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전한 멸망에서 일어설 용기·희망 주시는 주님[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57)에제키엘서 에제키엘서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상태에서 유다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하느님의 영광이 새 예루살렘을 건설할 것이라고 격려한다. 미켈란젤로, ‘에제키엘 예언자’, 프레스코화, 1512년께, 시스티나 소성당, 바티칸. 히브리어 구약 성경 「타낙」은 에제키엘서를 ‘예헤즈케엘’이라 표기합니다. 예헤즈케엘은 우리말로 ‘하느님은 강하시다’ ‘하느님께서 강하게 힘을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성경 「칠십인역」은 ‘Ιεξεκιηλ’,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Ezechiel’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에제키엘서’로 음역해 표기합니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대를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에제키엘은 차독 계열 사제인 부즈의 아들로 기원전 597년 제1차 유다인 유배가 있을 당시 예루살렘에서 사제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1차 바빌론 유배 때 유다의 여호야킨 임금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에제키엘이 임금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갔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유다 사회의 유력한 지위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에제키엘은 유배 중 기원전 593년께 바빌론의 크바르 강가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후 그는 기원전 571년까지 22년간 예언자로서 활동했습니다. 에제키엘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맥을 잇고, 제2이사야보다는 조금 앞선 시대의 인물입니다. 에제키엘의 활동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됩니다. 전반부(에제 1─32장)는 예루살렘의 멸망 이전(기원전 597~587년)으로 아직은 유다가 완전히 패망하기 이전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 사제 시절 이미 치드키야 통치하의 유다를 위해 예언을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행되고 있던 우상 숭배를 신랄히 비난하면서(에제 8장) 하느님의 심판으로 예루살렘 멸망을 경고합니다. 후반부(에제 33─48장)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붕괴되고 제2차 유배가 단행된 이후(기원전 587~571년) 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히 무너지자 에제키엘은 하느님 구원에 대한 새롭고 희망적인 약속을 선포합니다. 아내의 죽음(에제 24장)이 그의 예언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하느님께 변함없이 충실하도록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구원을 선포합니다. 에제키엘서는 에제키엘 당대에 대부분 기록되고 그의 제자와 추종자들에 의해 편집돼 유배 시기가 끝날 무렵 최종 완성됐을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짐작합니다. 에제키엘서는 당대까지의 신학, 곧 호세아, 아모스, 제1이사야, 예레미야 등 이전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의 신학을 종합적으로 집대성해 놓았습니다. 이는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의 신학이 균형 있게 종합돼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전기 예언서와 관련된 전통들도 발견됩니다. ‘주님의 손에 사로잡힘’, ‘영에 사로잡힘’ 등이 그것입니다. 에제키엘서는 ‘소명 사화와 주님의 현현’(1─3장),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린 심판 선포’(4─24장), ‘주변 민족들에 내린 심판 선포’(25─32장), ‘이스라엘에 내린 재건과 위로, 새로운 성전과 새 땅에 관한 환시’(33─48장) 네 부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에제키엘서는 두 개의 지리적 장소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바빌론 니푸르 부근 크바르 강가의 텔 아비브(에제 1,1.3; 3,15.23)와 예루살렘(에제 8,3; 11,23; 40,1-2) 입니다. ‘소명 사화와 주님의 현현’ 부분에선 에제키엘이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는 환시가 소개됩니다.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아먹는데 그 두루마리가 꿀처럼 달았습니다. 이후 에제키엘은 주님의 영과 손에 의해 유배지로 옮겨집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린 심판 선포’ 부분은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행해졌던 신탁이 수록돼 있습니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를 보게 되는데 성전이 더럽혀지고 우상이 세워지며 그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봅니다. 결국 크바르 강가에서 보았던 하느님의 영광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가게 됩니다. ‘주변 민족들에 내린 심판 선포’ 부분은 암몬, 모압, 에돔, 필리스티아, 티로, 이집트의 이민족들에게 내리는 신탁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에 내린 재건과 위로, 새로운 성전과 새 땅에 관한 환시’(33─48장) 부분은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상황에서 에제키엘이 유다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미래의 회복을 전합니다. 이러한 미래에 있을 회복은 이스라엘의 내적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돌같이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새 마음, 살처럼 부드러운 심장을 넣어 주실 것이라 선포합니다. 그리고 흩어져 있던 마른 뼈들이 서로 붙고 힘줄이 생기고 살아 올라오며 살갗이 덮인 후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자 모든 사람이 되살아납니다. 에제키엘은 마지막으로 재건된 새 성전을 중심으로 이제 이스라엘은 남북의 분단 없이 하나로 통일된 국가를 형성할 것이며, 떠나가셨던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신다고 예언합니다. 그리고 성전 문턱에서 솟아나오는 은총의 물로 비옥해진 새 이스라엘에서 하느님께 새로운 경신례가 바쳐지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에제키엘서 18장에는 매우 독특한 내용 하나가 제시됩니다. 바로 ‘하느님과 개인’에 대한 문제입니다. 유다인 개인이 하느님 앞에서 자기 행동과 삶에 책임을 진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구약 성경에서 처음 등장하는 주제로 유다이즘 신학의 배경이 됩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4.01.17

희년의 핵심은 거룩함의 본성 회복서울 사목국장 김연범 신부, 본당 수도자 연수서 희년 의미 전해 “우리가 희망을 이야기할 때 ‘앞으로 잘 될 거야, 희망하면 돼!’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희망, 예수는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을 고백했던 그 신앙 고백이 참된 희망임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희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0일 서울 중구 명동 가톨릭 회관 3층 강당.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김연범 신부는 ‘희년’을 주제로 열린 본당 수도자 연수에서 “우리는 희년이 되면 ‘기쁘고 재밌게 지내면 돼’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희년에 무슨 행사를 할지, 무엇을 먹고 마시며 즐길지를 먼저 떠올린다”고 지적했다. “친교라는 단어도 의미를 잃어가고 있죠. 코이노니아를 뜻하는 ‘친교’라는 신학적 단어도 본당에서 먹고 마시는 데 쓰이죠. 여기서 친교는 삼위일체의 친교, 즉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친교를 뜻하는데, 어쩌다 보니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치맥’ 정도로 변한 느낌이에요.”(웃음) 김 신부는 “구약 성경에서 희년은 ‘해방의 해’를 의미하며, 종이 된 유다인들을 해방해주고 땅을 원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희년은 세상 만물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기억하고, 거룩함의 본성을 회복하는 해”라고 설명했다. 이어 “희년은 가톨릭교회가 25년마다 맞이하는 은총의 해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선포되는 ‘성년’”이라며 “1300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처음 선포했고, 1475년 바오로 2세 교황이 희년을 25년 주기로 거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됐다”고 전했다. 정기 희년의 주기를 50년에서 25년으로 단축한 것은 평생 한 번이라도 희년의 기쁨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교황의 특별 지향에 따른 ‘특별 희년’이 자주 선포되면서 희년의 의미가 너무 가볍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고도 아쉬움을 전했다. 김 신부는 희년을 잘 살기 위한 일곱 가지 키워드로 ‘순례·성문·화해·기도·전례·신앙고백·대사’를 제시했다. 이어 “우리는 희년하면 ‘전대사’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희년은 전대사를 받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거룩함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핵심이며, 하느님의 선물인 대사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김 신부는 또 “희년이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오히려 희년에 대한 열정이 식어가는 때에 본당에 계신 수녀님들이 다시 희년의 의미를 묵상하고, 그 기쁨을 신자들에게 나눠주시면 좋겠다”며 “희년은 우리가 은총을 받아야 하는 해이자 구원의 해이며, 거룩해져야 할 기쁨의 해라는 점을 수녀님들이 삶으로 보여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사목국은 11월 18일에는 ‘2026년 사목교서 및 WYD’를 주제로 본당 수도자 연수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이지혜2025.06.18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월간 꿈 CUM] 유랑 _ 이야기 구약성경 (4) 야콥 요르단스(Jacob Jordaens, 1593~1678)의 ‘이사악의 희생 ’(The sacrifice of Isaac), 1625,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025 늘그막에 얻은 아들 이사악은 험난한 삶의 여정 끝에 다가온 행복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하느님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씀을 들었다. 