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주일에 만난 사람들] 신앙을 실천하는 평신도 권병태씨](//cpbc.co.kr/CMS/newspaper/2008/11/rc/271825_1.0_titleImage_1.jpg)
[평신도 주일에 만난 사람들] 신앙을 실천하는 평신도 권병태씨신앙의 기쁨, 혼자 누릴 수 있나요?틈만 나면 성경을 읽는 권씨는 지금까지 신약성서를 스무 번도 넘게 완독했다.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41,10)이다. 판공성사 참여율 100%. 모든 사목자들이 꿈꾸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꿈같은 이야기지만 권병태(스테파노, 51, 수원교구 조원솔대본당)씨는 아내 박승자(율리아)씨가 구역장을 맡았을 때 이 믿겨지지 않는 일을 함께 이뤄냈다. "판공성사 기간에 제가 맡은 구역의 모든 분들이 성사를 보게 하기로 마음 먹었죠. 퇴근하자마자 판공성사 보라고 전화하는 게 일이었고 그래도 안 보는 분들은 그 분들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면서 성당에 가자고 조르기까지 했어요." 부단한 노력 결과,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구역에 사는 신자 전원이 판공성사를 보는 놀라운 성과를 이끌어냈다. 권씨는 성모님의 군대인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써 28년째 활동하고 있다. 1500회 가까이 주회합에 참석하면서 결석한 것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24살 때 세례를 받자마자 청년 레지오 활동을 시작했죠. 그때부터 쉬는청년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회두를 권했고 그 후로도 쉬는교우들을 다시 성당으로 이끄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죠." 단원이 아무도 출석을 안 해 권씨 혼자 주회합을 진행한 일화는 본당 신자들 사이에서는 유명하다. "제가 통솔력도 부족하고, 술자리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단원들이 잘 따르지 않았어요. 주회합에 늦거나 아예 결석 하는 단원이 많았죠. 하지만 혼자서 평소와 다름없이 회합을 진행했고 단원들도 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어느새 다시 돌아오더군요." 권씨는 젊은 시절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이모와 같이 살았다. 처음 성당을 다니기로 마음먹고 기도를 하려 예수상을 집으로 가져왔을 때 이모는 "당장 버려라"고 할 정도로 천주교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세례를 받은 후 성실하게 생활하고, 이모님을 위해 기도를 꾸준히 바치다 보니 이모님도 저의 모습에 감동을 받으셨나봐요. 불교신자였던 이모님 가족이 천주교로 모두 개종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죠." 그는 늘 주님께 감사하며 산다. 젊은 시절 술을 마시는 것을 무척 좋아해 생활이 흐트러지는 것 같아 술을 끊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다. "기도를 드린 지 얼마 안 돼 위궤양에 걸렸어요. 그 뒤로는 술을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었죠. 20여 년을 소화가 안 돼 불편하게 살았지만 제 기도를 들어주신 성모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했죠." 권씨에게 3년 전 위암발병이라는 큰 시련이 닥쳤다. 그 때도 그는 담담했다. "가족들이 많이 울었어요. 하지만 저는 암은 언제든 올 것이었고,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기쁘게 돌아가는 것인데 슬퍼할 필요없다'고 제가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했죠." 수술은 다행히 잘 끝났고 그는 "위궤양 때문에 평생을 고생했는데 주님께서 그 고통마저 없애 주시려고 암을 선물해주셨다"고 감사해했다. 권씨는 신앙생활 뿐 아니라 회사생활도 모범적이다. 공업용 모터 판매영업 및 A/S(사후관리) 일을 하는 그는 회사 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는 평을 듣는다. 권씨의 아내는 "이 사람이 회사 먹여 살린거나 마찬가지죠"라고 한 마디 거들었다. "말주변도 없고 수줍음도 많아서 영업사원에는 맞지 않는다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고객들에게 믿음을 주고 성실한 모습을 보이니 자연스럽게 실적도 올랐어요. 휴일 새벽에도 고객이 A/S를 요청하면 무조건 달려갔죠. 지금은 고객이 제 이름만으로 회사를 믿어주실 정도에요." 밤낮 없이 지방으로 출장을 다니고, 전기를 다루는 일이라 사고의 위험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껏 큰 사고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주님의 은총이라고 믿는다. 본당에서 꾸리아 단장을 맡고 있는 권씨는 요즘도 퇴근하면 쉬는교우들에게 전화를 하고 방문하는 게 일이다. 성당일에 시간을 많이 뺏겨 부담스러울 만도 하지만 그는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이라며 기쁘게 살아간다. "제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자식들이 크게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멀리하고 있는 신자들이 성당으로 돌아오고, 두 아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임영선2008.11.11
