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성월 특강 -4강] 성모님과 함께하는 은총이 가득한 삶이란](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5/21/1O61779328604440.jpg)
[성모 성월 특강 -4강] 성모님과 함께하는 은총이 가득한 삶이란 [황창연 신부의 신앙 특강] (4, 끝)cpbc 가톨릭평화방송은 5월 성모 성월을 맞아 특강을 기획했다. 황창연(수원교구 성필립보생태마을 관장) 신부가 강사로 나서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을 주제로 4차례에 걸쳐 강의한다. 본지를 이를 요약 정리해 과달루페 성모 발현 이야기와 의미를 전한다. 수원교구 성필립보생태관장 황창연 신부가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cpbc 5월 성모특강 화면 캡처 황창연 신부의 신앙 특강(4강) ▶ 다시 보기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 그 뜻을 되새기며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은총이 가득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은총이란 아름다움의 눈부신 매력, 내적인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광휘(빛)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성모님은 그 최고의 은총을 받으신 분이다. 그렇다면 성모님이 은총을 받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 이유를 제대로 안다면 우리도 은총을 받는 삶을 살 수 있다. 4강은 성모님의 삶 안에서 은총의 조건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산드로 보티첼리 작 '주님 탄생 예고', 1489~1490년경 . 첫 번째 조건: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열여섯 살 처녀 마리아의 반응은 흥분도 들뜸도 아니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한다. "그 말뜻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만약 우리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난다면 어떻겠는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두방정을 떨고, 온 세상에 알릴 소식이라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달려가 자신이 특별히 선택된 사람인 양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주 차분했다. 자신의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용히, 깊이 생각했다.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색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분명 기회를 주시고 때로는 채찍질을 치실 때도 있다. 그때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고 계신가. 어떻게 살아야 은총 안에서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허송세월하는 삶은 1년을 100년처럼 살아내는 삶이 될 수 없다. 두 번째 조건: 긍정적인 말과 생각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열여섯 살 처녀에게 임신을 고하는 이 말씀은 어처구니없어도 한참 어처구니없는 선언이었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아기를 가진다는 것은 당시 유다법으로 돌로 쳐 죽이는 중죄였다. 육체적 죽음과 정신적 죽음을 모두 감당해야 하는 요구였다. 마리아는 조용히 물었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천사는 답했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결심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한 마디가 최고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말씀이었다. 만약 마리아가 납득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늘나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과 삶의 방식이야말로 은총을 온몸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성경은 말과 생각의 방향이 운명을 바꾼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모세는 이집트를 탈출한 뒤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였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돌아보고 온 열 명의 보고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도저히 올라가지 못한다면서 자기들이 가서 정탐한 고장은 사람이 살지 못할 곳이라는 소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뜨렸다. 우리가 정탐하고 온 땅에 들어가 살려다가는 도리어 잡혀먹힐 것이다. 거기에는 키가 장대 같은 사람들이 있더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 그 사람들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온 회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 위에 들어가게 하시며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결국 부정적인 열 명의 말을 따랐던 60만 명은 광야에서 죽었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입성했다. 은총이 있는 사람은 똑같은 장소와 시간에 있어도 밝은 면을 바라보고, 은총이 없는 사람은 어두운 면을 바라본다. 긍정적인 말과 생각은 하느님이 기뻐 여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늘 함께하시는 역사(役事)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작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1491년. 세 번째 조건: 하느님의 뜻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 마리아는 그 어렵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먼저 엘리사벳을 찾아갔다. 나이 들어 임신한 친척을 위로하기 위해 무려 석 달을 함께 머물렀다.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었던 늙은 엘리사벳과,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어야 할 처녀 마리아. 이 두 분의 마음고생은 누구보다도 깊었을 것이다. 그 어려운 처지에서 마리아는 먼저 엘리사벳을 찾아가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주었다. 엘리사벳은 이렇게 화답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힘들 때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사람에게서 은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성모님은 당신만 잘난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이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며 모두를 이기게 해 주시는 분이었다. 네 번째 조건: 찬미하는 삶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있다.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이다. 임신한 처녀의 불안한 처지에서, 죽음의 위협 앞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우리는 찬양보다 바람이 훨씬 많다. 이것 해 주세요, 저것 해 주세요 — 하느님께 시키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마음이 설렌다는 표현,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생명을 부여받은 것, 푸른 산과 하얀 눈, 빗소리와 폭포 소리와 단풍,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 그릴 줄 아는 재능, 공짜로 내려주시는 공기와 하늘과 비와 햇빛 —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을 생각하면 어찌 가슴이 설레지 않겠는가. 찬미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찬미하는 사람만이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 맨날 달라고 청하는 사람은 찬미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은총도 덜 받는 것이다. 다섯 번째 조건: 이웃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삶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의 모습이 빛난다. 잔치를 즐기던 성모님은 가만히 살펴보다가 술이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주인의 마음으로 그 어려운 처지를 걱정하며 아들 예수님께 조용히 고했다. 새침하게 차려 놓은 음식만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성모님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걱정해 주고,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려 하신 분이었다. 남의 일을 걱정해 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삶이야말로 축복된 삶, 천당에 갈 수밖에 없는 삶이다. 예수님도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군중 앞에서 어느 누구도 질책하지 않으시고 서로를 뒤돌아보게 하셨다. 여인을 고발하던 이들이 모두 사라진 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들이 네 죄를 묻지 않았다면,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예수님은 승승승(勝勝勝)의 사랑 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이셨다. 당신만 잘난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이를 이기게 해 주시는 분이었다. 은총 가득한 삶이란 성모님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은총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곰곰이 생각하고 사색하는 사람. 둘째, 긍정적인 말과 생각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셋째, 하느님의 뜻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위로가 되는 사람. 넷째, 청하기에 앞서 찬미하는 사람. 다섯째, 이웃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걱정하고 실질적으로 돕는 사람. 가브리엘 천사의 고지에 마리아가 드렸던 그 한 마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이 말씀이야말로 은총 가득한 삶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성모님을 공경하는 삶이란, 결국 성모님처럼 생각하고 성모님처럼 말하며 성모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다. 그렇게 살 때 우리도 은총이 가득한 사람이 될 수 있다. cpbc2026.05.25

