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 (10) 루카복음에서의 성모님.](//cpbc.co.kr/CMS/newspaper/2010/06/rc/341723_1.1_titleImage_1.jpg)
[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 (10) 루카복음에서의 성모님.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우리는 루카복음에서 하느님 말씀에 마음 설레하며 온 힘을 다해 순명하는 성모님을 살펴봤다. 겸손한 자세로 어려운 이들을 배려하며, 모든 일에 지혜롭게 대처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인격적 모습과 달리 성모님에 대해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학자나 외경은 원죄의 결과가 출산의 고통인데, 원죄 없으신 성모님은 그 고통을 겪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수님 탄생을 전하는 부분에 직접 언급은 없지만 성모님 역시 모든 어머니가 겪는 출산의 고통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출산의 고통과 노동은 결코 원죄의 결과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인간과 모든 동물이 번성하라는 하느님 축복으로 나타난다. 출산한 성모님이 나자렛으로 귀향하는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기 예수는 하느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성장 과정을 거친다. 모든 아이가 엄마에게 많은 것을 배워가듯 아기 예수도 배움이 필요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인간적 성장 과정 없이 쑥쑥 자라는 것과 달리 예수님의 성장 과정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소년 시절(루카 2,41-54)을 보면 예수님이 부모를 따라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가는 모습이 나온다. 파스카는 '건너 뛰다'라는 히브리어에서 유래됐다. 원래 유목민의 축제인 파스카는 질병이 자신들이 키우는 가축을 건너 뛰게 함으로써 재산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된 의식이었다. 나중에 모세는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파스카 예식을 이용한다. 이는 노예의 삶에서 자유인의 삶으로 건너 뛰려는 더 발전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훗날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통해 거행하는 파스카 예식은 한층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재산을 지키거나,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현재의 문제가 아닌 유한의 삶에서 무한의 삶으로 건너 뛰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파스카 축제에서 헤어진 아들을 애타게 찾던 부모에게 소년 예수가 한 말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성모님의 입장은 어땠을까? 여느 부모 같으면 화를 냈을 텐데, 성모님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했다. 정말 화가 나도 곰곰이 되새기는 성모님. 소년 예수를 대하는 성모님의 인격적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라는 성경구절을 보면 예수님이 결코 겉만 인간의 모습을 한 하느님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생활에서의 모습은 마태오ㆍ마르코복음에 겹쳐 나오기도 한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러 왔다는 제자들 말에 각 복음은 어법의 차이를 보인다. 루카복음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기록했고, 마태오ㆍ마르코복음에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표현이 더 나와 있다. 그리스 사람인 루카 성인은 철저한 남성 중심, 제자 중심에서 벗어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직접적 표현을 쓰지 않았다. 반면 마태오ㆍ마르코복음은 '누가 내 어머니냐'라는 반문을 뒤에 씀으로써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상에 어떤 남성과 여성이 아무리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따라도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는 오직 성모님과 요셉 성인 뿐이다. '내 어머니'라는 말마디는 예수님께서 항상 자신의 어머니인 성모님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다른 복음에는 나타나지 않고 루카복음(11,27-28)에만 나오는 기록을 살펴보자. 군중에게 연설하시는 예수님께 한 여인이 '선생님의 어머니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답하신다. 개신교는 여기 나오는 '오히려'를 예수님에게 젖을 먹인 여인은 행복하지 않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여인으로서 성모님이 갖는 이중적 행복의 의미라 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냐?'라는 표현이 어머니 성모님을 무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성모님은 예수님에게 육체적 어머니인 동시에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어머니라는 뜻이다. 정리=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cpbc2010.06.29
