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믿음 수업'신뢰의 길'을 선택하라 의심들 때가 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실까?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 절망, 응답 없는 기도 등은 신앙인마저도 회의에 빠뜨린다.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세상의 모순, 자신에게 닥친 삶의 부조리 앞에서 우리는 질문한다. "하느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계신다면, 왜 나는 그분을 느끼지 못할까?", "만일 하느님께서 지진해일 재해가 발생하도록 허락하셨다면 어떻게 그분을 선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왜 하느님은 십대 청소년들이 자살하려고 할 때 막지 않으실까?",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악한 사람들이 전쟁으로 세상을 파괴하려는 것을 막지 않으시는 걸까?" …. 요즘 같아선 이런 항변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아마 없지 않을 것이다. "진정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신사(神祠)참배를 일삼는 일본이 경제부국이 되게 내버려 두시는가?", "하느님은 대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인사들을 벌하시지 않고 뭐하시는가?" 하느님에 대한 의심은, 우리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실존적(實存的) 의심과 진리 추구와 관련된 인식론적(認識論的) 의심으로 나뉜다. 방금 예로 든 의심들은 실존적 의심에 속하는 것들이다. 여기에는 너무 고독해서 생기는 의심(lonely doubts)이나 위기에 처할 때 생기는 의심(crisis doubts) 등이 있다. - 사람은 너무 고독해서 사랑을 확신하지 못할 때 하느님을 의심한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하느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극심한 의심 없이 그런 기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사람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도록 태어난 존재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연히 하느님 사랑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게 되는 것이다. - 또 사람은 위기가 닥칠 때 하느님 존재를 의심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될 때,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버림받게 될 때, 학교에서 학기말 시험을 망치게 될 때, 승진에서 누락될 때, 하던 사업이 잘 안 될 때 우리 심신은 극도로 신경과민이 되어 하느님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가?",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아무런 도움을 주시지 않는단 말인가?" 인식론적 의심이란 교리나 세계관과 관련하여 이치를 따져볼 때 생기는 지적 의심(intellectual doubts)을 말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있겠다. "어느 하느님이 맞는가? 창조신인가, 범신인가?", "만일 하느님이 선하시다면 지옥이라는 것이 정말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힌두교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요즈음 같아선 「다빈치 코드」를 읽고서 의심을 품는 이들도 제법 될 것이다. "이거 내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배운 '예수'에 대한 교리들이 전부 거짓말 아냐?", "성경 그거 날조 아냐?" 이래서 생기고 저래서 생기는 것이 의심이다. 믿음 생활에는 의심이 따라다니게 되어 있다. 그래서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하느님을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그러나 확신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의심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의심은 우리를 더 큰 믿음에로 이끌어 준다. 의심은 언제나 믿음과 함께 존재한다. 완전한 확실함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디서 믿음의 필요성을 느끼겠는가? 의심이 문제가 아니라, 적당히 하는 의심이 문제이다. 적당히 하는 의심은 우리를 후퇴시키거나 제자리걸음을 하게 한다. 「다빈치 코드」같은 엉터리 책을 읽고 그저 "~하더라"는 수준에서 책임지지 못할 물음을 던져 놓고 더 자세히 진실(眞實)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의심은 믿음을 해치게 된다. 일부러 의심에 머물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체념하는 것도 현명치 못한 처사다. 딜레마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4세기에 살았던 한 프랑스 수사(修士)가 들려주는 당나귀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당나귀가 두 개의 먹음직스러운 건초 더미 사이에 있었다. 