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께 희망 두고 형제적 사랑 실천 당부[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1) 베드로의 첫째 서간 베드로의 첫째 서간은 세상 안에서 여러 박해를 겪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걸고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루벤스, 성 베드로 사도, 1610~1612,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베드로의 첫째 서간(이하 베드로 1서)은 소아시아에 있는 로마의 5개 속주, 곧 북부 흑해 변의 폰토스·중부 지방의 갈라티아·동부의 카파도키아·서부의 아시아·북부 폰토스의 서쪽 지방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 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흩어져’라는 말은 헬라어로 ‘διασποραs(디아스포라)’라 하는데 이 단어는 ‘팔레스티나 땅 밖에 사는 유다인’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베드로 1서는 얼른 보면 디아스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서간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2,11)이란 말에 주목하면 비유다계 그리스도인도 포함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 1서는 소아시아 지역 그리스도인 공동체 곧 유다계와 이방계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보낸 사목 서간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베드로 1서를 ‘가톨릭 서간’으로 분류합니다. 베드로 1서는 글쓴이가 교회 원로이며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5,1)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1,1)라고 밝힙니다. 그러면서 실바누스가 이 서간을 받아썼고, 마르코가 곁에 있었다고 합니다.(5,12-13) 베드로의 둘째 서간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2베드 3,1) 하지만 다수의 성경학자는 이 서간의 저자가 베드로 사도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로 첫째, 베드로 사도는 이스라엘 갈릴래아 베싸이다 출신 어부로 아람어를 사용했기에 헬라어에 능통하지 않다는 점. 둘째, 이 서간을 소아시아에 있는 로마의 5개 속주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냈는데 베드로 사도가 이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을 그대로 수용할 만한 이유도 딱히 부족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헬라어를 모국어로 하는 실바누스에게 받아쓰게 했고, 예수님과 사도 시대 당시 갈릴래아 지방에서도 헬라어가 통용됐기에 베드로 사도가 전혀 헬라어를 하지 못했다고 단정할 순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베드로 1서에 나오는 소아시아 5개 교회는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들이 세운 신앙 공동체이긴 합니다만 베드로 사도가 소아시아에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 서간을 쓰지 않았다고 결정적으로 제시하는 논거는 베드로 1서에 글쓴이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 직접 그분과 함께 생활했다는 사실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 1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서술할 뿐 ‘하느님 나라’나 ‘사람의 아들’처럼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하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1,8)는 요한 복음서 20장 29절을,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2,2)는 한 마르코 복음서 10장 15절을,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2,12)는 마태오 복음서 5장 16절의 예수님 말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베드로 사도가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기 직전에 자신의 구술을 근거로 실바누스에게 신자들을 격려하는 회람 서신을 보낼 것을 부탁했고, 베드로 사도가 순교한 얼마 뒤인 70~80년 사이 베드로 1서가 집필됐을 것으로 봅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Πετρου Α(페트로 알파)’,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Petri 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베드로의 첫째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베드로 1서는 5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하인과 노예의 처신(2,18-25)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서간을 받은 소아시아 5개 교회 구성원들이 전반적으로 사회 신분이 낮은 자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1서는 다섯 가지 권고로 내용을 이룹니다. 먼저 이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옛 생활 방식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그리스도께 희망을 품고 영적 성전의 한 부분이 되라고 촉구합니다.(1,13─2,10) 이어 이교인들 사이에 취해야 할 처신과 함께 신자들의 의무, 국가 권력에 대한 의무, 주인에 대한 종의 의무, 부부 사이의 의무를 제시하며 형제적 사랑을 실천할 것을 당부합니다.(2,11─3,12) 아울러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본보기를 실천하기 위해 죄와 단절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랑과 봉사로 신앙 공동체 생활에 충실할 것을 권면합니다.(3,13─4,11) 그리고 임박한 박해에 대해 선을 행하면서 자기 영혼을 성실하게 창조주께 맡기라고 합니다.(4,12-19) 마지막으로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고 모범이 될 것과 젊은이들에게 겸손하고 깨어있길 권고합니다.(5,1-11) 베드로 1서는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하는 사명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하느님을 위한 봉사는 먼저 교회 안에서 실행돼야 하며 가정과 사회 안에서도 실천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사랑과 신뢰의 마음으로 따르고 복음을 선포하며 주님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 선임2024.10.02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12>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하)](//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6442_1.2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하)창조, 구원은 하느님 사랑, 계획 안에서 완성 지난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발타사르는 역사가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완성되고 절정에 달한다며 그리스도 중심으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했다. 그는 또 십자가 신학을 전개하면서 십자가 사건이 위에서의 개입,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개입이기에 역사를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을 중심으로 해석할 것을 주문하면서 역사를 '하느님의 드라마'(Theodrama)로 제시했다. 발타사르의 이런 역사 해석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보자. 내재적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를 알기 위해선 우선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를 규정해야 한다.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는 이 세상의 구원역사 안에서 계시되고 나타난 삼위일체 하느님 모습을 뜻하는데 통상 '경륜'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내재적 삼위일체는 영원에서 이뤄지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인 생명의 신비 자체를 의미하는데 '신학'이라고 한다. 발타사르는 오직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서만 내재적 삼위일체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며 후자가 항상 전자보다 앞서고, 전자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봤다. 내재적 삼위일체가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구원역사 전체를 깊이 밝혀준다는 것이다. 발타사르는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 칼 라너의 입장을 비판했다. 라너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신비로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구별하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 당신 자신을 세상에 전달하고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타사르는 라너의 이런 입장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라너는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결과 내재적 삼위일체가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에 흡수돼 하느님 본질 자체가 세상 역사에 휩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타사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를 서로 명확하게 구별하고, 내재적 삼위일체를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뿐만 아니라 모든 구원 사건과 세상 역사 전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내재적 삼위일체가 없다면, 구원경륜적 삼위일체가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라너와 발타사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신학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너의 신학적 사고는 '아래에서 위로' 곧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향해 움직인다. 그의 신학적 기반은 '아래', 이 세상에 실존하는 인간이다. 그는 인간 중심적 신학을 전개한다. 이에 반해 발타사르의 신학적 사고는 '위에서 아래로' 곧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로 향한다. 발타사르의 신학적 기반은 '하늘'이며 이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뜻한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 중심적으로 풀어나간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역사의 근원과 마지막 그러면 발타사르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계시된 내재적 삼위일체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그는 삼위일체로서 하느님의 본질을 사랑 자체로 제시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변화 없이 경직된 하느님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께서 위격적으로 사랑을 나누시는 '삼위일체적인 사건', 영원히 계속되는 '사랑의 사건'이다. 하느님 본질이 사랑으로 구체화될 정도로 세 위격은 생생하게 사랑을 나누는 영원한 움직임, 역동적인 사랑의 사건이다. 발타사르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신약 성경 내용을 성부의 창조적인 사랑, 성자의 감사하는 사랑, 이 두 위격의 사랑 교환으로 탄생한 성령으로 이해했다. 이처럼 절대적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선 항상 사랑을 나누시기에 보다 위대한 분이며, 유한한 인간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크신 분이다. 발타사르가 묘사하는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절대적 사랑은 세 위격들의 절대적 자기 비움으로 이뤄진다. 이 사랑의 사건에서 세 위격들은 타 위격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삼위일체적 사건이 하느님의 영원한 운동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랑 자체로서 영원히 완전하시다. 그분은 스스로 충만하시며 하느님으로 존재하기 위해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둘째, 하느님 사랑은 그 본질상 폐쇄되지 않고 자기를 넘어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해 내려오시는 '위에서 아래로의 운동'이 일어난다. 발타사르는 이를 인식 이론적으로 '하강하는 논리'로 부른다. 곧 아래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자기운동 덕분에 인간이 하느님을 인식하거나 하느님께 다가서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처럼 발타사르가 근본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바는 세상과 인간 그 모든 것을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이 절대적이며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사랑의 사건은 세상의 시작이며 종말이다. 세상과 인간은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사랑에서 유래하며, 그 역사도 하느님 사랑으로 지속돼 결국 완성된다. 하느님 안에는 이미 절대적 자기포기의 사랑과 항상 자기를 헌신하는 사랑이 있기에 그 사랑으로 세상은 창조되고 구원된다. 사랑을 도외시한 채 세상과 그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발타사르의 이런 시각은 현대에 이르면서 점점 잊히는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을 생생하게 강조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사실 하느님 사랑은 세상과 인간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근본 토대며, 또 인간이 마지막까지 간직할 수 있는 희망이기도 하다. 역사, 하느님의 드라마 이제 발타사르가 제시하는 '하느님의 드라마'인 역사를 살펴보자. 세계 역사는 하느님의 내적 역사로부터 이뤄진다. 하느님에 의해 이뤄는 사건, 하느님 자신 안에서 생성되는 사건이다. 하느님 본질은 삼위일체로서 충만한 사랑 안에서 영원한 움직임, 생명이 넘치는 존재, 타자에게로 향하는 존재다. 이런 삼위일체 하느님은 역사의 기초다. 역사 자체는 그 기초에 상응해 삼위일체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사랑의 대화를 통해서 마침내 세상 창조를 결정하고, 세상을 떠맡으신다. 이런 내재적 삼위일체의 대화에 따라 세상의 윤곽을 스케치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사건은 세상에 의미와 형식을 주는 원리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낳으실 때 세상을 원하시고, 성자에게 세상을 선물로 넘겨주신다. 성자께서는 이런 선물을 순종으로 받아들여, 역사의 이념과 세상의 원형이 되신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세상에 대한 의지를 보편화시키신다. 창조로 시작해 강생을 넘어 십자가 사건에까지 이르는 역사의 모든 움직임은 이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서 미리 결정된다. 이렇게 역사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미리 결정되고 또 그 사랑으로 실행된 드라마라면 '어떻게 죄악이 역사에 나타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죄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충만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당신 사랑의 선물로 세상에 자유를 주는 모험을 감행하신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로 죄를 범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늘 함께하시고, 위급한 경우 십자가 비움을 통해서 인간을 되찾을 준비를 할 정도로 인간의 자유를 감싸셨다. 