![[아! 어쩌나?] (63) 지치도록 봉사해야 하나요?](//cpbc.co.kr/CMS/newspaper/2010/07/rc/344319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63) 지치도록 봉사해야 하나요?Q. 지치도록 봉사해야 하나요? 결혼 적령기를 넘어선 처녀입니다. 요즈음 결혼을 전제로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습니다. 남자친구는 외모는 별로이지만 마음 씀씀이는 많은 사람들이 칭찬할 정도로 괜찮은 편입니다. 헌신적이고 봉사정신도 투철해서 말 그대로 '성실' 그 자체, 법 없이도 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그런 모습이 좋아 사귀고 있는데, 시간이 가면서 왠지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다른 사람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고, 누가 힘들다는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도우러 가는 그를 보면서 마음 한구석으로는 좋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내가 저 사람하고 같이 살 수 있을까'하는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저는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남자친구는 저와 다른 차원에서 사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 그리고 더 불안해지는 것은 처음과 달리 남자친구가 짜증내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께름칙했던 것은 상대방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도움을 주러갔다와서는 저한테 짜증을 내는 일입니다. 도움을 줬는데도 상대방이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 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 참다운 봉사다"라고 했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네가 뭘 안다고 잔소리야!"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이런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A. 자매님 남자친구는 '사마리안 콤플렉스'가 심한 분인가 봅니다. 성경을 보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길을 걷다 어려운 이웃을 보고 도움을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교회 안에서 선행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인용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마리아 사람의 행적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예상치 못한 콤플렉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마리안 콤플렉스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 마음의 건강성은 균형 여부에 의해 판단됩니다. 즉, 사람 마음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과 다른 사람만 생각하는 '이타심'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가장 건강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에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친 희생과 헌신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이것을 일컬어 사마리안 콤플렉스에 걸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들의 성격은 공통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의존적 성격을 갖고 사는 게 문제입니다. 남의 눈치를 보고 산다는 것이지요. 대개 이분들은 자존감이 낮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병적인 생각이 있어서 많이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선택한 행동이 지나친 헌신과 봉사 등 자신이 착한 사람이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람이 참 괜찮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신 안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없애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때로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임에도 굳이 도와주려고 하거나 상대방이 원치 않은 것을 도와주려다가 쉽게 상처받고 힘들어합니다. 본당에 나간 지 얼마 안 된 신부가 선배 신부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신부는 본당에 몇몇 자매님들이 자기를 돌봐주려고 하는데 영 마음이 편치가 않다고 했습니다. 별로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많이 힘들지 않으냐고 하면서 자꾸 챙겨주려 하고, 밤에는 매우 외로우실 것 같다고 위로차 전화한다며 내용도 없는 이야기를 한다는 고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귀찮고 지겨운 느낌이 들어 "그러지 마시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인가 다른 자매들이 밤에 사제관에 전화해서는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신부님을 위로해 드리려고 한 건데 왜 상처를 주느냐, 정신적 아버지인 신부님이 어쩜 그럴 수가 있느냐, 그 자매들은 지금 식음을 전폐한 채 누워있다"며 울고불고 따지는 바람에 아주 애를 먹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는 싫다는 말도 못하고 늘 자기 옆에 붙어 있으려는 그 자매들 때문에 신경이 쓰여 소화도 안 되고, 얼른 그 본당을 떠났으면 하는 마음밖엔 없다고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선배 신부가 충고하기를, "그 자매님들은 사마리안 콤플렉스가 심한 분들이니 자네가 아무리 사양해도 안 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를 도와주는 다른 자매들이 있으니 내 걱정은 마시고, 옆 본당 신부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분을 도와드리라고 해서 떼어내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많은 영성가들이 건강한 신앙생활에 대해 공통으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존하는 정도를 식별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기대와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얼마나 포기해 왔는지를 알아차려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사랑의 계명을 완성하기는커녕 좌절과 탈진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영성가들의 이 말씀은 자매님 남자친구가 꼭 들어야 할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홍성남 신부(서울가좌동본당 주임) cafe.daum.net/withdoban 이힘2010.07.22
