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풀어낸 구원 역사[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38)역대기 역대기의 중심 사상은 유다 공동체 안에 펼쳐지는 이상적인 신정 왕국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만나기 위한 유일한 성소이다. 역대기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성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한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설치된 예루살렘 성전 모형. 역대기의 히브리어 성경 이름은 ‘디브레 하얌밈’입니다. 우리말로 ‘나날의 행적들’, ‘시대의 사건들’로 옮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은 디브레 하얌밈을 사무엘기와 열왕기를 보충하는 책으로 인식해 ‘파랄레이포메논’(Παραλειπομνων, 옆에 빼놓아둔 것, 곁들여 전해진 것, 간과된 것)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리고 본디 한 권이었던 디브레 하얌밈을 상ㆍ하권으로 나눴습니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 역시 칠십인역 목록 이름을 음역해 ‘파랄리포메논(Paralipomenon) ⅠㆍⅡ’라고 표기했습니다. 하지만 불가타 성경을 번역한 예로니모 성인은 이 책을 “하느님의 거룩한 역사 전체의 연대기”라고 설명했습니다. 한국 주교회의가 발행한 가톨릭 「성경」은 예로니모 성인의 제안에 따라 ‘역대기’(歷代記)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역대기는 본디 한 권의 책이었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역대기 하권 36장 22-23절과 에즈라기 1장 1-3절이 서로 겹쳐 ‘역대기-에즈라기-느헤미야기’를 하나로 묶을 수도 있습니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 역시 처음에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정경 안에서는 내용상 역대기가 에즈라-느헤미야기보다 앞서야 하지만 그 뒤에 편집돼 있습니다. 아마도 역대기가 에즈라, 느헤미야기보다 늦게 유다교 정경 안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구약 성경 역사서를 ‘신명기계 역사서’와 ‘역대기계 역사서’로 구분합니다. 이 둘 가운데 먼저 형성된 역사서가 신명기계 역사서입니다.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가 신명기계 역사서에 속합니다. 신명기계 역사서는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역사를 다룹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한 것은 임금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불충실했기 때문이며,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유배가 포로 생활을 하는 것은 그에 따른 징벌이라고 강조합니다. 역대기계 역사서는 신명기계 역사서보다 훨씬 더 늦은 시기에 쓰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기원전 330-250년 사이에 역대기계 역사서들이 쓰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역대기, 에즈라기, 느헤미야기가 역대기계 역사서에 속합니다. 이 책들은 모두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귀향한 후 쓰였습니다. 역대기계 역사서가 신명기계 역사서와 가장 차이를 보이는 것은 역사를 ‘아담부터’ 서술한다는 것입니다. 역대기계 역사서는 아담에서 시작해 바빌론 유배 이후 에즈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이 재건된 시대까지 유다인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대기는 ‘아담에서 다윗까지의 조상들 족보’(1역대 1─9장), ‘다윗 통치사’(1역대 10─29장), ‘솔로몬 통치사’(2역대 1─9장), ‘솔로몬 죽음부터 바빌론 유배와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직전에 이르는 유다 왕국사’(2역대 10─36장) 네 부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역대기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서술합니다. 그중에서도 다윗과 솔로몬의 이상적 통치를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역대기는 열왕기와 달리 다윗의 오점을 싣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른 모범적인 임금으로만 소개합니다. 이런 이유로 역대기는 다윗 왕조를 이어받지 못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역사를 취급하지 않습니다. 다윗 왕조만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왕조이며, 다윗의 후손만이 하느님 백성의 합법적인 임금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역대기는 다윗과 그의 후손들은 하느님을 대신해 주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대리자일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역대기는 또 솔로몬을 처음부터 다윗의 유일한 후계자로 선택된 인물로 소개합니다.(1역대 29,23-25) 더욱이 솔로몬은 다윗과 달리 평생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완전하고 충실한 삶을 산 임금으로 평가합니다. 또 솔로몬은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봉헌한 인물이고, 성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신앙 공동체로 결속시킨 인물이라고 합니다. 역대기는 다윗과 솔로몬 후계자들의 역사는 성전을 재건하고 경신례를 개혁한 임금들을 비중 있게 다룹니다. 아사(2역대 14ㅡ16장), 여호사팟(2역대 17ㅡ20장), 히즈키야(2역대 29ㅡ32장), 요시야(2역대 34ㅡ35장)가 그런 임금입니다. 역대기는 아울러 레위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입니다. 레위인들은 아론 집안 출신의 사제들이거나, 다른 집안으로서 레위 지파 출신의 레위인들입니다. 모세 오경 전체는 사제들에 관해 27번 언급하는 데 반해, 역대기는 76번이나 언급합니다. 역대기는 ‘예루살렘 성전’과 ‘경신례’를 중시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직접 당신이 머무를 장소로 선택하셨고(2역대 6,6), 이곳에 세워진 성전이 ‘하느님의 이름을 위한 집’(1역대 22,7)이며 ‘하느님의 성소’(1역대 22,19)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만나기 위한 유일한 성소이며, 그곳에서 거행되는 경신례는 유일한 공적 제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대기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성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합니다. 역대기의 중심 사상은 유다 공동체 안에 펼쳐지는 이상적인 신정 왕국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봉헌되는 유일하고 합법적인 경신례는 하느님 백성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임금이신 하느님께 충성과 기쁨, 찬양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일은 주님의 백성이 매일의 삶 안에서 지켜야 할 첫 번째 의무입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8.23
![[사도직 현장에서] 시골본당의 영성 생활](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2/27/4jB1709017064253.jpg)
[사도직 현장에서] 시골본당의 영성 생활 ‘교리 신학원이 시작됩니다. 통신 성경 공부를 지금 시작하세요.’ 교회 영성 프로그램 안내서가 본당으로 자주 온다. 처음에는 자주 홍보도 하고 주보 내용을 통해 공지했지만, 어느 순간 외면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평일 미사에 오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한두 시간을 나가서 수업을 들을까. 유튜브 링크 하나 걸어 보시라고 해도 찾기 힘든데 어떻게 통신 성경 공부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교회의 무수한 영성생활 중 어느 하나 접할 기회가 흔하지 않아 아쉬운 마음은 항상 있었다. 그래서 직접 시작해 보았다. 창세기와 탈출기 성경 공부, 성체조배회, 미사 영성 강의, 성무일도, 성지순례, 주일마다 피피티 작업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시도했다. 오기도 생겼다. 살림은 어렵지만 남의 집 자식들처럼 다해주고 싶은 아버지 마음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지치고, 교우 분들도 살짝 지친 것 같다. 농사일에 종일 바쁘고 지친 그들을 괜히 초짜 신부가 잡아두는 것만 같은 미안함이 들기 시작했고, 하나 둘씩 줄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작은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고해성사 내용이 깊어지고, 면담이 잦아지고, 개별 묵상 글들이 풍성해졌다. 농촌 사목의 아쉬운 점 하나는 교회의 보물인 다양한 영성에 대한 배움의 기회 부족이다. 그래도 요즘 어르신들은 유튜브를 자주 접하셔서 유명한 신부님 강의를 보거나, 교회 방송과 신문을 통해 읽을거리, 볼거리를 챙겨 보시기도 한다. 하지만 영성의 보물을 간직하고 사는 수도자들의 이야기를 접하기는 어렵다. 남들보다 8년 늦게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지금의 내가 있는 곳으로 이끌어준 계기는 창세기 성경 공부였다. 성경 공부를 하고 다시 창세기를 처음 읽었을 때 그 느낌은 지금도 강렬하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맙소사. 그분은 언제나 그곳에 계셨구나! 가톨릭 영성의 보화들이 더 많은 곳에서 울려 퍼지길 기도한다. 이선찬 신부 / 청주교구 학산본당 주임cpbc2024.04.03

