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상징] 104. 아침- 하느님과 창조사업 상징](//cpbc.co.kr/CMS/newspaper/2011/02/rc/36656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104. 아침- 하느님과 창조사업 상징예수님은 아침에 부활하셨다. 그림은 지그 쾨더가 그린 '호숫가의 아침'.허영업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새해 아침을 '원단'(元旦)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원(元)이란 으뜸을 의미하고, 시간적으로는 한해의 첫 시작일인 1월 1일을 가리킨다. 그리고 단(旦)은 태양이 솟는 모습을 본뜬 글자로 아침을 뜻한다. 이처럼 원단은 1월 1일 새해 첫날 첫 아침을 의미하는 희망찬 단어다. 새해 첫날은 누구나 한해의 계획을 세우고 소망을 기원하며 가족 간 사랑 속에서 희망의 미래를 설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침의 상징적 의의는 떠오르는 태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고대에는 태양을 향해 아침기도를 드리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고대 이집트 사상에 의하면 태양신은 매일 아침 하루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하늘의 대양에서 몸을 씻었다고 한다. 무속신앙에서도 밤에는 요귀들이 자유로이 배회하다가 빛이 비쳐오는 아침이 되면 힘을 잃고 활동을 멈춘다. 서양 민담 역시 악마나 흡혈귀와 같은 악한 정령들은 새벽이 오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보통 이들은 어둠을 좋아하고 빛을 싫어하며, 특히 햇빛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빛과 아침은 하느님, 그리고 창조사업을 상징한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5). 또 일반적으로 아침은 좋은 시작을 상징한다. "사자들은 사냥 거리 찾아 울부짖으며 하느님께 제 먹이를 청합니다. 해가 뜨면 물러나서 제 보금자리로 들어가고 사람은 일하러, 저녁까지 노동하러 나옵니다"(시편 104,21-23). 특별히 아침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다. "주님, 아침에 제 목소리 들어 주시겠기에 아침부터 당신께 청을 올리고 애틋이 기다립니다"(시편 5,4). 아침은 또 구원의 시간과 관계가 깊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너희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주님께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불평하느냐?"(탈출 16,7).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 위엄하신 모습을 나타내신 것도 아침이었다. "셋째 날 아침,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진영에 있던 백성이 모두 떨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모세가 백성을 진영에서 데리고 나오자 그들은 산기슭에 섰다"(탈출 19,16-17). 신약성경에서 아침은 예수님과 관계가 깊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죄인들 손에 결박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빌라도에게 인도된 시간도 아침이었다. "아침이 되자 수석 사제들은 곧바로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 곧 온 최고 의회와 의논한 끝에,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겼다"(마르 15,1).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과(루카 24,1-3)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식사를 준비해주신 때도 아침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한 21,12). 특별히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아침과 태양의 상징적 의미와 연결돼 있어서, 교회는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사람이 된 이를 '빛의 자녀'라 부른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 우리가 늘 새로운 아침처럼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퇴사자22011.02.08
![[성경 속 상징] (114) 덧없음- 부활 때 완성되는 삶이 진정한 인생](//cpbc.co.kr/CMS/newspaper/2011/04/rc/374892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114) 덧없음- 부활 때 완성되는 삶이 진정한 인생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얼마 전 평화방송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정진석 추기경에게 애창곡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정 추기경은 몇 년 전 명동성당에서 '인생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두 시간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이때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하숙생'을 노래했다. 또 2007년 가톨릭 문화예술인들과 미사 후 행사에서 가수 최희준씨와 함께 하숙생을 불렀다. 좀처럼 정 추기경이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데, 이렇게 여러 자리에서 하숙생을 부른 것을 보면 이 곡이 정 추기경 애창곡임에는 틀림없다. 하숙생 가사는 마치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한편의 철학 시와 같다. 성경에도 인생의 허무와 덧없음에 대한 언급이 많다. 인생을 피었다 지는 풀과 꽃과 같은 식물에 비유하며 무상함을 표현하는 이미지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들의 영광은 잠시 있다가 곧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그 세월 풀과 같아 들의 꽃처럼 피어나지만 바람이 그를 스치면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아내지 못한다"(시편 103,15-16). 반대로 하느님의 특징은 인생의 특징과 아주 대조된다. 특히 하느님 말씀은 영원하고 지속적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8). 그러나 사람은 늘 염려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간다. 성경은 풀 한 포기가 왕의 영광보다 더 아름답게 자라난다는 비유를 통해 하느님을 믿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언급한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 6,30-31). 또 인생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다. 그림자의 상징은 인생의 덧없음을 극단적으로 나타낸다. "사람이란 여인에게서 난 몸, 수명은 짧고 혼란만 가득합니다. 꽃처럼 솟아났다 시들고 그림자처럼 사라져 오래가지 못합니다"(욥 14,1-2). 심지어 삶의 허무함을 마치 바람을 잡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코헬 2,17). 또한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하는데 시간의 빠른 속도를 강조한다. "저의 날들은 파발꾼보다 빨리 지나가고 행복을 보지도 못한 채 달아납니다. 갈대배처럼 흘러가고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처럼 날아갑니다"(욥 9,25-26). 바오로 사도는 부활 때 완성되는 삶을 진정한 인생으로 강조한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3). 부활의 믿음을 통해 인생의 덧없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은일2011.04.26
![[본당 사회복지 현실과 문제, 그리고 대안은?]<상> 봉사 활동에 대한 불감증, 본당 사회복지 발전 걸림돌](//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6679_1.2_titleImage_1.jpg)
