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페소 (01)[월간 꿈 CUM] 바오로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_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 순례기 에페소 켈수스 도서관. 1만 5000권에 달하는 두루마리를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117년 공사를 시작해 135년 완공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도서관을 보지 못했지만, 에페소 공의회 개최 당시 모인 주교와 사제들은 이 도서관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적대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큰 문이 나에게 열려 있습니다.”(1코린 16,9)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교회를 두고 “큰 문이 열려 있다”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에페소에서의 선교 효과는 컸다. 그 결과는 대규모 에페소 신앙 공동체 형성으로 이어진다. 바오로 사도는 5년 동안 진행된 3차 선교 여행(서기 53~58년경) 중 무려 절반에 가까운 2년 3개월 동안 에페소에 머물렀다.(사도 19,8.10;20,31참조) 이 에페소 거주 기간 동안 신약성경의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이 작성되어 인편으로 각 지역에 배달됐다. 그런데 에페소는 원래 신앙에 부합하는 도시가 아니었다. 페르시아의 지배를받던 에페소가 알렉산더 대왕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 기원전 334년이다.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된 것이 기원전 133년. 에페소는 그리스 로마의 신전이 넘쳐나는 다신교 숭배 도시였다. 그래서 에페소는 유일신 신앙을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다.(기원전 88년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로마의 실라장군에 의해 진압됐다) 바오로가 에페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날을 상상해 보자. 장거리 여행으로 새카맣게 변한 발을 끌며 에페소 거리를 걷는 바오로 사도의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당시 경제, 종교, 정치, 문화 중심지였던 에페소에는 20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업 및 무역 관련 유동인구가 1~5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에서 일하는 사람들, 정치인, 교수, 물물 교환을 위해 장거리를 이동해온 사막의 상인, 군인, 여관업 종사자, 노예, 스포츠와 환락에 매료된 사람들로 에페소 거리는 북적였다. 바오로 사도는 걸을 때마다 옆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을 것이다. 그리고 화려하고 웅장한 신전들이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 북적거리는 번화가의 끝자락에 2만 50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극장이 있다. 이곳은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잊지 못할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그 사건의 내막이 사도행전 19장 23-30절에 자세히 나와 있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 19장 23-30절에 나오는 에페소 야외극장 관광지에 가면 기념품을 파는 곳이 있다. 2000년 전 에페소에도 그런 기념품점이 많았는데, 가장 인기를 끈 기념품은 은으로 만든 아르테미스(다이아나, 다산과 풍요의 여신) 신전 모형이었다. 은으로 만든 이 모형을 부적처럼 들고 다니는 것이 당시 유행이었다. ‘데메트리오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에페소에서 기념품을 팔아 큰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황금알 사업에 찬물을 끼얹은 무리가 있었다. 바오로와 그 동료들이었다. 참다못한 데메트리오스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직업으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바오로라는 사람이 오면서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때문에 우리 사업이 나쁜 평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도 무시를 당했습니다.” 데메트리오스는 바오로 때문에 여신과 관련한 기념품 판매가 저조해졌다고 여겼다. 그리고 군중을 선동했다. 그의 선동은 주효했다. 군중은 이렇게 외쳤다. “에페소인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시다!” 사도행전은 당시 상황을 두고 “온 도시가 혼란에 빠졌다”(사도 19,29)고 기록하고 있다. 다행히 바오로는 체포되지 않았다. 에페소 사람들은 바오로의 동행이었던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스와 아리스타르코스 두 사람을 붙잡아, 야외극장으로 끌고 갔다. 작은 행정관서가 아니라 야외극장으로 끌고 갔다는 점에서 당시 소요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바오로가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해 나서려 했지만, 바오로와 친분이 있었던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 흥분한 군중 앞에 나섰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소란은 서기관이 법정에서 별도로 문제를 다루자며 군중을 설득하기까지 두 시간 넘게 계속됐다. 서기관의 중재와 설득이 없었다면 당시 바오로의 동료는 물론이고 바오로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사도 19,23-30 참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에페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 열기가 상상을 초월했다는 점이다. 에페소 사람들은 원래 그리스 침략을 받기 전에는 풍요와 다산의 여신 퀘벨레를 섬겼는데 그리스 지배 후, 아르테미스 여신으로 갈아탄다. 그런데 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심성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인 후에는 성모 신심으로 연결된다. 실제로 아르테미스 신전 건축에 사용된 돌 및 기둥은 5세기 초 성모성당 건축 및 6세기 성모성당 증축 공사 때 재활용되었다. 유곽 안내 표지. 새겨진 발 크기보다 작은 사람은 입장할 수 없다는 미성년자 출입금지 표지판이라는 설, 유곽의 방향을 가리키는 도로 안내판이라는 설 등이 있다. 에페소에는 성모 마리아가 거주했다는 집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교회 역사상 성모께 최초로 봉헌된 대성당도 에페소에 있다. 더 나아가 431년 이 성모대성당에서 열린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모 신심 관련 계시의 결정체인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Theotokos) 교의가 정리됐다. 에페소에서 유독 성모 신심이 강했던 이유, 그리고 에페소에서 시작된 성모신심이 전 유럽으로 전파되는 과정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할 듯 보인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에페소가 없었다면 바오로의 서기 53~58년경 초기 교회 선교 동력은 약해졌을 것이고, 선교의 속도도 반감되었을 것이다. 에페소는 바오로의 말씀 선포에 귀 기울였고, 바오로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데 서기 100년경에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묘해진다. 바오로 이름이 싹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도 요한의 이름이 들어선다. 이는 그리스 지역(코린토, 테살로니카, 필리피 등)과 달리, 아시아 지역에서는 사도 요한과 그 제자들의 영향력이 바오로보다 더 커졌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사도 요한 계열 제자들이 쓴 요한 묵시록에, 에페소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에페소에는 사도 요한 및 성모 마리아와 관련한 대형 순례지가 많다. 사도 요한의 유해를 모신 성당, 그리고 성모 마리아가 살던 집이 그것이다. 글 _ 편집부2025.08.14

사육제[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40)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정결하고 경건하게 하는 그리스도교의 절기를 말한다. 이 기간 중에 신자들은 매일 성경을 읽고 참회·금식·단식을 병행해야 한다. 가톨릭·개신교·동방 교회는 지내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며, 가톨릭은 재의 수요일부터 성삼일 직전까지다. 사순 시기 구체적인 규정은 종파마다 다르지만 꽤나 엄격하게 지켜져 온 듯하다. 프랑스에서는 이 규정을 어긴 이들을 종종 사형시키기도 했다. 이 고행의 순간에 육류는 엄격하게 제한되었지만, 생선은 허용되었는데, 생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로 생선을 뜻하는 ‘익투스(Ichthus)’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원자’ 각각의 첫 글자를 따 조합한 말과 같아서 두 개의 겹쳐진 물고기 모양은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암호처럼 쓰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이나 이탈리아처럼 삼면이 바다에 접한 몇몇 나라를 빼놓고 생선은 그리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었다. 가톨릭교회의 전례력상 금육일이 116일에 달해 어쩔 수 없이 생선을 먹었지만, 냉장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에 염장·훈제·건조 방식으로 저장되었던 생선 맛이 그리 좋았을 리 없다. 유럽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잉어와 숭어 요리가 발전된 이유도 양식이 가능한 물고기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한때나마 유럽을 지배할 수 있던 것도 사순절과 금육 기간에 대량으로 염장 청어를 수출한 데 기인한다. 