그 결과 인간은 협력자로 하느님 드라마에 등장한다. 이 드라마의 핵심 인물은 하느님과 인간이다. 곧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으로 행동하시고, 인간은 그 사랑에 대해 자유를 통해 응답한다. 여기에서 인간은 창조와 함께 주어진 세상의 구체적 모습을 거부할 수 있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긍정적인 분리'를 인정하는 것도 거부할 수 있다. 하느님과 인간의 실제적 분리는 신적 위격들 사이의 실제적 분리에 기초한다. 세상은 하느님과 분명하게 분리되지만 뗄 수 없이 그분과 깊이 결합돼 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통해서만 세상은 자기의 실제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을 지킬 수 있다. 이에 비해 죄는 하느님과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피조물이 자기 자유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의 거룩한 분리 안에 자리잡은 죄 하지만 이런 죄의 가능성은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놓여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죄악을 원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발타사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조건 없이 사랑하시지만, 이 사랑에 직면한 인간이 이유 없이 거부한다고 자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죄는 성령 안에서 이뤄지는 성부와 성자의 거룩한 분리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거룩한 분리에서 모든 죄가 회복되고 극복될 수 있다. 그러니까 창조와 구원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둔다. 여기에서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을 엿볼 수 있다. 창조가 십자가 사건에서 완성되고 그 충만한 의미를 지닌다면, 창조는 십자가 표지 아래 있다. 이것은 구원 사건이 근본적으로 창조와 더불어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 계획돼 있다는 것을 뜻한다. 세상에 파견돼 인류를 구원한 성자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이미 성부의 뜻을 성령 안에서 실행하려 준비하고 계신다. 하느님에게 구원은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계획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발타사르는 예수님께서 세상이 창조 이전에 이미 살해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인간은 창조된 존재이기 이전에 먼저 구원된 존재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김선태 신부(전주교구 화산동본당 주임, 신학박사)조은일2013.07.30
![[가톨릭 문화산책]<24> 건축(5) 포털, 영광의 주님께서 들어가시는 문](//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1362_1.2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건축(5) 포털, 영광의 주님께서 들어가시는 문 누구나 들어오라 초대하는 주님의 집 '하늘나라의 문' 1285년에 지어진 프랑스의 부르주(Bourges)대성당 정면에 있는 5개의 문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광장과 도시를 압도한다. 이 문은 영광의 주님께서 들어가시는 문이다. 이 문은 시편에 나오는 그대로 '머리를 들고 있는 문'이며 '일어서 있는 문'이다. 그래서 이 문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향해 언제나 웅장하게 노래하고 있는 문이다. 헨델의 메시아 33번 합창곡은 이렇게 노래한다.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 누가 영광의 임금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께서 영광의 임금이시다"(시편 23,9-10). 이 메시아 33번곡을 들으며 이 대성당의 장대한 문을 바라보라. 그러면 저 문의 수많은 돌들이 소리 내며 우리와 함께 찬미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문은 사람들을 그 안에 있는 세계로 이끌어준다. 또 자신의 과거를 단절하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라고 재촉한다. 이렇게 문은 그 안에 있는 세계를 확정해준다. 문은 건물의 맨 앞에서 사람을 반기며 때로는 닫고 거절한다. 그리고 문은 안에 있던 이가 밖을 향해 출발을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다. 문은 건물의 안팎을 이렇게 이어준다. 사람이 사는 집의 대문은 방문과 달리 더 높고 크게 만드는 법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집인 성당의 문은 어떠해야 하겠는가?대성당처럼 중요한 건물의 웅장한 정문을 특별히 '포털'(portal)이라고 부른다. 포털이라 하면 천상과 지상의 이미지가 조각된 중세 대성당의 포털을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로 건물 전체의 의미가 응축되는 특별한 장소였다. 성당의 포털은 단순히 벽을 뚫어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를 건축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심히 생각하면 성당의 문을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으로만 여기기 쉽지만, 실은 그 문은 주님께서 들어가시는 문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문이시다. "나는 문이다"(요한 10,9). 포털은 이렇게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성당의 포털에 들어서는 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것 안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 때문에 어떠한 성당의 문도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숭고한 생각을 보여주는 상징이며, 그 의미가 지니는 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팀파눔에 많은 조각으로 장식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은 외관이 매우 간소했고, 르네상스나 종교개혁 시대의 외관에는 엄숙하면서도 침착한 건축 요소가 많이 사용됐다. 그러나 중세의 대성당에서는 실로 장려한 조각으로 그리스도교의 과거와 미래를 세상을 향해 있는 포털에 응축해 새겼다. 중세에서 회화와 조각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이들을 위해 대신 성경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당의 포털은 바깥 광장에 접해 있고 사람의 눈높이에 가까이 있으며, 성당에 들어가거나 그 앞을 지나갈 때 이 수많은 조각을 되풀이해 볼 수 있는 최적의 자리였다. 포털의 조각 모티프로는 십자가, 천사, 성인, 식물,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장면 등이 사용됐다. 이와 같이 성당의 포털은 '하늘나라의 문'이었고,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요약하고 있는 책의 표지와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포털이 한 개였지만 내부 통로의 수에 대응해 3개로 늘어났으며 때로는 5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베네치아의 산마르코성당처럼 본래 통로가 셋이었는데 후에 나르텍스가 확장되면서 포털이 두 개가 된 예외도 있다. 그렇지만 성당의 규모와 관계없이 신자들은 가운데로 들어가지 않고 측면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았다. 돌로 지어진 성당에서는 문을 만들려면 벽의 일부를 떼어내야 했다. 이 때문에 아무리 작은 성당이라도 문을 만들 때에는 건물의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설계했다. 문은 인방이라는 수평 부재와 이를 받치는 두 개의 기둥으로 구성된다. 로마네스크나 고딕 대성당의 문에서는 여러 개의 문설주가 뒤로 차례로 물러나며 문의 양쪽에 붙는다. 그 문설주 위로는 다시 여러 겹의 장식 아치가 뒤로 물러나며 얹힌다. 이 때문에 실제로 드나드는 문보다 훨씬 큰 문으로 확장돼 보이는 효과를 얻는다. 이 장식 아치가 뒤로 물러나며 많은 겹을 이룰수록 성당의 벽 두께가 두껍고 견고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면 문 위의 긴 인방과 장식 아치 사이에 반원형이 생기는데, 이 부분을 팀파눔(tympanum, 프랑스어로는 tympan : 탱팡)이라 부른다. 이 말은 라틴어로 '큰 북'이라는 뜻이다. 눈에 띄는 장소에 있기 때문에 팀파눔에는 많은 조각이 장식된다. 정면의 한가운데에 있는 주 포털의 팀파눔 안에는 영광의 그리스도, 최후의 심판자 그리스도가, 좌우 포털의 팀파눔에는 그리스도의 탄생 등이 새겨지기도 했다. 성당의 포털은 하늘나라의 문이므로 후광으로 둘러싸인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가기에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여기에서 판정한다. 일반적으로 고딕 성당에서는 구조적 이유로 문과 문 가운데에 기둥 한 개를 더 두는데, 이를 '가운데 기둥'(트뤼모, trumeau)이라고 한다. 독일 쾰른대성당의 가운데 기둥인 트뤼모에는 성모자상이 놓여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는 순례길의 중요한 장소였던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므와삭(Moissac)의 생 피에르 수도원 성당 문에는 로마네스크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일컫는 장엄한 조각이 있다. 성당 입구의 팀파눔 중앙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어좌에 앉으신 모습이 한층 높고 크게 조각돼 있다. 그 옆에는 네 복음사가가 날개가 있는 인간(마태오), 사자(마르코), 황소(루카), 독수리(요한)로 묘사돼 있으며, 주변에는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3단으로 앉아 있다. 요한묵시록 4장의 말씀이 돌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대성당 앞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은 마을과 도시 사람들이 모이는 일상의 장소여서, 이 장대한 문들은 성당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들에게도 늘 말을 건넨다. 더욱이 깊이가 있고 수많은 조각이 새겨져 있는 대성당의 남북 문 주변은 무대와 같은 공간이었다. 11세기에는 연극이 회중석에서 공연되기도 했지만, 실제로 문 주변에서 성사극(聖史劇)이 상연됐으며 음유시인들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교회의 앞 광장은 극장이 됐고, 장대한 포털은 그 연극의 무대 배경이 됐다.프랑스 부르주대성당(1285년). 정면의 5개 문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광장과 도시를 압도한다. #장대한 포털은 사라지고 전통만 남아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장대한 포털은 사라졌지만 그 전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도미니쿠스 뵘이 설계한 노이 울름(Neu-Ulm)의 성 요한 세례자성당(1927년)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근대 성당의 걸작이다. 전쟁으로 파괴된 울름 성채에서 나온 돌을 사용해 세워진 이 성당의 긴 정면에는 3개의 높은 아치의 포르티코가 겹쳐 있다. 붉은 벽돌 띠가 포르티코의 아치 위를 지나게 해 아치 형태를 더욱 뚜렷하게 했다. 성당에 들어가는 5개의 문 중에서 3개의 문은 높은 아치로 된 포르티코 안에 있다. 아치 한가운데는 요한 세례자, 좌우에는 성녀 엘리사벳과 밤베르크의 성 오토를 두었다. 로마네스크적 포털을 근대적으로 번안한 탁월한 설계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당은 중세 대성당의 포털을 가질 정도의 규모가 전혀 못 되고, 대지의 제한이 많아서 정면에 이러한 문을 만들기조차 어렵다. 그래서인가, 이와는 달리 루돌프 쉬바르츠가 설계한 성 안나성당(1956년)은 규모도 크고 그 주변이 제법 넓은데도 딱히 정면이랄 것이 없다. 성당 전체의 크기에 비하면 문이 아주 작아서, 잘 모르면 성당 주변을 한 바퀴 돌아야 찾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시대의 성당 문이다. 일상의 다른 건물과 다를 바가 없는 작은 문, 그렇지만 누구나 들어오라고 초대하는 겸손한 문이며, 지나가는 이에게 묵묵히 말을 건네는 문이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 자주 보는 가난한 자, 헐벗은 자의 모습으로 이 문으로 걸어 들어오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 크기로 작아진 문,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라는 말씀을 공간과 형태로 잘 구현한 '문이신 주님'을 겸손하게 만들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 문은 조용히, 그렇지만 중세의 장대한 포털 못지않게, 우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그곳에 늘 서 있게 될 것이다.김광현(안드레아, 건축가,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조은일2013.07.02
![[가톨릭 문화산책]<14> 건축(3) 회중석, 하느님 백성의 자리](//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9868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건축(3) 회중석, 하느님 백성의 자리 하느님 말씀 듣고 성체 모시려 하느님 백성이 머무는 공간 주님께서는 언덕 위에서 가르치셨고 배 위에서 가르치셨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그분을 둘러쌌다. 그들은 적당한 장소를 찾아 앉거나 서서 마음을 다하며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런 모습을 그대로 성당이라는 건축 안에 넣어본다. 그러면 신자들이 앉는 회중석이 어떤 것인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회중석이란 제대를 둘러싸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을 모시며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가 거행되는 동안 하느님 백성이 머무는 장소다. 미사를 드리는 공동체는 사제가 입당하면 일어서고 참회하기 위해 서 있고, 독서를 듣기 위해 앉았다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기 전 다시 일어서고 때로는 무릎을 꿇기도 하면서 몸으로 전례에 동참한다. 그러니 회중석은 신자가 편히 앉는 좌석이 배열된 전용공간 같은 것이 아니다. 성당의 회중석은 제단이라는 거룩한 공간과 구별되면서도 이 제단과 하나가 되도록 느끼는 하느님 백성의 자리다. 오늘날의 제단과 회중석은 각각 구약의 성전을 이루는 지성소와 성소의 위치에 있었다. 회중석은 예비신자 교리는 받고 있으나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이들이 있는 입구 가까운 곳의 나르텍스(narthex)와 제단 사이의, 신자들이 앉게 되는 공간을 가리킨다. 영어로 '네이브(nave)'라 하는데, 이것은 '배'라는 의미의 라틴어 '나비스(navis)'에서 유래한 건축 용어다. 본래 전용 건물이 없었던 교회는 공공 집회를 위해 넓은 내부 공간을 가졌던 고대 로마의 바실리카(basilica)를 성당 건축에 응용했다. 고대 로마의 바실리카에서는 긴 변의 한가운데에 입구를 두었는데, 교회는 반대로 짧은 변에 입구를 두고 내부의 긴 방향을 바라보게 했다. 이 간단한 차이는 그야말로 근본적인 변화를 줬다. 이때부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내부는 마치 배와 같은 구조처럼 보였고, 저 끝에 보이는 둥근 방은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앉으신 자리라고 여기게 됐다. 이렇게 하여 평면은 배 모양이 됐고, 그 이후에 생긴 볼트 천장으로 성당 내부는 더욱 배의 용골 모양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회중석이 왜 '배'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교회가 무질서하게 소용돌이치는 물 위에 떠 있는 노아의 방주로 비유됐고, 회중석에 앉은 사람들을 세상의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의 여정을 떠나는 이들로 비유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당의 평면 모양은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축약한 그림과도 같았다. 회중석을 지나가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인생을 여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아직 이 'nave'에 대한 번역어가 정해져 있지 못하다. 