땀과 기도로 세운 신앙의 집... 141년 이어온 ‘일치와 성덕’ [리길재 기자의 공소를 가다] 34. 전주교구 진안본당 봉암공소 전주교구 진안본당 봉암공소는 올해로 설립 141주년이 되는 유서 깊은 공소이다. 봉암공소 전경. 전주교구 진안본당 봉암공소는 전북 진안군 부귀면 부귀로 86-14 봉암리 원봉암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이름이 봉암(鳳岩)으로 불리는 데는 두 유래가 있다. 약 400여 년 전 봉황이 이 마을 한 바위에서 나와 그때부터 봉암 마을이라 했다는 것이다. 봉황이 나왔다는 바위는 오늘날 흔적조차 없다. 다른 하나는 마을 뒤편에 마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의 봉란산(鳳卵山)이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봉암 마을의 옛 이름은 ‘미실’이었다. 해발 1126m 운장산 어귀에 자리한 고랭지 마을로 쌀이 많이 나서 불린 이름이다. 지금도 봉암 저수지 농업용수로 주민 대부분이 벼농사뿐 아니라 풍부한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공소 입구 옆 마당에 모신 성모상. 봉암공소는 오래된 교우촌이다. 진안 지역에 그리스도인들이 본격적으로 교우촌들을 이루고 산 것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다. 대부분 전라도 고산에 살던 교우들이 진안의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사 기록에 따르면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 충청도 금산과 용담, 내포 지방 교우들이 진안 지역으로 이주해와 살았고, 그들 중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덕산, 전주 숲정이, 여산, 나주 무학당 등지에서 순교했다. 봉암공소는 ‘일치와 성덕’을 지향으로 교우들이 매일 기도로 살아가는 모범적인 공소이다. 봉암공소 내부. 교우 30명 미실공소, 10년 새 교우 8배로 봉암공소는 조선대목구 소속 파리외방전교회 교황 파견 선교사 리우빌(Liouville, 한국명 유달영, 1855~1893) 신부가 1885년에 설립했다. 당시는 ‘미실공소’라 불렀다. 미실공소 설립 당시 교우 수는 30명에 불과했으나 10년 후인 1896년에는 232명으로 크게 성장했다. 리우빌 신부는 1874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878년 사제품을 받고 교황 파견 조선 선교사로 임명됐다. 그는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 주교가 체포돼 옥에 갇히는 바람에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만주대목구에 2년간 머물면서 우리말과 글, 그리고 한자를 익혔다. 그런 다음 1880년 두 차례 시도 끝에 그해 11월 조선 입국에 성공해 황해도와 서울, 충청도에서 사목했다. 그는 1884년 제7대 조선대목구장 주교로 블랑 신부가 임명되자 주교의 옛 임지를 맡아 6년간 전라도 지역을 사목했다. 이후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교수로 사제 양성에 헌신하다 1893년 4월 장염으로 인한 복막염으로 선종했다. 봉암공소가 10년 사이 8배 가까이 교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교우들의 열심함 때문이었다. 그들은 조선 왕조 치하에서 박해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철저히 기도 생활을 했고, 진실하게 살았다. 누구에게도 편파적이지 않았고, 마을의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신심 깊고 열심한 봉암공소 교우들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박해를 피해 봉암에 정착해 교우촌을 이루었던 그분들의 많은 후손이 아직도 공소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쁜 농사철에도 제일 먼저 공소를 찾아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봉암공소 교우들의 기도 지향은 ‘일치와 성덕’이다. 이제 나이가 지긋해진 교우 모두가 하나 되고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는 성덕을 키워가게 해달라고 나날이 기도하고 있다. 봉암공소는 ‘일치와 성덕’을 지향으로 교우들이 매일 기도로 살아가는 모범적인 공소다. 지금의 봉암공소는 공소 설립 100주년을 맞아 공소 교우들과 옛 본당과 지금의 본당 교우들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봉암공소 제대. 경운기 10대 몰고 와 새 공소 건립 힘 보태 지금의 봉암공소 건물은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1985년 9월 12일 봉헌했다. 그해 관할 본당인 한들본당이 폐쇄돼 진안본당 공소로 개편됨에 따라 공소 신축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런데 한들공소 청년들이 공소를 짓는데 돈을 보태진 못해도 힘은 보태겠다며 봉암공소를 찾아왔다. 이들은 공소 터를 파고 경운기 10대를 동원해 한들에서 모래 자갈을 싣고 왔다. 봉암공소 교우들이 급하게 시멘트를 구해 그날 기초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66.12㎡(20평) 규모의 공소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공소 교우 중 건축일 경험이 있던 몇몇이 나서 벽돌을 쌓고 미장을 했다. 그렇게 공소와 사제방이 있는 집이 번듯하게 세워졌다. 제대와 십자가, 성상, 십자가의 길 14처 등은 진안본당이 지원해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봉암공소는 공소 교우들과 옛 본당과 현 본당의 교우들이 힘을 합쳐 지은 하느님과 그 백성의 집이다. 봉암공소 교우들은 새 공소 건립과 함께 레지오 마리애 ‘샛별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창단하고 가톨릭 농민회 활동도 시작했다. 지금은 진안본당 관할 공소 가운데 이 두 활동을 가장 활발히 하는 공소가 됐다. 16명 레지오 단원 가운데 8명이 성경을 완독했고, 그 절반이 완필했다. 또 이들 모두 매일 평균 묵주 기도 300단을 하고 있다. 어은동공소와 한들공소의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와 똑 닮은 봉암공소 14처 성화들이 유서 깊은 공소의 흔적을 잘 보여준다. 신심 깊은 교우들의 기도 체험 풍성 기도를 통한 체험도 크다. 봉암공소 교우들이 몇몇 기도 체험을 자랑했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해야 했는데 교우들의 기도로 절단 없이 완치되었고, 한 교우가 대학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장례 준비를 해 놓았는데 공소에서 끊임없이 기도해 완치됐다고 한다. 봉암공소는 봉암 마을 주택가 안에 있다. 여느 옛날 시골집처럼 벽돌 집에 시멘트로 마감해 놓았다. 건물 안팎이 모두 흰색으로 칠해져 깔끔하다. 공소 입구 옆 마당에 성모상을 마련하고 아담한 정원을 꾸며놓았다. 공소 내부는 단출하다. 입구 왼편 벽면에 긴 책상 하나를 두고 그 양쪽에 의자를 놓아뒀다. 여기서 교우들이 기도하고 레지오 회합을 한다. 친교 모임도 갖는다. 책상 뒤편 중앙에 나무 제대가 있다. 정갈한 흰색 제대포 위에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 촛대가 놓여 있다. 그 뒤로 십자가가, 양쪽 벽면에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가 설치돼 있다.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는 어은동과 한들공소의 그것과 똑 닮았다. 올해로 공소 설립 141주년이 된 봉암공소는 여전히 ‘일치와 성덕’의 모범을 보여주는 유서 깊은 공소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6.09.09

바벨탑(The Tower of Babel)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월간 꿈CUM] 그리는 꿈CUM _ 미술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 1525~1569), 바벨탑, 유화, 참나무 패널, 114×155cm, 1563,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창세 11,4) 하늘 높이 탑을 쌓으려는 인류의 욕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99년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세워진 ‘페트로나스트윈 타워’(452m)는 미국이 독점해온 세계 최고층 타이틀을 처음으로 빼앗아 왔다. 하지만 이 건물을 곧바로 2위로 밀어낸 건물이 2004년 대만에서 나왔다. 101층, 508m 높이인 ‘타이베이 101’이 그것이다. 이 기록을 깨고 현재까지 세계 최고층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버즈 칼리파’(829.84m)다. 2024년 9월 현재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은 높이 679m의 말레이시아 ‘메르데카 118’ 빌딩이다.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의 ‘바벨탑’(The Tower of Babel)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바벨탑을 향한 인간 욕망에 대한 경고다. 그림 속 바벨탑의 중앙축이 기울어져 있는 것은 인간의 허영과 욕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드러내고 있다. 곧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움.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라는 경고. 이것이 화가가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였다. 화가는 또 바벨탑이 지닌 이중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인간의 욕망이 스스로를 억압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림 속 바벨탑은 그 아래 도시의 모든 생명을 눌러버릴 듯한 기세다. 하지만 바벨탑을 반드시 인간의 악이 초래한 절망적 사건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욕망의 꺾임 속에서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성경에 또한 녹아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바벨탑 이야기 바로 뒤에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다. 인간이 바벨탑을 지어 하느님께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결국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 선으로 이끄시는 노력을 멈추지 않으신다. 여기서 우리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인간 : 그 인간을 위해 낮은 곳으로 오시는 하느님’이라는 ‘상승하강 구조’를 읽을 수 있다. 낮은 인간은 바벨탑을 지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는데…, 높으신 하느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다. 우리를 인간적 욕망의 꼭대기가 아닌, 참 하늘로 올라가도록 하기 위해 아기 예수님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다.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에페 4,9) 2025.09.21
창간 38돌, 새 필진 새 연재 가톨릭평화신문이 창간 38주년을 맞아 필진을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가톨릭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교회와 사회를 잇는 데 노력하고 있는 환경·생명·평화·교육·지역 공동체·의료 등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합니다. 시사진단을 통해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는 식견을 넓히고, 평화칼럼을 통해 신앙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성찰하는 시간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 시사진단 새 필진 문명희(체칠리아) (사)에코나우 이사 △세종대 환경정책학 박사 △전 세종대 기후환경융합센터 연구위원 △전 한국환경보건학회 이사 △한국녹색제품구매네트워크 이사 △환경부 화학물질평가위원회 위원 △서울시녹색서울시민위원회 위원 △서울시 은평구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위원장 △서울시 도봉구 환경정책위원회 부위원장 △(사)에코나우 환경건강연구소 소장 김경아(마리아) 인천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 교수 △이화여대 간호학 박사 △전 삼성서울병원 중환자실 책임간호사 △전 우송대학교 조교수 △인천가톨릭대 부교수 △여성건강간호학회 교육위원 △대한간호협회 간호조무사 교육훈련기관 지정평가 위원장 △인천가톨릭대 프로라이프대학생회 지도교수 △생명을 위한 40일 기도 한국본부장 △주교회의 생명위원회 위원 조은나(루치아) 박사 서강대학교 아루페인문사회연구소 연구원 △서강대 신학대학원 신학과 교의신학 박사 수료 △세명대·충남대·전남대·경성대학교·부산예술대학교·용인송담대학교 외래 교수 역임 △코리아오페라티브컴퍼니 대표·경기더이음오페라단 이사·극단 각인각색 음악감독 역임 김홍주 신부 계성고등학교 지도사제 △가톨릭 교육 전공 교육학 박사 △가톨릭학교교육포럼 회원 △전)동성고등학교 지도신부 황민호(다니엘) 옥천신문 대표 △(사)커뮤니티저널리즘센터 이사장 △바른지역언론연대 이사 △충북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운영위원 △옥천FM공동체라디오 추진위원장 △옥천 농촌활력지원센터 자문위원 ▧ 평화칼럼 새 필진 조재선(베드로)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상임대표 △노곡중학교 교사 △도서출판 다시문학 편집 주간 △전)동성중학교 교사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디다케’ 편집 자문 위원 역임 △사회복지법인 ‘라쉬 친구들’ 이사 역임 △사회복지법인 ‘호스피스 코리아’ 이사 역임 박효실(힐데가르트) 기자 △스포츠서울 편집국 기자(부장급) 역임 △ ‘서태지-이지아 이혼소송’ 단독보도로 한국기자협회 제248회 이달의 기자상 수상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 출연 △BBC 탐사보도 다큐 ‘버닝썬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출연 가톨릭중앙의료원(CMC) 의학칼럼 가톨릭중앙의료원(CMC) 전문 의료진과 함께 독자들의 건강한 삶을 위한 건강칼럼을 새롭게 선보입니다. 