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방 박사 성해(聖骸) 모신 ‘주님 공현 대축일의 성지’ 쾰른 대성당[차윤석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10. 독일 쾰른대교구 주교좌 쾰른 대성당 쾰른 대성당. 동방 박사 성유물 순례자를 위해 1248년에 새로 짓기 시작했으나, 1520년 이후 종교 개혁 여파로 공사가 중단됐다. 1842년 독일 민족의 자긍심으로 시민들이 기금을 모아 13세기의 설계도에 따라 공사를 재개해 1880년에 완공했다. 2005년 쾰른 세계청년대회(WYD)의 구심점이었다. 필자 제공 850년 순례 역사의 쾰른 대성당 하늘을 찌를 듯한 쾰른 대성당은 독일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꼽힙니다. 1248년에 짓기 시작해 1880년에 완공된 독일 고딕 양식 성당의 걸작입니다. 첨탑 높이가 157.4m로 1884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고, 너비 대 높이 비율에서는 가장 큰 성당이며,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관광지로선 큰 매력 포인트입니다. 실제 하루에 관광객 2만여 명이 다녀갑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들에게 쾰른 대성당은 어떤 곳일까요? 쾰른 대성당은 13세기부터 유럽에서 손꼽히는 순례지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별을 따라 그리스도께 경의를 표하러 온 세 명의 동방 박사 또는 왕이라 불리는 성인들의 성해가 모셔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유물함은 주제단 바로 뒤에 있습니다. 하지만 높은 천장,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장식들, 모자이크 바닥들에 시선이 꽂혀 여느 큰 황금 상자 중 하나라고 여기고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저도 처음에 그랬는데요. 목적 없이는 순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동방 박사 성유물함(1190~1125). 베르됭의 니콜라스가 삼랑 형식의 바실리카 모습으로 제작했다. 길이 220cm×너비 110cm×높이 153cm, 무게 500kg, 참나무·금·도금한 은과 구리로 만든 유럽에서 가장 큰 금세공 작품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부터 주님 세례 축일까지 전면의 격자 패널을 열어서 성인들의 두개골을 현시한다. 필자 제공 1164년 밀라노의 세 동방 박사 성유물이 쾰른으로 동방 박사 성유물의 역사가 곧 쾰른 대성당의 역사입니다. 쾰른은 지금까지 우리가 본 순례지와 다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시초로 형성된 도시가 아니라 라인강 요충지에 세운 군사기지로 출발한 로마 제국 도시입니다. 그래서 다른 로마 도시처럼 일찍부터 교회가 로마인의 주거지에 있었을 것입니다. 서기 313년 쾰른 주교가 마테르누스였다고 합니다. 대성당 세례대는 적어도 6세기 이곳에 큰 성당이 있었다고 알려 줍니다. 873년 여느 성당처럼 카롤루스 왕실의 지원으로 구(舊) 대성당이 들어섰고, 이후 측랑 등을 확장해나갔습니다. 1164년 라이날트 폰 다셀 대주교 때 쾰른을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밀라노에서 세 동방 박사의 성해(聖骸, 성인의 유골)를 쾰른으로 옮겨온 겁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선제후 7인의 투표로 로마-독일왕으로 선출된 후 이탈리아 로마로 가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때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을 지나면서 제국의 통치를 확인했는데, 쉽게 말해 도시마다 낼 세금액을 확정했지요. 이때 이탈리아 왕국 대재상을 겸임하던 쾰른 대주교가 중재에 나서곤 했습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바바로사가 원정 중 행정청을 설치해 지배력을 키우려 하자 밀라노는 반기를 듭니다. 결국 황제는 무력으로 밀라노를 점령했고, 당시 자기 편에 선 대주교에게 산테우스토르지오 대성당에 있던 성해를 선사한 겁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쾰른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로 부상했을 뿐 아니라 도시 명성과 평판도 높아졌습니다. 가대석의 ‘동방 박사 펜스’(14세기 초). 왼쪽의 두 장면은 성경 속 동방박사 이야기, 그 뒤 세 장면은 요하네스 폰 힐데스하임 수도원장의 성담(聖譚) 「축복받은 세 왕의 이야기」(1364년경)로 알려진 동방 박사의 삶과 토마스 사도의 만남, 나머지 세 장면은 성유물이 콘스탄티노플·밀라노를 거쳐 쾰른까지 오게 된 과정이 묘사됐다. 필자 제공 중세에 널리 퍼진 동방 박사에 대한 신심 동방 박사의 성해로 무슨 호들갑인가 싶겠지만, 가스파르·멜키오르·발타사르 세 명의 왕은 아기 예수님을 직접 뵌 성인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인식한 최초의 이교도였기에 구원의 빛이 모든 민족에게 비추고 있음을 드러낸 산증인인 동시에 민중에게 이들에 대한 공경은 간접적인 아기 예수님 경배였던 것이죠. 그래서 성해를 모신 행렬이 쾰른에 도착했을 때, 도시 전체 성직자들과 남녀노소가 모두 달려와 찬미가와 노래를 부르며 하늘에서 보낸 보물을 구 대성당에 모셨던 겁니다. 세 왕의 성해를 모실 화려한 장식을 갖춘 유럽 최대 크기의 성유물함도 만들었습니다. 이후 독일 왕들도 아헨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후 ‘최초의 그리스도 신자’ 왕들인 동방 박사를 경배하기 위해 바로 쾰른을 방문했습니다. 오토 4세는 화려한 왕관을 기증해 세 왕의 유골을 장식하기도 했죠. 이런 배경에는 교황과의 갈등에서 신성로마제국에 직접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는 정치적 함의도 있었습니다. 대성당 내진(內陣)의 동방 박사 소성당 스테인드글라스(1250/1260년경).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로 순례자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상단의 솔로몬왕을 찾아온 시바 여왕 사건과 동방 박사 경배처럼 구약과 신약 이미지가 좌우로 쌍을 이룬다. 필자 제공 성해가 쾰른 대성당 건립의 원동력 무엇보다 동방 박사의 성해는 새로운 주교좌 성당 건립에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순례자가 물밀 듯이 밀려들면서 1248년 콘라트 폰 호흐슈타덴 대주교는 구 대성당을 철거하고 더 나은 건물을 재건축하기로 합니다. 오늘날 고딕 양식 대성당의 초석이 그렇게 놓인 것이죠. 1322년 지금 모습대로 내진(內陣)이 완성된 후 지금의 위치에 성유물함을 모셨습니다. 세 현자의 유골 외에도 성 펠릭스·성 나보르·스폴레토의 성 그레고리오의 유골도 같이 안치했습니다. 특히 주님 공현 대축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전면 격자무늬의 패널을 열어 성해를 현시했는데, 순례자들은 이 시기를 큰 은총으로 여겼습니다. 순례자들은 동방의 성인들에게 자신의 고민과 사랑하는 이의 아픔과 질병을 치유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성해와 접촉한 종이나 천으로 만든 일종의 ‘순례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죠. 순례증에는 동방 박사의 경배 그림과 이 증서가 병을 치유하고 위험에서 보호해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쾰른 대성당은 오랜 역사만큼 역사적 굴곡이 많습니다. 선제후가 신교로 개종해 성지가 사라질 뻔하기도 했고, 프랑스 혁명군을 피해 피신해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융단폭격 속에 무사한 건 기적이었죠. 하지만 짙은 어둠 속에서도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구원의 빛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실 중 하나가 2005년 쾰른 세계청년대회(WYD)였을 겁니다. ‘우리는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란 주제처럼 전 세계에서 80여만 명의 청년들이 쾰른 대성당을 방문해 경배했고, 그 후 쾰른대교구 청년들은 매년 대성당 봉헌일(9월 27일)에 맞춰 ‘동방 박사 순례’를 합니다. 2025년이 우리에게도 내면의 빛을 따라 길을 나서는 순례의 한 해가 되길 빕니다. “20+C+M+B+25!”(Christus Mansionem Benedicat, 2025년 새해에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집을 축복해주시길!) <순례 팁> ※ 쾰른 중앙역은 유로스타(파리 3시간 15분, 브뤼셀 2시간), ICE/IC(암스테르담 2시간 45분, 프랑크푸르트 1시간 15분)가 정차한다. 주차는 CONTIPARK Tiefgarage Am Dom이 편하다. ※ 대성당 보물실(10~18시), 상트 우르술라 성당의 황금의 방(대성당에서 700m) 방문도 순례의 일종. ※ 대성당 미사 : 평일 6:30·7:15·9:00· 18:30, 주일 7:00·08:30·10:00·12:00· 18:30, 저녁 기도 : 평일 18:00, 주일 17:30. cpbc2024.12.31
![[금주의 성인] 성 마티아(5월 14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5/07/59B1715067031454.jpg)
[금주의 성인] 성 마티아(5월 14일)+1세기, 출생 및 선종지 미상, 사도, 독일 트리어의 수호성인 마티아 성인. 사진=굿뉴스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의 마티아 성인은 열두 사도 중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과 죽음으로 비어있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 선출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기존 사도들은 성 요한 세례자가 예수님께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줄곧 동행했던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을 뽑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후보자로 마티아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을 지닌 요셉을 앞에 세우고 기도한 뒤 제비를 뽑아 마티아를 사도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사도 1,15-26) ‘마티아’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흔했던 이름으로, 그리스어 ‘마티아스’와 히브리어 ‘마티티아’에서 유래했는데, 이름의 뜻 그대로 주님의 선물로서 열두 사도단의 일원이 됐습니다. 신약성경 안에서 열두 사도로 선출됐다는 사실 외에는 마티아에 관한 언급이 더는 나오지 않습니다. 후대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짝지어 파견한 72명의 제자(루카 10,1-12)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자캐오나 성 바르나바 사도와 동일 인물이라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순교 방식에 대해서도 여러 전승이 있습니다. 마티아는 사도가 된 후 오랫동안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남쪽 에티오피아까지 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합니다. 다른 전승은 북쪽으로 흑해 연안의 콜키스(오늘날의 조지아 일대)에 가 복음을 선포하다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또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유다인에게 돌에 맞은 후 도끼 또는 미늘창(도끼와 창을 합친 무기)에 의해 순교했다고 합니다. 교회 미술에서 십자가를 들거나 도끼 또는 미늘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옛 「로마 순교록」은 마티아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채울 사도로 뽑혔으며,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축일도 2월 24일에 기념했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과 함께 이듬해부터 매년 5월 14일, 주님 승천 대축일과 가까운 부활 시기로 옮겨 기념하고 있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마티아의 유해는 나중에 헬레나 성녀에 의해 발굴되어 로마로 이장되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다시 독일 남서부의 트리어로 옮겨졌습니다. 나중에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분실되었다가 발견되어 다시 안장, 현재 그의 지하 무덤 위에는 성 베네딕도회의 성 마티아스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cpbc2024.05.08
![[교황 선종]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교황, 내몰린 이들의 목소리 되다](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4/30/Qjo1745973383467.jpg)
