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OP 철책서 건넨 성모님 상본, 택시 기사 품에서 다시 만났다[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믿음에 충성한 백인대장, 신치구 베르나르도 장군 - (3) 21사단 백두산성당 봉헌식을 주례한 김수환 추기경과 신치구(뒷줄 오른쪽). 대령으로 전방 GOP부대 지휘할 때 순찰하는 병사들에게 성모 상본 건네 비육사 출신 화려한 인맥 없이 장군 진급 교황청은 교황 기사 훈장 수여 김 추기경, ‘군종사의 전설’이라며 축하 1978년 광주 상무대에서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참모장을 지낼 때였다. 어느 날 시내에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백미러로 신치구 대령을 계속 보는 듯했다. “혹시 저 15사단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네, 그런데요?” “그럼, 1974년 당시 50연대장님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기사는 잠시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지갑에서 재빨리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귀퉁이가 다 닳은 작은 성모님 상본이었다. “제가 50연대에서 철책 근무를 할 때 연대장님께서 주신 상본입니다. 군 생활 동안 이 상본의 성모님이 제 어머니가 되어주셔서 두려움을 이기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저도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 택시 기사는 신 장군이 장병들에게 뿌렸던 신앙의 씨앗이 맺은 열매였다. 한국전쟁 후 38사단 동료들과(가운데). GOP(General Outpost)는 6·25전쟁 이후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남방한계선 철책을 따라 설치된 일반전초를 말한다. 이곳 근무 장병은 야간에 경계근무를 하기에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한다. 병사들은 실탄을 장전한 소총과 수류탄을 휴대한 채 생활하며 언제든 전투가 가능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등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았다. 1969년 한신 대장이 제1 야전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신앙의 전력화’를 위해 ‘전군 신자화 운동’을 주창하고 이를 전체 군대로 확산시키고 있었다. 군의 신앙 전력화와 신자화 운동은 휴전선 철책 경계를 담당하는 병사들에게는 특히 적극 권장되었다. 확고한 신앙은 유물론 공산주의에 맞서는 정신 무장이 되고, 각종 안전사고와 월북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GOP 근무에 투입되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수계나 세례를 주기 위해 군종 스님, 목사, 신부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양적인 팽창을 우선시하다 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1974년 2월 말 토요일 오후 400여 명의 장병을 대상으로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사단장과 각 연대장 및 군인 가족 신자들과 서울에서 온 열심한 신자들, 군목과 민간 목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단상에서 세례식을 지켜보던 연대장 신치구 대령의 눈에 한 병사의 군복 상의 주머니에 십자 표시 배지가 두 개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세례식 후 그 병사를 불러 배지에 대해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예, 하나는 전에 세례받을 때 것이고 하나는 오늘 세례식에서 받은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도외시한 채 문제 사병의 선도와 사고 예방 등 군의 안전을 위한 현실적인 목적으로 접근한 ‘전군 신자화’는 부대 내 각 종교의 세례자 수를 합하면 전체 부대원 숫자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결과를 내기도 하였다. 신앙은 어떤 명분이든 세속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신치구 대령은 제대로 된 군인 신자 양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1975년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30명의 병사가 천주교 신자로 탄생했을 때 그는 마치 한 부대를 얻은 것 같았다. 50연대 군종 사제들과 수도자와 함께 한 신치구 대령(오른쪽에서 네 번째). 신치구 대령은 전방 GOP부대를 지휘할 때마다 신부님과 수녀님의 부대 방문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들은 매번 기도서와 빵과 음료수를 한가득 싣고 나타나셨는데 특히 정명조 아우구스티노 군종신부(후에 초대 군종교구장 주교)가 챙겨온 성모님 상본 1000매는 그 역할을 제대로 했다. 철책선을 따라 야간 순찰에 나섰을 때 신 대령은 병사들에게 상본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고향의 어머니 대신 하늘의 어머니가 너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이 상본을 잘 간직하도록!” 그때 상본을 받은 장병 중에 천주교를 알게 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가 99보병여단장으로 경기도 서해안 경계를 담당하고 있었을 때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근무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가까운 왕림본당의 수녀들에게 야간 초소 위문을 요청했다. 수녀들이 기꺼이 해안선 초소 위문에 나섰는데 병사들은 환호하며 반가워하였다. 11월 겨울 밤바람을 뚫고 따뜻한 호빵을 준비해온 수녀님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남양만의 해안선을 다 돌았다. 그가 부임하는 부대에 종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근처 본당의 신부와 수녀들이 기꺼이 달려와 봉사를 해주었다. 또 본당 행사가 있을 때는 부대에서도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부대와 인근 본당 사이에 일종의 자매결연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신치구 장군의 이·취임식 같은 경우에는 부대 행사와 천주교 행사가 구분이 안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신치구는 1978년 1월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51년 군 입대 후 25년 6개월 만에 마침내 별을 달게 되었다. 신치구 장군은 장성 진급 축하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단 별은 하느님께서 달아주신 별입니다!” 사실 그는 육사 출신도 아니고 어디 내세울 만한 화려한 인맥도, 정치적 연줄도 없었다. 오로지 그가 믿는 가장 든든한 ‘빽’은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에 대한 굳센 믿음 하나로 험난하지만 바른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온 것이다. 5사단 참모들과 기념촬영한 신치구.(뒷줄 오른쪽) 소장으로 진급한 1983년에 그는 아주 특별한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 기사 훈장을 받게 된 것이었다. 교황청은 신치구 베르나르도가 군 입대 이후 소속 부대의 가톨릭 장교단에서 보인 열성적인 활동과, 군부대 내 성당 건립과 군인 세례자 배가운동을 위해 애쓰고, 군종단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공로를 인정해 훈장을 수여한다고 하였다. 한국군 장교로서는 신치구가 최초로 받은 훈장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때 축하 인사에서 “신치구 장군은 군종 사목에 각별한 지원을 해줘 살아있는 군종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종 사제들 사이에서 그는 군종사의 전설로 통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군종 신부는 전쟁 중인 1951년 2월 군종 제1기 신부 11명으로 탄생했으며, 6·25전쟁 동안 40명이 전선에서 사목하였다. 그 후 각 교구 사제의 10%를 군종 신부로 파견하기로 하면서 1978년 4월 총 10명의 신부가 군종사관 후보생으로 입교하였는데, 제2대 군종교구장과 의정부교구장에 오른 이기헌 주교도 그중에 있었다. 신치구 장군은 군 생활 동안 도합 27명의 군종 사제와 함께했다. 소위 시절부터 장군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군종 사제의 업무를 돕기 위해 실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으며, 신학생 병사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폈다. 그가 군 현장에서 군종 신부를 도운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했다. 하느님 백성을 돌보고자 나선 사제가 그 직무를 잘 수행하도록 보조하는 일은 평신도 신자로서 마땅한 임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80년 3월 광주교구의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99보병여단장 신치구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처럼 신심이 깊은 사람이오.” <계속> 권은정 (유스티나 루이제, 작가, 전문 인터뷰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cpbc2026.08.12

믿음과 사랑 속에 그리스도인의 참삶을 살아야[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3)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신앙 고백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랑과 믿음의 참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콘스탄츠의 마스터 하인리히, ‘예수님 품에 기대어 쉬고 있는 요한 사도’, 14세기 초반, 목재,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벨기에. 신약 성경은 사도 시대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 나름으로 해석해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이단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자들로 인해 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오고 있습니다.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도 이러한 배경에서 쓰였습니다. 요한의 서간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이단을 퍼뜨리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 4,3; 2요한 7), ‘거짓 예언자’(1요한 4,1), ‘거짓말쟁이’(1요한 2,22), ‘속이는 자’(2요한 7)라고 규정합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일원이었으나(1요한 2,19) 이젠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교리를 퍼뜨려(2요한 10) 믿음을 충실히 지키는 신자들을 탈선시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1요한 2,26; 3,7) 요한의 서간들은 이들이 세상에서 나와 이 세상에만 속한 자들로서(1요한 4,5) ‘사람을 속이는 영’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고 비난합니다.(1요한 4,6) 교회를 위협하는 이들은 신비주의에 빠진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뵙고(1요한 3,6; 3요한 11), 그분과 일치를 이루며 살고 있으며(1요한 2,3), 빛 속에 있기에(1요한 2,9) 하느님을 완전히 안다(1요한 2,4)고 자처합니다. 이는 교회 가르침에 명백히 반대되는 주장이며 행위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강생을 부인하면서(1요한 4,2; 2요한 7)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며(1요한 2,22) 하느님의 아드님도 아니라고 가르칩니다.(1요한 4,15) 그러면서 자기들은 죄가 없다(1요한 1,8. 10)며 계명(1요한 2,4)과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1요한 2,9) 요한의 서간들은 영지주의자들을 경계하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1요한 2,2; 4,2; 2요한 7)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처음에 받은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할 것을 권면합니다.(1요한 1,1; 2,7; 3,11; 2요한 5.6) 그래서 요한의 첫째 서간은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5,13)라고 밝힙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Ιωαννη Α·Β·Γ’(요안네 알파·베타·감마),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Ioannis Ⅰ·Ⅱ·Ⅲ’,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동일 인물이 요한의 세 서간을 썼다고 봅니다. 세 서간의 문체나 담긴 가르침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 이 서간들을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요한 2·3서는 글쓴이 자신을 단지 ‘원로’라고 밝힐 뿐입니다. 그리고 요한 1서에선 글쓴이 자신을 ‘예수님을 직접 뵌 목격 증인’(1,1-3; 4,14)이라고 소개합니다. 오늘날까지 교회의 전승은 요한 사도가 이 서간들을 썼다고 합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이하 요한 1서)은 총 5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 서간의 핵심 주제는 ‘하느님과의 친교’입니다. 요한 1서는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기준을 세 단계로 제시합니다. 첫째 단계는 ‘죄를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1,5─2,28)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는 하느님의 빛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우선 죄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고, 그리스도의 적이 나타나고 항구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2,29─4,6) 하느님 아드님의 모범을 따라 의로움을 실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따라 영을 식별합니다. 