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상징] 양털](//cpbc.co.kr/CMS/newspaper/2011/02/rc/367978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양털좋은 값어치를 갖고 있는 상품 지난 1월 21일 성녀 아녜스 축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어린 양 두 마리를 축복했다. 교황이 축복한 이 어린 양의 털은 교황이 해마다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전 세계 신임 대주교를 로마로 불러 그들에게 입혀주는 팔리움(pallium)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팔리움은 대주교가 목과 어깨에 둘러 착용하는 좁은 고리 모양 양털 띠로 주교 임무의 충실성과 교황 권위에 참여함을 상징한다. 양은 다른 동물에 비해 우리에게 친근성이 덜한 동물이다. 아무래도 농경민보다는 유목민과 가까운 동물이기 때문이다. 양은 인간에게 젖과 고기, 털을 제공하는 등 버릴 것 없이 쓰임이 많은 동물이다. 특히 양털은 예로부터 옷, 이불, 신발 등의 재료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이러한 양털은 성경에서도 좋은 값어치를 갖고 있는 무역상품으로 등장한다. "너에게는 제품도 많고 온갖 재물이 많아, 다마스쿠스도 헬본 포도주와 차하르의 양털을 가져와 너와 무역을 하고, 단과 야완 머우잘도 너와 상품을 교환하였는데, 그들이 네 물품 값으로 가져온 것은 망치로 두드린 쇠, 계피, 향초였다"(에제 27,18-19). 이스라엘 민족은 유목생활을 했기에 성경에는 양털을 깎는 일이 자주 등장한다. "라반이 마침 양털을 깎으러 간 틈을 타서, 라헬은 아버지 집안의 수호신들을 훔쳐 냈다"(창세 31,19). "마온이라는 곳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는 카르멜에 목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나 되는 큰 부자였다. 마침 그는 카르멜에서 양털을 깎고 있었다"(1사무 25,2). 하지만 양털을 아무 때나 깎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1년에 한 번 양털을 깎게 되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때 양들을 함께 돌보았던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 며칠 동안 먹고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간교한 지혜가 많았던 압살롬은 양털을 깎는 때를 복수에 이용했다. 압살롬이 다윗의 왕자 모두를 초대해 남김없이 죽이려 했던 것도 양의 털을 깎은 후 축하연에 사람들을 초대한 자리에서였다(2사무 13,18-33). 우리가 일반적으로 목장에서 보는 양은 털이 더러운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러한 양들의 더러운 털을 헤치고 속을 보면 안에는 뽀얀 흰털이 있다. 그래서 양털의 흰색을 하느님의 자비에 비유하기도 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다니엘의 환시에서 하느님을 연상시키는 연로하신 분을 언급할 때 양털에 비유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다니 7,9). 흰 양털은 무구함의 상징이다(레위 14,49-53). 성전에서 하느님을 섬길 때 대제사장은 가는 베로 만든 옷을 걸쳐야 하며, 양털로 만든 의복을 입는 것은 엄히 금지됐다. "그러나 그들이 안뜰 대문으로 들어올 때에는, 아마포 옷을 입어야 한다. 안뜰 대문 안에서나 주님의 집 안에서 예식을 거행할 때, 양털 옷을 걸쳐서는 안 된다"(에제 44,17).cpbc2011.02.22

'가톨릭표' 아름다운 가게 더 늘어나야강북 평화의집 재활용 매장 5호점 개설1일 문을 연 서울 강북구 삼양동 '살림' 5호점에서 지역 주민들이 깨끗하게 정리된 옷을 고르고 있다. "급여는 적지만 이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자신감도 생겼고, 좋은 사람도 많이 알게 됐어요." 차상위계층 지원을 받던 김영희(가명, 65)씨는 나이 제한으로 올해부터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나이가 들어서도 스스로 일해 즐거움을 찾을 곳이 필요했다. 서울 삼양동 선교본당(주임 안광훈 신부) 부설 강북 평화의집이 운영하는 재활용 공동체 매장 '살림'이 김씨 같은 지역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김씨는 매일 오전 9시 서울 강북구 송천동 매장 본점으로 출근해 가장 먼저 기도를 한다. 물건을 모아 준 분들을 위해서다. 성경을 읽고나면 재활용품을 싣고 온 화물차에서 짐을 내려 분리 및 정리 작업을 시작한다. 도시락 점심을 먹은 뒤에는 담당 매장으로 가서 오전에 분리한 재활용품을 진열한다. 품목은 의류와 책, 각종 생활용품 등이다. '살림'은 쓸 만한 물건들을 기증받아 손질한 뒤 시중보다 싼 가격에 판매하는 협동조합매장으로 2000년에 1호점을 열었다. 강북 평화의집 실무책임자 곽희자(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 수녀는 "옷을 수거해 고물상에 넘기면 보통 1㎏에 750원 정도 받는데, 손질해서 팔면 값을 많이 받을 뿐 아니라 환경보호에도 좋다"고 재활용품 매장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곽 수녀는 재활용물품 수집을 위해 서울대교구 주보에 한 달에 한 번 물품기부 공지를 낸다. 또 서울대교구 각 본당 사회복지분과장에게 편지도 써서 1년에 한번이라도 옷, 책, 신발, 가방 등 재활용할 수 있는 물건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수익금은 전액 지역 주민의 일자리 공동체 운영, 강북 평화의집 청소년 멘토 프로그램 후원, 독거노인ㆍ외국인 이주노동자ㆍ새터민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쓴다. 곽 수녀는 "아름다운 가게(중고품 판매 수익을 공익사업에 쓰는 자선단체)처럼 서울대교구에도 재활용품 매장이 늘어나야 한다"며 "내가 쓰지 않는 물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의식이 확산되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강북 평화의집은 1일 강북구 삼양동에 '살림' 5호점을 열었다. 5호점은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어 문구용품과 도서전집, 의류 등을 주로 판매한다. 재활용품 기부 문의: 02-987-3978. 강성화 기자 michaela25@pbc.co.kr강성화2012.12.05
![[생활 속의 복음] 주님 승천 대축일 (루카 24,46ㄴ-53)](//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2098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주님 승천 대축일 (루카 24,46ㄴ-53)"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주님승천대축일이자 홍보주일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 동안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들과 함께 지내시다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기념하는 대축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시자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루카 24,52).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하늘만 유심히 바라봤다(사도 1,10)고 한다. 그러자 흰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라고 그들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주님 제자이자 하느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이 되는가? 하늘만 멍청히 쳐다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 그분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과 다시 오심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홍보해야만 한다. 승천하신 분께서도 당신께서 오시고 사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실들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라고 당부하셨지 않는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8-20). 21세기는 역사상 유례없이 과학이 발달하고 첨단 대중매체가 활보하는 시대다. 그러한 시대에 걸맞게 교회는 각 교구와 본당, 수도회마다 디지털 첨단 매체들을 동원해 승천하신 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선포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발달한 과학기기를 총동원해 주님 말씀을 선포함에도, 과연 그 효능은 아날로그 시대보다 더 효과적일까? 