![[성경속 상징]21-귀- 하느님께 대한 적절한 응답](//cpbc.co.kr/CMS/newspaper/2008/10/rc/268523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21-귀- 하느님께 대한 적절한 응답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나이가 들면 왜 귀가 잘 들리지 않을까? 한의학에서는 귀가 신장 활동의 강약을 나타내는 곳이라고 한다. 노화에 따라 청력도 약해지는 까닭은 신장 기능이 약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포유동물은 외이ㆍ중이ㆍ내이 세 부분으로 구분된 청각기관인 귀를 가지고 있다. 소리를 분별하는 기관인 귀는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기능도 한다. 성경에서 귀는 순종을 의미한다. 히브리 노예가 6년간 일하면 7년째에는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런데 만일 당사자인 노예가 6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주인 집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주인은 그를 재판관에게 데려가서 노예의 귀를 문짝이나 문설주에 다가세우고 송곳으로 뚫는다. 그렇게 하면 그는 평생동안 노예 신분에 머물게 된다(탈출 21,6). 사제를 임명하는 임직식에서 사제 직분을 맡은 사람의 오른쪽 귓불에 희생제물의 피를 바르기도 했다(레위 8,23). 귀는 주변 소리나 정보를 잘 듣고 따르려는 정신적 자세, 즉 마음 준비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래서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얘기하는 상대방에게 마음을 향하는 것이나 마음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잠언 4,20). 귀는 인식하는 기관으로서 마음과 생각의 동의어로 나타난다(잠언 2,2). 듣는다는 것은 귀를 기울이고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 대한 적절한 응답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를 그 고통으로 구하시고 재앙으로 그 귀를 열어 주십니다"(욥 36,15). 마음의 눈이 있는 것처럼 마음의 귀도 존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귀는 예민하다. "주님의 귀는 예민하셔서 모든 것을 다 들으시므로 불평을 속삭이기만 해도 그 귀에 다 들린다. 구원의 날이 오면 귀머거리의 귀가 열려 책 읽는 소리를 듣게 된다"(지혜 1,10).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종종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고 말씀하셨다(마르 4,9).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간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그러나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령을 거역한다(사도 7,51). 예수님께서는 듣지 못하는 이를 고쳐주시기도 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4). 과거 가톨릭 세례식에서는 사제가 "열려라"하고 말하면서 예비신자의 양쪽 귀를 만지는 예식이 있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향해 마음의 귀를 연다는 의미다. 듣는 것은 생명과 축복이요 듣지 않는 것은 심판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적게 이야기하고 남의 말을 열심히 들으라는 뜻이다"는 격언이 있다. 생활 안에서 깊이 생각하며 실천해볼 일이다. 조은일2008.10.14
![[세상에빛을?]왜관수도원④, 새로운 100년 향해 닻을 올리다.<끝>](//cpbc.co.kr/CMS/newspaper/2009/12/rc/318012_1.0_titleImage_1.jpg)
[세상에빛을?]왜관수도원④, 새로운 100년 향해 닻을 올리다.수난과 영광의 한 세기 여정, 새 희망 안고 하느님께로 왜관수도원 당가(재정담당) 박태규(시메온) 수사가 2005년 9월 21일 중국 지린(吉林)교구 지린시 코첸(口前)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권혁화 신부를 번쩍 안아들고 기뻐하고 있다. 권 신부는 1946년 폐쇄됐던 연길수도원 소속으로, 왜관수도원에서 수련을 받고 첫서원과 종신서원을 했다.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은 2001년 교회법적으로 복구됐고, 수도원은 현재 코첸성당 구내에 위치해 있다. 1991년 3월 25일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보급판이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보급판 신약성경 번역이 마무리된 것은 200주년 신약성서 번역위원회가 출범한 지 12년 만인 1986년이었지만, 주해판 본문이 그 자체로는 읽기에 적합하지 못해 본문을 다시 다듬고 각주도 곁들이느라 5년이 더 걸렸다. 신약성서 번역 완료 이후 주석서 출간도 어려움이 많았다. 주석이 달린 낱권 성서를 차례로 출간했고, 이들 낱권 성서를 합본해 2001년 5월 27년 만에 신약성경 27권 주해를 모두 담은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가 완간됐다. 이로써 한국천주교회는 신약성경 원문에 더욱 충실한 번역본 이해에 도움을 줄 주석이 실린 번역본을 비로소 갖게 됐다. 분도출판사를 통해 우리나라 성서학 및 신학 저술의 저변을 넓힌 왜관수도원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어르신사목, 노동사목, 사회복지로 선교활동 영역을 넓혔다. 