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삶과 신앙 굳건히 지켜온 ‘옆집의 성인들’[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14. 할머니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묵주를 든 처네 쓴 할머니’,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신앙 전수자이자 지혜 전해주는 영적 스승 조부모, 특히 할머니는 집안에서 ‘신앙의 전수자’다. 아울러 가정에 지혜를 전해주는 ‘영적 스승’이시다. 구교우라면 항상 묵주기도를 하고 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또 묵주기도뿐 아니라 아침저녁 기도와 삼종기도 등 모든 기도를 할머니에게서 배웠고, 늘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를 추억할 것이다. 할머니의 간구로 집안에 성직자·수도자가 배출됐고, 신앙의 명맥이 이어졌다. 그래서 할머니는 가정 교회의 으뜸 교리교사다. 할머니의 가르침으로 가족 구성원들은 어릴 적부터 도덕의 가치를 깨닫고 하느님을 흠숭하기 시작하며,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집회서는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고,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고 가르쳤다.(집회 3,2-6 참조) 아울러 잠언은 “손자들은 노인의 화관이다”고 했다.(17,6) 바오로 사도도 티모테오에게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2티모 1,5)라며 할머니의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지혜로우신 우리 할머니들은 자녀와 손주들의 신앙 교육에 있어 단순히 기도만 가르치시지 않았다. 그분들은 ‘덕’을 가르쳤다. 가정은 덕을 가르치기 딱 좋은 곳이다. 좋은 표양으로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삶을 영성적 삶으로 고양시켰다. 때로는 엄한 훈육으로 매섭게 대하셨지만, 그들 나름대로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권장하고, 하느님 소명을 일깨우는 데 힘쓰셨다.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갓등이 신자 가족’, 유리건판, 1911년 4월, 갓등이 교우촌,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보석과도 같은 신앙 열정 풍겨나는 할머니 이번 호에는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사진에 담은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을 소개한다. 먼저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3월 오늘날 경기도 의왕에 자리한 하우현성당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묵주를 든 처네 쓴 할머니’<사진 1>을 촬영했다. 당시 하우현본당은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르 각 신부가 사목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통과 궁핍 속에 자랐고 일용할 양식을 척박한 대지에서 힘겹게 얻었다. 그들의 부모는 일찍이 신앙을 위해 전 재산을 버렸다. 사랑하는 이들은 망나니의 칼에 피를 뿜었다. 쓰라린 빈곤 속에서도 신앙은 그들을 둘러싼 험준한 바위처럼 굳건했다. 존경스런 노인들도 오셨다. 뜨거운 믿음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저 눈동자들! 이 산골짜기에서 신앙을 구했고, 신앙은 그들의 전부였으니 그들이 이 산골짜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91~193쪽) 베버 총아빠스는 박해 시대 교우촌을 일군 하우현성당 교우들을 애잔해했다. 그러면서도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노인들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는 하우현 교우촌의 표징 중 하나로 묵주를 든 할머니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할머니는 오른손으로 묵주를 들고, 왼손은 지팡이를 꼿꼿하게 쥐고 있다. 미사보 모양으로 처네를 쓰고 머리를 감춰 성직자에게 예를 표하지만 허리를 곧추 세운 당당한 모습은 어떠한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온 삶과 신앙의 흔적을 증거한다. 무엇보다 평화로운 할머니의 얼굴에서 보석과도 같은 신앙의 열정이 풍겨 나온다. 베버 총아빠스는 같은 해 4월 초 갓등이성당을 방문했다. 그는 또 한 번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해 옹기를 굽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교우들을 조우했다. “빈털터리로 쫓기던 박해 시절, 옹기 일은 그나마 안전한 직업이었다. (⋯) 그때도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깊은 신앙과 뜨거운 사랑은 식을 줄을 모른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50쪽)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장옷 입은 할머니와 손주들’, 유리건판, 1911년 2월, 서울 근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늘 기도하는 엄마와 박해를 이겨낸 할머니 베버 총아빠스는 갓등이 교우촌에서 할머니와 며느리·손녀 둘을 주인공으로 신앙 3대 가족을 촬영했다.<사진 2> 할머니는 갸름한 얼굴과 가냘픈 몸을 하고 있지만 손녀를 안고 있는 두 손만큼은 굵고 힘세 보인다. 가끔 말보다 손짓 하나가 더 웅변적일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은 모름지기 손을 바로 지녀야 한다. 검게 그을고 굵고 단단한 할머니의 손은 ‘신뢰’와 ‘공감’을 안겨준다. 신앙 전달자의 강인함을 잘 보여준다. 반면 기도서를 들고 있는 며느리의 손은 곱다. 쌍가락지를 한 고운 손이 자신을 거두어들이듯 몸을 감싸며 겸손을 드러낸다. 겸손하고 차분한 며느리의 고운 자태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온유와 품위를 내비친다. 할머니와 며느리는 존재 그 자체로 손녀와 딸에게 아름다운 표양이 된다. 늘 기도하는 엄마와 박해를 이겨낸 할머니에게서 배우고 자란 그들은 벌써 기도 자세가 몸에 밸 만큼 잘 성장했다. 낯선 서양 신부의 모습에 놀라 칭얼대는 막내 때문인지 아니면 이런 멋쩍은 일을 제공한 베버 총아빠스 때문인지 큰 애는 뾰로통한 얼굴로 카메라를 노려본다. 그런데도 그의 손은 엄마처럼 몸을 감싸고 있다. 우리 몸에서 오직 십자성호를 그을 수 있는 지체가 바로 손이다. 위 아래로 손녀를 안고 있는 할머니의 손과 몸을 감싸고 있는 며느리와 큰 손녀의 손은 우리에게 십자가 형상을 보여준다. <사진 4>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수도원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도안으로 사용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2월 말 백동 수도원이 자리한 동소문 밖 서울 근교에서 장옷을 입은 할머니와 손주들을 촬영했다.<사진 3> 장옷은 일종의 머리 덮개다. 손자 둘에 손녀 하나를 얻은 복된 할머니이다. 할머니 얼굴에는 손주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비친다. 손주들도 그 사랑을 잘 아는지 밝고 행복해 보인다. 특히 이 사진은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성당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도안으로 사용되었다.<사진 4>우리옷의 다채로움을 볼 수 있는 가치있는 사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현대로라면 손주를 부양하는 데 희생을 아끼지 않는 할머니는 ‘옆집의 성인’이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할머니의 얼굴에는 한결같은 일상의 성덕이 엿보인다. 외간 서양 남자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사진을 찍지만 눈을 마주치지 못해 지그시 내리깔고 있다. 꼭 상대를 보지 않아도 그 본성을 꿰뚫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22)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5.01.15
![[생활 속의 복음]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예수님 부활하셨네](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3/26/Cqq1711446788272.jpg)
