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가르침으로 본 부동산과 재화사유재산권 인정하지만 독점적 배타적 사용엔 우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레위 25, 23).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이 말씀에 우리나라 '땅 부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구약의 율법과 부동산 불패신화와의 괴리가 너무 커서 대꾸 가치를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른다. 얼마 전 새 정부 내각 인사 청문회에서도 부동산 불패신화의 단면이 드러났다. 국민들은 '강부자(강남 땅부자)' '강금실(강남 금싸라기땅 실소유자)' 등 청문회 신조어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몇몇 장관 후보자들은 투기성 짙은 부동산 소유와 매매가 문제가 돼 잇달아 자진사퇴했다.부동산 소유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2005년 통계에 따르면 상위 1% 가구가 사유지 3분의 1을 보유하고 있고 전국 1777만 가구의 45.4%가 단 한 채의 집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톨릭교회는 땅을 '하느님의 것'으로 간주하며 이러한 사유 재산의 사용을 공동선 실현이라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 아래 사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백영민 기자 heelen@#부동산은 요술방망이 이들은 단지 부자라는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부에 대한 윤리의식 없이 편법, 탈법을 동원한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축적했다는 데 있다. 이들에게 땅은 재산증식 수단일 뿐이다. 땅에 돈을 묻어두기만 하면 요술 방망이를 두드린 것처럼 몇 배씩 불어난다. 불어난 돈으로 또 땅을 사고 팔면 자신도 모르게 땅 부자가 된다. 이들은 부동산을 통한 재산 불리기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다. 개발 소식이 들리면 재빨리 달려가 무더기로 사들인다. 소유주가 반드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절대농지도 불법, 편법을 동원해 버젓이 소유하고 있다. 한국도시연구소 신명호(바오로) 부소장은 "우리사회에서 부동산은 최고의 재테크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보편화됐다"며 "오히려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바보 소리를 듣는 것이 현실이지 않느냐"고 꼬집었다. 부동산으로 인한 소득은 정당한 노력이나 노동의 댓가가 아니다. 하룻밤 사이에 몇천만 원씩 오르는 부동산 값에 평생 벌어도 집 한 채, 땅 한 평 소유하지 못하는 이들은 일할 의욕을 잃고 허탈해할 수밖에 없다. 양극화를 부추기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 땅 주인은 누구인가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은 땅 주인이 분명 당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며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셨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이 토지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누리기를 원하신다. 공기와 물처럼 말이다. 땅(토지)과 관련한 하느님 말씀은 구약성경 레위기 25장에 집약돼 있다. 25장은 하느님의 토지 경제법전이라고 불린다. 하느님은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골고루 나눠주셨다. 물론 가난한 사람은 물려받은 소유지를 팔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산 사람은 희년이 되면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레위 25,13)고 하며 땅이 개인의 영원한 소유물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신다. 전강수(대구가톨릭대) 교수는 "하느님이 만든 토지는 일반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며 "성경에는 토지에 대해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여호수아기 12~19장을 살펴보면 평등하게 토지를 나눠준 분배정의를 엿볼 수 있다"며 "성경은 이러한 평등성을 위반하고 토지를 많이 소유한 이들을 꾸짖고 있다"고 했다. 토지와 집을 독차지한 이들에 대한 경고는 이사야서와 미카서에 기록돼 있다. 매우 엄한 꾸짖음이다. "불행하여라, 빈 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해 가고 밭에 밭을 늘려 가는 자들! 너희만 이 땅 한가운데에서 살려 하는구나"(이사 5,8).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미카 2,2-3). 혹자는 하느님의 토지 경제법에 대해 사회주의적 경향을 우려한다. 이에 대해 전강수 교수는 "사회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평등해야 하는 것은 토지에 대한 권리뿐이다. 평등한 권리가 보장되는 상태에서 개인 노력 여하에 따라 소득과 재산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 사유재산권이 지닌 윤리성 중시해야 가톨릭교회는 사유 재산권을 긍정한다. 동시에 공동선이라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 아래 사유재산권이 지닌 사회성과 윤리성도 중시한다. 사유재산권을 공동체 필요성과 하느님의 창조적 계획에 종속되는 도구적 성격으로 보고 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1년 회칙 「새로운 사태」에서 "재산의 부당한 소유와 정당한 사용은 구분돼야 한다"며 "자기 생활에 필수적인 것과 신분에 필요한 것 이외의 나머지를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마땅한 의무다"고 했다. 또 "토지는 비록 개인 소유로 분배된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의 공통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구실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며 독점적, 배타적 사용에 우려를 표명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에서는 사유재산의 사회적 성격을 깨닫지 못한 소유는 탐욕과 혼란을 가져온다고 경고하며 "투자와 경제생활의 계획을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러한 목적을 명심하고 자신의 막중한 임무를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 불로소득 환수정책 강화해야 이 같은 교회 가르침에 수긍하면서도 땅으로 재산을 불리는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게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부동산 불로소득으로 얻는 이익을 환수하는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가톨릭교회도 잘못된 부 축적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목헌장」은 공동선을 거슬러 사유재산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것이 공권력의 소관임을 명시하고 있다. 