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6> 제주 교육의 별 최정숙](//cpbc.co.kr/CMS/newspaper/2011/03/rc/370327_1.0_titleImage_1.jpg)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제주 교육의 별 최정숙 독립운동가, 교육자, 의사 등 모두 주님 향한 길... 신성여학교 시절에 영세한 뒤 진명여고 등서 독립 만세 외치다 감옥생활... 고향서 교육자의 길 걷다가 의학 공부해 빈민들 도와... 재속 프란치스코회 입회해 동정 지키며 단식과 기도... 초대 제주도 교육감 등 지내며 늘 겸손하고 가난한 삶'제주 교육의 별'이 된 최정숙 선생. 제주가 낳은 독립운동가, 여성 계몽운동가,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 출신 의사, 초대 신성여중ㆍ고 교장, 대한적십자사 제주도지사 부지사장, 초대 제주도 교육감 등으로 평생 애덕의 삶을 산 선각자. 그러나 그에 앞서 자신의 온 생애를 하느님께 봉헌하며 성 프란치스코를 따른 제주의 첫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 바로 최정숙(베아트리체) 선생이다.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족 중 맨 먼저 천주교에 입교해 가족을 복음화하고, 인술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신앙심을 기반으로 육영, 특히 여성교육에 헌신했으며, 나아가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빛나는 사표가 된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수도자 꿈 꾸다가 독립운동가로 최정숙은 1902년 생이다. 대한제국 광무 6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성장했다면, 여성이 신학문을 공부한다는 자체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법조인이던 아버지 최원순씨, 어머니 박효원씨 사이 6남매 가운데 맏딸로 태어난 그는 9살에 제주 신성여학교에 입학,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수도자들에게서 교육을 받고 1913년에 세례를 받는다. 세례를 받기에 앞서 미사 참례와 기도생활에 열심했던 그는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의 일생을 주님께 바치기로 약속한다. 이듬해 신성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업과에 들어갔다. 2년간 교육과정을 마칠 무렵에 3ㆍ1운동이 일어났다. 18살이던 그도 교문을 나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걷고 걸었다. 그렇게 조선총독부로 향하던 중 진고개(현 충무로)에서 일본 관헌에 잡혀 남산 정무총감부로 끌려가 주동자를 캐내려는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고문과 매질을 감수해야 했다.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있던 그는 일왕을 위해 교육에 힘을 쏟으라는 말을 듣고 느닷없이 석방된다. 하지만 일왕을 찬양하는 졸업장을 받을 수 없었던 그는 졸업식에 참석치 않고 고향 제주로 내려간다. 그런데도 담임 교사는 그에게 졸업장과 교사 자격증을 보내줬다. 그 기쁨도 잠시, 그는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으며 79소녀결사대 주모자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다. 고문과 고통 중에서도 그는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천주님,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빛을 주십시오. 성모님, 저희를 위해 빌어 주십시오." 유관순 열사와 함께 갇혀있던 그는 진명여고 교사들의 노력으로 석방됐지만, 재판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이로써 최정숙은 수녀회에 입회하려던 꿈을 접어야 했다. 광복을 위해 나선 애국의 길이었지만, 사상범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수녀회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 수도의 길은 막혔으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동정녀로서 일생을 주님께 몸 바치기로 한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성 계몽운동에 이어 애덕의 길로 감옥에서 시달린 최정숙은 고향 제주로 돌아오자마자 여성 계몽에 앞장서기로 했다. 때마침 일본에서 절친한 친구 강평국이 귀국하자 그와 함께 1922년 여수원을 열어 여성들을 가르쳤다. 밤낮없이 학생들을 불러 모으고 지역 유지들과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여학교 설립을 위한 기금을 모았지만, 제주에서 여학생들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없이 남학생도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명신학교를 설립했다. 200여 명을 헤아리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노심초사하던 그는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건강을 잃은 그가 서울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명신학교는 일제 간섭으로 제주공립보통학교에 흡수 통합되고 만다. 이에 그는 목포 사립학교 소화학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전라도 감목대리 김양홍 신부를 만나 전주 해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도 '조국의 산하'라는 노래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돼 형무소에 수감됐다. 얼마 뒤 풀려나온 그는 다시 상경, 1939년 38살 늦깎이로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에 입학해 의학 공부를 하게 됐다. 그에 앞서 1938년은 최정숙에게 잊지 못할 한 해였다. 수도자로서 삶에 대한 꿈을 잃은 채 살아야 했던 그가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서 새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서울 백동(현 혜화동)성당에 다니던 그는 오기선 신부에게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소개받고 입회한 뒤 1940년 4월 30일 서약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모범으로 삼아 동정을 지키며 단식과 기도생활을 철저히 하고 덕행을 닦는 일은 그에게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1943년 9월 경성의전을 1회로 졸업, 의사 면허를 받은 그는 성모병원에서 일하다가 이듬해 고향에 정화의원을 개업, 극빈 환자들을 주로 보살폈다. 또 일제 탄압과 운영난으로 문을 닫았던 제주 유일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 재개교에도 혼신을 기울였다. 이 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무보수 교원으로 일하던 그는 정식 중학교로 설립 인가가 나자 무보수 교장을 지냈으며, 1953년 신성여자고등학교를 신설해 초대 교장으로도 일했다. #의사로서도, 교육자로서도 가난했던 삶 6ㆍ25전쟁 중에는 제주도로 몰려든 피란민에게 구호 손길을 펴느라 그는 여념이 없었다. 서울 소신학교(성신중학교)와 대신학교가 제주로 옮겨오자 같은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노기남 대주교와 함께 신성여중에 피란 신학교를 개설하고 뒷바라지했다. 또 제주로 피란을 온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원들도 보살폈다. 몰려든 피란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병을 치료하고, 간호하는 법을 가르치느라 그는 늘 파김치가 되곤 했다. 특히 개업의였음에도 그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서 피란민을 포함 극빈자들을 주로 치료, 재정적 어려움이 매우 컸다. 그럼에도 그는 12살 영세 때 봉헌한 첫마음을 잃지 않았다. 당시 비망록을 보면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항상 천주께 감사하자. 천주 사업을 위해 몸 바친 이상 내 개인 문제로 고민하지 말자. 성경에도 있지 않은가. 재물을 세상에 쌓아두는 것보다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의사로서도 가난했고, 교육자로서도 가난했다. 그래도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풍요로웠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입회 서약은 그에게 소유 없이 사는 가난에 대한 풍요로움을 늘 일깨웠다. 이같은 피란민과 빈민 구호 여정이 교황청에 알려져 그는 1955년 교황청에서 한국인으로는 네 번째로 십자훈장(교육ㆍ사회ㆍ의료 사업 부문)을 받았다. 1960년 신성여중ㆍ고 교장직을 끝으로 퇴직하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던 그는 대한적십자사 제주도지사 부지사장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교육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제주도 초대 교육감에 선출됐다. 전국 최초 여성 교육감이었다. 재직 중 도농간 학력 차를 극복하고자 대정여중ㆍ고, 한림여중ㆍ실업고 등을 설립했으며, 제주교육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열정적이었지만 조용했고 업적 또한 많았지만 겸손했던 그는 제주교구, 나아가 한국천주교회에 빛나는 모범이 됐다.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참된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의 여정을 걸어간 그는 1977년 2월 하느님 품에 안겼다. 자료 제공=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정리=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11.03.15