[생활 속의 복음]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예수님 부활하셨네 부활 사건 전후 두 가지 사실에 주목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 시초부터 의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마태 28,11-15 참조) 선례가 없던 사건이고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나 증언도 없기에 직접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활 사건 전후의 두 가지 사실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그분의 제자들이 모두 흩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 죽음 직후에 흩어졌던 그 제자들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 죽음으로 실망하고 두려워했던 제자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태도를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그 사이에 어떤 획기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약 성경은 그 획기적 사건이 바로 예수님 부활이라고 증언하고 있고, 그 내용이 빈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 오늘 복음은 빈 무덤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에는 매장을 금지하는 유다인의 관습에 의해 예수님의 시신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급히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무렵 이미 안식일의 휴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간 첫날,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다는 사실조차 두려워 숨기고 도망가던 상황에서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 안에 시신은 없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동굴 형태의 무덤들을 통상 무거운 돌로 막았는데, 그 돌은 장정 몇 사람의 힘으로도 거의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빈 무덤 보고도 부활 믿지 못한 제자들 깜짝 놀란 마리아는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이 그분의 시신을 꺼내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그 길로 제자들이 숨어있는 다락방으로 달려가 자기가 발견한 일을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아마포와 예수님의 얼굴을 싸맸던 수건을 보았고,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요한 20,9)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에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여러 차례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활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이후에야 주님 부활을 믿게 됩니다. 비록 빈 무덤 이야기가 그 자체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떠받쳐주지 못하지만, 부활 신앙의 기초이고 부활에 대한 전체적인 증언의 한 요소입니다. 빈 무덤 증언으로 부활에 대한 믿음이 선포될 수 있었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갈 내적 힘을 얻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무거운 돌을 치워버리셨습니다. 그 돌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 삶에 지워진 힘들고 버거운 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짐을 쉽게 내던져버릴 수는 없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굳은 믿음과 하느님 은총으로 훨씬 수월하고 기쁘게 그 짐을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시작과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내적인 힘과 용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유승록 신부cpbc2024.03.27

야훼 하느님과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10)시나이 산 계약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산에서의 하느님과의 계약을 통해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된다. 미켈란젤로 작 ‘모세’, 대리석상, 성 베드로 대성전, 바티칸.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광야 생활을 하다가 시나이 산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신비로운 신앙 체험을 합니다.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산의 신앙 체험에서 가장 주도적이고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가 없었다면 하느님께 대한 히브리인들의 신앙이 없었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모세는 압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신비로운 신앙 체험을 했다는 것은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야훼는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있다’는 의미는 단순히 철학적 존재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있는 분’ ‘지금 바로 여기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 야훼는 ‘있게 하는 분’으로도 해석됩니다. 있게 하는 분은 ‘창조 활동을 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 조건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순종하여 율법인 ‘십계명’을 지키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계약을 잘 준수하면 종살이에서 ‘해방’ 시켜 주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으로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계약으로 이스라엘은 ‘유일하신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탄생합니다. 주변의 다른 민족들은 자연 현상이나 동물을 숭배하는 종교의식을 행한 것에 비해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이라는 역사적인 실제 사건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야훼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보다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축제를 중요한 종교 의례로 지내게 됩니다. 이 축제는 사실 하느님께서 이집트 탈출 이전부터 모세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가서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나의 백성이 내 앞에서 축제를 올리도록 광야로 내보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야훼가 누군데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느냐? 나는 야훼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이스라엘을 내보낸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하며 거절하였다. 그들은 말하였다. ‘히브리인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을 나가 우리 하느님 야훼께 제사를 드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공동번역 「성서」출애굽기 5,1-3) 사흘 길을 나가 우리 하느님 야훼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유목민들의 봄 축제를 뜻합니다. 해방절인 파스카 축제는 바로 유목민들의 봄 축제에서 기원한 것인데 이스라엘은 이것을 이집트 탈출 사건과 결부시킨 것이지요. 또 이스라엘 민족의 무교절과 주간절, 초막절은 농사와 연결된 축제인데 이것 역시 이집트 탈출 사건과 연관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축제가 바로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지요. 