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성심수녀회 이명기 수녀, 「성경은 왜 이렇게 말할까?2」펴내](//cpbc.co.kr/CMS/newspaper/2009/04/rc/291865_1.0_titleImage_1.jpg)
[출판]성심수녀회 이명기 수녀, 「성경은 왜 이렇게 말할까?2」펴내고통 속에서 하느님 찾아가는 여정 "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주십시오"(민수 11,15). 모세는 절망의 상처가 너무 깊어 그만 죽고 싶은 지경에 이른다. 성경 인물뿐 아니라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도 '고통'은 심해, 그 바닷속처럼 깊고 숙명적이기까지 하다. 이같은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치유를 받을 수 있을까. 그 답이 '성경은 왜 이렇게 말할까?'시리즈 2권에 담겼다. 가톨릭대 종교학과와 인간학교육원, 수도자신학원에서 강의하는 성심수녀회 이명기(마리아) 수녀의 「성경은 왜 이렇게 말할까?2-주님, 제가 고통 받을 때 어디 계십니까?」다. 곽승룡(대전가톨릭대 교수) 신부가 집필한 1권 「자비하신 하느님이 왜 화를 내실까?」에 이어 두 번째 권이다. 134쪽 분량으로 이뤄진 이 소책자는 고통에 관한 수많은 질문을 일곱 가지로 축약, 그에 대한 답변을 찾아가는 영적 여정을 담고 있다. 고통과 악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고통에 대한 이해를 안겨주고,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며, 더불어 충만한 하느님을 체험케 해준다. 그러나 성경과 같이 우리에게 정답을 제공하려 하기보다는 성경 속 인물들이 고통의 신비를 캐묻고 때로는 모호함을 견디며 하느님과 만남을 추구해가는 여정을 보여주려 한다. 특히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 성조들과 모세, 다윗, 욥, 시편 시인, 예언자 등 대부분 성경 인물들이 고통 한가운데서도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는다. 나는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있겠다'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기억하며 각자 걸어간 여정을 살핀다. 무죄한 사람들의 고통과 까닭 없이 닥치는 고통, 고통의 훈육적 의미,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성경에서 하느님을 향해 어떻게 불평하고 어떻게 믿음을 고백했는지를 전해준다. 또 착한 사람들에게 고통이 닥치는 이유와 신앙인의 선택은 어떠해야 하는지, 또 모세와 엘리야 등의 예를 들어 '버림받음'의 의미를 묵상한다. 이어 고통의 의미와 목적, 구약성경과 묵시문학의 희망을 돌아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통과 어떻게 맞서 싸우고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 또 예수의 고통과 죽음은 어떤 의미를 주는지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신비'를 통해 본문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바오로딸/6500원)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09.04.21

부활의 삶을 사는 출소자들"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 철판요리점 사장 신재웅씨 신자 교도관 통해 신앙에 눈 떠, 성경필사하며 고통 사라져희망 씨앗 잘 키워 출소자들 도와주고 싶은 '행복한 요리사'신앙 안에서 새 삶을 찾은 신재웅씨가 주방에서 즐겁게 요리를 하고 있다. 백영민 기자 "제게 부활이란 과거의 생각을 버리고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목숨을 다해 하느님 말씀을 사는 것이죠." 서울 성북구 석관동 철판요리점 사장인 신재웅(스테파노, 46)씨는 "누구에게나 주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오는데, 저는 그 도움의 손길을 늦지 않게 잡았다"며 안도의 눈빛을 내비쳤다. 그는 "매 순간 일상에서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느끼며 산다"고 털어놓으며 "빛과 어둠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도 했다. 무역업을 하다 크게 부도를 낸 신씨는 2년간 도피생활을 하다가 경제사범으로 수감됐다. '내가 왜 여기에, 성공이 눈 앞에 있었는데…'라는 생각들로 자신을 괴롭히다 자살을 시도했다. 그가 신앙에 눈을 뜬 건 가톨릭 신자 교도관이 그를 보살피면서다. 신씨는 신부를 찾아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물었고, 신부는 그의 손에 성경을 얹어줬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면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겠습니다." 신씨는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 기도했다. 그는 성경을 쓰며 여러번 통곡했다. 그는 깨지고 부숴지면서 서서히 고통에서 해방됐고, 원한과 욕심도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출소했던 겨울 날을 잊지 못한다. 2년 전 추운 새벽, 갈 곳 없는 자신을 데리러 온 이들이 눈에 선하다. 당시 신부와 함께 배웅나왔던 한 자매가 건네준 묵주는 차에 걸고 다닌다. 출소하자마자, 식당에서 주방일을 한 그는 지난 12월, 출소한 지 2년 만에 식당을 차렸다. 지난 해 겨울 기쁨과희망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법무부에서 지원을 받아 창업을 한 것이다. 그는 새벽마다 도매시장에 가서 싱싱한 해산물을 사온다. 그는 오징어를 다듬으면서도, 양파를 깎으면서도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삶은 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제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삶을 사시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고 털어놨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신씨는 "제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 누군가가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저를 예수님처럼 대해주셨기 때문에…"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앞으로 삶의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제가 받은 사랑을 전해주는 것"이라며 "그래야만 제가 받은 희망의 씨앗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 또 다른 싹을 틔울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의 출소를 기다렸던 아내와 딸은 등을 돌려 홀로 남겨졌지만, 그는 신앙 안에서 새 삶을 찾았다. "하느님이 주신 평화를 느껴봤기에 다시 유혹이 와도 물리칠 자신있습니다. 제 뜻대로 살았을 때 결과를 훤히 보여주셨잖습니까. 하느님 뜻대로 살 때 평화를 주신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지혜 기자 # 양말가게 운영하는 조연구씨출소 후 창업자금 대출 받아 아내와 함께 양말가게 운영도움받아 일어 섰는데… "다시 어둠 속으로 갈 순 없죠" "엄니~ 양말 면이 진짜 좋아. 색깔도 너무 이쁘네. 다섯 개에 3000원! 아니 여섯 개 줄게." 서울 관악구 봉천동 현대시장 앞 사거리. 아주머니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자 조연구(마태오, 43)씨가 바빠진다. 가지각색 양말이 수북히 쌓인 트럭에 걸린 플래카드에는 "고객님이 구입하신 양말 값의 일부는 불우이웃돕기에 쓰여 집니다"는 문구가 함께 쓰여있다. 이 글귀는 자신을 바닥으로 내리치신 하느님께 드리는 약속이다. "만날 술 마시고, 놀러다니고…. 승승장구 하면서 향락에 빠져 살았죠. 어느 날 하느님이 절 치시더라구요. '마태오, 너는 다시 시작해야겠다' 하시면서." 그는 월 매출 1억 원이 넘는 의류 브랜드 매장을 경영했다. 그런데 매출이 떨어지면서 부도가 났고 생계형 범죄를 저질러 4년을 복역했다. 아들 100일날 구속된 그는 원망으로 가득찬 시간을 보냈다. 그의 표현대로 그는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렇지만 반지하에서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는 아내를 기억했다. 그는 군산직업훈련소와 청송직업훈련교도소를 옮겨다니며 제과제빵ㆍ특수용접자격증을 땄다. 터널처럼 어두웠던 그의 마음에 빛 한줄기가 들어온 건 청송직업훈련교도소에서다. 당시 그는 아내가 가끔씩 보내오는 속옷과 생활용품으로 부족하지 않게 생활했다. 그런데 가족이 없는 한 수용자가 묵묵히 사는 모습을 보고 콧잔등이 시려왔다. 그 수용자는 밖에서 넣어주는 영치금이나 생활용품 없이 교도소에서만 제공되는 휴지 두 통과 세탁비누 한 개, 세숫비누 반토막으로 한 달을 묵묵히 사는 것이었다. '나보다 더 어렵게 생활하는 사람도 있는데, 난 불평만 하며 살았구나….' 그는 아내가 보내오는 생활용품들을 보며 하느님 사랑을 느꼈고, 그때부터 아내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의 삶도 달라졌다. 