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주일(요한 2,1-11)](//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8187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주일(요한 2,1-11)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연중 제2주일이다. 요한의 세례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세례운동을 거룩한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 만드신 예수께서는 오늘 어머니와 함께 카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신다. 혼인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고 말씀하신 바로 그 의미대로 성숙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으로 만나 백년가약을 맺음을 뜻한다. 동시에 인류가 대를 이어 존속해갈 수 있는 통로요 창구다. 이런 자리에 예수께서 증인으로 참석하심으로써 혼인은 거룩한 하느님의 역사로 거듭나게 된다. 이제부터 혼인은 단순히 인간끼리 만남의 장이 아니라 태초에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거룩한 일체의 표징이 된다. 오늘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함께 혼인잔치에 참석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의 첫 번째 기적에 눈길을 보내기보다는 이 자리에 참석한 주님 어머니의 태도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면 어머니의 태도가 바로 주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이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하셨다. 또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으며"(루카 2,19) 오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함으로써 모든 것을 당신 아드님 뜻에 맡기셨다. 물론 어머니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그분 뜻대로 하시라고 맡기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고 했다. 또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라고 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드님을 향해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라고 하셨다. 더러는 두려워하고, 역정 아닌 역정을 내며, 아들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권위를 발휘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아드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희망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잃지 않으셨다. 아드님은 또 어떠하신가? 단 한 번도 어머니 희망을 꺾지 않으셨다. 아드님께서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으며"(루카 2,51) 오늘은 또 "물독에 물을 채워라 (…)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요한 2,7-8)고 하심으로써 어머니 요청을 모두 들어주셨다. 아드님께서는 모든 믿는 이들의 청원,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이의 청원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청원하는 이의 청원보다 과분하게 넘치는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아드님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주님 앞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서 있는가? 복음서 안에 주님이 몇 번이나 기적을 행하셨는지 혹은 몇 번이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지, 또 십자가를 지시고 몇 번이나 넘어지셨고, 유언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대답도 기가 막히게 잘한다. 그와 같은 태도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복음사가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루카 2,11)고 전한다. 제자들은 그분 영광을 보고서야 그분을 믿으려 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어머니처럼 무조건 아드님을 믿는가? 아니면 제자들처럼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영광을 보고 그분을 믿는가? 사실 어찌 보면 전자도 후자도 아닌 듯싶다. 우리는 어머니처럼 아드님에게 모든 것을 걸고 희망하기란 틀려버린 게 아닐까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겉으로는 "주님!"하면서 속으로는 모든 것을 자기 욕심대로 결정하고, 그것을 주님 뜻이라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 제자들처럼 주님 영광을 보고 믿는다는 것도 진실이 아닐까봐 근심스럽다. 주님 영광이라면 성경을 통해, 각종 교리서와 성인 전기를 통해, 하늘과 땅과 산천초목을 통해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이도 저도 아니면서 세파에 이리저리 떠밀려가는 신세로 살면서 짐짓 입만 열면 주님, 주님하는 것을 보면 암담하기까지 하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태 6,24)는 주님 말씀이 곧 오늘 우리에게 해당하는 것처럼 보여 슬프기까지 하다. 주님은 어머니 요청에 대한 대답으로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루카 2,4)라고 하신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나 그 어느 누구에게도 휘둘리실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온전히 자유로운 분이신데 우리는 그분을 그분 뜻이 아니라 우리 뜻대로 움직이려 든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람들에 의해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으셨지만, 외려 혼인을 하느님의 거룩한 표징으로 만드시고 친히 축복해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종이면서 자녀라면 주님 뜻을 헤아리며 살 줄 알게 된다. 자기 뜻에 맞춰주실 것을 주님께 요구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왜냐면, 그분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저 그분 작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cpbc2013.01.15