셋째 단계는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4,7─5,12)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내려와 믿음 안에 뿌리를 내립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은 사랑의 뿌리입니다. 요한 1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4,8)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신약 성경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 줌과 동시에 친교이며 나눔입니다.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을 하나로 결합시킬 뿐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도 하나가 됩니다. 요한의 둘째 서간(이하 요한 2서)은 12절, 요한의 셋째 서간(이하 요한 3서)은 13절로 구성돼 있습니다. 요한 2서는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리셨고 또 교회 안에서 처음부터 전해 온 계명의 빛을 받으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며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는 요한 1서의 주제와 같은 내용입니다. 요한 3서 역시 진리에 따른 삶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는 자들의 자세와 대비되는 것이라며 선교사들에게 협조할 것을 당부합니다. 이처럼 요한의 서간들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참삶을 제시합니다. 이 참삶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삶입니다. 이 친교의 삶은 사랑의 실천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참삶의 기준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이는 성령을 알아볼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서간들은 모든 희망을 그리스도께 걸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분열하는 신앙의 위기가 닥쳤을 때 죄를 끊어버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증인이 될 것임을 선언한 세례 때의 신앙 고백을 충실하게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4.10.16
![[가톨릭 문화산책]<28> 영화(6) 맨오브 스틸(Man of Steel) - 대중 문화 속 하느님 구원 역사](//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6447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영화(6) 맨오브 스틸(Man of Steel) - 대중 문화 속 하느님 구원 역사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악 물리치는 '구원자' 그려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 2013) 감독 : 잭 스나이더 상영 시간 : 148분 장르 : 액션ㆍ모험ㆍ판타지ㆍSF 등급 : 12세 이상 과학자들은 지구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경고한다. 오존층이 파괴되고, 열대림은 소멸하며, 지구 온난화와 산성비 등 가시적 변화가 지구촌 도처에서 나타난다. 남극과 북극해를 뒤덮은 얼음은 예상보다 빠르게 녹아 해수면이 점점 상승한다. 홍수와 가뭄, 혹한이 정상적 기상 흐름을 잃은 지 오래다. 근대문명의 발달로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부상했고 자본과 권력은 신자유주의를 낳았다. 생명윤리를 외면한 유전자 조작과 생명 복제라는 비윤리적 생명공학이 현대 과학문명의 괴물로 자리를 틀고 있다.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인 '맨 오브 스틸'에서 말하고자 하는 파멸된 크립톤 행성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읽어내야 할 경고가 아닐까 싶다. #줄거리 무차별적 자원 개발로 멸망 위기에 처한 크립톤 행성. 이 행성 최고의 과학자 조엘은 그래서 갓 태어난 아들 칼엘을 지구로 보낸다. 자신의 존재를 모른 채 지구에서 클라크라는 이름으로 자란 칼엘은 남다른 능력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한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탄생과 성장 과정의 비밀을 듣게 되면서 혼란에 빠진다. 한편 크립톤 행성의 반란군 조드 장군은 파괴된 행성을 다시 재건할 수 있는 모든 유전자 정보가 담긴 코덱스(codex)가 칼엘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 부하들을 이끌고 지구에 온다. 이제 칼엘은 자신을 외면하던 사람들이 사는 지구의 보루가 돼 최강의 적 조드 장군과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전쟁을 시작한다.#새로운 시작 영화는 한 생명이 태어나는 장면에서 비롯된다. 수백 년 만에 산고를 겪으며 자연출산한 아이는 엘(EL) 가문의 아들이었다. 이름은 칼엘(Kal EL). 아버지 이름은 조엘(Jor EL)이었다. 'EL'은 엘로힘의 고대어로, 하느님과 같은 보통 명사이며 일반적으로 신성(神性)을 뜻하고, 동시에 고유명사로서 단 한 분뿐인 하느님을 지칭하기도 한다. 조엘과 칼엘은 하느님을 은유한다. 크립톤인들은 행성 표면의 자원을 모두 고갈시킨 후 그것도 모자라 행성의 중심핵까지 파내려가 결국 행성이 붕괴직전까지 간다. 이같은 급박함에도 조엘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크립톤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지구인들이 자신의 행성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아들을 지구로 보낸다. 크립톤 행성의 파괴는 오늘날의 생태계와 환경호르몬으로 죽음의 위기를 겪는 지구를 보여주는 비유(metaphor)이기도 하다. 조엘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칼엘에게 말한다. "가슴의 'S' 마크는 '엘'가문의 상징인 '희망'을 의미하지. 그 안에 믿음이 있어. 선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네가 그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믿어라"하고 말한다. 어머니 라라도 칼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새롭게 재생될 믿음과 희망을 암시하는 시작이다. #공존의 길 크립톤 행성의 대장 조드는 크립톤 행성만 살리는 데 목숨을 건다. 그는 힘을 앞세워 살상과 반란의 칼을 휘두른다. 조드는 자신의 종족을 구하고 영원히 번영하기 위해 열등한 혈족은 제거하고 우열족만을 살리려 한다. 한편 북극에서 만난 칼엘에게 조엘은 이렇게 말한다. "10만 년 동안 번영했었지…. 기적을 일궈냈던 거지…. 인위적으로 인구 조절을 했고, 아이들은 사회에서의 역할이 정해졌지. 노동자와 군인, 지도자 전부 말이야. 네 어머니와 나는 뭔가 중요한 걸 잃었다고 생각했지. 선택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 소중한 가치를…."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칼엘이라고 말한다. 조엘은 모든 생명체의 공존, 크립톤 종족과 지구인, 모두의 중요성을 칼엘에게 말한다. "넌 크립톤의 자식이자 지구의 자식이기도 해. 네가 원한다면 두 세상의 자식이 되어 다오." 그리고 두 종족 간에 다리가 돼 구원자의 역할을 하길 바란 것이다. 지구인들은 또한 거대 문명의 지배 속에서 충분히 폭력적이었고,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로 멸망 위기를 겪고 있다. 새로운 지구 건설은 모든 생명체가 함께 나누고 누리며 숨 쉬는 세계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는 던진다. 칼엘은 캔자스 주 스몰빌에 내려와 클라크라는 이름으로 산다. 신적 능력을 간직하고 있지만,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소박한 지구의 삶을 지구 부모에게 습득한다. 지구 아버지 켄트는 아들이 감정을 절제하고 분별력있게, 또 능력을 균형 있게 활용하라고 조언하며 신뢰로 동반한다. 그러나 칼엘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지구에 살고 있는지 의문을 품는다. 켄트는 클라크에게 칼엘의 현존 자체가 기적이고, 지구 외에도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해준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이유를 알게 될 때를 기다리게 한다. 열등한 인종도, 우열한 인종도, 심지어 미생물까지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칼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때가 도래해야 함을 말한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투신 칼엘은 자신의 초능력을 감추고 살아가지만 위험에 처한 약자들을 위해 흘러넘치는 사랑을 숨기지 못한다. 통학버스가 강에 빠지자 어린이를 구해 주고, 유조선이 폭발하자 초능력으로 철근을 막아낸다. 그의 사명은 악만 빼고 누구든지 살리는 일이다. 드디어 그의 때가 왔다. 칼엘은 북극에 숨겨진 크립톤 비행선에서 아버지 조엘을 만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뒤 그의 눈빛과 몸에서 초능력을 감지한다. 이때 조드 장군이 지구를 찾아와 크립톤 행성의 유전자 정보가 담긴 코덱스를 24시간 안에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를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한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칼엘은 "넌 평범하지 않아. 언젠가 선택의 날이 올 거야"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칼엘은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번민을 털어 놓는다. 등 뒤로 보이는 겟세마니 예수님 그림은 고뇌하는 칼엘의 심정과 겹치는 상징이다. 신부는 오로지 믿음에 따라 행동할 것을 권한다. 칼엘은 지구와 인류를 위해 투쟁할 것을 결심한다.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결전에 나선다. 싸움 중 조드가 칼엘에게 한 말을 기억해보자. "네가 받아들인 인간들을 고통받게 해 주마. 인간을 그렇게까지 사랑한다면 그들 죽음에 눈물이나 흘려." 불을 뿜어대는 악의 상징이다. 칼엘은 죽어가는 인간을 바라보며 그의 말대로 눈물을 흘린다. 천신만고 끝에 칼엘은 승리한다. 여기서 마지막 장면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다. 평범하지 않는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주시해야겠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칼엘의 모습. 드러나지 않지만 누룩과도 같은 존재, 오늘날 구석구석에서 선을 퍼뜨리는 또 다른 우리 중의 누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맨 오브 스틸'은 전형적인 미국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다. 따라서 미국적 강인함과 불굴의 영웅상을 연출했다. 이 영웅상은 타 문화에 대한 개방과 위기를 극복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된 메시지가 도드라진다. 그래선지 웅장하고 화려한 서사 구조와 극적인 장면들은 다소 지루해 보이기도 하고, 무자비하게 그려진다. 진정한 관용이 어디쯤에서 발휘돼야 할지 묻고 싶어지는 부분이 적잖은 영화다. 그룹대화 1. 생명공학을 앞세워 파괴되는 지구 환경과 유전자 조작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2. 나는 주체적으로 지구 위기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3. 유전자 조작을 막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성경구절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이복순 수녀(성 바오로딸 수도회)조은일2013.07.30

조정래 신부가 들려주는 묵주기도의 참의미한 사제의 묵주 기도 / 조정래 신부 /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한 사제의 묵주 기도 / 조정래 신부 /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심순화 작가의 한복 입은 성모님 그림 수록 출간 기념 염미숙 작가 전시회 9일까지 개최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조정래 신부가 「성모님과 함께하는 한 사제의 묵주 기도」를 펴냈다. 묵주기도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기도 가운데 하나다. 갓 세례를 받은 새내기 신자부터 레지오 마리애 단원, 성직자나 수도자까지 모두에게 보편적이면서도 의미를 지니는 특별한 기도다. 다양한 형태로 묵주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신자도 많다. 그에 반해 묵주기도의 의미와 바치는 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묵주 알을 굴리면서도 분심으로 자책한 경험은 다들 있을 것이다. 조 신부는 “그것도 시간과 마음을 봉헌하는 소중한 기도지만, 묵주기도는 단순히 정해진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을 넘어 예수님 탄생부터 수난·죽음·부활 그리고 영광에 이르는 구원 신비를 성모님의 눈을 통해 깊이 헤아리는 기도”라고 설명했다.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예수님 생애를 깊이 묵상하고, 성모님의 모범을 따르며 전구를 청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책은 먼저 묵주기도, 즉 로사리오의 뜻과 바치는 방법을 소개한다. 이어 각 신비, 각 단에 대한 조 신부의 묵상과 기도가 그림과 함께 펼쳐진다.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한국적인 모습의 성모님과 예수님, 천사들의 모습은 심순화(가타리나) 작가의 작품이다. “주님, 비록 잘 준비된 그럴듯한 장소와 사람이 아니더라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함께하신다면 그 모든 부족함마저도 귀하고 훌륭하게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듣게 하소서.”(환희의 신비 3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중) 조 신부는 “순례의 여정에 긴 시간 계속 묵주기도를 드렸고 그때 떠오른 묵상들을 정리해 보았다”며 “묵상인지 상상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생각인지 구별하기는 힘들지만, 나름대로 각 신비의 한 단, 한 단마다 어떤 묵상을 해야 할지, 무슨 마음을 가져야 할지, 또 어떤 기도를 드리고 어떤 결심을 해야 할지 함께 나누고자 한다”고 전했다. 출간을 기념해 9일까지 서울 중구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옥 지하 1층 역사전시실에서 전시회도 열린다. 로사리오의 신비를 화폭에 담은 염미숙(마리스텔라) 작가의 작품을 책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염 작가는 “바다의 별 성모님을 중심에 두고 환희·빛·고통·영광의 신비를 표현했다”며 “시각적인 작품을 통해 기도의 신비가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5.12.31

