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장 성경읽기 에제키엘서 해설이제 세 번째 '대예언서'인 「에제키엘서」를 읽으실 차례가 됐습니다. 기원전 597년께 유다가 바빌로니아 제국에 일차적으로 항복할 당시에 유배를 간 무리 가운데 하나였던 '에제키엘'은 그곳에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아 활약하면서, '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신다'는 뜻을 지닌 자신의 이름대로 실의에 빠진 유배민들에게 힘과 희망을 불어넣어 줬습니다. (1)「에제키엘서」의 구조 「에제키엘서」는 아래와 같이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1,1~33,20: 심판 - 야훼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안 계시다. 1-1) 1~3장: 부르심과 사명 1-2) 4,1~33,20: 예루살렘의 함락을 예시하는 상징 설교, 이민족을 향한 심판. *)33,21: 전환점 - 예루살렘의 함락. 2)33,22~48,35: 구원과 회복 - 야훼 하느님께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다. 2-1)33,23~39,29: 이스라엘의 부활 예고. 2-2)40~48장: 이스라엘의 재건 실현. 「에제키엘서」에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신탁 유형들이 나옵니다. 하나는 심판의 신탁으로서 예루살렘의 함락 이전에 발설됐으며, 또 하나는 구원의 신탁으로서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에 발설됐습니다. (2)「에제키엘서」의 가르침 유배를 겪은 다른 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바빌론 유배라는 민족적 재앙의 의미를 밝히는 데 주력한 「에제키엘서」는 이러한 민족적 재앙을 둘러싸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기된 몇 가지 신학적 질문들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1)하느님은 무능하신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라면, 어떻게 당신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이 수치스러운 유배 생활을 하도록 내버려두실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은 거대한 현실 앞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해야만 하는 신앙인의 고뇌를 드러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에제키엘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변합니다. 바빌론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것은 고대 근동의 정치 질서 변화에서 불가피하게 파생된 우연한 결과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징벌로 하느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징벌 기간이 다 채워지면, 하느님께서는 잠깐 떠나 계셨던 예루살렘 성전으로 되돌아가실 것이며, 하느님 영광은 새로 마련되고 성별된 성전에 충만할 것입니다. 2)누가 참 이스라엘인가?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유배를 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유배 기간이 지난 다음에 유배를 갔던 이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던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유배 기간을 전후로 세 개의 파벌로 나눠져 서로 자기가 참 이스라엘이라며 경쟁을 했습니다. 즉, 유배 갔다가 팔레스티나로 귀환한 이들, 유배 가지 않고 팔레스티나에 그대로 남아 있던 이들, 그리고 유배 가서 귀환하지 않고 유배지에 그냥 눌러 앉은 이들이 그들입니다. 에제키엘은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바빌론 유배를 갔다가 돌아올 이들의 손을 들어줍니다(예레 29,4~20 참조). 장차 이스라엘을 재건할 참 이스라엘은 바로 이들이라는 것입니다(에제 11,14~21 참조). 「에제키엘서」 마지막 구절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신학 사상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새로 세워질 예루살렘의 이름은 "야훼 삼마"(에제 48,35)라고 예언자는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이 이름의 뜻은 '야훼, 여기 계시다'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새로운 성전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현존의 성전입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늘 잘못을 반복해 저질러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머무는 하느님의 도성입니다. 「에제키엘서」를 읽으면서 우리 주변의 온갖 어려움에도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숨결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신희준 신부(서울대교구장 비서)이힘2009.05.05
![[출판]P. 로싸노 등 44명 집필「새로운 성경신학사전2」출간](//cpbc.co.kr/CMS/newspaper/2009/04/rc/290199_1.0_titleImage_1.jpg)
