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상징]74- 올리브 기름- 하느님 생명의 축복과 풍요](//cpbc.co.kr/CMS/newspaper/2010/01/rc/322613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74- 올리브 기름- 하느님 생명의 축복과 풍요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지중해식 요리에는 동물성 지방 함유량이 많다. 그런데도 이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심장 관련 질병 발생률은 낮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유럽인들이 건강식품으로 꼽는 올리브오일을 섭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올리브기름에 포함된 물질이 적혈구를 보호해 심장병을 줄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는 올리브기름 성분이 뇌 속의 치매 유발 단백질을 죽이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발견돼 이 성분으로 치매 백신을 만드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성경시대에도 올리브기름을 다양하게 사용했다. 음식에 많이 쓰였고, 등잔기름, 약, 향수, 비누재료 등 일상용품으로도 많이 사용했다. 또 올리브기름을 신체나 머리에 붓는 기름으로도 사용했다(탈출 29,7). 팔레스티나 지방은 여름에 매우 덥고 건조해 목욕한 뒤에 올리브기름을 몸에 발랐다(2사무 12,20). 먼길을 여행하고 난 뒤 몸에 기름을 바르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원기가 회복됐다. 그래서 예로부터 올리브기름은 상처를 치료하는데 사용했다.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보면 상처에 포도주와 기름을 붓는 장면이 나온다(루카 10,34). 보통 술은 상처를 소독하고 기름은 아픔을 누르는 역할을 한다(이사 1,6).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올리브기름은 단순한 의약품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환자에게 베푸시는 도움을 나타내는 표징이었다. 그래서 예수님 제자들은 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셨다(마르 6,13). 야고보 사도는 교회 원로들에게 아픈 이를 찾아가서 기름을 붓고 기도해 주라고 권유한다(야고 5,14).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현재의 병자성사는 이러한 성경 전통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올리브기름은 시체를 매장하기 전에도 사용했다(루카 23,56). 옛날 사람들도 결혼식 같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는 몸단장을 했다. 그럴 때 올리브기름에 향료를 첨가한 향유를 사용했다. 성경에서 특별히 올리브기름을 바르는 것은 기쁨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상중(喪中)에는 기름을 바르지 못했다(2사무 14,2). 또한 주인은 최고 환영의 표시로 손님 머리에 향유를 바르기도 했다(마태 26,7).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다가와, 식탁에 앉아 계시는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손님 발에 기름을 발라주는 것은 헌신과 존경을 상징한다(루카 7,28-46). 또한 특별한 직무를 부여받을 때 축성식에서 올리브기름을 머리에 붓는 의식을 했다. 이처럼 도유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세속에서 벗어나 성스럽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왕의 즉위식에서도 대사제가 기름을 바르는 도유식이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이처럼 올리브기름은 하느님 생명의 축복과 풍요의 상징이었다. 올리브기름은 성경시대에 연료로도 쓰였다. 등잔은 기름을 많이 담을 수 없어서 불을 오래 밝히려면 '열 처녀의 비유'에서처럼 기름을 여분으로 가지고 있어야 했다(마태 25,1-13). 올리브기름은 전쟁 때 방패에도 발랐는데, 적군의 화살이나 창이 닿으면 미끄러지게 하려는 조치였다. 이래저래 올리브기름은 성경시대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고, 많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했다.조은일2010.01.12
![[성경 속 상징]73- 기둥 - 우주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cpbc.co.kr/CMS/newspaper/2010/01/rc/321844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73- 기둥 - 우주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기둥은 건물 지붕의 하중을 초석에 전달하는 구조물이다. 기둥은 공간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가 되는데, 기둥 높이는 건축물 높이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수혈(竪穴) 안 가장자리에 구멍을 파서 세우거나 바닥에 직접 세워 그 윗부분의 구조물을 지탱하게 한 것이 기둥의 시작이라고 한다. 서양의 기둥 형태는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양하다. 이집트에는 기원전 27세기 경부터 이미 훌륭한 돌기둥이 있었다. 이집트 신전에 사용된 기둥은 기둥머리에 꽃봉오리나 파피루스를, 기둥 몸에는 풀잎을, 밑동에는 상형문자 등을 새겨넣은 것이 특징이다. 기둥과 지주, 나무 줄기는 모두 같은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 집과 우주를 동일시하여 집의 중심에 있는 기둥을 우주의 축으로 보는 민족도 있다. 고대 독일 작센족은 신성한 나무 기둥이 우주를 지탱하는 우주 기둥의 의미를 갖는다고 여겼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의 돌 사각기둥인 오벨리스크는 태양신이 앉는 장소로 간주됐다. 신왕국 이후에는 두 개씩 기둥을 쌍으로 만들어 태양과 달의 상징으로 삼았다. 수메르 사람들은 하늘의 출입구에 심어져 있는 두 그루의 나무를 상징하기 위해 신전 입구에 두 그루의 종려나무를 심거나 두 개의 기둥을 만들었다. 탈무드에 나오는 솔로몬 신전 앞 두 기둥은 태양과 달을 의미하고 있다. 성경에서도 "땅이며 그 모든 주민이 뒤흔들려도 내가 세운 그 기둥들은 굳건히 서 있다"(시편 75,4)는 표현처럼 기둥은 우주의 상징으로 나온다. 또한 하느님은 땅을 바닥째 뒤흔드시어 그 기둥들을 요동치게 하시는 분인데(욥기 9,6), 이는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솔로몬이 성전 앞 복도 입구에 세운 두 개의 청동기둥은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1열왕 7,15-22). 성경의 기둥에는 건물을 지탱하는 기능을 갖는 기둥과 함께 기념비 역할을 하는 기둥도 등장한다. "생전에 압살롬은 '내 이름을 기억해 줄 아들이 없구나.'하며 기념 기둥 하나를 마련하여 세워 두었는데, 그것이 '임금의 골짜기'에 있다. 그가 이 기념 기둥을 자기 이름으로 불렀기에, 오늘날까지도 그것이 '압살롬의 비석'이라 불린다"(2사무 18,18). 또한 하느님은 예레미아 예언자를 기둥에 비유하셨는데 이는 신앙을 지탱하는 힘과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예레 1,18). 신약성경에는 사도 바오로가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을 기둥 같이 여긴다는 표현이 등장한다(갈라 2,9).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을 기둥으로 묘사하는 상징적 용법의 단순한 예가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새로운 성전으로 여겼던 초대교회의 이해와 관련이 있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개의 기둥은 땅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느님의 현존은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의 형태를 취하였는데, 그 기둥들은 백성들을 인도하고 길을 밝게 비추어 주었다(탈출 13,21-22). 이처럼 기둥에 대한 성경의 언급들은 거룩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조은일2010.01.05