맛과 멋[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윌리엄 홀먼 헌트 작, ‘세상의 빛’ 1851~1853년 소문난 식당을 검색하여 줄을 서서 대기하면서까지 ‘먹고 싶게 만드는 맛’, 노을과 석양을 무대로 펼쳐진 장관을 관망하려고 일출·일몰 시각에 방문하는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보고 싶게 만드는 멋’이 있다. 적당한 양념을 배합한 조리 방식이, 적절한 조명을 지원한 관찰 각도가 맛과 멋을 돋운다. ‘맛’있는 음식, ‘멋’있는 풍경은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한다. 맛과 멋은 사치와 허영의 영역이 아니라 활력과 행복의 일부다. 일반적으로 음식과 경치에 적용되는 맛과 멋은 인간관계를 포함한 사회생활 전반에 반영될 수 있다. ‘맛’없는 관계는 지속되지 않으며, ‘멋’없는 모임과 조직에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 이 맛과 멋을 대표하는 주제어가 바로 소금과 빛이다. ‘맛’ 내는 양념의 기본은 ‘소금’이다. 양념 이외에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는 소금은 세상 시작부터 존재하였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바다’(창세 1,10 참조)를 기점으로 소금은 피조물 ‘내부에’ 포함되어 있다. 생명체의 필수 구성 성분인 염분의 적정량을 조절함으로써 생명이 유지된다. 하느님은 ‘안에 있는 소금’(세상의 소금)으로 창조된 생명을 유지한다. ‘멋’ 내는 조명의 본질은 ‘빛’이다. 조명 이외에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는 빛은 세상 시작부터 존재하였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빛’(창세 1,3 참조)은 피조물 ‘외부에’ 위치하면서 사물을 비추고 사물을 통해 반사된다. 생명체의 성장과 생활에 필수 요소인 빛은 강약을 조절함으로써 생명을 보호한다. 하느님은 ‘밖에 있는 빛’(세상의 빛)으로 창조된 생명을 보존한다.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마태 5,13), “세상의 빛”(마태 5,14)을 각인시키는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라는 소명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에 앞서 소금과 빛은 ‘우리 안팎에서 이미 존재하는 하느님’, 곧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 소금’, ‘우리 밖에 빛’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느님을 소개한다. 주 식재료 ‘안에’ 숨은 양념과 주 풍경 ‘밖에’ 숨은 조명이 맛과 멋을 내듯, 하느님은 ‘숨어 있는 방식으로’(마태 6,6 참조) 인생의 맛과 멋을 선사한다. ‘제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함지 속에 놓인 등불’은 하느님이 전달하는 맛과 멋을 외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금과 빛은 두 가지의 공통분모를 가진다. 하나는 고정된 형체를 취하지 않는 특성이다. 소금은 고체 형질로부터 변형하여 녹음으로써, 빛은 발광체로부터 분산하여 비춤으로써 자기 역할을 실현한다. 다른 하나는 균형 잡힌 정량으로 작용하는 특성이다. 소금과 빛이 과도하거나 부족하면 양념과 조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소금과 빛처럼 하느님은 ‘보이지 않게’(없는 듯이 있게), ‘적은 양으로도 깊고 세련되게’ 맛과 멋을 선사한다. ‘우리 안에 소금’처럼 있는 하느님을 통해 ‘사는 맛’이, ‘우리 밖에 빛’처럼 있는 하느님을 통해 ‘사는 멋’이 구현되면 좋겠다. 이 맛과 멋의 체험이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생명’(1요한 4,16 참조)이다.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cpbc2026.02.04

육군 중장 예편 후 고위직 마다하고 피정길에 올랐다[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믿음에 충성한 백인대장, 신치구 베르나르도 장군 - (4) 1987년 12월 29일에 열린 전역식 행사장에 나란히 앉은 신치구 장군과 부인 백옥현(로사) 여사. 36년 군 생활 마치고 차관 지낸 뒤 공직서 완전히 물러나 교리신학원 청강생으로 2년 개근 꿈꾸던 공소회장의 길 좌절되자 번역·저술 작업하며 본당서 봉사 북한선교위원회 후원회장 맡아 활동 “연구소 만들어보라”는 신부 제안에 가톨릭 신앙생활연구소 설립 준비 신치구는 1987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스무 살 청춘에 참전용사로 시작하여 36년간의 군 생활을 훌륭하게 마치고 군문을 떠나던 날 그는 개인적인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임시장교로 시작했다가 점차 군인을 나의 천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주신 직업이라 생각하며 이 직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군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조금도 후회가 없고 오히려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예편과 동시에 그는 국방부 차관으로 취임하여 1년간을 봉직한 다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차관직을 그만둘 무렵 그는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좋은 자리로 옮겨갈 수 있었다. 당시 여당의 국정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니 가만히 있어도 국영기업체 사장 자리 정도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낙하산 인사로 얻게 되는 자리를 사양했다. 가까운 지인들조차 권유했지만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평생 군인으로만 산 사람이다. 그 분야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는가. 마치 일반 회사원에게 군대 지휘를 맡기려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신앙인 신치구 장군의 진면목이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에 더 확실히 드러났다고 말한다. 그는 그 전에 누렸던 지위와 영광에 일체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는 보통의 겸손한 가톨릭 신자로서 오로지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하고자 했다. 신치구는 육군 교육사령관을 마지막으로 군을 떠났다. 1987년 12월, 신치구 장군을 위한 전역미사가 50여 명의 사제 공동집전으로 봉헌됐다. 자연인으로서 첫 번째 행보를 보더라도 그랬다. 차관직에서 물러난 바로 그날 오후 신치구는 피정센터 ‘수원 말씀의 집’에 단출한 짐가방을 내려놓았다. 그곳에서 열흘을 보내고, 이어서 ‘왜관 베네딕도 피정의 집’으로 옮겨가 근 한 달 동안 긴 피정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홀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지면서 인생의 세 번째 단계,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일에 봉사하는 일을 설계하고자 한 것이다. 신치구 장군의 이어지는 행보는 빈틈이 없어 보였다. 피정을 마치는 대로 바로 혜화동의 교리신학원에 청강생으로 등록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봉사활동을 하게 되든지 간에 먼저 성경과 교리에 대해서 공부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 과목 청강생으로 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수업에 출석했다. 1990년 말에 있었던 졸업식 때 그는 수료증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교리신학원 공부를 마치는 대로 고향으로 내려가 공소회장으로 살고자 했었다. 예편 직후 그는 고향의 적당한 마을을 정해 집을 지었다. 25평짜리 집칸은 양쪽에 방을 두고 중간에 대청마루를 깔았다. 이웃들과 친교를 나누며 동네 사람들을 하느님 백성으로 인도하며 사는 삶을 꿈꾸었다. 사실 젊은 날 전방 시절부터 그의 집은 언제나 공소와 같았다. 단칸방의 가난한 군인 살림이었지만 가톨릭 공동체로서는 한없이 풍성한 곳이었다. 쌀이 몹시 귀하던 때, 주일마다 모이는 신학생 병사들과 군종신부들을 위해 세끼 밥상을 차리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신 장군의 부인 백옥현(로사, 89)씨는 그 시절이 천국 같았다고 말한다. 신 장군의 공소회장의 꿈은 김천 지역의 정치인이 그의 낙향을 극구 반대하고 나서면서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1990년 12월 가톨릭 교리신학원 졸업사진. 맨 뒷줄 가운데가 신치구. 그 다음 그는 번역과 저술 작업을 시작했다. 신학생 병사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양덕배 신부의 권유로 일본어판 「마리아의 복음」을 읽게 되면서 처음으로 번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그에게 일본어는 낯설지 않았고 그는 평소 종교서적을 늘 탐독해 오던 터였다. 「성모의 생애」 번역 작업에 매달리고 있었는데 그 즈음 그의 모습은 매우 놀라운 변모였던 게 틀림없었다. 전철역에서 교정원고지를 들고 있던 그를 만난 옛 군대 동료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신형, 오랜만이오! 그런데 어찌 된 일이오?” 동료의 눈에는 낡은 가방을 둘러메고 운동화를 신은 신 장군의 차림이 무슨 사업에 실패한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던 옛 부하는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주시라고도 했다. 대부분 사람들의 눈에는 신 장군의 행동이 세상 물정에 어둡고 답답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속적인 잣대에 흔들리지 않았고 초탈한 자세로 오로지 신앙생활에 충실하게 사는 삶에서 큰 만족을 느꼈다. 1991년에 나온 「성모의 생애」는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고, 이어서 「나자렛의 요셉」의 역서도 출판했다. 그가 직접 지은 책으로는 「12사도의 생애」가 있다. 그는 살아가면서 예수님 가까이에 있던 인물들을 탐구해 보고자 하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좀 더 잘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온전히 신앙생활에 몰입하게 된 그는 당연히 본당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오랜 세월 교적을 두었던 가락동 본당에서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사목회 회장직을 맡았으며 성체분배자와 복사로도 활동하였다. 1992년 6월 명동대성당에서 북한선교위원회 ‘침묵의 교회’를 위한 바자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홍성철 전 장관, 함제도 신부, 신치구, 김수환 추기경, 이동호 아빠스,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 김영자 수녀. 또 이때 한국 주교회의의 상임위원회인 ‘북한선교위원회’ 후원회장직도 기꺼이 맡아서 일했다. 이제 그의 호칭은 ‘신 장군’에서 ‘신 회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평생 전방 너머로 바라보던 북한 지역 선교를 위해 일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위원회 활동을 하던 때 중국의 연길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길림성 장춘시 소팔가자 성당에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 건립을 위한 준비와 옛 함흥교구 소속 본당 실태를 파악하여 필요한 지원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만난 중국인 신부가 새벽녘에 신자들이 씻을 물을 준비해 주었는데 그곳 신자들은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던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 1991년 말, 당시 교리신학원장이던 유병일 신부가 신치구 회장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베르나르도 회장님, 교회를 위해 연구소를 하나 만들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유 신부는 교회 내 연구기관들이 대부분 성서학이나 영성신학, 신심에 대한 연구에 치중하고 있으니 이와는 차별화된 연구소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신자들의 신앙생활 상태를 확인하여, 이를 바탕으로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 정서에 맞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연구소의 목적이 될 것이었다. 평신도가 선뜻 나서기에 어려워 보였지만 그것이 바로 포인트였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신도가 먼저 세운 교회의 백성이야말로 교회의 중흥을 위해 나서는 데 가장 적격자일 수 있었다. 그날 밤부터 신 회장은 가톨릭 신앙생활연구소 설립을 위한 계획안의 틀을 잡기 시작했다. <계속> 권은정 (유스티나 루이제, 작가, 전문 인터뷰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cpbc2026.08.19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부활을 믿나이다[저는 믿나이다] (56·끝)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죽은 이들이 부활하여 심판받을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영광으로 충만한 새 하늘 새 땅이 열릴 것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 1536~1541년,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마지막 고백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경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삶에 대한 선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교회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내용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질타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12-14. 20) 예수님께서는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9) 죽은 이들은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요?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35-37.42. 52-53) 교회는 모두가 이해하도록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셨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루카 24,39)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로 돌아오셨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육신은 ‘영적인 몸’(1코린 15,44)으로,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필리 3,21 참조)(「가톨릭교회 교리서」 999)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살기’(2코린 5,8) 위하여 떠나야 한다. 