다(레위 16,15-16; 에제 45,18-20). 또 성경시대 사람들은 피가 죽음의 힘을 막아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은 집 문에 피를 바름으로써, 피가 그들의 생명을 보호해주고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의 길을 제공한다고 여겼다(탈출 12장). 구약성경에서는 피를 먹지 말라고 단호하게 가르친다. 사람의 피는 물론 동물의 피를 먹는 것도 죄로 명시된다. 하느님께서는 피가 들어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이르신다(창세 9,3-4). 짐승의 생명이 피에 있고,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신명 12,23). 생명은 오로지 하느님의 것이다. 만물에 생명을 주고 또 거두는 것은 하느님의 절대적 권리다(창세 3,19). 따라서 생명과 직결된 피를 먹지 않음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짐승의 피를 먹는 것은 하느님의 주권을 거스르는 배신행위로 여겼다(1사무 14,33).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하신다(요한 6,54-56). 그리스도의 피는 완벽한 정화와 속죄, 해방과 거룩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로마 3,25).조은일2010.12.14
 웃음-인간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거울](//cpbc.co.kr/CMS/newspaper/2010/10/rc/352491_1.3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89) 웃음-인간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거울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80년 인생을 산다면 26년 잠을 자고, 21년 일을 하고, 9년 먹고 마시지만… 웃는 시간은? 겨우 20일." 한 광고 카피 내용이다. 현대인들의 부족한 웃음을 소재로 삼아 "웃을수록 행복은 더 커진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80년은 2만9000일이 훨씬 넘는 긴 시간인데, 이 긴 세월 동안 웃을 날이 겨우 20일밖에 없다면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속담에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있다. 웃음은 우리 삶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 웃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의 건강과 행복을 상징한다. 웃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하다. 웃음은 자연 진통효과가 있으며, 동맥을 이완시켜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혈압을 낮춘다. 또 웃음은 스트레스와 분노, 긴장을 완화시켜 심장마비를 예방하고 면역력을 높여 감기와 같은 감염질환은 물론 암이나 성인병에 대한 저항력도 높인다고 하니 그 효과가 놀라울 따름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보통 여섯 살 난 어린이는 하루에 300번, 성인은 겨우 17번 정도 웃는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웃는 횟수가 줄어드는 셈이다. 웃음으로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하니 건강을 위해서 억지로라도 웃어볼 일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주변 환경도 빛나게 한다. 또한 기쁘고 환한 얼굴은 인간관계도 부드럽게 하고 일의 성공에도 보탬이 된다. 사람들은 찡그린 얼굴을 싫어하고 피한다. 따라서 기쁘게 웃으며 사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성경시대 사람들은 진정한 기쁨과 웃음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라고 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 주겠지"(창세 21,6). 또 웃음은 인간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거울이다. "사람의 마음은 그의 얼굴을 좋게도 나쁘게도 바꿔 놓는다. 행복에 싸인 마음의 기운은 밝은 얼굴에 나타난다"(집회 13,25-26). 웃음은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이기도 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웃음으로 얼굴을 빛나게 하고 굳은 얼굴을 변화시킨다(코헬 8,1). 하지만 비웃음과 어리석은 웃음은 기쁨과 행복과는 정반대 의미를 지닌다.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 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1열왕 9,7), "어리석은 자의 웃음은 솥 밑에서 타는 가시나무 소리 같으니 이 또한 허무이다"(코헬 7,6). 또 대인관계에서 거짓 웃음을 경계하라고 했다. "그와 대등하게 말하기를 삼가고 그의 장황한 말을 믿지도 마라. 그가 너를 많은 말로 떠보고 웃음 지으며 너를 자세히 살필 수도 있기 때문이다"(집회 13,11). 웃음은 신앙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요소다. 웃음과 희망이 없는 고통만의 신앙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십자가 고통은 오직 부활의 환희와 기쁨을 전제로 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웃음은 삶의 습관이다. 웃지 않게 되면 어느덧 웃음을 잃어버린다. 작은 일에도 마음을 기쁘게 하면 늘 웃는 얼굴이 된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웃을 때 가장 기뻐하시지 않을까?조은일2010.10.05
 남편- 가족의 안정 등 모든 책임 져](//cpbc.co.kr/CMS/newspaper/2010/09/rc/34958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86) 남편- 가족의 안정 등 모든 책임 져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좋은 남편의 조건'에 대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아내 말에 무조건 '예'하는 돌쇠 남편, 둥글둥글 성격 좋은 굴렁쇠 남편, 언제나 아내 마음을 풀어주는 만능열쇠 남편, 친구들과 만날 때 지갑을 열지 않는 짠돌이 구두쇠 남편이다. 좋은 남편의 조건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과거 여성들은 좋은 남편의 조건으로 안정적 직장과 믿음직하고 든든한 가장 역할을 꼽았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많아진 요즘 아내들은 남편의 경제적 능력과 가정적 모습뿐만 아니라 아내의 사회생활을 이해하고, 가사부담을 함께하며, 취미와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남편을 기대한다. 현대사회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다. 대부분 가족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출산하며 역할을 확장해간다. 