[하루 한 장 성경읽기] 이사야서 해설 이제 「이사야서」를 읽을 차례입니다. 「이사야서」는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다니엘서」와 더불어 '대예언서'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구약성경에는 12개 '소예언서'가 있는데, 대소(大小) 구분 기준은 작품 수준이나 중요성이 아니라 분량입니다. 실제로 66장으로 구성된 「이사야서」는 분량이 가장 많은 예언서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시편」 다음으로 인용이 가장 많을 정도로 예수님께서 즐겨 묵상하시던 예언서입니다. (1)「이사야서」의 저자 「이사야서」는 유다 우찌야(기원전 781~740) 통치 말기에 소명을 받아 요담ㆍ아하즈ㆍ히즈키야(716~687) 시대까지 약 40여 년간(740~700) 예언활동(이사 1,1)을 했던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 모음집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 나타난 이사야는 유다가 외세에 흔들리던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의해 함락이 돼 유다 백성이 바빌론으로 유배 간 시절과, 유배를 갔던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에 귀환해 공동체를 재건하는 기원전 6세기 후반까지 긴 기간 다양한 시대 배경 속에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학자들은 「이사야서」가 기원전 8세기에 활약했던 원조(元祖) '이사야' 외에도 또 다른 두 명의 익명 예언자들의 말씀을 담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元) 이사야를 '제1 이사야'라 부르고, 다른 두 명의 예언자들을 '제2 이사야'와 '제3 이사야'라 부릅니다. 또 이렇게 서로 다른 시대에 활동하던 여러 사람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같은 사상, 곧 제1 이사야의 신학 사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작품이기에, 「이사야서」는 하나의 작품입니다. (2) 「이사야서」의 구조와 주된 메시지 「이사야서」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제1 이사야서」: 1,1-39,8. 2)「제2 이사야서」: 40,1-55,13. 3)「제3 이사야서」: 56,1-66,24. (3)「제1 이사야서」의 가르침 예루살렘의 한 귀족 가문 출신인 제1 이사야, 곧 이사야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초월적인 거룩하심과 죄 많은 인간의 비참함을 통절하게 체험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곧 '임마누엘'(이사 7,14)이시기에, 이사야는 강대국인 아시리아, 바빌론과 이집트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던 유다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야훼 하느님께 대한 견고한 믿음으로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향, 곧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담대하게 가르쳤습니다. (4)「제2 이사야서」의 가르침 기원전 6세기 중반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익명의 유다인이던 제2 이사야는 좌절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네 번에 걸친 '주님 종의 노래'(이사 42,1-9; 49,1-7; 50,4-9; 52,13-53,12)를 통해 제2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빌론 탈출, 곧 '제2의 출애굽'을 약속하면서, 바빌론 억압에 허덕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과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5)「제3 이사야서」의 가르침 기원전 538년경에 바빌론 유배에서 해방돼 팔레스티나로 되돌아왔지만, 장밋빛 인생을 그리던 이스라엘 백성을 맞이한 것은 암울한 현실뿐이었습니다. 새 예루살렘 재건은 더디기만 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토지 분배와 안식일 준수 등에 대한 논쟁으로 분열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에 빠지고 자기 자식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이들마저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3 이사야는 묵시문학적인 언어로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새날을 묘사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새로운 희망을 갖도록 해줍니다(이사 60~62장). 사회정의를 이루는 진정한 예배를 바칠 때,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뭇 민족이 예루살렘 위에서 하느님 영광을 보고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자는 선포합니다(이사 65~66장). (6)「이사야서」의 전체적 가르침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사야서」는 각 시대 배경에 따라 각기 다른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대 배경에서도 동일하게 울려 퍼지는 메시지 역시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신학 사상이 바로 만민의 보편적인 구원관입니다. 이방인이라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계명에 따라 살 때 그는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이 모여와 다음과 같이 외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이사 2,3). 온 인류가 다 함께 한 마음으로 평화롭게 하느님께 찬미의 예배를 드리는 날이 오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이힘2008.12.23

미리보는 2010년 한국천주교회회개와 공동체 쇄신 촉구, 반생명 문화, 그리스도교 가치관 변화에 주력 한국 천주교회는 2010년 새해를 맞아 하느님 말씀과 전례 중심의 신앙 생활을 통해 교회 구성원 개개인의 회개와 공동체의 쇄신을 촉구하여 반생명적 문화를 그리스도교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복음화'에 사목 역량을 주력할 전망이다. 특히 사제의 해를 보내면서 교회 구성원 전체가 매일 기도와 성사, 신앙 공부를 통한 자신의 성화에 힘씀으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일치하고, 아시아 평신도 대회를 개최해 복음화를 위한 보편교회와의 형제적 친교와 협력을 증진해 나갈 계획이다. 전국 각 교구장이 발표한 2010년 사목지침과 주교회의 일정, 각 교구 주요 행사 등을 토대로 새해 한국 천주교회의 흐름을 조망해 본다. ▨ 복음화와 선교 전국 교구장 주교들은 2010년 사목교서를 통해 하느님 말씀 실천으로 복음화 토대를 마련해 나갈 것을 특별히 강조했다. 복음화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 말씀으로 바로잡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말씀을 우리 삶 가운데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 교구장 주교들은 쇄신과 복음화를 위해 성경을 자주 읽고, 읽은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것을 서로 나누고 실천할 것을 권고했다. 