죽음이라는 이 ‘떠남’에서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다. 그 영혼은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날 육체와 다시 합쳐질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05) 그러면 언제 죽은 이들이 부활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요한 6,39-40), “세상 끝 날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가톨릭교회는 모든 사람은 죽자마자 그 불멸의 영혼 안에서 산 이와 죽은 이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의 ‘개별 심판’으로 영원한 갚음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가는 연옥에서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지옥의 주된 고통은,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새겨야 할 교회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유 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 죽을 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만이 지옥에 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교회는 미사와 일상 기도를 통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2베드 3,9) 바라며 하느님의 자비를 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라고 신약 성경은 말합니다. 이날 모든 것이 변화할 것입니다. 모든 이가 부활할 뿐 아니라 교회 역시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이날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통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것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과 마찬가지로 “아멘”으로 끝맺습니다. 히브리말 ‘아멘’은 견고함, 신뢰, 성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멘’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과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의미합니다. “신경 끝의 ‘아멘’은 첫머리의 ‘저는 믿나이다’라고 하는 말마디를 되풀이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과 계명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무한한 사랑과 완전한 성실성의 ‘아멘’이신 분께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 때 ‘저는 믿나이다’라고 한 신앙 고백에 대한 ‘아멘’이 될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64) 부족한 긴 연재 글을 인내로이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신경은 여러분에게 거울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는다고 고백한 모든 것을 정말 여러분이 믿고 있는지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여러분의 믿음 안에서 기뻐하십시오.”(「설교집」 58,11,13) 리길재 전문 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12.17

요한 묵시록 (01)[월간 꿈CUM] 신약이 내게 말을 건네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Last Judgement), 프레스코화, 13.7×12.2m, 1534~1541년, 시스티나 성당, 로마 바티칸 Q. 묵시문학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1) 정의 : 묵시(默示)라는 말은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에서 유래된 것으로, ‘덮개를 벗김’ 또는 ‘숨은 것을 드러내 보임’을 뜻합니다. 묵시문학의 작품들은 세상 마지막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하느님 진노의 크신 날’을 기술하고 있으며, 이날을 묘사하는 문학적인 양식을 묵시문학이라고 부릅니다. 묵시문학 안에서 유다인들은 시대를 현세와 앞으로 다가올 세대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현세는 악으로 얼룩져 있어서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으며 개혁도 불가능한 세계이기에 오직 파괴와 소멸만이 이 세계의 운명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으로부터 마지막 세계를 기다리는 희망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세계는 하느님이 직접 다스리는 시대로 선과 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세상이며, 평화와 번영과 정의가 확립되는 세상으로서, 이곳에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지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세계는 오직 하느님께서 직접 이 세상의 사건에 개입하심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이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날, 곧 주님의 재림의 날은 악의 자식들에게는 공포와 파괴와 심판의 무서운 날이 될 것이지만, 주님의 자녀들에게는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꿈이 악의 자식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독특한 방법을 동원하여 글을 쓰게 되는 데, 이러한 문학 형태가 묵시문학입니다. 묵시문학은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에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2) 특성 ① 하느님의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선포하고 역사의 흐름 안에서 적용, 심화시키는 과정에서 상징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꿈, 천체전도, 동물, 숫자, 색채 등을 사용합니다. ②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항상 일인칭으로 말하지만, 자신의 본이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줄 수 없는 권위를 자신의 작품에 주기 위해서 구약의 유명한 예언자들의 이름(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또는 사도 베드로, 사도 바오로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저자의 메시지가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③ 이 시대가 끝나기 전에 내릴 재앙들을 열거, 때로는 종말이 오기 전에 예전에 없었던 고통의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다니 12,1) 요한 묵시록에서 언급한 일곱교회 중 하나인 티아티라 교회의 유적 Q. 요한 묵시록은 어떤 성경입니까? 많은 사람이 요한 묵시록을 두려움을 안겨 주는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희망을 안겨 주는 책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바로 환난과 박해 속에서 신음하며 외치는 교회 공동체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하느님의 대답입니다. 비록 박해로 점철된 순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때, 하느님의 시간, 하느님의 계획은 존재함을 알리는 성경입니다. Q.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요한이라 부릅니다.(1,1.4.9; 22,8) 이 요한은 교회 전승에 의하면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요한입니다. 2세기부터 이렇게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의 저자를 사도 요한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에는 문학작품을 과거의 중요한 인물에게 바치는 습관이 있었는데, 특히 묵시문학 작품을 쓸 때 그렇게 했습니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자기를 요한이라고 부르고 있을지라도 사도 요한은 아닐 것입니다. 저자는 달리 알려진 바 없는 ‘요한’이라는 이름의 ‘초기 그리스도교 예언자’라고 결론짓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Q. 요한 묵시록의 집필 시기는 언제입니까? 요한 묵시록은 황제인 자기를 세상의 ‘주인’으로 가르치며 강요했던 로마 황제 도미시아누스 통치 말년, 즉 서기 90년부터 100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주임을 지냈다.2025.10.23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투사 “예수님 따르는 구도자로 살겠다” 결심[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도시 빈민의 대부, 제정구 바오로 - (2) 민주투사의 회심 제정구(오른쪽)와 정일우 신부. 교련 반대 시위로 수배·도피하다 제적 청계천 판자촌 교회서 야학교사 활동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 형 받고 투옥 옥에서 하느님 섭리 깨닫고 성경 통독 아내와 함께 정일우 신부에게 세례받아 서울대 문리대 1급 데모꾼 “군사독재를 막지 못하면 조국의 주인이 아닌 이방인이 될 겁니다.” 나는 동기들보다 나이가 든 탓에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해 만기제대한 후 1971년에 복학했다. 이 무렵 군사독재 정권은 교련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해 군국주의를 강화하고자 했다. 나는 교련 반대 시위의 연사로 자주 나선 탓에 문리대의 1급 데모꾼으로 낙인찍혔다.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해 서울의 10개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군인을 주둔시키는 한편, 데모 가담자들을 잡아들였다. 나 역시 수배돼 도피하다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이듬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석 달 동안 구금당했다가 무사히 풀려났지만, 곧바로 ‘문제아 길들이기’ 코스에 붙들려가 3박 4일간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러나 억울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원망하거나 앙심을 품지도 않았다. 그간 내가 휘둘렀던 주먹다짐을 고스란히 되돌려받는 것이라 여겼다. 못된 싸움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이들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1973년 3월에 복적됐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급기야 1974년 4월에 민청학련사건이 터져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제적·구속됐다. 중앙정보부로 이송돼 무자비한 구타와 잠을 재우지 않는 살인적 고문을 당했다. 일주일간 모든 것을 다 털린 후에야 구치소로 갈 수 있었다. 동지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참담함과 부끄러움에 몸부림쳤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 이름을 외우지 않게 됐다. 마침내 형이 선고되던 날, 내 목소리가 재판정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재판장님과 마찬가지로 밥 굶고 발 부르터가며 애국했는데, 왜 이 자리에 서 있는 겁니까? 제가 죽어서 나라가 잘되리라 생각하시면 사형에 처해주십시오. 기꺼이 죽겠습니다.” 파월장병 출신인 삼성장군 재판장은 내게 15년 형을 선고했다. 골목대장 날건달이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투사로 공인된 날이었다. 서울대 캠퍼스에서 학우들과 시국을 논의하는 제정구(오른쪽에서 두번째). 청계천 판자촌 야학교사 나는 개신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캠퍼스에는 최루탄과 돌멩이가 교차하고 있는데, 개신교 서클은 이웃을 사랑하라며 태평스럽게 전교했다. 나는 엄중한 현실에 무감각한 개신교인들이 소인배적인 야바위꾼으로 보였다. 그러던 차에 나 대신 어머니가 경찰서에 연행돼 고초를 겪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동생 정무가 다니던 복음교회의 장성환 목사가 많이 위로해줬다. 이후 그와 사회 현실을 토론하면서 예수쟁이에 대한 혐오가 점차 사라졌다. 그는 내게 청계천 송정동 판자촌의 활빈교회 야학교사를 권했다. 나는 그곳에서 김진홍 목사를 만나 더럽고 낮은 곳에 있는 청계천의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라고 느꼈다. 1973년 초 활빈교회로 이사한 후 그에게 세례받았다. 인생을 바꾼 정일우 신부와의 만남 그해 말, 내 일생을 바꿔놓은 일이 벌어졌다. 미국인 신부가 청계천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유창한 한국말로 자신을 정일우(John V. Daly, S.J.)라고 소개한 그는 1960년에 예수회 신학생으로 한국에 와서 3년간 실습한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66년에 사제품을 받았다고 했다. 이듬해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서강대에서 철학을, 예수회 신학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다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 달간 청계천 체험을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번듯한 예수회 신부이자 대학교수가 왜 판자촌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인의 동정심이거나 객기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하느님의 섭리였던가. 당장 그가 묵을 곳이 없어 내가 기거하던 기도실에서 함께 지내야만 했다. 아홉 살 연상인 그와 마음이 통했다. 그는 사흘 뒤에 방을 얻어 나갔는데, 그때부터는 내가 그의 작은 방에 가서 함께 지내는 날이 많았다. 1974년 1월에 김 목사가 긴급조치 반대 성명서 사건으로 체포되자 불똥이 내게 튀었다. 체포조가 활빈교회에 들이닥쳤다. 나는 속옷 바람으로 답십리까지 달아나 정일우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나를 서강대 사제관에 숨겨주었다. 그때 책상 앞에 걸려있던 십자가가 눈에 띄었다. 