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기에 취하다]-(2) 월터 J. 취제크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cpbc.co.kr/CMS/newspaper/2009/02/rc/283090_1.0_titleImage_1.jpg)
[고전의 향기에 취하다]-(2) 월터 J. 취제크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동토 벼랑에서 건져올린 이름 '하느님'국내에선 바오로딸에서 번역, 두 권으로 출간된 월터 J. 취제크 신부의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With God In Russia)」 1ㆍ2권 표지. 신앙을 제재로 한 문학작품은, 우리가 볼 수 없고 감각하기 어려운 절대자의 존재, 그 섭리의 실체를 우리의 가시적 반경 내에 형상화함으로써 신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이로 하여금 현실적으로 느끼며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 소설 장르에서 가톨릭 쪽의 경우, 신부를 주인공으로 삼아 교의를 구현하려는 열의를 통해 일반인의 폭넓은 관심을 얻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널리 알려진 장편 몇 편이 그 예증이 된다. 베르나노스의 「어떤 시골신부의 일기」는 작은 마을에 부임해 타성에 젖고 교활함에 길들여진 인성의 벽 앞에서 무기력한 초상으로 주저앉는 앙브리꾸르 본당신부의 모습을 조명한다. 그레엄 그린의 「권력과 영광」은 좌파 혁명이 돌발하자 일시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나약한 위상으로 하루의 연명에 급급하는 위스키 신부를 그린다.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는 영국 해외 선교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돼 모진 시련을 겪고 초라한 외양으로 귀국한 치점 신부의 행로를 펼쳐 보인다. 이들 작품은 외관상 한결같이 패배자의 기록이라 할 만하고, 경우에 따라선 반교회적으로 오해될 만큼 사제의 그늘진 면과 교회의 일그러진 모서리, 이런 이야기 방식에 용해된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뜻'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행간에 가려진, 밑바닥에 흐르는 속내에 있어선 하느님의 사랑, 그 현존하심,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승리와 가톨리시즘의 본질을 구현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데 월터 J. 취제크의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With God In Russia)」(전 2권)는 소설과 유사한 화제를 담고 있지만 논픽션[手記]이므로 그 낱낱 장면은 모두 사실(fact)에 입각한다. 허구와 달리 이는 진상(reality)을 서술한다. 화자(話者)는 스탈린 강권 통치 아래 현세의 아수라도(阿修羅道)라 할 강제 노동수용소 진창구렁 속에서 살아 돌아왔다. 모두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까?"하고 묻게 마련이고, 그때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겠지요"하고 서슴없이 대답하는 문맥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님을 섬기면'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수기는 상식을 초월하는 놀라운 기록이다. 적어도 20세기에 있어 가톨릭교회의 개가로 손꼽을 만한 귀중한 성과라 하겠다. 미국 국적인 저자 취제크 신부는 신학생 시절 예수회에 입회, 로마 유학 중에 무신론이 팽배한 소련 선교를 위한 바티칸 정책에 따라 일단 폴란드로 간다. 한데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그가 사목하는 곳이 나치 독일 점령지가 되기에 이르렀고, 그 위기의 와중에 본래 목표대로 소련에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신분을 속인 채 전쟁 물자의 보고라 할 우랄산맥 지대 노동자 모집에 자원해 간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비밀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우랄에서 1년여에 걸쳐 신앙의 불씨를 일구던 중 체포당해 모스크바 정치범형무소 루비안카에서 오랜 심문과 취조를 받고는 예정된 코스대로 시베리아 강제노동에 수용되는 신세가 됐다. 그것도 최악이라 할, 북극에 가까운 혹독한 추위가 정신과 육체를 할퀴는 두딘카와 노릴스크로 말이다. 루비안카의 취조라 하면, 스탈린의 제거 대상이 된 볼셰비키의 혁혁한 노병들이 온갖 회유와 고문을 견뎌내다 종내엔 굴복하여 반국가 스파이라는 죄목에 사인을 한 후 처형장 이슬로 사라져 간 곳이다. 노릴스크는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는 게 기적이란 소문이 파다한 소련의 악명 높은 강제 노동수용소이다. 취제크 신부는 '바티칸 스파이'란 낙인이 찍혀 이런 험지에서 15년 형을 치르고, 석방 후에도 이른바 '제한 자유인'으로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귀환했다. 이런 행형 제도는 서방세계에선 얼마나 낯선가?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해 제정러시아 시대 시베리아 유형지 실상이 장편 「죽음의 집의 기록」을 통해서, 그리고 소비에트 치하에선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에 의해서 그곳의 반인륜적이며 잔혹한 노동 실태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됐다. 자국민의 픽션을 빌은 폭로에다 명예롭게도 외국 가톨릭 신부에 의한 논픽션이 가세한 셈이다. 취제크 신부는 불행 중 다행으로 몇 가지 의지할 것을 갖추고 있었다. 폴란드 이민 2세라는 점, 타고난 강건한 체력과 그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후천적 성향,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지켜주는 하느님 손길을 믿고 그분의 의중에 여일하게 감사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는 어떤 극난의 처지에 있을 때에도 기도에 소홀하지 않았고, 그 기도의 힘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임을 잊지 않았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반영에 다름 아니다. 노릴스크 수용소의 벽돌공장에서 수인들이 처우 개선이라는 요구사항을 내걸고 사보타지(태업)를 해서 경비대와 대치하며 죽음의 항거를 할 때였다. 