건축에서는 nave를 흔히 '신랑(身廊)'이라는 일본식 번역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몸이라는 뜻을 담고는 있어도 '랑(廊)'은 채나 복도라는 뜻이 강해서 '배'의 의미를 담지 못한다. 가톨릭사전에는 nave를 '신도석'이라고 적고 있지만 이보다는 '신자석'이 더 맞는 말이다.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 모이는 모든 이를 '전례 회중'(liturgical assembly)이라고 한다. 회중이 평신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에는 '함께 모여서 미사를 드린다'는 뜻이 잘 나타나 있으므로 nave를 '회중석(會衆席)'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성당의 평면이 긴 경우, 회중석은 긴 통로(aisle)로 나뉜다. 그러니까 회중석은 이 세 개의 통로 모두를 말한다. 그러나 성당이 세 부분으로 나뉘는 경우 흔히 가운데를 회중석(nave), 그 좌우를 '측랑(側廊)'이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표현이다. 가운데를 '중앙 통로(central aisle)', 그 좌우를 '측면 통로(side aisle)'라 부르는 것이 맞다. 평면이 기둥과 벽으로 몇 개로 나뉠지라도 그 전체가 회중석이다. 그런데 이 'aisle'을 번역할 말이 참 없다. 이것을 여기에서도 '통로'라고 번역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통로는 벽과 벽 사이를 말한다. 로마네스크나 고딕 성당에서 중앙 통로를 만드는 좌우의 벽을 높게 만들려고 아치로 이루어진 아케이드(arcade)를 제일 아래에 두고 그 위에 갤러리(gallery)를 두고, 다시 그 위에 세 잎처럼 생긴 트리폴리움(trifolium)을 얹기도 한다. 또 가장 위에는 측면 높은 곳에 낸 창(고창, clerestory)을 얹는다. 그러나 갤러리나 트리폴리움은 성당의 높이에 따라 모두 둘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 둘 수도 있다. 오래된 유럽의 성당에 들어가 보면 정성을 다해 아름답게 장식한 바닥을 볼 수 있다. 좌석이 고정돼 있는 오늘날의 회중석을 생각하면 어차피 의자에 가릴 바닥을 왜 그렇게 아름답게 장식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전에는 신자들이 미사를 드리는 동안 계속 서 있었고, 오래된 성당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보통 회중석에는 좌석을 두지 않고 빈 공간으로 뒀다. 회중석에 좌석이 놓이게 된 것은 중세 시기가 한참 지나서였다. 그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좌석이 마련돼 있지 않았으므로 평신도는 서 있었거나 요구가 있으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르 토로네 수도원 성당(프랑스 남부). 성당에 등받이가 없는 벤치를 놓게 된 것은 13세기부터였다. 신자들이 앉는 긴 자리는 개신교에서 긴 시간 설교를 듣게 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가톨릭 개혁에서 말씀 전례를 강조하게 된 이후에는 성당에도 이 긴 의자가 배열됐다. 16세기 후반에 가서야 등받이와 무릎틀도 생겼고 의자가 커지고 고정됐다. 그렇지만 이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회중석 옆에 앉는 여자들의 좌석은 의자가 낮고 무릎틀도 낮았다. 이러기까지 남자와 여자는 회중석에서 종종 나뉘어 있었다. 어떤 오래된 성당의 중앙 통로 좌우 벽에는 열주로 된 아케이드로 구분된 2층석이 있다. 이것은 마트로네오(matroneo)라고 하는 여성용 특별석으로, 남녀가 따로 미사를 드린 비잔틴 전통을 따른 것이다. 고딕 성당에서는 이것이 그 용도를 잃었지만, 동방교회에는 여자들이 때때로 회중석 위에 있는 기나이콘(gynaikon)이라 부르는 갤러리에 서 있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15세 이상의 여자들이 모여서 뜨개질을 하거나 옷을 짓던 '기나이콘'이라는 방에서 나온 것이다. 중세 가톨릭교회에서 흔히 여자들은 북쪽과 서쪽에, 남자들은 남쪽과 동쪽에 앉았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은 자들의 나라 하데스는 서쪽에 있고 이교도들은 북쪽에 있다고 보았고, 여자들이 믿음이 적은 이들을 이런 유혹에서 지켜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성당 정면에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드나들도록 문을 좌우에 두 개 더 두기도 했다. 요사이 이동하기 쉽게 하려고 회중석에 독립된 개인 의자를 두는 경우를 본다. 나무로 된 긴 의자는 무겁고 고정된 것이기는 해도 모인 이들이 '가족'이라는 이미지를 준다. 또 성당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함을 말해야 한다면 개인 의자는 극장 좌석을 연상하게 하므로 전례의 능동적 참여를 위해서는 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의자의 색깔이나 재질은 성당이라는 전체 공간의 바닥을 결정하는 것이므로 회중석의 의자는 세심하게 디자인돼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께서 교회를 먹이시는 주님의 식탁이 두 개가 있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하나는 제대이고 다른 하나는 독서대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강론을 하고 성경을 낭독하며 공지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회중석에 층계를 두고 높은 단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후에 강론대(pulpitum)와 독서대(ambo)가 됐다. 16세기 중엽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가톨릭에서는 회중석에서 보기 쉽고 말이 잘 들리도록 하기 위해 많은 강론대가 회중석 안으로 옮겨졌다. 이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성당 안에 있는 회중석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앉거나 서야 할까? 내가 본 가장 겸손한 회중석, 그것은 프랑스 남부 르 토로네 수도원 성당의 회중석이다. 앉아 보면 의자가 낮다. 주님 앞에서 조금이라도 나를 낮추기 위함이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 버린 겸손한 수도자의 마음이 이렇듯 의자라는 물체에 소박하게 표현돼 있다. 등받이도 없고 무릎틀도 없다. 무릎을 꿇으려면 딱딱한 돌바닥에 무릎을 대야 한다. 이런 의자에는 우리 성당에서 흔히 보는 긴 방석 같은 것이 놓일 여지가 없다.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주님의 몸을 모시고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가 조금 더 편한 의자에 앉아 무엇하랴? 이것이 우리가 앉고 서는 회중석의 본래 모습이다. 성당이라는 건축물은 바로 이런 우리 마음과 영성이 드러나는 곳이다. 김광현(안드레아, 건축가,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조은일2013.04.24

제46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전문(요약)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진리, 사랑, 정의로 사회가 새로워지도록 그리스도인이 나서자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태아를 비롯하여 가장 힘없는 이들의 생명권을 수호하지 않고서 어떻게 평화 실현이나 민족들의 온전한 발전, 환경보호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반문하며 생명을 침해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사진은 지난해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생명수호대행진에서 한 참가자가 십자가를 들고 있는 장면. 해마다 새해에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합니다. 이러한 기대를 품고, 저는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일치와 평화를 주시어 모든 이가 바라는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이 이뤄지기를 빕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인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을 확인하면 힘이 솟아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고 모든 이를 위한 평화 증진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는 세계화를 특징으로 하며, 유혈분쟁과 전쟁의 위협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이기적ㆍ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만연하면서 빚어진 긴장과 갈등의 온상들은 우리를 걱정스럽게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는 금융 자본주의에서도 드러납니다. 온갖 형태의 테러와 국제적 범죄 행위로 평화가 큰 위협을 받고 있으며, 종교의 참된 본질을 왜곡하는 근본주의와 광신주의도 평화에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평화를 이루려는 수많은 노력으로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올해 평화의 날 담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복음의 참 행복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 행복(마태 5,3-12; 루카 6,20-23 참조)은 약속들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참 행복은 약속에서 절정을 이루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참 행복은 단순한 도덕적 권고가 아닙니다. 오히려 참 행복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요구하는 것들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약속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세상 눈에는 하느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는 이들이 흔히 현실과 동떨어진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다음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서 언제나 그들 편이 돼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시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참 행복은 평화가 메시아의 선물이면서 인간 노력의 결실이라고 말해 줍니다. 평화는 서로에게 주는 선물의 열매입니다. 평화, 하느님 선물이며 인간 노력 결실 평화는 인격 전체와 관련되고 모든 인간의 참여를 요구합니다. 곧 반포 50주년을 맞는 회칙 「지상의 평화」에서 교황 요한 23세 복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평화는 무엇보다 진리, 자유, 사랑, 정의를 토대로 공존을 이루는 것입니다. 참다운 평화의 일꾼이 되려면, 초월적 차원에 관심을 갖고 아버지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평화를 부인하는 온갖 형태의 죄악들, 곧 이기주의와 폭력, 탐욕, 권력욕, 지배욕, 불용, 증오와 불의한 구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꿈이나 이상향이 아닙니다. 평화는 실현 가능합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의 이면을 더욱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됐고, 새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이바지하면서 성장해 나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새롭게 선포하는 일이 절실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평화와 더불어 민족들의 완전한 발전을 이루시는 으뜸가는 주역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평화, 우리의 정의, 우리의 화해이십니다(에페 2,14; 2코린 5,18 참조). 생명을 온전히 사랑하는 평화의 일꾼 공동선과 평화를 실현하는 길은 무엇보다도 임신[受精]에서부터 성장과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측면에서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충만한 생명은 평화의 정점입니다. 인간 생명의 가치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고, 이를 테면 낙태 자유화를 지지하는 자들은 자신이 거짓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실, 태아를 비롯해 가장 힘없는 이들의 생명권을 수호하지 않고서 어떻게 평화 실현이나 민족들의 온전한 발전, 환경보호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원칙은 신앙의 진리도 아니고 종교자유의 권리에 따른 귀결도 아닙니다. 이는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기에 온 인류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세계 평화와 관련되는 인간의 기본권 가운데 하나는 종교자유의 권리입니다. 소극적 관점에서, 한 사람이 종교를 선택할 자유와 관련해, 예를 들어, 의무나 제약 '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적극적 관점에서는 여러 가지로 '~할 자유'가 있습니다. 평화의 일꾼들은 급진적 경제 자유주의와 기술 관료주의의 이념들이 여론에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가장 큰 위협을 받고 있는 사회적 권리와 의무 가운데 하나가 노동의 권리입니다. 경제발전은 주로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에 달려 있다고 여겨 노동이 점점 경시되고 노동자의 법적 지위가 올바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인간 존엄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논리가 "모든 사람의 안정된 고용보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도록" 끊임없이 요구한다는 것을 재천명합니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한 가지 전제 조건은 새로운 노동관입니다. 이 선에 부응하는 것은 과감하고 혁신적인 노동정책을 요구할 의무와 권리입니다. 새로운 경제발전 모델을 통해 평화를 이룩하십시오 오늘날 많은 분야에서, 경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발전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연대를 통한 지속 가능한 통합적 발전과 공동선은 모두 재화와 가치에 대한 올바른 척도를 요구합니다. 그 척도는 하느님을 궁극적 준거로 삼고 있습니다. 최근 몇 십 년 동안의 지배적 경제 모델은 이윤과 소비 극대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지속적 성공은 우리 자신의 재능, 지적 능력, 진취적 정신을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경제분야에서, 특히 정부는 산업과 농업발전 정책을 표명해야 합니다. 또한 금융통화와 상업시장을 위한 윤리구조의 창출이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시장들은 안정돼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도록 더 많은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평화의 일꾼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각오로 재정위기보다 더 심각한 식량위기에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평화교육을 위한 가정과 단체 역할 평화의 일꾼들이 가정의 공동선과 사회정의를 위한 열정을 키우고, 효과적 사회교육에 헌신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거듭 강조합니다. 가정은 사람들이 성숙하도록 도와주고, 배려와 나눔을 통해 서로 풍요로운 성장을 하도록 북돋워 줍니다. 도덕과 신앙에 관한 자녀교육에서 부모의 권리와 그 일차적 역할이 지켜져야 합니다. 평화교육이라는 이 중대한 과업에 수도 공동체들도 특별한 방식으로 참여합니다. 교회는 새로운 복음화를 통해 이 커다란 책임을 함께 나눈다고 믿습니다. 이 복음화는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돌아가 개인과 사회가 정신적, 도덕적으로 새로 나는 것을 그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문화단체, 학교, 대학교는 평화를 위한 특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을 양성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 국제적 공공기관의 쇄신에도 중요한 공헌을 해야 합니다. 평화의 일꾼들을 위한 교육 결론적으로, 평화교육을 촉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평화를 이룩하는 일은 공동선 실현으로 이어지고, 평화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내며 평화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평화를 일구며, 단순한 관용보다는 선의를 지니고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용서에 대한 교육이 증진돼야 합니다. 이 세상 우상들이 내세우는 거짓 평화와 그에 따르는 위험을 거부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시어,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가져다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교황 요한 23세 복자와 더불어 우리도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모든 지도자들을 깨우쳐 주시어 그들이 자기 민족의 정당한 행복을 돌보며 평화의 고귀한 선물을 보장하게 해주소서. 모든 민족이 그들을 갈라놓는 벽을 허물고 서로 사랑의 유대를 강화하며 자기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모든 민족이 형제애를 나누며 그들이 갈망하는 평화가 영원토록 꽃피고 언제나 평화가 그들을 다스리게 하소서. 이 기도로 저는 모든 이가 참다운 평화의 일꾼이 되어 인류 공동체에 형제적 화합과 번영과 평화가 넘치게 되기를 빕니다.바티칸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 조은일2012.12.25