[본당 사회복지 현실과 문제, 그리고 대안은?] 봉사 활동에 대한 불감증, 본당 사회복지 발전 걸림돌재원뿐 아니라 봉사자 부족으로 본당 봉사활동 점차 위축 너도나도 사는 게 팍팍해졌다고 난리다.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모두가 체감한다. 교회는 이럴 때일수록 이웃을 더 돌봐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하지만 교회의 뿌리인 본당의 사회복지 활동은 추운 날씨만큼이나 꽁꽁 얼어붙은 것 같다. 본당에서 사회복지 활동을 담당하는 사회복지분과장들의 한숨은 늘어만 간다. 미사가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어려운 가정을 방문하던 모습은 옛일이 됐다. 활동보다 봉사자 모집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회의에는 늘 나오는 얼굴만 보인다. 서울 한 본당의 사회복지분과장은 "봉사하려는 신자들이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단체가 해오던 봉사활동도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털어놨다. 재정 지원 부족 역시 큰 어려움이다. 2회에 걸쳐 안개 속에 놓인 본당 사회복지 활동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활성화하기 위한 대안을 찾아본다. 2011년 서울 사회사목 시범본당으로 지정된 한남동본당 이창준 주임신부(가운데)와 본당 사회사목 전담 이정희 수녀가 추석을 맞아 형편이 어려운 가정을 찾아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부족한 봉사자 ㄱ본당은 연중 봉사자를 모집한다. 사회복지분과 소속 활동회원은 몇 년째 4명뿐이다. 주보공지와 미사 후 홍보로 봉사자를 모집하지만, 미사가 끝나기 무섭게 각자 삶으로 돌아가 버리는 신자들 뒤로 찬바람만 분다. ㄱ본당 사회복지분과장은 "활동회원을 많이 확보하고 있어야 가정 방문이라도 수월하게 하는데, 발로 뛸 사람이 턱없이 부족해 매달 40여 가정에 지원금만 지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본당 사회복지 활동은 그야말로 '봉사직' 사명이 투철한 이들만의 활동처럼 여겨지고 있다. 본당 사회복지분과와 레지오 마리애, 빈첸시오회, 나눔의 묵상회 등 봉사단체들이 '소수정예'를 이뤄 형편이 어려운 가정을 돌보고 있다. 팍팍해진 생활 탓에 주변을 돌아보는 넉넉함이 사라진 것도 한 원인이다. 현대사회가 발전하고 복지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지원이 향상되면서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공공복지시설이 확충됐다. 그러면서 사회복지 활동을 각종 복지 기관과 시설만의 활동으로 여기고,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을 구분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본당 사회복지는 '하는 이들만 하는' 전문 활동이 된 것이다. 본당 전체가 관심을 두는 선교 활동과는 비교가 된다. 교회가 사회복지시설도 아닌데 왜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데 발 벗고 나서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봉사활동에 열심인 이들은 "이야기만 들어줘도 고마워하는 어르신을 보면서 더 큰 주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봉사 불감증 ㄴ본당은 본당 사목자가 바뀐 후 사회복지 활동을 대폭 축소했다. 새로 부임한 주임신부가 본당 복지사업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줄여 사회복지분과는 새로 계획 중이던 사업마저 철회해야 했다. ㄴ본당 사회복지분과장은 "사회복지 활동이 크게 침체되면서 과거 활동하던 모습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라며 "지원이 줄어 지금까지 해오던 활동마저 대폭 줄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교회의 근본 사명이 본당 사제 관심에 따라 요동을 치는 셈이다. 본당 사목자나 단체장이 임기를 마치면 사회복지 활동은 갈피를 잡기 어렵다. 한 사회복지분과장은 "적은 수의 봉사자로 활동하다 보니 막상 사회복지 지원을 늘려달라고 요청하기도 어렵다"며 "신자 인식 부족과 봉사활동에 대한 불감증은 수년째 본당 사회복지 활동 발전의 발목을 잡는 원인"이라고 말했다. 교회 사회복지 관계자들은 본당 사회복지 활동이 부진한 이유로 △본당 사회복지에 대한 사목자와 신자의 인식 부족 △본당 지원 부족 △기도와 성경말씀 등 개인신앙에 치중한 사목 △전문가 부족 △사회복지 교육 부족 △사목자 및 단체장 교체에 따른 업무 연속성 부재 등을 꼽았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주현우(마르코) 계장은 "사회복지 활동이 활발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편차가 두드러질뿐더러 그렇다고 각기 사정이 다른 본당에 복지 활동을 늘려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며 "본당에 사회복지 활동을 전적으로 맡길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지역이 건강해지려면 본당이 '작은 복지관' 돼야 최근 의정부교구에서 열린 '나눔문화 활성화 방안' 심포지엄에서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박문수(프란치스코) 부원장은 "교회 사회복지 임무를 종사자들만의 과제로 보는 게 문제"라며 "동ㆍ리 단위까지 아우르는 우수한 전달체계를 갖추고 있는 본당이 교회 사회복지 활동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1년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와 사회사목 시범본당 협약을 맺은 서울 한남동본당 이창준 주임신부는 "신자들이 사회복지 활동을 사회복지분과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사명이라고 깨닫는 것이 본당 사회복지 활동의 출발점"이라며 "본당 전체 예산의 10%만 사회복지 활동에 배정해도 본당이 지역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침체된 본당 사회복지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에는 사목자의 관심과 지원이 절대적이다. 교구와 본당, 본당과 시설 간 유기적인 협력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도 사목자 의지에서 출발한다. 전국 각지에 그물망처럼 뻗어있는 1600여 개 본당이 지역을 위한 '작은 복지관'이 된다면 우리 사회 복지지수는 한 단계 올라갈 것이다.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조은일2012.12.31
![[ 아! 어쩌나 183] 병에게 야단을 쳤다는데…](//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6650_1.0_titleImage_1.jpg)
[ 아! 어쩌나 183] 병에게 야단을 쳤다는데…홍성남 신부 Q. 루카복음을 묵상하다가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루카복음 4장 38~39절을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아픈데 장모의 열에게 야단을 쳤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사람을 보고 야단을 친 것이 아니라 병을 보고 야단을 쳤다는 것이 영 이상하고, 이해가 안 갑니다. 혹시 성경 번역을 잘못한 것인가요? A. 그렇게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현대인 입장에서는 주님께서 하신 행동이 이상해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선 독자들을 위해서 루카복음 해당 구절을 알려 드리지요.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8-39). 베드로의 장모가 열이 심했다는 것은 화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위라고 하는 사람이 돈 벌 궁리는 하지 않고 젊은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딴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장모로서는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듣기 싫었을 것이고, 베드로 사도가 아주 미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열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더욱이 자기 사위를 부추겨 이상한 길로 끌고 가려는 사람,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고 지시한 장본인이 자기를 찾아온다니, 심기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어 자리에 몸져누웠을 것입니다. 