파스카 축제인 무교절(해방절)은 탈출기 본문에 이미 나온 것과 같이 종살이에서의 해방 순간을, 수콧이라 하는 초막절은 광야에서 머무른 것, 주간절이라고도 하는 오순절은 시나이 산 계약 체결과 연관돼 있습니다. 이 축제들은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에서 ‘이상적인 시기’(예레 2,2; 호세 2,14-15)와 ‘시험과 유혹의 시기’(신명 8,2-3)를 기념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느님의 이끄심을 기념하는 거룩한 제사 곧 축제를 통해 거룩한 민족,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관계는 ‘신명기 시대’부터 시작해 갈수록 점점 더 이스라엘과 그들 하느님의 관계를 해석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리고 이 계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계약’ 곧 신약(新約)으로 표명됩니다.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산 계약은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치적 해방’의 의미가 있습니다. 곧 새로운 질서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보장돼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종살이에서 해방과 자유라는 새로운 질서로 들어가기 위해선 ‘신앙의 정화’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바로 ‘광야 생활’입니다. 광야를 떠돌면서 히브리인들은 많은 고생을 하고 불평불만을 털어놓고 가끔 하느님께 대한 신앙도 저버립니다. 광야는 고난과 시련이 끊이지 않는 인간의 현실 세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신앙만 있다면 인내와 희망으로 이 고된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광야 생활에서 ‘만남의 천막’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의 샘이었습니다. ‘성막’이라고도 하는 이 만남의 천막의 계약 궤 안에는 야훼 하느님과 맺은 십계명 증언판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떠돌면서도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성막 안에서 현존하신다는 확신하고 모든 시련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2.08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저는 믿나이다](2)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계시에 기인한다. 이 신앙 고백은 그리스교 신앙의 근간이다. 예수 그리스도, 납화법 이콘, 6세기, 시나이산 카타리나 수도원, 이집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귀담아듣는 데서 생겨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이하 「계시 헌장」)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라고 밝힙니다.(2항) 어느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로 가실 때 길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라 하는 이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자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6,13-17; 마르 8,27-30 ; 루카 9,18-21 참조) 복음서 내용처럼 세상 사람들은 결코 예수님의 신원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그들의 필요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나 위대한 예언자처럼 예수님을 우러러보지 자신과 똑같은 한 인간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제자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베드로의 말은 최초의 신앙 고백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간입니다.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의 참모습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시’라고 합니다. 모든 계시는 하느님에게서 기원하고 시작됩니다. 계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아버지로 드러내시며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계시를 완성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위로자이신 성령을 통해 교회와 인간이 계시를 통찰할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초자연적인 은총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이 있으려면 하느님의 도움의 은총이 선행되어야 하며,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계시 헌장」 5항) 바오로 사도는 더 직설적으로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1코린 12,3 참조)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알려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믿는 것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하실뿐 아니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고 하십니다.(요한 14,9) 왜 이런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을까요?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요한 1,18)이시기에, 또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보여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마태 11,27)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영성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위해선 요한 복음서를 읽으라고 추천합니다. 시작부터 예수님의 참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를 단순히 읽는 것에 그치지 말고 믿음과 사랑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말씀을 들으라고 권고합니다.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말씀은 육신의 귀만으로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므로 겸손하고 경건한 영혼만이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럼 요한 복음서 서문을 통해 예수님의 참모습을 관상해 봅시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18)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 선임2024.11.12

AI와 패러독스[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10) 연중 제15주일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했다.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후 사람을 만들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창조하기도 전에 우리를 선택했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자 역설이다. 모순을 ‘패러독스(paradox)’라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역설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혼돈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적능력을 AI가 추월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패러독스와 관련한 질문에는 아직 AI도 논리적인 결과치를 내놓지 못한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 패러독스 자체가 비논리적이고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현재 개발되고 있는 AI 반도체는 INT8(8비트 정수)에서 1초당 최대 315조 회의 연산(TOPS)이 가능한 막강한 성능을 자랑한다. 상상하기 어려운 놀라운 연산속도다. 이런 막대한 기술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AI의 한계 역시 명확하다. 