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하느님의 봉사자가 된 까마귀베네딕토 성인 생명의 은인베네딕토 성인은 까마귀 덕분에 독살의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전해진다. 베네딕토 성인이 활동했던 이탈리아 수비아코 수도원 입구.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잘 잊어버리는 사람에게 흔히 "까마귀 고기를 먹었냐?"고 농담을 한다. 까마귀가 건망증이 심하다기보다는 "왜 까맣게 잊었느냐"는 뜻으로 발음의 유사성에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까마귀는 작은 동물을 공격해 눈을 쪼아먹고 썩은 고기를 즐겨 먹는 새다. 본래 까마귀는 잡식성으로 인가 부근에 집을 짓고 곡식이나 열매, 작은 짐승 등을 주로 먹는다. 까마귀는 온몸이 검은 색깔이고 '까욱까욱'하고 우는 거친 울음소리도 유쾌하지 않아 흉조로 알려졌다. 그래서 산촌과 어촌에 사는 사람들은 주위에서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다며 부지런히 쫓는다. 반대로 북미 인디언이나 게르만 족은 까마귀를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가진 새로 귀하게 여겼고, 영국 황실에서는 까마귀를 길조로 여겨 사육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까마귀를 결코 길조로 여기지 않지만 옛날 설화에 등장하는 까마귀는 흉조가 아니었다. 견우와 직녀 설화를 보더라도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오작교를 만들어 주는 것은 까마귀와 까치다. 까마귀와 인연이 깊은 인물은 베네딕토 성인(480~547년)이다. 성 베네딕토는 1964년 10월24일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년 재위)에 의해 유럽 전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분이다. 그를 상징하는 문장은 깨어진 컵, 까마귀, 종, 그리고 숲 등이다. 그의 문장 안에 까마귀가 포함돼 있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베네딕토 성인은 이탈리아 수비아코에서 3년 동안 동굴 생활을 하며 은수자 로마누스가 날라다 주는 음식을 먹으며 지냈다. 그의 성덕이 주위에 널리 알려져서, 그는 비코바로(Vicovaro)에 있는 한 수도자 공동체로부터 그들의 원장이 돼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수락했다. 그런데 이후 그들은 베네딕토 성인의 엄격한 규칙에 반대해 마침내 성인을 독살하려고 공모한다. 베네딕토 성인이 독이 든 포도주 잔에 십자성호를 긋는 동안 잔이 깨지고 독이 든 빵을 먹으려는 순간 까마귀가 날아와 그 빵을 물고 가 목숨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베네딕토 성인은 다시 수비아코로 돌아와서 수도원을 세웠고 이곳은 당시 그리스도교 영성과 학문의 중심이 됐다. 성경에서 까마귀는 검은 깃털과 동물의 시체를 먹는 습관(잠언 30, 17)으로 부정하고 가증한 흉조로 전해진다. 율법에서 까마귀는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해 유다인들이 먹는 것을 금하고 있다(레위 11, 15). "올빼미와 고슴도치가 그곳을 차지하고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리라. 그분께서는 그 위에 '혼돈의 줄'을 펴시고 '불모의 추'를 내리시리라"고 해 저주받은 땅을 까마귀가 머무는 땅으로 언급했다(이사 34, 11). 까마귀가 활동하고 있는 땅은 썩은 시체가 많은 땅이고 저주받은 장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까마귀가 사람에게 유익한 도구,'하느님의 봉사자'로 사용된 예도 있다. 그중에도 곤경에 처한 엘리야 예언자에게 까마귀가 음식을 날라다준 이야기는 유명하다. 엘리야는 아합 왕을 피해 주님의 말씀대로 요르단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다. 그런데 까마귀들이 엘리야에게 아침 저녁으로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1열왕 17, 6 참조). 한편 까마귀는 새 중에서 가장 효성이 지극한 새로 알려져 있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지극한 효성을 일컫는 말 가운데 ‘반포지효 (反哺之孝)란 고사성어가 있다. 반포란 까마귀 새끼가 자란 뒤에 늙은 어미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준다는 뜻이다. 또한 새끼 까마귀는 어미 까마귀가 앉은 윗가지에 앉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의 눈을 까마귀가 쪼아 먹는다(잠언 30, 17)고 했는가보다.cpbc2006.08.09

13-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석류제사장 옷에 금방울과 주렁주렁◀석류는 예로부터 성스러움과 아름다움, 축복의 상징이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감추려고 감추려고 애를 쓰는데도 어느새 살짝 삐져나오는 이 붉은 그리움은 제 탓이 아니에요 푸름으로 눈부신 가을 하늘 아래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터질 것 같은 가슴 이젠 부끄러워도 할 수 없네요 아직은 시고 떫은 채로 그대를 향해 터질 수밖에 없는 이 한 번의 사랑을 부디 아름답다고 말해주어요. 이해인 수녀의 시 '석류의 말'이다. 이 시처럼 석류는 낭만적 과실인 것 같다. 석류는 예로부터 생명의 과일, 여성의 과일로 불리운다. 무덥고 오랜 장마에도 유독 석류만은 싱싱하고 힘차게 아름다운 꽃을 잘 피운다. 석류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서북부에 자생하던 식물로 유럽으로 오래 전에 건너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는 과실이 됐다. 