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근 평화칼럼] 교회의 믿음](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3/11/29/Im51701224096562.jpg)
[이상근 평화칼럼] 교회의 믿음이상근 마태오(미국 테네시 오크릿지 국립연구소 연구원) 내가 살고 있는 미국 테네시 낙스빌에는 한인 천주교회가 없다.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우리 한인들은 각자의 지역 미국 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 달에 두 번 2시간 거리 내쉬빌에서 오시는 한인 신부님께서 주례하는 한국어 미사를 위해 주교좌성당에 모인다. 이렇게 한국어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귀한 기회이다 보니, 십여 년 전 한국에 살 때는 너무나도 당연했던 한국어 미사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날도 한국어 미사가 있는 날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조금 다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얼굴들이 미사에 참여했다. 미국인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온 방문객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국인이 아닌 것이 분명히 외국인인 그들이 우리 한국어 미사에 함께한 것이다. 나는 그날 미사 해설을 맡고 있었는데 해설자석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누구일까 궁금해했다. 사실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굳이 한국어 미사에 참여할 이유는 없으니 더욱 그랬다. 비록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미사에 참여한 그들의 모습은 매우 경건하고 거룩해 보였다. 미사가 끝난 후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환영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성당에 기도하러 왔다가 한국어 미사가 봉헌되는 것을 보고 참여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비록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느님을 느낄 수 있었고, 환영해 주어서 고맙다면서 성당을 떠났다.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거룩한 마음으로 임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의 힘을 느꼈다. 모국어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이지만, 때로는 낯선 언어로 바치는 미사에 참여해 얻는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어로 진행되는 미사에서도 속으로 그들의 언어로 함께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평화를 빌고, 성체성사의 신비에 함께 참여했으리라 생각하면서 보편 교회가 가진 일치하는 신앙의 힘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2021년 낙스빌교구가 주최한 다문화 다언어 묵주기도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이날 나는 한국어 화자의 대표로 참여했는데, 주어진 역할은 매 단을 마치는 ‘영광송''을 한국어로 바치는 것이었다. 이날 정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나중에 헤아려보니 무려 14개의 언어로 묵주기도를 함께 바쳤다. 각자의 언어로 각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조금 특별했다. 이를테면 영어로 주님의 기도를, 그리고 여러 언어로 돌아가며 성모송을, 그리고 한국어로 영광송을 바치는 형식이었다. 참여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봉헌되는 주님의 기도·성모송·영광송을 들으면서도, 모두 마음속에서는 각자의 언어로 일치된 기도를 하는 진귀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성령 강림 때 제자들이 외쳤던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사도 2,8)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날이었다. 생각할수록 신비롭고 놀랍다. 지금 이 순간 한국에서, 미국에서, 그리고 내가 가보지 못한 수많은 장소에서 온갖 언어로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같은 성경을 읽으며, 함께 성체를 모시고, 기도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을 것이다! 비록 나 하나의 믿음은 작고 보잘것없지만 일치된 ‘교회의 믿음’은 정말 아름답고 놀랍고 위대하다. 나는 그것에 큰 위안을 느낀다. 이것이 우리가 미사 중에 이렇게 매번 기도하는 이유일 것이다. 주님!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cpbc2024.06.26

성 정하상, 조선 땅에 선교사 데려오고 대목구 설정에 공헌[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18. 정하상 바오로와 상재상서(上宰相書) 박득순 작 ‘성 정하상 바오로’. 수원가톨릭대 소장.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을 연재하면서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103위 성인 가운데 평신도 대표인 성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이다. 아버지 정약종을 잃고 청년 시절 온 생애를 다해 선교사를 영입하고자 북경 파발꾼으로 가서 선교사들을 모셔 들이고, 마침내 조선대목구가 설정되자 사제가 되기 위해 준비했던 그의 노력은 우리 교회사에서 빠질 수 없다. 1839년 박해를 마무리하면서 정하상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사제의 길을 미리 걸었던 신학생 정하상 정하상이 103위 성인의 평신도 대표인 것은 많은 이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 첫 신학생’으로 사제직을 준비하며 모든 평신도의 모범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1838년 쓴 보고서에 보면, 자신이 4명의 신학생을 가르치고 2명에게는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3년 뒤에는 조선 땅에서 서품식을 거행하고 싶다는 희망을 전하고 있다. “첫째로는 42세 된 우리의 북경 파발꾼인데 여전히 독신으로 있으며 우리 세 선교사를 조선에 인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1801년 박해 때에 자신을 천국으로 보낼 칼날을 보겠다고 해서 (하늘을 보고) 눈을 뜬 채 참수를 당했던 영광스러운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입니다. ⋯저는 조선말을 공부해 가면서 이들 네 명에게 매일 2시간씩 강의를 하는데, 이것은 제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올여름에 이들은 (라틴어) 글을 읽는 일에 좀 익숙해졌습니다. ⋯앞의 두 명에게 신학 공부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 3년만 있으면 서품식을 거행할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30일 자 서한) 정하상은 아버지 정약종이 순교할 때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함께 옥에 갇혀 있다가 고향 마재로 돌아가 어머니 곁에서 성장하였다. 마재의 정씨 일가는 천주교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면서 조카인 정하상을 외면하였다고 한다. 정하상은 혼인하라는 집안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독신을 지켰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구전으로 전해 듣는 교리 지식으로는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 멀리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 간 조동섬(유스티노)를 찾아가 글을 배우기도 하였다. 정하상은 박해로 아버지와 형을 잃고 힘든 생애를 살아갔건만, 아무리 이치를 따져보고 다시 생각해 봐도 자신의 아버지만큼이나 천주가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심순화 작, 마재성지에 설치된 정약종 일가 모자이크. 왼쪽부터 정철상·정약종 복자와 성모 마리아, 정하상ㆍ유 체칠리아ㆍ정정혜 성인. 아버지 정약종 순교할 때 어머니와 함께 갇혀 정하상은 천주가 이 세상에 계신다는 것을 이 세상 만물과 사람의 양지(良知)와 성경에서 찾았다. 만물을 보면 천주가 계신다는 확신이 들고, 내 안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양심을 들여다보면 천주가 계심을 알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품 공부를 하면서 읽은 성경에서 하느님 말씀을 직접 들었을 것이다. 정하상의 믿음은 자신이 순교 전에 쓴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엿볼 수 있는데, 아버지와 형이 목숨 바쳐 증언한 것처럼 자신도 확신에 차 신앙을 증언하였다. “금(金)은 산지(産地)에 관계없이 순금이냐 아니냐에 따라 보배가 되느냐 안되느냐가 가려지고, 종교는 그 지역에 관계없이 거룩하냐 거룩하지 않냐에 따라 참된 종교인지 아닌지가 가려집니다. 그런데 어찌 이러한 종교를 전파하는 데 있어 이 나라 저 나라에 경계가 있겠습니까?”(「상재상서」 중) 이렇듯 굳건한 믿음을 지녔던 정하상은 조선 땅에 선교사를 인도하기 위해 조선과 북경을 오가는 파발꾼이 되었다. 그가 이처럼 힘겨운 길을 스스로 걸은 이유는 조선 땅에 다시 선교사가 들어와 성사(聖事)가 거행되고, 세상의 주인을 알아보는 참된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복음을 가르치는 사제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했던 것이다. 정하상은 유진길(아우구스티노)·조신철(가롤로)과 함께 조선대목구 설정의 주역으로 ‘평신도 삼총사’라고 부를 만하다. 그들의 노력과 편지가 교황청까지 전해져서 마침내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정하상 성인이 지은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 「상재상서」 한글 필사본. 가톨릭평화신문 DB 국왕에게 천주교 호교론서 「상재상서」 남겨 1839년 초에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조선과 북경을 오가던 정하상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정하상은 박해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듯 국왕에게 천주교가 올바른 종교임을 호소하는 「상재상서」라는 글을 남겼다. 정하상은 「상재상서」에서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호소하였다. “목숨을 바쳐 순교함으로써 성교가 진실된 가르침을 증명하여,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으로 삼는 일이옵나이다. 죽음에 임하여 용감히 말해야 할 때에 한 번 고개를 들고 크게 외쳐 보지도 못하고, 말없이 불쌍히 죽으면, 쌓이고 쌓인 회포를 백년 뒤에까지 스스로 밝힐 길이 없사오니, 엎디어 빌건대 밝히 굽어살피사, 도리의 참되고 거짓됨과 그르고 바름을 가리옵소서.” 정창섭 작 ‘성 정하상 바오로 가족’. 왼쪽부터 복자 정약종의 딸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부인 성녀 유 체칠리아, 아들 성 정하상 바오로.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103위 순교 성인 가운데 평신도 대표로 불려 정하상은 1839년 7월 11일 가족·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문초가 시작되었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추국(推鞫)을 당하게 되었지만, 정하상은 조금도 동요하거나 나약한 신심을 보이지 않았고, 대질 신문을 받는 중에도 교회나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전혀 입 밖에 내지 않고 당당히 천주교를 믿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정하상은 아버지가 하늘을 보며 칼을 받던 그 장소,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 나갈 때 수레 위에서 기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고 「기해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정하상은 사제가 되지 못하고 평신도로 삶을 마감했지만, 김대건 신부보다 앞서 신품성사를 준비했던 신학생이자 설교가였고, 선교사들의 훌륭한 복사였다. 독신을 지키며 복음의 가르침을 목숨으로 증거한 정하상 바오로는 사제의 길을 미리 걸어간 사제의 모범이 되었으며, 자신이 배운 모든 가르침과 지식, 그리고 두 다리로 조선 땅에 선교사들을 데려오고 대목구가 설정되는데 공헌한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다운 가장 위대한 한국의 순교 성인 가운데 한 분이시므로 평신도 대표로 불릴 만하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cpbc2024.04.30

40여 년 한우물, 서양자 수녀가 총정리한 중국 교회사한국순교복자수녀회 서 수녀 13세기부터 방대한 중국 교회사 집대성당시 세계정세 등 상세하게 기록 선교사들의 희생과 공헌 알리고 싶어 중국 천주교회사 베일을 벗기다 서양자 수녀 순교의 맥 “천주교라는 말은 명 말 중국에 들어간 예수회 이탈리아인 미카엘 루지에리 신부와 마태오 리치 신부가 만들어 낸 명사이다. 원나라 때는 경교와 천주교를 모두 ‘야리가온’ 혹은 ‘십자교’라 불렀다.”(23쪽) “이때(중일전쟁) 서양 선교사들이 피난민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고 부녀자들이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어 선교가 매우 잘되어, 1년 동안에 5000여 명이 입교했다고 한다.”(604쪽) 중국 가톨릭 전문가 서양자(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가 40여 년의 연구를 집대성한 「중국 천주교회사 베일을 벗기다」를 펴냈다. 13세기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의 원나라 파견부터 중일전쟁 때 천주교 선교사들의 활약까지 방대한 중국 교회사와 함께 당시 세계정세, 영향을 주고받은 주변국의 이야기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왼쪽부터, 1 변발한 뱅상 레브 신부(왼쪽)가 중국 어린이들과 함께한 모습. 2 북경 성모의 원죄없으신 잉태 성당 앞의 마태오 리치 신부 동상. 3 북경 성 요셉 성당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중국인 신자. 서양자 수녀 저자는 “중국 측에서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 아편을 들고 천주교를 전했다’, ‘천주교가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등 왜곡 선전을 해왔는데, 선교사들의 많은 희생과 중국에 공헌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에 책을 쓰게 됐다”고 전했다. 서 수녀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아편전쟁과 청프전쟁 이후 천주교는 중국 내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중국에 가장 많은 재정 지원과 선교사가 파견됐지만, 중국 인민들은 서양 열강에 직접 대항할 수 없어 교회와 교우들을 탄압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흉년이 들어 기근이 발생할 때마다 서양 선교사들이 외국의 원조를 통해 많은 인명을 구했고, 교회에서 보육원을 만들어 수많은 고아를 거두고 의료 자선사업도 실시했다. 서 수녀는 “같은 유교 문화권에 있었던 우리나라와는 매우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중국 교회사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특이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며 “당시 선교사들이 실수를 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밝히되 중국에 공헌한 일에 대해서도 밝히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600쪽 분량의 책은 어느덧 80대에 들어선 서 수녀 평생의 기록이기도 하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저자는 대만에서 중국 교회사를 연구하고 「중국천주교순교사」, 「박해시대 숨겨진 이야기들」, 「중공 치하에서 외국인 선교사들 추방과 강제노동수용소의 선교사들」 등을 펴내며 중국 교회사와 관련된 방대한 연구를 이어왔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3.11.30