베드로 장모의 이런 심사를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딸 가진 부모로서 당연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이런 전후사정을 다 아시면서도 베드로 장모의 불편한 심기를 위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야단을 치셨을까요? 아마도 베드로 장모가 자리에 눕는 행위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상습적이었기에 그러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일이 자기 마음대로 안 풀리면 무엇인가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위성 행위'로 자리에 누워버리는 습관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 사람을 야단치기는 그렇고 엉뚱한 열에게 야단을 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신학자들 중에서는 열을 야단치신 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어린 시절 상처에 대한 기억이라고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돈이 없어서, 배우지 못해서 지금 이렇게 사는 거야. 부모님이 나를 챙겨주지 않아 내가 이렇게 사는 거야"하는 말들은 어린 시절 상처가 지금의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물론 어린 시절의 힘겨움이 지금 내가 사는 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러나 지금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과거로 돌리는 것은 미성숙한 행위입니다. 왜냐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은 계속해 흘러가고 없어져 가는데, 과거라는 망령에 사로잡혀서 징징거리고 우는 것은 어른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 일이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퍼질러 앉아 울어대는 어린아이나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울어대도 일이 해결될 리가 없는데 떼를 쓰는 것은 사실은 자신의 무기력함과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기만적 행위임과 동시에 세상사가 자기 마음대로 돼야 한다는 '자기애적 성격장애자' 특성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을 아주 힘들게 합니다. 자기 비위를 맞출 때까지 희생양인 양 행동하기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엉뚱한 사람들을 가해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위로해주거나 이해해주려고 하면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위로를 자기 방어 겸 타인 공격용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위로해줘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냥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따끔하게 야단을 쳐야 합니다. 소위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합니다. 엄마가 말 안 듣는 아이를 날 잡아 매를 대듯 말입니다. 이런 특별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자칫 자기 기만적 한탄에 빠져 신세타령이나 하고 사는 한심한 인생으로 세상을 마감할 지도 모릅니다. 요즘같이 부모가 과보호한 아이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자식이 자기 인생을 책임지게 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개입하거나 혹은 과보호를 한 경우, 나중에 무책임하고 무능한 어른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 장모의 열에다 대고 야단을 치신 것은 화병의 원인 즉, 베드로 장모의 그릇된 생각을 고쳐주시기 위한 일갈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가운데 깊은 마음의 상처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위로를 통해 치유를 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자기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주님처럼 직면하고 따끔한 처방을 해줘야 합니다. <한국가톨릭상담심리학회 1급 심리상담가, 그루터기영성심리상담센터 담당> cafe.daum.net/withdoban cpbc2012.12.31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9>-재화 사용의 보편적 목적](//cpbc.co.kr/CMS/newspaper/2012/02/rc/406017_1.0_titleImage_1.jpg)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재화 사용의 보편적 목적선행, 그들의 것 돌려주는 것 성경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바라볼까? 게으름과 나태, 도덕적 해이, 무책임 때문에 가난해졌다고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구약성경의 신명기ㆍ레위기ㆍ시편, 그리고 예언서들은 가난과 빈곤에 처한 이들을 불의한 통치구조와 탐욕, 착취의 희생자로 보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공동체가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돌보는 것을 의무로 명하고 있다. 신약도 마찬가지다. 이웃을 위한 사랑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구약성경에서의 가난과 불의 교회 관행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 자주 논란과 비판 소재가 되는 게 '십일조'다. 이는 십일조 자체보다 그 사용에서 비롯된다. 구약을 보면 "너희 소출에서 십 분의 일을 모두 떼어 놓고, 그것을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그들이 너희 성안에서 배불리 먹게 될 때(…) 당신께서 저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습니다"(신명 26,12-14)라며 그 사용처를 밝힌다. 이처럼 십일조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데 주로 쓰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힘없고 약하고 불쌍한 존재로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비참한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 고통과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해내셨다. 구약의 시편과 예언서는 가난한 이들과 탐욕스러운 이들, 불공정한 재판을 일삼는 지도자를 대조시킴으로써 가난과 빈곤, 고통이 불의에 의한 희생임을 드러낸다. #신약성경의 사회적 약자와 불의 신약에서 예수님은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을 당신과 동일시하면서 당대 지도자를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며 신랄하게 비판하신다. 가장 유명한 가르침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일 것이다. "누가 이웃인가?" 하는 물음에, 예수님은 "무력한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신다. 무력한 사람을 돌보지 않고 지나친 이들은 나름 형편이 괜찮은 이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누구인가를 가르치면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이들을 비판하시는 것이다. 행복선언에서도 예수님은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 편을 드신다. 반면 부유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듣기에 불편할 정도로 꾸짖으신다.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의 라자로와 그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하고 자신의 풍요로움만 즐기는 부자의 비유를 들며 가난의 탓이 부자의 무관심에 있음을 드러내신다. 