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아들을 보내시어 인류 구원사를 쓰신 하느님[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28) 예수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 6세기 이콘, 시나이산 성 가타리나 수도원, 이집트.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예레 31,15) 헤로데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한 사건을 두고 마태오 복음서 저자가 인용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예언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헤로데 임금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1세 황제 때에 베들레헴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고, 메시아 가문인 다윗 집안의 요셉의 아내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리는 기간 중 본시오 빌라도 총독 치하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하느님의 영광과 은총에 참여하는 새 생명의 길을 인간에게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에게서 나오셨으며(요한 13,3), 하늘에서 내려오셨고(요한 3,13),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1요한 4,2)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 저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4.16)고 증언합니다. ‘예수’는 히브리말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 때에 가브리엘 천사가 그분께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루카 1,31 참조) 이 이름은 주님의 신원과 사명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 역사에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종살이하던 집에서 구해 내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죄에서도 구해 주셨습니다. 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오직 하느님만이 그 죄를 없애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로부터 보편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구해 내시기 위해 당신 외아드님을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는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는 하느님의 이름이며, 이제 강생하여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되시어, 모든 사람은 이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32 참조)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뜻하는 헬라어로, 히브리어로는 ‘메시아’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신적 사명을 완전히 수행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고유한 이름이 됩니다. 메시아는 왕이며 사제로서, 또한 예언자로서 주님의 성령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 예언자, 왕의 삼중 임무 안에서 메시아에 대한 이스라엘의 희망을 채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사명, 곧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본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라고 선포했습니다.(사도 9,20 참조) 이 고백은 처음부터 사도들과 초대 교회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영광을 받은 인성의 권능 안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4)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이미 윗글에서 설명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보다 명확하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말씀’은 우리에게 거룩함의 모범이 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458-460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 곧 말씀과 행동, 침묵과 고통, 존재와 표현 방식은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4,9) 예수님의 전 생애는 ‘속량’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아버지께 사랑으로 온전히 순종하시어,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는 고난 받는 종의 속죄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들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입니다.(1코린 15,3-5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약의 약속과 예수님께서 사시는 동안 하신 약속의 실현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인간을 위해 당신 구원의 역사 전체를 총괄적으로 실현하셨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6.08

이콘은 창작예술인가 묻는다면 명확히 답할 수 없다[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18) 이콘성화의 타당성 논란 (작품 1) ‘침묵의 성 요한’. 17세기 초반의 이콘 복사작품, 템페라, 40 x 30cm, 이콘 마오로 미술관. ‘나는 말하지 않았다’라는 상징으로 성 요한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을 통해 천사가 일러준 대로 기록하였을 뿐, 본인의 생각은 전혀 들어있지 않다는 의미다. 이콘은 하느님 말씀 전하는 교회 의식에 필요한 전례 도구 성경을 그림 형태로 옮긴 것 신앙생활에서 마음 정화하고 신앙의 내적 구심점으로 가는 통로 역할 해 3. 이콘은 창작예술 작품인가? 독일 유학 시절 종종 ‘야인(jain)’이란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야(ja)는 ‘그렇다’, 우리말로 ‘예’에 해당합니다. ‘아니요’는 ‘나인(nein)’으로 대답합니다. ‘예’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닌, 불확실할 때엔 이 두 단어를 합하여 표준어는 아니지만, ‘야인’으로 대답합니다. 아이들의 사춘기 시절, 성당에서 만난 아이 친구 부모에게 “당신의 자녀는 말을 잘 들어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하며 “야인” 또는 “나야(글쎄)”라고 답합니다. 생일 때 초대받아 간 자리에서 독일 아이들에게 “너 부모님 말씀을 잘 안 듣는다며?” 라고 물으면 웃으면서 “말 듣지 않는 것이 아니고요, 나와 생각이 달라요”라고 대답합니다. “이콘이 창작 예술품이냐?”라고 묻는다면 “야인”으로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콘은 신앙생활에서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신앙의 내적 구심점으로 가는 통로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는 훌륭한 창구가 됩니다. 그러나 이콘은 예술품이 아니고 복제품이라는 편견을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점 하나까지 똑같이 복사하는 것이 무슨 예술이냐’라는 논리는 부분적이나마 수긍할 만합니다. 이콘을 예술의 눈으로만 바라본다면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진 못할 것입니다. 많은 예술가가 이콘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미술 분야를 개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술을 이콘으로 쓸 수는 없었습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에 접어들기 전, 유럽 성당들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창문이 좁고 벽면이 넓은 까닭에 비잔틴 이콘을 응용한 프레스코화가 전성시대를 이루었습니다. 그 후 이콘 화법을 응용한 르네상스 이전의 조토·치마부에·두치오·마사초 등은 르네상스 대가들의 종교화와 조각품들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르네상스가 지난 후 서방에서는 이콘이 전례에 관한 것보다는 고대 예술품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샤갈·말레비치·칸딘스키 등의 예술인은 이콘을 새로운 예술에 접목하기 위한 실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콘을 급진적이거나 비전통적인 방법, 규범이나 현상의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예술 세계로 이끌려 했습니다. 그것이 이콘의 예술성을 올리려는 시도일지 몰라도, 결국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교회 의식에 필요한 전례 도구라는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콘을 통해 왜곡·역원근법·이미지의 중첩과 병렬 등의 구성기법과 색채의 상징성·탈 물질적 방법으로 새로운 예술의 발견이라 했지만, 여기서 나온 작품은 이콘의 본래의 목적에 벗어난 유실물(遺失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콘 작가는 이콘이 창작예술 작품이 아니라는 시각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콘은 글로 되어있는 성경 내용을 그림 형태로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콘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는, 전례 또는 기도를 위한 용도가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이콘 작가는 본인이 그린 인물에 대해 존경과 기도와 묵상을 합니다. 