그는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견디기 어려운 자기 연민과 고독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절체절명의 찰나에 솟구쳤던 생각을 그는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반문했다. "정말 하느님도 너를 잊으셨다고 생각하는가?… 바로 그 순간 나는 하느님 뜻을 완전히 믿는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확고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수기가 20세기에 있어 가톨릭교회의 개가라는 긍지는 도처의 국면들이 보증한다. 첫째, 세계가 공산주의 블록으로 인해 반분돼 냉전시대에 접어들자 보편교회인 가톨릭은 종교의 싹이 잘린 그 블록, 특히 종주국인 소련에 복음을 비춰야 한다는 사명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역대 교황은 얼마나 노심초사했으며, 전 세계 가톨릭 공동체는 러시아를 위해 얼마나 많이 기도 지향을 두고 적극적으로 기도 캠페인을 펼쳐왔던가? 둘째, 이 사명에 따라 다수 성직자가 그곳 수용소에서 선교에 매진하며 모진 고초와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취제크 신부는 그 일원으로, 주로 폴란드인과 독일인, 리투아니아인 등을 대상으로 한 라틴 전례는 물론, 잠입하기 전에 교육받은 동방 전례로 정교회 신앙에 목마른 러시아인을 비롯한 슬라브 민족에게 미사를 드리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이럴진대 이 책이 동토에도 하느님 빛이 면면히 비쳐졌다는 확고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밖에도 이 수기 자체의 문학적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편견이나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 힘찬 메시지, 그리고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진정성이야말로 이 논픽션의 문학적 요체다. 이 진정성은, 기차간에서 호송장교가 떨어뜨려 의자 밑으로 굴러들어간 빵조각을 호송병 몰래, 애면글면 애타게 손에 넣어 목구멍으로 꿀컥 삼키는, 굶주린 짐승의 경계에서 충분히 일별된다. 이 경우, 비루함도 한낱 인간적 슬픔으로 카타르시스가 되기에 한껏 순연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신중신(시인, 전 한국가톨릭문인회장) ▨월터 J. 취제크(Walter J. Ciszek)는 폴란드계로 190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출생했다. 신학교에 재학 중 예수회에 입회한 뒤 1934년에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 유학, 이태 후에 사제품을 받고는 러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폴란드에 건너갔다. 1940년 봄, 위장 이주노동자로 소련 잠입에 성공했으나 곧 체포당해 장기 취조를 받고 15년간 노동형 언도를 받았다. 부틸카 수용소에 수감생활을 하다가 시베리아 강제 노동수용소로 이감됐다. 노동 조건이 가장 험난한 곳에서 극한의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내며 석탄 수송과 탄광, 구리공장, 각종 노동현장 등을 전전하다 마침내 형기를 끝내고 '제한 자유인'으로 노릴스크와 아바칸에서 거주하며 선교활동을 수행했다. 러시아에 체류한 지 23년 만에, 미국과 소련 간에 각각 2명씩 인적 교환이 성립되어 1963년 귀환했으며 1984년 선종했다. cpbc2009.02.10

예수 부활의 의미와 부활시기 전례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이다. 예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부수고 구원의 희망을 심어준 것이 예수 부활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부활을 가장 성대하게 경축하며 기념한다.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아 부활 교리의 주요 내용과 의미, 그리고 부활시기에 대해 알아본다. ▨예수 부활 ▲역사적이면서도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 사전적 의미의 '부활'(復活)은 유한한 존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즉 다시 살아났지만 또 다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생명으로의 복귀다. 그러나 예수 부활은 죽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요한 11장)과 같은 재생(再生)이 아니다. 예수는 결코 다시 죽지 않는 완전한 생명으로 살아난 것이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교회는 부활이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믿음으로 도달할 수 있는 '신비'라고 가르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부활이 역사적 신빙성이 전혀 없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 곳곳에서 발견되는 제자들의 굳센 부활 신앙이 그 증거다. 세상을 구원해줄 위대한 스승으로 믿었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자 제자들은 제 목숨 구하기에 바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한 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부활을 증언하면서 교회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이라고 고백한다.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증언들이 있지만 예수 부활 사건 자체를 목격한 사람은 없다. 게다가 부활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확인할 길도 없을 뿐더러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 곧 하느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 부활은 과학적 진리라기보다는 신앙의 대상이 된다.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신 분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이다. ▲부활의 의미 예수 부활은 그분이 생전에 하신 말씀과 행업이 옳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이다. 즉 부활 사건은 예수께서 구약에서 예고된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증해 준다. 교회는 또 "예수께서는 당신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해주시고, 당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다"고 가르친다. 