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성전(聖傳)에 대해서 알려주세요하느님 말씀이 사도 계승을 통해 모범과 제도 등으로 전해지는 것교회가 성경과 함께 하느님 계시의 두 원천 가운데 하나라고 가르치는 성전(聖傳)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계시를 글로써 곧 문서로 전해주는 것을 성경이라고 하고, 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전하는 것을 성전(聖傳)이라고 합니다. 성전(聖傳)이란 거룩한 전통(傳統) 또는 거룩한 전승(傳承)이라는 뜻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75~100항)를 중심으로 성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봅니다. 하느님 계시('계시'에 대해서는 899호 2006년 12월 10일자를 참조하십시오)의 충만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라고 당신 친히 뽑으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이 명령을 두 가지 방식으로 실천했습니다. 하나는 말과 표양과 제도로 전달했고, 다른 하나는 문서로 기록한 것입니다. 구원의 소식을 문서로 기록한 것을 성경이라고 하고, 말과 표양과 제도로 전달하는 것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성전에 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분과 함께한 공생활에서 받은 것과 성령의 일깨우심으로 배운 것들을 설교와 모범과 제도로써 전달해 주었다"(76항). 성전에 관한 이 대목에서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도들은 무엇을 전했느냐는 것인데, ①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②그분과 함께한 공생활에서 받은 것 ③성령의 일깨움으로 배운 것입니다. 둘째, 사도들은 어떻게 전했느냐는 것인데, ①설교 ②모범과 ③제도를 통해서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교리(가르침)와 생활(의 표양)과 예배(전례)를 통해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도들은 누구에게 즉 어떤 경로로 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도들은 교회 안에 복음이 영구히 온전하게 또 생생하게 보존되도록 주교들을 후계자로 세워 자기 교도직(敎導職)의 자리를 넘겨주었다"(77항) 복음이 영구히 보존되도록 주교들을 후계자로 세워 교도직의 자리를 넘겨주는 것을 '사도 계승'이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지요(935호 9월 2일자 참조). 따라서 성전은 사도들에게 위탁된 하느님 말씀이 사도 계승을 통해 곧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통해 교회 안에서 설교와 모범과 제도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성전이 문서로 기록된 말씀인 성경과 함께 하느님 계시의 두 원천을 이룬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알아둡시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 계시의 두 원천 가운데 하나로서 성전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사도로부터 유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배운 것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또한 '사도 전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서 유래하는 성전과 달리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역교회에서 생겨난 신학적, 생활 규범적, 전례적 또는 신심에 관한 전통 또는 전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사도들에게서 유래하는 성전과 구별해서 교회 전승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전승들은 교회 교도권의 지도 아래 '성전'(사도 전승)에 비추어 보존되거나 수정되거나 폐기될 수 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83항). ◇한 가지 더 개신교에서는 성경만을 계시의 원천으로 인정하고 성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경에 비해 성전이 격이 떨어지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씌어지기 전에 사도들의 가르침과 체험과 증언, 곧 성전이 먼저 있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성경을 정경으로 인식하게 된 것도 성전을 통해서이고 성경이 더욱 깊이 이해되고 교회 안에서 힘을 발휘하게 된 것도 성전을 통해서입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계시헌장」 8항 참조). 그래서 교회는 성경과 성전에 대해 "똑같이 경건한 애정과 존경으로써 받아들이고 공경해야 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82항)고 가르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이창훈2007.09.12
[교회상식 교리상식- 113] 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죄란 이성과 진리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이다. 죄는 어떤 것에 대한 비뚤어진 애착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가 밝히는 죄의 정의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1846-1896항)를 중심으로 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봅니다. ◇죄란 무엇인가 성경은 하느님께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온갖 것을 지어내시고 사람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시고는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고 전합니다. 죄는 이렇게 "참 좋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침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래서 죄를 "영원한 법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위나 욕망"이라고 정의했지요.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죄는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자 "하느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나아가 죄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맞서며 우리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합니다. 이러한 죄는 인간의 본성에 상처를 입힐 뿐 아니라 인간의 연대성을 해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해치는 것입니다. ◇대죄와 소죄 죄는 그 경중에 따라 대죄(大罪, 죽을 죄)와 소죄(小罪, 용서받을 죄)로 나눕니다. 대죄(죽을 죄): 하느님의 법을 크게 어겨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생명 원리인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근본적으로 거스르고 파괴하는 죄를 말합니다. 예컨대 하느님을 모독하거나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근본적으로 어기는 것이 됩니다. 또 살인을 하거나 간통을 하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어기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죄가 대죄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나아가 어떤 죄가 대죄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첫째, 중대한 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둘째, 완전히 의식하며, 셋째, 고의로 저지를 때 대죄가 되는 것입니다. 