전강수 교수는 "성경에는 땅에서 나오는 이익은 모두 공평히 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며 "토지에서 생기는 이익을 공적으로 환수하고 고위 공직자들의 경우 부동산 백지신탁제를 적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고 말했다. 한국 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은 부동산 투기와 관련해 "미국 집값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돈 많은 한국 사람들이 투자 한다며 몰려갔지만 우리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세금 때문에 발길을 돌리고 있다"며 "부동산 소유에 대한 세금을 높여 부동산이 결코 재산증식 수단이 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이강서 신부는 "토지는 재생산되지 않기에 공공의 재화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투기나 재산증식 수단으로 변질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불로소득에 대한 이익을 환수하는 데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박수정2008.03.25

다시 살펴보는 새 '성경' 특징과 번역과정본문에 충실한 첫 우리말 완역 성경염수정(서울대교구) 주교가 「성경」을 인쇄할 가톨릭출판사 「성경」 전용 인쇄기를 축복하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지난해 가을 정기총회 때 새 성경 간행을 발표하면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말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새로운 육화의 시대가 열렸다"고 선포했다. 이로써 한국천주교회는 1784년 한국교회 창립 221년 만에, 그리고 1977년 개신교와 함께 「공동번역 성서」를 펴낸 이후 28년 만에 독자적으로 번역한 「성경」을 갖추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 최초 공용 신ㆍ구약 합본 성서인 「성경」에 대해 아직까지 많은 신자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서주간을 맞아 「성경」에 대한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새 성경의 특징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배포한 「성경」에 관한 종합 안내서 주요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 「성경」 번역ㆍ간행을 주도한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위원장 권혁주 주교, 이하 성서위)는 애초부터 '본문에 충실한 교회 공용 번역본 완성'을 목표로 새 성경 간행 작업을 착수했다. 성서위가 '성경 본문에 충실한 번역'과 '교회 공용으로 사용할 성경'이 두 가지 목표를 고집한 이유는 그간 한국 천주교회가 사용해온 「공동번역 성서」가 대중들의 이해를 돕도록 의역에 치중한 나머지 성서 본문의 내용과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성경의 두 가지 목표는 현실적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기가 어려운 작업을 거쳐야만 했다. 본문에 충실하다 보면 우리말이 매끄럽지 못하고, 부드럽고 좋은 우리말을 중시하다 보면, 공동 번역의 예에서 보듯이, 불완전한 번역이나 오역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번역 위원들과 우리말 위원들, 합본 위원들과 실무진은 언제나 이 두 가지 목표를 염두에 두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우리말이 아주 부드럽지는 못하다 해도 성경 본문 뜻을 제대로 옮기고, 아무리 본문에 짜 맞추어도 우리말이 되지 않을 때는 최소한의 가감으로 의미를 살려 옮겼다.그 결과 성서위는 '이 두 가지 목표에 어느 정도는 가깝게 다가섰다고 보인다'고 평가했다. 구약성경의 히브리말 부분은 「마소라 본문」을, 그리스어 부분은 「괴팅겐 칠십인역」 성경을 대본으로 삼았다. 신약성경은 세계성서공회가 발행한 「그리스말 신약성경」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 「성경」은 이 3개 대본을 토대로 되도록이면 줄임말을 쓰지 않고 좋은 우리말을 찾아 쓰고, 맞춤법ㆍ띄어쓰기ㆍ구두점 등은 일반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를 따르며, 표제어는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의 기준을 따랐다. 또 용어들은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통일성과 일관성을 유지했고, 히브리어ㆍ아람어ㆍ그리스어 고유명사들은 최대한 음역(音譯)했다. 또 번역자의 자의적 해석은 최대한 피하고, 라틴어ㆍ영어ㆍ프랑스어ㆍ독일어 성경을 대조하며 가장 중립적 번역을 취했다. 성경 각 책의 순서는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을 따랐다. 다만, 마카베오기 상ㆍ하권은 공동번역 개정판처럼 역사서 맨끝, 곧 에스테르기 뒤에 뒀다. 먼저, 하느님 이름인 히브리말 "야훼"를 "주" 또는 "주님", 때에 따라서는 "하느님"으로 옮겼다. 예외로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 이름을 계시하시는 장면(탈출 3,15; 6,2 등)과 야훼라는 이름과 함쳐진 이름(야훼 이레, 야훼 니시 등)은 그대로 "야훼"로 썼다. 성서위는 야훼를 "주님"으로 옮긴 이유로 △유일신을 믿는 우리는 옛날 다신교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인들과 달리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는 예의상 어른 함자를 함부로 부르지 않으며 △우리 언어 관습상 많은 경우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직책이나 칭호만 부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성서위는 또 「성경」은 공식 전례에서도 쓰일 공용 성경이므로, 2000년 동안 하느님의 이름을 "주님"으로 옮겨 불러온 가톨릭 교회의 전례 전통에 따라 "야훼"를 "주님"으로 옮겼다고 덧붙였다. 「성경」에서는 각 책의 제목도 몇가지 수정했다. 공동번역본의 '출애굽기'를 '탈출기'로 바로잡았다. '출애굽기'를 우리말 어법에 맞게 고치면, '이집트 탈출기'로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엑소도스'는 과거에 한 번 이뤄진 이집트 탈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구약성서 시대에 제2이사야는 하느님 백성이 바빌론에서 귀향하는 것을 제2의 엑소도스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전도서'를 '코헬렛'으로 바꿨다. 