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기에 취하다]-(5) 카를로 카레토 수사의「주여, 왜?」](//cpbc.co.kr/CMS/newspaper/2009/04/rc/292789_1.0_titleImage_1.jpg)
[고전의 향기에 취하다]-(5) 카를로 카레토 수사의「주여, 왜?」"고통 통해 구원으로 가기 때문이지"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카를로 카레토 수사의 영성적 메시지를 담은 「주여, 왜?」. 국내에선 김형민씨 번역으로, 생활성서사에서 출간됐다. 근년 들어 봄은 내게 점점 잔인한 계절이 되어가는 듯하다. 만물의 기운이 새롭게 솟아나는 이 때, 어째서 나는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되는 걸까? 그 까닭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봄의 밝은 기운과 대비되는 내 안의 어떤 어둠이 자괴감의 그림자로 인해 더욱 짙어지기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해마다 더 일찍, 그리고 더 빈번하게 덮치는 황사바람 속이라고는 해도 명랑한 봄새들의 지저귐에도 다투어 피어나는 봄꽃들의 향기에도 예전처럼 가슴이 설레지 않는 나의 상태는 확실히 이상하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의 들판은 저 먼 고비사막 언저리의 불모지처럼 메마르고 삭막해져 봄이 와도 새싹 한 톨 틔워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온종일 무기력과 공허의 먼지바람에 시달리다보면 어떤 때는 잠자리에 들어서 이대로 영원히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취침기도를 대신하기도 한다. 이러한 봄앓이를 올해는 유난히 심하게 겪고 있던 차 나는 무슨 은총의 작용에선지 놀라운 책 한 권을 만나게 됐다. #이탈리아 영성가, 고통을 이야기하다 이탈리아 영성가 카를로 카레토(예수의 작은형제회) 수사의 저서 「주여, 왜?」는 책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고통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인간 삶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고통에 대한 순차적이고 직접적인 해부를 통해 우리에게 근원적 문제 해결의 차원을 열어 보인다. 인간이란 생명체는 끊임없이 고통을 느끼며 우는 존재다. 그러다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어 시시때때로 저항도 하는 존재다. 내가 왜 이렇게 울어야 하지? 내가 뭘 잘못했어? 왜 하필 나야? 내가 왜? 카를로 카레토는 이 책에서 죄 없다고 믿어지는 자기 자신 혹은 이웃이 고통 받아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우리 보통 인간들의 가슴에 맺힌 통렬한 의문들을 하느님께 대신 물어준다. 주여, 왜? 그리고 친절한 담임선생님처럼 자신이 이미 거쳐 온 답풀이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여준다. 카를로 카레토는 가장 회의적인 사람조차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고통의 비밀을 헤쳐 보인다. 오랜 관상생활과 기도 속에서 자신이 깨닫게 된 하느님의 뜻하시는 바를,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친숙한 성경 내용을 인용해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써서 단순명징하게 펼쳐 보인다. 이 훌륭한 모범해답서를 얼마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 안의 어둠은 조금씩 엷어지는 듯 했다. 카를로 카레토는 이렇게 선언한다. '고통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저는 "왜?"라고 물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고통들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그분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고통의 무거운 외투 속으로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어둠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천명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하느님 나라의 <되어가고 있는 실재>이며 하느님과 우리들 자신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자들인 것입니다.' 나는 뭔가 강력한 빛이 견고한 내 어둠의 벽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세상이 다 귀찮아 방기했던 일들과 사람들이 하나 둘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집안을 청소하고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수첩에 할 일을 메모하고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나 막상 외출을 하자 곳곳에서 환호를 지르며 피어나는 봄꽃들의 덧없는 위세에 또 금방 기가 질려 어둠의 처소로 되돌아가기 위해 허둥대는 내 영혼은 그리 쉽게 구원받을 기색이 아니었다. 인간 역사를 이뤄 온 사람들의 전체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제각각일 고통의 모습 중에 내가 요즈음 겪고 있는 고통은 어느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나는 몸이 여기저기 좀 부실한 데가 있긴 해도 큰 병을 앓고 있지 않다. 나는 부자도 아니지만 그리 궁핍하지도 않다. 지금은 다들 돌아가셨지만 자애로운 부모 밑에서 정다운 형제들과 함께 자라났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25년째 큰 갈등 없이 잘 살고 있으며, 슬하에 밝고 건강한 자식도 두고 있다. 나는 큰돈은 못 벌지만 사람들이 존중해 주는 직업을 갖고 있다. 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해 왔다. 나는……. 이렇게 열거하다 보니 더더욱 나란 사람은 고통을 운운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주기적으로 침몰하여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것처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걸까? #고통에 대한 값진 깨달음 나는 이 물음을 「주여, 왜?」의 제8장이 놀랍도록 또렷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고 감격했다. '사랑,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 장은 온통 사랑이신 하느님이 인간의 고통을 방치하는 그 모순을 정면으로 다룬다. 시편 137편의 구절 '네 어린 것들을 잡아다가 바위에 메어치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를 인용하며, 하느님이 역설적 방법을 쓰는 이유를 설명한다. 