[교황 선종]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교황, 내몰린 이들의 목소리 되다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 말·말·말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 발코니에서 신자들과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OSV “제가 여러분을 축복하기 전에 여러분께 먼저 기도를 청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 3월 13일 선출된 직후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 발코니에서 광장에 운집한 신자들에게 건넨 첫 마디는 자신을 위한 기도 부탁이었다. 새 목자 탄생에 뜨겁게 연호하던 광장의 신자들은 이내 소리를 낮추고, 고요한 침묵 속에 교황을 위해 기도했다. 신자들은 새 교황이 갑작스레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하자 즉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함께 기도에 임했다. 고통을 넘어 희망을 향하는 통로요, 사랑의 신비를 가져다주는 가톨릭교회의 정수인 ‘기도’가 전 세계에 고스란히 생중계됐다. 교황은 그렇게 서로를 위해 함께 바치는 기도로 사도좌 직무를 시작했다. 2013~2025년 12년 재위 기간 교황이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 말은 셀 수 없다. 그 가운데 빛나는 메시지를 다시 돌아봤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하느님께로 올라갑니다” 교황은 2024년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에서 “가난한 이들의 기도를 우리 것으로 삼아 그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라는 부름을 받는다”고 했다. 교황의 메시지는 줄곧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했다. 교황은 “늙고 집 없는 사람이 노숙하다가 죽는 것은 뉴스가 되지 않지만, 주가지수가 2% 떨어진 것은 뉴스가 된다”는 메시지로 돈을 향해서만 나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전쟁은 언제나 패배합니다” 교황은 전쟁을 인류의 가장 극단적 해악으로 여겼다. 교황은 오늘날 지구촌은 제3차 세계 대전을 벌이고 있다며, 무기를 사들이지 않는 비용으로 전 세계 어려운 이를 모두 도울 수 있다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교황은 2013년 9월 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미국이 주도했던 시리아 공습 움직임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전쟁이 진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무기를 팔려는 것인지 늘 의심이 든다”며 갈등을 전쟁으로 해소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중앙아시아 지역 예수회 회원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용납할 수 없고, 혐오스럽고, 야만적인 신성모독”이라며 “많은 사람이 전쟁을 너무 단순하게 바라본다”고 우려했다. 교황은 지구촌 어떤 정치 지도자도 전쟁 중단을 외치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평화의 사도’로서 평화의 메시지로 전쟁과 맞섰다. 2023년 10월 15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하마스 무력 충돌로 민간인 피해가 악화일로로 치달을 때에는 “큰 슬픔을 느낀다. 인질들의 석방을 다시 한 번 호소하며 어린이와 노인·여성·아픈 이들을 포함한 모두가 전쟁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이제 전쟁을 그만둬야 한다. 전쟁은 언제나 패배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야전병원” 교황은 2013년 8월 이탈리아 예수회가 발행하는 잡지 「치빌타 가톨리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교회를 ‘야전병원’에 빗대어 설명하며 “상처 입은 이들을 치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만히 찾아오는 이들만 맞는 안일한 자기만족에서 벗어나 고통과 상처 입은 이들을 밤낮 돌보고 품는 병원과 같은 역할, 어머니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황은 “교회의 사목은 반드시 자비로워야 하며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씻겨주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7일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파견 미사에서 한국 청년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OSV “청년들이여, 깨어나십시오” 2014년 8월 14~18일 방한 당시 교황은 한국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한국 국민들에게 사랑의 가치를 전한 교황은 이 시기 대전과 솔뫼성지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에서 한국 청년들에게 “깨어나라(Wake up)”고 거듭 촉구하며 희망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특히 세계청년대회 때마다 젊은이들을 향한 애정을 강하게 드러내고,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희망찬 미래가 되길 계속 당부했다. 교황은 2016년 폴란드 크라쿠프 세계청년대회에서도 “우리는 무위도식하며 소파에서 잠에 빠져들라고 태어나지 않았다.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es, 감자칩을 즐기며 TV만 즐겨보는 사람)가 되지 말고, 끈을 졸라매는 신발을 신고 세상에 흔적을 남겨라”라고 응원했다. “인간의 고통에 관해서는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4박 5일간의 한국 사목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교황은 기내 기자회견에서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아픔을 나눈 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이에 교황은 자신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고 위로해주는 사제”라며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면서 더 큰 위로의 메시지를 남겼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5월 24일 하느님께서 창조한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의 집’ ‘통합 생태론’ ‘생태 교육과 영성’ 등을 주제로 지구를 돌보는 총체적인 가르침과 방향을 담아 펴낸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했다. OSV “더불어 사는 공동의 집” 생태계의 수호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태양의 찬가’에서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이며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찬미를 받으소서”라고 노래했다. 교황은 2015년 800여 년 전 프란치스코 성인이 노래한 그대로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면, 교황은 주님이 만드신 대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본래 모습을 잃어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땅과 지구를 살리는 데 모두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황이 회칙에서 지구를 ‘더불어 사는 공동의 집’이라 칭한 표현은 모든 그리스도인, 지구촌 인류에게 지구와 자연 전체의 가치를 한층 드높였다. “유통기한 지난 주교가 되지 마십시오” 교황은 늘 공감과 연민의 시선으로 모두를 바라봤지만, 양 떼를 이끄는 주교와 사제들에겐 사명을 확실히 일깨우는 메시지를 자주 전했다. 교황은 2014년 9월 신임 주교들을 만난 자리에서 ‘깨어 있으라’는 복음적 가르침의 모범을 주교부터 실천하라고 당부했다. 교황은 “주교는 항상 새로운 임무에 깨어있는 ‘감시병’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면서 “동시에 조건없는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 역할도 수행할 것”을 독려했다. 사제들에게도 “사제의 강론은 8분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면서 “강론은 하느님 말씀이 성경에 그치지 않고, 삶에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직자 중심주의를 경계하십시오” 교황은 특히 성직주의의 위험을 경계했다. 2017년 3월 소마스카 성직수도회 총회 참석자들에게 “오늘날 교회의 가장 중대하면서도 강력한 위험 가운데 하나가 성직주의”라고 지적하면서 평신도와 함께 일하고, 평신도들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도우라고 촉구했다. 2016년 자신의 사제수품 47주년 미사에서는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는 비유로 성직주의에 빠진 이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0년 3월 29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텅 빈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을 내려다보며 축복하고 있다. OSV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3년 10월 17일 바티칸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에 앞서 캐나다에서 온 샹탈 데스마레 수녀와 인사하고 있다. OSV “수도자들이여, 세상을 깨우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교황은 즉위 첫해에 열린 세계 남자수도회장상연합회 정기총회에서 수도자들에게 “세상을 깨우는 사람들이 돼달라”고 말했다. 수도자의 정체성은 복음적 삶을 통해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회 출신인 교황은 “세상과는 다른 방식인 복음을 통해 세상을 깨워야 한다”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수도자에게 행동하는 실천으로 교회의 매력을 보여주길 당부했다.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 자주 하세요” ‘사랑’은 교황의 핵심 메시지다. 교황은 ‘사랑 표현의 대가’이기도 했다. 장애인이 보이면 곧장 다가가 안아주고 축복해줬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키스해주고 안아준 어린아이만 해도 셀 수 없을 것이다.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약혼 남녀들을 만난 자리에서 “순간적인 마음이 아니라 늘 함께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바라보라”면서 “‘사랑’의 표현을 자주 하고, 실수했으면 곧바로 미안하다고 사과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특히 부부들에겐 “싸움했다면 반드시 그날 화해하라”고 강조했다. “가정이 교회와 세상의 희망입니다” 교황은 2018년 8월 제9차 세계가정대회 폐막 미사에서 “가정의 가치가 무너져가는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 가정이 ‘희망의 등불’이 돼야 한다”며 “가정은 교회와 세상의 희망”이라고 격려했다. 2024년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담화에서는 “젊은이들을 노인들과 대립하게 만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조종의 형태이며, 중요한 것은 다양한 연령대의 일치이고 이는 인간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한 진정한 기준점이 된다”며 세대 간 소통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4년 6월 7일 올리브나무 식수 10주년 평화기도회를 주관하고 있다. OSV “뒷담화를 하지 맙시다” 교황은 간결하면서도 단순한 메시지로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을 바로잡아줬다. 교황은 어느 날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에서 “평소 신앙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교회의 이런저런 일과 신부·수녀에 대한 뒷담화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고 지양해야 한다”며 “그리스도인은 서로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사제를 귀찮게 하세요.” 