전도서라는 이름은 1장1절의 코헬렛이라는 히브리말에 기인한다. 코헬렛은 '집회 연사' '대변인' '수집가'등 여러 뜻으로 해석되나 그 뜻이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책 이름이자 동시에 본문에도 나오는 이 명칭을 일관성 있게 '코헬렛'으로 옮겼다. 신약성서 서간 제목도 대폭 바꿨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 '야고보 편지'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디도에게 보낸 서간' '야고보 서간'과 같은 표현으로 바로 잡았다. 주교회의는 그동안 '성서'와 '성경'이라는 말(Biblia Sacra 또는 Sacra Scriptura)을 같은 의미로 써 왔지만, '서(書)'보다는 '경(經)'이 좀더 적합하다고 보아 '성경'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우리가 전례에서 공동 번역 성서를 사용한 뒤, '성서'라는 말이 익어 왔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처음부터 '성경'이라는 말을 써 왔다. '성경'이란 종교상 신앙의 최고 법전이 되는 책 또는 교리를 기록한 경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서와 똑같은 의미로 써 왔다. 한편으로, 일반인들은 성경이라는 말에 더 익숙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는 성서라는 말이 더 친근하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는 어느 말이 옳고 그르냐 하는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06.11.23
[교회상식 교리상식- 113] 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죄란 이성과 진리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이다. 죄는 어떤 것에 대한 비뚤어진 애착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가 밝히는 죄의 정의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1846-1896항)를 중심으로 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봅니다. ◇죄란 무엇인가 성경은 하느님께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온갖 것을 지어내시고 사람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시고는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고 전합니다. 죄는 이렇게 "참 좋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침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래서 죄를 "영원한 법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위나 욕망"이라고 정의했지요.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죄는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자 "하느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나아가 죄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맞서며 우리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합니다. 이러한 죄는 인간의 본성에 상처를 입힐 뿐 아니라 인간의 연대성을 해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해치는 것입니다. ◇대죄와 소죄 죄는 그 경중에 따라 대죄(大罪, 죽을 죄)와 소죄(小罪, 용서받을 죄)로 나눕니다. 대죄(죽을 죄): 하느님의 법을 크게 어겨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생명 원리인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근본적으로 거스르고 파괴하는 죄를 말합니다. 예컨대 하느님을 모독하거나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근본적으로 어기는 것이 됩니다. 또 살인을 하거나 간통을 하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어기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죄가 대죄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나아가 어떤 죄가 대죄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첫째, 중대한 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둘째, 완전히 의식하며, 셋째, 고의로 저지를 때 대죄가 되는 것입니다. 중대한 문제란 십계명을 거스르는 죄를 말합니다. 그런데 십계명에도 경중이 있지요. 살인은 도둑질보다 더 무겁습니다. 폭력도 부모에게 행사한 폭력은 그 자체로 다른 사람에게 휘두른 폭력보다 더 무겁습니다. 완전히 의식한다는 것은 그 행위가 악하고 하느님의 법을 거스른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으면서 저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고의로 저지른 죄라는 것은 의도를 가지고 저지르는 죄를 가리킵니다. 똑같은 죄를 고의가 아니라 무지에서 지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줄어듭니다. 순간적으로 격한 감정이 일어나서 저지른 죄, 외부의 압력에 의해 또는 병적 장애에 의해 저지르는 죄도 책임이 줄어들 수 있지요. 하지만 악의를 가지고 고의로 짓는 죄는 가장 무거운 죄입니다. 대죄는 생명 원리인 사랑을 상실하게 하고 성화 은총을 박탈해 버립니다. 이 은총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기에 인간의 진실한 회개와 함께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드리는 성사 곧 고해성사를 통해서만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소죄(용서받을 죄) :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어기고 해치기는 하지만 그 사랑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 죄를 말합니다. 가벼운 문제에 대해 도덕률이 정한 기준을 지키지 않았거나 중대한 문제에 대해 도덕률을 어겼지만 완전히 의식하지 못했거나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긴 것이라면 소죄가 됩니다. 예를 들면 엉겁결에 거짓말을 했다거나 남의 일에 쓸데 없이 참견해서 화를 돋군다거나 또는 비웃음을 흘리는 행위 등은 소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소죄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기에 고해성사를 보지 않더라도 인간의 참회 행위를 통해서 속죄할 수 있습니다. 현세에서 살아가는 동안 소죄들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죄라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습관적으로 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소죄라 하더라도 자꾸 범하면 양심을 흐리게 하고 판단을 그르치게 해 악습을 형성하게 합니다. 