석류는 이집트에서도 흔하고 귀한 과일이었다. 이집트에서는 B.C. 2000년께 이미 재배했고 신성하게 생각했던 식물이다. 석류의 아름다움은 아무래도 가을에 탐스럽게 잘 익은 열매에 있다. 새빨간 씨가 달고 신 즙이 있는 껍질에 싸여 빽빽하게 박혀 있다. 석류 씨는 구약의 솔로몬 시대부터 갈증을 해소하는 청량음료를 만드는 데 널리 쓰였다. 석류 열매는 촘촘히 박힌 보석 주머니 같다고해서 사금대(沙金袋)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꽃과 열매가 달려있는 기간이 4~5개월이나 된다. 봄철 잎이 돋을 때는 붉은 빛을 띠고 여름에 꽃이 피어 가을에 붉게 익는다. 오늘날에도 과일즙으로는 술을 빚기도 하고, 씨는 말려서 과자를 만든다. 덜 익은 열매 껍질은 빨간색 염료로 쓰기도 한다. 모세는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에 각 지파에서 한명씩 뽑아서 정탐꾼을 보냈다(민수 13, 1-24). 에스콜 골짜기에서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둘이서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가지고 돌아왔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내려 주신, 축복한 일곱가지 식물 중 하나가 석류다. 성경에서도 석류는 성스러운 식물로 등장한다. 제사장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 입는 에폿에 딸린 겉옷을 만들때 자락 둘레에는 자주와 자홍과 다홍 실로 석류들을 만들어 달고, 석류 사이사이에는 돌아가며 금방울을 달도록 했다. 그리고 겉옷 자락을 돌아가며 금방울 하나에 석류 하나, 또 금방울 하나에 석류 하나씩을 달았다(탈출 28, 31-38). 그래서 아론이 예식을 거행할 때 이 옷을 입어 성소에 들어가는데 방울 소리가 울려 죽지 않으리라고 한 것을 보아도 이스라엘에서는 석류를 성스런 나무로 생각했다. 석류는 아름다운 여인의 볼에 비유되기도 하고(아가 4, 3), 석류의 많은 씨는 풍요를 상징하며(아가 4, 13), 달콤한 즙은 사랑의 꿀(아가 8, 2)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석류가 가장 많이 쓰인 곳은 건축 장식이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과 왕궁장식에 석류나무를 사용했다(2열왕 25, 17; 2역대 4, 13). 석류 열매의 풍작과 흉작은 하느님의 복과 재앙을 상징해 석류 열매에 비유했다(하까 2, 19). 석류는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희망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석류는 터키, 중국, 그리스 등지에서는 다산을 뜻하는 과일로 자손의 번영을 의미하기에 결혼축하 선물로 보내는 풍습이 있다. 터키에서는 결혼한 신부가 잘 익은 석류를 땅에 던져서 쏟아지는 씨의 수가 장차 낳을 자식의 숫자를 나타낸다고 믿는 풍속도 있다. 이처럼 옛날부터 석류는 축복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석류를 심으면 자손이 흥하고 부귀가 늘 함께한다고 해 양지바른 정원에 즐겨 심었다. 또 잘 익은 석류에서 씨앗이 튀어나오는 모양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이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석류의 꽃말은'바보' 또는 '우둔함'이라 하니 이래저래 재미있는 나무다.cpbc2006.08.16
2- 인간이란주님이 육체, 영혼으로 빚어낸 인간이동익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생명과학 발달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많은 토론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인간 배아가 인간인가 아닌가, 인간 생명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에 대한 토론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신적 측면으로만 설명되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육체는 영혼 없이는 무의미하고 영혼의 움직임 또한 육체와 분리해서 설명할 수는 없다. 즉 인간에 대한 명확한 진리 하나는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통합을 이루는 실체적 단일체"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에 따라 당신과 닮은 사람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진흙으로 사람을 빚은 다음 코에 입김을 불어 넣음으로써 사람이 생겨났다고 가르친다 (창세 1,26-27; 2,7 참조).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돼 신비롭게 통합을 이루는 인간 존재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돼 있는 인간은 이렇게 생겨났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을 관찰해 보면 이런 점은 더 쉽게 이해된다. 