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의 첫째 임금[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14) 사울 1 이스라엘 첫째 임금은 벤야민 지파 출신으로 키스의 아들인 사울이다. 하지만 그는 절대 군주인 멜렉이기보다 영도자이며 군 통수권자인 나기드였다. 그림은 사무엘이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뽑힌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축성하고 있다. 사진 출처 구글. 이스라엘의 첫째 임금은 사울입니다. 히브리어 사울은 우리말로 “요구된 사람”, “바쳐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울의 헬라어식 이름이 ‘바오로’입니다. 사울의 족보는 사무엘기 상ㆍ하권과 역대기 상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습니다.(1사무 14,51; 1사무 31,2; 2사무 2,10; 1역대 8,33 참조) 정리하면 사울은 벤야민 지파 출신으로 키스의 아들입니다. 아내는 아히마아츠의 딸 아히노암이고요. 자녀는 8명입니다. 여섯 아들은 요나탄, 이스위, 말키수아, 아비나답, 에스바알, 이스 보셋이고, 두 딸은 메랍과 미칼입니다. 요나탄과 아비나답, 말키수아는 필리스티아인들과 벌인 길보아 산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이스 보셋은 사울이 죽은 후 아브네르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되어 2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작은딸 미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가 사울의 미움을 받아 갈림 출신 라이스의 아들 팔티에게 버려집니다. 사울의 족보가 불확실하고 복잡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답을 풀기 위해선 먼저 구약 성경의 역사서들이 어떻게 분류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 역사서는 ‘신명기계 역사서’와 ‘역대기계 역사서’ 그리고 ‘기타 역사서’로 나누어집니다.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가 신명기계 역사서에 속합니다. 가장 먼저 구성된 이 신명기계 역사서는 남왕국 유다가 멸망한 후 쓰였습니다. 역대기, 에즈라기, 느헤미야기가 역대기 역사서로 분류됩니다. 이 책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후 집필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타 역사서에는 룻기,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 마카베오기가 있습니다. 사울의 이야기가 나오는 사무엘기 상ㆍ하권과 역대기 상권의 저자들은 남왕국 유다의 역사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유다 지파 출신의 다윗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 왕조의 태조인 다윗을 현양해야 했기에 사울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고 호의적이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사울의 족보도 다윗의 족보만큼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어 이스라엘의 첫째 임금이 됩니다. 하느님의 명에 따라 사무엘은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입을 맞춘 다음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1사무 10,10)라고 선포합니다. 사무엘의 이 말처럼 사실 사울은 이스라엘의 ‘멜렉’(히브리어로 임금)이라기 보다 ‘나기드’(히브리어로 영도자)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나기드 곧 영도자는 구약 성경에서 사울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호칭입니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나기드는 절대 군주라는 개념보다 ‘군 통수권자’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울은 다윗이나 솔로몬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12지파 부족 구조를 중앙집권 체제로 바꾸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왕정제를 반대한 사무엘의 우려(1사무 12장 참조)와 달리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징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원병만 참전시켰습니다. 또 관료제를 만들거나 후궁을 두지도 않았습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영도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권위를 내세웠을 뿐 고대의 절대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사울은 암몬족을 물리치고 요르단 건너편에 있는 ‘야베스 길앗’이라는 도시를 구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억압에서 자신들을 구출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울을 임금으로 추대합니다.(1사무 11장 참조) 사울이 30살에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뽑혀 활동한 시기는 기원전 1030년에서 기원전 1010년께라고 추정합니다. 사울은 판관이 활동하던 구질서가 무너지고 신체제인 왕정이 확고히 수립되기 전까지 과도기의 이스라엘을 통치한 인물입니다. 그는 구질서를 대표하는 마지막 판관 사무엘과 새롭게 떠오르는 다윗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첫째 임금이라는 운명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비극의 영웅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후 재임 기간 내내 끊임없이 전쟁합니다. 그의 임무는 나기드로서 ‘하느님의 전투를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임금이 된 후 네 차례 큰 전투를 치릅니다. 첫 번째는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미크마스와 베텔, 게바에서 펼쳐졌습니다. 전투는 사울과 그의 장남 요나탄이 이끄는 부대가 게바의 필리스티아인의 전초 부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산악 지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친 사울은 필리스티아인들을 아얄론까지 내쫓습니다.(1사무 13─14장) 두 번째 전투는 아말렉족과 펼쳤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과 아말렉족이 적대 관계임을 여러 번 알려줍니다.(탈출 17,8-16; 민수 14,43-45; 신명 25,17-19; 판관 3,13 참조) 사울 임금은 예언자 사무엘의 지시에 따라 브에르 세바에서 멀지 않은 아말렉 성읍 텔 메소스와 하윌라에서 이집트 동쪽 수르까지 쳐서 아말렉 임금 아각을 생포하고,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이 전투에서 하느님께 대한 그의 충성심이 시험대에 오르고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를 버리십니다. teotokos@cpbc.co.krundefined리길재2023.03.10

기억[월간 꿈 CUM] 회개 _ 요나가 내게 말을 건네다 (17) “저는 주님을 기억하였습니다.”(요나 2,8) 저는 성경을 읽을 때와 묵상할 때 늘 깊이 탄복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삶과 기적, 그분 사랑의 가르침인 복음을 묵상할 때엔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예수님의 삶을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사가들의 노고와 헌신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가톨릭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1923~1996)의 글은 늘 제 마음에 깊고 큰 울림을 줍니다. “예수의 실제 모습이나 얼굴은 그와 함께 살았던, 예수와 마주친 사람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예수의 생애를 전하는 성서조차 전혀라고 해도 될 만큼 그의 외모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예수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를 알던 사람들이 평생 그를 잊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엔도 슈사쿠, 「예수의 생애」, 가톨릭 출판사, 8쪽) 과연 예수님의 생애를 글로 기록한 제자들의 머리에선 단 한 순간도 예수님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사랑의 마음이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사가들 중에서 예수님을 향한 그 절절히 사무치는 마음을 가장 깊이 간직한 분은 어쩌면 마태오 복음사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증오하고 죽여 버리고 싶어 했던 세리였습니다. 