또 흠숭하여야 할 ‘무한히 거룩한 분’의 숨결이라도 나의 손을 빌려 이콘 안에 내재해 계시기를 바랍니다. 전례용 작품은 전례를 위한 내용이 충실해야 하고, 품위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콘을 새로운 개념으로 창작할 때 이콘 작가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성경 말씀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면, 이콘을 구성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작된 이콘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성경 구절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했는지, 그에 맞는 상징적인 표현을 살려 전체적으로 충분히 미적 감각으로 구성하였는지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창작된 이콘이 전례와 기도를 올릴 수 있는 품위있는 작품인지는 영적인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이콘 중에 ‘침묵의 성 요한’ 작품이 있습니다. 성 요한은 하느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다른 사도와는 달리 순교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분으로, 그는 주님의 유언에 따라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신 분입니다. 훗날 그는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를 가 요한 복음을 쓴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침묵의 성 요한은 본인의 손가락을 입에 대고 있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를 표현하는 이콘입니다. 달리 해석하면 ‘내 생각은 전혀 들어있지 않다’라는 표현으로, 본인이 하느님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성령께서 천사를 통해 내 귀에 들려준 대로 기록하였을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말씀을 기록하지만, 하느님의 말씀 의도를 정확히 기록해야 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형상화한 언어(그림)로 표현한다면, 그 역시 말씀의 의도를 잘 파악해 상징적인 구성과 규정에 따른 논의를 거쳐야 합니다. 창작 이콘은 주로 수도원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깨닫고, 말씀의 핵심적인 내용과 견해를 논의하고 그 결과를 이콘에 맞게 구성했습니다. 따라서 이콘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말씀을 ‘썼다’고 했습니다. 잘못 써진 이콘은 말씀을 오해의 소지로 이끌 수 있습니다. 또 수백 년 동안 이콘을 그려 온 수도원에서도 성경 내용에 근거한 성사실(聖史實) 이콘이 독창적으로 한 번에 창작된 적이 없습니다. 이콘은 기존 이콘에서 차츰 말씀의 의도를 좀더 분석해 표현하고, 거기에 그 시대의 심미적 관점에 따라 조금씩 색상과 약간의 구성 변화를 줌으로써 발전해왔습니다. 그리고 인물의 표현에 미세하나마 창작성이 가미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콘은 그 시대에 한 번으로 끝나는 성화가 아니고, 영성적 내용이 첨가되는 ‘진행 과정’에 있는 전례용·기도용 성화라 볼 수 있습니다. 본인은 이콘이 정교회 그림이라는 인식에 반대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콘은 그리스도교가 형성되면서 초기 교회, 카타콤바 벽면을 시작으로 그려져 왔으며, 그 후 동·서방 교회에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벽면을 장식하였습니다. 그 후 1054년을 기준으로 동·서방 교회가 갈라진 후 동방 교회에서 이콘이 이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동방 교회의 성화상이라는 인식보다 그리스도교 미술이라는 긍지를 갖고 신자들이 묵상과 기도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추상적인 성화를 보면서 묵상할 수도 있지만, 이콘처럼 예수님 또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눈을 통해 하느님과 눈을 마주하며 기도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이콘은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현시대의 미적 감각을 살린 창작으로서 이콘이 가능하리라는 관점에서입니다. 이는 시대적 요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콘에서 예술의 시각만 강조한다면 그 실현은 요원할 것입니다. 이콘이 요구하는 규정과 미학을 연구하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감각을 연결한다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콘을 복사해 새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콘은 이콘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제작 과정이 어려워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작가 자신도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도자기 장인이 불가마에 도자기를 굽는 과정처럼 여겨집니다. 김형부 마오로cpbc2024.05.08
![[전문] 전주교구 부활 메시지](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4/16/5RR1744803499770.jpg)
[전문] 전주교구 부활 메시지“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28,5.10)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28,5.10) 1.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어둠의 온갖 세력을 물리치시고 마침내 승리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게 내리기를 빕니다. 올해 보편교회는 은총의 희년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가 희망의 순례자가 되기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생활함으로써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희망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지향에 따라 저는 주님의 부활을 희망의 관점에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2. 우선,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체험했던 몇몇 여자들에게서 희망의 작은 몸짓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늘 깊이 느끼며 그분을 기쁜 마음으로 추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태가 돌변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시고 묻히시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망연자실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없이 짓눌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밀려오는 두려움에 마냥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절망과 어둠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비관론에 빠지지 않았고, 그 현실에서 도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단순하고 특별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곧 그들은 집에서 예수님의 몸에 바를 향유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그들은 연민의 마음을 잃지 않았고, 주님을 신뢰하며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마르 16,2)을, 곧 역사를 새롭게 바꾸는 그 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땅속에 묻힌 씨앗처럼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싹 틔우시려는 중이었습니다. 여자들은 굳은 신뢰와 사랑으로 그 생명이 피어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의 발전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고”(2코린 4,8) 희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번 위헌·위법적인 12.3 비상계엄의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환난에 억눌리지 않고 참된 자유와 평화를 간절히 희망한 사람들 덕분입니다. 곧 참된 민주주의를 희망하며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충실히 이행한 사람들 덕분입니다. 3. 이어서 복음은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메시지를 두 번 선포함으로써 여자들에게 희망의 불이 더욱 타오르게 합니다. 한 번은 그들이 매우 이른 아침 무덤에 갔을 때 천사가 이렇게 선포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5-6). 그들에게 장엄한 부활 소식이 선포된 것입니다. 나머지 한 번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직접 나타나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28,10)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이나 강조된 “두려워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통해서 여자들은 마음 한쪽에 남아있던 슬픔과 공포를 말끔히 떨쳐버리고 이제 희망을 온전히 품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의 이 희망은 안이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이 희망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넣어 주신 선물입니다. 