가톨릭 신앙 안에 AI 활용 방안 모색수원교구 사제단, 교구청 직원 교육 한국 교회 안에서도 AI를 사제들의 사목과 직원들의 업무에 어떻게 적용할지 교육하고 나누는 자리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수원교구 홍보국은 3일 수원교구청에서 교구 사제단과 홍보국 직원 대상 ‘생성형 AI 활용’ 교육을 하고, AI가 가톨릭 신앙 안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모색했다. 교육은 디지털 프리스쿨 ‘에이블런’ 소속 김지아 강사가 ‘생성형 AI’의 개념 정리부터 ChatGPT 원리 및 활용법, 다양한 생성형 AI 소개·체험하기 등을 진행했다. 김 강사는 △종교 교육 및 콘텐츠 제작(강론 작성 보조, 신앙 교육자료 제작, 성경 요약 및 해설) △개인 신앙 생활 지원(성경 묵상 도우미, 개인 맞춤형 기도문 작성) △공동체 운영(공지 및 주보 자동 생성, 이메일·문자 자동화, 행사 기획 도우미) △선교 도구 활용(다국어 번역, SNS 콘텐츠 생성, 문화 콘텐츠 생성) 등 종교활동 안에서도 생성형 AI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신학적 오류 가능성과 신성·거룩함의 자동화 우려, 편향된 해석을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에 참석한 사제들은 ‘다양한 AI 툴’을 활용해 ‘회의록 요약 문서 작성, 이미지 생성, 특정 문서를 바탕으로 한 PPT 제작, 동영상 제작, 배경음악 제작’ 등을 해보며 높은 관심을 보이면서 “본당 사목, 특히 청소년 사목 부문에서 활용할 만한 부분이 많아 보인다”고 소감을 전했다. 교육에는 교구 사제단 20여 명이 참석했다. 가톨릭교회는 AI 기술의 잠재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을 중심에 둔 윤리적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2024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인공지능과 평화’에서 AI가 평화와 형제애·공동선의 도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이를 위한 국제적 협력과 윤리적 성찰을 촉구한 바 있다. 이상도 선임기자 raelly1@cpbc.co.kr이상도 선임2025.07.10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어머니’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교의사적 흐름 따라 제시한 마리아론 마리아와 교회 Ⅰ / 기스베르트 그레사케 신부 / 조한규 신부 옮김 /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0월은 묵주 기도 성월이다. 묵주 기도는 그리스도의 구세사적 업적을 성모님과 함께 관상하는 것이며, 성모님을 통해 그분의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다. 가톨릭교회에서 ‘마리아’만큼 자주 언급되는 주제도 드물다. 거의 모든 달에 성모님과 관련된 축일이나 기념일이 있을 정도다. 특히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마리아는 매우 중요한 분이다. 레지오 마리애 등의 성모 신심 단체가 활발하게 활동 중이고, 어느 성당이나 입구에 커다란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신자들의 집에도 십자가상과 함께 성모상을 모시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공격도 받는다. 하지만 많은 신앙인이 성모 마리아가 진정 누구시고, 어떤 분이기에 교회가 그토록 공경하고 자주 언급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2014년 독일에서 출간된 「마리아와 교회」는 그 해답을 입체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독일의 신학자 기스베르트 그레사케(1933~) 신부가 마리아에 관한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 교의사적 흐름을 구체적이고 포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가톨릭교회 내의 올바른 마리아론을 제시한다. 특히 초기 교회가 이해했던 마리아의 모습, 마리아의 삶과 신앙이 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 마리아론과 교회론의 관계를 바르게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서방에서도 어머니인 교회와 어머니인 마리아 사이의 매우 긴밀한 관계가 부각되었다. 서방에서는 교회가 신앙을 전달하면서 마리아가 낳은 그 ‘몸’의 지체, 즉 ‘온전한 그리스도’의 지체를 낳는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287쪽) 한글 번역본을 펴낸 서울대교구 조한규(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는 “교회는 마리아가 하느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분이기에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고백하고 동시에 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마리아가 있었다고 증언함으로써(참조: 요한 19,25)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가 됐다”며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라 말한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는 그리스도교가 자리매김하던 초기부터 서로 밀접한 관계였고, 따라서 초기 교회의 시작과 정착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리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며 “마리아에 대한 올바른 이해, 더 나아가 마리아론이 교회론에 어떤 영향과 결과를 미쳤는지를 이해한다면, 신학의 영역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앙의 영역도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전했다. 한글 번역본은 방대한 독일어 원서를 두 권으로 나누었다. 이번에 출간된 제1권은 총 7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은 성경에서 증언하는 마리아에 대해, 제2장은 초기 교회 교부들이 이해한 마리아에 대해, 제3장은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 제4장은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대해, 제5장은 마리아의 승천에 대해, 제6장은 지혜라는 개념을 통해 마리아를 바라보고, 마지막 제7장에서는 비가톨릭교회에서 바라보는 마리아에 대해 서술한다. 제2권은 2025년 2월 출간될 예정이다. 기스베르트 그레사케 신부는 독일 뮌스터대학교와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철학·신학·교회음악을 공부했고,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조한규 신부는 독일 본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15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신문취재팀 윤하정2024.10.08

GOP 철책서 건넨 성모님 상본, 택시 기사 품에서 다시 만났다[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믿음에 충성한 백인대장, 신치구 베르나르도 장군 - (3) 21사단 백두산성당 봉헌식을 주례한 김수환 추기경과 신치구(뒷줄 오른쪽). 대령으로 전방 GOP부대 지휘할 때 순찰하는 병사들에게 성모 상본 건네 비육사 출신 화려한 인맥 없이 장군 진급 교황청은 교황 기사 훈장 수여 김 추기경, ‘군종사의 전설’이라며 축하 1978년 광주 상무대에서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참모장을 지낼 때였다. 어느 날 시내에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백미러로 신치구 대령을 계속 보는 듯했다. “혹시 저 15사단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네, 그런데요?” “그럼, 1974년 당시 50연대장님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기사는 잠시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지갑에서 재빨리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귀퉁이가 다 닳은 작은 성모님 상본이었다. “제가 50연대에서 철책 근무를 할 때 연대장님께서 주신 상본입니다. 군 생활 동안 이 상본의 성모님이 제 어머니가 되어주셔서 두려움을 이기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저도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 택시 기사는 신 장군이 장병들에게 뿌렸던 신앙의 씨앗이 맺은 열매였다. 한국전쟁 후 38사단 동료들과(가운데). GOP(General Outpost)는 6·25전쟁 이후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남방한계선 철책을 따라 설치된 일반전초를 말한다. 이곳 근무 장병은 야간에 경계근무를 하기에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한다. 병사들은 실탄을 장전한 소총과 수류탄을 휴대한 채 생활하며 언제든 전투가 가능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등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았다. 1969년 한신 대장이 제1 야전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신앙의 전력화’를 위해 ‘전군 신자화 운동’을 주창하고 이를 전체 군대로 확산시키고 있었다. 군의 신앙 전력화와 신자화 운동은 휴전선 철책 경계를 담당하는 병사들에게는 특히 적극 권장되었다. 확고한 신앙은 유물론 공산주의에 맞서는 정신 무장이 되고, 각종 안전사고와 월북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GOP 근무에 투입되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수계나 세례를 주기 위해 군종 스님, 목사, 신부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양적인 팽창을 우선시하다 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1974년 2월 말 토요일 오후 400여 명의 장병을 대상으로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사단장과 각 연대장 및 군인 가족 신자들과 서울에서 온 열심한 신자들, 군목과 민간 목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단상에서 세례식을 지켜보던 연대장 신치구 대령의 눈에 한 병사의 군복 상의 주머니에 십자 표시 배지가 두 개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세례식 후 그 병사를 불러 배지에 대해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예, 하나는 전에 세례받을 때 것이고 하나는 오늘 세례식에서 받은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도외시한 채 문제 사병의 선도와 사고 예방 등 군의 안전을 위한 현실적인 목적으로 접근한 ‘전군 신자화’는 부대 내 각 종교의 세례자 수를 합하면 전체 부대원 숫자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결과를 내기도 하였다. 신앙은 어떤 명분이든 세속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신치구 대령은 제대로 된 군인 신자 양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1975년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30명의 병사가 천주교 신자로 탄생했을 때 그는 마치 한 부대를 얻은 것 같았다. 50연대 군종 사제들과 수도자와 함께 한 신치구 대령(오른쪽에서 네 번째). 신치구 대령은 전방 GOP부대를 지휘할 때마다 신부님과 수녀님의 부대 방문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들은 매번 기도서와 빵과 음료수를 한가득 싣고 나타나셨는데 특히 정명조 아우구스티노 군종신부(후에 초대 군종교구장 주교)가 챙겨온 성모님 상본 1000매는 그 역할을 제대로 했다. 철책선을 따라 야간 순찰에 나섰을 때 신 대령은 병사들에게 상본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고향의 어머니 대신 하늘의 어머니가 너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이 상본을 잘 간직하도록!” 그때 상본을 받은 장병 중에 천주교를 알게 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가 99보병여단장으로 경기도 서해안 경계를 담당하고 있었을 때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근무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가까운 왕림본당의 수녀들에게 야간 초소 위문을 요청했다. 수녀들이 기꺼이 해안선 초소 위문에 나섰는데 병사들은 환호하며 반가워하였다. 11월 겨울 밤바람을 뚫고 따뜻한 호빵을 준비해온 수녀님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남양만의 해안선을 다 돌았다. 그가 부임하는 부대에 종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근처 본당의 신부와 수녀들이 기꺼이 달려와 봉사를 해주었다. 또 본당 행사가 있을 때는 부대에서도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부대와 인근 본당 사이에 일종의 자매결연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신치구 장군의 이·취임식 같은 경우에는 부대 행사와 천주교 행사가 구분이 안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신치구는 1978년 1월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51년 군 입대 후 25년 6개월 만에 마침내 별을 달게 되었다. 신치구 장군은 장성 진급 축하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단 별은 하느님께서 달아주신 별입니다!” 사실 그는 육사 출신도 아니고 어디 내세울 만한 화려한 인맥도, 정치적 연줄도 없었다. 오로지 그가 믿는 가장 든든한 ‘빽’은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에 대한 굳센 믿음 하나로 험난하지만 바른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온 것이다. 5사단 참모들과 기념촬영한 신치구.(뒷줄 오른쪽) 소장으로 진급한 1983년에 그는 아주 특별한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 기사 훈장을 받게 된 것이었다. 교황청은 신치구 베르나르도가 군 입대 이후 소속 부대의 가톨릭 장교단에서 보인 열성적인 활동과, 군부대 내 성당 건립과 군인 세례자 배가운동을 위해 애쓰고, 군종단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공로를 인정해 훈장을 수여한다고 하였다. 한국군 장교로서는 신치구가 최초로 받은 훈장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때 축하 인사에서 “신치구 장군은 군종 사목에 각별한 지원을 해줘 살아있는 군종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종 사제들 사이에서 그는 군종사의 전설로 통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군종 신부는 전쟁 중인 1951년 2월 군종 제1기 신부 11명으로 탄생했으며, 6·25전쟁 동안 40명이 전선에서 사목하였다. 그 후 각 교구 사제의 10%를 군종 신부로 파견하기로 하면서 1978년 4월 총 10명의 신부가 군종사관 후보생으로 입교하였는데, 제2대 군종교구장과 의정부교구장에 오른 이기헌 주교도 그중에 있었다. 신치구 장군은 군 생활 동안 도합 27명의 군종 사제와 함께했다. 소위 시절부터 장군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군종 사제의 업무를 돕기 위해 실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으며, 신학생 병사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폈다. 그가 군 현장에서 군종 신부를 도운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했다. 하느님 백성을 돌보고자 나선 사제가 그 직무를 잘 수행하도록 보조하는 일은 평신도 신자로서 마땅한 임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80년 3월 광주교구의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99보병여단장 신치구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처럼 신심이 깊은 사람이오.” <계속> 권은정 (유스티나 루이제, 작가, 전문 인터뷰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cpbc2026.08.12