중대한 문제란 십계명을 거스르는 죄를 말합니다. 그런데 십계명에도 경중이 있지요. 살인은 도둑질보다 더 무겁습니다. 폭력도 부모에게 행사한 폭력은 그 자체로 다른 사람에게 휘두른 폭력보다 더 무겁습니다. 완전히 의식한다는 것은 그 행위가 악하고 하느님의 법을 거스른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으면서 저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고의로 저지른 죄라는 것은 의도를 가지고 저지르는 죄를 가리킵니다. 똑같은 죄를 고의가 아니라 무지에서 지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줄어듭니다. 순간적으로 격한 감정이 일어나서 저지른 죄, 외부의 압력에 의해 또는 병적 장애에 의해 저지르는 죄도 책임이 줄어들 수 있지요. 하지만 악의를 가지고 고의로 짓는 죄는 가장 무거운 죄입니다. 대죄는 생명 원리인 사랑을 상실하게 하고 성화 은총을 박탈해 버립니다. 이 은총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기에 인간의 진실한 회개와 함께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드리는 성사 곧 고해성사를 통해서만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소죄(용서받을 죄) :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어기고 해치기는 하지만 그 사랑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 죄를 말합니다. 가벼운 문제에 대해 도덕률이 정한 기준을 지키지 않았거나 중대한 문제에 대해 도덕률을 어겼지만 완전히 의식하지 못했거나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긴 것이라면 소죄가 됩니다. 예를 들면 엉겁결에 거짓말을 했다거나 남의 일에 쓸데 없이 참견해서 화를 돋군다거나 또는 비웃음을 흘리는 행위 등은 소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소죄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기에 고해성사를 보지 않더라도 인간의 참회 행위를 통해서 속죄할 수 있습니다. 현세에서 살아가는 동안 소죄들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죄라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습관적으로 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소죄라 하더라도 자꾸 범하면 양심을 흐리게 하고 판단을 그르치게 해 악습을 형성하게 합니다. 다른 많은 죄를 만들면서 이런 악습들의 뿌리가 되는 죄를 죄종이라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죄종을 일곱가지로 구분해 왔는데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가 그것입니다. 죄는 개인이 짓는 것이기에 개인적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짓는 죄에 협력하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그 죄에 직접적이고 고의적으로 관여하는 일뿐 아니라, 그 죄를 명령하거나 권장하거나 칭찬하거나 승인하는 일, 그 죄를 알리거나 막아야 할 의무가 있을 때 그렇게 하지 않은 일, 그리고 그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편들거나 보호하는 일 등이 포함되지요.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이창훈2008.10.21
![[생명의 문화] 연예인 자살, 더 이상은 안 된다](//cpbc.co.kr/CMS/newspaper/2008/10/rc/269241_1.0_titleImage_1.jpg)
[생명의 문화] 연예인 자살, 더 이상은 안 된다애틋한 사연 미화하는 언론도 문제우 재 명 신부(서강대 신학대학원장ㆍ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 잇단 연예인들 자살 소식은 마치 가족의 한 사람을 잃은 듯 허망하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사람들은 연예인들을 TV매체를 통해 거의 매일같이 만나면서 정서적으로 가족보다 더 가까이 느끼고 있기에, 연예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가까운 이의 죽음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그들의 자살은 사회에 더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연예인 모방 자살로 추정되는 몇 건의 자살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방증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살의 해악성과 문제점을 보도하기 보다는 당사자의 애틋한 사정만을 들어 자살을 미화하려는 듯 한 언론의 태도는 문제라고 본다. 2005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한국사회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 당 26.1명으로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 수치는 10년 전인 1995년 인구 10만 명 당 자살률 11.8명에 비해 거의 2.2배 상승한 수치로, 한국 10대 사망원인 중 4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20-30대의 경우에는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이는 우리사회의 생명에 관한 의식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생명의 복음」(1995)에서 생명에 대한 결정을 개인의 정당한 자유 표현으로 보는 현대인들의 왜곡된 자유개념을 지적하고 있다. 생명을 '살아내어야 하는' 최우선의 체험이 아니라 단순히 '소유' 혹은 '거부'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은 결코 선택 대상이 아니다. 공자의 효경(孝經)을 보면,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불감훼상 효지시야(不敢毁傷 孝之始也)'라 해서 자신의 몸을 훼손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불효라고 하고 있다. 더욱이 가톨릭 신앙 안에서 생명은 '선물'로서, 내 공로로 인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 사랑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결정은 오로지 하느님에게 주어져 있는 신성불가침 영역이며, 인간에게는 선물로 주어진 생명을 잘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아름다운 꽃으로도 때릴 수 없는 귀한 존재이다. 옹기장이는 옹기를 만들 때 옹기 기능을 생각해 가장 적합한 흙을 찾는다. 마찬가지로, 옹기장이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지을 때 가장 적합하고 좋은 흙으로 정성껏 빚어 만드셨다(이사 45,7-13참조). 그렇기에 "너는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아사 43,3)이라고 하신다. 우리 각자는 진실로 하느님의 귀한 존재이다. 자살을 시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억울하다'는 것이다. 너무 억울해서 못살겠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시대의 욥도 너무 억울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왜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자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하느님은 욥에게 폭풍 중에 말씀하신다.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을 해 본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본 적이 있느냐?"(욥 38,13) 결국,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존재하며, 인간이 가장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고통 안에 하느님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욥은 알게 된다. 