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넓은 곳으로 이끄시어 나를 부르시니…[월간 꿈 CUM] 뿌리 _ 구약이 말을 건네다 (1)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의 ‘다윗의 예루살렘 입성’, 1425~1452, 피렌체 성 세례자 요한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 ‘천국의 문’ 부조 부분. 하느님께서 저에게 해주셨던 일들을 가끔 묵상할 때, 혹은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이 부산할 때 가끔씩 되뇌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제가 아주 미미하게 폐소공포증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저는 다음의 성경 구절을 매우 좋아합니다. “넓은 곳으로 이끌어 내시어 나를 구하셨으니 내가 그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네.”(2사무 22,20; 시편 18,20) 위의 말씀은 성경에서 동일한 어휘로 사무엘기와 시편에서 각각 노래되고 있는 다윗의 승전가입니다. 성경의 표현처럼,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넓은 곳으로 이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하느님의 부르심과 관계된 성경의 아름다운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르심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여정을 이어 가시기에 부르심은 구원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을 선택하시어 부르시지만, 이 한 사람에 대한 부르심은 주변 이웃과 공동체를 향한 섭리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 한 사람에 대한 이 작은 부르심은 마치 중요한 하나의 사건처럼 묘사되며 특별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위의 시편이 노래하는 부르심의 특별한 장소는 넓은 곳입니다. ‘넓은 곳’이 주고 있는 일반적인 이해처럼 이 장소는 한적한 곳,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그러기에 이곳은 단 둘이 따로 만날 수 있는 장소이며, 일상의 분심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대화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고, 아픈 이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하는 모습은 이러한 시편의 분위기와 닿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마태 20,17)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을 예수님께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따로 데리고 벳사이다라는 고을로 물러가셨다.(루카 9,10)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마르 7,33)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를 한적한 곳으로 따로 부르시고 함께 머무셨으며 함께 걸으셨습니다. 특별히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는 장면에서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시는 모습은 부족함을 많이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들과 예수님의 만남에 대해 깊이 있는 묵상으로 이끌어 줍니다. 다윗의 승전가 시편 속에서 ‘넓은 곳’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מֶרְחָב>은 성경의 비유적 표현 안에서 자유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의 어원 <רָחַב>이 ‘넓게 만들다. 방을 만들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유념한다면, 하느님의 부르심 자체가 우리에게 커다란 자유이자, 또 다른 내면의 만남임을 묵상하게 됩니다. 사실, 자유를 찾아 떠났던 이스라엘 공동체는 한적하고 인적 드문 곳에서 하느님을 깊이 있게 만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유일하신 하느님과 만났고, 하느님께서 건네주신 말씀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체험하였습니다. 이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하느님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확신하였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약속을 합니다.(계약체결, 탈출 24,3-8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느님과의 만남이 너무도 소중하여 하느님께서 머무실 작은 방(만남의 천막) 하나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진 곳은 바로 시나이산입니다. 시나이산은 넓은 곳이자 한적한 곳이었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만난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의 이 소중한 만남을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영원토록 기억하고 되새깁니다 글 _ 오경택 신부 (안셀모, 춘천교구 성경 사목 담당 겸 교구장 비서) cpbc2023.11.06

초대 교회 신앙인들은 모든 재물과 사랑을 나눴다[저는 믿나이다] (11) 초대 교회의 삶 ② 초대 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신앙과 성사, 성령의 은사와 함께 모든 것을 공동 소유하고, 사랑을 공유하였다. 지거 쾨더 작 ‘죄인의 식사’. 넷째, 초대 교회 신자들은 모든 것을 공동 소유하였습니다.(사도 4,32 참조) “참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의 공동 소유로 여겨야 하며, 가난한 이와 이웃의 불행을 도와줄 준비와 열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자산 관리인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952) 가난한 이에 대한 사랑과 재물에 대한 사랑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야고 5,1-3)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사목 규칙에 “가난한 이들에게 필수적인 물건들을 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을 선물로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교회는 초기부터 왜 가난한 이들을 이렇게 환대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가르쳤고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를 돕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가난한 이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은 배척하신다는 것을 모든 그리스도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2)고 하셨습니다. 나아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고 하셨습니다. 잠시 「가톨릭교회 교리서」 내용을 곱씹어 보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사랑은 변함없는 전통에 속한다. 이 사랑은 참행복의 복음, 예수님의 가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특별히 배려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일할 의무를 지우는 동기들 가운데 하나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이 사랑은 물질적 가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거나 종교적인 다양한 형태의 가난에도 미치는 것이다.”(2444항) 교회는 또 이렇게 가르칩니다. “물질적 궁핍, 부당한 억압, 육체적 정신적 질병, 끝으로 죽음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인간의 비참은 원죄 이후 인간이 놓이게 된, 타고난 나약한 처지와 구원의 필요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참은 구세주 그리스도의 연민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이 비참을 짊어지시고, ‘형제들 중에 가장 작은 이들’(마태 25,40.45)과 같아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참에 짓눌리는 사람들은 교회의 우선적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 교회는 초기부터 많은 지체들의 과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을 구제하고, 보호하고, 해방시키려고 노력해 왔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48항)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형제애의 증거로, 또 하느님께서 복을 주시는 정의의 실천으로 기쁘게 행한 이 아름다운 전통을 어찌 자랑하지 않고 따르지 않겠습니까! 다섯째, 초대 교회 신자들은 사랑을 공유하였습니다.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6) 바오로 사도는 초대 교회 신자들의 삶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 가운데서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로마 14,7-8) 이웃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이시죠. 곧 하느님 사랑이 우리가 볼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한 사랑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행위가 바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 곧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 활동을 펼치기에 앞서 아버지 하느님께 당신을 맡기시는 기도를 늘 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느님 뜻에 협력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본받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를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모든 덕의 으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새로운 계명으로 삼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끝까지’(요한 13,1) 사랑하심으로써 당신께서 받으시는 성부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여 그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 15,9)하고 말씀하시며, 또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고 말씀하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23항)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 선임2025.01.14