물질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육체는 끊임없는 성장과 노쇠로 세포가 분해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일정한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육체는 영혼과도 아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어 인간을 생동감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의 생명력, 정신적 능력, 초자연적 활동 그리고 영원불멸성 등으로 영혼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이 또한 인간의 육체와 분리시켜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내가 생각할 수 있고 선한 일을 선택해 행동할 수 있다는 것, 또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 그리고 육체는 제한을 받지만 마음은 한껏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영혼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처럼 육체와 영혼은 인간 안에서 서로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결합되어 통합된 단일체를 형성한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 곧 '물질적인 육체'와 생각하고 선택하고 사랑하는 능력인 '정신적인 영혼'의 통합적 단일체인 것이다. 오늘날 생명윤리 분야의 논쟁 가운데 인간 배아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도 단순히 생물학적 관점에서만 다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 2,7).cpbc2006.05.23

평화 TV '교회음악콘서트' 출연한 음악가 가족"신앙심도, 음악도 선친께 물려받았죠"이복련(가운데)씨가 딸 전미영씨, 사위 이동우씨와 함께 고 전봉초 교수 사진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전미영(헬레나, 서울 반포본당, 한국교원대 교수)씨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자, 남편 이동우(세바스찬, 울산대 교수)씨와 동생 전소영(요안나, 서울대 강사)씨의 첼로 연주가 이어진다. 거기에 오빠 전성환(클레멘스, 대구가톨릭대 교수)씨의 성악까지. 4월19일 평화방송 TV '교회음악콘서트'에 출연한 음악가 가족은 고 전봉초(그레고리오, 1919~2002)씨 자녀들이다. 매년 추모 음악회를 열어 온 자녀들은 올해는 교회음악콘서트 출연으로 음악회를 대신했다. 첼리스트였던 고 전봉초 서울대 교수는 1965년에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창단한 국내 클래식 음악의 대가이다. 아버지 피를 이어받은 자녀들은 요즘 자기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음악이 최고의 대화"라는 전씨 가족. 그렇지만 음악이 전부는 아니다. 고 전봉초씨 부인 이복련(클라라)씨는 "남편은 매일 아침 구노의 아베 마리아로 아침기도를 바쳤다"며 "팔순이 넘어서까지 성경필사를 하는 등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씨도 레지오 마리애 간부 12년, 성모회 회장 10년 등 신앙생활에 열심이다. 매일 아침ㆍ저녁 성무일도와 묵주기도 20단은 기본이고, 6년간 준비해 2005년에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봉헌회에 종신봉헌도 했다. 교리교사, 성가 반주 등 봉사를 생활화해 온 자녀들 역시 신앙심으로 똘똘 뭉치긴 마찬가지. 월~금요일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일만 되면 약속이라도 한듯 반포성당에 다같이 모여 아침 9시30분 미사에 참례한다. 개신교 목사 할아버지와 장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위 이동우씨는 결혼하면서 천주교로 개종했다. 개신교보다 천주교 음악이 더 좋다는 사위를 보며 이씨는 "성당에 다니는게 너무 예쁘다"며 대견스러워하면서도 "이제는 성당 음악뿐 아니라 수도회 그레고리오 성가를 접할 때"라며 이씨의 신앙심과 음악이 한 단계 발전하기를 희망했다. 전미영씨는 "어려움을 겪다가도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를 생각하면 내가 은총 속에 살아왔다는 걸 깨닫게 된다"며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 덕"이라고 감사해했다. "항상 감사기도가 절로 나온다"는 이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봉사하며 하느님 사랑 속에서 잘 살다 가고 싶은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김민경 기자 mksophia@pbc.co.krcpbc2006.05.04
루가복음 해설5 루가복음 해설5 박영식 신부 지음/성바오로/9000원 ------------------------------- 성바오로출판사 '성경의 세계' 총서 시리즈 중 루가복음 해설 다섯번째 책인 박영식(야고보, 대구대교구) 신부의 「루가복음5」가 출간됐다. 성경의 세계 시리즈 중 신약해설서로는 8번째권. 제5권은 루가복음 16장1절 '불의한 관리인의 비유'부터 시작해 21장 38절 '성전에서 가르치신 예수'까지 다룬다. 이 해설서 역시 각 본문이 마르코복음, 「예수 어록」과 루가복음사가의 특수자료에서 나온 것인지, 그가 편집한 것은 무엇인지 살핀다. 루가는 마르코복음을 약 35%정도 재생했다고 지은이는 밝힌다. 이어 각 본문 뜻을 밝히기 위해 문학양식을 살피고, 복음사가가 본문에서 제시한 생활상황을 파악한다. 지은이는 독자가 루가복음의 메시지를 깊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복음사가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울러 역사비평 방법에 따라 복음이 쓰인 시대상황과 역사, 문화, 관습, 사고방식을 파악한다. 루가복음사가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며 예수 가르침을 등불로 삼고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었음을 전한다. 루가는 또 오늘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에 뿌리내린 믿음과 사랑, 희망을 살며 병자와 약자, 소외된 이, 죄의 지배를 받는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선포하라고 종용한다. 지은이는 독자들이 복음사가의 필치를 가급적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본문을 직역했고 루가복음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을 자주 인용했다. 오세택 기자cpbc2005.11.02