전주교구는 본당과 가정 성경 봉안 운동을 지속 전개하고, 전 신자 한 가지 이상 성경 운동 참가를 본당 중점 사업으로 펼친다. 또 매체와 문화 예술 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 2010년을 '새로운 복음화의 해'로 정한 광주대교구는 △매일 20분 성경 읽고,10분 새기는 시간 갖기 △미사 10분 전 도착, 미사후 20분간 머물며 성체 조배 및 친교 나누기 △본당 주일미사 참례율 20% 올리기, 쉬는신자 비율 10% 내리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기로 했다. 수원교구 역시 교구민 성경 읽기, 쓰기 및 성경 공부 활성화로 시노두스 실현 과제를 극대화 해 나갈 방침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서울대교구는 복음화 2020운동의 주체가 될 평신도 양성을 위해 '선교학교'를 운영하기로 했다. 해외 선교에 대한 교구 시스템 구축도 올해 눈여겨 볼 사업이다. 해외 선교에 적극적인 수원교구는 해외 선교 시스템을 구축 해외 선교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고 조직체계를 확립할 방침이다. 특히 복음화국 산하 해외 선교부에 아프리카수단선교위원회와 중국선교위원회를 운영하면서 현지 교구와의 협력 사업을 적극 실행해 나가기로 했다. 서울대교구도 해외 선교 촉진을 위해 평신도 선교사를 양성하기로 했으며, 광주대교구도 해외 선교 사제 후원회를 결성 해외 선교에 대한 체계적 시스템을 마련키로 했다. ▨ 생명 가치를 선포하는 교회 한국천주교회는 새해에도 가정사목이 모든 사목의 기초임을 재인식, 가정 복음화와 가정교회 구축에 매진할 계획이다. 서울대교구는 본당ㆍ지구ㆍ교구가 연계하는 가정사목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낙태 상처 치유 프로그램 △예비부모학교 △부부 태교교실 △부모 성교실 △가정 성화와 생명수호를 위한 월례 특강 및 미사를 운영하기로 했다. 전주교구는 가족 미사, 가족 성체조배, 성시간 등 가족전례를 활성화 하고 가정성화를 위한 전례 개발 및 보급에 힘쓰기로 했다. 특히 다문화 가정을 위해 결혼 이민자 상담 및 보호, 자녀들을 위한 방과 후 프로그램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수원교구도 본당 내 매주 가족 미사 운영하고 위기 가정 예방과 출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그리스도교 가정관 확립에 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군종교구 역시 매일 가정 기도 시간을 갖도록 했고, 인천교구는 교구 전 신자를 대상으로 가정성화를 위한 특강과 생명교육을 실시하기로 했다. ▨ 주교회의 주요 활동 주교회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는 8월 31~9월 5일 서울에서 '아시아에서 그리스도 선포하기'를 주제로 아시아 평신도 대회를 개최한다. 교황청 인류복음화성과 평신도평의회가 주최하는 이번 대회는 「아시아 교회」 「평신도 그리스도인」 「교회의 선교 사명」 등 교회 세 문헌을 집중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이번 대회 준비를 위해 이 대회에 앞서 한국평신도대회를 개최키로 하고 전국평협 회장단으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다.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와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는 생명문화 확산을 위해 제1차 전국 생명대회는 7월 9~11일 음성 꽃동네에서 '한국교회에서의 생명운동,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주제로 개최한다. 또 청소년사목위원회와 의정부교구 제2회 한국청년대회를 7월 9~11일 개최한다. 전례위원회는 새해 주일과 대축일의 복음을 복음서 저자별로 묶어놓은 「복음집」과 「미사 밖에서 하는 영성체와 성체 신비 공경 예식」(가칭) 「병자의 도유와 사목적 배려」(가칭)예식서를 주교회의에 승인 요청할 계획이다.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위는 1월 19일 부산 중앙성당에서 일치 기도회를 개최하고, 천주교ㆍ개신교 신학자 모임을 연다. 또 한일 주교 교류 모임과 청년 교류 모임을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한다.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는 주교회의 2009년 가을 총회 결정에 따라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2179명'(11개 교구)에 대한 제2차 시복 사업을 통합 추진한다. 아울러 한국전쟁 전후 순교자들인 '한국교회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 조사도 함께 진행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이길재2009.12.29
![[기획/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12> '이코니온에서'](//cpbc.co.kr/CMS/newspaper/2011/04/rc/373338_1.0_titleImage_1.jpg)
[기획/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 '이코니온에서'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의 투사가 되다... 이코니온은 수 세기 동안 강력한 그리스도교회 중심이며 대교회였다...◇작가노트 ;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성 테클라의 모습이다. 첫 번째 여성 순교자인 테클라의 영혼을 겹쳐 표현해봤다. 또 바오로 사도가 돌팔매질당하는 순간, 예전 사도께서 돌팔매질 당하는 스테파노를 방관했던 것과 비슷한 장면을 재현했다. 스테파노의 죽음을 떠올리며 평생 숨겨온 아픔을 보속하는 마음으로 바오로 사도는 계속 이어지는 박해를 감수한다. 오늘날 터키에선 얄바치(Yalvac)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피시디아 전 지역은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가 뿌린 주님 말씀의 씨앗을 풍성하게 받아들였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유다인들과 이전의 우상숭배자들이었다.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목격하자 유다인들은 성내 귀부인과 유력자들을 선동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핍박하고 그 지역 경계선 밖으로 쫓아냈다.(사도 13,50 참조) 사도들은 다른 지역에서 선교를 계속하려고 피시디아를 떠났다. 하지만 굳건한 교회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13,52)고 루카는 전한다. 이들 두 사도가 이코니온(오늘날 터키 콘야)으로 가고자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떠났을 때는 아마도 주후 46년 가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들은 120㎞나 이어지는 먼지 가득한 사막 길을 걸어 가야 했다. 지친 사도들은 지평선 끝에서 이코니온의 오아시스를 마주한다. 해발 1030m고지에 세워진 도시는 오늘과 마찬가지로 푸르른 나무들로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고 있다. 주민들은 그리스에서 온 갈라티아인과 로마인, 유다인들이었으며 주로 양모직조업에 종사했다. 그래서 바오로는 쉽게 거처할 곳과 일거리를 찾았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처럼 이코니온의 한 회당에서 주님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유다인들은 사도들에게 주님 말씀 전파를 금지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사도들은 이전에 우상숭배자였던 사람의 집에서 주님 말씀을 가르쳤고, 한동안은 사람들이 그 집을 가득 메웠으며 그 맞은편 귀족 저택에서 온 사람들도 말씀을 경청했다. 그 귀족 딸은 테클라라고 불렸는데, 바오로가 가르치는 동안 그 가르침에 계속 귀 기울이며 창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초대 그리스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고 믿음 전파에 헌신했으며 믿음을 위해 박해와 순교를 당했다. 잘 알려진 대로 교회에서 첫 번째로 순교한 여인은 테클라(Thecla)이며, 정교회는 9월 24일(가톨릭교회는 9월 23일로 지냄, 동서방 교회 간 시차로 날짜가 하루 차이가 남)을 성녀를 추모하는 축일로 정해 기념한다. 사도들은 1년 넘게 이코니온에서 선교했다. 도시 안에서만 선교한 것은 아니었다. 소도시와 시골에서도 선교를 했다. 루카는 우리에게 "많은 유다인과 우상숭배자들이 주님 은총에 관한 말씀을 듣고 사도들이 행한 기적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됐다'"(사도 14,1-3 참조)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유다인들은 여전히 사도들을 적대하도록 우상숭배자들을 선동했다. 도시 주민들은 차츰 둘로 나뉘게 됐다. 한쪽은 유다인들과 합세하고, 다른 쪽은 사도들과 합세했다. 