지상에서는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해 이른바 '반대되는 것들의 종합'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 후 카를로 카레토는 자신의 깨달음을 선물로 내어놓는다. '고통과 눈물은 하느님이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불러들이고 선택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제10장에 가서는 구약의 야곱 이야기를 인용하며 또 다른 깨달음을 보너스로 전해준다. '우리에게 내일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데 고통보다 더욱 효과적인 박차는 없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걷어차신 이유입니다.' 고통은 나의 성장에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며 내가 궁극적 미래, 즉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더없이 값진 전략이라 것. 그 고통을 불러들이고 선택하는 주체가 하느님이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 이 두 가지 얘기는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게 외적으로 고통이 충분치 않을 경우 내적으로 그것을 불러들여서라도 고통과 함께 살아나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나의 구원에 투자하는 것이라는 이야기? 그렇다면 나의 이 봄앓이도 무의미한 좌절이 아닐뿐더러 영적으로 해이해졌던 안이한 삶에 찾아든 '야곱의 엉덩이뼈 차기'와 같은 은총의 발길질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 카를로 카레토 수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이 '주여, 왜?'하고 함께 물어주셔서 저는 '왜, 주님인가?'를 새롭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당신의 이 훌륭한 저서가 많은 이들에게 각자 나름대로 안고 사는 어쩌지 못할 고통에 대한 값진 깨달음의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구자명<임마쿨라타, 소설가> #카를로 카레토(Carlo Carretto, 1910~1988) 수사는 1910년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 피에몬테 태생으로, 연구와 교직생활을 거쳐 1952년 이탈리아 가톨릭액션협회장으로 활동했다. 1954년 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1858~1916)의 영성을 사는 '예수의 작은 형제회(Little Brothers of Jesus)'에 입회, 10년간 사하라 사막에서 관상생활을 했다. 1964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아시시에 기도 및 묵상 센터를 설립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성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하다가 1988년 78살로 선종했다. 저서로는 「가시나무 덤불이 타는 곳」 「복되다 믿으신 분」 「아버지 나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도시의 광야」 「사막에서의 편지」 「오시는 주님」 「나와 함께 광야로 가자」 등이 있다. cpbc2009.04.28
![[특집]주교회의 정평위 환경소위 생태영성 심포지엄](//cpbc.co.kr/CMS/newspaper/2008/07/rc/258563_1.0_titleImage_1.jpg)
[특집]주교회의 정평위 환경소위 생태영성 심포지엄 김일회(가운데) 신부가 심포지엄 주제발표 및 논평을 마친 뒤 발표자들과 함께 한 종합토론에서 발전에 관한 사회교리와 관련한 답변을 하고 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최기산 주교) 환경소위원회는 12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물의 영성과 교회 가르침에서 본 한반도 생태 문제'를 주제로 생태 영성 심포지엄을 가졌다. 심포지엄은 특히 지구가 생태 위기에서 본래 모습으로 회복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할 물에 대한 영성적 통찰과 함께 현대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나타난 발전관을 살피고, 최근 사회 현안으로 불거진 운하 건설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모색했다. 최기산 주교는 인사말을 통해 "오늘 심포지엄으로 영적 의미에서 물의 의미뿐 아니라 개발 위주 사고가 지닌 위험성이 논의되고 지적돼야 할 것"이라며 "이번에는 다루지 않았지만 앞으로 북녘 생태도 함께 의견을 나누는 기회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음 주요 발제와 논평이다. #성경을 통해 본 '물의 영성'은 한순희(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수녀는 '물의 영성' 문제에 주목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물의 의미를 파고든 한 수녀는 시편 104장은 하느님께서 물의 주인(3-13절)임을 선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물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는 자들에게 주는 축복이며 표시다(창세 27,28;시편 133,3)고 강조했다. 특히 구세사에서 물의 역할을 △현세 삶에 대한 응보 수단(욥 22,11;이사 8,6-8;2베드 2,5;2베드3,5-7 등) △정화 수단(시편 51,4;1베드 3,20-21 등) △종말론적 관점에서 상징(에제 47,12;이사 44,3-5;예레 2,13 등) △생명의 물(1코린 10,4;요한 7,37-38;요한 7,39)이자 세례의 물(마태 3,11;마르 1,8;요한 1,26;로마 6,3-11 등)이라고 파악했다. 한 수녀는 "물의 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는 인간성의 본성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며 "우리에게는 물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물의 생명력을 지키는 데 공동 책임을 져야하는 사명이 있다"고 역설했다. 최민석(광주대교구 장흥본당 주임) 신부는 논평을 통해 "이용 가치에 고정돼 있는 물에 대한 신념체계를 해체시키고 물에 담긴 생명 가치를 회복하는 것은 우리의 생태적 감수성과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나타난 '발전관'은 김일회(인천교구 환경노동사목 전담) 신부와 황종렬(생태영성연구원) 박사는 현대 가톨릭교회의 사회 가르침에 나타난 발전관에 대해 공동으로 주제발표를 했다. 김 신부는 1891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를 시작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백주년」에 이르기까지 사회교리 계보를 살핀 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을 구성하는 「사목헌장」은 '발전'을 하느님의 다스림과 통합해 성찰하고 응답할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황 박사는 '발전' 문제에 대한 교회의 첫 체계적 응답으로 1961년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어머니요 스승」을 꼽고, 특히 1967년 발표된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은 회칙이라는 권위 있는 사목행위를 통해 발전에 관한 이성적 성찰과 복음적 실천을 통합해 발전을 세계 평화에 이르는 길로 제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생태 문제나 하느님 창조질서에 대한 관심을 명시적으로 주제화해 다룬 첫 문헌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1987년 회칙 「사회적 관심」을 들었다. 