이제 고통은 지나가고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더 큰 상을 내려 보상하신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모든 악 중에 고통만이 살균 소독된 악이다. 고통은 다른 악들처럼 첫 번째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병 혹은 원수)이 여전히 작용해 재발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은 증식하는 성향이 없다. 고통이 끝나면 그것은 말 그대로 끝나는 것으로서,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기쁨이 뒤따라오게 되어 있다"(「고통의 문제」 중에서). 고통은 인간의 자아실현 과정에서 장애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장애를 피하지 않고 넘을 수 있다면 장애는 인격 성장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죽어야 할 이유만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만일 죽어야 할 이유만을 찾는다면 세상은 죽어야 할 이유로 넘치는 고해 바다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보라. 세상은 아름다운 가치로 넘치는 기쁨의 원천이다." 필자는 이 글에 동의한다. 자살은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영혼에 남겨진 숙제의 시작이다. 자살한 엄마를 찾는 아이가 '우리 엄마 살려 주세요'하고 외치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있지 않은가.cpbc2008.10.21
-문희상(바오로, 통합민주당)](//cpbc.co.kr/CMS/newspaper/2008/05/rc/249079_1.2_titleImage_1.jpg)
[제18대 총선 당선자에게 듣는다](5)-문희상(바오로, 통합민주당)국민 신뢰 얻는데 총력 기울여야 지하 감옥서 세례 받으며 감동의 눈물 정치, 믿음의 원리 깊이 생각하며 활동 신앙, 정치활동 원천ㆍ자양분으로 삼아 언젠가 문희상(바오로, 63, 의정부1동본당) 의원의 이른바 '똥물세례' 사연을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당사자를 만나 직접 들으니 그 감동이 몇 곱절 더하다.문희상 의원 1980년 5공화국 탄생 직전의 일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신군부의 합동수사본부 지하 감옥에 끌려간 문 의원은 연일 계속되는 구타와 고문에 심신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다. 그곳에서 신군부를 비판한 죄목으로 붙잡혀 들어온 서인석(전 서강대 총장, 2005년 선종) 신부를 만났다. 서 신부는 같은 처지였건만, 그가 고문을 받고 돌아오면 밤늦도록 기도해주면서 고난을 이겨낸 성경의 인물들 얘기를 들려줬다. 어느 정도 성경 지식이 있던 그는 세례를 받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감옥에 세례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서 신부는 한참 망설이더니 물이 있는 유일한 장소인 변기통으로 그를 데려갔다. 문 의원은 "그날 서 신부님과 나는 부둥켜안고 내 이마에 부어진 똥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며 "그 세례로 하느님을 알고 난 뒤부터 더 용감히 불의와 시련에 맞서 싸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번 총선에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끝에 966표차로 신승(辛勝)을 거뒀다. 그는 "개표 이튿날 시장에 갔더니 상인들이 우황청심환을 먹어가며 개표방송을 봤다고 아우성이었다"며 껄껄 웃더니 "4선까지 오는 동안 이번처럼 힘든 선거는 처음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참여정부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열린우린당 출신 중진이다. 포부에 앞서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부터 들어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선거결과에서 보듯 국민의 평가는 이미 내려졌다. 그러나 훗날 역사의 평가는 다를 것이다. 참여정부는 제왕적 대통령 시대를 마감하고, 정경유착의 부패고리를 과감하게 끊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ㆍ국정원ㆍ국세청 등 과거 통치수단으로 필요했던 칼(권력)을 모두 버리고 간다(직무를 수행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권위주의 청산이다." 그는 "그러나 명분이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도 국민과 함께 하지 않으면 실패한다"며 그 점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야당은 '수구세력과 언론 때문에'라는 탓을 거두고 '내 탓이오'라는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불신의 늪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2006년 지방선거 참패 뒤 역린(逆鱗, 임금의 분노를 이르는 말)을 무릅쓰고 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대통령의 말은 모든 가치체계의 총화여야 합니다. 의제의 시작이 아니라, 결론을 말씀하셔야 합니다. 논란의 출발점을 말씀하시기보다는 결정을 짓고 집행할 부분을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信]인데, 신(信)자가 사람(人)과 말씀(言)으로 이뤄진 원리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통합민주당이 획득한 81석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민심은 천심이다. 국민들이 싹은 살려 주셨다. 그것도 과거처럼 특정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경상도와 강원도 등 전국에 골고루 살려 놓으셨다. 81석은 버림받는 숫자가 아니라 의미와 기대가 충분한 숫자다.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살려 주신 것이다." 이어 "투표 전날에도 아내(김양수 안나)와 밤늦도록 기도하면서 '행여나 해야 할 몫이 남았거든 데려다 쓰십시오'라고 청하기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5년간 해야 할 일은 진정한 야당성(性)을 회복해 국민의 신뢰를 다시 얻는 것"이라며 "좌우 이념대립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이제부터 개혁적 실용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혁적 실용주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지, 벌써부터 한계와 부작용을 드러내는 현 정부의 실용노선이 아니다"고 분명히 구분했다. "정치현실과 신앙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스러울 때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인생관과 종교관, 정치관을 따로 떼어 생각해 본 적은 없다"며 "특히 가톨릭 사상은 진보적이고 자유롭기에 신앙은 내 정치활동의 원천이자 자양분"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는 지난 국회에서 가톨릭신도의원회 회장으로 봉사했다. 문 의원은 의정부 토박이다. 2006년 미스코리아 진 이하늬씨가 문 의원의 외조카다. 이하늬씨가 선거운동 때 의정부역 앞에서 "우리 삼촌은 외모와 달리 가슴이 뜨거우신 분"이라며 홍보지원에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cpbc2008.05.06