출소한 그는 지난해 6월 기쁨과희망은행에서 창업자금 1500만 원을 대출받아 서울 봉천동에 작은 양말가게를 냈다. 아내는 매장에서 양말을 팔고, 조씨는 1t 트럭을 몰고 다니며 지방 5일장을 찾아다닌다. 강원도와 충청도 등 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는 지방에서 하루 장사가 끝나면 공터에 트럭을 세워놓고 잠을 청한다. 그는 "의자를 접어 이불을 깔면 '움직이는 호텔'이 따로 없다"며 직접 등받이를 접어 보였다. "심심할 때는 노트북으로 영화 보고, 음악도 듣고, 내비게이션으로 텔레비전까지 볼 수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또 "지역마다 특산물이 있어 먹을거리야말로 걱정없다"고 했다. 그는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딨냐"며 활짝 웃었다. 그는 한 손님에게 잔돈을 건네주며 말했다. "저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었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기쁨과희망은행 후원회원들 도움으로 창업하면서, 춥고 배고픈 수용자들에게 양말 한 켤레라도 보내 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조씨는 매일 3000원을 따로 떼어놓아 모은 돈으로 양말 120켤레를 사 교도소로 보냈다. 춥고 외로운 수용자들을 위한 설 선물이었다. 그는 지난 가을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가 나 쉬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빛 한줄기를 만났는데,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순 없었기 때문이다. 이지혜 기자 [BOX] 기쁨과희망은행은 가톨릭 교회가 출소자들의 창업지원을 위해 2008년 6월에 창립한 무담보 신용대출기관이다.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위원장 이영우 신부)는 사회 차별과 편견으로 자립할 기회가 막혀있는 출소자들이 창업교육을 받고 사업계획서를 제출해 심사를 통과하면 1인당 창업자금을 2000만 원까지 담보 없이 빌려주고 있다. 이자는 연 2%로, 5년에 거쳐 분할 상환해야 한다. 현재 50명이 넘는 출소자들이 기쁨과희망은행을 통해 새 삶을 찾아가고 있다. 후원 문의 : 02-921-5093~4,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이지혜2010.03.30
![[영성의 길 수도의 길]-(38) 카푸친 작은 형제회](//cpbc.co.kr/CMS/newspaper/2011/04/rc/374082_1.0_titleImage_1.jpg)
[영성의 길 수도의 길]-(38) 카푸친 작은 형제회가난, 겸손... 프란치스코 닮으려는 '작은 형제들' 사제,평수사 구분없이 모두 '형제'로 호칭 상설고해소 운영 및 매일 성체조배 경당 개방이주민 사목과 생명운동으로 사도직 확대할 터 십자가를 중심으로 아래에 두 손이 엇갈려 있다. 옷 소매가 보이지 않은 오른쪽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이고, 옷 소매가 보이는 왼쪽 손이 오상의 은총을 받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영으로, 육으로 완전히 일치한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르는 형제들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손으로 형상화했다. 둥그레 뭉쳐진 하얀 꽃눈이 시리도록 곱다.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역에서 효창운동장으로 접어드는 길목엔 백목련이 줄지어 있다. 소담스럽게 핀 목련꽃 향기가 아슴아슴 번지는 서울 효창동 주택가에서 수도원을 만났다. #올해 한국 진출 25돌 맞아 작은 형제회, 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와 함께 1회 프란치스칸의 세 기둥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한국보호구(보호자 에드워드 다울리 형제) 천사들의 성 마리아 형제회 수도원이다. 라틴어 원문 그대로라면 '카푸친 더욱 작은(Minoritas) 형제들의 수도회'로 번역돼야 할 이 수도회는 기도와 형제애, 복음화, 가난, 더욱 작음의 영성으로 프란치스코가 살아간 삶을 닮으려하는 '형제적 공동체(Fraternitas)'다. 그래선지 수도원에 들어서자마자 맨 처음 들은 단어는 '형제'라는 말이었다. 공동체 안팎 어디서나 사제든 평수도자든 차별 없이 형제라는 호칭만으로 불리는 공동체를 접하니 좀 낯설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처럼' 살며 형제애를 중시하는 공동체에 호감과 편안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동시에 '더욱 작은 자'로 살고자 하는 형제들 삶에 대한 궁금함도 커졌다. 올해로 한국 진출 25돌을 맞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사도직은 단출하다. 서울 지역 형제회 경당을 개방, 고해성사를 상설화하고 성체조배경당으로 발전시켰으며, 수련소가 있는 가평 지역 형제회에선 소규모 피정을 지도한다. 힘이 닿는 한 재속 프란치스코회원 양성과 영성 보조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주요 사도직 가운데 하나다. 이마저도 지난 2009년 성탄 전야부터 본격화됐고, 이전엔 관상생활과 함께 수도 공동체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는 데 주력했다. 상설 고해성사 마련은 1986년 카푸친 형제들을 서울대교구에 초청한 김수환 추기경의 교구민을 향한 사목적 사랑이 계기가 됐다. 유럽에 갈 때마다 신자들이 카푸친회 성체조배경당에 들러 자유롭게 기도하고 고해성사를 받는 모습을 마음에 담아뒀던 김 추기경은 카푸친 형제들을 초청해 성체조배와 고해성사 거행을 한국에서도 활성화하려 했다. 김 추기경은 생전에 한국 카푸친들을 만날 때마다 언제 이 사도직을 펼칠지 궁금해 했다. 이같은 김 추기경의 오랜 바람과 '고해실의 사도'로 불린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모범을 따라 한국 카푸친들은 지난해 3월부터 서울 형제회 경당에서 고해성사를 주고 있다. 평일엔 오후 2~5시, 토요일엔 오후 2~7시다. 토요일엔 영어 고해성사도 1시간(오후1~2시)씩 주고 있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적을 땐 대여섯 명, 많을 땐 열댓 명에 그치지만, 수도회측은 단순한 숫자보다는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 자비를 드러내는 데 더 비중을 둔다. 카푸친들의 고해성사는 편안하기 이를 데 없다. 고해소에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과 화해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 것이기에 편안하게 이야기하도록 한다. 신변잡사를 얘기해도 고해성사에서 신자들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위로를 해주는 데 더 주력한다. 2008년 한국인으로는 첫 카푸친 사제가 된 강주현(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는 "화해와 기쁨의 성사인 고해성사가 한국교회에선 냉담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다"며 "하느님 자비를 청하는 고해성사가 마치 심판인 것처럼 오해를 받고 보속 부담으로 또 다시 냉담하는 현실이 안타까워 고해성사를 상설했다"고 말한다. #하느님과 화해 돕는데 힘써 이뿐 아니라 날마다 오전 7시부터 밤 9시까지 성체조배경당을 개방, 성체조배를 돕고 있다. 매주 목요일(첫 주 목요일은 제외) 오후 8시 성체조배경당에서 성체강복을 거행하고, 형제회를 방문하는 신자들과 함께 아침기도(오전 6시 15분)와 아침미사(오전 7시), 저녁기도(오후 6시)를 거행한다. 성체조배 또한 고요히 앉아 십자가를 바라보는 방법을 통해 주님과 일치하도록 권유하지만, 특별히 그런 방법을 강권하지는 않는다. 성경을 읽거나 성당에 앉아 있기만 해도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사는 관상자인 한국 카푸친들은 또 교구 성직자들을 돕고 수도자와 장애인, 이주민, 군인들을 위한 미사전례를 거행하고 고해성사를 주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서울대신학교 영어 지도나 인천교구 이주민 사목 같은 활동도 수도형제들 개인 사도직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 한국보호구는 앞으로 이주민 사도직과 생명운동으로 공동체 사도직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을 계획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공동체 내 봉사도 무시되는 건 아니다. 수도회 밖에선 사제들의 사목에만 주목하지만, 수도회 내에선 모든 수도형제들의 활동이 똑같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사제든, 평형제든 똑같은 형제로서 사는 것, 이것이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핵심적 삶이자 수도생활 방식이다. 에드워드 다울리 형제는 "우리 한국 카푸친들은 '작은 형제의 첫째가는 사도직은 진리와 단순함과 기쁨으로 세상 안에서 복음생활을 사는 것'이라는 회헌대로 사도직과 봉사를 하고 있다"며 "앞으로는 이주민 사목과 생명운동 쪽으로 사도직 활동을 모색 중이다"고 밝혔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수도회 영성과 역사 카푸친 작은 형제회(Ordinis Fratrum Minorum Capuccinorum, O.F.M. Cap)는 성 프란치스코가 1223년에 인준 받은 회칙(수도규칙)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려는 이상에서 비롯됐다. 