패러독스 때문이다. 반도체 설계의 전설로 불리는 짐 켈러에 의하면 AI 개발자들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능력은 코딩이나 프로그래밍이 아닌 예술과 기초과학이다. 읽고 쓰고, 생각하고, 연극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수학·물리학·생물학·역사를 배워야 한다. 기초 없이 쌓아 올린 컴퓨터 과학이나 아키텍처는 무너질 수밖에 없으므로 항상 생각하는 힘과 기초를 쌓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논리로만 바라보는 개발자에게 패러독스는 버그(bug)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종종 접하게 되는 양자역학 역시 ‘패러독스’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론으로 설명되기 힘들다. 양자역학은 아무리 기묘하고 부조리한 사건이라도 일어날 확률이 제로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주생성의 비밀을 쥐고 있다는 현대 물리학의 기초 학문이 패러독스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많은 이가 장래 AI가 예술가의 영역을 침범할 수 있을지 물어본다. 솔직한 대답은 ‘모른다’이다. 프로그램을 해본 사람들은 이해하겠지만 AI가 어떠한 결과를 내놓더라도 논리구조의 기본은 사람이 만든다. 우리가 모르는 특출한 천재가 AI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결국 AI는 사람이 만든 프레임 내에서 발전하고 진화하고 변용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결괏값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다. 누구도 자동차보다 느리다고 침울해하지도 않고, 기중기보다 힘이 약하다고 절망하지 않는다. 사람은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보고 동경했고 수천 년을 사는 나무를 보고 놀라워했다. 분명한 차이는 자동차와 기중기는 사람이 만들었지만 새와 나무는 주님이 창조한 생물이라는 점이다. 만일 사람이 만든 것에 대해 사람이 동경하고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조물주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 계시다. AI에 대한 인류의 견제는 그 자체가 패러독스가 아닐까 한다. AI가 작곡한 베토벤 교향곡 10번 https://youtu.be/Rvj3Oblscqw?si=MdgzwXHkvVfyoTbJ 류재준 그레고리오, 작곡가 / 서울국제음악제 예술감독, 앙상블오푸스 음악감독cpbc2024.07.10

우크라이나 아이들에게 전달된 말씀, 위로와 치유의 힘 되길ACN 한국지부·CPBC, 우크라이나에 ‘어린이 성경’ 지원 전쟁의 고통 속에 지내는 우크라이나 가정과 어린이에게 ACN 한국지부가 ‘ACN 어린이 성경’과 ‘마르코 복음’을 지원한다. 우크라이나 어린이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다. 【CNS】 올해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아픔과 전쟁의 땅 우크라이나에 ‘말씀’이 전달된다. 교황청 재단 고통받는 교회돕기(ACN) 한국지부(지부장 박기석 신부)가 ‘ACN 어린이 성경’ 4만 부와 ‘마르코 복음’ 3만 부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게 된 것이다. 전 세계 전쟁과 박해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많은 지원을 해오고 있는 ACN 한국지부가 말씀의 빛으로 어둠을 비추는 아름다운 결정을 해낸 셈이다. 이를 위한 정성은 CPBC 가톨릭평화방송ㆍ평화신문 시청자와 독자, 후원자들이 마련했다.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일이 가능했을까. 성서 주간(20~26)을 맞아 우크라이나 가정과 어린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ACN 어린이 성경’ 지원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ACN 한국지부와 CPBC가 함께 만든 기적“러시아 침공으로 고통을 겪는 우크라이나 교회에 ‘어린이 성경’을 지원하고자 합니다.”지난 7월 13일 전 세계 23개 나라에 지부를 두고 있는 교황청 고통받는 교회돕기(ACN)의 지부장 전체 회의가 비대면으로 열렸다. ACN 본부의 키라 폰 보크이와니누크 프로젝트 커뮤니케이션 실장은 이 자리에서 “전쟁으로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해 줄 영성 서적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ACN 어린이 성경’인 「하느님이 당신 자녀에게 말씀하신다」의 우크라이나어판 지원 계획을 피력했다. 그렇지 않아도 각국 ACN 지부들은 전쟁이 발발한 올해 계속해서 우크라이나 교회를 지원해오던 터였다.각국 ACN 지부장들은 일제히 새 프로젝트에 찬성했다. 영국과 호주, 벨기에, 그리고 한국지부장 박기석 신부가 프로젝트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작은 기적은 이후에 일어났다.ACN 한국지부는 앞서 5월 15일 자 가톨릭평화신문 사랑 나눔 기획 보도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를 통해 우크라이나 난민 지원을 절실히 요청한 바 있었다. 이어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ACN 후원자의 날이기도 했던 6월 24일에도 박기석 신부가 가톨릭평화방송 TV 매일미사를 주례하며 우크라이나를 향한 관심을 호소했다. 신문과 TV를 본 이들은 즉각 응답했다. 신문을 본 독자들의 정성이 3966만 원, TV 매일미사 시청 후 ARS를 통해 들어온 후원금이 2000여만 원에 이르렀고, ACN 한국지부에 전달됐다.‘엇, 금액이 꼭 맞네?’ 계산해보니 마침 본부가 ACN 어린이 성경 지원 사업을 위해 산정한 금액과 ACN 한국지부가 가톨릭평화방송ㆍ평화신문을 통해 받은 성금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박 신부는 이후 ACN 본부에 다시 연락했다. “한국지부가 우크라이나 어린이 성경 지원 사업을 전액 도맡아 지원하겠습니다.” ACN 본부 측은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기쁜 소식”이라며 화답했다. CPBC 시청자와 독자들이 보내준 정성이 ACN 한국지부의 결정을 통해 우크라이나로 가게 된 것이다.전쟁 속 따뜻한 말씀의 손길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국제사회는 우크라이나 전쟁 사망자가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본다. 우크라이나 난민은 누적 1500만 명에 육박하며, 어린이와 여성이 90%를 차지한다. 국내 실향민만 600만 명이 넘고, 우크라이나 어린이의 절반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성당과 교회 시설, 교육 기관들이 포탄에 무너졌고, 수많은 실향민이 신학교와 수도원 등지의 지하시설을 대피소 삼아 피신해 있다.ACN은 이들을 위한 영적, 정신적 치유의 원동력이 ‘말씀’에 있다고 확신하고 성경을 지원하게 됐다. 현지 인쇄소들이 파괴되어 제 기능을 못 하게 되면서 ACN이 기금을 마련해 성경을 인쇄 및 전달하는 것이다. ACN은 1979년부터 어린이 성경을 제작해 보급하고 있으며, 현재 191개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이번에 전달될 우크라이나어 ‘ACN 어린이 성경’ 수만 권이 현지 교회 작은 본당에까지 전달될 예정이다. 현지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요청에 따라, 성경 속 삽화도 그들에게 익숙한 이콘으로 제작됐다. 이와 함께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로마제국의 박해에 관한 배경이 담긴 마르코 복음 3만 부도 우크라이나 성인 난민들에게 전달된다. ACN 본부는 ACN 한국지부와 한국 교계 언론인 CPBC와 일군 아름다운 합작품에 감사의 뜻을 재차 표했다.ACN 한국지부장 박기석 신부 인터뷰“아이들 마음속에 무기 대신 평화와 사랑을”“다른 어떤 지원 물품보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CPBC와 함께 지원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입니다.”ACN 한국지부장 박기석 신부는 10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2015년 아시아에서 처음 탄생한 ACN 한국지부가 다른 선배 지부들과 비교하면 ‘막내급’에 해당하는데,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활발히 지부를 운영하는 저희가 CPBC와 함께 따뜻한 사명을 실천할 수 있게 돼 큰 은총으로 여긴다”고 밝혔다. ACN 본부 측은 이처럼 지역 교회 언론사와 협력해 박해받는 교회를 지원해준 한국 후원자들의 신앙심에 크게 놀라워했다고 한다.박 신부는 “ACN의 세 가지 사명이 알리고, 기도하며, 행동하는 것인데, 교계 언론과 저희가 이 사명에 따라 함께 알리고, 기도하며 이웃을 돕고자 행동하게 된 것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박 신부는 “우크라이나는 현재 가정에서 신앙 전수의 큰 역할을 해야 할 아버지는 전쟁터에 나가고, 성경을 함께 읽어야 할 가정은 파괴된 상황”이라며 “남겨진 어머니와 자녀는 하느님 말씀 안에 치유의 은총을 받아야 하고, 기도로 희망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박 신부는 “지금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은 그림에 탱크, 미사일과 같은 것들을 그리는데, 이는 그들에게 깊이 새겨진 상처이고 아픔”이라며 “아이들 마음속에 무기 대신 주님 말씀 속 평화를 그리고, 사랑이 꽃피도록 해줘야 한다”고 전했다.박 신부는 성서 주간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우며 “가정에서 말씀과 기도를 시작하는 주체는 부모이며, 이를 물려받은 아이는 그 안에서 즐거움과 기쁨, 은총의 풍성함 속에 살고 다시 전수하게 된다”며 “그렇기에 우크라이나에도 말씀이 가야 하고, 우리는 기도로 함께해야 한다”고 거듭 관심을 요청했다. 후원 문의 : 02-796-6440후원 계좌 : 신한은행 100-031-121620, (사)고통받는교회돕기한국지부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cpbc2022.11.16