무표정한 성모님 이콘 무얼 표현하는 걸까[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24) 빛을 담은 그릇 - 성모 마리아 (작품 1) 성 안나와 성모님: 템페라, 106 x 76cm, 크레타, 1637. 베나키 박물관, 아테나, 그리스 성모님 이콘은 고통·놀람·슬픔·극기·절제 등 내적·영적 아름다움에 집중 무표정은 ‘침묵의 상태’ 나타내 고요함 속에 계신 하느님과 함께하며 우리를 위해 사랑하는 아기 예수 언제라도 내주시는 마음 표현 3. 마리아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395)는 ‘마리아’라는 이름의 의미를 ‘하느님에 의해 보존되어온 선물, 또는 하사품’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마리아’는 ‘미리암’으로, ‘저항’이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는 인류의 시작(창세 3,15 참조)부터, 즉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발꿈치를 물리고 밟는 사이가 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고백자 막시무스는 이 미리암을 ‘빛나는’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시리아에서는 ‘여주인’(여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신학자와 수도자들이 ‘마리아’의 의미에 대해 언급해 왔습니다. 그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크레타의 안드레아1)의 해석입니다. 그는 ‘하느님에 의해 불린 이름’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다우므로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고 했는데, 그 말에 수긍이 갑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오신 말씀이시며,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복음서 서두를 시작합니다. 복음 끝에는 본인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언하고 기록한 사람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믿고 보았던 제자들의 증언을 우리는 읽고 들으면서 말씀하신 의도를 깨달아 삶의 가치를 높여 나갑니다. 그 거룩하신 분의 어머니 마리아는 성인 중 가장 극존칭으로 칭송받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늦게 교회 전례에 등장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성모님의 탄생과 죽음이 외경이나 성전(聖傳)에서 전하는 것 외에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외경(外經) 중 야고보 원복음서에 따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은총으로 잉태되었고, 그 이름이 선택되었다고 전합니다. 모든 생명체의 탄생은 기적의 연속이지만, 마리아의 모친 안나의 불임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특별한 섭리라고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는 해석했습니다.(작품 1) 예수님의 탄생은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 나오며, 처음으로 등장하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존재 위치가 부족해 보입니다.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듯 저자는 자신을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예수님 탄생 이전에 성모 마리아의 탄생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였기에 ‘원복음’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야고보 원복음서에는 마리아의 탄생 이야기와 요아킴과 안나라는 부모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유하지만 자식이 없어 괴로워하는 부부를 보시고, 구약의 사무엘의 태어남을 들어 하소연하는 안나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천사가 등장하여 말하기를 “안나, 안나, 하느님께서 너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너는 아이를 가질 것이고, 너의 후손은 온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아고보 원복음 4,1)라고 하였다. 사무엘 부모가 사무엘을 성전에 바치는 전례대로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3살이 되자 성전에 봉헌합니다. 그 후 마리아가 12세가 되었을 때 성전을 떠날 시기가 됩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묻기 위해 사제인 즈카르야는 12개의 금방울이 달린 의복을 갖추어 입고(탈출 28,33-35.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알리는 방울) 지성소에서 천사의 계시 말을 듣습니다. 천사의 말에 따라 약혼자로 뽑힌 사람이 홀아비인 요셉입니다. 마리아는 처녀인 자신이 장성한 아들들이 있는 홀아비와 약혼해 이스라엘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 싫다고 거절합니다. 그러나 사제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므로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약혼 후 요셉은 집을 짓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납니다.(작품 2) 시간이 흐른 뒤 대사제는 주님의 집에 쓸 천을 마련하기 위해 다윗 후손 중에 순결한 일곱 처녀를 뽑습니다. 마리아는 다윗 후손 일곱 처녀 중 한 사람으로 뽑힙니다. 마리아는 자색과 주홍색 천을 짜고 있다가 가브리엘 대천사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 그 과정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잉태할 ‘보시기 좋은’ 거룩한 성전을 주선하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야고보 원복음서는 후일 외경이 되었지만, 마리아에 관한 많은 내용이 있고 그분 부모의 이름도 담겨 있습니다. 외경 문헌이라고 해서 그 가치를 과소평가해선 안 됩니다. 후대의 교회 전례와 신심, 예술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리아론과 관련된 교의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성전(聖傳)에 의하면 예수님 수난 이후 요한 사도가 에페소에서 성모님을 모시게 되었으며, 후일 영면 시기가 되어 각 사도에게 연락하여 예루살렘에 모여 성모님의 영면을 지켰다고 전합니다. 당시 멀리 있던 토마스 사도가 늦게 도착하여 영면하신 성모님 뵙기를 고집하였다고 합니다. 무덤을 열고 관을 들여다보니 시신은 간 데 없고 수의는 잘 개어져 머리맡에 있고 장미 향만이 진동하였다고 전합니다. 325년 교회 문헌에 처음으로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라는 존칭이 등장하며 이 존칭은 431년 제3차 에페소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습니다. 바오로의 전교 지방이었던 에페소는 당시 숭배 대상이었던 여신 아르테미스(사도 19,24-28 참조)를 성모님으로 대체하면서 순례지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어떠한 모습도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통적 황실의 인물 표현을 기준으로 그리게 되었습니다. 서방 교회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시대에도 성모님에 대한 기도나 찬송, 축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성모님에 대한 공경이 일반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이콘 표현은 약 400종류가 있는데, 그중 성사실(聖史實)2)을 제외하면 대략 5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성경에 언급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에 쓰인 성모님에 관한 내용과 그분의 삶을 유추해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품 2) 성모님의 성전 봉헌과 천사의 양식을 받는 내용: 프레스코, 1313/1314, 왕실 성당, 세르비엔/코소보 4. 성모님의 아름다움 이콘 작가는 성모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고민하게 됩니다. 성당 성물방에 가면 라파엘로의 성모상이라든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 그 외에 성모님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한 수많은 그림 상본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이미 서방 세계의 젊고 어여쁘신 성모의 표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것와 비교하면 이콘의 성모는 미인이라기보다는 얼굴이 어둡고 우울하고 무표정하게 표현한 것이 더 많습니다. 그 이유는 사실적 아름다움보다는 심미적 아름다움, 즉 영적인 미를 더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교로도 담아낼 수 없는 성모님의 내적, 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시도입니다. 성모님께서 받으신 고통·놀람·슬픔·극기·절제 등을 표현하고 있으며, 무표정은 침묵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고요함 속에 계신 하느님과 함께하며, 그토록 사랑하시는 아기 예수를 언제라도 우리를 위해 내주시는 마음을 표현하려 합니다. --------------------------------------------------------------------------- 각주 1) 시리아 다마스쿠스 출생. 예루살렘 성 사바 수도원 수도자. 692년 크레타 고르티나 대주교로 임명. 2) 성사실은 성경이나 성전에 전하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성전 봉헌·천사의 알림·예수 성탄·세례·예수님의 변모·십자가 처형 등으로 표현됨. 김형부 마오로 cpbc2024.06.19

이영헌 신부의 요한 복음서 깊이 읽기 요한 복음서 강해 / 이영헌 신부 / 바오로딸 복음서 순서 따라 총 10부에 걸쳐 풀이 난해한 영적 복음서로 불리는 이유 알려줘 성서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 참조해 주석 이영헌(광주대교구 성사전담사제) 신부가 성서연학총서 시리즈 열 번째 책으로 「요한 복음서 강해」를 펴냈다. 저자는 성경 안에서도 가장 난해한 책으로 꼽히는 요한 복음서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시작으로, 복음서 순서에 따라 머리말, 예수님의 활동과 계시 활동, 마지막 행적,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 부활, 그리고 맺음말 등 총 10부에 걸쳐 복음서를 풀이한다. “공관 복음서가 사건을 보도하는 형식을 취한 ‘육적인 복음서’라고 한다면 요한 복음서는 사건을 음미하며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형식을 취한 ‘영적인 복음서’라고 한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독수리로 상징되며(묵시 4,7 참조)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마주 볼 수 있는 독수리처럼 심오한 진리를 꿰뚫어 보는 영적인 혜안을 지닌 복음사가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중략) 그래서 공관 복음서처럼 ‘예수가 누구인가?’보다는 ‘예수님을 믿느냐 거부하느냐?’에 대한 응답에 복음 선포의 핵심을 둔다.”(19쪽) 책의 부제인 ‘삼위일체 하느님 계시와 영원한 생명’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느님을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선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도록, 즉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초대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조를 강조한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에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정체를 말하며, 믿음으로 맺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속 관계를 이야기한다.(1,12 참조) 이런 관계로 얻게 되는 생명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의 실존 자체요 삶의 요체이며 목적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는 요한 복음사가의 말은 깊은 신학 사상이 담긴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적인 기쁜 소식이다.”(664쪽) 저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 전체에 꼼꼼하게 각주를 달고 보충 설명을 더했다. 가능한 한 성경 원문에 충실했으며, 저자의 편견이나 자의적인 해설을 피하고 성서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참조해 주석하였다. 이영헌 신부는 1984년 인스브루크대학교에서 성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영국 케임브리지 신학대학과 예루살렘 성서대학에서 연수했다. 20년 가까이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와 총장을 역임하고, 여러 해 본당에서 사목한 후 성사전담사제로 다양한 집필과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성서연학총서’ 시리즈로 로마서·코린토서·마르코 복음서 강해 등을 펴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4.03.20

