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상징]31-빛- 선과 악을 가늠하는 잣대](//cpbc.co.kr/CMS/newspaper/2008/12/rc/27814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31-빛- 선과 악을 가늠하는 잣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약 400nm-700nm 파장을 가진 전자기파(가시광선)를 빛이라고 한다.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를 광속이라고 하는데,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고 지구에서 달까지 가는 데 1초 정도 걸린다고 한다. 넓은 의미로 빛은 적외선과 자외선 및 엑스선, 감마선까지 포함해 지칭하기도 한다. 인간은 빛이 있어야 사물을 볼 수 있다. 빛은 특히 비육체적, 비물질적인 것의 표현이므로 예로부터 신(神))의 정신, 영성을 상징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세상의 빛을 본다"고 표현한다. 고대 신화에서 빛의 영웅과 어둠과의 전쟁이 자주 등장한다. 신화에는 빛이 어둠에 승리해 세계 창조, 혹은 구원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소개된다. 고대 이집트 여러 신전에서는 신들상 앞에 등불을 밝혔다. 당시 사람들은 이 빛에 생명의 상징뿐 아니라 악마를 쫓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에서 빛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생겨났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 이처럼 빛은 하늘, 즉 신적인 것과 결부돼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구세주 탄생을 예언하며 암흑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빛을 본다고 표현했다(이사 9,1). 그래서 사람들이 빛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과 안전 속에서 사는 것과 같았다. "의인들의 빛은 흥겹게 빛나지만 악인들의 등불은 사위어 간다"(잠언 13,9). 하느님께 반역하는 악인의 몰락을 빛이 꺼지는 것에 비유했다. "정녕 악인들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타오르지 않네. 그 천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를 비추던 등불은 꺼져 버리지"(욥 18,5-6). 이처럼 성경에서 빛은 하느님을 상징한다. 또한 빛은 질서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요한 11,9). 그래서 빛은 사람들이 무질서를 거슬러 싸울 때 그들을 보호해 준다. 이처럼 빛은 생명을 주고 보호하는 특징을 지닌다. 예언자들이 언급하는 큰 빛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규정한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이처럼 빛은 구원을 상징하기도 한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그래서 빛은 선과 악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어 심판적 기능을 갖는다. "불신자들과는 상종하지 마십시오. 의로움과 불법이 어떻게 짝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빛이 어떻게 어둠과 사귈 수 있겠습니까?"(2코린 6,14).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하느님 말씀은 진정한 빛이다"고 했다. 또한 중세 신자들은 고딕 양식의 교회에서 어두운 건물 내부에 들어오는 태양 빛을 그리스도의 상징이고 빛을 받은 창을 성모 마리아의 상징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조은일2008.12.30
티모테오에게 보낸 1ㆍ2 서, 티토ㆍ필레몬ㆍ히브리서 해설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덕목들이 필요할까요? 이에 대한 지침들을 제공하고 있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ㆍ둘째 서간」과 「티토에게 보낸 서간」을 일컬어 '사목 서간'이라 부릅니다. 또 감옥에서 썼다 해서 「에페소서」, 「필리피서」, 「콜로새서」와 더불어 '옥중 서간'으로 분류되는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에서 우리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목자였던 사도 바오로의 고귀한 인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래에서 이 서간들을 각각 편의상 「티모테오 1ㆍ2서」, 「티토서」, 「필레몬서」, 「히브리서」라 부르겠습니다. (1)「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ㆍ둘째 서간」, 「티토에게 보낸 서간」 저자와 저술 연대 교회 공동체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한 실천적 지침들을 담고 있는 이 '사목 서간'들은 사도 바오로가 자신과 절친한 동료인 '티모테오'와 '티토'에게 보낸 서간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 서간들의 문체, 내용이나 신학적 용어가 '바오로 서간'들과 확연히 다르고, 감독이나 원로 같은 교회 지도자와 제도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이 서간들은 사도 바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사도 바오로 정신을 따라 100년경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2)「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ㆍ둘째 서간」, 「티토에게 보낸 서간」 구조와 내용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라며, 참된 목자의 사명에 대한 가르침으로 초대 교회 신자들이 당면한 위기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 '사목 서간'들은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1티모 1,1~20: 이단에 대항해 사도적 신앙을 지켜야 하는 티모테오의 사명. 2) 1티모 2,1~6,21: 사목자 사명과 언행. 3) 2티모 