이러한 상황은 곧 교착상태에 빠졌고, 우상숭배자들은 유다인들, 그리고 그들의 지배자들과 함께 사도들을 괴롭히고 돌로 쳐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을 알게 된 사도들은 이코니온에서 떠나 리카오니아 지방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 인근 지역으로 피신해 선교를 계속했다. 이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줬던 임무였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 사도들은 박해에 동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요한 15,20)라고 말한 주님께서 또 다시 그들에게 미리 알려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이코니온에는 바오로 사도의 이름을 딴 비잔틴 성당이 남아 있다. 또 도시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곳에 '성 바오로 사도의 굴'로 불리는 바위 위 수도원이 있다. 그 너머에 바위를 파고 들어간 아주 오래된 모자이크 성당들이 있다. 이코니온은 수 세기 동안 강력한 그리스도교회 중심이었으며, 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사도는 다시 한 번 선교를 중지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강도들 소굴이었던 지역 가운데 하나인 리카오니아였다. 이틀을 걸어 리카오니아 지방 리스트라에 도착했다. 주민들은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이었지만 무지와 미신에 빠져있었다. 도시 성문 앞에서 사도들이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작은 제우스 신전이었다. 그곳에서 주민들은 도시를 위해 제물을 바쳤다. 사도들은 리스트라에 머무는 동안 이코니온 형제들의 추천으로 이 도시에서 거의 유일한 히브리인 가족에게 환대를 받는다. 가족들은 히브리인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 아들 티모테오였다. 이들은 매우 경건한 신앙을 지켜온 가족으로, 티오테오는 모세 율법을 믿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성경을 배웠다. 에우니케의 이교도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티모테오를 매우 좋아했던 바오로는 후에 그를 수행원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에페소 교회 주교로 서품했다. 이 가족의 보금자리는 이 도시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첫 번째 중심지가 됐고, 사도들은 거의 1년 동안 도시와 주변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어느 날 사도들이 가르치는 동안 청중들 가운데서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마비된 앉은뱅이 한 사람을 봤다. 그는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다. 그는 바오로의 설교를 주의 깊게 경청했고, 바오로는 그를 주목했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음을 느꼈을 때 그를 구해주고자 큰 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그 사람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군중은 그 기적을 보고 소리쳤다.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로,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다. 제우스의 사제들은 사도들에게 바치기 위해 꽃으로 단장한 황소들을 끌고 왔다. 우리는 사도들이 어떻게 항의했을지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 14,15). 그럼에도 리스트라 주민들은 사도들에게 희생물을 바치기를 원해 사도들은 간신히 군중을 말렸다. 며칠 뒤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온 유다인들이 사도들을 죽이고자 몰려왔다. 바르나바는 거기에 없었고, 바오로는 적에게서 돌로 공격을 받게 됐다. 그들은 바오로가 죽었다고 여겨질 때까지 돌로 쳤다. 그리고서 그를 끌어내 도시 밖으로 내쳤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오로 사도에게 다가와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하고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상처를 감싸 줬다. 그런 와중에도 사도들은 그날 밤 도시에 남아 있는 히브리인들의 새로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리스트라를 떠나야 했다. 한 바오로 연구자는 바오로가 돌팔매질 당하는 순간에 자신이 참여했던 또 다른 돌팔매질 장면을 떠올렸고 천사로 보이는 한 사람이 자신을 고개 숙여 내려다 보는 것처럼 느꼈다고 전한다. 그때 그는 그 사람을 알아 봤다. "스테파노여,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제가 당신 죽음에 대한 죗값을 치른 것입니까?" 스테파노는 바오로 생애 동안 지속돼온 숨겨져 있는 아픔이었다. 바오로는 예전에 돌팔매질 당하던 스테파노와 똑같이 돌팔매질 당했다. 주님은 가끔 자신의 동조자들이 박해나 순교를 당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들이 그 임무를 더 잘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교회는 믿음의 투사가 필요하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오세택2011.04.12
![[아! 어쩌나?] (82) 무조건 받아들어야 하나요?](//cpbc.co.kr/CMS/newspaper/2010/12/rc/360834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82) 무조건 받아들어야 하나요?Q.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나요? 신앙생활에 대해 잘 모르는 새내기 신자입니다. 그런데 가끔 성경을 묵상하면서 의문이 떠오르기도 하고, 본당 신부님 강론을 들으며 '정말 그럴까'하고 반문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선배 신자들은 "아직 믿음이 약해서 그런 것이다. 신앙은 한 오라기 의심하는 마음 없이 순수 그 자체로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저는 그 말씀에 대해 공감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그래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외침이 있습니다.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요? 아니면 제가 가톨릭교회에 맞지 않아서 그런가요? Q. 결론부터 말하자면 형제님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약하지도 가톨릭교회가 맞지 않은 것도 아닌 지극히 정상인 분입니다. 오히려 형제님에게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신자 분이 병적 콤플렉스를 가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이 가지는 정신적 병리현상 중에 '내사(Introjection, 대상의 속성을 자기 것으로 동화시키는 것)'라는 것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펄스는 "사람은 자신의 공격성을 사용하는 것을 제지당하면 권위자의 행동이나 가치관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자기 안에 동화되지 않은 채 사람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게 심리적 부작용을 일으키는 타인의 행동방식이나 가치관을 내사라고 한다"고 정의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음식을 먹는데 씹는 과정 없이 그냥 삼켜서 위장 안에 음식물이 그대로 남아 체증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이렇게 외부 메시지를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보는 과정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면 첫째, 내사 때문에 고정된 행동패턴을 보이고 습관적이고 자동화된 행동을 반복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 마음에 기쁨이 거의 없고, 고해성사를 보기 싫어서 성당에 간다고 하는 분들이 바로 이런 유형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기도가 마음에 생동감을 주는 게 아니라 지루함과 무기력함을 제공하는 좋지 않은 현상이 생깁니다. 