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대 마산교구장에 이성효 주교 임명주한 교황대사관 오후 8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이성효 주교를 마산교구장으로 임명하셨다” 발표 수원교구 총대리 이성효(리노, 67) 주교가 21일 제6대 마산교구장에 임명됐다. 주한 교황대사관은 이날 오후 8시(로마 시각 낮 12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이성효 주교를 마산교구장으로 임명하셨다”고 발표했다. 임명 소식은 교황청 공식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 발표됐다. 마산교구는 2022년 8월 27일 배기현 주교의 사임으로 현재까지 신은근 신부가 교구장 서리로 교구장을 대리해왔다. 이성효 주교는 1957년 진주에서 태어나 1992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 주교는 1980년 2월 아주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석사를 마치고 1987년 수원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 독일 트리어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교부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후 1993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2000년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교부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수원교구 호계동본당에서 보좌로 첫 사목을 시작한 이 주교는 2001년부터 3년간 오산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사목부장, 영성관장, 교무처장,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장, 이성과 신앙연구소장을 맡았다. 2011년 2월 7일 수원교구 보좌주교이자 투리스 타말레니 명의주교로 임명되어 그해 3월 25일 주교품을 받았다. 2011년부터 수원교구 총대리를, 2014년부터 교황청 문화교육부 위원을 맡고 있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생명운동본부장과 2017년부터 2024년까지 주교회의 가정과 생명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 현재는 주교회의 사회홍보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고 있다. 이 주교의 저서로는 「선포와 봉사」(2003), 「교부학 인명(공저)」(2004)이 있으며, 번역서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인내론」, 「교부들의 성경주해 : 신약성경Ⅷ」(2015), 「4차 산업혁명과 인류의 미래」(2019) 등이 있다. 마산교구는 1966년 2월 15일 부산교구에서 분리돼 설립됐다. 초대 교구장은 고 김수환 추기경이다. 교구는 경남 거제시, 사천시, 진주시, 창원시, 통영시 전역, 김해시·밀양시 일부, 거창군, 고성군, 남해군 등 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관할한다.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23에 따르면, 주교좌 양덕동성당을 비롯해 본당 74개, 공소 49개, 사제 237명, 신자 18만 2662명(복음화율 7.7%)을 두고 있다.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 약력 이성효(리노) 주교 1957년 7월 6일 경남 진주 출생 1976년 2월 수원 고등학교 졸업 1980년 2월 아주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1983 - 198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전자공학 석사 1985 - 1987년 수원가톨릭대학교 신학부 졸업 1987년 8월 - 1992년 2월 독일 트리어 대학교 신학대학원 교부학 석사 1992년 4월 9일 사제 수품 1992년 4월 - 1993년 1월 수원교구 호계동본당 보좌 신부 1993년 4월 - 2000년 6월 프랑스 파리 가톨릭대학교 교부학 박사 2001년 1월 - 2003년 9월 수원교구 오산본당 주임 신부 2001년 3월 - 2003년 6월 수원가톨릭대학교 강사 2003년 9월 30일 - 2011년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04년 12월 9일 - 2006년 5월 1일 수원가톨릭대학교 사목부장 겸 영성관장 2006년 5월 1일 - 2006년 12월 14일 수원가톨릭대학교 대학원장 2006년 5월 1일 - 2008년 12월 11일 수원가톨릭대학교 교무처장 2006년 6월 1일 - 2010년 7월 수원가톨릭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장 2008년 6월 - 2010년 9월 한국가톨릭신학학회 편집위원장 2008년 12월 - 2010년 7월 수원가톨릭대학교 이성과 신앙연구소장 2010년 9월 - 2011년 2월 7일 안식년 2011년 2월 7일 수원교구 보좌주교 임명(투리스 타말레니 명의주교) 2011년 3월 25일 주교 수품 2011년 3월 26일 수원교구 총대리 임명 2012년 3월 14일 - 2017년 10월 18일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장(생명윤리위원회 위원) 2012년 3월 14일 - 2017년 10월 18일 주교회의 교리주교위원회 위원 2014년 3월 29일 - 현재 교황청 문화교육부(전 문화평의회) 위원 2017년 10월 18일 - 2024년 10월 14일 주교회의 가정과 생명 위원회 위원장 2017년 10월 18일 - 2024년 10월 14일 주교회의 선교사목주교위원회 위원 2018년 6월 26일 - 현재 수원교구 제1대리구장 2024년 10월 15일 - 현재 주교회의 사회홍보위원회 위원장 2024년 10월 15일 - 현재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위원 2024년 12월 21일 마산교구장 임명 신문취재팀 이지혜2024.12.21

역사 안에서 유다인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큰 그림[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43)에스테르기 에스테르기는 하느님께 대한 직접 언급이 없을 뿐이지 유다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암시하고 있다. 아르트 데 헬데르, ‘첫번 째 푸림절 서한을 쓰는 에스테르 왕비와 모르도카이’, 유화, 1685년경. 히브리어 타낙 성경 ‘에스테르’는 성문서로 분류돼 있습니다. 헬라어 번역 성경인 「칠십인역」에는 ‘Εσθηρ’(에스테르),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Esther’라 해 역사서로 분류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발행한 우리말 「성경」 역시 ‘에스테르기’라 해 불가타에 따라 역사서에 배열해 놓았습니다. 에스테르기는 167절로 구성된 히브리어 본문에 헬라어 번역본에서 93절을 첨가해 한 권으로 통합한 책입니다. 