그 말씀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나를 데려가시겠다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 그 어떤 형벌도 달게 받을 것이다. 하느님 명령이라면 마른 짚을 등에 지고 불에 뛰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들 이사악을 요구하셨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음속에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평생 나를 이끄신 하느님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요구하신 일이 없으신 분이었다. 하느님은 분명 내가 모르는 계획이 있으실 것이다. 아침 일찍 아들을 불렀다.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다.” 아들은 환하게 웃으며 따라나섰다. 마치 소풍을 가듯 흥겨운 모습이었다. 아들은 번제물을 태울 장작을 등에 지고 함께 산에 올랐다. 잠시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아들이 환하고 흥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세 22,7) 마음이 찢어졌다. 하지만 슬픔을 드러낼 순 없었다. 만약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도망칠 수도 있었다. 나는 늙었다. 이사악이 그 빠른 발로 도망간다면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 제사를 드릴 장소에 도착했다.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었다. 그런 후, 재빨리 아들을 묶어 장작 위에 올렸다. 영문을 모르는 아들은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번제물로 바쳐질 운명이었다. 칼을 빼 들었다. 아들이 새파랗게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럴수록 꽁꽁 묶인 밧줄은 아들을 더욱 옥죌 뿐이었다. 나는 의외로 차분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아들의 눈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한쪽 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 칼을 들었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칼을 아들의 하얀 목에 가져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다급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세 22,11)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창세 22,12) 천사가 조금만 늦었다면 이사악의 목이 날아갈 뻔했다. 아브라함은 그제야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 긴 숨을 토해냈다. 아들을 죽이려던 섬뜩한 눈빛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아들 이사악도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쥔 채 숨을 ‘하악하악’ 내쉬고 있었다. 목에는 아직도 서늘한 칼날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양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브라함은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를 발견했다. 양은 아들 이사악 대신 번제물로 바쳐졌다. 글 _ 편집부 cpbc2023.10.25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희망하기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79) 약속의 하느님 아기가 처음 걸을 때 부모는 앞에서 두 손을 펴고 기다리며 행여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며 마음을 졸인다. 부모는 한 걸음씩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기를 대견해하며 가슴에 안아준다. “아이고, 잘했다, 내 새끼~”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하는가? 보통 저 먼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나. 혹은 성경이 전하는 과거 이야기 속에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지금 나의 삶과는 무관하게 저 멀리 계시는 분, 지금 내가 겪는 고통과 무거운 삶의 짐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분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성경의 하느님은 약속의 하느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며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듣고 응답해주셨다. 광야에서 힘겨운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노예살이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가졌고,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으로 여겨 우상을 숭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셨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백성을 계속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하느님은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분,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셨다. 신약에서도 하느님은 약속의 하느님으로 드러나신다.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어 구원을 약속하셨다.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은 주님의 어머니께 이렇게 인사드렸다. “행복하십니다.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이 말씀에는 암시가 깔려 있다. 마리아의 삶에 고난과 시련이 도사리고 있다는 암시말이다. 실제 마리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해야 했고, 성전에서 어린 예수님을 잃기도 했으며, 동족들의 모함을 받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는 아드님의 모습을 지켜보셔야 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생애 끝까지 제자들과 함께 남아 기도하셨고,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하늘에 오르실 수 있었다. 하느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리아의 삶만이 아니라 우리 삶도 그렇지 않나. 우리 삶은 고통의 연속이며, 위기와 시련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의 하느님을 믿는다. 우리 안에 큰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반드시 그 일을 마치실 것이다. 삶의 시련은 끊임없이 우리의 희망을 짓누르려고 하지만, 신앙은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며, 우리가 계속해서 약속의 하느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한다. 그리스도 신앙은 희망이란 이름을 지닌다. 우리는 희망의 하느님을 믿는다. 삶이 희망차다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완성으로 이끄신다는 것, 그렇기에 우리가 겪는 고통과 시련, 위기는 우리의 희망을 단련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탄은 희망의 하느님, 약속의 하느님이 오심을 맞이하는 축제다.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직접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 가장 작고 연약하고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어, 가난한 우리 마음을 위로하시며, 우리 마음에 온기를 전해주시고 상처를 낫게 하시며 희망의 여명을 새롭게 밝혀주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저 앞에서 두 손 벌려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가 쓰러질까 노심초사 마음 졸이며. 그러나 우리 대신 걸어주지 않으신다. 우리가 스스로 당신께 걸어가도록 기다리신다. 넘어져도 괜찮다. 다시 일어서면 되니까. 우리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는 하느님을 향해 용기를 내어 일어나 계속 걸으면 된다. 한민택 신부cpbc2024.12.18

성경 입문 (1)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월간 꿈 CUM] 약속 _ 신약이 말을 건네다 (1) Q..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이 계시(啓示)한 진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A.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성경(聖經)과 성전(聖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Q. 성경이란 무엇입니까? A. 성경은 성령의 영감(靈感, Inspiration)을 받아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계시헌장 9항)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2티모 3,16) Q. 영감(靈感)은 무엇입니까? A. 영감은 하느님이 주신 특별한 능력으로, 그 영감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표현하도록 하는 하느님의 이끄심을 말합니다. Q. 왜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라 부릅니까? A. 성경은 하느님께서 성경을 기록한 이의 마음, 의지, 그리고 다른 재능을 오직, “하느님은 그를 통해 적고자 하시고 인도하시기에” 하느님의 말씀이라 부릅니다. Q. 성경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A. 하느님도 인간도 모두 성경들을 저술한 참 저자입니다. 하느님이 성경의 원저자이시지만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 하느님은 인간을 선택하셨고 자기 능력과 역량을 갖춘 그들을 이용하시어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하여 당신 자신이 활동하셨고, 그들이 참된 저자로서 하느님 자신이 원하시는 것만을 모두 다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계시헌장 11항) Q. 