정확히 두 건초 더미 중간에 서 있었다. 당나귀는 양쪽을 번갈아 보았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그런 상태가 계속 이어졌고, 결국 당나귀는 굶어 죽었다. 하지만 진지한 회의(懷疑)는 궁극적으로 더 큰 이해와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한다. 또 더 가까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해 준다. 만일 하느님이 계시다면 그 하느님은 진리여야 하고, 진리는 어떤 날카로운 의심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진지한 의심은 믿음에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프랑스의 장 설리번 신부는 하느님께 대한 회의(懷疑)와 하느님에게서 도피(逃避) 자체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절대자에게서 도망치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조차, 그리고 어떤 물질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그 욕구를 부지불식간에 억누르고 있다고 믿을 때조차, 실상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그 절대적인 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부정(否定)과 회의(懷疑) 자체가 믿음에로 나아가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처럼 보일 때가 있다. 모순이요 부조리로 보일 때가 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과 모리아 산에 올랐고, 욥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종기를 긁어야 했으며, 다윗은 동굴에 숨었고, 엘리야는 사막으로 힘없이 걸어 들어갔으며, 모세는 언제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느님께 여쭈었다. 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는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며, 심지어 적대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위기 순간을 경험했다. 그들은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기로에 서 있었다. 화를 내면서 돌아설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때 그들은 모두 '신뢰의 길'을 택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신앙의 거인들로 기억하고 있다. 셸던 배너켄은 말한다. "믿기로 결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결정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나는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단, 의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할 따름이다. '주님, 제가 믿나이다.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토마스 머튼이 우리를 격려한다. "우리가 얼마나 겸손한 복종과 사랑으로 하느님께 완전하게 자신을 드리는가에 비례해 그분을 알게 된다. 그분을 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행동하라. 그러면 보인다. … 하느님을 믿기도 전에 그분을 분명하게 보려고 기다리는 자들이 믿음의 여정을 시작조차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cpbc2005.03.23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주최 제1회 사랑의 가족수기 공모 최우수상작인간이 무엇이기에 이렇듯 보살펴 주시나이까?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위원장 김지석 주교)가 발표한 제1회 사랑의 가족수기 공모 당선작 중 최우수작인 정순희(율리아나)씨의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시나이까' 전문을 소개한다. 가정사목위는 12월 27일 오후 2시 서울 광진구 중곡1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4층 강당에서 제1회 사랑의 가족수기 당선작 시상식을 갖는다. ---------------------------------------------------------------------- 글=정순화 율리아나 삽화-김복태 사도요한 용기를 내었습니다. 수기 모집을 보며 바로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습니다. 2005년 8월15일 성모님께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승천대축일! 제가 세례 받은 지 27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번에도 성모님께서 이끌어 주심인지 제 신앙의 삶 우리 가족이 살아온 이야기들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주님과 성모님께 도와 주시기를 기도드렸습니다. 