1,1~2,26: 이단 교사들을 물리쳐야 할 티모테오의 사명. 4) 2티모 3,1~4,22: 마지막 지시. 5) 티토 1,1~16: 크레타 섬에서 티토가 해야 할 일. 6) 티토 2,1~3,15: 올바른 가르침을 가르쳐야 할 티토의 사명. (3)「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저자와 저술 목적 '바오로 서간' 가운데 가장 짧으면서도 고대 서간 양식을 온전히 갖춘 「필레몬서」 저자가 사도 바오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느 감옥에서 언제 이 서간을 작성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 저술 목적만큼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세례를 베푼 제자 '필레몬'에게는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스'가 있었는데, 사도 바오로는 이 노예를 필레몬에게 되돌려 보내며 선처를 부탁합니다. 사도 바오로나 필레몬이나 오네시모스나 모두 주님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노예 해방' 같은 커다란 규모의 변혁을 부르짖지 않고, 다만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백년대계'라는 구호만 난무하며 약자들을 핍박하기 일색인 오늘날 한 번쯤 되새겨봐야 할 대목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교회를 정화시키겠다는 명분으로 교회를 분열시켜 온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꼭 되새겨봐야 할 것입니다. (4)「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 저자와 저술 연대 및 장소 신약성경에서 궁금증을 가장 많이 일으키는 작품 중 한 권인 「히브리서」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증언을 토대로 전통적으로 사도 바오로 작품으로 여겨져 왔지만, 어휘나 문체가 '바오로 서간'들과 상당히 다르고 신학적 견해에도 차이가 엿보이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의 신학사상을 계승한 어느 누군가에 의해서 작성됐다고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또 이 책이 어디에서 누구를 위해 작성되었는지는 알 순 없지만, '로마의 클레멘스'가 95년경 쓴 저서에서 「히브리서」를 인용한 것으로 보아, 이 책이 7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사이에 작성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5)「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 구조와 내용 성공적으로 구약성경 고백문들을 새롭게 표현하는 데 성공했기에 '신학적 해석학의 표본'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하는 「히브리서」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1,1~2,18: 천사들보다 위대하신 아드님. 2) 3,1~5,10: 위대한 대사제 예수님. 3) 5,11~10,39: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 4) 11,1~13,25: 신앙적 권면과 끝 인사.신희준 신부(서울대교구 사제평생교육원 담당)임영선2010.03.16

포콜라레 운동은 갈라진 곳에 복음적 사랑을 1943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불신, 갈등 녹이는 일치 영성세상의 누룩과 소금 역할해 한국 포콜라레 회원들로 구성된 가족합창단이 천안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에서 회장단을 환영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인류의 일치를 꿈꾸는 포콜라레 운동은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의 격랑 속에서 이탈리아의 초등학교 교사 끼아라 루빅(Chiara Luich, 1920~2008) 여사에 의해 시작됐다. 루빅 여사는 전쟁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복음적인 삶만이 남는다는 것을 깨달아 친구들과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갈등과 불신이 팽배한 도시에서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1)라는 성경구절을 마음에 품고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마치 벽난로에 모인 단란한 가족 같다"며 이탈리아어로 벽난로를 뜻하는 '포콜라레'(focolare)란 이름을 붙여줬다. 포콜라레 운동은 마리아 사업회(Work of Mary)라는 명칭으로 1962년 교황청 공식 인준을 받았다. 당시 이 운동은 유럽을 시작으로 북ㆍ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등으로 전파됐다. 종교와 인종, 직업과 나이 세상을 가르는 모든 장벽을 넘어 종교가 없는 이들에게까지 퍼져 182개국의 400만 명 회원과 협조자들이 각자의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이 중에는 가톨릭의 평신도(남녀노소)와 성직ㆍ수도자를 비롯해 3만 명의 타종교인들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새가정 운동, 일치를 위한 정치인 운동, 일치된 세계를 위한 젊은이 운동, 경제적 이윤으로 보편적 형제애를 실천하는 공유경제(economy of communion), 종교 간 대화 등으로 갈라진 인류를 사랑의 끈으로 잇고 있다. 일치의 삶을 사는 소도시 로피아노를 비롯한 소피아 대학 등은 이 운동의 결실이다. 끼아라 루빅 여사를 취재해온 이탈리아의 저명한 프랑카 잠보니니 기자는 "그의 영성과 활동은 복음에서 말하는 누룩과 소금처럼 겸손하지만 풍부한 결실을 냈다"며 "그는 지붕 위에서 외치기 보다 현명한 씨뿌리는 사람의 단순한 상식으로 사랑의 땅에 씨앗을 심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잠보니니 기자는 "1900년대 가톨릭교회는 성경의 예언자들과도 같은 위상의 두 여성에 의해 새로워졌는데 그들은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와 끼아라 루빅"이라고 했다. 그는 "마더 데레사는 가난한 이들 중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몸을 숙여 20세기의 아이콘이 됐지만, 끼아라 루빅은 세상을 떠났을 때야 비로소 국내외 신문ㆍ방송들에게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한국 포콜라레(대표 카를로스 아단ㆍ문원주)는 1969년 시작해 지난해 40돌을 맞았다. 현재 2만 2000여 명의 회원이 있으며 50~60여 명이 서원을 하고 공동체 생활을 한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이지혜2010.01.12