아브라함 (3)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월간 꿈 CUM] 뿌리 _ 구약이 말을 건네다 (7) 이탈리아 카프리섬 산 미켈레 성당 바닥의 마졸리카(Majolica, 이탈리아산 도자기) 작품, 에덴동산. 성경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초의 창조 질서는 하느님 말씀에 의심을 품고, 그 말씀에 인간의 뜻을 첨가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유혹자였던 뱀, 그리고 하와와 아담으로 이어지는 의심은 몇 마디 대화와 암묵적인 동의로 서로 합의를 이루었다. 이렇게 하여 태초의 인류는 합심하여 죄를 지었고, 처음부터 죄는 공동체성을 띄게 된다. 뱀으로부터 시작한 하느님에 대한 이 의심에 대해, 그저 작은 것이었으며 하느님 말씀을 조금 바꾸어 몇 마디 첨가한 것뿐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급기야 에덴 동산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버려지는 고통을 받았다. 아마도 인간 안에 스며 있는, 가장 깊이 자리하고 있는 어두움인 ‘나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여기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이었던 카인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것도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준비한 제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였고, 자신의 제물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것을 자신에 대한 거부와 배제로 이해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는 아주 간단하게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 규정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죄의 뿌리는 인간의 심리를 더 깊게 파고들었고, 자기 비하는 시기심과 섞이어 급기야 형제의 생명을 파괴시키는 폭력으로 이어졌다. 카인과 아벨, 노아의 홍수의 이야기는 당최 어떻게 멈추고, 어디서부터 제자리를 다시 잡아야할 지 모르는 죄와 고통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는 마치 우리가 우리의 무거운 죄 앞에서 안절부절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과연 인류는 어떻게 다시 태초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까? 과연 회복이란 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인류 회복의 길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일흔다섯 살에, 하란에서 주님께서 이른 대로 길을 떠났다. 태초의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고, 그분께선 모든 피조물 가운데 당신의 말씀을 오직 인간에게만 전해주시며 소통하셨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후, 복을 내리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고 분명하게 전한다.(창세 1,28) 그러나 인간에게 전한 하느님의 이 축복의 말씀은 지금까지 실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아브라함에게서 ‘말씀대로’ 실현되는 이야기가 처음 펼쳐진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이른 ‘대로’, 길을 떠났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도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창세 12,6)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창세 12,7) 정리해보면,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분께서 보여줄 땅으로 향했으나, 그곳엔 이미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주님께선 그 땅을 아브라함 자신이 아닌,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했을까? 아브라함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맞이하게 된 세상은 유토피아적인 세상이 아니었다. 그곳은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이었다. 오직 하느님과 함께 사는 곳도 아니었고, 하느님 말씀만 들으며 살아가면 되는 그런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에서 그는 낯선 이방인이었고, 그곳의 문화와 삶을 배우고 듣고 익혀야만 했었다. 아브라함이 주님의 뜻에 따라 도달했던 곳은 지금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런 세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 우리들이 체험하는 낯선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태초의 질서는 주님 말씀에 대한 순명 안에서 서서히 (매우 긴 시간을 흘러서) 회복되어 갈 것이다. 글 _ 오경택 신부 (안셀모, 춘천교구 성경 사목 담당 겸 교구장 비서) cpbc2024.01.31

명석하고 유머 넘치는 ‘인싸’… 학구적인 ‘21세기 아우구스티노’신임 마산교구장 이성효(리노) 주교의 삶과 신앙, 걸어온 길 2011년 3월 25일 주교품을 받은 이성효 주교. 12월 21일 제6대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된 이성효 주교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이들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대체로 일치했다. 유년기부터 명석했고, 항상 앞장서며 유머가 넘쳤다는 것이다. 더불어 어려운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항상 하느님께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순명할 준비가 돼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제6대 마산교구장 이성효(앞줄 가운데) 주교의 어린 시절. 수원교구 홈페이지 ‘인싸’ 이성효 리노 “요즘 말로 하면 ‘인싸’(분위기를 주도하고 소통하는 인사이더)죠. 유머를 잃지 않았고 분위기를 잘 끌고 가고 행사만 있으면 사회를 도맡았어요.” 유년기부터 수원 지동초등학교와 지동성당에 함께 다니고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함께 봉직한 60년 지기 곽진상(수원교구 서판교본당 주임) 신부는 이 주교를 한마디로 ‘분위기 메이커’라고 했다. 이 주교는 어렸을 때부터 학생회와 청년회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성소를 키워나갔다. 곽 신부는 “본당에서 여름캠프를 가면 항상 기타 치고 사회를 맡아 분위기를 잘 휘어잡았다”면서 “본당 신자들도 이 주교를 다 알만큼 똑똑하고 사교성도 좋았는데, 신학교 간다고 하니까 다 놀랐다”고 전했다. 이 주교는 독실한 어머니 신앙을 이어받아 어린 시절부터 성당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지동본당에서 학생회 활동을 할 때에는 어떻게든 성당에 도움이 되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 지동본당은 푸세식 화장실이었는데 친구들 몇 사람을 모아 손수 똥지게를 메고 나타나기도 했단다. 이 주교의 기타와 색소폰 연주, 노래 실력은 신학교에서도 유명했다. 학교 축제가 있으면 기타리스트로 나서 공연했다. 주교가 된 후에도 틈날 때마다 녹슬지 않은 연주 실력을 뽐냈다. 이 주교가 수원가톨릭대 교편을 잡았던 당시 제자였던 진효준(주교회의 가정과생명위원회 총무) 신부는 “대전에서 열린 생명을 위한 미사 후 색소폰 연주를 해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에 흔쾌히 무대에 올라 연주를 선보였다”고 말했다. 제6대 마산교구장 이성효(왼쪽 두 번째) 주교가 프랑스 파리 유학시절 르와르 강변 성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한 모습. 수원교구 홈페이지 험난한 성소의 길 이 주교의 둘째 형 이경효(다니엘)씨는 동생이 신학교에 가겠다고 아버지 앞에 섰던 그 순간을 기억했다. “그때 동생은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을 정도로 부르심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고 회상했다. 이 주교는 1957년 경남 진주에서 아버지 이홍희(요셉)옹과 어머니 황숙재(라파엘라) 여사 사이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5살 때 대구 삼덕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7살 때 수원으로 이사해 신학교 입학 전까지 지동성당에 다녔다. 청소년기부터 사제의 꿈을 키운 이 주교는 고교 졸업 후 곧장 신학교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공무원이자 비신자셨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수재로 소문난 아들이었기에 가족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터였다. 이에 이 주교는 아주대 전자공학과 학부 과정을 마친다. 이후 서울대 전자공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한 그는 당시 서울 연건동 교정 건너편 가톨릭대 신학대를 바라보며 다시 사제의 꿈을 꾸게 됐다. 결정적으로 1984년 5월 여의도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주례로 거행된 한국 천주교 200주년 미사와 기념대회에 참여한 것이 그를 신학교로 이끈 계기가 됐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이 다시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뜻을 돌리려 했다. 두 형도 집안에 분란이 일어난다며 뜯어말렸다. 흔히 ‘일류 대학’을 나와 탄탄대로를 포기하겠다고 나선 그의 뜻은 이해받지 못했고, 엄동설한에 집에서 내쫓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주교의 뜻은 확고했다. 이 주교는 1985년 수원가톨릭대학교에 편입해 3학년으로 입학했다. 아버지는 입학 전날까지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오로지 하느님을 향했던 자식을 이길 순 없었다. 아버지는 임종 몇 달 전 스스로 성당에 나가 아들을 위해 기도했고 병자성사를 받고 하느님 곁으로 갔다. 이 주교는 이후 1980~1990년대 오랜 독일·프랑스에서 유학생활에서 언어로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자기 자신을 던져라. 그렇게 한다면 하느님이 나를 쓰실 것이다. 그러면 나를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이성효 주교가 2011년 수원교구 꾸르실리스타들과 손잡고 인사를 나누고 있다. 수원교구 홍보국 제공 2018년 7월 3일 수원교구 제1대리구장에 취임하고 있는 이성효 주교. 수원교구 홍보국 제공 한국 교회 교부학의 권위자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사람이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지나치지 않는다. 주교로서의 권위, 교부학 박사로서의 명예도 내세우지 않는다. 때론 강하게 보일지 몰라도 알고 보면 속정이 깊은 사람이다.” 이 주교가 수원교구 1대리구장을 맡았을 당시 옆에서 보좌한 이철구(수원교구 홍보국장) 신부는 “주교님은 항상 ‘이게 다 내거냐, 교회 것이지’라고 말씀하셨다”며 “늘 교회에 순명하는 마음을 지니셨다”고 전했다. 이 주교는 교구 사제들에게 특별히 관심이 많았다. 어려움에 처한 사제들에게는 한걸음에 달려가 도와주고자 했다. 환속 사제들에게는 사재(私財)를 털어 뒤에서 묵묵히 지원하기도 했다. 이성효 주교가 2021년 최덕기 주교의 주교 수품 25주년 감사 미사에서 최 주교와 하모니카·색소폰 합주를 선보이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DB 신학교 제자들과 신자들은 이 주교를 ‘자상한 눈높이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이 주교가 오산본당 주임 시절 본당 신학생이었던 박필범(광명본당 주임) 신부는 “신부님은 자신을 어려워하고 낯설어하는 신자에게 먼저 이야기를 걸어 금세 편한 분위기를 만드셨다”고 했다. 진효준 신부는 “제자였던 사제들과 모임을 가질 땐 지금도 별명을 불러주신다”면서 “유머와 농담으로 거리감 먼저 없애신다”고 전했다. 이 주교는 한국 교회 교부학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사제들 사이에선 ‘21세기 아우구스티노’로도 불린다. 이 주교도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존경하고 닮고자 평생을 노력했다. 초대 교부학의 권위자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늘 책을 옆에 끼고 살며 여지없는 학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형 이경효씨는 “어릴 때부터 학구적이었고 성경을 읽고 묵상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신학에 관한 서적들을 탐독해 가며 복음 말씀을 이해해 나갔다”고 기억했다. 신학 연구를 하면서 학문적 개방성도 놓지 않았다. 이 주교는 학문 간 벽을 넘어서는 공동연구를 중요시했다. 신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에도 동료 교수 신부들에게 “한국 교회를 넘어 보편 교회에 도움이 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차 산업혁명이 대두할 것을 예상, 신학적 교리연구에만 매진하는 게 아닌 윤리학자와 철학자·과학자 등과의 저술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주교가 펴낸 책들은 「선포와 봉사」(2003), 「교부학 인명(공저)」(2004) 등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관련한 책도 여러 권 펴냈다. 최근엔 인공지능(AI)과의 만남을 주제로 한 「4차 산업혁명과 인류의 미래」(2019)도 출간됐다. 이성효 주교는 한국 교회 생명운동가로서 매년 생명대행진에 참여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가치와 낙태죄 폐지 반대 등을 외치는 데에 힘써왔다. 사진은 2018년 생명대행진 후 서울 명동 일대에서 이어진 생명 수호 거리 행진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생명윤리와 가정 복음화에 투신 이 주교는 가정 복음화와 생명윤리 수호에도 투신했다. 그는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과 생명운동본부장을 역임했고 가정과 생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낙태와 조력존엄사는 엄연히 살인이라는 교회 가르침을 분명히 전했다. 2022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교회는 주수에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낙태죄 폐지에 반대한다”면서 “정치적 이해득실로 낙태죄 공백이 장기화되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쓴소리를 냈다. 지난 5월에는 주교회의 차원에서 최초로 펴낸 혼인 교리서에도 공동 집필자로 이름을 올려 모든 부부가 성·생명·사랑·혼인의 가치를 느끼도록 지원했다. 시국이 혼란할 때는 어김없이 강론대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이 주교는 2013년 당시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으로 번진 당시 시국미사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며 “정치가 혼탁하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계속 혼탁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이준태 기자 ouioui@cpbc.co.kr신문취재팀 이준태 2024.12.24