근엄하고 엄격한 사순 시기 직전 마음껏 마시고 먹고 즐기는 기간이 있다. 이때는 고기와 술이 허용되고, 가면이나 화장에 기괴하고 색다른 옷차림을 한 사람이나 대형 인형을 앞세워 거리를 행진했다. 이 광란의 축제를 사육제(謝肉祭, Carnival)라 하며 현대에 와서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확장되었다. 프랑스의 니스 카니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카니발,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이 유명하다. 작곡가들이 열기와 즐거움이 가득한 사육제에서 영감을 받지 못했을 리 없다. 특히 유명한 슈만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사육제’는 21개의 소품으로, 전체 길이는 30분 정도다. 비범하고 환상적인 창조력이 넘치는 이 작품은 많은 피아니스트의 사랑을 받아왔다. 에프게니 키신이 연주한 슈만의 ‘사육제’ //youtu.be/t1e2TOseohU?si=vWl2P-WBTRYHl89w 생상스가 작곡한 ‘동물의 사육제’도 유명하다. 1886년 그가 오스트리아에 머무는 동안 사육제의 음악회를 위해 작곡되었다. 각 동물의 특성을 기가 막히게 살린 특색 있는 음악으로 유명하다. 처음부터 모든 곡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고, 시작은 1871년이었다. 생상스의 ‘사육제’는 특히 청소년과 아이들을 위한 입문 음악으로도 유명하며, 제13곡인 ‘백조’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요요마가 연주하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 //youtu.be/3qrKjywjo7Q?si=SlHVaP9P3DI3_O2n 작곡가 류재준cpbc2025.03.05
![[이상근 평화칼럼] 아들 덕](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3/19/oOB1742348565743.jpg)
[이상근 평화칼럼] 아들 덕이상근 마태오(미국 테네시 오크릿지 국립연구소 연구원)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에는 묵주기도를 할 때마다 그저 반복되는 기도문에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 그리고 그 사이사이의 ‘영광송’까지. 뭐랄까, 기계적으로 입만 뗐다 하면 끝나는 그런 따분한 기도라고 생각했다.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하는 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냥 신앙생활 중 하나 정도로 여기며 대충 넘기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묵주기도의 ‘묵상’에 대해 알게 되고 체험을 하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단순히 기도문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 생애와 성모님의 삶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며 기도하는 것. 성경 속 장면 그 안으로 들어가 체험하면서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이 점점 하느님께로 향하고, 내 삶의 순간들이 하느님과 연결되는 경험을 하게 됐다. 묵주기도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내 영혼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다리였다. 그렇게 나는 매일 묵주를 손에 들게 됐다. 이 소중한 깨달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특히 내 아이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들이 “아빠, 이거 왜 이렇게 길어?” 하며 투덜대기도 했다. 그래도 꾸준히, 차근차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차에 오르면 묵주를 꺼내 들고 함께 기도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로 시작해 한 단 한 단,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등굣길을 채웠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묵주기도는 우리 부자의 아침 루틴이 됐다. 아들은 어느새 묵주를 쥐고 기도문을 술술 외우게 됐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루틴이 단순히 ‘아빠가 아들에게 가르쳐준’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아들에게서 더 큰 선물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살면서 누구나 그렇듯 나도 신앙의 열정이 식을 때가 있다. 일이 꼬이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밤잠을 설쳐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운 날들이 있다. 그런 날엔 솔직히 묵주를 들 생각조차 안 든다. ‘오늘은 그냥 넘어갈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차에 타자마자 아들이 묵주를 꺼내 들며 말한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그 순간 나는 웃음이 터지며 얼떨결에 묵주를 쥐고 기도를 시작한다. 아들의 그 작은 행동은 나에게 하느님 뜻을 다시 일깨워준다. 내가 가르친 기도가 이제는 아들을 통해 나를 다시 하느님께로 이끌고 있다. 피곤하고 지친 아침, 기도할 마음이 전혀 없을 때에도 아들의 목소리는 나를 깨운다. 이게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묵주기도를 하면서 깨달은 건, 기도란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함께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아들과의 등굣길 기도는 단순한 습관을 넘어 우리 부자를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묶어주는 끈이 됐다. 그리고 그 끈은 때로는 내가, 때로는 아들이 단단히 잡아주며 서로를 지탱해준다. 꼭 아이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친구, 아니면 혼자라도 좋다. 매일 아침 혹은 저녁, 묵주를 손에 쥐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보시라. 처음엔 어색하고 지루할지 모른다. 하지만 꾸준히 해보면 어느 순간 그 기도가 여러분의 삶을 바꾸고, 누군가와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처럼 여러분도 뜻밖의 순간에 하느님 손길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아들의 작은 목소리에서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cpbc2025.04.23

주님 이름을 모독하지 말며 주일을 거룩하게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27) 십계명(十誡命) ② 제3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켜라”라고 하신 성경 말씀에 따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주일 미사뿐 아니라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내라는 의미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제2계명 :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탈출 20,7) 명하는 법 ①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은 흠숭과 공경을 갖춰 불러야 합니다. ②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거나 개인적으로 하느님에게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금하는 법 ①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지 말아야 합니다. ② 그릇된 맹세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의 명예와 성실, 진실과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이름으로 지킬 생각이 없는 약속을 하거나 맹세를 하고 이행하지 않는다면,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거짓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진실하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잘못입니다. 구약 시대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고(탈출 6,2-8), 예언자와 사제들은 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을 전하고 백성을 축복했습니다.(신명 10,8) 신약 시대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줬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은 우리가 아닌, 하느님의 이름을 존경할 것을 명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은 우리의 청원과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영광으로 존경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나쁘게 말하거나 하느님에 대해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짓은 둘째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제3계명 :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탈출 20,8-9)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구약 시대부터 내려오는 계명입니다. ①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켜라”라고 하신 성경 말씀에 따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주일 미사뿐 아니라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낼 것을 명합니다. ②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 업적과 당신 백성을 위한 구원 업적을 찬미하고 기리는 거룩한 날, 곧 주님의 날입니다. 하느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듯이, 사람들도 일상의 일을 멈추고 쉴 수 있도록 마련됐습니다. ③ 주일은 휴식의 날입니다. 