배신자 유다와 그의 빈자리 채운 마티아[저는 믿나이다] (31) 유다 이스카리옷과 마티아 사도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의 삶이 그가 생각한 메시아의 상과 너무나 달라 주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겼다. 마티아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선출된 사도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지켜본 인물이다. (왼쪽)조토 작 ‘유다의 입맞춤’, 프레스코, 1303~1305, 이탈리아 파도바 스크로벤니 소성당. (오른쪽) 루벤스 작 ‘성 마티아 사도’, 유화, 1611,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유다 이스카리옷 유다 이스카리옷에 관해 신약 성경은 그가 열두 사도 중 한 명이었으나 예수님을 배신했고, 스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 외엔 어떠한 내용도 전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 복음서는 그를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6,17; 13,26)이라고 밝힙니다. 히브리말 ‘이스카리옷’은 ‘카리옷 사람’이란 뜻입니다. 카리옷은 구약 시대 유다 지파 땅 헤브론 인근에 위치한 ‘크리욧 헤츠론’(여호 15,25; 아모 2,2)을 일컫습니다. 이는 유다 이스카리옷이 갈릴래아 출신인 다른 사도들과 달리 유다 출신임을 알려줍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이스카리옷(Ισκαριώτης)을 헬라어 ‘시카리오스(σικαριοs)’의 변형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를 따르면 유다 이스카리옷은 우리말로 ‘단검으로 무장한 자객 유다’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이 말하던 이스카리옷은 열혈당 가운데에서도 가장 과격주의 분파였습니다. 그래서 유다 이스카리옷이 주님께 부르심을 받기 전에 로마 제국에 맞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무력 항쟁을 하던 열혈당원의 일원으로 자객 활동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스카리옷’을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요한 6,71; 12,4)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가 뭘까요? 복음서는 그가 예수님을 배신한 계기가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사건(마태 26,6-13; 마르 14,3-9; 요한 12,1-8)과 관련 있음을 말해줍니다. 공관 복음에서는 이 광경을 본 제자 몇몇이 “왜 저렇게 허투루 쓰는가?”라며 여인을 나무랍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주는 게 더 좋지 않으냐며 불평을 하지요. 그런데 요한 복음서에서는 오직 유다 이스카리옷만이 불평을 터뜨리죠.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면서요. 요한 복음서 저자는 유다 이스카리옷이 이렇게 불만을 표시한 것은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루살렘 수석 사제들을 찾아가 은돈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그렇다면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가 단지 돈 때문이었을까요? 그가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산헤드린으로 찾아가 받은 돈 전부를 내던지고 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아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대다수 신학자는 그가 예수님을 배신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 삶이 그가 기대한 메시아 상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세우실 하느님 나라가 지상의 왕국이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정말 열혈당원 자객 출신이었다면 당연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죽음과 관련해 마태오 복음서는 목매달아 죽었다(27,3-10)고 하는 반면, 사도행전은 예수님 몸값으로 받은 돈으로 밭을 산 뒤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내장이 모조리 쏟아져서 죽었다(1,15-20)고 합니다. 마티아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사도가 아닙니다. 그는 사도들이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뽑은 사도입니다. 헬라어 ‘마티아’는 히브리어 ‘마티티아’에서 나왔는데 우리말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마티아 사도는 사도행전에서 딱 두 번 나옵니다.(사도 1,13.26) 사도행전이 전하는 마티아 사도 선발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사도 1,15-26) 어느 날 120명가량 되는 형제가 모여 있을 때 베드로 사도가 일어나 유다 이스카리옷의 직책을 대신할 사도를 뽑자고 제안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사도를 뽑아야 한다”고 단서를 붙이지요.(사도 1,21-22) 이 제안에 따라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로도 불린 요셉과 마티아가 후보로 선발돼 기도한 후 제비를 뽑아 마티아를 사도로 선출합니다. 사도행전은 마티아 사도가 비록 처음부터 열두 사도에 속하진 않았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주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사도들과 줄곧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지켜본 인물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티아 사도는 유다 지파 출신으로 베들레헴의 지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사도로 뽑힌 후 그는 유다와 콜키스(지금의 그루지아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다 세바스토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전승은 그가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했고, 그에게 돌을 던진 유다인들은 죽은 마티아 사도의 목을 도끼로 내려쳤다고 합니다. 그의 유해는 헬레나 성녀에 의해 로마로 옮겨졌고, 이후 독일 트리어 베네딕도회 성 마티아스 수도원에 안장됐습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06.10

아브라함 (7) "전쟁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니?""가장 나쁜 것이요"[월간 꿈 CUM] 뿌리 _ 구약이 말을 건네다 (11)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 당신의 업적을 완성하시지만, 그 말씀의 실현은 인간이 처한 복잡한 삶의 아픔과 장애들과 함께 이어진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어리석음과 결함, 더 나아가 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은 실현을 이룬다. 전통적인 신학 안에서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복된 죄(Felix Culpa)라고 불러왔다. 성경은 상당 부분 이 복된 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결국 ‘죄’란 아름답게 그려질 수 없는 인간의 분명한 아픈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성경이 전하는 많은 이야기는 본디 우아할 수가 없다. 결국, 성경은 우아하셨던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모습을 내려놓으시고 진흙탕과도 같은 인간의 삶 안에 깊이 찾아오시어 선포되고 그 안에서 실현을 이루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가 거북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며 당황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건 그만큼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 안에 깊이 내려오셨다는 반증일 것이다. 우리 각자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고, 나 스스로도 바라보고 싶지 않은 어두운 내면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 스스로도 대면하기 어려울 수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어느 누가 찾아와 진지하게 바라봐 주었던가? 하느님의 말씀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 삶 안으로 찾아와 우리와 함께 벗하며 계신다. 좀 더 시선을 넓혀서, 우리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은 진흙탕과 같은 우리 인간사의 대표적인 이야기는 무엇일까?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함께 모여 보살핌을 받고 있는 곳에 찾아간 기자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전쟁이 무엇이라 생각하니?” “가장 나쁜 것이요.” 아브라함은 인간사에서 가장 나쁜 이야기,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하여 연약한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이 전쟁에 휘말린다. 이는 성경에 등장하는 첫 전쟁 이야기이다. “신아르 임금 아므라펠과 엘라사르 임금 아르욕과 엘람 임금 크도를라오메르와 고임 임금 티드알의 시대였다. 그들은 소돔 임금 베라, 고모라 임금 비르사, 아드마 임금 신압, 츠보임 임금 세므에베르, 벨라 곧 초아르 임금과 전쟁을 벌였다. … 그러자 적군들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모든 재물과 양식을 가지고 가 버렸다. 그들은 또한 소돔에 살고 있던 아브람의 조카 롯을 잡아가고 그의 재물도 가지고 가 버렸다.”(창세 14,1-12)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잡혀갔으며 그의 재산도 약탈당하였다. 아브라함은 즉시 롯을 구출하기 위한 행동에 돌입한다. 자신의 집에서 훈련받은 장정들을 이끌고 단까지 좇아가 그들을 치고 약탈당한 재물을 가져오며, 롯과 함께 부녀자들과 다른 이들도 데려온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말미에 소돔 임금을 상대로, 되찾은 재물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몫으로 그 어떤 것도 돌리지 않는다. 아브람이 소돔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신 주님께 내 손을 들어 맹세하오. 실오라기 하나라도 신발 끈 하나라도 그대의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소. 그러니 그대는 ‘내가 아브람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오.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소.”(창세 14,22-24) 권력과 소유욕으로 시작된 전쟁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관대함으로 막을 내린다. 아브라함은 이 덕목을 실현시키면서, 이 덕목의 원천이 하느님께 있음을 간접적으로 전해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신 주님께 내 손을 들어 맹세하오.” 아브라함은 전쟁에 승리하였지만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좀 더 가질 수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도 남겨두지 않았다. 죄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다. 전염병 확산과 전쟁, 기후위기가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거창한 방식을 전할 수 있겠지만, 아브라함은 욕심없음과 관대함을 전해준다. 우리의 죄를 복된 죄로 바꿀 수 있는 분은 하느님 이외에 없다. 이 안엔, 우리의 죄를 복된 죄로 바꿀 수 있는 우리의 노력도 필요하다. 바로, 욕심 없는 빈 마음과 내어주고 나눠주는 관대함일 것이다. 글 _ 오경택 신부 (안셀모, 춘천교구 성경 사목 담당 겸 교구장 비서)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예루살렘 프란치스칸 성서대학에서 성서 고고학 디플롬(diploma superiore)을 이수했다. 춘천교구 묵호, 퇴계 본당 주임을 지냈으며, 현재 교구장 비서 및 교구 성경 사목 담당 소임을 맞고 있다. cpbc2024.04.29