69-신바람 신앙을 꿈꾸며잃어버린 '은총' 되찾기 오늘날 선교현실을 극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40대 이상 연령층에서는 '선전', 40대 미만 연령층에서는 '부진'으로 결론 내려진다. 최근 2005년 인구조사 결과가 발표돼 지난 10년간 의외로 불교와 개신교 측보다 가톨릭 신자증가율이 높게 나타난 것이 고무적으로 느껴지지만, 40대 미만 연령층에서는 가톨릭의 부진이 어제 오늘 관찰된 바가 아니다. 우리는 한시도 자만하지 말고 언제나 겸허하게 부족함을 메우려는 노력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왜 가톨릭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일까? 필자는 그것을 가톨릭의 의무신앙 또는 율법신앙 분위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늘날까지 가톨릭 신앙은 '의무' 신앙이었다. 이 '의무' 신앙은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제2의 물결' 곧 산업혁명 시대, 나아가 모더니즘 시대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시대의 중심 덕목이 의무(duty)였기 때문이다. 대부분 직장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작업자(worker)로 규정하던 이 시대 사회에서는 의무에 충실한 사람이 성공하고 존경받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제3의 물결 곧 정보혁명의 시대,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람들이 선호하는 중심 덕목은 이제 의무가 아니라 재미(entertainment, joy)다.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를 '일을 즐기는 자'(player)로 여긴다. 의무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고자' 또는 '즐기면서' 일하는 것이다. 이 성향은 특히 본격적 포스트모더니즘 세대라 할 수 있는 40대 미만에게서 강하다. 요컨대,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40대 미만 젊은층에게 버림받는 이유가 바로 '의무' 신앙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가톨릭', '성당'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부담', '엄격함', '딱딱함' 등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가 미래에 살아남고자 한다면 이런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제는 '성당' 하면 생각나는 단어가 '신바람 나는', '즐거운', '웃음이 가득한'이라는 이미지가 돼야 한다. 종래의 '의무' 신앙이 '신바람' 신앙으로 틀바꿈, 탈바꿈을 해야 한다. 21세기 종교가 이미 시장논리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피터 버거가 말하는 '종교시장'의 치열한 경쟁에서 가톨릭교회가 살아남으려면 신자를 '소비자'로 대접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소비자 구미는 까다롭고 냉정하다. 이것은 종교를 선택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족과 감동이 없는 종교에 그들은 남아 있지 않는다. 과감히 버린다. 우리는 이 사실을 40대 미만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가톨릭교회는 신 고객(=예비신자)에게 6개월~1년의 딱딱한 강의식 교리, 의무 중심, 형식과 행위 중심의 교육으로 일관해 왔다. 그런데 다른 종교들은 젊은층을 대상으로 해서 행복클리닉, 평화프로그램, 행복한 가정, 치유, 상담프로그램 등으로 21세기 소비자 욕구와 취향을 정확히 인식하고 준비해 왔다. 가톨릭교회도 변해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신앙 아이템을 개발해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신바람을 일으키려면 신자들 '속'을 알아야 한다. 어디를 건드려야 신바람이 날지를 알아야 한다. 신자들이 어디를 아파하고 어디를 가려워하는지 잘 알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꼭 당부하는 말이 있다. "강론을 준비할 때 소재를 구하려고 책을 뒤지지 마라. 대신에 꼭 읽어야 할 것이 있다. 읽어야 할 것은 신자들이다. 신자들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힘들게 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좌절시키는지, 그들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등을 읽어라. 그리고 그 답을 그날 복음에서 찾아주려고 노력하라." 요즘 신자들이 마음으로 원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지역마다 다를 것이다. 본당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또 사람마다 제 각각일 것이다. 