다른 많은 죄를 만들면서 이런 악습들의 뿌리가 되는 죄를 죄종이라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죄종을 일곱가지로 구분해 왔는데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가 그것입니다. 죄는 개인이 짓는 것이기에 개인적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짓는 죄에 협력하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그 죄에 직접적이고 고의적으로 관여하는 일뿐 아니라, 그 죄를 명령하거나 권장하거나 칭찬하거나 승인하는 일, 그 죄를 알리거나 막아야 할 의무가 있을 때 그렇게 하지 않은 일, 그리고 그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편들거나 보호하는 일 등이 포함되지요.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이창훈2008.10.21
![[생명의 문화] 연예인 자살, 더 이상은 안 된다](//cpbc.co.kr/CMS/newspaper/2008/10/rc/269241_1.0_titleImage_1.jpg)
[생명의 문화] 연예인 자살, 더 이상은 안 된다애틋한 사연 미화하는 언론도 문제우 재 명 신부(서강대 신학대학원장ㆍ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 잇단 연예인들 자살 소식은 마치 가족의 한 사람을 잃은 듯 허망하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사람들은 연예인들을 TV매체를 통해 거의 매일같이 만나면서 정서적으로 가족보다 더 가까이 느끼고 있기에, 연예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가까운 이의 죽음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그들의 자살은 사회에 더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연예인 모방 자살로 추정되는 몇 건의 자살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방증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살의 해악성과 문제점을 보도하기 보다는 당사자의 애틋한 사정만을 들어 자살을 미화하려는 듯 한 언론의 태도는 문제라고 본다. 2005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한국사회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 당 26.1명으로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 수치는 10년 전인 1995년 인구 10만 명 당 자살률 11.8명에 비해 거의 2.2배 상승한 수치로, 한국 10대 사망원인 중 4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20-30대의 경우에는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이는 우리사회의 생명에 관한 의식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생명의 복음」(1995)에서 생명에 대한 결정을 개인의 정당한 자유 표현으로 보는 현대인들의 왜곡된 자유개념을 지적하고 있다. 생명을 '살아내어야 하는' 최우선의 체험이 아니라 단순히 '소유' 혹은 '거부'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은 결코 선택 대상이 아니다. 공자의 효경(孝經)을 보면,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불감훼상 효지시야(不敢毁傷 孝之始也)'라 해서 자신의 몸을 훼손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불효라고 하고 있다. 더욱이 가톨릭 신앙 안에서 생명은 '선물'로서, 내 공로로 인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 사랑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결정은 오로지 하느님에게 주어져 있는 신성불가침 영역이며, 인간에게는 선물로 주어진 생명을 잘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아름다운 꽃으로도 때릴 수 없는 귀한 존재이다. 옹기장이는 옹기를 만들 때 옹기 기능을 생각해 가장 적합한 흙을 찾는다. 마찬가지로, 옹기장이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지을 때 가장 적합하고 좋은 흙으로 정성껏 빚어 만드셨다(이사 45,7-13참조). 그렇기에 "너는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아사 43,3)이라고 하신다. 우리 각자는 진실로 하느님의 귀한 존재이다. 자살을 시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억울하다'는 것이다. 너무 억울해서 못살겠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시대의 욥도 너무 억울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왜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자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하느님은 욥에게 폭풍 중에 말씀하신다.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을 해 본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본 적이 있느냐?"(욥 38,13) 결국,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존재하며, 인간이 가장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고통 안에 하느님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욥은 알게 된다. 이제 고통은 지나가고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더 큰 상을 내려 보상하신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모든 악 중에 고통만이 살균 소독된 악이다. 고통은 다른 악들처럼 첫 번째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병 혹은 원수)이 여전히 작용해 재발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은 증식하는 성향이 없다. 고통이 끝나면 그것은 말 그대로 끝나는 것으로서,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기쁨이 뒤따라오게 되어 있다"(「고통의 문제」 중에서). 고통은 인간의 자아실현 과정에서 장애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장애를 피하지 않고 넘을 수 있다면 장애는 인격 성장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죽어야 할 이유만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만일 죽어야 할 이유만을 찾는다면 세상은 죽어야 할 이유로 넘치는 고해 바다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보라. 세상은 아름다운 가치로 넘치는 기쁨의 원천이다." 필자는 이 글에 동의한다. 자살은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영혼에 남겨진 숙제의 시작이다. 자살한 엄마를 찾는 아이가 '우리 엄마 살려 주세요'하고 외치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있지 않은가.cpbc2008.10.21