대립·분열 대신 화해·대화로 이루는 평화[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90) 좌(左)도 우(右)도 아닌 하느님 나라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께 행한 세 번째 유혹은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답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한 지인이 현 시국에 대해 걱정하면서 탄핵 정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 물으셨다. 옆에 있던 한 동료 사제가 답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계획하시는 대로 다 잘될 거라 확신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답변이었다. 현재 한국 사회는 극도의 분열과 갈등으로 갈라져 있고, 이는 고스란히 교회 안에도 자리하고 있다. 한편의 신자는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정치적·사회적 사안에 개입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편의 신자는 시국선언을 하는 사제단을 보며 교회를 떠날 결심을 하기도 한다. 지금 시국의 전개를 보고 교회는, 그리고 신자 개개인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 교회는 어떤 정당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공공연히 어느 정당을 추종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라는 기준 앞에서 교회는 지상의 정치적·사회적 사안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다. 신앙인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기준에 두고 그에 따라 신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기를 희망하며 복음을 위해 투신하는 사람이다. 만약 전자에 속한다면, 자신의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이 축구시합을 하는데, 가톨릭 쪽에서 골을 넣으니 관중석에서 예수님께서 환호하신다. 이어서 개신교가 골을 넣으니 예수님께서 또 환호하신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떤 관중이 “당신은 누구 편이요?”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둘 다입니다”라고 답하셨다. 그랬더니 그 관중이 하는 말. “흥, 무신론자로군!”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단 안에 오늘날 소위 극좌와 극우에 해당하는 사람을 모두 뽑으셨다. 세리도 있었고, 정치적 혁명을 꿈꾸던 이도 있었다. 그들이 한데 어우러져 공동체를 이루며 살도록 배려하셨다. 진정한 평화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채 나와 뜻을 같이 하는 나머지 사람들과만 이루는 것이 아니다. 나와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갈 때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적은 대화나 화해를 거부하고 대립과 분열을 선동하며 서로를 헐뜯고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기보다 화합과 일치를 외치며 그러한 화합과 일치의 삶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몸소 살아야 할 것이다. 탄핵심판 선고 결과가 나의 뜻에 반대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뜻을 잠시 접어두고 하느님 뜻이 어떤 것인지 헤아리며 하느님 나라 실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이다. 정의는 분명 이루어진다. 평화도 분명 실현될 것이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크신 계획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마주치는 시련은 마땅히 거쳐야 할 산고의 시간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회개란 그동안의 갈등과 분열, 미움과 증오의 관계를 청산하고, 우리 모두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임을 고백하며 화해와 일치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평화의 장인(匠人)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신앙인이 갈등과 분열을 넘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평화의 장인이 되어야 한다. 한민택 신부cpbc2025.03.11

하느님께 불충한 이들, 벌을 받다[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37) 열왕기 열왕기는 통일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멸망한 것은 임금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순종할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하예즈, ‘예루살렘 성전 파괴’, 1867, 유화, 갤러리에 델 아카데미아 베네치아. 열왕기의 히브리어 성경 이름은 ‘멜라킴’입니다. 우리말로 ‘왕들’이라는 뜻이죠. 열왕기는 사무엘기처럼 본디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옮긴 「칠십인역」 번역자들은 멜라킴을 사무엘기의 후편으로 여겨 사무엘기를 두 권으로 나눴던 것처럼 둘로 나눠 ‘바실레이온 감마’(Βασιλειων Γ, 제3왕국기), ‘바실레이온 델타’(Βασιλειων Δ, 제4왕국기)로 이름 지었습니다. 1열왕 1,1─2,46이 사무엘기 하권의 ‘다윗 왕위 계승’(2사무 9,1─20,26) 내용과 연결되고, 사무엘기와 열왕기 모두 연속되는 이스라엘의 왕조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칠십인역을 따르지 않고 ‘ⅠReges’(1열왕기) ‘ⅡReges’(2열왕기)라 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가톨릭 「성경」은 히브리어 타낙 성경과 라틴어 불가타 성경에 표현에 따라 ‘열왕기 상권’과 ‘열왕기 하권’으로 표기합니다. 열왕기는 기원전 970년 다윗의 재임 마지막 해부터 기원전 561년 여호야킨 임금이 바빌론 감옥에서 풀려난 사건까지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 임금들의 실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임금들이 어떻게 하느님께 불충했는지 이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벌하셨는지를 들려줍니다. 이 시기는 이탈리아에서 로마가, 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가 건국하고, 바빌로니아가 아시리아를 정복하던 격동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왕조 시기 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합니다. 통일 이스라엘은 기원전 932년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로 갈라집니다. 유다 왕국에서는 다윗 왕조의 승계를 유지하지만,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약 200년 동안 9번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그때마다 왕조가 바뀌는 혼란을 겪습니다. 그러다 기원전 722년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살만에세르 5세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백성들은 아시리아로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2열왕 17장) 남 왕국 유다는 기원전 587년 신바빌로니아 네부카드네자르의 군대에 짓밟혀 패망합니다. 예루살렘은 불탔고, 성전은 파괴됩니다. 다윗 왕조의 통치도 멈춥니다.(2열왕 25장) 그리고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살이를 합니다. 유다교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열왕기를 저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학자들의 일반 견해는 신명기계 역사서 편집자들이 열왕기를 최종 편집했다고 봅니다. 학자들은 기원전 561~538년 사이에 열왕기가 최종 편집됐으리라 추정합니다. 열왕기 마지막 부분인 2열왕 25,27에 네부카드네자르의 아들 에윌 므로닥이 바빌로니아 임금으로 등극하던 해(기원전 561년)에 유다 임금 여호야킨을 감옥에서 풀어줬다는 내용만 있지, 유배자들에게 예루살렘 귀환을 선포하는 키루스의 칙령(기원전 538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왕기 저자는 이 책의 편집을 위해 세 가지 사료, 곧 ‘솔로몬의 실록’(1열왕 11,41),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1열왕 14,19), ‘유다 임금들의 실록’(1열왕 14,29)을 사용했다고 밝힙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열왕기가 바빌론 유배 이전 요시야 임금 때 기록된 본문들(1열왕 8,8; 2열왕 8,22; 17,24-34)도 있지만, 많은 부분 바빌론 유배 후반기에 기록됐다고 주장합니다. 