이것들을 알아낼 수 있다면, 아마도 그 속에 신바람의 비밀이 있지 않을까 한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신바람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길은 '은총'을 재발굴하고 중재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은총은 하느님에게서 '거저' '공짜'로 주어진 영적 선물을 말한다. 이 은총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 고유의 것이다. 물론 그 약속을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모체격인 유다교의 경전 구약성경에서 발견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물과 젖을 사서 마셔라"(공동번역 이사 55, 1) 그렇다. '돈없이', '값없이' 누리는 구원의 선물,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관점에서 신앙을 새롭게 조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여기에 물이 있다」이다. 이 책에서는 '의무'라는 단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의무라는 단어를 '은총'이라는 단어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가 아니다. 신앙생활의 맛을 좀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의무를 뒤집으면 거기서 은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이 책을 많은 독자들이 사랑해 줬다. 나아가 전국의 많은 본당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위한 교재로 사용해 주고 있다. 이후 필자는 교회생활에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던 은총을 다시 찾아 나섰다. 그 결과 우리가 매일 무덤덤하게 대하는 미사에서, 성경에서, 기도에서, 성사(聖事)에서, 십계명(十誡命)에서 빛나는 '은총'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밭에 뭍힌 보물」이다. 읽어본 이들은 신앙의 재미와 신바람을 느끼게 해줘서 고맙다고들 한다. 곳곳에서 희망을 본다. '은총'이라는 명약이 듣는다는 확신을 얻는다. 필자는 신부님들께서 강론시간에 '의무'라는 용어 대신에 '은총'으로 신자들을 위로해 주었으면 한다. 의무를 얘기하지 않아도 교무금이 늘고, 교회 헌신이 좋아진다는 기적을 체험하셨으면 한다. '은총'에 눈을 뜨도록 조금만 도와주면, 의무를 얘기하지 않아도 신자들이 알아서 바르게 살고, 사회에서도 빛과 소금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으셨으면 한다. 충정이다. 희망은 있다. 이제껏 놓쳐왔던 '은총'에 눈뜨는 신자가 하나 둘 늘어간다면 교회 밖 사람들이 이를 보고 하나씩 둘씩 다시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이사 2, 2-3).cpbc2006.06.15

성사와 영원한 삶(생명)손희송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교수)일곱성사 가운데 가장 먼저 받게 되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은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신다.평화신문 자료사진 우리는 미사 때마다 사도신경을 바치면서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영원한 삶은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고 영원하신 하느님만이 가능케 한다. 즉 영원하신 하느님과 내가 완전히 일치하게 되면 영원히 살 수 있다. 요한묵시록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21, 3-4) 영원한 삶이란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삶이다. 이런 삶은 지상 삶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다.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삶으로, 육신 생명이 끝난 다음에야 가능하다. 현세 삶은 영원한 삶과 전혀 관련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영원한 삶은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통해 가능한데, 이 지상에서도 하느님과 일치가 가능하다. 그분은 성경 말씀과 성사 안에 현존하시면서 우리 곁에 계신다. 말씀과 성사를 통해 우리 곁에 계시는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비록 우리의 죄와 나약함 때문에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하지만 어느 정도 일치는 가능하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완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 12)라고 했다. 성사는 하느님 사랑의 손길, 즉 하느님 현존을 아주 가깝게 전해주는 예식으로서 성사를 통해 주님과 좀 더 긴밀하게 일치를 이룰 수 있다. 이 일치를 통해 이미 세상에서 영원한 삶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고 슬픔과 괴로움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7성사 중에서 제일 먼저 받는 성사는 세례성사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은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신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 15)로 부르게 된다.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면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무한한 사랑을 받게 된다. 