겨울에 듣던 헨델의 ‘메시아’ 8월에 만난다 서울시합창단 ‘한여름의 메시아’ 포스터 세종문화회관 서울시합창단 ‘한여름의 메시아’ 이색 무대 세계 3대 오라토리오 꼽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의 최고 걸작으로 불리는 ‘메시아(Messiah)’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전 세계 곳곳에서 연주되는 스테디셀러다. 모두 3부로 구성된 ‘메시아’의 1부는 예언과 아기 예수의 탄생을 다루고 있어 ‘주님 성탄 대축일’에 어울리고, 2부와 3부는 각각 메시아의 수난과 부활, 구원과 영생에 관한 이야기로 사순 시기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에 제격이다.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자선음악회에서 헨델의 지휘로 초연된 것도 1742년 4월 13일, 사순 시기였다. 헨델 생전에는 주로 사순 시기에 연주됐고, 사후에는 대림 시기에서 성탄까지 자주 공연되고 있다. 주로 겨울에 주요 공연장에서 즐길 수 있는 ‘메시아’를 8월에 만날 수 있는 이색적인 무대가 마련된다. 이름하여 ‘한여름의 메시아’. 세종문화회관 서울시합창단이 지난 2021년 기획해 4년째 8월에 선보이고 있는 공연이다. 독일 출신으로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던 헨델의 ‘메시아’는 하이든의 ‘천지창조’·멘델스존의 ‘엘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오라토리오로 손꼽힌다. ‘오라토리오(Oratorio)’는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별다른 무대장치 없이 전개되는 음악극으로, ‘메시아’ 역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곡으로 시작해 독창과 중창, 낭독하듯 노래하는 레치타티보, 합창 등 여러 형태의 노래가 이어진다. 복잡하고 화려한 음악과 단순하고 명쾌한 음악의 조화가 놀랍지만, 대본을 받은 헨델이 곡을 완성하는 데는 3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작품의 백미는 합창이다. 특히 2부를 마무리하는 ‘알렐루야’와 곡 전체를 마무리하는 ‘아멘’은 묵직한 제창부터 다양하고 깊게 발전된 변주로 합창음악의 정수를 선사한다. 영국 초연 당시 국왕이었던 조지 2세가 ‘알렐루야’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는 일화는 오늘날에도 ‘알렐루야’가 연주될 때면 청중이 기립하는 전통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하이든 역시 ‘알렐루야’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아 ‘천지창조’를 구상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울시합창단이 선사하는 헨델의 ‘메시아’는 이야기 흐름에 맞게 발췌해 120분 안팎으로 압축한 형태다. 이번 무대에서는 서울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인 데이비드 이가 지휘를 맡고,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소프라노 허진아·메조소프라노 김세린·테너 존노·바리톤 성승욱 등이 참여한다. 8월 8일과 9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감상할 수 있다. 문의 02-399-1000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4.07.17

부활에 대한 믿음과 메시아 사상 퍼져나가[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25) 부활 사상과 묵시문학 발전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유다인 공동체에는 부활과 메시아, 종말에 대한 사상이 등장했고 그와 관련한 묵시문학이 발전한다. 또 사회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그리고 분리주의자인 에세네파가 등장한다. 에세네파 쿰란공동체에서 발굴된 필사본 기원전 164년 12월 유다 마카베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25일에 성전 정화 의식을 거행하면서 새 제단을 축성 봉헌했다고 했습니다. 성전을 정화하고 새 제단을 하느님께 바친 것은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4세 임금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우스를 위한 제단과 신상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율법에 따라 불결한 짐승으로 여겨 먹지 않는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쳐 성전과 제단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은 것은 마케도니아인들보다 군사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성전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개입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정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신 것은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유다인들의 간절한 기도와 순교자들의 피 덕분이었습니다. “마카베오라고 하는 유다와 그의 동지들은 여러 마을에 몰래 들어가, 친족들을 불러내고 유다교에 충실하게 살아온 이들을 소집하여 육천 명가량 모았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억압당하는 이 백성을 굽어보시고, 사악한 사람들에게 더럽혀진 성전을 가엾이 여겨 주십사고 주님께 간청하였다. 또한, 파괴되어 거의 무너져 가는 이 도성에 자비를 베푸시고, 죽은 이들의 피가 당신께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어 주시며, 무죄한 아기들이 당한 무도한 학살과 당신의 이름이 받은 모독을 기억하시고, 악에 대한 당신의 혐오감을 드러내시기를 간청하였다.”(2마카 8,1-4)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유다인들의 믿음이 이 무렵부터 생겨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에 충실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서 그들을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2마카 7장 참조) 이 시기에 저술된 구약 성경은 마카베오 상ㆍ하권과 다니엘서 그리고 지혜서입니다. 이 네 권의 책들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해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믿음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뒤엎어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이룩하시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종말’ 사상을 드러냅니다. 이 시기 유행하기 시작한 문학 장르가 있습니다. 바로 ‘묵시문학’입니다. 묵시문학 작품은 기원전 3세기부터 2세기까지 많이 생겨납니다. 작품들 대부분은 예언자들이 환시를 통해 현 세상은 종말을 고하고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고 계시합니다. 그리고 그때 죽은 이들이 부활해 심판을 받고 의로운 이들은 영원한 생명과 복을 받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아울러 ‘새로운 메시아’ 사상도 이 무렵 등장합니다. 곧 다윗 왕조의 후손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나오리라는 기존의 믿음 대신에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 구원에 개입하신다는 메시아 사상입니다. 다니엘서가 이 시기에 쓰인 대표적인 묵시문학 작품입니다. 히브리어 성경 중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책은 ‘다니엘서’뿐입니다. “그때에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다니 12,1-3) 다니엘서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믿음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우시고 다스리는 영원한 왕국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다니 2,44) 그리고 다니엘서는 ‘사람의 아들’이 메시아로 나타날 것이라고 계시합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3-14) 또 기원전 2세기 무렵인 이때 유다인 공동체에 두 파당이 생겨납니다. 바로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입니다. 바리사이는 안티오코스 4세 시대에 율법과 전통의 이름으로 마케도니아인들에게 항거하던 하시드인들을 계승한 파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과 구전 전승을 열심히 준수하던 율법학자들로 중산층에 속했으며 백성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반면, 사두가이는 헬레니즘에 개방적인 사제들로 귀족층에 속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구전 전승을 인정하지 않고, 모세 오경에 분명히 포함되지 않은 교의들을 부정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에 속하지 않은 분리주의자들도 같은 시기 생겨났습니다. 그 대표적인 공동체가 바로 ‘에세네파’입니다. 에세네파는 차독의 후손이 아닌 하스모네아 가문의 대사제들을 거부했고, 예루살렘 성전의 경배 예식도 율법에 어긋난다고 부정했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5.18

우상숭배 일삼던 이스라엘 결국 멸망의 길로[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19) 북 왕국 이스라엘 북 왕국 이스라엘은 예로보암부터 호세아까지 19명의 임금이 다스렸으나 하느님과의 계약을 파기해 멸망하고 말았다. 살만에세르 3세 오벨리스크 부조, 이라크 국립박물관, 바그다드. 북 왕국 이스라엘 예후 임금이 아시리아 살만에세르 3세에게 무릎을 꿇고 조공을 바치고 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예로보암부터 호세아까지 모두 19명의 임금이 다스렸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끊임없이 모반이 일어나 임금이 죽고, 다른 이가 임금에 오르는 역사가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금들에게 ‘예로보암의 길을 걸었다’ ‘예로보암의 죄에서 돌아서지 않았다’(1열왕 15,26.34; 22.53; 2열왕 3,3 )라는 평가가 따라다녔습니다. 예로보암은 이스라엘 왕국이 망할 때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주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긴 임금들의 원조라는 불명예가 주어집니다. 예로보암의 아들 나답은 왕위를 계승해 1년 조금 넘게 다스립니다. 이사카르 집안의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왕좌를 빼앗습니다. 그는 예로보암의 자손 중 남자를 모두 죽입니다. 성경은 이 학살을 ‘예로보암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을 선포한 아히야 예언이 이뤄졌다고 해석했습니다.(1열왕 14,4-18; 15,28-30) 바아사는 24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합니다. 바아사를 이어 아들 엘라가 2년 조금 못 되게 이스라엘을 통치합니다. 지므리 장군이 엘라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후 바아사의 후손을 모두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지므리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므리 장수를 자신들의 왕으로 선포합니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성읍 티르차를 공격했고, 티르차에 있던 지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불에 타 죽습니다. 오므리는 12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그는 사마리아로 이스라엘의 성읍을 옮깁니다. 그는 모압 북쪽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왕국을 안정시킵니다. 오므리의 뒤를 이어 아들 아합이 왕이 됩니다. 그는 22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합니다. 