믿음과 사랑 속에 그리스도인의 참삶을 살아야[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3)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신앙 고백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랑과 믿음의 참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콘스탄츠의 마스터 하인리히, ‘예수님 품에 기대어 쉬고 있는 요한 사도’, 14세기 초반, 목재,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벨기에. 신약 성경은 사도 시대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 나름으로 해석해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이단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자들로 인해 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오고 있습니다.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도 이러한 배경에서 쓰였습니다. 요한의 서간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이단을 퍼뜨리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 4,3; 2요한 7), ‘거짓 예언자’(1요한 4,1), ‘거짓말쟁이’(1요한 2,22), ‘속이는 자’(2요한 7)라고 규정합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일원이었으나(1요한 2,19) 이젠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교리를 퍼뜨려(2요한 10) 믿음을 충실히 지키는 신자들을 탈선시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1요한 2,26; 3,7) 요한의 서간들은 이들이 세상에서 나와 이 세상에만 속한 자들로서(1요한 4,5) ‘사람을 속이는 영’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고 비난합니다.(1요한 4,6) 교회를 위협하는 이들은 신비주의에 빠진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뵙고(1요한 3,6; 3요한 11), 그분과 일치를 이루며 살고 있으며(1요한 2,3), 빛 속에 있기에(1요한 2,9) 하느님을 완전히 안다(1요한 2,4)고 자처합니다. 이는 교회 가르침에 명백히 반대되는 주장이며 행위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강생을 부인하면서(1요한 4,2; 2요한 7)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며(1요한 2,22) 하느님의 아드님도 아니라고 가르칩니다.(1요한 4,15) 그러면서 자기들은 죄가 없다(1요한 1,8. 10)며 계명(1요한 2,4)과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1요한 2,9) 요한의 서간들은 영지주의자들을 경계하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1요한 2,2; 4,2; 2요한 7)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처음에 받은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할 것을 권면합니다.(1요한 1,1; 2,7; 3,11; 2요한 5.6) 그래서 요한의 첫째 서간은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5,13)라고 밝힙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Ιωαννη Α·Β·Γ’(요안네 알파·베타·감마),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Ioannis Ⅰ·Ⅱ·Ⅲ’,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동일 인물이 요한의 세 서간을 썼다고 봅니다. 세 서간의 문체나 담긴 가르침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 이 서간들을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요한 2·3서는 글쓴이 자신을 단지 ‘원로’라고 밝힐 뿐입니다. 그리고 요한 1서에선 글쓴이 자신을 ‘예수님을 직접 뵌 목격 증인’(1,1-3; 4,14)이라고 소개합니다. 오늘날까지 교회의 전승은 요한 사도가 이 서간들을 썼다고 합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이하 요한 1서)은 총 5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 서간의 핵심 주제는 ‘하느님과의 친교’입니다. 요한 1서는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기준을 세 단계로 제시합니다. 첫째 단계는 ‘죄를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1,5─2,28)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는 하느님의 빛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우선 죄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고, 그리스도의 적이 나타나고 항구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2,29─4,6) 하느님 아드님의 모범을 따라 의로움을 실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따라 영을 식별합니다. 셋째 단계는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4,7─5,12)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내려와 믿음 안에 뿌리를 내립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은 사랑의 뿌리입니다. 요한 1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4,8)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신약 성경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 줌과 동시에 친교이며 나눔입니다.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을 하나로 결합시킬 뿐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도 하나가 됩니다. 요한의 둘째 서간(이하 요한 2서)은 12절, 요한의 셋째 서간(이하 요한 3서)은 13절로 구성돼 있습니다. 요한 2서는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리셨고 또 교회 안에서 처음부터 전해 온 계명의 빛을 받으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며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는 요한 1서의 주제와 같은 내용입니다. 요한 3서 역시 진리에 따른 삶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는 자들의 자세와 대비되는 것이라며 선교사들에게 협조할 것을 당부합니다. 이처럼 요한의 서간들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참삶을 제시합니다. 이 참삶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삶입니다. 이 친교의 삶은 사랑의 실천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참삶의 기준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이는 성령을 알아볼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서간들은 모든 희망을 그리스도께 걸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분열하는 신앙의 위기가 닥쳤을 때 죄를 끊어버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증인이 될 것임을 선언한 세례 때의 신앙 고백을 충실하게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4.10.16

조정래 신부가 들려주는 묵주기도의 참의미한 사제의 묵주 기도 / 조정래 신부 /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한 사제의 묵주 기도 / 조정래 신부 /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심순화 작가의 한복 입은 성모님 그림 수록 출간 기념 염미숙 작가 전시회 9일까지 개최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조정래 신부가 「성모님과 함께하는 한 사제의 묵주 기도」를 펴냈다. 묵주기도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기도 가운데 하나다. 갓 세례를 받은 새내기 신자부터 레지오 마리애 단원, 성직자나 수도자까지 모두에게 보편적이면서도 의미를 지니는 특별한 기도다. 다양한 형태로 묵주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신자도 많다. 그에 반해 묵주기도의 의미와 바치는 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묵주 알을 굴리면서도 분심으로 자책한 경험은 다들 있을 것이다. 조 신부는 “그것도 시간과 마음을 봉헌하는 소중한 기도지만, 묵주기도는 단순히 정해진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을 넘어 예수님 탄생부터 수난·죽음·부활 그리고 영광에 이르는 구원 신비를 성모님의 눈을 통해 깊이 헤아리는 기도”라고 설명했다.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예수님 생애를 깊이 묵상하고, 성모님의 모범을 따르며 전구를 청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책은 먼저 묵주기도, 즉 로사리오의 뜻과 바치는 방법을 소개한다. 이어 각 신비, 각 단에 대한 조 신부의 묵상과 기도가 그림과 함께 펼쳐진다.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한국적인 모습의 성모님과 예수님, 천사들의 모습은 심순화(가타리나) 작가의 작품이다. “주님, 비록 잘 준비된 그럴듯한 장소와 사람이 아니더라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함께하신다면 그 모든 부족함마저도 귀하고 훌륭하게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듣게 하소서.”(환희의 신비 3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중) 조 신부는 “순례의 여정에 긴 시간 계속 묵주기도를 드렸고 그때 떠오른 묵상들을 정리해 보았다”며 “묵상인지 상상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생각인지 구별하기는 힘들지만, 나름대로 각 신비의 한 단, 한 단마다 어떤 묵상을 해야 할지, 무슨 마음을 가져야 할지, 또 어떤 기도를 드리고 어떤 결심을 해야 할지 함께 나누고자 한다”고 전했다. 출간을 기념해 9일까지 서울 중구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옥 지하 1층 역사전시실에서 전시회도 열린다. 로사리오의 신비를 화폭에 담은 염미숙(마리스텔라) 작가의 작품을 책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염 작가는 “바다의 별 성모님을 중심에 두고 환희·빛·고통·영광의 신비를 표현했다”며 “시각적인 작품을 통해 기도의 신비가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5.12.31

맛과 멋[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윌리엄 홀먼 헌트 작, ‘세상의 빛’ 1851~1853년 소문난 식당을 검색하여 줄을 서서 대기하면서까지 ‘먹고 싶게 만드는 맛’, 노을과 석양을 무대로 펼쳐진 장관을 관망하려고 일출·일몰 시각에 방문하는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보고 싶게 만드는 멋’이 있다. 적당한 양념을 배합한 조리 방식이, 적절한 조명을 지원한 관찰 각도가 맛과 멋을 돋운다. ‘맛’있는 음식, ‘멋’있는 풍경은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한다. 맛과 멋은 사치와 허영의 영역이 아니라 활력과 행복의 일부다. 일반적으로 음식과 경치에 적용되는 맛과 멋은 인간관계를 포함한 사회생활 전반에 반영될 수 있다. ‘맛’없는 관계는 지속되지 않으며, ‘멋’없는 모임과 조직에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 이 맛과 멋을 대표하는 주제어가 바로 소금과 빛이다. ‘맛’ 내는 양념의 기본은 ‘소금’이다. 양념 이외에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는 소금은 세상 시작부터 존재하였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바다’(창세 1,10 참조)를 기점으로 소금은 피조물 ‘내부에’ 포함되어 있다. 생명체의 필수 구성 성분인 염분의 적정량을 조절함으로써 생명이 유지된다. 하느님은 ‘안에 있는 소금’(세상의 소금)으로 창조된 생명을 유지한다. ‘멋’ 내는 조명의 본질은 ‘빛’이다. 조명 이외에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는 빛은 세상 시작부터 존재하였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빛’(창세 1,3 참조)은 피조물 ‘외부에’ 위치하면서 사물을 비추고 사물을 통해 반사된다. 생명체의 성장과 생활에 필수 요소인 빛은 강약을 조절함으로써 생명을 보호한다. 하느님은 ‘밖에 있는 빛’(세상의 빛)으로 창조된 생명을 보존한다.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마태 5,13), “세상의 빛”(마태 5,14)을 각인시키는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라는 소명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에 앞서 소금과 빛은 ‘우리 안팎에서 이미 존재하는 하느님’, 곧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 소금’, ‘우리 밖에 빛’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느님을 소개한다. 주 식재료 ‘안에’ 숨은 양념과 주 풍경 ‘밖에’ 숨은 조명이 맛과 멋을 내듯, 하느님은 ‘숨어 있는 방식으로’(마태 6,6 참조) 인생의 맛과 멋을 선사한다. ‘제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함지 속에 놓인 등불’은 하느님이 전달하는 맛과 멋을 외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금과 빛은 두 가지의 공통분모를 가진다. 하나는 고정된 형체를 취하지 않는 특성이다. 소금은 고체 형질로부터 변형하여 녹음으로써, 빛은 발광체로부터 분산하여 비춤으로써 자기 역할을 실현한다. 다른 하나는 균형 잡힌 정량으로 작용하는 특성이다. 소금과 빛이 과도하거나 부족하면 양념과 조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소금과 빛처럼 하느님은 ‘보이지 않게’(없는 듯이 있게), ‘적은 양으로도 깊고 세련되게’ 맛과 멋을 선사한다. ‘우리 안에 소금’처럼 있는 하느님을 통해 ‘사는 맛’이, ‘우리 밖에 빛’처럼 있는 하느님을 통해 ‘사는 멋’이 구현되면 좋겠다. 이 맛과 멋의 체험이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생명’(1요한 4,16 참조)이다.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cpbc2026.02.04

