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6주일- 예수님의 충격 선언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너무나도 충격적인 예수님 말씀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자기들보다도 먼저 세리와 창녀들이 천국에 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혁명적 말씀이었지요. 왜 그렇게 된다는 말씀일까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끝내 그 답을 찾지 못해 멸망의 길을 가고 말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충격 선언을 들은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칠 줄은 모르고 남의 잘못만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외쳤고, 예수님이 가르쳤지만 정작 자기의 길을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행동으로 보인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들이었지요. 포도원을 경작하는 농부가 있었는데 그 농부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일이 아주 바빴던가 봅니다. 농부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 21,28)고 청합니다. 이 말에 첫째 아들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싫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아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아버지가 굉장히 실망을 했겠지요? 그리고 거기에 생각이 미친 맏아들은 곧 뉘우치고 일하러 갑니다. 맏아들에게 거절당한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똑같이 일을 시킵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요한 21,28). 그러자 둘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마태 21,30)하고 대답은 합니다. 하지만 대답만 하고 아버지의 일은 아랑곳없이 곧 다른 곳으로 놀러가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성경 안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선뜻 "맏아들입니다"(마태 21,31)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대답만 하고 따르지 않은 아들보다는 뉘우치고 밭에 간 아들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이라는 데에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곧 명확해집니다. 과거에 잘못된 삶을 살았더라도 반성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대답만 잘 하고 행동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부부가 차에 기름을 넣으려고 한 주유소에 들어갔습니다. 기름을 넣는 동안 주유소 직원이 다가와 차 앞 유리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기름이 거의 채워지고 유리가 거의 닦아질 무렵 남편이 주유소 직원을 불러 세웠습니다. "유리가 잘 닦이지 않았네요. 다시 한 번 잘 닦아주세요."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열심히 유리를 닦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남편은 직원을 불러 소리쳤습니다. "잘 좀 닦아보세요. 유리가 전혀 닦이지 않았잖아요." 직원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차 유리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닦이지 않는다고 화가 난 남편은 차 문을 열며 곧 뛰쳐나갈 태세였지요. 이때 옆에 있던 부인이 남편의 안경을 빼서 닦아주었습니다. 순간 남편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더러웠던 것은 차 유리가 아니라 자기 안경알이었던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며 남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사람보다는 과거에 잘못된 길을 걸었더라도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이 하느님께 더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의 탓을 하지 말고 자기를 닦아야 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내 눈에 남의 잘못들만 보인다는 것은 내 안에 나쁜 것이 있다는 증거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으로 나를 정화하고 상대방의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 어떠한 지식보다도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는 말씀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조은일2008.09.23
![[출판/신간]'새감 행복 영성 시리즈' 6권 출간](//cpbc.co.kr/CMS/newspaper/2008/06/rc/254204_1.0_titleImage_1.jpg)