특히 무덤에서조차 생명을 생기게 하시는 부활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악의 결과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12항)는 확신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십니다. 따라서 이 희망은 삶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굳건히 지탱해 주고, 결코 주저앉지 않게 해 주는 힘입니다. 현재를 용기 있게 살아내고 미래를 담대하게 바라보게 하는 참된 힘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격려의 말로서 ‘내일은 더 나아질 거야!’라고 되풀이하는 세상의 막연한 희망과 다릅니다. 우리의 희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께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시고 성실하시며 온전히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 편에 계시고,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의 모든 상황, 특히 우리의 고통과 불안과 죽음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의 빛으로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죄악을 물리치시고,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희망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에, 우리를 속이지도 실망시키지도 않습니다(로마 5,5 참조). 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희망할 수 있고 반드시 희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련을 겪을 때마다 마음 한쪽에서 속삭이는 어둠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헛되다고 비난하며, 우리의 용기를 꺾고 마음을 텅 비게 만드는 교활하고도 나태한 목소리입니다. 이는 우리를 포기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단념하게 하는 희망의 적으로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러한 어둠의 생각에 맞서 용감하게 싸울 것을 바라십니다. 이러한 싸움을 위해 우리는 먼저, 슬픔과 어둠에 굴복하지 않고 희망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일이며, 그분을 우리 안에 모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 안에 갇혀있지 말고, 주님을 향해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께서 들어오시게 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빛과 사랑과 생명을 주시도록 그 자리를 마련합시다. 이리하여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은 희망이 더욱 굳건해지도록,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 사랑의 업적을 기억할 것을 크게 강조합니다(루카 24,6 참조).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이미 행동하셨고, 지금도 행동하고 계시는 모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억은 절망에 사로잡힌 삶을 다시 일깨우고, 미래의 희망에 마음을 활짝 열게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동하셨던 것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을 잃게 됩니다. 5.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이 시기에,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열어드립시다. 그리하여 부활의 증인인 여자들처럼 어둠에 굴복하지 말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이행하며 희망의 불을 지피는 신앙인이 됩시다. 2025년 부활절에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2025.04.16
![[신앙단상] 내일의 산을 등반하는 법(김민주 에스더,크리에이터·작가, 로마가족 대표)](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10/29/K9P1730188483354.jpg)
[신앙단상] 내일의 산을 등반하는 법(김민주 에스더,크리에이터·작가, 로마가족 대표) 토비야와 천사 첫째 아이의 이탈리아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교장 선생님은 그림 하나를 보여주었습니다. 15세기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공방(1470~1475)에서 그린 토비야와 천사 그림이었습니다. 그림 속에선 눈먼 아버지를 대신해 길을 떠나는 아들 토비야를 라파엘 대천사가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부모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여러분, 그림을 보세요. 천사는 소년을 밀지도 끌어당기지도 않습니다. 같이 걸어갑니다. 아래를 보세요. 자갈밭입니다. 천사는 돌을 치워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이들에게 돌을 만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직접 돌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들이 배우고 성숙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오늘의 돌들이 내일은 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산을 만날 때, 아이들은 등반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이들의 어려움을 치워주지 마세요. 아이들이 17세 정도가 되면 사춘기가 옵니다. 사춘기가 된 아이들은 문제가 닥치면 포기하고 외면하려 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부모들은 실망하죠. 하지만 그건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탓입니다. 아이들의 돌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에 아이들은 스스로 어려움을 대면하고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자신에게 맞는 답을 찾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아이들에게 삶의 방식을 보여 준 적이 없습니다. 나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고 생각해야지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나를 알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린 삶이라는 여행을 통해 우리 자신을 알아가야 합니다. 질문은 중요합니다. 질문은 언제나 우리를 더욱 깊이 들어서도록 합니다. 위기는 아이들을 성장시킵니다. 아이들은 어려움과 함께 머무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의 자갈을 빼앗으면 안 됩니다. 제발, 돌을 치워주지 마세요!” 부모가 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자갈을 치우는 것보다 자갈을 치워주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요. 성경 속 길을 떠나는 토비야를 보고 우는 어머니 안나에게 아버지 토빗이 말합니다. “그러자 토빗이 대답하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아이는 건강한 몸으로 갔다가 건강한 몸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오. 이 아이가 건강한 몸으로 당신에게 돌아오는 날을 당신 눈으로 볼 것이오. 그러니 여보, 걱정하지 말고 이 사람들 때문에 염려도 하지 마시오. 선하신 천사께서 토비야와 함께 가실 터이니, 이 아이는 여행을 잘 마치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올 것이오.’ 그러자 그 여자는 울음을 그쳤다.”(토빗 5,21-22; 6,1) 부모가 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비록 자갈만 보일지라도 그 위를 걷는 걸음 곁에 천사가 손을 잡아주고 있다는 것을요. 오늘도 이 이탈리아 땅에서 어려움과 함께 머무는 법을 배워나갑니다. 김민주 에스더 (크리에이터·작가·''로마가족'' 대표) cpbc2024.11.05

유다계는 쫓겨나고 이방계 그리스도인이 예루살렘 차지[저는 믿나이다] (16) 예루살렘 함락과 유다계 그리스도인 예루살렘 사도 회의는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단순히 첫 번째 열린 공의회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리지 않는 놀라운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임을 확신했습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과 할례가 거부되지 않듯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과 할례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고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 교회와 갈라서지 않았고, 안티오키아 교회 역시 예루살렘 교회와 연대를 지속합니다. 이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로운 그리스도교를 선포하기 시작했고, 사도들의 전승 안에 머물 수 있게 됐지요. 바오로 사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방인 선교를 알아보기에 앞서 짧게 유다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가 역사 과정을 어떻게 거치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네 복음서도 밝히고 있듯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때에도 유다인들은 로마군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자처했고 사두가이파와 사제 계급이 모든 메시아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조했지요. 여기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터집니다. 66년 유다 총독 플로루스가 덜 걷힌 세금을 메꾸고자 예루살렘 성전 보물을 약탈합니다. 유다인들이 들고 일어났죠. 