이에 오경환(인천가톨릭대 명예교수) 신부는 논평을 통해 "참된 발전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사회교리의 근본 주제다"며 "「사회적 관심」에서 발전 개념에 모든 창조물에 대한 존중과 자연자원 보전과 보호를 포함시킨 것은 발전 개념의 질적 확대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운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한 '교회 응답'은 김지형(안토니오) 고려대 교수, 한면희(프란치스코) 전북대 교수는 '한반도 대운하' 문제를 주제로 파고들었다. 김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운하건설은 △구체적 계획이 없고 △정부 측 책임기관이 없고 △논의 범위가 제한적이고 초점이 명확하지 않은 게 특징이라며 교회는 운하사업 전체가 가져야 할 가치와 문화적 방향에 대한 성찰, 복음적 생명 가치를 일깨워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교수도 민주주의와 효용성, 정의, 생태적 건전성 등 네 원칙을 기준으로 운하 문제를 짚고, △3면이 바다이며 철도와 고속도로가 구축된 우리나라에 운하는 필요하지 않고 △운하 건설을 강행했을 때 그 비용은 많고 편익은 지극히 적은 최악 정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산경도」 등 산하에 대한 우리나라의 전통 인식을 바탕으로 한 평가를 통해 백두대간과 정맥이 품은 강의 물길은 그대로 흐르도록 하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최종수(전주교구 팔복본당 주임) 신부도 논평을 통해 "대운하는 소비와 성장, 개발, 풍요의 자본주의적 사회 병폐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개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08.07.15
[교회상식 교리상식-101] 열두 사도에 대해 알고 싶어요(5)-야고버(大)12사도 가운데 야고보 이름을 가진 사도는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요한의 형 야고보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두 사도를 구별하기 위해 요한의 형 야고보를 큰(大) 야고보, 다른 야고보를 작은(小) 야고보라고 부르지요. 이번 호에서는 큰 야고보에 대해 알아봅니다. ◇성경에서의 야고보 야고보는 제베대오 아들로서 요한의 친형입니다. 또 관련되는 성경 말씀들을 종합하면(마태 27,56; 마르 15,40 ; 16,1), 어머니는 살로메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시몬 베드로의 동업자(루카 5,10)로서 직업이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야고보는 아버지 제베대오와 동생 요한과 삯꾼들과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지요(마태 4,18-22; 마르 1,16-20). 아버지가 삯꾼을 부릴 정도인 것으로 보아 야고보 집안은 시몬 베드로에 비해 경제적 형편이 나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부터 함께 따라 다니며 시중을 들 수 있었을 것이고(마태 27, 55-56), 예수님께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9,21)하고 청을 드릴 수도 있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에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마르 3,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은 야고보와 요한의 불같은 성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두 형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해 저들을 불살라 버릴까요?'하고 말할 정도로 과격한 성격을 드러냅니다(루카 9,51-56). 야고보가 나중에 사도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순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시몬 베드로와 동생 요한과 함께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볼 산에서 당신이 영광스럽게 변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실 때에 이 세 사람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으며(마르 9,2), 수난 전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가신 것이(마르 14,33) 이를 말해 주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함께 있었던 야고보는(요한 21,2)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자 예루살렘의 이층 다락방에서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며 지내다가 마티아 사도를 뽑고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을 가득 받아 복음을 선포합니다(사도 1-2장).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가 스테파노의 순교와 함께 박해를 받기 시작할 때에도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습니다(사도 8,1-2). 그러다가 44년 쯤에 헤로데 임금에 의해 순교합니다(사도 12,2). 이 헤로데 임금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유다를 다스린 헤로데 임금의 손자인 헤로데 아그리파 1세입니다. 그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교회에 대한 박해를 자행했지요. ◇전승에서의 야고보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러 사방으로 흩어졌을 때에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활동하다가 스페인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채 다시 유다 지방으로 돌아왔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스페인 서북부 지방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 대성당에서는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스페인 북부 지방에 모셔져 있던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을 받은 후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별빛이 쏟아지는 들판의 한 동굴에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발견돼 그 위에 교회를 세우고 그 도시 이름을 '별의 들판' 곧 콤포스텔라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9세기쯤의 일이었습니다. 