하느님에게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마음에 큰 영적 재산이 되어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구해준다. 세례성사를 통해 받게 된 하느님의 큰 사랑이 성체성사를 통해 빵과 포도주 형태로 거듭 새롭게 우리에게 주어진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성체에는 이런 예수님이 현존하시고, 영성체로 그분을 모실 때마다 하느님 사랑을 듬뿍 받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죄인인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고, 부활하시어 계속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이 힘으로 악과 유혹에 거슬러 투쟁할 수 있고, 마지막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또한 고해성사는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죄는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을 안겨주는 세력이다. 이런 죄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죽은 다음에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룰 때 가능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고해성사를 통해 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해성사에는 우리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는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고, 그분 용서의 손길을 통해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다시 자유롭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성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신과 일치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이끄신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전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우리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맛볼 수 있도록 주님 도구가 돼야 한다. 특히 능력 없는 사람, 병든 사람, 나이 든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러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냉대하는 이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민다면 교회는 사회와 대조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정리=남정률 기자 njyul@pbc.co.krcpbc2006.09.06

'성모승천 대축일'과 '성모승천' 교리하느님 영광 보여주는 구원의 표징성모 승천 교리는 장차 우리도 받게 될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는 구원의 표지다. 그림은 니콜라스 푸신의 `성모 승천`(1626년, 워싱턴국립갤러리). 그림 제공=한국교회사연구소 가톨릭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원죄없이 잉태'되신 분으로 '거룩한 동정녀'이며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충만한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아 '승천'했음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다. '원죄 없는 잉태'가 구원의 첫 열매인 성모 마리아 신비의 출발점이라면 하늘에 올림을 받은 '승천'은 성모 마리아 신비의 종착점이다. 원죄 없이 태어난 분은 원죄에 물든 이들과 똑같이 죽음을 맞아 부패의 무덤에 머물 수 없다. 따라서 성모 승천은 마리아가 근원적으로 구원받은 분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장차 우리도 받게 될 하늘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므로 영원한 생명을 믿는 신자들에게 구원의 표지이다. 주지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승천과 마리아 승천은 확연히 구별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신적 권능으로 스스로 승천했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힘이 아닌 하느님 능력에 의해 하늘로 들어올림를 받았다. 그래서 성모 승천을 '몽소승천'(蒙召昇天), '피승천'(被昇天)이라고도 불렀다. 성모 승천은 마리아가 구원 역사 안에서 거룩한 동정녀이며 하느님 어머니로서 지니는 '특권'이다. 그러나 이 특권은 우리 자신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우리 자신이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닮으면 닮을수록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기 때문이다. '성모 승천'이 신앙 교리로 선포된 것은 반세기에 불과하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년 재위)는 1950년 11월1일 희년의 '모든 성인의 날' 축일을 맞아 사도적 헌장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해 "원죄없으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는 지상 생애의 여정이 끝난 다음 그 영혼과 육신이 천상의 영광 안에 받아들여졌다"며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군주들의 주님이시며(묵시 19,16)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교회헌장」 59항)고 고백했다.