하느님의 이끄심 고백하는 성조들의 이야기[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8)성조 시대 구세사 성조들의 이야기는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과 많은 자손을 얻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과 결합돼 있다. 땅과 자손은 그들의 생활과 신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복이다. 그림은 Jozsef Molnar의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떠나는 아브라함 가족. 1850, 위키피디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부터 시작됩니다. 이집트 탈출 후 시나이 산에서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부족 동맹 체제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은 하느님 구원의 역사 곧 구세사를 원조(元祖)들과 이스라엘 성조(聖祖)들의 역사까지 소급합니다. 창세기 12장 1절부터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 등장 이전을 ‘태고사’로, 아브라함부터 요셉까지(창세 12─50장)를 ‘성조 시대’ 곧 거룩한 조상들의 역사로 구분합니다. 창세기 1─11장 태고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구세사의 서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가설이지만, 성경학자들은 성조 시대를 기원전 1900년께부터 기원전 1700년께까지라고 봅니다. 근래에는 기원전 2000년부터 이집트 탈출 직전인 기원전 1290년까지를 성조 시대로 잡기도 합니다. 성경고고학자들은 창세기 내용을 발굴 유적 유물과 비교 조사한 결과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시기를 중기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2000년~기원전 1900년께라고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셈족의 대이동이 있었습니다. 가족이나 씨족, 부족 단위로 이주할 때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의 친족도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칼데아 우르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이주합니다. 하란은 ‘파딴 아람’(창세 25,20; 28,2)과 ‘아람 나하라임’(창세 24,10)으로도 불린 유프라테스 강과 카부르 강 사이에 위치한 아람인의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 살다가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창세 12,1-3)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이 부르심에 따라 아내 사라이, 조카 롯과 함께 전 재산을 가지고 새로운 땅 ‘가나안’을 향해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가나안 땅 스켐이었습니다.(창세 12,6) 오늘날 나블루스 근처 텔 발라타(Tell Balata) 입니다. 유목민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아브라함은 베텔과 아이 등 산악 지역으로 이주했다가 헤브론 남쪽 지역 네겝으로 이주했습니다.(창세 12,9) 또 가뭄을 피해 이집트로 가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이 사이에서 이사악을, 이집트 여종 하가르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사악은 브투엘의 딸 레베카와 혼인해 쌍둥이 에사우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형 에사우는 빵과 불콩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동생 야곱에게 넘깁니다. 야곱은 형의 분노를 피해 어머니 레베카의 고향인 하란으로 도망가 외삼촌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과 혼인을 합니다. 또 두 아내의 몸종 질파와 빌하를 받아들여 네 명의 아내 사이에서 아들 열둘을 낳습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 가운데 막내인 요셉을 가장 사랑하였습니다. 그러자 시기와 질투에 눈이 어두워진 11명의 형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버립니다. 미디안 상인들은 이집트로 가서 요셉을 파라오의 내신으로 경호대장인 포티파르에가 되팝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아 파라오 다음가는 실권자인 이집트의 재상이 됩니다. 그리고 야곱 일가는 요셉 때문에 이집트로 이주해 그곳에서 살게 됩니다. 이상이 창세기가 전하는 구세사 성조 시대의 줄거리입니다. 아브라함은 팔레스티나 헤브론 마므레에, 이사악은 그보다 남쪽인 브엘세바, 야곱은 북쪽 베텔에서 활동했습니다. 브니엘은 야곱이 하란에서 베텔로 돌아올 때 밤에 꿈을 꾼 나루터 이름입니다. 이곳은 거룩한 곳(聖所)이기에 항상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됩니다. 이처럼 성조들의 이야기는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제사와 연결돼 있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구세사 성조 시대, 곧 성조들의 이야기는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과 많은 자손을 얻을 것이라는 하느님과의 약속과 결합돼 있다는 것입니다. 농경 시대 유목민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땅’이고 가장 큰 축복은 ‘많은 자손’이었습니다. 땅과 자손은 그들의 생활과 신앙(종교)과 떼래야 뗄 수 없는 복입니다. 구세사의 성조들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이끄심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 언제나 되풀이하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는 ‘신앙의 유산’이 되어 세습 전승되고, 언제나 이스라엘 민족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 신뢰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저 없이 길을 떠난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이 출발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아버지’라고 현양합니다. 성조들의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에게도 늘 부르심을 통해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1.18
![[성탄 특집 방송]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과 희년 맞이는 cpbc와 함께](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12/17/SNg1734418573746.jpg)