「상재상서」 남기고 선교 사명에 가장 충실한 제자[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19. 성 정하상 바오로 윤영선 작 ‘성 정하상 바오로’ 출 생 | 1795년 경기도 남양주시 마재 순 교 | 1839년(44세) 서소문 밖 / 참수 신 분 | 회장·신학생 승천하신 예수님 유언 실현에 매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발현하는 모습은 예사롭지가 않다. 부활이 우리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일 것이다. 빈 무덤, 정원지기인 줄 알았던 마리아 막달레나, 빵을 떼어주실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는 엠마오의 제자들. 심지어 닫힌 문으로 들어오셨다는 성경의 말씀들까지 제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방식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인식하고 깨달았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공통점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우리가 알고 있던 바로 그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고백이다. 예수님의 승천 또한 상식을 뛰어넘는 부활의 또 다른 양상이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선포와 약속이다. 유언이 된 주님 말씀은 언제나 든든한 의지가 된다. 저 유언에 희망을 두면 둘수록 그 말씀을 충실히 살아간 순교자가 더욱 존경스러워진다.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103위 성인의 대표로 이름을 올린 정하상 바오로는 세상의 끝과 같은 이 땅을 주님의 부활과 유언이 실현된 장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조선대목구설정·선교사 영입에 큰 공로 하상은 정약용의 조카이자 순교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성녀 유 체칠리아의 아들이다. 천주 하느님 때문에 가족이 겪은 모진 고난은, 그의 집안을 양반 명문가에서 신앙의 명문가로 만들었다. 젊은 시절에는 영적인 생명을 나눠줄 성직자를 모셔 들이려고 열성을 다했다.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도 그의 큰 공로였다. 훗날 앵베르 주교가 그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다고 하니 선교사들과 정하상 바오로 자신도 민족을 위한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성스런 희망을 가졌던 게 분명하다. 그는 평신도였지만 순교할 때까지 일생 독신으로 살았고, 조선을 위한 교회의 사람으로 살았다. 끝 날까지 계신 예수님과 함께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제자들의 소명이라면 정하상 바오로야말로 그 유언의 가장 충실한 제자였다. 그리고 그가 남긴 「상재상서(上宰相書)」는 신앙의 후손에게 남긴 또 다른 유언이다. “이 도리를 한 집안에서 실행하면 집안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며, 한 나라에서 실행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전 세계에서 실행하면 온 세계가 평화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미 교회의 사람으로 세상 끝, 조선에 복음을 전하고 부활의 신비를 살아온 하상은 순교와 함께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 유언의 실현이 되었다. 한국 천주교의 초석 다진 큰 일꾼 서울 원효로에 있는 신학교 건물인 옛 용산신학교(사적)와 예수성심성당(사적)을 방문하였다. 예수성심상이 있는 성당 마당에서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모습이 느껴졌다. 사제의 꿈은 이루지 못하였지만, 한국 천주교의 초석을 다진 큰 일꾼으로서 부활의 대형 십자가를 세우고 「상재상서」를 들고 선하게 미소 짓고 계셨다. cpbc2024.05.08

돌아보는 복음화 여정전교 주일에 읽을 만한 책전교 주일이다. 과거부터 현재, 서양에서 동양, 사제·수도자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복음화가 어떻게 발전했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들을 골라봤다. 명청시기 예수회 선교사 한학의_史(역사) / 장시핑 / 전홍석 옮김 / 소명출판 16~18세기 동아시아에 온 유럽 선교사들은 동서양 간 문명교류를 이끌었다. 당시 유럽 라틴어·그리스도교 문명권에 전달된 동양 학문이나 동아시아 한문·유교 문명권에 확산된 서양 학문은 모두 이들의 저역서가 쌍방향 운반체 구실을 했다. 따라서 이들 선교사의 문헌은 초기 인류문명 교류사의 진귀한 보고로 매우 중요한 사료적·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로마 교황청 바티칸도서관과의 국제 교류 협력을 통해 「바티칸도서관 소장 동서문화교류사 문헌총서」라는 제목으로 아직 공개되지 않은 방대한 자료를 영인·발간하고 있다. 이 문헌총서의 학술 사업을 이끈 장본인이 베이징외국어대학교 장시핑 교수다. 장시핑 교수가 집필한 「명청시기 예수회 선교사 한학의_史(역사)」는 동서양 양대 문명권인 중국과 유럽 간 문화교류의 초기 역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예수회원으로 대표되는 유럽 선교사들이 남긴 방대한 한문 작품들은 동아시아의 근대적 사유의 발단·근대사상의 발생과정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토대가 된다. 명청시기 선교사 지식인들이 동아시아의 다양한 사회적 층위에서 상호작용한 역사적 사건이나 그 결과로서의 한문 문헌은 동아시아의 근대사·근대문화의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 역시 이들 한문 서학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책을 엮고 옮긴 중국저장공상대학교 동아시아연구원 전홍석 교수는 “명청시기 천주교 서양 선교사는 당대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으로, 동아시아의 세계관과 그 주류 이념이었던 유교 천권(天權) 문명을 이해하고자 대화를 나누었고 이렇게 생산된 ‘천학(天學)’이라는 학술체계의 지적 구성물을 통해 도서 교류를 진척시킨 최초의 동아시아학자들”이라고 평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느님과의 합일론 / 김광서 신부 / 게쎄마니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느님과의 합일론」은 맨발 가르멜 수도회 김광서 신부가 지난 2006년 집필한 스페인 부르고스 신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엮은 책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은 맨발 가르멜 수도회 창립자로, 자신의 깊은 신비 체험을 스콜라 신학을 바탕으로 풀어내 보편 교회에 전해준 성인이다. 이 책은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즉 본성과 본질이 다른 두 존재가 불일치하여 양립할 수 없다는 관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로 만나고 일치할 수 있다는 합일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다룬다. 이를 위해 인간은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의 완성을 위해 창조되었으나 원죄 이후 죄와 결점, 욕의 속박을 받게 됐다는 인간학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십자가의 성 요한 영성의 목표인 변화적 합일의 완성으로써 하느님화와 그리스도화에 대해 전개한다. 인간은 육체적 감각과 욕에서 벗어나는 정화, 본질이 아닌 것과 하느님이 아닌 것에 대한 부정, 믿음·희망·사랑의 대신덕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간다. 그렇게 정화된 인간은 하느님과의 합일이라는 사랑의 완성 단계에 이르게 된다. 저자는 “성인의 저서와 가르침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명제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드리고 싶었다”며 “성인의 영성은 이러한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에 바탕을 두고 사랑에서 출발해서,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사랑으로 완성되는, 사랑의 영성”이라고 말했다. 사제·수도 성소의 심리학 / 미하일 센마르토니 신부 / 김동규 신부 옮김 / 가톨릭대학교출판부 성경·신학과 교회 전승은 ‘성소’라는 용어에 ‘부르심’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성소의 현상은 영적인 개념·심리학적 개념·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의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영적인 개념이 하느님께서 개인에게 선사하시는 직접적이고 특별한 부르심이라면 심리학적 개념은 자아실현에 초점을 둔다.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의 개념에서는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이중의 특성 안에서 성소를 바라본다. 결국 성소는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인격적 만남과 대화 안에서 자신의 깊은 내면을 인식하고 복음을 따르며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고 새로운 인격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사제·수도 성소의 심리학」은 성소의 성숙과 발달과정, 식별과 양성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1장부터 4장까지는 성소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와 신학적 성찰을 통해 성소의 진정한 의미와 차원을 개괄하고, 성소의 동기와 특징, 발달 과정을 정신분석·자아실현·자기초월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5장에서 9장까지는 성소의 의식·무의식적 동기화 과정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다양한 성소의 반대표지를 살펴봄으로써 성소 식별의 방법과 실천, 성소의 발달과 성숙을 향한 교육학적 토대를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10장에서 14장까지는 축성생활자로서의 독신, 성소 지도자의 양성, 성소의 위기를 병리학적·교육 심리학적·영성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미하일 센마르토니(예수회, 1945~) 신부는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의 심리학부·영성신학부 교수로 일하며 심리학과 영성신학에 관한 다채로운 글을 저술하였다. 성 장주기 회장과 성 요셉 신학교 / 여진천 신부 / 기쁜소식 한국 교회에는 103위 성인이 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충북 제천의 배론에서 20여 년을 살았던 장주기(요셉, 1803~1866) 성인이다. 경기도 화성의 형편이 괜찮은 가문에서 태어난 성인은 학식 있고 슬기로우며 신심이 두터워 모방 신부에 의해 평신도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20년 동안 회장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고, 1856년 베르뇌 주교가 배론 지역에 신학교를 세우자 자기 집을 신학교로 제공하며 신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이를 부인하지 않아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성 장주기 회장과 성 요셉 신학교」는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교회로부터 받은 소임을 충실히 따른 성인의 모범적인 일생을 담고 있다. 성인의 봉헌으로 세워진 성 요셉 신학교의 의의도 기술했다. 부록으로 원주교구 출신 순교자 97위의 명단과 한국전쟁 중 순교한 원주교구의 성직자와 평신도 11위(근현대 신앙의 증인들)의 명단을 함께 실어, 박해와 전쟁 중에서도 이어진 신앙의 뿌리를 다시금 되새겨 보도록 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신문취재팀 윤하정2024.10.16

“왜 겁을 내느냐?”[월간 꿈 CUM] 꿈CUM 묵상_예수의 일생 (12)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예수(제주 성이시돌 목장 새미은총의 동산 조형물) 예수님께서 군중 앞에서 수많은 비유를 들어 하느님 나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신 그날이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해가 저물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그렇게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있는데, 순간 엄청난 풍랑이 일었습니다. 성경은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르 4,37 참조) 배가 조금 기울어진 상황이 아닙니다. 배에 물이 가득 차 침몰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당시 모습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마르 4,38) 그래서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죽을 수도 있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갈릴래아 호수를 안방처럼 여기던 어부가 네 사람이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배를 다루는 일이라면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이 베테랑 어부들이 이렇게 겁을 먹을 정도였으면 당시 풍랑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쿨쿨 잠을 자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이해되시나요? 제자들이 지금 배에서 물을 퍼내고 난리가 났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이처럼 편하게 잠을 주무시고 계셨을까요? 혹시 전날 밤 과음을 하셔서? 숙취 때문에 인사불성? 그건 아닌 것 같구요…. 이때 잠을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많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지금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한자 숙어는 많습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 사면초가(四面楚歌), 혼비백산(魂飛魄散), 우왕좌왕(右往左往)….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시죠? 아주 평온하게 주무십니다. 그렇게 평온한 예수님을 제자들이 흔들어 깨웁니다. 그러자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그러면서 바다를 향해 손을 뻗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그러자 바람이 멎고 고요해졌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지금 파도가 크게 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잔잔합니다. 제자들은 왜 호들갑을 떨고, 난리가 났을까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믿었을까요. 어떤 믿는 구석이 있길래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편안하게 잠을 주무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아버지가 자신과 늘 함께(CUM) 계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1분 1초도 그 사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시편 말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4) 예수님은 이 믿음 속에서 사신 분입니다. 그렇게 완전한 믿음 속에서 거니셨던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가신 것이 있습니다.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믿음 속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늘 고요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시에 이런 묘한 말도 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세상이 주는 평화가 ‘틀렸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주시는 평화와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는 무엇이 다를까요. 다음 호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글 _ 안성철 신부 (마조리노, 꿈CUM 지도신부, 성 바오로 수도회) cpbc2024.01.15

