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족한 믿음에 대한 성찰, 부활의 시작[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43) 완벽하지 않은 믿음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를 두는 길은, 완전한 믿음이라는 이상에서가 아닌, 완벽하지 못한 우리의 믿음을 인정하며 출발하는 것이다. 부활에 우리가 처음 접하는 복음 말씀은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고 의심을 품었던 제자들의 이야기다. 이는 제자들의 약한 믿음을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이란 것이 나약한 인간 본성을 관통하는 것이기에 나약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임을 말해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부활절이 되었다고 없던 신앙이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의 부활 신앙은 빈 무덤에서 시작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믿음은 당혹스러움·놀라움·의심의 순간을 거쳐야 했으며,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다가와 말씀을 나누시며 격려해주시는 주님과의 동행 속에서 자라는 것이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걷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꾸짖으며 말씀하신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그러나 질책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풀이해주시며 그분이 겪으신 수난과 죽음이 실패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이루셔야 할 사명이었음을 일깨워주신다. 또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 빵을 나누어 주며 친교를 이루신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고, 희망의 불을 지피시며, 신앙의 눈을 밝혀주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가? 제자들처럼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거나, 무디고 단단한 마음으로 살지는 않나?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잘 믿고 있는 것인가? 자연스럽게 던지는 이 질문들은 자책이 아닌 더 멀리 걸어가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들이다.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숨길 필요 없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보다 먼저 이 길을 걸은 신앙의 선조들, 심지어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와 사도들조차도 우리처럼 나약한 믿음에서 시작하였고, 좌절과 절망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거기 머물러 있거나 포기하지 않고, 더 멀리 가기 위해 하느님께 계속해서 매달렸으며, 부족하나마 신앙의 길을 계속해서 걷고자 하였다. 하느님을 찾고 자신을 찾는 그 길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고, 자신 안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에게서 하느님의 권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좌절과 절망, 죽음을 뚫고 일어서는 불멸의 희망을 맛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파스카 여정’, 곧 예전의 나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진리이며 인생의 진리다.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탓하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 살면서 삶을 배우듯,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믿음을 살면서 믿음을 배우는 것이다. 부활을 맞아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보여드리면 어떨까. 부활을 믿지 못해도, 부활이 기쁘지 않아도, 그것이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할 결격사유는 아니다. 믿음은 강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부족한 믿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믿음을 키워달라고 청하면 좋을 것이다. 그럴 때 믿음은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완벽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포기하지 말고 당신과 함께 걷기를 바라신다. 이야기를 나누며 그분과 사귀기를 바라신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우리의 소명인 거룩함의 성소를 발견하고, 나날이 성장해가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 ‘금쪽같은 내신앙’ 코너를 통해 신앙 관련 상담 및 고민을 문의하실 분들은 메일(pbcpeace12@gmail.com)로 내용 보내주시면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한민택 신부cpbc2024.03.26

나무와 금속에 담아낸 ‘고통과 시련’김재윤·홍수원 작가 2인전...‘삶이라는 광야’ 갤러리 1898 홍수원 작, ‘저는 곧 넘어질 지경이며 저의 고통은 늘 제 앞에 있습니다’(시편 38,18), 홍송고재에 고철. 김재윤 작, ‘광야 / 비움, 발견’. 구리에 주석과 나무. 김재윤·홍수원 작가의 2인전 ‘삶이라는 광야’가 서울 명동 갤러리 1898 제3전시실에서 5~13일 개최된다. 전시를 기획한 홍수원(젬마, 성물 전문 갤러리 보고재 관장) 작가는 “종교를 초월해 모두와 주어진 삶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며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거칠고 메마른 땅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고 한탄했지만 결국 그분의 위로와 보살핌 속에서 사랑을 마주했듯이, 일상의 삶이라는 광야에서 마주치는 숱한 고통과 시련 역시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해야 하는 것, 즉 온전히 수용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시에서는 ‘나무’와 ‘금속’이라는 상이한 물성의 재료로 ‘광야’를 표현한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복원 과정에서 나온 금강송 고재(古材)로 ‘십자가의 길’을 만들어온 홍 작가는 이번에도 낡고 투박한 고재의 단단한 옹이와 못 자국, 거친 상처에 다양한 재료를 더해 희로애락의 인생길 같은 다채로운 이미지를 선보인다. 광야에 선 사람의 형상이 주를 이루며,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완벽하거나 깔끔하게 마무리될 수 없음을 표현하기 위해 미완의 작품도 전시할 예정이다. 성경 말씀을 비롯해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도 더해진다. 김재윤(토마스 무어, 올댓해머 대표) 작가가 선보이는 30여 점의 십자가상 역시 얼핏 보면 나무 같다. 하지만 모두 금속이다. 비결은 망치질. 금속은 차갑고 빛을 발하는 성질이 있지만, 망치로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작업을 거치면 나무 같은 질감과 나무보다 더 따뜻한 감성을 지닐 수 있다. 또 구리가 여러 색으로 변색될 때 적절한 시점을 잡아내서 변색을 멈추면 나무 느낌을 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10여 년간 크고 작은 성미술 그룹전에 참여하고 있는 김 작가는 “평소에는 일반 작품을 제작하지만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물을 만들 때가 있다”며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일종의 소명 같은 느낌이고, 그런 작업 자체가 기도의 시간이 된다”고 전했다. 한편 홍 작가가 그동안 고재로 작업한 14처와 감실은 6월 중 제주 정난주성당에 설치될 예정이다. 또 이번 전시 수익금은 세상의 소외된 아이들을 돕는 공익법인 블루밍키즈(이사장 홍수원)에 기부하기로 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4.05.29

창세기는 말한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하라고[신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손희송 주교 가톨릭출판사 “창조 이야기의 저자는 우리에게 어떤 경우라도,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하느님을 굳건히 믿으면서 끈질기게 희망을 지니라고 강력히 권고한다.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주님이시기에, 결코 불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신앙인이라면 어떤 경우나 상황에서도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희망을 길어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33쪽) “‘하느님께서 죄인에게 너무 관대하신 것이 아닌가?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면 또 죄를 범할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는 다르고, 그분의 마음은 우리 마음보다 훨씬 더 크다. (중략) 하느님 안에 무한한 용서가 있음을 믿는 이라면 자신의 죄와 잘못 때문에 낙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125쪽) 세상과 인간의 창조·아담과 하와·카인과 아벨·노아의 홍수·바벨탑의 붕괴,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이야기 등 창세기 속의 여러 이야기를 하나의 키워드로 엮으면 무엇일까? 의정부교구장 손희송 주교는 바로 ‘희망’이라고 말한다. 렘브란트 작 ‘아브라함의 희생제사’, 1635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는 희망의 눈으로 창세기를 읽고 그 안에 숨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 믿음의 선조들이 전해주는 신앙의 보화를 발견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이다. 