[성탄 특집 방송]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과 희년 맞이는 cpbc와 함께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의 TV와 라디오가 아기 예수님께서 오신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아 사랑과 평화로 가득찬 다양한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 ■ 주님 성탄 대축일 전례 특별 생중계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가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주례하는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를 특별 생중계한다. ▶방송 : 24일 오후 11시 50분(TV·유튜브), 24일 밤 12시(라디오) 바티칸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희년의 문을 열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거행되는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를 TV와 유튜브로 특별 생중계한다. ▶방송 : 25일 오전 2시 50분, 재방송 : 오후 9시 30분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가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주례하는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를 생중계한다. ▶방송 : 25일 낮 12시(TV·유튜브·라디오) ■ TV 프로그램 가톨릭 명화극장 ‘프란치스코, 예수회’ 베스트 셀러 「The Jesuit」를 원작으로 한 프란치스코 교황, 즉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의 삶을 담았다. 예수회에 입회해 허약한 몸에도 복음화를 향한 열정으로 사제의 길을 걸어가는 베르골료의 여정을 조명한다. ▶방송 : 21일 오후 11시, 재방송 : 22일 오후 4시 / 23일 오후 9시 30분 / 27일 밤 12시, cpbc플러스 23일 공개 예정 영화 ‘마리아’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친구였다면? 둘의 관계를 세상과 교회 모습으로 대비해 가면서 마리아의 일생을 보여준다. ▶방송 : 1~2부 24~25일 오후 4시, cpbc플러스에서 시청 가능 만화 ‘홀리몰리’ 성경 속 이야기가 생동감 넘치는 만화로 아이들을 찾아간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친근하게 풀어내 아이들 마음속에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는 내용. ▶방송 : 24일 오후 8시 30분, 재방송 : 에피소드 중 ‘성탄’ 편만 26일 오전 6시 50분 / 낮 12시 50분 / 오후 6시 50분, cpbc플러스에서 시청 가능 만화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꿈’ 초대 조선대목구장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과 신앙, 그리고 조선을 향한 그의 깊은 사랑을 애니메이션에 담아냈다. ▶방송 : 24일 오후 9시 30분, 재방송 : 27일 오후 11시 / 28일 오전 11시 10분 / 30일 오후 4시 40분, cpbc플러스 24일 공개 예정 다큐 ‘죽음에서 돌아오다, 메일린의 기적’ 2012년 프랑스 리옹에서 일어난 한 사고와 이어진 놀라운 기적 이야기. 의학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았던 소녀 메일린이 다시 살아난 날을 돌아보며 그가 전구를 청했던 복자 폴린 자리코의 삶을 추적했다. ▶방송 : 24일 오후 9시 50분, 재방송 : 25일 오후 1시 30분 / 29일 오전 10시 / 1월 1일 오후 7시, cpbc플러스 24일 공개 예정 다큐 ‘아르투로 마리, 교황의 사진사’ 18살 때부터 역대 교황들과 함께하며 교회사를 사진으로 기록해 온 아르투로 마리. 요한 23세 교황부터 바오로 6세·요한 바오로 1세·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이르기까지 그가 렌즈에 담은 교황들의 모습을 생생히 전한다. ▶방송 : 25일 오전 10시, cpbc플러스에서 시청 가능 다큐 ‘요한 바오로 2세가 본 세상’ 복음화 사명을 깊이 새기며 온 세상을 누빈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사목 방문했던 아일랜드·폴란드·인도·멕시코를 찾아갔다. 교황을 만났던 이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할까? ▶방송 : 25일 오전 11시, cpbc플러스 1월 공개 예정 이해인 수녀 수도생활 60주년 기념 콘서트 연가곡집 ‘편지’ 이해인 수녀가 수도자로 지낸 60년 여정을 돌아본다. 이 수녀의 신앙과 삶의 고백이 담긴 시 18편에 멜로디를 입혀 탄생한 가곡들을 들을 수 있다. ▶방송 : 25일 오후 7시, 재방송 : 26일 밤 12시 / 28일 오후 4시 / 29일 오후 10시 30분 송년 특집 ‘함께 가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한국 교회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향한 순례 여정에 올랐다. 서울 WYD 지역조직위원회 총괄 코디네이터 이경상 주교와 교회 젊은이들이 한 해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여정을 나눈다. ▶방송 : 31일 오후 7시 30분, 재방송 : 1월 3일 오전 1시 / 1월 4일 오전 10시 / 1월 5일 오후 10시 30분 ■ 라디오 프로그램 이 주의 책 ‘어쩌면, 성탄을 기쁘게 하는 것들’ 가톨릭 사제이자 작가인 방종우 신부와 다가오는 새해를 바라보며 삶을 견디게 하는 위로와 희망을 나눈다. ▶방송 : 22일 오전 8시 장일범의 유쾌한 클래식 ‘Funny Christmas’ 성탄의 기쁨을 가득 담은 클래식 캐럴이 관악 6중주 선율로 울려 퍼진다. 청취자를 위한 특별한 성탄 선물도 있다. ▶방송 : 24일 오전 11시 오수진의 행복을 여는 아침 ‘사랑은 선물을 타고’ 선물처럼 주어진 일상의 고마움을 떠올려보는 따뜻한 시간. 성탄을 맞아 김리온 작가, 이서원 교수, 성탄 선물 협찬기업 대표 등 특별 초대 손님과 더욱 풍성해진 이야기로 행복을 전한다. ▶방송 : 24~25일 오전 7시 음악이 있는 저녁풍경 김형중입니다 ‘애즈원과 캐롤을!’ 크리스마스 때마다 음악 차트에 오르는 한국 캐럴 명반의 주인공 애즈원 민과 함께하는 캐럴 라이브. ▶방송 : 24일 오후 7시 참 좋은 오늘, 은빛수녀입니다 ‘참 좋은 성탄, 은빛나는 이야기!’ 예수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억하며, 흥겨운 캐럴과 은빛수녀의 강연으로 성탄 아침을 따뜻하게 채우는 시간이 준비된다. ▶방송 : 25일 오전 9시 기도의 오솔길 ‘성탄, 특별한 기도밥상’ 전진 신부와 전영금 수녀가 아기 예수님 탄생의 기쁨을 담아 정성껏 차리는 기도밥상이 청취자들을 찾아간다. ▶방송 : 25일 오후 4시 ■ 2024 명동 겨울을 밝히다 - 공개방송 성탄 특집 라디오 공개방송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cpbc는 24~25일 서울대교구청 마당에 ‘cpbc 미디어존’을 마련해 신자 및 시민들과 성탄의 기쁨을 함께한다. cpbc 오픈 스튜디오에서는 ‘新(새로운)! 신신우신’이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다채로운 출연진과 함께 성탄의 감동을 선사한다. 5인조 혼성 아카펠라 그룹 DIA와 신신우신의 선곡마트 라이더 양채윤(엘리사벳)씨, 뮤지컬 배우이자 피아니스트 에드윈 킴이 결성한 프로젝트팀이 감동적인 라이브 무대를 펼친다. ▶방송 : 24일 낮 12시 15분, cpbcTV 유튜브 라이브스트리밍으로 동시 공개 성탄 특집 라디오 공개방송 ‘2시N뮤직 김빛나입니다’ 성탄의 기쁨과 따뜻한 음악으로 꽉 채워진 ‘2시N뮤직 김빛나입니다’도 cpbc 오픈 스튜디오 공개방송으로 청취자들과 함께한다. 뮤지컬 배우 박영주씨와 가수 신현희·이승훈·이솔로몬씨가 전하는 라이브 음악과 감동 이야기가 추운 겨울을 따스하게 녹인다. ▶방송 : 24~25일 오후 2시, cpbcTV 유튜브 라이브스트리밍으로 동시 공개 2024 명동, 겨울을 밝히다 2015년부터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일대에서 펼쳐지는 대표 성탄 축제 ‘명동, 겨울을 밝히다’가 올해에도 찾아왔다. 최현정 전 아나운서 진행으로 세계 젊은이와 성탄 문화를 나누고, 특별한 사연이 담긴 애장품 경매를 마련한다. cpbc는 사도회관 외벽에 성탄의 기쁨을 빛으로 표현하는 미디어파사드도 선보인다. ▶방송(라디오) : 24~25일 오후 5시, cpbcTV 유튜브 라이브스트리밍으로 동시 공개신문취재팀 박예슬2024.12.17