에큐메니칼은 그리스도인의 일치 뜻하는 용어[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38) ‘에큐메니칼’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셨나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3월 23일 바티칸 도서관에서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의장 쿠르트 코흐 추기경(맨 왼쪽)과 제네바에 본부를 둔 세계교회협의회(WCC) 대표단을 만났다. 사진=OSV 개신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에큐메니칼’(ecumenical), 또는 ‘에큐메니즘’(ecumenism)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뜻하는 용어로, 그리스어의 ‘오이케오’(οκω), 곧 ‘살다’라는 뜻의 단어에서 파생된 ‘오이코스’(집, 가정, 세상)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에큐메니칼’을 의미하는 ‘오이쿠메네’(oikoumene)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기원전 5세기로, 헤로도투스(Herodotus)와 크세오파네스(Xenophanes)가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 또는 지상의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을 제외한 모든 인간계’를 총칭하는 용어로 활용하였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오이쿠메네’가 ‘로마 제국이 통치하는 세계’를 지칭하였고, 로마 제국이 동서로 양분된 뒤에는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일치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일치를 뜻하는 용어였습니다. 이 용어가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뜻하는 용어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부터입니다. 개신교 교단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이 사회적 투쟁으로 격화되어 사회 위기를 불러왔고, 19세기 말 유럽 식민지 정책의 확장에 따라 선교지에서 나타난 선교사들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고자 대화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서구 사회가 전쟁의 참상으로 고통을 겪을 때 개신교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상호 연대가 필요하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에큐메니즘은 좁은 의미에서 서로 다른 성경 해석과 전통, 교회 지도의 형태나 지역적 특성 등의 다양한 이유로 갈라진 개신교 교파들이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결속을 도모하는 세계 교회 일치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48년에 창립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물론 인간의 삶에 관한 모든 측면, 곧 정치, 경제, 사회, 창조 질서에까지 일치와 화해를 지향하는 용어로 에큐메니즘의 의미를 확장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에큐메니즘’이라는 용어보다는 ‘그리스도인 일치 운동’, 또는 ‘교회 일치 운동’이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촉진하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는 가톨릭교회의 사도좌로부터 갈라져 나간 정교회와 개신교 교단들과의 형제적 일치를 위한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노력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분열은 세상에 일치와 화해를 선포하는 교회의 올바르지 못한 표양이 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소통과 친교를 가로막는 것이기에 갈라진 형제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를 극복하는 회심에서 그리스도인의 일치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한국의 경우 천주교와 개신교가 같은 그리스도교라는 동질감보다는 서로 다른 성경 해석과 교회에 대한 편견으로 오랜 상호 불신의 역사를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에큐메니칼이라는 용어가 지칭하듯 모든 그리스도인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세상에서 살아가며 “한 하느님, 한 주님, 한 성령님”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음에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하고, 함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그리스도의 한몸이 되어야 한다는 공동의 과제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 cpbc2023.12.20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10주일- 영적 투쟁에서 싸워 이겨 주님께로 나아가자](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6/04/klr1717485932120.jpg)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10주일- 영적 투쟁에서 싸워 이겨 주님께로 나아가자유승록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 기도사제)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통한 복음 선포의 활동이 진행될수록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의 오해와 비난의 강도도 높아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몇몇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마르 3,22 참조)라고 예수님을 모함합니다. 베엘제불이란 우두머리 마귀의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 ''미쳤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내고 있다고 재차 모함합니다. 예수님의 병자 치유와 구마행위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통해 이뤄진 것이라며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이라는 단순한 이치를 제시하며 사탄의 힘을 빌려 사탄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사탄을 묶어놓는 이는 사탄보다 더 힘센 이, 곧 하느님 능력을 드러내는 예수님 자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수행하시는 일을 사탄의 것으로 돌려 예수님을 통해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하느님 편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아서기를 거부하는 죄입니다. 하느님을 반대하는 세력의 인격화된 표현들이 마귀·사탄·악마·유혹자·원수 등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 그런 세력들이 언급돼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기에 신앙생활에서도 그들과의 영적인 싸움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전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기도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성인들, 그리스도 자신이 기도란 일종의 싸움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누구와 싸우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 자신과 싸우는 것이며, 인간에게 기도를 외면하게 하고, 인간과 하느님의 일치를 깨뜨리려는 유혹자의 계략에 맞서는 싸움이다. (⋯) 그리스도인의 새 생활을 위한 ‘영적 싸움’은 기도의 싸움과 분리될 수 없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25항 참조)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물리쳐 이기신 분이니 하느님의 반대자들을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영적 투쟁에서 우리가 맞서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보다 더 깊은 일치를 위해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기도생활을 실천해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표현은 오늘날 근동 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기나 가까운 친척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란 그분의 친척들로 이해됩니다. 그들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은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의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냐며 오히려 반문하십니다. 그런 말씀이 어머니에게 불효하라거나 친지들과 반목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강조점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우선이며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기준이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교회는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세워졌고, 하느님 뜻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더 자주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에 담긴 하느님 뜻을 실천해 일상의 영적 투쟁에서 승리하여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유승록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 기도사제) cpbc2024.06.04
![[베네딕토 16세 선종] 교회 전통 살리고 성경에 근거한 신앙 회복에 힘써](//cpbc.co.kr/CMS/newspaper/2023/01/rc/838420_1.4_titleImage_1.jpg)
[베네딕토 16세 선종] 교회 전통 살리고 성경에 근거한 신앙 회복에 힘써회칙으로 돌아보는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11년 4월 22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 금요일 예배에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CNS시대를 위한 방향성 제공회칙은 교황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열쇠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재임기간 총 3개의 회칙을 발표했다. 가장 먼저 2005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복음의 핵심인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를 발표했다. 이 회칙을 통해 교황은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도록 창조된 피조물로서 인간의 역할을 역설했다.2년 후인 2007년 11월 30일에는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를 발표했다. 교회 공동체와 현대인들이 희망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시대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지를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적 관점에서 말했다. 교황은 회칙에서 기도와 고통이야말로 ‘희망을 배우는 학교’라고 강조했다.마지막으로 2009년 6월 29일에는 21세기의 첫 사회회칙 「진리 안의 사랑」을 발표했다. 교황은 회칙을 통해 글로벌 경제위기와 빈곤, 환경파괴 등 현대 세계가 직면한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면서, 진정한 인간 발전을 위한 시민 사회의 연대와 형제애, 인류 가족의 국제적 협력에 이르기까지 여러 측면의 미래적 전망을 제시했다.교황은 3개의 회칙 외에도 권고 「사랑의 성사」와 「주님의 말씀」, 자의교서 「교회 일치」와 「믿음의 문」 등을 발표했고, 저서 「나자렛 예수」를 통해 인격적 만남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전하기도 했다.특히 교황은 라틴어 사용을 권장하고 사용 분야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교회 전통을 살리고 성경에 근거한 신앙 회복을 위해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보급을 확산시켰다. ‘종교 간 일치’, ‘화해’, ‘대화’, ‘평화’‘종교 간 일치’, ‘화해’, ‘대화’, ‘평화’는 베네딕토 16세를 대표하는 말들이다. 교황은 즉위 직후부터 “그리스도교의 일치와 종교 간 대화, 비신자들과의 대화가 자신의 첫 번째 임무”라고 밝히며 종교와 이념의 벽을 허물고 상호 대화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즉위 후 첫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집전한 교황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와 중동, 라틴아메리카의 평화를 기원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독일 출신 교황으로서 아우슈비츠수용소를 방문해 죽음의 벽 앞에서 나치 만행에 희생된 유다인들을 위해 기도했다. 11월에는 무슬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슬람 국가 튀르키예를 방문해 “사랑은 위험보다 강하다”며 평화를 위한 종교의 역할을 역설했다. 평화를 위한 교황의 움직임은 끝이 없었다. 교황은 그해 12월 그리스 정교회 수장 크리스토둘로스 대주교와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고 “종교는 전 세계에 평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 외에도 성공회 신자 및 성직자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할 수 있는 교회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영국 교회를 공식 방문하기도 했다. 