[출판]P. 로싸노 등 44명 집필「새로운 성경신학사전2」출간성경 궁금증 속 시원히 해결 「새로운 성경신학사전」 두 번째권이 2년 만에 나왔다. 피에트로 로싸노(1923~1991, 이탈리아 알바교구) 전 라테라노대학 총장신부 등 저명한 성경학자 44명이 10여 년간 166개 항목에 걸쳐 집필한 저술로, 원래 1988년 이탈리아 성 바오로 출판사에서 1권으로 출간한 것을 임승필(1950~2003, 제주교구) 전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신부 등 21명이 우리말로 옮기면서 3권으로 나눴다. 성경신학사전은 한마디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의 근본이 되는 성경 본문의 뜻과 내용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분석적이고도 종합적 해석을 제공한다. 특히 단순히 용어 해설적 성격에 그치는 일반 사전과 달리 성경 73권의 메시지를 역사적이고 문학적 맥락 안에서 폭넓게 조명하고 있다. 풍부하면서도 다양한 내용은 성경을 신학적이면서도 일반적인 개념을 통해 방법론적으로 풀어내면서 본문 주석은 물론 역사학적, 유다교적으로 다양하게 접근, 사전을 접하는 이들에게 실제적, 이론적으로 도움을 준다. 두 번째권은 하느님 백성과 부르심 받은 이의 정체성, 일상 삶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제1권은 ㄱ(가난)에서 ㅂ(빛/어둠)까지 57개 항목을 담았다면, 제2권은 ㅅ(사도/제자)에서 ㅇ전반부(예루살렘/시온)까지 49개 항목을 수록했다. 오는 2011년께 출간될 제3권은 ㅇ후반부(예수 그리스도)에서 ㅎ(히브리서)까지 60개 항목을 담을 예정이다. 제2권은 언뜻 보면 성경과 무관하게 느껴지는 신화와 심리학, 문화, 문학, 예술, 음악, 시간 등이 사실은 얼마나 성경과 긴밀히 연관돼 있는지, 또 이 세상에 성경과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 시야를 넓게 열어준다. 아울러 성경에 나타난 지역과 동ㆍ식물, 인간 행위에서 비롯되는 사건과 상징 언어에 대한 용어 해설 및 기원, 당시 생활 및 관습, 사상 변천사 등 방대한 자료를 수집 분석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성경의 전체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덕분에 성경 본문에 대한 이해는 물론 평소 성경에 대해 갖고 있던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성경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성경신학 전반에 대한 체계적이고 전문적 참고문헌으로 기능할 것으로 기대되며, 사목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는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각을 제시하는 한편 다양한 신앙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준다.(바오로딸/6만 원)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09.04.07

"가난한 마음으로 이들과 함께함에 행복"행려인들 돌보는 하태욱 원장20년 가까이 행려인들과 동고동락한 '우리집 공동체' 하태욱(왼쪽 두 번째) 원장이 행려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저 건너 조그만 호숫가에 개구리 노총각이 살았는데, 사십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가 안 간 건지 못 간 건지 나도 몰라, 얼굴이 못 생겼나 돈이 없나 어디가 어때서 왜 그런지 나도 몰라" (동요 '개구리 노총각' 중에서). 서울 성북구 정릉3동 조그만 산동네 낡은 복지시설. 이곳에 노총각 사회복지사가 살고 있다. 노랫말의 개구리는 마흔이지만 노총각은 쉰이 넘었다. 물론 돈도 없다. 텔레비전에 나올만한 꽃미남도 아니다. "경식아, 너 무슨 걱정 있냐? 왜 그러고 있냐?"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행려인 복지시설 '우리집 공동체' 하태욱(미카엘, 51) 원장이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석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긴 행려인들에게 말을 건넨다. "여기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어요. 늦게까지 술 마시고 들어와서 깽판 부리면 쫓아내야 하고…." 노인요양원 운전봉사로 시작해 1992년 행려인 쉼터 설립지금까지 800여 명 병들고 외로운 행려인 정성껏 보살펴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 농촌에 보금자리 마련 꿈꿔 하 원장은 행려인들과 형, 동생하는 사이다. 운전일을 하던 그는 25살 때 노인요양시설 두엄자리 요양원에 차량 봉사를 해줄 운전사가 없다는 말에 운전대를 잡았다가 봉사의 길로 들어섰다. 요양원에서 자신의 꿈은 뒷전으로 미룬 채 봉사하는 이들을 보며 가난을 선택해서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느꼈고, 1991년 세례도 받았다. 1992년 그는 함께 봉사하던 지인 몇 명과 행려인 쉼터 우리집 공동체를 설립했다. 지금까지 '쪽방촌의 슈바이처' 고 선우경식 요셉의원 원장이 보낸 결핵 환자를 비롯해 오갈 데 없는 800여 명 행려인들이 머물다 갔다. 알코올 중독자와 중증 장애인 등 병든 몸과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이어간 사람들이다. 가족에게도 외면당한 삶이다. 어머니가 지적장애인이라 돌봐줄 사람이 없어 이곳에 맡겨진 아이가 숨을 거둔 일은 하씨에게 가장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프다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밤새 앓다가 다음날 아침에 눈을 감았어요. 그날 밤 아이를 둘러업고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 하씨는 자폐증세가 있어 틈만 나면 뛰쳐 나가려는 아이의 발을 묶어놓기도 하고 대소변 기저귀도 갈아줬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익숙한 냄새가 나더라고요. 앗, 이건 진우 똥냄샌가!…(웃음). 진우가 머리 깎을 때 이발기에서 나는 '윙'하는 소리에 늘 심취하던 모습이 생각나요. 부모가 여기에 아이를 맡겨뒀는데 몇 년이 흘러도 찾아오지 않더라고요." 욕심 없이 행려인들과 함께 밥 숟가락을 뜨고 함께 잠자리에 누운 그였지만 그에게도 '어둔 밤'은 찾아왔다. "가난하게 살고 싶다"는 철학이 흔들렸다. '계속 이렇게 살면 결혼도 못하게 되는 건 아닌가….' 그는 종종 공허한 마음이 들어 명례방 협동조합, 천주교 도시빈민회 등에 문을 두드렸고, 빈민사목 봉사자들과 교류를 이어갔다. 천주교 도시빈민회장을 역임하면서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였고, 다시 하느님과의 연결 끈을 잡았다. 신앙은 깊어지고 삶의 현실적 고민과 갈등이 사라졌다. "우리 아저씨(행려인)들과 부대끼기도 하지만 진솔한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워요. 