교황은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모습도 요청했다. 교황은 “송아지가 어미에게 젖을 달라고 괴롭히듯 신자들은 자신의 사제를 괴롭혀야 하고, 그래야만 사제들이 자신에게 위탁된 하느님 백성을 이끌어가며 빛을 비춰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평신도도 교황청 조직에서 역할과 책임을 맡아야 합니다.” 교황은 성직자 중심의 교회 의사결정 구조에도 변화를 꾀했다. 하느님 백성과 함께하는 교회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2022년 3월 교황청 구조개혁을 담은 교황령을 반포해 세례받은 누구든 교황청 모든 부서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될 수 있도록 했다. 교황은 새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에서 “교황과 주교·서품받은 성직자들만이 교회의 복음 전파자는 아니다”라며 “평신도도 교황청 조직에서 역할과 책임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가엾은 죄인입니다.” 교황은 자비가 필요한 죄인의 모습도 조명했다. 교황은 2017년 8월 9일 일반 알현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너무 값싸게’ 경험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며 “우리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희망을 새롭게 하는 힘이 있는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가엾은 죄인”이라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6년 8월 16일 성매매 여성 보호 기관을 방문해 한 피해자에게 입을 맞추며 위로하고 있다. OSV “교회가 저지른 잘못에 용서를 구합니다” 교황은 사과와 용서가 화해의 시작점이자, 자비로 향하는 길임을 몸소 보여줬다. 교황은 2022년 7월 25일 캐나다 매스쿼치스 원주민 공동묘지에서 기도한 후 원주민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곤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잘못에 용서를 구한다”며 정중히 사과했다. 이때 교황이 오른 참회의 순례는 캐나다 교회가 1880년부터 약 100년간 운영해온 원주민 기숙학교에서 발생한 아동학대에 대해 직접 사죄하기 위해 이뤄졌다. 교황은 “교회와 수도회의 많은 구성원이 무관심한 태도로 협력한 방식에 대해 용서를 청한다”면서 당시 상황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잘못을 깊이 인정했다. 교황이 과거든 현재든 사안에 대해 직접 나서 사과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함께 걸어가는 길, 이웃의 아픔에 깊이 공감해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직접 찾아가 고개를 숙였고, 먼저 손을 내밀고 안아줬다. “제 삶의 마지막에 맞이하는 고통을 온 누리의 평화와 만민의 형제애를 위하여 주님께 봉헌합니다.” 교황이 남긴 영적 유언의 가장 마지막 문장이다. 교황의 생애는 하느님 자비 안에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한 삶이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가장 낮은 이들을 찾아 주님 사랑을 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언에서도 “단순하고 특별한 장식 없이 ‘Franciscus’라는 이름만 새겨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교회의 으뜸이었지만 먼저 안아주고 미소를 건네며 극한의 고통 중에도 마지막 날까지 신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고통을 그렇게 우리의 평화를 위해 봉헌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박민규2025.04.30

세 개의 장미창, 영원한 진리이자 빛의 근원인 그리스도 표현[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46.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하>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배치도. 출처=Wikimedia Commons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나온 신비한 빛이 성당을 가득 채웠을 때 사람들은 눈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고 하늘나라를 상상할 수 있었다. 성당 안을 가득 채운 신비로운 빛으로 빛의 근원,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1요한 1,5)는 성경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렇듯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하느님의 신비함을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표현 수단이었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의 중랑 바닥에는 지름 12m인 동심원이 있다. ‘미로’라고 불리는 통로다. 성지 예루살렘 또는 골고타 언덕에 이르는 순례의 길을 걷거나 무릎걸음을 하면서 예수님의 고통을 추체험(追體驗)하는 통로다. 지금은 없어진 꽃장식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다 걸으면 그 길이는 294m나 된다. 밝은 밖에서 성당에 들어와 포탈의 문이 닫히면 이 ‘미로’를 앞에 두고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신비롭고 선명한 빛에 둘러싸인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은 12~13세기 후반의 걸작인 스테인드글라스를 거의 잃지 않은 유일한 대성당이다. 건축 기술의 진보, 특히 성당 밖에 마련된 강력한 버팀벽과 플라잉 버트리스는 거대한 창문을 만들 수 있게 하여 내부 공간의 비물질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해줬다. 그런데 플라잉 버트리스를 건물 전체에 처음 본격적으로 도입한 고딕 성당은 샤르트르 대성당이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플라잉 버트리스에는 두 단이 작은 원기둥으로 엮여 있다. 성당에는 모두 176장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모두 합치면 그 면적은 2000㎡가 넘으며 그려진 인물도 4000명에 가깝다. 샤르트르 대성당과 같은 13세기 중기의 고전 고딕 건축으로 명석한 건축 구성에 긴장감이 감돌지만, 본래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대부분 잃어버린 랑스나 아미앵 대성당에서는 샤르트르 대성당과 같은 빛의 신비로움을 감동적으로 체험하기 어렵다. 대성당의 ‘빛’을 말할 때 “성당이 빛으로 채워지고 있다”, “공간을 둘러싸는 벽 자신이 발광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색유리라는 투광 재료로 만든 벽, 곧 ‘은은히 투과하는’ 빛의 벽이다. 물리적으로는 빛이 지나는 벽이지만 시각적으로나 상징적으로는 스스로 빛나는 벽이다. 돌의 벽과 같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비실체적인 벽이다. 따라서 스테인드글라스는 결코 창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빛은 눈부시게 빛나는 빛이 아니다. 짙은 빨간색, 짙은 파란색을 기조로 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풍부한 빛을 통과시키는 유리가 아니다. 그것은 어스레한 어둠 속에서 색채가 풍부한 빛을 공간에 떨어뜨린다. 로마네스크에 비해 고딕 성당의 창이 점점 커진 것은 내부를 밝히기 위함이 아니라, 내부를 신비한 색채의 빛으로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중세 사람들은 빛나는 하느님의 손안에 자신이 있다고 느꼈다. 고딕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빛이 주는 본질이 이것에 있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북쪽 수랑 장미창. 출처=Wikimedia Commons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남쪽 수랑 장미창. 출처=Wikimedia Commons 하느님의 말씀 형상화한 세 개의 장미창 고딕 대성당에는 수직을 향하는 방향성과는 상반되게 자기 완결적인 원의 형태를 한 장미창(rose window)이 있다. 장미창은 고딕 대성당의 정면인 서쪽, 횡랑의 남쪽과 북쪽 등 세 개의 포털을 통괄하듯이 그 위에 크게 뚫려 있다. 신비한 장미창의 빛은 약간 어두운 성당 안에 들어서야 비로소 강렬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일 드 프랑스 지방에 있는 고딕 대성당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장미창은 ‘태양창’ 또는 ‘차륜창(車輪窓, wheel window)’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그리스도를 빛의 아들이시며, 중앙에 군림하는 그리스도로부터 열두 개의 바큇살로 방사하는 열두 사도가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 창을 ‘장미창’이라 부르는 까닭에 장미라는 말에 성모를 연상하여, 이 창이 성모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러나 장미창은 성모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생드니에 처음으로 나타난 장미창은 구약 성경의 예언자 에제키엘이 본 구세주의 비전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생물들을 바라보니, 생물들 옆 땅바닥에는 네 얼굴에 따라 바퀴가 하나씩 있었다. 그 바퀴들의 모습과 생김새는 빛나는 녹주석 같은데, 넷의 형상이 모두 같았으며, 그 모습과 생김새는 바퀴 안에 또 바퀴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에제 1,15-16)는 말씀을 형상화한 것이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세 장미창은 남쪽, 북쪽, 서쪽에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북쪽 장미창은 강생하신 그리스도를, 남쪽 장미창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서쪽 장미창은 심판자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북쪽 수랑의 장미창(1235년)은 구약을 형상화했고, 남쪽 수랑의 장미창(1225~1230년)은 신약을 형상화했으며, 서쪽 정면의 장미창(1215년)은 요한 묵시록을 따르고 있다. 빛나는 장미창은 극도로 중심적이며 모든 빛의 근원을 뜻한다. 세 개의 장미창은 영원하신 진리이자 로고스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영광송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처럼, 과거(“처음과 같이”, 구약)와 현재(“이제와”, 신약)와 미래(“항상 영원히”, 장차 오실 심판)라는 세 개의 시간을 나타낸다. 이렇게 성당은 세 개의 시간이 합쳐진 영원한 현재를 재현하고 있었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서쪽 정면 장미창. 출처=Wikimedia Commons 중세 사람 눈으로 스테인드글라스 보아야 그런데 흔히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중세 사람들을 위해 성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그렸다는 말을 많이 한다. 현대와는 달리 성직자만 성경을 읽을 수 있었던 중세에는 글을 모르는 신자들은 강론을 들은 다음, 성당을 장식한 그림과 조각 등으로 강론 내용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눈은 그것에 그려진 도상(圖像)을 어디까지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었을까? 폭이 좁고 높이가 낮은 작은 성당이라면 스테인드글라스 그림을 세세한 부분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샤르트르 대성당과 같이 거대한 성당에서 많은 곳에 세세하게 그려져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그림 대부분은 이미 성경의 내용을 잘 아는 이도 인식하기 어렵다. 저 높은 데 있는 그림은 더욱 그렇다. 중세 사람들의 시력이 우리보다 좋았다고 말한들 그것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성당 안에서 스테인드글라스 한 장 보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도 많이 든다. 그러니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시각적 성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었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의 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는 오늘의 내 눈이 아닌, 그것을 만든 중세 사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먼저 800년 전에 그들은 성당 바닥에 서거나 앉아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닿는 빛을 받았고, 이에 감탄하여 그것에 그려진 이미지를 읽고 있었다. 그다음 하나의 스테인드글라스 앞에 서서 그것을 구성하는 복잡한 틀과 다양한 도형을 일일이 음미하며 서로 관련을 맺었을 것이다. 이어서 회중석 측랑이나 주보랑을 걸어가면서 이어지는 창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교차부에 서서 몸의 방향을 바꾸어 내부 공간 전체를 바라보면서 보이는 모든 창을 서로 연결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수많은 거룩한 도상을 통해 안쪽에서 쏟아지는 빛과 방대한 도상에 그저 압도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대성당을 이렇게 읽었다. cpbc2023.11.23