60-성전(聖傳)에 대해서 알려주세요하느님 말씀이 사도 계승을 통해 모범과 제도 등으로 전해지는 것교회가 성경과 함께 하느님 계시의 두 원천 가운데 하나라고 가르치는 성전(聖傳)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계시를 글로써 곧 문서로 전해주는 것을 성경이라고 하고, 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전하는 것을 성전(聖傳)이라고 합니다. 성전(聖傳)이란 거룩한 전통(傳統) 또는 거룩한 전승(傳承)이라는 뜻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75~100항)를 중심으로 성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봅니다. 하느님 계시('계시'에 대해서는 899호 2006년 12월 10일자를 참조하십시오)의 충만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라고 당신 친히 뽑으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이 명령을 두 가지 방식으로 실천했습니다. 하나는 말과 표양과 제도로 전달했고, 다른 하나는 문서로 기록한 것입니다. 구원의 소식을 문서로 기록한 것을 성경이라고 하고, 말과 표양과 제도로 전달하는 것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성전에 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분과 함께한 공생활에서 받은 것과 성령의 일깨우심으로 배운 것들을 설교와 모범과 제도로써 전달해 주었다"(76항). 성전에 관한 이 대목에서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도들은 무엇을 전했느냐는 것인데, ①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②그분과 함께한 공생활에서 받은 것 ③성령의 일깨움으로 배운 것입니다. 둘째, 사도들은 어떻게 전했느냐는 것인데, ①설교 ②모범과 ③제도를 통해서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교리(가르침)와 생활(의 표양)과 예배(전례)를 통해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도들은 누구에게 즉 어떤 경로로 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도들은 교회 안에 복음이 영구히 온전하게 또 생생하게 보존되도록 주교들을 후계자로 세워 자기 교도직(敎導職)의 자리를 넘겨주었다"(77항) 복음이 영구히 보존되도록 주교들을 후계자로 세워 교도직의 자리를 넘겨주는 것을 '사도 계승'이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지요(935호 9월 2일자 참조). 따라서 성전은 사도들에게 위탁된 하느님 말씀이 사도 계승을 통해 곧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통해 교회 안에서 설교와 모범과 제도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성전이 문서로 기록된 말씀인 성경과 함께 하느님 계시의 두 원천을 이룬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알아둡시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 계시의 두 원천 가운데 하나로서 성전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사도로부터 유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배운 것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또한 '사도 전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서 유래하는 성전과 달리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역교회에서 생겨난 신학적, 생활 규범적, 전례적 또는 신심에 관한 전통 또는 전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사도들에게서 유래하는 성전과 구별해서 교회 전승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전승들은 교회 교도권의 지도 아래 '성전'(사도 전승)에 비추어 보존되거나 수정되거나 폐기될 수 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83항). ◇한 가지 더 개신교에서는 성경만을 계시의 원천으로 인정하고 성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경에 비해 성전이 격이 떨어지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씌어지기 전에 사도들의 가르침과 체험과 증언, 곧 성전이 먼저 있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성경을 정경으로 인식하게 된 것도 성전을 통해서이고 성경이 더욱 깊이 이해되고 교회 안에서 힘을 발휘하게 된 것도 성전을 통해서입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계시헌장」 8항 참조). 그래서 교회는 성경과 성전에 대해 "똑같이 경건한 애정과 존경으로써 받아들이고 공경해야 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82항)고 가르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이창훈2007.09.12
-문희상(바오로, 통합민주당)](//cpbc.co.kr/CMS/newspaper/2008/05/rc/249079_1.2_titleImage_1.jpg)
[제18대 총선 당선자에게 듣는다](5)-문희상(바오로, 통합민주당)국민 신뢰 얻는데 총력 기울여야 지하 감옥서 세례 받으며 감동의 눈물 정치, 믿음의 원리 깊이 생각하며 활동 신앙, 정치활동 원천ㆍ자양분으로 삼아 언젠가 문희상(바오로, 63, 의정부1동본당) 의원의 이른바 '똥물세례' 사연을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당사자를 만나 직접 들으니 그 감동이 몇 곱절 더하다.문희상 의원 1980년 5공화국 탄생 직전의 일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신군부의 합동수사본부 지하 감옥에 끌려간 문 의원은 연일 계속되는 구타와 고문에 심신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다. 그곳에서 신군부를 비판한 죄목으로 붙잡혀 들어온 서인석(전 서강대 총장, 2005년 선종) 신부를 만났다. 서 신부는 같은 처지였건만, 그가 고문을 받고 돌아오면 밤늦도록 기도해주면서 고난을 이겨낸 성경의 인물들 얘기를 들려줬다. 어느 정도 성경 지식이 있던 그는 세례를 받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감옥에 세례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서 신부는 한참 망설이더니 물이 있는 유일한 장소인 변기통으로 그를 데려갔다. 