같은 동포의 피를 빨아 침략자 로마에게 바치고 자신도 착취하며 살던 매국노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배는 불렀을지 몰라도 삶은 언제나 불안했고 늘 두려움에 살아야 했던 세리 마태오의 삶은 초췌했고 벌레 같은 초라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세금을 걷기 위해 동포들과 싸워야 했고 그들의 멸시와 증오의 눈빛을 두려워하며 악몽 같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다른 인생의 환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 밝은 태양의 빛이, 찬란한 광명의 빛이 비치고 비로소 참 평화를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꿈같은 시간을 향유하며 정말 행복했을 것입니다. 자주 예수님을 그리워하며 그 영원한 꿈이 깨이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 극적인 행복의 주인공인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고 회상하고 추억하며 그분 사랑과 환희의 가르침, 축복의 말씀, 기적, 치유와 용서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서를 집필하면서 마태오는 수없이 펜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었을 것이고 사무치는 그리움에 자주 울고 또 울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참혹한 수렁에 빠진 자신을 부르는 대목을(마태 9,9 참조) 기록할 때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어 눈가가 짓무르도록 긴긴 밤을 울고 또 울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태오의 모습을 상상하면 저 또한 뜨거운 눈물이 납니다. 어쩌면 마태오처럼 우리 또한 죄인인 까닭에 같은 심정에서 눈물이 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그렇게 탄생된 것입니다. 때문에 엔도 슈사쿠의 주장은 진실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과연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우시는 모습이나 기뻐하시는 모습, 죄인을 용서하시는 자애로운 눈길, 가엾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바라보시며 치유해 주시는 측은지심의 마음은 그분과 함께 뜨겁게 살았던 사람들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복음서를 읽을 때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마태오 복음사가처럼 예수님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분으로 기억하고 회상하며 사랑으로 기록한 분들의 노고의 눈물 덕분일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마르지 않는 감동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더 뜨겁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영성의 깊은 샘물을 끌어올리는 마중물이 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찬례를 남겨 주시어 교회가 날마다 당신의 파스카를 기억하고 깊이 참여하게 하셨습니다.(루카 22,19 참조) 복음화의 기쁨은 언제나 감사하는 기억에서 생겨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신 순간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제13항) 그래서 요나가 또다시 말을 건네옵니다. “제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큰 도시 니네베에서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저를 구렁에서 건져 주시어 평화를 살게 해주신 주님의 은총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신앙은 ‘사랑의 기억’에서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배광하 신부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 바오로) cpbc2024.03.11
![[생활속의 복음] 부활 제5주일 -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삶](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4/23/hT21713855842086.jpg)
[생활속의 복음] 부활 제5주일 -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삶 포도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오늘날의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자라는 밀과 보리, 무화과와 석류, 올리브와 대추야자와 함께 축복받은 일곱 가지 대표 산물 중 하나입니다. 성경에는 포도나무·포도원·포도주·건포도·포도즙 등 다양한 표현으로 포도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 직전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일련의 고별 말씀을 상당히 길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중의 한 대목이 오늘 복음인 포도나무의 비유인데, 당신 제자들에게 전하는 고별사여서 마지막 당부의 어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핵심은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 15,4)라는 요청에 담겨있다고 생각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과 더 나아가 오늘의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고 하느님 사랑의 실천이라는 열매를 맺는 길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머물다’라는 동사가 여러 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성경 원어로 ‘붙어 있다’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 참조)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예수님과 우리는 지속적이고 끊임없이 교류하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나무가 뿌리를 통해서 끌어오고 줄기를 따라 위로 보낸 수액은 마지막 작은 가지를 통해 맨 끝의 이파리까지 전해집니다. 그래서 한 나무는 동일한 수액으로 살아가고, 나무 줄기와 그에 붙어 있는 가지들의 생명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 안의 생명은 그분 자신의 생명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그분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그 생명을 계속해서 부여받게 됩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에서 잘려나간 가지는 시들고 말라버려 다시는 열매 맺지 못하듯이, 우리가 예수님과의 친교와 일치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는 순간부터 우리 안의 영적인 생명도 점차 사라집니다. 임신부의 자궁 안에 있는 태아를 상상해보십시오. 태아는 탯줄로 어머니와 이어져 있고 그 탯줄을 통해 양분을 공급받으며 생명을 유지하고 키워갑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그렇게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참조)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가지들처럼 우리가 예수님 가르침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우리의 영적인 생명력도 점점 더 충만해질 것입니다. 갓난아기는 놀라운 생명을 지닌 존재이지만 그 아이가 자라지 않는다면 큰 문제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명도 계속해서 성장하여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육체적 성장은 어느 시점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가 점점 쇠퇴해가지만, 영적인 생명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완성을 향하여 상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나무의 가지이니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며 그분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삶은 그분의 역사하심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기꺼이 우리 자신을 그분께 내맡기는 것이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심어주신 하느님의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예수님 안에 더 깊이 머물도록 합시다. 