교회에서 보던 밋밋한 모양이 아니라 실제 예수님이 매달려있는 십자가였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벌어진 양손과 한데 모은 발에는 못이 박혔으며, 병사가 창으로 찔러서 죽음을 확인했다는 옆구리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섬뜩했다. 1960년대 청계전 1973년 청계천 판자촌 모습. 수형생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간 시간 며칠 뒤 사제관에서 나왔지만, 결국 석 달 뒤에 민청학련사건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15년 형을 받고 교도소에 갇혀 육체와 정신이 무기력하게 파괴돼가던 어느 날이었다. 쥐 한 마리가 화장실 홈통을 타고 내 방에 나타났다. 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뭇등걸 같던 몸이 생명체를 발견한 기쁨에 꿈틀거렸다. 불현듯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광야에서 40여 년간 떠돌던 시련,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40일간 겪었던 고난이 선명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맞아! 하느님께서 나를 황량한 광야로 이끄신 거야. 역사 속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단련의 시간으로 말이야.’ 하느님의 인도로 판자촌에 들어갔고, 감옥에 갇혔다는 확신이 들었다. 광야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날부터 성경을 통독하기 시작했다.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던 날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날로 바뀌었다. 수형생활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 됐다. 나는 1975년 2월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예수님 음성 듣고 가톨릭으로 개종 출소한 직후 정 신부의 제안으로 치악산에서 열흘간 피정했다. 허름한 여인숙의 탁자 위에 놓인 십자고상이 촛불에 빛났다. 축 늘어진 예수님 모습은 섬뜩함이 아니라 애처로움으로 다가왔다. 가련한 그의 모습이 답답하게 보였다. 나는 수석 사제나 율법학자와 같이 그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아니, 도발해 그를 움직이고 싶었다. “당신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왜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겁니까?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이 썩어빠진 세상을 뒤엎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달란 말입니다.” 그때였다. 묵직한 음성이 방을 가득 채웠다. “나도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질 때까지 아버지께 청했다.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지.” 나는 급히 되물었다. “도대체 그 뜻이 뭔데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단 말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죄를 짓고 낙원에서 추방된 뒤 하늘 나라는 굳게 닫히고 말았다. 이제 내가 사람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가는 거야. 누구든 회개하고 나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거지. 그게 바로 아버지의 뜻이란다.” “⋯⋯.”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어엎어 달라는 건 가당치 않아.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거든. 내 제자가 되려면 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거라.” 내가 가야 할 길이 환히 보였다. 내 십자가를 지고 빈손으로 따르다 하나의 밀알로 죽는 길이었다. 지난날의 과오와 죄악이 낱낱이 떠올랐다. 옛일을 하나하나 곱씹고 통렬히 뉘우치며 가슴을 쳤다. 어느새 탁자 위에는 촛농이 수북이 쌓였고, 창밖은 훤해지고 있었다. 개종을 결심했다. 전에 받은 개신교 세례는 신앙적 결단이 아니라 그곳에 동화해야겠다는 조급증 때문이었다. 더욱이 청계천의 하느님을 통해 사회운동의 성과물을 내고 싶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이 앞섰다. 부끄러웠다. 1977년 1월에 아내와 함께 정 신부에게 세례받았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 동행하며 사람의 길을 발견하리라 다짐했다. 구도자로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무엘의 말을 읊조리며⋯.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 김문태 힐라리오 (한국평단협 수석부회장, 문학박사)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cpbc2025.12.16

사도들의 정통 신앙 계승한 교회의 아버지, 교부[저는 믿나이다] (35) 교부는 누구인가 교부들은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을 해설하고 정통 교리를 수호함으로써 교회 성장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베르니니 작 ‘사도좌’, 1657~1666년, 금도금 청동,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령 강림 후 성령으로 가득 찬 사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선포한 기쁜 소식에서 시작됩니다. 교회가 전하는 ‘사도들의 신앙’은 “성령께서 영감을 주신 성경 안에서, 교부들의 증언이 언제나 살아 있는 전통 안에서, 성령께서 도우시는 교회의 교도권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게 하시는 성사의 전례 안에서 말씀과 상징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성령께서 전구해 주시는 기도 안에서, 교회를 이루는 은사와 직무 안에서, 사도적 삶과 선교적 삶의 표징들 안에서, 성령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구원 사업을 계속하시는 성인들의 증거 안에서”(「가톨릭교회 교리서」 688) 계승되고 지켜지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어 땅 끝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뿐 아니라 많은 민족이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이에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이며 고대 교회 저술가인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다교 지역과 문화를 뛰어넘어 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당대 유행하던 헬레니즘 철학 사고 체계를 도입합니다. 이 과정에서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복음 내용(케리그마, Kerygma)이 ‘믿을 교의’(도그마, Dogma)로 발전하게 됩니다. 교부(敎父, Patres Ecclesiae, Father of the Church)는 문자 그대로 ‘교회의 아버지’를 뜻합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교회의 영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요. 일반적으로 교회의 영적 아버지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교부는 주교가 아니더라도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을 해설하고 정통 교리를 수호함으로써 교회 성장과 발전에 이바지한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스승으로 성경의 언어와 문화로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았던 신앙의 오랜 증인들입니다. 이들은 모진 박해와 세상 거짓에 맞서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며 복음의 진리와 거룩한 삶의 가치를 지켜낸 성인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백성을 섬기고 돌보는 일을 천직으로 여겼던 목자들입니다.(한국교부학연구회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머리말 참조) 고대 저술가들 가운데 ‘교부’로 인정받고 불리기 위해선 다음 네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첫째, ‘고대성’을 지녀야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일반적으로 첫 교부를 제4대 교황 클레멘스 1세(재위 88~97년)로, 마지막 교부를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650?~749?)으로 봅니다. 따라서 1세기 말 사도 시대 이후부터 7~8세기까지를 ‘교부 시대’라 합니다. 적어도 이 시기 안에 활동해야 교부의 자격이 됩니다. 둘째, ‘정통 교리’입니다. 그 가르침이 정통 교리에 부합해야만 합니다. 셋째, ‘생활과의 조화’입니다. 그 가르침이 실제 생활과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신앙과 생활이, 가르침과 삶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단에 빠지거나 윤리적으로 고결하지 못한 삶으로 추문을 일으킨 자는 교부라 불릴 수 없습니다. 넷째, ‘교회의 승인’입니다. 교회가 그를 교부로 선포하거나 그의 저서가 교회 문헌에 직접 인용돼야 합니다.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는 성 암브로시오(339~397)와 성 아우구스티노(354~430),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 예로니모(347~419), 그레고리오 대교황(540?~604)입니다. 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는 성 대 바실리오(329~379)와 성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329?~390?),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4/354?~407), 성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295?~373)입니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는 사도좌를 바치고 있는 네 교부의 청동상이 있습니다. 앞쪽은 서방 교회 교부를 대표하는 성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티노이며, 뒤쪽은 동방 교회 교부를 대표하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성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입니다. 동·서방 교부들이 사도좌를 받들고 있는 것은 성령 안에서 항상 일치를 이뤄야 한다는 교회 가르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교부들은 사도로부터 이어온 정통 신앙을 해설하고 수호하며 후대에 계승해 줌으로써 교회에 풍요로움을 더해 준 이들이라 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부들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겨 “거룩한 교부들은 이 성전(聖傳)이 살아 있음을 증언하고, 믿고 기도하는 교회의 관습과 생활 안으로 이 성전의 풍요로움이 흘러들어온다고 가르친다”고 밝힙니다.(「계시 헌장」 8) 따라서 교부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소중한 영적 자산이자 보화입니다. 특히 초기 교부들은 유다이즘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가현설, 영지주의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과 인성을 옹호하는데 크게 공헌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성경과 사도 전승으로 증명했을 뿐 아니라 신앙의 유산으로 계승하였습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07.09
![[금주의 성인] 다니엘 (7월 21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7/15/QSk1752562244664.jpg)
[금주의 성인] 다니엘 (7월 21일)연대 미상, 출생 및 선종지 미상, 예언자, 구약인물 다니엘 성인. 굿뉴스 다니엘서는 구약 성경 예언서로, ‘다니엘’이란 이름은 아람어와 히브리어에서 ‘하느님께서 판결(심판)하신다’ 또는 ‘하느님께서 바르게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서에 따르면, 다니엘은 유다 임금 여호야킴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 함께 갔습니다. 그는 네부카드네자르·벨사차르·다리우스·키루스 임금 치하에서 궁중의 조언자로 그리고 포로로 끌려 온 유다 민족을 위한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다니엘서를 포함해 구약 성경이 담고 있는 다니엘에 관한 내용은 다소 일관되지 못하고, 역사성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바빌론 유배 시대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서 형성된 상징적 인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징적 인물의 기원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다니엘서 저자가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모르나,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이란 뜻)에 속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사후(死後)의 상선벌악(賞善罰惡)과 육신의 부활에 대한 교의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표명한 것은 다니엘서 저자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 정부가 하수인을 만들기 위해 유다 왕족이나 귀족 자녀들을 모아 교육할 때, 그 대상자로 뽑힌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이름까지 바꾸며 강제로 바빌론 문화를 익혀야만 했습니다. 바빌론의 내시장은 다니엘과 세 명의 동료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다니엘은 벨트사차르라고 불렸습니다. 내시장은 그들을 임금의 시종으로 발탁했습니다. 다니엘은 나중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꿈을 정확히 해석해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그들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은 궁중에서 지내면서 율법에 어긋나는 부정한 음식과 술을 강요당한 것이었으나 다니엘은 내시장에게 간청해 슬기롭게 이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최대 시련은 임금이 금으로 만든 바빌로니아의 수호신, 마르두크 신상 앞에 절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이 명령을 따를 때, 다니엘과 동료는 결코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그들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세 젊은이는 가마 속에서 유유히 걸으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렸습니다. 임금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며 천사를 보내 당신의 종들을 몸소 구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세 젊은이에게 높은 벼슬을 내렸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7월 21일을 성 다니엘의 축일로 기념합니다.cpbc2025.07.16