[성경 속 상징] (92) 화 지혜로운 이는 화를 가라앉혀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베트남 승려이자 시인, 평화 운동가로 유명한 틱낫한 스님이 쓴 책 「화」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는 행복한 인생을 꿈꾼다면 화부터 다스리라고 권고한다. 평소에는 늘 웃고 지내다가도 상대방 말 한마디에 불쑥 화가 솟기도 한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평상시에도 마음속에 화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외부로부터 크고 작은 자극을 받으면 가만히 숨어 있던 화가 마음 한가득 퍼진다.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화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상대방을 공격하고 악담을 퍼부어 화를 쏟아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화내는 사람의 마음에 몇 배의 화를 다시 쌓게 된다. 불쑥 솟아나는 화를 무조건 참아야만 할까. 그렇지는 않다. 화를 무조건 드러내는 것도, 화를 참고 속으로 삭이는 것도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화가 날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충분한 시간 동안 호흡을 천천히 하며 자신을 들여다보도록 권한다. 그리고 화를 폭발시키기 전에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깊이 생각하는 습관을 지니라고 조언한다. 순간의 감정을 화로 쏟아내고 나면 인간관계가 깨지기 쉽고, 대개의 경우 화를 낸 후로는 후회의 감정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떠올리면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분이라는 기억이 제일 먼저 난다. 그런데 가끔 화를 내시면 평소와는 딴판으로 무척 무섭게 꾸짖고 벌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가 화가 나셨다 하면 무조건 줄행랑을 쳤다. 시간이 좀 흐른 후 집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 싶게 아버지는 평온상태셨다. 요즘에는 우발적 폭력이나 살인이 점점 더 늘어난다고 한다. 욱하는 성질과 핏대를 억누르지 못해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방증이다. 성경에도 화에 대한 언급이 많다. 화를 잘 내면 다른 이와 언쟁이 잦아지고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우둔한 자는 화를 있는 대로 다 터뜨리지만 지혜로운 이는 화를 가만히 가라앉힌다"(잠언 29,11). 또 화는 이성적 힘을 약화시켜 본의 아닌 실수와 잘못을 가져온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싸움을 일으키고 성을 잘 내는 자는 죄를 많이 짓는다"(잠언 29,22). 또한 화는 자주 범죄로 이어지므로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화를 잘 내는 자는 벌을 받는다. 네가 그를 구해 주려 하면 화를 돋울 뿐이다"(잠언 19,19). 화를 쉽사리 내지 않고 기분 나쁜 일에 즉시 발끈하지 않으려면 대단한 용기와 이성적 힘이 필요하다. "분노에 더딘 이는 용사보다 낫고 자신을 다스리는 이는 성을 정복한 자보다 낫다"(잠언 16,32). 재미있는 것은 하느님도 화를 내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는 꾸짖고 가르치시려고 우리에게 잠시 화를 내시지만, 당신의 종들과 다시 화해하실 것이오"(2마카 7,33). 그러나 하느님의 화는 결국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한 것이다. cpbc2010.10.26
![[아! 어쩌나?] (181) Q. 술만 마시면 푸념하는 남편](//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5233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181) Q. 술만 마시면 푸념하는 남편Q. 술만 마시면 푸념하는 남편 제 남편은 술만 마시면 가족에게 푸념을 해대서 아주 괴롭습니다. 특히 자기는 부모를 잘못 만나 어린 시절이 너무 가난했고,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제가 처녀 때는 남편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안돼서 나름 도움을 주고자 했고, 결혼 후에도 남편을 안쓰럽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날이 갈수록 술주정이 심해져서 이제는 남편 신세타령을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픕니다. 남편이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요? 이유라도 알고 싶습니다. A. 남편의 증세는 '피해자 증후군'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입버릇처럼 "너희가 나를 알아?" 하면서 허세 아닌 허세를 부립니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문제가 다 과거 이유 때문이라는 변명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데, 이런 모습이 때로는 특권을 누리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버스에 올라타서는 자기 전과를 자랑하는 사람처럼 말이지요. 과거에 아무리 아픈 상처가 있다손 치더라도 현재 나의 삶에 대한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습니다.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 중에는 어린 시절 불우했던 기억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은 진흙탕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자신의 인생을 성공으로 만듭니다. 진흙탕 같은 자기 과거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그 진흙탕 안에서 꽃을 피운 것입니다. 그런데 피해자 증후군 증세를 가진 사람들은 꽃을 피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늘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 속에서 마치 그 영혼이 늪에 빠진 사람처럼 살아가니 자기 인생에서 꽃을 피우기는커녕 시궁창처럼 썩은 내를 풍기며 사는 것입니다. 자매님 남편의 술버릇을 고치려면 절대 주정하는 소리를 들어주면 안 됩니다. 응석받이가 돼서 더 심해질 것입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면 제풀에 지쳐서 안 하게 될 것이니 동정이나 연민은 절대 금물입니다. Q.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데 저는 아직 신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루카복음을 읽고 있습니다만,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52). 이 대목을 읽다 보면 그리스도교를 믿으면 가정이 파탄이 난다는 말로도 들리는데 정말 그런지요?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친구가 시집가서 시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다는 말을 들으면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A. 