유승록 신부이정훈2024.04.23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17)성모님에 관한 4대 믿을 교리 티치아노 베첼리오 작 ‘성모 승천’, 1516~1518년. 나자렛 산골 소녀 마리아 성모 마리아는 우리와 다른 일상생활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마리아도 우리와 같은 일상생활을 했습니다. 다른 것은 불편한 일·이해하지 못한 일·속상한 일이 있을 때 바로 표현하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기도하시면서 주님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묵상하셨다는 점입니다. 성모님은 깊은 신앙으로 거룩한 동정성을 평생 간직할 수 있었고, 제자들과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으며 영광스럽게 승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에 관한 4대 믿을 교리 1.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하느님의 총애를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놀랍게도 원죄 없이 잉태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위해 마리아의 영혼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할 수 있도록 가꿔진 순결하고도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였습니다. 1845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교리를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교리 앞에 갈등하는 모습을 보고, 1858년 성모님께서는 프랑스 루르드에 직접 발현하셔서 원죄 없이 잉태된 교리를 직접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차례 베르나데트 성녀에게 발현하시면서 마지막에 “사랑하는 내 딸 베르나데트야,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평생 동정 성모님은 성령의 힘에 의해 동정의 몸으로 아들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을 출산하신 이후에도 평생 동정의 몸으로 사셨습니다. ‘동정’은 한 인간으로 자신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온전히 하느님께만 봉헌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신교는 성경에 나온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요셉·시몬·유다가 아닌가?”(마태 13,55-56 참조)를 언급하며 ‘예수님에게 형제자매가 있는데 평생 동정일 수 있느냐?’고 부정합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 문화 안에서 형제라는 말은 포괄적이었으며, 이들은 예수님의 사촌들입니다. 3. 하느님의 어머니 3세기부터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기도문에 사용하였습니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마리아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다. 성모님의 자유로운 신앙과 순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여 생명을 세상에 낳아주셨기에 우리 교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동정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예고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천주의 성모로 또 구세주의 참 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받으시는 것이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구원되고 아드님과 불가분 관계로 긴밀히 결합되었으며, 천주 성자의 모친이 되는 직무와 품위를 갖추시었다”(「교회 헌장」 53항)라고 설명합니다. 4. 성모 승천 1950년 11월 1일 비오 12세 교황은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현세의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함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며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교회는 오랜 전승에 따라 마리아가 “천상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표현하는 것과 비교가 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cpbc2024.09.09

엥기켄, 손 안에 있다.[월간 꿈 CUM] 전대섭의 공감 (8)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에서 ‘가까이 왔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엥기켄’은 ‘손 안에 있다. 손 닿는 곳에 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머지않아 도래할 어떤 ‘실재’라고들 생각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도 그 시기가 언제일까 궁금해했고, 자기들 세대가 다 가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오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때(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디선가, 언제부터 ‘짠~’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손 안에’ 이미 와 있는 것입니다. 엥기켄, 즉 ‘손 닿는 곳에’ 있다고 했으니 바로 내가 하느님 나라요 이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요한 17, 2 1) 는 성경말씀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누구도 하느님 나라를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데, 예수님은 그런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영(성령)을 지녔기에 그 자체로 하느님과 한 생명입니다. 인간 심연에 새겨진 하느님의 영을 자각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하느님과 한 생명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 되는 곳, 바로 그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교회의 비유 가운데 ‘이미(already), 그러나 아직(not yet)’이라는 말도 유명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표현하지만, 저는 ‘이미’ ‘손 닿는 곳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에 주목합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곳, 성령을 통해 하느님과 한 생명임이 드러나는 곳인 하느님 나라의 속성은 사랑입니다. 자비입니다. 연민입니다. 연대와 일치입니다. 영혼의 지성소에 있는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개별적이면서 공동체적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과 하나된 영혼들이 만들어 가야할 세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손 닿는 곳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의 진면목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 모습을 봅니다. 그 사랑이, 자비가 연민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저 말씀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입니다.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은 본 대로 들은 대로 행하라는 준엄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글 _ 전대섭 (바오로, 전 가톨릭신문 편집국장) 가톨릭신문에서 편집국장, 취재부장, 편집부장을 역임했다. 대학에서는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바보’라는 뜻의 ‘여기치’(如己癡)를 모토로 삼고 살고 있다. cpbc2024.02.26