![[성경 속의 동식물]56-미련하고 어리석은 타조](//cpbc.co.kr/CMS/newspaper/2007/07/rc/214253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의 동식물]56-미련하고 어리석은 타조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타조는 현재 살아있는 조류 가운데 몸집이 가장 크다. 타조라는 이름은 낙타와 비슷한 새라는 뜻이다. 타조는 긴 모가지, 튼튼한 다리, 그리고 모랫 바닥에 앉는 앉음새까지 낙타와 비슷하다. 타조의 다리는 튼튼하고 발가락은 둘이며, 부리는 짧고 편평하다. 목이 길고 머리높이가 높으며 시력과 청력이 아주 뛰어나 야생 타조에게 접근하기는 무척 어렵다. 걸을 때는 시속 4㎞ 정도이나 적이 가까이 오면 시속 60㎞ 이상 속도를 낸다. 타조는 자신의 알을 잃어버릴 정도로 주의가 부족한 동물이라 유럽에서는 '부주의'의 대명사로 쓰였다. 타조는 쫓기면 모래에 머리를 숨기고 적으로부터 도망쳤다고 생각한다. 또 중세기에는 타조가 철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타조가 소화를 돕기 위해 작은 돌을 삼키는 습성을 잘못 본 것이라 생각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타조의 깃털을 신을 나타내는 문장에 사용했다. 정의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했다. 타조는 날개가 퇴화해 날지 못하지만 달리는 속도가 빨라 시속 90km까지 낼 수 있다고 한다. 자연적으로는 아프리카 건조한 대초원, 수목이 드문 대초원, 반사막지대에서 적은 무리를 지어 살며, 여러 가지 식물성 먹이와 작은 동물들을 먹는다. 타조는 텃새이며 물을 찾아 이동한다. 일반적으로 일부다처로 수컷 한 마리가 암컷 3∼5마리를 거느린다. 수컷의 흰 장식 깃은 중세에는 기사의 헬멧 장식으로 이용됐고, 19세기에는 부인용 모자의 장식으로 판매됐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부인용 모자 장식이 사라졌으며, 현재는 깃털보다 가죽의 수요가 많아져 고급 가방, 핸드백을 만들려고 사육한다. 타조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시리아 등지에 분포한다. 몇십 마리가 떼를 지어 다니기도 하고, 얼룩말이나 아프리카의 영양류와 함께 어울리기도 한다. 시리아,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옛날부터 이 새의 날개를 장식물로 사용한 것은 조각에 그 자취가 남아 있다. 구약성경에선 타조를 부정하고 어리석은 새로 보고 있다(레위 11,16; 신명 14,15). 타조는 로마와 그 외 지역에서 잡아먹기도 했으나 이스라엘인들은 음식으로 먹지 않았다. 욥기에도 아라비아에 사는 이 새의 동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욥 30,28-29). 타조가 밤에 우는 소리는 광야의 적막을 깨고 멀리 울려 퍼진다(미카 1,8). 타조의 습성은 욥기에 자세히 쓰여 있다(욥 39,13-18). 사막의 타조를 인정 없는 동물로도 언급한다. "승냥이들도 가슴을 헤쳐 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건만 내 딸 백성은 사막의 타조처럼 매정하게 되어 버렸구나"(애가 4,3). 타조가 알을 모랫바닥에 낳아서 방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타조는 새끼를 돌보아 들짐승의 습격도 막아준다. 타조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에 서식한다. 그래서 멸망한 바빌론을 타조들이 사는 곳으로 언급한다. "사막의 짐승들이 그곳에 깃들이고 그들의 집들은 부엉이로 우글거리리라. 타조들이 그곳에서 살고 염소 귀신들이 그곳에서 춤추며 놀리라"(이사 13,21).cpbc2007.07.11
감사하며 살리라(하)제3회 생명수호 체험수기 우수작(정정희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서울 목5동본당)▶지난 호에 이어교직에서 나를 다시 받아 주리라는 믿음이나 단서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교원 정년 단축으로 교사 채용을 늘린다는 보도가 나에게는 한가닥 희망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정부의 교원정책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공부했다. 첫 해 임용시험에는 떨어졌다. 젊은 예비 교사들의 실력은 대단했으며, 설상가상으로 교사 채용 인원도 극소수였다. 또 한 해를 더 공부해야만 했을 때 세상을 더욱 깊이 배우게 됐다. 이제까지 학업, 직장, 결혼 등 모든 생활이 전반적으로 순탄했던 내가 어려움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확신이 없는 공부를 하면서 꿈 속에서까지 나타나는 시험 스트레스를 경험해야만 했다. 시험이 끝난 뒤 해방감과 행복감은 물론 공짜가 아니었다. 시험 준비기간이 길면 길수록, 시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들인 공이 크면 클수록 기쁨은 커지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인천에 발령받았다.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인천 임용을 선택하게 했으며, 가족 모두가 인천으로 올라왔다. 물론 자녀 양육과 교육은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되었다. 남편은 인천에서 서울로 통근하면서 사무실에서 가까운 명동성당을 찾아가 교리공부를 시작했고, 아마추어 가톨릭 남성합창단 울바우 단원이 돼 주님 찬양 노래를 불렀다. 난 그때까지 주님을 알지 못했지만 막내와 함께 남편 공연장마다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꽃다발을 날랐고, 사진 촬영에 바빴다. 세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명동성당에서 치르는 남편 세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으며, 대부님을 모신 저녁식사까지 흔쾌히 동행했다.