![[성경 속 상징]30-안수(按手)- 축복을 전달하는 가시적 표현](//cpbc.co.kr/CMS/newspaper/2008/12/rc/27722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30-안수(按手)- 축복을 전달하는 가시적 표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사제서품식 후 새 사제는 부모님에게 첫 안수(按手)를 한다. 내 경우에도 사제서품 미사가 끝난 후 어머니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안수를 청하셨는데 순간 감격에 겨워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던 기억이 난다. 아마 모든 사제들은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옛날부터 손은 축복을 이끄는 신체 부위로 생각했다. 많은 나라 신화에도 안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구원을 가져오고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많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종교적으로 거룩한 인물인 예언자, 사제와 하느님의 대리자라고 믿었던 왕의 오른손에는 구원과 치유와 축복의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안수는 그리스도교 의식 가운데 하나로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고 능력과 자격을 수여하는 상징적 행위로 정착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 안수는 하느님의 성령을 안수 받는 이에게 준다는 뜻을 갖는다. 성경에서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축복을 전달하는 가시적 표현이다. 야곱은 에프라임과 므나쎄 머리에 오른손과 왼손을 얹고 축복했다. "이스라엘은 손을 엇갈리게 내밀어, 에프라임이 작은아들인데도 오른손을 에프라임의 머리에 얹고, 므나쎄가 맏아들인데도 왼손을 므나쎄의 머리에 얹었다"(창세 48,14). 장자권 상속이나 육체의 건강을 기원하면서도 안수를 했다. 그리고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거나 직책을 임명할 때도 안수를 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써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공동체 최고지도자로 임명됐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데려오너라. 그는 영을 지닌 사람이다. 너는 그에게 네 손을 얹어라'"(민수 27,18). 구약성경은 안수를 통해 죄가 옮겨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레위인들이 황소들 머리에 손을 얹고 나면, 너는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또 한 마리는 번제물로 주님에게 바쳐, 레위인들을 위한 속죄 예식을 거행하여라"(민수 8,12). 이처럼 손을 얹음으로써 죄라는 무거운 짐을 다른 존재에게 떠맡기는 것이다. "아론은 살려 둔 그 숫염소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 곧 그들의 허물과 잘못을 고백하여 그것들을 그 염소 머리에 씌우고서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손에 맡겨 광야로 내보낸다"(레위 16,21).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이 다른 이들에게 성령을 수여할 때도 안수를 했다.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사도 8,17). 또한 안수를 통해 교회의 특별한 직위를 수여했다(사도 6,6).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할 때도 병자에게 손을 얹어 안수를 했다(루카 13,13). 그리고 안수는 축복을 주는 방법으로 사용했다(마태 19,13). 현재 가톨릭교회에서는 세례 지원자에게서 악마를 내쫓을 때, 사죄를 할 때, 병자ㆍ견진ㆍ신품성사 때 안수를 한다. 이때 손을 얹어 기도하는 안수의 동작은 공동체에 대한 봉사를 위한 축성과 거룩한 권능을 전수한다는 표지가 된다. 따라서 안수는 하느님의 성령이 선발된 존재를 세상에서 분리시켜 그에게 직무를 수행할 권위와 능력을 수여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오늘날 안수의 본질은 직분과 그에 따른 능력의 수여 및 직위 계승의 의미가 강하다. 이러한 의미의 안수는 사제 서품 의식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조은일2008.12.23
![[성경 속 상징] 10-칼](//cpbc.co.kr/CMS/newspaper/2008/07/rc/257632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10-칼하느님의 심판 혹은 말씀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전야인 6월 28일 저녁, 로마 성 바오로 대성전에 특별한 등(燈)이 켜졌다. '바오로의 해'가 시작되었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등불이다. 로마 성 바오로 대성전 앞에는 사도 바오로가 칼과 성경을 들고 있는 상이 서 있다. 이처럼 바오로의 성화에는 곧잘 칼이 등장한다. 바오로를 상징하는 칼은 그가 선포한 하느님 말씀의 능력과 생명력을 나타낸다. 칼은 옛날의 중요한 전쟁 무기였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칼은 주로 전쟁을 묘사하는 이야기에서 자주 나타난다. 칼에 맞아 쓰러진다고 하면 전쟁에서 패배를 뜻한다. "나는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겠다. 그들을 원수들 앞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게 하고,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 손에 죽게 하겠다. 