특히 1986년 3월 1일 왜관감목대리구가 폐지되고 관내 20개 본당이 모두 대구대교구 직속관할구로 이관되는 가운데서도 선교 영역은 한층 다양화됐다. 왜관수도원은 1992년 7월 경북 칠곡군 왜관읍 금남리에 총면적 2만3445㎡(7092평) 규모로 분도 노인마을을 완공, 고령화시대에 대비했다. '노인복지'라는 개념조차 낯설던 1970년 경북 선산에 양로원을 개원해 22년간 운영한 경험이 토대가 됐다. 분도 노인마을은 일반 양로원과 달리 '수용' 방식이 아니라 '마을' 형태로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어르신들이 평생 살아온 방식대로 자유롭게 자신의 노후를 살도록 배려한 것으로, 독일 양로원 운영방식을 우리나라에 적용시킨 시설이다. 수도원의 노동사목은 1973년 경북 구미시 원평동에 공단 여성 노동자들 권익 향상을 위해 설립한 여성복지상담소가 시작이다. 이후 1995년 경북ㆍ구미지역 이주노동자들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외국인노동자 상담소, 여성복지상담소를 모태로 2001년 명칭을 바꾼 고용평등상담소, 2000년 11월 개원한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및 부설 경제윤리연구소 활동 등을 통해 가톨릭 사회윤리 실현에 힘을 쏟았다. 아울러 왜관 순심중ㆍ고와 순심여중ㆍ고를 주축으로 한 순심학원의 청소년 교육, 왜관 피정의 집(1964년)ㆍ부산 명상의 집(1971년)ㆍ성 베네딕도 피정의 집(1979년)ㆍ요셉수도원 피정의 집(1987년)을 주축으로 이뤄져 온 피정 활동, 가톨릭신학원(1969년)을 중심으로 한 수도자 교육 등에도 매진하고 있다. '필요로 하는 곳에 이미 가 있는',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헌신하는' 그리스도 정신의 실천이었다. 이같은 선교활동과 함께 2001년 8월 이형우(시몬 베드로) 신부가 제4대 수도원장에 선출돼 그해 9월 아빠스로 축복된 것을 전후해 수도공동체도 확대됐다. 1987년 3월 서울 근교 불암산 기슭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에 성 요셉 수도원이 분원으로 설립됐고, 1998년에는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승격됐다. 2001년 10월 19일 왜관수도원 참사회에서 미국 뉴저지 뉴튼수도원을 인수키로 결정한 것은 왜관수도원의 성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그 해 12월 뉴튼수도원을 인수하기 위해 6년간 관리원장을 맡아온 김구인 신부가 허홍길 신부 등 5명과 함께 파견됐고, 2004년에는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승격했다. 1977년 이후 20여 년간 종신서원자가 없어 폐원 위기에 처했던 뉴튼수도원은 2006년 8월 첫 유기 서원자를 배출하는 경사를 안기도 했다. 2006년 11월에는 전남 화순군 춘양면 석정리에 분원인 화순수도원이 설립됐다. 그간 경북과 경기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베네딕도회가 호남권역에 파견된 첫 수도원이었다. 농원으로 쓰던 건물을 고쳐지어 수도원으로 쓰고, 올해 4월에는 황토 피정의 집을 지었다. 기존 서울, 대구, 부산분원과 함께 총 6곳에 이르는 분원에는 왜관수도원 140여 명 회원 가운데 70여 명이 파견돼 수도생활과 선교를 병행하고 있다. 베네딕도회 수사들과 함께 덕원에서 선교한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는 대구 수녀원에, 연길에서 선교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는 부산 수녀원에 각각 정착해 50여 년 성상을 선교에 힘써왔지만 '고향 같은' 덕원과 연길을 잊지 못한다. 지난 9월 25일, 화재로 불탄 수도원터에 새로 지은 100주년 기념성당에서 베네딕도회 한국 파견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한 왜관수도원 공동체는 이제 서울ㆍ덕원ㆍ연길수도원 수도선배들의 100년에 걸친 영광과 수난, 순교 여정을 기억하며 새로운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나아간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 땅에 베네딕토 성인의 수도 정신이 뿌리내리도록 섭리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한국천주교회 발전과 수도공동체의 영적 쇄신을 위한 디딤돌이 되고자 새로운 100년을 향해 새로운 영적 항해의 닻을 올린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전대식 기자 jfaco@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오세택2009.12.01
한글 라틴-라틴 한글사전 나와 한글과 라틴어를 한 번에 찾아볼 수 있는 「한글-라틴, 라틴-한글 사전」이 나왔다. 새 사전은 단어 이해를 돕는 용어 해설과 백과사전에 실린 예문, 교리해설 등을 곁들인 풍부한 해설을 통해 뜻을 비롯해 단어 활용 등 궁금증까지 해결할 수 있도록 편집된 것이 특징이다. 한글로도 한 번에 뜻을 알기 어려운 단어에는 한자 표기를 병행했고, 알기 쉽게 풀이했으며, 성경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도 배열해 다양한 변화도 꾀했다. 장익(춘천교구장) 주교와 성염(요한 보스코, 라틴어 박사) 전 교황청 주재 한국대사 등이 공동집필한 「라틴-한글 사전」(1995년)을 바탕으로 적재적소에 예문을 배치, 108가지로 변화하는 동사 등 까다로운 라틴어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미사통상문과 주요 기도문, 성경, 성가, 교회법, 수도회 회칙 등 성직ㆍ수도자, 평신도와 밀접한 미사 전례나 기도문 등에서 예문을 인용했다. 총 2624쪽 방대한 분량이지만 성경 용지로 제작해 부피와 무게도 크게 줄였다. 앞쪽에는 한글-라틴 사전, 1513쪽부터는 라틴-한글 사전으로 구성됐다. 성직자와 수도자, 신학생, 라틴어에 관심 있는 평신도에게 한 권쯤 꼭 필요한 사전이다.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소 펴냄, 이순용(마르코) 엮음. 값 9만4000원. 문의: 011-9845-1879 이힘 기자 lensman@pbc.co.kr이힘2009.06.23