중국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아가 교황은 2000년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 사과하면서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한 잘못을 매우 부끄러워하며 인정한다”고 밝혔다. 한반도에 대한 관심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한반도 평화에 대해서도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 한반도의 비핵화를 비롯한 평화와 화해를 독려했고, 특히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나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006년 교황청 주재 신임 일본대사의 신임장을 제정받는 자리에서 교황은 “교황청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남북 양자협상과 다자협상을 권장한다”고 밝혔다.2007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접견하면서는 “한국 국민들은 50년 넘게 가족과 헤어져 사는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다”며 “그 고통에 영적으로 함께 하고 있고, 하루속히 해결되도록 기도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아울러 북한 취약 계층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도 반드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9년 교황청을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도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 주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남북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손을 내밀었다.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는 “남북 대화의 중요한 진전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이바지하리라는 희망을 낳고 있다”면서 전 세계 신자들의 기도를 이끌었다. 온전한 자유로 사임한 교황,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따라서“하느님 앞에서 거듭거듭 제 양심을 성찰하면서, 저는 고령으로 더 이상 베드로 직무를 수행하기에 맞갖은 힘이 없다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사임 선언문 중 일부다.가장 최근 생존하는 교황이 직무에서 물러난 것은 600여 년 전인 1415년 그레고리오 12세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했고, 건강상의 이유로 온전히 자발적 사임을 발표한 것은 2000년 교회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교황은 2월 11일 사임을 발표하고 재의 수요일 다음 날인 2월 14일 로마 교구 사제들과 만남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언급하며 “우리는 교회와 공의회가 진정으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나는 세상으로부터 잊힐 것이나, 여러분과 변함없이 함께할 것이고 여러분도 그럴 것으로 확신한다”며 오히려 사제들을 위로했다.교황은 육체적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가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다. 공의회 당시 독일 쾰른대교구장 신학 자문위원으로 모든 회기에 참석했던 교황은 최근까지도 공의회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지난해 10월 미국 오하이오주 스튜번빌 소재 프란치스코 대학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보낸 메시지를 통해 “공의회는 의미심장할 뿐만 아니라 필요했고, 현대 세계 안에서 교회의 문제는 마침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고 역설하며 마지막까지 교회와 시대의 사명을 분명히 밝혔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cpbc2023.01.01
![[제12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야훼이레](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3/11/BC51741676294548.jpg)
[제12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야훼이레김정화(체칠리아, 수원교구 동탄능동본당)하느님 당신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하느님께로 가 꽃이 되었다. 아름드리 큰 나무에 걸터앉아 나뭇잎 사이의 햇살을 맞는다. 나무는 하느님이셨고 나의 숨이시며 나의 쉼이셨다. 목 놓아 흘린 눈물은 새들의 지저귐에 반짝인다. 나무는 벗이다. 꽃, 사람, 동물, 새, 여러 모양으로 말을 건넨 구름도 벗이다. 손끝을 스치며 감각을 깨우는 바람도 벗이다. 눈을 감으니 곳곳에 당신의 숨결이 닿는다. 숨결에 눈을 맞춘다. 침묵 끝에 평온함이 함께 한다. 말씀이 생명이다. 생명이 내 숨결과 호흡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돌아보니 곳곳에 계셨다. 내 눈길 내 숨결 내 손끝에! 곳곳에 계셨다 마리아의 잉태 순간은 받아들임의 영성이다. 아이의 장애진단 선고는 예수님의 사형선고가 아닌 마리아의 받아들임의 영성이었다. 어떻게 지나왔을까? 갈팡질팡했던 시간 속에서 시련은 고통 그 자체였다. 고통이 은총이며 부활임을 알고 나서야 삶은 바뀌었다. 삶은 받아들임이다. 결혼도 출산도 시련도 매 순간의 일상도. 마리아께서도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으셨다. 두려워하셨고 곰곰이 생각하셨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기쁜 소식을 하느님의 뜻으로 들으시고 나서야 받아들이신다. 받아들이는 과정은 모두가 다르다. 뒤돌아보니 지나온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받아들이는 과정이 길었지만 이제는 온전히 나를, 시간을, 삶을 받아들임이다. 하느님 당신은 내 영혼의 닻입니다. 당신의 침묵은 외면이 아니심을 압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가는 거북이는 기다려주는 희망이 있기에 완주한다. 아이를 통해 볼 수 있게 하셨다. 기다림, 느림, 울림이 그래서 기도가 되었다. 당신 침묵은 언어이시며 자비이심을 알게 하셨다. 숨 가쁘게 달려왔다. 당신 품에 안으시어 숨을 쉬게 하셨고, 당신을 내주시어 쉬게 하셨다. 아는 게 하나 없으니 손에 쥐어주시고 이건 너와 나의 사랑이란다, 이건 너와 나의 사랑의 증표인 인내란다. 지금까지 그러하셨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저를 사랑해주셨다. 존재성도 정체성도 없었던, 왜 태어나게 하셨느냐고 나를 부정하고, 하느님을 부정했던 삶이었다. 내 일상은 가시밭의 백합화의 삶이 되었다.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내어 맡김의 일상을 사는 것이다. 근심, 걱정, 불안, 미래는 내 생각이니 생각은 쉬기는 하되 멈추게는 하지 말자. 시간의 흐름 속에 흘러가게 두자. 내어 맡김으로! 절망 펑범한 어느 날, 그 일상이 사라졌다. 아침에 뜨는 해는 뜨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건 어둠이다. 달빛도 별빛도 사라진 내 일상, 우리 가족의 일상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일상의 소중함을 찾아야 하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발밑의 늪은 어쩌란 말인가? 준비되지 않은 내 일상이 산산조각 깨진 접시처럼 요란하게 시작되었다. 아이의 이름을 짓기도 전에 기도하기 위해 교우 분들과 성체조배실에서 불리던 그 이름 은총이는 우리 가족에겐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은총이는 기쁜 소식이 되어 우리 집 셋째로, 막내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왔다. 태어나기 전 양수 과다로 검사도 하고 일정량이 넘으면 바늘을 꽂아 양수를 빼야 했다. 다행히 바늘 꽂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배가 너무 커서 한 달을 남겨 두고 제왕절개로 태어났다. 형, 누나랑 똑같은 3.1㎏, 건강하게 태어났다. 새해 문을 열고 눈처럼 예쁜 아이가 선물로 왔다. 가슴을 에이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6개월. 뇌수막염으로 입원한 아이는 밤새 아프고 힘들어했다. 조금 나아지나 하고 맘을 놓을 때쯤 구토를 하고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이 손을 쓰는 중에도 아이는 여러 번 경기를 일으켰다. 그러면서 숨이 넘어갔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급박하게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엄마는 들어갈 수 없다. 눈앞에서 닫히는 문이 거대하다. 내가 엄만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닫힌 문이 말하는 것 같았다. 병원에 있는 성당으로 갔다. 말을 잃어버렸나? 왜 말이 나오지 않지? 지금도 생각나지 않는다. 뭐라고 했을까? 면회 시간마다 아이의 귀에 같은 말만 했다. 영혼은 듣고 있기에 들려주었다. 엄마, 아빠는 준희 사랑해! 누나도 준희 사랑해! 예수님도 준희 사랑해! 성모님도 준희 사랑해! 형아도 사랑해! 아이는 3일 만에 깨어났다. 기쁨도 잠시였다. 여러 번 경기를 일으킨 아이에게 간질이라는 병명이 내려졌다. 받아들이기가 너무 버거웠다. 간질이라니, 내가 죄를 많이 지었나? 내가 착하지 않아서인가? 자책감만 들었다. 주님께 매달렸다. 말씀하시지 않는 주님을 바라봤다. 전문의가 있는 병원으로 다시 진료를 신청했다. 먼저 병원에서 치료한 일과 100일 동안 지켜보면서 경기하는 약을 안 먹였는데 경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과는 간질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6개월에 겪은 마지막 시련이라 생각했다. 그 후로도 잔병치레를 큰 병이나 앓는 것처럼 치렀다. 36개월이 되었을 때 시련은 시작되었다. 모든 발달이 느렸다. 언어는 더 느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을 찾으니 입원해서 검사하자고 했다. 느낌이 불안했다. 검사하는 동안 형과 누나는 미사 참례를 하며 동생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느낌으로 누나와 형도 아는지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3일간 검사한 결과는, 왜 나한테만 이러냐고? 왜 나만 불행하냐고? 왜, 나만 미워하냐고, 원망을 했다. 아주 먼 남의 이야기라 생각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전반적 발달장애 2급. 자폐성 장애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하소연했다. 그냥 한 달을 울고 다녔다. 울분과 설움을 모두 표출해서였을까? 현실이 보였다. 울음을 토해내면서 아이를 인정하게 되었다. 뇌수막염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 닫혔던 문 앞에서 절망은 잊었다. 두 번째 절망은 진짜 절망이었다. 시선(신뢰, 존중) 엘리베이터에서는 작은 소리에도 모두의 신경이 하나로 모인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니 아이가 부끄럽고 이 순간이 부끄러웠다. 왜 부끄러웠니? 나에게 묻는다. 일반 아이였으면 아무 생각 없이 아이를 달랬을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이기에 내 신경은 타인의 시선에 갇혀있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봤다. 부끄러웠다. 누군가 나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아주 많이 슬플 것이다. 주님 앞에서 마음을 추슬렀다. 괜찮아, 괜찮아. 아이를 향해 한 말은 내게 하는 말이었다. 놀랍게도 아이가 듣는 것 같았다. 소리 내는 횟수가 줄었고 나는 마음이 편안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마음이 나비처럼 가볍다. 이유도 모른 채 늘 무거웠다. 타인을 향했던 시선은 오로지 아이에게만 향했다. 내 시선은 늘 아이만 보고 있었다. 예쁘다. 예쁘다. 예뻐 죽겠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워서 죽겠다. 늘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말을 먼저 하다 보니 어느새 아이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걸 느꼈다. 갈팡질팡 혼란스러울 때마다 주님께 기도할 줄 몰랐던 나는 오소서 성령님! 주님께 봉헌합니다! 라고 기도드렸을 뿐인데, 지혜를 주셨고 함께하고 계심을 이렇게 알게 하셨다. 어느 날 고학년이 된 아이에게 준희야, 엄마는 행복해! 준희는? 하고 물었다. 잠깐 생각하는 걸까? 하는 순간 말했다. 준희도 행복해요. 아! 눈물 나도록 행복이 더해졌다. 내 시선은 아이를 신뢰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시선은 어디 있을까? 하느님을 향해 있음을 믿는다. 성당 가는 건 아이에게 의무다. 일상을 본능처럼 살듯이 아이에게 신앙생활 또한 본능인 것 같다. 자폐는 타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본인이 원할 때 행동한다. 청소년 성가, 어린이 성가, 가톨릭 성가, 성령기도회 성가 책 가사를 컴퓨터로 필사했다. 몇 년 동안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빠르고 경쾌하고 힘있게 들렸다. 수도회에서 생활하시는 작은 수사님 같다. 하느님을 위한 시선은 지혜와 함께하셨다. 그 지혜는 아이와 함께 계셨다. 나와 아이의 시선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축복이다. 신뢰와 존중이 되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신뢰와 존중은 아이가 성장하는 빠른 원동력이 되었고 마중물이 되었다. 한그루의 귀한 나무가 되었다. 기다림의 미학(느림, 울림) 아이 옆에서 이름을 불렀다. 준희야, 준희야! 엄마를 보고 고개를 돌린 시간은 0.1초? 0.2초? 두 번, 세 번을 반복해도 아이의 행동은 똑같다. 막막함에, 서러움에 흘린 눈물은 원망의 눈물이다. 차라리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라고 하세요. 쳐다보지도 않는 아이와 무엇을 할 수 있어요 하며 목놓아 울었다. 그렇게 오열하는 엄마를 아이는 철저히 외면한다. 그 등에서 암담함을 느꼈을 때 지혜가 스쳤다. 아! 왜? 나는 아이에게 주려고만 했을까? 아이가 원하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이 스치며 드는 또 다른 생각은, 아이가 원하는 게 있을까? 전자는 지혜였다. 후자는 내 생각이었다. 깨달음이 스친 자리는 분명했다. 며칠을 아이가 하는 행동을 바라봤다. 패턴이 보였다. 자기만의 규칙대로 행동했다. 뱅글뱅글 도는 등 자폐아이가 하는 행동을 잠깐 지켜보다가 관심을 바꾸는 행동으로 제지했다. 뇌수막염으로 중환자실에서 숨이 넘어가 호흡기를 달고 있는 아이의 귀에 면회 때마다 들려주었던, 상황을 재연하는 삶이 일상이었다. 영혼에게 들려주듯 이해를 시켰다. 처음 신발을 신기는 과정에서 내 입은 쉬지 않고 반복하며 아이가 스스로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엄마가 잡고 있는 발에 신발을 걸쳐놓을 때까지 몇 주가 걸렸다. 휴지를 각 티슈 앞에서 뽑는 것부터 엄마 손에 놓아주는 것도 몇 주가 걸렸다. 음식 앞에서 맛있니? 네! 하기까지도 몇 달이 걸렸다. 2~3단어로 말하는 것도 몇 년에 걸쳐 했다. 비로소 중1 때부터는 수다쟁이가 되었다. 성격이 급했던 내게 기다리는 건 힘겹다. 나는아이를 키우며 성화되어 갔다. 아이가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 기다려야 한다는 것. 모두가 그날 목놓아 울던 날, 설움에 울고 울분에 울던 내 기도를 들으셨다. 지혜를 주셨던 날 내 세상은 시작되었다. 지혜가 함께하시는 날이었다. 아이를 지켜보며 아이의 마음을 보았던 날, 그 마음은 아이가 보내는 또 다른 언어였다. 