문 의원은 "그날 서 신부님과 나는 부둥켜안고 내 이마에 부어진 똥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며 "그 세례로 하느님을 알고 난 뒤부터 더 용감히 불의와 시련에 맞서 싸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번 총선에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끝에 966표차로 신승(辛勝)을 거뒀다. 그는 "개표 이튿날 시장에 갔더니 상인들이 우황청심환을 먹어가며 개표방송을 봤다고 아우성이었다"며 껄껄 웃더니 "4선까지 오는 동안 이번처럼 힘든 선거는 처음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참여정부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열린우린당 출신 중진이다. 포부에 앞서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부터 들어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선거결과에서 보듯 국민의 평가는 이미 내려졌다. 그러나 훗날 역사의 평가는 다를 것이다. 참여정부는 제왕적 대통령 시대를 마감하고, 정경유착의 부패고리를 과감하게 끊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ㆍ국정원ㆍ국세청 등 과거 통치수단으로 필요했던 칼(권력)을 모두 버리고 간다(직무를 수행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권위주의 청산이다." 그는 "그러나 명분이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도 국민과 함께 하지 않으면 실패한다"며 그 점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야당은 '수구세력과 언론 때문에'라는 탓을 거두고 '내 탓이오'라는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불신의 늪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2006년 지방선거 참패 뒤 역린(逆鱗, 임금의 분노를 이르는 말)을 무릅쓰고 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대통령의 말은 모든 가치체계의 총화여야 합니다. 의제의 시작이 아니라, 결론을 말씀하셔야 합니다. 논란의 출발점을 말씀하시기보다는 결정을 짓고 집행할 부분을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信]인데, 신(信)자가 사람(人)과 말씀(言)으로 이뤄진 원리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통합민주당이 획득한 81석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민심은 천심이다. 국민들이 싹은 살려 주셨다. 그것도 과거처럼 특정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경상도와 강원도 등 전국에 골고루 살려 놓으셨다. 81석은 버림받는 숫자가 아니라 의미와 기대가 충분한 숫자다.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살려 주신 것이다." 이어 "투표 전날에도 아내(김양수 안나)와 밤늦도록 기도하면서 '행여나 해야 할 몫이 남았거든 데려다 쓰십시오'라고 청하기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5년간 해야 할 일은 진정한 야당성(性)을 회복해 국민의 신뢰를 다시 얻는 것"이라며 "좌우 이념대립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이제부터 개혁적 실용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혁적 실용주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지, 벌써부터 한계와 부작용을 드러내는 현 정부의 실용노선이 아니다"고 분명히 구분했다. "정치현실과 신앙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스러울 때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인생관과 종교관, 정치관을 따로 떼어 생각해 본 적은 없다"며 "특히 가톨릭 사상은 진보적이고 자유롭기에 신앙은 내 정치활동의 원천이자 자양분"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는 지난 국회에서 가톨릭신도의원회 회장으로 봉사했다. 문 의원은 의정부 토박이다. 2006년 미스코리아 진 이하늬씨가 문 의원의 외조카다. 이하늬씨가 선거운동 때 의정부역 앞에서 "우리 삼촌은 외모와 달리 가슴이 뜨거우신 분"이라며 홍보지원에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cpbc2008.05.06
![[고전의 향기에 취하다]-(3)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cpbc.co.kr/CMS/newspaper/2009/03/rc/285821_1.0_titleImage_1.jpg)
[고전의 향기에 취하다]-(3)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시련의 밭에서 핀 양심과 사랑의 꽃, 주님 은총 햇살 가득 국내에선 하서출판사에서 번역 발간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 표지 이미지. "이 세상에 빈부 격차가 남아있고, 가난 때문에 사람들이 삶의 밑바닥에서 허덕이고, 굶주림으로 여자들이 몸을 팔고, 빛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어린 아이들이 위축돼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한, 이 소설은 오래도록 살아 있을 것이다." 문호 빅토르 위고는 총 10권에 이르는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서문을 통해 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오랜 생각을 털어놓는다. 이 빈부격차 문제는 이후 20, 21세기를 관통하는 전 세계적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 작품은 그래선지 일찍부터 「장 발장」 또는 「레 미제라블」이라는 표제로 국내에 소개돼 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쌉싸래한 감동을 주는 이 소설은 1862년 발표되자마자 전 세계로 번역돼 많은 독자를 확보했고, 성경의 뒤를 이었다고 할 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이 듬뿍 담긴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그 체취를 세밀하고도 밀도있게 묘사했다. 악에서 벗어나 자비로운 마음으로 선량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의 이면을 추적하는 심리 묘사는 마치 탐정소설과도 같은 묘미도 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사제나 수도자들의 삶 또한 읽은 이들로 하여금 끝모를 감동과 함께 심신의 정화를 불러 일으킨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중 대표주자인 위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레 미제라블」은 밑바닥 인생에서 허덕이는 비참한 서민들의 이야기다. 