예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그분 은총에 힘입어 새로운 생명을 얻어 살아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요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그분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14.20)라고 말했다. 교회는 아울러 예수 부활이 2000여년 전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부활한 예수는 지금도 살아 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를 21세기에 만나는 것은 그 옛날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어떻게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자신의 신앙공동체와 가정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예수는 분명히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말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부활한 예수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신앙의 눈을 떠야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빵을 같이 나눈 다음에야 비로소 눈이 열려 부활한 예수를 알아본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루가 24,13-35)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성경 말씀과 성찬 전례를 통해 언제든 만남이 가능하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느끼거나 성체를 모시면서 지극한 예수의 사랑을 느꼈다면 그 안에 살아있는 예수를 만난 것과 같다. 또한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눌 때도 예수를 만날 수 있다(마태 25,31-46). 자신의 몸과 피를 내놓은 예수를 본받아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할 때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만날 수 있고, 또 사랑을 받는 이웃도 우리를 통해 예수를 알아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단순히 2000여년 전에 일어났던 하나의 사건을 되새기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기 위함이다. ▨부활시기 교회는 특별히 예수부활 대축일부터 성령강림 대축일까지 50일간을 부활시기로 경축한다. 예수성탄 대축일은 12월 25일로 정해져 있지만 예수부활 대축일은 해마다 날짜가 다르다. 예수부활 대축일은 춘분(3월 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후 맞는 첫번째 주일에 지낸다. 올해는 3월 21일 이후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이 3월 22일(음력 2월 15일)이어서 바로 그 다음 주일인 3월 23일이 예수부활 대축일이 된다. 교회는 부활시기 50일 동안 매일매일을 부활 축제를 지내듯이 기쁘게 지내도록 권고하지만 특별히 부활시기 첫 8일간을 대축일처럼 지낸다. 이를 '부활8일 축제'라고 부르는데 부활의 기쁨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부활시기 전례의 가장 큰 특징은 기쁨과 찬미이다. 그래서 사순시기에 금했던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을 다시 노래하며, 미사 때마다 부활 초를 밝힌다. 사제 제의는 기쁨을 나타내는 백색으로 바뀌며, 삼종기도도 부활삼종기도를 바친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부활 제2주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 자비의 사도'라 불리던 파우스티나 수녀를 새 천년기 첫 성인으로 시성하면서 이날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제정했다. 교황은 전쟁과 폭력, 살인, 기아, 낙태 등 세계 전역에 만연돼 있는 반(反)생명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사랑과 용서를 전제로 한 자비뿐이라면서 이 땅의 평화를 위해 '한결같은 사랑으로 인간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할 것을 권고했다. ▲성소 주일(부활 제4주일)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리는 부활 제4주일은 특별히 사제와 수도자, 선교 성소 증진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성소주일이다. 성소주일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제정됐다. ▲주님 승천 대축일(부활 제7주일) 부활한 예수는 40일간 지상에 머물면서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친 후 하늘에 올랐다는 성경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념하는 대축일이다. 부활 제7주일은 또한 홍보주일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승천하기에 앞서 사도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당부한 것을 새기고, 특별히 현대의 다양한 홍보매체들을 복음선포에 적극 활용하는 한편 홍보매체들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날이다. ▲성령 강림 대축일 교회는 부활시기 마지막 날에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낸다. 이 날은 예수께서 부활한 후 50일(오순절)이 되던 날에 사도들에게 성령을 보낸 것을 기념하는 날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부활시기가 성령강림 대축일로 끝난다는 것은 성령강림으로 인류 구원의 신비가 완성되고, 이 신비가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를 통해 역사의 종말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활시기를 지내는 신앙인은 부활의 기쁨을 경축하면서 부활의 신비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오도록, 즉 구원이 완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희망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남정률2008.03.19