또한 그들의 시체는 하늘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에게 먹이로 내어 주겠다"(예레 19,7). 이사야 예언자도 평화가 오는 것을 칼과 창을 농기구로 만드는 것에 비유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또한 칼을 사용하는 것을 사람들 사이의 유혈과 다툼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 너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그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자손들의 칼로 죽였다.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사무 하 12,9-10). 칼은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주님의 칼은 피로 흥건하고 기름기로 덮여 있으며 어린 양과 숫염소들의 피에, 숫양들의 콩팥 기름에 젖어 있다"(이사 34,6). 잘못을 행하는 자를 벌주고 처형하는 정부의 권력을 칼의 이미지로 묘사되는 대목도 있다.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악을 행할 경우에는 두려워하십시오. 그들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로마 13,4). 칼이 상처를 입히기 때문에 해악과 상처를 사람들에게 끼치는 모든 것들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기 했다. "저는 사자들 가운데에, 사람을 집어삼키려는 것들 가운데에 누워 있습니다. 그들의 이빨은 창과 화살,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입니다"(시편 57,5).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다. "이웃에게 해로운 거짓 증언을 하는 자는 방망이와 칼과 날카로운 화살과 같다"(잠언 25,18).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칼에 비유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능력 때문에 칼에 비유되었던 것이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2).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마옴 가장 깊은 곳까지 미치며 삶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우리의 삶에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조은일2008.07.08
[생활 속의 복음]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주간)- 에수님이 세상 왕들과 다른 점은?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오늘은 전례력상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4주일이며, 동시에 권능과 신성과 지혜와 힘과 영예를 받기에 합당한 그리스도가 만물의 왕이심을 선포하는 대축일입니다. 오늘의 가르침처럼 예수님은 과연 우리 왕이실까요? 예수님은 이 세상 왕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거나 번쩍이는 왕관을 쓰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 임금들이 축복과 환호 속에서 태어났던 것과 달리 예수님은 아무도 없는 외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왕에게는 언제나 그럴듯한 고관대작들이 온갖 감언이설로 갖은 찬사와 산해진미를 바치는 반면, 예수님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천대 받는 죄인들이 득실거렸습니다. 세상 임금들이 권위로 백성을 억누르고 살았다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는 말씀처럼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셨고 최후만찬 석상에서는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 주시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온몸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날 세상 모든 왕들의 명성과 업적은 사라졌지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우리 안에 길이 살아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에 관한 말씀은 성경으로 기록되어 세상 역사를 바꾸는 '생명의 책'으로 남아 있으며,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을 넘어서 우리의 구원자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왕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믿고 가르치기 위해 교회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참된 길임을 다시 한번 깨우쳐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길이 기억되는 인물이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어린 시절 링컨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초등교육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을 들려주었고, 하느님 말씀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는 말씀을 택했고 일생을 하느님 안에서 사신 분입니다.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政敵)이 있었습니다. 스탠턴은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한 번은 두 사람이 함께 사건을 맡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법정에 앉아 있던 스탠턴은 링컨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 따위 시골뜨기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라는 겁니까?"하며 나가 버렸습니다. 이렇듯 스탠턴이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하게 행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부장관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앉혔습니다. 