성 프란치스코의 실제 모범과 이미 알려진 의도, 특히 성인의 유언에서 표현된 대로 회칙을 해석해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번째 동료들을 엄격하게 닮고자하는 개혁운동으로 시작된 것. 카푸친 영성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대로 가난하고 겸손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형제애와 관상, 복음화, 가난 및 더욱 작음, 정의평화 및 창조보전 증진을 핵심적 가치로 삼고 있다. 카푸친 개혁의 시초를 장식한 인물은 당시 작은 형제회의 두 가지 중 하나였던 준수회(Observantes) 이탈리아 마르케 관구 바시오의 마태오 형제로, 1525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회칙을 문자 그대로 준수해도 된다는 구두 허락을 받는다. 이어 클레멘스 7세는 1528년 칙서를 통해 카푸친 개혁을 '은둔 생활의 작은 형제'라는 이름으로 교회법적으로 인준했고, 이들은 성 프란치스코가 입었던 수도복이라고 생각한 길고 뾰족한 모자(Cappucio)가 달린 수도복을 선택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은 후드 같은 모자, 카푸치오에서 기원한 것으로, 이탈리아어로 카푸치노(Cappuccino)는 '작은 카푸치오'라는 뜻이다. 1535년에 카푸친 작은 형제회 총대리가 된 아스티의 베르나르디노 형제는 수도회를 안팎으로 정비, 이후 카푸친들은 그를 진정한 카푸친 작은 형제회 설립자로 여기게 됐다. 1619년 교황 바오로 5세는 작은 형제회 세 가지 중 하나로 인가했다. 국내에는 1986년 7월 아일랜드 성 프란치스코와 성 파트리시오 관구 소속 형제 4명이 입국, 서울대교구에 진출함으로써 시작됐다. 한국 카푸친은 모두 16명이며, 이 가운데 6명은 선교사로 종신서약을 한 사제와 평형제가 각각 3명이다. 한국인 종신서약자는 총 7명으로, 사제는 3명이고 평형제는 4명이다. 나머지 3명은 수련자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성소 상담 ▨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지역 천사들의 성 마리아 형제회(서울시 용산구 효창동 5-40)▨ 문의 : 02-701-5727, 5720, 홍호남 고스마 성소 담당 형제 cpbc2011.04.19
![[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 (26)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cpbc.co.kr/CMS/newspaper/2010/11/rc/355668_1.0_titleImage_1.jpg)
[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 (26)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인정되기까지 '무염시태'로 불렸던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에 관한 교의는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의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에 의해 선포됐다. 이 교의는 교회의 오랜 역사 안에서 논쟁이 됐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와 동정녀라는 것도 일찍이 선포됐지만 성모님의 죄없는 잉태는 1850년대까지 미뤄진 부분이다. 성모님이 죄없이 잉태됐다고 하는 것은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초기 교부들도, 성경의 관심도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데 초점을 뒀다. 그런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데 성모 마리아의 역할과 성덕이 굉장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교부들은 성모 마리아의 성덕을 찾아낸다. 초창기 유스니토 교부는 처음으로 하와의 불순명이 성모 마리아의 순명으로 극복되는 부분을 강조한다. 이레네오 교부는 성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구속자, 공동 중재자라고까지 설명하기에 이른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모님의 원죄없는 잉태에 대해 주저했다. 토마스 데 아퀴노, 보나벤투라 등 중세기 대학자 성인들도 그 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프란치스코회 둔스 스코투스 신학자는 "성모님이 원죄없이 잉태되셨다고 하는 사실은 성모님이 예수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구원 중재 능력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크다는 것이다.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가 원죄로부터 면제될 수 있는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결코 한순간도 원죄의 지배하에 있지 않게 하실 수 있다. 둘째, 마리아를 어느 한순간만 원죄의 지배하에 있게 하실 수 있다. 셋째, 어느 시기가 지난 다음 마리아를 원죄로부터 성화하실 수 있다. 이 세 가지 가능성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실 수 있는 하느님은 과연 무엇을 선택하시겠는가 질문하고, 하느님은 가장 좋은 것을 마리아에게 이루셨음을 확신한다. 당시 유명한 중세기의 공식이 있다. "하느님은 하실 수 있었고, 원하셨으며, 따라서 하셨다"(Potuit, voluit, fecit)는 것이다. 교도권은 중립적 자세를 취했다. 교황 식스토 4세는 회칙을 반포해 더 이상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에 관해 논쟁하거나 서로 단죄하지 못하게 했다. 한편 사회적 분위기는 신학적 논쟁과 달리 성모 신심이 가열되고 있었다. 근대에 이르러 종교 개혁자들은 가톨릭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가톨릭의 대중적 경향을 비판했으며,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마리아의 승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 지성주의와 계몽주의는 반작용을 낳았고, 가톨릭의 대중신심은 신비주의 경향에 더 매력을 느낀다. 성모신심을 중심으로 많은 단체와 수도회가 생겨난다. 1841년 8월 22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가 한국교회의 수호자로 선포된다. 그리스도교 국가의 왕과 주교들은 교황에게 빈번히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교의로 선포해 줄 것을 요청한다. 1667년부터 1799년까지 교황 13명은 선대 교황의 입장을 따라 중립을 지킨다. 성모 축일을 장려하면서도 신앙 교의로 선포하지는 않았다. 1840년 10명의 프랑스 주교들이 공동 서한으로 그레고리오 16세에게 교의 선포를 청원한다. 마리아 신심이 깊었던 비오 9세가 1846년 교황이 된다. 그도 끊임없이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에 관한 교의 선포를 요청받았다. 교황은 주교들에게 설문지를 보내 호의적인 답을 얻었고, 1854년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을 선포했다. 36항으로 구성된 회칙은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탁월한 위치에 있음을 설명하고,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소개한다. 또 선대 교황들이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신심을 격려했던 사실을 열거했다.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cpbc2010.11.02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6> 제주 교육의 별 최정숙](//cpbc.co.kr/CMS/newspaper/2011/03/rc/370327_1.0_titleImage_1.jpg)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제주 교육의 별 최정숙 독립운동가, 교육자, 의사 등 모두 주님 향한 길... 신성여학교 시절에 영세한 뒤 진명여고 등서 독립 만세 외치다 감옥생활... 고향서 교육자의 길 걷다가 의학 공부해 빈민들 도와... 재속 프란치스코회 입회해 동정 지키며 단식과 기도... 초대 제주도 교육감 등 지내며 늘 겸손하고 가난한 삶'제주 교육의 별'이 된 최정숙 선생. 제주가 낳은 독립운동가, 여성 계몽운동가,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 출신 의사, 초대 신성여중ㆍ고 교장, 대한적십자사 제주도지사 부지사장, 초대 제주도 교육감 등으로 평생 애덕의 삶을 산 선각자. 그러나 그에 앞서 자신의 온 생애를 하느님께 봉헌하며 성 프란치스코를 따른 제주의 첫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 바로 최정숙(베아트리체) 선생이다.