열왕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솔로몬 통치’(1열왕 1─11장), ‘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 멸망까지의 남북 두 왕국 역사’(1열왕 12장─2열왕 17장), ‘예루살렘 멸망까지의 남 왕국 역사’(2열왕 18─25장)입니다. 열왕기는 늙고 기운을 잃은 다윗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도니야가 다윗을 이을 야망에 불탔으나 동생 솔로몬이 궁정 음모를 통해 후계자가 됩니다.(1열왕 1,5-53) 이어 솔로몬의 치세는 그가 지은 죄들에 대한 부정적 기록으로 끝맺습니다.(1열왕 2장─11장) 이후 임금들의 실록이 이어집니다. 열왕기는 임금 대부분을 부정 평가합니다. 임금들에 대한 평가 기준은 히즈키야와 요시야 임금이 시행했던 종교 개혁 규정이었습니다. 곧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얼마나 충실했느냐에 따라 임금들을 평가했습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임금들 역사만을 전해주는 책이 아닙니다. 임금들과 함께했던 예언자들도 등장합니다. 나탄과 아히야, 엘리야, 엘리사, 미카야, 훌다가 그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이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할 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합니다.(1열왕 18,17-40; 2열왕 17,13) 또한 그들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을 선포합니다.(1열왕 14,7-11; 2열왕 22,16-17)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율법에 충실하라고 합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이 분열되고 멸망한 것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임금들이 바알을 숭배해 백성들은 하느님과 멀어지는 길로 이끌었기에 그 죄에 대한 벌로 나라가 망했다고 합니다. 열왕기는 임금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순종할 것을 호소합니다. 아울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올바로 섬기는 이들을 보호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8.16

스스로 영혼의 상처 보듬을 수 있는 영적 힘 길러야[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8. 상처와 치유 우리는 살면서 상처받곤 한다. 인간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 연약한 영혼을 가진 존재다. 연약한 영혼에 가해진 상처는 치료를 통해 낫는 육체의 상처와는 달리 항상 흔적을 남기며, 영적으로 약해질 때마다 다시금 도져 괴로움과 아픔을 주곤 한다. 이는 우리가 경험의 존재임과 동시에 자기의 고유한 경험과 그 기억을 통해 비로소 자기가 된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는 「고백록」에서 인간의 영혼을 고유한 경험이 저장된 ‘기억의 창고’라 부른다. 그에게 고백은 기억을 떠올림이요, 기억은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경험과 기억이 영혼에 영원한 흔적을 남기는 상처로 얼룩져 있다면, 과연 우리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의 관점에서 이런 상처를 치유하는 힘은 오로지 하느님 사랑에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의 상처는 부정적 경험에서 비롯되며, 그 원인은 실로 다양하다. 그런데 부정적 경험의 무수한 원인 가운데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홀로 서지 못함’이다. 우리는 홀로 서지 못한 채 항상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며, 끊임없이 타인을 욕망한다. 왜 우리는 홀로서지 못하고 타인을 욕망하는 것일까? 플라톤(Platon)은 「향연」에서 타인을 욕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에로스(eros)의 기원에서 찾는다. 이 기원에 따르면 인간의 성은 본래 남·여 둘만이 아니라 남녀추니(hermaphrodite)를 합해 셋이었으며, 지금의 인간 둘이 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힘과 자만심에 신과 맞섰고, 이를 참지 못한 제우스가 인간을 반으로 잘라놓았다. 그때부터 반으로 잘린 인간은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하며 한 몸이 되기만을 열망했다는 이야기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 성경의 창세기 2장에도 있다. 하느님께서 처음 아담을 창조하시고, 홀로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아 그의 갈빗대를 빼내어 협력자인 하와를 만드셨다는 이야기다. 하나로 붙어 있다가 둘로 갈라졌든 혹은 애당초 하나였다가 둘로 갈라졌든 두 이야기의 핵심은 타인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소외에 관한 것이다. 욕망은 생물학적인 본능적 욕구와 구별되는 인간의 정신적 욕망을 의미한다. 인간은 삶의 여정 내내 자기와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는 ‘타자인 자기’를 갈망하는 존재다. 인간은 항상 타인으로부터 위로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갈망한다. 소외는 자기로부터 근원하지만, 결코 자기가 될 수 없는 ‘자기인 타자’의 낯섦을 의미한다. 나와 타자 사이에 놓인 이런 근원적 소외, 즉 타자의 낯섦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자를 자기와 일치시키려는 욕망이 지나칠 때, 우리는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관계 설정으로부터 얻은 상처는 고스란히 평생 스스로 감당하며 살아야 할 고통의 굴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영혼의 부정적 흔적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일회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평생의 과제라 할 수 있다. 부정적인 경험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스스로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영적 힘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치유의 본질이다. cpbc2025.02.19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 하느님의 믿음을 가지십시오[저는 믿나이다] (7) 하느님의 믿음 갖기 사도행전은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 곧 교회의 기원을 정확히 서술하고 있다. 사진은 예루살렘 주님 무덤 성당 내 예수님의 빈 무덤. 하느님의 의로움을 은총으로 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애와 공정·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의로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성화의 길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진실로 살펴야 할 삶의 실천 덕목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하느님 말씀을 향한 경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펴봤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 곧 교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기원했는지, 곧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는 사도행전에 정확히 기록돼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사도들에게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저자 루카에 따르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복음은 맨 먼저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선포되어 사마리아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특히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를 통해 소아시아와 로마, 땅 끝까지 복음이 들불처럼 퍼져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루카는 그의 스승인 바오로 사도가 로마에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되자 아래 글로 사도행전을 마칩니다. “너는 저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이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느님의 이 구원이 다른 민족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들을 것입니다.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26-31) 사도행전은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시고 묻히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승천하기까지 40일간 사도들에게 살아있는 분으로 나타나 하느님 나라에 관해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음을 알려줍니다. 주님 부활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입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1코린 15,3-11) 주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은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지역 유다인들에게, 또 사마리아와 해외에 사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게 “그대가 예수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로마 10,9 참조) 사도들이 선포한 이 복음이 우리 그리스도인 신앙의 토대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1코린 15,1-2 참조) 아울러 이 신앙의 토대가 모든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습니다. 