아울러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 제자들이 따라야 할 길임을 밝히신다. #자비 이전에 정의의 의무이다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의 가르침은 어떤가? "애덕의 실천은 자선 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빈곤 문제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 대처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184항)고 말한다. 빈곤 원인이 개인의 도덕적 결함일 수도 있겠으나 사회 정치의 구조적 불의와 불완전함에도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10억 인구가 굶주림으로 시달리고, 어린이가 5초에 한 명씩 굶주림과 기초적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죽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에 몰려있다. 가난한 나라의 빈곤이 과연 그들만의 탓일까. 국외여행을 며칠 다녀온 분들이 "그쪽 사람들이 얼마나 게으른지 구걸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겨. 그러니 가난할 수밖에…"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이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책임해서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오랜 식민지배의 억압과 착취 때문에, 혹은 발전 자체가 불가능한 현재의 불의한 경제 교역조건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살펴봐야 한다. 빈곤을 그들 나라의 부패와 게으름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교회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오랜 식민지배의 억압과 착취로 이룬 선진국의 책임을 엄중하게 묻고 있다. 교회는 가르침을 통해 사랑과 정의의 관계로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가난한 이들에게 선행을 베풀 때,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라 그들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맡겨진 정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정의에 따라 이미 주었어야 할 것을 마치 사랑의 선물인양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밝힌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의무를 올바로 수행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은 분명 "재물에 지나친 애착을 갖거나 재물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가 전하는 것은 재화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가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재화를 나누는 정신은 정의와 사랑의 의무이다.퇴사자22012.02.21
![[아! 어쩌나?] (161) Q. 아들이 건강을 해치고 있어요](//cpbc.co.kr/CMS/newspaper/2012/07/rc/420860_1.1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161) Q. 아들이 건강을 해치고 있어요 Q. 아들이 건강을 해치고 있어요 제 아들은 수도자가 되려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엄격한 봉쇄 관상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성인전을 비롯한 수도생활에 대한 책을 보면서 제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엄격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날이 갈수록 자기 몸을 거의 돌보지 않아 건강을 해칠 정도가 돼 가고 있습니다. 제가 걱정이 돼 이제 몸을 좀 돌보라고 하면 아들은 복음을 인용하면서 저를 나무랍니다. 아들이 잘 인용하는 대목은 마태오복음 6장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저는 아들이 성경구절을 들이대면서 자기 입장을 주장하는 데는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어미 된 사람으로서 아들의 지나친 금욕주의적 삶을 말리고 싶습니다. 아들이 엄격한 삶을 살수록 가족들과의 대화도 세속적이라고 기피하고, 작은 일에 짜증도 잘 냅니다. 왠지 아들의 이런 삶이 뭔가 아니란 생각은 드는데 제가 학문이 깊지 않아 뭐라 말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A.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얼핏 들어보면 몸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교회 수도원에서는 성경의 이 말씀에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스토아학파 생각마저 얹어 아주 혹독한 수도생활을 하는 곳이 적지 않았습니다. 잘 입고 잘 먹고 사는 것은 수치스런 짓이라 여겨서 옷은 넝마같은 것으로 일 년 열두 달 입고 잠자리는 마구간 같은 곳에서 자는 아주 엄격한 수도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수시로 자다 깨서 기도하는 시과경까지 바치고 심지어 어떤 수도자는 음식을 탐하지 않으려고 자기 밥에다 재를 뿌린 사람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이런 성향은 오랫동안 뿌리를 내려 하나의 편견으로 자리 잡게 됐는데, 그 바람에 곤욕을 치르는 것이 본당신부들이었습니다. 새로운 본당신부가 몸집이 좋고 혈색이 좋으면 '기도생활 안 하는 신부'라고 비아냥거리고, 새 옷을 입기만 하면 '무슨 신부가 그리 부자들 흉내를 내느냐'고 핀잔을 줘서 당혹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몸의 병은 떠나질 않아서 많은 열심인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 주위 사람들을 더 당혹하게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몸에 대해 과소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몸을 대화적 대상이 아닌 물적 대상으로 여기는 풍조가 질병을 불러온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건강관리에 지나친 관심을 보입니다. 신문지상에 나오는 광고들을 보면 상당수가 건강식품과 건강의약품 등에 대한 것들입니다. 또 건강관리를 위해 걷고 뛰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질병은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확산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교회가 몸을 혹독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과 현대 사회가 지나치게 건강에 신경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공통점이 있습니다. 양쪽 모두 몸을 물적 대상으로만 여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처럼 대화 대상이 아니라 무슨 기계나 혹은 귀찮은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질병이 떠나질 않는 것입니다. 몸은 학대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며, 단순히 먹이고 입히기만 하면 되는 대상도 아닙니다. 몸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영민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몸을 물적 대상으로만 보는 것은 몸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이야기 중에 건전한 신체는 건전한 정신의 산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역으로 건강한 마음은 건강한 신체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말은 몸과 마음이 이원적 관계가 아니라 일원적 관계 즉, 몸과 마음이 연계성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을 잘 살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촌이 잘되면 배가 아프다''화가 나면 머리가 아프다''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가슴이 벌렁거린다' 등등 몸은 마음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시 그것을 몸으로 느끼는 순환고리를 갖습니다. 주님은 몸의 이런 중요성을 잘 아셨기에 늘 병자들 몸을 고쳐주셨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기적을 일으키시기도 했습니다. 또 많은 영성가들이 영혼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성전이고 몸은 그런 영혼이 머무는 성전이라고 하면서 몸의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몸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함께 가야 하는 조강지처 같은 존재입니다. 이렇게 평생 동반자인 몸을 단순한 물적 대상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혐오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복음적 정신에 어긋납니다. 자매님은 아드님에게 이런 취지를 말씀해주시고 마음의 평안함을 위해 몸을 소중히 여기라는 조언을 해주시길 바랍니다.홍성남 신부 (한국가톨릭상담심리학회 1급 심리상담가, 그루터기영성심리상담센터 담당) cafe.daum.net/withdoban 퇴사자22012.07.17