얼핏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심리치료적 관점에서 보면 루카복음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가정을 파탄 내기 위한 말씀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정의 화목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시기에 가족 간 불화를 조장할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은 태어날 때 서로 연결돼 있지만, 매우 혼란스런 신경망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은 성장하면서 경험을 통해 더욱 조직화됩니다. 경험은 사람과 환경이 효과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뇌구조를 체계화시켜줌으로써 세상을 배우고 세상에 적응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 경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가족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가족관계를 통해 세상에서 사는 방법을 터득해갑니다. 어린 동물들이 작은 둥지에서 생존 법칙을 배우고 난 후 넓은 세상에 나가듯이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족 간의 관계가 병적인 경우에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즉, 부모가 아이를 과보호하는 등 좋지 않은 양육습관으로 아이를 대할 때면 어른으로 성장해야 할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다시 말해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아이들이 걸음마를 배울 때 엄마가 지나치게 보호하면 결국은 걸음마를 배우지 못하고 엄마에게 자기 인생을 통째로 맡겨버리는 의존적 성격이 형성됩니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세상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기를 지나치게 바라는, 성격적으로 심각한 결함이 생깁니다. 소위 '성격장애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외부 지지를 받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조종하려고 합니다. 즉, 타인의 지지를 받으려는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어떤 공동체를 가든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치유하는 방법은 지지나 격려가 아니라 '좌절시키는 것'입니다. 즉, 세상살이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해야 성격장애 결함을 일부라도 고칠 수 있습니다. 주님 말씀에 대한 완전한 답은 아니지만 심리치료적 관점에서 이렇게 보기도 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퇴사자22012.12.18
![[예비신자가 묻습니다] 28. 순교신심에 관하여](//cpbc.co.kr/CMS/newspaper/2012/08/rc/424594_1.0_titleImage_1.jpg)
[예비신자가 묻습니다] 28. 순교신심에 관하여103위 순교성인화(부분), 서울 혜화동본당 소장.Q. 김대건 신부님에 관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체포돼 온갖 고문을 당하고 결국 사형되셨는데, '어떻게 믿음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천주교가 박해받던 시기에 수많은 신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데, 어디서 그런 믿음이 났을까요? 신성호(서울 신림성모본당, 53) A. 목숨까지 바쳐가며 신앙을 지키는 것을 순교(殉敎)라고 합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爲主致命, 위주치명)는 말을 줄여 치명이라고도 부릅니다. 한국교회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신앙을 증거했던 신앙선조들의 '순교신심'에 뿌리를 두고 성장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외국 선교사를 통해 천주교를 접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직접 천주교에 관한 책과 성경 등을 들여와 공부하며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유교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남자와 여자, 양반과 노예를 차별하지 않고 모두 똑같은 하느님 자녀로 사랑받는다는 사실은 놀라움과 동시에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또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사랑을 배우며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눈 뜨게 됩니다. 신앙선조들은 천주교 가르침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했고 영원한 구원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은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모독하기보다 차라리 천 번이라도 죽을 각오가 돼 있다"고 외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한국교회가 배출한 성인은 103분으로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형당한 순교자입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그 중 한 분입니다. 또 현재 시복시성을 추진 중인 125분도 모두 순교자입니다. 125분 가운데 한 분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님인데 '땀의 순교자'로 불립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순교는 아니지만, 박해의 눈을 피해 전국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다 과로로 숨지셨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9월을 순교자성월로 정해 순교자들 삶과 신앙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순교성인전을 읽고, 순교성지를 순례하며 믿음을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의 신심을 본받는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퇴사자22012.08.28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14>사순 제5주일- 고해성사](//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3389_1.0_titleImage_1.jpg)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사순 제5주일- 고해성사화해의 성사,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고해성사는 지은 죄에 대한 용서를 얻고 하느님과 교회와 다시 화해하게 해 주는 성사다. 사진은 세계청년대회에서 고해성사를 보는 청년. [CMS]"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 8,11). 우리 잘못을 고백합시다. 주님께서는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회개의 성사, 참회의 성사, 화해의 성사라고도 하는 고해성사에 대해 알아봅니다.