열왕기 상권 20장부터 22장까지는 아합이 아람 임금 벤 하닷 2세와 벌인 세 차례 전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합은 아람이 쳐들어오자 항복하려 했으나 “주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에 힘을 얻어 기습 공격을 감행해 승리를 거둡니다. 아합은 이듬해 아람 군대가 다시 쳐들어왔을 때도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는 킨네렛 호수 동편 아펙 전투에서 아람 임금 벤 하닷 2세를 생포하는 전과를 세웁니다. 세 번째 전쟁은 아합이 일으킵니다. 아합은 아람인들이 점령한 라못 길앗을 공격하자는 유다 임금 여호사팟의 제안에 전쟁을 벌입니다. 400명의 예언자도 이 전쟁에서 아합이 이길 것이라며 지지했지요. 하지만 미카야 예언자만 반대했습니다. 미카야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패했고, 아합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들 아하즈야는 두 해를 다스립니다. 열왕기 상권은 그의 통치를 언급하지 않고 우상 숭배의 죄만 전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그 죄 때문에 아하즈야가 죽을 것임을 예언합니다. 이것이 엘리야 예언자의 마지막 예언이었습니다. 아하즈야의 동생 요람이 왕위를 잇습니다. 요람은 유다 임금 아하즈야와 동맹을 맺고 하자엘이 다마스쿠스에서 벤 하닷 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구실삼아 아람 원정길에 오릅니다. 이 원정에서 요람과 아하즈야는 유다의 예후 장군에게 암살당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오므리 왕조는 종말을 고합니다.(2열왕 8,7-15; 9─10장) 예후는 28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합니다. 그는 두 왕의 인척과 바알의 예언자들을 전부 죽이고 바알 신전을 무너뜨렸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주님을 진심으로 섬기지 않고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했지요. 그 결과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동편 땅을 아람에게 빼앗깁니다. 아들 여호아하즈가 예후를 이어 17년간 왕위에 올랐지만 아람과의 전쟁에서 계속해서 국토를 잃었습니다. 그를 계승해 여호아스가 임금이 됩니다. 그는 아버지 때 빼앗긴 이스라엘의 땅을 되찾아옵니다. 또 예루살렘까지 진격해 성벽 일부를 파괴하고 성전과 왕궁의 보물들을 약탈합니다. 16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린 여호아스를 뒤를 이어 예로보암 2세가 임금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예로보암 2세 통치 41년간 가장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아람인들에게 넘어갔던 모든 땅을 회복하고 평화를 구현했습니다. 예로보암 2세가 죽은 뒤 왕위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아들 즈카르야가 임금이 됐으나 6개월 만에 살룸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이로써 4대에 걸친 예후 왕조는 예언대로 마감합니다. 살룸은 몇 주 만에 므나헴에게 암살됩니다. 므나헴의 아들 프카흐야도 페카에서 살해됩니다. 페카는 아람인들과 연합해 아시리아에 맞서자 아시리아의 티글랏 필에세르 3세는 이들의 수많은 도시를 파괴 점령합니다. 그러자 호세아는 페카를 살해하고 아시리아에 공물을 바쳐 이스라엘을 존속시킵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살만에세르 5세가 아시리아의 왕위를 계승하자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살만에세르 5세는 이스라엘을 공격해 사마리아를 제외한 모든 땅을 점령하고 호세아를 감옥에 가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마리아에서 3년간 저항했지만, 기원전 722년에 함락되고 맙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왕국은 200년 만에 멸망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종교 혼합주의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우상을 숭배한 탓이라는 합니다. 몰락한 이스라엘의 영토는 아시리아 제국의 속주가 됐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아시리아로 끌려갑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4.05

초기 신앙 공동체, 신앙·성사·성령의 은사를 공유[저는 믿나이다] (10) 초대 교회의 삶① 초대 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신앙과 성사, 성령의 은사를 공유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유다인들이 세례를 받고 있다. 출처=대구대교구 가실본당 「그림 성경」 베드로 사도의 첫 설교,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 선포를 듣고 회심하여 세례를 받은 이가 3000명, 그리고 곧바로 장정만 5000명에 달한다고 사도행전을 알려줍니다.(사도 4,4 참조) 당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인들은 학자들에 따라 2만에서 6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그대로 따르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를 이룬 신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함께 기도하고 나누는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2-47)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 모습을 역사적 사실로 충실하게 묘사합니다. 첫째, 초대 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신앙을 공유’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이 가르침으로 성장한 신앙은 사도들에게서 받은 교회의 신앙이며, 나눔으로써 풍부해지는 생명의 보화입니다. 사도(使徒)는 헬라어 ‘ἀπόστολος’(아포스톨로스)를 한자로 풀이한 단어로, 우리말로 ‘파견된 자’란 뜻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파견하셨죠. 지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 가운데 열둘을 세워 ‘사도’라 하며 그들과 함께 지내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마르 3,13-14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러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고,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마태 10,40)이라며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당신 사명에 열두 사도를 참여시키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 신자들은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이 여러 형태로 주는 가르침과 지도를 온순하게 받아들입니다. 둘째,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성사를 공유’합니다. 세례로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모든 성사의 효과는 신자 전체의 것이다. 성사들, 특히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문과 같은 세례 성사는 모두를 서로 묶어 주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 결합시키는 거룩한 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교부들의 신경 풀이에서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성사의 공유로 이해하고 있다. (⋯) 성사는 우리를 하느님과 결합시켜 주므로, 모든 성사는 친교의 성사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러한 친교를 완성시키는 주된 성사는 성체 성사이므로 친교의 성사라는 말은 성체 성사에 더 적합하다.”(「가톨릭교회 교리서」 950항)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주님 가르침을 우리 생활 안에 구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영성 생활’의 목적이기도 하지요. 하느님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초대 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알았기에 주님을 닮고자 성사를 공유하는 영성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중대한 사실을 전해줍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그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5,12) 셋째,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공유’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행하는 많은 이적과 표징을 목격하였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신자들이 하느님 자녀로서 더 깊이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 굳게 결합시키며, 교회와 더욱 튼튼하게 유대를 맺게 합니다. 또 신자들에게 교회의 사명, 곧 복음 선포에 더욱 깊이 참여하게 하며, 더욱 철저한 실천으로 신앙을 증거하게 합니다. 우리는 견진성사를 통해 이러한 성령의 은사를 받지요. “성령께서는 신비체의 모든 지체들이 하는 생동적이며 참으로 유익한 모든 활동의 근원이시다. 성령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 안에서 온몸을 이루신다. 곧, 지체들을 완전한 사람으로 ‘세울 수 있는’(사도 20,32)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양육하고 치유하는 성사를 통하여, ‘그 선물들 가운데에서 사도들이 받은 가장 뛰어난 은총’을 통하여, 선을 행하게 하는 덕행들을 통하여, 끝으로 여러 가지 특별한 은사(카리스마)들을 통하여 신비체를 이루신다. 이 은사들은, 신도들이 ‘교회의 쇄신과 더욱 폭넓은 교회 건설을 위하여 유익한 여러 가지 활동이나 직무를 받아들이는 데에 알맞도록 준비시킨다.”(「가톨릭교회 교리서」 798항) 영성가 마르미옹 신부는 성령의 은사를 영적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성화의 길’로 표현했습니다. 성화란 거룩함 자체이신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분을 따름에 걸맞은 생활을 함으로써 믿음 안에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마르미옹 신부는 순수한 신앙심이 성화에 유익이 될 것이라 조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우리 신앙과 영성생활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5.01.07
![[영화의 향기 with CaFF] (253)여기는 아미코](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3/26/auL1711446681889.jpg)