이후 이 도시는 또 이슬람교도들에게 침공 받았다가 재건됐는데 그때부터 야고보 사도 이름을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고 불렀습니다.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입니다. 이후 야고보 사도의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순례하는 성지가 됐고, 오늘날도 유럽인들에게는 예루살렘과 로마와 더불어 3대 순례성지 중 하나로 꼽히지요. 다른 한편 사도 야고보는 중세기에 이슬람교도들이 스페인 중북부 지역을 침공했을 때 백마를 탄 투사가 돼 이들을 앞장서서 무찔렀다는 전설도 전해져 옵니다. 그래서 스페인 예술작품들에서 종종 말을 탄 기사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사도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이탈리아에서는 순례자의 수호성인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지요. 로마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 있는 야고보 사도 조각상도 지팡이를 든 순례자 모습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이창훈2008.07.15
[생활속의 복음] 대림 제1주일-가장 인간적인 하느님 만나는 날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부활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축제임을 알면서도 신자들은 크리스마스를 더 기다리고 축제의 장으로 열광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활이 그리스도교 전례주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크리스마스는 믿음에 대한 최대 인간 축제일 것이다. 그것은 이날 우리가 하느님의 인간성을 가장 깊이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베네딕토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구간 구유의 아기 예수와 초라한 목동들의 벅찬 감동이 완벽한 찬미를 이룬 그날 밤은 하느님의 인간성이 절정을 이룬 날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는 오늘, 복음과 독서는 우리의 이러한 성향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온통 '깨어 있어라'고 경고합니다. 짧은 복음 말씀에서 깨어있으라는 구절이 네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삶이 깨어 있으면서 예수님 성탄을 준비하는 삶이겠습니까? 바로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과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메시아를 기다렸던 율법학자, 바리사이, 사두가이는 바로 곁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 본 이들은 멀리 있었던 동방박사들과 하느님에 대해 무식하고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죄인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잘 알고, 메시아를 학수고대했던 이들이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이유는 그들의 모든 관심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현세적 욕심을 채우는 데만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를 쳐부수고 제2의 모세가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 자기들만을 일등국민으로 만들어 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을 만났고, 또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했던 사람들은 동방박사들, 목동들, 제자들, 과부들과 병자들, 고아와 고통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던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번 성탄에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을 우리는 제대로 알아 모실 수 있을까요? 대림시기 동안 내 이기적 마음을 정화시켜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랑과 평화, 감사의 마음을 간직한다면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스탠턴은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한 번은 두 사람이 함께 사건을 맡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법정에 앉아 있던 스탠턴은 링컨을 보자마자 자리에게 벌떡 일어나 "저 따위 시골뜨기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라는 겁니까"하며 나가 버렸습니다. 이렇듯 스탠턴이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하게 행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장관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임명했습니다. 참모들은 이런 링컨의 결정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탠턴이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참모들이 재고를 건의하자 링컨은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합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스탠턴은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버려야지요!" 참모들의 말에 링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속에서 없애버려야지요!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뒀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구원 복음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요구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어느덧 사랑이 샘솟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맺어졌던 아픈 과거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성탄보다도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축제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조은일2008.11.25