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거룩한 동정녀의 승천은 당신 아들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것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한 것"(966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는 십자가 아래 계신 마리아(요한 19,25-27)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성령이 오시길 기다리는(사도 1,14) 모습 이후 성모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그러나 초기 교회 공동체부터 성모 마리아가 지상생활을 마친 후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 영광으로 하늘로 들어올려졌다고 믿어왔다. 이 전승을 뒷받침하는 한 사건이 있다. 칼체돈 공의회(451년)를 소집한 로마의 마르치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의 세례자 유베날리에게 성모의 유해를 인도할 것을 요청했지만 성모가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 인근 발케르네에 성모 승천 기념 경당을 세웠다. 교회는 4세기께부터 성모 승천 축일을 기념해 왔다. 5세기 초부터 예루살렘에서는 해마다 8월15일이면 '하느님의 어머니(Teotokos)' 축일을 지냈다. 이 축일은 6세기께 '성모 안식 축일(Dormitio-일시적으로 잠에 떨어짐)'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8세기에 들어 '성모 승천 대축일'로 확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울러 1970년 「미사경본」 개정에서 성모 승천 대축일은 전야 미사가 있는 유일한 마리아 축일이 돼 마리아 축일 중 가장 중요한 날로 자리잡게 됐고, 한국 교회는 이 날을 의무 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편 한국 천주교 용어위원회는 2000년 「가톨릭교회 공식 용어집」을 간행하면서 '몽소승천', '피승천', '소천' 등의 말이 모두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 '성모승천'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06.08.09

1- 일요일엔 성당에 꼭 가야 하나요?주간 첫날인 일요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주님의 날이다. 사진은 주일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신자들. 평화신문 자료 사진 평화신문은 이번호부터 '교회 상식 교리 상식'을 시작합니다. '교회…'는 성당을 처음 찾는 예비신자들은 물론 이미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일반 신자들에게도 가톨릭 교리 및 교회 생활과 관련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을 중심으로 엮어 갑니다. Q. 일요일엔 성당에 꼭 가야 하나요? 나이도 50줄에 들어섰고 이제는 성당에 다녀볼까 하는데 한 가지가 걸립니다. 왜 성당에는 꼭 일요일에만 가야 합니까. 가족과 주말 여행도 떠나고 싶고, 직장 일로 바빠서 만나지 못한 친구들도 만나야 하고, 밀린 집안 일도 해야 하고, 아무 일도 않고 푹 쉬고도 싶은데, 일요일마다 성당에 가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습니다. 꼭 일요일에 성당에 가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 천주교 신자들은 일요일마다 성당에 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바칩니다. 이것을 미사에 참례한다고 하지요. 그리고 일요일 미사 참례는 천주교 신자라면 지켜야 할 중요한 의무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 우리는 보통 한 주간 시작을 월요일로 봅니다. 그래서 토요일과 일요일을 주말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달력을 보면 예외 없이 모두가 일요일부터 시작합니다. '일-월-화-수-목-금-토'로 한 주간이 이뤄지지요. 그래서 일요일은 주간 첫날이 됩니다. 우리 통념과는 맞지 않지만 달력이 이를 말해 주지요. 이렇게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한 주간으로 지내는 것은 서양 그리스-로마 세계 때부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7일을 한 주간으로 정해 지내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잘 알 수 있는데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6일 동안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쉬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날을 안식일이라고 하는데 오늘의 토요일에 해당하지요. 그런데 성경은 하느님께서 이렛날인 안식일에 쉬셨을 뿐 아니라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으시면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법으로 십계명을 주십니다. 