![[성경 속 상징]61- 뼈- 육체적 건강이나 기운의 저장소](//cpbc.co.kr/CMS/newspaper/2009/09/rc/311095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61- 뼈- 육체적 건강이나 기운의 저장소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사람 몸에는 몇 개의 뼈가 있을까? 사람은 206개의 뼈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에 따라서는 없는 뼈도 있어서 204개의 뼈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뼈는 우리 몸을 지탱하고 내장기관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뼈는 인간 골격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뼈에는 체내 칼슘의 약 99%가 함유돼 있어 칼슘 저장소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화석은 생물의 유해 및 유적이 지층 속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고생물 연구자료이다. 화석에는 실체는 남아 있지 않고 형상만 남아 있는 것에서부터 몸의 연한 부분까지 보존된 것도 있으나, 고생물의 단단한 부분인 뼈는 양적으로도 많기 때문에 화석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서 뼈는 실제 뼈보다 사람의 본질, 육체적 건강이나 기운의 저장소 등 의미를 지닌다. 혹은 영적 건강이나 사람의 생명 그 자체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뼈가 몸을 지탱해 주며 큰 뼈는 큰 힘을 의미한다고 알고 있었다(욥 40,18). 뼛속 깊이 느껴지는 고통은 사람의 깊은 고뇌를 나타낸다. "밤은 내 뼈를 깎아 내고 나를 갉아먹는 고통은 잠들지 않네"(욥 30,17). 그래서 뼈는 하느님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적 단어로도 사용됐다. "기쁨과 즐거움을 제가 맛보게 해 주소서. 당신께서 부수셨던 뼈들이 기뻐 뛰리이다"(시편 51,10). 구약에서 자주 나오는 '골육'이란 표현은 친척을 '혈육'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2사무 5,1). 또한 열왕기 하권에서 생명이 없던 몸이 엘리사의 뼈가 가서 닿자 회생돼 일어섰다는 표현에서는 뼈와 관련된 능력과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번은 사람들이 주검을 묻으려다가 그 약탈대를 보고는, 주검을 엘리사의 무덤 속에 던지고 가 버렸다. 그런데 그 주검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 다시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섰다"(2열왕 13,21). 뼈는 인간 지체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썩는 지체이다. 따라서 뼈는 인간의 본질을 간직하고 보전한다고 보았고, 인간의 숙명을 상징하기도 했다. 부서진 뼈는 철저한 파괴를 상징했다(다니 6,25).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제물들 뼈는 부수는 것을 금했다.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겨서는 안 되고, 뼈를 부러뜨려서도 안 된다. 파스카 축제의 모든 규정에 따라 그것을 지내야 한다"(민수 9,12). 요한은 구약 예언의 성취로서, 십자가상에서 예수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았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요한 19,36). 사람 몸에서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지체인 뼈는 소중하게 다뤄야 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의 유골을 약속의 땅으로 가져가 줄 것을 후손들에게 유언한다(창세 50,25). 누군가의 뼈가 매장되지 못하고 드러난 채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은 특별한 치욕의 표시였다(2사무 21,1-15). 사람의 뼈가 묻혀 있는 무덤을 만지는 일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됐다(민수 19,16). 조은일2009.09.28
![[성경 속 상징] 57- 비둘기- 초대교회부터 순결과 희망 나타내](//cpbc.co.kr/CMS/newspaper/2009/08/rc/306683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57- 비둘기- 초대교회부터 순결과 희망 나타내비둘기 하면 '평화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비둘기는 극한지역,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을 제외한 전 세계에 분포한다. 구조(區鳥), 시조(市鳥), 도조(道鳥) 등 전국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비둘기를 상징새로 삼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6월 환경부가 비둘기를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하고,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를 받아 비둘기를 포획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비둘기 알 수거, 먹이 공급 차단 등으로 개체 수를 줄일 계획이라고 한다. 비둘기 배설물은 건축물, 철탑과 전선을 부식시키며, 떨어진 깃털과 함께 온갖 병원균의 원천,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이유에서다. 현재 서울 도심에 서식하는 집비둘기는 약 100만 마리로 추정되며, 대부분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행사용으로 들여온 것이 무서운 속도로 번식해 현재와 같이 늘어났다고 한다. 인류가 있는 곳에 비둘기가 있었고, 수천 년 전부터 비둘기는 인간의 좋은 친구였다. 식탁에 닭고기가 오르기 전부터 비둘기는 중요한 식량이었다. 비둘기는 다른 애완 조류와는 달리 멀리서도 집을 찾아가는 귀소 본능이 있다. 비둘기를 전쟁에 전서구(傳書鳩)로 이용하게 되면서 전쟁 판도를 바꾸고 통신 혁명을 이뤘다. 고대문명은 비둘기를 숭배했다. 수메르인에게 비둘기는 신의 사자였다. 그리스 로마에서는 사랑, 생명, 다산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중국에서도 비둘기는 장수, 신의, 질서, 효행의 상징이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셨다(마르 1,9-10). 성경을 주제로 한 성화에도 비둘기가 자주 등장한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희생제물을 위한 새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을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바치라고 했다. "날짐승 가운데에서 주님을 위한 예물을 골라 번제물로 바치려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가운데에서 예물을 골라 바쳐야 한다"(레위 1,14). 비둘기는 예루살렘 성전 구내나 뜰에서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사람들과도 친숙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둘기와 비둘기 새끼는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바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의 제물이었다(레위 5,7). 예수님께서 태어났을 때에도 부모는 이 노점에서 비둘기를 사서 하느님께 바쳤을지 모르지만 후년에 예수께서는 성전 구내에서 이런 비둘기 장수를 쫓아냈다(요한 2,16).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라고 당부하신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이처럼 비둘기는 순박함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또한 비둘기 울음소리는 슬프게 들리기에 불쌍한 인간의 슬픔을 비둘기 소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저는 제비처럼 두루미처럼 울고 비둘기처럼 탄식합니다. 위를 보느라 제 눈은 지쳤습니다. 주님, 곤경에 빠진 이 몸, 저를 돌보아 주소서"(이사 38,14). 비둘기는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순결과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조은일2009.08.18
![[성경 속 상징]42-순례- 천국 향해 나아가는 삶의 여정](//cpbc.co.kr/CMS/newspaper/2009/04/rc/290260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42-순례- 천국 향해 나아가는 삶의 여정지난해 가을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편지 한통을 받았다. "신부님! 저는 일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체험했습니다. 하루 하루를 지나보면 은총이 아닌 순간이 없었습니다. 지금 같아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성지순례를 함께해주신 모든 분 특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성지순례도 여행인지라 항상 문제가 많다. 자꾸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 출발 때 늦게와서 다른 이에게 불편을 끼치는 사람, 아픈 사람 등 공동체는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성지 순례의 일부가 된다. 성지순례는 무엇보다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이다. 성지순례란 단순한 관광이나 여행과는 분명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성지순례는 언제나 회개와 신앙의 증진, 또 사도직 수행에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구약성경에서 성지순례는 개인이나 가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행되는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연례적으로 떠나는 여행을 말한다. 성경에서 순례는 자주 이 세상을 넘어서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 삶의 비유로 사용한다. 왜냐면 순례는 거룩한 곳으로 여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순례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널리 수행된 예배 행위들에 기초를 둔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요한 종교적 축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졌다. 