특별기고 - (12) 성전건립 유감(有感)-뚝심과 효심으로 이룬 성전-<인테리어> 대전교구 유구성당이 새로 건립된 모습. 정필국 신부 제공 그럭저럭 대부분의 공정은 이루어졌고 마무리만 하면 되었다. 남은 것은 인테리어... 인테리어는 오로지 내 몫이었다. 내가 인테리어에 대해 뭘 아나? 하지만 몇몇 인테리어 관계자를 불러 설계를 맡겨보았지만 전혀 내 눈에 들지 않았다. 나는 내 눈썰미와 감각을 믿고 두루두루 쫓아다니며 견학하고 자문을 구했다. 실상 고딕 성당은 그 구조 자체가 가장 뛰어난 인테리어지 별다른 인테리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전례적으로 아름답고 경건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할 것인가가 문제고, 또 어떻게 하면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와 색감을 연출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성당 내부가 너무 여러 가지 화려한 색상으로 되어있으면 어수선하고 눈도 혼란스럽고 집중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랜 탐색과 궁리 끝에 결국 미색(아이보리, 밀크 화이트)과 갈색(브라운(체리))으로 모아졌다. 실제로 완성 단계에 이를수록 예쁘고 단아하며 차분한 것이 맘에 들었다. 순간 나의 눈썰미와 감각이 이정도 였나... 스스로 감탄하기도 했다. 고딕 성당 내부 인테리어의 백미는 역시 스테인드 글라스였다. 인간이 만든 유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니 빛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름다운 광채가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만민이 기도하는 하느님의 집에 비쳐 들어오는 그 아름다운 빛깔... 마음 같아서야 노트르담 대성당(가보지는 못하고 사진으로만..)의 스테인드 글라스나 적어도 명동 성당 정도의 모습이라도 구현하고 싶었지만 예산이 어마어마하기도 하거니와 국내에 어느 고딕성당을 가도 내 눈에 차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공주 중동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김동억 신부님 재임시 이남규 화백 작)를 만들었던 화가의 제자(파주 헤이리 유리재연구소)인 조규석(요한) 화백에 대해 듣고 무작정 쫓아갔다. 자초지종 설명을 하고 유구성당 내력과 순교자의 얼이 깃든 유서 깊은 마을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선뜻 수락을 하지 않았다. 여러 번 쫓아가고 연락하며 졸랐더니... 어렵게 수락을 했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여러 가지 평가와 구설수에 오를 수 있음에 쉬이 수락을 못 하고 신중히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나의 끈기와 열정에 감복했는지 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이 오래도록 진행되는 가운데 성당 바닥재, 제단석 등 … 중요한 부분의 자재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궁리하다가 휴게실 화장실에까지 흔하게 까는 타일이나 화강석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 하여 대리석을 깔기로 했다. 하지만 이것도 색상과 문양이 중요했기에 역시 신중하게 궁리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스페인의 Granada 라는 업체에 의뢰하여 역시 아이보리 빛깔과 브라운(체리)톤 그리고 붉은 계통의 걸레받이석으로 하여 주문했다. 고맙게도 제대와 감실을 비롯하여 구입하는데 수원 교구 김진태 신부님이 자상하게 조언을 해주시고 아울러 유학 시 공부했던 현지 교구장 주교님까지 아시게 되어 정말 좋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도록 신경 써주시고 크게 배려해 주셨다. 거의 100여 일 만에 항공으로 실어 온 대리석과 성물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튼튼한 포장과 내구성, 성물들의 아름다움은 정말 가슴 떨리는 감동이었다. 자부하건대 우리나라에 이렇게 좋은 제대, 감실, 성물(성작, 성합 …)은 다시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제단 구성도 흔히 대부분 성당이 그렇듯 제대 뒷벽에 어두운 색상의 칙칙한 십자나무에 예수님의 몸이 걸쳐져 있는 모습들... 그것이 십자가의 모습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칙칙하거나 비율이 맞지 않는다든가.. 등등 뭔가 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것은 심지어 패션쇼를 하는 것인지 너무 지나치게 멋을 부렸다든가 등등 맘에 들지 않았다. 일본에 서 본 성당 … 책자나 인터넷 등에서 검색하고 탐색을 거듭한 결과 딸랑 십자가만 걸쳐 놓기보다는 십자가 양 옆에 성모님과 요한 사도가 함께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또 따랐던 두 사람의 꾸밈없는 비통한 심정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리고 처음에는 십자가를 스테인드 글래스로 표현해 볼까 했는데... 작가와의 여러 가지 숙의 끝에 스테인드 글래스와 십자가는 별개로 하되, 스테인드 글래스의 중앙에 십자가를 배치하는 형식으로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인 십자가가 중심이지만 그 십자가를 배경처럼 병풍처럼 스테인드 글래스가 받쳐주는 모양새 그리고 스테인드 글래스의 내용도 너무 구체적인 인물이나 성경 주제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문양이나 색감으로 의미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추상적으로 구상했다. 그리고 제대 쪽 스테인드 글래스는 두꺼운 오리지널 오스트리아 색 유리로 제작하고 성당 양 사이드 창은 부드럽고 맑은 톤으로 꾸미기로 했다. 또 색상에 민감한 나인지라 수시로 가서 샘플을 보고 색상에 대해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십자고상과 성모상 요한상도 스페인에서 나무로 조각하여 색채를 입혔는데 내가 의도한 대로 우리 성당 어르신들이 직관적으로 쉽게 친근하게 알아볼 수 있는 또렷한 색깔로 마무리해서 질감이 참 좋았다. 그리고 뒤에서 (신자석에서) 봤을 때 위아래 높낮이나 좌우 비율이 맞아야 하겠기에 수십 번도 더 올렸다 내렸다 옮겼다를 반복하다가 마치 영화 감독이 큐 사인을 외치듯이 오케이 선언을 해야만 시행되었다. 조금이라도 어색하거나 눈에 안 차면 마음이 불편해서 도무지 잠을 못자기에 다음날 또 바꾸게 되기가 십상이었다. 제대도 벽 제대를 따로 만들어 감실을 올려놓고 실제 성찬례를 거행하는 제대는 앞쪽에 별도로 설치하고 (최후만찬 조각을 새겨 넣음) 독서대는 네 복음서의 상징을 금도금을 넣어 새겨 넣었다. 그리고 뒤늦게 제대 난간목을 설치했는데, 그러고 나자 고딕성당다운 멋이 구현되었다. 신자석과 지성소(제대)를 구분하면서도 경건한 맛이 더 좋았다. 나중 일이지만 파이프 오르간도 오랜 고민 끝에 제작, 설치하니 제대와 화답하듯 화룡점정인 듯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성당에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고, 거기서 아름다운 미사곡이 울려퍼지고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가 울려퍼질 것을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이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파이프 오르간 마스터가 세밀하게 점검도 해줘서 더욱 마음이 놓였다. 요한 비안네 성인께서도 본당은 가난했지만 성물만큼은 정말 정성을 들여서 좋은 것으로 쓰셨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고 성물도 비싸더라도 정말 좋은 것, 예쁜 것, 튼튼한 것으로 엄선해서 고르고 골랐다. 너무 과하다 싶을 만큼... 세례대까지 비싼 돈을 주고 대리석으로 맞추었다. 본당을 떠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례성사에 써보았다. 그러는 중에 진즉부터 맞춰놓은 성당 장의자, 제대의자, 성당 출입문도 점검,수정했다. 나름 이름 있는 천주교 성물업체 여러 군데에 직접 가보고 샘플을 맞춰 여러차례 상의 끝에 영세하지만 성심껏 만들고 우리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는 곳을 최종 낙점하여 제작했다. 무엇보다도 장의자는 앉았을 때 등이 다소 뒤로 기울고 허벅지가 엉덩이보다 조금 높아야 편하기에 그 각도를 맞추느라 수백번 다시 해오라고 호통을 쳤다. 아울러 대부분 장궤틀을 만들지 않는데 나는 반드시 장퀘틀을 만들어야 했다. 무릎이 불편한 사람이야 그냥 앉아 있으면 되지만, 성한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느님 앞에 죄인이 가져야할 자세... 그래서 의자와 장궤틀에 골백번도 더 앉아보고 꿇어보고 내 몸으로 느낄 때 어느정도 편하고 인체공학적으로 맞는다고 확신했을 때 비로소 OK 사인을 해줬다. 색상도 너무 튀어도 안되고 희뿌연해도 안되었다. 브라운과 체리색이 잘 조화된 그런 색감을 낼 때까지 계속 반복시켰다. 그 사람들도 지겨워 치를 떨었을 것이다. 어지간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두고두고 불편할 수 있는데... <계속> - 대전교구 정필국 베드로 신부 신문취재팀 이정훈2024.12.26

박정일 주교 삶과 신앙“늘 선교하고 사회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인이 돼달라”고 당부하는 참된 목자8월 28일 98세를 일기로 선종한 박정일(미카엘) 주교는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여러 기록을 갖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박정일 주교. 박 주교는 한국 교회에서 3개 교구(제주ㆍ전주ㆍ마산) 교구장을 지낸 유일한 주교다. 또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단독 추진한 124위 시복시성 소송을 책임졌던 주교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 가장 먼저 ‘피데이 도눔’(Fidei Doum, 사제가 부족한 지역에 교구 사제를 한시적으로 선교사로 파견하는 제도)을 도입한 주교다. 그리고 한국 교회 사도좌 정기방문 및 세계성체대회에 가장 많이 참석한 주교다. 박정일 주교는 평소 교우들을 만나면 “늘 선교하고 사회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인이 돼달라”고 당부하는 참된 목자였다. 그러나 정작 2015년 3월 사도좌 정기방문 때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한 그는 “아무런 공로 없이 은퇴한 주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교황은 크게 웃으면서 “겸손하신 분”이라 화답했다. 이처럼 박 주교는 겸손하고 소탈하다. 늘 웃는 얼굴로 사제들과 신자들을 대한다. 직접 컴퓨터로 ‘기도 상본’을 만들어 만나는 사람마다 나눠주며 매일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그래서 때때로 그를 ‘무른 사람’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한 가지 목표를 세우면 결실을 볼 때까지 뚝심 있게 추진하는 ‘호시우행(虎視牛行, 눈은 호랑이처럼 예리하게, 행동은 소처럼 성실하게)’형 인물이라고 평한다. 박정일 주교는 1926년 12월 평남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1950년 12월 월남을 했으니 24년을 북한에서 살았다. 그는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다녔다. 그때 학교 동기인 서울대교구 고(故) 백민관(테오도로) 신부를 만나 평양교구 영유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의 반대로 숭인상업학교 졸업 후 신학교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1945년부터 3년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다. 그런데 당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앓자 어머니가 “신부가 되지 못해 병이 났다”며 결국 신학교 입학을 허락했다. 