[출판/신간]'새감 행복 영성 시리즈' 6권 출간윤을수 신부 "오늘은 요한 사도 축일. 아침미사에서 언제나 그랬듯 오늘도 노인이 가지는 생의 지혜를 전해 주려고 한다. 이렇게 30년이 흘렀지만, 나의 주의는 더욱 굳어만 가니 스승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다른 길이 없다. 인도(人道)는 천도(天道), 그리고 인도는 경천애인(敬天愛人), '서로 사랑하라'"(유고집,27). 인보성체수도회 설립자 윤을수(1907~71, 사진) 신부의 영성을 축약한 소책자 6권이 한꺼번에 출간됐다. 4ㆍ6판(12.8×18.8㎝) 크기로 나온 '새감행복영성' 시리즈다. 새감은 윤 신부의 아호로, '새[乙]가 물가[洙]에 감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새감행복영성 시리즈 발간은 지난해 윤 신부의 영성이 담긴 말 가운데 365개를 가려 매일 묵상용 책상달력을 발행한 게 계기였다. 독자들에게서 '그 말을 손가방에 넣어 들고 다니며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하도 많이 들어 윤 신부의 어록을 내기에 이르렀다. 말의 문맥을 살리되 외연을 넓혀 발췌하고 20여 개 큰 주제로 나눈 뒤 이를 다시 5개의 굵직한 가르침으로 묶어 총 5권을 냈고, 윤 신부의 역서인 「그리스도를 따라」(청소년용 「준주성범」, 경향잡지사)에 나오는 묵상자료를 가려 나머지 한 권을 묶었다. 제1권 「한없는 사랑의 손길이」에선 행복영성의 기초가 되는 윤 신부의 말을 엮었고, 제2권 「성체의 뜻은 인보(隣保)」에선 행복영성의 기본 정신을 이루는 말을 주로 묶었다. 제3권 「마음바르게 부지런히」에선 인보정신을 살아가는 구체적 방법과 그 방법을 닦아 나가는 법을 위주로 엮었고, 제4권 「그리스도의 참 제자 되어」에선 공동생활의 열매인 지혜와 인내, 감사에 관한 말과 공동체 생활을 재미있게 적극적으로 사는 법, 복음적 청빈의 삶과 자발적 순명에 대한 말로 참 그리스도의 제자됨에 관한 가르침을 엮었다. 제5권 「넘치는 행복을 이웃에게」에선 인보 정신을 마음 바르게 부지런히 살아가는 사람에게 맺어지는 열매인 행복을 나에게서 시작해 이웃에게 흘려주는 삶에 대한 말을 중심으로 엮었다. 제6권 「하느님과 함께 사는 법」은 내적 생활과 관상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인지 성경을 기반으로 확실히 깨우쳐주고 그리스도의 참 제자됨이 이 세상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구체적 삶의 상황 안에서 쉽게 설명해준다.(가톨릭출판사/각권 2000~3500원)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08.06.17
[근로자의 날] 노동에 관한 교회 가르침노동은 의무인 동시에 성화의 수단…누구든지 취업에 차별 받아선 안돼5월 1일은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 의욕을 높이고자 제정된 근로자의 날이다. 가톨릭교회가 산업혁명기 이후 거대한 자본의 힘에 짓눌려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던 근로자들, 다른 말로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앞장서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진 여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 또한 적지 않다. 비정규직이나 이주 노동자들이 대표적 경우다. 아예 노동의 대열에도 끼지 못하는 실업자는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권리이자 의무인 노동에 대해 교회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까. ▨노동의 의미와 가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에게 노동은 하기 싫은 것,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짐이다. 물론 노동은 인간의 의무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노동은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게 하면서 자신을 성스럽게 하고, 나아가 세상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봐도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시고 나자렛에서 보내신 여러 해 동안 비천한 일을 하심으로써 가정과 노동의 일상 생활 안에서 거룩함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64항).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2테살 3,10)는 성경 말씀처럼 노동은 하나의 의무인 동시에 선물과 재능을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노동은 성화의 한 수단일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정신을 세상사들 안에 불어넣는 방법일 수도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27항) 교회는 또 인간 중심의 노동을 강조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는 성경 말씀(마르 2,27)과 같은 맥락이다. 「노동하는 인간」(6항)은 "노동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그 일의 주체이며 목적인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고 명시했다. ▨노동자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과 탁월한 인간 존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간추린 사회교리」 301항은 노동자들이 보장받아야 할 권리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정당한 임금에 관한 권리 △휴식의 권리 △노동자들의 신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끼치지 않는 노동과 작업 과정에 관한 권리 △자신의 양심과 존엄성이 모독을 받지 않고 일터에서 자신의 인격을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 △실직 노동자들과 그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적절한 보조금에 대한 권리 △연금에 대한 권리 △노후와 질병, 직업 관련 사고에 대비한 보험에 대한 권리 △출산과 관련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집회 결사의 권리 등이다. 직업을 가질 권리 또한 가톨릭교회가 매우 중요시하는 권리이다. 