(나의 모든 행동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나의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성경의 역사서와 예언서를 읽고 있는 중인데 파라오의 마음을 올곧게도 하시고, 마음을 열게도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란 부분을 읽으면서 깊게 묵상하고 기도드린 바 있다.) 자녀교육 때문에 또 한 차례 서울로 이사했다. 고향을 떠나와서 아이들 키우느라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변변한 가을여행 아니 나들이조차도 나설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다만 도로변 가로수인 플라타너스의 무성한 잎사귀가 밝은 연두빛과 짙은 오렌지색과 검은 갈색으로 차차 물들어가는 것을 보거나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져 쌓이는 은행나무잎들을 보며 가을을 삭혔다. 가을 단풍이 볼만한 곳이라는 대문짝만한 글귀와 호사스러운 단풍이 맑은 물과 어우러진 근사한 사진이 담겨져 있던 모 신문은 내 손에 구겨져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말았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도 막내를 포함한 네 자녀 모두 나팔꽃이 연달아 폭죽 터트리듯 "하하" 웃으며 건강하게 자라주었고, 바쁜 넝쿨이 되어 '앞으로 앞으로' 칭칭 감으며 나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여 온갖 시름을 다 잊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레지오 활동을 다녀오더니, 외짝 교우반이란 게 있는데 두 달 교리공부 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아이 넷 건사하랴 직장 생활에 뒤늦은 학업까지 병행하고 있던 참이라 시간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달은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설거지하던 손을 멈추고 남편을 향하여 고개 내밀며 말했다. "저 그거 할래요. 외짝 교우반 그거…." 이렇게 주님께서 날 부르셨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할 일인가. 교리 마지막 날 교리시간이 부족했던 우리에게 신부님께서는 일반신자가 지켜야 할 몇 가지 일들을 열심히 설명하셨고, 난 그 내용을 메모하느라 무척이나 바빴다. 그리고 작년 겨울방학 동안 평일미사에 참례해 부족했던 교리뿐만 아니라 마음과 몸, 영혼의 건강을 채워갈 수 있음을 기뻐했다. 올 봄 큰 아이가 교리공부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성가정 목5동성당'에서 자녀들 모두 주님을 알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해주십사 열렬히 기도드린다. 남들하고 다르게 셋째와 넷째까지를 허락해 주시고, 내가 하느님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그때부터 일찍이 보살펴 주셨으며 주님의 길로 오묘히 인도해 주신 전능하신 하느님. 지금 이 순간 "이제는 주님 꼭 붙들고 끝까지 살게 해달라" 한껏 어리광을 부리며 매달려본다. 그러면서 '위상(位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위상'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위치나 상태'를 말한다. 난 위상이란 것을 다시 생각했다. 현재의 연약한 나를 잘 받아들이고 앞으로 씩씩하게 나아갈 수 있는 비상하는 꿈의 힘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안주하지 않고 일어서는 용기 말이다. 얼마 전 피겨선수 김연아가 세계피겨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어 우리나라의 위상을 온 세계에 아주 힘차게 떨쳤다. 또한 김연아가 손가락에 낀 묵주반지는 온 누리에 주님의 은총을, 주님의 자랑스러운 영예를 펼쳐보인 것이었다. 보이는 위상을 떨친 것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은 위상이란 것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내 마음대로 보이지 않는 위상을 정의해 본다. 아이 넷의 엄마, 학교 아이들의 선생님, 남편의 아내. 이 모든 일들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나의 작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 사랑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임을 기억하고 행하련다. 나는 이제 더욱 절실해졌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보이지 않는 위상이 펼칠 맥박소리에 귀를 예민하게 정착시키고 싶다. 맑고 푸르게 마음을 닦고 하늘을 바라다본다. 자랑스러운 금메달을 목에 건 영예로운 선수처럼, 내 환경을 너끈히 뛰어 넘을 수 있는 갈매기 리빙스턴 조나단처럼 '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날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더 이상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늘과 바람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만 같다.남정률2009.06.30