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족 중 맨 먼저 천주교에 입교해 가족을 복음화하고, 인술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신앙심을 기반으로 육영, 특히 여성교육에 헌신했으며, 나아가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빛나는 사표가 된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수도자 꿈 꾸다가 독립운동가로 최정숙은 1902년 생이다. 대한제국 광무 6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성장했다면, 여성이 신학문을 공부한다는 자체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법조인이던 아버지 최원순씨, 어머니 박효원씨 사이 6남매 가운데 맏딸로 태어난 그는 9살에 제주 신성여학교에 입학,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수도자들에게서 교육을 받고 1913년에 세례를 받는다. 세례를 받기에 앞서 미사 참례와 기도생활에 열심했던 그는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의 일생을 주님께 바치기로 약속한다. 이듬해 신성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업과에 들어갔다. 2년간 교육과정을 마칠 무렵에 3ㆍ1운동이 일어났다. 18살이던 그도 교문을 나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걷고 걸었다. 그렇게 조선총독부로 향하던 중 진고개(현 충무로)에서 일본 관헌에 잡혀 남산 정무총감부로 끌려가 주동자를 캐내려는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고문과 매질을 감수해야 했다.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있던 그는 일왕을 위해 교육에 힘을 쏟으라는 말을 듣고 느닷없이 석방된다. 하지만 일왕을 찬양하는 졸업장을 받을 수 없었던 그는 졸업식에 참석치 않고 고향 제주로 내려간다. 그런데도 담임 교사는 그에게 졸업장과 교사 자격증을 보내줬다. 그 기쁨도 잠시, 그는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으며 79소녀결사대 주모자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다. 고문과 고통 중에서도 그는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천주님,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빛을 주십시오. 성모님, 저희를 위해 빌어 주십시오." 유관순 열사와 함께 갇혀있던 그는 진명여고 교사들의 노력으로 석방됐지만, 재판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이로써 최정숙은 수녀회에 입회하려던 꿈을 접어야 했다. 광복을 위해 나선 애국의 길이었지만, 사상범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수녀회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 수도의 길은 막혔으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동정녀로서 일생을 주님께 몸 바치기로 한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성 계몽운동에 이어 애덕의 길로 감옥에서 시달린 최정숙은 고향 제주로 돌아오자마자 여성 계몽에 앞장서기로 했다. 때마침 일본에서 절친한 친구 강평국이 귀국하자 그와 함께 1922년 여수원을 열어 여성들을 가르쳤다. 밤낮없이 학생들을 불러 모으고 지역 유지들과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여학교 설립을 위한 기금을 모았지만, 제주에서 여학생들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없이 남학생도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명신학교를 설립했다. 200여 명을 헤아리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노심초사하던 그는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건강을 잃은 그가 서울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명신학교는 일제 간섭으로 제주공립보통학교에 흡수 통합되고 만다. 이에 그는 목포 사립학교 소화학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전라도 감목대리 김양홍 신부를 만나 전주 해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도 '조국의 산하'라는 노래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돼 형무소에 수감됐다. 얼마 뒤 풀려나온 그는 다시 상경, 1939년 38살 늦깎이로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에 입학해 의학 공부를 하게 됐다. 그에 앞서 1938년은 최정숙에게 잊지 못할 한 해였다. 수도자로서 삶에 대한 꿈을 잃은 채 살아야 했던 그가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서 새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서울 백동(현 혜화동)성당에 다니던 그는 오기선 신부에게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소개받고 입회한 뒤 1940년 4월 30일 서약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모범으로 삼아 동정을 지키며 단식과 기도생활을 철저히 하고 덕행을 닦는 일은 그에게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1943년 9월 경성의전을 1회로 졸업, 의사 면허를 받은 그는 성모병원에서 일하다가 이듬해 고향에 정화의원을 개업, 극빈 환자들을 주로 보살폈다. 또 일제 탄압과 운영난으로 문을 닫았던 제주 유일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 재개교에도 혼신을 기울였다. 이 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무보수 교원으로 일하던 그는 정식 중학교로 설립 인가가 나자 무보수 교장을 지냈으며, 1953년 신성여자고등학교를 신설해 초대 교장으로도 일했다. #의사로서도, 교육자로서도 가난했던 삶 6ㆍ25전쟁 중에는 제주도로 몰려든 피란민에게 구호 손길을 펴느라 그는 여념이 없었다. 서울 소신학교(성신중학교)와 대신학교가 제주로 옮겨오자 같은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노기남 대주교와 함께 신성여중에 피란 신학교를 개설하고 뒷바라지했다. 또 제주로 피란을 온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원들도 보살폈다. 몰려든 피란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병을 치료하고, 간호하는 법을 가르치느라 그는 늘 파김치가 되곤 했다. 특히 개업의였음에도 그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서 피란민을 포함 극빈자들을 주로 치료, 재정적 어려움이 매우 컸다. 그럼에도 그는 12살 영세 때 봉헌한 첫마음을 잃지 않았다. 당시 비망록을 보면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항상 천주께 감사하자. 천주 사업을 위해 몸 바친 이상 내 개인 문제로 고민하지 말자. 성경에도 있지 않은가. 재물을 세상에 쌓아두는 것보다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의사로서도 가난했고, 교육자로서도 가난했다. 그래도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풍요로웠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입회 서약은 그에게 소유 없이 사는 가난에 대한 풍요로움을 늘 일깨웠다. 이같은 피란민과 빈민 구호 여정이 교황청에 알려져 그는 1955년 교황청에서 한국인으로는 네 번째로 십자훈장(교육ㆍ사회ㆍ의료 사업 부문)을 받았다. 1960년 신성여중ㆍ고 교장직을 끝으로 퇴직하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던 그는 대한적십자사 제주도지사 부지사장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교육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제주도 초대 교육감에 선출됐다. 전국 최초 여성 교육감이었다. 재직 중 도농간 학력 차를 극복하고자 대정여중ㆍ고, 한림여중ㆍ실업고 등을 설립했으며, 제주교육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열정적이었지만 조용했고 업적 또한 많았지만 겸손했던 그는 제주교구, 나아가 한국천주교회에 빛나는 모범이 됐다.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참된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의 여정을 걸어간 그는 1977년 2월 하느님 품에 안겼다. 자료 제공=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정리=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11.03.15