가난한 마음으로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 기쁩니다." 하 원장은 2001년 후원자들이 대준 학비로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대학원에도 진학해 사회복지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그는 "오랫동안 행려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공부할 기회까지 얻어 감사할 뿐"이라며 "힘들다고 이곳을 뛰쳐 나갔다면 하느님 섭리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우리집 공동체 역사가 20년 가까이 되어가면서 후원자 수도 꾸준히 늘었다. 한 달에 봉사자 30~40명이 이곳을 찾아 행려인들 목욕을 시켜주고, 김장을 담그는 등 다양한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하 원장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행려인들 마음을 사랑으로 다시 싸맨 그를 지켜준 좌우명이다. 결혼 적령기가 지난 그는 "근로 능력이 없는 행려인들이 농촌에서 흙도 만져보고 여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시골에 집을 얻어 살고 싶다"면서 활짝 웃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퇴사자22011.04.05
[하루 한 장 성경읽기] 호세아서, 요엘서, 아모스서 해설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니호세아서ㆍ요엘서ㆍ아모스서이번 주부터 '12소(小)예언서'를 읽을 차례입니다. 분량은 적지만, 분량으로는 감히 규정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 신앙의 대(大)증언들을 담고 있는 이 예언서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먼저 읽을 예언서는 「호세아서」「요엘서」와 「아모스서」가 되겠습니다.(1)「호세아서」 기원전 8세기 초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 호세아의 이름을 따라 제목이 정해진 「호세아서」는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 함락 이후 남유다로 피신한 호세아의 제자들에 의해 수집되고 편집돼 완성됐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ㆍ사회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경신례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호세아는 그의 사생활인 결혼생활을 통해서도 하느님 말씀을 전한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남편과 삼남매를 버리고 정부들을 따라간 아내 '고메르'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내를 찾아가 용서해주고 받아준 호세아는 당신을 배신했음에도 다시금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시는 '사랑과 자비' 의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결국 이 책의 중심 주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손상된 관계와 그 관계의 복원인데, 다음 말씀이 이를 잘 요약해줍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21-22). 그리고 호세아 예언자는 자신의 온 삶으로 이를 선포하고 증언했습니다. (2)「요엘서」 12소예언서 가운데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요엘서」는 바빌론 유배 이후인 기원전 400년께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한 예언자 요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책의 문학기법은 매우 특이합니다. 먼저 독자들에게 무서운 메뚜기 재앙을 상상하게 만든 다음, 메뚜기 떼의 공격을 주님이 유다를 공격하기 위해 보내신 군대의 공격으로 바꿉니다. 이런 문학기법을 통해 요엘은 궁극적인 구원이 실현되는 '주님의 날'이 임박했으니 하느님 백성은 하루 빨리 회개해 하느님께 되돌아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특히 3장에서 예언자는 당신의 영을 내려주신다는 하느님 약속을 전해주고 있는데,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러한 약속이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통해 실현됐다고 선포했습니다(사도 2장). 따라서 주님의 영인 성령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때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요엘 3,5)는 요엘 예언자의 말씀을 일상의 생활 안에서 실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3)「아모스서」 세 번째 소예언서인 「아모스서」는 호세아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8세기께 남유다 베들레헴 근처 토코아 출신 양치기이면서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예언자로 소명을 받아 활동했던 아모스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면서 종교비판에 주력했던 호세아와는 달리 아모스는 주로 사회정의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고 착취하던 이스라엘 상류층을 신랄하게 또는 풍자적으로 비판하면서 이스라엘에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적들 손에 넘어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여기서 북이스라엘의 적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기원전 8세기 후반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고 결국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 제국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모스에 의하면, 올바른 회개란 성소를 찾아 겉치레뿐인 예물을 바치는 데 있지 않고 정의를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해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2-24).신희준 신부(서울대교구장 비서)이힘2009.07.07