◇살펴봅시다 ㉠고해성사의 필요성(1424~1445항) :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원죄와 본죄(직접 지은 죄)가 모두 깨끗이 사해지고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세례성사가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주지만 "인간 본성의 불안정함과 나약함을 없앤 것은 아니고, 전통적으로 사욕이라고 부르는, 죄로 기우는 경향을 없앤 것도 아니었기"(1426항)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하느님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모욕"(1440항)이고 또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시는 까닭입니다. 하느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권위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시며 당신 이름으로 행사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 이 권한을 위임받은 이들이 사도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죄는 교회와 이루는 친교에도 해를 끼칩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또한 교회와 화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용서하는 당신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시면서 죄인들을 교회와 화해시키는 권한도 주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시며 주신 '매고 푸는 권한'에서 잘 드러납니다. 베드로에게 맡겨진 매고 푸는 저 임무는 그 단장과 결합돼 있는 사도단에도 부여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죄를 지은 사람은 회개를 통해 하느님의 용서를 얻고 또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해성사는 이를 전례적으로 표현하고 실현하는 것"(1440항)입니다. 이 고해성사는 참회자 혹은 고백자의 세 가지 행위와 집전자인 사제의 사죄로써 이뤄집니다. ㉡참회자의 행위(1450~60, 1490항) : 참회자의 세 가지 행위는 마음의 통회, 사제에게 하는 죄의 고백, 그리고 보속하겠다는 결심과 그 이행입니다. 통회는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 죄를 미워하는 것"(1451항)입니다. 통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 드린 것을 아파하는 완전한 통회(사랑의 통회)입니다. 완전한 통회는 소죄를 용서해 주며, 가능한 한 속히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굳은 다짐이 포함된 경우 죽을 죄도 용서받게 해 줍니다. 또 하나는 불완전한 통회(두려움의 통회)로, 죄의 추악함이나 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통회하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통회는 그 자체로는 대죄를 용서받지 못하며, 고해성사로 용서받도록 준비시킬 뿐입니다. 통회하고 고해성사를 받으려면 먼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하느님 말씀에 비춰 자신의 양심을 살펴보는 양심성찰이 필요합니다. 십계명, 복음서의 산상설교, 서간에 나오는 사도들의 가르침 등이 양심성찰을 위한 요긴한 성경 본문들입니다. 통회를 한 후에는 죄를 고백합니다. 죄의 고백은 지은 죄를 직시하게 해주고 그에 대한 책임을 깨닫게 해주며 그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친교에 다시 마음을 열게 해줍니다. 고해성사에서 핵심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죽을 죄, 곧 대죄는 하나하나 열거해야 합니다. 부끄럽다고 해서 숨긴다면, 환자가 의사에게 자신의 증세를 제대로 알리지 않고 치료를 받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드시 고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잘못(소죄)도 고백하기를 교회는 크게 장려합니다. 보속은 죄의 결과로 인한 폐해를 보상하는 것입니다. 적절한 방법으로 죄를 보상하거나 속죄해야 하는데 이를 보속(補贖)이라고 합니다. 고해사제는 참회자의 고백을 듣고 나면 죄의 경중과 개인적 상황, 영적 이익 등을 고려해 적절한 보속을 내려주며, 고백자는 이를 성실하게 이행해야 합니다. ㉢고해성사의 집전자(1461~1467항) : 고해성사의 집전자들은 주교와 사제들입니다. 주교와 사제들은 성품성사의 힘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집니다. 사제는 신자에게 고해성사를 받도록 권고해야 하며 신자가 합리적으로 이 성사를 요청할 때마다 언제나 기꺼이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고해성사를 거행할 때 사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착한 목자, 탕자를 기다리다 맞아들이는 아버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고 자비로운 판결을 내리는 의로운 재판관의 직무를 다해야 합니다. "죄인에 대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표지이며 도구"(1465항)인 사제는 "하느님의 용서를 마음대로 다루는 주인이 아니라 종"(1466항)입니다. 고해사제는 △죄에 떨어진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며 △진리를 사랑하고 교회 교도권에 충실해야 하고 △고백하는 사람을 치유와 완전한 성숙으로 인내로이 인도해야 하며 △고백자를 위해 기도하고 속죄해야 합니다. ㉣고해성사의 효과(1468~1470, 1496항) : 고해성사의 효과는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시켜 주고 하느님과 화해하고 결합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또 우리를 교회와 화해시켜 줍니다. 죄가 약화시키거나 파괴한 형제적 친교를 바로 잡고 회복시켜 줍니다. ◇알아둡시다 고해성사는 나아가 △죽을 죄로 받게 되었던 영원한 벌(영벌)을 사면받게 해주고 △잠벌(暫罰, 그 죄 때문에 받아야 잠시 받아야 할 벌)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사면받게 해주며 △양심의 평화와 안온, 영적 위안을 주고 △악의 유혹과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영적 힘을 키워 줍니다. -교회법에서 가장 엄한 벌인 파문을 받은 사람은 고해성사를 받지 못합니다. 파문을 푸는 권한은 교회법에 따라 그 지역의 주교와 교황, 또는 이들에게서 권한을 받은 사제들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나 파문된 사람이 죽을 위험이 있을 때는 고백을 들을 권한이 없는 사제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사제가 모든 죄와 파문에서 그 사람을 풀어 줄 수 있습니다(1463항). -고해사제는 고백자에게서 들은 죄에 대해 절대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으며, 고해를 통해 고백자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인용해서도 안 됩니다(1467항).