유다인 남자들은 일 년에 최소한 세 차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해마다 세 번씩, 곧 무교절과 주간절과 초막절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선택하시는 곳에서,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빈손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는 안 된다"(신명 16,16). 성경에서 순례는 어떤 형태로든 모든 시대에 걸쳐 하느님 백성들의 믿음과 신뢰의 여정을 의미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믿음의 순례에서 대표적 인물은 하느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아브라함이다(창세 12,1-3). 창세기에서 야곱은 자기 자신의 인생과 조상들의 인생을 나그네의 인생으로 묘사한다. "야곱이 파라오에게 대답하였다. '제가 나그네살이한 햇수는 백삼십 년입니다. 제가 산 햇수는 짧고 불행하였을 뿐 아니라 제 조상들이 나그네살이한 햇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창세 47,9). 따라서 믿음의 삶이란 영원한 안식처를 찾기 위한 순례의 길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역사가 바로 이런 특징을 잘 나타내고있다. 특히 이사야 예언자는 순례의 상징적 이미지를 이용해 미래의 구원을 예언했다(이사 야 11,11-12: 35,8: 30,29).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순례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늘 보호하실 것이라는 것이다(이사 52,7-12). 이처럼 성경에서 순례는 구원을 위한 부차적 주제로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순례의 상징은 신약에서도 잘 나타난다. 특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에서 마지막 순례 여행으로 강조된다(마태 21,1-11). 결국에는 예수님을 순례자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선언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결국 하늘의 예루살렘을 궁극적인 목표지로 삼고 여행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신자는 이 땅에서 사회적으로 격리되고, 사회에서 대체적으로 핍박받는 유배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주 나그네, 행인으로 묘사된다(1베드 1,17). 이처럼 성경 전체를 통해 하느님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자들은 상징적으로 순례자들로서 묘사된다.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은 늘 자신을 순례자라고 말했다.조은일2009.04.07
![[성경 속 상징]39-눈물- 겸손, 좌절, 실망... 울음과 연관](//cpbc.co.kr/CMS/newspaper/2009/03/rc/287790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39-눈물- 겸손, 좌절, 실망... 울음과 연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악어는 먹이를 잡아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잡아먹히는 동물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실은 눈물이 입안에 부족한 수분을 보충해줘서 먹이를 삼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악어는 사람이 하품을 하듯 턱을 벌리면 눈물샘이 자극돼 눈물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이 흘리는 거짓 눈물을 악어의 눈물이라 하게 됐다. 눈물 성분의 대부분인 98%는 물이고 나머지는 단백질ㆍ전해질ㆍ글루코오스 등의 성분으로 구성돼 있다. 눈물은 각막 표면을 매끄럽게 하고 각막의 광학적 기능을 유지하며 결막과 각막 표면의 이물질을 씻어내는 역할을 한다. 정상적인 경우 하루에 흘리는 눈물의 총량은 평균 약 0.5~0.8g 가량이라고 한다. 눈물은 인간의 강한 감정, 대개는 슬픔을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비탄, 애도를 나타낸다. 성경에서 눈물은 겸손, 좌절, 실망의 상징으로 울음이나 통곡과 연관돼 나타난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형제들과 상봉했을 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통곡을 했다. "요셉이 목 놓아 울자, 그 소리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들리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창세 45,2).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아주 다양한 상황에서 눈물을 흘렸다. 하느님께 기도할 때도 눈물을 흘린다.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1사무 1,10). 에사우는 자신의 이익을 찾을 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에사우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는 축복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까? 아버지, 저에게, 저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 그런 다음 에사우는 목 놓아 울었다" (창세 27, 8). 큰 기쁨을 맞아서도 눈물을 흘린다. "요셉은 자기 아우에 대한 애정이 솟구쳐 올라 울음이 나오려고 해서,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울었다"(창세 43, 30). 예수님께서도 자주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은 절친한 친구 라자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4-35). 또한 곧 멸망 될 예루살렘을 위해 슬피 우셨다(루카 19,41).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의 표시였고 인간적인 면모를 잘 나타낸다. 강인한 품성을 지녔다는 사도 바오로도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사도 20,31). 또는 그는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울었다. "나는 매우 괴롭고 답답한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2코린 2,4). 그는 신자들을 향한 걱정과 연민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죄와 연관된 눈물은 특별히 설교나 기도의 전통 가운데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눈물이 그렇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마태 26,75). 인간의 눈물은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과 함께한다. 눈물처럼 인간적인 것이 있을까? 우리가 최근에 눈물을 흘린 것은 언제인가?조은일2009.03.17
![[성경속 상징] 27-말- 용맹, 군사적 힘, 또는 완고함](//cpbc.co.kr/CMS/newspaper/2008/12/rc/274275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 27-말- 용맹, 군사적 힘, 또는 완고함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암행어사 출두요!" 어린시절 영화 춘향전을 숨죽여 보던 기억이 난다. 암행어사가 돼 돌아온 이몽룡이 마패를 꺼내 보이고 이어서 뒤따르는 수많은 역졸들이 육모방망이를 들고 탐관오리들을 징벌하는 장면에는 박수를 치며 환호하기도 했다. 마패 앞면에는 한 마리에서 열 마리까지 말이 새겨져 있는데 그 숫자만큼 역마(驛馬)와 역졸(驛卒)을 이용할 수 있었다. 역참제도를 바탕으로 생긴 마패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 원종15년 때부터다. 말은 교통수단과 통신이 발달하기 이전, 소식을 빠르게 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말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하더라도 쉬지 않고 며칠을 달리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삼국 시대부터 지역 곳곳에 역참을 두게 됐다. 한국인에게 말은 '신성한 동물'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신성한 존재, 하늘의 사신, 중요 인물 탄생을 알리고 알아볼 줄 아는 영물, 죽은 사람 영혼과 마을 수호신이 타는 동물, 장수와 희망의 상징, 위대한 인물들이 타는 동물로 인식했다. 말을 처음 가축으로 기른 민족은 BC 2000년 무렵 흑해 북부 우크라이나와 다뉴브강 유역에 살던 아리아계(系) 고대민족이었다. 말의 후각은 매우 예민해 '코의 동물'이라고도 한다. 공포심이 많으나 부드럽게 다루면 온순하며, 기억력도 뛰어나 사람의 애정을 느끼고 그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말은 다른 동물에 비해 용맹성이 뛰어난다. 전쟁터에서 진격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나면 다른 동물은 겁에 질려 도망가지만 말은 북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용맹하게 달린다. 