[하루 한 장 성경읽기] 이사야서 해설 이제 「이사야서」를 읽을 차례입니다. 「이사야서」는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다니엘서」와 더불어 '대예언서'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구약성경에는 12개 '소예언서'가 있는데, 대소(大小) 구분 기준은 작품 수준이나 중요성이 아니라 분량입니다. 실제로 66장으로 구성된 「이사야서」는 분량이 가장 많은 예언서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시편」 다음으로 인용이 가장 많을 정도로 예수님께서 즐겨 묵상하시던 예언서입니다. (1)「이사야서」의 저자 「이사야서」는 유다 우찌야(기원전 781~740) 통치 말기에 소명을 받아 요담ㆍ아하즈ㆍ히즈키야(716~687) 시대까지 약 40여 년간(740~700) 예언활동(이사 1,1)을 했던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 모음집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 나타난 이사야는 유다가 외세에 흔들리던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의해 함락이 돼 유다 백성이 바빌론으로 유배 간 시절과, 유배를 갔던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에 귀환해 공동체를 재건하는 기원전 6세기 후반까지 긴 기간 다양한 시대 배경 속에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학자들은 「이사야서」가 기원전 8세기에 활약했던 원조(元祖) '이사야' 외에도 또 다른 두 명의 익명 예언자들의 말씀을 담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元) 이사야를 '제1 이사야'라 부르고, 다른 두 명의 예언자들을 '제2 이사야'와 '제3 이사야'라 부릅니다. 또 이렇게 서로 다른 시대에 활동하던 여러 사람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같은 사상, 곧 제1 이사야의 신학 사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작품이기에, 「이사야서」는 하나의 작품입니다. (2) 「이사야서」의 구조와 주된 메시지 「이사야서」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제1 이사야서」: 1,1-39,8. 2)「제2 이사야서」: 40,1-55,13. 3)「제3 이사야서」: 56,1-66,24. (3)「제1 이사야서」의 가르침 예루살렘의 한 귀족 가문 출신인 제1 이사야, 곧 이사야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초월적인 거룩하심과 죄 많은 인간의 비참함을 통절하게 체험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곧 '임마누엘'(이사 7,14)이시기에, 이사야는 강대국인 아시리아, 바빌론과 이집트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던 유다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야훼 하느님께 대한 견고한 믿음으로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향, 곧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담대하게 가르쳤습니다. (4)「제2 이사야서」의 가르침 기원전 6세기 중반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익명의 유다인이던 제2 이사야는 좌절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네 번에 걸친 '주님 종의 노래'(이사 42,1-9; 49,1-7; 50,4-9; 52,13-53,12)를 통해 제2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빌론 탈출, 곧 '제2의 출애굽'을 약속하면서, 바빌론 억압에 허덕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과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5)「제3 이사야서」의 가르침 기원전 538년경에 바빌론 유배에서 해방돼 팔레스티나로 되돌아왔지만, 장밋빛 인생을 그리던 이스라엘 백성을 맞이한 것은 암울한 현실뿐이었습니다. 새 예루살렘 재건은 더디기만 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토지 분배와 안식일 준수 등에 대한 논쟁으로 분열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에 빠지고 자기 자식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이들마저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3 이사야는 묵시문학적인 언어로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새날을 묘사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새로운 희망을 갖도록 해줍니다(이사 60~62장). 사회정의를 이루는 진정한 예배를 바칠 때,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뭇 민족이 예루살렘 위에서 하느님 영광을 보고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자는 선포합니다(이사 65~66장). (6)「이사야서」의 전체적 가르침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사야서」는 각 시대 배경에 따라 각기 다른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대 배경에서도 동일하게 울려 퍼지는 메시지 역시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신학 사상이 바로 만민의 보편적인 구원관입니다. 이방인이라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계명에 따라 살 때 그는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이 모여와 다음과 같이 외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이사 2,3). 온 인류가 다 함께 한 마음으로 평화롭게 하느님께 찬미의 예배를 드리는 날이 오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이힘2008.12.23
![[성경 속 상징]19-길](//cpbc.co.kr/CMS/newspaper/2008/09/rc/26691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19-길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서울의 거리 이름들이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식으로 바꿔 부르다가 광복 이후에는 전부 우리 식으로 다시 바뀌었다. 충무로의 옛날 이름은 진고개였다. 광복 전에는 남산 주위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 남산 아래에 있는 진고개는 자연스레 일본인들의 주 생활 무대가 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진고개를 '혼마치'라고 불렀는데 일본 상인들의 삶터였다. 그들은 혼마치를 대대적으로 개발해 서울에서 제일가는 곳으로 만들려고 했다. 한편 해방이 되어 이 거리는 진고개라는 옛 이름 대신 충무로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됐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서울의 거리 이름에는 사연과 역사가 묻어있다. 길의 이미지는 성경에 매우 빈번하게 나타난다. 길이나 도로의 이미지는 근본적이고 윤리적인 주제들과 관련을 갖는다. 하느님과 인간의 행동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의 특징에 대한 심오한 사상을 길에 비유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구약성경에서 길은 하느님의 뜻과 같이,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내적 세계를 의미한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이사 55,8). 또한 인간이 가야할 인생의 길을 의미한다. "사람의 발걸음은 주님께 달려 있으니 인간이 어찌 제 길을 깨닫겠는가?"(잠언 20,24) 이처럼 성경에서는 인생의 방향과 행로를 하나의 길로 묘사한다. 사람의 생애를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역동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정적이지 않고 그 속에서 맺어진 개인적 선택들은 전체적인 인생 여정에 관계를 갖는다. 또한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 즉 율법과의 관련에 있어서 인간 삶의 방식, 생활 태도를 의미한다.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3).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길을 걸으라는 요청을 거듭 듣는다. 그러나 하느님은 생명의 길을 선택하느냐 죽음의 길을 선택하느냐를 최종적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에 맡긴다. "이제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놓아둔다"(예레 21,8). 두 개의 길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시편 1편)은 극명한 대조로 구성돼 있다. 이 주제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두 가지 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주제는 특별히 유명한 모세의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세는 그 설교에서 백성들 앞에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을 제시한다. 신약에서는 좋은 길과 나쁜 길이라는 구약성경의 두 가지 길에 대한 더 분명한 의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언급한다(마태 7,13-14). 성경에서 길이라는 상징이 정점을 이루는 곳은 예수님 자신의 증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제 길이 되신다. 예수님은 길에 머무르지 않고 길의 목적, 즉 생명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통해 모든 인간을 위한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길을 충실하게 걷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조은일2008.09.30