하지만 주일 미사 참여와 자선의 실천·적당한 휴식에 방해되는 일이나 활동은 삼가야 합니다. 주일에 일 때문에 충분한 여가 시간이 없다면 기도와 정성으로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④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성찬례(미사)를 거행하며 주일을 경축했습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경축하는 날로, 교회는 가장 중요한 의무 축일로 지킵니다. 주일 미사는 교회 신앙생활의 중심이기에 성실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다만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는 미사 참여에서 면제되며 고해성사에 임하지 않아도 됩니다. △감옥에 있을 때 △군 복무 중 외출이 자유롭지 못할 때 △병석에 있거나 병석에 있는 환자를 간호할 때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할 때(직장에서 허락을 받아야 할 때) △자연재해로 성당을 올 수 없을 때 △ 수해나 화재를 당한 사람을 급히 도와줘야 할 때 △자신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큰 범죄나 재난을 방지할 수 있을 때 등입니다.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특별한 기도로 주일을 거룩히 보내야 하는 의무는 있습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나온 ‘공소 예절’ ‘묵주기도 5단’ ‘그날의 복음과 독서를 읽고 묵상하기’ ‘선행과 봉사’ ‘주님의 기도 33번’ 등 주교회의에서 결의한 기도문을 바칩니다. 박모란 cpbc2024.11.19

십자가 사랑 묵상하고 실천합니다주님 부활 대축일·장애인의 날 추천 도서20일은 주님 부활 대축일이자 장애인의 날이다. 교회 안팎에서 십자가 사랑의 의미를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을 골라봤다. 완덕의 길 / 예수의 성녀 데레사 지음 / 최민순 신부 옮김 / 바오로딸 「완덕의 길」은 신비가이며 교회학자인 예수의 성녀 데레사(1515~1582)가 창립한 첫 개혁 가르멜회 성 요셉 수도원의 수녀들에게 남긴 가르침을 담고 있다. 전체 42장으로 수도 생활과 영적 생활 전반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권고에서 신비 체험까지 제시한다. 기도를 위한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덕행들(청빈·순수한 사랑·이탈·겸손 등)을 강조하고, 다양한 기도의 길(구송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 등)과 그 단계를 설명한다. 특히 ‘주님의 기도’ 각 구절 풀이를 통해 기도의 여정과 악의 유혹에 대처하는 방안을 안내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 최민순 신부의 번역으로 1967년에 출간됐고, 이번 개정판은 앞서 개정된 「영혼의 성」과 통일성을 갖춘 판형과 디자인이다. 기존 최 신부의 시적이고 유려한 필치를 보존하되 이해하기 어렵거나 모호한 표현은 일부 수정하거나 설명을 달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습관 / 안셀름 그륀 신부·우신루 지음 / 김혜진 옮김 / 분도출판사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자기 자신과 조화롭게 사는 데 방해되는 습관들이 있다. 죄책감·수동적 공격성·투사·콤플렉스·잘못된 경계 짓기·상처 주기 등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도 상처받는 메커니즘을 반복하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착한 마음과 기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선의와 기도만으로는 이 같은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나를 힘들게 하는 습관」에서는 관계를 방해하는 여섯 가지 유형을 제시하고, 인식을 통해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안내한다. 심리학적 통찰은 물론 성경적 치료법을 통해 관계를 힘들게 하고 때로는 파괴하는 메커니즘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결혼은 하늘나라 가는 예행연습이다 / 백복선 / 기쁜소식 한 여성이자 아내·어머니·교육자로 60여 년을 살아온 저자가 사랑의 다채로운 모습을 97개의 이야기로 전하는 책이다. 저자는 “사람의 사랑하는 방식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방식으로 연습하기 위해 우리는 사랑과 결혼을 하고 그 사랑을 실천한다”며 결혼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와 역할에서의 사랑을 서술한다. 사랑의 다양한 종류와 방식, 사랑으로 겪는 어려움을 푸는 방법,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고별 / 김춘호 / 인문학사 김춘호(프란치스코) 작가의 시집 「고별」이 출간됐다. 196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신문사 기자와 잡지사 편집부장 등을 역임한 저자의 세 번째 시집이다. 제목처럼 ‘고별’과 관련된 작품들을 비롯해 60여 편의 시를 담았다.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지만 어느덧 80대에 접어든 시인은 신의 예정을 벗어날 수 없는, 거스를 수 없는 피조세계를 이야기한다. 중도 시각장애인인 시인은 “스마트폰에 확대경을 들이대 자음과 모음을 겨우 맞춰 이번 시집을 완성했다”며 “불초 소생의 여생 마지막 페이지에 담은 통한의 노스탤지어”라 전했다. 하느님이 토끼라면⋯ / 마틴 발트샤이트·수잔네 슈트라서 / 백다라·백훈승 옮김 / 리시오 “하느님이 토끼라면, 거위구이 대신에 차가운 당근 샐러드를 먹을 거예요. (중략) 천사들은 귀가 길고 코를 씰룩거릴 거예요.”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만약 하느님이 토끼라면, 물고기라면, 구름이라면 어떨까? 글과 그림이 더해진 책은 얼핏 어린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화같지만, 세대를 불문하고 인간 중심의 세계관과 일상의 행동 양식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윤하정 기자윤하정2025.04.16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8주일- ‘내로남불’과 ‘마음의 선한 곳간’](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2/25/l4m1740473054069.jpg)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8주일- ‘내로남불’과 ‘마음의 선한 곳간’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 6장 예수님의 ‘평지 설교’의 한 부분을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첫 부분은 ‘형제 눈 속의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내용이고,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라는 말씀은 두 번째 부분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산상 설교’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작은 차이점은, 마태오 복음은 ‘좋은 열매, 나쁜 열매’를 언급하신 다음,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7,19)라는 심판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는 데 반해, 오늘 루카 복음에서는 ‘좋은 열매, 나쁜 열매’ 언급 후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6,45)라고 ‘마음의 문제’로 결론을 맺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잠시 마태오 복음의 ‘산상 설교’에 나오는 참된 행복 선언을 떠올려 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반면에 루카복음의 행복 선언에서는 단순히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지요. 희랍어 원문의 표현을 찾아보면, 오늘 루카 복음에서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마음의 문제’를 언급할 때 ‘마음’은 ‘심장’(καρδία, 카르디아)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마태오 복음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할 때의 ‘마음’은 ‘영’(πνεύμα, 프네우마)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성경의 세계에서 ‘심장’은 ‘육체적 생명의 자리’로 이해되고, ‘영’은 ‘육체에 생명을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생각합니다. 이제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을 다시 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6,41)라는 예수님의 아픈 질타를 묵상하면서, 어쩌면 이런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공통된 인간 속성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내로남불’을 넘어서서, 마음에 선한 곳간을 가꾸는 제자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6,45) 이기적이고 나약한 우리가 선한 마음의 곳간을 짓기 위해서는 하느님 영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마음의 선한 곳간’을 넓혀가려는 우리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겸손되이 하느님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 봅니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아멘.”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cpbc2025.02.25