그래서 동양 풍속에서 말은 제왕 출현의 징표였고 초자연적 세계와 교류하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고구려 시조 주몽도 말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성경에서 말은 용맹함과 전쟁 혹은 재난을 상징한다. 옛날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선 필수적인 것이었기에 말은 군사적 힘의 상징이 되었다. "이들은 병거를, 저들은 기마를 믿지만 우리는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네"(시편 20, 8).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느님은 어떤 인간적인 힘보다 우월하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물이 되돌아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따라 바다로 들어선 파라오의 모든 군대의 병거와 기병들을 덮쳐 버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탈출 14, 28). 또한 말은 완고함, 미련함의 상징으로도 나타나기도 한다. 예레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지 않고 싸움터로 내닫는 말에 비유하며 백성의 완고함을 꼬집었다(예레 8, 6). 또한 백성들 풍기문란을 수말에 비유했다. "그들은 욕정이 가득한 살진 수말이 되어 저마다 제 이웃의 아내를 향해 힝힝거린다"(예레 5, 8). 죄인들과 우둔한 자들을 채찍을 맞아야 하는 말의 미련함에 비유하기도 했다. "말에게는 채찍, 나귀에게는 재갈, 우둔한 자의 등에는 매" (잠언 26, 3). 즈카르야서에서 말은 하느님에게 파견된 동물로 등장한다(즈카 1,7-13). 중세시대에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황금색으로 장식된 백마를 타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옛날 태양의 상징이었던 백마를 의식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무적의 태양'과 그 대리자에 적용한 것이다. 또한 중세기 성화와 조각에서 말이 그리스도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있는 것은 불신앙에 머물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조은일2008.12.02
![[성경 속 상징] 25-입맞춤-친밀감과 헌신, 존경의 표시](//cpbc.co.kr/CMS/newspaper/2008/11/rc/272645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25-입맞춤-친밀감과 헌신, 존경의 표시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감동적 스토리와 멋진 음악의 영화 '시네마 천국' (Cinema Paradiso, 1988)의 마지막 장면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 작은 마을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키스 장면은 사전 검열로 모두 삭제됐다. 이후 로마에서 유명 감독이 된 중년의 토토는 아버지와도 같았던 고향 마을 영사기사 알프레도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옛 시절을 추억한다. 토토는 알프레도가 그에게 남긴 마지막 필름 한 통을 받아 자신의 현대식 극장에서 상영해 보는데 거기에는 커트된 수많은 영화 속 키스 장면이 이어져 나온다.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인 키스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입맞춤은 보통 선의의 징표이며 신뢰와 우호, 화해와 애정을 나타낸다. 따라서 입맞춤은 평화와 계약의 조인에도 사용된다. 또한 상대방의 손이나 발에 하는 입맞춤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나 보호 요청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신전 입구 문지방과 제단과 신상에 종교 의식으로 입맞춤을 했다. 이집트에서는 신과 동일시되는 지배자의 양 발에 입맞춤하는 관습이 있었다. 또한 입맞춤은 동지적 결속에 대한 표시로서 같은 조직에 가담해 있는 사람들 사이에도 교환했다. 성경에 나오는 입맞춤은 일종의 친밀함에 대한 외적 표현이다. 또한 화해나 친밀감 회복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요셉은 형들과도 하나하나 입을 맞추고 그들을 붙잡고 울었다. 그제야 형들은 그와 이야기하였다"(창세 45,15). 이처럼 다양한 친밀함과 서로에 대한 헌신, 존경과 숭배의 표시로 성경에 나타난다. 포옹을 수반하는 입맞춤은 동등한 자들끼리 나누는 인사이다. 야곱과 에사오가 화해할 때도 에사오는 달려가서 야곱을 맞아 안고 입맞추고 울었다(창세 33,4). 사무엘이 사울에게 입맞춤하는 것은 새로 선택된 왕에게 순명의 뜻을 표한 것이다.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춘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1사무 10,1). 입맞춤은 본래 애정과 헌신의 표시였지만 주님을 배반한 유다에 의해 악용돼 배반의 표시로 변했다(마태 26,48-49). 이처럼 유다의 입맞춤은 다른 이를 철저하게 속이는 행위였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해 신자들이 서로 인사할 때 입맞춤을 언급한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로마 16,16). 사도 베드로도 역시 같은 요구를 한 점으로 봐서 초대교회의 일반적 인사였음을 알 수 있다.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1베드 5,14). 가톨릭에서 미사 시작과 끝에 주례자가 제단에 입맞춤하는 관습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관습을 장려한 것은 제단을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제단에의 입맞춤은 제단 아래에 안치해 있는 순교자의 유해와도 관련이 있다. 조은일2008.11.18
![[성경속 상징]23-발- 자유로운 움직임, 봉사, 비천함...](//cpbc.co.kr/CMS/newspaper/2008/10/rc/270233_1.2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23-발- 자유로운 움직임, 봉사, 비천함...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올해는 사도 바오로 탄생 2000년을 기념하는 바오로해다. 그리스 터키 지의 성지를 순례하다보면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다. 2000여 년 전 어떻게 사도 바오로 일행이 이 먼 길을 여행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 걸어서 여행했을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생애를 묵상할 때 마다 그분의 열정과 깊은 신앙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인간은 두 발로 대지 위에 굳건히 설 수 있다. 또한 몸을 지탱하면서 앞으로 걸을 수 있게 한다. 인간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는 발자국이 남는다. 발은 자유로운 움직임, 자발적 봉사, 겸손, 비천함을 의미한다. 또한 다른 이의 발에 입을 맞추거나 발을 닦아주는 것은 철저한 자기비하나 경의를 의미한다. 로마 성 베드로 성전에서 사도 베드로 성상 발에 입을 맞추며 존경을 표하는 순례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성경 시대에 손님을 환대하는 표시의 하나로 손님의 발을 씻겨 주는 풍습도 있었다. 어떤 이가 집으로 들어가서 발을 씻는다는 것은 그날에는 다시 밖으로 나가지 않음을 의미한다(2사무 11,8). 또한 성경에서 발은 윤리적 생활 방식, 생활태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하마터면 발이 미끄러지고 걸음을 헛디딜 뻔하였으니…"(시편 73,2). 또한 하느님께서 만물을 인간의 발아래 두셨다는 것은 만물을 인간의 소유로 맡겼다는 의미를 나타낸다(시편 8,6-8). 여호수아는 승리를 확실히 나타내기 위해 붙잡힌 다섯 왕을 자기 앞으로 끌어낸 후 자기와 함께 싸운 지휘관들에게 명령해 패배한 왕들의 목을 발로 밟게 했다. 여기서 발을 밟는 행위는 완전한 승복, 승리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그 임금들을 끌어내어 여호수아에게 데려가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은 다음, 자기와 함께 갔던 병사들을 지휘하는 군관들에게 지시하였다. '가까이 와서 발로 이 임금들의 목을 밟아라.'"(여호 10,24). 그리고 신발을 벗어 맨발을 드러내는 것은 신성한 것에 대한 겸양과 존중의 의미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불떨기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하신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탈출 3,5). 그러나 맨발은 비참함과 굴종을 의미할 때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발아래 엎드리는 것은 탄원 행위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빌었던 것이다(마르 5,22). 옛날에는 토지나 영토를 취득했을 때 그곳에 발을 놓는 일로 증거를 삼는 법적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부유한 신자들이 소유를 판 대금을 사도들의 발아래 두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5). 또한 발은 심판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복음을 거절하는 곳에서 사도들은 항의의 표시로 발에서 먼지를 털어내었다(사도 13,51). 예수님께서는 종의 행위인 발을 씻김으로 제자들에게 섬기는 모범을 보이셨다(요한 13,2-11). 여기서 발은 비천함의 상징이다. 우리 신체 일부인 발이 이처럼 다양한 상징으로 나타낸다고 하니 신기할 뿐이다. 조은일2008.10.28