그래서 1948년 9월 덕원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1949년 5월 7일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신학교가 폐쇄됐다. 귀가 명령을 받고 평양교구청에 와보니 교구장이던 홍용호 주교도 체포돼 행방불명 상태였다. “1949년 5월 7일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밤 사이 경찰들이 신학교 옆 베네딕도 수도원에 들이닥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님과 독일 신부님, 수사님, 교수 신부님들을 모두 잡아갔다는 거예요. 창밖을 보니 경찰이 두세 명씩 짝지어서 신학교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무서웠죠. 5일간 숙소에 갇혀 지냈습니다. 5월 13일에 학교를 폐쇄하니 모두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짐을 챙기는데 묵주나 성상, 성경은 가져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학교에 있던 성작이나 성광 같은 성물은 부제와 상급생들이 주방에 근무하는 분들을 통해 몰래 밖으로 옮겨 놨다고 하더라고요. 신학생들은 짐을 싸서 다음날 평양 주교관으로 갔지요.”(생전 인터뷰에서) 사제의 꿈을 버릴 수 없던 박 주교는 고향으로 돌아와 남몰래 월남 계획을 짰다. 수소문 끝에 평양에서 월남을 돕는 교우를 소개받았다. 1950년 2월 말이었다. 첫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다. 평양에서 해주까지 갔지만, 정치보위부원에 발각돼 두 달 넘게 유치장에 갇혔다. 심문과 폭행, 굶주림을 견딘 끝에 겨우 풀려났다. 그때가 5월 초였다. 6월에 전쟁이 났다. 그는 북한군에 강제 징집됐지만, 용케 도망쳤다. 한동안 산에서 숨어 지내다가 평양 관후리성당으로 가서 캐롤 몬시뇰이 써준 ‘신자 확인서’를 갖고 미군 차량을 얻어 타고선 12월 초 대동강을 건너 월남했다. 12월 23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명동대성당 주님 성탄 밤미사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덕원신학교 신학생이던 황춘홍 신부를 만났다. 혜화동 신학교에 신학생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가 정의채 몬시뇰과 김진하 신부를 만났다. 박 주교는 6·25전쟁 동안 30여 명의 신학생과 함께 대구와 제주, 부산 영도로 피난하면서 오로지 사제가 되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임시 신학교에서 열심히 신학 공부를 했다. “1951년 여름에 인천에서 만났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셋만 월남했더라고요. 형들과 형수님 그리고 조카들까지 이동하긴 어려웠던 거죠. 아버지께서 해주에서 밀선을 구해 인천으로 오셨습니다. 남쪽에 오자마자 저를 찾으셨는데 ‘이놈이 살아있다면 분명 신학교에 있을 거다’라고 생각하셨답니다. 답동성당에 가서 우리 아들이 신학생인데 확인 좀 해달라고 하셨고, 부산 신학교에 있던 제게 연락이 닿은 겁니다. 그 길로 인천으로 가서 부모님을 뵈었죠.” 박 주교는 1952년 봄 로마에 있는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우르바노대학교는 규율이 엄격했다. 모든 수업은 라틴말로 진행됐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수단을 입어야 했다. 방학 때에도 집에 가지 못하고 신학교 별장에서 기숙 생활을 해야 했다. 신문은 물론 라디오도 들을 수 없었다. 박 주교는 “로마에서 10년을 살면서 한국에 전화 한 번 할 수 없었고, 동생이 보내온 편지 1통을 받아보았을 뿐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우르바노대학교에선 철저한 복음 선포 의식을 배웠다. ‘한 번 우르바노 신학생은 영원한 선교사’라는 표어를 늘 자랑스럽게 외치곤 했다. 성모 신심도 몸에 깊이 뱄다. 박 주교는 1958년 11월 23일 로마에서 평양교구 소속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성구는 ‘나 주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9,2)이다. 주교회의가 펴낸 「성경」에는 ‘저는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로 돼있다. 그는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사제로 뽑아주신 주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시편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훗날 그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아니었다면 부족한 제가 66년간 사제로 살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저를 위해 기도해준 모든 이에게 감사드리고 특히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박 주교는 사제품을 받고 나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우르바노대학교를 졸업 후 장학금을 받고 그레고리오대학교와 안젤리쿰(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교)에서 1년씩 사회학을 공부했다. 사회학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을 당시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가 사제가 부족하니 빨리 귀국할 것을 요청해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1962년 귀국했다. 박 주교는 귀국할 때 같은 평양교구 출신 유재국·장덕범 신부와 함께 부산교구에 입적했다. 당시에는 사제품을 받고 바로 주임 신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평양교구 출신 셋은 부산교구에서 처음으로 1년 넘게 보좌 신부 생활을 했다. 이후 1964년 문산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아 사목하고 있을 때 마산교구가 설정됐다. 문산본당이 마산교구로 편입되면서 마산교구 사제로 입적됐다. 이후 1970년부터 대건대신학교(현 광주가톨릭대) 교수로 윤리신학과 사회학을 가르쳤다. 박 주교는 1977년 4월 15일 성 바오로 6세 교황으로부터 초대 제주교구장으로 임명됐다. 그해 5월 31일 제주 중앙성당에서 주한 교황대사 루이지 도세나 대주교에게 주교품을 받았다. 주교 수품 성구는 ‘충성과 온유’(집회 45,4)다. 박 주교는 제주교구장 착좌 후 “앞으로 제주교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충성이 두터운 교회, 그리고 사회 속에 현존하는 교회가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사목 이념을 밝혔다. 그가 약속한 ‘사회 속에 현존하는 교회’는 제주교구의 전통이 됐다. 그는 5년간 제주교구장으로 사목하다 198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제6대 전주교구장으로 임명됐다. 박 주교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과 1987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을 준비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그 가운데 주교로서 그에게 가장 보람되었던 것은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피데이 도눔 선교사를 남미 페루에 파견한 일이었다. “한국 교회가 성숙한 교회답게 새로운 출발을 할 때라고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교구 사제들에게 보편 교회에 이바지하는 선교활동에 동참하자고 호소했지요. 고맙게도 정승현·방의성·김윤섭 신부님이 피데이 도눔을 자원해줬습니다. 이들이 밀알이 돼 현재 서울·대구·수원·대전·원주·춘천 등 많은 교구 사제들이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지요.” 박 주교는 또 전주교구장 시절 천호성지와 치명자산성지를 조성한 게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한 바 있다. 박 주교는 전주교구장으로 6년간 활동하다 1988년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03위 시성 이후 전주교구장으로 있을 때 초기 순교자 시복 청원을 준비했었다. 1999년 주교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후 주교회의 산하에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주교들의 동의로 위원장이 됐고, 11년간 시복시성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가 마산교구장이었기에 교회법에 따라 마산교구장이 책임을 맡아 시복 대상자를 선발하고 시복예비심사 재판을 이끌었다. 그는 “하느님의 종 124위가 한 명도 탈락 없이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모두 복자품에 올라 매우 기쁘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박 주교는 또 ‘나자렛 예수 수녀회’를 설립했다. 마산교구에서 처음 설립한 수도회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는 나자렛 예수 수녀회는 홀몸노인과 매 맞는 여성, 갈 곳 없는 아이들과 함께 30년이 넘은 폐교를 수리해 함께 살고 있다. 박 주교는 2002년 마산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사목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교회는 늘 선교해야 하고, 사회 속에 현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순교자 영성과 순교 정신을 기반으로 한 올바른 정신 자세와 자기 쇄신의 태도, 시대의 표징과 사람들의 필요를 재빨리 파악하는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의 사제들에게 “내적으로 과감한 쇄신을 이뤄 겨레가 갈망하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착한 목자가 돼달라”고 권고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 선임2024.08.28

거짓말은 먹음직스런 ‘선악과’처럼 달콤한 유혹[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66. 거짓말 과잉소통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거짓말인줄 알고도 자주 듣고 보면서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사진은 인류 최초의 거짓말쟁이인 성경 속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과일을 따 먹도록 한 모습을 그린 작품. OSV “우리 모두는 거짓말을 하지.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웃으면서 쉽게 거짓말을 해.” 드라마 ‘SKY 캐슬’의 OST곡 ‘We All Lie’의 한 대목이다. 웅장함과 우아함 그리고 몽환적이기까지 한 이 노래는 ‘우리는 가짜고 거짓말쟁이’라고 장엄하고 당당하게 선포한다. ‘돈과 명예 그리고 외모, 다 갖추고 싶어? 그러면 적당한 위선과 거짓으로 가면을 쓰고 서로를 속여야만 해!’라며 유혹의 손길을 보내는 듯하다. 나만 거짓의 그늘 속에 있는 것 같아 부끄럽고 비굴하게 느껴질 때, 노래는 ‘괜찮아! 우리 다들 속이며 살잖아?’라고 속삭인다. 대부분 우리는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생각보다 많은 거짓말을 하고 산다. 누군가 선물을 주면 좋아하지 않아도 ”와, 딱 내 스타일인데”라고 말한다. 편하지 않은 사람이 ‘밥 먹자’라고 하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선약이 있다’고 한다. 약속 시간에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가고 있다’고 할 때도 있다. 관계를 위한 거짓 칭찬에 감동하고, 듣기 좋은 하얀 거짓말에 고마워한다. ‘나’를 지키기 위한 거짓말도 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기 이익을 위한 악의의 거짓말도 있다. 마이클 캐플런의 「뇌의 거짓말」에 소개된 사회심리학자 데보라 그루엔펠드(Deborah Gruenfeld, 스탠퍼드대학)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면 규칙을 무시하고 극단적 이기심과 거짓말로 안하무인격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일단 권력이 부여되면 예의 없이 늘어진 자세로 앉거나 타인을 방해하는 행위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기적인 태도는 처음부터 타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경제와 정치 분야 권력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태도로 논쟁거리가 될 때, 그의 주변 사람은 “그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두둔한다. 