감각의 언어다. 동화책을 정리하다 보면 아이가 늘 펴놓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기를 여러 날이었다. 아!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아이와 소통한 느낌이었다. 마음 한 자락 보았을 뿐인데 마음이 가득 찼다. 아이는 자신을 거북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였다. 토끼는 잠을 자고 거북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기어가는 장면, 아이는 그렇게 달리고 있었다. 힘겹지만 그 끝은 완주였다. 기다림, 느림, 아이는 계속해서 울림으로 성장하고 있다. 치료 과정에서 아이와 실랑이가 벌어지면 앞이 캄캄했다. 그럴 때면 오소서 성령님! 주님께 봉헌합니다! 라고 화살기도를 참 많이 바쳤다. 버스 타기 전 쉬를 해야 하는데 그냥 탈 때가 있다. 버스에서 아이가 땀을 뻘뻘 흘린다. 쉬가 마려운데 참느라 애쓰는 것이다. 어쩌지, 나도 애가 탔다. 버스에서 내려 바지를 벗기니 시원하게 눈다. 그 후에 몇 번이나 설명하고 기저귀를 채웠다. 그런데 땀을 흘리면서도 쉬를 안 한다. 버스에서 내려 기저귀를 푸니 그때서야 쉬를 한다. 오랫동안 간직한 한마디, ‘아! 준희는 장애가 아닐 수도 있다.’ 가슴깊이 새겨졌다. 거북이는 기다림이었다 느림이었다. 감각을 깨우다(매일 나가기, 일기) 힘겹게 유치원에 입학했다. 통합유치원이 거의 없는 시대였다. 성당 유치원에서 받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렸다. 오랜 대화 끝에 수녀님께서 성가정이네요? 하시며 신부님께 말씀드려 보겠다고 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첫날 아이를 보내놓고 걱정을 한가득 안고 묵주기도를 바쳤다. 하루하루 숨 가쁘게 달렸고 갈팡질팡했으며 노심초사했다. 원복 입은 모습은 멋있었다. 평범한 아이처럼 보였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지혜가 함께하심을 조금씩 느껴가고 있었다.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의 표정을 읽는다. 좋은 것도 안 좋은 것도 아닌 그저 그런 표정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히고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백화점으로 간다.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손을 잡고 다닌다. 2~3시간을 돌아다니고 간식을 먹는다. 하루는 백화점, 하루는 쇼핑몰, 마트, 시장, 공원, 동네를 누빈다. 유치원을 다녀와서, 학교를 다녀와서 주말에도 방학에도 매일 나갔다. 기분도 전환할 겸 자극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저녁이면 아빠도 누나도 형도 함께했다. 매일 나가는 행동은 감각을 깨우는 일 중의 하나였다. 고1 때 언어치료를 했다. 아이가 그 전에는 원하지 않아서였다. 이해를 시키니 수긍했다. 선생님께 일기 쓰는 걸 지도해달라 부탁드렸고 아이에게도 설명했다. 2년 동안 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일기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중학교 때 일이다. 손톱 깎는 걸 가르쳐야 했는데 엄마가 해야 할 때가 있고 선생님께서 해야 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효과 만점이었다. 선생님께서 어머니 덕분에 다른 아이들도 스스로 손톱을 깎게 되었다고 좋아하셨다. 이번엔 늘 고민이었던 용변 후 뒤처리를 부탁드렸다. 주먹을 살짝 쥐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물감을 묻혀 교육시키면 어떨까요? 이것도 아이들의 반응이 좋았다. 감각을 깨우려면 끊임없이 두드려야 했다. 해주기보다는 이해시키고 반복하면서 기다려주었다. 기억력이 좋은 아이는 첫영성체 때 기도문을 제일 먼저 외우고 제일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미사 참례해서인지 기도문 외우는 건 다른 아이들보다는 수월하게 지나갔다. 긴 미사도 칭얼대지 않고 참례를 했다. 울며 기도하며 아이와 함께 성장했다. 성체를 모시고 묵상하면 아이는 엄마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눈물에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손등으로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던 손길에서 주님이심을 느꼈다. 작은 손이 주는 큰 위안이었다. 재울 때면 불러주던 노래가 있었다. 반짝반짝 준희별 아름답게 비치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준희별 아름답게 비치네. 작은 별 노래를 준희별로 바꾸어 불러주었다. 반짝반짝 빛나기를 소망하는 엄마의 기도였다. 고학년이 되었을 때 아이가 이 노래를 불렀다. 깜짝 놀라 엄마가 불러준 거 기억나니? 하니, 네~ 라고 대답했다. 처음 아이에게 언어를 가르칠 때였다. 기억 저편에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사촌 큰어머니 댁에서 인사하고 가려던 때였다. 사촌 오빠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니, 큰어머니가 그래서 혼자 가겠다고? 하셨고 이에 오빠는 또 웅웅 소리를 냈다. 큰어머니가 뭐라 뭐라 하시는 장면이 기억 속에 충격으로 남아있었다. 어린 마음에 이상한 장면이었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는데 큰엄마는 대화를 하셨다. 이 일은 기억 속에 진하게 남았다. 어느 날 아이가 놀다가 와서는 마음이 담긴 언어로 엄마? 엄마? 하는 소리에 너무 놀랐다. 벙어리는 아니구나, 말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때 기억 속에 묻혀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만이 알아들었던 거였다. 큰어머니가 말을 못하는 오빠와 대화가 가능했던 이유였다. 감각의 언어 엄마와 아기가 나누던 감각의 언어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자폐 아이와의 소통은 그렇게 힘겨운 시간이 되었다. 늘 바라보고 있어야 하고 모든 신경이 아이를 항해 있어야 했다. 대답하지 않는 아이에게 몇 번을 묻고 대신 대답하며 설명했다. 진심이 통해서였을까? 감각으로 느낌으로 긍정 또는 부정의 대답을 한다. 표정으로, 그렇게 미소로 무엇을 하든 아이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꼭 해야만 하는 이유를. 그러면 감각으로 대답하던 아이가 단어로 말한다. 아멘! 알렐루야! 형, 누나가 엄마라고 했을 때도 기쁨이었지만 아픈 아이가 엄마! 엄마! 부르는 소리는 가슴을, 영혼을 울린다. 아이가 부르는 소리는 울림이다. 횡단보도에 도착하기 전 파란불이 켜졌을 때도 기다리는 마음을 심었다. 장애 아이들은 모든 감각이 다 열려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더 예민하고 날카롭게 반응한다. 우리 아이도 감각으로 듣는다. 눈으로 듣고, 귀로 듣는다. 듣는 영역이 넓다. 이걸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모든 감각으로 들으니 눈 맞춤이 더 안 되는 것이다. 스스로는 다 듣고 이해했으니 급한 일이 없다. 상대가 왜 저러는지 표현은 못 하지만 알고 있다. 표현하고 싶지 않다. 행동하고 싶지 않다. 왜 해야 하는지 관심도 없고 이유도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이 감각으로 깨우고 두드리고 엄마와 눈 맞춤해야 한다. 중고등학교 때는 많이 걸어 다녔다. 걷다가 카페도 가고 장도 보고 아이쇼핑도 했다. 대학교 때는 3년 동안 서울 도보성지 순례와 성지순례, 피정을 다녔다. 개인 피정을 갔을 때 신부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을 찾아 읽고 묵상을 했다. 성경을 너무 잘 찾는다. 신약 구약 순서를 알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하신 일이 놀랍다. 엄마가 묵상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다. 아이도 했으리라 믿는다.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의 방식으로 말이다. 함께하는 피정도 그런 방식으로 듣고 있으리라. 3년 동안 지하철을 이용해 성지 순례를 다닌 결과 환승하는 법과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놀랍다. 주님이 하시는 일! 야훼이레! 말씀이 생명이다. 지난해 가을 어느 시월 삼성 희망별숲에 취업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고용보험훈련센터를 다닌 후다. 처음엔 어디에 취업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집에서 생활하는 건 예측할 수 있지만 직업을 찾기란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훈련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면 선생님들은 아시겠지 하면서 주님만 믿자 하는 마음이었다. 나에서 우리(함께 성장) 처음 진단을 받고 목놓아 울 때 아이의 모습은 ‘바위’ 같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무생물 같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 분리된 느낌이다. 그래서 더한 절망을 느꼈다. 그 절망감에 바위 같은 아이를 보며 어떤 원망의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원망을 기도로 들으셨다. 선으로 갚아주셨다. 하느님 앞에 엎드렸다. 키워본 적은 없어도 눈으로 본 적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시각장애인을 위한 맹학교나 특수학교 봉사도 다녔다. 그곳에서 본 아이가 내게 왔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지혜가 스쳐 지나간 자리는 컸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사라졌다. 오소서 성령님! 주님께 봉헌합니다! 화살기도를 남발했다.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했다. 성령의 이끌림으로 치료는 10개월만 다녔다. 준희는 반드시 되돌아오니 다시 생각해보라는 선생님께, 그래도 유치원 보내볼게요 라고 말했다. 결국 준희는 돌아가지 않았다. 유치원 3년,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3년 과정을 모두 마쳤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다. 다른 엄마들 시선도 똑같았다. 내 마음은 불안하지 않았다. 적응 못 하면 다시 오면 되니까 괜찮다며 나를 다독였다. 유치원 문을 두드렸을 때 한 번에 얘기가 되지는 않았지만 끈질기게 매달렸고 성가정이라는 소리를 듣고 통과했으니 이 또한 야훼이레다. 아이는 자신을 나무로 표현했다. 나무를 그리고 이끼로 푸른 잎을 만들었다. 아름드리 큰 나무는 아니지만 작고 앙상한 나무도 아니다. 그 나무는 보기 좋게 컸다. 푸르게 푸르게, 아이의 마음이다. 그 옆에는 ‘행복한 나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이 거름이 되어 나무는 성장하고 있다. 이 나무의 나이테는 올해 23년이다. 자폐라는 이름의 절망의 시간은 우리라는 희망의 시간으로 성장했다. 나였던 아이는 우리라는 말로 마음 밭을 일궈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아이의 시선이 하느님을 향해 있으니 하느님 사랑을 받은 아이는 하느님의 영광의 열매를 맺는다. 나에서 우리가 되기까지의 시간은 눈물과 기도의 시간이 마중물이었다. 반복, 기다림, 느림, 울림이 기도가 되었다. 기도는 열매를 맺는다. 일상(교육) 우리는 주어지는 하루를 본능으로 그냥 살아간다. 우리 아이는 일상이 교육이다. 문을 열고 나갈 때 뒷사람이 다치지 않게 확인 후 문고리를 놔야 한다는 것도 지금까지 반복하는 교육이다. 악수도 어른이 손을 내밀면 준희는 두 손으로 하는 거라고 몇 년을 교육시킨 후에 이루어졌다. 자신과 관련된 건 빠르게 익히는 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는 것들은 오래 걸린다. 일기쓰기는 언어 치료하는 2년 동안 수업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다. 수영은 고등학교 3학년에 시작해서 지금은 제법 잘한다. 현재는 배영 발차기를 배우고 있다. 서울 지하철 이용은 3년 동안 도보 성지순례와 희망의 순례를 통해 이루었다. 취업을 위해 다녔던 훈련센터 출근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야 훈련센터에 도착하는데 옆으로 집에 가는 버스가 보이니 탔다가 잘못 탔음을 알았다. 노선을 확인한 후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려 다시 전철을 타고 훈련센터로 가는 역에서 내렸다. 1시간 30분 지각이었지만 아이는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대로 전철역만 가면 찾아갈 수 있음을 3년 동안의 지하철 이용 교육을 통해 인지한 것이다. 교육은 일상이다. 마트에서는 과자를 직접 한 개만 선택하는 교육을 통해 선택과 결정 그리고 책임을 배우게 했다. 지금도 선택한 걸 계산하기 바로 전에 바꾼다. 초등학교 1학년, 더 많이 긴장한 시간이자 한 해였다. 장애아를 키우는 건 나의 고통이며 가족의 아픔이다. 타인은 타인이다. 이해, 위로, 공감은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따뜻한 선생님을 만나면 그 해는 마음에 위로가 된다. 아이를 밀어내는 교사에게 무얼 바랄 수 있을까? 갈팡질팡 간절히 기도하며 한 해를 버텨냈다. 오직 아이만 봤다. 힘들고 아픈 건 엄마가 할게. 준희는 거북이가 열심히 달린 것처럼 걸어가! 그렇게 주님께 울며 기도했다. 아침이면 등교하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이상한 소리 내면 돼, 안돼? 아이는 안돼요! 대답한다. 화장실 가고 싶으면 조용히 가야 해. 그리고 도와주세요, 도와줘라고 말해야 해! 아이는 네라고 대답한다. 성장한 후에는 예의지? 라는 말로 바꿨다. 아침마다 반복하는 교육이었다. 하교 후 아침에 얘기했던 거 실천했느냐고 물으면 모두 네라고 답한다. 반은 맞는 대답이다. 약속은 지키는 아이다. 직진이 규칙이고 법인 아이다. 교육의 효과는 몇 주가 지나면 나타난다. 지시사항은 바꿔서 다시 설명한다. 진단받고 처음 교육한 말이 있다. 괜찮아, 괜찮아다. 교육한 지 1년이 지났을 즈음에 아이가 실수를 했다. 엄마보다 빠르게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했다. 처음으로 스스로 한 말이었다. 이 말은 고2 때 만든 작품 속에 써놓았다. 우리 아이는 자폐성 전반적 발달장애 2급이다. 그래서 가장 힘든 건 눈 맞춤이다. 지금도 10초 이상 눈 맞춤이 안 된다. 낯선 곳에서의 적응도 오래 걸린다. 일반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다니도록 하려면 끊임없는 반복 교육이 필요했다. 대학교는 집에서 버스와 전철로 1시간 30분 거리였다. 코로나 기간에 대학교 1학년을 다녔다. 취업은 언제든 가능하지만 대학생활은 지금이어야 했다. 대학생활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은 오로지 아이 자신만이 자신에게 줄 수 있고 습득할 수 있기에 꼭 필요했다. 종일 수업이 있는 날은 학교 가는 버스에 올라 출발하는 걸 보고 돌아왔다. 오후에는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리면 집으로 돌아왔다. 오전 수업만 있는 날은 역 근처 성당에서 미사 참례, 성체조배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 수업에는 같이 등교해서 수업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1학년을 마치고 12월 31일 산책하는 중에 아이가 말했다. 내년 2학년에는 혼자 학교 다닐게요. 아름다운 울림, 기적이 있는 날이었다. 일상이 구름이 흘러가듯 평범한 날이었다. 삼성 희망별숲에 면접을 본다고 한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감사함에 눈물이 흘렀다. 감사합니다. 어느 날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삼성은 돈이 많아서 표준 사업장을 만들지 않는다고 목청을 높이셨던 어느 강사님 얘기였다. 2주년 야유회를 다녀오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뒤늦은 감동은 야훼이레. 하느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감사 기도를 했다. 하루 4시간씩 한 달 근무를 했다. 첫 월급을 탔다. 대학생활도, 직장생활도 희망이고 꿈이었다. 신기루 같았던 일이 현실이 됐다.다. 꿈은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하느님은 곳곳에 계신다. 아이에게 십일조가 무어냐고 물었다. 정확하게 자신이 받은 월급을 말한다. 십일조를 낸다고 했다. 지금까지 3번 냈다. 자신이 직접 인출해 사무실에서 통장으로 낸다. 이것도 훈련이며 교육이다. 오랜 시간 인내의 결과로 희망은 일상이 되었다. 내어맡김의 일상을 사는 것.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깊은 곳에서 울컥 뜨거움이 북받치다 감사함에 눈물이 흐른다. 지나간 시간 속 응어리와 엉켜있던 매듭이 풀리는 감사였다. 치유는 그렇게 당신의 숨결로 곳곳에서 스며들었다. 김정화 체칠리아 cpbc2025.03.11