[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29-칠극(七克) 이야기(4)자신과 하느님 아는 것, 선의 시작과 끝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칠극」을 읽다보면 늘 만나게 되는 독특한 느낌들이 있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의 구수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편안함이다.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의 교리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소신학생 시절 영적 지도신부님의 훈화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게도 되며, 심지어는 한문을 가르쳐주셨던 여러 어르신들의 이야기들도 함께 어우러져 또 다른 세계를 여행하며 그것에 젖어 들어가는 행복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학자인 김승혜 수녀는 「칠극」의 특성으로 '지혜문학적 성격'을 지적하기도 한다. 판토하가 인용하는 많은 성경구절, 고대 문학의 가르침, 교부들의 말씀들은 대부분 지혜문학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동양 종교들의 지혜들도 함께 곁들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여튼 「칠극」은 '교만과 겸손'이라는 주제로 시작하면서 그것에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다. 이 주제가 수덕(修德)의 출발점이자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교만을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하고 나서, 경계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제시한다. 즉 세상의 행복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戒以形福傲), 마음의 덕을 자랑하는 것(戒以心德伐),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여기기를 좋아하는 것(戒好異), 명예를 좋아하는 것(戒好名), 선을 가장하여 명예를 낚으려는 것(戒詐善釣名), 예찬을 듣는 것(戒聽譽), 귀해지기를 좋아하는 것(戒好貴)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학 뿐 아니라 동양의 모든 종교들이 그 수덕과정에서 강조하는 것들도 바로 이런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것을 잊고 세속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 가치있는 삶인가 하는 문제요, 이러한 경향들은 모두 교만이 빚어내는 결과라는 것이다. 판토하는 교만을 극복하는 결정적인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을 알아 겸손을 지키는 것'(識己保謙)이다. 그리고 그것에 관한 핵심적인 설명으로 성 베르나르도의 말씀을 전해준다. "너희가 만약 두 가지 알아야 할 것을 지니고, 두 가지 알지 못하는 것에서 벗어난다면, 지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알면 겸손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은 모든 선(善)의 시작이다. 그리고 하느님(天主)을 알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은 모든 선의 마지막이다. 이것이 두 가지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므로 교만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모든 죄(罪)의 시작이다. 그리고 하느님(天主)을 알지 못하므로 하느님에게 바라거나,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것은 모든 악(惡)의 마지막이다. 이것이 두 가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爾持二知. 逃二不知. 則能成智. 知己則生謙爲衆善之始. 知天主故愛天主爲衆善之成. 此二知也. 不知己故生傲爲衆罪之始. 不知天主故無所畏望於天主爲衆惡之成. 此二不知也. 「七克」, '識己保謙'). 유학이라는 학문도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된다. 자신을 살피고, 가꾸고, 완성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이다. 그래서 유학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부른다.(「論語」 헌문편 25절 참조) 그리고 그 학문은 하늘의 뜻을 아는 지명(知命)에서 완성된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論語」라는 책도 '學而時習之'(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면)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不知命無以爲君子'(하늘의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로 끝나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 겸손은 모든 수덕과정을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덕행이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따른다면 '원리와 기초'가 되는 셈이다. 곰곰이 생각해보자.조은일2008.09.02
![[고전의 향기에 취하다]-(3)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cpbc.co.kr/CMS/newspaper/2009/03/rc/285821_1.0_titleImage_1.jpg)
[고전의 향기에 취하다]-(3)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시련의 밭에서 핀 양심과 사랑의 꽃, 주님 은총 햇살 가득 국내에선 하서출판사에서 번역 발간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 표지 이미지. "이 세상에 빈부 격차가 남아있고, 가난 때문에 사람들이 삶의 밑바닥에서 허덕이고, 굶주림으로 여자들이 몸을 팔고, 빛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어린 아이들이 위축돼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한, 이 소설은 오래도록 살아 있을 것이다." 문호 빅토르 위고는 총 10권에 이르는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서문을 통해 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오랜 생각을 털어놓는다. 이 빈부격차 문제는 이후 20, 21세기를 관통하는 전 세계적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 작품은 그래선지 일찍부터 「장 발장」 또는 「레 미제라블」이라는 표제로 국내에 소개돼 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쌉싸래한 감동을 주는 이 소설은 1862년 발표되자마자 전 세계로 번역돼 많은 독자를 확보했고, 성경의 뒤를 이었다고 할 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이 듬뿍 담긴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그 체취를 세밀하고도 밀도있게 묘사했다. 악에서 벗어나 자비로운 마음으로 선량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의 이면을 추적하는 심리 묘사는 마치 탐정소설과도 같은 묘미도 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사제나 수도자들의 삶 또한 읽은 이들로 하여금 끝모를 감동과 함께 심신의 정화를 불러 일으킨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중 대표주자인 위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레 미제라블」은 밑바닥 인생에서 허덕이는 비참한 서민들의 이야기다. 표제 그대로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허기진 가족과 어린 조카들을 보다 못한 한 청년이 가게에서 빵 하나를 훔친 죄로 19년간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하는데서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장 발장으로, 전과자에 더할 나위 없이 냉랭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하룻밤 쉴 곳조차 없이 방황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지치고 마음까지 거칠어진 그는 마지막으로 성당을 찾아가 하룻밤을 청한다. 미리엘 신부 사제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온 그는 앞길이 막막해 사제관에서 나올 때 은촛대 두 개를 훔친다. 때마침 성당 앞을 지나던 경찰이 그를 수상히 여겨 사제관으로 데려 간다. 미리엘 신부는 간밤에 잠을 자고 간 나그네가 촛대를 들고 경찰과 같이 온 정황을 눈치챈 뒤 웃으며 "왜 그것만 가지고 갔느냐? 여기 두 개도 내가 가져가라고 했으니 이것도 가지고 가라"며 나머지도 그에게 내어준다. 