![[성경 속 상징]54- 겨자씨- 미소하지만 희망과 인내의 상징](//cpbc.co.kr/CMS/newspaper/2009/07/rc/302497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54- 겨자씨- 미소하지만 희망과 인내의 상징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겨자씨는 성경이나 랍비 문헌에서 가장 작은 것을 가리킬 때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겨자라고 하면 음식점에서 나오는 톡 쏘는 매운맛 향신료를 상상한다. 겨자는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로, 재배식물 중에서 역사가 아주 오래된 것 중 하나다.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에 기록돼 있을 정도다. 성경시대에는 겨자를 기름과 약재로 사용했고, 중요한 향신료로 사용했다. 지금도 버섯에 중독 되거나 독이 있는 짐승에게 물렸을 때 겨자씨를 달여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겨자는 1년생 초본인데 중동지역에서는 3m 이상씩 자라 사람 키보다도 큰 것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들에서 자랐다고 하며, 또 흔하게 재배되는 것이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 이미지를 통해 비유하셨다. 예수님은 실제로 겨자씨를 땅에 심는 것 중에 가장 작은 씨라고 묘사하셨다. 그런데 가장 작은 것의 상징으로 사용된 겨자씨가 실제로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가장 작은 것의 상징으로 사용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갈릴래아 호수 근처와 북쪽에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흔한 식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마르 4,31). 당시 이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은 대단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다윗 성왕의 위대한 왕조를 다시 건설할 정치적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철저하게 그분 능력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인간의 눈에는 신비로운 형태를 지닌다. 보이지 않던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말씀도 처음에는 미약하게 보이지만 점차 엄청난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1-32).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 아주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라서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정원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된다고 역설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점차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누룩의 비유에서도 나타난다(마태 13,33). 이러한 말씀은 박해에 시달리던 초대교회 신자들에게도 큰 희망과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신앙인의 믿음에 대해서도 겨자씨에 비유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예수님이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잣대를 분명하게 언급한 대목이다. 비록 인간의 생각에는 작은 믿음이라 해도 믿음의 능력은 위대한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작고 미소한 겨자씨는 희망과 인내의 상징이 된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그 열매가 맺는 일은 믿음 안에서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겨자씨의 상징은 빨리빨리를 외치고 눈에 당장 결과가 보여야 안심이 되는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조은일2009.07.21
![[아! 어쩌나?] (100) 마음에 안 드는 자비송](//cpbc.co.kr/CMS/newspaper/2011/04/rc/374895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100) 마음에 안 드는 자비송Q. 마음에 안 드는 자비송 세례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아들이 미사참례를 하고 오면 영 마뜩잖은 표정을 짓습니다. 왜냐고 물으니 미사 중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하는 기도문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 그렇게 애처롭게 마치 구걸하는 사람처럼 기도해야 하느냐고 하는데 저는 습관적으로 기도해서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 대답할 말이 없어 "그냥 따라 하면 되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들 말처럼 기도문이 너무 저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벗으로 삼으셨다고 성경에 나와 있는데 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저자세를 취해야 하는지요? A.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미사 중 그 기도문은 주님을 맞을 때 마치 백성이 왕을 맞이하듯 하는 데서 기원한 기도문입니다. 그 기도문에 대한 심리적 풀이를 해 드리지요.