[영화의 향기 with CaFF] (253)여기는 아미코천진하고 별난 아이의 슬픈 동화 영화를 보는 내내 참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움츠려 들었다. 결국 아이는 가족으로부터 내쳐진다. 좋아하는 친구에게는 코뼈가 부러지도록 얻어맞는다. 유별나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일까, 감당이 어렵다는 말일까? 넘치는 활력과 호기심으로 학교에서 집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천진한 아이, 아미코! 여기는 아미코, 여기는 아미코 응답하라, 응답하라⋯. 생일날 받은 고장 난 무전기로 아이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부른다. 가족들과 친구를 부르고 있지만, 대답은 없다. 아미코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는데 어른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다른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무자비한 부모가 아니다. 다정하고 친절한 엄마 아빠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보는 눈이 없는 것인지, 보려고 안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분명 버거운 게다. 그러니 어른 방법으로 보라고 일반 상식대로 살라고 요구하고 또 요구한다. 아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지, 엄마 얼굴의 커다란 점만 바라본다. 아이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 왜 잘못인지 모른다. 그러면 안 된다고만 하니 이해할 수가 없다. 모두가 너를 싫어한다는 친구의 말에 이유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지만, 또래 아이는 답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의 사회화는 언제 일어나는 것일까, 아기 때부터 배워지는 것일까, 아미코는 아기 때 배우지 못한 것인가? 생각이 많다. 서로 다른 공간 속에서 머물다가 부모는 아이를 속이며 밀어낸다. 외진 곳으로 밀려온 아이는 왜 그 속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면서 산다. 어디에서 오는지 모를 슬픔을 잊기 위한 것인지 바닷가를 찾아가 첨벙대며 논다. 그것은 노는 것인가, 그도 모르겠다. 지나가며 걱정스럽게 묻는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답한다. 괜찮다는 말이 그렇게 슬프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아이는 그렇게 한 어른이 되어가겠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아이의 모습이 다시 생각난다. 짠하지만, 그 맑고 선함이 아이를 스스로 키울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웃음이 난다. 이 영화는 2023년 키네마준보 베스트 10에 선정되었다. 이외에도 타이베이영화제·런던아시아영화제 등 많은 영화제로부터 호평받았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는 관객들이 베스트로 뽑은 화제작이다. 아미코는 어린 시절 순수의 세계도 떠오르게 하고, 사회화된 교양있는 사회가 잃어버린 무언가도 엿보게 한다. 아미코에게 하고픈 말은 밀어내는 사람들의 모습에 많이 슬퍼하지 말고, 어느 성경학자가 말하듯 하느님이 쓰신 두 권의 책, 성경과 자연 중에서 자연인 바다의 너른 품에서 맘껏 뛰놀며 지금처럼 괜찮다고 읊조리며 살라고 말하고 싶다. 그를 그로 볼 수 있는 자애로운 눈은 어떻게 가질까? 나도 살고 너도 살게 하는 맑은 눈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우리를 하나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지혜를 청해본다. 2월 28일 극장 개봉 손옥경 수녀cpbc2024.03.27

목자 잃은 교우들, 산속에 숨어들어 교우촌 이루고 믿음 지켜[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9. 교우촌과 목자 없는 신앙생활 한국교회사연구소 등에서 보존하고 있는 「텬쥬셩교공과(천주성교공과)」 필사본과 목판본·활판본 등 원본들. 「천주성교공과」는 1862년 목판으로 인쇄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로 1969년 「가톨릭 기도서」가 나올 때까지 100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기도서로 사용됐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주문모 신부 순교로 다시 목자 없는 교회로 1801년의 박해로 조선 교회는 하나밖에 없는 목자였던 주문모 신부를 잃었다. 교우들의 삶을 한마디로 ‘기도와 성사생활’이라고 할 때, 이제 반쪽인 성사(聖事)는 거행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참된 성사를 위해서 수없이 북경을 오가며 선교사를 요청했건만, 6년이라는 짧은 활동 끝에 순교로 끝을 맺고, 조선 교회는 다시 목자 없는 양 떼의 삶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34년 유방제(파치피코) 신부와 1836년 모방(베드로) 신부가 들어오기 까지 거의 35년간 사제 없는 조선 교우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살아남은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위해 깊은 산골로 숨어들게 되었고, 박해 시기 교회는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사제는 없었지만, 기도문을 외워가면서 근근이 믿음을 지켜나갔다. 이 시기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신자들이 남긴 옥중 수기와 북경 주교와 교황께 보낸 신자들 편지다. 먼저 신태보(베드로) 복자의 옥중 수기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그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전주에서 체포되어 13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면서 수기를 남겼다. “박해가 마침내 가라앉기는 하였으나, 우리는 서로 뿔뿔이 헤어져 있었고, 모든 기도문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신자 본분을 지킬 방법이 있겠습니까? 나는 우연히 몇몇 순교자 집안의 유족들이 용인(龍仁) 지방에 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중략) 그들은 기도서 몇 권과 복음 성경 해설서를 가지고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깊숙이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 책을 보자고 청하자, 내 말을 막고 ‘가만히 있으라’고 손을 내저었습니다. (중략) 나는 거기에서 40리 되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8일이나 10일에 한 번씩 서로 찾아다녔습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서로 깊고 진실한 정이 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하였고, 주일(主日)과 축일(祝日)의 의무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었습니다…. 마치 신부를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기쁨과 행복이 번졌습니다….”<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중권, 11~12쪽> 신유박해 이후 교우들은 산속에 숨어들어 이처럼 신유박해 이후 남아있던 교우들은 산속에 숨어들어가 찢긴 기도문과 성경을 보면서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외우던 기도는 오늘날 주님의 기도 등 주요 기도문들과 주일 미사를 대신하던 ‘첨례경’이라는 기도문이었다. 성경은 「성경직해광익」이라는 주일과 축일 복음 해설서를 가리킨다. 위의 내용 중에 신태보와 함께 있던 교우가 그 깊은 산골짜기에서 신태보의 입을 막고, 조용히 하라고 한 것은 그의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천주교와 연루되어 붙잡혀 갔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이다. 신태보는 40년 넘는 신앙생활 가운데 사제를 한 번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주문모 신부를 6년간 찾아다니다가 못 만났다. 그는 전주의 옥에서 순교하기 전 해인 1838년 샤스탕 신부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받는 기쁨을 누렸다. “올해에 저는 사형 언도를 받은 채 12년째 감옥에 갇힌 5명(신태보·김대권·이일언·이태권·정태봉)의 복된 신앙 증거자를 보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간수들은 이 죄수들을 성실한 사람들로 인정해서 이들에게 노동을 하여 생활비를 벌게도 하고, 감옥소에서 따로 지은 별채에서 함께 살 수도 있게 해 주었고, 감옥소에서 나와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할 수도 있도록 허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신자들이 고백하는 죄를 저에게 서면으로 보내주었고, 저는 그들과 잠시 만나 몇 마디의 훈계를 한 다음에 사죄의 기도를 하여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샤스탕 신부 서한 중에서, 1838.10.16.> 무려 13년이나 갇혀 있다가 1839년 박해 때 순교한 신자들은 말하자면 ‘모범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토록 사제를 만나고자 열망했던 신태보는 순교하기 1년 전에 샤스탕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샤스탕 신부의 권면으로 지나간 신앙생활을 수기로 적었다. 원문은 찾을 수 없으나, 그 내용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전해지고 있다. 화전 일구고 옹기 구워 팔며 생계 이어가 교우촌 신자들은 미신을 피하고자 외교인들과 떨어져 산속으로 피신해 지내면서 황무지에 씨를 뿌리거나 나무뿌리나 잎을 먹고 살았다.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짓기도 하고, 담배농사·옹기점·숯막 운영 등을 생활수단으로 삼았다. 옹기점을 많이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가 쉽고, 옹기를 팔기 위해 여러 곳에 다니면서 흩어진 신자들을 찾거나 많은 정보를 얻기 쉬웠기 때문이다. 당시 옹기장이는 사회적으로 천대받은 직업이었기에 사람의 관심 밖에 있는 부류였고, 일이 고되지만 4~6배 정도의 이문이 남는 수익을 낼 수 있었다. 다만 좋은 흙을 소모하게 되면 또 다른 흙을 찾아 장소를 옮겨야 했다. 교우촌의 삶은 역시 ‘파공첨례(罷工瞻禮)’라고 일컫는 주일 집회가 가장 중심이 되었다. 그 지역 교우촌 혹은 공소 회장이나 집안의 가장(家長)이 주도하여 함께 첨례경을 바치며 기도하고, 성경과 교리서를 읽고 주일 집회를 하며 보냈다. 그 첫 시작기도는 다음과 같다. ‘무시무종하신 전능 천주여, 나 비록 불감한 죄인이오나 너의 내신 바라. 이제 네 앞에 나아와 너를 찬송하려 하오니, 너는 내 천주시요, 임자시요, 나를 내시고 구속하신 이심을 인함이요…. 내 죄악의 무수함과 예비가 타당치 못함을 생각하여, 어찌 황송치 않으리요, 마땅히 너를 만유 위에 사랑하고 찬송하여야 하겠거늘 도리어 너 지극히 어지신 주께 죄만 지었으니 진심으로 절통하여 하나이다…. 주여 내 기도함을 들으사, 내 모든 죄악과 모병과 네 마음에 합치 않는 모든 것을 없애어 주시고 내게 요긴한 덕을 주사, 내 본분을 착실히 지키며 너를 타당히 섬기게 하시고, 또 모든 일을 도무지 네 영광을 위하여, 나와 남의 구령함을 위하여, 연옥영혼을 위하며, 특히 내 친척과 내게 은혜 준 자를 위하여 유익하게 하소서…. 너 내 천주시요, 내 대부시요, 내 모든 정(情)의 마땅히 향할 바로소이다. 아멘.’<「천주성교공과」 첨례경 중 ‘초행공부’ 발췌>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cpbc2024.02.22

특별기고 - (15) 성전건립 유감(有感)-뚝심과 효심으로 이룬 성전- <인테리어> 성당 이름과 주요 시설명을 나타내는 글씨는 눈에 띄면서도 예술적이어야 하고 시인성과 전문성이 드러나야 했다. 일본에 성당 견학을 갔을 때 소박한 성당 상단에 ‘천주당(天主堂)’이라 새겨진 글씨가 참 맘에 들었다. 중국에서도 이 이름과 글자를 많이 사용했는데 한자 문화권에서 즐겨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성당(聖堂)이라는 이름도 좋지만 ‘천주당’이라는 이름이 역사성도 있고 옛스러운 맛도 나니 이 이름을 쓰기로 했다. 문제는 어디다 써야 할까 궁리하다가 나무에 새기면 눈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설치해야 하고 고딕 성당에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최종적으로 돌로 새기기로 했다. 성당 건물 외벽이 빨간 벽돌이라서 흰 대리석으로 하되 바탕은 진붉은 색상으로 입체감 있게 올록볼록 질감을 주고 글씨는 흰색으로 새겨 넣었다. 글씨는 서예 경력이 오랜 전문가에게 의뢰하고, 돌을 찾다 보니 우연히도 우리나라 최고의 석공예 전문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天主堂’ 글씨(서예)를 가져갔는데 사이즈를 돌에 맞춘다고 임의로 확대시키는 바람에 균형이 맞지 않아 되돌려 보냈고 또 한번 맞지 않아서 또다시 되돌려 보냈다. 필시 그분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내 눈에 차지 않고 또 어딘가 불편하면 안 되었다. 결국 세 번 만에 맞추어서 벽돌을 ‘넣어 쌓기’로 어렵게 작업해서 올려놓으니 역시 잘 어울렸다. 내가 퇴짜를 놓았던 2개도 측면 출입문 위에 설치했다. 그리고 머릿돌과 성당 정문 기둥의 주보 성인 이름과 성당 이름도 돌로 새길까 생각하다가 너무 비석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신주’로 하기로 결정하고 글귀와 모양, 색상까지 수많은 수정 끝에 최종 확정하여 드디어 벽에 설치하고 보니... 과연...! 감탄이 흘러나왔다. 참으로 길고 피곤한 과정이었지만 해놓고 보면 그렇게 맘에 들 수가 없었다. 심지어 공사 관계자나 수고한 교우들에게 수여할 공로패, 감사패도 일일이 직접 문장을 작성하고 글씨체까지 가장 잘 어울리는 글씨체로 신중히 결정해서 맞췄다. 평소 임명장이나 상장 하나도 나는 내가 내 글씨로 직접 써서 주었고, 세례받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상본에 붓 펜으로 글씨를 써서 코팅해서 주었고, 성경책(구신약합본) 내피에도 글씨를 직접 써서 선물로 주었다. 