정말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안하무인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대단한 권력을 쟁취한 정치인이나 경제인이 아니라 직장이라는 조직에서도 승진한 사람에게 “완장을 차니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을 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다. 책임과 위치가 그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하겠지만, 욕심 없고 겸손했던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자 권위적이고 오만해졌다는 의미도 있다. 만약 권력을 지키기 위해 혹은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로 사람들을 대한다면 결국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어떤 ‘진실’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업무 보고가 올라갈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는 권력자가 듣고 싶어 하는 거짓말로 인정받으려 할지도 모른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으로 이어지고 조직은 점점 부정직함에 무뎌지고 진실에서 멀어질 것이다. ‘거짓말은 할수록 는다’는 속담이 있다. 사실 뇌과학적으로도 맞는 말이다. 처음 거짓말을 할 때는 소뇌 편도체가 크게 활성화된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하면 반응 횟수가 줄어든다고 신경학자들은 말한다. 거짓말을 자주 하다 보면 뇌가 부정직한 것에 둔감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개인에게만 해당할까? 여론조작과 가짜뉴스가 넘치고 권력자의 속임수가 빈번하다면 사회 구성원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처음에는 경악을 금치 못하겠지만 유사한 일이 빈번하면 부정직함에 둔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인류 최초의 거짓말쟁이로 성경 속 ‘뱀’을 꼽는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창세 3,13) 하지만 뱀이 하와에게 억지로 먹이진 않았다. 여자는 스스로 팔을 올려 나무에서 과일을 따 먹었다. 아담 역시 하와가 강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먹어보라고 주었고 아담은 스스로 과일을 받아먹었다. 과잉소통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거짓말인줄 알고도 자주 듣고 보면서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매 순간 인터넷의 수많은 상품 후기들과 과장 광고, SNS의 허황된 이슈를 접한다. 누구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런 ‘선악과’처럼 달콤한 유혹이다. 우린 점점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에, 진실보다 더 감동적인 거짓에 익숙해지면서 부정직함에 무뎌져 가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영성이 묻는 안부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든다(wag the dog)’란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증권시장에서는 주가가 현 가치보다 미래 예상 가치에 흔들린다는 의미지요. 정치가에서 자신의 비리를 덮기 위해 유권자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도할 때 사용하는 정치 속어이기도 합니다. ‘미디어’가 대중을 흔들어댈 때 ‘웩더독’이라고도 하지요. 현재의 진실을 감추는 행위입니다. 누구나 모두 ‘진실’일수도 없고 또 모두 ‘거짓’일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거짓말을 자주 하다 보면 그것이 진실처럼 기억되기도 합니다. 수많은 공약으로 유권자들의 표를 얻어낸 정치인들의 말을 기억하고 있나요? 혹시 익숙한 나머지 ‘괜찮아! 우리 다들 속이며 살잖아?’라는 ‘We All Lie’ 노래처럼 관대해지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진실’이 우리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봅니다. “진실한 증인은 여러 목숨을 구하지만 거짓말을 퍼뜨리는 자는 속임수만 일삼는다.“(잠언 14,25) cpbc2024.04.24

힘 빼고 살아가기[월간 꿈 CUM] 꿈CUM 신앙칼럼 (5) 개인적으로 자전거를 즐기는데, 처음 1년은 힘으로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자전거는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힘으로 자전거 타는 사람은 10㎞도 가지 못한다. 굴러가는 바퀴의 흐름을 탈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힘을 빼고 타면 100㎞도 거뜬히 갈 수 있다. 힘 빼야 제대로 탈 수 있다. 이 밖에 골프, 수영 등 대부분 스포츠에서 ‘힘 빼기’는 하수와 고수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인류 역사 이래로 머리 똑똑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힘 빼기’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노자(老子, ?~?)는 ‘힘주지 않는 것이 진정 힘주는 것이다’(無爲의 爲)라고 했고,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BC 399)는 ‘머리에 힘 빼는 것’(무지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진정한 앎의 출발점이 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힘 잔뜩 주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조금만 건드려도 파르르 한다. 그래야 이 험한 세상에서 손해 보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로마 10,11-13 참조) 물론 살다 보면 위기 상황이 올 수 있다. 사업 실패, 퇴직, 건강 악화, 갑작스런 사고, 대학 입시, 취업 등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사랑 때문에 심한 마음 앓이를 할 수도 있다. 터무니없는 모함과 거짓말로 상처받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어떤 때는 이 모든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힘을 잔뜩 준다. 티베트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 안 될 문제라면 걱정해도 소용없다.” 힘 빼도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수고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사탄의 유혹을 허락하신다. 그 유혹의 실체가 바로 “힘줘!”다. 나와 공동체를 붕괴시키기 위해 사탄은 ‘힘줘!’라는 달콤한 사탕을 내민다. 예수님도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사탄이 돌을 빵으로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했을 때 “NO!”라고 말씀하셨다. 할 수 있는 힘이 분명히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다.(루카 4,1-13 참조) 힘 확실히 빼셨다. 성경을 읽다보면 대부분 힘 빼라는 내용인데, 우리는 혹시 힘 잔뜩 들어간,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 성경을 붙잡고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는데, 다시 읽어보니 힘 빼도 된다는 말씀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춥다. 자전거를 오랜만에 꺼냈다. 힘 빼고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중랑천 힘 빼고 살아가기 물이 힘 빼고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물결이 차분하다. 따뜻해졌다. 글 _ 우광호 발행인 원주교구 출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94년부터 가톨릭 언론에 몸담아 가톨릭평화방송·가톨릭평화신문 기자와 가톨릭신문 취재부장, 월간 가톨릭 비타꼰 편집장 및 주간을 지냈다. 저서로 「유대인 이야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성당평전」, 엮은 책으로 「경청」 등이 있다 cpbc2023.11.06

생일이나 잔칫날·제삿날 먹으며 기쁨과 슬픔 함께 나눈 국수[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12. 국수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독상을 받은 신부의 손님들’, 1911년 5월 21일 황해도 신천군 청계리,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잔칫상과 제사상에 빠지지 않고 오른 국수 우리 민족은 예부터 국수를 잔칫날 함께 나눠 먹으면서 기쁨을 나눴고, 상가에서 음복하며 먼저 세상을 떠난 이를 추모하고 슬픔을 달랬다. 돌·생일·회갑 등 태어난 날과 혼례 등을 축하하는 잔칫상에, 또 제사상 제수로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음식이 바로 국수였다. 국수는 고려 시대 송나라에서 들어왔다. 스님들이 송나라를 왕래하면서 국수를 들여와 절간 음식으로 먹었고, 이후 상류사회 잔치와 제사 음식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밀을 수입해 밀가루가 흔하지만 20세기 초반만 해도 밀은 비싸고 귀했다. 국수가 의례 음식으로 생일과 잔칫날·제삿날 등 특별한 날에 먹을 수 있는 별식 대접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밀이 귀하던 조선 시대에는 주로 메밀과 녹두·녹말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이외에도 콩·칡가루·밤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면에 쇠고기나 꿩고기를 우려낸 육수나 여러 채수로 국수를 만들었다. 멸치 육수는 20세기 이후 들어 사용했고 밀국수는 해방 후 수입 밀가루가 많아지면서 일반화됐다고 한다. 이 참에 국수와 관련된 우리 풍속도 살펴보자. 조선 시대에는 아기가 출생한 지 3일째 되는 날에 축하 손님에게 국수를 대접했다. 아이의 첫 생일을 축하하는 돌잔치에는 흰밥과 미역국·나물·구이·백설기·수수경단·과일과 함께 반드시 국수를 돌상에 올려놓고, 국수장국으로 손님을 대접했다. 아울러 ‘돌잡이’로 쌀·돈·국수 등을 놓고 아이의 미래를 점쳤다. 그리고 61세 회갑을 맞은 이에게 국수장국을 차려주고, 축하객들에게도 잔치 국수를 대접했다고 한다. 지방과 집안에 따라 다르지만 제사상에 ‘면서병동’(麵西餠東)이라 하여 국수를 서쪽에, 떡을 동쪽에 놓는다. 제수로 올리는 국수를 ‘메국수’라 하는데, 국수를 놓을 때는 삶은 국수사리만 제기에 담고 그 위에 계란채·잣·깨소금 등을 고명으로 얹어놓는다. 음복 시에는 장국밥이나 비빔밥 등 제삿밥에 메국수를 고명처럼 얹어 먹기도 한다.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국수를 먹는 사람들’, 1925년 함경남도 안변군 내평리,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혼례식 후 국수 먹는 여성들’, 1925년 함경남도 안변군 내평리,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혼례식 후 국수를 먹는 사람들 촬영 우리는 보통 “국수 언제 먹여줄래?”란 말을 “결혼 언제 할 거냐?”란 뜻으로 쓰곤 한다. 이는 혼인 잔칫날 손님을 대접하는 음식이 국수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국수에 장수와 백년해로, 추모의 뜻을 담아 면을 끊지 않고 먹었다. 국수는 계절에 따라 여름에 냉면, 겨울엔 온면으로 먹는다. 냉면은 차갑게 식힌 육수에 동치미·배추김치·나박김치 국물을 섞어 쓰거나 육수만 단독으로, 혹은 동치미나 김칫국물만 따로 쓴다. 면을 만 다음, 오이절임·배·편육·동치미 무 썬 것, 달걀 등을 얹어 낸다. 온면은 국수를 삶아 헹군 뒤 사리를 만들어 두었다가 미리 만들어놓은 장국에 ‘토렴’하여 데운 후 그릇에 담고 쇠고기볶음·편육·달걀지단 등 꾸미를 얹어 더운 장국을 부어 만든다. 비빔국수도 있다. 고기 고명과 각종 나물·김치를 비빔 재료로 사용한다. 오늘날 춘천 막국수와 함흥회냉면 등이 대표적 비빔국수다. 국수는 가공 방법에 따라 절면(切麵), 압착면(壓搾麵), 타면(打麵)으로 나뉜다. 절면은 밀가루나 메밀가루 등을 물에 반죽해 끈기가 있게 잘 치대어 밀판에 놓고 밀대로 얇게 밀어서 가늘게 썰어 만든 국수를 말한다. 압착면은 잘 치댄 반죽을 국수틀에 넣고 압력을 가해 뽑아낸 국수다. 타면은 반죽을 양손으로 밀판에 치고 당기기를 반복해 가늘게 뽑아낸 국수를 가리킨다. 산업화 이전까지 국수를 삶을 때는 ‘광주리’와 ‘석자’를 빼놓을 수 없었다. 농가에 흔했던 광주리는 삶은 국수사리를 담아놓기 제격인 용기였다. 또 바가지 모양의 석자는 삶은 국수사리를 건져내는데 제격인 도구였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사진 중에 국수와 관련한 사진이 4장 있다. 