육군 중장 예편 후 고위직 마다하고 피정길에 올랐다[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믿음에 충성한 백인대장, 신치구 베르나르도 장군 - (4) 1987년 12월 29일에 열린 전역식 행사장에 나란히 앉은 신치구 장군과 부인 백옥현(로사) 여사. 36년 군 생활 마치고 차관 지낸 뒤 공직서 완전히 물러나 교리신학원 청강생으로 2년 개근 꿈꾸던 공소회장의 길 좌절되자 번역·저술 작업하며 본당서 봉사 북한선교위원회 후원회장 맡아 활동 “연구소 만들어보라”는 신부 제안에 가톨릭 신앙생활연구소 설립 준비 신치구는 1987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스무 살 청춘에 참전용사로 시작하여 36년간의 군 생활을 훌륭하게 마치고 군문을 떠나던 날 그는 개인적인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임시장교로 시작했다가 점차 군인을 나의 천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주신 직업이라 생각하며 이 직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군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조금도 후회가 없고 오히려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예편과 동시에 그는 국방부 차관으로 취임하여 1년간을 봉직한 다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차관직을 그만둘 무렵 그는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좋은 자리로 옮겨갈 수 있었다. 당시 여당의 국정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니 가만히 있어도 국영기업체 사장 자리 정도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낙하산 인사로 얻게 되는 자리를 사양했다. 가까운 지인들조차 권유했지만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평생 군인으로만 산 사람이다. 그 분야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는가. 마치 일반 회사원에게 군대 지휘를 맡기려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신앙인 신치구 장군의 진면목이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에 더 확실히 드러났다고 말한다. 그는 그 전에 누렸던 지위와 영광에 일체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는 보통의 겸손한 가톨릭 신자로서 오로지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하고자 했다. 신치구는 육군 교육사령관을 마지막으로 군을 떠났다. 1987년 12월, 신치구 장군을 위한 전역미사가 50여 명의 사제 공동집전으로 봉헌됐다. 자연인으로서 첫 번째 행보를 보더라도 그랬다. 차관직에서 물러난 바로 그날 오후 신치구는 피정센터 ‘수원 말씀의 집’에 단출한 짐가방을 내려놓았다. 그곳에서 열흘을 보내고, 이어서 ‘왜관 베네딕도 피정의 집’으로 옮겨가 근 한 달 동안 긴 피정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홀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지면서 인생의 세 번째 단계,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일에 봉사하는 일을 설계하고자 한 것이다. 신치구 장군의 이어지는 행보는 빈틈이 없어 보였다. 피정을 마치는 대로 바로 혜화동의 교리신학원에 청강생으로 등록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봉사활동을 하게 되든지 간에 먼저 성경과 교리에 대해서 공부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 과목 청강생으로 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수업에 출석했다. 1990년 말에 있었던 졸업식 때 그는 수료증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교리신학원 공부를 마치는 대로 고향으로 내려가 공소회장으로 살고자 했었다. 예편 직후 그는 고향의 적당한 마을을 정해 집을 지었다. 25평짜리 집칸은 양쪽에 방을 두고 중간에 대청마루를 깔았다. 이웃들과 친교를 나누며 동네 사람들을 하느님 백성으로 인도하며 사는 삶을 꿈꾸었다. 사실 젊은 날 전방 시절부터 그의 집은 언제나 공소와 같았다. 단칸방의 가난한 군인 살림이었지만 가톨릭 공동체로서는 한없이 풍성한 곳이었다. 쌀이 몹시 귀하던 때, 주일마다 모이는 신학생 병사들과 군종신부들을 위해 세끼 밥상을 차리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신 장군의 부인 백옥현(로사, 89)씨는 그 시절이 천국 같았다고 말한다. 신 장군의 공소회장의 꿈은 김천 지역의 정치인이 그의 낙향을 극구 반대하고 나서면서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1990년 12월 가톨릭 교리신학원 졸업사진. 맨 뒷줄 가운데가 신치구. 그 다음 그는 번역과 저술 작업을 시작했다. 신학생 병사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양덕배 신부의 권유로 일본어판 「마리아의 복음」을 읽게 되면서 처음으로 번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그에게 일본어는 낯설지 않았고 그는 평소 종교서적을 늘 탐독해 오던 터였다. 「성모의 생애」 번역 작업에 매달리고 있었는데 그 즈음 그의 모습은 매우 놀라운 변모였던 게 틀림없었다. 전철역에서 교정원고지를 들고 있던 그를 만난 옛 군대 동료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신형, 오랜만이오! 그런데 어찌 된 일이오?” 동료의 눈에는 낡은 가방을 둘러메고 운동화를 신은 신 장군의 차림이 무슨 사업에 실패한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던 옛 부하는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주시라고도 했다. 대부분 사람들의 눈에는 신 장군의 행동이 세상 물정에 어둡고 답답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속적인 잣대에 흔들리지 않았고 초탈한 자세로 오로지 신앙생활에 충실하게 사는 삶에서 큰 만족을 느꼈다. 1991년에 나온 「성모의 생애」는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고, 이어서 「나자렛의 요셉」의 역서도 출판했다. 그가 직접 지은 책으로는 「12사도의 생애」가 있다. 그는 살아가면서 예수님 가까이에 있던 인물들을 탐구해 보고자 하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좀 더 잘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온전히 신앙생활에 몰입하게 된 그는 당연히 본당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오랜 세월 교적을 두었던 가락동 본당에서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사목회 회장직을 맡았으며 성체분배자와 복사로도 활동하였다. 1992년 6월 명동대성당에서 북한선교위원회 ‘침묵의 교회’를 위한 바자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홍성철 전 장관, 함제도 신부, 신치구, 김수환 추기경, 이동호 아빠스,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 김영자 수녀. 또 이때 한국 주교회의의 상임위원회인 ‘북한선교위원회’ 후원회장직도 기꺼이 맡아서 일했다. 이제 그의 호칭은 ‘신 장군’에서 ‘신 회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평생 전방 너머로 바라보던 북한 지역 선교를 위해 일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위원회 활동을 하던 때 중국의 연길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길림성 장춘시 소팔가자 성당에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 건립을 위한 준비와 옛 함흥교구 소속 본당 실태를 파악하여 필요한 지원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만난 중국인 신부가 새벽녘에 신자들이 씻을 물을 준비해 주었는데 그곳 신자들은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던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 1991년 말, 당시 교리신학원장이던 유병일 신부가 신치구 회장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베르나르도 회장님, 교회를 위해 연구소를 하나 만들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유 신부는 교회 내 연구기관들이 대부분 성서학이나 영성신학, 신심에 대한 연구에 치중하고 있으니 이와는 차별화된 연구소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신자들의 신앙생활 상태를 확인하여, 이를 바탕으로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 정서에 맞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연구소의 목적이 될 것이었다. 평신도가 선뜻 나서기에 어려워 보였지만 그것이 바로 포인트였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신도가 먼저 세운 교회의 백성이야말로 교회의 중흥을 위해 나서는 데 가장 적격자일 수 있었다. 그날 밤부터 신 회장은 가톨릭 신앙생활연구소 설립을 위한 계획안의 틀을 잡기 시작했다. <계속> 권은정 (유스티나 루이제, 작가, 전문 인터뷰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cpbc2026.08.19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부활을 믿나이다[저는 믿나이다] (56·끝)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죽은 이들이 부활하여 심판받을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영광으로 충만한 새 하늘 새 땅이 열릴 것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 1536~1541년,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마지막 고백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경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삶에 대한 선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교회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내용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질타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12-14. 20) 예수님께서는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9) 죽은 이들은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요?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35-37.42. 52-53) 교회는 모두가 이해하도록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셨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루카 24,39)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로 돌아오셨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육신은 ‘영적인 몸’(1코린 15,44)으로,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필리 3,21 참조)(「가톨릭교회 교리서」 999)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살기’(2코린 5,8) 위하여 떠나야 한다. 죽음이라는 이 ‘떠남’에서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다. 그 영혼은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날 육체와 다시 합쳐질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05) 그러면 언제 죽은 이들이 부활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요한 6,39-40), “세상 끝 날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가톨릭교회는 모든 사람은 죽자마자 그 불멸의 영혼 안에서 산 이와 죽은 이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의 ‘개별 심판’으로 영원한 갚음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가는 연옥에서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지옥의 주된 고통은,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새겨야 할 교회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유 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 죽을 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만이 지옥에 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교회는 미사와 일상 기도를 통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2베드 3,9) 바라며 하느님의 자비를 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라고 신약 성경은 말합니다. 이날 모든 것이 변화할 것입니다. 모든 이가 부활할 뿐 아니라 교회 역시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이날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통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것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과 마찬가지로 “아멘”으로 끝맺습니다. 히브리말 ‘아멘’은 견고함, 신뢰, 성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멘’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과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의미합니다. “신경 끝의 ‘아멘’은 첫머리의 ‘저는 믿나이다’라고 하는 말마디를 되풀이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과 계명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무한한 사랑과 완전한 성실성의 ‘아멘’이신 분께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 때 ‘저는 믿나이다’라고 한 신앙 고백에 대한 ‘아멘’이 될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64) 부족한 긴 연재 글을 인내로이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신경은 여러분에게 거울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는다고 고백한 모든 것을 정말 여러분이 믿고 있는지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여러분의 믿음 안에서 기뻐하십시오.”(「설교집」 58,11,13) 리길재 전문 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12.17

요한 묵시록 (01)[월간 꿈CUM] 신약이 내게 말을 건네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Last Judgement), 프레스코화, 13.7×12.2m, 1534~1541년, 시스티나 성당, 로마 바티칸 Q. 묵시문학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1) 정의 : 묵시(默示)라는 말은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에서 유래된 것으로, ‘덮개를 벗김’ 또는 ‘숨은 것을 드러내 보임’을 뜻합니다. 묵시문학의 작품들은 세상 마지막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하느님 진노의 크신 날’을 기술하고 있으며, 이날을 묘사하는 문학적인 양식을 묵시문학이라고 부릅니다. 묵시문학 안에서 유다인들은 시대를 현세와 앞으로 다가올 세대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현세는 악으로 얼룩져 있어서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으며 개혁도 불가능한 세계이기에 오직 파괴와 소멸만이 이 세계의 운명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으로부터 마지막 세계를 기다리는 희망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세계는 하느님이 직접 다스리는 시대로 선과 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세상이며, 평화와 번영과 정의가 확립되는 세상으로서, 이곳에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지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세계는 오직 하느님께서 직접 이 세상의 사건에 개입하심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이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날, 곧 주님의 재림의 날은 악의 자식들에게는 공포와 파괴와 심판의 무서운 날이 될 것이지만, 주님의 자녀들에게는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꿈이 악의 자식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독특한 방법을 동원하여 글을 쓰게 되는 데, 이러한 문학 형태가 묵시문학입니다. 묵시문학은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에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2) 특성 ① 하느님의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선포하고 역사의 흐름 안에서 적용, 심화시키는 과정에서 상징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꿈, 천체전도, 동물, 숫자, 색채 등을 사용합니다. ②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항상 일인칭으로 말하지만, 자신의 본이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줄 수 없는 권위를 자신의 작품에 주기 위해서 구약의 유명한 예언자들의 이름(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또는 사도 베드로, 사도 바오로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저자의 메시지가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③ 이 시대가 끝나기 전에 내릴 재앙들을 열거, 때로는 종말이 오기 전에 예전에 없었던 고통의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다니 12,1) 요한 묵시록에서 언급한 일곱교회 중 하나인 티아티라 교회의 유적 Q. 요한 묵시록은 어떤 성경입니까? 많은 사람이 요한 묵시록을 두려움을 안겨 주는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희망을 안겨 주는 책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바로 환난과 박해 속에서 신음하며 외치는 교회 공동체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하느님의 대답입니다. 비록 박해로 점철된 순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때, 하느님의 시간, 하느님의 계획은 존재함을 알리는 성경입니다. Q.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요한이라 부릅니다.(1,1.4.9; 22,8) 이 요한은 교회 전승에 의하면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요한입니다. 2세기부터 이렇게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의 저자를 사도 요한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에는 문학작품을 과거의 중요한 인물에게 바치는 습관이 있었는데, 특히 묵시문학 작품을 쓸 때 그렇게 했습니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자기를 요한이라고 부르고 있을지라도 사도 요한은 아닐 것입니다. 저자는 달리 알려진 바 없는 ‘요한’이라는 이름의 ‘초기 그리스도교 예언자’라고 결론짓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Q. 요한 묵시록의 집필 시기는 언제입니까? 요한 묵시록은 황제인 자기를 세상의 ‘주인’으로 가르치며 강요했던 로마 황제 도미시아누스 통치 말년, 즉 서기 90년부터 100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주임을 지냈다.2025.10.23