예수 부활의 의미와 전례빈무덤, 우리 신앙의 정수·생명 예수 부활은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 신앙의 정수다. 신앙이 예수의 부활을 믿는 행위이므로, 부활은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 곧 은총이다. 신앙생활은 부활한 생활이며(에페 2,6; 골로 3,1) 몸의 부활을 향하는 생활(로마 8,11; 요한 5,29)이어야 한다.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아 예수 부활의 의미와 전례를 알아본다.'무덤으로 달려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 위젠느 뷔르낭 작,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소장. ▨예수 부활의 의미 예수 부활과 관련해 가장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시신을 모셨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이다. 빈 무덤 자체가 부활을 직접 증거하지 않지만, 빈 무덤은 예수 부활의 핵심적 징표다. 다른 증거는 부활한 예수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도들, 엠마오의 제자 등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1코린 15,6). 예수는 제자들이 당신을 만지게 하고 함께 식사함으로써 자신이 유령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부활한 예수는 시공간을 초월해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태 28,9.16-17; 루카 24,15.36; 요한 20,14.19.26; 21,4 참조)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부활은 죽은 시신이 다시 살아나는 재생(再生)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가 지상의 삶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의 세계로 넘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 부활이 역사적 신빙성이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에는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굳은 신앙이 이를 잘 보여준다. 구원자라 믿었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자, 제자들은 각자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예수 부활을 증언하며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부활한 예수의 육신이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은 부활이 초월적 사건임을 알려준다. 초월적 사건이란, 부활은 하느님이 이루신 사건을 뜻하며 이는 신앙의 신비다.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시킨 분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이다. 이에 교회는 부활이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믿음으로 도달하는 '신비'라고 가르친다. 예수 부활의 의미는 구약에서 예언된 약속과 예수가 지상에서 한 약속이 실행됐음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즉 부활은 예수가 구약에서 예고된 메시아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나아가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해주시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다. 이는 우리도 부활한 예수의 은총에 힘입어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단순히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되새기는 게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기 위한 것이다. ▨부활시기 및 전례 교회는 예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50일을 부활시기로 정해 성대히 기린다. 예수 성탄 대축일(12월 25일)은 정해져 있지만 예수 부활 대축일은 해마다 다르다. 부활 대축일은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에서 유래된 것으로, 춘분(3월 20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뜨고 난 다음 첫 주일에 지낸다. 올해는 3월 20일 이후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음력 15일)이 4월 10일이어서, 바로 그 다음 주일인 12일을 부활 대축일로 지내는 것이다. 부활 시기의 전례적 특징은 '기쁨과 찬미'다. 사제는 기쁨을 상징하는 백색 제의를 입고, 사순시기에 부르지 않은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을 부른다. 또 매 미사마다 부활초를 켜 예수 부활을 경축한다. 부활 성야 전례의 핵심은 '빛의 예식'이다. 부활초에 불을 옮겨 밝히고 성당으로 행렬하는 빛의 예식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세상에 새 생명을 가져왔음을 상징한다. 교회는 또 부활의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해 부활시기 첫 8일을 대축일로 정해 축제처럼 지내는데,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때 모두 일손을 놓고 매일 미사를 참례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이지혜2009.04.07
![[출판/신간]로마 유학 중인 송현 신부 예화집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발간](//cpbc.co.kr/CMS/newspaper/2008/06/rc/253335_1.0_titleImage_1.jpg)