참모들은 링컨의 이런 결정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참모들이 재고를 건의하자 링컨은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스탠턴은 대통령님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버려야지요!" 참모들 말에 링컨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 속에서 없애 버려야지요!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과연 링컨은 자기를 미워했던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한 진정한 승리자였습니다. 연중 제34주일은 성서주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고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그분의 삶을 기록한 성경을 통해서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길은 성경 말씀을 읽어 마음에 새기고 실천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지난 3년 동안 '생활 속의 복음'을 연재해주신 이기양(요셉)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29일자)부터 인천교구 홍승모(미카엘, 강화본당 주임 겸 인천가톨릭대 교수) 신부님께서 집필해 주십니다.조은일2009.11.17
![[아! 어쩌나?] (68) 성모님은 왜 슬픈 얼굴일까요?](//cpbc.co.kr/CMS/newspaper/2010/08/rc/348781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68) 성모님은 왜 슬픈 얼굴일까요?Q1. 성모님은 왜 슬픈얼굴일까요? 천주교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초보신자입니다. 그래서 교리를 잘 모릅니다. 더욱이 개신교에서 개종해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 특히 성모님의 삶을 본받으라는 이야기는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모상을 보면 대부분 우울한 표정이거나 혹은 눈물 흘리는 표정, 심지어 아들을 안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인데 그런 것을 왜 닮으라고 하는지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는 늘 우울한 어머니를 보고 자라서 그런지 여자들이 우는 것을 보면 지겨운 생각이 들고, 우울한 성모상을 봐도 왠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심지어 내가 잘못 개종했나하는 생각마저 들곤 합니다. A. 성경에서는 성모님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라고 합니다(루카 1,39-56 참조). 왜냐하면, 아들을 잘 두셔서 하느님을 당신 아들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행복한 여인의 표정이 밝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당의 거의 모든 성모상이 슬픈 미소를 짓고 있거나 혹은 아예 눈물을 흘리는 모습 등 형제님 말처럼 우울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행복해야 할 여인이 왜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교리서에 성모칠고(聖母七苦) 즉, 성모님이 겪으신 일곱 가지 고통이란 말이 나옵니다. 성모님은 주님만큼이나 마음의 수난을 겪으신 분이시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성모님도 슬프고 힘겨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성모님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성모님께서 그런 슬픔 속에서도 무너지거나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제자들을 추스르시는 강한 어머니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아무리 힘겨운 일이 닥쳐도 성모님처럼 슬픔을 잘 이겨내는 삶을 살라는 취지로 성모님 생애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럼 성모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의 슬픔을 잘 이겨내셨을까요? 성모님은 슬픔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 의미를 잘 받아들이셨습니다. 슬픔의 의미는 또 무엇일까요? 사람이 슬픔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슬퍼할 수 있는 능력은 내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약 슬픔을 느끼지도 슬퍼하지도 못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슬픈 일에 공감하지 못하고, 허구적이고 비현실적인 세상 안에서 기형적 삶을 살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런 슬픔의 의미를 잘 아셨던 분입니다. 또 슬픔을 느끼는 능력과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큰 분이시기에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에게 다가온 많은 가슴 아픈 일들을 잘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슬픔을 이겨내신 과정을 통해 지금은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런 성모님 삶을 신앙인의 모범적 삶으로 꼽고 있습니다. Q2. 10년이 지났는데도 제 아내는 장인어른과 사이가 매우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10년 전 돌아가신 장인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물론 아버지를 생각하는 효심이 갸륵하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장인이 돌아가신 이후로 살림살이나 아이들 양육에는 관심이 없고 온종일 장인 영정만 바라보며 울고 지내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 그만 잊으라고 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거나 혹은 애지중지하는 대상물을 잃어버리고 나면 누구나 큰 상실감을 느낍니다. 