![[출판/신간]'새감 행복 영성 시리즈' 6권 출간](//cpbc.co.kr/CMS/newspaper/2008/06/rc/254204_1.0_titleImage_1.jpg)
[출판/신간]'새감 행복 영성 시리즈' 6권 출간윤을수 신부 "오늘은 요한 사도 축일. 아침미사에서 언제나 그랬듯 오늘도 노인이 가지는 생의 지혜를 전해 주려고 한다. 이렇게 30년이 흘렀지만, 나의 주의는 더욱 굳어만 가니 스승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다른 길이 없다. 인도(人道)는 천도(天道), 그리고 인도는 경천애인(敬天愛人), '서로 사랑하라'"(유고집,27). 인보성체수도회 설립자 윤을수(1907~71, 사진) 신부의 영성을 축약한 소책자 6권이 한꺼번에 출간됐다. 4ㆍ6판(12.8×18.8㎝) 크기로 나온 '새감행복영성' 시리즈다. 새감은 윤 신부의 아호로, '새[乙]가 물가[洙]에 감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새감행복영성 시리즈 발간은 지난해 윤 신부의 영성이 담긴 말 가운데 365개를 가려 매일 묵상용 책상달력을 발행한 게 계기였다. 독자들에게서 '그 말을 손가방에 넣어 들고 다니며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하도 많이 들어 윤 신부의 어록을 내기에 이르렀다. 말의 문맥을 살리되 외연을 넓혀 발췌하고 20여 개 큰 주제로 나눈 뒤 이를 다시 5개의 굵직한 가르침으로 묶어 총 5권을 냈고, 윤 신부의 역서인 「그리스도를 따라」(청소년용 「준주성범」, 경향잡지사)에 나오는 묵상자료를 가려 나머지 한 권을 묶었다. 제1권 「한없는 사랑의 손길이」에선 행복영성의 기초가 되는 윤 신부의 말을 엮었고, 제2권 「성체의 뜻은 인보(隣保)」에선 행복영성의 기본 정신을 이루는 말을 주로 묶었다. 제3권 「마음바르게 부지런히」에선 인보정신을 살아가는 구체적 방법과 그 방법을 닦아 나가는 법을 위주로 엮었고, 제4권 「그리스도의 참 제자 되어」에선 공동생활의 열매인 지혜와 인내, 감사에 관한 말과 공동체 생활을 재미있게 적극적으로 사는 법, 복음적 청빈의 삶과 자발적 순명에 대한 말로 참 그리스도의 제자됨에 관한 가르침을 엮었다. 제5권 「넘치는 행복을 이웃에게」에선 인보 정신을 마음 바르게 부지런히 살아가는 사람에게 맺어지는 열매인 행복을 나에게서 시작해 이웃에게 흘려주는 삶에 대한 말을 중심으로 엮었다. 제6권 「하느님과 함께 사는 법」은 내적 생활과 관상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인지 성경을 기반으로 확실히 깨우쳐주고 그리스도의 참 제자됨이 이 세상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구체적 삶의 상황 안에서 쉽게 설명해준다.(가톨릭출판사/각권 2000~3500원)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08.06.17
[근로자의 날] 노동에 관한 교회 가르침노동은 의무인 동시에 성화의 수단…누구든지 취업에 차별 받아선 안돼5월 1일은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 의욕을 높이고자 제정된 근로자의 날이다. 가톨릭교회가 산업혁명기 이후 거대한 자본의 힘에 짓눌려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던 근로자들, 다른 말로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앞장서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진 여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 또한 적지 않다. 비정규직이나 이주 노동자들이 대표적 경우다. 아예 노동의 대열에도 끼지 못하는 실업자는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권리이자 의무인 노동에 대해 교회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까. ▨노동의 의미와 가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에게 노동은 하기 싫은 것,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짐이다. 물론 노동은 인간의 의무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노동은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게 하면서 자신을 성스럽게 하고, 나아가 세상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봐도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시고 나자렛에서 보내신 여러 해 동안 비천한 일을 하심으로써 가정과 노동의 일상 생활 안에서 거룩함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64항).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2테살 3,10)는 성경 말씀처럼 노동은 하나의 의무인 동시에 선물과 재능을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노동은 성화의 한 수단일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정신을 세상사들 안에 불어넣는 방법일 수도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27항) 교회는 또 인간 중심의 노동을 강조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는 성경 말씀(마르 2,27)과 같은 맥락이다. 「노동하는 인간」(6항)은 "노동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그 일의 주체이며 목적인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고 명시했다. ▨노동자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과 탁월한 인간 존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간추린 사회교리」 301항은 노동자들이 보장받아야 할 권리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정당한 임금에 관한 권리 △휴식의 권리 △노동자들의 신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끼치지 않는 노동과 작업 과정에 관한 권리 △자신의 양심과 존엄성이 모독을 받지 않고 일터에서 자신의 인격을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 △실직 노동자들과 그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적절한 보조금에 대한 권리 △연금에 대한 권리 △노후와 질병, 직업 관련 사고에 대비한 보험에 대한 권리 △출산과 관련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집회 결사의 권리 등이다. 직업을 가질 권리 또한 가톨릭교회가 매우 중요시하는 권리이다. 