성경은 그르칠 수 있습니까? A. 그르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를 따라 기록된 책입니다.(요한 20,31; 2티모 3,16; 2베드 1,19-21) 따라서 성경의 원저자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있어 어느 부분을 막론하고 조금도 그르칠 수 없습니다.(계시헌장 11항 참조) Q. 성경해석에 대한 우리 교회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A. 기록된 하느님 말씀 즉 성경에 대한 유권적 해석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습니다.(계시헌장 10항)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교회에서는 신자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해석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기를 주의시킬 뿐입니다. Q. 성경은 어떻게 나뉘어 있습니까? A.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써진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써진 신약성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Q. 신약성경이란 어떤 책입니까? A. 성경의 두 번째 부분인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탄생, 삶, 가르침, 수난,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초대 교회의 생활에 관한 책입니다. 하느님의 영감 아래 글로 기록된 것을 교회에서 정경으로 채택한 27권의 책들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Q. 신약이란 명칭은 어디에서 기원합니까? A. 신약(新約)이란 명칭은 2세기 말경부터 불리기 시작하였고(히브 9,16-17; 2코린 3,14) 신약과 구약의 ‘약’(約)은 히브리어 ‘Berit’인 ‘계약’에서 나온 것입니다.(마태 26,28; 마르 14,24) 이 말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체결된 약속의 의미이며 그리스도 이전의 계약을 옛 계약이라 하여 구약성경이란 명칭을 사용하였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과 인류 사이에 맺어주신 계약을 예언자들의 예언에 따라(예레 31,31-34) 새로운 계약으로 받아들여(히브 9,15-22) 신약성경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등의 주임을 지냈다.cpbc2024.01.29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에 대한 물음과 대답[저는 믿나이다] (3)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들음의 시작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기 위해 부활 이전의 예수와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를 살피기 시작했다. 바오로 사도 프레스코, 성 바오로 대성전, 로마.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9-10)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라고 가르칩니다.(로마 10,17)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느님의 계시를 듣는 것입니다. 하지만 홀로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하느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들음’은 하느님께서 세우시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의 전례와 성사 그리고 교리교육 안에서 보호받고 보존되고 전승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기록된 복음서들과 독립적으로 주님의 말씀과 행적뿐 아니라 그의 모든 역사를 온전하게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도 시대에 점유된 것은 가르침과 설교의 토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교회의 신앙 고백의 기원뿐 아니라 스스로를 ‘기쁜 소식’의 한 표현으로 이해했던 기록된 복음서들의 원천을 이루었다.”(「교부들의 그리스도론」 276쪽) 지금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사도 신경을 통해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백하지만 아직 신약 성경 정경조차 선정되지 못했던 초대 교회 때에는 우선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신약 성경 또한 사도 시대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기 나름으로 해석해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일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자들로 인해 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오고 있지요. 주님의 제자인 사도들이 이끌던 초대 교회 때부터 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혼란을 겪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달은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 그래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이전의 예수와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에 대해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신약 성경이 알려주고 있듯이 사도 시대 초대 교회 구성원들은 세 부류였습니다.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유다교를 믿다 개종한 유다계 그리스도인, 유다인이지만 팔레스티나 지역 밖에서 헬레니즘화된 디아스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 헬레니즘 문화에서 살아온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지요. 그들은 각기 구약 성경의 율법을 기반으로, 유다교 전통과 헬레니즘 사고를 융합한 문화를 배경으로,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부활 이전의 예수에서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로’, ‘역사의 예수에서 신앙의 그리스도로’, 나아가 ‘사람의 아들(인성)에서 하느님의 아들(신성)로’ 넘어가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선포, 이에 대한 교회의 성찰인 교리 선포, 교회 공동체의 신앙 체험을 토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 진심으로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초대 교회 세 부류의 구성원들과 누구보다 친숙했고 네 번째 복음서를 쓴 요한 사도만큼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15-20) 바오로 사도는 또 예수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6-11) 사도들이 들려주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입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4.11.20

10년 후[월간 꿈 CUM] 유랑 _ 이야기 구약성경 (3) 구에르치노(Guercino,1591~1666)의 ‘하가르와 이스마엘을 내쫓는 아브라함’(Abraham Casting Out Hagar and Ishmael), 1657,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아내 사라이의 속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느님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그분의 딸이다. 하지만 하느님 말씀을 믿지 않고, 고집을 피울 때도 많다. 10년 전 일만 해도 그렇다. 아내는 하느님께서 아이를 주시겠다는 말을 하셨는데도 믿지않았다. 오히려 “하느님 맙소사!”라고 말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창세 18,12)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내 사라이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이사악이라 하여라.”(창세 17,19) 물론 나와 아내의 나이를 생각하면 믿기 힘든 말씀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지금까지 나에게 하신 말씀 중,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들 이사악을 예고하실 즈음 나와 아내의 이름을 바꾸도록 하셨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창세 17,5) “너의 아내는 사라가 그의 이름이다.”(창세 17,15 참조) 참으로 송구한 일이다. ‘아브라함’에서 ‘아브’는 아버지라는 뜻이고 ‘함’은 백성 혹은 민족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나를 민족의 아버지, 백성의 아버지로 세우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아내의 새 이름 ‘사라’도 ‘여왕’이라는 뜻이니, 영광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나와 아내는 하느님에 의해 민족들의 아버지와 여왕이 되었다. 하느님은 더 나아가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창세 17,7)고 약속하셨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의 말씀이 있을까. 하느님은 또한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창세 17,8)고 하셨다. 실제로 하느님은 이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아비멜렉이 보낸 장수 피콜과 평화계약을 성사시켜 주시는 등(창세 21,22-34 참조) 당신의 약속을 하나하나 실현해 보이셨다. 그리고 이 모든 계약의 증표로 하느님은 ‘할례’를 요구하셨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징이다.”(창세 17,11) 그래서 하느님 말씀대로 할례를 했다. 몸종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부족들은 할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례는 우리 집안사람들만의 독특한 소속감을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나중에 자손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가더라도 할례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그 여부에 따라 나의 후손인지, 후손이 아닌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할례는 단순히 소속감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할례는 하느님께 대한 복종이었고, 순명이었다. 