둘째, 매번 자신의 다양한 욕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내사된 것들의 명령에 따라 그것이 자기 자신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예컨대 종교적 가치관과 부모의 가치관, 사회적 도덕률을 지나치게 많이 내사한 사람들은 그 도덕적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로봇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이들은 대부분 윗사람에게서 모범생이라는 칭찬을 듣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며 스스로 자기 인생을 만드는 창의적 삶을 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자신이 책임지는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권위 있는 사람 혹은 집단이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라며 그것들을 비판 없이 받아들입니다. 신자들이 작은 기도모임에서 자유기도 하는 것을 아주 부담스러워 하고 자기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겸손해서가 아니라 내사가 심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셋째, 관계 안에서 갈등이 심합니다. 즉, 심리적 자기고문게임을 하거나 대인관계에서 심한 갈등을 빚습니다. 외부 메시지를 씹는 과정 없이 그냥 삼키면 마음 안의 공격성(치아공격성)이 자기 자신에게 향하게 돼 자신을 비난하고 자해하는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에 대한 이해가 없다 보면 그런 갈등이 외부로 투사돼 다른 사람과도 심한 갈등을 빚게 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치아가 발달하지 않아서 씹어야 하는 음식물을 주지 않고 죽처럼 그냥 삼켜도 되는 것을 먹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했는데도 그냥 삼킬 수 있는 음식물을 주면 성장을 저해 받듯,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유아적 신앙기에는 그냥 믿어도 되는 신앙생활 패턴이 가능하지만, 신앙생활의 성장을 위해서는 나의 신앙 가치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음 안의 치아공격성을 사용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말씀들을 천천히 씹고 음미하고 소화시키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 마음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 관계 안에서 여러 가지 콤플렉스가 형성돼 마치 나뭇가지가 어지러이 얽힌 숲과 같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신앙에 입문하게 되면 하느님 말씀과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식별되지 않고 동일시되는 현상이 생깁니다. 부모님 말씀을 복음말씀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 부모님 말씀이 건강한 것이 아닌 병적인 경우에는 점점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앙생활조차도 성장하기는커녕 병적 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 빠져나오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말씀이 마음에 양식이 돼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인생의 덫이 돼 하느님께 가려는 발걸음을 제자리에 맴돌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깊은 생각을 하는 시간, 곱씹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형제님의 의심은 건강한 것이니 자신을 비하하지 마시고 지금의 자세로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홍성남 신부(서울 가좌동본당 주임) cafe.daum.net/withdoban이힘2010.12.14

제5차 아시파 총회 (하) 강연 및 인터뷰 10월 28일 막을 내린 제5차 아시파총회에 참가한 강우일ㆍ티로나 주교 인터뷰와 소공동체 이론의 대가로 불리는 로빙거 주교 강연을 싣는다. 두 주교는 "소공동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구현하는 친교의 교회인 동시에 다양한 민족과 문화로 이뤄진 아시아교회를 하나로 묶는 끈"이라며 소공동체의 미래를 낙관했다. 로빙거 주교는 복음화라는 큰 틀 안에서 성경과 소공동체, 그리고 소공동체와 실천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했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강연-복음화와 소공동체(프리츠 로빙거 주교,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알리왈교구장) 소공동체의 목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복음화다. 복음화를 위해서는 먼저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의 메시지가 나에게 다가와야 한다. 복음화는 참여하는 것이다. 참여하는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다. 주일미사에 의무적으로 참례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응답하고,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 참여다. 복음화는 먼저 자신의 삶에 응답하는 것이다. 혼자 성경을 읽고 이해한 후 이에 대해 스스로 응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소공동체는 많은 장점을 갖는다. 소공동체에서는 각자 성경을 읽고 짧게 응답하며 기도할 수 있다. '복음나누기 7단계'에서 어떤 성경 말씀이 마음에 와 닿으면 그 말씀을 반복해서 곱씹을 수 있다. 그 말씀이 왜 와 닿는지 스스로 대답할 수 있다. 그러면 자신 안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하느님 말씀을 더욱 깊이, 그리고 조심스럽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음나누기 7단계의 큰 장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겸손한 자세를 배운다. 성경만 있으면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복음화는 또한 신앙을 삶과 연결시킨다. 이는 말씀이 내 삶과 연결되는 것이다. 복음 나누기를 통해 말씀을 숙고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응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소공동체가 안고 있는 숙제이기도 하다. 다양한 문제들을 자신의 것으로만 여겨 세상 문제를 보기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늘 가까이하고, 읽고, 해석해야 한다. 평신도가 성경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성경 해석은 어떤 특정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평범한 이들도 성경을 읽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느님 말씀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소공동체를 보자. 소공동체에서도 각자 성경을 읽고 해석한다. 이는 상호의존적이다. 소공동체에서 함께 성경을 읽고 나눔을 가지면 주일미사 때 사제 강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소공동체가 함께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은 후에는 반드시 그것을 자기 삶과 연결시켜야 한다. 신앙을 새로이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소공동체는 도움이 된다. 소공동체를 통해 교회 가르침이 무엇인지, 가톨릭교회는 어떤 교회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소공동체는 신앙을 찾는 이들에게 활짝 열린 문과 같다. 특히 사제나 수도자를 직접 찾아가기가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소공동체는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열린 이웃이다. 소공동체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가장 기초적인 모임이다. 소공동체는 현대교회에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다만 아직까지 명백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도 연구 중이다. 아시파총회 같은 모임에서 서로 배우고 또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교회 본질인 '친교의 공동체'를 구현하는 데 소공동체 역할은 결정적이다. ▨소공동체, 삶과 신앙의 중심에 서야(강우일 주교, 제주교구장) 1990년대 초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재직할 당시 한국교회에 소공동체를 처음 도입한 강우일(제주교구장) 주교는 명실공히 한국교회 소공동체 운동의 산증인이다. 