희망이 있기에 살아가는 삶[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95) 평안하냐?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장면들을 살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의 반응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아마도 스승의 부활이 제자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사고 안에, 기다림의 지평 안에, 그분이 되살아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를 빌어주신다. “평안하냐?”(마태 28,9)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요한 20,19) 이 말씀은 좌절과 절망, 슬픔과 시름 속에 빠진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표현이었다. 당신 죽음으로 인해 겪었을 마음고생을 헤아리며 진정으로 평화가 제자들 마음에 찾아오기를 바라는 말씀이셨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의 그러한 마음을 발견한다.(루카 24,13-35 참조) 두 제자는 스승을 잃고 실의에 빠진 채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살아온 삶에 관해 물으시며, 성경을 바탕으로 당신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자상하게 설명해주신다. 그들의 초대에 응해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빵을 나눠주실 때 비로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분은 곧 사라지셨지만, 그분과 함께한 길에서 경험했던 마음 뜨거움은 강렬히 남아있었다. 이 모든 것은 ‘희망’이라는 말로 귀결되는 듯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바로 그 희망이 가져다주는 은총의 선물일 것이다. 그 희망은 좌절과 절망의 절벽을 넘어 새로운 하늘을 향해 열린 창문을 마주하는 것이며, 어두운 지평선 너머로 새로운 여명이 밝아옴을 발견하는 것이다. 희망,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삶 그 안에서 찾아야 할 무엇, 주어지는 무엇이다. 그렇기에 그 희망은 역설적이다. 절망스럽고 어두운 현실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 희망은 고난을 경험한 끝에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6) 이 말씀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난이 희망찬 내일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고난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가능케 하고,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한다. 고난이 나의 죽음을 위해 필요했던 순간임을 깨달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희망을 놀라운 눈으로 발견할 수 있다. 부활을 맞은 우리 역시 주님과 다시 걷도록 초대되고 있다. 기쁨과 환희, 고통과 절망이 교차하는 평범한 일상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다.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은 우리의 다양한 경험, 특히 위기와 시련, 고난과 괴로움, 슬픔과 절망의 순간을 달리 바라보게 해줄 것이며, 새로 태어나는 부활의 기쁨과 환희는 바로 그러한 순간들을 겪어내지 않고선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온 삶이 전혀 무익한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이다. 삶의 애환, 고통과 근심, 괴로움과 외로움, 우울함과 초라함 등을 모두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말씀을 건네신다. “그래, 많이 힘들었지? 이제 괜찮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아니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아직 기회가 있다. 나를 찾고, 나를 온전히 실현할 기회가. 나를 향해 서 있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가 살아온 삶에 희망이 있다. 또한 앞으로 살아갈 삶에 희망이 있다. 우리가 계속해서 걸어야 하는 이유다. 한민택 신부cpbc2025.04.15

구원의 보편성[월간 꿈 CUM] 요나가 내게 말을 건네다 (28)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10)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공의회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 착한 사마리아인의 옛 이야기가 우리 공의회의 정신을 이끌어 준 모범이자 규범이었습니다. … 이 공의회의 풍요로운 가르침은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제4항) 1965년 12월 8일 역사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면서 우리 가톨릭교회가 절실히 깨닫게 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받는 세계’였습니다. 사실 세상은 제1차,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고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강도 만난 나그네인데(루카 10,29-37 참조), 교회는 끊임없이 전례와 율법과 구원을 가지고 논쟁만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울부짖고 탄식하며 절규하고 있는데, 또는 거대한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는데, 교회는 성당 안에 보호막을 치고 안주하며 근엄한 전례의 향을 피우며 자신들만의 구원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구원의 최종 결정권자는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구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을”(시편 146,3)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구원이 있음에도 교회가 감히 인간 구원에 대하여 결정권을 가진 듯 오만하였던 것입니다. 이 같은 오류를 바로 잡고자 깊은 반성의 성찰을 한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습니다. 따라서 공의회의 교부들은 시작부터 이렇듯 분명히 밝힙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에서 모인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사람의 시련, 영육의 곤경과 고통과 염원과 희망을 우리 마음속에 지니고 왔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온갖 고뇌에 우리는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관심은 특히 더 낮고 더 가난하고 더 힘없는 사람들에게 쏠립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도 기아와 곤궁과 무지로 고통받는 군중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치고 있습니다.(2코린 5,14)”(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메시지) 인간의 구원은 분명 하느님께 달렸음에도 2천 년 동안 교회는 줄기차게 교회 안에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리하여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라는 명백한 가르침을 잊고,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오류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만의 무서운 단죄와 이단의 죄를 씌워 칼을 휘두른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성령께서는 교회의 오류를 일깨워 주셨고, 교회가 구원의 참 신비와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비로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는 위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이렇게 만천하에 구원의 참된 복음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고(사도 17,25-28 참조),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1티모 2,4)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 제16항) 과연 교회 또한 하느님의 거대하고 웅장하며 장엄한 구원의 방주에 무임승차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향한 생명의 물줄기는 늘 아래로 흐르고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드디어 깨달은 것입니다. 또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명백히 가르쳐 주는 계시의 진리 역시 ‘구원의 보편성’이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그토록 원하신 것이 ‘만민의 구원’이었음을 교회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세우신 우리 교회의 이름이 ‘가톨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바로 보편된 구원을 일컫는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가톨릭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은총의 이름이면서 우리의 지상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 앞에는 세상 그 어떤 것도 소외되거나 열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말을 건넵니다. “사실 저 또한 구원에 대하여 우리 민족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아주 편협된 이기적인 구원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 큰 도시 니네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실 때, 그리고 그 뜻을 따랐을 때 구원의 보편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진정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구원의 문은 만민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 cpbc2025.01.06