![[성경 속 상징]22-눈- 하느님의 전지전능한 능력](//cpbc.co.kr/CMS/newspaper/2008/10/rc/269284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22-눈- 하느님의 전지전능한 능력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얼마 전 TV에서 동남아시아 안다만 해를 떠돌며 생활하는 바다집시 모켄족의 생활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모켄족은 대나무 작살 하나만으로도 빠르고 정확하게 물고기를 잡는다. 공기와 물은 밀도가 달라서 사람의 눈은 물속에서 초점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물안경을 쓰고도 바닷속 생물을 구별하기 쉽지 않은데 모켄족은 물속에서 맨눈으로도 작은 조개와 같은 생물을 정확하게 찾아낸다니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수리처럼 높은 하늘을 날며 먹이를 잡는 맹금류는 가장 민감한 눈을 갖고 있다. 그중에 매는 인간보다 4∼8배나 멀리 볼 수 있다. 매는 색을 감지하는 원추세포의 밀도가 인간의 다섯 배에 이르기 때문에 선명한 천연색 영상을 본다. 그러나 이들도 밤이 되면 맥을 못 춘다. 매의 눈에는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감지하는 간상세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놀라운 후각과 청각을 지닌 개의 시각능력은 형편없다는 사실이다. 근시이며 색맹에 가깝다고 한다. 그래서 개가 보는 세상은 마치 흑백 텔레비전 화면과 같다고 한다. 하지만 개의 야간 시력은 휠씬 뛰어나다. 이것은 살아남기 위한 진화의 결과이며, 워낙 뛰어난 후각과 청각의 기능으로, 자주 사용하지 않게 되어 시각의 기능이 떨어졌다고 보여진다. 사람의 눈은 본능적으로 빛이 비추는 쪽을 향한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세계를 본다. 한편 눈은 혼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눈을 통해 인간의 내면까지 뚫어 보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눈은 태양을 상징하며 태양은 제우스신의 눈이다. 일반적으로 눈은 빛과 각성, 지식, 정신, 보호, 안정, 목적을 상징한다. 성경에서도 눈은 사물 일체를 꿰뚫어보는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상징한다. 또한 직감적으로 사물을 보는 능력을 뜻하기도 하고 힘과 능력, 빛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약성경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주님 발현 체험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네 생물의 형상을 표현하며 눈이 가득하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하느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에제 10,18). 하느님의 눈은 태양보다 밝고 인간의 모든 것을 다 보신다(집회 34,21). 성경에서 하느님의 눈은 하느님 전체, 하느님의 인격을 나타내는 단어로 종종 사용된다. 지식이란 진실하고 바르다고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인간을 나타낼 때에 눈동자라는 이미지가 이용된다. "주님께서는 광야의 땅에서 울부짖는 소리만 들리는 삭막한 황무지에서 그를 감싸 주시고 돌보아 주셨으며 당신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신명 32,10).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을 암시적으로 가리키시면서, 눈을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루카 11,34). 시각 기관인 눈이 정신적 태도로 상징되는 경우도 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마태 5,29). 항상 모든 곳에 존재하며 일체를 꿰뚫어 보는 하느님의 눈을 가리킨다(히브 4,13). 눈이 하느님 영의 상징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묵시 5,6).조은일2008.10.21
![[성경속 상징]11-새- 하늘과 땅을 중재하는 존재](//cpbc.co.kr/CMS/newspaper/2008/07/rc/259391_1.2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11-새- 하늘과 땅을 중재하는 존재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기러기는 무리지어 이동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맨 앞에서 무리를 이끄는 기러기를 중심으로 V자형을 이루며 비행을 한다. 왜일까? 그 이유는 앞선 새의 날개에서 생기는 상승기류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기러기의 날개는 날면서 바람을 일게 한다. 그래서 기러기들은 앞의 새가 남긴 공기 흐름에 의해 부력을 얻도록 V자 대형으로 자기 위치를 잡는다. 따라서 V자대형의 선두에 나는 새 덕분에 모든 새가 쉽게 비행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맨 선두의 기러기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기에 쉽게 지친다. 따라서 힘이 좋은 기러기가 수시로 자리를 바꾸면서 난다고 한다. V자로 무리가 비행을 하면 혼자 나는 새보다 날개짓 횟수가 적어 심장박동수가 낮고 에너지 소비가 적다고 한다. 머리가 나쁜 사람을 새 머리에 비유하는 비아냥은 틀린말이 아닐까싶다. 새를 의인화하여 해석하는 전 세계적 경향으로 새에 관한 이미지가 상당히 많이 있다. 사람들은 새들이 나는 능력과 날마다 먹이를 구해서 먹는 것에 대한 부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새들을 목가적이고 걱정 근심이 없는 존재로 생각해 왔다. 새는 예로부터 죽은자의 영, 신과의 교류를 의미하는 존재의 상징이었다. 선사시대와 고대 이집트에서는 새머리를 한 인간의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다. 인간 본성의 영적 측면과 불멸성의 약속을 함축한다. 새는 하늘과 땅을 중재하는 거룩한 존재다. 전통적으로 새를 지혜, 지성,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힘의 상징으로 보았다. 고대 세계 사람들의 새에 대한 생각은 신화, 민간 전승, 미신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밤에 움직이는 새들은 어둠 속에 있는 악령의 심부름꾼이나 사악한 세력과 결탁한 무리들이라 생각했다. 성경에서도 저주받은 장소라고 생각했던 황폐한 곳에 자주 드나드는 새들은 그들이 초월적 어둠의 세력과 연관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이사 13,19-23). 어떤 새들이 시체를 먹는 습성은 그들을 부정한 새로 규정짓게 할 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 그것들을 죽음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새의 먹이가 됐다는 것은 신이나 동료에 의해 버림을 받았다는 의미가 됐다(예레 7,33). 실제로 전쟁 직후의 전장에는 죽은 시체들의 주변을 새들이 배회한다. 수치스러운 죽음을 인생의 죄와 연관시키기도 했다. "아버지를 비웃고 어머니에게 순종하기를 하찮게 여기는 눈은 개울의 까마귀들이 쪼아 내고 독수리 새끼들이 쪼아 먹는다"(잠언 30,17). 새들은 산채로 잡기가 쉬워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음식으로 사용했다. 희생 제물로서 새의 이미지도 있다. 어떤 새들은 잘 속는 특징이 있어 무모하고 경솔하게 서두르는 단순한 사람을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했다(잠언 7,23).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새들이 도망하는 재주는 그들의 비행을 언급하는 대목이나 또한 종교적 상징 가운데도 많이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하는데서 새의 영적인 면이 잘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마태 3,16).조은일2008.07.22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3,9)[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구약 성경 _ 듣기 (04) 삽화 _ 김 사무엘 예수님은 비유를 자주 사용하십니다. 비유는 일상생활의 사건이나 자연의 요소를 이용하여 심오한 진리를 전하는 이야기로서, 예수님 당시 널리 퍼져있던 문학 양식입니다. 복음서에는 40여 개의 비유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하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비유 하나가 마태오 복음서에 실려 있습니다. 바로 마태오 복음 20장 1-16절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의 삶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당시 포도 재배를 하던 이들은 수확 철에 한시적으로 일꾼들을 고용했습니다. 이 비유는 마지막 순간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에게 임금을 분배하는 방식을 보는 순간 적게 일한 사람이 많이 일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사실 주인이 마지막 일꾼에게도 1데나리온을 주든 말든, 먼저 온 일꾼들이 손해 본 것은 없습니다. 