모방 신부, 1836년 소년 3명 뽑아 마카오 신학교로 유학 보내[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19. 한국인 사제 양성의 시작 세 신학생의 마카오까지 여정 현지인 사제 양성 위해 신학생 선발 정하상(바오로)의 순교로 국내에서의 한국인 사제 양성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방 신부는 이미 1836년에 한양에 거처하면서 3명의 소년을 뽑아 라틴어 기초교육을 하고, 한겨울에 육로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생을 선발하고 있는 모방 신부의 모습이 그의 편지에 전해진다. “⋯나는 도착 후 즉시 유(파치피코) 신부에게 그가 말한 2명의 학생에 관해 물었습니다. ⋯하나는 홀아비로 더없이 게으르고 공부를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의 학대를 피해 집을 뛰쳐나온 젊은이였습니다. ⋯그가 신부가 될 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외교인인 그의 아버지가 약혼시킨 그 외교인 여자와 결혼하도록 관면을 주겠다고 약속하자 그는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은 제가 약간의 소년들을 공부시키고자 하는 것을 알고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벌써 한 달 이상 저와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서양말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일 처음 도착한 소년은 ‘최 토마스 양업’이라 하고, 다음은 ‘프란치스코 과출(Kouatchouri)’이라고 합니다.”(1836년 4월 4일, 한양. 모방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편지) 모방 신부는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방침 제일 우선순위인 현지인 사제 양성을 위해 신학생들을 선발하였다. 유방제 신부가 미리 선발해놓은 두 젊은이는 신학생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아마도 정하상을 비롯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최양업과 최방제 소년을 추천하였고, 나중에 김대건도 예비신학생에 합류하게 돼 세 소년을 유학 보내게 되었다. 마카오 조선 신학교 교장으로 세 조선인 신학생에게 교리와 교회 음악 등을 가르친 칼르리(Callery, 1810~1862) 신부. 1841년 파리외방전교회를 탈회하고 프랑스로 귀국해 환속했다. 사진은 1845년 찍은 것이다. 출처=위키피디아 최양업·최방제에 이어 김대건 신학생 합류 세 소년 가운데 라틴어 기초 과정이 끝난 2명만 먼저 유학을 보내려다가 김대건도 함께 보내면서, 세 소년에게 서약서를 받게 되었다. “조선 소년 2명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또 기회가 없을까 걱정이 되어 비록 저하고 4~5개월밖에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세 번째 소년을 추가로 같이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은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교우들입니다. 그러나 가난합니다. ⋯이 소년들은 온순합니다.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열심과 순명으로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1836년 12월 3일, 한양. 모방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세 소년이 서약한 내용은 다음의 두 가지다. 곧 ‘장상에게의 순명’과 ‘장상의 허락 없이 다른 회에 들어가거나 다른 장소로 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와 조선 포교지의 후계자들에게 순명과 복종을 서약합니까? (서약합니다) 나와 조선 포교지의 나의 후계자들인 장상들에게, 장상에게 신청하여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다른 회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또는 장상이 지적한 장소 외에 다른 장소로 가지 않을 것을 서약합니까? (서약합니다) ⋯1836년 12월 3일 성경에 손을 얹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받았습니다. 모방, 조선 선교사.” 그들은 한겨울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 내륙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갔고,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페낭에는 동아시아 지역의 사제들을 양성하는 신학교가 있었다. 마카오 지부 부대표였던 바랑탱 신부는 3명의 조선 신학생을 보고 “이 학생들은 놀랄 만큼 순박해 보입니다”라고 첫 인상을 얘기하면서, 페낭 신학교가 ‘파벌과 교만과 비판 정신’ 등으로 환경이 좋지 않기 때문에 마카오 극동 대표부에 임시로 신학교를 마련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조선 선교사로 보낼 예정이었던 칼르리 신부에게 세 명으로 이루어진 임시 신학교의 교장 역할을 맡겼다. 청주교구 배티 순교성지에 전시 중인 풍금. 최양업 신부가 활동하던 시기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전한다. 출처=배티 순교성지 홈페이지 가장 뛰어난 최방제, 위열병으로 세상 떠나 조선 신학교의 교육을 담당하게 된 칼르리 신부는 신학생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파리 본부에 청하였다. “잡지·수준기(水準器, 수평선 또는 수평면을 구하기 위한 기구)·기압계·최고품 연필 3다스·한자가 새겨진 기적의 메달·자명종. ⋯이 학교의 교장이 된 나는 동시에 이 가엾은 소년들의 교사요 지도자요 아버지요 의사입니다. 나의 조선 소년들의 목소리가 매우 쉰 목소리이고, 완전히 음정이 맞지 않는 목소리라고 말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교회 노래와 성가들을 가르쳐 좀 고쳐볼까 합니다. 그러기 위해 4~5피아스트르 값의 손풍금이 있으면 아주 좋겠습니다.”(1837년 10월 4일. 칼르리 신부가 파리 신학교 트송 신부에게 보낸 편지) 비록 3명으로 이루어진 임시 학교이지만 첫 번째 교장 선생은 신학생들을 위한 학용품과 생활용품을 꼼꼼히 챙겼다. 그들을 위해 최고급 연필 3다스와 학생들의 목소리 교정을 위한 손풍금까지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라틴어와 교리 교육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중 나이도 한 살이 더 많고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던 최방제가 위열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라틴어 공부에서 보인 진전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식사 동안 그는 성경을 알아듣게 낭독하였습니다. 이렇게 벌써 우리가 그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게 되었을 때, 지난달 중순경에 위열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예절이 끝난 후 나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비에르는 나의 손을 잡고 ‘그라시아스 파트리’(Gratias Patri, 신부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그의 고상을 입에 갖다 대고 ‘착한 예수! 착한 천주!’라고 되풀이하였습니다. ⋯이어 우리의 성스러운 젊은이는 그의 천주님 곁으로 가기 위해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칼르리 신부의 서한 중에서)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학생 사제로 양성 이제 남아 있는 신학생들은 김대건과 최양업 둘뿐이었다. 그들이 초기에 교리를 어떻게 배워갔는지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토마스는 아주 건강합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거의 언제나 두통이나 요통을 앓습니다. 성장이 그 원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나는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토마스는 천주 성삼의 제2위인 성자가,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 능해야 한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제1위인 성부보다 덜 능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대죄만은 모두 고해해야 하지만 소죄는 고해할 엄격한 의무가 없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내가 그들을 우롱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나를 믿기까지는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1839년 6월 23일, 리브와 신부) 조선에서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있었을 때, 이렇게 두 소년은 훌륭한 사제가 되기 위해 성장하고 있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cpbc2024.05.08

비둘기 모양의 떼제 십자가 디자인한 마르크 수사 선종 1980년대 한국에 머물며 국내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디자인 프랑스 떼제 공동체 마르크 수사(Br. Marc, Heinz-Peter Rudolf)가 19일 프랑스 마콩의 병원에서 선종했다. 향년 93세. 고인의 장례 미사는 21일 프랑스 떼제 화해의 교회에서 거행됐다. 1931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고인은 취리히 응용 미술학교에서 그래픽 아트를 공부했으며, 1957년 떼제(Taiz) 공동체에 종신 서약해 마르크 수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인은 공동체 입회 후 목판화와 회화, 콜라주, 스테인드글라스, 책 표지, 포스터 등 다양한 장르에서 예술적 재능을 발휘했다. 1962년 떼제 화해의 교회가 만들어졌을 때, 서쪽 정면의 대형 유리화를 디자인했다. 떼제 공동체의 상징인 비둘기 모양의 떼제 십자가를 디자인한 것도 마르크 수사였다. 고인은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해 그 안에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꽃피웠다. 1971년에는 떼제 공동체에선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고, 1973년부터 약 6개월간 인도의 콜카타에서 활동했다. 1978년부터 8년여간은 일본에서 창작활동을 펼쳤다. 특히 1986년부터 한국에서 머물며 국내 여러 성당과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 초청을 받아 떼제 수사들이 공동체를 이뤄 살고 있었다. 이후 고인은 25년간 한국에 머물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고인은 서울 원효로 옛 예수성심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 제천 의림동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설치 작업에 참여했으며, 분당성요한성당과 서울 광림교회에서도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만들었다. 2007년에는 몽골 울란바토르 대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 이후 유럽으로 돌아가 떼제에서 머물던 고인은 2017년 이후 스위스 바젤 인근에 있는 리헨 디아코니아 공동체에서 머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며,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까지도 떼제 노래 가사나 성경 구절을 활용한 카드 제작에 매진했다. 장현민 기자 memo@cpbc.co.kr 장현민2024.01.22

스스로 파스카의 양이 되신 예수님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20) 사람의 손으로 그리지 않은 얼굴 (작품1)예수님 최후의 만찬: 모자이크 이콘, 6세기 초, 아폴리나레, 누오보, 라벤나. 반만 드러난 얼굴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른편 맨 끝 사람이 반만 드러나 있어 유다 이스카리옷으로 보인다. 제자들이 유다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매섭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의 목숨 내놓을 것 선언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대신하는 빵과 포도주 예식 계속 거행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구약의 파스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인류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 아케이로포이에토스(acheiropoiétos)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하느님은 원형이시고 우리는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닮은 이콘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5)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얼굴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분의 실제 얼굴도 보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카타콤바 벽면에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그리지 않은 그리스도의 얼굴이 있다고 전해 내려오는 이콘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방과 서방 교회에 전승으로 내려오는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그것을 ‘아케이로포이에토스’(사람의 손으로 그리지 않은 얼굴) 또는 ‘만딜리온’(참된 얼굴, 거룩한 얼굴)이라고 부릅니다. 때는 서기 30년, 예루살렘에는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전국뿐 아니라 근방의 이국 땅에 흩어져 살던 수많은 유다인이 모여들었습니다.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너희 자녀들이 너희에게 “이 예식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그것은 주님을 위한 파스카 제사다. 그분께서는 이집트인들을 치실 때,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을 거르고 지나가시어, 우리 집들을 구해주셨다.”(탈출 12,26-27) 파스카 축제 때 양을 잡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기 전날 죽음을 피하고자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를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누룩 없는 빵은 서둘러 이집트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선조들의 다급함을 연상케 해 줍니다. 파스카 의식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양의 피는 죄를 깨끗이 없애는 것을, 쓴 나물은 이집트 종살이의 고통스러움을, 누룩 없는 빵은 순결을 상징했습니다. 