미리보는 2010년 한국천주교회회개와 공동체 쇄신 촉구, 반생명 문화, 그리스도교 가치관 변화에 주력 한국 천주교회는 2010년 새해를 맞아 하느님 말씀과 전례 중심의 신앙 생활을 통해 교회 구성원 개개인의 회개와 공동체의 쇄신을 촉구하여 반생명적 문화를 그리스도교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복음화'에 사목 역량을 주력할 전망이다. 특히 사제의 해를 보내면서 교회 구성원 전체가 매일 기도와 성사, 신앙 공부를 통한 자신의 성화에 힘씀으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일치하고, 아시아 평신도 대회를 개최해 복음화를 위한 보편교회와의 형제적 친교와 협력을 증진해 나갈 계획이다. 전국 각 교구장이 발표한 2010년 사목지침과 주교회의 일정, 각 교구 주요 행사 등을 토대로 새해 한국 천주교회의 흐름을 조망해 본다. ▨ 복음화와 선교 전국 교구장 주교들은 2010년 사목교서를 통해 하느님 말씀 실천으로 복음화 토대를 마련해 나갈 것을 특별히 강조했다. 복음화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 말씀으로 바로잡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말씀을 우리 삶 가운데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 교구장 주교들은 쇄신과 복음화를 위해 성경을 자주 읽고, 읽은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것을 서로 나누고 실천할 것을 권고했다. 전주교구는 본당과 가정 성경 봉안 운동을 지속 전개하고, 전 신자 한 가지 이상 성경 운동 참가를 본당 중점 사업으로 펼친다. 또 매체와 문화 예술 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 2010년을 '새로운 복음화의 해'로 정한 광주대교구는 △매일 20분 성경 읽고,10분 새기는 시간 갖기 △미사 10분 전 도착, 미사후 20분간 머물며 성체 조배 및 친교 나누기 △본당 주일미사 참례율 20% 올리기, 쉬는신자 비율 10% 내리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기로 했다. 수원교구 역시 교구민 성경 읽기, 쓰기 및 성경 공부 활성화로 시노두스 실현 과제를 극대화 해 나갈 방침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서울대교구는 복음화 2020운동의 주체가 될 평신도 양성을 위해 '선교학교'를 운영하기로 했다. 해외 선교에 대한 교구 시스템 구축도 올해 눈여겨 볼 사업이다. 해외 선교에 적극적인 수원교구는 해외 선교 시스템을 구축 해외 선교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고 조직체계를 확립할 방침이다. 특히 복음화국 산하 해외 선교부에 아프리카수단선교위원회와 중국선교위원회를 운영하면서 현지 교구와의 협력 사업을 적극 실행해 나가기로 했다. 서울대교구도 해외 선교 촉진을 위해 평신도 선교사를 양성하기로 했으며, 광주대교구도 해외 선교 사제 후원회를 결성 해외 선교에 대한 체계적 시스템을 마련키로 했다. ▨ 생명 가치를 선포하는 교회 한국천주교회는 새해에도 가정사목이 모든 사목의 기초임을 재인식, 가정 복음화와 가정교회 구축에 매진할 계획이다. 서울대교구는 본당ㆍ지구ㆍ교구가 연계하는 가정사목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낙태 상처 치유 프로그램 △예비부모학교 △부부 태교교실 △부모 성교실 △가정 성화와 생명수호를 위한 월례 특강 및 미사를 운영하기로 했다. 전주교구는 가족 미사, 가족 성체조배, 성시간 등 가족전례를 활성화 하고 가정성화를 위한 전례 개발 및 보급에 힘쓰기로 했다. 특히 다문화 가정을 위해 결혼 이민자 상담 및 보호, 자녀들을 위한 방과 후 프로그램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수원교구도 본당 내 매주 가족 미사 운영하고 위기 가정 예방과 출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그리스도교 가정관 확립에 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군종교구 역시 매일 가정 기도 시간을 갖도록 했고, 인천교구는 교구 전 신자를 대상으로 가정성화를 위한 특강과 생명교육을 실시하기로 했다. ▨ 주교회의 주요 활동 주교회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는 8월 31~9월 5일 서울에서 '아시아에서 그리스도 선포하기'를 주제로 아시아 평신도 대회를 개최한다. 교황청 인류복음화성과 평신도평의회가 주최하는 이번 대회는 「아시아 교회」 「평신도 그리스도인」 「교회의 선교 사명」 등 교회 세 문헌을 집중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이번 대회 준비를 위해 이 대회에 앞서 한국평신도대회를 개최키로 하고 전국평협 회장단으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다.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와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는 생명문화 확산을 위해 제1차 전국 생명대회는 7월 9~11일 음성 꽃동네에서 '한국교회에서의 생명운동,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주제로 개최한다. 또 청소년사목위원회와 의정부교구 제2회 한국청년대회를 7월 9~11일 개최한다. 전례위원회는 새해 주일과 대축일의 복음을 복음서 저자별로 묶어놓은 「복음집」과 「미사 밖에서 하는 영성체와 성체 신비 공경 예식」(가칭) 「병자의 도유와 사목적 배려」(가칭)예식서를 주교회의에 승인 요청할 계획이다.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위는 1월 19일 부산 중앙성당에서 일치 기도회를 개최하고, 천주교ㆍ개신교 신학자 모임을 연다. 또 한일 주교 교류 모임과 청년 교류 모임을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한다.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는 주교회의 2009년 가을 총회 결정에 따라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2179명'(11개 교구)에 대한 제2차 시복 사업을 통합 추진한다. 아울러 한국전쟁 전후 순교자들인 '한국교회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 조사도 함께 진행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이길재2009.12.29
![[성경속 상징]35-어둠- 무지나 어리석음, 거짓말로](//cpbc.co.kr/CMS/newspaper/2009/02/rc/283096_1.2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35-어둠- 무지나 어리석음, 거짓말로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어둠은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를 뜻한다. 어둠은 자연의 실재이고 영적 실재이며 동시에 심오한 인간 체험의 어떤 부분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기도 하다. 어둠은 그림자와는 구별된다. 어둠은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상태를 비유하는 경우에도 쓰인다. 고대 사람들은 인생을, 심지어는 우주를 빛과 어두움 사이 투쟁으로 생각했다. 어둠의 이미지는 문학, 예술 등에 많이 쓰인다. 성경의 첫 장에 어두움과 빛이 함께 등장한다. 하느님은 첫 번째 창조물로 빛을 만드신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3-5).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5 공동번역).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미래에 다가올 심판을 예고할 때 어두움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내가 보니 땅은 혼돈과 불모요 하늘에는 빛이 사라졌다"(예레 4,23).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어두움은 항상 빛과 대조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어두움으로부터 빛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구원을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 밤의 어두움에 함축된 의미는 사악함이다.