주인은 그들을 속이거나 착취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계약한 대로 일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먼저 온 일꾼들은 자신들보다 적게 일한 마지막 일꾼이 같은 일당을 받았다고 불평했습니다. 이들은 공평의 원리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평의 원리뿐 아니라 형평의 원리도 필요합니다. 일한 만큼 받는 것은 공평의 원리에 맞습니다. 하지만 일을 못 해도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 받아 가는 것은 형평의 원리에 맞습니다. 평의 원리는 정의를 구현하고, 형평의 원리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공평의 원리가 없으면 사회가 발전할 수 없고, 형평의 원리가 없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공평의 원칙을 따르면 1시간 동안 일한 마지막 일꾼은 1/12 데나리온을 받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에 주인은 형평의 원칙을 적용해 하루의 생계에 필요한 1데나리온을 준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준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늘나라는 포도원 주인과 같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비유가 하늘나라의 어떤 면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하늘나라에서는 공평뿐 아니라 형평의 원리까지 함께 고려된다는 점입니다. 루카 복음 15장 1-7절의 ‘되찾은 양의 비유’도 봅시다. 이 비유는 하늘나라의 또 다른 논리 하나를 보여줍니다. 바로 자비입니다. 목자에게서 떨어진 양은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양의 시력은 매우 나쁩니다. 따라서 무리에서 이탈한 양은 종종 가파른 비탈에서 미끄러지거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집니다. 이런 경우 스스로 힘으로 기어오를 수 없습니다. 또한, 비대한 상체에 비해 짧고 약한 다리 때문에 넘어지기 쉬웠는데 한 번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립되면 야생 동물들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죠. 이런 점에서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비유를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읽는다면, 그리고 아마 실제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이 비유를 듣는다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양들은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의 논리로 귀가 막히면 이 비유의 참된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비유는 양 한 마리도 버려두지 않으시는, 즉 죄인 하나도 멸망하게 두지 않으시는 헤아릴 길 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르코 복음 4장 21-25절 ‘등불의 비유’를 보겠습니다. 이 비유는 지당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기껏 등불을 켜놓고 빛을 가리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죠. 이 빛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아직 모릅니다만, 적어도 한계가 없는 어떤 것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빛은 가리지 않으면 어디까지라도 가죠. 저 먼 우주까지도 말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훨씬 웅변적입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아, 이 비유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베풀어야 할 자비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능력에 대한 것이군요. 자비심이 없는 마음은 돌처럼 굳은 마음과 같습니다. 닫힌 마음입니다. 이 닫힌 마음에서는 자비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지만, 자비가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자비심이 있어야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진 자가 더 갖게 됩니다! 즉, 자비심이 큰 만큼 하느님의 한계 없는 자비를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본 예수님의 비유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함으로써 복음적 현실로 들어가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들어라’라는 명령은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열린 마음으로 듣는 이들, 그들은 복음을 얻을 것이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아마추어미술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cpbc2026.09.19
[출판]루카복음에 따라 엮은 열 송이 렉시오 디비나- 구원 위한 열가지 거룩한 독서로남양성모성지 전담 이상각 신부, 성경 묵상 기도로 이끌어 루카복음에 따라 엮은 열 송이 렉시오 디비나(이상각 지음/들숨날숨/8500원)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전담 이상각 신부는 현대인이 가장 좋아하고 열망하는 '성공'이란 단어를 영성생활에도 적용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한 삶은 바로 '오늘, 구원을 이룬 삶'이라고 했다. 이 신부는 최근 구원에 필요한 열 가지를 루카복음에서 골라내,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로 이끄는 책을 펴냈다. 루카복음을 선택한 것은 교회가 공적으로 드리는 시간전례의 아침, 저녁, 밤 찬미가가 모두 루카복음에서 인용됐기 때문이다. 루카복음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는 △찬미로 여는 아침 △동정만이 잉태할 수 있는 하느님 △오늘 나의 손님은? △내 이웃은 누구이며 어디에? △구원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겸손과 온유의 행복 △구원받은 이의 저녁 찬미가 △하늘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에 △평화로운 잠으로 구성돼 있다. 이 신부는 하루를 시작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고요하고 평온한 환경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한 뒤, 기도하고 관상하도록 독자를 이끈다. 또 거룩한 독서를 할 때 성모님께 특별히 함께해 주시기를 청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가장 먼저 거룩한 독서를 하셨고, 거룩한 독서가 되신 성모님께서 깊은 신비의 세계로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했다. 박수정 기자조은일2013.07.09
![[성경 속 상징] (123) 동물- 하느님은 사자나 표범에 비유](//cpbc.co.kr/CMS/newspaper/2011/07/rc/383168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123) 동물- 하느님은 사자나 표범에 비유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동물은 인간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고대시대부터 동물은 인간의 사냥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상숭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곳곳에 역사 흔적으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 단군신화에는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데, 이는 곰을 숭배한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한 부족을 의미한다. 이집트에서도 고양이 얼굴에 여인의 몸을 하고 있는 바스트(bast)를 사랑과 자비, 다산과 풍요의 여신으로 숭배했다. 이처럼 특정 동물에 영적 힘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숭배하는 것을 토테미즘(totemism)이라 하는데, 이러한 형태의 원시종교들은 인간 이상의 어떤 힘에 의지하려는 인간 본능에서 나온 것으로 신앙심(信仰心)과는 다르다. 성경에도 많은 동물이 등장한다. 말, 낙타, 늑대, 메추라기 같이 실제 존재하는 동물뿐 아니라 용(龍), 불말(火馬) 같은 상상의 동물도 존재한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2열왕 2,11). 특정 동물은 하느님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어떤 동물은 하느님 대리자로 악마들과 투쟁하는가 하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서 먹으라고 유혹하는 뱀 같이 악마 앞잡이로 활동하기도 한다. 