글씨가 되니까..??!! ㅎ~~ 그러니 늘 예민하고 피곤하지만 결과를 보면 너무 만족스러우니 어쩌랴..?? 까다로운 성질도 요긴하게 써먹을 데가 있었다. 진즉 발견을 했더라면.… 봉헌식을 준비할 때에도 초청장을 작가가 찍은 사진을 활용하고 본당 마크도 내가 만들었던 마크를 넣고 문맥을 작성해서 인쇄소에 꼬치꼬치 잔소리해서 만들어 놓고 보니 매우 맘에 들었다. 그뿐인가. 중요한 전례 주년이나 축일이 되면 은인들에게 축하 문자를 보내고 감사 문자와 공문을 보낸 것이 한 두통이었던가.. 생각해보면 그런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정성들이 큰 힘을 발휘한 것 같다... 오래전 신설 성당에서 성전을 건립할 기금만 마련해놓고 떠났던 일이 못내 아쉽고 속상해 이번 성전만큼은 완벽하게 끝까지 제대로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으로 뼈를 갈아 넣었다. <봉헌식> 10월 말에 봉헌식을 하고 싶었으나 준비도 덜 되고 미리 주교님과의 협의가 되지 않아 날짜가 밀려서 11월 11일에 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유구성당 10년간에 걸친 사목과 건립의 결산이기도 하고 유구본당 공동체로서는 참으로 감개무량한 성전 봉헌식이기에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미사 전례부터 음식, 손님 접대, 선물, 안내, 교통정리까지... 나름대로 행사를 치르는 데는 경험상 노하우가 있었지만 교우들이 잘 모르기에 몇 본당 견학을 하고 진두지휘하면서 촉박하게 준비했다. 잔치도 손맛 좋은 우리 교우들(성모회)이 직접 하면 좋으련만... 그 많은 손님을 감당하기에는 큰 무리고 거의 불가능하여 뷔페를 하기로 결정했다. 전례 및 행사 예행 연습에, 역사 영상 자료까지... 55년 동안 준비된 것이 거의 전무하다 보니 내가 부임한 이후의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대로 추리고 편집해서 음악까지 삽입하여 사진 자료와 동영상을 완성했다. 너무 미진한 준비였지만 마침내 운명의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사제들과 은인들이 많이 오기를 기대했지만, 추운 날씨에 멀리서 그리 많이 오기는 불가능했다. 그런대로 크지 않은 성당에 발 디딜 틈 없이 성황을 이루어 성대하고 거룩한 봉헌식이 열렸다. 사제들이 많이 오기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적게 참석해서 못내 아쉬웠다. 성가대도 도저히 우리 성가대(멜로디만 부르는 소수의 중년 자매들.. 그러나 열심히는 하는...)만으로는 역부족이어서 공주 중동 성가대와 연합해서 나름 훌륭히 치를 수 있었다. 너무 긴장해서 정신도 못 차리고 어찌 치렀는지 모르겠다. 봉헌식에서 최고의 히트는 단연 사목회장의 답사였다.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 데다 몰골이 바짝 마른 사람인데 목까지 쉬어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소감을 말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통곡의 연속이었다. 하도 울어 재끼는 바람에 처음에는 참석자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함께 울면서 숙연해졌다. 내용이야 당연히 본당신부가 너무 고생해서 이렇게도 아름답고 튼튼한 성전을 이룩했다는 것 그리고 열악한 형편이라서 부채도 없이 오히려 몇억을 남겨놓았다는... 모두들 감동하는 듯 했다. 하도 울어 싸서 어지간히 울으라고 한마디 했다. 마침대 내 차례가 되어 여러 가지 말을 하고 싶었으나 다 못하고 느낀 점을 간곡하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감격에 겨워 나도 울고 말았다. 변변찮은 나를 통해 이런 역사를 이루어 내신 하느님께, 그리고 고생한 교우들과 이를 가능하도록 성심을 다해 후원해주신 은인들께 감사할 수밖에... 이 거룩하고 보람찬 위업을 이루는데 나를 도구로 써주시고 내가 이런 은혜로운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그리 감사하고 감격스럽다. 언젠가 이곳이 성지로 개발되어 수많은 순례자의 발길이 이어지고, 이곳 순교자들의 이름이 빛나고 이 아름다운 성당에서 혼인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기쁨과 위로와 은혜를 느낀다면 그 얼마나 행복할까… 사실, 지금까지 이런 엄청난 일을 이렇게도 오래 지속하고 이루어낼 수 있었던 힘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아울러 그 비밀은 내 어머니의 전구와 아낌없는 응원이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아들 신부가 이런 큰일을 해내라고 조금은 일찍 자리를 비켜주신 것이라 확신한다.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도 천사 같던 어머니... 우리 형편도 어려운데 지나가는 걸인을 불러 씻기고 밥을 해 먹이실 만큼 자애로우셨던 어머니는 하느님을 만나고부터는 그야말로 성녀같이 사셨다. 신부인 아들보다 더 극진하게 기도하셨고, 어디서 그런 지혜를 받으셨는지 내가 찾아가서 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을 알려주셨다. 분명 성령의 이끄심이었다. 기금마련 하러 가기 전 늘 어머니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고 나면 안 될 것 같던 일도 성사되고, 큰 후원이 이루어지고 은인을 보내주셨다. 이는 나의 효심이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고 격려였다... 그 힘으로 불가능한 이 성전 건립의 위업을 이룰 수 있었다. 하늘에서도 기뻐하실 거라 확신한다. - 대전교구 정필국 베드로 신부 이정훈2025.03.21

파리지앵의 영적 쉼터,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15.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프랑스 파리 6구의 생제르맹데프레 성당. 6세기 지은 베네딕도회 수도원 성당으로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11세기부터 증개축을 계속하다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수도원 건물 중 성당만 남았다. shutterstock 파리 6구의 영적 쉼터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우리나라 여행객이 가장 많이 검색한 유럽 여행지 1위는 파리입니다. 에펠탑·샹젤리제 거리·몽마르트르 언덕⋯. 무엇보다 5년간 복원 공사를 마치고 지난해 12월 재개관한 노트르담 주교좌 대성당은 가고 싶은 유럽 명소 1순위일 테죠. 그런데 가톨릭 순례지로서 파리를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안타깝게도 프랑스 혁명 때 너무나 많은 수도원과 성당이 파괴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성당들은 대개 기념비적 건축물로만 소개되기에, 파리는 성모 발현지 순례 일정표에서 쉬어가는 기착지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파리에는 바쁜 삶 속에 영적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일상의 섬이 있습니다. 카페·갤러리·부티크가 많아 파리지앵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센강 남쪽 기슭의 파리 6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6구의 생제르맹데프레 지구에는 파리 시민의 오랜 순례 장소이자 가톨릭 신앙의 중심지인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성당이 있습니다. 생제르맹데프레대로 교차로에 우뚝 서 있지만 스쳐 지나갈 때가 많지요. 11세기 재건된 성 제르맹이 처음 묻힌 생심포리앙 소성당(좌)과 르네 데카르트 무덤 소성당(우). 생트제느비에브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매장되어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 중 수도원이 파괴되어 1819년 이곳으로 이장했다. 필자 제공 생제르맹데프레 성당 본당(좌), 가대석과 내진 부분(우). 1794년에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수 톤의 화약이 폭발하여 크게 손상됐다. 1821~1854년 신고전주의 건축가 에티엔 이폴리트 고드와 빅토르 발타르가 지금 모습으로 복원했다. 필자 제공 성 십자가와 성 빈첸시오 성유물 모셨던 성당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은 543년 프랑크 왕국을 창건한 클로비스 1세의 셋째 아들인 킬데베르투스가 설립한 베네딕도회 수도원입니다. 킬데베르투스는 서고트족을 상대로 원정 중 스페인 사라고사에서 204년 그곳에서 순교한 성 빈첸시오의 튜니카 조각을 선물 받아 파리로 가져옵니다. 왕은 당시 유럽에 전해진 성십자가 조각과 성 빈첸시오의 성유물을 모시고자 542~548년 시테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당을 짓도록 합니다. 로마 시대에 이시스 사원이 있던 곳이었지요. 558년 파리 주교인 성 게르마누스, 즉 성 제르맹이 수도원 축복식을 거행했는데, 처음에는 생트크루아에생뱅상 수도원이라 불렸습니다. 킬데베르투스는 이곳 성당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립니다. 그 뒤로 수도원은 632년 다고베르 1세가 파리 북쪽 교외에 생드니 수도원을 세우기 전까지 메로베우스 왕가의 무덤 역할을 하며 지역의 새 중심지로 발전합니다. 수도원의 아빠스는 1670년 무렵까지 주변 지역에 대한 영적·세속적 관할권을 모두 행사했습니다. 지금의 디드로 동상과 생제르맹데프레 성당 사이에 뻗은 생제르맹대로에 서서 보면 수도원 중심으로 센강 좌안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데프레’라는 수식어는 수도원이 도시 밖 들판에 있었음을 나타내는데요, 당시 파리 도시가 지금에 비하면 무척 작았던 거지요. 755년 생심포리앙 소성당에 매장했던 게르마누스 주교의 유해를 성당 주제단 뒤편으로 이장했는데, 이때부터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성 게르마누스는 오툉의 베네딕도회 수도원 아빠스였는데, 형제들의 반발을 살 만큼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한없이 베풀었다고 합니다. 주교가 돼서도 수도자로서 미덕과 금욕을 실천했고, 이교도 관습을 없애고 왕가의 갈등을 중재해 평화를 이루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중세 파리 시민들은 전염병이나 전쟁 등 위기가 닥칠 때면 성인의 성유물을 모시고 거리를 돌았습니다. 13세기 건축된 동정녀 소성당의 흔적(좌)과 가대석의 성모자상(우). 1999년에 발굴된 성모자상으로 중세 파리지앵의 성모 신심을 엿볼 수 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모자상과 느낌이 비슷한데, 미완성 상태임에도 매우 세련된 표정과 우아한 자세를 보여준다. 필자 제공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도면과 스케치(1725년). 상아색 부분인 성당만 현재 남아 있다. 보라색 부분은 동정녀 소성당으로 붕괴가 우려돼 19세기 초 쌍둥이 탑과 함께 철거됐다. 필자 제공 개혁운동 주도했던 생모르 베네딕도 연합회의 모원(母院)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성당 외관은 다소 칙칙하고 밋밋합니다. 지금과 달리 중세 초 수도원 지붕은 금박이어서 ‘생뱅상르도레’라고도 불렸는데, 그 때문인지 9세기 바이킹의 주 표적이 되어 두 번이나 약탈당하고 불탔습니다. 본당·외벽과 아케이드·종탑 등은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된 것으로 묵중한 서쪽 탑은 에펠탑에서도 보이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종탑입니다. 성당 안은 북적이는 대로변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화려한 천장, 성당 벽을 가득 채운 프레스코화, 디테일이 살아있는 기둥과 조각상,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드리운 햇살 속에 잠시 묵상에 잠기면 참 아름다운 주님의 집이구나 느낄 겁니다. 하지만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이 정적인 장소만은 아니었습니다. 1618년 창립된 프랑스 생모르 베네딕도 연합회의 모원으로서 개혁운동을 주도했으며, 프랑스 혁명 전까지 생빅토르 수도원·생트제느비에브 수도원과 함께 신학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당시 200여 수도원이 연합회에 가입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전례와 기도생활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베네딕도 규칙을 엄격히 따르면서도 당대 신학과 학문의 발전을 적극 수용했고, 교부학·성경 번역과 해석 등 가톨릭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에 적대적인 민중들에 의해 1792년 9월 세브뢰 총아빠스가 피살됐고, 1818년에는 연합회도 해체됩니다. 프랑스 혁명 중 다른 종교 시설처럼 이곳 수도원 건물도 파괴되고, 성당은 소금 공장으로 바뀌었습니다. 500년 넘게 파리 시민들이 애원을 털어놓던 동정녀 소성당은 프랑스 혁명 중 곡물 위원회 사무실로 쓰다가 1802년 철거당합니다. 물론 프랑스 혁명이 오늘날 정치·경제·사회의 토대를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습니다만, 당시 프랑스 가톨릭에는 재앙이었지요. 생제르맹데프레 성당은 이미 1803년부터 전례 공간으로 본연의 기능을 되찾습니다. 가대석 뒤에 모셔진 미완성 성모자상의 은은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다른 성당과 달리 이곳이 파리 시민들에게 뭔가 특별한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제르맹데프레 성모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이곳을 순례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겁니다. <순례 팁> ※ 파리 6구 지하철 생제르맹데프레역(M4)에서 올라오면 교차로에 성당이 바로 보인다. ※ 성당 무료 가이드 : 매월 첫 토요일과 셋째 일요일 14:30(파이프오르간 아래 집결, 7·8월 제외). 2~3차례 저녁 미사 후 음악회가 열린다. 사르트르·보부아르·헤밍웨이 등이 자주 찾던 카페 ‘레듀마고’ ‘카페드플로르’가 지척에 있다. ※ 생제르맹 성당 미사 : 주일과 대축일 11:00·19:00, 평일 : 07:00(화~금)·12:15·19:00(월~토). cpbc2025.02.12