외과·산부인과·성형외과·정신건강의학과·가정의학과 등 각 분야 전문의 및 교수진 9명이 참여하는 이번 연재는 질환 예방과 치료, 올바른 건강상식은 물론, 생명 존중의 가치를 담아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의료 정보를 전할 예정입니다. ▧ 새 코너 연재 프란치스코의 향기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희년’을 맞아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도자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성인이 창설한 남자 수도회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카푸친 작은형제회’입니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세 수도회는 성인을 사부로 모시는 프란치스칸 1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남긴 가난과 평화, 작음과 형제애의 향기는 프란치스칸들의 삶과 현존을 통해 8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연재에서 2026년 오늘을 살아가는 프란치스칸의 눈으로 프란치스코의 삶과 영성을 다시 비춰보고자 합니다. 기후위기와 전쟁, 경쟁과 고립의 시대 속에서 프란치스코의 길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되새겨봅니다. 프란치스칸을 통해 프란치스코의 향기를 전합니다. ‘성서와함께’ 가꾸는 기도의 정원 ‘성서와함께 가꾸는 기도의 정원’ 코너는 최근 동명의 책 「기도의 정원」을 출간한 도서출판 ‘성서와함께’와 동행합니다. 「기도의 정원」은 성 프란치스코 피정센터 명예 정원관리장을 지낸 원예가 마거릿 로즈 릴리가 정원을 가꾸며 체험한 영적 여정을 담은 책으로, 성경 및 그리스도교 예술과 건축에 자주 등장하는 꽃과 나무 등을 소개합니다. 새 코너에서는 책을 번역한 신지현(소피아)씨가 계절과 전례색에 맞춰 식물과 글을 발췌해 다듬고, 책에 실린 메리 스프레이그의 그림을 더할 예정입니다. 다수의 영미 도서를 우리글로 옮긴 신지현 통번역가는 국내외 기관에서 플로리스트 과정을 수료했고, 가톨릭 전례 꽃꽂이를 배우며 본당에서 꽃 봉사도 담당하고 있어 새 코너에 또 다른 싱그러움을 더할 것으로 기대됩니다.장현민2026.05.13
![[과학과 신앙] (50) 먼지가 되어(전성호 베르나르도, 경기 효명고 과학교사)](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10/15/PWW1728980105959.jpg)
[과학과 신앙] (50) 먼지가 되어(전성호 베르나르도, 경기 효명고 과학교사) 미국 록밴드 캔자스(Kansas)는 1977년 ‘Dust in the wind (바람 속 먼지)’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 곡은 밴드의 한 멤버가 미국 원주민들의 시를 모은 시집에서 ‘우리는 그저 바람 속의 먼지입니다’란 문장과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라는 구약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쓴 가사라 한다. 캔자스는 이 노래에서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우리는 모두 바람 속의 먼지입니다) / Dust in the wind (바람 속에 흩날리는 먼지) /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모든 것이 바람 속의 먼지입니다)’라며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서정적인 멜로디로 표현했다. 이 곡은 1978년 빌보드 인기 순위 6위까지 올라갔으며 전 MBC 라디오 DJ였던 김기덕씨가 네티즌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하고 펴낸 책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곡」(2002년)에도 포함되어 있다. 먼지란 사전적 의미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가벼운 고체 입자’로 바람에 의해 운반되고 중력에 의해 지표면에 퇴적된다. 먼지란 단어 자체는 굉장히 하찮은 뉘앙스를 주지만 인류의 시작은 캔자스의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먼지였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주요 원소는 질량을 기준으로 산소(65%)·탄소(18.5%)·수소(9.5%)·질소(3.3%)가 96% 이상을 차지하는데, 질량비가 아닌 개수로 가장 많은 것은 수소이며 몸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수소는 우주를 구성하는 비율이 75%나 될 정도로 우주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별의 주요 구성 원소가 수소이기 때문이다. 빅뱅과 우주의 진화 과정 이론에 의하면 생명체의 몸을 구성하는 수소는 우주에서 왔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인간의 몸을 이루는 원소들이 별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모두 별의 먼지(star dust)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 말을 통해 인류는 우주와 연결된 존재이므로 별처럼 빛나는 존재여야 하며 동시에 광활한 우주 속에서 겸손해야 함을 강조했다. 구약 성경도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고 하였듯이 인간의 시작과 끝은 먼지다. 그 옛날 권력과 부를 누리던 왕후장상(王侯將相)과 평범한 민초(民草)들도 결국 생을 마감할 때는 먼지로 돌아갔다. 11월 2일 주일은 교회가 정한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다. 나 역시 언젠가는 미래의 누군가에게 과거의 존재로 기억될 것이다. 정호승(프란치스코) 시인은 그의 시 「햇살에게」에서 ‘이른 아침에 / 먼지를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제는 내가 /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시처럼 나도 먼지이리라. 먼지로 시작하여 결국 먼지로 돌아갈 나의 삶이여! 캔자스의 노래처럼 속세의 풍파(風波) 속에서 흩날리는 먼지인 나는 어떤 존재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가? 세상을 흐리게 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황사나 미세먼지 같은 존재가 아니기를, 겸손하고 별처럼 빛나는 별의 먼지이기를 간구한다. 전성호cpbc2025.10.29
![나귀를 타고 오신 겸손한 왕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91)](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5/07/fdT1715067341708.jpg)
나귀를 타고 오신 겸손한 왕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91) 사순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던 이들이 곧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은 언제 생각해도 살벌하고 애처롭다. 고금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사람들의 환호는 종종 질투와 실망의 출발점이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원하는 상을 그려 놓고 열광하다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등을 돌린다.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되어 온 모습이다.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를 외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들이 아니다. 상당 부분 같은 군중이었고,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조차 최후의 순간에 함께하지 못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선택한 믿음이었고 무리의 분위기에 휩쓸린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는 신앙을 통해 자신이 돌봄을 받고 특별히 여겨진다는 경험을 갈구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믿으면 잘살게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세상의 삶이란 유한한 것을 나누는 구조이기에, 누군가가 이득을 보면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고, 어느 나라가 잘살면 다른 한편에는 반드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생긴다. 그러나 이단의 논리 구조는 대개 ‘믿음이 현세적인 성공을 가져오고, 그 성공이 곧 믿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반면 그리스도교 복음의 구조는 전혀 다르다. 믿음으로 주님 뜻에 따라 살며 회개하고, 그 끝에서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 어디에서도 주님이 현세의 성공을 약속하거나 성공을 부활의 조건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 현세에서의 부와 성공을 위한 신앙이라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예수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종려나무를 흔들던 이들이 곧 당신의 죽음을 외칠 것을 아시면서도, 그 운명을 거역하지 않고 나귀를 타고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셨다. 말이나 낙타가 아닌 나귀를 타고 가신 선택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은 힘과 전쟁·지배를 상징하고, 낙타는 부와 높은 지위를 떠올린다. 반면 나귀는 평화와 겸손, 그리고 일상의 짐을 묵묵히 지는 존재를 상징한다. 구약에도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고 예언되어 있다. 이는 주님께서 세속의 왕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것을 미리 알린 말씀이다. 이렇게 분명히 알려 주셨음에도 끝내 세속의 왕을 기대했던 인간의 어리석음 앞에서 혀를 차게 된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는 관현악곡 「로마의 분수」 중 ‘트레비 분수’ 악장에서 나귀가 끄는 마차 소리를 묘사한다. 그는 나귀를 도시의 화려함을 떠받치는, 평범하지만 중심을 이루는 존재로 그려내며, 찬란한 분수와 대비되는 소박한 생명을 드러낸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향해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로 묵묵히 걸어가던 그 나귀의 발걸음을, 이 곡을 통해 투영해본다. 리카르도 샤이가 지휘한 레스피기의 트레비 분수 //youtu.be/u4beF7X69hM?si=siONBndygT8sZI9U 작곡가 류재준cpbc2026.03.25