희생 제물[월간 꿈 CUM] 회개 _ 요나가 내게 말을 건네다 (18)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요나 2,10) 기원전 130년경 지중해 일대의 최고 패권 국가인 로마는 일찍이 그리스를 함락시키고 끝없이 영토를 확장하여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 (284~305년 재위) 황제 시대에는 이미 그리스는 물론 소아시아(튀르키예)를 비롯하여 이스라엘과 북아프리카 전부를, 서쪽으로는 스페인과 바다 건너 영국 땅까지 점령하는 대제국의 영토를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로마 대제국의 영토에서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변방 중의 변방이요, 보이지도 않는 작은 식민지였습니다. 바로 이런 작고 슬픈 역사를 간직한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식민지 백성으로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고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피눈물 나는 선교의 열정과 순교를 이겨내는 장한 믿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토록 빨리 로마 제국 전체로 복음이 불길 같이 퍼져 나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학자 들은 신약성경의 집필이 끝난 시기를 대략 서기 1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집필이 끝나고 본격적인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불과 100년 사이에 로마 대제국 내의 그리스도교는 이미 더 이상 박해로는 막을 수 없는 강력한 종교로 성장해 버렸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빠른 시간 안에 그리스도교를 확산시킬 수 있었을까요. 급기야 서기 300년이 시작되면서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 밀라노 관용령(313년)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박해를 멈추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합니다. 이것은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와 군사적으로는 훨씬 우세한 막센티우스 군대와 로마 근교 밀비우스 다리에서의 승리 때문이기도 하였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로마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인들을 죽일 수 없을 만큼 제국 내에 엄청난 신자들이 증가하여 손을 들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빠른 시간 안에 그리스도교의 성장을 가능케 했던 것일까요? 미국의 저명한 종교사회학자 겸 종교사가인 로드니 스타크 교수는 고대문헌 연구를 통해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로마 대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될 무렵 로마는 아주 끔찍한 두 번의 역병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첫 번째 역병은 천연두였을 것으로, 두 번째 역병은 홍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오늘날은 큰 병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로마 대제국 시대에는 이 역병으로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공포와 절망의 역병으로 민심은 흉흉했고, 도시 사람들은 봉쇄를 피해 달아나기에 급급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문을 닫아걸고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그저 자기 목숨만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시체는 쌓여갔고 죽음의 공포는 멈출 줄 몰랐습니다. 급기야 황제도 로마를 버리고 시골로 피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지옥 같은 도시를 떠나지 않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극진히 돌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끔찍한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박해의 죽음과도 맞섰던 ‘부활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의 뇌리 속에는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리시고 극진한 사랑으로 돌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가르침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신자들은 역병을 만나 죽어가는 환자들을 가까이에서 돌보며 면역력이 생기면서 강해졌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신자들은 유다교의 정결례법을 잘 지켜 청결을 유지했기에 역병에 더욱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눈물 나는 극진한 돌봄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저 탄복할 수밖에 없었고 감동적인 소문은 제국 내로 급속하게 퍼져나가 교회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믿었던 허황된 신화의 신들이 얼마나 거짓이고 조잡한지를 깨닫게 되어 유일신이신 하느님의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로드니 스타크 교수는, 이 역병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100%를 넘어 500% 이상 수직 상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의 놀라운 확장은 교우들의 죽음을 이긴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7) 그래서 요나는 다시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최고의 희생 제물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삶이 그 어떤 번제물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과연 삶의 마지막은 사랑입니다.” 배광하 신부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 바오로) cpbc2024.03.18

눅눅해진 심신 보송보송한 글로 다독여 볼까요삼복·장마에 읽을 만한 책 삼복에 장마가 겹쳤다. 폭염와 폭우가 이어지며 그야말로 찜통 속에 있는 듯한 요즘, 보송보송한 글로 눅눅해진 몸과 마음을 다독여 보자. 고전음악은 기도이자 친구 나의 음악, 나의 기도 / 원종철 신부 / 가톨릭대학교출판부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도 오늘날 우리에게 미완성으로 남아 있지만 보탤 것도 그 이상을 기대할 것도 없는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 좋은 작품으로서 그야말로 완벽한 미완성이라 할 수 있다. 절대자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작품으로서 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완성했다고 생각해도 그분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당신을 향한 과정일 따름일 테니까.”(86쪽) 제목처럼 음악과 기도가 어우러진 「나의 음악, 나의 기도」는 가톨릭대학교 총장 원종철(서울대교구) 신부가 이른 새벽 음악을 들으며 떠오른 단상, 그리고 경당에서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 미사 때 묵상 내용을 엮은 책이다. 저자가 고등학생 때부터 관심을 갖게 된 고전음악은 어느덧 좋은 친구이자 정화와 기도,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인도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미 2권까지 펴낸 「음악은 나의 기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이번 책에서는 브람스의 「대학 축전 서곡」·림스키코르사코프의 「러시아 부활 축제 서곡」·포레의 「레퀴엠」·구노의 「성녀 체칠리아 장엄미사」 등 웅장한 교향곡을 중심으로 크게 진리와 사랑(2요한 1,1)·시련과 인내(야고 1,2-3)·거룩함과 의로움(루카 1,75)·자유와 해방(갈라 5,1)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성경 말씀과 묵상은 물론 음악과 작곡가를 둘러싼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다채로운 경험을 엿볼 수 있다. 주로 명화로 장식된 즐겨 듣는 음반의 표지에 대한 정보도 흥미를 더한다. 사랑, 늘 미안하다 말하는… 사랑은 늘 미안하다 / 김용태 신부 / 생활성서 “홀로되신 어머니는 지금도 나만 보면 미안하단 말만 하신다. 사랑은 늘 미안한가 보다. 가진 것 다 주면서 더 주지 못해 미안하고 더 줄 수 없어 미안하다. 아무리 주어도 모자란 것 같은 마음, 끝이 없는 사랑, 다함없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런 게 아닐까? 