봉기 가담자들은 예루살렘 안토니아 요새와 헤로데 궁에 불을 지르고 로마군을 살해합니다. 그러자 로마 네로 황제의 명을 받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3개 군단 병사 6만 명을 이끌고 팔레스티나로 진군해 유다인들을 잔인하게 진압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가 죽자 황제 자리에 올랐고, 그의 아들 티투스가 원정을 마무리합니다. 티투스는 70년 8월 예루살렘을 함락합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30㎞ 떨어진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73년 모두 자살합니다. 이로써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이 막을 내립니다. 로마인들은 이 승리를 기념해 콜로세움과 포룸 로마눔(로마 광장) 사이에 ‘티투스 개선문’을 세웁니다. 유다는 시리아에서 분리돼 로마 제10군단이 주둔했고, 대부분 땅은 로마 황제에게 귀속됐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을 함락한 바빌로니아 제국 네부카드네자르가 그랬듯 철저히 파괴되고 이교화됐습니다. 예루살렘 땅에는 ‘콜로니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이름으로 새 도시가 건설됐습니다. 유다인들이 이 도시에 들어오거나 주변을 서성이면 사형에 처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역시 철저히 파괴됐습니다. 성전은 약탈당했고 불탔습니다. ‘유다인세’란 이름의 성전세만 남았습니다. 이 성전세도 로마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 재물로 보내졌습니다.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철저히 파괴됨으로써 그곳에 살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도 토대를 잃고 맙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 교회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그 지위를 잃게 된 것이지요. 다행히 예루살렘 교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도성이 함락되기 전 요르단 건너편 데카폴리스 협곡지대 펠라로 피신합니다. “우리 구세주께서 승천하신 뒤 맨 먼저 예루살렘의 주교직을 맡은 야고보가 앞에서 말한 대로 살해되자, 다른 사도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수많은 위험을 겪은 뒤 유다 땅을 떠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갔다. 마침내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은 계시를 통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도시를 떠나 펠라라는 페레아 도시에 정주하라는 예언을 받았다. 그 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예루살렘을 떠났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3,5,2-3)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왜 갈릴래아 호수 동편 이방인들이 살던 데카폴리스로 피신했을까요?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셨지요.(마르 7,31-37 참조) 이곳에 사는 이방인들도 예수님에 관해 이미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을 선교 거점으로 삼은 것이지요. 또 이곳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래아와 인접해 있습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교회의 뿌리가 예루살렘과 더불어 갈릴래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데카폴리스 지역으로 피신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베로이아와 사해 인근에서 선교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전쟁 이후 상황이 진정된 뒤 유다 땅으로 돌아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에 콜로니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이교도화된 로마 도시가 건설되자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빈자리를 메꿉니다. 이때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공동체가 되어 옛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구별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유다계 그리스도인을 설명할 땐 ‘예루살렘 교회’라는 말을 빼겠습니다. 이때부터 두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얼마 가지 않아 유다교의 여러 종파와 혼합됩니다. 유다교로부터 공적 이단으로 배척받고, 교회 안에서도 잊힙니다. 이들 중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사도 15,5) 몇몇 율법 중심의 보수적인 무리가 사도 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자기중심의 주장을 펼쳐 사도행전과 신약 성경 여러 서간에서 ‘거짓 형제들’로 배척받게 됩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5.02.25

한님성서연구소 창립 25주년 기념 학술 발표 한님성서연구소 창립 25주년 학술 발표회에서 소장 정태현 신부가 인사말을 통해 말씀의 육화와 성경의 올바른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님성서연구소 창립 25주년 학술 발표회에서 주원준 연구원이 탈출기 3장에 나오는 나무가 '떨기나무'보다 '가시덤불'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평신도 학자 양성과 그리스도교 원천 문헌 연구에 몰두해온 한님성서연구소(소장 정태현 신부)가 창립 25주년을 맞아 1일 의정부교구청 신앙교육원에서 교구 선교사목국과 공동 주최 학술 발표회를 개최했다. 기념 논문집 「말씀의 육화와 성경의 올바른 해석」도 발행했다. 연구원들은 ‘말씀의 육화와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주제로 1년간 전공 분야의 소고를 기획해 완성했다. 주원준(토마스아퀴나스) 연구원은 이날 탈출기 3장의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나무가 ‘떨기나무’보다 ‘가시덤불’이 더 적절한 번역어라고 주장했다. 주 연구원은 “가시덤불은 구약과 신약, 교부시대로 이어지는 전승사의 일치를 드러내는 번역어이며, 교부들의 풍부한 성찰을 이해하기에도 유리한 말”이라면서 “문헌학과 언어적 측면에서, 또 신학적ㆍ사목적 측면에서도 가시덤불이 더 적절한 번역어임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한님성서연구소 창립 25주년 학술 발표회에서 박미경 연구원이 주님의 호칭인 칠십인역 성경의 '키리오스'와 신약성경에 나타난 '키리오스'의 연관성을 설명하고 있다. 박미경(안나) 연구원은 구약과 신약의 연결성 안에서 하느님의 호칭인 「칠십인역」 성경의 ‘키리오스’가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키리오스’가 된다고 밝혔다. 박 연구원은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구원을 이룩했다고 전한다”며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최초의 작품인 「칠십인역」 성경이 신약성경 저자들의 믿음과 사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강선남(헬레나) 연구원도 로마 10장 6~8절을 중심으로 ‘신약의 구약 인용문과 그리스도론적 성경읽기’에 대한 연구 내용을 전하며, 그리스도론으로 이어지는 성경의 단일성을 드러냈다. 강 연구원은 “신약의 저자들은 유다교 해석방법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구약을 해석했다”며 “특히 변화의 동인이 그리스도가 된 바로오 사도의 패러다임 변화는 더욱 극적이다”고 밝혔다. 강지숙(빅토리아) 연구원은 ‘이스라엘 땅에 머무르는 이방인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과 논쟁’을, 김선영(아녜스) 연구원은 ‘정결과 부정에서 죄와 치유로’를, 김명숙(소피아) 연구원은 ‘산헤립의 침공과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적사화로 묘사한 배경’을, 송혜경(비아) 연구원은 ‘초대 그리스도교 성(性) 금욕주의’를 주제로 발표했다. 소장 정태현 신부는 “이번 학술 발표회의 공통 주제는 우리 가운데 육화되신 말씀이며, 우리는 육화되신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며 “연구원들의 소고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 지니는 특성, 곧 로고스의 육화를 더 심도 있게 파악하려는 시도들”이라고 밝혔다. 논문집 구입 문의 : 031-846-3467, 한님성서연구소 박민규 기자 mk@cpbc.co.kr박민규2023.12.04