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기분 좋은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지만 때로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분명히 저건 아닌데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 내 속을 상하게 하거나, 심지어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을 만나면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이럴 때 교회에서는 '용서'의 미덕을 강조합니다. 피해를 본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내가 어떤 마음을 먹는가보다 내 마음을 힘들게 한 상대방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속이 분노로 가득 차 있을 때 가장 괴로운 사람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분노는 불덩어리인데 그것을 오래 가지고 있어봐야 데이고 상처입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에, 용서라는 작업을 통해 얼른 마음 밖으로 내어놓고 싶어합니다. 분노가 심할수록 동시에 용서하고 싶은 마음도 강하다는 것인데, 상대방이 나에게 보이는 태도에 따라 쉽게 용서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용서하기가 편할까요? 가장 좋은 태도는 변명하지 말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입니다. 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에서 "실수에 대해 변명을 하면 오히려 그 변명 때문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된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왜 그럴까요? 변명이란 상대방의 분노에 휘발유를 끼얹는 것과 같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남자 연예인들 병역문제가 심각하지요. 한창 인기 있고 돈을 벌 나이에 입대하게 되면 인기도 잃고 돈도 못 버니까 입영연기를 할 때까지 하다가 서른 즈음에 가기도 하고, 신체적 결함을 입증해 면제를 받으려 하기도 합니다. 또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을 시도했다가 발각된 경우에는 자신이 무죄임이 판명나더라도 변명으로 일관하면 사람들에게서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용서는커녕 잘못하면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변명이 분노라는 불에 휘발유를 뿌린 탓입니다. 그러나 자기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잘못을 빌거나 사과를 하면 "그래, 잘못은 했지만 잘못을 인정한다니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지"하면서 용서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인 경영 컨설턴트인 야스다 시게가츠는 기업의 실수 때문에 고객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째, 일단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사사로운 것을 설명하고 변명하지 않는다. 왜냐면 잘못했다간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앞으로 개선책을 밝힌다. 셋째,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일단 사과부터 한다. 넷째, 신뢰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다섯째,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전달한다. 최근 한복 문제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시내 한 유명 호텔은 이 수칙을 지키지 않고 변명하는 바람에 문제가 더 커졌습니다. 가족 드라마에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화가 났을 때 어머니가 자식들을 나무라면서 "얼른 잘못했다고 말씀드려"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머리가 모자란 자식들은 "왜 나만 갖고 그래요,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요?"하면서 바득바득 대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영리한 아이들은 바로 사과하고 잘못했다고 해서 아버지 분노를 식힌 후 대화를 시도합니다. 이것은 비단 사람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우리와 하느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크고 작은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화가 나 있으실지도 모르는 하느님께 가장 먼저 드려야 하는 기도는 '이것도 해달라, 저것도 해달라'하는 청원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속상한 마음을 풀어 드리는 기도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비송이 미사 초입부에 붙박이장처럼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송은 우리가 하느님께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처지를 스스로 인정하고 드리는 자연스러운 기도입니다.홍성남 신부(서울 가좌동본당 주임) cafe.daum.net/withdoban이힘2011.04.26