![[성경 속 상징]-(2) 광야](//cpbc.co.kr/CMS/newspaper/2008/04/rc/248281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2) 광야하느님을 애타게 찾도록 하는 곳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광야'하면, 오래전 성지순례 중에 순례자들과 시나이 반도의 광야에서 작은 바위를 제대삼아 미사를 봉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미사를 시작하자 근처에 사는 베드윈족 아이들 몇십 명이 우리 주위에 모여들었다. 이방인을 호기심의 눈초리로 보던 아이들은 우리가 성가를 부르자 자기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크게 따라 불렀다. 나중에는 손뼉까지 치며 즐겁게 노래를 부르던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광야에 사는 아이들의 삶이 무척 순박하고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야라고 하면 우선 황량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척박한 땅, 뜨겁고 건조한 불모의 사막을 생각하기 쉽다. 광야는 죽음과 쇠퇴, 파멸의 땅을 의미한다. 또 광야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굶주림과 타는 듯한 갈증이 존재한다. 무서운 모래 바람과 위험한 독사, 전갈 등이 인간의 생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곳이 광야다. 그래서 성경은 광야를 사람이 살지 않고 야생 당나귀나 들짐승이 사는 곳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광야의 들나귀처럼 먹이를 찾아서 일하러 나가네"(욥기 24,5). 구약의 광야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던 장소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는 무섭고 두려운 곳이었다.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호렙을 떠나, 너희가 본 저 크고 무서운 광야를 가로질러, 아모리족의 산악 지방 길을 따라 카데스 바르네아에 이르렀다"(신명 1,19). 이스라엘은 광야를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시련과 정화의 상징이 된다. 황폐한 광야에는 각종 사악한 짐승이 도사리고 있다. 하느님께 버림 받은 장소인 광야는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기만 한다면 비옥한 풍요의 땅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하늘에서 영이 우리 위에 쏟아져 내려 광야는 과수원이 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이사 32,15). 역설적으로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광야의 땅에서 울부짖는 소리만 들리는 삭막한 황무지에서 그를 감싸 주시고 돌보아 주셨으며 당신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신명 32,10). 신약에서 광야는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를 위한 길을 준비한 장소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4). 이처럼 광야는 예언자로서 사명을 위해 준비하는 장소다. 광야는 악이 거처하는 장소로도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머무르시며 기도하셨다(마태 4,1-11). 광야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기에 세상에 숨겨진 곳, 속세를 초월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수도자들은 오랫동안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전심으로 기도와 사색에 몰두했다. 광야에는 안락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과 자연으로부터 기대할 것이 거의 없는 황량함이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살이 동안 수많은 고난을 겪고 불평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광야는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살 수 없음을 뼈저리게 가르쳐주고 하느님을 애타게 찾도록 하는 장소다. 나의 광야는 어디인가?cpbc2008.04.29
![[성경속 상징]24-무릎 꿇는 동작-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경배](//cpbc.co.kr/CMS/newspaper/2008/11/rc/271851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24-무릎 꿇는 동작-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경배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고대 희랍인들은 무릎을 꿇는 것은 자유인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야만인이나 하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릎을 꿇는 것은 아주 긍정적 의미도 담고 있다. 억지로 하는 비굴한 자세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극진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자세이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나설 때에는 자연히 경배의 자세로 무릎을 꿇게 된다. 무릎을 꿇는 행위 안에는 모든 기도가 내적으로 지녀야 할 기본적 자세를 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사나 전례, 기도에서 무릎 꿇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동작이다. 우리나라 전통 예절 중 하나인 큰절을 할 때도 무릎 꿇는 동작을 먼저 한다. 이처럼 무릎을 꿇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며 존경과 겸손을 드러내는 동작이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속죄, 통회의 의미도 있다. 또한 양 무릎을 꿇는 것은 자기보다 강한 자에 대한 굴복을 나타낸다. 특히 신적 존재에게 경배할 때에는 이 자세를 취했다. 앗시리아에서는 왕도 제단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덜덜 떠는 무릎의 흔들림은 불안과 두려움 혹은 연약함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죄책감의 표시, 간절히 바라는 동작, 공손함의 표현으로 간주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자세이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치고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했다(2역대 6,13). 