구약성경 권수가 다른 천주교와 개신교[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7) 성경의 권수 구약성경 열왕기 상권의 첫 페이지가 펼쳐져 있다. OSV 천주교와 개신교는 왜 성경의 권수가 서로 다른가요? 천주교와 개신교는 성경을 같은 경전으로 사용하지만 구약성경의 권수가 서로 다릅니다. 천주교는 구약성경 46권과 신약성경 27권을 통틀어 모두 73권을 정경(正經)으로 인정합니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구약성경 46권 가운데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39권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여 모두 66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합니다. 천주교는 유다교가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다인을 위하여 그리스어로 번역한 이른바 ‘칠십인역’을 초대 교회부터 구약의 정경으로 인정해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로 기록된 7권의 구약의 책(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권, 마카베오기 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도 제2경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가 유다교의 39권만을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들여 독일어로 번역한 뒤로 개신교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지 않는 7권의 칠십인역을 정경이 아닌 외경(外經)으로 간주하였습니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천주교가 7권의 칠십인역을 정경으로 최종 결정하자 개신교 쪽에서는 이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좀 더 분명히 표명하기에 이릅니다. 영국 성공회는 외경이 “교회가 신도에게 생활의 모범이나 교훈을 가르치려고 할 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외경을 근거로 하여 교리를 제정할 수는 없다.”(39개조 종교 조항 제6조)라고 밝히고, 1647년 웨스터민스터 신학자 총회에서 “외경은 영감으로 쓰인 책이 아니므로 정경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외경은 성경과는 달리 교회 안에서 어떠한 권위도 가지지 못하고, 인정되거나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신앙 고백 제1장 3절)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제2경전의 일부가 히브리어로 기록된 필사본이 1947년 사해 부근에서 발견되면서 개신교가 히브리어로만 된 구약을 정경으로 인정하던 논리는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서학자들이 제2경전의 상당 부분이 예수님과 제자들, 또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서도 인용되었음을 밝혀냄으로써, 천주교에서 제2경전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정당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현재 한국 정교회와 대한 성공회는 1977년에 완역되어 출간된 「공동 번역 성서」를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제2경전을 성경의 끝부분에 따로 모아 놓았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일부 개신교단에서도 「공동 번역 성서」를 인용하거나 사용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성경에 대한 출판과 유권 해석은 천주교의 경우 교도권에 맡겨져 있어 성경 번역과 교리 해석에 차이가 없는 반면, 개신교는 누구나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에 해석의 차이로 논쟁과 교단 분열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 cpbc2023.07.11

유다 민족의 살 길 보여준 용감한 유딧[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42)유딧기 유딧기는 유다 민족이 살길은 하느님께 충실하고 하느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크리스토파노 알로니,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딧’, 1580년께, 유화, 팔라초 피티. 유딧기 역시 히브리어 타낙 성경에 수록돼 있지 않습니다. 유다교 정경에 없는 ‘제2경전’입니다. 유딧기는 헬라어 구약 성경 「칠십인역」에 ‘Ιουδιθ’(유딧)으로 표기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유딧은 ‘유다인 여자’라는 뜻이며, 이 책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합니다. 「칠십인역」은 유딧기를 역사서로 분류해 에스테르기 다음에 배치해 놓았습니다. 라틴어 대중 성경인 「불가타」는 ‘Judith’로 표기하고 에스테르기 앞에 배치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과 정교회 성경도 이를 따르고 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간행한 우리말 「성경」은 ‘유딧기’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유딧기의 원저자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본디 히브리말로 저술했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유딧기가 쓰인 시기가 기원전 166년에서 기원전 142년에 일어난 마카베오 전쟁 기간이나 그 이후, 늦어도 1세기 중반 이전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후 「칠십인역」 성경 번역자들이 유딧기를 헬라어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불가타」 성경을 펴낸 예로니모 성인은 아람어로 된 유딧기 본문을 라틴어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유딧기는 하느님께서 유딧이라는 여인을 통해 유다인의 존립을 위협하는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당신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딧기는 “이 세상의 모든 여인 가운데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이”(유딧 13,18)인 유딧을 찬양합니다. 유딧기는 팔레스티나의 조그마한 성읍인 배툴리아가 포위되는 사건을 다룹니다. 사마리아 지방의 도탄과 이즈르엘 평야 곁 가파른 산비탈 위에 자리한 배툴리아는 예루살렘을 비롯해 팔레스티나의 다른 지방으로 가는 길목들을 내려다보는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신심 깊은 과부 유딧은 배툴리아 성읍에서 나가 적군 진지로 갑니다. 유딧은 적장 홀로페르네스가 만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자 그의 목을 베어버립니다. 이로써 침략군이 패주하고 맙니다. 유딧기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불일치합니다. 유딧기 1장에 나오는 니네베에서 아시리아인들을 다스리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기원전 605년에서 기원전 562년까지 신바빌로니아를 다스린 왕입니다. 그는 아시리아인이 아니고 바빌로니아 사람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한 후 유다인들을 바빌론 포로로 끌고 간 자입니다. 그리고 적장 홀로페르네스와 그의 내시 바고아스는 네부카드네자르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난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기원전 358년~기원전 337년)가 다스릴 때 살았던 페르시아인들입니다. 유딧기 내용대로라면 임진왜란 때 김구 선생과 김좌진 장군이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운 셈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유딧기를 ‘교훈 설화’라고 부릅니다. 유딧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전반부(1─7장)는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배툴리아가 위기를 맞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이스라엘을 침략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세상의 신들을 모두 없애버리라는 임무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민족이 네부카드네자르만 섬기고, 말이 다른 종족들과 부족들이 모두 그를 신으로 받들어 부르게 하려는 것이었다.”(유딧 3,8) 유다인들은 항전을 준비하면서 참회하며 기도했습니다. 홀로페르네스는 암몬인 아키오르에게 유다인에 대한 정보를 얻습니다. 아키오르는 홀로페르네스에게 유다인들이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정복할 수 없다고 일러줍니다. 하지만 홀로페르네스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배툴리아를 포위합니다. 후반부(8─16장)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과부 유딧이 등장합니다. 유딧은 배툴리아 주민들에게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동포에게 모범을 보이자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련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유딧은 머리에 재를 뿌리고 자루 옷을 입고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지켜주시기를 간청한 후 홀로페르네스에게 갑니다. 유딧은 홀로페르네스가 연회에서 만취해 잠들자 그의 목을 베어 시녀에게 들게 하고 배툴리아로 돌아갑니다. 유딧은 아시리아 군대가 홀로페르네스의 주검을 보고 달아나자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유딧은 유다인들에게 존경받았고, 그녀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아무도 이스라엘을 위협하지 못했습니다. 유딧기는 유다 민족이 살길을 제시합니다. 첫째, 군사력이 아니라 백성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유딧 5장 참조) “하느님께 죄를 짓지 않는 한, 징벌을 당하지도 않고 칼에 압도되지도 않는다.”(유딧 11,10) 둘째,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겨레의 보호자이며 구원자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유딧 9장, 11장) 이는 유딧의 기도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당신의 능력은 수에 달려 있지 않고 당신의 위력은 힘센 자들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오히려 미천한 이들의 하느님, 비천한 이들의 구조자, 약한 이들의 보호자, 버림받은 이들의 옹호자, 희망 없는 이들의 구원자이십니다.”(유딧 9,11) “당신께서 모든 권세와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으로서, 당신 말고는 이스라엘 겨레를 보호하실 분이 없음을, 당신의 온 백성과 모든 지파가 깨달아 알게 하십시오.”(유딧 9,14)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9.06