과학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의 논리대로 ‘빈 무덤’ 자체가 부활의 증거가 될 순 없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대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옮긴 것으로 의심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무덤에 주님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한 그분께서 부활했다고 선포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분명 빈 무덤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할 순 없지만 몸과 인격 전체와 상관되는 부활 신앙을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답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주님 부활을 말하면,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이 인간 예수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일반인들은 그들과 거리를 둡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사도들이 선포한 그 복음과 달라서일까요? 현대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 신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믿음을 가지시오’라고 말씀하신다. 번역을 신중하게 하는 바람에 이 문장의 의미가 ‘하느님께 믿음을 가지시오’라는 식으로 희석되고 왜곡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더 많은 내용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주체’이다.”(「그리스도교의 오후」 183쪽)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4.12.17

혼인, ‘진정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하느님의 초대[청년들을 위한 생명 지킴 안내서](16) 아일랜드 더블린의 부활 대축일 행사에서 아이들이 잔디밭에 순수함을 상징하는 백합을 놓고 있다. 부부의 사랑은 자녀를 향한 조건 없이 내어 주는 사랑으로 나아간다. OSV 전개 4. 진정한 사랑에 이르는 통로인 혼인 교회에서 가르치는 혼인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혼인 서약은, 이로써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그 본연의 성질상 부부의 선익과 자녀의 출산 및 교육을 지향하는 평생 공동 운명체를 이루는 것인 바, 주 그리스도에 의하여 영세자들 사이에서는 성사의 품위로 올려졌다.”(교회법 제1055조 1항) 이는 혼인이 계약이 아니라 전인격적 존재인 인간이 상대방과 맺는 서원 같은 약속(서약)이라는 뜻입니다. 혼인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는 관계이며 서로를 유일한 대상으로 하며 결코 제삼자가 개입할 수 없는 배타성을 가집니다. 혼인의 목적은 부부 상호 간에 선익을 지향하고 자녀를 출산하고 교육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는 평생 공동 운명체이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께서 맺으신 일이기에 사람이 풀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인격적으로 고유하고 자유로운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 두 사람은 동등하며 종속되거나 지배하지 않는 협력자입니다. 두 사람은 전적으로 부부의 선익을 위하여 행동하고 살아가며, 삶의 결실인 자녀를 출산하고 교육하는 평생 공동 운명체입니다. 그러기에 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권리로 표현되는 성관계를 교회는 혼인 안에서의 ‘부부 행위’라고 표현합니다. 부부는 혼인을 통하여 성적 존재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인격적인 존재로서 자기 자신의 전 존재를 상대방에게 증여하고 수용함으로써 일치된 삶을 이루고, 나아가 생명 창조의 능력에 참여함으로써 부모(자녀를 통하여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 자기 자신을 조건 없이 내어 주는 ‘진정한 사랑’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타성(단일성-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관계)과 영원성(평생 공동 운명체)을 조건으로 생명 창조 능력에 참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혼인은 인간 사회에서 인간적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는 조건이며, 인간적인 사랑이 ‘진정한 사랑’으로 보호되는 울타리입니다. 함께 나누어 봅시다 1. 부부 사랑의 행동과 의미에 대하여 나누어 보세요. 2. 인간 삶의 여정에서 혼인과 자녀 출산과 양육이 진정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나누어 보세요. 결론: 부부 사랑, 인격적 자기완성 부부 행위를 통해서 부부는 한 몸으로 일치하여 서로를 증여하고 수용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온전히 내어 주고 투신하는 ‘진정한 사랑’에 도달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여정과 가능성을 수용하는 성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자신이 ‘진정한 사랑’의 존재임을 자각하는 데까지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혼인한 배우자와의 성관계 곧 부부 행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에 관한 가르침을 제시할 때 인간적인 사랑의 행위를 성관계(性交)라고 부르지 않고 ‘부부 행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부 행위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평등한 인격적 관계이며 그 행위의 목적은 부부의 선익과 자녀 출산과 교육입니다. 혼인은 단순히 남녀가 결합하는 의미 이상의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동등한 인간으로 상호 보완을 통한 일치를 추구하며 인격적 서약을 통해서 혼인합니다. 자신들의 서약으로 이루어진 혼인을 통하여 인간적인 나약함과 한계를 이겨 내고 하느님다운 영원성을 지향하며 더욱 깊이 사랑하고 일치합니다. 또한 임신과 출산을 통하여 부모가 되어 창조적인 하느님다운 사랑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고유한 인격적 존재인 인간은 자신을 상대에게 선물로 증여함으로써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되고, 자신을 증여한 상대에게 받아들여짐으로써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았던’(창세 2,18 참조) 존재의 외로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존재의 한계를 넘어 새롭게 일치한 부부는 이제 인간 존재의 생명에 대한 근원적 일치를 이루는 체험으로 서로를 초대합니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은 부부의 인간적인 사랑이 새로운 존재를 향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부부의 사랑은 자녀를 향한 조건 없이 내어 주는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사랑의 방향은 이웃을 향해서 나아가고, 궁극적인 대상인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이 모든 사랑의 여정이 혼인 안에서 이루어지므로 혼인은 성소(거룩한 부르심)이며 구원의 여정입니다. 추천 도서 1. 구약 성경, 「아가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 2,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혼인 교리 교육 지침」,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 3. 전택부, 「부부의 십계명」, 홍성사, 1991.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5박예슬2025.04.16

하느님을 따르는 길, 믿음·희망·사랑의 삶[저는 믿나이다] (4) 가톨릭교회 신앙 가톨릭교회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인 동시에 인간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려는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호세 타피로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지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십자가 수난으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복음 선포와 이에 대한 교회의 성찰인 교의(믿을 교리),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일상으로 거행되는 전례와 성사 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진 구원 사건을 소개하며 최초로 그 의미를 해석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고백에서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것은, 교회가 먼저 믿고 우리에게 그 신앙을 전해 주고, 키워 주고, 지탱해 준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먼저 주님을 고백하는 것은 교회이며,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우리는 “저는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도록 인도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성사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과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온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생명을 교회를 통하여 받게 되므로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교회를 새로운 생명의 어머니로 믿는 것이지, 교회를 우리 구원의 창시자로 믿지는 않는다.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므로 또한 우리 신앙의 스승이기도 하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9)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초자연적인 은총입니다. 믿음이 있으려면 하느님의 도움의 은총이 선행돼야 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말씀에 자유로이 순종하는 인간의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격적으로 하느님께 귀의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전체에 대하여 자유로이 동의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50)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인 동시에 인간의 행위입니다. 