1978년 8월15일 하느님의 딸로 다시 태어났고 그날 이후 이 순간까지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지만 주님 날개 밑에서 견디어내고, 더 큰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감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집 안방에는 가장 쉽게 눈길이 가는 곳에 '하느님 사랑 안에서 기쁘고 꿋꿋하게! 2003년 12월' 이라는 가훈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 남편, 아이들 아버지 세바스티아노씨가 2003년 11월 세상을 떠나고 집에는 너무도 사랑하는 딸 루치아와 단둘이 생활하고 있지만 그 가훈 말씀대로 하느님 사랑 때문에 기쁘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답니다. 신앙을 전혀 모르고 자랐던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을지로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70년대 초였지요. 근무를 마치면 조금 걸어가서 명동성당 입구 동굴의 성모님께 마음이 끌리어 무릎틀에 무릎 꿇고 기도도 했습니다. 주일이면 집 근처 성당 문앞에 두손 모으고 서 계시는 성모님을 혼자서 찾아뵙고 했으니 앞으로 제 삶을 알고 계시는 어머니께서는 그때부터 저를 불러주신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좀 이른 나이에 한 회사에서 근무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1972년 5월31일 첫아기 루치아가 태어났습니다. 아기에 대한 사랑과 기대감으로 아기용품도 하나씩 장만해가며 대구 친정에서 아기를 낳게 됐죠.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나고 아빠와 함께 포대에 싸인 아기를 안고서는 새 생명의 소중함과 첫 분신이라는 신기한 마음과 잘키워 보겠다는 희망으로 세 식구가 서울 시댁으로 올라왔습니다. 아기가 밤낮이 바뀌어 밤엔 자지 않고 계속 울고 낮엔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보채니 시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어려움이 많았으나 한없이 애착이 가고 사랑스러웠습니다. 태어났을 때 3.62kg의 건강했던 그 아기가 서기 시작할 땐 부자연스러워보였습니다. 1년 6개월이 되어 걸음마를 시작할 땐 늦었지만 무척 기뻤습니다. 그러나 관절 부분에 이상이 있는 듯해 친정 언니와 모대학 병원 정형외과를 찾았고 마음 조이며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신체 관절의 마디 형성이 정상적이지 못해 성장 발달이 온전하지 못하게 된 아주 희귀한 병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걱정을 안고 언니와 헤어져 집에 왔습니다. 언니는 너무 마음이 아파 평생 그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지 못했을 정도로 울었다고 합니다. 이제 갓 두돌이 된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소꿉장난하며 그릇에 물을 퍼담고 놉니다. 직장에서 돌아온 아빠는 그 놀고 있는 모습을 힘없이 바라보더니 아기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희에게 다가오는 고통의 시작이었지만 하느님 부르심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위로 오빠 두 분과 제 바로 위 언니, 이렇게 4남매의 막내입니다. 어리광도 많이 피우고 철이 없는 저와는 달리 어려서도 다 커서도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아온 그 언니가 앞으로 아기를 키워 가며 힘든 일도 많을 테니 천주교에 입교해 보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바르게 살아가고 현명한 언니의 이야기라 제 마음에 담아두었습니다. 그 후 시댁에서 분가하고 남편의 직장과 가까운 광명시로 이사하게 됐고 둘째 안드레아가 태어났습니다. 아기를 업고 가끔 들른 이웃집은 열심한 천주교 신자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성당에 나가고 싶다고 했는데 그 할머니는 물론 레지오 단장까지 하시는 며느님도 별 반응을 주시지 않았어요. 그렇게 아기들을 키우며 지내다가 어느땐 너무 크게 밀어닥치는 루치아의 앞날에 대한 안타까움과 두려움으로 1978년 1월 주일 한낮에 갑자기 루치아를 업고 성당을 찾게 됐지요. 마침 마당에 계신 수녀님께 교리반 안내를 듣고 출석해 보니 교리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고통의 숙제를 안고 아버지 집을 찾아온 나! 이제부터 제 삶은 하느님을 모르고 헛되이 살아온 옛 생활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큰 축복으로 이어지니 고통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디딤돌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가족은 구원의 약속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보물과 같은 선물인 루치아로 인해 이 세상 무엇보다 가치 있고 중요한 신앙을 얻게 된 것입니다. 1978년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세례를 받고 또 두 아이는 루치아와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줄곧 안드레아에게 사제성소가 있기를 소망해 왔습니다. 수녀님 권유로 레지오에 입단했고 3년이 되자마자 꾸르실료 교육을 받았습니다. 