하느님의 명령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지만, 할례는 앞으로 하느님 백성임을 드러내는 표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 이사악도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도록 했다.(창세 21,4 참조) 이사악은 벌써 성장해서 들판을 뛰어다닐 나이가 되었다. 이사악은 내 삶의 전부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이사악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이사악이 태어나기 직전, 몸종 하가르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낼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했지만, 그들 또한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은 모두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창세 21,8-21 참조) 인간은 여정의 동물, 길 위의 동물(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이라고 했던가. 돌이켜 보면 참으로 험난했던 삶이다. 고향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이곳으로 오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혹독한 기근에 시달려야 했고, 낯선 이방인들과의 수많은 다툼도 거쳐야 했다. 나의 인생은 그렇게 길 위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그 길 위에서 막을 내릴 것이다. 이사악은 그런 길 위의 여정 끝에 다가온 행복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의 일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씀을 들었다. 글 _ 편집부 cpbc2023.10.17

필리핀 가톨릭 미디어 RVA가 쏘아 올린 전파, 아시아 21개 언어로 닿다[아시아 가톨릭 미디어를 가다] (1) 라디오 베리타스 아시아(RVA) 라디오 베리타스 아시아 본부 건물과 정원. 한때 300명이 상주하며 북적이던 공간이었다. 아시아 교회 대표하는 가톨릭 미디어 1969년 4월 단파 라디오 방송으로 개국 국내 방송 Veritas 846과 RVA 나눠 운영 필리핀 현대사 속 진실을 전한 목소리 민주화 혁명 때 비폭력 저항 호소 방송 독재 정권에 저항해 막사이사이상 수상 필리핀 마닐라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의 퀘손시티에 본부를 둔 ‘라디오 베리타스 아시아(Radio Veritas Asia, 이하 RVA)’. RVA는 ‘아시아 그리스도교의 목소리’이자 ‘아시아의 선교사’로 불려 온 아시아의 상징적인 가톨릭 미디어다. 1969년 단파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해 인터넷 시대를 거치면서 2018년 웹 스트리밍과 SNS 중심의 디지털 미디어로 전환하기까지, 형태는 바뀌었지만 아시아 각 민족의 언어로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은 한결같다. ‘VERITAS’는 라틴어로 ‘진리’를 뜻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는 말씀에 따라 RVA는 아시아 대륙 전역에 진실을 말하며 진리를 일깨우는 가톨릭 미디어의 여정을 걸어왔다. 본지 기획 ‘아시아 가톨릭 미디어를 가다’의 시작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하는 미디어 RVA를 방문했다. 1970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RVA를 방문해 ‘아시아인에게 보내는 라디오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RVA 50년사 RVA 태동과 설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아시아엔 냉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중국에는 공산 정권이 들어섰고,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비극 끝에 분단됐다.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곳곳에서도 이념 갈등이 격화했다. 공산주의 이념이 확산하면서 여러 지역 교회가 탄압을 받았고 종교의 자유가 제한됐다. 선교사와 신자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위기 속에 아시아와 호주 주교들은 1958년 필리핀 산토 토마스대에 모였다. 이념과 국경·언어의 장벽을 넘어 진리를 전파하고, 흩어진 교회들을 하나로 연결할 매체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며 아시아를 위한 가톨릭 라디오 방송국 설립을 논의했다. 교황청도 아시아 주교들의 뜻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현실은 척박했다. 방송국을 꾸릴 자금·부지·기술·경험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다. 주교들은 성령의 이끄심을 믿으며 길을 찾아 나갔다. 아시아 주교들의 방송국 설립 움직임에 독일 가톨릭교회와 정부가 재정 지원을 약속하면서 설립 안이 구체화됐다. 여기에 교황청과 아시아 각국 교회의 재정 지원이 더해져 논의가 시작된 지 11년 만인 1969년 4월 ‘라디오 베리타스’는 첫 전파를 쏘아 올렸다. 라디오 베리타스로 출발한 RVA는 1990년대부터 필리핀 국내 방송 Veritas 846과 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한 RVA로 나눠 운영되고 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바티칸 라디오를 통해 개국 축하 메시지를 보내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교황은 RVA가 ‘베리타스’라는 이름처럼 “진리에 새롭고 강력한 목소리를 주는 매체”가 되기를 당부했다. 이듬해인 1970년 필리핀을 처음 사목방문한 교황은 RVA를 직접 찾아 ‘아시아인에게 보내는 라디오 메시지’를 발표했다. 교황은 이 메시지를 통해 RVA가 단순한 방송국을 넘어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와 종교, 가난과 불평등의 현실 안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교의 통로임을 분명히 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RVA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RVA 50년사 국경·언론 탄압의 벽 넘어 진리 전달 개국 당시 RVA는 영어·베트남어·필리핀어로 방송을 시작했다. 이후 중국어, 싱할라어(스리랑카), 텔루구어(인도), 타밀어(인도·스리랑카), 미얀마어, 벵골어(방글라데시), 우르두어(파키스탄), 카렌어·카친어(미얀마) 등 여러 민족과 지역 언어로 방송 영역을 넓혀갔다. 현재 RVA는 아시아 7개국에 지부를 두고 21개 언어로 보편 및 아시아 교회 소식을 전하고 있다. RVA의 현지어 방송은 단순히 복음 확장의 전략이 아니었다. 전례 안에서 모국어 사용의 길을 열고, 복음이 각 민족의 언어와 문화에 뿌리내리도록 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정신을 따르는 실천이었다. RVA 덕분에 아시아 신자들은 자신의 언어로 복음과 교회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됐다. 특히 소수민족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가 아시아의 문화와 언어, 역사를 존중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사제가 부족하거나 교회 활동이 제한된 지역, 정치적 상황으로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없던 지역에 사는 신자들에게 RVA는 복음을 접하는 주요 창구였다. 이들에게 RVA는 사제이자 교리교사이자 선교사였다. RVA는 매일 복음 묵상, 미사 생중계, 교회 뉴스와 교리 및 전례 교육, 신앙 상담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더불어 종교 간 대화, 생태, 평화, 인권 등 아시아 사회가 마주한 문제도 각 지역 교회 언어로 풀어내며 복음을 아시아인의 삶 한가운데서 해석하고 전해왔다. 1994년 4월 11일 라디오 베리타스 아시아 은경축 기념 표지석 제막식에서 RVA 총책임자 에를린다 소 여사가 축사를 하고 있다.RVA 50년사 필리핀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에 RVA는 진실을 전하는 목소리였다. RVA 총괄 책임자 펠마 피엘(Felma Fiel, 필리핀, 성령선교수도회) 신부는 “1986년 ‘피플 파워’라 불리는 민주화 혁명 당시 RVA는 독재 정권의 언론 통제에 맞서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매체였다”고 말했다. 당시 마닐라대교구장이던 하이메 신 추기경은 RVA 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폭력이 아닌 평화로운 저항을 호소했고, 시민들은 이에 응답하며 거리로 나와 유혈 사태 없이 민주화를 이뤄냈다. 독재 정권은 RVA의 방송을 막기 위해 송신소를 공격했지만, RVA는 방송을 멈추지 않았다. 본부 박물관에 전시된 폭격당한 송신기 파편은 가톨릭 미디어가 교회 소식 전달을 넘어 민주주의와 인권, 인간 존엄을 지키는 예언자적 목소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RVA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라디오 방송에서 디지털로 변신한 RVA “WYD 때 ‘신앙의 눈’ 되겠다” 펠마 피엘 신부가 2019년 RVA 설립 5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포토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과감한 전환 2007년 녹음·편집 체계 및 자료 디지털화 49년 이어온 단파 라디오 송출 중단 젊은 세대 참여 유도에 주력 단편영화 공모전에 80편 넘는 작품 응모 서울 WYD 기간 통신원 42명 파견 준비 새로운 기술 환경에 발 맞춰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다양한 소셜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복음을 접하는 ‘유일한 창구’로서 역할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때 필리핀 본부에는 300명에 달하는 직원과 제작자들이 상주했다. 각 민족 언어를 담당하는 이들이 RVA 본부로 파견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RVA 국장 존 미 쉔(John Mi Shen) 신부는 “아시아 각지에서 온 교회 미디어 종사자들이 모인 RVA는 작은 아시아 교회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터넷과 기술의 발달에 RVA도 적응해야 했다. RVA는 2007년 아날로그 녹음과 편집 체계를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했다. 디지털화로 RVA는 비용을 절감하면서 효율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게 됐다. 테이프에 보관하던 강론·교리·성경 강의·성가들도 디지털 자료로 변환했다. 라디오 베리타스 아시아 본부 내에 있는 박물관. 반세기 넘는 RVA 여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RVA 50년사 2018년에는 50년 가까이 이어온 단파 라디오 송출을 중단했다. 결정 과정까지 반대가 거셌다. 아시아 주교단 사이에서도 “굳이 없애야 하느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오랫동안 라디오로 RVA를 들어온 청취자들은 “우리를 버리는 것이냐”고 항의했다. 