신앙의 한 단면이 인간 행위라면 인간 스스로도 하느님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려는 실천적 삶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를 ‘향주덕’(向主德)이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덕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덕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사랑이 다른 모든 것의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하신 것, 또 교회가 우리에게 믿도록 제시하는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희망과 사랑으로 표현돼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분께 희망을 두지 않고, 그분께서 바라시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바로 ‘죽은 믿음’(야고 2,26)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을 간직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이를 담대하게 고백하고 확신으로 증언하고 전파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16) 이러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참된 믿음’ ‘산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희망은 하느님께서 주신 ‘행복을 갈망하는 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행복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재림 이후 하느님 나라에서 완전히 누리게 될 것이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희망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현세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넘어 영원을 희망합니다. 둘째, 구원을 보장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1티모 2,4) 기도하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를 갈망합니다. 이처럼 희망은 기도 안에서 표현되고 지탱됩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요한 15,12 참조) 바오로 사도는 믿음과 희망, 사랑 가운데 으뜸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1코린 13,13) 사랑은 모든 덕의 바탕이며 완성입니다. 이처럼 가톨릭교회 신앙은 교회 구성원의 거룩함, 곧 성화(聖化)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선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르는 삶 곧 영성(Spiritualitas) 생활을 추구해야 합니다. 리길재 선임 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4.11.26
[신간] 성모 마리아와 사제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이유 성모 마리아와 사제 / 방효익 신부 / 기쁜소식 성당 마당에 들어서면 대부분 ‘성모상’부터 눈에 띈다. 이는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공경하기 때문이며, 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모범으로 삼아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로 받들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와 사제」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성모 마리아를 교회와 그 가르침 안에서 깊이 있게 살펴본 책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어머니, 곧 하느님의 어머니로 마리아를 공경하는 이유를 성경과 전승,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교황들의 문헌 등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에 기초하여 설명한다. 또 마리아에 대한 왜곡된 주장과 신자로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들여다보고, 마리아 신심과 신학이 그리스도와 교회가 갖는 신비 안에서 고려되어야 함을 되새긴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의 삶과 서품된 사제의 직무를 비교하면서 마리아와 사제의 영적 일치를 확인한다. 저자 수원교구 방효익(권선동본당 주임) 신부는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라는 말의 의미와 그에 따르는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줄 안다면 성모 마리아께 대한 올바른 이해와 지극한 공경이 가능할 것”이라며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성모 마리아처럼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루카 1,38)라고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방 신부는 스페인 부르고스 신학대학에서 공부했고, 아빌라 가르멜 영성 연구소에서 활동했다. 「영성사」, 「영혼의 입맞춤」, 「사제로 산다는 것」, 「섬김과 봉사」 등을 집필했다. 윤하정 기자 신문취재팀 윤하정2024.10.02

신앙의 눈을 뜨게 되는 여정[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89) 수수께끼 같은 인생과 신앙 ‘인생은 풀리지 않는 문제 같은 것’이라는 노랫말 가사가 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시작하는 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이지만, 삶에서 닥치는 문제들을 경험하며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수수께끼와 같은 삶을 꿰뚫어 보려면 보는 눈과 듣는 눈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채 죽을 수도 있다. 신앙은 인생이라는 수수께끼를 꿰뚫는 눈과 지혜를 주지만, 그것도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신앙의 눈이 완성된 상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땅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것처럼 긴 시간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의 인물에게도 해당한다. 성모 마리아의 경우, 천사의 방문에서 예수님의 탄생, 공생활에 이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통 수수께끼와 같은 삶이었을 것이다. 복음서는 마리아가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 놀라운 일들을 겪으며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사람이었다고 전한다.(루카 1,29; 2,19.51 참조) 처음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 마리아는 하느님의 숨은 뜻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사화 중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는 장면은 여느 기적과는 다르게 다가온다.(마르 8,22-26 참조)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눈에 침을 발라 고쳐주시는데, 그 과정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시는 과정이 점진적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수수께끼와 같은 삶을 꿰뚫어볼 수 있는 신앙의 눈, 지혜의 문을 열어주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서서히 진행된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분명히 보이다가도 시련과 위기가 닥치면 모든 것이 모호해진다. 그렇게 어두운 밤을 거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신앙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출발점에 다다른다. 얼마 전 친구 신부가 사제품 은경축을 맞아 소회를 밝혔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모호해지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좀 더 옆을 살펴야 하고 침묵해야 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음에 깊이 새겨 곰곰이 생각해 볼 대목이었다. 생각해보면 교회 안의 모든 활동은 영적인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말씀과 성사, 기도와 애덕 실천, 봉사와 선교⋯. 그중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성에 머물러보고자 한다. 신학생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제성소를 식별하고(알아차리고) 부르심에 응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이 과정에서 공동체 삶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천사들만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신학교인데 막상 살다 보니 그렇지 않아 실망하지만, 서로를 알아가고 자기를 알아가며 신학교에 ‘천사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나와 생각이나 성격이 맞지 않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함께 살아야 하는 이웃임을, 그 또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임을 깨닫는다. 타인이 없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외롭고 재미없을까. 지지고 볶고 다투고 싸우지만,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타인에게서 배우려는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의 눈, 신앙의 눈을 계속해서 떠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한민택 신부cpbc2025.03.04