또 어떤 교육이건 피정이건 기회가 오면 기쁘게 응해 은혜를 받았고 그 힘의 원천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운명의 난관을 그저 고통스럽게 살지만 말고 주님께서 지켜보심을 믿으며 나를 지탱해 주시는 그지없이 크신 그분께 의지했습니다. 1981년 부활절엔 남편도 세바스티아노라는 세례명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어 저희도 성가정이 됐습니다. 루치아는 신체적으로 정상적이진 못하지만 영리한 두뇌와 너그럽게 참고 받아들이는 그 마음은 제가 본받을 만했습니다. 동생과 함께 다닌 2년간의 유치원 생활, 정상아들과 함께 한 일반 초등학교 생활, 저는 늘 루치아와 등하교를 함께 했고 1년 후 입학한 안드레아는 대견하게 혼자 모든 것을 잘해 줬습니다. 1983년 4월 아빠 직장을 따라 아빠 고향이기도 한 포항으로 이사하게 됐습니다. 루치아가 4학년 안드레아가 3학년때였지요. 정든 교우들과 작별하고 제게는 낯선 포항에 와서 짐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캄캄한 느낌이 들고 떠나온 곳과 성당 식구들이 그리워져서 친정 어머니가 계시는데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가 다시 이곳 성당에 정을 붙이고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고 계셨습니다. 정상아라도 전학하면 잘 적응하기 힘들텐데 루치아는 그래도 잘 참아내면서 혼자 교실로 들어갑니다(그때는 혼자서도 걸었지요). 나이가 좀 드신 남 선생님이 맞아 주셨고 아무 거부도 없이 혼자 조금 구부정한 걸음으로 들어가는 우리 딸 뒷 모습이 너무 아파, 지금도 선합니다. 그런데 자기들과 모습이 좀 다른 애가 새로 전학해서 들어오니 아이들이 "와~" 하고 웃어댑니다. 제 가슴도 함께 무너집니다. 그러나 아! 성모님 마음, 십자가의 길 제4처에서 피투성이 아드님과 만나시어 속으로 비통함을 삭이셨을 우리 어머니 그분을 생각하니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스런 우리 루치아! 무던히도 잘 견뎌주는 그 딸을 위해서라도 저는 더 힘을 내고 슬픈 마음은 던져 버려야 했습니다. 육신으로 맡아 기르는 부족한 이 엄마보다 너무도 훌륭하신 분 영신의 어머니, 하늘 어머니께서 루치아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그 어린 것이 어떤 야유도 용기있게 받아내고 그날 수업을 거뜬히 마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착하게 잘 도와주는 친구도 있고 간혹은 루치아의 신체적 약점을 얕보기도 하고 "가시나야 서울말 하지 마라!"하며 빈정거리고 괴롭히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잘 참고 학교를 빠지지 않는 딸의 슬픈 마음을 너무 잘 알기에 딸을 보내 놓고 나면 저는 학교 바로 앞 바닷가 백사장에 앉아서 많이 울었습니다. 루치아와 안드레아가 첫영성체 교리를 마치고 루치아는 예쁜 하얀 드레스와 화관을 쓰고 처음으로 거룩하신 하느님 성체를 모셨습니다. 참 기쁜 날이었어요. 신부님, 수녀님께서도 따사로이 돌봐 주시고 버스를 타고 이웃의 친구들과 함께 어린이 미사에 참례하고 교리도 마치고 옵니다. 제가 일이 있어 함께 하지 못하면 동생 안드레아가 누나를 업고 버스까지 타고 성당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누나를 많이 생각하며 늘 집에서 몇 친구와 함께 미사놀이, 소꿉놀이도 하며 혼자 밖에 나가 노는 적이 없었던 아들입니다. 이제 우리 루치아가 여중생이 됐어요. 또 하나 힘든 문턱을 넘어서듯 걱정도 많았지만 무난히 중학교에 입학해 공부도 곧잘 했습니다. 제가 운전을 못 할 때여서 아빠가 출퇴근 길에 승용차로 등하교를 시켰고 저는 무슨 일을 하든 루치아 학교가 마칠 시간이면 신경을 써서 학교에 가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풍, 운동회 등 행사 때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팠지요. 루치아를 저 이상으로 아껴주고 사랑하셨던 친정어머니는 루치아가 생각나서 자주 저의 집으로 내려오시곤 했습니다. 가끔 절에 다니시고 하신 분이지만 제가 교리반에 모시고 다녔고 마침내 70대 중반 에 세례를 받으셨는데 예수님 성화를 대하면 "이분이 예수씨인가?" "어느 나라 분이고?" 하며 공경하는 모습으로 물어보기도 하셨습니다. 어느날은 열심히 묵주알을 굴리시기에 기도문을 외우신 줄 알고 반가운 마음에 "엄마 뭐라고 외우며 기도합니까?" 하고 물어 보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며 기도했다 하셔서 황당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습니다. 늘 마음에 남는 걱정스런 막내딸 그리고 애처로운 손녀를 못잊어 서울 오빠댁에서 자주 포항을 찾아오셨던 친정어머니는 79살을 넘기지 못하시고 목련이 아름답던 봄날 사순절을 보내고 성금요일에 하느님 나라로 떠나셨습니다. 루치아도 저도 그 허전함과 슬픔이 오래 갔습니다. 3년간 중학교 생활도 끝나고 이젠 고등학교 입학을 두고 평준화 지역이 아닌 포항에서 두 번째는 되는 여고로 원서를 내고 무난히 합격했습니다. 또 그렇게 3년! 하루하루 루치아를 업고 등교시키고 또 아빠는 차를 운전하고 했지만 그 일들이 전혀 힘들지 않았고 '내 몫, 우리가 해내야 할 일"이라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 부부는 말없이 실천했습니다. 남편과 저는 자식을 바라보는 아픈 마음을 내놓고 표현치 않았지만 서로가 절실히 함께 느끼고 살았습니다. 남편은 조용하고 별로 표현하지 않는 내성적인 분이고 저는 원래 밝은 성격이며 잘 웃습니다. 저를 보고 다른 사람들은 큰 고통을 안고 있는데도 참 밝게 살아간다고들 했습니다. 우리 딸 루치아는 자신의 신체적 조건 때문에 다른 친구와 같이 할 수 없는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그 사춘기 시절에도 엄마를 더 걱정하며 "엄마 사랑해요. 