특별히 취업에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데 초점을 뒀다. "취업과 직업은 남자와 여자, 심신이 건강한 사람과 장애인, 원주민과 이주민에게 모두 한결같이 부당한 차별 없이 허용돼야 한다(「노동하는 인간」 19항). "상황에 따라서 사회는 나름대로 시민들이 일자리와 직업을 얻도록 도와줘야 한다"(「백주년」 48항). ▨노동조합과 파업 교회가 특정 직종에 있는 노동자들 권리와 사회 정의를 증진하고자 노력하는 노동조합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노동조합의 투쟁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투쟁이 아니라 정당한 선을 위한 정당한 노력이어야 한다는 것이 교회 가르침(「노동하는 인간」 20항)이다. 아울러 「간추린 사회교리」 306항은 △연대와 정의의 도구인 노동조합이 투쟁의 도구를 남용해서는 안되며 △노동조합의 존재 이유 때문에 노동조합은 모든 노동자가 조합원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자율성을 갖추고 조합의 결정이 공동선에 미칠 영향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파업도 교회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파업이 필수적 수단으로 나타날 때에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인식에서다. 다만 파업이 폭력을 수반하거나 근로 조건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목적 또는 공동선에 어긋나는 목적을 내걸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35항).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cpbc2008.04.23
[기도맛들이기]-거룩한 독서(5) 말씀 통해 하느님이 나를 읽도록이연학 신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마리아 어머니, 지난주에 이어 '듣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흔히 우리 편에서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듣는 것이야말로 기도의 결정적 요소라는 사실은 잘 깨닫지 못하는 듯합니다. 이것은 듣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관계나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듣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요. 성경 읽기가 곧바로 기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읽기'가 사실은 '듣기'이기 때문입니다. 듣는다함은 우선 상대방이 내 앞에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주도권은 말씀하시는 하느님께서 쥐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독서는 내가 주체가 되어 성경을 읽는 것이라기보다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분의 현존 앞에 머무는 일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다기보다는, 거기 기록된 말씀이 내 내면을 '읽으실'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는 일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유다교 랍비 전통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하나가 의미심장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온 제자가 어느날 스승께 여쭈었다고 합니다. "스승님, 제가 토라를 일곱 번 꿰뚫어 읽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스승은 "그렇다면 토라는 너를 몇 번 꿰뚫어 읽었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룩한 독서를 하는 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체험 하나를 잘 전해줍니다. 즉, 기도하며 성경을 읽다보면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내가 '읽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읽는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눈이 내 인생 전부를 읽고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내가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는 순간은, 성경을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 말씀이 나를 해석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해야 합니다(히브 4,12 참조). 어떤 분의 현존 앞에서 이렇게 선후(先後)가 뒤바뀌고 주객(主客)이 뒤집어지는 체험(요한 15,16 참조)… 이것이 거룩한 독서를 포함해 모든 형태의 그리스도인 기도에서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이 지점이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 시선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기도 문은 열리기도 하고 반대로 닫히기도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을 까다롭고 깐깐한 '채점자' 혹은 심판자라고 느낄 때 우리 마음은 굳어지고 닫힙니다. 그분 앞에 나를 있는 그대로 펼쳐 놓기가 두려워지고, 절로 스스로를 변명하거나 합리화하는 마음이 되기 십상입니다. 마음 깊은 곳을 그분께 열어드리지 못하기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의지력이나 테크닉에 더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피상적 독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자동차 기어가 중립에 가 있을 때에는 가속 페달을 아무리 세게 밟아도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경우와도 비슷합니다. 이 경우 기도는 피곤하기만 하고, 기쁨이 아니라 짜증과 지루함으로 점철된 '극기훈련'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 시선이 근본적으로 따뜻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자비와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비로소 우리는 안심하고 영혼의 옷을 벗게 됩니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노래의 한 소절처럼 말입니다. "너의 사랑 앞에 나는 옷을 벗었다, 거짓의 옷을 벗어 버렸다."cpbc2007.08.29