![[위령성월 특집] 위령성월에 만난 사람- 남편과 자녀 둘 잃은 김시영씨](//cpbc.co.kr/CMS/newspaper/2012/11/rc/430575_1.0_titleImage_1.jpg)
[위령성월 특집] 위령성월에 만난 사람- 남편과 자녀 둘 잃은 김시영씨죽음 이긴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야겠다 결심25년 전 남편 잃은 후 아들 딸도상실감에 방황하고 우울증 겪어피정 다니며 예수님께 희망 얻어김시영시가 하늘나라로 떠난 남편과 두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부모는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속담이 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보다 자식을 잃었을 때의 아픔이 더 크다는 뜻이다. 위령성월(11월)을 맞아 남편과 두 자녀 등 가족 셋을 잃었지만 신앙심 하나로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 행복한 삶을 사는 김시영(포티나, 74, 서울 상계2동본당)씨를 만났다. 김씨는 "그때는 정말 살고 싶지 않았다"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하느님 원망을 참 많이 했지요.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하면서요. 남편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우리 아들딸마저 데려가셨으니까요." 그는 지난해 5월 지병을 앓던 큰딸(고혜순 마리아, 당시 52살)을 잃었다. 앞서 12년 전에는 외아들(고기윤 가밀로, 당시 33살)을, 1987년에는 남편(고재환 요한, 당시 53살)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25년 전부터 그에게 시작된 죽음과 이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악연이었다. 그는 평소 레지오 마리애 단장과 구역ㆍ반장, 선종봉사회장 등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1994년 둘째 딸이 수녀회(한국외방선교수녀회)에 입회한 것 말고는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삶이었다. 남편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1남 3녀를 둔 다복한 집안이었다. 공무원이었던 남편은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남몰래 지역 내 어려운 청소년들을 도왔다. 시간이 흘러 도움을 받았던 한 명이 장성해 취직하자 그를 위해 잔치를 열었는데, 그곳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아들도 2000년 교통사고로 그의 곁을 떠났다. 아들은 당시 신혼이었고, 손자가 태어난 지 8개월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김씨는 "아들을 잃었을 때는 삶 전부를 잃은 듯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성당에 나가는 것과 봉사하는 것, 기도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리면 '아들 전화 아닌가'하며 깜짝깜짝 놀랐다. 우울증도 생겼다. 혼자 창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어느덧 시곗바늘은 1시간 뒤를 가리키는 날이 많았다. "아들을 보내고 몇 년쯤 지나선가,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이대로 살면 저마저 죽을 것 같더라고요.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과 자식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어요. 신앙인에겐 죽음이 완전한 끝이 아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올리며 다시 살아야겠다고 하느님께 매달렸어요." 그는 그 뒤로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찾아 피정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 주님은 그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하고 묻는 것 같았다. 그는 생활습관도 바꿨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본당 노인대학에도 나가고, 가만히 있으면 우울해질까봐 허드렛일이나마 직장생활도 시작했다. 그렇게 지내자 죽음의 고통이 물러나고 삶의 희망과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지난해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큰딸마저 잃었을 때는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전처럼 신앙을 저버리는 일은 없었다. 요즘에는 성경필사를 하면서 주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제는 그의 얼굴에서 행복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성당에만 오면 기분이 좋아요. 하느님은 제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들여다보고 계시잖아요. 이제는 하느님께 감사드려요. 노인을 잘 대해주는 좋은 주임신부님 보내주신 것도요. 아니 전부 다 말이에요." 이힘 기자 lensman@pbc.co.kr이힘2012.11.06
![[기획] 이웃종교 스테이 1>유교](//cpbc.co.kr/CMS/newspaper/2012/07/rc/421928_1.0_titleImage_1.jpg)
[기획] 이웃종교 스테이 1>유교종교 유교, '仁' 강조하며 '참 인간 되기' 지향다례를 배운 한 아이가 아버지에게 차를 따라주고 있다. 유교를 종교가 아닌 전통문화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천주교 신자들도 다르지 않다. 유교 예식인 제사는 낯설지 않다. 제사를 지내는 신자들도 많고 주교회의가 '한국 천주교 가정제례 예식(안)'을 마련하는 등 제사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이기 때문이다. 유교가 강조하는 예의범절도 어려서부터 '당연히 지켜야할 것'으로 배우며 자란다. 이처럼 친숙한 유교지만 유교를 단지 전통문화 혹은 학문으로만 바라봐서는 유교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유교는 문화이기 전에 종교이기 때문이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대표회장 김희중 대주교)가 7월 27~29일 경북 영주 한국선비문화수련원에서 개최한 '유교 스테이'에 참가해 유교문화를 체험했다. 문화로서는 친숙하지만 종교로서는 낯설게 느껴지는 유교를 소개한다. 이웃종교 스테이는 개신교(17~19일), 원불교(24~26일), 불교(31~9월 2일)로 이어진다. 입소식 후 배례법(拜禮法)부터 배웠다. 모든 유교 예식의 시작은 예의를 갖춘 절이다. 제사를 지내거나 어른들에게 예를 표현할 때도 절을 한다. 바른절은 직계ㆍ방계 존속, 8촌 이내 어른, 스승에게 하는 절이다. 남자와 여자의 바른절은 차이가 있다. 바른절을 하기 전 남자는 왼손을 오른손 위에 얹고 배꼽 아래 부분에 올리고 있어야 한다. 이 자세를 공수(拱手)라고 한다. 공수 자세에서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엎드리면서 이마를 오른손 위에 올린다. 여자는 오른손을 위에 둔다. 공수한 손을 어깨 높이로 올려 수평이 되게 한 후 고개를 숙여 이마를 손등에 살짝 닿게 한다. 그 자세로 왼쪽 무릎을 먼저 꿇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후 머리를 숙인다. 