이들에겐 신앙의 추억과 기억이 담긴 매체가 사라지는 일이었다. 쉔 신부는 “방송 종료를 받아들이지 못한 청취자들에게 그들이 좋아했던 강론과 강의를 디지털 기기에 담아 선물하기도 했다”면서 “우리가 기존 방송과 청취자를 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소식을 전하는 것임을 알리려고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디지털 전환은 RVA 운영 방식도 바꿨다. 탈중심화 전략에 따라 각 언어 담당자는 현지에서 직접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본부는 이를 연결해 확산하는 허브 역할을 맡게 됐다. 필리핀 본부와 21개 언어 지부 담당자는 한 달에 한 번씩 온라인 회의를 통해 서로의 상황과 계획을 나누고 공통 주제와 보도 방향을 조율한다. 각 언어 방송은 오늘날 인터넷 홈페이지를 기반으로 페이스북·유튜브·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 피엘 신부는 “아시아 곳곳에 퍼져 있는 RVA 지부는 현지 교회의 눈과 귀와 입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지역 교회만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RVA 소속 기자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RVA 50년사 청년과 만나는 새로운 방식 RVA는 아시아 지역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도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해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10주년을 기념하며 국제 단편영화 공모전을 개최했다. 생태 회심과 신앙 실천을 주제로 한 공모전에는 예상을 뛰어넘는 호응 속에 80편이 넘는 작품이 응모했다. 특히 AI와 디지털 미디어에 익숙한 10~20대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올해 1월 수상작이 발표됐고, 1~3위는 각각 태국·필리핀·인도팀에 돌아갔다. 각 작품은 RVA 홈페이지(www.rvasia.org/laudato-si-film-making-contes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쉔 신부는 “현지 언어로 제작된 작품도 AI 기술로 영어 번역이 가능했기에 작품의 주제가 전달되는 데엔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현대 기술 덕분에 더 많은 이가 참여하고 「찬미받으소서」 메시지를 더 널리 알릴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아시아주교회의연합 사회홍보위원회와 공동주최한 국제 단편영화 공모전은 아시아 주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RVA는 앞으로도 젊은 세대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활동에 주력할 계획이다. 이제 RVA의 시선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로 향하고 있다. 이미 서울 WYD에 21개 언어 담당자 전원(42명)을 파견할 준비에 들어갔다. 서울 WYD는 RVA가 ‘아시아 그리스도교의 목소리’라는 사명을 새롭게 실천할 장이기 때문이다. 쉔 신부는 각 언어 담당자를 ‘42명의 통신원’이 아닌 ‘42쌍의 눈’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이야말로 아시아의 시각으로 WYD의 현장과 한국 교회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의 렌즈라는 뜻이다. 쉔 신부는 “공식 보도자료나 일반 언론에서는 다룰 수 없는 아시아 교회 청년들의 진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RVA는 아시아 교회가 자기 언어로 증언하는 기쁜 소식을 연결하는 허브로 거듭났다. 반세기 전 단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신자들에게 다가갔던 RVA는 이제 디지털 공간에서 아시아 청년과 지역 교회, 소수 민족과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이어 가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인터뷰] RVA 라디오 듣고 자란 꼬마, 콘텐츠 총괄 사제가 되다 라디오 베리타스 아시아 국장 존 미 쉔 신부. RVA는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주며 아시아의 언어로 복음을 전해왔다. RVA 국장 존 미 쉔(John Mi Shen) 신부는 “아시아 교회 소식을 알려면 RVA를 보면 된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그는 ‘RVA 키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 방송인 RVA를 통해 강론과 교리 강의를 들으며 자랐다. 2010년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쉔 신부는 “할아버지께선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RVA에 주파수를 맞추셨다”면서 “매일 가족과 함께 RVA 방송을 들으며 신앙을 키워갔다”고 회고했다. 쉔 신부는 필리핀 산토 토마스대에서 공부하던 20대 때 RVA 본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린 시절 라디오로 듣던 방송국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꿈을 이룬 것 같았습니다.” 그는 2004부터 RVA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중국어 담당자로 일을 시작해 지금은 21개 언어 콘텐츠를 총괄하고 있다. 할아버지 곁에서 RVA 방송을 듣던 어린 꼬마가 이제는 RVA에서 아시아 교회 전역에 복음을 전하는 사제가 된 것이다.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2018년 단파 라디오 방송을 종료하던 때였다. 디지털 전환은 새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오랫동안 RVA를 청취해온 이들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쉔 신부는 “RVA의 역사와 전통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쉔 신부는 디지털 세계를 새로운 선교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거짓 뉴스가 넘쳐나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많을수록 교회 미디어가 더 적극적으로 디지털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디지털 세계 역시 현실 세계처럼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있다”며 “좋은 콘텐츠가 그 공간을 채우면 하느님의 현존도 그 안에서 드러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이 이야기가 아시아 그리스도교의 목소리를 대표하는가’를 끊임없이 되묻고 성찰합니다. 다른 가톨릭 미디어에서도 접할 수 있는 행사 기사나 주교의 발표문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RVA만이 전할 수 있는 아시아 교회의 삶과 신앙을 찾아내고 전하는 것이 우리 사명이니까요. 서품식이 언제 어디서 열렸다는 보도보다는 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해 그 자리까지 오게 됐는지를 다루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RVA의 21개 언어는 아시아 교회의 다양한 목소리다. 쉔 신부는 “아시아 그리스도교의 목소리는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면서 “다종교·다문화 사회에서 RVA가 전하는 내용은 일방적 강요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사랑·진리·용서의 메시지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분이 아닙니다. 모든 이를 위한 분이죠. 우리가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아시아의 다양성은 걸림돌이나 어려움이 아닌 아름다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한 아름다움은 21개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RVA 안에서 매일 피어나고 있다. 필리핀=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박수정2026.05.13
![[과학과 신앙] (34)그들은 진정으로 ‘일어서는 사자’일까? (전성호 베르나르도, 경기 효명고 과학교사)](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10/15/PWW1728980105959.jpg)
[과학과 신앙] (34)그들은 진정으로 ‘일어서는 사자’일까? (전성호 베르나르도, 경기 효명고 과학교사) 1986년 방영된 TV 영화 ‘기드온의 검(sword of Gideon)’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구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이스라엘의 복수를 다루고 있다. 액션과 스릴이 가미된 첩보 영화이지만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악순환 속에 결국 폭력의 끝은 어디이고 진정한 평화와 용서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수작이었다. 이 영화는 같은 사건을 다룬 유다인 출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뮌헨(2005년)’에 영향을 주었다. 이스라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탈출 21,24-25)는 구약성경 구절을 너무나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은 2023년 가자지구에서 하마스와의 전쟁을 시작한 이래 지금도 가자 지구를 초토화시키고 있으며, 이번 6월 13일 새벽에는 이란의 핵 연구 시설과 과학자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란을 공습했다. 이에 따른 민간인 피해도 많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으며 이란 역시 미사일 공격으로 맞대응하며 중동 지역에 전쟁 확산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이란에 대한 공습 작전명을 ‘일어서는 사자(rising lion)’라 부르며 자신들의 군사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열변했다. ‘일어서는 사자’의 본래 의미는 ‘사자처럼 용맹한 민족’이란 뜻으로 이는 이스라엘이 사자처럼 강하고 용맹한 민족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스라엘의 일련의 행동들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려되는 점들이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생태학은 생물학의 중요한 분야로 부각되고 있는데, 이는 인간도 결국 생태계를 이루는 수많은 생물 군집 중 하나이며 동물 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원리들이 인간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인구팽창과 그에 따른 식량·자원 부족, 주거 공간 부족, 환경오염, 자연파괴 등 인류가 당면한 많은 사회적·지정학적 문제들은 결국 생태학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그 원인과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생태계에서 어떤 생물이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먹이 지위, 그 생물의 서식 공간이 차지하는 지위는 공간 지위라 하며 이 둘을 합쳐 생태적 지위라고 한다. 만약 서로 다른 두 생물 사이에 생태적 지위가 겹치게 되면 한정된 먹이와 생활공간을 두고 치열한 다툼인 경쟁이 일어난다.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생물 종의 싸움이 치열해지면 한 종이 다른 종을 전멸시켜버리는 경쟁·배타의 원리가 작용하는데 이는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냉혹한 현실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성이 있으며 관용과 용서, 박애의 마음이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눈에는 눈을 고집한다면 모든 세상의 눈이 멀게 된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라고 역설했다. 6·25 발발 75주년을 맞는 6월 25일 「남북통일 기원 미사」 제2독서 말씀이 오늘따라 더 무게 있게 들려온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1-32) 전성호cpbc2025.06.25