[하루 한 장 성경읽기 해설] 하까이서, 즈카르야서, 말리키서 우리는 드디어 구약성경 마지막 세 권「하까이서」와 「즈카르야서」, 「말라키서」를 읽을 차례입니다. 2006년 대림시기에 「창세기」부터 읽기 시작한 지 어느덧 2년 반이 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고대해마지 않던 메시아이신 예수님 말씀과 업적을 담은 '신약성경'을 읽기에 앞서 메시아 오심을 노래한 세 권의 예언서들에 관해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하까이서」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으로 바빌론에서 귀향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지도 못한 채 가난과 고통 속에서 암담한 생활을 하던 유다인들에게 돌연히 나타나 넉 달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에 유다인들로 하여금 성전 재건에 박차를 가하도록 한 예언자 '하까이(나의 축제일)'의 말씀 모음집인 「하까이서」의 주된 관심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이고, 다른 하나는 메시아 희망입니다. 그에게 성전은 한낱 건물이 아니라 유다인들의 메시아 희망을 담은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그 희망은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입니다. (2)「즈카르야서」 하까이 예언자와 동시대인 기원전 6세기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성전 재건에 힘썼던 예언자 '제1 즈카르야(야훼께서 기억하신다)'(즈카 1~8장)와 기원전 4세기께 활동하면서 폭넓은 메시아사상을 전해준 '제2 즈카르야'의 말씀 모음집인 「즈카르야서」는 아래와 같이 구분됩니다: 1) 즈카 1~8장: 성전 건축 중에 기록. 해방되리라는 희망 1-1) 1,1~6: 머리글: 회개하라는 호소 1-2) 1,7~6,15: 여덟 가지 밤의 환시들과 신탁 1-3) 7,1~8,23: 신탁 모음: 단식 설교 2) 즈카 9~14장: 성전 건축 후에 기록 2-1) 9~11장: 신탁 모음집(1): 겸손한 메시아가 오리라는 희망 2-2) 12~14장: 신탁 모음집(2): 하느님 왕권의 도래에 대한 희망 하느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을 주시고 악인들에게는 벌을 주시리라는 종말론 성격이 강한 「제2 즈카르야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본문은 '찔려 죽은 이'(즈카 12,9~14) 와 '칼의 노래'(즈카 13,7~9) 대목입니다. 아마도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주님의 종'과 더불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 수난 신비의 의미를 밝히는 데에 가장 도움이 된 구약성경 말씀일 것입니다. (3)「말라키서」 소예언서는 물론 구약성경 전체의 마지막 책인 「말라키서」는 비록 55절 짧은 문헌에 지나지 않지만,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중요한 구실을 하는 예언서입니다. 기원전 460년께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말라 3,14)라며 낙담에 빠져 있으면서 예배를 드리는 일을 등한시하는 이들이 많던 시기에 시나이 산에서 야훼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다시금 충실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한 예언자 '말라키(나의 사자(使者))' 말씀을 담은 이 예언서의 백미는 3장 22~24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의 종 모세의 율법,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내린 규정과 법규들을 기억하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마태 17,1~8; 마르 9,2~8; 루카 9,28~36) 때에도 함께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를 언급함으로써 예언자는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계약을 준비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이제 옛날의 계약을 떠나 '새'계약을 향해 나아갈 차례입니다. 준비되셨나요?이힘2009.08.18
![[아! 어쩌나?] (74) 착하디착한 남편](//cpbc.co.kr/CMS/newspaper/2010/10/rc/354075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74) 착하디착한 남편Q1. 착하디착한 남편 제 남편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살려고 하는 아주 착한 사람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인사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겉치레에 신경 쓰지도 않고, 부모님 보필하는 것도 다른 형제들이 있어도 무조건 자기가 다 하겠다고 합니다. 시아주버니와 동업을 하는데 머슴같이 일만 하고 시아주버니네가 금전적으로 많이 써도 말 한마디 못하고, 오히려 가족들에게 검소하게 살라고 잔소리를 합니다. 시댁 일이라면 무슨 일이나 다 나서 돕는데, 다른 형제들은 이제는 고마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당연시합니다. 분명히 주님 보시기에 착한 남편인데 그런 남편을 보는 제 마음은 편치가 않습니다. '왜 저렇게 바보같이 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남편에게 불만을 품는 저 자신이 속물 같고, 탐욕스러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성경공부를 하면서 제 자신을 달래고 있습니다. '난 행복하다, 저렇게 착한 사람과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하면서요. 그런데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마음이 불편해지고 저를 나쁜 여자로 만드는 남편이 미워집니다. 그렇다고 구질구질하게 싸움을 걸기도 싫고요. 욕심이 많아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인지 답답하고 힘듭니다. A. 자매님 마음이 무척 속상할 것 같습니다. 자매님 설명대로라면, 남편은 착한 분이라기보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분 같습니다. 아마도 어린 시절 기가 센 형 동생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착하게 행동해야 하는 배경 아래 성장하셨는가 봅니다. 