‘자비로운 하느님’을 찾고자한 루터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49) 마르틴 루터는 어떤 인물인가요 마르틴 루터의 동상. 사진=언스플래쉬 종교개혁 이후 루터에 대한 평가 크게 갈라져 한편에선 이단자이자 윤리 저버린 타락자란 평가 비판적 태도로 교회 분열 일으킨 점 분명하지만 처음부터 새 교회 세우려던 건 아니라는 해석도 동시대 인물 예수회 창설 이냐시오 성인과 비교 흔히 종교 개혁이 마르틴 루터가 ‘대사부’의 본래 의미가 왜곡된 ‘면죄부’에 반발하여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루터에 대한 평가는 종교 개혁 이후 심각하게 갈라졌습니다. 그를 신랄하게 비판한 당대의 역사가 요한네스 코칼레우스는 종교 개혁은 교회 분열의 원인이며, 참된 가톨릭교회에서 분열되어 나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격한 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또한 루터를 배교한 수도자, 그리스도교 세계의 이단자, 윤리를 저버린 타락자로 치부하였습니다. 그러나 2017년 종교 개혁 500주년을 지내면서 가톨릭교회의 마르틴 루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가 교회 분열을 일으킨 점은 분명하지만, 처음부터 가톨릭교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는 엄격하고 철저한 ‘아우구스티노 은수자 수도회’(Ordo Ermitarum S. Augustini)에 소속된 수도승으로서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주교와 교황이 복음의 정신과 멀어졌다고 판단하며 교회에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루터의 생을 관통한 질문은 “나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였다고 전해집니다. 중세 말의 시대적 상황은 크고 작은 전쟁과 전염병 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음의 위협에 놓이며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느님보다는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하느님이 더 강조된 것도 이러한 분위기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단 사상을 막고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교회는 신자들이 교회의 정통 교리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루터가 고뇌한 ‘자비로운 하느님’을 찾는 여정은 중세 교회에서 강조하는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에 갇혀 있던 그에게 매우 절실하였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어떠한 형태의 금욕과 단식으로도 자신의 내적 욕망의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고, 자신의 노력으로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심각한 좌절과 회의에 빠졌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한 구절,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로마 1,17)라는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 곧 죄의 굴레에서 해방된 구원의 체험은 자신의 공로나 선행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메시지로부터 체험되는 복음의 힘으로 가능하고,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인간은 의로움을 얻게 된다는 깨달음이 루터의 심장을 관통했던 것입니다. 그 뒤 루터는 종교 개혁을 이끌면서 라틴어 성경을 신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자국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루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루터와 거의 동시대 인물이었고, 교회 안에서의 쇄신을 호소하며 예수회를 창설하여 교회의 지속적인 쇄신을 도모하여 일치를 위해서 헌신한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과 비교하면 마르틴 루터에 대한 평가는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cpbc2024.03.20

30년 필력과 30차례 순례로 엮은 이스라엘 안내서 [신간] 나자렛에서 예루살렘까지 나자렛에서 예루살렘까지 이창훈 성바오로 1990년부터 30년간 가톨릭평화신문에서 교계 언론인으로 교회를 위한 삶을 살았던 고 이창훈(알폰소, 1959~2023) 기자가 성경의 땅 이스라엘을 그린 책이 나왔다. 「나자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예수님의 생애를 따라 이스라엘 성지들을 입체적으로 소개한 책으로 저자는 생전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고 집필에 힘썼다. 이 책은 선종 후 약 반 년 뒤 출간된 그의 유작(遺作)이다. 베들레헴의 주님 성탄 성당과 예수님이 첫 번째 기적을 일으키신 카나의 혼인잔치 기념성당, 예수님 활동의 주요 무대인 갈릴래아 호수, 예수님이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고 붙잡히신 겟세마니, 올리브산 예수님 승천 경당과 시온산 성모 영면 성당 등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익숙한 성경 속 장소들이 자세한 설명, 풍성한 사진과 함께 펼쳐진다.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교회를 위했던 언론인의 글이라 더욱 매끄럽게 읽히면서도 완성도가 높다. “이스라엘 북부 갈릴래아 호수에서 남서쪽으로 약 25㎞쯤 떨어진 나자렛은 (중략) 오늘날 세계적인 성지가 되었습니다. 아랍인들이 주로 사는 나자렛 저지대의 중심지에는 주님 탄생 예고 기념 대성당이 우뚝 서 있습니다.”(21쪽) “오늘날 골고타는 예루살렘 성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10여 년이 지난 기원후 44년에 헤로데 아그리파 왕이 새로 성벽을 세우면서 골고타 지역이 도성 안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곳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근처에 있던 바위를 깎아 만든 새 무덤에 모셔졌습니다.(마태 27,60 참조) 그리고 바로 이 무덤에서 부활하셨지요. 그래서 골고타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기념하는 주님 무덤 대성당 혹은 주님 부활 대성당이 들어서 있습니다.”(242쪽) 주님 눈물 성당. 저자는 기자로 일하는 동안 서른 번 가까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마땅한 인솔자가 없을 때는 직접 순례단을 이끌기도 했다. 성지순례 인솔 경험은 그의 삶과 신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순례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했다. 그리고 그 순례의 체험은 그의 글과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이후 월간 「레지오 마리애」에 2018년부터 2년 동안 ‘예수님 생애를 따라가는 이스라엘 성지’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했고, 그렇게 모인 원고와 사진을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출간을 앞두고 지난해 12월 선종한 저자는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통해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배경에서, 어떤 맥락에서 그런 가르침을 주시고, 그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며 “이 책이 예수님의 삶과 구원의 신비를 좀 더 묵상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4.06.04

나눌수록 커지는 신앙과 음악[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25) 가난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따라다니는 아픔이자 상처다. 불완전한 사회구조는 필연적으로 빈부 격차를 만들어냈고, 모든 사람이 다 같이 행복하게 잘사는 곳은 ‘낙원’이라는 환상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같은 동네에서도 빈부 격차가 있지만 국가 간의 차이는 ‘넘사벽’이다. 태어난 나라에 따라 가난을 업으로 평생을 보낼 수도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한국은 이런 걱정에서 많이 벗어났다. 1950년대 세계 최빈국에서 반세기 만에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는 것은 판타지 소설에서 소재로 사용해도 용납되기 힘들 것이다.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이 그렇게 가까운 과거인데도 다른 나라의 힘든 이들을 보지 못하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6년 11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선포한 이유도 같을 것이다. 우리가 가난하다고 하는 기준이 단지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것에만 국한되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님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표현은 신랄하고 직접적이다. 물질적인 가난은 노력 여부에 따라 극복할 희망이 있지만, 마음이 가난한 것을 채우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만족을 모르며, 남을 도와주는 것을 싫어하고 이기적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하신다. 이에 대한 오해를 풀려면 성경의 원전을 살펴봐야 한다. 사실 ‘마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프뉴마티’(pneumati)이며 ‘영혼’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마음’이 가난한 것은 개인적인 문제이지만, ‘영혼’이 가난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프토코스’(ptochos)’, 히브리어로 ‘에브욘’(ebyown)’이라고 하는 ‘가난’은 ‘도움을 갈구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즉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과의 영적인 관계에 목마른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베네수엘라 엘 시스테마(El Sistema)는 아브레우 박사(José Abreu)가 클래식 음악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을 발굴해 보고자 1975년 시작한 교육 시스템이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빈민가 차고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 11명의 단원으로 출발한 엘 시스테마는 2010년 기준 190여 개 센터, 26만여 명이 가입된 조직으로 성장했다. 엘 시스테마가 배출한 세계적 음악가로는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과 베를린 필하모닉 최연소 더블베이스 연주자 에딕슨 루이즈(Edicson Ruiz) 등을 꼽을 수 있다. 나눌수록 커지는 것은 신앙과 음악이다. 이들의 행보는 다음 세대에 비전과 꿈을 제시하고 가치를 전파한다. 도움을 갈구하는 이들의 영혼을 구원해주는 기적이다. 두다멜이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5번 //youtu.be/SSypujlLlNI?si=zDGMsQYKfj_rf06f 류재준 그레고리오, 작곡가 / 서울국제음악제 예술감독, 앙상블오푸스 음악감독 류재준 그레고리오, 작곡가 / 서울국제음악제 예술감독, 앙상블오푸스 음악감독cpbc2024.11.12