단순 비교만으로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겠지만 회의적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홍보하는 일에 첨단 과학기재들이 어느 정도 도움은 될 수 있으나, 거기에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태도는 금물이다. 복음 선포는 첨단 과학기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주님 뜻에 부합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첨단 과학 시대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어떻게 홍보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박해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찬란하고 아름다운 선교 역사를 신앙 선조에게서 상속받았다. 예를 들면 1785년 이 땅의 최초 신앙대회(을사추조적발) 때는 불과 10명 남짓이던 일꾼들에 의해 무려 1000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모진 박해의 칼날 속에 심산유곡에 숨어들어서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홍보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 1970~80년대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아래에서 오히려 교회를 찾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모든 것이 과거와는 달리 넘쳐나게 갖춘 것이 21세기 한국교회 모습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에는 점점 '위기의식론'을 주창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왜일까? 해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물질만능주의에서 속히 벗어나는 것이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증인'의 역할을 세상 안에서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한국교회 안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길거리 미사'는 이제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봉헌하는 미사에 제대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하느님의 절박한 호소에 응답하는 것인데, 왜 길거리 미사가 교회 안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주님께서는 길 위에 오셨고, 길 위에 사셨으며, 길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또 승천하셨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길을 버리고 거대하고 화려하게 꾸며졌으며 모든 것에서 안정되고 보호받는 성전 안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 시대의 십자가는 누가 질 것이며, 길거리에 내쫓겨 아파하고 신음하는 가난하고 작은이들의 눈물은 누가 닦아 줄 것인가? 교회이며 길이신 분이 그러하셨으니, 이제 그분 지체인 우리가 그분이 하신 대로 따라함은 참으로 당연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성경은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기록하지 않았을까? 주님의 승천 대축일이자 홍보주일인 오늘, 우리가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새롭게 되새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도리다.cpbc2013.05.07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6. 주님 공현 대축일](//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6651_1.0_titleImage_1.jpg)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6. 주님 공현 대축일 사람을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이 되신 하느님캐나다 토론토 주교좌성당의 동방박사 방문 색유리화. 【CNS 자료사진】 "그들은…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12).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세상에 드러나심을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초라한 구유에 누운 아기가 민족들의 빛으로 떠오릅니다. ◇살펴봅시다 ㉠주님 공현 : 공현(公顯)이란 공적으로 드러남을 뜻합니다. 주님 공현은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이심이 공적으로 드러난 사건을 기념합니다. 그 중 하나가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사건입니다(마태 2,1-12). 교회는 이 경배 사건을 특별히 '주님 공현 대축일'로 기념합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를 경배한 이 사건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동방 박사들은 주변 이교(異敎) 민족들을 대표합니다. 이 이교인들이 유다인의 왕에게 경배하러 예루살렘으로, 나아가 베들레헴으로 왔다는 것은 단지 유다인뿐 아니라 만백성의 왕이 되실 분을 이스라엘에서 찾았음을 보여줍니다. 동방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으로 왔고, 아기가 있는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이 별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별, 곧 다윗의 별입니다(민수 24,17 참조). 이 다윗의 별이 가리키는 메시아는 구약에서 예언된,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 곧 유다인들에게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입니다. 그렇다면 동방 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했다는 것은 "구약에 담겨 있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일 때만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자 온 세상의 구원자로 경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528항)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는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528항 참조). ㉡이집트 피난과 죄없는 아기들의 학살 : 마태오복음서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에 이어 아기 예수와 그 부모의 이집트 피신(2,13-15), 죄없는 아기들의 살해(2,16-18) 그리고 이집트에서에 돌아옴(2,19-23)에 관한 기사들을 전합니다. 이집트 피신과 죄없는 아기의 살해, 두 사건은 빛에 대한 어둠의 저항을 나타냅니다. 실제로 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전 생애를 통해 많은 박해를 받으셨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십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돌아오신 일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출애굽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 모세가 출애굽으로 이스라엘의 해방자가 됐듯이 예수님을 온 인류를 구원하실 결정적 해방자로 제시합니다(530항 참조). 하느님의 아들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는가(470~478항) : 지난호(1196,1197호)에서는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심을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더 제기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강생의 신비스러운 결합에서, 성자는 인간 본성을 취하셨지만 소멸시키지는 않으셨다"(470항).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어 참으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 죄 말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셨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22항).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셨다'는 것은 인간 조건, 곧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지닌 역사적 인간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지혜와 키가 자랐다"(루카 2,51)는 성경 대목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람이 되심으로써 예수님의 신성은 소멸되고 만 것일까요? 