나는 주님을 찾습니다[월간 꿈CUM] 평신도 기도 출처: 월간 꿈CUM 우리의 희망이신 주님!나는 주님을 찾습니다. 그 얼굴, 그 모습을 형제들 가슴속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사랑, 기쁨) 그러나 무엇을 했나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루를 지내고 주님 앞에 앉아 뒤돌아볼 때 깊은 기도, 묵주 기도, 성경 읽기, 미사참례를 제외하고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한 일이 떠오르지 않지만 소소한 일을 꺼내보면, * 황톳길 걷다가 지렁이가 보이면 흙으로 보내주기 * 지인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며 이야기 나누기 * 교사들과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사랑 표현 많이 하기 의지적으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해 보기로 결심해 봅니다.그런 행동이 곧 열매이고, 기도하고 생활한 제물이 되어 봉헌될 테니까요. 말씀을 들으라 하셔서 듣기를 원했지만 주님은 언제나 침묵하십니다. 문득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이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침묵으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오감을 열어놓습니다. 들으려고만 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깊이 생각할수록 많은 지혜들이 생겨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희망의 시간을 보내면서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물은 마셔야 갈증이 해소되고, 밥은 먹어야 배고픔이 사라지고, 와서 보고 경험을 해봐야 깊을 맛을 느끼게 되겠지요? 아직은 미숙하지만, 언젠가 주님과 마주 보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날을 꿈꾸며 오늘도 하염없이 주님을 바라봅니다. 밝은 빛으로 눈을 뜨게 하시고, 생명의 말씀으로 귀를 열게 하시고, 아름다운 찬양으로 입을 열도록 끊임없이 이끄시며, 도움 주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기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글 _ 구정회 (프란체스카, 서울대교구 수락산 본당)2025.12.27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저는 믿나이다] (51) 한 분이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며 전능하시고 유형무형의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미켈란젤로, ‘천지 창조’, 프레스코화, 1511,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은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좀더 구체적이고 교리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본성과 실체와 본질에서 오직 한 분이시다”라고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어떻게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알 수 있느냐고요?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통해,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이 유일하신 분이심을 확실하게 알려주셨기 때문이죠.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 곧 “야훼”라는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을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써 당신이 누구이시며 어떤 이름으로 당신을 흠숭해야 할지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이름으로 당신만이 영원히 있는 분으로 모든 것의 시작이시며 마지막이심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고 일깨워줍니다. 그리스도교, 유다교, 이슬람교 등 야훼 하느님을 믿는 종교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주로서 만물의 근원이시며 초월적인 권위를 지니셨기 때문에 ‘아버지’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 분’(탈출 34,6)으로 당신의 모든 자녀를 자비와 사랑으로 보살피시기에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구세주이시며 아버지 하느님과 한 하느님이시다고 믿는 그리스도교는 유일하게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계시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당신 외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그 아들은 오직 당신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서만 영원히 아들이시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가톨릭교회 교리서」 240)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전능하심’은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을 ‘무한한 사랑’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다. 그분의 부성애와 전능은 서로를 밝혀준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심으로써(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에게 아들딸이 되리라 - 2코린 6,18), 그리고 무한한 자비를 통하여 아버지로서 전능을 보여 주신다. 당신 자비로 죄인들을 자유로이 용서하심으로써 그 권능의 극치를 드러내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70) 하느님의 전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부활과 영광을 통해 신비가 아닌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명료함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문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전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 어떻게 성부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성자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가톨릭교회 교리서」 278) 그리스도교는 아버지 하느님이 ‘창조주’이심을 믿습니다. 성경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하느님께서 유형무형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인간과 우주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기원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인간과 모든 만물의 존재 목적이 하느님께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동시에 우리의 행복을 돌보시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고백합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교 교령 「만민에게」 2 참조) “당신의 선하심으로 그리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유일하신 참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행복을 더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당신의 완전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들에 부여하신 선을 통하여 당신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가장 자유로운 계획 안에서, 모든 것을 한 번에, 한처음에, 유형무형의 피조물 하나하나를 무에서 창조하셨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드님」 1장) 교회는 창조의 업적을 아버지 하느님께 돌리기는 하지만,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창조의 유일하고 분리될 수 없는 근원이시라고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구약 성경 안에 암시되고 새로운 계약 안에 계시된, 성부의 창조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성자와 성령의 창조 활동은 교회의 신앙 규범으로 분명하게 확언된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 그분은 아버지이시고, 그분은 하느님이시며,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그분은 주인이시며, 그분은 만드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 자신, 곧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지혜를 통하여, 당신의 두 손이신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조는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공동 업적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92)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11.12
![[가톨릭 문화산책]<28> 영화(6) 맨오브 스틸(Man of Steel) - 대중 문화 속 하느님 구원 역사](//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6447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영화(6) 맨오브 스틸(Man of Steel) - 대중 문화 속 하느님 구원 역사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악 물리치는 '구원자' 그려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 2013) 감독 : 잭 스나이더 상영 시간 : 148분 장르 : 액션ㆍ모험ㆍ판타지ㆍSF 등급 : 12세 이상 과학자들은 지구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경고한다. 오존층이 파괴되고, 열대림은 소멸하며, 지구 온난화와 산성비 등 가시적 변화가 지구촌 도처에서 나타난다. 남극과 북극해를 뒤덮은 얼음은 예상보다 빠르게 녹아 해수면이 점점 상승한다. 홍수와 가뭄, 혹한이 정상적 기상 흐름을 잃은 지 오래다. 근대문명의 발달로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부상했고 자본과 권력은 신자유주의를 낳았다. 생명윤리를 외면한 유전자 조작과 생명 복제라는 비윤리적 생명공학이 현대 과학문명의 괴물로 자리를 틀고 있다.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인 '맨 오브 스틸'에서 말하고자 하는 파멸된 크립톤 행성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읽어내야 할 경고가 아닐까 싶다. #줄거리 무차별적 자원 개발로 멸망 위기에 처한 크립톤 행성. 이 행성 최고의 과학자 조엘은 그래서 갓 태어난 아들 칼엘을 지구로 보낸다. 자신의 존재를 모른 채 지구에서 클라크라는 이름으로 자란 칼엘은 남다른 능력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한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탄생과 성장 과정의 비밀을 듣게 되면서 혼란에 빠진다. 한편 크립톤 행성의 반란군 조드 장군은 파괴된 행성을 다시 재건할 수 있는 모든 유전자 정보가 담긴 코덱스(codex)가 칼엘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 부하들을 이끌고 지구에 온다. 이제 칼엘은 자신을 외면하던 사람들이 사는 지구의 보루가 돼 최강의 적 조드 장군과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전쟁을 시작한다.#새로운 시작 영화는 한 생명이 태어나는 장면에서 비롯된다. 수백 년 만에 산고를 겪으며 자연출산한 아이는 엘(EL) 가문의 아들이었다. 이름은 칼엘(Kal EL). 아버지 이름은 조엘(Jor EL)이었다. 'EL'은 엘로힘의 고대어로, 하느님과 같은 보통 명사이며 일반적으로 신성(神性)을 뜻하고, 동시에 고유명사로서 단 한 분뿐인 하느님을 지칭하기도 한다. 조엘과 칼엘은 하느님을 은유한다. 크립톤인들은 행성 표면의 자원을 모두 고갈시킨 후 그것도 모자라 행성의 중심핵까지 파내려가 결국 행성이 붕괴직전까지 간다. 이같은 급박함에도 조엘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크립톤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지구인들이 자신의 행성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아들을 지구로 보낸다. 크립톤 행성의 파괴는 오늘날의 생태계와 환경호르몬으로 죽음의 위기를 겪는 지구를 보여주는 비유(metaphor)이기도 하다. 