표제 그대로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허기진 가족과 어린 조카들을 보다 못한 한 청년이 가게에서 빵 하나를 훔친 죄로 19년간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하는데서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장 발장으로, 전과자에 더할 나위 없이 냉랭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하룻밤 쉴 곳조차 없이 방황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지치고 마음까지 거칠어진 그는 마지막으로 성당을 찾아가 하룻밤을 청한다. 미리엘 신부 사제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온 그는 앞길이 막막해 사제관에서 나올 때 은촛대 두 개를 훔친다. 때마침 성당 앞을 지나던 경찰이 그를 수상히 여겨 사제관으로 데려 간다. 미리엘 신부는 간밤에 잠을 자고 간 나그네가 촛대를 들고 경찰과 같이 온 정황을 눈치챈 뒤 웃으며 "왜 그것만 가지고 갔느냐? 여기 두 개도 내가 가져가라고 했으니 이것도 가지고 가라"며 나머지도 그에게 내어준다. 뜻밖에 온정어린 신부의 말에 장 발장은 그 순간 오래동안 잊었던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는 미리엘 신부의 따뜻한 온정에 돌연 한줄기 빛이 자기 머리 위에 비치는 것을 느낀다. 그 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속죄의 은총이 온몸으로 가득히 번지며 새롭게 태어난다. 그 순간 그는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고 180도로 전환시켜 주는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랑과 관용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수십 년 뒤 장 발장은 어느 해변 산업도시 공장 지대에서 이름을 마드랫으로 바꿔 일을 하며 성공한다. 성실과 정직으로 마침내 그는 공장 하나를 자영하기에 이르렀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일을 하고 종업원들에게 자비와 선한 마음으로 대하니 공장은 날로 번성하여 부를 누렸다. 장 발장은 그 부를 약자와 빈곤한 서민들을 위해 베풀었고, 자연스럽게 그는 그 일대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시장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장 발장을 시기심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며 감시하는 자가 나타난다. 쟈발이라는 경시관이었다. 정체불명 나그네의 출세에 의구심을 가진 그는 장 발장의 본색을 찾고자 혈안이 된다. 그 때 그의 공장에 환티눈이라는 여자가 일을 구하러 온다. 과거 매춘부였던 그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아이 하나를 데리고 나와 숨어다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를 안 쟈발 경시관은 그녀를 체포해 법원에 넘긴다. 장 발장은 법원에 출두해 환티눈을 변호해 구해내고 병든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켜 준다. 이에 쟈발 경시관은 분에 못이겨 마드랫의 원래의 이름이 장 발장이라는 것과 전과자라는 사실까지 알아내고, 법원에 고발한다. 때마침 한 절도범이 잡혀왔는데, 그의 이름이 장 발장으로 '동명이인'이었다. 장 발장에게는 뜻밖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였다. 사실을 이대로 묵인하면 자신은 영원히 원래 신분을 속인 채 살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장 발장의 양심에 미리엘 신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대신해 남을 희생시킬 수 없었던 장 발장은 고민 끝에 명예도, 부도 다 버리고 법정에 나가 자신이 19년 옥살이한 한 전과자라는 것을 고백하고 시장직에서 물러난다. 다시 전과를 속인 죄목으로 구속된 그는 옥살이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장 발장은 병원에 입원해 자기를 기다릴 환티눈이 가엾어 탈옥을 해 병원을 찾아간다. 한 수녀의 헌신적 간호를 받고 있던 환티눈은 자신의 어린 딸 고제트를 부탁하며 숨을 거둔다. 탈옥죄로 다시 체포된 그는 감옥으로 이송돼 옥살이를 한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환티눈이 부탁한 어린 딸이 걱정이 된 그는 재차 탈옥해 고제트를 찾아간다. 8살 고제트는 어른들의 학대와 혹사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에 장 발장은 고제트를 데리고 수도원으로 피신한다. 10년 세월이 지나자 장 발장은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아 고제트를 데리고 나온다. 장 발장의 사랑과 훈육으로 아름답게 성장한 고제트는 사회 개혁을 주장하면서 왕당에 도전하는 공화주의자 청년 마류스와 사랑에 빠진다. 장 발장은 사랑하는 고제트가 개혁의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사랑하는 고제트를 위해 참아야 했다. 그런데 마류스가 시위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입고 체포 직전에 이른다. 장 발장은 또 다시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기회에 봉착한다. 결국 그는 부상한 마류스를 등에 지고 파리 하수구로 피신해 허리까지 차오르는 하수구 물 속으로 들어가 왕당의 추격을 벗어나 고제트와 마류스를 혼인시킨다. 그리고서 장 발장은 두 사람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 그의 고백을 듣고 놀란 마류스는 그간 자신을 돌봐준 어르신이 오래 전 탈옥한 수배자라는 말을 듣고 크게 실망해 고제트를 데리고 장 발장 곁을 떠나버린다. 그들이 떠난 후 장 발장은 외롭고 심신이 쇠잔할 때로 쇠잔해져 몸져 눕고 만다. 한편 마류스는 장 발장의 진솔한 고백에 실망하고 떠난 것을 후회하고 다시 장 발장 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노쇠하고 병든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빈다. 하지만 장 발장은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며 산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주고 자신은 하느님 은총으로 행복했다고 털어놓으며 마류스 부부를 기도로 축복하고 눈을 감는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숨진 장 발장의 온화한 얼굴 위로 미리엘 신부의 은촛대가 찬란하게 비친다. 송원희(마리아, 소설가)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는 1802년 2월 프랑스 브장송에서 태어나 시와 희곡, 소설 등을 다작했다. 나폴레옹 휘하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주로 파리에서 살며 많은 작품을 썼다. 어릴 적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1817년 15살 때 아카데미 프랑세스 콩쿠르에 입상, 자신의 재능을 드러냈다. 이후 여러 권 시집과 환상소설, 희곡 등을 발표하며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초기엔 가톨릭적 색채가 농후했으나 훗날엔 점차 자유주의적 경향이 현저했다. 