그 존재들이 나를 지탱해준 대상물이었기에 이별을 하고나면 그야말로 황량함과 외로움, 슬픔과 눈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세월이 약이야"하면서 슬픔이 강물처럼 흘러가기를 기다리고, 그 물살에 자아가 휩쓸려가지 않도록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슬픔의 늪에 빠져 아예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떠나간 사람이나 대상이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구가 강할 때 그렇습니다. 떠난 것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슬픔 속에 살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감정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미성숙한 기대 또는 자기가 울면 상황이 전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철없는 기대를 하고 살아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가능하면 상대방 문제에 대해 직설적으로 지적해주는 '그룹상담치료'를 받는 게 좋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위로는 독약이란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홍성남 신부(서울 가좌동본당 주임) cafe.daum.net/withdoban 이힘2010.08.31
[출판]박영식 신부 「구약성경에서 캐내는 보물2」 「구약성경에서 캐내는 보물」 하권이 최근 출간됐다. 박영식(대구대교구 복현본당 주임) 신부가 집필 중인 총 4권의 성경 교재 가운데 두 번째 구약성경 교재다. 지은이는 구약성경 예언서를 전기 예언서(역사서)와 후기 예언서로 각각 나누고 주된 가르침을 담은 본문을 골라 해설했다. 그래서 '전기 예언서(역사서)와 후기 예언서의 주된 가르침'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전기 예언서는 여호수아기와 판관기, 사무엘기 상ㆍ하, 열왕기 상ㆍ하 등 주로 역사서를, 후기 예언서는 아모스서와 호세아서, 이사야서, 미카서, 스바니야서, 나훔서, 하바쿡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하까이서, 즈카르야서, 오바드야서, 말라키서, 요엘서, 요나서 등 예언서를 망라했다. 총 33과에 걸쳐 각 과별로 본문 이해를 돕기 위한 질문과 가르침에 대한 설명, 이 가르침과 신약성경과 관계, 생활 적용으로 나눈 것은 상권과 같다. 솔로몬 성전 조감도와 성경 관련 지도를 부록으로 실어 이해를 돕고 있다.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유익한 교재다. 박 신부는 "성경을 읽을 때는 보물을 캐내듯, 기쁜 마음으로 의지를 다하고 지성과 생각을 다하고 모든 힘을 다 기울여야 한다"며 "교사와 배우는 이들이 좋은 해설서를 갖고 함께 성경을 공부하면 혼자서 성경을 읽을 때보다 더 많은 보물과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가톨릭출판사/1만1500원)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이지혜2008.10.14
![[성경속 상징] 27-말- 용맹, 군사적 힘, 또는 완고함](//cpbc.co.kr/CMS/newspaper/2008/12/rc/274275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 27-말- 용맹, 군사적 힘, 또는 완고함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암행어사 출두요!" 어린시절 영화 춘향전을 숨죽여 보던 기억이 난다. 암행어사가 돼 돌아온 이몽룡이 마패를 꺼내 보이고 이어서 뒤따르는 수많은 역졸들이 육모방망이를 들고 탐관오리들을 징벌하는 장면에는 박수를 치며 환호하기도 했다. 마패 앞면에는 한 마리에서 열 마리까지 말이 새겨져 있는데 그 숫자만큼 역마(驛馬)와 역졸(驛卒)을 이용할 수 있었다. 역참제도를 바탕으로 생긴 마패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 원종15년 때부터다. 말은 교통수단과 통신이 발달하기 이전, 소식을 빠르게 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말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하더라도 쉬지 않고 며칠을 달리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삼국 시대부터 지역 곳곳에 역참을 두게 됐다. 한국인에게 말은 '신성한 동물'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신성한 존재, 하늘의 사신, 중요 인물 탄생을 알리고 알아볼 줄 아는 영물, 죽은 사람 영혼과 마을 수호신이 타는 동물, 장수와 희망의 상징, 위대한 인물들이 타는 동물로 인식했다. 말을 처음 가축으로 기른 민족은 BC 2000년 무렵 흑해 북부 우크라이나와 다뉴브강 유역에 살던 아리아계(系) 고대민족이었다. 말의 후각은 매우 예민해 '코의 동물'이라고도 한다. 공포심이 많으나 부드럽게 다루면 온순하며, 기억력도 뛰어나 사람의 애정을 느끼고 그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말은 다른 동물에 비해 용맹성이 뛰어난다. 전쟁터에서 진격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나면 다른 동물은 겁에 질려 도망가지만 말은 북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용맹하게 달린다. 그래서 동양 풍속에서 말은 제왕 출현의 징표였고 초자연적 세계와 교류하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고구려 시조 주몽도 말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성경에서 말은 용맹함과 전쟁 혹은 재난을 상징한다. 옛날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선 필수적인 것이었기에 말은 군사적 힘의 상징이 되었다. "이들은 병거를, 저들은 기마를 믿지만 우리는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네"(시편 20, 8).