[출판/신간]로마 유학 중인 송현 신부 예화집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발간"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다가서 나란히 걸어가셨다"(루카 24,15). 도살장에 돼지를 순순히 끌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완두콩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도살장으로 가는 길에 계속 몇 알씩 흘려주면 된다. 이 말을 들은 영국의 어느 주교는 마귀가 유혹하는 방법 또한 이와 같다며, 우리 앞에 뿌려지는 달콤한 쾌락과 욕망의 콩을 주워 먹으며 계속 따라간다면 우리는 어느새 영혼의 도살장으로 들어서게 된다는 자신의 묵상을 전한다. 아무리 작은 죄일지라도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큰 죄악에 빠지게 되므로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숨어 있다. 이처럼 재밌는 예화를 담은 송현(부산교구, 로마 유학 중) 신부의 묵상집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가 최근 발간됐다. 지난 2003년부터 4년간 평화신문 미주판에 연재돼 북미주 교포 신자들에게 신앙 지침이 된 '송현 신부의 엠마오로 가는 길'을 모아 엮었다.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던'(루카 24,13-16) 제자들의 모습을 상기하며, 저자는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재미있게 신앙 이야기를 풀어간다. 지은이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명료한 해설은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를 깨우쳐줄 뿐 아니라 지혜롭게 신앙생활을 가꿔가는 방법도 넌지시 전해준다. 이 책의 미덕은 실존 인물의 삶이나 사건, 혹은 교훈적 이야기나 예화가 153편이나 소재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딱딱한 신학적 논리나 복잡한 성경 해설 등으로 야기될 중압감에서 벗어나 말 그대로 신자들이 신앙의 산책을 즐기도록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면서도 등장 인물의 가르침이나 그에서 비롯되는 교훈은 신앙의 길에 '이정표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는 153편의 이야기를 6개 장으로 나눠 우리 신앙을 엠마오 여정에 비유해 정리했다. 마치 성경 말씀이 살아서 우리 자신을 비추고, 변화될 우리 신앙을 예시해주는 듯하다. '콜베 신부'의 예화는 세례성사를 통해 세상과 육체, 자신에 대해 죽기로 약속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일깨우고, '물이 잘 스며들도록 단단한 흙덩이를 깸'에 대한 예화는 우리 삶도 깨지고 부서져야만 온전히 하느님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깨어짐의 영성을 깨우쳐준다. 이처럼 다양한 예화를 통해 여러 각도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조명함으로써 올바른 신앙인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하고 신앙인으로써 삶을 풍요롭게 일궈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아울러 여백의 미를 잘 살린 삽화는 하삼두(스테파노) 화백이 그렸다.(가톨릭출판사/9800원)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08.06.11
[2009년은 '천문의 해'] 우주시대의 신학적 지평을 열며파괴적 삶 생명의 삶, 갈림길에 서다우주 생성과 성장에 관한 신우주론 등장과학적 발견 통해 하느님 신비 수용 가능신우주론 시대, 갈릴레오 사례서 배워야 대부분의 문화는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기원 이야기를 갖고 있다. 우리에게는 전통적 창조 이야기, 즉 창세기 1-3장이 있다. 오늘날 130억 년 된 우주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과학적 탐구를 통해 등장한다. 이것을 우리가 흔히 신우주론이라고 부른다. 창세기 제6일 토마스 베리 신부는 자신의 저서 「지구의 꿈」에서 우리는 현재 멋진 이야기를 갖고 있지 않아서 큰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는 두 이야기 중간에 끼어있다.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우리가 여기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옛 이야기'는 더 이상 빅뱅(우주발생)을 이야기하거나, 우주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토마스 베리 신부가 '새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옛 이야기'는 여전히 전통적 우주론에 매여 있다. '옛 이야기'는 이런 신우주론의 발견들을 통합해야만 한다. '새 이야기'는 어떻게 우주가 만들어졌으며,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지구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우리 행성에는 어떻게 생명이 나타나 그 자신을 의식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진화하는 우주 이야기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겨우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살펴보기로 하자.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역사를 3대 주요시기로 구분한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지구 자신이 가장 위대한 생명의 만발을 이룩한 시대인 신생대에 살고 있다. 