「칠십인역」은 헬라어 첨가 부분을 하느님에 관해 직접 언급이 없는 히브리어 본문 사이사이에 삽입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가치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우리말 「성경」에도 히브리어 본문 가운데 삽입된 헬라어 본문을 구분하기 위해 장, 절을 다르게 표기합니다.(예; 1,1①) 하지만 히브리어 구약 성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개신교는 유다교 타낙 성경처럼 히브리어 본문만을 에스테르기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성경은 에스테르기를 역사서로 분류하지만 실제로 역사성이 희박한 작품입니다. 페르시아 역사에는 ‘와스티’라는 왕비도, ‘에스테르’라는 왕비도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테르기는 임금을 제외한 다른 모든 등장인물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페르시아의 왕비는 항상 페르시아인이었습니다. 에스테르기 1장 1절의 임금이 크세르크세스 1세라면 그의 왕비는 1장 11절이 말하는 와스티가 아니라, 후타오사라는 여인입니다. 유다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을 몰살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또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재상 하만의 태도도 페르시아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스테르기 내용은 마카오베기에 나오는 유다인들을 모질게 탄압한 헬레니즘 시대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4세(기원전 175~기원전 164년)의 통치 시대와 들어맞습니다. 히브리어본 에스테르기에 한 번도 하느님이 언급되지 않은 까닭은 이 책이 작성될 시기에 유다인들이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고 여길 만큼 암울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외세의 억압과 박해 속에서 하느님께서 과연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지를 의심했습니다. 마치 안 계신 듯,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어두운 밤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바로 에스테르기입니다. 에스테르기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게 된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기억하시고 돌보고 계심을 믿게 될 것이라 격려합니다. 에스테르기는 혼란한 인간 역사 안에서도 하느님의 발자취를 알아보라고 당부합니다.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에스테르기 저술 시기를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전 100년 사이로 넓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3세기께 히브리어 본문이 저술됐고, 기원전 2세기 중엽에 헬라어 본문이 기록됐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에스테르기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도입부(1,1①-1 )는 기원전 597년 바빌로니아 1차 유배 때 포로로 끌려온 모르도카이가 유배지에서 앞으로 닥치게 될 유다인들의 고난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꿈을 통해 전해 받습니다. 첫째 부분(1,1-2,23)은 크세르크세스 임금이 잔치에 불참한 와스티 왕비를 폐위하고 유다인 처녀 에스테르를 새 왕비로 선택합니다. 둘째 부분(3,1-9,19①)은 유다인들을 말살하려는 재상 하만의 계략에 맞서는 모르도카이와 에스테르의 활약을 들려줍니다. 셋째 부분(9,20-10,3⑪)은 푸림절 유래를 설명합니다. 푸림은 주사위, 제비를 뜻하는 히브리어 ‘푸르’의 복수형입니다. 에스 9,24-26은 푸림절이 본디 이교도들의 축제였지만 유다인들이 이를 자신들의 축제로 받아들였음을 설명합니다. 에스테르기는 나라를 잃은 유다인들이 다른 민족 사이에 섞여 살면서도 민족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고 이민족과 분명히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다른 민족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민족우월주의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유다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고유 신앙과 관습, 전례 등에 충실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자기들을 말살하려는 그 모든 시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시고자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하느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성경학자들은 해외 유다인 공동체가 이방 민족에게 박해를 당하다가 같은 동포 가운데 어느 누군가의 주도적 역할에 힘입어 박해를 벗어난 사건이 실제 일어났을 수 있고, 그런 사건을 바탕으로 에스테르기가 꾸며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에스테르기는 하느님께 대한 직접 언급이 없을 뿐이지 유다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암시합니다.(에스 4,14) 또한 에스테르기는 하느님의 섭리를 기적 같은 초자연적 개입으로만 여기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초자연적 개입이 있든 없든 유다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모든 위협에서 건져내는 사건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에스테르기는 해외 공동체의 유다인들이 이민족의 위협을 예견치 못하는 상황에서 겪는 불안과 공포를 신앙으로 이겨내도록 이끌어줍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10.11