책은 크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창조주 하느님을 통해 희망의 근거를 묻고, 2장에서는 인간의 근원, 3장에서는 죄인의 희망을 찾는다. 마지막 4장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 준다. 창세기를 희망의 관점에서 보려는 저자의 노력은 1995년 가톨릭청년성서모임이 주관하는 연수를 통해 창세기에 담긴 메시지와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밝히는 데서 시작됐다. 당시 강의록을 수정하고 보충해 「신앙인」(1999), 「나에게 희망이 있다」(2001)를 펴내기도 했다. 두 기록을 하나로 다시 엮은 책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 저자는 창세기의 주요 이야기를 설명하면서도 독자가 성경의 큰 틀과 하느님의 말씀을 유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며 다양한 예화를 더한다. 저자는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희망은 우리 구원과도 직결된다”며 “원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좋게 창조하셨고 남녀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셨음으로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애쓰신다”고 전했다. 손 주교는 1986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석사학위와 사제품을 받았고, 1996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동 대학교에서 신학 교수를 역임했다. 2015년 주교품을 받고 2016년부터 서울대교구 총대리를 맡다 올해 3월 제3대 의정부교구장에 임명됐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4.07.02

천사의 손가락 삼위일체 상징… 발아래 상자는 야곱의 우물[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29) (29)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 천사의 알림(주님 탄생 예고) 천사의 알림: 94.5 x 80.3cm, 템페라, 14세기, 스코플테 박물관, 성 클레멘스, 오흐리드 펴져 있는 세 손가락은 삼위 구부린 엄지·약지는 일체의 의미 이 물은 생명의 물이신 구세주 의미 우물은 구세주를 몸에 담고 계신 성모님의 모습 <앞글에 이어> 동정녀 “그가 나를 대문으로,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런데 보라,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았고, 땅은 그분의 영광으로 빛났다. ···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에제 43,1-4) “그 사람은 나를 성전 밖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다시 데리고 갔는데, 그 대문은 잠겨 있었다. 그때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문은 잠가둔 채 열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이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겨 있어야 한다.’”(에제 44,1-2) 예로부터 삼대가 덕을 쌓아야 남향에 동쪽 대문 집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동문이 왜 좋을까요? 가장 먼저 빛이 들어오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지나 떠오른 빛이 집안에 들기 시작하면, 새 아침과 함께 환하고 기운이 넘칩니다. 아마도 에제키엘 예언자 당시의 사람들은 이 동문의 의미를 완전히 해석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빛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동문, 즉 구세주로 오실 하느님의 의미까지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훗날 아르고의 페트루스는(850~922)1) 성전의 동쪽 문이 동정녀 마리아를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동문은 성경에 언급됐듯 빛으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께서 들어오시고 나가신 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외경2)에 따르면 동정녀 마리아가 성전(聖殿)에 봉헌된 후, 세월이 흘러 혼기가 다가오자 대제관은 천사가 알려준 대로 마리아의 배필을 정했다고 합니다. 즉 유다 지방의 총각과 홀아비들은 막대기를 하나씩 가져다 성전에 놓도록 명령받았습니다. 당시 홀아비였던 요셉도 막대기를 가져다 놓았는데 그곳에 두었던 막대기에서 기적이 일어나면서 요셉이 배필로 결정됐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말하기를 “나는 아들들도 있고 이미 늙었다. 그리고 그녀는 젊디젊은 처녀이므로 나는 이스라엘의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기 싫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이 난 대로 그는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후 마리아를 집에 데려다 놓고, 목수 일 때문에 먼 곳으로 떠나가 있었습니다. 다윗 집안의 정결한 처녀로 성전에 사용할 자색과 붉은 장막을 짜도록 선택된 마리아가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놓고는 의자에 앉아 천을 짜고 있을 때,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동정녀는 순간적으로 빛이 들어오는 쪽을 향한 듯하고 약간 불안한 모습입니다. 동정녀는 약간 귀를 기울이는 듯한 표정으로(시편 45,11-12 참조)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왠지 두려운 듯 손을 들고 몸은 약간 뒤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 천사의 행동은 마리아의 조용한 모습과 달리 급히 다가오는 모습으로 표현돼있습니다. 이것은 이 기쁜 소식을 촌각인들 늦을까봐 빨리 전하고자 재촉하는 모습입니다.(루카 1,26-27) 그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의 모습입니다. 천사는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가 있는 흰빛 겉옷과 푸른빛 옷을 입고 있는데, 여기서 청색은 하늘의 의미와 순수함을 나타냅니다. 오른팔 어깨 부분의 조금 더 진한 청색 띠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 띠는 사도들의 옷에도 표시되는데 색깔은 각기 다르며 예수님의 띠는 주로 금색으로 그려집니다. 천사가 왼손에 쥔 지팡이는 권위와 품위를 드러냅니다. 오른손은 팔을 펴고 있으며, 눈은 마리아를 향하고 있어 전해야 할 말을 이미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축복의 상징을 손가락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펴져 있는 세 손가락은 삼위이고 엄지와 약지를 구부려 붙인 것은 일체의 의미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구부린 두 손가락은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을 상징하며 인간으로서(인성), 하느님으로서(신성) 처음부터 보이지 않게 계획하신 육화(肉化)의 신비를 기억시키려 합니다. 우물가의 성모님: 템페라, 31x26cm, 레클링하우젠 이콘 미술관, 독일. 우물 오흐리드 이콘에는 네모난 상자 형태가 앞 아래쪽에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우물을 상징합니다. 우물은 땅에 있으면서 들여다보면 하늘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 물에 비친 하늘을 보면 하늘에 계신 분을 연상할 수 있고, 또 우물은 지상에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비친 하늘과 땅과 지하세계의 연결을 나타냅니다. 예로부터 유다 지방에서는 우물에 치유의 성격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우물 안의 물로써 몸을 깨끗이 씻게 하고, 옷을 빨아 희게 하며, 병을 낫게 하고, 갈증을 풀어주며, ‘생명을’(에제 47,9) 유지하게 합니다. 이 우물은 앞에 놓여 있어 누구나 길어 마실 수 있으며,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그 안에서 샘처럼 솟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요한 4,14 참조) 이 물은 생명의 물이신 구세주를 의미하고, 우물은 구세주를 몸에 담고 계신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구도와 배경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이 걷혀 문 위로 걸쳐 있는데, 천의 끝자락이 살짝 늘어져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대칭 구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천사는 동적(動的)으로 힘차게 다가오는 모습인 데 비해, 성모님은 조용한 모습으로 생각하는 정적(靜的)인 구도입니다. 성령께서는 위로부터 성모님의 머리를 향하여 비둘기의 모습처럼 나타나고 있으며 검푸른 빛입니다. 이콘에서 하느님 빛의 색깔은 흰색이 아닌 검푸른 색으로 표현하는데, 성경에서 하느님의 기운을 짙은 구름, 안개로 자주 표현하는 데 따른 것입니다. 그 빛은 우리가 보는 자연의 빛이 아니라 그늘의 빛입니다. 성전 동문 위에는 늘어져 있던 붉은 휘장이 걷어 올려져 있는데, 이는 오실 구세주에 의해 성전 휘장이 걷힐 것을 미리 보여주는 상징입니다.(마태 27,51; 마르 15,38; 루카 23,45) 이콘에서는 중요 인물을 강조하여 그립니다. 앉아 계신 동정녀의 발판을 두 단계로 하여 한 단계의 천사보다 성모님을 더 위로 들어 올립니다. 또 서 있는 천사와 앉아 계신 성모님의 크기가 같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일어나신다면 어떻게 될까? 천사보다 더 큰 성모님의 키에는 높으신 분이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원근법에 맞지 않게 지붕이나 발판이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이유는 역원근법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눈’이 성모 마리아의 복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복부를 중심으로 모든 가구와 천장, 우물, 발판이 원근법과 반대로 앞은 좁고 뒤로 갈수록 넓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성모님 복부에 있는 하느님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라보는 우리는 그 자리에 ‘보여지는’ 위치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서방 미술에서 ‘천사의 알림’은 결과적인 분위기로 그려내지만, 동방 미술에서는 당시의 상태를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 각주 1) 아르고의 페투르스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폭넓은 교육을 받은 후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저술에 힘을 쏟았다. 그는 주교직을 여러 차례 거절한 후 순종으로 받아들였고, 가난한 이웃에 사랑을 베풀었으며,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2) 여기서는 「야고보 원복음」. 김형부 마오로cpbc2024.07.24