아닙니다. 451년 칼케돈에서 열린 공의회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한 분이시며 같은 그리스도이신 외아들 주님은, 우리가 두 본성(곧 신성과 인성)을 혼동하거나, 변질시키거나, 분할하거나, 분리하지 않고 인정해야 한다. 두 본성의 차이점은 그 결합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본성의 고유함이 그대로 보전되어…결합되었다"(467항, 칼케돈공의회 신경). 같은 취지에서 230년 후인 681년에 열린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는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 두 의지가 작용하며 이 두 의지는 서로 대립하지 않고 협력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는 당신의 신적 의지에 저항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이 전능한 의지에 순종한다"고 밝힙니다(475항). 하지만 바오로 사도가 노래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필리 2,6-8 참조).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 온전히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해 사람이 되셨다는 것, 이것이 강생의 위대한 신비입니다. ◇정리합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의 신비에 관한 교리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영원한 말씀이요 성부의 실체적 모습이신 성부의 외아들께서 강생하셨다. 그분은 신성을 잃지 않으시면서 인성을 취하셨다"(479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신적 위격의 단일성 안에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시다"(480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을 지니신다.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 않으면서, 하느님 아들의 단일한 위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481항).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 지성과 의지를 가지신다. 이 지성과 의지는 성부와 성령과 공유하시는 당신의 신적 지성과 의지에 온전히 일치하고 종속된다"(482항). -"그러므로 강생은 '말씀'의 유일한 위격 안에 결합된 신성과 인성의 놀라운 일치의 신비이다"(483항). ◇생각해 봅시다 강생의 신비에 대한 교리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함께 생각해 봅시다. 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을까요? 하느님이 사람으로 낮아지셨다는 것은 거꾸로 보면 사람이 하느님의 품위로 들어 높여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만큼 존엄합니다. 못나고 가난하고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일지라도 더없이 존엄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강생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퇴사자22012.12.31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17>요한복음(하)](//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5673_1.0_titleImage_1.jpg)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요한복음(하)사랑의 근원과 하나인 참사랑의 구현자 예수렘브란트 작 '라자로의 부활', 1630년. 요한복음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함께 이 세상에서 황홀한 말은 생명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과 사랑이다. 사랑이 먼저일까, 생명이 먼저일까. 두 가지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사랑이 생명을 낳고, 생명이 사랑을 낳는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 그를 믿는 사람은 심판받지 않고 구원받게 하셨다고 요한복음은 말한다.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공부하고자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어떻게 새로운 계명일까. 예수님은 이것이 왜 새롭다고 하셨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이다. 사랑의 모델을 예수님이 제시하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계명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 예수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고 말씀하신다. 생명을 얻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고, 생명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으려면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친구들에게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웃과 친구를 위해 어떻게 목숨을 내놓으셨나. 카나의 혼인잔치에 술이 동났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확신으로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 예수님 답변은 "아직 제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였다. 예수님이 거부하는 듯한 발언을 하신 것이다. 이 '때'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때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아들에게 위임한다. 어머니의 신뢰를 받은 아들은 행동에 나선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예수님은 빵의 기적(오병이어)에 이어 없어질 빵에 만족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으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 하셨다. 말씀 자체이신 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빵으로 먹힌다는 것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것을 비유한다. 우리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 이야기를 알고 있다. 유다인 율법에 따르면 간음하다 잡힌 여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 로마법은 간음을 사형죄로 판단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다. 이 동작은 침묵으로 자신을 돌아보라는 무언의 요구다. 예수님은 고발자들을 자극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이 물러났고 고발은 무효가 됐다. 이 여자에 대한 고소는 취하되고 여자는 자유로운 몸이 됐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를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비와 인간의 죄가 가진 비참함만이 남아 있다고 해석했다. 예수님이 여자를 용서하신 것은 여자가 져야 할 죄의 대가를 당신이 짊어지겠다는 뜻도 있다. 예수님이 보여준 일화로 라자로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면서 베타니아에 들른다. 유다 지방 베타니아는 위험한 지역이다. 제자들 만류에도 예수님은 라자로를 소생시키기 위해 라자로가 사는 베타니아에 갔다.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는 일은 당신으로선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린 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늘었고, 유다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최고의회가 소집됐고, "많은 표징을 일으키는 저 자를 그대로 두면 모두가 그를 믿는다"며 대사제 가야파가 나서서 예수님을 죽이자고 선동했다. 예수님은 라자로를 살리신 대신 당신은 죽음의 길을 가셨다. "나는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씀을 실천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한 유다를 포함해 당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사랑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랑의 기원이 바로 당신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생명과 진리,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권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받으셨다. 