때로는 악마 모습이 동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때에 나는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개구리같이 생긴 더러운 영 셋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묵시 16,13). 또한 성경에서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언급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레위 11장 참조). 창세기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와 병행해 제시한다. 따라서 인간과 짐승의 관계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동물들을 다스리도록 위임하셨다(창세 1-2). 따라서 동물은 성경 여러 곳에서 믿음과 충성, 헌신의 상징으로 표현됐다. 또 성경에는 동물을 인생에 비유하고 상징하는 경우도 많다. 죽은 개는 천한 인생을 상징했다. "그때 츠루야의 아들 아비사이가 임금에게 말하였다. '이 죽은 개가 어찌 감히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을 저주합니까? 가서 그의 머리를 베어 버리게 해 주십시오.'"(2사무 16,9). 일반적으로 개는 경멸과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단 교리를 주장함으로써 신자들을 유혹하는 가짜 사목자를 개들이라 칭하며 경고한다.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나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거짓된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필리 3,2). 성경은 종종 인간에게 지혜를 가르칠 때 동물 이미지를 사용한다. "너 게으름뱅이야, 개미에게 가서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지혜로워져라"(잠언 6,6). 예수님께서는 동물을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마태 13,47). 성경은 동물을 하느님을 은유적으로 비유하고 상징하는 데 사용한다. 하느님은 사자나 표범에 비유되고(호세 13,7),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암탉에도 비유됐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성경의 동물은 그 종류만큼이나 아주 다양하고 재미있는 싱징으로 그려진다.조은일2011.07.12
제물- 죄를 용서받으려 바치던 희생물](//cpbc.co.kr/CMS/newspaper/2011/06/rc/380848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120)제물- 죄를 용서받으려 바치던 희생물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제물(祭物)은 제사에 쓰는 음식물, 또는 희생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유교문화에 기반을 둔 우리나라는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고 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때 제사상에 조상에게 바치는 음식을 올리는데, 그 음식들에는 각각의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세 가지 탕(湯)과 세 가지 적(炙), 삼색 나물, 삼색 과일 등 제사상에 필수로 올리는 제사음식의 가짓수와 색에는 자연의 섭리와 사람과의 일치됨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고, 기복도 담겨 있다. 또한 제사음식을 준비할 때는 최고의 것을 장만하고, 값을 깎지 않으며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등 부정한 기운이 드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온 정성을 다했다. 고대의 제물은 '희생물'의 의미가 크다. 고대의 희생은 교환이라는 관념이 주를 이뤘는데, 이는 인간이 신에게 희생을 바치는 것은 신으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받기 위함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에 인간을 산 제물로 신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속죄 희생의 최고 형태로 여겼기 때문이다. 산 제물은 점차 동물로 대신하게 됐다. 성경에서 제물은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바치던 희생물을 의미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양이나 암소 등 동물과 곡식을 제물로 바쳤으며,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짐승의 피를 바쳤다(레위 16,11). 모든 생물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제물은 철저하게 하느님과 관련성을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생 제물에 대해 밝히신다. "너희는 나를 위한 희생 제물의 피를 누룩 든 빵과 함께 바쳐서는 안 된다. 또 축제 때 나에게 바친 굳기름을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도 안 된다"(탈출 23,18). 특별히 첫 소출은 하느님께 드리는 희생제물이 된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탈출 13,2). 성경에서는 제물을 드리는 자체가 하느님께 완전히 속한다는 상징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제물을 드리는 행위에서 내면적 의의는 잃어버리고, 그 형식만 남아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시편 40,7). 하느님께서는 제단 위에 바친 제물을 보고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을 보고 자비를 베푸신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예언자들도 하느님께서는 내적 제물을 원하시며, 마음과 행동의 변화 없이는 그 어떤 물질적 제물도 의미가 없음을 강조했다. 신약시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제물로 삼아(1코린 5,7) 최후의 만찬에서 제헌의식을 행하셨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써 희생의식을 행하셨다. 세상의 죄를 없애는 희생 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1요한 2,2).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1베드 2,5).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께 바쳐야 할 참된 유일한 제물은 '자선 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친절'이라고 강조했다. 조은일2011.06.21
![[성경 속 상징] (103) 행렬- 야곱의 장례행렬 보기 드문 장관](//cpbc.co.kr/CMS/newspaper/2011/01/rc/36530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103) 행렬- 야곱의 장례행렬 보기 드문 장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신년하례미사, 성유축성미사, 사제성화의 날 등 서울대교구 사제들이 주교좌성당인 명동성당에 모여 함께 미사를 드릴 때면 사제들은 성당 밖에서 입당을 위해 길게 줄을 선다. 사제단이 많이 모일 때에는 명동대성당을 반 바퀴나 돌 정도로 행렬이 길 때가 있다. 행렬(行列)의 사전적 의미는 '여럿이 줄지어 감, 또는 그런 줄'이지만 교회에서는 '사제와 신자들이 열을 지어 행진하는 종교의식'이란 뜻이 있다. 따라서 행렬은 그리스도교 의식의 한 요소이기도 하고, 대중의 신심을 비공식적으로 표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톨릭이 국교인 나라들에서는 나라 수호성인 축일이나,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수호성인 축일에는 성인상(像)을 모시고 거리를 행렬하는 축제를 벌이곤 한다. 이러한 대중 행렬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종교로 공인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행했으며, 중요한 의미를 갖고 거행됐던 특별행렬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전례에서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성지주일행렬과 성체행렬도 중요한 행렬에 속한다. 성경에 언급된 가장 두드러진 정기적 행렬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전례의 일부로 거행된 행렬이다. "영광스러우신 분의 초막, 하느님의 집까지 환호와 찬미 소리 드높이 축제의 무리와 함께 행진하던 일들을 되새기며 저의 영혼이 북받쳐 오릅니다"(시편 42,5). 성경에는 야곱의 장례행렬에 대한 기록도 있다. 야곱이 죽고 요셉은 파라오에게 가나안 땅에 묻히고 싶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전하고, 이집트에서부터 가나안땅까지 야곱의 시신을 옮긴다. "이리하여 요셉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러 올라갔다. 그와 함께 파라오의 모든 신하와 파라오 궁궐의 원로들과 이집트 땅의 모든 원로, 그리고 요셉의 온 집안과 그의 형제들과 아버지의 집안 사람들이 올라갔다. 그들의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지방에 남겨 두었다. 또 병거와 기병까지 요셉과 함께 올라가니, 그것은 굉장한 행렬이었다"(창세 50,7-9). 성경에도 굉장한 행렬이라고 기록돼 있듯이, 야곱의 장례행렬은 아마도 성경에 기록된 장례행렬 중 보기 드문 큰 규모였을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 뒤로 환호하는 군중들의 행렬이 등장한다(마태 21,1-11). 이 행렬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악을 정복하고 환희로 가득 차 천국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행렬은 마치 승전한 장군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또는 포로들을 데리고 수도로 입성하는 로마 군대의 행렬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2코린 2,14). 우리는 과연 누구와 함께 어디로 행렬을 하고 있는 것일까?조은일2011.01.25