![[금주의 성인] 성녀 루갈다 (6월 16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6/11/ASj1718083517757.jpg)
[금주의 성인] 성녀 루갈다 (6월 16일)1182~1246년, 벨기에 출생 및 선종, 수녀, 12~13세기 뛰어난 신비가 가스파르 드 크라이에의 성 루갈다에게 발현하신 그리스도. 사진=굿뉴스 루갈다 성녀는 12살에 어머니 권유로 벨기에의 생트롱 부근 성 가타리나의 검은 베네딕도회로 갔습니다. 수도생활에 특별한 성소가 있지는 않았지만, 지참금이 없다는 사실은 혼인을 포기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진난만했던 소녀는 예수님 현존을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들과 놀고 있는 루갈다에게 나타나 상처를 보여주며, 당신만을 사랑할 수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루갈다는 바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20살이 되는 해에 베네딕도회 수녀가 되었습니다. 루갈다가 기도하면 항상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일이 주어질 땐 “주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일을 끝내자마자 다시 올게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 환시를 경험했고, 이를 통해 주님과 성모님, 다수의 성인을 뵈었다고 합니다.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할 때는 이마와 머리에서 피가 맺혀 흘렀습니다. 성 가타리나 수도원 수녀들은 루갈다를 원장으로 추대하고자 했지만, 그는 1208년 더 엄격한 규칙이 있는 곳을 찾아 브뤼셀 근처 에비에르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루갈다는 고해 사제와 당시 성 가타리나 수도원 근처에 살던 크리스티나 성녀의 권고에 따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루갈다는 그곳에서 30년 동안 오직 빵과 물로만 지내며 극기 생활을 했고, 영적 슬기로움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루갈다에게 치유와 예언의 은사, 성경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루갈다는 불완전한 프랑스어로도 영적 지도에 있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루갈다는 특히 기도에 열중했는데, 그의 기도는 신비롭게 이루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한 번은 동정심이 없던 한 수도원 원장이 선종하자, 루갈다는 그가 천국에 들지 못할 것을 걱정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수도원장이 나타나 그의 기도 덕분으로 연옥의 고통을 크게 덜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졌습니다. 또 예수님은 당신의 심장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자주 루갈다에게 발현하셨습니다. 예수님 수난에 대한 묵상은 그의 수도생활의 핵심 주제였습니다. 루갈다는 생애 마지막 11년을 앞을 보지 못한 채 지냈습니다. 그는 그것마저 가시적인 세계에서 자신을 떼어놓고자 도와주시는 하느님께서 주신 기쁜 선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루갈다에게 나타나셔서 언제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루갈다는 예언대로 1246년 6월 16일 삼위일체 대축일 저녁기도 후 끝기도가 시작되려는 순간 64세로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루갈다의 일생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가치관에 큰 징표를 남겼습니다. 그는 12~13세기의 뛰어난 신비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cpbc2024.06.11
![[성탄] 무려 21년 만에 신약 필사, 지적장애인이 주님께 드리는 선물](//cpbc.co.kr/CMS/newspaper/2022/12/rc/837667_1.3_titleImage_1.jpg)
[성탄] 무려 21년 만에 신약 필사, 지적장애인이 주님께 드리는 선물지적장애 3급 송장욱(미카엘)씨의 성경 필사 이야기 무려 21년 만인 올해 신약 성경을 완필해낸 송장욱씨가 다시 성경을 필사하는 동안 어머니 박옥위씨가 곁에서 함께하고 있다. 1999년 11월 30일. 희망의 대림 시기가 막 시작하던 그때, 아들이 느닷없이 엄마에게 질문했다. “엄마, 성경 한 번 써볼까예?” 무슨 바람이 들어선지 당시 20대 후반이던 아들 송장욱(미카엘, 51, 부산교구 정관본당)씨가 엄마에게 성경 필사 선언(?)을 했다. ‘우리 아들이 설마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엄마의 보살핌과 가족의 응원으로 성경 필사를 시작한 지도 21년째이던 올해. “엄마! 내 드디어 완성했습니데이~!” 그가 올 초 장장 21년 만에 신약을 완필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월 부산교구장 손삼석 주교 명의로 수여되는 ‘성경 완필 인증서’를 받았다. 대림 시기를 지나 다시 찾아온 주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15일 부산 기장군 정관읍 정관성당 인근에서 그를 만났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엄마는 글 쓰고, 아들은 하느님 말씀 쓰고 “아, 조금 힘들었어요. 음… 근데, 재미있었어요.” 송씨는 무려 20년 넘게 쓴 신약 완필 소감을 아주 짧게 답했다. 긴 시간 공들인 자신의 노력에 미사여구를 써서 힘주어 의미 부여를 할 만도 한데, 돌아오는 대답은 짧고 간단했다. 송씨는 지적장애 3급인 장애인이다. 어릴 때에도 체구는 컸지만, 언행이 또래만큼 발달하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도 짤막한 대화는 가능하지만 단답형이다. 글자를 쓰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내용의 깊은 이해를 요구할 수 없다. “엄마, 공부 가르쳐주세요.” 성경 쓰기를 하자는 뜻이다. 성경 필사는 그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직장에 다녀오면 펜을 잡고 성경 쓰기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에게 성경 필사는 결코 쉽지 않았다. 받침을 곧잘 빼먹기도 하고, 썼던 구절을 또 쓰기도 했다. 있는 그대로 옮겨적는다는 것도 큰 작업이었다. 하루 한 바닥을 쓰기도 버거웠다. 그래도 엄마 박씨는 삐뚤빼뚤 써내려간 아들의 필사를 날마다 확인하고 사인을 해줬다. 받침이 없으면 채워주고, 빠뜨린 구절은 대신 써주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는 묵묵히 지켜봤다. ‘우리 아들, 오늘도 잘 썼네.’ “우리 엄마는 시인! 아빠는 화가.” 송씨는 인터뷰 중에도 연신 작업실 한편에 놓인 아빠의 그림들과 엄마가 쓴 시 작품을 가리켰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닭을 키우고 병아리가 달걀을 낳는 이야기를 하는 등 엄마의 제재에도 자신의 관심사를 자꾸만 꺼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을 찾아온 기자를 친구처럼 여겼다. 송씨의 말대로 부친은 부산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낸 송영명(안토니오, 79) 서양화가이고, 모친 박옥위씨는 시조시인이자 수필가로 40년 동안 활동해 온 여류작가다. 부부는 40년 세월을 교사로, 작가로 살았다. 아들이 그래도 하느님 말씀을 써보겠다고 한 것이 어쩌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부모의 모습을 따라 신앙적으로 표출해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주님 말씀을 다 이해하진 못해도, 글씨를 그림 그리듯 해도 아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꾸준히 말씀을 써내려 간 것이다. 이런 풍경을 엄마는 작품으로 썼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카치니 아베마리아를 듣는 오후’다. 소나기 한바탕 한더위를 씻고 간 후 / 매미의 화답송이 푸르게 쏟아지고 / 여름은 점층 초록빛 에움 없이 푸르다 아이는 삐뚤빼뚤 성서를 쓰고 있고 / 나는 솔기를 펴가며 빨래를 개키고 / 카치니 아베마리아는 빗물처럼 흐르고 성모님 노래는 왜 그리 많아요? 엄마! / 아이는 고린서(코린토) 2서 7장을 삐딱삐딱 넘어가고 / 비 맞은 베고니아꽃이 함초롬히 웃는다 그건 어머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란다 / 아이는 7장 3절을 살밋살밋 건너가고 / 아아아 아베마리아 산마을도 푹 젖는다 (‘카치니 아베마리아를 듣는 오후’ 박옥위 데레사) 주님의 특별한 아들 엄마 박씨는 “그 옛날 임신했을 때 아이와 임신부에게 좋다는 한약을 먹은 까닭인지, 병원에서 멋모르고 엑스레이 촬영을 했는데 그 이유 때문인지…. 제가 참으로 어리석었다”며 말 못할 돌덩어리처럼 무거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들은 그래도 밝게 자라줬다. 수집하는 것을 좋아해 병뚜껑을 색깔별로 모으기도 하고, 제대로 읽지도 못할 책을 모아 만족해했다. 커서는 상점에서 구입하고 쓴 병은 반드시 그 가게에 돌려주는 습관도 생겼다. 성당 주변에 버려진 담배꽁초나 쓰레기가 보이면 바로 치워야 한다. 송씨는 “자연이 파괴되니까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면 안 된다”고 했다. 자신의 방식으로 ‘환경 지킴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모는 기도로 아들을 키웠다. 