토빗이 말하는 신앙 실천은 자선과 선행[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41)토빗기 토빗기는 이스라엘을 떠나 이국땅에 흩어져 살아가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의로운 일을 하고 자선을 베풀라고 당부합니다. 얀마시스, ‘시력을 회복한 토빗’, 1550년께, 유화, 샤르트뢰즈 박물관, 두에, 프랑스.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에스테르기 일부와 다니엘서 일부는 히브리어 타낙 성경에 수록돼 있지 않습니다. 유다교 정경에 없는 이 책들을 ‘제2경전’이라고 합니다. 쉽게 풀이해 제2경전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에는 수록돼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는 책들입니다. 제2경전이라 해서 그 권위나 중요성이 덜한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교회는 경전으로 인정한 책들을 모두 구약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유다교 정경에 속하는 히브리어책들만을 구약성경으로 인정하기에 토빗기를 비롯한 제2경전을 구약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토빗기는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에세네파 쿰란 공동체에서 발견한 토빗기 단편들이 주로 아람어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토빗기 전체 내용이 온전히 보존된 본문은 헬라어로 쓰여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실린 토빗기 역시 헬라어 성경에서 옮긴 것입니다. 토빗기는 헬라어 성경 「칠십인역」에선 ‘Τωβιτ’(토빗)이라고 합니다. 토빗은 “야훼는 나의 복이시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토브야’에서 나온 말입니다. 책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토빗은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이시며 복이심을 가르쳐줍니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Tobias’(토비아스)라고 표기하고,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간행한 우리말 「성경」은 ‘토빗기’라고 쓰고 역사서에 포함해 놓았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토빗기를 유딧기와 마케베오기 사이에 두었으나, 불가타 성경은 토빗기를 느헤미야기 바로 뒤, 유딧기 앞에 배치해 놓았습니다. 토빗기는 기원전 8세기(BC 734년)부터 기원전 4세기 이후까지(BC 587년) 일어난 남북 왕조의 멸망, 예루살렘 함락, 성전 파괴, 바빌론 유배와 유배 시대 이후 유다교 신앙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후대에 토빗기가 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이유는 기원전 2세기께 저술된 집회서와 유사한 부분들(토빗 12,9; 집회 3,30)과 니산 달을 헬라어 이름인 ‘디스트로스 달’(토빗 2,12)로 사용하거나 그리스 화폐인 ‘드라크마’(토빗 5,15)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토빗기에는 부활 신앙이 발견되지 않다는 점, 천사론이 발전돼 전개되고 있다는 점 등을 미루어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전 170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토빗기는 납탈리 출신 이스라엘 사람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어떻게 극복하게 됐는지를 들려줍니다. 토빗기는 크게 토빗에게 닥친 불행(1─3장), 토비야의 여행(4─9장), 토비야의 귀향(10─12장), 토빗의 찬미가(13장), 종결(14장)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친족인 토빗과 그의 며느리가 될 사라의 가족이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아시리아로 유배를 갑니다. 토빗 가족은 현재 이라크에 있는 니네베에서 살고, 사라 가정은 현재 이란에 있는 엑바타나에서 유배생활을 합니다. 두 가족은 유배지에서도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모범 가정이었습니다. 토빗은 선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죽은 동포들의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정에 불행이 닥칩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높은 관직에 올랐던 토빗은 새 임금이 즉위하자 공직뿐 아니라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채 죽음을 피해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 게다가 얼굴도 모르는 동포를 장사 지내주고 난 직후에는 눈까지 멀게 됩니다. 사라는 혼인만 했다 하면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신랑이 죽어 나갔습니다. 이 일이 7번이나 반복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토빗과 사라의 기도를 들으시고 라파엘 천사를 통해 그들을 고쳐주기로 하십니다. 토빗은 아들 토비야의 장래를 위해 전에 자신이 맡겨놓은 돈을 찾아오도록 그를 메디아로 보냅니다. 이때 사람 모습을 한 라파엘 천사가 토비야와 동행하면서 그가 사라와 혼인하도록 이끕니다. 아내 사라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토비야는 라파엘 천사의 인도로 늙은 아버지 토빗의 병도 고치게 됩니다. 그래서 두 집안은 행복을 되찾습니다. 토빗기는 자선을 강조합니다. 토빗이 유배지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실천하는 길은 선행과 자선이었습니다. 그는 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는 입을 것을 주며, 죽어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버려진 동족들을 정성스럽게 묻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실천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토빗에게는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가는 길이었습니다.(토빗 4,11 참조) 토빗기는 이스라엘을 떠나 이국땅에 흩어져 살아가던 당시의 수많은 유다인에게 삶의 지침을 줍니다. 토빗은 죽기 전에 아들 토비야에게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의로운 일을 하고 자선을 베풀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는 이국땅의 유다인들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언젠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불러모아 주시리라 믿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토빗 13장 참조) 이처럼 토빗기는 하느님을 섬기고 선을 행하라고 권고합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9.06

서예가 신부 4인의 붓끝에 담긴 기도의정부교구 정성훈·도현우·한만옥·용하진 신부 계주 개인전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한만옥·정성훈·도현우 신부가 각자의 작품 옆에 서 있다. 오른쪽 벽면에 걸린 두 점은 용하진 신부 작품이다. 축성(祝聖)의 서예가, 심성필성(心聖筆聖) 작품 총서 출판기념전’ 20일 개막 두달간 서울 명동 갤러리 1898 사제 네 명의 계주 개인전이 두 달간 서울 명동 갤러리 1898에서 개최된다. 바로 ‘ 릴레이 주자는 의정부교구 정성훈(안식년)·도현우(교하본당 주임)·한만옥(성사전담)·용하진(제7지구장) 신부다. 이들은 서예가이며 미술품 감정학 박사인 이동천 선생에게 오랜 기간 왕희지·김정희 등 거장들의 필법인 전번필법과 신경필법을 배우고 있다. 개막에 앞서 지난 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들 사제는 ‘서예가 기도와 닿아 있다’고 말했다. 한 신부는 “제가 나이가 가장 많은데, 정말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기도할 때도 분심이 들었다”며 “하지만 붓글씨를 쓰는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어 이를 응용해 기도와 수양에도 도움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정 신부 역시 “우리에게 붓글씨는 취미가 아니라 하나의 기도생활”이라며 “준비 없이 끄적이는 게 아니라 서예를 통해 묵상하고 집중하기 때문에 사목할 때에도 더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 신부는 “종교성과 예술성은 상당히 공통된 부분이 많다”며 “미사도 서예도 어떻게 보면 반복되는 작업인데,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면 같은 동작인데도 새로운 의미로 더 깊게 들어가게 된다”고 전했다. ‘축성의 서예가, 심성필성’이라는 제목 역시 종교와 예술의 조화와 연결된다. 도 신부는 “‘심성필성(心聖筆聖)’은 ‘마음이 거룩하면 글씨도 거룩하고, 글씨가 거룩하면 마음도 거룩해진다’는 의미”라며 “우리 자신부터 붓글씨를 통해 축성되기를 바라고 다시 우리를 통해 주변을 축성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동천 선생이 사제인 우리를 ‘축성의 서예가’로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 신부는 “가톨릭 신자는 모두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고, 거룩해진다는 건 우리 모두의 소명”이라며 “글씨가 거룩해진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고, 신앙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우리는 서예라는 도구를 통해 담아내는 것“이라고 설명을 더했다. 