엄마 힘내세요!" 하며 수시로 사랑의 글을 주어 제게 힘이 나게 했습니다. 꽤 이쁜 글들을 노트에 적어보기도 했던 루치아가 글쓰는 사람이 됐으면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진행이 되지 않음을 아쉬워하며 액자를 만들어 걸어둔 루치아의 시 한 편을 적어봅니다. '인고의 시간을-이 시간 내가 치러야 할 아픔임을 압니다. 오로지 나 혼자만이 버티고 서서 그저 이 풍랑이 잠잠해지길 기도합니다. 언젠가는 거센 파도 잠잠해지고 예전처럼 고요해질 것입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주님! 이 시간 저는 풍랑이 잠잠해지길 기도하는 어부입니다. 어부는, 성난 파도를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어부는 벤더 빌트의 동화를 믿습니다.' 루치아는 여고 졸업을 앞두고 대학 진학도 궁리해보고 대구까지 가서라도 방송통신대학을 다녀 보려고도 했으나 여의치 못해 집에서 컴퓨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딸이 여고를 졸업하던 날 친정 오빠, 언니들이 모두 참석해서, 12년을 함께 학교 다닌 동생과 조카를 위로하고 축하해 줬습니다. 앞으로의 일들도 지금처럼 오롯이 그분께 맡기면서 하루하루 기쁘게 살고 "예수님께서 지켜보시는 내 영혼, 용기를 내야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제 마음 밑바닥에 늘 차지 하고 있는 성경 말씀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 데살 5, 16-18). 이 말씀이 반석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인생의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저는 허물도 많고 형편없이 허점 투성이입니다. 제가 겪는 고통들은 거의가 저의 잘못된 판단과 죄와 실수로 빚어지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주님께 매달리며 일어나 걸어갈 때 주님은 꼭 도와주고 살펴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형편 없어!' 하는 자괴감에서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 옷자락을 놓지 말고 자비를 얻고 다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힘든 삶이라면 힘들게 살아온 저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다면, 나름대로의 삶의 무게로 괴로운 이들이 저를 보고 용기를 낼 수만 있다면, 너무나 감사할 일이지요. 우리 인생의 고민과 걱정거리는 시간과 함께 하느님 손 안에서 자연스럽게 때를 맞아 해결되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안드레아는 어릴 때부터 신부님 역할을 하며 아이들과 미사 드리는 놀이를 했고 아빠와는 얘기도 못했지만 루치아와 저는 수시로 "커서 신부님 되거라" 했습니다. 본인도 중학교 때 진로를 선택할 때 성직자라고 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합창부 음악에 빠져서 그만 마음이 멀어진 것만 같았습니다. 성소의 길은 억지로 될 수는 없고 본인 선택이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요. 안드레아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입니다. 아빠는 동문회에서 등산 가고 저는 레지오에서 고령 들꽃마을로 봉사를 갔습니다. 누나에게 인사하고 자전거 타고 학교 보충수업을 받으러 갔던 아들이 제가 저녁에 돌아와서 세수를 하고 있자니 교통사고로 많이 다쳤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허겁지겁 시내 병원을 가니 아빠도 급히 달려왔습니다. 머리도 다치고 하체도 많이 다쳤는데 정신은 말짱했고 그 병원에서는 일요일이고 손 쓸 수 없다면서 구급차에 태워 대구로 보냈습니다. 누워있는 침대에는 피가 너무 많이 흘렀고 시간을 다투며 대구로 달려가는데 다행인 것은 정신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아빠, 엄마 죄송해요. 누나 혼자 집에 있어 어떻해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막힌 상황에서 손가락에 낀 묵주를 빼내어 계속 성모님께 참으로 온 마음 다해 절실히 매달렸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아주 나쁜 일은 없을 것 같은 확신이었어요. 병원에 도착해서 응급처리하고 아수라장 같은 응급실에서 마음을 졸이며 밤을 새웠답니다. 서울서도 친척들이 대구 병원으로 내려왔는데 천만다행으로 뇌는 손상이 없고 다리쪽 대퇴부를 많이 다쳤습니다. 수술하고 약 3개월을 아빠와 저는 교대로 간호를 하러 다니다가 3개월 지나면서 포항 성모병원으로 옮겨와서 다시 수술하고 또 3개월을 입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해 대입고사는 치르지 못하고 그 다음해에 영남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대학생이 되어 여름방학 때는 신앙학교 봉사도 해가며 학사님들과 가까이 지내며 성소의 싹이 자라난 것 같습니다. 영남대 입학식날 딸과 저는 '이제 신학교는 안 되나 보다' 하면서 그래도 결혼식장에 입장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아는 여러 가지 동기로 마음이 움직였는지 자취방에 틀어박혀 많은 생각을 한 끝에 작정을 하고 1년 동안 성소모임에 나가게 되니 오묘하신 주님의 부르심이 전달된 것 같았습니다. 