우리를 기르시려고 당신을 양식으로 내어 주시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신다. 목숨이 다함으로 그 사랑이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 다시 사랑해 주신다.”(25쪽) 김용태(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장) 신부가 예수님께서 남기신 가장 큰 계명인 ‘이웃 사랑’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책을 펴냈다. 저자는 이웃과의 관계가 삭막해져 가는 현대사회에서 신앙인이라면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답답해하는 그 마음이라도 갖는 것, 그 아픔과 진실을 주위에 알리고 작은 정성만이라도 봉헌하는 것이 위로라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미안하다는 말을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서 듣는다”며 “사랑에서 오는 미안함, 그 마음이 이 세상에 더 많아지면 지금보다 훨씬 더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저자가 월간 「생활성서」에 여섯 해 동안 연재한 칼럼 가운데 우리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추려 실은 것이다. 김용태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방계 4대 후손이기도 하다. 이해인 수녀의 60년 단상집 소중한 보물들 / 이해인 수녀 / 김영사 이해인(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의 수도회 입회 60주년 기념 단상집이 출간됐다. 노을빛 여정에서 생각을 정리하며 쓴 단문·칼럼 그리고 신작 시 열 편을 엮었다. 어머니의 편지부터 사형수의 엽서까지, 첫 서원 일기와 친구 수녀의 마지막을 배웅하며 쓴 시, 열정 품은 동백꽃에서 늘 푸른 소나무까지 저자가 걸어오며 만나고 경험한 수많은 사람과 배경, 그에 얽힌 사연이 담겨 있다. 법정 스님과의 일화·김수환 추기경의 서간문·신영복 선생의 붓글씨 등 이미 하늘나라로 떠난 인연들과의 추억도 더했다. “기쁨 발견 연구원인 내 취미는 참으로 풍성하다. ‘글로 말로 누구를 기쁘게 해줄까?’를 구체적으로 궁리하는 것. 좋은 시나 글귀를 모아 맛을 들이고 만나는 사람에 맞춰 나눠주는 것. 나뭇잎, 꽃잎, 돌멩이, 조가비, 빈 병, 솔방울, 손수건들을 모아 예술성 있게 작은 선물을 만드는 것. 아름다운 풍경이나 마음 따뜻한 사람들의 말을 잊지 않고 적어두었다가 되새김하는 것. (중략) 모두가 기쁨을 찾는 ‘기쁨이’가 되도록 내 기쁨을 나눠주는 것.”(51쪽) “인생의 이별학교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모든 것은 언젠가 다 지나간다는 것을, 삶의 유한성을 시시로 절감하며 지금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결국 많이 감사하고 자주 용서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되지 않더라도 의식적으로 옆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깊고 넓은 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어느 날 찾아올 진짜 마지막 이별을 순하게 맞이하는 길이라고 말이다.”(101쪽) 정멜멜 사진작가가 지난 2022년 11월부터 최근까지 이해인 수녀와 동행하며 찍은 사진이 생동감과 정감을 더한다. 쉬운 게 축복은 아니라네 가문비 나무의 노래 / 마틴 슐레스케 / 유영미 옮김 / 니케북스 “어렵다고 모두 해가 되는 것이 아니고, 쉬운 것이 모두 축복은 아닙니다. 기름진 땅, 저지대의 온화한 기후에서 나무들은 빠르게 쑥쑥 자랍니다. 우리가 복으로 여기는 풍요로움도 종종 그렇습니다. 풍요로운 땅에서 나무는 기름지고 빠르게 자랍니다. 하지만 울림에는 부적합하지요.”(19쪽) 고지대에서 빼곡히 자라는 나무들은 바이올린 제작자에게는 가히 은총이다. 밑동에서부터 40~50m까지는 가지 하나 없이 줄기만 쭉 뻗은 가문비나무는 바이올린의 공명판으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지대에서 200년 넘게 서서히 자란 나무는 저지대에서 몇 년 만에 자란 나무와 견줄 수 없다. 「가문비나무의 노래」 한국어판 출간 10주년 특별판이 나왔다. 독일의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1965~)가 현악기의 제작 과정 자체를 예술이자 인생으로 비유하며 깊은 통찰과 영성을 담아내고 있다. 짧은 에세이를 365일 만날 수 있도록 구성했고, 세계적인 사진작가 도나타 벤더스의 흑백 사진이 더해져 짧지만 깊은 명상으로 이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4.07.17

오래전 그 날 밤의 기억[월간 꿈 CUM] 꿈CUM 신앙칼럼 (14) 그 날 밤,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통곡(cry unrestrainedly)이었다. 나의 통곡은 대한제국 시절 황성신문 장지연(張志淵, 1864~1921) 사장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을 슬퍼하여 토해낸 울분,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아니었다. 나의 통곡은 그처럼 고결하지 않았다. 나의 통곡은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옷을 잡아 찢으며 울었던 ‘다윗의 통곡’(2사무 1,11-12 참조)도 아니었다. 나의 통곡은 타인을 향한 애가(哀歌)가 아니었다. 나의 통곡은 작가 최명희(崔明姬, 1947~1998)가 소설 「혼불」에서 묘사한 “목줄띠가 퍼렇게 솟아 쏟아내는 어미의 통곡”도 아니었다. 나의 통곡은 그런 숭고한 사랑의 유출물이 아니었다. 나의 통곡은 그 날 밤 기도 중에, 진정으로 보잘것없는 나 자신을 발견한 뒤 터져 나왔다. 나는 그동안 ‘신앙은 겸손’이라고 생각했었다. 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교만이었다. 원래 가장 낮은 존재인데 더 이상 어떻게 아래로 내려간단 말인가. 겸손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었다. 가장 낮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됐었다. 그 날 밤, 알았다. 내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얼마나 보잘것없는 종의 신분인지 말이다. 교만한 삶으로 인해 파괴된 영혼의 부스러기를 보며 그렇게 나는 한참을 울었다. 구약성경에서 삼손은 참으로 복잡한 인물이다.(판관 13-16 참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폭력을 즐기는 듯한 인상도 보인다. 종교적으로 볼 때 금기인 몸 파는 여자와의 환락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인물이 성경에 영웅의 모습으로 들어온 것은 그의 ‘회개’ 때문이다. 하느님은 회개하는 아들과 딸을 넓은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머리카락이 잘려 힘을 잃고 적군에게 체포된 뒤, 두 눈까지 잃은 삼손의 회개와 절규의 기도는 나를 울린다. “주 하느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저에게 다시 힘을 주십시오 .”(판관 16,28) 그 날 밤,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목 놓아 쏟아내는 통곡’(cry unrestrainedly), 삼손의 통곡이었다. 그것은 은총이었다. 그것은 복(福)이었다. 글 _ 우광호 발행인 원주교구 출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94년부터 가톨릭 언론에 몸담아 가톨릭평화방송·가톨릭평화신문 기자와 가톨릭신문 취재부장, 월간 가톨릭 비타꼰 편집장 및 주간을 지냈다. 저서로 「유대인 이야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성당평전」, 엮은 책으로 「경청」 등이 있다. cpbc2024.02.19
![[금주의 성인] 성 예로니모 학자 (9월 30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3/09/19/QJs1695100944758.jpg)