그중 3장은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것이고, 나머지 한 장은 촬영자를 알 수 없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5월 21일 황해도 신천군 청계성당을 방문했을 때 한 혼례식에 초청받았다. 그곳에서 신부 측의 높은 손님으로 보이는 여인들이 각자 소반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장면을 촬영했다.<사진 1> 이 사진은 이미 혼례식 때 소개한 바 있다. 여인들이 받은 소반 위에는 그릇 2개가 놓여 있다. 아마도 그릇에는 국수와 양념간장이 담겨 있을 것이다. 베버 총아빠스는 1925년 함경남도 안변군 내평성당을 방문했을 때 또 한 번 혼례식에 참여한다. 이때 혼례식 후 국수를 먹는 남성들<사진 2>과 여성들<사진 3>을 촬영했다. “수탉이 울고 암탉들이 그 주위에 모여드는 통에 촬영이 중단되곤 했다. 외교인들은 색다른 체험에 즐거워했다. 폭염 속에서도 촬영에 여념이 없는 총아빠스와, 새 필름을 갈아 넣을 때까지 혼례 중간에 종종 기다려야 했던 신랑 신부가 고생이었다. 혼례 장소로 쓰인 성당 마당과 정원이 넓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 일정이 너무 빠듯한 탓에 애석하게도 총아빠스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바로 원산으로 떠났다.”(「분도통사」 297쪽) <사진 4> 촬영자 미상, ‘국수 먹는 남학생들’, 1910~1945,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소풍 가서 국수 먹는 덕원 소신학교 학생들 베버 총아빠스는 바쁜 일정에도 한국의 전통 혼례식을 촬영했다. 그는 혼례를 마친 후 남녀가 구분되어 잔칫상을 받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남자들은 노인과 장정·어른·아이 없이 멍석에서 따로 잔치 국숫상을 받았다. 제법 큰 놋쇠 그릇에 담겨 나온 국수를 누구 할 것 없이 국물 하나 남김없이 맛있게 들이키고 있다. 장정 한 명이 참기름병인지, 간장병인지 모를 빈 병을 들고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멍석은 성당에서 정말 긴요한 도구다. 볕 좋은 날에는 멍석 위에서 교리 공부도 하고 한글 수업도 한다. 또 찰고도 한다. 또 혼인성사와 같은 잔칫날이나 장례를 치를 때면 어엿한 식탁이 되기도 한다. 여인들은 남자들과 달리 툇마루에서 잔치 국수를 먹는다. 아이들을 돌보고 잔치 일을 도와야 하기에 남자들보다 여유가 없다. 한 아낙은 아예 선 채 국수를 먹고 있다. 이미 국수를 다 먹은 이들은 여유 있게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한 여인은 어린아이를 가누고 있다. 바로 곁에서 오른손에 젓가락을 쥐고도 이를 마다하고 국수사리를 손으로 집어 막 입에 넣으려는 여자아이가 천진하다. 국수와 관련한 또 하나의 사진은 촬영자와 연도·장소가 알려지지 않은 ‘국수 먹는 남학생들’ 이다.<사진 4> 모자 교표와 교복으로 보아 아마도 덕원 소신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가서 국수를 먹고 있는 장면인 듯하다. 덕원신학교는 1940년대에 한국 교회 중심 신학교였다. 원산은 물론 서울·평양·대구·전주·연길 등 전국 교구 신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소신학생들은 종교 수업뿐 아니라 성경과 라틴어를 배웠다. 또 여러 악기를 배우며 사제의 소양을 키웠다. 사진 속 학생들의 표정이 장난스럽다. 국수를 쉽게 먹기 위해 모자를 비틀거나 위로 올린 모습이 귀엽다. 모자챙이 구겨지고 실밥이 뜯어진 것으로 봐서 모두 엄청 개구진 듯하다. 국수 국물이 새까매질 만큼 간장을 그득 부었다. 한입 가득 국수를 채운 학생은 이제 막 시작한 듯하고, 옆의 친구는 벌써 그릇을 거의 다 비웠다. 또랑또랑한 눈빛이 호연지기를 보여준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5.01.08
[독자마당] 내리 복사정종학(미카엘, 청주교구 진천본당) 미사 전례를 돕는 부제와 복사들이 십자가와 향을 들고 행렬하는 모습. OSV 청춘의 이상과 희망이 넘치는 때 설렘 속에 맞선을 보았습니다. 평생의 배우자를 고르는 데 외모와 학벌보다 신앙심을 저울질하며 선택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불교 가문에서 천주교로 개종하며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신앙생활을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녜스 손에 이끌려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게 전부입니다. 내세울 만한 건 고작 꾸르실료 교육, 메리지 엔카운터(ME) 주말 부부교육, 레지오 마리애, 공무원 가톨릭 신자 공동체 양업회 회장뿐입니다. 하지만 신앙심 돈독한 아녜스는 본당 일이라면 열일 제치고 앞장서왔습니다. 구역 반장, 성가대, 레지오 마리애, 성경 이어쓰기, 사회 자원봉사 등에 수범을 보여왔습니다. 그 무엇보다 가족부터 선교하고, 아들 요셉의 복사 입단 때엔 가슴이 더없이 뿌듯해 했습니다. 유년 시절, 진천본당과 봉명동본당 복사단 활동을 하고, 이후 믿음의 불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요셉은 한때 장래 희망이 신부였습니다. 요셉과 함께한 복사 단원 몇몇은 사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요셉은 서울로 진학한 이후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요셉은 배우자와 외동딸·장인까지 선교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인 손녀 체칠리아는 서울 개포동본당 복사단에 입단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아빠에 이은 내리 복사입니다. 체칠리아는 성당 다니는 즐거움과 재미에 더불어 신앙심의 아름다운 꽃망울을 맺고 있습니다. 할아버지·할머니에게 “복사 단원들과 용평리조트 썰매장을 간다”면서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아이가 오갈 때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는 체칠리아를 보며 흐뭇한 보람과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갈수록 더욱 흉해지는 이 세상, 후손의 훈육에 복사단만 한 공동체도 흔치 않음을 새삼 느낍니다. 정종학(미카엘, 청주교구 진천성당) cpbc2024.03.12

동방 박사가 받은 선물 세 가지주님 공현 대축일 - 아기 예수께 ‘부르심, 식별, 놀라움’ 받아 세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와 마리아 앞에 황금과 유향, 몰약을 가져와 경배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OSV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11) 동방 박사들의 방문으로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빛으로 드러났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이를 경축하는 날이다. 공현(公顯)은 ‘공적으로 드러남’을 뜻한다. 성탄 구유도 아기 예수와 그를 보호하고 있는 마리아, 요셉 곁에 동방 박사들이 함께하면서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띤다. 신약 성경 본문에서 박사라는 단어는 마술사와 점성술사를 뜻하는 ‘마고스’(magos)로 나온다. 보통 성경에서 점성술사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마태오 복음서에 이들은 탁월한 지혜를 가진 이방 세계의 현자들로 나타난다. 즉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구원의 빛이 유다인을 넘어 이방 민족에게까지 비춘다는 사실을 뜻한다.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동방 박사를 통해 하느님의 보편 구원 계획이 보여지는 것이다. 동방 박사는 교회 전승 안에서 멜키오르, 발타사르, 가스파르로 알려졌고, 중세 때부터 성인으로 공경됐다. 이들은 황금·유향·몰약을 예물로 가져왔다. 황금은 가장 값비싸고 귀한 보물이다.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황금을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고귀함과 하늘과 땅의 왕이신 예수의 왕권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유향은 대사제로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뜻한다. 과거 거룩한 성전에서 제사를 올릴 때 태우던 향료였던 유향은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경건한 봉헌물로,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고 구세주를 찬미하는 행위다. 몰약은 장례예식에 쓴 약물로 그리스도 수난의 신비를 의미한다. 구세주의 사명을 상징하는 예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주님 공현 대축일 삼종기도 훈화에서 “동방의 현자들은 그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선물로 유명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먼저 ‘부르심’, ‘식별’, ‘놀라움’이라는 세 가지 선물을 받았다”며 “이는 우리와도 관련된 귀중한 선물”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인생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달았을 때, 많은 고통을 겪은 후 그분의 목소리를 식별했을 때, 또 그분께서 선사하신 놀라움을 깨달았을 때를 되돌아보고 잘 간직하자”고 당부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원래 1월 6일이다. 선교지인 한국 교회는 사목 편의에 따라 1월 1일 다음에 오는 2~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낸다. 그리고 성탄 시기는 ‘주님 세례 축일’로 끝난다. 다만 한국 교회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이 1월 7일이거나 8일인 때에는 대축일 다음 날인 월요일에 주님 세례 축일로 기념한다. 따라서 올해는 1월 8일에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성탄 시기를 마무리한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 박민규2023.12.27

서로를 인정하며 대화와 기도, 연대해야[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28)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가 함께 할 수 있는 것 사목자와 목회자 사이의 형제애적 관계는 서로 친교의 영성을 증진하는 으뜸가는 수단이다. 또한,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해서는 공동선 추구를 위한 공동체 간의 연대, 서로 다른 심신과 영성의 다양한 전통을 배우고 인정하는 일도 중요하다. 일치 운동은 영적 일치를 위한 기도와 전문 신학자들의 대화 외에도 그리스도 복음 정신을 실천하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협력과 연대에서도 중요하게 표현됩니다. 먼저 일반 신자들은 다른 전통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과 일상적인 우정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에 대하여 관대하고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각자의 고유한 전통에 계속 충실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전통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정서를 해치는 태도와 언행을 삼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은 일치 운동의 중요한 기초입니다. 다양한 전통에 속하는 사목자와 목회자들 사이의 우정 어리고 형제애로 묶인 관계는 친교의 영성을 증진하는 데에 으뜸가는 수단입니다. 사목자가 보여 주는 모범은 그리스도인 일치에 관한 문제에서 신자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가르침이 됩니다. 따라서 사목자는 지역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또는 전례력의 중요한 시기에 기도와 형제적 교류를 위하여 다른 전통의 성직자를 만날 수 있으며, 그들의 개인 생활이나 사목 생활에 중요한 일이 생기는 경우 연대성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계는 상호 신뢰와 관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사랑의 증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에 힘쓰는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도 일치 운동에 협력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각 교단의 주요 행사와 특정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를 서로 교환합니다. 