밖에서 지나가던 아이들이 아들더러 ‘바보야’라고 놀려도, 목소리가 커서 주변 시선이 느껴지는 나날과 숱한 아픔도 모두 주님이 지켜주신다는 생각으로 지냈다고 했다. 그럼에도 송씨는 신앙인으로 자라줬다. 2001년 척추에 고름 주머니가 생기는 질환이 발견돼 10시간 가까운 수술에 임하고 난 뒤, 그가 퇴원하고 집에 돌아와 처음 한 말은 십자가와 성모님 앞에서 “아버지,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였다. 과거 가족 가운데 아버지만 세례를 받지 못한 상황이 안타까웠는지 “아빠만 오면 다 오는데…”라며 결국 아버지를 주님의 집으로 이끈 아들이었다. 어머니 박씨는 “누군가 아프면 아들은 ‘우리 구원자 예수님! 그를 빨리 낫게 해주세요’ 하며 기도하기도 하고, 제가 힘들까 봐 집안 청소며 설거지까지 솔선수범해준다”고 했다. 송씨는 매주 참여하는 미사 때엔 누구보다 성가를 크게 부른다. 기자에게도 “판공성사 안 보면 큰일 난다. 성당 못 나간다”며 철저한 신앙관도 보였다. 교우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 안에 살아가는 그를 본당 사제들이 더욱 챙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머니 박씨는 “하느님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 말씀을 손으로 써가면서 주님을 알게 됐으리라 생각한다”며 “사랑으로 돌봐주신 주님과 응원해주신 신부님, 신자분들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성탄의 기쁨, 그리고 새 희망 송씨는 “이제 구약 성경 쓰기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런데 “마음에 들게 써지지 않아 계속 다시 쓰고 있다”며 “이젠 더 빨리 분발해서 빨리 쓰고 엄마한테 사인받고 싶다”면서 새로운 각오를 밝혔다. 어머니 박씨는 “구약을 언제 다 쓸지 모르겠지만, 아들의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도 작은 희망이 되면 좋겠다”며 “특별하고 소중한 제 아들과 가족을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 기도한다”고 전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진 지 10분 만에 전화가 왔다. “잘 가고 있습니까? 언제 또 볼 수 있습니까?” 낯설게 느낄 줄만 알았던 잠깐의 만남조차 그는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이정훈2022.12.20

하느님 아래 이스라엘의 임금을 세우다[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13)이스라엘, 왕을 요구하다 사무엘은 우리말로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판관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바뀌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마지막 판관이자 첫 예언자이다. 비슷한 시기에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인들은 빈번히 충돌했습니다. 기원전 1050년께에는 필리스티아인들이 병거와 철기 무기로 무장한 잘 훈련된 병사들을 이끌고 가나안 내륙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에 맞서 각 지파에서 소집한 병사들로 연합 부대를 만들어 대항했지만, 청동기 무기를 든 보병뿐이어서 대패를 하고 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실로에 있던 하느님의 계약 궤를 모셔와 참전했으나 보병 3만 명이 살육당하고 주님의 계약 궤마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기고 맙니다.(1사무 4,1-11 참조) 전장에서 도망쳐 나온 벤야민 지파 출신 한 병사가 이스라엘의 판관 엘리 사제에게 한 증언입니다.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도망쳤고, 군사들이 대학살을 당하였습니다. 사제님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고, 하느님의 궤도 빼앗겼습니다.”(1사무 4,17) 이 말을 들은 엘리는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필리스티아인들이 하느님의 계약 궤를 되돌려줬다는 것입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하느님의 궤를 빼앗아 에벤 에제르에서 아스돗으로 옮긴 다음 다곤의 신전으로 가져다가 다곤 곁에 세워 두었습니다. 그러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아스돗 필리스티아인들의 몸에 종기가 나는 역병이 돌았습니다. 또 신전에 있던 다곤 상이 하느님의 계약 궤 앞에 쓰러져 얼굴을 박고 있는가 하면 얼굴과 팔다리가 잘려 널브러져 있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일로 필리스티아인들은 하느님의 징벌을 피하려고 하느님의 계약 궤를 이스라엘에 되돌려 주기로 합니다. 하느님의 계약 궤는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긴 지 7개월 만에 이스라엘로 되돌아옵니다. 키르얏 여아림 사람들이 필리스티아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서 하느님의 계약 궤를 모셔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계약 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옮기고, 아비나답의 아들 엘아자르에게 주님의 궤를 돌보게 했습니다.(1사무 5─6장 참조) 하느님의 계약 궤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한 후에야 아비나답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참상을 겪은 후 이스라엘은 판관이 다스리는 부족 연맹으로는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판관기 마지막 구절은 당시 이스라엘 내부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판관 21,25) 그래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는 주변 민족들처럼 강력한 권력을 가진 왕을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불길처럼 일었습니다. 왕정에 대한 찬반 공방이 치열했습니다. 왕정 찬성론자들은 “판관은 이스라엘이 위험에 닥칠 때마다 그때그때 하느님께서 세워주시는 인물이어서 항구적인 제도가 아니다”라며 “안정된 국가 조직을 유지하려면 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왕정 반대론자들은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임금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며 “나라가 위기에 빠질수록 하느님께 충실해야 한다”고 반론했습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 앞에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판관이며 이스라엘의 첫 예언자입니다. 사무엘은 왕정을 공개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는 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슬러 큰 악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군사를 징발하고, 부역을 시키고, 세금을 징수해 결국에는 백성이 임금의 종이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합니다.(1사무 12장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습니다. 마지못해 사무엘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울에게 기름 부어 축성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웁니다. 신명기 17장 14-20절에는 ‘이스라엘 임금이 지켜야 할 규정’이 나옵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일단, 이스라엘 백성이 임금을 세울 때 반드시 주 하느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외국인을 임금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은 주 하느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 이 율법의 모든 말씀과 규정을 명심해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임금은 자기 종족을 업신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또 계명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이스라엘 임금은 아내와 군마를 너무 많이 늘리거나 금은보화를 너무 많이 모아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왕정은 다른 나라의 군주제와 확연히 다릅니다. 앞의 신명기 규정에 따르면 이스라엘 임금은 절대군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주 하느님뿐이시며, 임금은 하느님 아래에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은 하느님의 계명인 율법에 순종해야 하며, 예언자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왕정은 하느님의 뜻 아래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제도였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2.28