일어날 때는 오른쪽 무릎을 먼저 세운다. 초상과 같은 흉사(凶事) 때는 손 위치를 바꾼다. 남자는 오른손, 여자는 왼손을 위로 한다. 단 제사는 흉사가 아니기에 손 위치를 바꾸지 않는다. 배운 대로 서너 번 절을 하고 나니 이제 절만큼은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배례법 공부를 마친 후 계촌(計寸)법을 배웠다. 부모와 자식 관계가 1촌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촌수 계산은 생각보다 쉽다. 나를 중심으로 가계도를 그리고 1씩 더 해서 계산하면 된다. 예를 들어 이모의 아들(이종형제)은 4촌이다. 나와 어머니,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와 이모, 이모와 아들이 1촌이기 때문에 모두 더하면 4촌이 된다. 이종형제가 자녀를 낳으면 나와 5촌이 된다. 기본적인 예절 공부를 마친 후 한국선비문화수련원 이상호 원장의 강의가 이어졌다. 공자(BC 551~479)를 시조로 하는 유교의 궁극적 가르침은 '참 인간 되기'이다. 유교는 '인(仁)'을 강조한다. 여기서 '인'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의미다. 유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 44)는 성경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이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지만 유교는 '이직보원'(以直報怨)을 이야기한다. 원한을 가진 사람을 정의로 대하라는 의미다. 또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은혜로 갚으라고 가르친다. 이를 '방법적 차별애'라고 한다. 특히 부모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엄격하게 다스린다. 유교에서는 내 생명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부모, 조상과 깊이 연관돼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서에 익숙한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유교의 가르침이 다소 매정해 보일 수 있다. 지금은 신자들이 유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천주교 전래 초기에는 제사 문제 등으로 대립이 있었다.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신주단지를 모시지 않아 박해가 일어난 진산사건 후 대립이 이어졌다. 조선왕조는 척사위정(斥邪衛正)이라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해 천주교를 탄압했다. 교황 비오 12세가 1939년 '중국 의식(儀式)에 관한 훈령'을 통해 조상제사에 대해 관용적 조치를 취한 후 유교와 천주교의 제사로 인한 갈등은 해소됐다. 제사가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닌 문화적 풍속이라고 해석했다. 유교는 가장 현실적인 종교이기도 하다. 경험할 수 있고 증명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공자는 비현실적인 일, 증명할 수 없는 신의 존재, 내세,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역시 사후세계(천국)를 믿는 천주교와 다른 점이다. 대부분 종교는 신자 수 등을 집계해 교세를 파악하지만 유교는 정확한 신자 수를 알 수 없다. 입교예식이 따로 없고 교적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성직자도 따로 없다. 이상호 원장은 "공자를 경건한 마음으로 모시고, 유교 가르침에 따라 '꼿꼿함'을 바탕으로 하는 선비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유림(유교 신자)라고 할 수 있다"면서 "유교적 이념에 동참하면 누구나 유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향교는 유교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 234개 향교에서는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지낸다. 유교 예식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정해진 날에 향교를 찾으면 된다. '유교 스테이'는 예절교육, 강의를 비롯해 전통 무예 택견 배우기, 사군자 그리기, 다례 실습, 떡메치기 등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유교의 성경이라 할 수 있는 「논어」 강독 시간도 마련됐다. 25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유교를 이해하기에는 2박 3일은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종교로서 유교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된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원장은 "이웃 종교 신자들이 유교를 전통문화나 학문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종교로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주=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임영선2012.07.31
![[아! 어쩌나] (160) Q. 백수 아들이 걱정입니다(하)](//cpbc.co.kr/CMS/newspaper/2012/07/rc/420252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160) Q. 백수 아들이 걱정입니다(하)Q. 백수 아들이 걱정입니다(하)A.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요? 좋지 않은 생각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건강한 생각은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안 좋은 생각은 좋은 생각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과거 안 좋은 기억들을 떨쳐버리고 좋은 기억들만 떠올리고 그 안에서 쉬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올라오는 생각들을 떨치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지요. 그래서 제가 사용한 방법은 '사진 보기'입니다. 사진은 과거 좋은 추억들을 떠올리는 데 아주 큰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사진 속의 시간으로 들어가 심리적 안정감을 갖게 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앞날에 대한 낙관적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 앞날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앞날을 생각하다 숨이 막히고 죽을 것만 같은 기분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불길한 앞날을 줄곧 생각하다 보면 중추신경이 그것을 현실로 인식해 불길한 생각이 현실처럼 여겨지고 신체적으로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재개발을 겪으면서 거짓말과 선동, 사기로 주민을 속인 사람들과 몇 년을 상대하면서 무기력감을 느끼게 됐고, 그런 무기력감이 앞날에 대한 불길한 예측으로 이어져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럴 때에도 심리적 처방은 비슷합니다. 지금 바로가 아닌 몇 년 후 제 모습과 모든 일이 다 해결된 이후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불안감에 시달리면 그 마음의 눈이 자꾸 자기 발밑만 보려는 습성이 있는데, 그 눈을 들어 먼 앞날 소위 장밋빛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침이면 다 부서진 동네를 걸으면서 군대 시절 불렀던 군가를 부르곤 했습니다. "눈 들어 눈을 들어 앞을 보면서 물도 맑고 산도 고운 이 강산 위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불안한 제 마음에 힘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현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재개발 현장에서 심리적 괴로움을 겪기는 하지만 그런 상황이 꼭 안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 그런 상황 속에서 제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우 현장에서 벌어지는 역겹고 힘겨운 상황들이 저를 책상물림 상담가가 아닌 '현장 상담가'로 만들어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제 마음 안에 온갖 소용돌이가 치고 그것이 안정돼 가면서 소위 현장 상담가로서 심리적 내공이 생기게 된 것이 소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마전보다 더한 이곳에서 제가 사는 의미를 찾을 수 있었고, 그 뒤부터 마음 안에 전의가 살아났습니다. 