뜻밖에 온정어린 신부의 말에 장 발장은 그 순간 오래동안 잊었던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는 미리엘 신부의 따뜻한 온정에 돌연 한줄기 빛이 자기 머리 위에 비치는 것을 느낀다. 그 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속죄의 은총이 온몸으로 가득히 번지며 새롭게 태어난다. 그 순간 그는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고 180도로 전환시켜 주는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랑과 관용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수십 년 뒤 장 발장은 어느 해변 산업도시 공장 지대에서 이름을 마드랫으로 바꿔 일을 하며 성공한다. 성실과 정직으로 마침내 그는 공장 하나를 자영하기에 이르렀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일을 하고 종업원들에게 자비와 선한 마음으로 대하니 공장은 날로 번성하여 부를 누렸다. 장 발장은 그 부를 약자와 빈곤한 서민들을 위해 베풀었고, 자연스럽게 그는 그 일대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시장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장 발장을 시기심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며 감시하는 자가 나타난다. 쟈발이라는 경시관이었다. 정체불명 나그네의 출세에 의구심을 가진 그는 장 발장의 본색을 찾고자 혈안이 된다. 그 때 그의 공장에 환티눈이라는 여자가 일을 구하러 온다. 과거 매춘부였던 그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아이 하나를 데리고 나와 숨어다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를 안 쟈발 경시관은 그녀를 체포해 법원에 넘긴다. 장 발장은 법원에 출두해 환티눈을 변호해 구해내고 병든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켜 준다. 이에 쟈발 경시관은 분에 못이겨 마드랫의 원래의 이름이 장 발장이라는 것과 전과자라는 사실까지 알아내고, 법원에 고발한다. 때마침 한 절도범이 잡혀왔는데, 그의 이름이 장 발장으로 '동명이인'이었다. 장 발장에게는 뜻밖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였다. 사실을 이대로 묵인하면 자신은 영원히 원래 신분을 속인 채 살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장 발장의 양심에 미리엘 신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대신해 남을 희생시킬 수 없었던 장 발장은 고민 끝에 명예도, 부도 다 버리고 법정에 나가 자신이 19년 옥살이한 한 전과자라는 것을 고백하고 시장직에서 물러난다. 다시 전과를 속인 죄목으로 구속된 그는 옥살이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장 발장은 병원에 입원해 자기를 기다릴 환티눈이 가엾어 탈옥을 해 병원을 찾아간다. 한 수녀의 헌신적 간호를 받고 있던 환티눈은 자신의 어린 딸 고제트를 부탁하며 숨을 거둔다. 탈옥죄로 다시 체포된 그는 감옥으로 이송돼 옥살이를 한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환티눈이 부탁한 어린 딸이 걱정이 된 그는 재차 탈옥해 고제트를 찾아간다. 8살 고제트는 어른들의 학대와 혹사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에 장 발장은 고제트를 데리고 수도원으로 피신한다. 10년 세월이 지나자 장 발장은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아 고제트를 데리고 나온다. 장 발장의 사랑과 훈육으로 아름답게 성장한 고제트는 사회 개혁을 주장하면서 왕당에 도전하는 공화주의자 청년 마류스와 사랑에 빠진다. 장 발장은 사랑하는 고제트가 개혁의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사랑하는 고제트를 위해 참아야 했다. 그런데 마류스가 시위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입고 체포 직전에 이른다. 장 발장은 또 다시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기회에 봉착한다. 결국 그는 부상한 마류스를 등에 지고 파리 하수구로 피신해 허리까지 차오르는 하수구 물 속으로 들어가 왕당의 추격을 벗어나 고제트와 마류스를 혼인시킨다. 그리고서 장 발장은 두 사람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 그의 고백을 듣고 놀란 마류스는 그간 자신을 돌봐준 어르신이 오래 전 탈옥한 수배자라는 말을 듣고 크게 실망해 고제트를 데리고 장 발장 곁을 떠나버린다. 그들이 떠난 후 장 발장은 외롭고 심신이 쇠잔할 때로 쇠잔해져 몸져 눕고 만다. 한편 마류스는 장 발장의 진솔한 고백에 실망하고 떠난 것을 후회하고 다시 장 발장 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노쇠하고 병든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빈다. 하지만 장 발장은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며 산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주고 자신은 하느님 은총으로 행복했다고 털어놓으며 마류스 부부를 기도로 축복하고 눈을 감는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숨진 장 발장의 온화한 얼굴 위로 미리엘 신부의 은촛대가 찬란하게 비친다. 송원희(마리아, 소설가)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는 1802년 2월 프랑스 브장송에서 태어나 시와 희곡, 소설 등을 다작했다. 나폴레옹 휘하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주로 파리에서 살며 많은 작품을 썼다. 어릴 적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1817년 15살 때 아카데미 프랑세스 콩쿠르에 입상, 자신의 재능을 드러냈다. 이후 여러 권 시집과 환상소설, 희곡 등을 발표하며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초기엔 가톨릭적 색채가 농후했으나 훗날엔 점차 자유주의적 경향이 현저했다. 프랑스 의회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문학 외적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고,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항거하다가 영국으로 추방당해 19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이 시기 「레 미제라블」을 비롯해 「노틀담 파리」, 「바다의 노동자」, 「웃는 남자」(이상 소설), 「징벌」, 「명상시집」, 「세기의 전설」(이상 시집) 「성주」(희곡)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보불전쟁으로 몰락하자 다시 파리로 돌아와 1885년 5월 22일 향년 83살로 타계할 때까지 프랑스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사후 프랑스의 위대한 문인들과 함께 팡테옹에 묻힌 그의 작품에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 신뢰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에 대한 불 같은 정열이 깔려있다. 1985년 위고 서거 100주기를 맞아 파리 시민들이 "빅토르 위고는 우리 가슴에 아직도 살아있다"는 글귀를 가슴에 써 붙이고 행진을 벌이며 대대적 행사를 벌였을 만큼 위고는 존경을 받고 있다. cpbc2009.03.03