조엘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칼엘에게 말한다. "가슴의 'S' 마크는 '엘'가문의 상징인 '희망'을 의미하지. 그 안에 믿음이 있어. 선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네가 그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믿어라"하고 말한다. 어머니 라라도 칼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새롭게 재생될 믿음과 희망을 암시하는 시작이다. #공존의 길 크립톤 행성의 대장 조드는 크립톤 행성만 살리는 데 목숨을 건다. 그는 힘을 앞세워 살상과 반란의 칼을 휘두른다. 조드는 자신의 종족을 구하고 영원히 번영하기 위해 열등한 혈족은 제거하고 우열족만을 살리려 한다. 한편 북극에서 만난 칼엘에게 조엘은 이렇게 말한다. "10만 년 동안 번영했었지…. 기적을 일궈냈던 거지…. 인위적으로 인구 조절을 했고, 아이들은 사회에서의 역할이 정해졌지. 노동자와 군인, 지도자 전부 말이야. 네 어머니와 나는 뭔가 중요한 걸 잃었다고 생각했지. 선택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 소중한 가치를…."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칼엘이라고 말한다. 조엘은 모든 생명체의 공존, 크립톤 종족과 지구인, 모두의 중요성을 칼엘에게 말한다. "넌 크립톤의 자식이자 지구의 자식이기도 해. 네가 원한다면 두 세상의 자식이 되어 다오." 그리고 두 종족 간에 다리가 돼 구원자의 역할을 하길 바란 것이다. 지구인들은 또한 거대 문명의 지배 속에서 충분히 폭력적이었고,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로 멸망 위기를 겪고 있다. 새로운 지구 건설은 모든 생명체가 함께 나누고 누리며 숨 쉬는 세계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는 던진다. 칼엘은 캔자스 주 스몰빌에 내려와 클라크라는 이름으로 산다. 신적 능력을 간직하고 있지만,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소박한 지구의 삶을 지구 부모에게 습득한다. 지구 아버지 켄트는 아들이 감정을 절제하고 분별력있게, 또 능력을 균형 있게 활용하라고 조언하며 신뢰로 동반한다. 그러나 칼엘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지구에 살고 있는지 의문을 품는다. 켄트는 클라크에게 칼엘의 현존 자체가 기적이고, 지구 외에도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해준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이유를 알게 될 때를 기다리게 한다. 열등한 인종도, 우열한 인종도, 심지어 미생물까지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칼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때가 도래해야 함을 말한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투신 칼엘은 자신의 초능력을 감추고 살아가지만 위험에 처한 약자들을 위해 흘러넘치는 사랑을 숨기지 못한다. 통학버스가 강에 빠지자 어린이를 구해 주고, 유조선이 폭발하자 초능력으로 철근을 막아낸다. 그의 사명은 악만 빼고 누구든지 살리는 일이다. 드디어 그의 때가 왔다. 칼엘은 북극에 숨겨진 크립톤 비행선에서 아버지 조엘을 만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뒤 그의 눈빛과 몸에서 초능력을 감지한다. 이때 조드 장군이 지구를 찾아와 크립톤 행성의 유전자 정보가 담긴 코덱스를 24시간 안에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를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한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칼엘은 "넌 평범하지 않아. 언젠가 선택의 날이 올 거야"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칼엘은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번민을 털어 놓는다. 등 뒤로 보이는 겟세마니 예수님 그림은 고뇌하는 칼엘의 심정과 겹치는 상징이다. 신부는 오로지 믿음에 따라 행동할 것을 권한다. 칼엘은 지구와 인류를 위해 투쟁할 것을 결심한다.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결전에 나선다. 싸움 중 조드가 칼엘에게 한 말을 기억해보자. "네가 받아들인 인간들을 고통받게 해 주마. 인간을 그렇게까지 사랑한다면 그들 죽음에 눈물이나 흘려." 불을 뿜어대는 악의 상징이다. 칼엘은 죽어가는 인간을 바라보며 그의 말대로 눈물을 흘린다. 천신만고 끝에 칼엘은 승리한다. 여기서 마지막 장면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다. 평범하지 않는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주시해야겠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칼엘의 모습. 드러나지 않지만 누룩과도 같은 존재, 오늘날 구석구석에서 선을 퍼뜨리는 또 다른 우리 중의 누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맨 오브 스틸'은 전형적인 미국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다. 따라서 미국적 강인함과 불굴의 영웅상을 연출했다. 이 영웅상은 타 문화에 대한 개방과 위기를 극복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된 메시지가 도드라진다. 그래선지 웅장하고 화려한 서사 구조와 극적인 장면들은 다소 지루해 보이기도 하고, 무자비하게 그려진다. 진정한 관용이 어디쯤에서 발휘돼야 할지 묻고 싶어지는 부분이 적잖은 영화다. 그룹대화 1. 생명공학을 앞세워 파괴되는 지구 환경과 유전자 조작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2. 나는 주체적으로 지구 위기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3. 유전자 조작을 막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성경구절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이복순 수녀(성 바오로딸 수도회)조은일2013.07.30

주님의 날을 준비하여라[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5·끝) 요한 묵시록 신약 성경의 마지막 정경인 요한 묵시록은 주님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라고 권고한다.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 1536~1541,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요한 묵시록은 읽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정경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성경의 여느 정경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많은 상징을 담은 ‘환시’를 통해 종말에 드러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를 전달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요한 묵시록을 읽고 그 내용을 제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의 권위 있는 주석과 주해를 바탕으로 요한 묵시록을 대해야만 이 정경을 제대로 읽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신약 성경의 마지막 정경입니다. ‘계시’ ‘묵시’ ‘묵시록’으로 번역된 헬라어 성경 본문을 ‘아포칼립시스(Αποκαλυψιs)’라고 합니다. 아포칼립시스는 우리말로 ‘가려져 있는 것을 열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곧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묵시문학과 예언서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묵시문학에서는 한 인물에게 어떤 초월적인 내용이 전달됩니다. 그 내용은 시간적으로는 종말에 관해, 공간적으로는 천상 세계에 관해 계시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계시받는 사람이 그 받은 내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천사나 다른 어떤 존재가 해석해 줍니다.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 묵시록이 묵시문학에 속합니다. 물론 예언서에도 환시가 등장합니다. 아모스·예레미아 예언자가 환시를 보았지요. 또 예언서도 ‘주님의 날’인 종말에 관해 말합니다. 아모스·즈카르야·말라키 예언자가 종말을 경고했지요. 하지만 묵시문학의 종말은 예언서의 그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예언서는 종말을 말하지만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고한 종말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의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의 종말은 현재의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 역사의 흐름이 단절되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시작됨을 나타냅니다. 묵시문학은 미래에 닥칠 종말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세사 전체를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앞이 보이지 않는 현재를 하느님의 계획 일부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Αποκαλυψιs Ιωαννου(아포칼립시스 요안누)’,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Apocalypsis(Apocalypsis B. Ioannis Apostoli)’, 한국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요한 묵시록’으로 표기합니다. 교회는 요한 묵시록의 저자를 넷째 복음서를 쓴 요한 사도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과거부터 넷째 복음서와 묵시록은 한 저자가 썼다고 하기에는 문체와 신학이 너무 다르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 예로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의 그리스도론이 중심인데 반해 요한 묵시록에는 육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성경학자 중에는 팔레스티나 지역에 살다가 유다 전쟁(66~73년) 이후 소아시아 지방으로 이주한 유다인 출신 순회 예언자 중 한 명이 묵시록을 저술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로마의 황제 숭배 의식이 강요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말기의 박해 상황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어 95년께 쓰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요한 묵시록의 수신인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입니다.(1,4.11; 2─3장) 에페소·스미르나·페르가몬·티아티라·사르디스·필라델피아·라오디케이아 교회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요한 묵시록은 이 일곱 교회에만 보내진 종말에 관한 계시가 아니라 소아시아 전체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이라고 설명합니다.(22장 참조) 가장 큰 이유는 ‘7’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일곱, 곧 7은 하느님의 세상 창조에 필요했던 시간으로 이후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약속된 것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부터 주어진 하느님의 구원을 위한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을 드러냅니다. 요한 묵시록은 22장으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짧은 편지(1─3장)와 환시들(4─22장)로 구성돼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일곱 교회에 ‘니콜라오스파’를 경계하라고 경고합니다.(2,6) 이들은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2,2), “사탄의 무리”(2,9),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2,14), “이제벨이라는 여자”(2,20), “사탄의 깊은 비밀”(2,24)로 우상 숭배를 조장하고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환시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환시는 ‘어좌에 앉은 분’과 ‘어린양’에 대한 환시로 이뤄져 있습니다. 어좌에 앉은 분은 하늘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어린양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12번에 걸쳐 표현되는 스물네 원로는 천사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과 성가대를 나타내는 숫자에서 왔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1역대 24─25장 참조) 또 사자·황소·사람·독수리로 묘사된 네 생물은 네 복음서를 상징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종말의 모습을 악의 세력과의 전쟁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사이에 ‘천 년 통치’라는 중간 시간을 계시합니다. 이 시기는 ‘평화의 시대’(이사 11,1-9)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실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환시입니다.(마태 19,28) 신약 성경의 마지막 정경인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주님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리길재 선임 기자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4.10.30