지금까지 다섯 차례 열린 아시파총회에 이번 총회를 포함해 네 번이나 참가할 만큼 소공동체 활성화에 열정을 쏟고 있는 강 주교는 "제5차 총회는 소공동체가 말씀 나누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삶을 일치시킴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라는 것을 확인시켜줬다"고 참가 소감을 밝혔다. "한국교회 소공동체는 아직 복음 나누기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세상을 복음화시키는 면에서는 많이 부족하죠. 그런 면에서 필리핀교회는 많은 귀감이 됩니다." 1960년대부터 소공동체 운동을 시작한 필리핀교회는 필리핀의 사회ㆍ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사회를 변화시키고, 필리핀이 민주화된 이후에는 정치적 문제와 상관 없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인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강 주교의 설명. 강 주교는 아시파총회가 거듭될수록 참가자들이 늘어나고, 또 다양화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번 총회에서는 사제와 주교들이 참석자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소공동체에 대한 성직자들의 관심이 그만큼 커진 거죠. 소공동체의 미래를 밝게 해주는 징표입니다." 강 주교는 "한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시한 교회상의 본질과 핵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상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공의회 문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시한 친교의 교회상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사목의 틀은 바로 소공동체라는 것이 강 주교의 지론이다. 강 주교는 또 "예비신자를 입교시켜 신자 수를 늘리는 전통적 의미의 선교에서 한걸음 나아가 신자 개개인이 복음적으로 삶으로써 세상을 복음적으로 바꾸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음화"라면서 "소공동체의 궁극적 목표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복음화"라고 말했다. "이번 총회에 참석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보편교회인 가톨릭은 다른 나라 교회들과 친교를 이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아시아교회와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총회에 참가한 모든 나라 교회들에게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 됐을 것으로 믿습니다." ▨풍성한 친교의 나눔이 축복(FABC평신도가정사무국 의장 롤란도 티로나 주교, 필리핀 인파타교구장) "아시아 전역에서 모인 신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었던 풍요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아시아지역이 참으로 종교적이고 또 영적 보고(寶庫)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총회를 주관한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평신도가정사무국 의장 롤란도 티로나(필리핀 인파타교구장) 주교는 "아시아 전역의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한데 모여 소공동체를 활성화하고자 머리를 맞대고, 한데 어울린 것 자체가 큰 성과"라면서 총회 결과는 물론 풍성한 나눔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올해부터 평신도가정사무국 의장을 맡고 있는 티로나 주교의 아시파총회 참석은 2006년 인도에서 열렸던 제4회 총회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티로나 주교는 "소공동체는 가톨릭 신자가 소수인 동시에 가톨릭 신자로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아시아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굳건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아시아교회에서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소공동체"라고 아시아교회 소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시파는 소공동체를 매개로 아시아교회의 연대와 화합을 일궈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파는 아시아지역에 잠재해 있는 풍요로운 영적 유산을 찾아낼 것이고, 아시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티로나 주교는 2004년 대전 정하상 교육회관에서 열렸던 FABC 제8차 총회와 2007년 선종한 정명조(부산교구장) 주교 장례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부산교구는 일본 히로시마교구와 함께 인파타교구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교구. 티로나 주교는 "방한 당시 한국 신자들의 열정적 신앙에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소공동체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 이웃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께서 이땅에서 하신 그대로 실천하기를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남정률2009.11.10
![[사람들]'쉰셋에 떠난 해외선교' 방글라데시 선교 이광미 스테파니아 수녀](//cpbc.co.kr/CMS/newspaper/2010/10/rc/352500_1.0_titleImage_1.jpg)
[사람들]'쉰셋에 떠난 해외선교' 방글라데시 선교 이광미 스테파니아 수녀 '쉰셋, 이 나이에 선교사로 떠날 수 있을까?' 2008년 11월. 방글라데시라는 새 소임지를 받아든 이광미(스테파니아,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수녀는 스스로 물었다. 적잖은 나이에 이방, 그것도 이슬람 땅에서 과연 활동적으로 사도직을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든 것. 그런데 앞서 파견된 한 수도자에게 방글라데시 국민들 평균 수명이 51살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이 수녀는 '여분의 삶'을 방글라데시에 바치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리고 기도 가운데서 받아들이고 순명했다. 홍콩을 경유해 다카 공항에 내려 바라본 대지는 회색이었지만, 그 땅 모두가 회색만은 아니었다. 가난하고 병든 작은 예수들이 있었고, 순박하고도 따스한 형제자매들이 있었다. 그리고서 2년 세월이 지났다. 이 수녀는 이제야 고백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의 내면이 참 많이 부서졌어요. 하느님께서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는 훈련을 시키셨지요. 이들과 함께 살게 되면서 이젠 방글라데시를 떠나올 수가 없게 됐어요. 방글라데시는 제게 있어 '있어야 되는 곳'입니다." 이 수녀가 활동하는 사도직 현장은 수도 다카에서 북쪽으로 120㎞ 가량 떨어진 마이멘싱 시다. 동쪽으로 메그나 강, 서쪽으로 브라마푸트라 강 물길이 지나는 저지대로, 우기 때면 광활한 습지와 물이 괸 낮은 웅덩이 하오르(haor)가 인상적인 인구 20만 명의 소도시에서 간호사로 산다. 소수부족으로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만디족(혹은 갈오족)이 많이 사는 마이멘싱교구(교구장 포넨 바오로 주교)는 교세가 7만 명에 이른다. 이 수녀가 활동하는 성 빈센트 드 뽈 의원(St. Vincent de Paul Sick Shelter &Clinic)은 갈 곳 없는 환우들의 쉼터이자 진료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용한 의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탈리아 등 해외 의료진들이 해마다 11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건기 때 2~3주씩 의료봉사를 하고 가는 '열린 진료소'로 쓴다. 의료진이 없을 때, 환자들이 오면 인근 국립병원에 데려가 진료를 받도록 주선하고 처방전을 받아 약을 사서 치료해 보낸다. 물리치료사인 성경림(마리아) 수녀, 현지인 간호사 2명과 진료소 운영에 온 힘을 쏟는 이 수녀는 인근 빈민가에서 거리 소녀들을 데려와 교육하고 보호하는 '희망이 머무는 집' 김성자(스콜라스티카) 수녀와 함께 수도공동체를 이룬다. 진료소를 찾는 환자들은 피부병 환자들이 가장 많고, 외과 환자들도 적지 않다. 이웃한 슬럼에서 노숙하는 청소년들도 많이 찾는다. 일주일에 한 차례씩은 꼭 노숙 청소년들에게 급식활동도 하고 있다. "하루에 환자들을 대략 일고여덟 명 정도 보살펴요. 교구 신부님들 추천으로 치료를 하는데, 지금은 의료진이 없어서 많은 환자를 치료할 수가 없어 안타까워요. 한국에서 1~2년이라도 기한을 정해서 의료봉사를 와주시면 고맙겠어요. 공동체도 열악하지만, 함께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는 교리상 감사하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데서 드러나듯 우리와는 문화 자체가 사뭇 달라 사도직 활동도 때때로 일종의 '피로증후군'에 젖는다. 질병이라는 게 한 차례 치료나 수술만으로 금세 호전되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 입원을 거듭해야 하고 때로는 타계하는 경우도 많아 암담할 때가 더 많다. 그래서 하느님께 의탁하게 된다는 이 수녀는 "아무래도 지금은 정착하는 단계이니 시행착오도 더 있을 것 같다"며 "그들 속으로 더 녹아들어가게 되면 그들처럼 살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27일 출국.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10.10.05