신앙의 집을 잘 짓고 있는가[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61)영적인 건축 필자에게 기획관리처장직은 힘에 부치는 소임이다. 예산·결산·건물 관리·공사·조직 개편 등 학교 살림 전반을 맡아보는 와중에 신학생 양성,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소임에서도 중요한 공부를 하고 있으니, 바로 건축이다. 혹자는 성당이나 건물 짓는 건축을 떠올릴 것이다. 사실 눈에 보이는 건물 건축도 있지만, 개인의 신앙이나 공동체의 삶과 같이 살아있는 유기체 건축도 있다. 신앙과 건축, 무슨 상관이 있을까? 성경에는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건축을 비유로 든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반석 위의 집이란 각자의 삶을 의미한다. 삶이라는 집을 짓기 위해 어떤 토대를 마련해야 할까? 주님의 말씀과 말씀의 실천이라는 토대 위에서라면 그 어떤 위기와 시련이 와도 흔들림이 없을 거란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118장을 인용하시기도 한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르 12,10) 유다인들이 배척한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 계획의 기초로 삼으셨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구원받는 데 필요한 분이 예수님밖에 없음을 선포하며 이 구절을 인용한다.(사도 4,11-12) 교회와 관련해서도 건축에의 비유가 종종 등장한다.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브 11,10) 묵시록에서는 도성의 성벽과 열두 주춧돌을 이야기한다.(21,14) 바오로 사도께서도 말씀하신다. “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저마다 잘 살펴야 합니다.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코린 3,10-11) 건축을 모티브로 각자의 삶과 신앙, 나아가 교회 공동체(교구·본당·소공동체·레지오·단체 등)를 생각하면, 건축이라는 말이 지닌 영적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어떻게 건설하고 있는가? 공동체를 어떻게 건설하고 있는가? 신앙도 결국 삶이라는 건물을 건축하는 일이다. 그것은 긴 과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이라는 집을 지어야 하며, 긴 양육·양성 기간을 거쳐 각자의 집을 짓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는 삶을 건설하는 중인가? 그 건축에서 신앙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리스도라는 머릿돌과 사도라는 기둥을 중심으로 집을 세우고 있는가? 아니면 기초 없는 집을 짓다 무너진 집터에서 망연자실 앉아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삶이라는 집을 건축하다 만 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반 건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신앙과 교회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점이다. 생로병사 과정을 겪는 유기체와도 다르다. 교회는 늙는 것이 아닌, 늘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늙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공동체를 통해 늘 새롭게 성장하며 발전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자기 삶을 점검하고 새로운 내일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콜로 2,7) 한민택 신부cpbc2024.08.06

요한 복음서 (2)[월간 꿈 CUM] 약속 _ 신약이 말을 건네다 (8) 로마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 대성전' Q. 요한복음서의 신학적 특징은 무엇입니까? A. 공관복음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느님 나라는 마치 ~과 같다’라는 비유적 표현이 요한복음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대신 ‘나는 ~ 이다’라는 표현으로 예수님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진술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서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의 복음서라고 합니다. 또한 요한복음서는 ‘성령’(14-16장)과 ‘사랑의 복음서’(13,31-35; 15,11-17)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계명(14,21.23; 15,12 참조)을 강조하시고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13,1 참조)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을 ‘생명의 복음서’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복음 저술의 목적이 생명을 얻게 하려는 데 있음을 단언(20,31 참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공관복음과 비교할 수 있는 주제어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요한복음서에는 ‘하느님 나라’라는 표현이 두 번(3,3.5) 사용됩니다. 대신 ‘영원한 생명’ 또는 ‘생명’이라는 단어는 36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생명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5,26), 생명이신 그리스도(11,25; 14,6)와 일치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5,24)고 말합니다. 끝으로, 요한복음서는 ‘믿음의 복음서’입니다. 저술목적(20,30-31)에도 드러나듯이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이 아주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동사 ‘믿다’는 98번이나 나오는데 명사 ‘믿음’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명사가 추상적이고 개념적 성격을 지니는 반면, 동사는 구체적이고 역동적 성격을 지닙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요한복음은 단순히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구체적이며 다양한 차원의 믿음을 드러내는 ‘믿음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의 대상은 하느님이 아니라 항상 예수님, 그분의 말씀, 그리고 그분의 행적입니다. 이러한 말씀과 행적을 통해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이시고(5,18; 10,30; 14,9; 19,7), 하느님과 똑같이 생명을 지니고 계시며(5,26; 11,25; 14,6), 심판하실 권한을 갖고 계시다(3,19; 5,22) 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Q. 요한복음이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A. 요한복음에는 ‘믿음’이라는 명사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반면 동사 ‘믿다’는 98번이나 나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행동을 선호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명사보다 동사를 선호하는 것은 그가 신앙을 내적성향으로 여기지 않고 자발적 위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믿다’ 또는 ‘신뢰하다’는 예수님과 그분께서 선포하신 바를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그분께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의 우위성과 선행의 중요성은 부딪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입니다.(6,29 참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과 계명 안에 머무르겠다는 뜻을 내포합니다.(8,31; 1요한 5,10 참조) 성경, 특히 요한복음에서 신앙은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를 믿는다’라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적극적 응답과 투신을 의미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하며, 그분의 인격과 선교에 자신의 전 생애를 봉헌함으로써 그분의 제자가 되라는 초대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제자됨은 동의어’입니다. Q. 공관복음서의 ‘믿음’과 요한복음서의 ‘믿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A. 공관복음의 믿음은 구약성경에서 일관되게 믿음의 자세로 부각되던 그 신뢰입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의 능력으로 모두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마르 9,23 참조)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전혀 다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핵심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받아들이고, 한 분이신 이 구원의 중개자와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서의 믿음은 본질상 구원과 관계됩니다. 믿음의 구원적 의미는 영원하고 신적인 생명을 중개해 주는 데 있습니다. 벳자타 못 가의 치유 사건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묻게 만듭니다.(5,12 참조)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시는 사건에서도, 이 사람을 실로암 못으로 보내 눈 뜨게 하신 이분은 누구신가라는 물음에 모든 관심이 집중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눈먼 사람에게 비춰 주신 그 빛은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9,5)이요, 영원한 생명의 빛(8,12)입니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11,25-26)이라는 계시의 절정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께서 부단히 요구하시는 믿음은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입니다.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등의 주임을 지냈다. cpbc2024.04.29