이렇게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분들은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 욕구를 맞춰주는 삶을 살아왔기에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고, 자기만족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자신에게 위압적인 존재에게 착하디착한 양처럼 행동하면서 만만한 자기 가족들에게 자기 삶의 방식을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타인지향적 삶을 살까요?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는 관심입니다. 관심은 아이들의 심리적 '필수영양분'이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관심을 받기 위한 방법은 성장 과정 안의 자기 자리마다 모두 다릅니다. 불행하게도 남편분은 아주 좋지 않은 병적 방법을 터득하신 것이지요. 이런 콤플렉스를 가진 분들은 자기 돌봄, 자기 욕구 이해와 같은 심리훈련을 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이미 너무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을 고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남편을 보고 불편한 마음을 갖는 자매님은 절대 욕심이 많은 분도, 속물도 아닌 아주 정상적인 분이십니다. 착한 남편이 형제들에게 착취당하는 것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겠지요. 단지 자매님이 주의하셔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남편을 보면서 속상해하는 것이 자신에게 무리를 준다는 것을 늘 상기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남편이 달라지지 않을 때는 포기하시고, 자매님 인생을 만드는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매님에게 주어진 귀한 시간이 남편 생각하느라 어느새 날아가고 남은 것 하나 없는 노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Q2. 묵주를 부적처럼 사용해도 되나요? 기도하기 위해 늘 묵주를 갖고 다니지만 기도가 생활화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냥 갖고 다니기만 합니다. 가끔은 묵주를 보면서 '아, 그래 내가 신자인데 잘못된 행동은 하지 말아야지'하는 반성은 하고 삽니다. 차에도 묵주를 걸어놨습니다. 왠지 성모님이 지켜주실 것 같아서요. 그런데 신자가 아닌 남편이 그런 저를 보고서 핀잔을 줍니다. 무슨 부적처럼 묵주를 걸어놓고 다니느냐고요.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묵주를 걸어놓은 것이 마음이 덜 불안해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는데,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처럼 묵주를 대해도 성모님이 화를 내지 않으실까 걱정입니다. A. 부적은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이 갖고 다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안감을 갖고 살기에 부적 효과를 가지는 도구들은 어느 종교건 다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만드는 성물은 기도의 수단이자 불안감을 감소시키거나 없애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마치 부적 같은 심리치료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늘 묵주를 지니고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자매님이 성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고 묵주를 아예 두고 다니신다면, 그나마 있는 신심마저 사라져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너무 오래 만나지 않으면 서먹하듯, 묵주기도도 그러하니 늘 수중에 지니고 다니시고, 차에도 늘 걸어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묵주기도를 하고픈 마음이 들겠지요.홍성남 신부(서울 가좌동본당 주임) cafe.daum.net/withdoban이힘2010.10.19
신화, 철학에서의 신 문제](//cpbc.co.kr/CMS/newspaper/2011/06/rc/379303_1.2_titleImage_1.jpg)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2)신화, 철학에서의 신 문제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존재라는 사실이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까'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죽음이라는 것은 돌아간다는 것인데, 어디로 돌아가는 걸까'…. 끊임없는 질문이 하느님을 발견하게 해준다.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철학을 했고, 철학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철학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았다. 철학은 신과 인간, 자연의 문제를 다룬다. 철학의 시작은 자연이었다. 만물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자연도 중요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 철학의 큰 주제는 하느님ㆍ인간ㆍ자연으로, 이 주제들은 계속 번갈아가면서 철학의 중심 주제로 다뤄졌다. 자연철학이 나오기 전에는 신화에서 신의 문제를 다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올림푸스의 신 제우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 부부 사랑을 관장하는 헤라 여신, 불을 다스리는 헤스티아, 지하세계를 다루는 하데스 등…. 인간이 희망하는 것을 투사시켜서 신들 모습을 그렸다. 만약 소나 돼지들이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신의 모습을 소나 돼지로 그렸을 것이다. 