160여 개국 누빈 ‘지구별 순례자’ “여행만큼 좋은 ‘인간 수업’은 없다”‘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탄생 100주년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찬삼 선생의 기획전이 영종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다. 40년간 지구 32바퀴 이동한 세계 여행가 1958년 여행 시작으로 지구 곳곳 방문해 갖은 위기 속 국적·인종 초월한 호의 경험 세계에 한국을, 한국에 세계를 전하다 사진 슬라이드 10만 장 등 기록물 남겨 서적 100만 권 이상 판매·국민훈장 추서 지난해 우리나라 해외 여행객은 3000만 명에 육박했다. 지금 우리는 휴대전화 하나로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하고, 지구 곳곳을 누비는 여행 유튜버들도 셀 수 없다. 그보다 수십 년 앞서 배낭 하나 메고 세계로 나간 한국인이 있다. 여행을 ‘인간 수업’으로 여기고, 세계를 ‘인류 공동체’로 바라본 이, ‘한국 세계 여행의 선구자’ 김찬삼(토마스, 1926~2003) 선생이다. 그가 처음 세계 여행에 나선 때는 1958년. 한국전쟁의 폐허가 채 복구되지 않았고 해외 여행 자유화는 30여 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던 시절이다. 지리학자이자 교사였던 그는 40여 년 동안 총 3회 세계 일주와 20여 회 세계 여행을 통해 160여 개국을 방문했다. 순수 여행 기간만 14년, 이동 거리는 지구 32바퀴에 이른다. 낯선 땅에서 자신보다 더 큰 곤궁 속에 사는 사람을 만났고, 국적과 인종을 넘어 건네는 호의를 경험했다. 김 선생은 자신이 보고 듣고 기록한 세계를 책·사진·강연을 통해 우리 사회와 나눴고, 이는 많은 이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 됐다. 올해는 김찬삼 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여행이 일상이 된 시대, 한국인의 세계 여행에 길을 낸 ‘세계의 나그네’가 남긴 발자국을 다시 따라가 본다. 1959년 알래스카 포인트 배로에서 아이들과 찍은 사진. 유서 써놓고 떠난 세계 여행 김 선생이 세계 여행을 꿈꾸게 된 데에는 14살 때 세상을 떠난 형의 영향이 컸다. 자전거 여행 중 사고로 떠난 형의 유품에서 “언젠가 남미의 안데스 고원을 헤매고 아프리카를 넘으리라”는 글을 발견했다. 그는 형의 꿈을 대신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동방견문록」도 소년의 마음에 세계를 심었다. 그는 “마르코 폴로가 서방에서 동방으로 왔다면 나는 동에서 서로 가겠다”고 꿈꿨다. 그러나 꿈만으로 세계에 나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는 우선 세계 여행을 위한 관문으로 미국 유학을 택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교(SFSU) 대학원 지리학과에서 수학할 때 정원을 돌보고 항공사 기내 청소 등을 하며 경비를 모았다. 그렇게 1958년 제1차 세계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페루 안데스 고원을 밟으며 형의 소원을 이뤘다. 그의 여행 원칙은 분명했다. 떠나기 전 현지 지리와 국제 정세를 공부하고 최신 지도와 카메라를 준비했다. 교통편은 가능한 한 가장 싼 것을 택했고 화려한 복장을 피했다. 호텔보다 여행자 숙소를 찾고 식사는 전통시장에서 해결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피곤해도 잠들기 전에는 그날의 여행 상황과 지출을 기록하고 이동 경로를 지도에 표시했다. 김찬삼 선생의 일기. 매일의 여행 기록을 빠짐없이 남겼다. 또 하나의 원칙은 ‘위급할수록 미소를 잃지 않는다’였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통하지 않으면 웃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준 최상의 의사소통 수단은 미소”라고 했다. 하지만 여행은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비자 문제로 국경에서 발이 묶이기도 하고,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나마 필름은 구두 속에 숨겨놓아 건질 수 있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자고, 숲에서 길을 잃어 굶주리기도 했다. 아마존에서는 현지인들과 어울리기 위해 쥐고기까지 먹었다.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 유서까지 써놓았다. 그렇게 목숨 걸고 세계를 걸은 끝에 그는 ‘사람’을 발견했다. 제1차 세계 여행을 마친 그는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은 분명 사랑에 굶주리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길 위에서 몸으로 얻은 결론을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넓고 사람들의 마음씨는 아름답다.” 그는 “인간 수업에 있어서 여행처럼 좋은 것이 없다”고 했다. 자연을 바라보면서는 ‘위대한 성경’이라고 했다. 김찬삼 선생의 딸 김서라 이사장이 부친의 수많은 상패가 전시된 거실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아버지 김찬삼은 김 선생의 1남 6녀 중 셋째 딸 김찬삼세계여행문화협회 김서라(요안나, 73) 이사장의 어린 시절 기억에는 아버지의 긴 ‘부재’가 자리한다. 한 번 여행을 떠나면 몇 년씩 집을 비웠다. 그 자리는 어머니와 조부모가 채웠다. 그런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김 선생은 귀국한 뒤 방학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국내 곳곳을 여행했다. 가족 여행에서도 그는 ‘지리 선생님’이었다. 석탑 하나를 봐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한참 설명한 뒤에는 자녀들에게 질문했다.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는 ‘시험’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김 이사장도 훗날 교사가 돼 39년 동안 교단에 섰다. 세월이 흘러 김 선생의 강연과 책을 접한 뒤 외교관 꿈을 키우고 세계로 나갔다는 이들이 김 이사장을 찾아왔다. 자신을 ‘자전거 김찬삼’·‘자동차 김찬삼’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김찬삼 선생이 세계여행 중 찍은 슬라이드 필름. 김 이사장은 본지와의 만남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의 업적이 크게 느껴진다”며 “아버지를 기억하는 세대가 사라지기 전에 이들의 증언을 기록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김찬삼이라는 이름이 낯설어진 30~40년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겨진 기록도 방대하다. 김 선생이 세계 곳곳에서 촬영한 슬라이드만 10만 장에 이른다. 개인 여행 기록을 넘어 세계의 모습과 한국인 시선이 담긴 시대 기록이다. 지도·일기·원고·사진 등 자료도 방대하다. 여행 중 집으로 보낸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도 1000권이 넘는다. 김 이사장은 “무엇보다 이 자료들을 디지털화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김찬삼 여행박물관’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63년 가봉 랑바레네에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찍은 사진. 수많은 독자·청중에 전한 여행 이야기 김 선생은 세계를 ‘인류 공동체’로 바라봤다.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고, 동시에 자신이 직접 본 세계를 한국인들에게 보여줬다. 세계로 멀리 나갈수록 조국에 대한 애정은 더 커졌다. 그때마다 한국의 아름다운 풍속을 담은 사진과 교육용 슬라이드를 챙겼다. 해외 언론과 만나면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의 변화상을 설명했고, 애국가와 아리랑을 소개했다. 1963년 제2차 세계 여행 중에는 아프리카 가봉에서 그가 가장 동경하던 노벨상 수상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보름 동안 함께 지냈다. 김 선생의 집필실 책상 벽면에는 지금도 슈바이처 박사와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그가 세계 곳곳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는 책과 강연을 통해 수많은 독자와 청중에게 전해졌다. 전 10권으로 출간된 「김찬삼의 세계 여행」은 100만 권 이상 판매됐다. 1980년대 후반까지도 가정 방문 판매의 대표 서적이었다. 훗날 사람들이 그를 진정한 외교관이라 평가하는 이유다. 선종 5년 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 받았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찬삼 선생의 기획전이 영종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다. 여행가에서 ‘김찬삼 토마스’로 여행과 집필, 강연으로 평생 분주하게 살아온 그는 말년에 아내 고 정안순(루실라) 여사와 함께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했다. 김 이사장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장면은 손을 잡고 새벽 미사에 가던 부모의 모습이다. 거동이 불편해진 뒤에는 김 이사장이 부모를 차로 성당에 모셨다. 미사가 끝나면 어머니는 성체조배실에 남았다. 언제나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한 어머니다. 아버지는 비뚤어진 성당 의자를 정리하고 쓰레기도 주웠다. 평생 지구 곳곳의 길을 걸었던 여행가는 병상에 눕기 전까지 그렇게 성당 의자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김 선생을 병간호하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 선생도 6개월 뒤인 2003년 7월 2일 눈을 감았다. 다음 날인 7월 3일은 그의 세례명 성 토마스 축일이었다. 김 이사장은 “말년에 보속과 같은 아버지의 신앙생활이 하늘에 닿은 것 같이 느껴졌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는 김찬삼 선생이 꿈꾸던 것보다 훨씬 쉽게 세계로 나간다. 여행가들의 넘쳐나는 영상을 보며 낯선 도시의 골목과 음식까지 손바닥 안에서 만난다. 그러나 여행의 목적을 ‘인간 수업’이라 부르며 낯선 이들과 직접 눈을 맞추고 세계를 바라본 그의 삶은 오히려 지금 여행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제시해준다. 탄생 100년, 잊혀가던 ‘세계의 나그네’가 우리 앞에 남긴 말이다. “세계는 넓고 사람들의 마음씨는 아름답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박민규2026.09.16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투사 “예수님 따르는 구도자로 살겠다” 결심[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도시 빈민의 대부, 제정구 바오로 - (2) 민주투사의 회심 제정구(오른쪽)와 정일우 신부. 교련 반대 시위로 수배·도피하다 제적 청계천 판자촌 교회서 야학교사 활동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 형 받고 투옥 옥에서 하느님 섭리 깨닫고 성경 통독 아내와 함께 정일우 신부에게 세례받아 서울대 문리대 1급 데모꾼 “군사독재를 막지 못하면 조국의 주인이 아닌 이방인이 될 겁니다.” 나는 동기들보다 나이가 든 탓에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해 만기제대한 후 1971년에 복학했다. 이 무렵 군사독재 정권은 교련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해 군국주의를 강화하고자 했다. 나는 교련 반대 시위의 연사로 자주 나선 탓에 문리대의 1급 데모꾼으로 낙인찍혔다.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해 서울의 10개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군인을 주둔시키는 한편, 데모 가담자들을 잡아들였다. 나 역시 수배돼 도피하다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이듬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석 달 동안 구금당했다가 무사히 풀려났지만, 곧바로 ‘문제아 길들이기’ 코스에 붙들려가 3박 4일간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러나 억울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원망하거나 앙심을 품지도 않았다. 그간 내가 휘둘렀던 주먹다짐을 고스란히 되돌려받는 것이라 여겼다. 못된 싸움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이들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1973년 3월에 복적됐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급기야 1974년 4월에 민청학련사건이 터져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제적·구속됐다. 중앙정보부로 이송돼 무자비한 구타와 잠을 재우지 않는 살인적 고문을 당했다. 일주일간 모든 것을 다 털린 후에야 구치소로 갈 수 있었다. 동지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참담함과 부끄러움에 몸부림쳤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 이름을 외우지 않게 됐다. 마침내 형이 선고되던 날, 내 목소리가 재판정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재판장님과 마찬가지로 밥 굶고 발 부르터가며 애국했는데, 왜 이 자리에 서 있는 겁니까? 제가 죽어서 나라가 잘되리라 생각하시면 사형에 처해주십시오. 기꺼이 죽겠습니다.” 파월장병 출신인 삼성장군 재판장은 내게 15년 형을 선고했다. 골목대장 날건달이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투사로 공인된 날이었다. 서울대 캠퍼스에서 학우들과 시국을 논의하는 제정구(오른쪽에서 두번째). 청계천 판자촌 야학교사 나는 개신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캠퍼스에는 최루탄과 돌멩이가 교차하고 있는데, 개신교 서클은 이웃을 사랑하라며 태평스럽게 전교했다. 나는 엄중한 현실에 무감각한 개신교인들이 소인배적인 야바위꾼으로 보였다. 그러던 차에 나 대신 어머니가 경찰서에 연행돼 고초를 겪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동생 정무가 다니던 복음교회의 장성환 목사가 많이 위로해줬다. 이후 그와 사회 현실을 토론하면서 예수쟁이에 대한 혐오가 점차 사라졌다. 그는 내게 청계천 송정동 판자촌의 활빈교회 야학교사를 권했다. 나는 그곳에서 김진홍 목사를 만나 더럽고 낮은 곳에 있는 청계천의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라고 느꼈다. 1973년 초 활빈교회로 이사한 후 그에게 세례받았다. 인생을 바꾼 정일우 신부와의 만남 그해 말, 내 일생을 바꿔놓은 일이 벌어졌다. 미국인 신부가 청계천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유창한 한국말로 자신을 정일우(John V. Daly, S.J.)라고 소개한 그는 1960년에 예수회 신학생으로 한국에 와서 3년간 실습한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66년에 사제품을 받았다고 했다. 