신앙 유산 집대성한 ‘교의학’ 교과서이자 개론서[신간] 교의학 I/1 서론, 신론 교의학 I/1 서론, 신론 테오도어 슈나이더 신부 등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교의학은 하느님을 그분의 자기전달 안에서 이해하고자 노력함으로써, 하느님에 관한 ‘합당한’ 언설이라는 규범을 표명하고 또 구체화한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에 관한 해석학은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다양한 방법론 없이는 성립할 수 없으니, 이 다양한 방법론의 도움으로 성경(또는 신앙전승)의 텍스트를 그 시대의 문서로 읽을 수 있다.”(19쪽) “교의학은 하느님의 자기전달 안에서 밝혀진 복된 하느님 진리에 대한 참된 증언들에 더해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그 실현 방법 - 구원의 ‘경륜(Okomomie)’ - 을 이해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체계적인 조직신학(신앙의 학문)이다. 실증적 교의학으로서 조직신학은 성경과 신앙 역사 안의 이 하느님 진리에 대한 참된 증언들을 탐구한다. 사변적 교의학으로서 조직신학은 이 증언들이 주장하는 개별적인 신앙의 진리들(신앙 조목들 articuli fidei)의 의미 맥락을 뚜렷이 밝혀내려 애쓴다.”(96쪽)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쇄신을 반영하여 교의학 교과서로 기획된 「교의학 I/1 서론, 신론」이 출간됐다. 테오도어 슈나이더 신부, 위르겐 베르비크, 도로테아 자틀러 등 독일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활동한 세 명의 저자가 교의학 전 분야를 다룬 원서를 우리 실정에 맞게 번역·구성한 책의 첫 부분이다. 원서 1권은 교의학 서론·신론·창조론·그리스도론·성령론을, 2권은 은총론·교회론·마리아론·성사론·종말론·삼위일체론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오늘날 조직신학 연구 작업에서 제기·숙고·서술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개요를 제공한다. 「서론」에서는 교의학을 하는 이유와 방법론, 신앙적 증언의 형식, 교의학의 전제 및 교의학의 자기이해 등을 풀어내며 교의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서론」을 제외한 모든 각론은 네 단계로 진행된다. 1단계 ‘접근’은 오늘날의 난제와 기회, 물음으로 시작한다. 2단계에서는 ‘성경의 전거’가 상세히 논평되며 하나의 뚜렷한 강조점을 부각한다. 3단계에서는 ‘교의사에서의 발전’이 전개되며, 4단계 ‘체계적 성찰’에서는 성경과 전통을 오늘날의 문제 제기와 연계하고 신앙 교리를 통찰한다. 방대한 교의학 개론서의 마지막은 삼위일체론으로 마무리된다. 그림은 알브레히트 뒤러 작 ‘삼위일체 경배’, 1511년, 오스트리아 미술사박물관. 가톨릭평화신문 DB 「신론」에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이후의 모든 각론에서 전제되며 또 구체적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방대한 교의학 개론서의 마지막은 「삼위일체론」으로 마무리된다. 「삼위일체론」은 신앙 전체를 한 다발로 묶는다. 살아 계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참되고 충만한 생명이라는 사상,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이 개론서는 교의학의 개별적 주제에 꼭 필요한 정보를 모두 제공하고, 제기된 주요 문제들과 해결 단초들을 명시하여 독자들이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가톨릭의 관점에서 교회일치적 감수성을 지닌 다양한 전문가가 집필에 참여하였고 토론을 거쳐 완성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4.05.21
![[전문]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4/16/VFq1744803931416.jpg)
[전문]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가 너희와 함께.”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 부활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부활의 축복을 보내드립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에서 당신에 관해 기록된 말씀들을 설명해 주시면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셨고, 성찬례를 통해 그들에게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시며, 부활의 은총을 나누어 주시고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루카 24,36-48; 요한 20,19-23 참조)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로도 참된 평화가 도래하지 못한 세상 곳곳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상처로 고통받는 이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전쟁과 지진 및 산불 피해로 고통받는 이들, 끝없이 이어지는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 고향을 떠나 살아야만 하는 이주민들이 평화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우리 교회는 그들을 치유하는 평화의 노력에 동참해야 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빛은 결코 어둠 속에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옛말에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권력도 십 년을 못 가고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꼭 권력이나 꽃에만 국한된 말이 아닙니다. 우리네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의 대원칙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이 바로 그런 길입니다. 또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사자성어도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좋은 일이 좋기만 한 것도 아니고, 나쁜 일이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한 번뿐인 삶의 여정이 단순히 인간적인 어떤 영달만을 바라는 삶이 돼선 안 될 것입니다. 최근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파면되는 헌법재판소 결정의 엄청난 순간을 지켜보았습니다. 비록 2025년 4월 4일의 이 사건은 그날 이후 역사 속 한 장면으로 지나가겠지만, 그것이 주는 성찰은 영원히 유효할 것입니다. 지난 123일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 많은 이들이 서로 갈라져 진영논리를 앞세우는 가운데 극심하게 혼란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는 결코 ‘당연한 것’도,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모두의 각성과 참여, 분열이 아니라 연대를 통해 지켜내야 할 ‘소중한 결실’입니다. 다행히도 성숙한 시민들의 저항과 민주주의 시스템이 작동되면서 국가 위기 상황을 조금은 벗어난 듯합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세상의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우리가 이번 사건에서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서로를 보살피며 민주주의를 가꾸어 간다면, 분명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만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희망의 닻을 끌고 가야 할 책임이 있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언제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자 삶의 자리에서 진정한 평화의 외침이 울려 퍼져야 합니다. 오늘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제안하시는 ‘평화의 장인’으로서, 인간적인 세상이 주는 적대감과 혐오, 폭력이 아닌, 경청과 사랑, 연대의 문화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친교 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한국 사회가 이 위기를 넘어서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가며, 우리가 두려움과 혐오를 넘어 사랑과 희망을 선택하기를 소망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참으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의 욕망과 죽음으로 향하는 마음을 부수시며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부활의 증인으로서 평화의 사도가 되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분열과 죽음이 아닌 존중과 생명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며, 그 은총을 널리 전하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기쁨에 넘쳐 지내는 일상의 삶은, 죽음의 문화, 힘의 논리를 버리고 친교와 참여, 사명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신이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부터 참된 평화를 살아가는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2025년 부활절에 천주교 제주교구장 문창우 비오 박예슬2025.04.14
![[전문] 의정부교구장 손희송 주교 주님 부활 대축일 메시지](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4/17/LqI1744879544023.jpg)