[금주의 성인] 성 예로니모 학자 (9월 30일)347-419년, 이탈리아 출생, 교회학자, 신학교의 수호성인 예로니모 성인은 12살 때 로마에 가 도나투스라는 유명한 학자에게 수사학과 라틴어 문학을 배웠습니다. 주일에는 사도들과 여러 순교자의 성지, 특히 카타콤바를 방문하며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리베리오 교황에게서 세례를 받고, 프랑스를 여행하던 19살의 예로니모는 트리어에 정착해 정부 관리로 일하다 수도생활에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는 370년쯤 고향인 아퀼레이아로 돌아가 발레리아누스 주교의 지도를 받으며 같은 뜻을 가진 몇몇 동료와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373년 예루살렘을 순례한 뒤에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부했는데, 이때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기도 했습니다. 이후 예로니모는 칼치스 사막에서 2년간 은수생활을 하며 어느 랍비에게 히브리어를 새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은수자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 아리우스주의로 대립이 일어나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로니모는 379년 안티오키아에 다시 갔을 때 일정한 사목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바울리누스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예로니모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 성인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의 성경 주석 방법에 매료됐습니다. 이에 그리스어로 돼 있던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했습니다.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은 예로니모를 비서로 임명해 신·구약 성경 모두를 라틴어로 새로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습니다. 당시 서방 교회에서는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경이 있었지만, 교황의 요구는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로니모는 마르첼라 성녀와 바울라 성녀 등 상류층의 미망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수도생활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로니모에게 신임이 두터웠던 교황이 선종하자 일부 적대자들은 그가 여자들의 집을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을 보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예로니모는 로마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로 가 바울라 성녀와 그의 둘째 딸인 에우스토키움 성녀 등과 함께 이집트로 갔다가, 386년 여름부터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에 임했습니다. 귀족 부인이었던 바울라는 자신의 돈으로 세 개의 남자 수도원과 한 개의 여자 수도원을 세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바울라는 여자 수도원 원장을, 예로니모는 남자 수도원 원장을 맡았습니다. 이후 예로니모는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 동안 성경 번역 활동에 몰두하면서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부인과 사제의 독신 및 성인 유해 공경 반대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명확한 근거를 갖고 반박했습니다. 그럼에도 예로니모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계속된 성경의 라틴어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의 경우, 히브리어 원문을 토대로 라틴어로 번역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70인역 성경」을 배척하는 유다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며 새롭게 번역했습니다. 나중에 라틴어 성경에 대중적이라는 뜻의 「불가타」라는 이름이 붙여진 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는 트렌토 공의회에서 이를 공식적인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예로니모는 서방 교회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신학교의 수호성인 또는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cpbc2023.09.14

판관을 통해 이스라엘을 적으로부터 해방하시다[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12)판관 시대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착 후 왕정이 들어서기 전까지 약 220년간 12명의 판관이 활동하는 판관 시대를 보낸다. 프랑수아 부셰, ‘기드온의 번제물’, 유화, 18세기, 루브르박물관, 프랑스. 가나안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입니다.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창세 17,8) 가나안은 또 주님께서 약속하신 좋은 땅입니다. “너희가 차지하러 건너가는 땅은 언덕과 골짜기가 많은 땅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촉촉이 적셔 주는 곳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시며, 주 너희 하느님의 눈이 한 해가 시작할 때부터 한 해가 끝날 때까지 늘 살펴 주시는 땅이다.”(신명 11,10-12)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탈출 3,8) 가나안은 하느님의 땅입니다. “땅은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구약 성경은 가나안 땅의 경계를 동쪽 요르단 강, 서쪽 지중해, 남쪽 소금바다(사해) 남단에서 이집트 마른내 끝 바다, 북쪽 호르 산에서 하차르 에난까지라고 합니다.(민수 34,1-12) 셈어인 가나안은 구약 성경 안에서 ‘낮은 땅’, ‘자색’ ‘상인’ ‘서쪽 땅’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특히, 그리스 사람들은 가나안 지역을 헬라어로 자색 물감을 뜻하는 ‘페니키아’라고 불렀습니다. 이 지방에서 자색 염료로 물들인 옷감을 생산하는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히브리인들과 같은 서부 셈족계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들이 맨 처음 알파벳을 고안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 알파벳이 페니키아와 그리스로 전해져 유럽으로 퍼졌다고 합니다. 도시 국가를 이루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은 농경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생산을 목적으로 자식은 물론 짐승도 새끼를 많이 낳고, 곡식도 많이 소출하길 염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고, 황소 모양을 한 ‘바알’을 숭배하였습니다. 바알은 우리말로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있어 바알은 생명과 생산의 신이며 농사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겨울철 만물이 시드는 것은 바알이 죽음의 신인 ‘모트’와의 싸움에 졌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봄에 만물이 소생하는 것은 죽었던 바알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라고 믿어 가나안 사람들은 이를 기념해 봄 축제를 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다시 살아난 바알이 ‘아세라’(탈출 34,13; 신명 7,5; 판관 6,25) 여신과 결혼해 만물을 다시 생산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축제 의식으로 그들을 대신해 서로 음행을 했습니다. 신을 섬기는 의식 자체가 이렇다 보니 가나안 사람들은 성적으로 문란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가나안에 정착한 후 점차 가나안 사람들에게 물들게 됐습니다. 그래서 훗날 예언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빌론 유배 생활을 하게 된 것도 결국엔 히브리인들이 바로 바알 우상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할 거의 같은 시기에 에게 해와 이오니아 해, 크레타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해양 민족인 필리스티아인들이 가나안 해안지구에 상륙해 삶의 터전을 잡았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호전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리아와 가나안 땅에 정착 후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페니키아와 우가릿, 비블로스, 므기또, 벳 산 등 가나안의 여러 도시를 침공했습니다. 또 메르네프타와 람세스 3세 치하의 이집트 왕국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의 가나안 정착 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지역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력이 눈에 띄게 축소됐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과의 충돌도 잦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부터 왕정이 들어서기 전까지 약 220년 시기를 ‘판관 시대’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부족 동맹 시대’라고 이해할 수 있겠죠. 