아브라함 (1)[월간 꿈 CUM] 뿌리 _ 구약이 말을 건네다 (5) 성경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송하지만, 그 바탕엔 아브라함의 떠남이 자리한다. 그는 길을 떠나는 이들의 조상이다. 히브리어 본문, 12장 첫 문장의 앞 부분만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히브리어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떠남에 대한 명령은, “가거라” (레크, ) 뒤에 이어 “너에게로” 를 뜻하는 ‘레카’ ( )라는 어휘가 첨부되었다. 이는 사실 히브리어 구분에서 매우 흥미로운 표현인데, 일반적으로 떠나라는 명령은, 어휘의 첨부 없이 “레크 ‘ ’ (가거라)”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결국, 뒤에 첨부된 표현은 의도적으로 덧붙여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히브리어에서 잘 쓰이지 않는 이 표현 안에는 어떤 의도와 의미가 숨어있을까. 우선, 뒤에 첨부된 표현과 함께 히브리어 본문을 어휘 그대로 번역해보면, “너에게로 가거라”라고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아브라함의 떠남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여정’이며, ‘내적인 여정’임을 드러낸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했던 명령은 분명 자신이 머물던 곳을 떠나면서 시작되는데, 그 떠남의 방향이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내적인 여정을 명상적인 수행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의 여정은 머물러 안주하지 않는 실제적인 떠남이었다. 히브리어 본문의 문장 순서에 따르면, “가거라”라는 명령에 뒤이어 떠남의 대상이 언급된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브라함의 이 내적 여정은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실제적으로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본문을 유심히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전하셨던 떠남의 명령이 점진적으로 구체화(명료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향 → 친족 → 아버지의 집. 즉, ‘고향’, ‘친족’, ‘아버지의 집’으로 언급되는 떠남의 대상은 넓은 범주에서 좀 더 좁은 범주로 좁혀지고 있다.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이렇듯 구체적이고 명료하다. 사실, 두리뭉실한 부르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부르심을 무리화하고 일반화하며 살아가는가. 얼마나 많은 우리의 소명(召命)과 성소(聖召)들은 익명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을까. 함께 걷는 시노드적 여정이 교회 공동체의 본질적인 모습인 것은 맞지만, 우리 각자의 소명은 우리에게 유일무이한 것임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주님의 부르심에 고군분투하며 응답했던 한 사제가, 사제단에 속해있는 것만으로 사제 성소에 대한 부르심을 완성했다 생각하는 것. 마음 속 깊은 곳에 울려오는 음성에 응답하여 세례를 받은 한 신자가, 본당의 단체 몇 개 가입하고 나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안주하며 사는 것. 과연 이것이 부르심에 대한 올바른 응답일 것인가, 조심스레 예를 들어본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처음엔 고향을 떠나는 것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성찰을 거듭하여 주변 친척들을 떠나고 아버지를 떠나는 부르심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을 두고 기도하며 깨달았을 것이다. 창세기의 본문은 아브라함의 떠남을 한 줄 문장으로 전하고 있지만, 이는 아브라함 스스로 오랜 시간 동안 성찰했던 것일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 다섯 살이었다.”(창세 12,4) 그의 나이 일흔 다섯. 모든 것을 버려 모든 것을 얻는다는 이 영적 진리를 깨닫기 위해 아브라함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치열하게 기도하며 번뇌했을까.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의 모든 발걸음은 분명한 내적 여정이었다. 그의 이내적인 여정은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아주 명료하게 시작하였다. 상징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떠났던 ‘아버지의 집’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바로 지금 그 자리를 뜻할 것이다 글 _ 오경택 신부 (안셀모, 춘천교구 성경 사목 담당 겸 교구장 비서) cpbc2023.12.18

하느님께 소중하디 소중한 존재, 인간[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29)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부모가 사랑스러운 자식을 일컬을 때 종종 쓰는 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면 얼마나 사랑스럽다는 말인가! 성경에서도 그러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이사 43,4) 공동번역 성경은 이를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라고 번역했다. 부모는 갓 태어난 아기를 두 팔로 받아 안으며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선물처럼 주어진 아기 앞에서 신비로움과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어떻게 이런 아기가 나에게 태어났을까!’ 그러나 더욱 큰 신비는, 이 여리디여린 아기가 장차 부모와 대화를 나누고 친교를 이룰 인격적 주체로 성장한다는 점이다. 물론 긴 성장의 시간이 필요하고, 성장 과정에서 자녀가 부모를 적잖이 고통스럽게 하겠지만, 결국 자기 삶을 스스로 영위하고 책임질 성인이 된다. 사실 모든 이가 그런 과정을 거쳤으며, 아기를 키우는 과정에서 부모의 노고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좋아하셨다고 한다.(창세 1,1-31 참조) 동시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시는 대목이 등장한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 6,5-6) 사람들을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고 결심하시고 홍수를 일으키시기까지 하신다. 그러나 이내 뉘우치시고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고 파멸치 않으시리라 다짐하신다. 무지개는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의 표지다.(창세 8―9장) 인간이란 악하고 나약해서 때로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파멸하지 않으시고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성숙한 존재로 성장하도록 인간을 돌보시며 양육하신다. ‘롬므, 메르베유 드 디유(L’homme, merveille de Dieu)’. 이는 프랑스의 저명한 신학자 베르나르 세스부에가 자신의 저서에 붙인 제목으로, 번역하자면 ‘하느님께 경이로운 존재인 인간’이라는 뜻이다. 롬므, 메르베유 드 디유! 하느님께서 보고 경탄할 만큼 소중한 존재인 인간! 카스퍼 추기경님도 성탄 강론집에서 대 레오 교황님의 뒤를 이어 말씀하신다. “인간아,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라.”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대로(imago Dei) 창조된 존재로 고백한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여 그분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유로운 인격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신앙이 온 인류를 향해 전하는 기쁜 소식은, 인간이 그토록 경이롭고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이며, 더더욱 기쁜 소식은 인간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무한한 거리를 뛰어넘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 단순히 우리들 사이로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와 나누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걸으며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향한 ‘탈출기’를 써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하느님께 경이로운 존재인 인간, 그것은 하느님의 눈에 비친 우리의 본래 모습이며, 우리가 일생을 통해 찾아가야 할 우리의 미래 모습이기도 하다. 신앙은 그 아름답고 위대한 길로 우리를 초대하는 이정표다. ※ ‘금쪽같은 내신앙’ 코너를 통해 신앙 관련 상담 및 고민을 문의하실 분들은 메일(pbcpeace12@gmail.com)로 내용 보내주시면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한민택 신부 cpbc2023.12.08

마리아가 더 좋은 몫을 선택하다[월간 꿈 CUM] 복음의 길 _ 제주 이시돌 피정 (3)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제가 제주 이시돌 목장에 수의사로 봉사하고자 처음 ㅁ왔을 때, 한 직원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음식을 준비한 그 부인이 푸짐한 상차림을 끝내고 식사를 시작하기 직전, 그 부인은 부엌으로 사라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당연한 듯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아일랜드에서도 손님을 위한 준비는 여자가 다 하지만, 식사는 당연히 손님들과 함께했습니다. 만일 그때 그 부인이 식사를 같이하려 식탁에 앉았다면 다른 사람들이 엄청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일상적인 행위에 있어 어릴 때부터 받아온 가정교육이나 그 사회의 규범에 영향을 받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온 이후로 남녀의 역할 인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만, 아직도 여전히 여자의 역할에 대한 왜곡된 견해가 남아 있습니다. 성경에 이 이야기가 담기고 나서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이(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포함해서) 마르타의 입장에 동조합니다. 여자는 음식을 준비하고 식사 시중드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리아가 냉큼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언니 마르타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타는 예수가 동생을 꾸짖어주길 기대했겠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아 실망했겠지요. 