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느님은 어떤 인간적인 힘보다 우월하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물이 되돌아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따라 바다로 들어선 파라오의 모든 군대의 병거와 기병들을 덮쳐 버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탈출 14, 28). 또한 말은 완고함, 미련함의 상징으로도 나타나기도 한다. 예레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지 않고 싸움터로 내닫는 말에 비유하며 백성의 완고함을 꼬집었다(예레 8, 6). 또한 백성들 풍기문란을 수말에 비유했다. "그들은 욕정이 가득한 살진 수말이 되어 저마다 제 이웃의 아내를 향해 힝힝거린다"(예레 5, 8). 죄인들과 우둔한 자들을 채찍을 맞아야 하는 말의 미련함에 비유하기도 했다. "말에게는 채찍, 나귀에게는 재갈, 우둔한 자의 등에는 매" (잠언 26, 3). 즈카르야서에서 말은 하느님에게 파견된 동물로 등장한다(즈카 1,7-13). 중세시대에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황금색으로 장식된 백마를 타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옛날 태양의 상징이었던 백마를 의식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무적의 태양'과 그 대리자에 적용한 것이다. 또한 중세기 성화와 조각에서 말이 그리스도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있는 것은 불신앙에 머물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조은일2008.12.02
![[성경 속 상징] 29-혀- 하느님 찬양하는 언어, 무서운 무기](//cpbc.co.kr/CMS/newspaper/2008/12/rc/276055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29-혀- 하느님 찬양하는 언어, 무서운 무기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유다인의 지혜서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나라의 왕이 신하 두명을 불러 서로 정반대 임무를 맡겼다. 한 신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을, 또 다른 신하에게는 가장 악한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이었다. 임무를 맡은 신하들은 온 세상을 두루 돌아본 후에 그 답을 찾아왔다. 그런데 두 신하의 답은 같았다. 그들은 모두 사람의 '혀'라고 답했던 것이다. 왕은 두 신하의 열띤 논쟁을 들어본 후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도 혀요, 가장 악한 것도 혀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혀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도 악도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세치 밖에 되지 않는 혀는 온몸을 다스릴 정도로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혀를 통해 만들어 내는 말 한마디는 행복과 불행의 열쇠가 될 정도니 말이다. 무심코 내뱉은 말은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영향을 주듯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혀는 웅변과 함께 거짓말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람이 혀를 내밀 때는 대부분의 민족이 상대에 대한 우롱이나 경멸의 표시로 여겨진다. 그런데 티베트에서는 존경의 인사가 되고,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에게는 환영의 표시가 된다고 한다. 이처럼 지역마다 다른 풍속을 나타내는데 중요한 것은 혀 자체가 감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혀는 인간의 언어활동 도구다. 혀는 좋은 일에서도 나쁜 일에서도 역할을 한다. 혀는 말을 만들어내기에 일종의 창조 기관으로 간주됐다. 이집트 전설에 의하면 세상은 심장과 혀, 즉 정신의 힘과 창조의 말에 의해 세계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집트 사람들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심장과 혀라고 생각했다. 성경에서 혀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언어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죽음의 형벌에서 저를 구하소서, 하느님, 제 구원의 하느님. 제 혀가 당신의 의로움에 환호하오리다" (시편 51,16). 또한 혀는 인간의 생각과 태도를 나타내기에 삶의 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의인의 혀는 순수한 은과 같지만 악인의 마음은 별 가치가 없다"(잠언 10,20). 인간의 행복은 혀에 달려있다고 단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 18,21). 잠언에서 사람은 혀가 만들어낸 말의 열매를 먹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타인과 자신의 상황에 대해 쏟아내는 우리의 말은 결국 자신을 향하게 된다. 또한 사람의 혀가 무서운 무기로 비유되고 있다. "매에 맞으면 자국이 남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집회 28,17). 그래서 위험한 혀는 독사로 비유된다. "뱀처럼 혀를 벼리고 살무사의 독을 입술 밑에 품습니다"(시편 140,4). 신약에서 야고버 사도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혀를 삼가라고 권면했다. 아무리 신앙심이 깊어도 혀를 제어할 수 없다면, 그 신앙심은 무의미하다고 가르친다.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야고 1,26).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성령이 불꽃 모양의 혀로 제자들에게 내렸다고 전해진다(사도 2,3-4).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불꽃 모양의 혀로 나타난 성령의 모습은 중세 회화에서 즐겨 사용했던 주제다. 이처럼 혀는 비언어적인 메시지를 의미하기도 했다. 조은일2008.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