신생대는 지난 6500만 년의 기간을 일컫는 것으로, 이 시기에는 모든 생물 종들이 다양하게 지구상에 존재한다. 신생대란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 을 보시고 그것이 "아주 좋다"고 말씀하신 제6일을 은유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생활기능들은 자연의 그물망처럼 우주전체의 존재와 기능에 완전히 의존해 있다. 우리의 사고, 감정, 감각 능력은 우리들의 경이롭고도 장엄한 지구행성의 존재에 의존해 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 역시 경이로운 창조주(로마 1,19-21)를 계시하는 우주경험에 의해 일깨워진다. 그런데 인류가 지구행성을 환경호로몬, 유전자 조작, 장기매매, 엄청난 소비 그리고 지구온난화로 위기를 몰아가고 있는 지금, 지구행성이 미래에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인지는 의문시되고 있다. 파괴적 생활 방식 경고 21세기는 인류에게 있어서 아주 결정적 순간이다. 지구가 본래의 통합성을 잃게 되면 지구상에는 그 어떤 생명도 살아남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근본적 창조질서가 인간의 탐욕에 의해 파헤쳐지고, 자연과 인간이 동시에 멸망할 위기에 있다. 특히 기후변화와 그 회복의 총 규모를 평가할 도구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우리는 신생대 종말을 초래하는 장본인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는 두 개의 길이 나 있다. 현재와 같은 파괴적 생활방식을 계속하거나, 혹은 우리의 삶의 양식을 성찰해 건강한 지구-인간 관계에 돌입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의 위기는 경제위기라기보다는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위기이다. 지금까지 근대화 패러다임이 몰고온 세계관의 위기이다. 교회는 갈릴레오로 하여금 저술활동을 중단케 했다. 갈릴레오는 지구가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연중 태양 주변을 공전하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지지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구약성경의 창세기 창조론이 쓰여졌던 당시나 문학에 대한 문헌비판이 개발되지도 않던 시대의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과학적 통찰력을 발견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시대에는 사람들이 종교는 물론, 역사와 과학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성경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전자현미경이나 천체 망원경 같은 과학적 도구들은 전혀 개발되지 않았다. 그 이후 몇 세기 동안 과학이 우리에게 우주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보다 발전된 통찰력 있는 지식들을 배우게 되면서, 교회는 이 새로운 지식들을 받아들였다.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진화에 대한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진화에 관한 의문은 인간의 근원에 관련된 문제이므로, 교회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생태위기와 관련해 계시와 창조에 대한 보다 풍부한 관점을 포용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우리를 새로운 파스카 즉 대탈출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 다양한 생물종의 실종, 석유위기, 그리고 광우병이나 구제역과 같은 폭력적 생활에 대해 성찰하고, 다시 우주와 일치를 이루는 삶, 즉 단순 소박한 생활양식으로 인도하기 위해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창조주 하느님이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을 찾아 사막을 헤맨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낡은 세계관을 버리고 하느님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했는지에 대한 도전적인 문제에 수용하도록 우리에게 소명하고 있는 것이다. 신우주론 도전에 직면 갈릴레오 시대 대다수 사람들도 역시 오랜 사고방식을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이전의 지구와 태양에 대한 통념을 버리지 못했다. 갈릴레오 시대 후 300년이 지나서 교회는 갈릴레오와 당면했던 딜레마를 인정했다. 이와 같은 신우주론의 도전에 직면한 우리에게는 갈릴레오 사례에서 배울 점이 있다. 새로운 천문학과 우주선, 인공위성과 같은 도구로 우리는 지구가 어떻게 시작되어 진화와 이 우주가 어떻게 팽창을 계속하고 있는지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우리는 과학적 발견을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구우주론에서.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대탈출, 즉 토마스 베리 신부가 명명한 '생태대'로 향한 돌입은 지구의 미래 그 자체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떼이야르 샤르뎅 신부가 말한 바와 같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과제는 우리가 가진 묵은 편견을 떨쳐버리고 지구를 건설하는 것이다."정 홍 규 신부(대구대교구 경산본당 주임, 산자연학교 교장) 임영선2009.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