성령의 다양한 은사, 교회에 숨을 불어넣다성령쇄신운동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하)[[그림]]7. 은사와 제도의 조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은 여러 곳에서 은사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이 용어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14번 등장합니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4항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성령께서는…교계제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은혜로써 교회를 가르치시고 지도하시며…." 호게이는 「21세기를 위한 은사의 회복」에서 이것은 잠재적으로 아주 중요한 선언이지만, 상세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교회론적으로 함축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명확하지 않다고 말하며, 같은 문헌 12항에서 이러한 은사가 정확하게 어디가 교회론적인지 더 불분명하다고 지적합니다. "성령은…모든 계층 신도들에게 특은도 나누어 주심으로써 교회의 쇄신과 보다 폭넓은 건설을 위해 유익한 여러 가지 활동과 직무를 맡기기에 적합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킨다. 이것은 '각 사람에게 성령이 나타나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1코린 12,7) 이라고 기록한 바와 같다. 이러한 은사는 이례적인 것이건 혹은 보다 단순하고 일반적인 것이건 간에 모두 교회의 필요에 적합하고 유익한 것이니만큼 감사와 위안을 느끼며 받아들여야 한다."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3항은 다시 은사 주제에 관해서 소개하나 교회와 세상 모두를 위해서 은사들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데 있어서 더 포괄적으로 다룹니다. "이러한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교회와 세계 안에서 사람들의 행복과 교회 건설을 위하여, 이런 은사를 사용할 권리와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9항을 통해 우리는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항에서 사제들은 깨닫도록 권고를 받습니다. "사제는 어떤 영감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판단하고, 신도들이 받는 높고 낮은 여러 형태의 은사를 신앙심으로써 찾아내며, 기꺼이 인정하고 열심히 보호해야 한다." 「올바른 성령 이해」에서 성령께서는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선사하신다(에페 4,11-16 참조)고 언급합니다. 아울러 같은 성령께서는 교회가 분열되지 않도록 평화의 끈으로 일치를 이루어 주신다(에페 4,3 참조)고 설명합니다. 또한 누군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교회 일치와 화합에 어긋나게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갈라 5,20-21)와 같은 '육의 행실'을 저지른다면, 그가 주장하는 은사는 진정한 것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호게이는 「21세기를 위한 은사의 회복」에서 은사가 이 시대에 우리에게 상당히 자주 또는 드물게, 비상하게 또는 평범하게 여전히 존재한다면서, 수웨넨스 추기경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선물들이 배타적인 비상한 그리고 놀라운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우리 모두는 각자의 교구에서 평신도로, 남자와 여자로 하느님으로부터 진실로 부르심을 받고…특별한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모르는가?" "각자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학식이 있건 그렇지 않건, 매일의 삶 안에서 은사를 지닌다." 아마 공의회가 했던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유기적 조직체는 두 종류의 선물, 곧 제도와 은사에 의해서 운영된다는, 1943년부터 교황 비오 12세의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관하여」(Mystici Corporis Christi)에서 제기된, 여전히 시험되지 않은 표현을 반복한 것이었습니다. 교황 비오 12세와 같이 공의회는 제도의 선물들이 유기적 조직체를 유지하며 반면에 은사적 선물들이 그것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사의 사용에 대한 기대나 여지를 갖지 않는 조직은 그들 자신의 제도와 질서로 인해 성령과 성령의 선물을 제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은사는 교회로 하여금 일련의 제도가 어떻게 돼야하며, 교회가 성령의 예측할 수 없는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에 어떻게 의존해야 하는지를 상기시킵니다. 교회법은 그것이 본래대로 기능하기 위해 성령께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코린 3,17). 호게이는 은사는 생명력이 있는 교회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누룩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조직 체계와는 독립적으로 기능한 은사는 혼돈을 일으킬 수 있는 반면에, 은사가 없는 조직은 단조롭고, 일률적이고,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각자 서로 보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의식이 있는 교회의 사제들과 주교들은 그들 교구민의 은사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와 함께 「올바른 성령 이해」는 교도권은 하느님 백성이, 이 봉사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는 목자들에게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무류성의 은사를 주셨다고 언급합니다. 이 은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행사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은사의 진실성과 올바른 실천에 관한 판단은 교회를 다스리는 이들에게 속한다"고 천명하면서, 목자들에게는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모든 것을 시험하여 좋은 것을 붙드는" 사명이 맡겨져 있다고 분명하게 밝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은사 식별에 관해서는 교도권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결론 초대교회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교회 공동체가 생명력을 지니려면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치하여, 모든 지체들 안에 은사가 드러나 공동유익을 위해 사용돼야 합니다. 