규범과 예절[류재준의 음악여행](57) 오늘 제1독서의 신명기 말씀에 따르면 율법서에 쓰인 계명과 규정들은 사실 힘든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하늘에 있지도, 바다 저쪽에 있지도 않고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신명 30,10~14 참조) 우리가 사회를 살면서 지켜야 하는 법과 예절의 근원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법의 본질은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지 않고 서로의 생명을 존중하며 서로 불편한 부분들을 미리 지정해 싸울 거리를 없애는 것에 있다. 공자도 길거리에 재를 뿌리는 이를 엄히 처벌하는 것을 과한 법이라고 비판하는 무리에게, 이 법을 만든 이는 현명하다고 하였다. 재를 뿌리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재를 맞은 사람들끼리 있을 다툼을 방지하려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를 규제하는 규율은 명문화되면 ‘법’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의 상식 선에서 암묵적으로 지킬 경우 ‘예절’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성경 말씀처럼 우리의 입과 마음에서 비롯된 규칙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모두 지키며 살기는 어렵다. 나의 이득을 위해, 또는 편리를 위해 ‘법’을 위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사회는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재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법’을 지키지 않고 잘 사는 무리를 보면, 그리고 당장의 편의를 생각하면 유혹에 빠지기 쉽다.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제재가 크지 않은 예절에 대해서는 더욱 관대하다. 공동체로 살면 집단이 저지르는 실수에 대해선 더욱 너그럽게 된다. 누구나 다 예절을 지키지 않으면 불편해질 것을 알면서도 ‘나 하나면 어때, 다 하는데 어때’ 하는 생각이 만든 결과다. 클래식 공연장이 다른 음악 분야보다 좀 더 예절에 엄격한 것은 음악의 성격이 조금 독특하기 때문이다. 공연 중 소리를 내거나 옆 사람과 대화하면 대중음악에 비해 볼륨이 작은 음악 특성상 다른 관객들이 불편하다. SNS에 사진과 동영상 올리는 것이 일상이 된 요즘, 연주 도중 사진 찍는 이들도 문제가 된다. 공연 중 번쩍이는 화면은 연주자들이 당황하게 만든다. 바로 얼마 전 유서 깊은 성당의 연주회에서 플래시를 터트리는 관객도 보았다. 이런 이들을 말리기 위해 한시도 쉬지 못하는 공연장 직원들의 고생이 심하지만, 어린 직원들이 다가서면 반말로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오히려 핏대를 세우는 이들이 있다. 특히 연주자들이 앙코르를 할 때 동영상으로 촬영하는 이들은 연주자의 초상권과 저작권을 침해하는 위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악장과 악장 사이에 박수 치는 것도 그렇다. 오래전에는 악장 사이에 박수 치는 것이 종종 허용되었다. 유럽의 유명 콘서트홀에서도 여전히 악장 사이에 박수가 나오곤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집중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는 공감대와 경험이 쌓여왔다. 곡이 끝나고 연주자가 인사할 때 박수 치면 된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좋은 관계는 관계를 잇는 행동을 할 때 만들어진다. 조성진이 연주하는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1. 물의 요정이다. //youtu.be/cI5NW9lIaGU 작곡가 류재준cpbc2025.07.10

예루살렘의 비극을 탄식하는 슬픈 노래[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55)애가 애가는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한 후 유다인들을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킨 사건을 배경으로 한 다섯 편의 노래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하예츠, ‘예루살렘 성전 파괴’, 1867. 유화, 베네치아 국립현대미술관, 이탈리아. 히브리어 구약 성경 「타낙」은 애가를 ‘에카’로 표기합니다. 이는 고통스러울 때 저절로 나오게 되는 탄식으로, 우리말 ‘아!’ ‘어찌하여!’ 등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언서가 아닌 성문서로 분류합니다. 헬라어 성경 「칠십인역」은 이를 ‘트레노이’(Θρηνοι)라고 옮깁니다. 우리말로 ‘슬픔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한자로 ‘애가’(哀歌), ‘조가’(弔歌)라고 표현하지요. 이를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라멘타씨오네스’(Lamentationes)로 음역합니다. 우리말로 ‘애도’, ‘탄식’이라는 뜻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교회 성경 분류 전통에 따라 ‘애가’로 표기하고, 예언서로 분류해 예레미야서 다음에 배치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이렇게 배열한 이유는 애가의 저자를 예레미야 예언자로 보는 전승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가를 ‘예레미야의 애가’라 부르기도 합니다. 「칠십인역」은 본문에 앞서 머리글로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고 예루살렘이 사막으로 변하자, 예레미야는 주저앉아 눈물지으며 예루살렘을 위한 애가를 부르며 말하였다”라고 덧붙여 놓았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애가의 저자로 보는 전통은 역대기 하권 35장 25절에 근거합니다. “요시아가 자기 조상들의 무덤에 묻히자, 온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예레미야도 요시야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다. 그래서 요시아를 애도할 때에는 오늘날까지도 노래하는 남녀들이 모두 그 애가를 부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이스라엘의 규정으로 삼았다. 그 애가는 애가집에 실려 있다.”(2역대 35,24-25) 그러나 성경학자들은 예례미야가 애가의 저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애가에 담긴 다섯 개의 시가 서로 다른 문학 양식과 내용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가는 유다교 축제 때 읽는 멜길롯 곧 ‘다섯 두루마리’(룻기ㆍ아가ㆍ코헬렛ㆍ애가ㆍ에스테르기)에 속하는 책으로, 예루살렘 함락 후 성전이 파괴된 아브달(파스카로 시작되는 한 해의 다섯 번째 달로 대략 7~8월) 9일에 봉독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두 차례 파괴됩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에, 서기 70년 로마 제국에 짓밟힙니다. 공교롭게도 두 차례 모두 ‘아브달 9일’(티샤 베아브)에 일어났습니다. 열왕기 하권 25장 8-9절과 예레미야서 52장 12-13절은 제1성전이 파괴된 날을 각각 아브달 제7일과 제10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몇몇 열왕기 사본과 루치아노의 칠십인역본, 랍비 전통에서는 아브달 7일부터 성전 외곽이 파괴되기 시작해 성전 본 건물이 파괴된 것은 9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성전 파괴의 날’을 아브달 9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날 유다인들은 단식하고, 목욕, 기름 바름, 향수 등을 금하며 가죽신을 신지 않는 것으로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를 추념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성주간 전례 때 애가를 봉독합니다. 애가는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한 후 유다인들을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킨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애가에 담긴 모든 노래가 기원전 538년 유배 시대가 끝나기 이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중 둘째와 넷째 노래는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이 파괴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지어졌다고 합니다. 또 첫째 시는 기원전 598년 제1차 유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으로 추정합니다. 애가는 모두 5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곧 다섯 편의 슬픈 노래가 묶여 있지요. 애가는 예루살렘 도성, 곧 ‘시온’을 의인화해 시온의 죽음을 슬퍼하는 비탄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1장 예루살렘의 참상, 2장 예루살렘 파괴, 3장 고통과 희망, 4장 징벌의 한가운데에서 비통한 현실, 5장 애원의 기도로 이어집니다. 애가 1─4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22개 구절로 이어갑니다. 첫째ㆍ둘째ㆍ넷째 애가는 ‘정치’, 셋째 애가는 ‘개인’, 다섯째 애가는 ‘공동체’ 차원에서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를 애도합니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애가는 예루살렘 멸망이 하느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으로 말미암은 결과라고 강조합니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성실하지 못했던 이스라엘에 불가피하게 내려진 비극이 바로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이 재난의 원인과 의미를 깨달은 유다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애가는 하느님께서 예루살렘 멸망을 통해 당신 백성의 참회와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또 이를 통해 다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는 당신 백성을 물리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백성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애가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일으켜 주시라고 간청합니다.(애가 5,21) 하느님께서는 성실하시므로 이스라엘이 다시금 회개해 돌아온다면 그들은 구원될 것입니다.(애가 3,40-41; 4,22; 5,21)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4.01.03