안드레아가 대학교 2학년 때 방학이 되어 집에 와서 아버지께 신학교에 가겠다고 말씀드리니 놀란 아빠는 그 길을 안 가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가고 안 가고 하는 단계가 아니라 지금은 어떻게 잘 준비할까 하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하고 확고한 의지로 말했습니다. 아빠도 "그래, 그렇다면 열심히 해야 된다. 딴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나도 너를 돕겠다"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아들은 신설 본당의 첫 신학생이 되어 대구대교구 한티 순교성지, 우리의 용감하신 순교 선조님들의 얼이 깃든, 팔공산 높은 산 기슭에서 입학식을 하고 반년을 생활하게 됐습니다. 아들을 두고 올 때 어떤 어머니는 울기도 하고 서운해 했지만 저는 감사해서 벙글벙글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그 후로도 방학이 끝나 다시 학교로 갈 때는 안드레아도 학교 가는 것이 좋아 신명나서 짐을 챙기고 저도 늘 기쁘게 보내곤 했습니다. 참 씩씩하게 학교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많은 시련 끝에 우리 루치아가 참아 받는 모든 것이 주님 앞에 안드레아 성소의 밑거름 되어 그 처음부터 소망했던 루치아와 저의 그 대단한 꿈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IMF도 오고 아빠 사업도 어려워지면서 경제적 어려움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방학이 되면 늠름하게 본당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얼굴을 보며 우리 가족은 힘을 냈습니다. 고생이 고생 같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 기꺼이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아빠의 사촌형님께서 인도네시아에서 섬유업을 시작하게 되어 아빠가 그 일 맡아 외국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안드레아가 신학교 3학년 방학 때였는데 경북 가천 수련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으므로 거기까지 가서 우리 가족 함께 식사하고 다음날 아빠는 출국하셨습니다. 아빠는 먼 외국에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고 안드레아는 신학교 생활 잘 하고 루치아와 저도 기도하며 매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그 힘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처음 생각과는 달리 그 나라에도 여러 악조건이 겹치고 2년을 애써봤지만 아빠는 기계들을 그대로 두고 일단 귀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사업이 잘 된 것은 아니지만 아빠는 그곳에서 기도생활과 신앙이 많이 성숙해서 돌아오셨습니다. 성모님을 모신 기도상에 그 나라에 많은 아름다운 들꽃을 매일같이 꽂아드리며 아들과 가족을 위해 묵주기도로 나날을 보냈답니다. 다시 귀국해서는 일을 새로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만 신학생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며 이제껏 해보지 못한 노동일이라도 하시겠다고 공단의 한 회사에 3교대 근무를 나가게 됐습니다. 정말 한몸을 투신하듯이 고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새벽이면 저와 함께 아파트에 신문을 배달하기도 했지요. 신문 일을 끝내고 집으로 오다가 들꽃을 손에 들고 성모님께 바치고 흐믓해 하시던 모습. 통근버스를 타고 공단까지 가며 또 집으로 올 때 늘 안드레아를 위해 성모님께 묵주기도 바친다고 루치아에게 말했던 아빠! 아빠는 일을 하던 도중 허리를 삐끗한 후 그 통증으로 괴로워하셨고 또 변비가 심해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출근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나갔습니다. 늘 파스를 바르고 통증 클리닉까지 다니면서도 회사에는 계속 나갔습니다. 어느날 근무를 마치고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오시며 "그래도 뼈 안 다쳐서 천만 다행이다" 하더군요. 손가락 치료를 하며 회사 산재병원에 다니다가 허리가 너무 많이 아파서 며칠 입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안드레아의 부제품이 다가오던 6월초 무렵이었지요. 화요일은 장애아 어린이 집에서 봉사를 하는데 루치아가 아빠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빨리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전합니다. 불길한 마음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 갔는데…. "주님! 이 무슨 청천병력인가요?" 초음파 검사에서 간암 소견이 나온다고 큰 병원을 빨리 가보라고 합니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온 몸에 힘이 다 빠지고 가슴이 아픔니다. 우리 가족은 안드레아의 부제품에 모든 마음을 다 쏟고 기도하며 기다렸는데, 아빠에게 생각지도 않은 이런 일이 생기다니…. 큰 병원으로 가려고 루치아를 태우고 차를 운전해서 아빠가 있는 병원에 갔습니다. 침대에 반듯이 누우셔서 한번도 제게 보여 주지 않았던 아빠의 뺨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잊을 수 없는 그 눈물! 