구약 성경 「판관기」에는 12명의 판관이 등장하는데 그중 여섯이 ‘대판관’, 나머지 여섯이 ‘소판관’으로 불립니다. 판관은 말 그대로 백성들의 여러 송사를 해결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판관 시대 판관들의 주요 임무는 이스라엘에 재난이 닥쳤을 때 각 지파를 소집해 적을 물리치는 군사 지도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협한 주적은 필리스티아족이었습니다. 「판관기」는 신명기계 학자들이 짜놓은 일정한 도식에 따라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이 우상인 바알을 숭배해 하느님과의 계약을 스스로 깹니다. 2. 이에 대한 처벌로 적들이 쳐들어옵니다. 3. 비로소 정신을 차린 이스라엘이 회개해 하느님께 구원을 간청합니다. 4.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판관을 통해 이스라엘을 적으로부터 해방해 주시어 평화를 되찾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2.22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고통받는 이들과 묵묵히 걸어온 10년수원교구 안산 생명센터장 조원기 신부,,, 생명센터 “치유 사목으로 세월호 유가족·시민 동반”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의 마음을 돌보기 위해 2014년 문을 연 수원교구 안산 생명센터의 센터장 조원기 신부가 미소 짓고 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 수원교구는 2014년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을 위해 안산 생명센터를 열고, 예수님 말씀대로 특히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는 10년의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심리상담부터 도자기·캘리그래피·뜨개질·유화 프로그램 등 다양한 활동을 접목한 치유 사목으로 세월호 유가족, 시민과 동반하고 있다. 특히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단원고 학생 유가족들이 사는 안산 지역에 자리하면서 교회가 그들과 함께하는 중심 역할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유화 프로그램으로 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안산 생명센터 센터장 조원기 신부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만난 자리에서 “수원교구를 비롯한 한국 교회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아픔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과 연대하는 이유는 성경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안산 생명센터는 우리가 고통 속에도 주고받는 사랑을 통해 치유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유가족이 안산 생명센터에서 자신의 고통을 내어놓고, 자녀를 화폭에 아름답게 담아내며 아픔을 희망으로 끌어올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그간 받아온 조건없는 사랑을 나누고자 직접 반찬을 만들어 홀몸 어르신을 찾아가고, 장기기증 서약에 동참하는 등 이웃을 위하는 실천을 하기에 이르렀다. 조 신부는 “아픔 중에도 위로가 되어주신 예수님 사랑을 느낀 이들은 다시금 이웃에게 사랑을 전함으로써 내 상처가 얼마큼 아물었는지 가늠하고, 나아가 더욱 치유되는 계기를 얻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곳곳에서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향한 비난과 멸시, 혐오 섞인 발언이 이어져 온 것도 사실. 조 신부는 “성경 표현을 빌리면 큰 물이 닥쳐야 집이 반석 위에 세워졌는지, 모래 위에 지어졌는지 알 수 있듯이 세월호 참사는 우리 안에 뿌리 깊게 자리했던,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극단적인 ‘사회적 단절’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했다. 2014년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며 크나큰 아픔을 겪는 우리 사회에 울림을 남겼다. 조 신부는 “교황님 말씀대로 사랑하는 가족과 자녀를 잃은 부모의 고통,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더 서로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편 가르기보다 중요한 고통과 사랑의 본질을 볼 필요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반과 기다림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조 신부는 “유가족 어머니들이 ‘신부님은 그들을 용서하라거나 회복을 강요하지 않고, 저희 고통이 치유될 때까지 기다려주셔서 좋다’는 말씀을 하곤 하셨다”면서 “우리 교회 또한 크나큰 고통 속에 있는 이들과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함께하고 기다려주는 역할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고 전했다. 안산 생명센터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더욱 손을 뻗을 계획이다. 조 신부는 “사목자로서 회복하는 여정에 초대해주신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도리어 매우 감사한 마음이 든다”며 “안산 생명센터는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반석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예수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도록 지속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박예슬2024.04.09

십자가 푯말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12) I.N.R.I가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 십자가 위로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뜻의 ‘I.N.R.I’가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십자가를 들고 예식을 거행하고 있다. OSV 교리실을 빙 둘러보던 학생이 십자고상을 한참을 바라보더니, “선생님, 십자가 위에 글자가 있는데 왜 새겨져 있는 것이고, 무슨 뜻이에요?”라고 질문합니다. 십자고상 위에 새겨진 ‘I.N.R.I’를 보고 묻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 궁금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전 저와 같이 궁금한 것이 많은 이 학생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상징과 상징어’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알파(A)와 오메가(Ω) 그리스어 문자 ‘A’와 ‘Ω''는 알파벳 첫 글자와 끝 글자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A’와 ‘Ω’는 일반적으로 시작과 끝을 나타내므로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시초부터 종말까지 우주를 지배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돼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묵시 22,13)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상징은 종종 십자가나 키로(☧)의 형태로 표현되며, 주님 부활 대축일에 사용되는 초에 새겨집니다. 키로(☧) 초대 교회의 중요한 상징이었던 ‘키로''는 그리스어 ‘그리스도(Χριστός)’의 첫 두 글자 카이(Χ)와 로(Ρ)를 따서 꾸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미하는 상징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널리 사용하는 예수님에 대한 상징으로, 제단·제구·제의 등에 쓰입니다. 물고기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그리스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의 어절 첫 글자를 따로 모으면 ‘물고기(ⅠΧΘΥΣ)’가 된다. 출처=Wikimedia Commons 물고기(ⅠΧΘΥΣ, 익투스) 물고기는 로마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서로를 알아보던 암호로 ‘그리스도’를 가리켰습니다. 그리스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의 어절 첫 글자를 따로 모으면 물고기(ⅠΧΘΥΣ)라는 단어가 됩니다. 예수 : Ⅰ - Ιησούς (예수스) 그리스도 : Χ - 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 하느님 : Θ - Θεος (테오스) 아들 : ϒ - Υιός (휘오스) 구세주 : Σ - Σωτηρ (소테르) 신약성경에서 물고기는 참된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표현됩니다.