상호존중의 마음으로 이슬람교 대해야한국 천주교회와 이웃 종교(23) 프란치스코 교황이 9월 28일 브뤼셀에 있는 주벨기에 교황 대사관에서 지부티 출신 무슬림 가족을 맞이하고 있다. OSV 쿠란에 돼지고기 금지하는 구절 명시 유다인들도 비슷한 이유로 먹지 않아 우상 숭배·도박·고리대금업 등도 못하게 무슬림의 종교적 식습관·예배 존중을 무슬림이 지키는 할랄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불안한 시대에, 신앙인들은 전능하신 분의 종으로서 종교를 실천할 자유를 통하여 각 개인과 공동체의 확신을 존중하는 것을 보여 주어 무엇보다도 평화를 위하여 일할 의무가 있습니다.”(교황청 종교간대화부의 1428/2007년 라마단과 파재절 경축 메시지, 2항) 할랄(helâl)이란 ‘허용된 것’이라는 의미로 종교적으로 허용되는 먹거리나 행위를 의미합니다. 무슬림에게 허용되지 않는 대표적인 먹거리는 이슬람법에 따른 도축 이외의 방법으로 죽은 동물의 고기·돼지고기·동물의 피·술 등이며 무슬림이 해서는 안 될 행위로는 우상 숭배·도박·점술·고리대금업 등이 있습니다. 무슬림은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서로 종교와 종교적 정서를 존중하면서, 우리가 섬기는 전능하신 그 한 분을 증언하고 다른 이들과 우리의 믿음을 나눌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교황청 종교간대화부의 1439/2018년 라마단과 파재절 경축 메시지) 이슬람교에서는 돼지를 부정(不淨)한 동물이라고 생각하여 먹지 않으며, 쿠란에 돼지고기를 금지하는 구절(쿠란 5,3 참조)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유다인들도 비슷한 이유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레위 11,7 참조) 유일신 종교인 이슬람교는 하느님 외의 다른 신에게 공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 역시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슬림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다른 종교와 그 신자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도록 길러야 하고, 그들의 신념과 실천을 경시하거나 비웃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상호 존중이 모든 인간관계, 특히 종교적 신념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상호 존중을 통하여 진실하고 지속적인 우정이 자랄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의 1434/2013년 라마단과 파재절 경축 메시지) 무슬림은 그리스도인과 같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의 계시를 기록한 성경을 가진 그리스도교와 유다교를 매우 친근한 종교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슬림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지만, 최근 이주 노동자·유학생·기업인들 중에서 무슬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무슬림이 폭력적인 근본주의자라는 선입관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극히 일부입니다. 무슬림의 종교적 식습관이나 날마다 드리는 예배 행위를 존중하는 것이 종교 간 대화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cpbc2024.10.23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이 죄[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30) 죄(罪)란 무엇인가요 렘브란트 작 ‘돌아온 탕자’, 1669년,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뻬제르부르크 에르메타쥬미술관. 첫영성체 교리 중 ‘고해성사’에 대해 알려주니 한 학생이 묻습니다. “선생님,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럼 죄란 무엇인가요?” 그리스도교에서 죄는 ‘하느님께서 만든 질서를 깨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죄는 하느님 그리고 이웃들과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선(善)과 사랑에 머물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물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나빠집니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는다”(야고 1,15)는 말씀처럼 죄인의 생각은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죄는 행동으로 드러날 때 죄질의 고유한 특성을 보입니다. 이 때문에 죄의 유형은 죄가 어떤 행동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죄의 다양성은 그 행위의 성격에 의해 규정되는 것입니다. 죄는 어떻게 구분되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원죄 - 인간이 처음 범한 죄를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입니다. 인류 대표가 죄를 지었으니 그 후손인 우리도 모두 그 벌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의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본죄 - 죄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나쁜 일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의 자유의지로 지은 죄를 본죄라고 합니다. 본죄는 다시 대죄와 소죄로 구분합니다. 1. 대죄 -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하느님을 배반하고 떠남으로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죄(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 성경에서 말하는 죄 :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등 이런 것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갈라 5,20-21) - 교회에서 대죄로 규정한 죄 : 초대 교회 때부터 살인·간음·배교·우상 숭배는 4대 대죄로 다스려 왔습니다. -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정하는 극악한 죄 : 살인, 강간 등입니다. →반드시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2. 소죄 - 하느님과의 우정에 장애를 주거나 교란을 시키지만, 그 관계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소죄는 진정한 참회와 선행을 통해 사해질 수 있으며 고해성사에 임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를 죄로 이끄는 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칠죄종(七罪宗) : 다른 죄의 근원이 되는 7가지 ①교만 : 명예·우월 등에 대한 무질서한 욕망으로 겸손의 덕에 반대됩니다. ②인색 : 재물에 대한 무질서한 욕구로 정의에 반대됩니다. ③음욕 : 육체적인 쾌락에 대한 무질서한 욕구로, 대부분 합법적인 혼인 이외의 성적인 쾌락이기 때문에 대죄가 됩니다. ④ 탐욕(탐식) : 음식에 대한 무질서한 욕구로 절제의 덕에 반대됩니다. ⑤시기(질투) : 다른 사람의 선에 대한 비난으로 표현됩니다. 다른 사람의 선을 마치 자기의 악처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선이 자기 품위를 격하시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시기는 원칙적으로 대죄에 해당합니다. ⑥분노 : 보복하고자 하는 무질서한 욕망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기에게 반대하는 것을 없애버리려는 그릇된 욕망입니다. ⑦나태 : 어려운 일을 싫어하고 피하며, 본분상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은 게으름입니다. 일반적으로 소죄에 해당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유혹입니다. 유혹을 견뎌내는 것은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cpbc2024.12.10

다윗 시대부터 1000여 년에 걸쳐 정리된 경전[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6)구약 성경 형성 과정 구약 성경은 다윗 시대부터 구약 말기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에 걸쳐 여러 사료와 자료가 수집 정리돼 편집한 경전들이다. 사진은 이스라엘 쿰란 공동체에서 발굴한 히브리어 성경 두루마리. 구약 성경의 세계에 빠져들기에 앞서 먼저 이 경전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간략히 살펴봅시다. 구약 성경은 다윗 시대부터 구약 말기에 이르기까지 약 1000여 년에 걸쳐 여러 사료와 자료가 수집 정리되고, 수정 첨가하면서 편집한 경전들입니다. ‘토라’인 모세 오경뿐 아니라 경전 대부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예로, 탈출기에는 기원전 1000년께 다윗 시대의 법률이 수록돼 있는가 하면, 기원전 500년께 바빌론 유배기의 법률도 포함돼 있습니다. 또 시편에 수록된 150편의 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시와 제일 늦게 쓰인 시는 800년이라는 시차를 보여줍니다. 이는 구약 성경이 이스라엘 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은 시대적으로 크게 세 단계에 걸쳐 형성됐습니다. 첫째, 기원전 1000년께부터 기원전 750년까지로 이스라엘 왕정 시대입니다. 이스라엘을 통일한 왕은 다윗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이은 솔로몬 왕 때에 이스라엘 왕국은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솔로몬 왕 시기인 기원전 950년께 이스라엘 남부 유다 지역에서 뛰어난 학자들이 그때까지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족장 시대부터 구전된 전승들을 체계적으로 글로 정리한 것이지요. 