속죄와 참회로 지내는 사순 시기 사순 의미와 전례 특징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창세 3,19)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첫날이다. 성경에서 ‘재와 먼지’는 속죄와 참회의 상징으로,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참회와 슬픔을 표현할 때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자루 옷을 입었다.(2사무 13,19; 에스 4,1) 이러한 참회 예식이 교회 전통 안으로 받아들여지며 재의 수요일이 형성됐다. 이날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는다. 이를 통해 인간은 흙에서 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겸손과 회개의 삶으로 돌아가도록 초대받는다. 재의 수요일은 단식재와 금육재를 함께 지켜야하는 날이기도 하다. 재의 예식의 핵심 의미는 단순한 참회를 넘어 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데 있다. 하느님 뜻에 따라 회개하고, 하느님께 향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라는 권고가 담겨 있다. 올해 재의 수요일(18일)은 설 명절 공휴일과 겹친다. 재의 수요일은 보편 교회가 동일한 날짜에 지내는 전례일로, 변경할 수 없다. 재의 예식에 참여하려면 당일 미사에 참여해야 한다.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는 사순 시기는 참회와 속죄를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기간으로, 5주간 이어진다. 이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맞이하며 전례력 중 가장 거룩한 시기인 성주간이 시작된다. 성주간 중 성목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신비를 기념하는 파스카 성삼일이다. 전례력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목요일에는 성유 축성 미사와 주님 만찬 미사가 거행되며, 성금요일에는 미사 없이 말씀의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로 구성된 수난 예식만 거행된다. 성토요일은 예수님의 무덤 곁에 머물며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날로, 해가 진 뒤 파스카 성야 예식을 통해 부활의 기쁨을 맞이한다. 이날은 시간전례 외에 다른 전례가 없는 유일한 날이다. 사순 시기 전례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알렐루야와 대영광송, 사은 찬미가를 바치지 않는 것이다. 제의는 회개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바뀌고, 성인 축일도 이 시기에는 기념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 말씀과 성사, 전례를 통해 신자들이 신앙을 더욱 깊이 성찰하도록 이끈다. 특히 십자가의 길 기도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고 공동체와 다시 결합하도록 권고한다. 사순 시기의 단식과 고행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자선, 수난과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희망과 깊이 연결돼 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박민규2026.02.11
![[생활속의 복음] 산 이들의 하느님](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3/18/ZFV1773800245402.jpg)
[생활속의 복음] 산 이들의 하느님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라자로의 소생’, 1517년~1519년. ‘카나의 혼인 잔치’를 시작으로 일곱 표징을 배열하는 요한 복음은 ‘죽은 라자로의 소생’을 마지막 표징으로 소개한다. 이 표징 때문에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11,45-57 참조)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11,3)이며 “친구”(11,11)인 라자로를 살린 표징에서 예수님의 ‘눈물’(슬픔)이 눈길을 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우는 장면(루카 19,41 참조)과 대조하여, 예수님은 죽은(잠든) 친구 때문에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져’(11,33 참조) “눈물을 흘리셨다.”(11,35) ‘예수님이 참 하느님’(1,1 참조)임을 도입부터 주창한 요한 복음은 눈물을 통로로 ‘예수님이 참 인간’임을 공표하였다. 예수님은 아픔과 슬픔을 느끼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흙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나 흙으로 돌아가듯”(집회 41,10)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죽음은 자연의 이치다. 인간의 죽음은 의학적 관점에서 심폐 혹은 뇌 기능의 영구적 정지로 정의된다. 그리스도교는 이와 다른 관점에서 죽음을 이해한다. 신앙 언어의 고유 의미가 일상 언어와의 혼용으로 인해 곡해되는 사례들이 발생하는데, 대표적 예가 죽음이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은 세상 창조 후 ‘세상 밖에서’ 방관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이다.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라는 전례 문구가 이를 표명한다. 하느님의 지속적인 창조 업적에 대응하여, 슬픈 숙명인 피조물의 죽음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요청된다. 성경은 첫 인간의 죄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보도한다.(로마 5,12 참조) 죄는 일차적으로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과의 ‘친교 거부’이며, 그 결과인 죽음은 ‘단절 상태의 연속’(하느님 밖)이다. 반면 생명은 ‘하느님 안’에 있는 상태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죽음과 관련하여 이렇게 부연한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4)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 안’(무덤)에 갇힌 인간을 ‘생명 안’(부활)으로 해방하였다.(에페 2,5 참조) 인간은 ‘죽음 전’(이승)과 ‘죽음 후’(저승)의 분리에 익숙하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위령 감사송 1)이라고 고백한다.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산 이들(생명)의 하느님’은 ‘죽음 안’(어둠/거짓 속)에서 ‘생명 안’(빛/진리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사망진단이 내려진 망자가 ‘생명 안’에 있을 희망을 제시하는 사후세계 교리는 ‘생명’(하느님 안)과 ‘죽음’(하느님 밖)의 경계에 선 이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면서 ‘죽음 후 생명 안’(천국)에 있기 위해 ‘죽음 전 생명 안’(사랑)에 있기를 재촉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14) 라자로를 무덤(죽음 안)에서 나오게 하였듯, 태초부터 ‘생명 안’(아버지 안: 10,38 참조)에 있는 예수님은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 곧 ‘생명 안’(아들 안: 3,15 참조)을 선사한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참 인간’으로 죽고 묻히셨으며, ‘참 하느님’으로 부활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cpbc2026.03.18

서툰 가위질에서 희망의 박음질로… 난민 자립 일구는 ‘함께’ 공동체부활르포 - ‘함께’ 공동체 의정부 엑소더스 ‘평화공간’에서 2024년 재봉틀 교육으로 시작 패브릭 브랜드 ‘함께’로 성장 수익보다 ‘성장 가치’에 무게 둬 재봉틀로 이주민·난민의 경제적 자립을 꿈꾸는 핸드메이드 패브릭 브랜드 ‘함께’ 공동체 구성원들이 한국 봉사자들과 함께 동두천성당 내 작업실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전쟁과 기후위기, 종교 박해로 전 세계 난민은 1억 명을 훌쩍 넘어섰다. 난민 문제는 현재 국제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꼽힌다. 우리나라도 난민협약 가입과 난민법 시행으로 대응해왔고, 교회 역시 이들을 ‘가난한 이 가운데 우선되는 형제자매’로 보며 보호와 환대를 강조한다. 레오 14세 교황은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는 ‘희망의 선교사’로서 이들이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는 주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법도 교황의 메시지도 현실 안에서 손을 내밀어 주는 이들이 없다면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만다. 제도가 닿지 못한 빈자리를 아무 조건 없이 메워주는 이들 덕에 새 생명이 움튼다. 부활 시기를 맞아 이주민·난민들이 재봉틀로 희망을 꽃피운 ‘함께’ 공동체를 찾았다. 이주민·난민들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신앙 매주 토요일 의정부교구 동두천성당 지하 교리실 한편에선 아프리카 이주민·난민들의 재봉틀 작업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오른쪽 상단이 조금 비뚤어졌네요. 여기를 잡고 더 내려서 박음질해야 해요. 이건 합격! 오늘 공임비는 10만 원이에요. 고생했어요.” 일주일간의 작업을 마친 이들은 꼼꼼한 검수를 거쳐 보람을 확인한다. 공임비를 받아든 순간,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에 몸을 맡기며 기쁨을 표현한다. 처음엔 직선 긋기조차 어려웠던 손끝이 1~2년 만에 재봉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들이 만든 결과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제품은 매일미사·성경·성무일도 커버와 묵주 파우치다. 한 땀 한 땀 손끝에서 시작된 공동체의 온기가 신앙인의 기도로 이어지고, 다시 제품을 만드는 거룩한 순환이 이곳 ‘함께’에서 이뤄지고 있다. 함께’ 소속 아프리카 출신 이주민들이 작업물을 들어 보이고 있다. 우연한 시작 시작은 ‘우연’이었다. 서성희(안젤라, 의정부교구 마두동본당)씨는 동두천에 있는 의정부 엑소더스 ‘평화공간’에서 사용하지 않는 재봉틀 5대와 자재를 발견했다. 코로나19로 중단된 재봉 교실의 흔적이었다. 