「축성의 서예가, 심성필성 작품 총서」는 총 4권으로, 이들 사제가 각각 20개 작품을 붓글씨로 쓰고 묵상하는 글을 더한 책이다. 한 릴레이 전시에서는 정성훈 신부(6.20~29)를 시작으로 도현우(7.4~13)·한만옥(7.18~27)·용하진(8.8~17) 신부의 작품 총 80점이 4회에 걸쳐 소개된다. 이들은 지난해 사순 시기에도 갤러리 1898에서 단체전을 열었다. 그러나 올해는 마치 자기색이 짙어진 아이돌 멤버들이 솔로 활동에 나서듯 개인전으로 돌아섰다. 같은 스승을 둔 만큼 이들의 서체는 닮은 듯 다르다. 자신만의 글씨 안에 각자의 생각도 담았다. 먼저 정 신부는 가톨릭 신앙행위의 핵심을 이루는 미사와 관련된 성경구절과 미사경문을 주제로 작품을 구상했다. ‘미사성제’부터 ‘아멘’ ‘천주적고양’ 등을 선보인다. 도 신부는 서예 필법을 넘어서는 마음의 수양, 곧 종교성과 예술성의 친밀한 조화로움을 지향하며 작업했다. 시편의 말씀을 중심으로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노기폐심지목’ 등을 준비했다. 한 신부는 오늘날 심각한 문제인 환경폐해에 직면해 ‘생태적 회개’를 바라며 ‘천지창조’를 주제로 삼았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잘 보존하고 가꾸고, 우리만 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넘겨주자는 의미에서 관련된 작품을 전시한다. 마지막으로 용 신부는 인생에 녹아 있는 수많은 만남 중 삶의 큰 변곡점이 되고 긴 여운을 주는 만남과 그로 인한 변화의 순간을 작품에 담았다. 대표작으로 ‘나는 있는 나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쉬자’ 등을 꼽았다. 의정부교구장 손희송 주교는 “사제는 말씀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이며, 그 사명의 수행은 다양한 방법으로 수행될 수 있고, 또한 수행되어야 한다”며 “네 신부님들은 더욱 정진하여 개인의 성장뿐 아니라 제단 밖에서의 복음 선포에도 더욱 열성적으로 임해주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축성의 서예가들이 선보이는 글씨는 붓을 굴리고 뒤집어서, 즉 붓 전체를 사용해서 나온 모양이라고 한다. 신부들은 서예 대가들의 필법을 알리기 위해 전시마다 개막식에서 붓글씨 시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담은 굿즈도 판매하며, 모든 수익금은 전액 기부할 계획이다. 전시 기간 매일 오전 10시~오후 6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문의 02-727-2336 네 사제의 작품은 9월 15~20일 일본 도쿄 오즈갤러리에서 열리는 ‘일기일회(一期一會)’전에도 전시될 예정이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5.06.18

하느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법[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45) 시서와 지혜서 시서와 지혜서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대한 인간의 응답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콘은 시편의 저자로 일컬어지는 다윗 임금. 가톨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구약 성경 정경 46권은 오경ㆍ역사서ㆍ시서와 지혜서ㆍ예언서 순으로 배열돼 있습니다.(유다교 성경은 토라, 예언서, 성문서 순으로, 개신교 구약 성경은 오경, 역사서, 지혜서, 예언서 순) 그중 시서와 지혜서는 욥기, 시편, 잠언, 코헬렛, 아가, 지혜서, 집회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배열한 이유는 주요 인물들의 활동 시기를 순서대로 나열했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고대 인물인 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편은 다윗 임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과 코헬렛, 아가는 솔로몬의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지요. 이어 구약 성경 시대 말엽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지혜서와 집회서가 배치됩니다. 시편과 욥기, 잠언, 아가는 유다교 히브리어 타낙 성경 정경에 속해 성문서로 배열돼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서와 집회서는 제1경전인 히브리어 구약성경 정경에 없어 제2경전이라고 하지요. 가톨릭 구약 성경은 시서로 시편과 아가를, 지혜서로 나머지 5권을 분류합니다. 가톨릭교회가 시서와 지혜서를 예언서 앞에 배열한 까닭은 구약 성경 다음으로 신약 성경이 바로 연결된다는 점과 연관이 있습니다.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예언서들을 구약 성경 마지막에 배열해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와 직접 연결하려는 교회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 내용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유다교 신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이 신앙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으로 성사됩니다. “‘주님’께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당신을 계시하셨고 이 백성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셨다는 데에는 늘 일치를 보인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모세의 인도로 자신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그를 통하여 계약을 체결하셨으며, 끝내 성조들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땅으로 자신들을 이끌어 가셨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경신례를 통하여 현재화시켜 나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처럼 유일하신 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펼쳐진 역사였으며, 이 관계 자체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었다.”(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주석 성경」 1359쪽) 구약 성경 중 오경과 역사서, 예언서는 이처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펼쳐진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서와 지혜서의 경우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내용이 전개됩니다. 곧 계약과 율법, 사제와 성전에 관한 관심보다 하느님을 어떻게 하면 잘 찬미할 수 있고, 참 지혜를 간구해 슬기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서와 지혜서는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라고 노래합니다.(시편 111,10; 욥 29,28; 잠언 1,7; 집회 1,14 참조) 이처럼 시서와 지혜서는 하느님의 가르침과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유다인들 사이에 지혜 문학이 발전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이미 유다교는 조국이나 성전, 왕조와 같은 역사적이고 물질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을 재건하겠다는 마음은 이미 없어졌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나라를 잃고 노예살이를 했지만, 율법을 통해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 역사적이고 물질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노예살이를 면하고 자기 땅으로 돌아와 비록 옛날처럼 왕국을 건설하지 못했지만 해방된 민족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겐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이라는 의식 대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이란 의식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민족이 우선이 아닌 개개인을 중시하는 풍토가 유다 사회 안에 확산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지혜 문학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지혜서는 인간의 지혜가 하느님에게서 기인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시편 104,24; 잠언 3,19), 창조된 세상 안에 내재하며 그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의 지혜는 세상과 하느님을 연결시킵니다.(잠언 8장 참조) 따라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지혜를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욥 28,28; 잠언 9,10; 집회 1,14) 유다인들은 바빌론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을 구원하고 해방시켜주실 하느님께 희망의 시를 지어 노래했습니다. 찬양과 탄원, 신뢰와 감사, 교훈 등 다양한 주제가 담긴 시편 기도는 이스라엘의 경신례에 자리 잡게 됐고, 그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중요한 기도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서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 심성을 시적 운율 안에서 결정체를 이룬 문학 작품입니다. 따라서 시서에는 구약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가 집약돼 있습니다. 그래서 시서를 특히 ‘시편을 구약 성경의 요약집’이라고 합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10.19