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서는 시각적 판별이 어렵다. 어두움은 악한 행위를 숨겨 모든 것을 더욱 사악하게 만든다. 사도 바오로는 이 같은 어두움의 특성을 잘 요약하고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 사실 그들이 은밀히 저지르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에페 5,11-12). 비유적 의미로 어두움은 무지나 어리석음, 선지자적 계시의 침묵, 거짓말 등으로 나타난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1요한 1,6). 또한 어두움은 죽음이나 무덤과 같은 이미지로 사용된다. "제가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어둠과 암흑의 땅으로 가기 전에. 칠흑같이 캄캄한 땅, 혼란과 암흑만 있고 빛마저 칠흑 같은 곳으로 가기 전에 말입니다"(욥 10,21-22). 비록 실제적인 감옥은 아니지만, 어두움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기력한 상황으로 감옥을 연상하게 한다. 영적 힘으로서 어두움의 세력은 너무도 생생해서 상징 이상의 의미로, 영적 실재를 나타냈다. 예수님께서 직접 "어둠의 권세"(루카 22,53)라는 언급을 하셨다. 사도 바오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라고 했다(에페 6,12). 어두움은 인간 사회와 우주 속에서 선함과 질서의 하느님께 대적하는 사악함과 연관된다. 어두움도 사실 하느님 통제 아래 존재할 뿐이다(욥 38,19). 하느님께서는 어두움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셨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둠 속에 살지 말 것을 단호하게 선언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2,8).조은일2009.02.10
![[생활속의 복음] 대림 제1주일- 예수님 흉내내기로 예수님 태어나실 분위기를 만듭시다](//cpbc.co.kr/CMS/newspaper/2010/11/rc/358157_1.1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대림 제1주일- 예수님 흉내내기로 예수님 태어나실 분위기를 만듭시다박용식 신부(원주교구 횡성본당 주임)오늘부터 예수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인간은 한번 태어난 후 또 다시 태어날 수 없지만 예수님은 다시 태어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에 2000년 전 12월 25일에 태어나셨지만 또 다시 태어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성탄에 예수님이 또 태어나실 것을 기다리며 준비합니다. 내 안에 다시 태어나시어 나를 구원해 주십사고 청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학자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이신 주님이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탄생하시지만 만일 내 마음에 태어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하고 질문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태어나시지 않으면 성탄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 됩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어떤 사람 안에 태어나시는가? 어떻게 해야 내 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실 수 있을까? 내 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게 하려면 내 안에 예수님 태어나실 풍토와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집안 분위기를 예수님께서 태어나고 싶은 분위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사제가 태어날 만한 집안분위기에서 태어나서 자랐기에 사제가 된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자란 환경과 집안 분위기는 그야말로 사제를 탄생시킬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순교하시고 아버지마저 순교하실 만큼 신앙심이 깊은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집안의 모든 분위기가 신앙 중심이었고 신앙이 삶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환경에서 자연스레 신앙심이 몸에 배였던 풍토였습니다. 신학생으로 마카오에 뽑혀갔을 때 마카오의 세 신학생들을 맞이한 조선신학교 책임자 칼르리 신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에게 전적으로 맡긴 세 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신심, 겸손, 면학심, 선생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자라온 환경과 배경이 신부되는 데 손색이 없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우리의 집안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방마다 중심에 십자가가 걸려있고 성모상, 성인들의 상본, 성경책, 묵주 등 신앙적인 분위기입니까? 아니면 방의 중심에는 사진이나 장식물이 걸려 있고 십자가는 구석으로 몰려 있어 그 위에는 걸레나 옷가지들이 걸려있거나 덮여있지는 않습니까? 아침ㆍ저녁기도, 식사전ㆍ후기도, 묵주 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등을 자연스럽게 바치고 있습니까? 평일미사에까지 참여하며 성당에서 봉사하고 성서를 읽는 등 신앙적 분위기입니까? 아니면 일주일에 겨우 한번 마지못해 성당에 나오고 그 밖에는 예수님의 '예'자도 들어볼 수 없는 그런 환경입니까? 애들은 학교교육, 과외, 외모에만 신경을 쓰고, 연예인들이나 흉내내고 어른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잘 벌고 세속의 쾌락과 즐거움을 누리는 데만 중점을 두는 집안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실천하는 분위기입니까? 환경과 풍토가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 집안 분위기를 신앙 분위기로, 집안 환경을 기도하는 환경으로 만듭시다. 그리고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세속적으로 출세한 사람을 따라하고 흉내내는 분위기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하며 예수님을 흉내내는 분위기로 만듭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흉내 내고, 예수님을 따라하고,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하면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집안 분위기를 예수님을 소중히 여기는 분위기로, 우리의 풍토와 환경을 예수님을 탄생시킬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면 우리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또 다시 기다리는 것은 이번 성탄에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셔야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에 예수께서 우리 안에 다시 태어나셔야 우리가 안고 있는 그 많은 문제들까지 해결하거나 또는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성탄에 우리 안에 예수님을 탄생시킬 분위기를 만들어 봅시다. 평소에 안 하던 기도를 하든가, 성당봉사나 청소를 하든가, 전에 안 하던 구역반 모임에 참가하든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좋은 환경과 분위기를 만드는 방법은 많습니다. 이번 성탄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예수님을 흉내냄으로써 예수님을 탄생시킵시다. ▲박용식(시몬) 신부는 1979년 사제품을 받고 원주교구 풍수원본당 주임, 미국 버지니아 성바오로 정하상본당 주임, 황지ㆍ봉산동본당 주임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예수님 흉내내기」와 「예수님 따라하기」 등이 있다.조은일2010.11.23
![[기획/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12> '이코니온에서'](//cpbc.co.kr/CMS/newspaper/2011/04/rc/373338_1.0_titleImage_1.jpg)