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전폭적인 사랑에 보답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당신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진리를 세상에 증언하는 것이 당신이 세상에 온 목적이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으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에로 초대를 받았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고 말씀하신다.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은 평화방송 TV 홈페이지(www.pb c.co.kr) 강좌/성경 꼭지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퇴사자22013.05.29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21)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성체성사](//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5670_1.1_titleImage_1.jpg)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21)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성체성사그리스도 희생 기억하며 현재화하는 감사의 제사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이다. 사진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찬례에서 축성된 성혈을 들어 올리고 있다. [CNS]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당신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을 기념하고 되새기는 축일입니다. 일곱 성사 중 하나인 성체성사에 대해 알아봅니다.◇살펴봅시다 세례성사로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신자들은 견진성사로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아 그리스도의 힘찬 증인이 됩니다. 그리고 성찬례 곧 성체성사를 통해 온 공동체와 함께 주님의 희생 제사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를 완결짓는 성사입니다. 교회는 성찬례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1324항)이라고 가르칩니다. ㉠감사와 찬미의 제사(1328, 1359~1361항) : 성찬례는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입니다. 성찬례는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 창조와 구속과 성화로 이루어주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교회가 드리는 찬미"(1360항)입니다. 성찬례로 번역되는 라틴어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라는 말 자체가 '감사'를 의미합니다. 성찬례는 또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여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미의 제사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이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제사(1330, 1362~1367항) :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를 기념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전례 안에서 이 십자가 희생 제사를 현재화하는 제사입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기념은 단지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는 것"(1363항)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전례 안에서 과거 사건을 기념할 때 그 사건은 현재 실제로 일어나게 됩니다. 곧 그 사건이 현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를 위해 흘릴 내 피다' 하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성찬례는 이 희생제사를 기념하고 현재화(재현)하는 성사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희생 제사(1368~1372항) : 성찬례는 또한 교회의 희생 제사이기도 합니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인 신비체인 교회는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봉헌되기 때문입니다. 또 신비체인 교회의 지체들이 바치는 제사이기도 합니다. 곧 "신자들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노동 등은 그리스도의 그것들과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봉헌과 결합되며, 이로써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된다"(1368항)는 것입니다. 성찬례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지체들뿐 아니라 하늘의 영광 중에 있는 지체들, 곧 천국의 성인들도 그리스도의 봉헌에 결합됩니다. 교회는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을 기억하며 또 그분들과 일치하여 성찬의 제사를 봉헌합니다. 나아가 이미 세상을 떠나 정화 중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 "그들이 그리스도의 빛과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바치는"(1371항) 제사이기도 합니다. ㉣성찬례에서의 그리스도 현존(1373~1377항) :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찬례에서 특히 성체의 형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교회는 성체성사 안에는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담겨 계신다"(1374항)고 고백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 성사에 현존하시게 되는"(1375항) 것입니다. 16세기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성체성사 안의 그리스도 현존에 대한 가톨릭 신앙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써 빵의 실체 전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실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적절하고도 정확하게 '실체변화'라고 불러왔다"(1376항)(「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 또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의 두 가지 형상 곧 빵과 포도주 안에 각각 온전히 현존하실 뿐 아니라 그 각 부분에도 현존하시므로 빵을 나누고 포도주를 나눠도 그리스도께서는 나뉘지 않고 그대로 온전히 현존하신다고 교회는 믿고 가르칩니다. ◇알아둡시다 ㉠영성체와 그 효과(1384~1401항) : 신자들은 성찬례에서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중한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성체를 모시기 전에 먼저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또 교회가 전한 공복재(영성체 한 시간에는 물과 약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을 먹고 마시지 않음)를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주일과 의무 축일에는 물론 더 자주, 매일 같이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모실 것을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렇게 성체를 받아모시는 영성체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일치를 증진시켜 주며 △세례성사 때 받은 은총의 생명을 보존하고 성장시키고 새롭게 해주고 △우리를 죄에 멀어지도록 지켜 주며 △소죄를 없애줍니다. 또 신자들이 세례로써 이미 교회와 이룬 결합을 더욱 새롭게 하고 굳건하게 해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신하게 해줍니다. ㉡성체 공경(1378~1381항) : 성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실제로 현존하시기에 교회는 각별한 정성으로 성체께 대한 공경을 표시합니다. 미사 전례 중에는 특히 무릎을 꿇거나 몸을 깊이 숙여 절함으로써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계신다는 믿음으로 표현합니다. 또 축성된 성체는 정성스럽게 보존하고, 신자들이 장엄하게 흠숭을 표현하도록 성체를 현시합니다. 또 행렬 중에 함께 모시기도 합니다. 성체를 모셔둔 곳을 감실, 성체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흠숭을 드리는 것을 성체조배, 성체를 모시고 장엄하게 행렬하는 것을 성체거동이라고 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퇴사자22013.05.29