에즈라는 저녁 제사 때에 단식을 그치고 일어나서, 의복과 겉옷은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 번민의 기도를 올렸다(에즈 9,5). 예수님께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올리브 동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셨다.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루카 22,41). 예수님이 무릎을 꿇은 자세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염원하는 기도를 바치는 예수님은 무엇이 참된 자유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또한 무릎을 꿇는 것은 경외심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10-11).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경배의 표시로써 무릎을 꿇는다. "이렇게 대답하여라. '그것은 주님을 위한 파스카 제사이다. 그분께서는 이집트인들을 치실 때,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을 거르고 지나가시어, 우리 집들을 구해 주셨다.' 그러자 백성은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다"(탈출 12,27). 또한 무릎을 꿇는 것은 간절히 무엇을 바라는 사람의 태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비를 청할 때 무릎을 꿇는다. 나병을 고치기를 바라는 사람(마르 1,40), 아들의 간질병을 치유하기를 바라는 부친 등이 그렇다(마태 17,14-15). 초기 유럽 교회에서는 번민, 혹은 속죄의 성격을 가진 날에만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중세 말부터는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의 기본자세가 됐다. 겸손과 통회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무릎을 꿇는 동작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보다 심오한 흠숭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첨가됐다. 조은일2008.11.11
하루 한 장 성경 읽기 -코헬기ㆍ아가서 해설「코헬렛」과 「아가」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잠언」 다음으로 「지혜문학」의 네 번째 작품인 「코헬렛( )」과 다섯 번째 작품인 「아가( )」가 연이어서 나옵니다. 단 12장으로 구성돼 있는 「코헬렛」은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슬기(인생의 길, 道)'(코헬 12,9)를 가르치는 책이라는 의미가 있는 중국어 성경의 「전도서(傳道書)」라고 불렸지만, 「새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에 따라 제목을 정했습니다. 또한 단 8장으로 이뤄져 있는 「아가(雅歌)」는 '노래 중의 노래' 혹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아가 1,1)라는 뜻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1)「코헬렛」의 저자와 저술 연대 이 책 역시 다른 지혜문학 계통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솔로몬이 저자로 알려져 왔습니다. 1장 1절을 보면, 저자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헬렛」의 문체를 살펴보면 이 책이 유배 이후인 기원전 300~200년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솔로몬이 실제로 이 책을 작성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자신을 일곱 번씩(1,1.2.12; 7,27; 12,8.9.10)이나 '코헬렛'이라고 밝힌 저자가 실제로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코헬렛」이 여러 사람에 의해서 편집됐을 가능성이 크다고만 말할 수 있겠습니다. (2)「코헬렛」의 구조와 내용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깨달은 인간의 현실적 한계와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인생을 허무로 끝내지 않고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코헬렛」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습니다. 1) 1,1 : 표제. 2) 1,2~11 : 머리말. 3) 1,12~2,26 : 코헬렛의 자기반성과 인생에 대한 반성. 4) 3,1~6,12 : 인간 현실의 부정적인 면과 한계. 5) 7,1~12,8 : 인간 실존의 문제들(예컨대, 지혜, 정의, 여자, 권력, 운명과 사회적 관계). 6) 12,9~14 : 결문 -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12,13). (3)「코헬렛」의 '허무' 「코헬렛」은 '허무로다, 허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끝맺습니다(1,2; 12,8). '허무' 또는 '헛됨'을 뜻하는 히브리어 명사 '헤벨( )'은 모두 38번이나 사용되고 있으며, 인생이 허무하다고 강조하는 구실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코헬렛」이 인생무상을 말하는 비관적인 허무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만 믿으면서 세속적 보상만을 바란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허무를 맛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4)「아가」의 저자와 저술 연대 사랑의 노래인 「아가」는 서두에서 저자가 솔로몬이라고 밝혔지만, 다양한 시기에 작성된 노래들이 하나의 책으로 묶인 것은 내용상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개혁 이후인 4세기 초반인 것으로 추정되기에, 이 책은 솔로몬이 아닌 익명의 저자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 분명합니다. (5)「아가」의 구조와 내용 모두 열다섯 편의 노래들로 이뤄져 있는 「아가」는 내용상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1,2~4 : 서언 노래: 사랑을 호소함. 2) 1,5~2,7 : 연인 간의 대화. 3) 2,8~17 : 여인의 회상. 4) 3,1~5,1 : 혼례 행렬과 연인 찬가. 5) 5,2~6,3 : 가버린 연인을 찾는 여인. 6) 6,4~8,4 : 연인 간의 대화. 7) 8,5~14 : 사랑의 인장. (6)「아가」의 신학사상 이 책의 핵심내용은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지를 한 마디로 전달해주고 있는 다음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합니다'(8,6). 