이러한 능동적 신앙생활과 모든 지체들이 교회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성령쇄신은 폭 넓은 은사를 접할 수 있도록 기회와 교육을 제공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은사들을 필요한 곳, 쓰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활용은 바로 복음 선포와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그 목표를 둬야 하며 성령쇄신이 추구할 목표가 돼야 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25항에서는 사제와 주교의 사목에 있어서 설교가 중심적이라는 중요성에 관해 강조했고, 서품된 사제들의 은사는 교회에서 다 함께 축복할 일이며 사제와 주교가 복음을 설교해야 하는 의무 또한 명확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교회의 복음선포 소명은 모든 세례와 견진 성사로부터 유래됩니다. 수웨넨스 추기경은 추기경들의 사목 경험을 상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우리 경험에 비춰 자신의 교구에서 평신도 중에 정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신자가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평신도들은 교리를 가르치거나 전도를 하고 여러 종류의 사도적 활동은 다양한 서로 다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만일 이러한 성령의 은사가 없다면 교회의 사목은 활기를 잃고 무미건조해 질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31항에서는 세례와 견진으로 평신도 또한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참여해야 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소명은 복음을 증거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전체 교회의 책임을 각자가 분수대로 지는 것입니다. 부활 성야에서 물의 축복과 성유 축성은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단지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을 받은 능동적인 사목자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세례수 축복 때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당신은 세례 받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만방에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유 축성 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그리스도를 닮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예언자직과 사제직과 왕직을 함께 나누어 받게 하셨나이다"(부활절 1, 서문 1). 그러나 서품된 사제들은 독특한 역할, 분별의 직무 그리고 특히 주교에게 위탁받은 은사들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올바른 성령 이해」는 교회 교도권과 그 권위에 대한 순종도 참된 영을 식별하는 기준이 된다고 언급합니다. 왜냐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만민을 가르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주셨고(마태 28,18-19), 이 교도 직무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에게 전수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주교들은 진리인 영인 성령(요한 16,13)의 도우심으로 계시된 진리를 올바로 설명하고 신앙을 수호하며 오류를 경계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계속해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의 교도권에 대한 순종은 예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하며, 「가톨릭 교회교리서」에서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교회 목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그들에게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고 한 부분을 인용하며, 성령의 은사를 내세우면서 교도권의 판단을 무시하거나 그에 저항한다면, 그 은사 현상은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성령 이해」 마지막 부분에서 은사의 식별 과정을 위해 성경,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에 근거를 둔 기준이 제시된다고 하며, 이는 공동체의 선익, 사랑, 성령의 열매, 일치, 교도권에 대한 순종, 겸손, 이성이 바로 그것이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문 종 원 신부(서울대교구 성령쇄신봉사회 대표 담당) cpbc2009.05.26

순교자 성월 '순교자 현양 특별 강론' 지상 중계 /제1강- 최창무 대주교(광주대교구장)삶의 현장에서 '위주치명(爲主致命)' 정신 실천'순교자 현양 특별 강론' 참석자들이 4일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 강의를 듣고 있다.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최창화 몬시뇰)와 평신도사도직협의회(회장 한홍순)는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4일부터 18일까지 '순교자 현양 특별 강론'을 마련했다. 본보는 특별히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을 뜻깊게 맞이하기 위해 '피어나라 순교자들의 꽃이여'를 주제로 한 이번 특강 요지를 연재, 순교자들의 거룩한 신앙을 통해 우리 삶을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한가위 신문 휴간으로 2,3회는 9월 28일자에 동시 연재). 4일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 강의로 시작된 순교자 성월 특강은 11일 박정일 주교, 18일 유흥식 주교(각 오후 2시 명동대성당) 등 3회에 걸쳐 이어진다.#순교의 개념과 의미 9월은 한국 교회가 정한 순교자 성월이다. 우리나라 성인들은 9월에 가장 많이 순교하셨고, 특히 9월 20일은 한국순교성인 대축일이다. '순교'라는 단어는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많이 접해 익숙해져 있지만 순교자 성월을 맞아 좀 더 깊고 진정한 순교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순교의 개념을 되짚어 보겠다. 순교란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성경에 보면 어원적으로 '순교'(Martyrdom)는 법정용어다. 즉 증언, 증거, 증인의 의미가 들어 있고 구세사 안에서 순교자로 발전했다. 이에 비해 '치명'(致命)은 우리 선조들 순교의 피가 묻은 말이다. '위주치명'(爲主致命), 즉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다. 헌신의 의미가 들어있다. 우리 순교자들이 기쁘게 가난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인내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위주치명의 삶에 근거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위주치명은 한국 순교사에 들어 있는 옛말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 새롭게 만나야 할 굉장히 아름다운 말이다. 