가톨릭과 개신교에 대한 오해들성전은 성경과 함께 교회에 맡겨진 유산교황청과 세계교회협의회는 성 베드로 사도가 로마 주교좌를 설정한 1월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 개종 축일인 1월25일까지 그리스도인 일치기도 주간으로 정하고 1968년 이후로 매년 기도운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한국 그리스도교 교단 대표들이 갈라진 형제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WCC) 소속 교단들은 매년 성 베드로 사도의 로마 주교좌 설정일인 1월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 개종축일인 25일까지 한 주간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일치주간을 맞아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이 양 교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을 한국 교회 일치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송용민(인천가톨릭대 교수) 신부와 채수일(한신대 선교학 교수) 목사를 통해 들어보았다. ------------------------------------------------------------------------------------------------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 교회에 갖고 있는 오해 10가지> ▲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된 이단적 교회다." 개신교 신자 가운데 상당수는 가톨릭이 비성경적인 것들을 진리에 첨가해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왜곡하고 있다고 여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맡겨 주신 것을 성령의 감도를 받아 설교와 글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까지 모든 세대에 전달했다. 그래서 가톨릭은 "성전(聖傳)과 성경은 교회에 맡겨진 하느님 말씀의 유일한 성스러운 유산을 형성한다"(「계시헌장」 10항)고 고백한다. ▲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 '오직 하느님 은총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개신교 신자들은 '개인적 선업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톨릭 태도에 대해 비판한다. 이는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 은총의 절대성과 인간의 행업 협력에 대한 거부에서 오는 오해이다. 가톨릭은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화되며, 인간은 자유로이 은총에 협력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고 성상에 절하는 우상숭배 교회다." 개신교는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와 성인 공경에 대해 성경의 전거를 두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내용에 따라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 그리스도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이단적 처신이라고 비판한다. 마리아의 동정성, 원죄없이 잉태된 자, 승천 교리는 성경과 초대 교회의 성전을 통해 입증된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의 자아의식에 내포돼 있던 것으로 완전하게 구원된 하느님의 어머니로서는 죄의 물듦이 없어야 하고, 평생을 거쳐 동정의 순결함을 유지하고, 육신까지 온전히 구원받으셨다는 신앙의 당위성에서 나온 결과이다. ▲ "가톨릭 신자들은 성경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성경 외의 교회 전승과 교도권의 가르침을 더 중요시 한다." 개신교는 가톨릭이 계시의 원천으로 성경과 성전으로 동등하게 두는 것을 비판한다. 이는 성경 해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가톨릭은 "성경은 신앙의 증언이자, 전승된 교회 신앙의 표현이며, 인간의 언어로 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개신교는 성경과 교회 전승의 상보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인정하여 교황에 이어 주교, 신부들의 성직자들에 의해 통치되는 계급적 종교다." 가톨릭의 교계제도에 대한 개신교의 비판이다. 교도권은 복음을 선포하는 임무를 유권적으로 이행하는 권한으로 결코 하느님 말씀보다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황 수위권 역시 교회 신앙 일치의 표징으로 이해해야 한다. ▲ "스스로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하고, 교회법으로 운영되는 율법적 교회다." 개신교가 가톨릭이 배타적 구원관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법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회라고 비난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하지만 가톨릭은 교회 밖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웃 종교와의 대화와 교회 일치를 위해 협력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법은 볼 수 있는 제도교회 유지를 위한 가장 기본적 신앙인의 삶의 기준과 척도를 제시하는 것이다. 