하느님께 내쳐져 비참한 최후를 맞은 사울 임금[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15) 사울 2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 사울이 하느님께 버림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은 그가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은 질투심에 휩싸인 사울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칭송받고 있는 다윗을 창으로 죽이려 하고 있는 장면이다. 구글 챕쳐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법 가운데 ‘헤렘’이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헤렘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는 이민족과 싸워 이겼을 때 남녀노소는 물론 가축까지 전멸시켜야 한다는 법입니다. 또 노획물은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므로 함부로 사적으로 취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헤렘을 어기는 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중죄였습니다. 현대인의 사고로는 반인권 야만의 학살 행위인 헤렘을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으로 지킨 이유는 하느님께 대한 순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려는 땅으로 너희를 데려가시고, 많은 민족, 곧 너희보다 수가 많고 강한 일곱 민족인 히타이트족, 기르가스족, 아모리족, 프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실 때, 그리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그들을 너희에게 넘겨주셔서 너희가 그들을 쳐부수게 될 때, 너희는 그들을 반드시 전멸시켜야 한다. 너희는 그들과 계약을 맺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도 안 된다. 너희는 또한 그들과 혼인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도 말고, 너희 아들에게 주려고 그들의 딸을 맞아들여서도 안 된다. 그런 짓은 너희의 아들이 나를 따르지 않고 돌아서서 다른 신들을 섬기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진노가 너희를 거슬러 타올라 주님께서 너희를 곧바로 멸망시키실 것이다. 오히려 너희는 그들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 그들의 제단들을 허물어뜨리고 그들의 기념 기둥들을 부수며, 그들의 아세라 목상들을 찍어 버리고 그들의 우상들을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이는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시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를 당신 소유의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신명 7,1-6) 이스라엘 영도자 사울이 하느님께 내쳐진 이유도 헤렘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왕이 된 후 두 번째로 치른 아말렉족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는 아말렉 임금 아각을 생포하고 가축과 재물을 노획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헤렘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울과 그의 군사들은 아각뿐 아니라, 양과 소와 기름진 짐승들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들과 새끼 양들, 그 밖에 좋은 것들을 모두 아깝게 여겨 완전히 없애 버리지 않고,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없애 버렸습니다.(1사무 15,9) 사울의 이 행위에 예언자 사무엘은 크게 노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소리치면서 아말렉 임금 아각을 난도질해 죽여버립니다.(1사무 15, 23-35 참조) 그리고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예언자가 떠난 것은 하느님께서 떠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사울은 하느님께 버림받은 인간, 질투의 자아에 갇혀 방황하는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울은 세 번째로 엘라 골짜기에서 필리스타인들과 전투를 치릅니다. 다윗과 골리앗이 이 전투에 참전합니다. 18세 청년이던 다윗은 사무엘로부터 비밀리에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사무엘기 상권 마지막 부분(18─27장)은 다윗과 사울의 대립을 집중 조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후 이스라엘의 미래 왕으로 등장합니다. 다윗은 가는 곳마다 성공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사무 18,7)라며 다윗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은 사울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급기야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고, 다윗은 사울을 피해 적인 필리스타인 진영으로 망명했습니다. 사울의 네 번째 마지막 전투는 필리스타인 군대와 벌인 길보아 산 전투입니다. 길보아 산은 오늘날 제린(zerin)으로 불리는 이즈르엘 근처에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사울의 세 아들 요나탄과 아비나답, 말키수아가 전사합니다. 그리고 화살을 맞고 심하게 다친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어져 자결합니다. 왕을 잃은 이스라엘 군대는 크게 패했습니다. 필리스타인인들은 사울의 머리를 자르고 시신을 벳 산 성벽에 매달아 승리를 자축했습니다.(1사무 31장 참조) 사울이 하느님께 버림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은 순전히 그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사울은 하느님을 신뢰할 줄도,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 관계 안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이해할 줄도 몰랐다”고 평합니다. ‘불순종’과 ‘자만’이라는 근본적인 죄가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진단합니다. 따라서 성경학자들은 “하느님께서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한 사울의 행위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 결론짓습니다.(「성경 역사 지도」 89쪽 참조)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3.14

주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해 영원한 생명 얻는 세례[저는 믿나이다] (9)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세례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통해 인류의 죄를 대신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셨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한다. OSV 베드로 사도의 설교, 곧 첫 복음 선포로 3000명가량이 회심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날 세례를 받고 처음으로 교회 구성원이 된 이들은 지금처럼 가톨릭교회 교리를 철저히 배운 다음 입교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형으로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진실로 믿고 개종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부활 자체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불러일으킴을 증명합니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예수님 부활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입니다. 제자들의 부활 신앙이 예수님을 부활시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부활 신앙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선포, 곧 ‘케리그마(κῆρυγμα)’는 장정 3000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을 만큼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 선포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강림, 곧 성령을 받은 후 첫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기까지 40일간 지상에 머무셨고, 열흘 뒤 곧 주님 부활 이후 50일째 되는 날(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 20장 19-23절에 따르면 성령은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주님을 통해 제자들에게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성령 강림에 대한 요한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시점 차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사건들을 요약한 반면, 사도행전 저자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주님 부활과 승천, 성령 파견과 강림에 관한 사건들을 구원사적으로 발전시키고 전개시키면서 정확한 사실들을 전해주고자 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의 첫 복음 선포로 3000명이 세례를 받았고, 곧이어 장정만 5000명(사도 4,4), 또 수만 명이 믿음을 가져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인 교회가 급성장하는 것을 보여줍니다.(사도 21,20 참조)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모든 이도 ‘세례’를 통해서만 교회 안에 받아들여져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견진성사·성체성사와 함께 그리스도교 생활의 기초를 놓는 ‘입문’ 성사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세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을 여는 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세례는 물로써 그리고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사다. (⋯) 물에 ‘잠김’은 예비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묻힘을 상징하는데, 그는 그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사람’(2코린 5,17; 갈라 6,15)으로 나오게 된다. 