70- 원죄란 무엇인가요원죄란 무엇인가요? 또 원죄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원죄(原罪)는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명령을 거슬러 범한 죄로서, 그 영향이 단지 아담과 하와에게만 미치지 않고 전인류에게 미치는 죄를 말합니다. 원죄는 아담과 하와에게는 그들이 직접 '범한' 죄 곧 '행위'이지만, 그로 인해 후손에게까지 미치는 원죄는 죄스러운 '행위'가 아니라 죄스러운 '상태'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이하 교리서)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원죄에 대해 좀 더 알아봅니다. ◇원죄란 원죄 이야기를 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성경 대목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3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잘 관리하게 하시면서 다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 명령을 거슬러 그 나무 열매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났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땀을 흘려야 했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흙에서 빚어진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 곧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란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이자 또한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교리서 397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거슬러 범한 죄는 인간 본성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즉 인간은 원초적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상태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도록 창조되었지만 하느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인간 본성이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처받은 본성, 타락한 인간 본성이 인간 번식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한 아담과 하와의 죄를 원죄라고 부릅니다(교리서 404항 참조). 교회는 단 한 사람, 곧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원죄는 개인의 잘못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원죄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은 잃었지만 인간 본성이 온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인간 본성이 "손상돼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세력에 휘둘리며 죄에 기우는 것"입니다(교리서 405항). ◇원죄 교리의 이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을 짓누르는 엄청난 비참이나 죄와 죽음으로 기울어지는 인간의 경향"(교리서 403항)을 너나 없이 경험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본성적으로 지니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이 경향은 바로 원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안고 있는 이 원죄가 세례성사를 통해 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는 원죄에서 해방된 새로운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세례의 은총으로 원죄에서 깨끗하게 됐다고 해도 원죄의 결과 또는 상흔이라고 할 수 있는 악으로 기우는 경향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교리서는 이렇게 언급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은총의 생명을 줌으로써 원죄를 없애고 인간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지만, 약해지고 악으로 기우는 인간 본성에 미친 결과는 인간 안에 집요하게 남아서 영적인 싸움을 치르게 한다"(교리서 405항).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은 우리가 이 싸움에서 굴복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성경은 이렇게 밝힙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8-19). 이 성경 말씀은 원죄 교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원죄 교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면'(裏面)이라고 말할 수 있기"(교리서 389항) 때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원죄 교리는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러 범한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총이 그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다'(로마 5,20)는 성경 말씀은 큰 위안과 힘이 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이창훈2007.11.28
![[고전의 향기에 취하다]-(2) 월터 J. 취제크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cpbc.co.kr/CMS/newspaper/2009/02/rc/283090_1.0_titleImage_1.jpg)
[고전의 향기에 취하다]-(2) 월터 J. 취제크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동토 벼랑에서 건져올린 이름 '하느님'국내에선 바오로딸에서 번역, 두 권으로 출간된 월터 J. 취제크 신부의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With God In Russia)」 1ㆍ2권 표지. 신앙을 제재로 한 문학작품은, 우리가 볼 수 없고 감각하기 어려운 절대자의 존재, 그 섭리의 실체를 우리의 가시적 반경 내에 형상화함으로써 신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이로 하여금 현실적으로 느끼며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 소설 장르에서 가톨릭 쪽의 경우, 신부를 주인공으로 삼아 교의를 구현하려는 열의를 통해 일반인의 폭넓은 관심을 얻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널리 알려진 장편 몇 편이 그 예증이 된다. 베르나노스의 「어떤 시골신부의 일기」는 작은 마을에 부임해 타성에 젖고 교활함에 길들여진 인성의 벽 앞에서 무기력한 초상으로 주저앉는 앙브리꾸르 본당신부의 모습을 조명한다. 그레엄 그린의 「권력과 영광」은 좌파 혁명이 돌발하자 일시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나약한 위상으로 하루의 연명에 급급하는 위스키 신부를 그린다.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는 영국 해외 선교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돼 모진 시련을 겪고 초라한 외양으로 귀국한 치점 신부의 행로를 펼쳐 보인다. 이들 작품은 외관상 한결같이 패배자의 기록이라 할 만하고, 경우에 따라선 반교회적으로 오해될 만큼 사제의 그늘진 면과 교회의 일그러진 모서리, 이런 이야기 방식에 용해된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뜻'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행간에 가려진, 밑바닥에 흐르는 속내에 있어선 하느님의 사랑, 그 현존하심,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승리와 가톨리시즘의 본질을 구현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데 월터 J. 취제크의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With God In Russia)」(전 2권)는 소설과 유사한 화제를 담고 있지만 논픽션[手記]이므로 그 낱낱 장면은 모두 사실(fact)에 입각한다. 허구와 달리 이는 진상(reality)을 서술한다. 화자(話者)는 스탈린 강권 통치 아래 현세의 아수라도(阿修羅道)라 할 강제 노동수용소 진창구렁 속에서 살아 돌아왔다. 모두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까?"하고 묻게 마련이고, 그때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겠지요"하고 서슴없이 대답하는 문맥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님을 섬기면'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수기는 상식을 초월하는 놀라운 기록이다. 