이들은 자신들이 쓴 사료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를 ‘야휘스트 사료’라 부르며, 알파벳 ‘J’로 표기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으로 멸시했던 이방 신들을 섬겼고, 백성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불공평한 부역을 강요하는 폭정을 펼쳤습니다. 이에 북쪽 10개 지파와 남쪽 2개 지파가 지역 갈등을 겪었고, 백성들은 왕에게 불만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사망 후 이스라엘 민족은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로 쪼개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두 왕국으로 갈라진 뒤 북 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9~8세기 다시 한 번 자기 조상의 역사를 정리해 사료를 만듭니다. 이 사료를 엮은이들도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료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엘로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들 사료를 ‘엘로히스트 사료’라고 하며, 약어 ‘E’로 표기합니다. 둘째, 기원전 750년께부터 기원전 500년까지로 남북 왕국 패망과 바빌론 유배 시대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패망했습니다. 또 기원전 587년 남 왕국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층 인사들은 모두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북 왕국이 망하기 얼마 전부터 바빌론 유배 시기까지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예언자들이 나타나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대였습니다. 구약 성경 예언서들의 주요 내용이 이 시대에 설교 되거나 기록됐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상ㆍ하, 열왕기 상ㆍ하의 주요한 줄거리도 이 시대에 엮어졌습니다. 특히, 북 왕국 이스라엘이 패망한 뒤 학자들이 남 왕국 유다로 피난 와서 기원전 650년께 율법을 새로이 정리했고, 그 내용을 모세의 유언으로 꾸몄습니다. 바로 ‘신명기’(申命記)입니다. 한자로 ‘율법을 펼쳐놓은 책’인 신명기는 헬라어로 ‘Δευτερονμιον’(데우테로노미온), 라틴어로는 ‘Deuteronomium’(데우테로노미움)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두 번째 법’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료를 쓴 이들을 ‘신명기계 학파’라 하고 약어 ‘D’로 표기합니다. 신명기계 학파는 신명기뿐 아니라 앞서 말한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를 저술했습니다. 이 책들을 ‘신명기계 역사서’라고 합니다. 신명기계 학파는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 원인을 찾으려 이 책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가르침 곧 ‘하느님의 율법’을 충실히 살지 않아서 자신들이 멸망했다는 것을 민족들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또 기원전 587년 남 왕국 유다 멸망 후 바빌론으로 끌려간 예루살렘의 사제(제관)들은 유배지에서 깊은 성찰을 하고 많은 공부를 하며, 이스라엘 민족의 여러 사료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나름의 관점에서 새로운 사료도 엮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더는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어서 제관들의 제의에 관해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료를 ‘제관계 사료’라 하며 약어 ‘P’로 표기합니다. 셋째 단계는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바빌론 유배 이후 시대입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 때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토라 곧 모세 오경이 저술됐습니다. 이 시기 율법 학자들이 야휘스트와 엘로히스트 사료에 신명기께 사료를 덧붙인 후 제관계 사료를 합해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보고 읽고 묵상하는 모세 오경을 편찬했습니다. 또 바빌론 유배 시대 이후 예언자들의 전승들이 정리돼 예언서들로 편집됐습니다. 그리고 시편과 지혜서들도 다듬어졌습니다. 이러한 작업들은 대략 기원전 200년께 마무리됩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유다교 성경,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구약 성경의 제1 경전이 편찬된 것입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1.03

“지역 균형 발전 위해서는 종교와 지역사회 협력 필수”[이상도 선임기자의 톡(talk)터뷰] 지방시대위원회 우동기(파스칼) 전 위원장 퇴임 전 정부서울청사에서 만난 지방시대위원회 우동기 전 위원장이 활짝 웃고 있다. 우 전 위원장은 지역발전을 위해 종교와 지역사회 협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방시대위원회는 지역이 주도하는 지역균형발전을 통해 국민 모두가 어디에 살든 균등한 기회를 누리는 지방시대를 열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최근까지 위원장을 맡은 이는 대구가톨릭대 총장과 영남대 총장·8~9대 대구시 교육감 등을 역임한 우동기(파스칼) 박사다. 다만 우 위원장은 6월 3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러 사정을 고려해 지난 5월 2일 퇴임해 현재 현직은 아니다. 인터뷰는 퇴임 전인 3월 말 정부서울청사에서 진행됐다.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과 레오 14세 교황 선출 등 예상치 않았던 일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인터뷰 게재가 예정보다 늦어졌음을 미리 알린다. 종교와 지역사회 협력은 필수, 각종 병리 현상 함께 해결해야 대학교수와 대구시 교육감·대학 총장 등 오랜 세월 교육계에 종사한 교육통인 우동기 위원장은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종교계와의 협력이 중요하다”며 자신의 경험을 소개했다. “2011년 대구에서 학교폭력으로 한 학생이 숨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교육감으로 있을 때여서 ‘학교가 못 해주는 인성 교육을 영성에서 찾자. 어떤 종교든 좋다’라고 생각해 가톨릭 등 대구 지역 6대 종단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일학교에 예산을 지원하고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상담연수를 30시간씩 시켜줬습니다. 또 학교 안에 종교 동아리를 만들지 못하도록 했던 규정을 없애고, 종교 동아리를 지도하는 교사에게도 가산점을 줬습니다.” 이어 아이들을 지도하느라 지친 교사들을 위해서도 대구대교구 한티성지·원불교 연수원 등 종교계와 다양한 연수 프로그램을 마련해 운영했다. 그러자 구체적 성과가 도출되기 시작했다. 2012년 학교폭력 피해를 봤다는 응답률이 4.73%이었던 게 2013년 0.8%로 뚝 떨어졌고, 연수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교사들의 심신안정도 눈에 보일 정도로 나아졌다. 우 위원장은 “종교계 영성이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한다”며 “지역 발전을 위해서는 각 종교가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종교 간 대화,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 의식을 갖고 지역의 비전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게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천주교에는 피정이 있고, 개신교에는 기도회가, 불교에는 템플스테이, 원불교에도 좋은 연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습니다. 지금 아이들에게는 인성·자살·학교 폭력 문제가 있고 부모들의 학대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교사가 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일도 있지 않았습니까? 이런 문제는 종교계가 갖고 있는 영성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종교계가 그 역할을 안 해주면 산업화 시대에 일어나는 이런 병리 현상은 절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우동기 전 위원장이 2024년 10월 글로벌 휴양도시 발전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지방시대위원회 제공 지역 균형 발전의 핵심은 교육과 의료 서비스 확충 최근 100대 기업 본사 86%를 비롯해 IT 및 벤처기업 등 지식·정보, 그리고 대학·R&D(연구개발) 기능 등이 수도권에 몰리면서 지역 소멸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2022년 한국산업연구원(KIET)은 ‘K-지방소멸지수 개발과 정책과제’를 발표했다. 전국 228개 시·군·구 중 46.5%에 해당하는 106개 지역이 지방소멸 위험지역으로 나왔고, ‘소멸위기’에 직면한 지역이 59곳이나 됐다. 지방에 고임금·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 위원장은 “지방의 교육과 의료 서비스 확충을 통해 이를 타개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역대 정권이 펼친 교육 입시 정책은 오히려 수도권 집중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번에 의대 정원을 늘리면서 지방에 83%를 배정했고, 수시모집에서 부모들이 보내고 싶어하는 의대·약대·치대·한의대 등 의학계열의 80% 이상을 해당 지역 고교 출신을 뽑도록 했습니다. 교육부에 있는 고등교육(대학) 정책을 시·도에 넘겨주는 방안도 추진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글로컬 대학(Glocal University)에 가톨릭계 대학들도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방소멸과 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마련한 글로컬 대학에 선정되면 5년간 최대 1000억 원이 지원된다. “현재 출산율과 인구구조로 볼 때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에 있는 가톨릭계 대학은 모두 어렵습니다. 