그 자리에서 이주민들이 재봉에 관심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곤 바느질 잘하기로 소문난 본당 교우 주현영(엘리사벳)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통역은 주씨 남편 김장섭(프란치스코)씨가 맡으면서 3명의 봉사자가 아프리카 출신 이주민·난민 5명을 대상으로 2024년 2월 17일 재봉틀 교육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봉틀 사용법과 기초 바느질 기술을 교육하는 4~5주 과정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위질조차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정밀한 수작업을 요구하는 재봉과 바느질은 결코 짧은 시간에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다음 기수 참여를 희망하는 이들도 생기면서 자연스레 2기, 3기 교육이 이어졌다. 선한 사람들 미약한 시작이었기에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봉사자와 교육생 모두에게 난관의 연속이었다. 늘지 않는 실력에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면 그 뜻에 동참하는 이들도 생기기 마련이다. 교우들의 후원으로 중고 재봉틀을 기증 받았고, 교육생들은 가정에서도 연습할 수 있었다. 봉사자들도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 영상을 제작해 한글과 영어 자막으로 공유했다. 원단 수급이나 기타 비용 문제가 생길 때도 적절한 조력자가 나타났고, 작지만 후원회도 꾸려졌다. 그렇게 선한 이들의 뒷받침 속에 교육생들의 기술은 눈에 띄게 향상됐다. 교육을 수료한 이주민이 강사가 되는 경우도 생겼다. 이주민·난민이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함께’가 만든 매일미사 커버 야훼이레 단기 교육으로 시작했지만, 제품을 판매해도 좋겠다는 데 뜻이 모였다. 마침내 교육 시작 7개월 만인 2024년 9월 29일 ‘엑소더스 축제’를 통해 핸드메이드 패브릭 브랜드 ‘함께’가 첫 선을 보였다. 이후 교구 봉사자 연수와 피정, 본당의 날 등 다양한 현장에서 판매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성물 판매소와 소품 매장 등과도 협력해 계속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갑곶 성지에서 상설판매도 시작했다. 품목도 앞치마와 손수건·스카프 등 40여 개로 늘어났다. 가나 출신 글라디스씨는 “취미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직업 의식마저 생겼다”며 “재봉 일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좋을 것 같다”고 열정을 보였다. 열정에 답하듯 지난해 1월에는 모든 사용 비용을 무상으로 지원받으면서 동두천성당 지하 교리실로 작업장을 이전했다. 현재까지 6기, 30명이 참여했고, 그중 13명이 활동하고 있다. 4월 1일 7기가 시작됐다. 서성희씨는 “야훼이레,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일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고 말했다. “사실 이 일을 하기 전까진 이주민과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어요. 부끄럽지만 관심이 크게 없었죠. 지금은 저희 봉사자들 집이 원단으로 가득 차 있을 만큼 ‘함께’는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가족 공동체 ‘함께’ 짐바브웨 출신 아폴로니아씨는 세 자녀와 함께 작업실을 찾는다. 모임에 가지 못하는 날이면 아이들이 먼저 아쉬워할 정도다. “여기서는 모두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느낌입니다. 제가 바느질 기술을 배우면, 아이들은 소통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 덕에 자폐가 있는 첫째 아이도 이곳에서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슬람 무장세력의 종교 박해를 피해 한국에 정착한 나이지리아 출신 기프트씨는 2기 교육생으로 참여해 현재 강사가 됐다. 그는 “한국 교회의 환대 덕에 자리를 잡아 아들도 복사를 서고 있다”며 “‘함께’ 공동체 일원이 되면서는 더 끈끈한 가족애가 생겼다”고 했다. 이웃사랑과 관심으로 신앙도 더욱 단단해진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어려워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한국 봉사자분들과 남편 격려로 다시 나올 수 있었어요. 하다 보니 욕심이 나더군요. 실력을 키워 가르쳐주신 보람을 안겨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손으로 만든 성경 커버를 보고 선생님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요.” 기프트씨를 처음부터 이끌어온 주현영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두 손 크게 하트를 만들어 화답했다. 서성희씨도 “돌려받지 않아도 줄 수 있는 사랑을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교육생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큰 걸 받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봉사자 선주민과 교육생 이주민은 서로가 서로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이렇듯 ‘함께’는 이주민·난민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공동체면서, 일주일에 한 번 한자리에 모이는 가족 공동체 역할도 하고 있다. 희망의 선교사 하지만 공동체가 커지고 판로가 늘어나면서 봉사자 인원 부족과 판매 구조의 지속 가능성, 재정 안정성 등 구조적 한계도 드러났다. 이에 ‘함께’는 사회적협동조합 설립을 꿈꾼다. 법적·재정적 지원을 확보하고, 조직 운영의 안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김장섭씨는 “단순한 수익 창출을 넘어 이웃에 제품을 기증하는 ‘상생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며 “이 과정을 통해 이주민은 도움받는 대상에서 자신의 노동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희망의 선교사’이자 사회적 가치 창출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미 저희 모습 안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낯선 땅에 뿌리내리며, 서툰 손끝으로 한 땀 한 땀 새 삶을 꿰매온 이들이다. 어둠 끝에 비치는 부활의 빛처럼, 그렇게 바늘이 지나간 자리마다 공동체는 ‘함께’ 살아나고 있다. 후원문의: 0505-566-0001 박민규 기자 mk@cpbc.co.kr박민규2026.04.08

영원한 생명 희망하도록 생의 마지막 동반청년들을 위한 생명 지킴 안내서(50·끝) 영화 ‘리스본 특급’에 출연했던 배우 알랭 들롱의 생전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즈 제10장 삶의 끝에서 – 죽음과 고통의 문제 결론 현대 사회의 문화적 분위기에서는 사실 죽음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것이며, 피할 수 없다면 안락사와 같은 방법으로 고통의 시간을 줄이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이는 더 많은 돌봄과 관심을 받아야 하는 말기 환자의 삶과 생명을 경시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렇게 해 주는 것이 그를 위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그가 희망을 잃지 않고 인간으로서 품위 있는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동반하고 지지하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도움을 위해서는 말기 환자 자신뿐만 아니라, 그를 돌보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우리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드높은 소명은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더 밝혀 주며, 영원한 삶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이들의 마지막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줍니다. 성경은 그 희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0-22) 죽음을 넘어선 희망은 결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성을 지닌 우리는 세상의 온갖 불의와 억압을 볼 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현실에 희생된 무죄한 이들의 삶이 그냥 그렇게 끝나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불합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 안에는 이미 영원한 삶의 씨앗이 심겨 있습니다. 믿는 이에게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활짝 열린 문이며,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삶은 우리의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는 행복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영원한 삶에는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4)라고 가르쳐 줍니다. 생의 말기를 보내는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이러한 신앙과 희망은 어떤 것보다 큰 위안을 가져다주며,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그들을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줍니다. 추천 도서 1. 김형숙,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뜨인돌, 2013 2.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신에게 보내는 편지」, 김민정 역, 열림원, 2013 3. 군나 두트게·신동일 공편,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존엄성」, 세창출판사, 2016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5 덧붙이는 묵상 지금은 선종했지만 세기의 배우 알랭 들롱은 생전 “노화는 끔찍하다”며 안락사를 원했습니다. 젊은 시절 화려한 인생을 보냈던 그에게 나이 들고 병환에 지쳐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끔찍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치 고통 속에 몸부림치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느니, 차라리 짧은 고통 속의 죽음이라는 처방전을 선택하는 듯합니다. 소위 ‘조력 존엄사’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고통의 치료제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고통을 없애기 위해 고통받는 사람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진정한 치료이자 사랑일 수 있을까요? 또 세상에서 쓸모가 없어 보인다고 해도 과연 그가 진정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이유가 될까요. 이런 시선은 인간을 효용 가치로만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고, 하느님 모습을 닮은 존귀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에 고통받는 이들에게 진정한 처방전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물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희망과 신앙을 잃지 않고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건네야 할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혼자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는 동반이지, 죽음이라는 절망이 될 순 없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조차 사랑으로 동반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죽음은 삶의 허무한 붕괴이거나 벽이 아닙니다. 고통 속에 있더라도 우리 손으로 억지로 열어야 할 문도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선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인위적인 끝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생명을 껴안고 사랑할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cpbc2025.12.17