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퇴사자22013.03.12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4>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上)](//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9560_1.0_titleImage_1.jpg)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上)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한 복음 선포그리스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80㎞ 떨어진 고대도시 코린토는 상업이 번창한 항구도시였다. 신약의 코린토 서간은 이곳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 바오로 사도가 사목적으로 답변한 내용이다. 사진은 코린토 유적지. 평화신문 자료사진 코린토 서간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교회의 여러 사목적 문제에 대해 신학적으로 답변한 것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코린토는 양옆에 바다가 있어 문물과 문화의 교류가 활발했던 도시다. 반면 도덕적 추문이 잦았다. 바오로 사도는 이곳에서 1년 6개월여를 머물며 교회를 창설했지만, 유다인들의 고발로 떠나야 했다. 신자들은 에페소에 머물던 사도에게 코린토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대한 사도의 답변을 묶은 것이 바로 코린토 서간이다. 코린토에서 일어난 문제는 △교회 파벌싸움 △도덕적 추문 △우상에게 바친 제물 △종교적 열광주의 △바오로에 대한 불신 △부활에 대한 불신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코린토교회는 아폴로와 베드로파, 바오로파 등 파벌로 분열돼 있었다. 사도는 사람들이 인간적 지혜와 학문적 언변, 인간적 권위를 추구하는 데서 분열이 시작됐다고 판단했다. 복음은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선포한다는 것이다. 사도는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 1,22)하고 말했다. 표징은 증거를 요구하는 계산적 신앙을 뜻한다. 이를 따르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분일 뿐이다. 지혜를 찾는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철학을 발전시키며 끊임없이 지적 세계를 건설했지만, 이성적 합리주의 안에 갇혔다. 이들은 이성으로 파악되는 우주적 이성을 신으로 숭배했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지혜는 결국 인간적 지혜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어리석음을 따르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어리석음은 코린토교회를 구성하는 원리이자 바오로의 인격을 구성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바오로 사도는 계모와 동침하거나 창녀와 어울리는 등의 도덕적 추문(1코린 5,1, 1코린 6,16)에 대해 분노를 드러냈다. 사도는 이러한 죄인은 사탄에 넘겨지고 육체는 파멸되지만, 세례 때 받은 영이 그를 결국 그리스도의 몸에 다시금 통합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사도는 "창녀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곧 창녀와 한몸이 된다는 것이고, 이는 창녀의 지체가 된다는 뜻"이라며 이들을 단호히 단죄했다. 육체의 결합은 매우 밀접해서 다른 모든 결합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이 성경에 드러나는 성적 결합의 의미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성적 방종은 큰 죄가 된다. 그의 몸은 자신의 몸이 아니라 성령의 성전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 역시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하고 말하기도 했다. 사도는 우상에 바쳐졌던 물고기를 먹어도 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신자들에게는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관련해, 우리는 '세상에 우상이란 없다'는 것과 '하느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코린 8,4)하고 답했다. 즉, 하느님 외에는 섬길 분이 없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바쳐진 음식이 문제가 아니라 이 때문에 괴로워하고 양심에 상처를 입는 형제들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1코린 8,12-13). 또 사도는 그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격을 부인하려는 사람들에게 답변했다. 그는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바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나의 업적이 아닙니까? 내가 다른 이들에게는 사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사도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 사도직의 증표입니다"(1코린 9,1-2)하며 부활한 예수를 만났음을 강조했다.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러한 의심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신자들의 물질적 도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도들은 아내를 동반해 전교여행을 했고, 지역 교회로부터 물질적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사도는 도움을 받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사도는 "나는 내가 원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다그치는 그리스도의 그 충동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보상을 받을 자격이 된다면 '보상을 포기하는 자유'가 보상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한편으로는, 사분오열돼 있고 여러 어려움을 겪는 코린토교회에서는 물질적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이 좀 더 정정당당하게 교회를 이끌어갈 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필리피교회에서는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았던 것에 미뤄 경우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정리=김은아 기자 euna@pbc.co.kr※평화방송 TV 방송시간: 월요일 오전 9시(본방송), 화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목요일 오후 3시, 일요일 저녁 10시퇴사자22013.01.29