그리고 상호 교단의 구성원이 함께 일하고 대화하며 분열과 오해를 극복하여 일치를 이루기 위한 기도와 활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동 증언과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직접 지원하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 존엄성의 올바른 존중을 위하여, 또는 평화 증진을 위하여, 또는 복음의 사회 적용을 위하여, 또는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학문과 예술을 진보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또 기아와 재난, 문맹과 빈곤, 주택난이나 불공정한 부의 분배와 같은 현대의 곤경에 대한 온갖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협력이 필요”(일치 교령 12항)합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찬미받으소서」 등을 통하여 강조한 생태계 파괴와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환경 보호 운동에 동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러 전통의 영적 지도자와 학자들의 저서와 가르침에서 뽑은 성경 해설을 출판하거나 성경과 관련된 영적 갈증 해소를 위하여 시청각과 전자 미디어 매체를 활용한 성경 공부 프로그램이나 자료를 함께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신학자들 사이의 대화도 중요합니다. 이들은 성경에 대한 공동 연구와 번역 작업 등을 통하여 상호 이해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분열 이전 시대에서 유래한 공통 전통을 재발견하거나 분열 뒤 수 세기 동안 다양한 전통에서 유래된 신학적, 영적 자원을 공동으로 연구하여 출판할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여기고 성모님의 동정성을 존중하는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그 밖의 다른 교회들은 성모님에 관한 전례 거행과 교리 선언, 기도와 신심에 반영된 초기 그리스도교의 증언을 함께 연구하며 서로 다른 심신과 영성의 다양한 전통을 배우고 인정하는 일을 장려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서로의 교회에서 인정하는 영적 스승들과 성인들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문헌을 공동 연구하면서 영적 쇄신의 원천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cpbc2023.10.11
[부음] 시사평론가 최영일씨 선종본지를 비롯해 다양한 매체에서 맹활약한 시사평론가 최영일(빈첸시오, 공공소통전략연구소 대표)씨가 16일 대장암 투병 끝에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선종했다. 향년 57세. 1966년 서울에서 출생한 고인은 서라벌고·인하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한림대·연세대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2009년께 시사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주요 일간지에 칼럼을 기고하고, 종합편성채널 시사프로그램 패널로 출연하는 등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2015년부터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앵커를 맡으며 방송 진행자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한국정치평론가협회 부회장, 경희사이버대 영상홍보학과 겸임교수, (사)한국인터넷전문가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코로나19시대의 새로운 시작’이란 주제로 열린 특별대담 참석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양주열 신부, 유환민 신부, 최영일 대표, 권종오 기자 cpbc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과는 2019년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출연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 cpbcTV 코로나19 특별대담에 패널로도 참여했다. 2020~2023년 가톨릭평화신문 시사진단 필진을 맡아 예리한 통찰력과 재치로 독자들에게 교회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기도 했다. 2021년 6월 대장암 진단을 받고 암 투병을 시작한 고인에게 신앙은 큰 버팀목이었다. 평소 자신의 SNS에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사진, cpbcTV 매일미사 화면을 자주 게재하기도 했고, 지난 12월에는 병자 영성체를 받은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3호실에 마련됐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이학주2024.02.16

주님께 부르짖음[월간 꿈 CUM] 회개 _ 요나가 내게 말을 건네다 (15) “주 저의 하느님.”(요나 2,7) 구약성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집트를 탈출한 후 40년 광야의 혹독한 고난의 시간이 끝나갈 무렵, 약속의 땅을 지척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킬 것을 다짐받으며 자신이 그토록 희망을 걸고 애타게 부르고 또 불렀던 하느님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신명 4,7) 사실 우리는 하느님을 간절히 부르지 않았습니다. 인생 저 밑바닥에서 목이 타도록 하느님을 애타게 찾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거나 곁에 계시지 않는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분을 내 인생을 간섭하거나 통제하시는 억압의 하느님으로 생각하며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는 주님께 아뢰어라. ‘나의 피신처, 나의 산성이신 나의 하느님, 나 그분을 신뢰하네.’ ‘그가 나를 따르기에 나 그를 구하여 주고 그가 내 이름을 알기에 나 그를 들어 높이리라. 그가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환난 가운데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며 그를 해방하여 영예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오래 살게 하여 흡족케 하고 내 구원을 그에게 보여 주리라.’”(시편 91,1–2; 14–16) 이 시편의 말씀을 이현주 목사님은 이렇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 시는 함부로 읊을 게 못 된다. 지금 ‘환난 중’에 있는 자만이 이 시를 읊을 자격이 있다. 자칫 잘못 읽으면, 천만 이웃이 고통을 당해도 나만 끄떡없으면 된다는 고약한 불감증을, 저주받을 이기심을 키워줄 뿐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의 파도 속에서 마지막 목소리로 부르짖는 자에게만 이 시는 힘차고 아름다운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지금 환난 중에 있는 자에게만 이 시는 진실이다.”(이현주,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생활성서, 41쪽) 진실로 성경의 의인들은 모두 절망 가운데서도, 유혹 중에도, 시련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또한 천국의 자랑스러운 성인 성녀들도 자신들의 삶에서 인간의 부족한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애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주님 말씀을 분명히 들었고, 그 말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처음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 천주, 내 주 하느님을 부른다 함이 어인 말인고, 그를 부름이 내 안으로 불러 모심이거늘? 내 하느님이 내게 오실 자리가 내 안에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최민순 역, 바오로딸, 24쪽) 그러나 그토록 하느님을 찾고 부르던 성인께서 드디어 만난 하느님 사랑의 기쁨을 이렇게 벅찬 감동으로 고백합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같은 책, 283쪽) 현대인들의 가장 큰 병은 여러 전염병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부르지 않는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실로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 아닌 여정이 없었는데, 우리가 주님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고백처럼 주님을 부른다 함은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인데, 우리는 주님을 애타게 부르지도, 모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고난과 고독의 외로움을 온몸으로 떠 안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요나가 또다시 말을 건네옵니다. “고통의 심연 속에서 숨조차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제가 붙들 수 있는 희망은 주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놓아 울부짖었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그리고 저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사랑과 용서와 희망과 구원의 하느님을 만난 것입니다.” 배광하 신부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 바오로) cpbc2024.02.26

정 이야기[월간 꿈 CUM] 꿈CUM 신앙칼럼 (18) 심정(心情)이 착잡하다. 가만히 추정(推定)해 보니 매정한 세상 때문인 것 같다. 무정(無情)한 사람들을 바라보면 정(情)나미 떨어진다. 인정(人情)은 사라졌고, 박정(薄情)스러운 말로 타인을 공격하는 세태다. 왜 이렇게 냉정(冷情)할까. 왜 미운 정(情)만 남았을까. 왜 이토록 마음씨(심정, 深情)가 비뚤어지고, 감정(感情)이 메말랐을까. 우리는 원래 이런 민족이 아니었다.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사람들이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情)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콜로 4,6)라는 성경 말씀을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해 오던 민족이었다. 특히 과거 순교자들은 정(情)이 넘쳐서 하느님의 복음을 세상과 나눴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쳤다.(1테살 2,8 참조)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가슴 뭉클하게 하는 정(情)이 무수히 많다. 친구 사이의 우정(友情), 사랑하는 연인들의 애정(愛情), 민족과 나라를 향한 충정(忠情), 그리고 신뢰의 정(情), 흠모의 정(情), 석별의 정(情), 고운 정(情), 첫정(情), 풋정(情), 잔정(情)…. 이렇게 우리는 이미 가진 정(情)이 많다. 그 옛정(情)을 회복해야 한다. 어떻게? 가장 위대한 정(情)을 기억해 내면 쉬울지도 모른다. 정(情) 중의 정(情), 정(情)의 최고봉은 모정(母情)이 아닐까. 모정(母情)만큼 위대한 것이 또 있을까. 모정(母情)은 정(情)의 고갈로 바짝 마르고 갈라진 우리 마음을 회복시킬 것이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매정한 세상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다. 그 모정(母情)을 넘어서는 모정(母情)이 있다. 우리는 모정(母情) 중의 모정(母情), 모정(母情)의 최고봉은 마리아 모정(母情)이라고 고백한다. 성모 성월이다. 거룩한 어머니(聖母)의 정(母情)을 생각하니 편안해진다. 그 품에서 잠시만 머물렀을 뿐인데, 세상의 그 어떤 무정(無情)함도, 박정(薄情)스러운 공격도 나를 흔들지 못한다. ‘망운지정’(望雲之情)이라는 말이 있다. 구름을 바라보며 그리워함, 즉 타향(他鄕)에서 고향(故鄕)에 계신 부모(父母)님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의 타향살이가 끝나고, 하느님 나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날, 거룩한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정(情)겹게 안아주실 것이다. 글 _ 우광호 발행인 원주교구 출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94년부터 가톨릭 언론에 몸담아 가톨릭평화방송·가톨릭평화신문 기자와 가톨릭신문 취재부장, 월간 가톨릭 비타꼰 편집장 및 주간을 지냈다. 저서로 「유대인 이야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성당평전」, 엮은 책으로 「경청」 등이 있다. cpbc2024.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