이 책의 저자는 등장인물인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서로에 대한 사랑에 대한 묘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고백하고 믿는 이들의 영혼을 향한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가」의 남녀가 지닌 사랑은 당신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기초합니다(1요한 4,8 참조).이힘2008.09.23
![[아! 어쩌나?] (62) 자기 허상을 버려야](//cpbc.co.kr/CMS/newspaper/2010/07/rc/343348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62) 자기 허상을 버려야Q1. 자기 허상을 버려야 남편이 요즘 많이 힘들어합니다. 직장에서 승진 대상자에 빠졌을 뿐 아니라 보직도 좋지 않은 곳으로 발령이 나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술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매일 술을 마시고 들어와 "나 같은 인재를 몰라보는 회사는 망해버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남편은 이른바 일류대학 출신이고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란 것을 모르고 살아온 엘리트인데, 그래서 이런 상황이 더 힘든가 봅니다. 모아둔 재산은 별로 없고 남편이 특별히 다른 기술을 가진 것도 없어 직장을 그만두면 당장 어려워질 것 같아 남편을 달래느라 죽을 맛입니다. 어떻게 해야 남편이 마음을 잡고 다시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A. 남편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실패가 한 번도 없었다니 더욱이 마음이 상했을 것입니다. 자매님께서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것은 참으로 잘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셔야 남편의 상한 마음이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어린아이 달래듯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들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또 너무 오랫동안 들어주다 보면 상대방이 달라질 생각은 안 하고 응석욕구를 채우려는 잘못된 습관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남편 문제는 외관상으로는 회사와의 관계로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이 만든 허상 때문에 생긴 심리적 문제입니다. 즉, 자신이 아주 유능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스스로 만든 허상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허상을 제거하지 않는 한 내적 갈등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허상을 제거하는 방법은 '잘난 나'가 아닌 '못난 나'를 기점으로 다시 사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이런 데로 보내다니, 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야'하는 생각을 뿌리치고 요즘 같은 세상에, 그리고 내 나이에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춰 생각해야 무엇인가 다시 노력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올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칭송을 받는 노인 신부님께서 사제생활이 힘들지 않으셨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자마자 노인 신부님은 손사래를 치시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나 같이 허물 많은 사람을 사제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이지요"라고 하시더랍니다. 노인 신부님은 겸손의 삶, '못난 나'를 기점으로 사시는 분이시기에 이런 말씀이 가능하셨던 것입니다. 남편도 마음이 편안해지려면 이 노인 신부님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합니다. 루카복음 14장 11절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써서 남편분에게 건네고 묵상을 권유해 보십시오. Q2. 제가 탕자인가요? 제 대부님은 아주 열심인 분이십니다. 늘 매일미사에 참례하시고, 묵주기도도 하루 30단을 바치시며,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칩니다. 성당에서도 다른 분들과 잡담을 하지 않고 성경묵상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 '성인 같다'는 느낌과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하는 것들에 대해 심하게 질책을 하셔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대부님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제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방을 갔다 왔다고 하면 불쾌한 얼굴로 "너는 왜 그렇게 세속적이냐"하고 나무라십니다. 심지어는 별것 아닌 일에도 그런 짓을 했으면 반드시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고 심하게 야단을 치십니다. 