![[책꽂이] 「수험생을 위한 100일 은총 성경 쓰기」 외 3권](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8/20/HAI1724137079392.png)
[책꽂이] 「수험생을 위한 100일 은총 성경 쓰기」 외 3권 수험생을 위한 100일 은총 성경 쓰기 / 생활성서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오는 11월 14일 치러진다. 석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수험생은 물론이고 이를 지켜보는 가족과 지인들의 마음도 초조할 수밖에 없다. 「수험생을 위한 100일 은총 성경 쓰기」는 은총과 지혜의 원천인 성경을 필사하며 묵묵히 수험생의 여정에 동참하도록 돕는다. ‘성경 쓰기’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단순한 필사를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경 안에서 사랑으로 당신 자녀들과 만나시며 그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신다”(「계시 헌장」 21항)라는 교부들의 가르침대로, 성경을 쓴다는 것은 곧 하느님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지향을 갖고 성경 필사를 하면 혼자서는 지치기 쉬운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 드리고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 더구나 가족을 위해 바치는 진심 어린 기도에 담긴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자. 청진상륙작전 / 김정선 / 서교출판사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기만작전 중 하나인 청진상륙작전을 소재로 70여 년간 묻혀 있던 비화를 엮은 소설이다. 신학생 출신인 최병해(마르코, 1914~1994) 중령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사흘 앞서 이뤄진 청진상륙작전의 유일한 생존자다. 이 작전에서 최 중령이 이끈 특공대 500명은 전원 사망했다. 지원을 약속했던 미군의 함포사격도, 후속부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해 10월 최 중령은 미주리호 함상에서 한국군 가운데 최초로 미국 대통령이 수여한 동성훈장을 받았지만, 죽은 부하들을 떠올리며 바다에 버렸다. 같은 이유로 한국군에서 수여한 금성충무무공훈장과 종군기장도 받지 않았다. 70년이 지난 2020년에야 최 중령의 유가족인 세 딸(최효선 수녀 등)에게 이 훈장들이 전달됐다. 저자는 “세 자매가 선친에 대한 전기문을 써달라며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주섬주섬 꺼냈다”며 “조국을 위해 산화한 최병해 중령과 500인의 지워진 영웅들이 이룬 청진상륙작전이 현대사에 선명한 한 줄로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겪어보면 안다 / 김홍신 / 해냄 굶어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 걸 코 막히면 안다, 숨 쉬는 것만도 행복인 걸 일이 없어 놀아보면 안다, 일터가 낙원인 걸 불행해지면 안다, 아주 작은 게 행복인 걸 … 「겪어보면 안다」는 소설가 김홍신(리노)이 인생을 살아가며 수없이 경험하고 깨달은 삶의 소회를 엮은 책이다. 작가의 139번째 출간작이자 4년 만에 선보이는 산문집으로, ‘아프고 잃고 떠나보낸 뒤 비로소 깨달은 인생의 참된 행복’을 주제로 40여 편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환경이 변하고 세대가 달라져도 사는 일에 대한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에서, 따뜻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노작가의 진솔한 고백이 깊은 감명을 선사한다. 별다올 아침 산책 / 오세윤 / 북나비 저자 오세윤(토마스 아퀴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80여 년 세상 한 번 어지럽게 산 남자의 삶에 대한 수필이다. 1938년생인 저자는 38선 인접 북녘 바다 마을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았고, 공산 정권을 피해 월남했다 전란의 생지옥을 겪었으며,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 소아과 의사로 한평생을 살았다. 굴침스레 살아내며 보고 느끼고 사랑하며 산 세상을 글로 엮어 꾸준히 펴내고 있다. 이번 책에서도 사람 사는 이야기, 살아야 할 의미에 대해 썼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4.08.23

옻칠과 조각에 담긴 ‘영원의 숨결’이승원·안병철 초대전… 절두산·서소문 성지 박물관서 각각 개최 이승원 작 ‘인도하심’ 오랜 세월 수행하듯 작업해 온 두 작가의 신앙과 예술 세계가 서울대교구 내 성지 박물관에 나란히 펼쳐졌다. 이승원 작가 ‘영원을 향한 시간’ 이승원(마르타, 80) 작가 초대전 ‘영원을 향한 시간’은 절두산순교성지 내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관장 원종현 신부)에서 열리고 있다. 독일에서 정통 금속공예를 배운 작가는 1979년 귀국해 국내 금속공예 1세대 작가들과 함께 활동했다. 유학 시절부터 금속공예와 함께 모시·삼베·창호지·옻칠 등 우리나라 전통 소재에 관심을 두고 서구적인 조형미에 한국적인 정서를 이질감 없이 조화한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뉘른베르크 미술대학 아카데미상을 연속 수상했고, 1992년 국제 은공예 트리엔날레에서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성미술품 및 생활과 밀접한 작품들을 창작해 왔고, 공예에서 저변을 확장해 옻칠화 작업을 해왔다. 이승원 작가 초대전 '영원을 향한 시간' 전경. 이번 전시에서는 금속공예에서 출발해 옻칠을 매개로 영역을 확장해 온 작가의 작업 세계를 조명한다. 특히 신앙에 대한 성찰과 성경 묵상을 바탕으로 ‘영원’을 향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시간이 담겨 있는 작품들로, 옻칠화·설치·성물·금속공예 작품 총 60여 점이 소개된다. 옻칠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서양의 유화가 색을 칠하고 마르면 그 위에 또 다른 색을 덮어 전체적인 색채의 균형을 맞춘다면 옻칠은 바탕 효과를 예상하면서 칠을 반복한다. 유화는 색칠의 효과를 비교적 빠르게 확인할 수 있지만, 옻칠은 원하는 색을 내기 위해 칠을 하고 적절한 온도와 습도에서 며칠간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이후 마지막 부분에서 표면을 사포로 갈아내야만 은은한 광택과 깊이감을 얻을 수 있다. 작가는 “수 개월 동안 수십 차례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거쳐야 완성되는 옻칠 작업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묵상을 반복하는 구도의 삶과 닮아있다”며 “겹겹이 쌓을수록 고운 색채에 옻 특유의 무게감이 드러나는 옻칠 작품처럼 우리의 기도가 켜켜이 쌓여 영원을 향한 깊이 있는 신앙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승원 작 ‘은총의 나무’ 관장 원종현 신부도 “시간과 재료의 축적이라는 옻칠 작업으로 창작된 작품을 통해 작품의 표면을 넘어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신앙적 사유의 층위를 함께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덕성여대 생활미술과를 졸업한 작가는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수학했다. 원광대와 청주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서울·의정부 가르멜 여자 수도원, 제주 성클라라 수도회 성당,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청량리성당,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승원 작 '마리아' 한편 작가는 이번 전시가 끝난 뒤 출품 작품과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성물과 금속공예품 등의 기증을 박물관 측과 협의하고 있다. 작가의 대표작이 포함돼 있어 교회 미술로서의 예술 가치와 전례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 이어진다.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9시 30분~오후 5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문의 : 02-3142-4504 안병철 작 ‘생명-영(影) XIX 4’ 조각가 안병철 ‘물성에서 생명으로’ 조각가 안병철(베드로, 69) 개인전은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전시 제목은 ‘안병철: 물성에서 생명으로’. 초창기 조각·입체 작품부터 최근의 한지 작업까지 40년에 걸친 작업 변천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1980~1990년대 한국 조각의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작가의 미공개 초기작을 시작으로 대립하는 두 세계 사이의 경계를 은유한 ‘문’ 연작, 자연·인간·순환의 질서를 탐구한 ‘생명’ 연작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부친인 1세대 근대 조각가 안찬주 선생의 작품도 최초로 공개한다. 안병철 작 ‘Flow of Life IV’ 작가는 철·스테인리스·브론즈·한지 등 전통적인 조각 재료의 물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미니멀하고 기하학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해 왔다. 특히 형태를 단순화해 본질을 드러내는 그의 작업은 ‘생명의 기원’ 연작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생명-영(影)’ 작품은 모든 세부 묘사를 덜어내고 매끈하게 연마되어 잘 닦인 거울 표면으로 빛과 공간, 관람자를 끌어들이며 작품 안에 비친 관람자 스스로를 마주 보게 한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외형을 넘어 움트는 생명과 보이지 않는 에너지, 시간의 흐름이 빚어낸 순환의 흔적은 작품의 표면에 머무르지 않고 관람자의 감각과 내면에 스며든다. 작품을 통해 수행하는 수도자에 본인을 비유하기도 한 작가는 “작가와 작품은 서로를 비추며 결국 닮아가는 존재”라며 “자연의 이치와 섭리를 느끼고 배우며 깊은 성찰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정을 그려낸다”고 말했다. 안병철 작 '생명-기원 VIII' 서울대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에서 조소를 공부한 작가는 서울시립대 조각학과 교수 및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장을 지냈다. 1988년 경기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서울시립미술관, 포항시립미술관, 수원 올림픽기념조각공원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30일까지 매일 오전 9시 30분~오후 5시 30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문의 : 02-3147-2403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6.04.29

예수의 신성·인성 결합과 삼위일체 교리 제시[저는 믿나이다] (43)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 3세기 호교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는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제시한 위대한 신학자들이다. 테르툴리아누스(왼쪽), 오리게네스 중세 삽화. 3세기 그리스도교는 로마 황제의 조직적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지역 교회 주교들을 중심으로 교계제도가 든든히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비 신자 교육 기간도 3년으로 굳어지고 있었습니다. 또 2세기 때부터 활발히 진행되었던 성경 정경 목록 작업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처럼 3세기 교회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면서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느님,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신앙 규범을 확정하기 위해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이 시기 성경 정경과 사도들의 전승에 기초해 삼위일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규범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한 두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호교 교부들인 서방의 테르툴리아누스와 동방의 오리게네스입니다. 최초의 서방 호교 교부인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155~230?/240?)는 그리스도론에 있어 서방이 동방보다 몇 세기 앞서는 큰 신학 업적을 남깁니다. 그는 삼위일체 하느님에게 ‘성삼’(Trinitas), ‘위격’(persona)이라는 신학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라틴 교부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 다음으로 뛰어난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평신도였던 그는 안타깝게도 몬타누스주의 이단에 빠졌을 뿐 아니라 극단적인 윤리 생활과 지나친 엄격주의를 강조해 배우자 사별 후 재혼하는 것도 간음이며, 박해를 피해 숨는 것도 배교이며, 배교·살인·간음 등 대죄는 교회도 사해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보편 사제직을 강조해 반 교계제도를 주장했습니다. 교회는 이를 ‘테르툴리아누스주의’라 부르며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 하지만 몬타누스주의 이단에 빠지기 전 초기 그는 신학 저술을 통해 교회의 신앙 규범 틀 안에서, 유일하신 하느님의 본질 안에서 아버지·아들·영이라는 고유한 실재가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오직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며 모든 것에 앞서서 발하신 그분의 말씀으로, 무에서 만물을 만드신, 세상의 창조주 외에는 다른 하느님이 없다고 믿어진다. 