교회와 신앙의 눈으로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87) 혼란한 시대에 생각하는 신앙 독일 출신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남겼다. 악이 특별히 악한 동기나 사악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일상적인 무사유(사고의 결여)와 책임 회피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일반화할 순 없지만, 생각하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나 악한 일이 우리 주위에 비일비재한 것도 사실이다. 종교가 사유와 멀어질 때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위험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한 종교가 정치와 결탁할 경우 종교는 선동의 도구로, 정치의 노리개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우리는 이를 전 세계적으로, 특히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목격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종종 ‘비지성적’이란 비판을 받는다. 성당은 열심히 다니지만, 막상 성경이나 교리에 대한 물음에는 잘 모른다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가정이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신앙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신앙 따로 삶 따로’도 문제이지만, 신앙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신앙으로 세상일을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는 것도 큰 문제다. 이러한 비지성적 신앙은 언제든 정치적 선동에 휩쓸리고 그릇된 신심이나 유사종교의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어떤 신자들은 교회가 왜 정치에 관여하고 사회적 사안에 관심을 갖느냐고 항의하기도 한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는 주교님·신부님들 때문에 수십 년 된 신앙생활을 접고 이제 성당에 안 나가겠다고 선언하는 신자도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가다듬고 사회 안에서 돌아가는 일들에 대해 이성적으로, 특히 교회와 신앙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신앙에서 이성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왔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신앙과 이성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다”고 하였다.(회칙 「신앙과 이성」 1항) 신앙 없는 이성은 사유의 최고 경지까지 이를 수 없고, 이성 없는 신앙은 맹목이나 신화에 빠질 위험이 있다. 신앙과 이성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발전할 때 인류에 큰 유익을 선사한다. 물론 신자 개개인이 세상 모든 문제를 신앙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취하는 입장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 것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교회는 각 분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세상과 교회가 고민하는 현 시대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신학적으로 숙고하고, 이에 대한 공식 입장을 표명한다. 물론 교회가 신자들에게 획일적인 생각을 강요할 순 없지만, 세상의 여러 오류를 지적하고 교회 가르침에 따라 진리를 향한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사유를 넓히고, 세상과 대화하며 보다 인간적이고 정의로우며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동참하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최근의 정치적 이슈에 대해 주교회의는 교회의 공식 입장을 분명히 천명하였다. 물론 이것이 믿을 교리는 아니지만, 성경과 성전에 근거한 것이기에 신자들은 그 안에 담긴 교회 정신을 이해하고, 혹시라도 빠질 수 있는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이성은 약하고 이해관계에 얽히기 쉽다. 신앙이 한국인의 무뎌진 이성에 도움을 줄 때다.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는 이 시기에, 우리는 신앙을 통해 여러 이해관계와 이념에서 벗어나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될 수 있는 길을 찾으며, 이 땅에 구원의 진리가 실현되도록, 거짓과 폭력이 사라지고 정의와 평화가 이 땅에 도래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한민택 신부cpbc2025.02.19

“손주들이 신앙생활하는 모습 기쁘고 행복”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에 만난 사람 임근배씨 첫영성체도 하고, 미사 반주도 하는 기특한 손자 재준이와 찍은 셀카. 임근배씨 제공 “신앙 안에서의 체험·추억 중요 믿음 멀어지는 때가 오더라도 성당에서 지내며 느낀 것들 신앙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 “명절 때 가족들이 다 모이면, 손자보고 식사 전 기도를 하라고 시키죠.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손자 재준이는 이제 수줍어하는 기색 없이 기도를 합니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면 으쓱해 하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요.” ‘제5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7월 27일)을 맞아 만난 임근배(야고보, 68, 서울 연희동본당)씨는 “손자를 데리고 성당에 가면, 제 또래 신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산다”면서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는데, 둘 다 혼인성사를 했고 손자도 한 명씩 안겨줘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지난해는 겹경사였다. 외손자 재준(다니엘)이가 첫영성체를 했고, 친손자 유준(다미아노)이가 태어났다. “주변에선 아들 딸 다 결혼하고 손주까지 있으니 얼마나 좋겠냐고 해요. 자식 결혼 문제, 손주 문제로 걱정인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그 앞에선 좋은 내색도 못합니다.(웃음)” 임씨는 “신앙을 물려주고 지켜나가려면 자녀가 듣기 싫어해도 말해 줄 건 말해줘야 한다”고 했다. “저는 아이들에게 놀아도 성당에서 놀라고 했어요. ‘미사에 빠지지 마라, 결혼은 해야 한다’ 계속 얘기했죠. 요즘 그런 말 하면 안 된다면서요.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른들이 방관하지 않고 알려주고 이끌어줘야 해요. 아이들이 성당에 안 가도 ‘알아서 가겠지, 내가 뭐라 하면 싫어하겠지’라며 내버려 둔 부모들은 다 후회하더라고요. 그럼 제가 그러죠. 애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 같아도 말해줄 건 말해줘야 하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요.” 아내와 두 손자, 딸 내외와 아들 내외랑 온 가족이 산책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맨 오른쪽이 임근배(야보고)씨다. 임근배씨 사진 제공 그도 부모에게 신앙을 물려받았다. 외가엔 사제와 수도자가 많은 집안이라 독실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땐 가톨릭청소년회(Cell)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함께했던 친구들과는 50년 지기로 여전히 만나고 있다. 임씨는 ‘말’만이 아니라 매일 기도, 성경 필사, 다양한 성당 활동으로 자녀와 손주에게 신앙의 모범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는 건축사로서 여러 성당을 지어 봉헌하기도 했다. 임씨는 “신앙 안에서의 체험과 추억이 중요하다”면서 “믿음에서 멀어지는 때가 오더라도, 성당에서 지내며 느꼈던 것들이 언젠가는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는 힘이 돼준다”고 했다. 그래서 손자 재준이가 주일학교 미사 반주를 시작했다는 소식에 몹시 기뻤다. 손자가 주일학교에 재미를 붙인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첫영성체에 이어 미사 반주를 하는 손주 덕분에 딸 내외도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임씨는 “손주가 이제 하느님 꽃밭으로 들어온 것 같으니, 이후는 하느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손주가 생기니 매일 아내와 바치는 아침 기도 때 기도거리가 더 늘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내 편’인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다는 걸 손주들이 알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자들 통해서 자식 키울 땐 몰랐던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보고만 있어도 예뻐요. 욕심 없이 존재 그 자체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 같아요. 할아버지만이 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아낌없이 주고 싶습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박수정2025.07.23