![[생활 속의 복음] 누가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가](//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9554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누가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가 연중 제4주일 (루카 4,21-30) 연중 제4주일이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해 당신의 사명선언문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목격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실현해야 할 사명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루카 4,19)를 선포하시는 일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들의 삶 속에 기쁨이 넘쳐나도록 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여 억울하게 잡혀가 영어(囹圄)의 삶을 사는 그들이 목 놓아 자유를 노래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또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똑똑하게 목도(目睹)하도록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면서 그 모든 일이 곧 주님께서 베푸신 자비에서 비롯됨을 온몸으로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예수님 사명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수행해야 할 사명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열성적 신앙인들이다. 예수께서 이사야 예언자 말씀을 낭독하실 때에도, 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말씀하실 때에도 그들은 열성신자답게 그 말씀을 하느님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놀라워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적 열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돌연 무서운 집단적 패거리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잘못되고 왜곡된 신앙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진실한 예수님 말씀에 불쾌감을 느끼고는 헐뜯기 시작했다. 급기야 모두 화를 내면서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루카 3,29-30)했다. 열성적 신앙인들이 삽시간에 흉악무도한 패거리로 돌변하는 순간이며, 그들이 자긍심을 지녔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됐음을 자인하는 순간이다. 왜곡된 믿음은 눈에 보이는 '기적(잿밥)'에 더 관심을 끌게 하고, 오로지 기적만을 강조하게 한다. 주님의 참된 말씀을 앞세워 살기보다는 자신들의 그릇된 욕심을 앞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기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일시적 영달을 채우려는 못된 마음 씀씀이가 문제다. 주님께서 베푸신 기적은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시고자 행하시는 이상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갈라지고 다투며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인류를 바로잡으시려는 은총이요 은사다. 따라서 은총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당신 자비에 바탕을 둔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 방문이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은총임을 깨닫기보다는 고향이라는 것을 내세워 몇 배나 더 강한 기적을 행할 것을 주문하려 했다.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그들은 예수께서 소개하시는 하느님이 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느님도 되신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다인들의 선민의식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당신의 공동체를 세우셨다. 그러나 그분이 뽑아 세운 일꾼들은 또다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그분을 '감실(龕室)'에 가두고, 감실 안에 계시는 분만 세상에 소개하려 한다. 모든 세상 사람들의 주님이 아니라 그들만의 주님으로 섬기려 하기에 그분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참뜻을 저버리는 신세로 전락하려 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누리면서 살기를 일깨워주기는커녕 그분을 다시금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니 그 옛날 나자렛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우리는 교회의 몸이시며 머리이신 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고"(2티모 1,10), 또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라는 선언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정은 어떠한가. 입으로는 무엇인들 말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우리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 떨어뜨리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 그분, 교회의 몸이시고 머리이신 분의 말씀을 듣고 화를 잔뜩 낸 적은 없는가. 잘못되어 돌아가는 정치에 일침을 가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고, 작고 약한 이들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고, 쥐꼬리만한 세속 권력에 기대려 하고, 교회의 안보를 내세워 불의와 타협하지는 않았는가. 또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험담하고, 입만 열면 '십자가' 운운하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교묘하고 해괴한 논리로 회피하지는 않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진리나 진실보다는 권력과 재물과 학력에 모든 것을 걸려는 삶의 행태야말로 예수님을 벼랑으로 끌고 가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아닐까.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면 우리가 주님의 자녀나 일꾼이라고 감히 불릴 수 있을까.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주님 뜻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참된 믿음을 잃어버렸거나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혹은 훼손하고 있다면, 주저 없이 예수께로 돌아와 그분에 대한 참된 신앙을 재발견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기도한다.▲신대원 신부(안동교회사연구소장)cpbc2013.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