게다가 사회 문제에 제대로 눈 뜨게 된 것 역시 큰 소득입니다. 신문을 보면서도 남의 집 일인 양했는데 몸으로 겪다 보니 이제는 신문 지상에 난 기사들이 저의 일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소위 사회에 대한 눈이 떠지고 누가 사기꾼이고 누가 진솔한 사람들인지 식별하는 눈을 갖게 된 것은 소득입니다. 이렇게 현장에서 힘겨운 삶이 유약하고 우유부단하던 저를 변화시켰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마음이 과거와 미래로 도망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무는 경험을 했습니다. 물론 이 세 가지 방법이 만능은 아니고 또 세 가지 방법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를 따져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좋았던 것에만 머물려고 하면 심리적으로 퇴행해서 무력한 삶을 살게 되고, 미래의 좋은 일들만 생각하고 살려고 하면 마치 마약환자들처럼 현실감이 떨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현재에 감사하면 사는 것 역시 사람의 힘겨움을 무시한 삶을 살게 해 나중에 또 다른 신경증적 심리적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과거 미래 현재 시점의 치료 방법을 사용하는 것과 한가지 방법으로 너무 오래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권유하고 싶은 방법은 성경구절을 써서 늘 간직하고 다니다가 마음이 힘들 때 꺼내 묵상하는 방법입니다. 옛날 유다인들은 성경구절을 귀중하게 간직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단순히 보관하는 차원이 아닌 수시로 자기 심리치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특히 아드님에게는 마태오 복음 말씀을 권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 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25-34).홍성남 신부(한국가톨릭상담심리학회 1급 심리상담가, 그루터기영성심리상담센터 담당) cafe.daum.net/withdoban 퇴사자22012.07.10

자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관계자 방담나쁜 생각 들때 주위에 도움 청하라 전직 프로야구 선수의 자살로 자살문제가 또 불거지고 있다. 고귀한 생명을 왜 그토록 허망하게 내던지는지, 또 어떻게 해야 OECD 국가 자살률 1위 불명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안타깝고 답답하다.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에서 자살과 '싸우는' 센터장 김보미 수녀와 정신보건 사회복지사 등 담당자들을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들은 업무를 제쳐두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다. 이들은 자살사건을 다루는 언론 보도태도를 질타하는가 하면, 우리사회의 자살문제 원인을 영적 결핍에서 찾았다. 또 누구나 '자살 고위험군'에 속할 수 있기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리=이힘 기자 lensman@pbc.co.kr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관계자들이 자살문제를 놓고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류정희 사회복지사, 센터장 김보미 수녀, 이인희 상담심리사, 서지영 정신보건 사회복지사.방담 참가자 : -센터장 김보미 수녀 -류정희(에밀리아나) 사회복지사 -서지영 정신보건 사회복지사 -이인희(막시마) 상담심리사 ▶자살예방센터 종사자로서 조성민씨 자살소식을 접했을 때 심정은. -김보미 수녀(이하 김): 처음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문제는 매스컴이 조씨 자살사건을 여과 없이 대서특필하는 것이다. 모방자살이 발생할 수 있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사안인데도, 시시각각 상세하게 보도한다. 화가 날 정도였다. 자살 관련 보도는 사람이 아니라 '자살문제'에 초점을 둬야 한다. 자살 원인은 워낙 복잡해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런데도 언론은 '경제적 어려움' '이성 친구와의 이별' '성적 비관' 식으로 단정 짓는다. 그런 보도는 '자살하면 그런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구나'하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류정희(이하 류): 공감한다. 자살 수단과 방법이 소설처럼 묘사돼 있는 자극적 기사를 반복해서 내보내면 또 다른 자살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명인이 자살하면 모방 자살자가 증가하는 소위 '베르테르 효과'는. -서지영(이하 서): 영향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언론의 그릇된 보도 태도도 영향을 미친다. 2004년 한국자살예방협회ㆍ한국기자협회ㆍ보건복지부가 '언론의 자살 보도 권고안'을 내놨다. 하지만 이를 지키는 언론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살 보도의 좋은 예는 1994년 그룹 너바나(Nirvana)의 가수 커트 코베인 자살을 다룬 미국 언론들이다. 당시 언론은 그의 자살을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비난함으로써 모방자살을 막았다. 반면 자살을 미화한 대표적 보도가 2003년 영화배우 장국영 사례다. 유명인의 자살 소식을 쉽게 접하고 이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다 보면, 무의식 중에 '○○처럼 나도….'하는 생각을 품을 수 있다. -류: 유명인 자살은 일반 대중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부와 명예 등 겉보기에 남부럽지 않은 조건을 가진 사람도 자살하는데 그렇지 않은 국민 대부분은 어떤 심정이겠나. ▶우리나라는 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8년 연속 자살률 1위인가. -류: 삶의 중심과 철학이 허약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겨내는 힘이 많이 부족하다. -김: 우리나라 국민 행복지수가 매우 낮은 것과도 관계가 있다. 필리핀에 선교하는 한 수녀님이 "이곳은 자살률이 높지 않다"고 전해왔다. 수도자로서 영적 풍요로움을 강조하고 싶다. 또한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자살한 이가 있으면 주변인이 '고위험군'이 된다는데. -서: 외국에서는 자살자 가족과 친구 등을 '주변 생존자'(Suicide Survivor)라 부른다. 예를 들어 학생 1명이 자살하면 부모는 물론, 같은 반 학생들과 담임교사가 고위험군 혹은 주변 생존자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전문가 상담이 필요하다. -이인희(이하 이): 자살자 유가족은 이중고를 겪는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한 번, 위로받지 못하는 것에 또 한 번 고통받는다. 주변 사람들조차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일반 유가족과 똑같이 위로해줘야 한다. ▶센터의 상담활동 효과는 어느 정도인가. -김: 최근에도 극단적 선택을 하려는 이가 1시간 넘게 우리와 통화한 후 마음을 돌렸다. -서: 사회 일각에서 상담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자살하려던 이가 상담 한 번 받은 것으로 평생 자살 결심을 거두는 것이 아니다. 상담은 큰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다. 다만, 일촉즉발의 위기 순간에 그 시간을 지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 센터는 해바라기 자조모임(가칭)과 같은 자살 유가족 대화의 장을 준비하고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유가족들이 아픔을 이겨내고 희망을 갖기를 기대한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김: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성경구절로 대신하겠다. 무조건 나눠라. 