![[기획/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8> 아라비아에서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가다](//cpbc.co.kr/CMS/newspaper/2011/03/rc/368711_1.1_titleImage_1.jpg)
[기획/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 아라비아에서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가다박해자로 떠나 회개한 뒤 핍박받는 자로… "한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 은총에 힘입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이제까지 수천 년을 거쳐 오며 신을 찾아 갈증을 느끼는 모든 영혼에게 양식을 제공해온 그러한 인물은 인류 역사상 처음이며 유일하다." 이 글은 최고의 바오로 연구자들 중 한 분이 쓴 것으로 실제로 바오로를 매우 훌륭하게 설명한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하느님과 끊임없이 교통(交通)한 3년은 바오로 사도의 감성적 삶과 정신세계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다마스쿠스에서 하나니아스가 그들의 첫 만남에서 바오로에게 나타내 보였던 바로 그것을 그의 마음속에서 분명히 이해하게 됐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 9,15). 이러한 책임의식이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는 사막에 머물 수 없었다. 그는 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고 전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전형적인 고행자의 모습으로 사막에서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그가 사막으로 떠나있는 동안 다마스쿠스의 정치적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이 도시는 로마 황제 칼리굴라의 대표가 다스렸으나, 나바테아 왕국(요르단 암만에서 서남쪽 150㎞) 아레타스왕에게 양도됐으며, 아레타스왕은 거기에 총독을 세웠다. 히브리인들은 새로운 정부 아래서 상당한 자유를 누렸고 통치자의 후원을 받았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장님이 됐을 때 기꺼이 자신을 유숙시켰던 유다의 집에 다시 머물렀다. 그 다음 토요일에 그는 유다인 회당(Synagogue)으로 갔다. 성경 낭독 후에 그는 설교하기를 청했다. 그의 설교가 진행되고 구약에 근거해 메시아에 대한 모든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성취됐음을, 예수가 죽은 후 부활해 살아있음을 증명했을 때 수백 명이 주먹을 쳐들고 그에게 위협을 가했다. "그에게서 물러나라! 변절자다!" 그는 간신히 빠져 나왔다. 변절자를 죽이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은 그때에 아랍 총독에게 돈을 줘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되도록 설득했다. 총독은 만일 그가 도망치려고 한다면 그를 잡아들이라고 모든 성문들에 보초를 세워놓았다. 다마스쿠스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가 위험에 처했음을 알고 피신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밤늦게 사도를 성 옆에 세워진 집들 중 하나로 데려갔다. 그 집의 위쪽 바닥에 있는 창문에서 그는 바깥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들은 준비해 놓은 큰 바구니에 바오로를 들어가게 한 뒤 단단한 밧줄로 묶은 바구니를 성문 밖으로 내려 보냈다. 캄캄한 밤중에 그가 길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 예수님이 나타났다. 그가 바닥에 떨어질 것을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그는 감격했고 마음속 깊이 주님께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바오로가 내려선 곳은 '교회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예루살렘으로 향한 길이었다. 마음속에서 그는 자신보다 앞서 초대교회에서 사도로 불림을 받은 이들과 교통하고 싶은 열망이 일어났다. 앞선 사도들에게 주님 삶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듣기 위해서였다. 먼 길을 걸어온 뒤 성스러운 도시에 다가갔을 때 예루살렘은 그에게 갖가지 복합된 감정을 야기했다. 부제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인 장소를 지날 때 그가 전율했으리라는 사실은 지금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스테파노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에게 범한 잘못을 바로잡고 싶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살인자이며 박해자로 떠났으나, 회개한 뒤 핍박받는 자로 다시 돌아왔다. 예루살렘에서 바오로의 입지는 유다 정신을 배반했다는 것을 알게 된 유다인들의 적이었고, 그가 얼마나 교회를 잔인하게 핍박했는지를 알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이라는 사면초가의 특별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성전 학교에서 바오로의 옛 동기생인 바르나바(그 이름은 '위로자'라는 뜻)는 다른 사람의 영혼으로 들어가는 은사를 가졌다. 그래서 그는 바오로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사도들, 곧 베드로와 야고보에게 데려갔다. 바오로는 당시 다른 사도들을 알지 못했다. 점잖고 동정심이 많고 항상 친절했던 베드로 사도는 갓 도착한 바오로를 불러 마리아의 집에서 유숙하게 했다. 마리아는 복음사가 마르코의 어머니였고, 바르나바는 마르코의 아저씨였다. 아마도 이 두 사도는 14일간 함께 머물며 나눌 이야기가 무척이나 많았을 것이다. 바오로는 베드로에게서 주님이 행하고 가르친 것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경청했을 것이다. 두 주간에 걸쳐 이뤄진 베드로와의 접촉은 그리스도에 관해 갖고 있던 바오로의 이해를 유다 전통 위에서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바오로는 베드로에게서 주님 삶에 대해 자세하게 듣고 주님께서 성찬예식을 행한 최후의 만찬 장소로 함께 가주기를 그에게 청했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피로 물들은 골고타도 가봤을 것이다. 골고타의 작은 언덕 위에 무언가를 기원하며 고개를 숙인 베드로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가 갑자기 속삭이면서 무릎을 꿇고 "여기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래서 바오로는 떨리는 손을 십자가를 세웠던 구멍에 넣었다. 그가 베드로에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 본다. "케파(베드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과 나도 전혀 상관없지는 않습니다. 나는 주님 몸인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분 자신이 저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 특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선 저를 용서하시고 저를 사랑하시고 박해자인 저를 바로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대답했을 것이다. "아! 