이듬해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서강대에서 철학을, 예수회 신학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다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 달간 청계천 체험을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번듯한 예수회 신부이자 대학교수가 왜 판자촌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인의 동정심이거나 객기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하느님의 섭리였던가. 당장 그가 묵을 곳이 없어 내가 기거하던 기도실에서 함께 지내야만 했다. 아홉 살 연상인 그와 마음이 통했다. 그는 사흘 뒤에 방을 얻어 나갔는데, 그때부터는 내가 그의 작은 방에 가서 함께 지내는 날이 많았다. 1974년 1월에 김 목사가 긴급조치 반대 성명서 사건으로 체포되자 불똥이 내게 튀었다. 체포조가 활빈교회에 들이닥쳤다. 나는 속옷 바람으로 답십리까지 달아나 정일우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나를 서강대 사제관에 숨겨주었다. 그때 책상 앞에 걸려있던 십자가가 눈에 띄었다. 교회에서 보던 밋밋한 모양이 아니라 실제 예수님이 매달려있는 십자가였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벌어진 양손과 한데 모은 발에는 못이 박혔으며, 병사가 창으로 찔러서 죽음을 확인했다는 옆구리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섬뜩했다. 1960년대 청계전 1973년 청계천 판자촌 모습. 수형생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간 시간 며칠 뒤 사제관에서 나왔지만, 결국 석 달 뒤에 민청학련사건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15년 형을 받고 교도소에 갇혀 육체와 정신이 무기력하게 파괴돼가던 어느 날이었다. 쥐 한 마리가 화장실 홈통을 타고 내 방에 나타났다. 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뭇등걸 같던 몸이 생명체를 발견한 기쁨에 꿈틀거렸다. 불현듯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광야에서 40여 년간 떠돌던 시련,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40일간 겪었던 고난이 선명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맞아! 하느님께서 나를 황량한 광야로 이끄신 거야. 역사 속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단련의 시간으로 말이야.’ 하느님의 인도로 판자촌에 들어갔고, 감옥에 갇혔다는 확신이 들었다. 광야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날부터 성경을 통독하기 시작했다.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던 날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날로 바뀌었다. 수형생활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 됐다. 나는 1975년 2월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예수님 음성 듣고 가톨릭으로 개종 출소한 직후 정 신부의 제안으로 치악산에서 열흘간 피정했다. 허름한 여인숙의 탁자 위에 놓인 십자고상이 촛불에 빛났다. 축 늘어진 예수님 모습은 섬뜩함이 아니라 애처로움으로 다가왔다. 가련한 그의 모습이 답답하게 보였다. 나는 수석 사제나 율법학자와 같이 그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아니, 도발해 그를 움직이고 싶었다. “당신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왜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겁니까?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이 썩어빠진 세상을 뒤엎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달란 말입니다.” 그때였다. 묵직한 음성이 방을 가득 채웠다. “나도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질 때까지 아버지께 청했다.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지.” 나는 급히 되물었다. “도대체 그 뜻이 뭔데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단 말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죄를 짓고 낙원에서 추방된 뒤 하늘 나라는 굳게 닫히고 말았다. 이제 내가 사람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가는 거야. 누구든 회개하고 나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거지. 그게 바로 아버지의 뜻이란다.” “⋯⋯.”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어엎어 달라는 건 가당치 않아.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거든. 내 제자가 되려면 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거라.” 내가 가야 할 길이 환히 보였다. 내 십자가를 지고 빈손으로 따르다 하나의 밀알로 죽는 길이었다. 지난날의 과오와 죄악이 낱낱이 떠올랐다. 옛일을 하나하나 곱씹고 통렬히 뉘우치며 가슴을 쳤다. 어느새 탁자 위에는 촛농이 수북이 쌓였고, 창밖은 훤해지고 있었다. 개종을 결심했다. 전에 받은 개신교 세례는 신앙적 결단이 아니라 그곳에 동화해야겠다는 조급증 때문이었다. 더욱이 청계천의 하느님을 통해 사회운동의 성과물을 내고 싶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이 앞섰다. 부끄러웠다. 1977년 1월에 아내와 함께 정 신부에게 세례받았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 동행하며 사람의 길을 발견하리라 다짐했다. 구도자로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무엘의 말을 읊조리며⋯.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 김문태 힐라리오 (한국평단협 수석부회장, 문학박사)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cpbc2025.12.16

사도들의 정통 신앙 계승한 교회의 아버지, 교부[저는 믿나이다] (35) 교부는 누구인가 교부들은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을 해설하고 정통 교리를 수호함으로써 교회 성장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베르니니 작 ‘사도좌’, 1657~1666년, 금도금 청동,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령 강림 후 성령으로 가득 찬 사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선포한 기쁜 소식에서 시작됩니다. 교회가 전하는 ‘사도들의 신앙’은 “성령께서 영감을 주신 성경 안에서, 교부들의 증언이 언제나 살아 있는 전통 안에서, 성령께서 도우시는 교회의 교도권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게 하시는 성사의 전례 안에서 말씀과 상징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성령께서 전구해 주시는 기도 안에서, 교회를 이루는 은사와 직무 안에서, 사도적 삶과 선교적 삶의 표징들 안에서, 성령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구원 사업을 계속하시는 성인들의 증거 안에서”(「가톨릭교회 교리서」 688) 계승되고 지켜지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어 땅 끝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뿐 아니라 많은 민족이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이에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이며 고대 교회 저술가인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다교 지역과 문화를 뛰어넘어 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당대 유행하던 헬레니즘 철학 사고 체계를 도입합니다. 이 과정에서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복음 내용(케리그마, Kerygma)이 ‘믿을 교의’(도그마, Dogma)로 발전하게 됩니다. 교부(敎父, Patres Ecclesiae, Father of the Church)는 문자 그대로 ‘교회의 아버지’를 뜻합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교회의 영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요. 일반적으로 교회의 영적 아버지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교부는 주교가 아니더라도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을 해설하고 정통 교리를 수호함으로써 교회 성장과 발전에 이바지한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스승으로 성경의 언어와 문화로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았던 신앙의 오랜 증인들입니다. 이들은 모진 박해와 세상 거짓에 맞서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며 복음의 진리와 거룩한 삶의 가치를 지켜낸 성인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백성을 섬기고 돌보는 일을 천직으로 여겼던 목자들입니다.(한국교부학연구회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머리말 참조) 고대 저술가들 가운데 ‘교부’로 인정받고 불리기 위해선 다음 네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첫째, ‘고대성’을 지녀야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일반적으로 첫 교부를 제4대 교황 클레멘스 1세(재위 88~97년)로, 마지막 교부를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650?~749?)으로 봅니다. 따라서 1세기 말 사도 시대 이후부터 7~8세기까지를 ‘교부 시대’라 합니다. 적어도 이 시기 안에 활동해야 교부의 자격이 됩니다. 둘째, ‘정통 교리’입니다. 그 가르침이 정통 교리에 부합해야만 합니다. 셋째, ‘생활과의 조화’입니다. 그 가르침이 실제 생활과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신앙과 생활이, 가르침과 삶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단에 빠지거나 윤리적으로 고결하지 못한 삶으로 추문을 일으킨 자는 교부라 불릴 수 없습니다. 넷째, ‘교회의 승인’입니다. 교회가 그를 교부로 선포하거나 그의 저서가 교회 문헌에 직접 인용돼야 합니다.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는 성 암브로시오(339~397)와 성 아우구스티노(354~430),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 예로니모(347~419), 그레고리오 대교황(540?~604)입니다. 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는 성 대 바실리오(329~379)와 성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329?~390?),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4/354?~407), 성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295?~373)입니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는 사도좌를 바치고 있는 네 교부의 청동상이 있습니다. 앞쪽은 서방 교회 교부를 대표하는 성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티노이며, 뒤쪽은 동방 교회 교부를 대표하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성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입니다. 동·서방 교부들이 사도좌를 받들고 있는 것은 성령 안에서 항상 일치를 이뤄야 한다는 교회 가르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교부들은 사도로부터 이어온 정통 신앙을 해설하고 수호하며 후대에 계승해 줌으로써 교회에 풍요로움을 더해 준 이들이라 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부들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겨 “거룩한 교부들은 이 성전(聖傳)이 살아 있음을 증언하고, 믿고 기도하는 교회의 관습과 생활 안으로 이 성전의 풍요로움이 흘러들어온다고 가르친다”고 밝힙니다.(「계시 헌장」 8) 따라서 교부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소중한 영적 자산이자 보화입니다. 특히 초기 교부들은 유다이즘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가현설, 영지주의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과 인성을 옹호하는데 크게 공헌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성경과 사도 전승으로 증명했을 뿐 아니라 신앙의 유산으로 계승하였습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07.09
![[금주의 성인] 다니엘 (7월 21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7/15/QSk1752562244664.jpg)
[금주의 성인] 다니엘 (7월 21일)연대 미상, 출생 및 선종지 미상, 예언자, 구약인물 다니엘 성인. 굿뉴스 다니엘서는 구약 성경 예언서로, ‘다니엘’이란 이름은 아람어와 히브리어에서 ‘하느님께서 판결(심판)하신다’ 또는 ‘하느님께서 바르게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서에 따르면, 다니엘은 유다 임금 여호야킴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 함께 갔습니다. 그는 네부카드네자르·벨사차르·다리우스·키루스 임금 치하에서 궁중의 조언자로 그리고 포로로 끌려 온 유다 민족을 위한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다니엘서를 포함해 구약 성경이 담고 있는 다니엘에 관한 내용은 다소 일관되지 못하고, 역사성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바빌론 유배 시대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서 형성된 상징적 인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징적 인물의 기원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다니엘서 저자가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모르나,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이란 뜻)에 속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사후(死後)의 상선벌악(賞善罰惡)과 육신의 부활에 대한 교의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표명한 것은 다니엘서 저자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 정부가 하수인을 만들기 위해 유다 왕족이나 귀족 자녀들을 모아 교육할 때, 그 대상자로 뽑힌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이름까지 바꾸며 강제로 바빌론 문화를 익혀야만 했습니다. 바빌론의 내시장은 다니엘과 세 명의 동료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다니엘은 벨트사차르라고 불렸습니다. 내시장은 그들을 임금의 시종으로 발탁했습니다. 다니엘은 나중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꿈을 정확히 해석해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그들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은 궁중에서 지내면서 율법에 어긋나는 부정한 음식과 술을 강요당한 것이었으나 다니엘은 내시장에게 간청해 슬기롭게 이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최대 시련은 임금이 금으로 만든 바빌로니아의 수호신, 마르두크 신상 앞에 절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이 명령을 따를 때, 다니엘과 동료는 결코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그들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세 젊은이는 가마 속에서 유유히 걸으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렸습니다. 임금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며 천사를 보내 당신의 종들을 몸소 구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세 젊은이에게 높은 벼슬을 내렸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7월 21일을 성 다니엘의 축일로 기념합니다.cpbc2025.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