이야기하라. -서: 자살 생각을 하는 것 자체를 문제라고 보지 않았으면 한다. 누구나 자살 생각은 할 수 있다. 어려울 때 주변에 도움을 청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 센터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현명하고 용기있는 행동이다. 아픈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니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는? 2010년 콜센터 운영과 함께 개소한 센터는 생명문화축제ㆍ연구조사사업ㆍ자살예방 네트워크 구축ㆍ상담(전화ㆍ인터넷) 등 다양한 사업과 활동을 벌인다. 특히 연령별 '게이트 키퍼'를 양성해 주변 자살 고위험군 발굴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2011년 (사)한국자살예방협회가 수여하는 생명사랑대상(네트워크 부문)을 수상했다. 상담 문의 : 1599-3079, 누리방(www.3079.or.kr) 조은일2013.01.15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2>나자렛 예수-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②](//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8190_1.0_titleImage_1.jpg)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나자렛 예수-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②예수 부활, 하느님 나라 선포 정당성 증거예수에게 내려진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체 행위를 근절시키고자 예수는 제자들을 파견해 복음을 선포하게 하고, 그들에게 마귀 추방과 치유 능력의 권한을 부여했다. 또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는 새 세상이 오면, 그들 역시 옥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마태 19,28). 이처럼 예수는 자신의 권능을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고, 제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재건을 위해 헌신했다. 또 어머니인 마리아와 형제들 역시 예수 활동에 함께했다(요한 2,1, 요한 7,3-10). 또 예수가 행한 기적과 구마행위는 군중을 모여들게 했다. 군중은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 예수는 이를 피해 산으로 가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요한 6,15), 이는 예수가 일부 군중에게 메시아로 간주됐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예수가 십자가형을 선고받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 ◇예수와 율법 예수와 유다교의 두 개 기둥으로 일컬어지는 율법과 성전의 관계를 살펴보자. 예수는 복음서에서 흔히 율법과 갈등을 일으키는 이로 묘사된다. 그러나 예수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말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현실에서 율법을 재해석하고 근본 취지를 되살리고자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는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이와 등 굽은 여자, 앉은뱅이를 치유했다. 유다인들이 율법을 증거 삼아 항의하자, 예수는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하고 말했다. 병자가 병이 나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누리는 것은 하느님 창조질서의 회복과도 같고, 그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지상에서 이뤄지는 표지라고 해석한 것이다. 또 예수는 병자를 고쳐준 뒤 모세가 명한 대로 제물을 바치라고 명하거나, 십일조를 무시하지 말라고 이르기도 했다. 즉, 예수는 일부 잘못된 율법주의적 해석과 태도를 비판한 것이지 율법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상과 비둘기 장수를 내쫓았던 '성전 정화사건'은 사제가 백성을 참다운 진리와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한 사건이다. 또 예수는 중풍병자에게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포했다. 요한 세례자 역시 회개의 세례를 베풂으로써 성전의 고유 권한인 사죄권을 행사했다. 성전 당국자들 입장에서 이러한 행동은 용납하기 어려운 도발이었다. 로마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17)하고 말하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예수는 폭압적 권력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예수의 십자가형과 부활 예수는 결국 종교와 정치 지도자에 의해 체포되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왜 십자가형이었을까. 이는 당시 로마제국의 형벌 중에서 정치범에게 가하는 가장 참혹한 것이었다. 벌거벗긴 죄수는 인간적 수모를 겪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고, 탈진한 상태로 서서히 죽어간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는 뼛조각과 쇳조각이 감긴 채찍을 맞아 온몸이 피범벅이 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예수에게 이런 끔찍한 형을 내린 것은 로마 제국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체 행위를 근절시키고자 하는 식민지 지배자들의 단호한 의지 표명이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로마제국에 대한 도전, 예수를 메시아라 떠받드는 군중의 기대는 황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으로 과연 예수 운동이 막을 내렸을까? 필자는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 중 예수 부활만큼 놀라운 반전은 없다고 생각한다. 막달레나를 비롯한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했고, 몇몇에게 예수가 발현함으로써 그들은 예수 부활을 전하기에 이르렀다. 예수 체포 당시 도망쳤던 남자 제자들 역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 일부 유다인은 제자들이 예수 시신을 훔쳐다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예수 시신이 다른 무덤으로 옮겨졌다고 생각했기에 빈 무덤을 부활의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 발현은 제자들의 절망이 만들어낸 심리 현상이라며 그 의미를 축소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로는 도주했던 제자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예수 부활을 드높이 외치는 반전을 설명할 길이 없다. 더군다나 예수 생전에 그를 만난 적도 없지만, 부활한 예수의 용감한 증인이 된 바오로 사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부활로써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비로소 활활 타오르게 됐다. 예수 부활은 하느님 나라 선포가 옳았으며 섬김의 삶이 승리를 가져오고, 나자렛 예수의 역사가 제자들을 통해 새롭게 지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신약성경 전반을 살피는 이 대장정을 시작하며 나자렛 예수의 삶과 부활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요, 본질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개될 신약의 고백은 예수를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분으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그들 증언이다. 그들은 각자가 처한 고유한 역사적 상황과 공동체 특성에 따라 예수에 대한 표현과 소개를 달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를 한결같이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다. 정리=김은아 기자 euna@pbc.co.kr퇴사자22013.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