![[성경 속 상징] 105. 함정](//cpbc.co.kr/CMS/newspaper/2011/02/rc/367254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105. 함정악마의 유혹처럼 큰 함정도 없다. 그림은 '악마에게 시험 받으시는 예수' (두초 작, 1308~1311년)함정을 놓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 생활의 일부였다. 음식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신을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함정을 놓았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사용한 함정은 주로 위장된 그물에 덮여 있는 구덩이였다. 오늘날 통상적 수사방법으로는 범인을 체포하기 어려운 경우 범죄를 유도한 후 그 실행을 기다려 범죄를 소탕하는 것을 함정수사라고 부른다. 그래서 함정은 올무나 덫의 의미도 지닌다. 함정을 놓는다는 것은 성경에서는 주로 비유적으로 사용됐다. 성경에서는 불의한 행동을, 그것을 행하는 자들 앞에 놓인 함정이라고 말한다. "악인은 제 악행에 붙잡히고 제 죄의 밧줄에 얽매인다. 그는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아 죽게 되고 너무 어리석어 길을 잃게 된다"(잠언 5,22-23). 하느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곧바로 함정에 빠지는 위험한 행위가 된다. "온전하게 걷는 이는 구원을 받고 그릇된 길을 걷는 자는 구렁에 빠진다"(잠언 28,18). 신약성경에서는 악인들 중에서도 가장 악한 존재로 꼽히는 사탄의 유혹을 가리켜 '악마의 올가미'로 표현한다(1티모 3,7). 성경은 종종 악인을 간교한 사냥꾼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가지고 모든 약한 자들을 파괴하며 희생시키는 자들을 상징한다.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함정 중에서 중요한 이미지는 여자에 관한 것이다. "너 자신을 여자에게 넘겨주어 그가 네 능력 위에 올라서지 못하게 하여라. 창부를 만나지 마라. 그의 덫에 걸릴까 염려된다"(집회 9,2-3). 특별히 악한 여인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나는 여자란 죽음보다 쓰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올가미, 그 마음은 그물, 그 손은 굴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만 죄인은 그에게 붙잡히고 만다"(코헬 7,26). 이 충고는 경건한 사람이라면 방탕한 여인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함정을 파는 자는 동시에 자신이 그 속에 빠지게 될 위험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죄가 어떤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혼동하게 만들어 쉽게 함정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사울은 그의 아름다운 딸을 다윗에게 아내로 줌으로써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주의가 산만해지고 미혹되게 하려고 했다. "이런 궁리를 하였다. '그 애를 다윗에게 아내로 주어야겠다. 그래서 그 애를 미끼 삼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해야지'"(1사무 18,21).죄는 바른 판단과 인식을 방해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위험에 빠지는 덫이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죄를 가리켜 소경의 상태로 비유하셨는데, 죄인이 쉽게 함정에 빠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또한 사도 바오로는 부자가 되려는 욕망을 덫에 걸려드는 유혹이라고 묘사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1티모 6,9). 그런 의미에서 함정이나 덫은 우리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닐까.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이정훈2011.02.15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11> 루카 (상)](//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7217_1.0_titleImage_1.jpg)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루카 (상)구원 계획,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루카복음서는 예수가 장차 행하게 될 소명을 시메온의 노래를 비롯한 네 개의 찬미가로 드러난다.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감격스러워 하는 장면을 묘사한 모자이크화. 루카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선교했던 동역자이자 의사로서, 예수와 시간상으로 동떨어진 제3세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구약성경과 그리스 문화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유려한 필치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편찬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오는 종말과 심판, 하느님 나라에 심취해 세상의 질서와 제도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루카는 이들에게 현실에 관심을 둬야 한다는 점과 현실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또 주요 인물들이 활동한 장소와 시간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함으로써 구원 계획과 세상 역사를 결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루카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문학적 특징은 병행법(synkrisis)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루카복음에서는 예수와 요한 세례자 행적이, 사도행전에서는 예수와 제자들 행적이 반복 서술돼 있다. 이는 제자들이 스승 예수의 삶과 소명을 이어받아 뒤따른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루카복음과 마태오복음은 모두 예수의 유년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내용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마태오복음이 예수 부모 중에서도 요셉을 중심으로 기록했다면 루카복음은 철저히 마리아 중심으로 서술했다. 또 마태오복음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 잉태 사실을 통보하지만, 루카복음에서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 아기가 생길 것임을 알린다. 이때 천사는 마리아와 대화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취한다. 역사적 배경에도 차이가 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는 통치자 헤로데 왕(BC 4-7년)과 적수인 것처럼 묘사된다. 반면, 루카복음에서는 예수 부모가 호구조사에 응하기 위해 나자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여정에 예수가 태어난다. 이 같은 시간차는 예수 부모가 로마제국의 정치질서와 유다교 율법에도 충실했음을 드러냄으로써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에 적대적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 평화를 전하는 종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태오복음에서 별이 나타나 동방박사들을 이끈다. 메소포타미아의 학자이자 사제였던 이들이 가장 먼저 예수 탄생을 알게 됐다는 것은 예수가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할 보편적 메시아라는 점을 암시한다. 