신의 언어[월간 꿈 CUM] 전대섭의 공감 (13) 인류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인간게놈 프로젝트’를 총지휘했던 프란시스 S. 콜린스 박사는 대학 시절 열렬한 무신론자였다. 유전학의 중요성과 가치를 깨달은 후 의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부터 종교적 신념, 신앙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하니 매우 아이러니하다. 콜린스는 신의 존재와 신앙을 부정하는 모든 종류의 가설과 주장들을 반박하는 과학자로도 유명하다. 과학의 진실을 터무니없이 거부하는 종교인들 역시 그는 반박한다. 신에 대한 믿음과 과학에 대한 믿음은 얼마든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유전학을 전공하고 진화론을 신봉하는 뛰어난 과학자인 콜린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89년 여름, 그는 대학생 딸과 함께 의료봉사 활동을 위해 나이지리아를 찾았다. 아프리카에 대한 호기심, 선진 의료기술로써 무언가를 기여하고픈 욕구, 약간의 우쭐함을 품고. 그런 기대도 잠시. 아프리카의 열악한 공중보건체계 현실은 그의 희망과 의욕을 단번에 앗아갔다. 어느 날 오후, 쇠약해지고 다리가 심하게 부은 젊은 농부가 병원을 찾았다. 숨을 들이쉴 때면 맥박이 거의 사라졌다. 결핵이 원인인 ‘기맥’ 증상이다. 심장 주변 심낭에 엄청난 양의 물이 차 혈액순환을 방해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 의료기구도 전문의도 없는 그곳에서 콜린스는 구멍이 큰 큰 바늘을 가슴에 꽂아 심낭에 고인 물을 빼내는 위험천만한 시술을 감행했다. 기맥은 곧바로 사라졌고 부은 다리도 하루 만에 빠르게 호전되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그는 잠시나마 희열까지 느꼈다. 그러나 이런 행운이 무슨 대수인가. 다음날 아침, 익숙한 우울함이 다시 찾아왔다. 결핵을 부른 환경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약값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농부는 결핵이 재발해 죽을 게 뻔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며 환자를 찾은 그는 성경을 읽고 있는 그에게서 영원히 가슴에 새겨질 말을 들었다. “제가 보니까 선생님은 지금 내가 대체 여기를 왜 왔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제가 알려 드릴게요. 선생님이 여기 오신 이유는 딱 하나예요. 저를 위해 오신 거예요.” 그의 말을 곱씹던 콜린스는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체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확신에서 나오는 눈물이었고, 그 낯선 장소에서 바로 그 순간에 내가 하느님의 의지와 조화를 이루면서 대단히 예외적인 그러나 기적 같은 방법으로 이 청년과 인연을 맺었다는 확신이었다.” 글 _ 전대섭 (바오로, 전 가톨릭신문 편집국장) 가톨릭신문에서 취재부장, 편집부장,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대학에서는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바보’라는 뜻의 ‘여기치’(如己癡)를 모토로 삼고 살고 있다. cpbc2024.06.17

사랑 (1)[월간 꿈 CUM] 행복의 길 (2) 우리가 하는 말 중,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많이 쓰이는 단어는 사랑이다. 누구나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하고 즐거워진다. 가정에서는 부모 사랑, 자식 사랑, 형제 사랑을 가족에게서 듣고 사용하면서 깨닫는다. 그리고 사회활동 중에는 겨레 사랑, 이웃 사랑, 향토 사랑, 직장 사랑이 많이 강조된다. 특히 군대 생활 안에서는 조국 사랑, 부대 사랑, 전우 사랑, 부하 사랑이 더욱 요구된다. 또 가수들은 사랑을 목놓아 노래하고, 작가들은 작품으로써 사랑을 묘사하며, 예술가들은 사랑 이야기를 최고의 주제로 다룬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은 큰 종교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천주교와 개신교에서는 애주애인(愛主愛人), 불교에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 유교에서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 중심사상이다. 애주애인과 대자대비와 경천애인의 공통점은 바로 사랑이다. 예수님이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부활 논쟁(마르 12,18-27) 을 하고 있을 때,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둘째라고 하면서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대답하셨다.(마르 12,30-31 참조)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사상은 사랑이며,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사도 바오로는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말까지 하고,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이 있으며, 또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고 자신의 몸까지 넘겨준다 해도, 그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요란한 징이나 꽹과리에 지나지 않아 아무 소용이 없으며(1코린 13,1-3 참조), 사랑이 더욱 뛰어난 길이라고(1코린 12,31) 했다. 사도 바오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당시 문명과 교통의 중심지였던 타르수스(Tarsus)에서 출생한 유대인이었고, 어릴 때부터 희랍의 영재교육(英才敎育)을 받았다. 또 예루살렘에 유학해서는 석학 가말리엘(Gamaliel)의 문하생(門下生)이 되었고, 그곳에서 철학과 신학 및 율법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지배계층이었던 바리사이파에 속해 활동했다. 아울러 신자라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잡아들여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할 수 있는 권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는 중, 다마스쿠스(Damascus)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사도 9.3-6 참조) 극적으로 회심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獨身)으로 살면서, 여러 곳을 다니며 오로지 복음 전파에 힘썼다. 그리고 여러 곳에 교회를 설립하고 신약성경 중 13권의 서간(書簡)을 저술하였으며, 67년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위대한 사도로 살았다. 이러한 바오로가 그리스도교의 첫째요 둘째 계명이며 신앙생활 지침이기도 하고,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감동을 주는 사랑(1코린 13,1-13)을 설명했다. 그중에서 1코린 13,4-7의 내용은 이러하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 내용의 주어(主語)인 ‘사랑’을 ‘나’로 바꾸어 읽으면 더 뜻이 깊어진다. 글 _ 최봉원 신부 (야고보, 마산교구 원로사목) 1977년 사제품을 받았다. 1980년 군종장교로 임관, 군종단 홍보국장, 군종교구 사무처장 겸 사목국장, 관리국장, 군종참모 등을 지냈으며 2001년 군종감으로 취임, 2003년 퇴임했다. 이후 미국 LA 성삼본당, 함안본당, 신안동본당, 수산본당, 덕산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했으며, 마산교구 총대리 겸 사무처장을 역임했다. cpbc2024.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