나의 사도 바오로여, 주님은 항상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분과 3년간 함께 지냈고 그 분의 가르침을 들었고 수많은 기적을 봤고 그 분의 사랑을 봤고 저의 발까지 씻기셨으나, 저는 다음 날 그를 세 번이나 부인했으며 맹세코 그를 모른다고 잡아뗐습니다. 이 모든 일들 후에도 재판에서도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맹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처럼 베드로는 눈물을 터트렸을 것이다. "부활 후 나를 용서하시고 그분 곁에 나를 그분의 사도로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붙들어 두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이에게, 그분을 부정하거나 박해했던 이들에게까지도 베푸시는 우리 주님의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때 이후 두 사도는 로마 네로 황제 박해로 인해 순교할 때까지 온 생애 동안 강력한 사랑의 사슬로 하나가 됐다.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머무르는 동안 바리사이인들과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려 시도했고 헬라어를 말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설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로 히브리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들고 일어나게 됐던 것이다. 형제들이 그것을 알게 됐을 때 그를 카이사리아로 안전하게 피신시켰고 거기서부터 바오로는 고향 타르수스로 향했다(사도 9,28-30 참조).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기도할 때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말씀을 들었다. "어서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라…. 가거라. 나는 너를 멀리 다른 민족들에게 보내려고 한다"(사도 22,17-21).오세택2011.03.01
![[공동체]대전교구 레지오 마리애 도입 기념비 제막](//cpbc.co.kr/CMS/newspaper/2010/03/rc/328769_1.0_titleImage_1.jpg)
[공동체]대전교구 레지오 마리애 도입 기념비 제막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와 사제단, 대전교구 레지오 마리애 단장 및 단원 등이 논산 부창동성당에서 교구 레지오 마리애 도입 기념비 제막 및 축복식을 가진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전교구 레지오 마리애 '평화의 모후' 레지아(단장 이석구)는 3일 충남 논산시 부창동성당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400여 명이 함께한 가운데 레지오 마리애 도입 기념비 제막 및 축복식을 가졌다. 1957년 3월 3일 논산 부창동본당에 '천지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도입됨으로써 교구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된 것을 기념해 세운 빗돌이다. 화강암으로 가로, 세로, 폭이 각각 130㎝, 230㎝, 60㎝ 크기로 제작됐으며 바닥 받침 길이는 130㎝다. 기념비 조각은 레지오 마리애 기도문 가운데서 '저희 레지오의 불기둥이 될 믿음을 주소서'라는 대목을 형상화했다. 맨 위 비둘기 형상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성령을, 가운데 거꾸로 된 십자가는 베드로 사도가 거꾸로 십자가 형을 받은 것을 뜻한다. 비석 중앙 성모상 조각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머리 위 원형 후관을 둘러싼 영문 글자 'LEGIO MARIAE'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성모님 군대라는 뜻이다. 성모 발 아래 원형은 지구를 뜻하며, 지구 가운데 묵주와 손 조각은 끊임없이 마음을 다해 기도를 바치라는 뜻이 담겼다. 전체 조형물을 떠바친 모양은 성경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말씀대로 살면 새 힘을 받게 되고 말씀에서 나오는 힘으로 그리스도인과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말씀을 증거하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단 부분 성경 왼쪽에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은 성모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구체적인 삶에서 실천하여 이 세상에 사랑의 문화를 건설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내용으로 유 주교 친필 휘호가 새겨졌고, 오른쪽에는 교구 레지오 마리애 운동의 씨앗을 뿌려 초석을 이룬 것을 기념하고 후배 단원들 표상으로 삼으려하는 취지가 실렸다. 유 주교는 격려사를 통해 "50주년을 감사하고 레지오 정신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기도와 마음가짐과 각오를 모아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큰 축복이며,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낳으셨듯이 우리도 삶을 통해서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주는 작은 성모 마리아가 돼 성모님을 닮은 작은 성모님처럼 참된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교구 레지오 마리애는 반세기만에 꾸리아 144개, 쁘레시디움 1779개, 단원 수 3만487명(행동단원 1만6630명)으로 성장한 것을 기념해 세운 기념비를 통해 50주년을 기억하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정완영 명예기자 0espresso@pbc.co.kr오세택2010.03.09

이웃사랑, 인터넷을 타고다음카페 '라면식탁에 평화를' 굶주리고 고통받는 이들 위한 사랑 모임다음카페 '라면식탁에 평화를…'카페지기 이상열씨(왼쪽)와 김이부씨가 카페를 둘러보고 있다. 가장 배고픈 이들의 식단, 라면. 가난한 이들의 '라면 식탁'에 사랑을 전하는 이들이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다음카페 '라면 식탁에 평화를…'(cafe.daum. net/rtpeace) 회원들이다. 1979년 김수환 추기경에게서 견진을 받은 서울 응암동본당 신자들은 '장년사도회'(회장 조경제)를 만들어 당시 본당 주임이었던 최창화 신부(현 몬시뇰)를 담당 신부로 두고 두 달에 한 번씩 피정과 성지순례, 산행 등을 함께하며 30여 년간 친목을 다져왔다. 자신들만의 카페를 운영하며 친교를 나눠온 회원들은 나이가 많은 회원들이 한 명, 두 명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죽기 전에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며 2년 전 다음카페 '라면 식탁에 평화를…'(이하 라면식탁)을 만들었다. 라면밖에 못 먹는, 배고픈 이들을 위해 기도하자는 취지에서 카페에 '굶주리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기도 모임'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하느님께 기도 한마디 △성경 한 줄 쓰기 △성경공부방 등 수십 개 코너를 통해 함께 '기도'하는 것에 중점을 둬온 라면식탁은 좋은 의도로 카페를 운영하다 보니 회원들이 하나 둘 늘어, 가톨릭 관련 다음 카페 1만7000여 개 중 순위 10위에 오르기도 했다. 카페 설립 2년 만에 회원 수가 2500명이 넘자 이를 기념해 후원에도 나섰다. 지난 2월 한국 카리타스에 아이티 지원 성금 252만2000원을 기탁, 첫 후원사업을 실시한 것. 당시 회원 수 2522명이었던 라면식탁은 2522명이 1000원씩 봉헌한다는 의미로 252만2000원을 지원했다. 앞으로 한국카리타스로부터 계좌번호를 받아 지속적으로 후원에 나설 계획이다. 카페 홍보담당 김이부(실베스텔, 68, 녹번동본당)씨는 "다른 카페는 오락 성격이 강하지만 우리 카페는 성스러운 내용이 많아 사람들이 장난스럽게 글을 올리지 않는다"며 "미국, 캐나다, 중국 등 해외에서 가입한 회원들도 7%에 달한다"고 자랑했다. 카페지기 이상열(안드레아, 66, 서울 녹번동본당)씨는 "나이가 많아 몸으로 하는 봉사는 하지 못하니 금전적으로나마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며 "2년쯤 후 회원 수가 5000명이 되면 복지법인을 만들어 배고픈 이들을 돕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구청과 보건복지가족부 등을 오가며 법인 설립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는 운영진은 이미 후원자도 마련해 둔 상태다. "카페 활동을 열심히 하는 회원 중 후진을 양성할 계획입니다. 카페에 보다 많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길 바랍니다." 김민경 기자 sofia@pbc.co.kr cpbc2010.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