루카복음에서는 양을 치던 목동들 앞에 천사들이 나타나 환호의 노래를 부른다. 이는 예수 탄생이 우주적 찬미가 울려 퍼지는 경사스런 사건이라는 것을 뜻한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는 '다윗 왕좌를 계승하는 이'와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리는 이'로서 그 신원과 사명이 제시된다. 그가 장차 행하게 될 소명은 네 개의 찬미가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천사 가브리엘에게 잉태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1,52-53)라고 노래한다. 다소 과격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노래는 당시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가 아닌가 추정된다. 이는 다가올 메시아에게 이러한 역할을 기대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께 간절히 청원한 끝에 뒤늦게 아기를 가진 그는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76-79) 하고 노래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 그들을 평화의 길로 이끄는 사명이라는 것이다.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2,14)라고 노래하며 평화의 복음을 선포했다. 죽기 전 그리스도를 뵙기를 간절히 청했던 시메온은 예수를 안고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2,29-32)라고 노래했다. 이는 아기 예수를 본 것이 이미 구원을 본 것이며, 하느님 구원이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결정적 사실을 나타낸다. 정리=김은아 기자 euna@pbc.co.kr※평화방송 TV 방송시간 : 월요일 오전 9시(본방송), 화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목요일 오후 3시, 일요일 저녁 10시퇴사자22013.04.09
![[아! 어쩌나] 196. 가난과 배고픔이 행복이라고요?](//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7215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196. 가난과 배고픔이 행복이라고요? Q. 새내기 신자입니다. 세례 받은 후 매일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루카복음 6장 20절을 읽다 보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문의합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저는 집안이 매우 가난해 식구들이 모두 직장에 다니면서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벌려고 애쓰고 삽니다. 일이 없을 때는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마음고생 몸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은 왠지 현실감이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또 부자를 미워하고 가난한 사람 편을 드는 것 같아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이 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A. 형제님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한때 일부 젊은이들이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공산 혁명을 생각하셨다'고 주장할 정도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해석에 무리가 따를 수 있습니다. 말씀 그대로라면 현실에서 말도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주님이 하신 말씀의 진의 즉, 가난한 사람의 행복이란 100% 채우는 것이 아닌, '삶이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굶주린 사람들 역시 심리적으로 희망과 갈망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것이지 정말 굶주린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정말 가난에 찌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이란 모자람 없이 충분히 가진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어 행복을 사들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런데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은 늘 있기 마련이고, 완전하게 모든 것을 갖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다 가진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여긴다면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갖지 못한 마음은 늘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자 메네데모스는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행복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물론 갖지 못한 것에 미련을 갖는 것은 마음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지고 싶어하는 욕구를 억압하는 것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기에 메네데모스 식의 논리를 '궤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지금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늘 배고픈 심정으로 공부하고 무엇인가를 창조해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연승가도를 달리는 프로팀 코치가 승리했음에도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나는 지금의 승리에 웃을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요. 이처럼 무엇인가를 더 추구하는 사람은 마음에 생동감이 있어 행복합니다. 그러나 감각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강렬한 행복감을 안겨주는 본능을 충족시키는 행위들은 애석하게도 수명이 짧기 때문입니다. 마치 확 피어올랐다가 금방 사그라지는 불꽃과 같습니다. 이런 행복감은 순간의 황홀함이 지난 다음에는 깊은 어둠이 오고, 더 길고 깊은 공허감이 따라오기에 위험한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행복은 크게 세 단계로 이뤄져 있습니다. 생리적 욕구, 정신적 욕구, 영성적 욕구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욕구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성적 욕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리적, 정신적 욕구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치부하고, 오로지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려고 하면 심리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되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신자들 가운데 생리적, 정신적 욕구는 세속적이라며 오로지 영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사람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개개인의 인생길이 어땠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자기 콤플렉스에 밀려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강요하는 미성숙한 사람들입니다. 대개 이런 분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감추고 위장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생리적 욕구, 정신적 욕구는 적당히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적 삶을 추구하는 데 무리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님 말씀은 깊이 공부해야 합니다. 홍성남 신부 (서울대교구 영성생활상담소장) 상담전화: 02-776-8405 cpbc2013.04.09