이 성사는 또한 ‘성령에 의한 재생과 경신의 목욕’(티토 3,5)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사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을 의미하고, 이를 실제로 이루어 주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1214~1215항) 예수님의 공생활은 정확히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역사의 사건이며, 신화의 무시간성과 전혀 다른 실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세례’로 시작하십니다. 물속에 잠겨 물 밑으로 내려가면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며 새로 시작하겠다는 회심을 다짐합니다. 하느님께서 왜 이러한 행동을 하셔야 할까요?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답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당신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그 짐을 날라 요르단 강 속으로 가라앉히셨다. 그분의 첫 공생활은 바로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시는 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십자가를 미리 짊어지는 일이었다. (⋯) 예수님의 세례가 갖는 모든 의미, 곧 ‘모든 의로움’을 지고 가신다는 의미는 십자가에서 비로소 밝혀진다. 세례는 인류의 죄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 때 들려온 소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는 부활을 미리 알려주는 소리다. 그리하여 예수 자신의 말씀에서 세례라는 말은 곧 그분의 죽음을 표현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나자렛 예수 1」 48~49쪽) 그리스도인의 세례, 곧 교회의 세례성사도 주님 세례의 참 뜻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해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 새 생명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본성, 옛날 표현으로 ‘천주성’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죠. “세례받은 사람은 원죄와 모든 본죄를 용서받고, 성부의 양자,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이 되어 새롭게 태어난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몸인 교회와 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279항)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신문취재팀 이정훈2024.12.31

옹기 굽던 산골 교우촌 질가마는 ‘한국의 카타콤바’[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24. 옹기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수레질하는 옹기장이’, 유리건판, 1911년 4월, 갓등이 옹기 마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신앙 선조들의 옹기는 신앙 증거의 수단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일까? 아마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득 담아 그 말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그릇’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것도 숨구멍이 있어 생명이 살아 숨쉬는 ‘질그릇’일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예수 그리스도를 ‘질그릇에 담긴 보물’로 비유하지 않았는가!(2코린 4,7 참조)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질그릇은 ‘사람’과 닮았다. 인간 역시 하느님에 의해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쉽게 깨지는 한없이 미약한 존재이지만 더없이 사랑받고 널리 쓰이는 것이 질그릇과 사람의 닮은 꼴인듯하다. 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고온에 구우면 ‘오지그릇’이 된다. 된장이나 김치 등 발효 식품을 담아두는 갈색 빛깔의 독이 바로 오지그릇이다. 그리고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통칭해 ‘옹기’라고 부른다. 옹(甕, 瓮)은 우리말 ‘독’의 한자어다. 한국 천주교 박해사의 특징을 ‘옹기장이 신앙’이라 표현할 정도이니 옹기는 한국 천주교회사와 떼려야 뗄 수 없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이 땅의 천주교인들은 깊은 산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로 숨어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옹기나 숯을 팔아 목숨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 신앙 선조들은 옹기를 단순히 생계수단으로만 여기지 않고, 신앙 증거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십자가 모양의 넝쿨을 그리거나, 비둘기·포도나무 등을 무늬로 자신만의 신앙 고백을 옹기에 새겼다. 이 믿음의 표식으로 옹기는 단순히 음식이나 물건을 담는 용기가 아니라 하느님 보화를 담은 그릇으로 변화한다. 단순히 믿음의 표식이 새겨졌다고 해서가 아니다. 이 옹기들은 굽던 질가마 안에서 함께 기도하고, 성사를 고대하던 교우들 믿음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생활과 정신, 노동 안에서 실현함으로써 그 믿음을 완전한 사랑으로 변화시킨 신앙 선조들의 놀라운 힘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 때 그것이 사랑의 생활이 되고, 사랑의 행위가 된다는 것을 옹기에 새긴 작은 믿음의 표식으로 증거했다. 이 놀라운 신앙 선조들의 믿음의 삶이 오늘날까지 한국 교회의 바탕이 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과 염수정 추기경을 비롯한 무수한 그리스도인이 이런 옹기장이 신앙인의 후손들이다. 간혹 몇몇 성지에서 ‘한국의 카타콤바’라고 표현하는데, 개인적으로 한국의 카타콤바는 옹기를 굽던 산골 교우촌의 ‘질가마’라고 말하고 싶다.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옹기 제작’, 유리건판, 192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이엉으로 옹기 말리기’, 유리건판, 1911년 4월, 경기도 갓등이 옹기 마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곡식도 담고 오물도 담는 삶의 그릇 ‘옹기’ 이처럼 질가마에서 탄생한 것이 김수환 추기경의 ‘옹기 영성’이다.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옹기는 특별합니다. 오래된 옹기의 뚜껑을 열어보면 십자가 문양이 그려진 게 있습니다. 무자비한 박해를 피해 산으로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지켰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옹기는 먹는 것도 담지만 더러운 것도 담습니다. 곡식도 담고 오물도 담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그릇이었습니다. 오물조차 기꺼이 품어 안는 사람, 세상에는 옹기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소망을 담아 제 아호도 ‘옹기’로 정한 것입니다.”(김수환 추기경 말씀 중에서)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삶에서 활성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온전히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영성생활이다. 이 삶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뿐이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9)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4월 경기도 화성 갓등이성당을 방문해 옹기 마을 교우촌 일상을 사진에 담았다. 베버 총아빠스가 찾은 옹기 마을 교우촌은 갓등이성당에서 1시간 30분 거리에 있었다. 이곳 교우 150여 명의 조상들은 박해를 피해 이리저리 떠돌다 마침내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빈털터리로 쫓기던 박해 시절, 옹기 일은 그나마 안전한 작업이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 ‘더 좋은 흙과 땔감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서는 척하고 신속히 은신처를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그때도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깊은 신앙과 뜨거운 사랑은 식을 줄을 모른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50쪽)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옹기 만드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먼저 수레질이다.<사진 1> 한 교우가 돌림판 위에 점토 덩어리를 올려놓고 돌리면서 수레로 쳐서 모양을 만든다. “길이가 50㎝쯤 되고, 너비는 손바닥에 약간 못 미치는 판때기로 평평하게 두드리더니, 발로 돌림판을 잽싸게 돌리면서 튼튼한 나무칼로 점토를 둥글게 깎아 냈다. 그런 다음, 점토를 동그랗게 말아 가장자리에 민첩하게 쌓아 올리고는 부드러운 반죽으로 점토판과 이어 붙였다. 가장자리가 점점 높아지면 형태 없던 흙덩이가 산뜻한 옹기로 탈바꿈할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50~251쪽) 드디어 작은 항아리 하나가 빚어졌다.<사진 2> 장인은 만족한 듯 두 손을 떨군 채 자신이 빚은 항아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어느새 잔뜩 몰려든 교우촌 신자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아마도 항아리를 빚는 것보다 서양 신부가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왔을 것이다. “이제 표면도 매끈해졌고, 처음에는 곧추서서 투박했던 옹기가 바닥부터 제법 우아해졌다. 배는 볼록하고 아래위는 날렵했다. 옹기장이가 재빨리 손잡이를 붙이면 첫 공정이 성공적으로 완수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52쪽)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질가마’, 유리건판, 1911년 4월, 경기도 갓등이 옹기 마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5> 노르베르트 베버, ‘옹기 장수’, 유리건판, 1911년 4월, 경기도 갓등이 옹기 마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옹기 팔러가서 성직자·교우들과 연락 취해 성형된 옹기는 자연 건조 과정을 거친다. 이곳 교우들은 이엉을 엮어 그늘을 만들어 그 속에서 옹기를 말렸다.<사진 3> “옹기들이 천천히 건조되고 있다. (⋯) 방마다 짚을 깔아 두었다. 흙벽을 두껍게 쌓고 입구를 낮추어 옹기의 균열을 막는 데 필요한 냉기를 유지했다. (⋯) 이 어두운 방에서 몇 주 동안 건조된 옹기는 새로운 시련을 맞는다. 큼지막한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52~253쪽) 드디어 질가마에 불이 들어갔다.<사진 4> “마을 끝에 길이 25m, 너비 2.5m의 가마가 완만하게 경사진 둔덕으로 펼쳐져 있다. 둔덕은 약 15도 경사를 이루며 저수지로 이어진다. 가마의 긴 쪽에는 흙을 쌓아 열기를 보존했고, 윗부분은 진흙으로 덮어 아치형을 이루었다. 가마 아래쪽 끝에는 화덕을 만들어 열기가 가마 전체에 전달되도록 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53쪽) 가마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열기가 식자 교우들은 옹기를 조심스레 끄집어냈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들은 가차 없이 박살을 냈다. 제대로 된 옹기를 한가득 지게에 싣고 읍내로 내려간다.<사진 5> 장터로 가는 길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꽃이 얼굴에 피어오른다. 그는 읍내 장에 가서 옹기도 팔뿐더러 세간의 눈을 피해 성직자·교우들과 연락도 취한다. 그렇게 성직자를 만나 성사를 받고, 세상 돌아가는 정보도 수집해 교우촌으로 돌아온다. 옹기 덕에 목숨을 부지하고 기본적인 생활은 영위한 셈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5.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