어느 면에서는 우리 역시 예수를 도덕적 심판관이라고 여깁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일에 곧잘 예수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자신을 도덕 교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평가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또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는 사람들 일의 재판관이 되기를 요청받자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8,15) 최근에 교황 프란치스코는 게이인 사람이 영성체를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가 누구이기에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는 새로운 법규들을 만들러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오기 전에 유대교에는 보통 사람들은 다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규칙과 법규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그분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지를 알려 주려 오셨습니다. 예수는 마리아가 더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 말씀을 듣는 것이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훈으로 자주 인용되기도 합니다. 들어주거나 기도하는 삶이 행동하는 삶보다 더 중요하다! 라는.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합니까? 예수가 하신 말이니 당연히 옳지 않은가 라며 동의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이 진실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겪어온 경험들을 통해 한 번 성찰해 봅시다. 때때로 부모들은 마르타와 마찬가지로 자녀들을 위해 아주 많은 일들을 하느라 바쁘기에, 앉아서 자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다 양육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그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경우가 꽤 됩니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쏟아부은 시간이 결국 낭비였다고 후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만일 자녀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면, 자녀들을 먹이고 재우고 교육시키고 하는 그 모든 필요한 일을 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잘 들었을지라도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했더라면, 역시 그 점을 후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자리에 앉아 듣는 것과 시중드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치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는 당연히 둘 다 중요하겠지요. 사실 예수는 마르타에게 시중드는 것을 그만두고 자리에 앉아 들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봅시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이 장면을 상상해봅시다.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 발치에 앉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홀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과 늘 함께했었지요. 그렇다면 그때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아마도 예수 발치에 앉아서 그의 말씀들을 듣고 있었을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제자들 사이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제자들 무리와 함께요. 그때 제자들은 파견 준비를 위해 필요한 가르침을 예수로부터 받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남자들은 여러 형태의 공식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 여자들의 역할은 집안일이나 농사일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 발치에 앉음으로써 자신의 교육받을 권리와 또 예수의 제자가 될 권리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예수가 마리아에게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한 것은 마리아가 그 당시 여자들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인 구속에 매이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말씀이었다고요. 마리아는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자신이 남자들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챈 것이고, 그래서 자신 역시 교육받을 권리와 제자가 될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고, 예수는 그것이 옳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처해 있는 부당한 사회적 관례를 깨뜨리고 또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보여줄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하고, 우리는 호흡하는 산소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고에 끼치는 문화적 영향력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우리는 삶의 방식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알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지금껏 해온 방식만이 옳다는 사고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글 _ 이어돈 신부 (Michael Riordan,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제주교구 금악본당 주임, 성 이시돌 피정의 집 담당) cpbc2024.06.10

아브라함 (4) 진정한 순명 : 지금 바로 실행하는 것[월간 꿈 CUM] 뿌리 _ 구약이 말을 건네다 (8) 야코포 밧사노(Jacopo Bassano) 작.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달하게 되고, 그때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다. 이는 하느님께서 “보여지다(רָאָה, 니팔형태, Niphal Verb)”라는 어휘와 함께 최초로 직접 성경의 이야기에서 나타나시는 장면이다. 동일한 동사의 표현 안에서, 훗날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을 드러내실 것이다.(탈출 3,2) 이런 점만으로 볼 때도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이 부분은 중요한 의미를 구성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직접 나타나시어 약속의 말씀을 건네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약속의 말씀들 가운데에서 가장 짧으면서 땅과 후손이라는 창세기의 중심 주제를 온전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창세 12,7) 훗날 여호수아기를 비롯한 역사서 전체의 중심 주제인 ‘약속의 땅’에 대한 언급은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처음 선포되었다. 그리스도교는 구원의 실질적인 역사를 아브라함으로부터 두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약속의 땅과 그 안에서 실현을 이루는 하느님의 구원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계시헌장 14항 참조)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창세 12,7)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떠남에 대한 명령과 땅에 대한 약속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하느님께선 아브라함에게 7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땅’이라고 지목하신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향해 걸어오는 동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인지 구체적으로 어느 장소인지 모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떠남이라는 하느님의 요청에 순명했지만, 사실 어느 땅에 머물러야 할지 정확하게 모른 채 걸어왔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의 순명은 떠나라는 명령의 완수가 아닌, 실행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실 이는 우리에게 매우 깊은 묵상을 던져준다. 우린 사실 우리에게 요청된 복음의 명령에 대해 그것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자주 고민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우리에게 선포된 복음적 가난과 나눔의 소명을 우리가 완수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것을 바로 실행하는 것이리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그 명령을 이행했던 결과는 사실 방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목적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방황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었다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본문의 맥락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버지 테라가 도달하고자 했던 가나안 땅을 주님의 섭리라 믿고 추측하고 기도하며 떠났을 것이다.(창세 11,31 참조) 목적지가 없는 떠나라는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아브라함은 하란에서부터 가나안 땅으로 도달하기까지 수백 킬로미터(대략 600km)의 여정 동안 도착지에 대한 막연한 상상 속에서 지내야만 했을 것이다. 이 부분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는 막연함 자체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아브라함은 알 수 없는 막연함만을 품은 채, 약속의 땅에 도착했다. 아브라함이 체험했을 알 수 없는 이 막연함은 결국 하느님의 섭리가 채우고 있지 않았던가. 글 _ 오경택 신부 (안셀모, 춘천교구 성경 사목 담당 겸 교구장 비서) cpbc2024.02.05