(마태 13,48-49; 루카 5,1-11; 요한 21,1-13 참조) I.N.R.I 이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요한 19,19)라는 뜻입니다. 로마의 유다 총독 본시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써 붙인 명패로, 예수님의 죄목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고상 위에 라틴어 어절 첫 글자를 딴 ‘I.N.R.I’를 붙입니다. 예수 : I - Iesvs (예수스) 나자렛 사람 : N - Nazarenvs(나자레누스) 임금: R - Rex (렉스) 유다인들 : I - Ivdaeorvm(유데오름) IHS 이는 예수님을 뜻하는 모노그램(두 개 이상 글자를 합쳐 한 글자 모양으로 도안한 합일문자)입니다. 예수의 그리스어 표기(Ιησούς)는 대문자로 ‘ΙΗΣΟΥΣ’ 또는 ‘IHCOYC’입니다. 로마자로는 ‘IHSOVS’라고 쓰는데, 이때 첫 3글자를 따서 만든 모노그램이 바로 IHS입니다. IHS는 15세기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가 처음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현재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창립한 예수회(Societas Iesu)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박모란 교리교사 cpbc2024.07.23

외딴 곳으로 벗어나다 (02)[월간 꿈 CUM] 노호영 신부의 사진 이야기 - 어둠 속 별을 바라보며, 따라가며 (10) 뉴질랜드 킹스턴(Kingston)의 오로라 성경 안에서 벗어남은 종종 떠남을 의미한다. 기존의 삶과 터에서 벗어났기에 성경 속 인물들은 주님께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었다. 이렇게 떠남을 통해 주님을 만난 인물들이 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 12,1.4) 아브라함이 우리 신앙 안에서 믿음의 아버지로 기억되는 그 근본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의 터전에서 떠났던 그의 선택이 자리하고 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메시아의 탄생에 함께했던 세 명의 박사들 또한 동방에서 빛나는 별을 보고 자신들의 터전에서 떠났기에 그 여정의 종착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19 -20) 베드로 사도를 포함해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배와 그물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복잡한 인간관계, 챙겨야 하는 많은 일, 그리고 잘 변하지 않는 내 주변 환경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가? 인간이 만든 수많은 빛 속에서 하느님의 별을 구별해 낼 수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떠남과 벗어남이 무엇으로부터의 도망이나 회피는 아니다. 아브라함과 동방 박사들, 그리고 사도들이 보여준 떠남은 주님을 찾아 분연히 떠날 수 있는 용기와 그 여정 속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인내가 포함된 선택이다. 이러한 선택을 나는 지금 하려 하는가? 뉴질랜드 푸카키 호수(Lake Pukaki)의 은하수 글·사진 _ 노호영 신부 (미카엘, 대전교구 고덕본당 주임) 사진으로 아름다움을 담아내려 노력하는 신부. 8년 전부터는 자연 속의 경이로운 순간들, 특히 밤하늘의 별과 은하수를 쫓아다니며 하느님의 피조물을 촬영하고 정리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제13회 ‘서울시 빛공해 사진공모전’ 최우수상, 제26회·제28회 ‘천체사진공모전’ 금상 및 우수상을 비롯해 다수의 사진 공모전에서 수상했다. cpbc2024.01.31

화폭에 그리는 나만의 성경 공부김형주 작가의 성미술 개인전, 명동 갤러리1898에서 23~28일까지 요한 복음 묵상 후 벅찬 감흥을 표현한 ‘로고스의 찬가’. 김형주(이멜다) 작가의 개인전이 23일부터 28일까지 서울 명동 갤러리1898에서 열린다. ‘아름다운 것들 깊은 이야기와 함께’를 주제로, 갤러리 전관에 수채화와 추상화, 유화 등 170여 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같은 장소에서 지난 2016년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쌓인 작품들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요한 복음을 묵상하며 담아낸 81점의 수채화와 그 감흥을 표현한 추상화가 중심을 이룬다. “작년부터 요한 복음에 빠져서 하루 7~8시간을 그렸어요. 그냥 읽을 때는 몰랐는데, 그림으로 그리다 보니까 그렇게 힘차고 아름다운 복음이 없더라고요. 우리는 색을 보고 뭔가를 그리는 사람이니까, 눈으로 읽기만 하는 것보다 그걸 생각해서 그림으로 표현할 때 훨씬 더 깊이 들어가거든요. 요한 복음도 그렇게 작업하다 보니 아주 생생하게 느낌이 왔어요.” 성경을 화폭에 옮기는 것은 김 작가만의 심도 있는 성경 공부인 셈이다. 하지만 성미술만큼 조심스럽고 책임감 있는 작업도 없다. 개인의 작품을 떠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내가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성경 공부를 하는 거지만, 성경 그림은 책임감이 필요해요. 신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보잖아요. 개인 작품과는 차원이 달라요. 성경을 많이 공부해야 하고, 교회 지침에서 벗어나서도 안 되고요. 구성이나 표현은 작가적인 창의성을 드러낼 수 있지만, 내용은 그대로 담아내야 하니까 주교님이나 신부님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듣죠. 또 품위가 있어야 하고, 그림 자체가 배타적이지 않아서 색이나 형태에 있어 거부감이 없어야 하고요.”그래서인지 김 작가의 작업실에는 곳곳에 성경과 손글씨와 밑줄이 더해진 주해서 인쇄본 등이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도 요한 복음을 묵상한 작품은 각 절을 기준으로 분리하여 81점의 수채화로 표현한 반면 거기에서 오는 감동은 작가적인 느낌을 충만히 살려 추상화로 담아냈다. 2002년 제7회 가톨릭미술상을 수상한 김형주 작가의 성미술은 전국 곳곳의 성전에 걸려 있다. 배론성지의 ‘최양업 신부’ 초상화도 작업했다. 하지만 김 작가의 본업은 추상화가다. 1970년 서울대 미술학과를 졸업했고, 내내 추상화로 국내외를 누비며 작품 활동을 펼쳤다. 성미술과의 인연은 40대에 서울가톨릭미술가회에 들면서부터다. “추상화로 나름 날렸죠.(웃음) 그런데 선생님들이 가톨릭미술가회에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거기 우리 학교 교수님들이 많이 계시는 거예요. 덕분에 다시 막내로 총무를 맡아서 이 일 저 일 다 하면서 교회 미술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됐어요. 특히 1995년부터 장익 주교님과 우리나라 가톨릭 미술에 대한 세미나를 3년간 진행했어요. 당시 성전을 많이 짓는데, 성당 건축부터 내부에 들어가는 성미술, 성물 등에 대해서 공부하고 전시하고 실제로 작업도 하고요.”그 3년이 김 작가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선생님들을 따라다녔고, 이후에는 그녀가 주축이 되어 부름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찾아 나섰다. “우리 세대는 미술대학에서 종교미술이란 걸 따로 언급하지 않았어요. 그저 미술의 역사였죠. 그런데 장 주교님과 세미나를 하다 보니 우리 작가들이 우리 성전에 맞는 미술을 작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니면 어디 다른 나라에서 사올 거 아녜요. 그때 얼마나 마음이 순수했겠어요. ‘어디 좀 봐줄래?’ 하면 아무리 멀든 내 돈이 들든, 내 재주껏 잘할 생각만 했어요. 맹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미술가로서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 거죠.”그렇게 1998년 광주가톨릭대학교를 다시 지을 때부터 최근 청주교구 멍에목성지까지 그녀의 손길이 닿고 작품이 담긴 곳은 무려 120곳에 달한다. 뒤돌아보니 하느님이 공짜로 시키지는 않으셨단다. “성미술을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교회 일을 멈춘 적이 없어요.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곳에서 연락이 오고. 이른바 돈이 되지도 않아요. ‘차비도 없어요’라며 시작하는 곳도 많거든요.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조각가나 공예가에게 맡기면 돈이 많이 들고 교회 재정으로는 살 수 없는 것도 많으니까 그냥 내가 돌도 짜고, 뚝딱 만들고. 그렇게 훈련을 받다 보니 무슨 돌은 어떻게, 감실은 어디에, 십자가 무게는 어느 정도, 어느덧 전체적인 그림이 보이고 척척 일이 진행되더라고요. 무엇보다 내 재주껏 힘쓰다 보면 성전이 완성되고, 축성하는 미사를 드릴 때면··· 그게 보람이죠.”(웃음)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cpbc2022.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