인간들이 그림을 그리고 생각할 줄 알기에 신의 모습을 사람 모습으로 그렸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여러 신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신들은 죽지 않지만 인간처럼 잠도 자야 하는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신의 세계에도 신들 운명을 지배하는 최고 존재가 있다. 결국 신화는 다신론을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서 그들을 지배하는 절대적 힘을 가진 유일신론을 지향한다. 한편 철학에서도 신의 존재를 다룬다. 소크라테스 제자였던 플라톤은 이데아 세계를 그렸다. 플라톤의 사고방식에서 플라톤적 사랑은 이데아적 사랑을 의미한다. 물질ㆍ육체적 사랑은 저질적으로, 이데아적 사랑은 높게 평가한다.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인간 개념을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서 물려받았다.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교회에 가져오기 전까지 이데아적인 것, 즉 정신적인 것은 고귀한 것이고 인간의 육신은 저질이라고 생각해왔다. 교리에서 보면 우리가 물리쳐야 할 원수는 세속과 육신, 마귀다. 사실 육신은 물리쳐야 할 원수가 아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이 물질적인 것을 죄악시한 경우는 없었다. 예수님은 먹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오히려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시기와 질투, 증오라고 했다. 이 세상 모든 물질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게 창조된 것이다. 플라톤의 사고방식과 달랐다. 플라톤은 이데아 세계가 신의 세계이기에 이데아 세계가 참되고 옳은 것이라고 봤다. 죽음은 이데아에서 온 우리 영혼이 물질적 악의 세계에서 온 육신과 결합해 인간으로 살다가 육신으로부터 해방돼 영원히 다시 이데아 세계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도 죽음은 우리 영혼이 죄스런 육신에서 벗어나 본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꿈은 시간을 초월하는 정신세계로, 하느님이 존재하는 초월적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을, 플라톤은 정신세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의 모든 합리적 사고방식의 기초를 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교부들은 사람을 영혼과 정신, 육신으로 구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 존재하거나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인다고 했다. 예를 들면, 성모상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성모상을 제작한 작가는 부모에 의해 존재하고, 그 부모는 할머니ㆍ할아버지, 증ㆍ고조부에 의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소급과정이 무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시작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만물의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고 봤다. 결과를 통해 최종 원인으로서 하느님을 이야기한다. 토마스 데 아퀴노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접목해 인간이 이성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다며 하느님 존재를 5가지 방식으로 증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증명한 것 같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최종 운동자인 '제일운동인(第一運動因)'을 하느님이라 부른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예를 들어 내가 존재하는 데는 나를 있게 한 부모가 있고, 부모에게는 또 그 부모가 있듯이 부모를 계속 거슬러 올라갈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소급할 수는 없다. 그 시작이 되는 '제일작용인(第一作用因)'이 하느님이다. 세 번째는 우연적인 것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전개돼 가는 과정에서 하느님을 증명한다. 우연적인 것은 없다가도 있지만 필연적인 것은 반드시 존재한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세상 모든 사물은 우연적이다. 100년 전에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존재하고 있다. 우주 역시 200억 년 전에 빅뱅이라는 사건으로 생겼지만 300억 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사물이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우연적 존재라면 어느 순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이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한다. 네 번째는 이 세상에는 목적 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주 질서가 하느님을 증명한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이 오듯이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이 있다. 결론적으로 목적을 부여하는 이도 하느님이고, 그 마지막 목표도 하느님이다.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는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에서 매 주일 오후 6시 5분에 방송되며, 평화방송TV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전 8시(본방송)에 이어 수요일 새벽 4시와 저녁 9시, 금요일 오후 4시, 주일 오후 6시에 재방송된다. 인터넷 다시 보기 www.pbc. co.krcpbc2011.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