남자는 결혼과 출산을 통해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된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아지며 가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은 가정경제의 주요 역할을 남성이 맡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남성은 아버지와 남편, 가족 구성원을 부양하는 몫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경제가 초고속으로 발전하고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남성들은 가족 부양을 위해 경제활동에 전념했고, 이로 인해 아버지와 남편 역할에 소홀하게 됐다. 가족 구성원 간 감성적 교감을 할 시간이 없어진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경제활동에 전념할수록 가족과 멀어지고 가정에서 소외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런 현상은 가정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됐다. 성경에서 가장(家長)으로서 남편은 가족 구성원의 안정을 포함한 모든 책임을 진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파라오 앞에서 남편이 시킨대로 '남매지간'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사실을 알게 된 파라오는 사라보다 아브라함을 크게 책망했다(창세 12,17-20). 가장은 영적 지도자와 제사장 역할도 담당했다. "그는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창세 12,8). 또 율법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자녀들에게 전해야 했다.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 주어라. 또한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신명 6,7-8). 성경시대 남성이 가정에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것은 큰 죄로 여겼다(잠언 6,6-11). 필요한 경우에는 남편과 아버지로서 재판관 앞에서 자기 가족의 권리를 변호했다(신명 22,13-19). 가정에서 큰 책임을 맡고 있는 남편은 정작 자신의 행복을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찾는다. "좋은 아내를 가진 남편은 행복하다. 그가 사는 날수가 두 배로 늘어나리라"(집회 26,1).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부부와 그 가정에는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이 따른다. 성경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불변의 법칙이다.조은일2010.09.07
![[성경 속 상징]80-십자성호-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cpbc.co.kr/CMS/newspaper/2010/03/rc/329578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80-십자성호-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감동과 눈물을 안겨준 김연아 선수는 피겨 여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기로 세계기록을 경신하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2008년 '스텔라'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한 후 경기에 나설 때 십자성호를 긋고 경기장에 들어선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십자성호를 그으며 경기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TV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나타내는 십자성호는 가장 널리 알려진 상징으로, 이마와 가슴, 양쪽 어깨에 십자 모양을 긋는 것이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바치는 성호경은 가장 짧지만 가장 중요한 기도문이다. 십자성호는 바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동시에 가톨릭 신자임을 알리는 표시이기도 하다. 십자성호는 초기 사도시대 이래로 오늘날까지 교회에서 공적 전례를 거행할 때와 신자들이 사사로이 기도할 때 사용된다. 또한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식사 전후, 위험과 유혹이 있을 때에도 자유롭게 사용됐다. 본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훨씬 전부터 여러 대륙, 많은 민족 사이에서 종교적 징표나 상징, 또는 장식으로 사용됐다. 그러다가 페르시아인들이 십자가를 처형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로마에서도 기원후 4세기까지 십자가형을 극형으로 사용했다. 로마 시민도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특별한 경우에만 매우 드물게 시용됐다. 로마인들은 노예들이 살인이나 강도, 반역이나 반란 같은 죄를 저질렀을 때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노예 처형 방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처럼 십자가는 본래 처형 도구였다. 성경에서도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을 의미한다(신명 21,21-23). 따라서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치욕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신비롭게도 이 십자가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 20,19).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 뜻에 순종하셨다(필립 2,8). 십자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느님을 화해시키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도구가 된다(에페 2,13-16). 따라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삶을 의미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 십자가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신앙의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3-24). 이처럼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분의 구원 능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명백한 징표이다. 십자가는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 무덤을 비롯해 기념비나 동전, 관공서 서류 등 곳곳에서 사용됐다. 그리스도교가 4세기 말 마침내 로마제국 국교가 되면서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이 됐다. 조은일2010.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