![[성경 속 상징]87-아내- 좋은 아내를 둔 남편은 행복](//cpbc.co.kr/CMS/newspaper/2010/09/rc/350488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87-아내- 좋은 아내를 둔 남편은 행복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다음은 어느 잡지에서 보았던 '좋은 아내의 십계명'이다. 하나, 자신과 가정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 재치와 근면성을 가져라. 둘, 음식 준비에 정성을 기울이고 남편 식성에 유의하라. 셋, 남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혼자만 말하지 마라. 넷, 남들 앞에서 남편의 결점을 늘어놓거나 지나친 자랑도 하지 마라. 다섯, 따져야 할 말이 있을 때는 남편의 기분 상태를 참작하라. 여섯, 남편에게는 혼자만의 정신적 휴식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음을 참조하라. 일곱, 중요한 가정문제를 결정할 때는 남편 뜻에 따르라. 여덟, 남편 수입에 맞춰 살림을 꾸려 나가도록 하라. 아홉, 모든 일에 참을성 있게 행동하라. 마지막으로 하루 중에 두 번 이상 남편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일깨워 줌으로써 남편에게 기쁨과 긍지를 갖도록 하라. 다분히 남편 중심적 내용이지만, 반대로 '좋은 남편의 십계명'은 부인 중심적이다. 결혼을 통해 아내는 남편을 돕는 배필이 된다. 생활 속에서 아내의 주된 임무는 남편을 위해 자녀들을 키우는 일이다(창세 24,60). 유다인들은 부인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처럼 되기를 바랐으며, 집이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차게 되기를 원했다(시편 128,3). 또 아내는 자녀들 훈육에 대한 책임을 남편과 나눠 가졌다. 이처럼 아내 역할은 가사와 육아에 집중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가정 경제까지 포함되며, 가정의 후생복지에 영향을 주는 모든 분야로 확대되기도 한다(잠언 31,16-25). 따라서 부인이 자기 임무를 얼마만큼 잘 감당하느냐에 따라 그 집안 흥망이 결정되는 것이다(잠언 12,4). 아내가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면, 남편에게 큰 유익을 줬다. 유다인들은 남자가 이스라엘 지도자 자리에 서려면 그 부인이 현명하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잠언 31,23). 반대로 어리석은 아내에 대해서도 많은 언급이 있는데, 특히 말을 강조한다. 재앙과 불행은 혀를 잘못 놀려 불러들이는 것이다. 수다스럽고 험한 말을 하며, 이간질을 하는 여인은 자신의 남편에게 고통과 피해를 안겨준다. "목소리 크고 수다스러운 아내는 전쟁터의 신호나팔과 같다. 이렇게 사는 모든 남자는 전쟁의 와중에서 삶을 보내게 되리라"(집회 26,27). 성경에서 말하는 남편의 가장 큰 기쁨은 무엇보다도 훌륭한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다. "좋은 아내를 가진 남편은 행복하다. 그가 사는 날수가 두 배로 늘어나리라"(집회 26,1). 이는 곧 남편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아내, 건전하고 선량한 아내를 칭찬하는 것이다. 두 배로 오래 산다는 것은 좋은 아내는 남편의 건강을 늘 잘 보살피기 때문이며, 그로 인한 부부 화합이 바로 건강의 샘이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정숙한 아내란 아름다운 용모와 착한 품성, 교양 있는 말과 행동, 자제력을 갖춘 여인을 말한다. 그런 아내는 바로 하느님의 선물이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이 행운이 주어진다. "좋은 아내는 큰 행운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그런 아내는 행운으로 주어지리라"(집회 26,3). 이처럼 성경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좋은 아내를 얻는 길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조은일2010.09.15
![[성경 속 상징]81-겉옷(외투)-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생존과 직결](//cpbc.co.kr/CMS/newspaper/2010/03/rc/330371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81-겉옷(외투)-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생존과 직결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옷은 사람의 신체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옷은 그 사람 신분이나 성별 및 민족의 특징을 나타낸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옷은 맵시를 내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옷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음식, 집과 함께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특정한 옷을 입으면 변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사자 가죽을 걸치면 사자와 같은 센 힘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옷은 풍습과 민족에 따라 다양하며, 그 민족이 지켜온 전통과 깊게 연관돼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행하는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의복의 경우 주변 나라들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다. 유다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 외투를 입고 예를 갖췄다. 엘리사가 예언자 소명을 받을 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외투를 입게 했다. 이처럼 외투를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는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소유하신다는 상징이 됐다.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1열왕 19,19). 예수님은 폭력을 포기하라는 설교에서 겉옷에 대해 언급한다.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 5,40).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겉옷은 생존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팔레스티나 지역은 대체로 일교차가 무척 심하다. 밤이나 겨울이 되면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때문에 가벼운 옷차림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저녁에는 추위를 막아주는 외투가 필수였다. 이불 역할을 하는 셈이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이 되면 옷을 여러 벌 겹쳐 입기도 했다. 그런데 겉에 입는 외투는 워낙 비싸다 보니 가난한 이들은 한 벌을 가지고 가족이 돌려 입거나 담보로 잡힌 채 돈을 빌리기도 했다. 이처럼 근동지역에서는 여러 벌 겉옷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유한 사람의 척도가 됐다.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먹고 마시면서 즐거운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루카 16,19). 자색 겉옷은 예로부터, 그리고 로마시대에 황제와 귀족들의 특권이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주로 세간 같은 것을 담보로 잡았는데 가장 흔한 담보물은 겉옷이었다. 담보물이 밤에 덮고 자는 겉옷이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줘야 했다.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 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탈출 22,25-26).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이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게 된다고 가르쳤다(갈라 3,27). 초대교회부터 세례식 때 겉에 입었던 세례복은 부활의 영광과 옛 죄인의 모습이 변화되는 것을 상징했다. 따라서 신자들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부활과 구원의 영적인 옷을 입은 사람들이다.조은일2010.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