이 말씀은 그분의 아들로 불리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에 의해 여러 모습으로 보여졌으며, 예언자들 안에서 항상 그 말씀이 들렸고, 마지막 날에 하느님 아버지의 영과 권능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내려오셨으며, 그분의 태중에서 육이 되셨고, 그분께 잉태되어 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으며, 그 다음에 새로운 율법과 하늘나라에 대한 새로운 약속을 설교하시고 기적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으며, 믿는 이들을 움직이시는 대리자 성령의 힘을 보내셨고,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성인들은 영원한 생명과 천상 약속의 열매를 누리도록 받아들이고 불경한 이들은 영원한 불로 단죄하시기 위함이며, 육의 회복과 함께 영혼과 육 둘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어진다.”(테르툴리아누스, 「이단자들의 규정」 13, ‘신앙의 규범’, 황치헌 신부 역, 「고대 교회사 사료 편람」 289쪽) 아울러 테르툴리아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항구하게 결합하여 실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육이 영이 되거나 영이 육이 되지 않는다. 물론 육과 영은 온전히 하나의 주체 안에 있을 수 있다. 이들로부터 예수가, 육으로부터 인간이, 영으로부터 하느님이 존재한다.”(테르툴리아누스, 「프락세아스 반박」 27.; 「교부들의 그리스도론」 460쪽) 이러한 테르툴리아누스의 신학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451년 칼체돈 공의회의 교의 선포에 기초를 제공합니다. 서방 라틴 교회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활동하던 시기 동방에서는 오리게네스(185~253)가 호교 교부로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 레오니데스가 순교하자 그 역시 순교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신학과 철학 등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고신 극기에 힘썼습니다. 자주 단식하고, 맨바닥에서 자고, 두 벌의 옷을 갖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금욕 생활을 위해 스스로 거세를 했습니다. 이 일로 그의 사제품은 무효가 되고, 파문까지 받아 교회에서 내쫓기게 됩니다. 그는 로마 데치우스 황제 박해 때 체포돼 모진 고문을 겪고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의 200여 편 저술 가운데 가장 대표하는 책이 「원리론」입니다. 하느님, 세상, 인간, 성경 등 네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가장 오래된 신학 교과서로 고대 교회 「신학대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신학의 중심은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영이며 빛이며 절대적 원리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다스리는 분이시며, 성부의 선하신 형상인 ‘둘째 하느님’이신 성자는 성령과 함께 성부와 피조물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또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로고스인 ‘신성’과 예수의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된 ‘인성’이 결합해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밀접하게 결합해 있기에 신성과 인성의 속성들을 서로 교환해 적용할 수 있다는 ‘신인 속성 교환’ 이론을 새롭게 제시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신인 속성 교환 이론에 따라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인간 예수를 낳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속성들이 한 위격 안에서 서로 교환되기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고 합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09.09

‘하느님의 말씀 주일’ 떠오르는 세 명의 성인예로니모, 대중 성경 보급 초석 안토니오, 사막에서 복음의 삶 프란치스코, 철저히 말씀 실천 ‘하느님의 말씀 주일’은 신앙생활에서 성경이 지니는 중요성과 가치를 일깨우는 날이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하고 삶의 형태가 변해도 복음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성경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과 성인들의 모범은 오늘날 신앙생활에도 기준점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맞아 성경에 충실했던 성인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마리누스 반 레이메르스바엘 작 성 예로니모. 출처=가톨릭굿뉴스 성경이 일반 사람들에게도 널리 보급된 데에는 성 예로니모(345~420)를 빼놓을 수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9월 30일 자의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를 통해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포했다. 교서가 반포된 9월 30일은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이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의 본문 비판과 함께 라틴어 번역본을 만들어 오늘날 대중적인 성경이 보급되는 데 초석을 다진 위대한 학자다. 당시 대다수 서민들은 라틴어를 사용했지만, 성경은 일부 라틴어 부분 번역을 제외하고 모두 그리스어로만 쓰여있었다. 성인은 번역 작업을 완수하고자 탄탄한 라틴어 소양과 그리스어·히브리어 지식을 활용했다. 그의 번역은 히브리어 문체에 충실하면서도 라틴어의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일반 신자들에게도 성경은 공동의 유산이 됐고, 동시에 신학 용어의 원형을 이루면서 서양 문화사를 특징짓는 기념비가 됐다. 그가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은 ‘대중적’이라는 의미의 「불가타」(Vulgata)라고 불리게 됐다. 성 안토니오 아빠스. “성경을 자주 읽으십시오. 그대의 손에서 거룩한 책을 절대 내려놓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예로니모 성인의 권고는 16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오늘날에도 울려 퍼지고 있다. 수도생활 역사의 시조라 불리는 성 안토니오 아빠스(251~356)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을 둔 채 치열하게 복음을 살았다. 금욕생활과 철저한 고독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 무장했던 성인은 수도생활을 방해하는 온갖 유혹과 싸우며 평생 주님만 따랐다. 성인의 일생은 ‘말씀’에 기초한다. 자기 보화가 하늘에 있음을 확신해 주님을 따랐고, 늘 성경을 신뢰하며 거기서 영감을 받아 힘을 얻었다. 성경에서 삶의 양식을 배웠으며, 영들의 식별 기술을 깨우쳤다. 제자들에게도 성경의 계명들을 마음으로 배우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유혹을 극복했다. 기도는 하느님 말씀에 젖어드는 것이었고,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는 수단이었다. 이처럼 그의 참된 금욕 수행은 지속적인 기도, 성경에 대한 경청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오의 기억이 성경을 대신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코(1182~1226)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하느님을 체험하고 성경 말씀을 접하면서 모든 재산을 버렸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7-10) 그런 자신을 주교에게 고발한 아버지와도 작별을 고하면서 철저히 말씀을 실천에 옮겼다. 성인은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한센인을 비롯한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형제들과 어디에서든 평화를 전했다. 옷은 낡고 거친 수도복 한 벌만 가지고, 음식도 주어진 대로 만족했다. 인준 받은 ‘수도규칙’ 제1장의 시작은 이렇다. “작은 형제들의 수도규칙과 생활은 이러합니다. 즉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그대로 실천하며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던 성인은 오상까지 얻으며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리게 됐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박민규2025.01.22
![[생활속의 복음] 본래의 약함 그리고 성령](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1/14/USo1768355820582.jpg)
[생활속의 복음] 본래의 약함 그리고 성령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니콜라 푸생 작 ‘그리스도의 세례’, 1641~1642년. 자연계의 생존 법칙인 ‘약육강식’과 대비하여 ‘강자 앞에서 약하게, 약자 앞에서 강하게’ 처신하는 자세를 비꼬는 ‘강약약강’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우리 사회는 재산·권한·능력·건강 등의 한시적 척도로 강자와 약자를 분류한다. 대부분 사람은 강자로의 진입을 인생의 최종 목표, 행복의 필수 요건으로 간주한다. 강자는 자신이 선점한 지위를 고수하려고, 약자는 강자 대열에 합류하려고 치열하게 노력한다.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부동의 이분법 구도로 고착되어 약자에서 강자로 변환할 수 없다는 체념은 다수의 약자에게 적지 않은 피해의식을 남긴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본래 약자라는 사실을 부각할 필요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보호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고통으로 번민하며 살아가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약자로 생을 마감한다. 강자는 ‘본래의 약함’을 해소한 초인(超人)이 아니라, 본래의 약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시대와 문화가 설정해 놓은 상대적 척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신론자는 본래의 약함을 단호히 부정하거나 한시적 지표의 우세가 본래의 약함을 보완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유신론자의 첫째 관문은 본래의 약함에 대한 긍정과 원초적인 보호의 필요성에 대한 수용이다.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는 ‘약함’을 대표하는 어린양은 구약성경에서 속죄 예식의 번제물(탈출 29,39; 민수 28,9 참조)과 파스카 축제의 잔치 음식(탈출 12,5 참조)으로 사용되었다. 이 약한 어린양을 하느님께서 ‘목자가 팔로 모아 품에 안듯이’(이사 40,11 참조) 극진히 보살핀다. 곧 어린양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드러내는 표지다. 어린양 개념을 도입하는 요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발언을 통하여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1베드 1,19)가 세상을 구원하였다. 세상의 죄를 없애는 ‘권능’(강함)과 ‘어린양’(약함)의 연결은 모순처럼 다가온다. 그런데 이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역설(逆說)은 하느님의 자기 현현 양식이다. ‘전능한’(강한)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똑같은’(약한) 인간으로 태어나고 죽으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셨다. 어둠 속에 빛으로 오신 성자 그리스도와 같이, 하느님의 전능성은 절대 강자의 권력 행사 방식이 아니라 ‘상호 대립’(강함-약함; 첫째-꼴찌; 높음-낮음)이 ‘상호 일치’(약함 안에 강함; 꼴찌 안에 첫째; 낮음 안에 높음)를 이루는 방식으로 발휘된다. 요한 복음은 ‘요한의 세례’와 ‘주님의 세례’를 ‘물의 세례’(본래의 약함에 대한 긍정)와 ‘성령의 세례’(보호·강화하는 하느님에 대한 확증)로 구분한다. 물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를 준비하고, 성령의 세례는 물의 세례를 완성한다. 성령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지닌 본래의 약함 안에서 우리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며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령의 보호하고 강화하는 은사를 ‘생명’과 연결한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의 세례는 본래의 약함을 긍정하는 이에게 생명(강함)을 선사한다. 2026.01.14