파스카는 가족 축제로 시작되었지만, 후일 성소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축제로 바뀌면서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축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자는 1년에 세 번 큰 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에 나와야 합니다. 그 후 양의 피를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는 대신, 성전에서 사제가 양의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목적은 제단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후기에는 백성의 대표자가 자신과 모든 백성을 위해 속죄 제물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집트 탈출’이라는 주제는 구약 전체의 시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는 하느님께서 계약으로 맺으신 당신 백성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상기시키는 축제였습니다. 구속에서 구원으로 이어지는 이 축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육체적·정신적·신앙적 억압을 겪을 때마다 변함없는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파스카 의식에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파스카의 양이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겪으신 때가 파스카 축제 기간 중이었으며 예수님 최후의 만찬도 바로 파스카 식사였습니다. 그림에는 없지만, 틀림없이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와 쓴 나물과 열두 사도와 함께 드실 구운 양이 있었을 것입니다. (작품 1)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을 것을 선언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대신하는 빵과 포도주의 예식을 계속 거행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구약의 파스카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인류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파스카 희생 제물이었음을 깨닫고 상징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때의 파스카 사건의 흐름은 하느님의 지혜였으며, 하느님 사랑에 기인한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순례자 중에 그리스인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과 면담을 요청하였습니다. 아마도 에데사(Edessa)에서 온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되는 장면입니다. (작품 2) 아케이로포이에토스: 34 x 25cm, 템페라, 카타리나 수도원, 시나이, 아브가르 왕이 하나니아로부터 아마포에 박힌 예수님의 얼굴을 들고 있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지나 동방으로 나가는 관문이 바로 에데사입니다. 구약 성경의 하란(Harran)이 북쪽으로 50㎞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에데사는 오늘날 튀르키예의 우르파(Urfa)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이며 상류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습니다. 교회사 자료에는 에데사의 국왕이었던 아브가르 우까마(Abgar Ukkama, A.D. 30)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신하로부터 예수님께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치유를 베푼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매우 큰 관심을 갖습니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환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4,24) 아브가르 왕 자신도 중병에 걸려 예수님께 치유받고자 했습니다. 아브가르 왕은 특사 하나니아를 통해 보낸 편지에서 예수님께 속히 에데사로 오셔서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려움과 박해가 있을 때는 안전하게 보호해 드리겠다고 전합니다. 축제 때 예수님 뵙기를 요청한 그리스인들은 먼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인 필립보에게 청합니다.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전하고, 이 두 사람이 함께 예수님께 전합니다.(요한 12,20-26 참조)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인들이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찾아온 그 목적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해하려는 모종의 모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에데사로 망명할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권유를 거부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인 십자가를 지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3-24) 요한 복음서는 ‘밀알의 말씀’이 대단히 중요하기에 예수님께서 그리스인들에게 하신 그 말씀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브가르 왕에게 전달한 내용은 ''나를 대신하여 제자 한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로 인하여 병이 나을 것''이었다고 전합니다. (작품 2)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는 에데사로 가셨고, 예수님 얼굴이 찍혀있는 수건으로 아브가르 왕의 병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국왕을 비롯해 많은 신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비록 외경이긴 하지만 토마스 행전이 에데사 선교를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제자가 누구인지는 추측에 불과합니다. 시나이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소장되어있는 이콘에는 유다로 그려져 있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타대오라는 설도 있습니다. 유다는 야고보와 형제라고 하며, 이름이 비슷한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어 혼동을 피하려고 타대오라는 이름을 쓴다고도 전합니다. 김형부 마오로cpbc2024.05.22
![[임홍택의 중고로운 평화나라] 어른이 된다는 것](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5/28/XYI1716879768556.jpg)
[임홍택의 중고로운 평화나라] 어른이 된다는 것임홍택 유스토(「90년생이 온다」 저자·명지대 미래융합경영학과 겸임교수) 지난 5월 20일 월요일은 ‘성년의 날’이었다. 나도 이제 성인의 나이가 된 지 어언 20여 년이 지난 지라, 이날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잊고 살다가 지난 주말 한 구청에서 진행하는 성년 축하 행사에 강연을 갔다가, 백만 년 만에 성년의 의미를 떠올려보게 되었다. 성년의 날은 만 19세가 되는 해의 1월 1일을 맞이한 신생 성인들을 장려하고 성인으로서 책임감을 일깨워주고자 지정되었다고 한다. 근데 성인, 즉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른이란 사전적으로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어른이란 단순히 만 19세가 넘거나, 일정 이상의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부여되는 자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도 성년의 나이가 되었던 20여 년 전 과거에는 신세대 혹은 신인류라고 불렸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신세대라는 타이틀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그렇다고 불혹의 나이가 지난 지금 나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 만화 「주술회전」에 등장하는 나나미 켄토는 주인공인 이타도리 유지에게 사람이 어른으로 넘어서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당신은 그간, 여러 번 사선을 뛰어넘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어른이 된 건 아니에요. 베개 밑에 빠진 머리카락이 늘어나거나, 좋아하던 야채빵이 편의점에서 자취를 감추는 등, 그런 작은 절망들이 겹겹이 쌓여 사람을 어른으로 만드는 겁니다”라고 말이다. 나는 10여 년 전 다시금 성경을 보다가 얻은 깨달음으로 세례를 받아 ‘유스토’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고, 가톨릭의 인연으로 만난 아내와 가정을 꾸려 2명의 아이와 삶을 함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10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자영업자가 되어 하루하루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두 단지 앞으로 죽는 날까지 삶에 녹아있는 작은 절망을 넘어가며 성장하고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란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작은 절망들이 넘치는 하루를 담대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단순히 나이를 먹었다고 모두가 꼰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시대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시대적 혹은 시대착오적 사고를 유지하는 이들만이 개꼰대라는 이름의 시대착오적 인간으로 남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세대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사는 방법은 사실 어렵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유치원 때 배웠던 기본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선배들이 잘못했던 부분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단지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다. 21세기에 태어난 우리의 다음 세대는 실수를 두려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책임지지 못할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라는 손쉬운 조언을 하지 말자. 실수는 원래 두려운 것임을 솔직히 인정하자. 단지 삶에 있어 어쩔 수 없이 실수가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우리가 조금씩 어른이라는 목표로 가기 위해서는 거기서 교훈을 얻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자. 그리고 ‘그놈의 MZ타령’이 반복되지 않도록, 세대로 사람을 분석하기보다 그 세대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정확히 보는 노력을 해보자. 그러다 보면 적어도 우리는, 다음 세대를 잘파 세대(Z세대와 알파 세대를 묶는 용어로 우리나라에만 있다)로 퉁치는 일만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성년 이야기가 나왔으니, 10년 전부터 하루하루 미루다 어느새 잊어버린 견진성사를 받아야겠다.cpbc2024.05.29

「가톨릭 성가」에도 실린 바흐의 수난곡바흐 ‘요한 수난곡’ ‘마태오 수난곡’ 그리스도 수난과 십자가 죽음 묘사 바로크 음악 총망라한 오라토리오 다음 달 ‘마태오 수난곡’ 국내 공연 대규모 합창단·오케스트라 무대에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 롯데콘서트홀 제공 취리히 징-아카데미 합창단. 롯데콘서트홀 제공 사순 시기, 교회는 ‘수난곡(Passion)’을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묘사했다. 이 수난곡 가운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의 ‘요한 수난곡’과 ‘마태오 수난곡’은 종교를 떠나 바로크 음악의 모든 형식을 총망라한 대작으로 손꼽히는 오라토리오다. 이들 곡은 루터교 신자였던 바흐가 독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서 1723년부터 1750년까지 칸토르(성가대 지휘자 겸 음악감독)로 재직하던 초기에 완성했다. ‘요한 수난곡’은 1724년에 작곡해 그해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마태오 수난곡’은 1727년에 완성해 2년 뒤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초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한 수난곡’과 ‘마태오 수난곡’은 각각 요한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에 성가 가사와 자유 가사 등이 더해졌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독창·합창·관현악이 모두 등장하지만, 별도의 무대연출이 없고 성악가도 따로 연기하지 않는다. 오페라에 비해 합창의 비중이 더 크고, 합창과 아리아 사이에 줄거리를 해설하는 복음사가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야기는 성경을 노래하는 복음사가의 레치타티보(Recitativo, 낭독하듯 노래하는 방식)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아리아와 합창이 교차로 주요 인물이나 군중의 상태를 묘사한다. 이들 수난곡의 일부 곡은 가톨릭 미사에서도 자주 불려진다. 가톨릭 성가 116번 ‘주 예수 바라보라’는 ‘마태오 수난곡’에서, 75번 ‘주 그리스도 우리 왕’은 ‘요한 수난곡’에서, 169번 ‘사랑의 성사’는 두 수난곡 모두에서 가져왔다. 각각의 성가를 보면 원곡자가 한스 레오 해슬러, 멜히오르 테쉬너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바흐가 차용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콘트라팍툼’(Contrafactum)이라고, 자신의 곡이 아니더라도 다른 가사를 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연주에만 3시간이 소요되는 ‘마태오 수난곡’을 감상할 수 있는 공연이 4월 3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 5일 경남 통영국제음악당, 7일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개최된다. 바흐 서거 이후 단 한 번도 연주되지 않았던 ‘마태오 수난곡’은 1829년 스무 살의 청년 멘델스존이 대규모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무대에 올리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마태오 수난곡’은 이중합창 구조로 지휘자 양쪽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각각 자리해 곡의 입체감과 극적 효과를 높인다. 이번 무대에서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가 원전 악기의 정수를 연주하며, 합창은 스위스 취리히 징-아카데미 합창단과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이 맡는다.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은 지난해에는 ‘마태오 수난곡’, 3월에는 ‘요한 수난곡’을 선보이기도 했다. 윤하정 기자윤하정2024.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