프랑스 의회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문학 외적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고,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항거하다가 영국으로 추방당해 19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이 시기 「레 미제라블」을 비롯해 「노틀담 파리」, 「바다의 노동자」, 「웃는 남자」(이상 소설), 「징벌」, 「명상시집」, 「세기의 전설」(이상 시집) 「성주」(희곡)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보불전쟁으로 몰락하자 다시 파리로 돌아와 1885년 5월 22일 향년 83살로 타계할 때까지 프랑스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사후 프랑스의 위대한 문인들과 함께 팡테옹에 묻힌 그의 작품에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 신뢰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에 대한 불 같은 정열이 깔려있다. 1985년 위고 서거 100주기를 맞아 파리 시민들이 "빅토르 위고는 우리 가슴에 아직도 살아있다"는 글귀를 가슴에 써 붙이고 행진을 벌이며 대대적 행사를 벌였을 만큼 위고는 존경을 받고 있다. cpbc2009.03.03
70- 원죄란 무엇인가요원죄란 무엇인가요? 또 원죄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원죄(原罪)는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명령을 거슬러 범한 죄로서, 그 영향이 단지 아담과 하와에게만 미치지 않고 전인류에게 미치는 죄를 말합니다. 원죄는 아담과 하와에게는 그들이 직접 '범한' 죄 곧 '행위'이지만, 그로 인해 후손에게까지 미치는 원죄는 죄스러운 '행위'가 아니라 죄스러운 '상태'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이하 교리서)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원죄에 대해 좀 더 알아봅니다. ◇원죄란 원죄 이야기를 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성경 대목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3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잘 관리하게 하시면서 다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 명령을 거슬러 그 나무 열매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났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땀을 흘려야 했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흙에서 빚어진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 곧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란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이자 또한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교리서 397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거슬러 범한 죄는 인간 본성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즉 인간은 원초적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상태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도록 창조되었지만 하느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인간 본성이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처받은 본성, 타락한 인간 본성이 인간 번식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한 아담과 하와의 죄를 원죄라고 부릅니다(교리서 404항 참조). 교회는 단 한 사람, 곧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원죄는 개인의 잘못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원죄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은 잃었지만 인간 본성이 온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인간 본성이 "손상돼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세력에 휘둘리며 죄에 기우는 것"입니다(교리서 405항). ◇원죄 교리의 이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을 짓누르는 엄청난 비참이나 죄와 죽음으로 기울어지는 인간의 경향"(교리서 403항)을 너나 없이 경험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본성적으로 지니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이 경향은 바로 원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안고 있는 이 원죄가 세례성사를 통해 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는 원죄에서 해방된 새로운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세례의 은총으로 원죄에서 깨끗하게 됐다고 해도 원죄의 결과 또는 상흔이라고 할 수 있는 악으로 기우는 경향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교리서는 이렇게 언급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은총의 생명을 줌으로써 원죄를 없애고 인간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지만, 약해지고 악으로 기우는 인간 본성에 미친 결과는 인간 안에 집요하게 남아서 영적인 싸움을 치르게 한다"(교리서 405항).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은 우리가 이 싸움에서 굴복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성경은 이렇게 밝힙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8-19). 이 성경 말씀은 원죄 교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원죄 교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면'(裏面)이라고 말할 수 있기"(교리서 389항) 때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원죄 교리는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러 범한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총이 그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다'(로마 5,20)는 성경 말씀은 큰 위안과 힘이 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이창훈2007.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