순교자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다. 즉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는 뿌리는 바로 선조들이 행한 위주치명 안에 담겨 있다. 수많은 순교 중 가장 위대한 순교는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다. 하느님 뜻을 밝혀주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수했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삶, 곧 영원의 시작이다. 순교의 죽음 안에는 부활, 새 생명, 새 삶이 내포돼 있는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면 그에 상응해서 새 생명이 솟아나온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세상이 구원된 것이다. #역사 안에서의 순교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순교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의인과 죄인의 대결로 점철돼 있다. 초기 교회에서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악과 맞서 싸운 순교자들이 있었다. 첫 번째 순교자라 할 수 있는 스테파노의 순교와 또 사도로서 첫 번째 순교자인 야고보 사도의 순교에서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들의 순교가 교회에 불러일으킨 영향을 살펴볼 때 순교가 우리 신앙의 결정적 씨앗이 된 증거라 할 수 있다. 역사 속 예언자들의 몫은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다 죽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에 사람들의 미움을 사서 죽는 것은 바로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명을 수행하는 것과 통한다. 그 무엇도 하느님과 바꿀 수 없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능력을 다 바쳐 주님을 공경하고 사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 역사에서 순교자와 위주치명의 완성자이자 대표자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5-7). 예수님 부활 이후 다시 순교의 역사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 안에 이뤄진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사도 5,28) 하며 추궁하는 말에 사도 베드로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 29)하셨다. 즉 위주치명의 삶을 그의 행위로 실천해 보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과 죽음, 예언자와 사도들의 삶을 통해 볼 때 결국 성경은 구세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순교의 역사를 가리키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순교는 땀의 순교, '백색순교', '녹색순교' 가톨릭교회는 역사에서 살아 움직이며 살아 완성되는 교회다. 신앙인이란 살아 있는 신자들을 통해 순교의 대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은 것을 의미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신앙의 자유로 과거 신앙의 선조들처럼 피 흘림의 순교를 요구 받지는 않는다. 종교의 오해와 몰이해로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현대는 악인과 의인의 대결로 이뤄졌던 과거의 순교 대신 그리스도를 위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백색순교와 녹색순교가 필요하다. 백색순교란 피 흘림은 없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순교를 뜻했다. 박해시대 이후 동정녀들이나 광야의 수도자들의 삶을 가리키는'증거자'들의 삶이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 순교 현장은 바로 가정이요 직장이어야 하겠고, 우리가 날마다 머무는 자리가 곧 순교 현장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생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위주치명의 정신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백색순교와 녹색순교의 기회를 기억하자. 순교자 성월을 보람있게 보내기 위해 우리 모두 삶의 현장, 순교의 현장에 기쁘게 동참해야 할 것이다. 정리=이서연 기자 kitty@pbc.co.kr임영선2008.09.09
[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20-경전을 읽고, 그 다음엔?곧바로 읽고, 곧바로 묵상, 곧바로 실천!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이제 독서법에 관한 긴 얘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좀 더 자세하고 전문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주제를 통해서도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 연구한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그것에 관한 원칙들을 소개하면서 늘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것은 실천에 관한 것이다. 즉 '하느님 말씀에 순종의 삶으로 응답하라'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읽고 끊임없이 되뇌이며 묵상한 것을 이제는 자신의 삶 속에서 행동으로 이끌어내는 것이고, 머리와 가슴으로 만난 하느님을 일상 안에서 새로운 결단과 함께 맞이하는 것이다. 실천을 강조하는 유학도 같은 입장이다. 그래서 주자는 이렇게 말한다. "배우는 사람은 들은 것이 있으면 모름지기 바로 행해야 한다. 만약 한 권의 책을 얻으면 모름지기 곧바로 읽고, 곧바로 생각하고, 곧바로 행해야 한다. 어떻게 다시 이리저리 생각하고 머뭇거리며 기다린 뒤에 착수할 수 있겠는가? 한 장의 종이를 얻었으면, 한 장의 종이에 있는 도리를 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學者有所聞須便行, 始得. 若得一書須便讀便思便行, 豈可又按排停待而後下手? 且如得一片紙, 便來一片紙上道里行之可也. 「朱子語類」, '讀書篇'). 독서의 목적을 실천적 시각에서 말한 것이다. 어쩌면 경전을 읽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러한 결실과 실행이 없다면, 그것은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논어」(論語) '서설'(序說)에서 정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예를 들어 「논어」를 읽었을 적에 읽기 전에도 그러한 사람이요, 다 읽고 난 뒤에도 또 다만 그러한 사람이라면 이것은 곧 읽지 않은 것이다"(程子曰 今人 不會讀書 如讀論語 未讀時 是此等人 讀了後 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 실로 두려운 말씀이다. 