적어도 20세기에 있어 가톨릭교회의 개가로 손꼽을 만한 귀중한 성과라 하겠다. 미국 국적인 저자 취제크 신부는 신학생 시절 예수회에 입회, 로마 유학 중에 무신론이 팽배한 소련 선교를 위한 바티칸 정책에 따라 일단 폴란드로 간다. 한데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그가 사목하는 곳이 나치 독일 점령지가 되기에 이르렀고, 그 위기의 와중에 본래 목표대로 소련에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신분을 속인 채 전쟁 물자의 보고라 할 우랄산맥 지대 노동자 모집에 자원해 간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비밀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우랄에서 1년여에 걸쳐 신앙의 불씨를 일구던 중 체포당해 모스크바 정치범형무소 루비안카에서 오랜 심문과 취조를 받고는 예정된 코스대로 시베리아 강제노동에 수용되는 신세가 됐다. 그것도 최악이라 할, 북극에 가까운 혹독한 추위가 정신과 육체를 할퀴는 두딘카와 노릴스크로 말이다. 루비안카의 취조라 하면, 스탈린의 제거 대상이 된 볼셰비키의 혁혁한 노병들이 온갖 회유와 고문을 견뎌내다 종내엔 굴복하여 반국가 스파이라는 죄목에 사인을 한 후 처형장 이슬로 사라져 간 곳이다. 노릴스크는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는 게 기적이란 소문이 파다한 소련의 악명 높은 강제 노동수용소이다. 취제크 신부는 '바티칸 스파이'란 낙인이 찍혀 이런 험지에서 15년 형을 치르고, 석방 후에도 이른바 '제한 자유인'으로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귀환했다. 이런 행형 제도는 서방세계에선 얼마나 낯선가?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해 제정러시아 시대 시베리아 유형지 실상이 장편 「죽음의 집의 기록」을 통해서, 그리고 소비에트 치하에선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에 의해서 그곳의 반인륜적이며 잔혹한 노동 실태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됐다. 자국민의 픽션을 빌은 폭로에다 명예롭게도 외국 가톨릭 신부에 의한 논픽션이 가세한 셈이다. 취제크 신부는 불행 중 다행으로 몇 가지 의지할 것을 갖추고 있었다. 폴란드 이민 2세라는 점, 타고난 강건한 체력과 그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후천적 성향,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지켜주는 하느님 손길을 믿고 그분의 의중에 여일하게 감사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는 어떤 극난의 처지에 있을 때에도 기도에 소홀하지 않았고, 그 기도의 힘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임을 잊지 않았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반영에 다름 아니다. 노릴스크 수용소의 벽돌공장에서 수인들이 처우 개선이라는 요구사항을 내걸고 사보타지(태업)를 해서 경비대와 대치하며 죽음의 항거를 할 때였다. 그는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견디기 어려운 자기 연민과 고독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절체절명의 찰나에 솟구쳤던 생각을 그는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반문했다. "정말 하느님도 너를 잊으셨다고 생각하는가?… 바로 그 순간 나는 하느님 뜻을 완전히 믿는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확고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수기가 20세기에 있어 가톨릭교회의 개가라는 긍지는 도처의 국면들이 보증한다. 첫째, 세계가 공산주의 블록으로 인해 반분돼 냉전시대에 접어들자 보편교회인 가톨릭은 종교의 싹이 잘린 그 블록, 특히 종주국인 소련에 복음을 비춰야 한다는 사명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역대 교황은 얼마나 노심초사했으며, 전 세계 가톨릭 공동체는 러시아를 위해 얼마나 많이 기도 지향을 두고 적극적으로 기도 캠페인을 펼쳐왔던가? 둘째, 이 사명에 따라 다수 성직자가 그곳 수용소에서 선교에 매진하며 모진 고초와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취제크 신부는 그 일원으로, 주로 폴란드인과 독일인, 리투아니아인 등을 대상으로 한 라틴 전례는 물론, 잠입하기 전에 교육받은 동방 전례로 정교회 신앙에 목마른 러시아인을 비롯한 슬라브 민족에게 미사를 드리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이럴진대 이 책이 동토에도 하느님 빛이 면면히 비쳐졌다는 확고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밖에도 이 수기 자체의 문학적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편견이나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 힘찬 메시지, 그리고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진정성이야말로 이 논픽션의 문학적 요체다. 이 진정성은, 기차간에서 호송장교가 떨어뜨려 의자 밑으로 굴러들어간 빵조각을 호송병 몰래, 애면글면 애타게 손에 넣어 목구멍으로 꿀컥 삼키는, 굶주린 짐승의 경계에서 충분히 일별된다. 이 경우, 비루함도 한낱 인간적 슬픔으로 카타르시스가 되기에 한껏 순연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신중신(시인, 전 한국가톨릭문인회장) ▨월터 J. 취제크(Walter J. Ciszek)는 폴란드계로 190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출생했다. 신학교에 재학 중 예수회에 입회한 뒤 1934년에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 유학, 이태 후에 사제품을 받고는 러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폴란드에 건너갔다. 1940년 봄, 위장 이주노동자로 소련 잠입에 성공했으나 곧 체포당해 장기 취조를 받고 15년간 노동형 언도를 받았다. 부틸카 수용소에 수감생활을 하다가 시베리아 강제 노동수용소로 이감됐다. 노동 조건이 가장 험난한 곳에서 극한의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내며 석탄 수송과 탄광, 구리공장, 각종 노동현장 등을 전전하다 마침내 형기를 끝내고 '제한 자유인'으로 노릴스크와 아바칸에서 거주하며 선교활동을 수행했다. 러시아에 체류한 지 23년 만에, 미국과 소련 간에 각각 2명씩 인적 교환이 성립되어 1963년 귀환했으며 1984년 선종했다. cpbc2009.02.10

예수 부활의 의미와 부활시기 전례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이다. 예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부수고 구원의 희망을 심어준 것이 예수 부활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부활을 가장 성대하게 경축하며 기념한다.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아 부활 교리의 주요 내용과 의미, 그리고 부활시기에 대해 알아본다. ▨예수 부활 ▲역사적이면서도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 사전적 의미의 '부활'(復活)은 유한한 존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즉 다시 살아났지만 또 다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생명으로의 복귀다. 그러나 예수 부활은 죽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요한 11장)과 같은 재생(再生)이 아니다. 예수는 결코 다시 죽지 않는 완전한 생명으로 살아난 것이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교회는 부활이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믿음으로 도달할 수 있는 '신비'라고 가르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부활이 역사적 신빙성이 전혀 없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 곳곳에서 발견되는 제자들의 굳센 부활 신앙이 그 증거다. 