하느님의 지혜를 삶의 근본으로 삼아야[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0) 야고보 서간 야고보 서간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지탱해 주는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실천함으로써 완성되고 구원받는 사람들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주교이며 야고보서 저자로 전해지고 있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 성인 이콘. 신약 성경 가운데 야고보 서간과 베드로의 첫째·둘째 서간,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 그리고 유다 서간을 ‘가톨릭 서간’이라고 부릅니다. 이 일곱 서간을 가톨릭 서간이라 부르는 이유는 특정인이나 개별 교회를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보편 교회의 모든 신자에게 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 서간 첫머리에 수신자가 나옵니다. 야고보 서간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야고 1,1), 베드로 서간은 “폰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1베드 1,1), 요한의 둘째 서간은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2요한 1절), 요한의 셋째 서간은 “가이오스”(3요한 1절)이라고 수신인이 명시돼 있지만, 바오로 사도 서간의 수신인보다 훨씬 보편적인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들 서간을 ‘가톨릭 서간’으로 처음으로 부른 이는 2세기 말 아폴로니우스입니다. 그는 2세기 중엽 소아시아 프리기아 지방에서 종말론에 심취해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니 세상을 멀리하고 회개해 단식과 생식을 하고, 독신 생활을 하며 성생활을 자제하고, 자선과 순교를 권했던 몬타누스 이단에 맞서 정통 신앙을 수호했던 교부입니다. 야고보 서간(이하 야고보서)의 저자는 자신을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1,1)라고 밝힙니다. 야고보는 히브리어로 ‘야곱’입니다. 이사악의 아들이자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과 같은 이름이죠. 예수님과 사도 시대 당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야고보 곧 야곱이라는 이름이 매우 흔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세 명의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인 야고보(마태 10,2; 마르 1,19-20)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르 3,18; 루카 6,15; 사도 1,13)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주님의 형제”(사도 12,17; 15,13-21; 21,18-25; 갈라 1,19)이자 “교회의 기둥”(갈라 2,9)이라고 불렀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저술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학자들은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팔레스티나 사람으로 헬라 문화와 상당히 거리가 멀었기에 헬라어와 헬레니즘 문화와 사상에 능통한 그의 협력자가 야고보의 말을 대필했거나 그의 이름을 빌려 썼다고 봅니다. 그는 62년께 순교했고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 대략 50년께 쓰인 것으로 보아 50년대 말에 야고보서가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Ιακωβου’(야코보),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Iacobi’,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야고보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야고보서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보아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팔레스티나 지역을 떠나 세상에 흩어져 사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특히 유다교 회당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아울러 부자들을 혹평하고(5,1-6), 가난한 사람들이 믿음의 부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상속하게 되었다(2,5)는 내용, 그리고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보다는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어울리려 했고(2,1-4 참조),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다(2,15-16 참조)고 나무라는 것을 보아 부자는 아니더라도 먹고 사는 데는 걱정이 없는 일반적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서간인 듯합니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야고보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분열이나 반목을 해결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어떠한지를 제시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시련과 시험을 통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는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려면 하늘에서 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순수하고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3,17)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아울러 지혜에서 오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 자기의 실천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3,13) 야고보서는 또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되고 교만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는 지고한 법을 이행해야 합니다.(2,1-13 참조) 야고보서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자기들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4,6)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지혜는 다툼과 분열을 가져다주고 참신앙과 거리가 멉니다.(4,1-12 참조)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무엇보다 형제를 심판하지 말며, 자만하지 말고 허세를 부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재림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고통을 겪는 이들, 아픈 이들, 죄지은 이들, 교회 원로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5장 참조)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 선임2024.09.25
![광야에서 들려오는 침묵의 음악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87)](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5/07/fdT1715067341708.jpg)
광야에서 들려오는 침묵의 음악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87) 사순 시기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과 시험을 겪으신 사건을 기념하는 시간이다. ‘사순(四旬)’이라는 말 자체가 ‘마흔’을 뜻하며,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중요한 사건을 앞둔 준비와 정화의 기간을 상징한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시나이산에서 40일을 지냈고, 엘리야 역시 호렙산으로 향하는 길을 40일 동안 걸었다. 광야에서의 40일 역시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기존의 삶이 해체되고 새로운 사명이 태어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선지자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향했던 광야는 일상 질서가 완전히 사라진 공간이다. 광야에 홀로 고립되면 유혹과 두려움·절망·지독한 향수에 시달리게 된다. 유목 민족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이 ‘광야로의 추방’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그 공포와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극한의 고행 속에서 얻는 자기 정체성은 단순한 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비상을 만들어낸다. 문학에서 광야는 오래전부터 빼어난 소재다. 특히 ‘황무지’로 대표되는 T.S. 엘리엇의 시 세계는 현대 문명의 정신적 광야를 상징한다. 그가 말하는 ‘오지 않는 비’는 구원의 부재를 뜻하며, 파편화된 시어들은 20세기 문명의 분열과 붕괴를 드러낸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문학은 더 이상 선형적 서사를 고집하지 않고, 구조·파편·인용이 중심이 되는 현대적 글쓰기로 나아간다. 프랑스의 올리비에 메시앙은 작품 ‘기도(Oraison)’에서 광야에서의 기도와 침묵을 극단적으로 느린 시간 속에 담아낸다. 이 음악에는 멜로디를 따라가려는 욕망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고독과 갈구가 묘하게 얽혀 들을 때마다 심연의 외로움을 불러낸다. 유리를 공명시킬 때 들리는 듯한 소리, 공기 자체가 떨리는 것 같은 음향은 음악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끌어들인다. 메시앙 - 기도 러시아 출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시편 교향곡’에서 흔히 말하는 ‘비 없는 기도’, 즉 황무지적인 종교성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그는 작품의 첫 장에 “신의 영광을 위해 작곡된 교향곡”이라는 문구를 적어넣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편성이다. 스트라빈스키는 교향곡에서 가장 윤택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악기군인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그 결과 따뜻함 대신 메마름을, 풍요 대신 고독을 들려준다. 네덜란드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폴란드 작곡가 헨릭 구레츠키는 ‘교향곡 3번’에서 절규 이후의 텅 빈 공간을 형상화한다. 이 작품은 발표된 지 14년이 지난 1991년 빌보드 클래식 차트에 등장해 무려 31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50분을 넘기는 연주 시간과 세 악장 모두 ‘렌토(Lento, 아주 느리게)’로 진행되는 작품이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킨 사실은 기적 같다. 이 음악은 흔히 ‘슬픔을 치유하는 음악’ ‘고독을 넘어서는 기도’로 불린다. 적막한 광야를 가로질러 다가오는 주님의 발걸음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펜데레츠키가 지휘하는 구레츠키의 ‘슬픔의 노래’ 작곡가 류재준cpbc2026.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