그리고는 옷을 갈아 입고 내려와서 앞자리에서 얼굴이 벌겋게 울고 있는 딸을 보곤 "아빠 괜찮다. 임마 울지 마라" 하십니다. 성모병원에 가서 CT 촬영실 앞 의자에 앉아 늘 지니고 계시던 묵주를 꼭 잡고 기도하시던 그 모습! 우리가 가슴을 졸이며 기대했던 결과는, 많이 진전된 간암, 그것도 대장암에서 전이가 된 간암이라는 절망적 진단이었습니다. "하느님! 내 아버지시여, 우리 세바스티아노가 가여워서 어떡하지요? 너무 가엾습니다." 이 지경이 이르도록 그냥 있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또 미련한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던지 모릅니다. 죄송해요. 여보! 정말 죄송합니다. 아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까 우리 가족은 더 걱정이 됐습니다. 아버지도 결코 알게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부제품 날짜는 20일을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안드레아의 부제품 날. 아들 부제품 때 입으려고 새로 준비해둔 양복을 입고 그 동안 너무 수척해지고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부제품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성인 호칭 기도의 긴 시간도 남들과 같이 무릎 꿇어서 한치 흔들림 없이 온몸을 바쳐 기도하셨고, 사진 촬영, 모든 행사를 다 치른 후 성모병원 입원실로 들어왔습니다. 아빠 모습에 너무 놀란 아들이 대구에 올라가서 전화해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사실을 알게 될 때 안드레아가 무너질까봐 많이 걱정했지만 저는 안드레아에게 침착하라고 타이르며 모두 얘기했습니다. 아빠가 원하시기도 했고 큰아버지들께서 주선하시어 아들이 아빠를 모시고 서울 삼성의료원에 가서 또 그 힘든 검사를 받는 곤욕을 치르셨습니다. 그러나 수술을 할 수 있는 정도도 아니고 해서 다시 포항 성모병원으로 와서 항암 주사 치료를 받기로 했습니다. 항암 치료를 하는 한 열흘간은 일인실 독방에서 우리 세 식구 함께 지냈고, 치료가 끝나서는 퇴원해서 집에서 보름 정도 왔다 갔다 하며 투병 생활을 했습니다. 참을성 많은 아빠는 힘든 진통의 아픔과 항암제를 맞으면서도 잘 견디셨습니다. 아빠도 삶의 끈을 놓지 않으셨을 것이고 저도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향하면서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담당 의사가 이제 한달 정도 시간이 남았다는 말씀에 그분이 너무 원망스럽고 그리 빨리 아빠의 날이 온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아버지, 우리 가정의 든든한 대들보 남편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볼 수도 없었습니다. 복수가 차서 처음에는 알부민을 주사하니 곧 가라 앉았는데 나중에는 듣지가 않습니다. 마지막 항암 치료를 하고 퇴원해서는 상태가 좀 양호해져서 함께 마트에도 가고 루치아에게 전동 칫솔도 사주고 하면서 며칠을 잘 지냈습니다. 아프지만 아빠가 함께 계신다는 그 사실이 푸근하고 좋았습니다. 10월 마지막 날 저녁 아빠 몸이 많이 좋지 않아 응급실로 입원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들이 있었다면 늘 그러던 것처럼 아빠를 업고 4층 계단을 내려갔을 텐데 학교 생활중이어서, 아빠는 힘든 몸을 이끌고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그것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마지막이 돼 버렸습니다. 11월 위령성월이 시작됐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담화문을 내시며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시작이라고…. 평화방송을 통해 듣고 있던 아빠가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 일어나 앉습니다. 마침 방사선과의 수녀님께서 며칠간 피정을 마치고 오셔서 병실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아빠는 평소에 그 수녀님께 잘 의논도 하고 많이 의지하셨는데, 그날은 어떤 마음의 준비를 굳힌 표정으로 "내 장기들은 기증할 수도 없을 것 같고 눈이라도 괜찮다면 안구 기증을 하고 그만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하며 기막힌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너무 놀라 수녀님도 울고 우리도 울었습니다. 수녀님과 상의해서 엊그제 주일에 아버지께 왔다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정신 없이 학교로 올라간 아들에게 전화하니 울면서 곧 내려온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폐가 될까봐 고개 저으며 전화 못하게 하던 아버지도 든든한 아들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고 우리 모녀도 참 든든했습니다. 온갖 정성 다들여 아들이 보살펴드리고 2003년 11월5일 새벽 2시45분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딸 루치아가 "아빠! 우리 걱정은 마시고 편안하게 가세요. 나중에 우리도 다 따라 갈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위로하니 루치아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안드레아는 "아버지, 성모님께 의지하세요. 