하지만 글로컬 대학을 만들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가톨릭계 대학끼리 통폐합 등 구조조정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각 교구가 법인을 통합해서 운영하는 등 한국 교회 전체가 협력해야 합니다.” 우동기 전 위원장이 대구시 교육감 시절 산타 복장을 하고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대구시교육청 제공 영·호남 등 지역 간 화합과 협력 중요 현재 지역에서는 지방정부 경쟁력 강화를 위한 통합논의가 활발하다. 대구·경북, 부산·경남, 대전·충남이 광역 지자체 간 통합을 추진하고 있고, 전주·완주와 같이 기초 지자체 간 통합을 시도하는 곳도 있다. 우 위원장도 “지방정부가 주도적으로 정책을 펼쳐야 한다”며 이를 적극 지원했다. “초광역권발전계획과 행정구역 통합 등 행정체계 개편은 지방자치 30주년을 맞는 지방정부가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초광역권발전계획의 경우 지방주도로 협력사업을 발굴해야 하고, 추진동력 확보를 위한 협의체 구성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중앙정부가 초광역 협력사업 추진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재정, 행정조직, 법·제도 지원이 가능합니다. 만약 개헌이 이뤄질 경우 자치입법권·자치재정권·계획권 강화 내용이 꼭 들어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 간 화합이 중요하다”며 과거 경험담을 소개했다. “영남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설립자입니다. 2006년 총장으로 있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제안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제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동서화합의 상징적 의미’라고 말씀드리니 받기로 하셨습니다. 그때 ‘실사구시’란 친필 휘호를 주셨고, 화합 차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 ‘민족중흥의 동량’과 함께 걸어뒀습니다.” 지방시대위원회 우동기 전 위원장. 그는 퇴임 후 신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교리 교사로 활동하는 꿈을 꾼다. 좋은 교리교재를 만드는 꿈과 국토균형발전의 소명 1952년 태어난 우동기 위원장은 영남대를 졸업하고 일본 쓰쿠바대에서 사회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지금도 학생이다. 2012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공직을 마치면 신학 공부를 계속해 좋은 교리 교재를 만들고 교리 교사로 활동할 생각이다. “박사 과정에 진학한 건 특별한 게 아니고 교리교사를 좀 잘해보려고 한 겁니다. 교리 공부를 해보니까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교재가 뭔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박사 과정은 지금 한 학점이 남아있고요, 로마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틈틈이 교리교재를 쓴 게 있는데 좀더 보완해서 출판할 계획입니다.” 우 위원장은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와 고교 동창으로 오랜 인연이 있다. 그는 1999년 주님의 자녀가 되면서 세례명으로 ‘파스칼’을 선택했다. “파스칼은 목동과 수학자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수학자인 줄 알았는데 목동이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저한테 딱 맞는 겁니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자’는 게 제 신념입니다. 성경 말씀 중에는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잠언 16,3)를 가장 좋아합니다. 첫 직장이던 국토연구원에서 처음 맡은 과제가 ‘수도권 정비 계획’입니다. 국토균형발전을 위해 수도권에 과도하게 집중된 인구와 산업을 적정하게 배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죠. 그러다 이 일을 맡게 됐는데 ‘아 이게 소명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상도 선임기자 raelly1@cpbc.co.kr 이상도 선임2025.05.21

교회의 시대, 땅끝까지 가서 복음 선포[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29) 사도들과 교회 주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은 맞닿은 사건이다. 이제 성령이 함께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교회의 시대’라고도 부르는 이 시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장 레스투, ‘성령 강림’, 유화, 루브르박물관, 파리.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주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자신들의 믿음과 주님 부활의 체험을 어떻게 삶으로 이어갔는지, 그리고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려줍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만큼이나 충격적인 체험을 합니다. 바로 ‘성령 강림’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1-2) 이제 주님과 결합된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이끄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은 맞닿은 사건입니다. 구약 성경이 전하는 시대가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한 시간을, 복음서는 아드님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을 전한다면 이제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함께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교회의 시대’라고도 부르는 이 시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16일자 1410호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44편 참조)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이러한 신앙의 인식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와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오셔서 우리 안에 신앙을 불러일으키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신앙의 첫 성사인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성부 안에 근원을 두고 성자 안에서 주어진 ‘생명’은 교회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내밀하게 전달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83) 주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으로 이전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사도들은 완전히 바뀝니다. 그들은 땅끝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 공동체를 설립합니다. 그 시작은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유다인들에게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사도 2,22-24)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사도의 설교는 이렇게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 내용을 선포합니다. 교회는 이 고백을 ‘케리그마(kerygma)’라고 부릅니다. 사도들은 또한 “하느님의 가장 큰 업적은 죄 중에 있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과 화해시킨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화해 말씀을 전하는 ‘화해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2코린 5,18)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선포합니다. 사도들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에 맞갖게 동정과 호의, 겸손과 온유, 인내를 간직하여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콜로 3,12 참조)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새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했습니다.(콜로 3,17) 사도들은 무엇보다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지킬 것’을 강조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복음 선포와 함께 교회 구성원들은 유다인에서 이방인으로 확장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을 위한 것이면서 당신 몸인 교회 안에 서로 다른 유다인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만드는 사건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소아시아, 로마, 스페인과 아시아의 땅끝까지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사도들과 교회가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주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8,19-20) 성령 강림으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구원의 공동체가 됐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날까지 지속할 것입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