그 중 세 번째 계명이 바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 20,8-11). 이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은 안식일 계명을 철저히 지켜왔습니다.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해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만, 하느님 의 창조사업을 기념해 쉬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거룩하게 지내라는 게 안식일 계명의 핵심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렇게 일곱째 날인 토요일을 안식일로, 쉬면서 거룩하게 지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여서 이스라엘에 가면 유다교인들은 토요일을 쉬는 날, 곧 안식일로 지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7일 안식교 신자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내지요. "주님을 위한 거룩한 안식의 날"인 이렛날인 토요일이 지니는 의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가 탄생과 함께 여덟쨋날 곧 주간 첫날인 일요일로 옮겨 가면서 그 의미가 새롭고 풍부해집니다. 안식일 다음날 곧 주간 첫날은 바로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을 주님의 날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일요일을 주일(主日)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일은 다름 아닌 주님의 날을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지요. 주간 첫날인 주일은 이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에서 부활하신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첫번째 창조(천지창조)와 연관지어 새로운 창조를 가리킵니다. 유다인들이 하느님 창조사업을 기념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곧 새로운 창조를 기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 날을 주님의 날로 경축하며 지내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날 함께 모여 주님 부활을 기념하면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사도 2,42)했습니다. 곧 주님 부활을 경축하면서 성찬례를 거행한 것입니다. 이 성찬례가 오늘날 천주교 신자들이 주일에 성당에서 참례하는 '미사'입니다. 이제 왜 천주교 신자들이 다른 날보다도 주일에 성당에 가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복음을 선포하는 일도 헛된 것이고 그리스도인들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1 코린 15,13).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인 주간 첫날 곧 일요일에 성당에 가서 주님 부활을 경축하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시고 거행하라고 당부하신 성찬례(미사)에 참례해서 영적 힘을 얻고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아울러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날 일상 일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면서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지낸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일을 하라는 것과 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간 첫날인 일요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축제일입니다. 주님의 날인 주일이 또한 은총의 날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알아둡시다>>> 가톨릭교회의 법규는 신자들이 주일에 미사에 참례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합니다. 또 의무 축일에도 반드시 미사에 참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의무 축일이란 주일처럼 미사에 의무적으로 참례해야 하는 날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2월25일(예수님이 탄생하신 날, 예수 성탄 대축일)과 1월1일(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로 기리는 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그리고 8월15일(성모님께서 지상 생활을 마치고 하늘에 불려 올라가심을 기리는 날, 성모 승천 대축일)을 의무 축일로 지냅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이제부터는 '일요일' 대신 '주일'이란 말을 쓸 것을 제안합니다. 일요일은 '쉬는 날'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일은 주님의 날을 가리키므로, 거룩한 날, 은총의 날, 성당에 가는 날로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녀 신앙교육 차원에서라도 '일요일' 대신 '주일'이라고 표현합시다.cpbc2006.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