아울러 지역 교회의 자치 구조와 독립성은 교회가 율법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 "빵과 포도주가 사제 축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믿는다. 또 영성체를 가톨릭 신자로 국한해 교회 일치에 장애가 되고 있다." 개신교는 성찬례를 성사가 아닌 상징으로만 이해한다. 가톨릭은 성체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인격적 현존를 믿는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을 위한 성체성사에 대한 개신교의 전이해와 체험적 선구조가 없이는 성체를 공동으로 영하는 행위가 일치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 "죄의 용서는 하느님께만 유보된 권한이지 가톨릭 사제가 신자들의 죄를 용서해 줄 권한은 없다." 사제의 사죄권에 대한 비판이다. 고해성사는 죄의 용서라는 관점보다는 치유와 화해의 의미에서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화해의 직무를 맡기셨고(요한 20, 23) 그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주교들의 협력자인 사제들이 이 직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다. ▲ "혼인에 대해 지나치게 교회법을 강조, 이혼을 금지하거나, 이혼을 합법화 하기 위해 혼인무효라는 제도를 뒀다." 개신교는 혼인은 교회가 관여해야 할 신법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연법적 영역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톨릭은 '혼인은 자녀출산과 부부애를 통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친밀한 일치를 표현해 내는 성사적 의미'로 이해한다. ▲ "교회 분열의 원인은 가톨릭 교회가 중세에 면죄부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교리 해석의 논쟁과 차이가 교회 분열의 직접 원인은 아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면죄부를 발행한 것이 아니라, 죄의 용서에 따른 보속 행위의 일부로서 '대사부'를 발행한 것이다. 교회 일치적 차원에서 교회 분열을 진리에 대한 상호 이단적 배격의 입장에서라기 보다는 영성적 의미로 재해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에 갖는 오해들> ▲ "목사도 사제다." 가톨릭 신자 상당수가 개신교 교역자를 '사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정말 오해다. 이 오해의 배경에는 '예배'와 '주교직'에 대한 이해 차이에서 나왔다. 물론 개신교 교역자도 안수례를 받은 직제이다. 하지만 가톨릭의 사제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가톨릭 사제직이 '주교품'과 위계적으로 결합돼 있다는 것이다. 또 가톨릭은 미사를 예수의 십자가상의 희생을 재현하고 그 효력이 미사를 통해 분배된다고 이해하지만, 개신교는 성찬의 식사적 성격만을 강조하려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신교 교역자들은 자신을 사제로 이해하지 않는다. ▲ "그리스도와 연결이 끊어진 교회다." 가톨릭 신자들 중 상당 수는 개신교가 그리스도와 연결이 끊어진 교회라고 생각한다. 개신교는 사죄권이 없어 고해성사가 없는 것이 그 표징이라고 말한다. 사죄의 주관적 확신보다 사죄의 객관적 확증을 강조하는 이런 입장은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 이것이 곧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연관성 유무에서 오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개신교가 그리스도와의 직접적 관련성을 강조하는 것은 종교개혁 정신, 곧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서'라는 주장을 근거로 한다. 사제나 교회의 중재적 역할 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직접적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사도적 계승을 근거로 개신교가 그리스도와 직접적 연관성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 "성만찬은 구원의 필수 조건이다." 성만찬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논란은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문제다. 그래도 개신교가 가톨릭의 성체성사를 '우상숭배'로 비난하거나, 가톨릭이 개신교 성찬식을 주관적 '신심행사'라고만 보지는 않게 됐다는 것은 중요한 진전이다. 지금까지도 개신교와 가톨릭을 갈라놓는 근본적 차이점이 세 가지 정도 남아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성체 안에 현존한다는 점은 개신교나 가톨릭이 모두 수용하지만, '어떻게'현존하느냐에 대한 교리적 차이가 그것이다. 둘째는 제사로서의 미사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대립이다. 셋째, 가톨릭은 사제로 수품된 사람만이 성체성사를 주례할 수 있다고 보며, '유효하게 서품된 공직자가 없이 거행되는 개신교의 만찬례를 완전히 유효한 성체성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차이다. ▲ "교파 분열은 개신교의 본질이다." 물론 종교개혁 전통에서 출발한 대부분의 개신교회의 특징은 분열에 있다. 종교개혁 자체가 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논쟁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이런 분열에도 불구하고 일치에 대한 꿈과 시도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분열과 마찬가지로 일치에 대한 의지는 종교개혁 당시에도 이미 있었다. 리길재 기자cpbc2007.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