[전문] 의정부교구장 손희송 주교 주님 부활 대축일 메시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요한 20,19)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알렐루야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어둠을 물리 치시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 빛이 우리 각자와 우리 가정과 온 세상에 두루 비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주님은 수난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바로 그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 지금 우리 사회의 상황을 보면 어느 때보다도 주님의 평화를 간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큰 혼란과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던 정치적 위기는 한고비 넘겼지만, 마음의 통합이라는 중요한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또한 지속되는 경기 침체와 요동치는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큰 불안을 안겨 줍니다. 기후 위기로 인한 각종 자연재해는 두려움을 일으키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만듭니다. 이 모든 것은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향한 우리의 길을 막고 있는 큰 돌과 같습니다. 그 돌은 예수님의 무덤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 입구를 막아놓은 큰 돌은 그분을 반대하던 이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시면서 흩어진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려고 하셨습니다하지만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요한 3,19 참조)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곧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두 형태의 사랑이 충돌했던 것입니다. “세계 역사는 자기 사랑과 타인 사랑이라고 하는 두 가지 사랑 간의 싸움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세상 파괴에까지 이를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은 자아 포기에까지 이르게 한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집착하면서 자기편만 감싸는 ‘닫힌 사랑’으로 병든 이 세상을 ‘열린 사랑’ 곧 자기를 넘어서서 자기희생에 이르는 참된 사랑으로 치유하고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분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된 듯했습니다. “나무에 매 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신명 ( 21,23)라는 구약성경 구절에 비추어볼 때, 예수님은 하느님께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예수님의 부활로 뒤집히게 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부활시켜서 당신 아드님이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덕분에 제자들은 그분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으로 믿으면서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사도 2,42-47 참조).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놓는 참된 사랑을 실천하셨고, 하느님은 그런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시어 평화의 원천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대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우리의 적대심마저 뛰어넘는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그분처럼 자기희생의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이기심의 큰 돌’을 치워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전부라고 우기면서 다른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독선과 아집의 돌, 나눌 줄 모르고 모으려고만 하는 탐욕의 돌, 나만 잘 되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무관심의 돌, 자기 책임은 외면하고 남 탓만으로 일관하는 비겁함의 돌이 사라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승처럼 참된 사랑을 실천하면서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그분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 역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변화되면 세상도 조금씩 변화됩니다. 세상의 변화는 나에게서 시작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내 안에 있는 ‘이기심의 큰 돌’을 치워버립시다. 참빛이신 주님께서 내 마음에서 어둠을 몰아내시고 사랑의 빛으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간청합시다. 우리 모두 제자들처럼 변화되어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기쁘게 세상에 전하는 ‘평화의 사도’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저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평화의 주님저희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 의정부교구장 손희송 주교 박민규2025.04.14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월간 꿈 CUM] 약속 _ 신약이 말을 건네다 (19) 티모테오가 활동했던 테살로니카 교회의 유적 Q. 사목서간이란 어떤 서간을 말합니까? A. 사목서간이라고 이름 붙은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은 티모테오에게 보낸 두 편지와 티토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영혼의 목자들’ 곧 교회의 책임자들이요 교우들의 영성적 통솔을 관장하는 이들에게 보냈다고 해서 사목서간이라고 합니다. 영혼의 목자들이 이 막중한 사명을 다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Q. 티모테오는 누구입니까? A. 티모테오는 리스트라(Lystra)에서 그리스인 아버지와 유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사도 16,1) 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는 사도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 중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2차 선교여행 중 리스트라에 들른 사도 바오로는 그곳에 있는 교우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은 그를 선교 활동의 동료로 선택하였습니다.(사도 16,2-3)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로 건너가 교회를 세울 때, 티모테오는 베로이아에 남아 선교하다가(사도 17,14) 아테네로 사도 바오로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사도 바오로와 함께 코린토에서 선교 활동을 함께 하였으며(2코린 1,19; 사도 18,5) 코린토 공동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사도 바오로의 지시로 코린토에 갔습니다.(1코린 4,17) 또 그는 사도 바오로가 필레몬서를 쓸 때 필리피에 선교하였으며(필리 2,19) 테살로니카 공동체를 탄탄하게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1테살 3,2) 그는 에페소에서도 선교하였고(사도 19,22) 거기에 투옥되어 있던 사도 바오로와 긴밀하게 접촉하였습니다.(필레 1장; 필리 1,1; 콜로 1,1) 또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로마서를 쓸 때도(로마 16,21), 에페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도 바오로의 마지막 여정에도 참여하였습니다.(사도 20,4) 교회 전승은 티모테오가 네르바 황제 때인 97년에 순교한 것으로 전합니다. 성 요한 다마스체노(676?~749?)는 티모테오가 에페소의 첫 주교였다고 전합니다. Q. 티모테오서의 집필동기는 무엇입니까? A. 그 당시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지고 많은 교우들이 생겼으나, 교회의 정통성과 합법성의 최고 권위인 사도들이 죽어 사라짐으로써 여러 형태의 반발과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① 교회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온 것은 교회 내의 여러 가지 상반된 견해였습니다.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이 유포되면서, 참된 믿음의 가르침을 분명히 밝히고 교회의 정체를 확실히 하는 일이 시급해졌습니다.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티모테오서의 저자는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과 삶을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유일한 정통 가르침이자 바람직한 생활방식의 본보기로 제시합니다.(1티모 1,16; 2티모 1,13) 저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가르침을 지키고 따를 것을 호소합니다. ② 티모테오서의 저자는 이단에 대항하여 교회의 사도적 정통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에게 교회를 조직화하고 직제를 유지하도록 강력히 촉구합니다. ③ 티모테오서의 저자는 바람직한 윤리생활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적대 세력이나 패륜집단이 아님을 실제로 보여주어 선교의 역동성을 유지하고자 이 서간을 쓰게 된 것입니다. Q. 티모테오 1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 A. ① 1,1-2 : 인사 ② 1,3-20 : 이단과 복음 ③ 2,1-3,16 : 교회규범 ④ 4,1-11 : 이단자 ⑤ 4,12-5,2 : 교직자의 사명과 언행 ⑥ 5,3-6,2 : 교회규범 ⑦ 6,3-21 : 여러 가지 권고 Q. 티모테오 1서가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A.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1티모 6,3) 잔뜩 교만해지거나 세속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교우들 간에 분쟁이 생기고 자신을 위해주지 않는다고 시기와 다툼과 비방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인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 대신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1티모 6.11)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주임을 지냈다. cpbc2025.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