기도 하지 않는 용감한 부모[월간 꿈 CUM] 꿈CUM 가정 _ 오늘 당신의 자녀와 안녕한가요? (3) 3년 전 자녀 교육서를 출간하고, 책에 대한 추천사를 써준 선배에게 인사차 찾아갔을 때입니다. “그래, 축하해. 아이가 벌써 중학생이라고? 잘 크지?” 그 한마디에 벌써 저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지요. 자녀 교육서를 쓰고 교육 강사로 일하면서 제 자식은 학업도 생활 태도도 엉망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으니까요. “에효, 죽겠어요. 제가 지금 이런 책을 낼 때인가 싶어요. 무슨 사춘기가….” “그렇지 뭐. 나도 우리 애들 너무 힘들다. 그래도 지켜보며 기다려야지. 그런데 넌 성당 잘 다니고 기도 많이 하니? 그냥 키우기도 힘든데 기도 안 하고 어떻게 키워. 자식 둔 부모가 기도하지 않는 것만큼 용감한 일이 없다.” 그 선배를 만난 후 ‘자식 둔 부모가 기도하지 않는 건 정말 용감하다’는 말이 항상 뒤통수를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도무지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었지요. 왜냐하면 사춘기란 게 한두 해 만에 끝나지가 않더라고요. 중2에 정점을 찍고도 후폭풍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시켜 놨더니 고등학교는 간다 안 간다, 애간장을 녹였지요. 그래도 다행히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아이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한 학기 정도 반짝 학교생활을 즐기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해 가을 자퇴를 하게 됐지요. 교우문제를 시작으로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는 그렇게 학교 밖 청소년이 되었답니다. 어떤 집 아이는 자기가 왜 자퇴를 해야 하는지, 자퇴 후엔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 파워포인트 문서로 30장을 작성해 부모에게 보여준다더군요. 하지만 저희 아이는 그렇게 계획적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는 학교 밖에서 자유인지 방임인지 모를 시간을 만끽했고 부모인 저희는 자괴감에 바닥을 뒹굴 수밖에요. 그즈음 3년 전에 만났던 선배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9일 기도를 시작해서 56일, 또 56일, 그리고 세 번째 9일 기도를 시작하던 중에 ‘성서 모임’에 관한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창세기 반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된 날, 저는 다른 엄마를 보며 또 자괴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복사단의 단장 엄마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아이 때문에 이 자리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아이 때문에 복사단 단장까지 맡게 됐고 아이 때문에 성당에 자주, 일찍 오다 보니 제대회 봉사에 성경공부까지 하게 됐다고 말이지요. 순간, 아이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그곳에 와 앉아 있던 저는 그 상반된 입장의 엄마가 몹시 부러웠습니다. ‘이끄심도 저렇게 아이를 통해 하시는구나. 저 엄마는 참 축복 받았네. 나도 결국 아이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앉았지만, 아이를 앞세워 극심한 형벌 같은 시간을 보내고 반성하며 와서 앉아있는 나와는 차원이 다르구나.’ 남의 집 이쁜 자식과 우리 집의 미운 자식을 비교하며 그렇게 혼자 속으로 뼈아팠지요. 그러면서 생각은 이내 반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 아이가 저 아이 또래일 때 나는 엄마로서 왜 저렇게 열심히 하지 못했을까? 나도 저렇게 지냈다면, 우리 아이의 과거와 나의 양육의 시간은 달라져 있을까?’ 짧은 순간에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이 스쳐갔습니다. 그렇게 회한이 가득한 마음으로 매주 참석한 성경공부 시간에 어느 날은 나름의 깨우침이 있었지요. ‘시련이 있다고 하여 그것이 반드시 처벌이고 형벌이라 할 수는 없다. 신앙인에게 그 사건은 시련이자 형벌 같아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일을 통해 깨닫고 의미를 이해하고, 감사로 누려야 할 ‘신앙의 언어’일 수도 있다.’ ‘기도하는 부모’란 어떤 모습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동안 저는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이 깊었습니다. 그러다 제 나름의 결론을 얻었지요. 내 뜻대로, 나의 기대대로 존재하길 바라며 구하는 모습이 아니라, 아이가 가장 자기답게 살 수 있도록 세워주는 부모, 그렇게 되기를 축복해주는 모습이 바로 기도하는 부모의 모습이라고요. 이제는 저 역시 그날의 선배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냥 키우기도 힘든데 기도하지 않는 부모라? 정말 용감(?)한 부모라고요. 양육자로서 저는 오늘도 기도하며 이 숭고한(?) 몸부림을 계속하고 있답니다. 부디 여러분도 오늘 자녀와 함께 안녕하시기를 빕니다. 글 _ 최진희 (안나) 국문학을 전공하고 방송 구성작가로 10여 년을 일했다. 어느 날 엄마가 되었고 아이와 함께 가는 길을 찾아 나서다 책놀이 선생님, 독서지도 선생님이 되었다. 동화구연을 배웠고, 2011년 색동회 대한민국 어머니동화구연대회에서 대상(여성가족부장관상)을 수상했다. 휴(休)그림책센터 대표이며, 「하루 10분 그림책 질문의 기적」을 썼다. cpbc2024.09.23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3주일 - 귀먹고 말 더듬는 신앙인 되지 않으려면](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9/03/kpr1725350691977.jpg)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3주일 - 귀먹고 말 더듬는 신앙인 되지 않으려면 필립 메드허스트 성경 삽화 컬렉션 중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의 귀를 열리게 하는 기적을 그린 삽화 부분. 출처=Wikimedia 예수님께서 어느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신 이야기가 오늘의 복음 내용입니다. 그의 두 귀에 당신의 손가락을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열려라! 하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첫 번째 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께서 말씀하신 메시아 시대의 기쁨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 이러한 예언을 그대로 실현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약속된 메시아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놀라운 행적과 권위 있는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했지만, 모두가 이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배척하거나 믿지 않으려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눈은 있어도 보질 못하고, 귀는 있어도 듣지를 못하는 사람’(마태 13,14-15 참조)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의 복음은 육체적으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한 사람의 치유 이야기지만, 비유적으로는 귀가 있어도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입이 있어도 하느님 말씀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육신의 귀가 건강해서 갖가지 소리를 잘 듣는다 하여도 정작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거나,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의 진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귀는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입으로 탐욕스러운 말, 남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말, 잘난 척하는 말만 하고 있다면 올바른 입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듣고 말하는 우리의 내적인 태도와 자세를 자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듣기와 말하기 중 어느 쪽이 더 힘든가요? 저의 경험으로는 잘 듣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말하는 훈련, 토론 대회 등은 있지만 잘 듣는 방법과 연습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현실입니다. 먼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고, 잘 들을 때 비로소 제대로 답할 수 있기 때문에 듣는 것은 말하기의 출발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신앙인으로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출생 이후 아기들이 처음으로 하게 되는 말은 ‘엄마·아빠’일 것입니다. 그렇게 엄마 아빠를 부르기 전에 아기들의 부모가 사랑으로 수없이 반복해서 엄마·아빠라는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아기들은 먼저 그것을 듣고 익혔고 마침내 소리내어 말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서, 세상의 사건과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양심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계속 들려주십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적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을 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에 계속 귀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에 마음을 여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그리한다면 세상과 이웃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더 잘 듣고 올바로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유승록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 기도사제)cpbc2024.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