진실로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멘’[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7) 아멘! 아멘! 아멘! 신자들이 미사 중 ‘아멘’ 하고 응답하고 있다. OSV 주일학교 미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교리를 마친 한 학생이 제게 오더니 묻습니다. “선생님, 기도 끝에는 ‘아멘’을 꼭 붙여야 하는 거죠?” “그렇지. 그런데 왜?” “우리 선생님이 미사 중 ‘주님의 기도’ 끝에는 ‘아멘’을 하지 않는 거래요.” 학생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기도 끝에 ‘아멘’으로 응답하라고 배워 알고 있기에, 미사 중 ‘주님의 기도’ 끝에는 ‘아멘’을 왜 하지 않는지 선뜻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저도 미사에 참여하다 보면 ‘주님의 기도’ 끝에 ‘아멘’하고 응답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아멘’의 본래 뜻부터, 미사 중 ‘주님의 기도’ 끝에는 왜 ‘아멘’으로 응답하지 않는지 알아봅시다. ‘아멘’이란 말은 옛날 유다교 회당에서 제사 의식 때 쓰던 말을 그대로 그리스도교에서 이어받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마칠 때 ‘아멘’으로 끝맺게 하였습니다. ‘아멘’은 히브리어 동사 ‘Aman’(의뢰가 된다. 동의한다)에서 나온 부사로, 오늘날 ‘참으로’, ‘진실로’란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멘’은 우리말로 ‘좋습니다’(민수 5,22)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아멘’을 ‘나는 분명히 말한다’(마르 3,28)라고 번역했습니다. 코린토 1서 14장 16절에는 “기도 끝에 ‘아멘’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멘’의 뜻은 우리가 앞에 기도한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그것이 이뤄지길 기원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멘’하고 응답하는 건 기도 내용에 능동적으로 동의함을 뜻합니다. 미사 중에 바치는 ‘아멘’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본 기도와 예물기도, 그리고 영성체 후 기도 끝에 교우들은 ‘아멘’이라고 응답합니다. 이 응답은 사제들이 바치는 기도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그 내용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감사기도 끝 부분 사제가 마침 영광송을 바친 후 교우들은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이 응답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제의 영광송과 감사기도 전체에 온전히 마음으로 응답하며 동의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에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 교우들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이는 성체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한마디로 기도를 마감하는 응답이며, 주님의 뜻이 꼭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동의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미사 중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 끝에 바로 ‘아멘’을 붙이지 않는 이유는 아직 기도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성찬 전례 예식 중 영성체 예식의 시작으로, 사제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자고 권고합니다. 교우들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나면, 사제는 혼자 부속기도를 바칩니다. 부속기도 후엔 모든 교우가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하고 찬미의 기도로 끝맺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기도’ 그 자체로 기도가 끝나지 않고, 사제의 기도와 이어지는 ‘영광송’이 ‘아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기에 미사 중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 끝에는 ‘아멘’을 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박모란 교리교사cpbc2024.06.18

하느님 계시에 대한 핵심 교리를 담다[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5)계시헌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구약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 전체를 알려준 공의회이다. 사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회기 장면. 지금까지 가톨릭교회 신ㆍ구약 성경 정경이 어떻게 형성돼 왔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 성경 정경이 유다교와 또 갈라진 교회들의 성경 정경과 왜 다른지를 부족하나마 알아보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성경에 푹 빠져들기에 앞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한 문헌을 소개합니다. 바로 하느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이하 계시헌장)입니다. 하느님 계시에 관한 교의(敎義) 곧 교리를 담고 있는 헌장입니다. 왜 계시헌장을 소개하느냐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구약 성경에 특별한 관심을 두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 이후 주일 미사 말씀의 전례 때 제1 독서로 구약 성경을 봉독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구약 성경의 독서가 없었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ㆍ구약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 전체를 알려준 공의회입니다. 그중 계시헌장은 하느님 계시에 관한 핵심 교리를 담고 있지요. 계시헌장은 전체 6장 26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1장은 계시 자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당신 뜻을 알려주시는 것이 계시의 본질입니다. 또 사람들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계시의 목적입니다. 인간은 만물을 통해, 그리고 이성의 빛으로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마지막에는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을 충만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충만이자 또한 계시의 완성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신앙의 복종’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느님께 향하게 해 주실 때, 인간은 하느님 계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신앙은 더 강화되고, 하느님 계시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제2장은 하느님 계시가 성경과 성전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제시합니다. 성전(聖傳)은 사도들이 주님의 말씀과 행적에서 얻고 배운 것을 설교와 모범과 제도로써 그 후계자들에게 전달해 준 것입니다. 또 사도들과 그 직제자들은 성령의 감도로 구원의 소식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신약 성경입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 속에서 드러난 하느님 계시를 기록한 구약 성경과 함께 한 하느님 말씀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함께 성전도 계시의 원천으로 똑같이 경건한 애정과 존경으로써 받아들이고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교회가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하게 된 것도 성전을 통해서입니다. 아울러 성경과 성전을 올바로 해석하는 직무가 교회의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교도권이 성경이나 성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말씀에 종속되어 봉사한다”고 고백합니다. 제3장은 성경의 영감과 해석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기록됐기에 원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전달하시기 위해 구체적 시간과 장소에서 살아가던 인간을 성경 저자로 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저자들의 의도를 올바로 파악하려면 그 시대의 문학 유형과 사고방식, 언어 표현 방식과 설명 방식 등은 물론 전체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과 신앙의 유비뿐만 아니라 나아가 성경 전체 내용과 일체성까지 세심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회 지도를 따라야 합니다. 제4장과 제5장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그리고 두 관계에 대해 설명합니다. 