[기획/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 '이코니온에서'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의 투사가 되다... 이코니온은 수 세기 동안 강력한 그리스도교회 중심이며 대교회였다...◇작가노트 ;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성 테클라의 모습이다. 첫 번째 여성 순교자인 테클라의 영혼을 겹쳐 표현해봤다. 또 바오로 사도가 돌팔매질당하는 순간, 예전 사도께서 돌팔매질 당하는 스테파노를 방관했던 것과 비슷한 장면을 재현했다. 스테파노의 죽음을 떠올리며 평생 숨겨온 아픔을 보속하는 마음으로 바오로 사도는 계속 이어지는 박해를 감수한다. 오늘날 터키에선 얄바치(Yalvac)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피시디아 전 지역은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가 뿌린 주님 말씀의 씨앗을 풍성하게 받아들였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유다인들과 이전의 우상숭배자들이었다.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목격하자 유다인들은 성내 귀부인과 유력자들을 선동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핍박하고 그 지역 경계선 밖으로 쫓아냈다.(사도 13,50 참조) 사도들은 다른 지역에서 선교를 계속하려고 피시디아를 떠났다. 하지만 굳건한 교회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13,52)고 루카는 전한다. 이들 두 사도가 이코니온(오늘날 터키 콘야)으로 가고자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떠났을 때는 아마도 주후 46년 가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들은 120㎞나 이어지는 먼지 가득한 사막 길을 걸어 가야 했다. 지친 사도들은 지평선 끝에서 이코니온의 오아시스를 마주한다. 해발 1030m고지에 세워진 도시는 오늘과 마찬가지로 푸르른 나무들로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고 있다. 주민들은 그리스에서 온 갈라티아인과 로마인, 유다인들이었으며 주로 양모직조업에 종사했다. 그래서 바오로는 쉽게 거처할 곳과 일거리를 찾았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처럼 이코니온의 한 회당에서 주님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유다인들은 사도들에게 주님 말씀 전파를 금지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사도들은 이전에 우상숭배자였던 사람의 집에서 주님 말씀을 가르쳤고, 한동안은 사람들이 그 집을 가득 메웠으며 그 맞은편 귀족 저택에서 온 사람들도 말씀을 경청했다. 그 귀족 딸은 테클라라고 불렸는데, 바오로가 가르치는 동안 그 가르침에 계속 귀 기울이며 창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초대 그리스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고 믿음 전파에 헌신했으며 믿음을 위해 박해와 순교를 당했다. 잘 알려진 대로 교회에서 첫 번째로 순교한 여인은 테클라(Thecla)이며, 정교회는 9월 24일(가톨릭교회는 9월 23일로 지냄, 동서방 교회 간 시차로 날짜가 하루 차이가 남)을 성녀를 추모하는 축일로 정해 기념한다. 사도들은 1년 넘게 이코니온에서 선교했다. 도시 안에서만 선교한 것은 아니었다. 소도시와 시골에서도 선교를 했다. 루카는 우리에게 "많은 유다인과 우상숭배자들이 주님 은총에 관한 말씀을 듣고 사도들이 행한 기적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됐다'"(사도 14,1-3 참조)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유다인들은 여전히 사도들을 적대하도록 우상숭배자들을 선동했다. 도시 주민들은 차츰 둘로 나뉘게 됐다. 한쪽은 유다인들과 합세하고, 다른 쪽은 사도들과 합세했다. 이러한 상황은 곧 교착상태에 빠졌고, 우상숭배자들은 유다인들, 그리고 그들의 지배자들과 함께 사도들을 괴롭히고 돌로 쳐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을 알게 된 사도들은 이코니온에서 떠나 리카오니아 지방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 인근 지역으로 피신해 선교를 계속했다. 이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줬던 임무였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 사도들은 박해에 동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요한 15,20)라고 말한 주님께서 또 다시 그들에게 미리 알려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이코니온에는 바오로 사도의 이름을 딴 비잔틴 성당이 남아 있다. 또 도시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곳에 '성 바오로 사도의 굴'로 불리는 바위 위 수도원이 있다. 그 너머에 바위를 파고 들어간 아주 오래된 모자이크 성당들이 있다. 이코니온은 수 세기 동안 강력한 그리스도교회 중심이었으며, 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사도는 다시 한 번 선교를 중지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강도들 소굴이었던 지역 가운데 하나인 리카오니아였다. 이틀을 걸어 리카오니아 지방 리스트라에 도착했다. 주민들은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이었지만 무지와 미신에 빠져있었다. 도시 성문 앞에서 사도들이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작은 제우스 신전이었다. 그곳에서 주민들은 도시를 위해 제물을 바쳤다. 사도들은 리스트라에 머무는 동안 이코니온 형제들의 추천으로 이 도시에서 거의 유일한 히브리인 가족에게 환대를 받는다. 가족들은 히브리인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 아들 티모테오였다. 이들은 매우 경건한 신앙을 지켜온 가족으로, 티오테오는 모세 율법을 믿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성경을 배웠다. 에우니케의 이교도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티모테오를 매우 좋아했던 바오로는 후에 그를 수행원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에페소 교회 주교로 서품했다. 이 가족의 보금자리는 이 도시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첫 번째 중심지가 됐고, 사도들은 거의 1년 동안 도시와 주변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어느 날 사도들이 가르치는 동안 청중들 가운데서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마비된 앉은뱅이 한 사람을 봤다. 그는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다. 그는 바오로의 설교를 주의 깊게 경청했고, 바오로는 그를 주목했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음을 느꼈을 때 그를 구해주고자 큰 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그 사람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군중은 그 기적을 보고 소리쳤다.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로,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다. 제우스의 사제들은 사도들에게 바치기 위해 꽃으로 단장한 황소들을 끌고 왔다. 우리는 사도들이 어떻게 항의했을지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 14,15). 그럼에도 리스트라 주민들은 사도들에게 희생물을 바치기를 원해 사도들은 간신히 군중을 말렸다. 며칠 뒤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온 유다인들이 사도들을 죽이고자 몰려왔다. 바르나바는 거기에 없었고, 바오로는 적에게서 돌로 공격을 받게 됐다. 그들은 바오로가 죽었다고 여겨질 때까지 돌로 쳤다. 그리고서 그를 끌어내 도시 밖으로 내쳤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오로 사도에게 다가와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하고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상처를 감싸 줬다. 그런 와중에도 사도들은 그날 밤 도시에 남아 있는 히브리인들의 새로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리스트라를 떠나야 했다. 한 바오로 연구자는 바오로가 돌팔매질 당하는 순간에 자신이 참여했던 또 다른 돌팔매질 장면을 떠올렸고 천사로 보이는 한 사람이 자신을 고개 숙여 내려다 보는 것처럼 느꼈다고 전한다. 그때 그는 그 사람을 알아 봤다. "스테파노여,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제가 당신 죽음에 대한 죗값을 치른 것입니까?" 스테파노는 바오로 생애 동안 지속돼온 숨겨져 있는 아픔이었다. 바오로는 예전에 돌팔매질 당하던 스테파노와 똑같이 돌팔매질 당했다. 주님은 가끔 자신의 동조자들이 박해나 순교를 당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들이 그 임무를 더 잘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교회는 믿음의 투사가 필요하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오세택2011.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