세상을 구원해줄 위대한 스승으로 믿었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자 제자들은 제 목숨 구하기에 바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한 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부활을 증언하면서 교회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이라고 고백한다.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증언들이 있지만 예수 부활 사건 자체를 목격한 사람은 없다. 게다가 부활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확인할 길도 없을 뿐더러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 곧 하느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 부활은 과학적 진리라기보다는 신앙의 대상이 된다.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신 분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이다. ▲부활의 의미 예수 부활은 그분이 생전에 하신 말씀과 행업이 옳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이다. 즉 부활 사건은 예수께서 구약에서 예고된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증해 준다. 교회는 또 "예수께서는 당신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해주시고, 당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다"고 가르친다. 예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그분 은총에 힘입어 새로운 생명을 얻어 살아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요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그분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14.20)라고 말했다. 교회는 아울러 예수 부활이 2000여년 전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부활한 예수는 지금도 살아 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를 21세기에 만나는 것은 그 옛날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어떻게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자신의 신앙공동체와 가정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예수는 분명히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말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부활한 예수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신앙의 눈을 떠야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빵을 같이 나눈 다음에야 비로소 눈이 열려 부활한 예수를 알아본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루가 24,13-35)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성경 말씀과 성찬 전례를 통해 언제든 만남이 가능하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느끼거나 성체를 모시면서 지극한 예수의 사랑을 느꼈다면 그 안에 살아있는 예수를 만난 것과 같다. 또한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눌 때도 예수를 만날 수 있다(마태 25,31-46). 자신의 몸과 피를 내놓은 예수를 본받아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할 때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만날 수 있고, 또 사랑을 받는 이웃도 우리를 통해 예수를 알아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단순히 2000여년 전에 일어났던 하나의 사건을 되새기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기 위함이다. ▨부활시기 교회는 특별히 예수부활 대축일부터 성령강림 대축일까지 50일간을 부활시기로 경축한다. 예수성탄 대축일은 12월 25일로 정해져 있지만 예수부활 대축일은 해마다 날짜가 다르다. 예수부활 대축일은 춘분(3월 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후 맞는 첫번째 주일에 지낸다. 올해는 3월 21일 이후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이 3월 22일(음력 2월 15일)이어서 바로 그 다음 주일인 3월 23일이 예수부활 대축일이 된다. 교회는 부활시기 50일 동안 매일매일을 부활 축제를 지내듯이 기쁘게 지내도록 권고하지만 특별히 부활시기 첫 8일간을 대축일처럼 지낸다. 이를 '부활8일 축제'라고 부르는데 부활의 기쁨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부활시기 전례의 가장 큰 특징은 기쁨과 찬미이다. 그래서 사순시기에 금했던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을 다시 노래하며, 미사 때마다 부활 초를 밝힌다. 사제 제의는 기쁨을 나타내는 백색으로 바뀌며, 삼종기도도 부활삼종기도를 바친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부활 제2주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 자비의 사도'라 불리던 파우스티나 수녀를 새 천년기 첫 성인으로 시성하면서 이날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제정했다. 교황은 전쟁과 폭력, 살인, 기아, 낙태 등 세계 전역에 만연돼 있는 반(反)생명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사랑과 용서를 전제로 한 자비뿐이라면서 이 땅의 평화를 위해 '한결같은 사랑으로 인간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할 것을 권고했다. ▲성소 주일(부활 제4주일)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리는 부활 제4주일은 특별히 사제와 수도자, 선교 성소 증진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성소주일이다. 성소주일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제정됐다. ▲주님 승천 대축일(부활 제7주일) 부활한 예수는 40일간 지상에 머물면서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친 후 하늘에 올랐다는 성경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념하는 대축일이다. 부활 제7주일은 또한 홍보주일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승천하기에 앞서 사도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당부한 것을 새기고, 특별히 현대의 다양한 홍보매체들을 복음선포에 적극 활용하는 한편 홍보매체들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날이다. ▲성령 강림 대축일 교회는 부활시기 마지막 날에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낸다. 이 날은 예수께서 부활한 후 50일(오순절)이 되던 날에 사도들에게 성령을 보낸 것을 기념하는 날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부활시기가 성령강림 대축일로 끝난다는 것은 성령강림으로 인류 구원의 신비가 완성되고, 이 신비가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를 통해 역사의 종말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활시기를 지내는 신앙인은 부활의 기쁨을 경축하면서 부활의 신비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오도록, 즉 구원이 완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희망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남정률2008.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