![[가톨릭 문화산책]<31>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7)](//cpbc.co.kr/CMS/newspaper/2013/08/rc/470826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7)채찍질 후 고통스런 예수, 우리 마음에도 그려져 "그러니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주겠소"(루카 23,16)작품 : '채찍질을 당한 후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응시하는 그리스도' 벨라스케스 작(1630년께, 런던 내셔널갤러리) ● 고통의 신비 2단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맞으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육체적 고통, 순종, 신뢰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고, 겟세마니로 가서 기도를 한다. 그러고 나서는 유다의 대사제와 율법학자, 원로들이 보낸 병사들에게 잡혀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채찍질을 당했던 사실을 기록한다. 하지만 루카는 예수가 처형당할 만큼 죄가 없으니 채찍질이나 몇 번 하고 풀어주라고 빌라도가 명령한 사실을 전한다. 예수 수난을 주제로 다룬 작품에서 '채찍질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수가 겪은 잔인한 육체적 고통과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이는 예수가 구원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정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벨라스케스의 작품 역시 예수에 대한 육체적 고문보다는 예수의 인내의 참된 가치와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더 초점을 둔다. 스페인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의 '채찍질 당한 후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응시하는 그리스도'란 긴 제목의 작품은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기도', 그리고 성녀 비르지타가 어렸을 때 예수 수난을 체험한 신비 때문에 '성녀 비르지타의 환시'로도 불렸다. 예수께서 막 채찍질 당하신 뒤 장면이다. 바닥에는 채찍 도구들이 널려 있다. 그림 왼쪽 끝에는 단단한 기둥이 세워져 있고, 커다란 돌기둥에 두 손이 묶인 예수는 한가운데를 바라보며 지친 몸을 겨우 지탱한 채 앉아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한 어린아이가 두 손을 꼭 모으고 있고, 그 옆에는 천사가 서 있다. 무방비 상태로 앉은 예수는 무릎을 꿇고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를 향해 보호받기를 원하는 듯하다. 천사는 어린아이에게 "보아라" 하고 말하는 것처럼 채찍질을 당한 예수를 가리킨다. 예수의 힘없고 고통스러운 얼굴에서 어린아이의 가슴으로 한 줄기 빛이 스며든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 벨라스케스는 그리스도를 아름다운 몸으로 묘사한다. 비록 모진 채찍질을 당한 후라 매우 지쳐 보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보다 수려하다(시편 45,3)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가 생애 최초로 이탈리아를 다녀온 후 독창적인 그림을 그렸던 시기의 작품답게 여러 가지 영향을 풍부하게 섞고 있다.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에서 여러 대가와 만나고 고대 작품을 연구하고 나서 인간 형상을 다루는 데 최고조의 능력을 발휘한다. 작품은 장식적 요소 하나 없이 아주 단순하다. 작품 배경은 벨라스케스 자신이 젊은 시절 감동을 받았던 카라바조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검은색으로 처리하고, 그와 대비시켜 힘없이 앉아 있는 예수의 몸과 어린아이는 밝게 처리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두 팔이 고통스럽게 기둥에 매달린 예수의 자세가 자연스럽게 묘사돼 육체적 고통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으며, 단순한 구성으로 주제에만 주의를 집중시킨다. 깨끗한 눈과 마음의 어린아이 벨라스케스는 채찍질을 당한 예수를 표현한 장면에서 고문자들은 배제하고 어린아이만 등장시킨다. 예수를 바라보는 깨끗한 눈과 마음의 어린아이의 순수성이 마치 예수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이 어린아이만이 예수의 고통을 진정 이해하는 듯하다. 한편 그림 제목에서 살필 수 있듯이 아이는 그리스도인(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나타낸다.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예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호천사의 인도로 이미 예수 피땀으로 얼룩진 기둥과 앞에 놓인 고문 도구들을 바라보며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작품을 이렇게 하나의 시각적 묵상 도구로 활용할 수도 있다. 수난에 관한 시각적 명상 벨라스케스의 이 작품은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 방법론과 함께 가톨릭 개혁기 스페인의 영성과 종교미술이 나가던 방향을 잘 보여준다. 「영신수련」은 예수의 삶과 부활 이야기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예를 들어 시각적 묘사로 가득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장소를 상상하며 명상을 구성한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이 사건에 참여해야 한다. 고통받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비탄에 빠진 그리스도와 함께 눈물과 애끓는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나 때문에 겪으신 그 많은 아픔을 함께 느끼기를 청하는 것이다.(「영신수련」 203항) 13세기 초부터 예수가 겪은 고통과 그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한 새로운 신앙적 흐름이 형성된다. 중세 말부터 전해오는 가톨릭 묵상법 가운데 하나인 보나벤투라의 「그리스도 일생 명상」은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이다'라고 할 때에, 그것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더라도 이를 영적 명상의 조건으로 간주해야 한다. 내가 마치 '예수께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셨다고 가정해보자'라고 말한 것처럼 받아들여라. 그리고 이 명상에서 영적 혜택을 받으려고 한다면 세속의 걱정거리를 모두 떨쳐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께서 행하시는 그 순간에 항상 함께하라"고 말하고 있다. 묵상적 이미지를 그려내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누는 신비를 체험할 수 있어서다. 묵상할 때 마음을 집중해 마치 그리스도의 수난이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상상할 필요가 있다. 슬픔 속에서 우리는 마치 주님께서 당하시는 수난을 우리가 직접 당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으며, 주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직접 받아들이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채찍질을 당한 예수 모습이 담긴 작품을 바라보며 우리는 수난의 고통을 공감한다. 이렇듯 시각적 이미지는 상상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통을 체험하도록 해준다. 한 예로 14세기 영국 신비주의자 노리치의 줄리언 수녀는 "이후 나는 눈앞에 있는 십자가상을 계속 바라봤으며, 거기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모욕과 채찍질, 일그러지고 멍든 그리스도의 상처,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을 봤다"고 기록에 남겼다. 이 작품은 하나의 이미지 속에 그리스도가 겪은 수난의 전 과정을 집약하고 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당신의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하느님의 요구에 순종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럽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자신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있다. 고통 속에서도 저버리지 않는 순종과 신뢰! 예수의 구원의 힘의 너비와 길이, 높이, 깊이는(에페 3,18) 예수께서 당한 난폭한 육체적 폭력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하느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쏟아 부었던 사랑의 깊이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다."