예수 또한 자신의 설교에서 끊임없이 '듣기만 하지 말고 실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8).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7,46)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더욱이 야고보서에서는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을 강한 어조로 책망하고 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이제 그동안 '경전 읽기'에 관해 논의했던 것들을 율곡선생의 말씀으로 정리해 보자. "무릇 책을 읽는 사람은(凡讀書者) 단정하게 손을 모으고 곧게 앉아(端拱危坐), 공경하는 마음으로 책을 대하고(敬對方冊), 오롯한 마음과 치밀한 뜻을 지니고(專心致志), 깊이 생각하며 글에 푹 잠기며(精思涵泳), 그 뜻을 깊이 헤아리고(深解義趣), 매 구절마다 반드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방도를 구할 것이다(每句必求踐履之方). 만약 입으로는 읽으면서 마음으로는 깨닫지 못하고 몸으로는 실행하지 못한다면, 책은 책대로요 나는 나대로 일터이니 글을 읽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若口讀而心不體 身不行則 書自書 我自我 何益之有. 「擊蒙要訣」, '讀書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성경을 읽자. 많이 읽어야 잘 읽을 수 있고, 잘 읽어야 그 안에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과 지혜를,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cpbc2008.06.04
성경 하루 한장 읽기(사무엘기 하권 및 열왕기 상권, 7월 29일∼8월 11일)▨사무엘기 하권 및 열왕기 상권(7월 29일∼8월 11일) 사무엘기 하권 ▲21장(29일) : 그 뒤 다윗의 부하들은 "임금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다시는 싸움터에 나가지 마십시오. 그러면 임금님께서 ( )의 등불을 꺼 버리시게 될 것입니다." 하며 다짐을 받았다. ▲22장(30일) : 당신께서는 제 원수들에게서 저를 빼내시고 저를 거슬러 일어선 자들에게서 들어 높이셨으며 ( ) 자에게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23장(31일) : 사람을 정의롭게 다스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며 다스리는 이는 구름 끼지 않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그 아침의 햇살 같고 비 온 뒤의 찬란함, 땅에서 돋아나는 ( )과 같다. ▲24장(8월 1일) :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 )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열왕기 상권(해설 12면) ▲1장(2일) : 내가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고 그대에게, '그대 아들 솔로몬이 내 뒤를 이어 임금이 되고, 나 대신 ( )에 앉을 것이다.' 하고 맹세하였으니, 오늘 그대로 하겠소. ▲2장(3일) : 그러나 ( ) 사람 바르질라이의 아들들에게는 자애를 베풀어, 네 식탁에서 함께 먹게 하여라. 그들은 내가 네 형 압살롬을 피해 달아날 때, 나를 그렇듯 충성스럽게 맞아 주었다. ▲3장(4일) : 임금이 다시 말하였다. "그 ( )를 둘로 나누어 반쪽은 이 여자에게, 또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4장(5일) : 유다와 이스라엘은 그 ( )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았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행복하게 지냈다. ▲5장(6일) : 나는 주 나의 ( )의 이름을 위한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내가 너 대신 네 왕좌에 앉힐 너의 아들이 내 이름을 위한 집을 지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6장(7일) : 솔로몬 임금이 주님께 지어 바친 ( )은 그 길이가 예순 암마, 너비가 스무 암마, 높이가 서른 암마였다. ▲7장(8일) : 이렇게 바다는 황소 열두 마리 위에 얹혀 있었는데, 세 마리는 북쪽을, 세 마리는 서쪽을, 세 마리는 남쪽을, 세 마리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 )는 황소들 위에 올려져 있고 황소들은 모두 엉덩이를 안쪽으로 향하였다. ▲8장(9일) :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 )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9장(10일) : 자기 조상들을 ( )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 그들의 하느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끌어들여 그 신들을 예배하고 섬겼기 때문이지.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모든 재앙을 그들 위에 내리셨다네. ▲10장(11일) :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사랑하셔서, 임금님을 ( )으로 세워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게 하셨습니다. 남정률2007.07.25
새 음반▨임두빈 두 번째 앨범- 잃었던 아들 임두빈(안드레아)씨가 10년 만에 두 번째 앨범을 냈다. 13곡이 담긴 이번 앨범에는 10년 넘게 '음악 선교사'로 경력을 쌓아온 그의 폭넓은 음악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팝, 록, 발라드, 포크,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의 곡들은 저마다 색다른 감동으로 하느님 사랑과 체험을 들려준다. 창세기, 요한복음, 탈출기 등 성경 말씀과 체험을 담은 가사는 편안하게 다가온다. 임씨는 이번 앨범에도 낙태 반대를 주제로 한 곡을 담았다. 12번째 곡 '나를 버리지마'에서 그는 생명의 소중함을 노래한다. 임씨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며 "다양한 장르에 담아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한국가톨릭문화원, CD 1만 원) ▨그레고리오 성가 그레고리오 성가의 본산 솔렘 베네딕도 수도원을 둘러보며 성가를 들어보자. 이 앨범은 수도원 역사와 생활이 담긴 DVD와 그레고리오 성가가 담긴 CD로 이뤄졌다. DVD에는 6세기 성 베네딕토가 남긴 회칙에 따라 자연과 함께 기도와 공부, 노동의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수도자들 모습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겨있다. 평소 쉽게 접할 수 없는 수도 공동체 생활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또 9곡이 실린 CD에는 성체찬미가, 입당송, 화답송, 연미사곡 등으로 채워져있다. (성바오딸수도회, DVD 2만2000원) 박수정 기자박수정2008.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