성모님께 의지하세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눈 한번 감으니 영혼은 떠나가고 다시는 서로 마주 볼 수 없고, 목소리 들을 수 없고, 만져볼 수도 없는 막막한 처지가 돼버리더군요. 살아온 추억들이, 함께한 삶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하지만 그 기억과 함께 옛날 사람! 지금은 없는 사람으로 묻혀버리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분 뒤를 따라 아버지 집으로 가는 그날까지 더 열심히 더 주님께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남기고 그분은 가셨습니다. 신학교 동기 부제님들이 그득하게 안드레아와 함께 상주 역할을 해주고 담임 신부님은 나날이 오셔서 빈소 앞에서 미사 드려 주시고 많은 교우분들이 연도를 바쳐주시고 장례미사 때는 많은 신부님, 부제님들 함께 하셨습니다. 모든 장례를 마치고 조용히 돌아보니 슬픔 중에서도 하느님의 큰 사랑이 가슴에 차올라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피시나이까?" 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2004년 6월29일 대구대교구 김대건 기념관에서 15명의 새사제가 탄생했습니다. 안드레아가 많은 눈물을 흘리며 주교님 안수를 받고 새 사제로 탄생했습니다. 하늘에서 세바스티아노가 무척 기뻐해 주셨겠지요. 가족들과 포옹하며 많이도 울었던 우리 아들, 아버지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돌아가시기전 당부했던 아빠의 부탁대로 많은 친척들이 서품식에 함께 하시고 고인 생각에 눈물도 흘렸습니다. 본당의 첫 사제가 되어 성대한 첫 미사를 올릴 때 아버지 신부님께서 돌아가신 세바스티아노씨에게 감사 드린다고 인사하셨습니다. 저는 가족 인사를 할 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새 신부님이 몸이 불편한 누나에게 사랑을 보여주었듯이 가장 힘든 처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시기를 빕니다." 서품을 앞두고 아버지를 잃은 기막힌 일을 겪었지만 그만큼 폭이 넓어진 아들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기도상 성모님 바로 옆에 있는 첫미사 드리는 아들 사진을 보면 벅차 오르는 감사의 마음에 제가 살아온 보람이 느껴집니다. 세바스티아노와의 이별이 다가옴을 느꼈을 때 제가 귀에 대고 "우리는 영영 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 때, 영성체 때 꼭 함께 할 것입니다" 하고 약속했고 늘 영적으로 하나됨을 느낍니다. 안드레아도 보좌신부로서 열심히 살고 있고 저희 모녀도 더욱 주님 가까이 있기만 원하며 성서 읽기 열심히 하고 기쁘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일진 모르지만 천상가정으로 옮겨가 아빠 세바스티아노와 다시 만날 때까지 만날 때까지….cpbc2005.12.14
신간 안내 ■ 성경의 지혜 잠언 오디오북 신앙적 교훈, 인간 심리와 행동을 꿰뚫어보는 현명한 가르침과 지혜가 가득한 구약성서 잠언을 두장의 CD에 담아 편안히 들을 수 있도록 만든 오디오북. 현직 성우 두 명이 구약시대 상황을 묘사하는 잔잔한 배경음악을 바탕으로 번갈아가며 잔잔한 목소리로 성서를 녹음, 차분히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묵상할 수 있다. (성우 박선영·김승태 읽음/내림과올림/1만 5000원) ■ 엄마의 행복 시각 장애우이면서도 자식은 물론 손자들까지 너끈히 키워낸 박흥식·지인자씨 부부 이야기를 큰 딸 박명화씨가 엮은 책.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끄러워하거나 감추지 않고, 자식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노 부부의 감동적 삶이 진하게 묻어난다. (글 박명화/도서출판 정한PNP/9000원) ■ 갈매기 조나단에게서 배우는 사랑 그리고 영원한 삶 시인인 저자가 명저 룗갈매기의 꿈룘에서 발췌한 글에 자신의 편지를 덧붙여 현대인 삶을 되돌아보게 꾸민 명상집. 저자는 해변의 편안한 삶을 버리고 드높은 하늘에서 자신의 삶을 완성해가는 갈매기 조나단을 관조하면서 삶은 소유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김영수 글, 토리디자인 그림/책이있는마을/8500원) ■ 그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남 순천 효산고등학교 교사이자 시인인 저자가 인터넷 신문에 3년간 연재한 글을 발췌해 엮은 교육 에세이. 저자는 학교와 아이들 사이, 배움과 가르침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험과 학교안 내밀한 풍경을 상세히 묘사하며 사랑을 경험한 아이들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소개한다. (안준철 지음/우리교육/8500원) ■ 중동의 화해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유다교 세 종교의 중심지 중동을 여행하며 공동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 분쟁의 근원을 살펴보고 화해 방안을 제시하는 책. 저자는 중동을 여행하며 유다교 랍비, 이슬람교 이맘, 그리스 정교회 주교, 개신교 목사를 비롯해 저명한 신학자와 만나 경험한 화해 가능성을 상술하고 있다. (브루스 페일러 지음/이병걸 옮김/인바이로넷/1만 5000원) cpbc2004.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