특별히 취업에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데 초점을 뒀다. "취업과 직업은 남자와 여자, 심신이 건강한 사람과 장애인, 원주민과 이주민에게 모두 한결같이 부당한 차별 없이 허용돼야 한다(「노동하는 인간」 19항). "상황에 따라서 사회는 나름대로 시민들이 일자리와 직업을 얻도록 도와줘야 한다"(「백주년」 48항). ▨노동조합과 파업 교회가 특정 직종에 있는 노동자들 권리와 사회 정의를 증진하고자 노력하는 노동조합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노동조합의 투쟁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투쟁이 아니라 정당한 선을 위한 정당한 노력이어야 한다는 것이 교회 가르침(「노동하는 인간」 20항)이다. 아울러 「간추린 사회교리」 306항은 △연대와 정의의 도구인 노동조합이 투쟁의 도구를 남용해서는 안되며 △노동조합의 존재 이유 때문에 노동조합은 모든 노동자가 조합원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자율성을 갖추고 조합의 결정이 공동선에 미칠 영향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파업도 교회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파업이 필수적 수단으로 나타날 때에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인식에서다. 다만 파업이 폭력을 수반하거나 근로 조건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목적 또는 공동선에 어긋나는 목적을 내걸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35항).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cpbc2008.04.23
[기도맛들이기]-거룩한 독서(5) 말씀 통해 하느님이 나를 읽도록이연학 신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마리아 어머니, 지난주에 이어 '듣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흔히 우리 편에서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듣는 것이야말로 기도의 결정적 요소라는 사실은 잘 깨닫지 못하는 듯합니다. 이것은 듣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관계나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듣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요. 성경 읽기가 곧바로 기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읽기'가 사실은 '듣기'이기 때문입니다. 듣는다함은 우선 상대방이 내 앞에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주도권은 말씀하시는 하느님께서 쥐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독서는 내가 주체가 되어 성경을 읽는 것이라기보다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분의 현존 앞에 머무는 일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다기보다는, 거기 기록된 말씀이 내 내면을 '읽으실'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는 일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유다교 랍비 전통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하나가 의미심장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온 제자가 어느날 스승께 여쭈었다고 합니다. "스승님, 제가 토라를 일곱 번 꿰뚫어 읽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스승은 "그렇다면 토라는 너를 몇 번 꿰뚫어 읽었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룩한 독서를 하는 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체험 하나를 잘 전해줍니다. 즉, 기도하며 성경을 읽다보면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내가 '읽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읽는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눈이 내 인생 전부를 읽고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내가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는 순간은, 성경을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 말씀이 나를 해석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해야 합니다(히브 4,12 참조). 어떤 분의 현존 앞에서 이렇게 선후(先後)가 뒤바뀌고 주객(主客)이 뒤집어지는 체험(요한 15,16 참조)… 이것이 거룩한 독서를 포함해 모든 형태의 그리스도인 기도에서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이 지점이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 시선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기도 문은 열리기도 하고 반대로 닫히기도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을 까다롭고 깐깐한 '채점자' 혹은 심판자라고 느낄 때 우리 마음은 굳어지고 닫힙니다. 그분 앞에 나를 있는 그대로 펼쳐 놓기가 두려워지고, 절로 스스로를 변명하거나 합리화하는 마음이 되기 십상입니다. 마음 깊은 곳을 그분께 열어드리지 못하기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의지력이나 테크닉에 더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피상적 독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자동차 기어가 중립에 가 있을 때에는 가속 페달을 아무리 세게 밟아도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경우와도 비슷합니다. 이 경우 기도는 피곤하기만 하고, 기쁨이 아니라 짜증과 지루함으로 점철된 '극기훈련'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 시선이 근본적으로 따뜻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자비와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비로소 우리는 안심하고 영혼의 옷을 벗게 됩니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노래의 한 소절처럼 말입니다. "너의 사랑 앞에 나는 옷을 벗었다, 거짓의 옷을 벗어 버렸다."cpbc2007.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