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작품 :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 만테냐 작 (1455년께, 런던 내셔널갤러리) ● 고통의 신비 1단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고뇌의 기도, 외로움, 순종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만찬을 나눈 뒤 세 제자와 함께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서 하느님께 고뇌의 기도를 올린다. 곧 다가올 죽음을 앞두고 예수는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하고 말하며 모든 것을 하느님 뜻대로 따르겠다고 기도한다. 안드레아 만테냐(1431~1506)의 그림에서 보듯이 예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하늘에는 천사들이 앞으로 다가올 예수 수난을 상징하는 물건을 들고 있다. 언덕 아래에는 그를 따르기로 자처한 제자들이 무심히 잠만 자고 있고, 화면 오른쪽 멀리에는 유다가 병사를 앞세워 예수를 잡으러 온다. 제자들과 함께 있어도 예수께서는 홀로 깨어 외롭게 기도하며 자신을 아버지께 맡긴다. 그림 오른쪽 나뭇가지 위에는 사다새(펠리컨)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어미가 자신의 가슴을 쪼아 흘러넘치는 피로 배고픈 새끼들을 먹여 살린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사다새가 상징하듯이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윤인복 교수 (아기예수의 데레사,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cpbc2013.08.27
![[나의 묵주 이야기] 34. 신앙ㆍ나눔ㆍ위로의 징표, 묵주](//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3381_1.0_titleImage_1.jpg)
[나의 묵주 이야기] 34. 신앙ㆍ나눔ㆍ위로의 징표, 묵주 김선실 데레사 (한국파트너십연구소 연구원, 서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지난해 성탄전야는 가톨릭 신자가 된지 만 4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때 고등학교 선배이던 성당 언니가 대모를 서주며 선물로 준 것이 묵주였다. 영세하자마자 가지게 된 묵주는 곧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징표였다. 그 후 언제나 내 곁에는 몇 개의 묵주가 함께하곤 했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기도 했고 어느 행사나 모임에 가서 기념품으로 받기도 했다. 그러나 묵주를 가지고 있다가 기회가 생기면 누군가에게 기쁜 마음으로 주곤 했다. 대모님에게서 영세 축하 선물로 받은 것을 기억하며 영세를 축하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서, 같은 지향으로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때로는 묵주를 보고 멋있다고 감탄하는 사람에게도 기꺼이 나눠줬다. 몇 년 전에는 묵주를 손수 만드는 분을 만나 한꺼번에 100개나 되는 팔찌 묵주를 기증받은 적이 있다. 마침 필리핀계 이주여성들을 만나고 있던 참이라 그 여성들과 자녀들에게 나눠 주며 얼마나 기뻐했던지! 근래에 선물 받은 특별한 묵주는 어느 수녀님이 직접 만든 수공예 매듭 묵주다. 묵주알이 전부 매듭이라 정성도 들어 있고 색채도 곱지만 무엇보다도 그 묵주를 볼 때마다 투병 중이신 그분을 떠올리게 되고 저절로 그분 완쾌를 빌면서 기도하게 된다. 이 묵주 또한 얼마 동안 가지고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그분이 완쾌됐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때까지는 가지고 있겠지만…. 이렇듯 묵주는 내 손을 거쳐 많은 이들에게로 흘러갔고 앞으로도 또 그러할 것이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통교하듯 서로의 마음과 기도를 이어주며, 묵주는 어느 새 나눔의 징표가 됐다. 그러나 단 하나 30년 가까이 지니고 있는 묵주가 있다. 20대 중반 외국으로 떠날 때 공항에서 가톨릭학생회 후배이자 대녀가 울면서 손에 쥐어준 묵주다. 환송 나온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멀리 떠난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 채 웃으며 비행기를 탔고, 비행기가 이륙하고 한 시간 쯤 지나 겉옷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묵주를 꺼내 보았다. 까만 묵주 주머니 안에 비교적 알이 자그마한 주황색 묵주가 들어있었다. 외국으로 떠난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고 왈칵 눈물이 앞을 가렸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고향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져 눈물이 날 때 묵주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굳이 묵주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고 그래서 늘 소지품 속에 넣고 다녔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머나먼 곳으로 떠날 때 동행했던 그 묵주는 지금까지도 늘 길 떠날 때마다 나와 동행한다. 이와 같이 묵주는 나에게 가톨릭 신앙의 징표, 나눔의 징표, 그리고 낯선 곳을 향해 두려움을 가지고 떠날 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징표가 됐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의식하지도 못 한 채 말이다. 그럼에도 1990년대 초반 여성신학을 만나기 전까지 묵주기도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비는 기복신앙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측면이 있어 약간의 거리감, 아니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성모신심에 관한 오해를 익히 들었기에 더 그랬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여성신학을 접하게 된 후 여성의 관점에서 성경을 새롭게 읽기 시작했고, 특히 루카복음 1장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됐을 때 그런 우려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성모님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정의로운 하느님 나라 실현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이다(루카 1,46-55). 묵주가 우리에게 가톨릭 신앙의 징표라면, 묵주기도는 성모님이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바치는 기도가 돼야 하지 않을까? '생명ㆍ평화ㆍ인권' 묵주가 그런 뜻으로 만들어졌고 여럿이 나눠 가졌기에 오늘도 그 뜻을 새기며 묵주기도를 바친다. cpbc2013.03.12
이웃 종교 소통ㆍ화합 한마당 성황제16회 대한민국 종교문화축제 열려불교체험관을 방문한 김희중 대주교가 윤장대(팔각형으로 된 책궤)에 '기쁨'이라는 메시지를 적고 있다. 이웃종교 간 화합과 소통의 한마당인 제16회 대한민국 종교문화축제가 '생명 평화 나눔 사랑'을 주제로 8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렸다. (사)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공동대표 의장 자승 스님)가 주최한 이날 축제에는 주교회의 교회일치와종교간대화위원회 위원장 김희중 대주교를 비롯한 개신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민족종교 등 7대 종단 대표와 신자, 시민 등이 참가해 이웃종교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종단대표 어린이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된 이날 축제는 종단별 축하 공연, 마술쇼, 기념음악회로 이어졌다. 각 종단은 체험관을 마련해 이웃종교 신자들과 시민들을 초대했다. 천주교는 까리따스수녀회에서 팔찌 묵주 만들기, 명화 퍼즐 맞추기, 기도문 나무에 매달기, 성경 이어쓰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해 인기를 끌었다. 특히 묵주 만들기는 넉넉히 준비해 놓은 재료가 부족했을 정도로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대한민국 종교문화축제는 문화예술을 매개로 각 종교가 실현하는 공동선과 보편적 가치를 나누는 장이다. 1997년 설립돼 종교 간 갈등 해소와 국민 화합에 앞장서고 있는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종단 간 문화와 예술 교류를 통한 화합 도모를 위해 매년 이 축제를 열고 있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임영선2012.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