교회 공동체 안에선 모든 이가 동등한 형제[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88)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은 바오로 사도가 도망친 종 오네시모스를 형제로 받아줄 것을 주인 필레몬에게 권고하고 있다. 성 필레몬과 아피아, 아르키포스 이콘. 바오로 사도 서간 가운데 가장 짧은 글이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이하 필레몬서)입니다. 이 서간은 이름 그대로 필레몬 개인에게 보낸 서간이지만, 콜로새에 있는 그의 집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가정 교회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이기도 합니다.(2절 참조) 아울러 이 서간은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쓴 글로 인정받고 있는 일곱 서간 가운데 가장 뒤에 배치된 경전입니다. 그리고 필레몬서는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썼기에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과 함께 ‘옥중 서간’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필레몬서가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쓰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감옥에 있을 때 썼다면 55년께, 카이사리아에 갇혀 있었을 때면 58~60년께, 로마에서 옥중 생활을 했을 때라면 61~63년께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헬라어 신약성경은 ‘Προs Φιλημονα’(프로스 필레모나), 라틴어 대중성경 「불가타」는 ‘Ad Philemonem’,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헬라어 필레몬(Φιλημων)은 사랑하다란 의미의 동사 ‘필레오’(φιλεω)에서 나온 말로 우리말로 ‘사랑하는 이’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당시 프리기아(오늘날 튀르키예)에서 흔히 불린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는 아내 ‘아피아’와 아들로 짐작되는 ‘아르키포스’ 함께 살았습니다. 아르키포스는 콜로새 교회에서 특정 직무를 수행했습니다.(콜로 4,17 참조) 필레몬은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설교를 듣고 회심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콜로새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에페소에서 활발히 복음을 선포할 때 필레몬이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후 그는 바오로 사도의 ‘사랑하는 협력자’(1절)이자 ‘동지’(17절)가 됩니다. 필레몬은 콜로새 교회의 주요 인사였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자신을 위해 손님방을 하나 마련해달라(22절)고 부탁하고, ‘오네시모스’라는 종을 거느릴 만큼(16절) 부유했고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스는 우리말로 ‘유익한’ ‘이로운’ ‘쓸모있는’이란 뜻입니다. 그는 필레몬의 집에서 물질적인 손실을 입힐 만큼 부정한 행위를 저지른 후 바오로 사도가 갇혀 있는 곳으로 도망쳤습니다.(18절) 하지만 필레몬은 바오로 사도의 권유로 그리스도인이 된 오네시모스를 복음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줍니다.(21절 참조) 필레몬은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줘(2절) 신생 콜로새 교회의 성장을 적극 도와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5-7절)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형제여,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대 덕분에 성도들이 마음에 생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라고 칭찬했습니다.(7절) 16세기에 저술된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필레몬은 아내 아피아와 함께 네로 황제 시대(54~68년) 때 콜로새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필레몬 축일은 11월 22일입니다. 필레몬서는 총 23절로 구성돼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필레몬서를 쓴 배경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간 내용 정황상 필레몬의 종 오네시모스와 관련한 일 처리 때문에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필레몬 집에서 도망친 오네시모스는 바오로 사도를 만나 세례를 받고 협력자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충실하고 사랑받는 형제”(콜로 4,9)라 인정할 만큼 오네시모스를 곁에 둡니다. 하지만 오네시모스는 자유인이 아니라 도망친 종의 신분이었기에 체포돼 감옥에 갇힐까 봐 늘 불안에 떨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당시 로마법에 따라 도망자를 은닉해 개인 재산권을 침해한 중범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주인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나 오네시모스를 그냥 보내지 않고 그의 손에 필레몬에게 보내는 서간을 쥐여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자신을 맞아들이듯이 형제로 맞아 달라고 부탁합니다.(16-17절) 그러면서 “내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대가 해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라며 오네시모스를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은근히 요청합니다.(21절) 필레몬서는 초대 교회의 노예 제도에 관한 ‘복음의 관점’, 곧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 서간에서 주인과 종에 관한 관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1코린 7,20-24; 에페 6,5-9; 콜로 3,22─4,1) 바오로 사도는 근본적으로 노예제도를 반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분리의 벽이 허물어져 더 이상 “종도 자유인도 없다”고 단언합니다.(갈라 3,28) 또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로마 12,10)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노예제도를 직접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 특히 전례 모임에서는 모든 이가 동등하며 서로 형제임을 확언합니다. “당시 노예제도는 누구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모든 사람이 당연시하는 비인간적 제도의 희생자인 노예들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강요하지는 않는다.(8-9절, 14절) 다만 믿음과 사랑으로(5절) 내 자신부터 변화하고, 또 그러한 변화가 불의한 사회 제도와 그 희생자와 관련하여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도록 인도한다.”(「주석 성경」 839쪽)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 선임2024.09.04

체장수 책 두 권이 바꾼 운명… 춘천 산골에 신앙공동체 일구다[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춘천의 엄주언 말딩, 1920년 기적을 만들다 - (2) 체장수의 책, 엄말딩의 결심 춘천시 신북읍에 자리한 천전리 샘밭성당 전경. 이 지역은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교우촌을 이룬 곳이었고, 엄주언은 이곳을 왕래하던 체장수를 통해 신앙 서적을 접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천주실의」 「주교요지」 읽고 깊은 감명 어려서 영특했고 한학 익히며 성장 천진암 머물며 교리 배우고 세례 받아 돌아온 고향에서 냉대가 존경으로 화전 일구고 밤엔 교리·성경 가르쳐 ‘장차 큰일 할 사람’ 칭송이 자자 춘천, 자생적 신앙의 터전 앞선 연재에서 신유박해(1801) 이후 많은 천주교인이 춘천으로 숨어들거나 정착해 살았을 가능성과 그 증거로 정약용의 두 번의 춘천 여행을 살펴보았다. 그 정황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황심 추국 사건’을 들 수 있다. 황심은 1797년부터 세 차례나 조선 교회의 서신을 북경 주교에게 전달했고, 1801년에는 배론에서 황사영을 만난 뒤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춘천에서 처형당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신유박해 때 황심이 가족과 함께 춘천 북산면 쪽으로 옮겨 살다가 화를 입었다는 점이다. 북산면은 이벽 후손들이 살던 천전리와 북쪽으로 맞닿은 지역이고, 마적산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의 동네들이다. 즉 “춘천에도 교우들이 있었다”는 말이 전설처럼 떠도는 게 아니라, 박해의 서늘한 그늘이 실제로 이 산골까지 내려왔다는 뜻이 된다. 그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춘천이 자생적으로 신앙의 씨앗을 품어 온 터전이었음만은 분명해 보인다. 더구나 1880년대 춘천의 교우촌이나 공소를 언급한 기록에서 천전리 ‘샘밭’과 인근 지명이 반복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믿음은 꺼지지 않고, 오롯이 남아 있었던 셈이다. 운명적 만남: 체장수와 두 권의 책 이제 여기서 평신도 엄주언의 삶이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는지가 비로소 설명된다. 곰실본당(1920)을 ‘춘천 천주교의 출발점’으로만 부르는 말이 얼마나 성급한지, 그 말의 뒤에 숨은 시간의 층이 얼마나 두꺼운지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두꺼움 위에 우뚝 선 사람이 엄주언(嚴柱彦, 마르티노, 1872~1955)이었다. 엄주언의 출생은 기록과 기억이 서로 어긋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1873년 1월 8일(음력 1872년 12월 10일) 태어났고, 출생지도 한동안 동면 장학리 노루목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서면 월송리 출생으로 알려지면서 ‘어디서 태어났는가’의 좌표가 흔들렸다. 나는 이 흔들림이 오히려 진짜 같다고 느낀다. 박해의 끝물, 가난한 농촌, 평신도의 신앙의 길은 늘 공식 문서보다 구전과 가족 기억에 더 많이 기대어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는 비교적 고르게 전해진다. 그는 어려서 영특했고 한학을 배우며 글에 기대어 자랐다는 점이다. 그의 내면을 바꾼 결정적 계기는 열아홉 무렵에 찾아온다. ‘체장수’의 권유로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멈칫하게 된다. 어떻게 일개 체장수가 그런 책을 품고 다녔을까. 그리고 그 위험한 책을, 하룻밤 묵어가는 주인집 젊은이에게 선뜻 권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은 앞에서 살핀 ‘춘천의 오래된 교우촌’이라는 배경을 놓고 보면 조금씩 풀린다. 천전리 샘밭과 인근에 교우촌·공소의 흔적이 이어져 왔다면, 천주교인이었던 체장수는 그 지역과 왕래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월송리는 천전리와 멀지 않고, 북한강이 사이에 있었지만 충적지와 옥산포에서 배를 통해 쉽게 오가던 지척이었다. 장터와 마을을 잇는 길 위에서, 책 한 권은 때때로 사람보다 더 멀리 이동한다. 체장수는 그 길을 가장 자주 걷는 타인이었다. 툇마루에 앉아 체를 손보며 세상 소식을 엮는 사람, 어느 날은 체 대신 얇은 책 두 권을 봇짐에서 꺼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엄주언이 느꼈을 충격은 전승 속 탄식 한 줄로 남아있다. “세상 부모도 공경 못 하면 불효의 죄를 짓는 것인데,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지으신 천주님을 모르고 미신을 섬기며 살아왔으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 이 문장은 묘하게 낯익다. 남인 선비들이 서학을 ‘지식’으로 접하다가 어느 순간 ‘신앙’으로 넘어가며 삶이 통째로 흔들리던 그 전환과 닮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약종의 「주교요지」는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에게 빠르게 길을 열어준다. 책은 머리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붙잡아 끌고 가기 때문이다. 「천주실의」. 엄주언 등과 같은 초기 신앙인들은 「천주실의」,「주교요지」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뒤 신앙 공동체 형성에 기여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마음 속 성지 천진암에 가다 그 뒤로 엄주언은 아마 체장수를 기다렸을 것이다. 봇짐에 체만 담은 사람이 아니라 질문과 답을 담아 다니는 사람, 어쩌면 스승이자 인도자였을 것이다. 이야기들이 쌓일수록 젊은 마음은 ‘보고 싶다’는 쪽으로 기울었을 것이다. 신앙이 자라나면, 신앙은 발 딛고 설 자리를 찾는다. 신과 관련된 장소(천진암), 사람(이벽과 정약용 형제들), 그리고 흔적들 말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천진암으로 향한다. 1891년 무렵, 엄주언은 직접 천진암을 방문했다. 한때 천주교의 요람으로 기억되었으나 박해가 거세지던 당시 스님들까지 처형당하고 폐찰된 채 방치되었던 곳이다. 그 ‘마음속 성지’가 현실의 길로 다시 열리기 시작한 건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신앙의 자유가 일정 부분 허용되면서부터다. 엄주언이 천진암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역사적 ‘틈’ 덕분이었다. 이후 그는 천진암으로 이주하자고 가족에게까지 제안했으나 두 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몇 해 뒤 반대하던 두 형이 세상을 떠나자, 1893년 그는 맏형과 함께 천진암까지 두 발로 걸어가 한 달을 머물며 교리를 배운다. 그해 늦가을에는 막 가정을 꾸린 아내 윤희자(아가타)를 포함한 가족 7인을 이끌고 아예 천진암으로 터전을 옮긴다. 가족들은 움막 같은 거처에서 어렵게 신앙생활을 이어갔다고 전한다. 여기서 하나의 논쟁점이 남는다. 엄주언의 영세(세례) 시기와 집전 사제 문제다. 전승에는 1894년 엄주언이 형과 함께 프랑스 사제 ‘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다만 1894년 당시 성이 ‘목’인 프랑스 선교사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이를 리굴로(A. P. Rigoulot, 목) 신부와 연결하는 추정도 있으나, 그는 1897년 9월 26일 사제품을 받고 1898년 1월 5일 입국했기에 1894년의 집전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영세 시기가 1894년이 맞는다면 집전자는 리굴로가 아닌 다른 선교사였을 수 있다. 그동안 두세(C. E. Doucet, 정가미) 신부일 가능성도 거론되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산간 전교 활동과 1890년대 전후의 행적을 고려할 때 조제프 알릭스(Josheph Alix, 한약슬) 신부가 세례를 줬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불분명함이 그의 삶을 흐리게 하진 않는다. 누가 세례를 줬는가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왜 그 길을 택했는가’이기 때문이다. 냉대 이겨내고 고향 춘천에 정착 엄말딩은 천진암에서 3년을 보낸 뒤 고향 춘천으로 돌아오지만 기다린 것은 환대가 아니라 ‘천주학쟁이’라는 냉대였다. 거처를 장학리 노루목으로 옮겨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처가 친척의 도움으로 대룡산 자락 고은리 윗너부랭이의 폐가를 사서 이주한다. 쌀 한 가마, 콩 두 가마를 빌려 연명하고, 떡갈나무 잎을 따 죽을 쑤어 먹으며 화전을 일구었고, 이웃의 놀림과 수모도 견뎌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무너지지 않는다. 금주하며 근검하게 살았고, 밤이면 글을 아는 이들을 모아 교리와 성경을 가르쳤다. 한학을 배운 사람의 힘은 지식이 아니라 ‘매일의 습관’으로 드러난다. 생활이 곧 설교가 되고, 절제가 곧 신앙의 언어가 된다. 시간이 쌓이자 사람들은 그를 대할수록 존경을 품기 시작했다. ‘장차 큰일 할 사람’이라는 칭송이 늘어났다는 전언이 괜히 나온 건 아니었던 것이다. 곰실의 첫 씨앗은 거대한 성당이 아니라 이런 습관과 생활에서 시작되었다. 엄주언은 단지 ‘신자가 된 사람’이 아니라, 신앙을 공동체의 형식으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책으로, 이야기로, 발걸음으로 옮겨 다니던 믿음이 마침내 춘천의 한 산골에서 ‘삶의 방식’으로 싹튼 것이다. 그리고 그 싹은 굵은 줄기가 되어 공소라는 이름과 강당이라는 공간을 얻고, 마침내 문서 속 역사로 자리를 잡게 된다. <계속> 이현준(프란치스코, 한림대 강사)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cpbc2026.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