오리게네스의 편지 :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월간 꿈 CUM] 영성의 길 (01) 출처: 월간 꿈CUM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분에게! 저는 오리게네스( , 185년 경~253년 경)라고 합니다.1)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닌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10살 경에 로마의 박해로 저의 아버지 레오니데스는 순교하였고, 저희 집안의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여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절망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알렉산드리아에 학교를 설립하여 남은 식구들을 봉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데메트리우스 주교님이 세례지원자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셔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리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그리스도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뿐만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하는 동안 또한 제 삶에서, 하느님은 저에게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과 하느님과 영적인 합일에 도달하는 ‘영적여정’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깨닫도록 이끄셨습니다. 우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한 이집트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또한, 이집트 땅을 뒤로 한 지점에 도착했더라도 홍해를 건너야만 “나는 야훼를 찬양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탈출 15장 참조)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때부터 우리는 「아가」에 이르기까지 머나먼 영적인 길을 가야 합니다. 그 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유혹받고 이를 물리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광야를 지나 영적 여행을 계속하여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우물에 도착해야 합니다.(민수 21,17-20) 그런 연후 거룩한 땅의 문턱에 이르러서(요르단 강둑) 우리들은 모세가 불렀던 것처럼, ‘하늘아 귀를 기울여라. 내가 말하리라. 땅아 들어라. 내가 입을 열리라’ (신명 32장 참조)라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후 우리들은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싸우며 거룩한 땅(하느님 나라)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또 열왕기로 올라가면서 ‘다윗의 노래’에 다다라야 합니다. 즉 다윗이 원수들과 사울 왕의 손아귀에서 달아났을 때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 하고 불렀던 노래입니다.(2사무 22,2-51 참조) 다음으로 우리들은 이사야에 다다라야 합니다. 그곳에서 이사야와 더불어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드리리라’ 하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이사 5장 참조) 이 모든 노래를 다 거치고 나면 우리는 더한층 높은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곳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의 신랑과 더불어 아름다운 영혼으로 노래 중의 노래인 「아가」를 부를 수 있어야 됩니다.(오리게네스, 아가강론 1. 참조) 이 이야기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하느님께로 향한 영적인 삶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감’과 같은 것입니다. 탈출한다는 것은 ‘회개함’을, 홍해를 건너감은 ‘세례를 받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영적인 삶은 진실로 회개하는 영혼에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태어나게(세례) 하면서 시작됩니다. 움터로 보내집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를 사막으로 보내시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악과 세상의 다양한 유혹에 대항하는 영적인 투쟁을 하게 하시며, 결국에는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생명의 우물에서 영적인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어려운 과정을 거친 이들은 드디어 하느님 나라 앞에 서게 되는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헌신했던 다윗과 같이하느님을 사랑했던 이사야와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다가오는데, 이 모든 것은 위와 같은 영적인 삶에 필요한 동반자들인 것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생활은 기쁨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벗어난 이들이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듯이, 어려운 사막을 지나거나, 요르단 강둑에 서서나, 그리고 하느님과 우리가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어 나오는 「아가」의 노래와 같이, 영성 생활은 최종적으로 늘 우리를 하느님과의 친밀한 사랑을 나누게 하는 것이므로, 찬미와 기쁨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여러분의 시대에서는 저를 그리스도교 신비신학의 첫걸음을 시작한 교부로 평가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교 신비신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신비신학은 최종적으로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여 기쁘고 행복하게 살면서, 이 사랑의 기쁨 때문에 우리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모두 사랑의 기쁨으로 가득하시길 빕니다. 아멘. 글 _ 이수완 교수 (로마노, 수원가톨릭대학교 하상신학원 영성신학)2025.09.03

“33년 녹음 봉사하다 보니 마음 부자 됐어요”[카리타스, 희망이 되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본지 희년 공동기획 소리주보 녹음하는 임순남 성동장애인복지관 녹음봉사회 회장 회원들과 함께 작업해 온 분량 소리주보 6000여 권 소리매일미사 6000일분 넘어 “책과 기도 자연스럽게 접하니 지식과 영성의 양분 쌓여” 팔순 가까운 나이에도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 “’복음 말씀 한 줄로 사람 마음 적실 수 있다니 감사” “녹음 봉사를 하면서 마음이 부자가 되더라고요. 책과 기도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돼 지식과 영성의 양분이 쌓였습니다. 오히려 봉사를 한다기보다 더 많은 것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서울가톨릭복지회 산하 성동장애인복지관 녹음봉사회 회장 임순남(구네군따, 78)씨는 30여 년간 소리 봉사를 이어온 원동력을 이같이 말했다. 임 회장은 1993년부터 시각장애인을 위한 소리주보와 소리매일미사를 녹음해왔다. 팔순에 가까운 지금도 현역으로 왕성하게 녹음실을 누빈다. 임 회장이 단원들과 함께 작업해 온 분량은 소리주보 6000여 권, 소리매일미사 6000일분 이상에 달한다. 현재는 7개 교구의 소리주보 녹음을 봉사회가 담당하고 있으며, 2년에 걸쳐 구약·신약 성경 73권 전체를 녹음하기도 했다. 지금은 교회 내 시각장애인을 돕는 일을 넘어, 국회도서관 자료를 녹음하는 정부 서비스도 지원하고 있다. 30여 년 여정의 시작은 우연이었다. 임 회장은 “시작할 때에는 본당 활동을 열심히 하는 정도였는데, 같이 교리신학원에 다니는 한 자매님께서 저를 이곳에 데리고 오셨다”며 “나를 데리고 온 자매님의 체면을 지켜주려고 ‘6개월만 버텨야지’했는데 벌써 33년이 됐다”고 말했다. 임순남(왼쪽 두 번째) 회장과 녹음봉사회 회원들, 최장민(가운데) 신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여 년간 주부로 살아온 그였지만, 대학 졸업 후 3년간 문화방송(MBC)에서 아나운서로 일한 경험도 있다. 혹독한 아나운서 수습 과정을 거친 경험은 지금 단원들을 교육하는 데 보탬이 됐다. 임 회장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방송을 배웠던 것이 하느님께서 이곳에 쓰시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물론 쉬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회원은 65명이지만 120명에 달한 적도 있었다. 다양한 개인들을 품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가톨릭 세례를 받지 않은 봉사자도 있었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지닌 이도 있었다. 그에게는 특별히 고 정진석(전 서울대교구장) 추기경과의 대화가 기억에 남아있다. “정 추기경님께서 ‘천국에 가면 시각장애인분들이 찾아와 인사할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보지 못해 누군지 몰라 인사를 못 하지만, 천국에서는 세상 만물을 볼 수 있으니 이승에서 귀가 되어준 여러분에게 반드시 고맙다고 인사할 거예요’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우리 회원 모두가 긍지를 가지고 이 일을 할 수 있었죠.” 그는 봉사하면서 받은 따뜻한 기억들을 떠올렸다. 아버지 장례 때 많은 수녀가 빈소를 찾아와 준 일, 명절마다 꿀이나 호두를 보내주는 형제, 시각장애인들의 감사 인사 등이 모두 큰 힘이 됐다. 그는 “함께 봉사하는 자매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볼 때면 행복이 가득하다”고 전했다. 임 회장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보다 신앙심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잘 읽고 못 읽고를 떠나서 신앙심이 우선”이라며 “소리는 마음을 실어 보낼 때 제대로 전달된다. 시각장애인분들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목소리를 들으면 행복해하신다”고 말했다. “32년 동안 하느님 공동체 안에서 감사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회원들에게 여전히 가르쳐줄 것도 많고, 저를 좋아해 주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됩니다. 복음 말씀 한 줄로 사람들의 마음을 적실 수 있다는 데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준태 기자 ouioui@cpbc.co.kr ☞ 올해 희년을 맞아 본지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와 공동기획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순례자’로 희년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맞는 희년의 의미와 희망을 되새기며 이웃에 대한 관심과 구체적 사랑 실천을 전합니다.이준태 2025.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