한 번은 제가 영성체를 하러 나가려고 하는데 제 옷을 잡으시면서, "보속도 제대로 안 하면서 무슨 영성체냐"하시는데, 사람들이 저를 무슨 대역죄인처럼 쳐다보는 것 같아 무안했던 적도 있습니다. 대부님이 존경스러운데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제가 신심이 부족해서일까요? A.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님은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시는데, 심리적으로는 여러 가지 병적 콤플렉스를 가지신 분이신듯합니다. 우선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자로 재듯 구분하려는 것을 '성전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성당 안은 거룩하고 다른 곳은 세속적이라는 생각인데, 이런 생각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볼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도 이분법적으로 봐 자칫 분열증을 일으킬 가능성을 가진 콤플렉스입니다. 이런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 하신 것과 주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콤플렉스는 초대교회 때 영지주의자들이 가졌던 것입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이미 교회에서 문제시한 바 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비록 대부님이라 하더라도 영적지도를 받지 마시고, 다른 분에게 영적지도를 받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이힘2010.07.13
![[인터뷰]생태신학자 숀 맥도나휴(성 골롬반신학교 교수)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0/05/rc/335335_1.0_titleImage_1.jpg)
[인터뷰]생태신학자 숀 맥도나휴(성 골롬반신학교 교수) 신부"교회, 녹색 가치의 옷 입어야"숀 맥도나휴 성 골롬반신학교 교수신부 25년간 전 세계를 돌며 강연을 통해 생태신학과 영성을 나눠온 세계적 생태신학자 숀 맥도나휴(Sean Mcdonagh,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부가 한국을 방문했다. 4월 13일 내한한 맥도나휴 신부는 23일간에 걸쳐 제주와 대구, 서울대교구, 서울 포교 성 베네딕도수녀회 등을 찾아 성직자 및 수도자들과 생태신학 및 영성을 나누고 '물과 기후변화'를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번이 다섯 번째 방한이다. 3일 서울 돈암동 상지 피정의 집 내 유치원 지하강당에서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강연에 앞서 맥도나휴 신부를 만났다. 1969년 사제품을 받고 필리핀 민다나오섬으로 파견된 맥도나휴 신부는 티볼리 지역 내 호수 세 곳에 세계은행에서 미화 2억 달러를 지원받아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정부에 맞서 이를 저지했다. 이로부터 땅을 중시하고 사랑하는 새로운 모형의 신학, 곧 생태신학에 주목한 맥도나휴 신부는 교회가 녹색가치를 입고 새롭게 태어날 것을 강조했고 그의 신학은 「땅의 신학」(황종렬 옮김), 「교회의 녹화」(성찬성 옮김, 이상 분도출판사) 등으로 국내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이번에 정홍규(대구대교구, 산자연학교 교장) 신부 초청으로 방한한 맥도나휴 신부는 4월 17일 낙동강 물막이공사 현장을 직접 돌아보기도 했다. "생태신학적 입장에서 4대 강 개발이 옳은지는 하느님 피조물을 보호하느냐, 아니면 파괴하느냐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데, 제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대로라면 이 사업이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4대 강 사업에 대한 한국 주교단의 입장, 1104명에 이르는 한국천주교회 사제단의 4대 강 사업 중단촉구 선언문, 4대 강 사업 반대측 자료와 정부측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보니 4대 강 사업은 중단돼야 한다고 봅니다." 맥도나휴 신부는 댐을 허물고 자연하천을 복원하는 독일과 스위스, 영국, 미국, 일본의 예를 들며 생태하천으로 살려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보다는 친환경적으로 물을 살려내고 절약하는 공동체 차원 하천보호가 더 실효성이 크다고 밝혔다. 맥도나휴 신부는 특히 4대 강 사업이 왜 24시간 3교대로 빠르게 속도전처럼 진행돼야 하는지, 왜 4대 강 개발이 한꺼번에 추진돼야 하는지, 이명박 대통령은 왜 대구를 내륙도시가 아니라 항구도시라고 했는지, 4대 강 사업은 대운하 사업이 아니라면서도 왜 강바닥을 그렇게 깊이 파내고 댐(보)을 만드는지 등 4대 강 사업 전반에 대해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맥도나휴 신부는 이어 최근 들어 가장 심각한 지구촌 환경현안으로 생물다양성 파괴 문제를 꼽았다. 맥도나휴 신부는 "앞으로 50년 안에 지구상에 현존하는 1000~3000만 종의 동ㆍ식물과 미생물 가운데 3분의 1, 혹은 절반이 멸종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데도 다들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며 "이와 비슷한 멸종 사례가 바로 6500만 년 전에 있었던 공룡의 멸종이었다"고 경고했다. 또 "생물다양성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기후변화도 심각한 환경 현안"이라며 "앞으로 10년간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지구생태계는 결코 전과 같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맥도나휴 신부는 "천주교회도 199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통해 강조하신대로 '생태적 회심'이 절실하다"며 "성경에 등장하는 첫 생태주의자 노아처럼 생물다양성 보존과 기상이변을 막을 방주를 만드는 과제는 바로 우리 교회에 주어진 가장 큰 도전"이라고 강조했다. 5일 출국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10.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