구약 성경은 하느님의 참된 교육 방법을 보여줄 뿐 아니라 신약 성경과 일관성을 이룹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복음 선포에 온전히 수용되고 신약 안에서 그 완전한 의미를 얻고 드러내며, 다른 한 편으로 신약을 밝히고 설명해 줍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탁월합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증언하고 있는 복음서가 가장 뛰어납니다. 네 복음서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역사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기억과 회상이나 또는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했기에 네 복음서는 역사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제6장은 교회 생활에서 성경이 차지하는 비중을 제시하면서 성경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미사 전례에서 말씀의 식탁을 이룹니다. 성찬의 식탁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눠 먹고 마시듯이 신자들은 ‘말씀의 식탁’에서 하느님 말씀을 영적 양식으로 섭취합니다. 나아가 하느님은 성경 안에서 당신 자녀들을 만나시며 말씀을 나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에는 버팀과 활력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영혼의 양식, 그리고 영성 생활의 순수하고도 영구적인 원천이 되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또 모든 신자가 전례에서나 영적 독서 등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가까이할 것을 권고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말씀이 적절한 방식으로 온 인류 모든 사람에게 선포돼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계시헌장 전문은 주교회의 홈페이지 ‘문헌 마당-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방에 있습니다. 꼭 한 번 필독하시길 추천합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2.12.27

하느님 구원 계획이 계시되고 실현된 역사[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7)구세사 1 구세사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역사의 사실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묵상하려는 신앙 태도이다. 역사 사건을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한 구세사의 배경을 알아야 성경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조토,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 프레스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이탈리아.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세사(救世史)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호부터 몇 차례에 걸쳐 성경 속 구세사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려 합니다. 구세사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계시되고 실현되어온 역사입니다. 구세사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신 것에서 시작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왕께서 재림하심으로 완성됩니다. 성경은 구세사 가운데 창조부터 사도 시대 교회까지의 역사를 서술하고, 요한 묵시록을 통해 구세사의 완성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구세사의 정점 곧 하이라이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 사건입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의 영원한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인간을 위해 당신 구원의 역사 전체를 총괄적으로 실현하신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430항) 가톨릭교회는 구세사 관점에서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하느님의 주권으로 성취된 하나의 구원 역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도 시대부터 지금까지 성전(聖傳) 안에서 일관되게 ‘예형론’에 기초해 신ㆍ구약에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단일성을 천명해 왔습니다. 이 단일성은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과 계시의 단일성에서 비롯됩니다. 예형론(typologia)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이 구약의 역사 안에 이미 예표(豫表)로 나타나 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신약 성경을 구약 성경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러한 예형론적 성경 읽기는 구약 성경의 내용을 명백히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구약 성경이 자신의 고유한 계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형론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때 이루어질 하느님 계획의 완성을 향한 역동적인 순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예를 들어 성조들에 대한 부르심이나 이집트 탈출 사건이 하느님 계획의 중간 단계라고 해서, 하느님 계획에서 그 고유한 가치를 잃지는 않는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0항) 이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으며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형론 관점의 성경 해석 사례 몇 가지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담은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상징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은 그리스도교의 세례 성사를 미리 일러주는 사건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생활하며 바위에서 솟아 나오는 물로 갈증을 푼 것은 바로 주님의 성체 성사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본형(本型)이고, 구약의 아담이나 광야의 만나, 바위의 물 등은 모두 예형(豫型)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예형론 입니다. 성경의 역사 곧 구세사는 창조와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시작해서, 묵시록에 묘사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모든 인류가 마지막 심판을 통해 구원받아 새 하늘 새 땅의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그 날까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전개되는 역사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구세사 개념을 일부 학계에서는 그리스도교 신학이라고 국한하지만, 대다수 학자는 일반 세계사와 구세사와의 관계를 ‘사실과 그 사실의 해석’으로 이해합니다. 곧 일반 세계사는 ‘역사의 사실’를 말하는 것이고, 구세사는 ‘그 사실을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한 역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사도 시대 초대 교회에 이르기까지 문자로 기록된 성경의 역사는 일반 세계사와 연관된 역사인 동시에 그와 다른 범주 속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일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사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건은 엄연한 역사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 탈출이나 예수님의 수난 사건은 이집트 역사서나 공식 문서, 그리고 로마 제국의 연대기나 공식 문서에 단 한 줄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집트 탈출 사건은 지리나 연대기적으로 분명히 일어난 사건입니다. 기원전 1298~1235년 람세스 2세 통치 시절 피톰과 라메세스 건설을 위해 강제 노동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지도로 이집트를 탈출했습니다. 수천 명의 노예가 탈출한 것이 이집트 입장에서는 기록에 남길 만큼 큰 사건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보다 더 중대한 사건이 없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집트 탈출 사건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이 지상에 탄생시킨 획기적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제국 문서에 단 한 줄도 기재되지 않은 그의 십자가 처형은 당시 중죄인들에게 흔히 집행되던 형벌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다인의 왕으로 자처한 예수를 반역자로 처형한 것은 로마 제국사에서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 주님의 십자가 수난보다 더 중대한 사건은 없었습니다. 구세사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역사의 사실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묵상하려는 신앙 태도입니다. 역사 사건을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한 구세사의 배경을 알아야 성경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