무뎌진 마음에 사랑을 일깨우자[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97) 사랑에 눈뜨기 사랑⋯.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중 하나가 아닐까. 물이나 공기가 없이 살 수 없지만, 평소에는 그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처럼 사랑 또한 우리를 살게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그 중요성을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얼마 전 한 수녀회의 성삼일 전례에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한 수녀님께서 사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부님, 이제 저도 세속화가 돼서 성삼일 전례에 마음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네요.” 수녀님의 고백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것이 아닐까. 일상사와 세상 걱정으로 마음이 무뎌져,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걷던 일을 회상하며 뜨거웠던 마음을 떠올린 때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어떤 경험이었을까? 주님께서 가까이 다가와 자신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건네주신 말씀들, 자신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시며 보여주신 친밀감에 담긴 사랑에 대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스승의 바로 그 사랑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분의 똑같은 사랑으로 눈을 뜨고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본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 그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 그분께서 돌아가신 다음 살아나셔서 그들에게 다가오시며 똑같은 사랑으로 그들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그들이 절망과 슬픔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며 새로운 희망이 떠오를 수 있도록 격려해주셨다. 재와 같던 그들 내면에 사랑의 불꽃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유학 시절 한 수도원에서 성삼일 전례에 참례하며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깊이 체험한 적이 있었다. 아무 조건도 없이, 남김없이 당신의 온 존재를 선물로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이 성삼일 전례 곳곳에 배어있었다. 그 사랑 앞에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사랑에 마음을 닫고 무딘 영혼으로 살아왔는지도 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이 세상에 왔으며,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던 것도 바로 사랑 덕분이었다. 그 사랑은 그 어떤 사심이나 욕심도 없이 그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좋고 사랑스러웠기에 베푸셨던 부모님의 사랑이었고, 가족들과 친구들과 나눠 온 우정이었다. 그 사랑과 우정이 우리를 키우고 우리 사이를 돈독히 해주었다. 살면서 많은 중요한 일을 겪고 큰 계획을 갖고 살지만, 결국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큰 위기나 시련을 겪을 때야 비로소 그 사랑의 고귀함을 깨닫고 그동안 그 사랑에 왜 그렇게 무감각하게 살아왔는지 후회하는 우리 자신의 무뎌진 마음이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인간적 사랑을 매개로 당신의 애틋한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특별히 교회 삶 전체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향한 눈을 뜨도록 이끌어 주신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 사이의 ‘사랑’에 관한 대화로 마무리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주님 사랑에, 그리고 우리 주위 소중한 사람들의 사랑에 얼마나 눈을 뜨고 살아왔나? 너무 무디고 딱딱한 마음으로 살아온 나머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잊고 살아오지 않았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랑을 향한 눈을 뜨게 해주시도록 기도하면 어떨까. 한민택 신부cpbc2025.04.29

에페소 (01)[월간 꿈 CUM] 바오로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_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 순례기 에페소 켈수스 도서관. 1만 5000권에 달하는 두루마리를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117년 공사를 시작해 135년 완공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도서관을 보지 못했지만, 에페소 공의회 개최 당시 모인 주교와 사제들은 이 도서관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적대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큰 문이 나에게 열려 있습니다.”(1코린 16,9)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교회를 두고 “큰 문이 열려 있다”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에페소에서의 선교 효과는 컸다. 그 결과는 대규모 에페소 신앙 공동체 형성으로 이어진다. 바오로 사도는 5년 동안 진행된 3차 선교 여행(서기 53~58년경) 중 무려 절반에 가까운 2년 3개월 동안 에페소에 머물렀다.(사도 19,8.10;20,31참조) 이 에페소 거주 기간 동안 신약성경의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이 작성되어 인편으로 각 지역에 배달됐다. 그런데 에페소는 원래 신앙에 부합하는 도시가 아니었다. 페르시아의 지배를받던 에페소가 알렉산더 대왕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 기원전 334년이다.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된 것이 기원전 133년. 에페소는 그리스 로마의 신전이 넘쳐나는 다신교 숭배 도시였다. 그래서 에페소는 유일신 신앙을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다.(기원전 88년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로마의 실라장군에 의해 진압됐다) 바오로가 에페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날을 상상해 보자. 장거리 여행으로 새카맣게 변한 발을 끌며 에페소 거리를 걷는 바오로 사도의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당시 경제, 종교, 정치, 문화 중심지였던 에페소에는 20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업 및 무역 관련 유동인구가 1~5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에서 일하는 사람들, 정치인, 교수, 물물 교환을 위해 장거리를 이동해온 사막의 상인, 군인, 여관업 종사자, 노예, 스포츠와 환락에 매료된 사람들로 에페소 거리는 북적였다. 바오로 사도는 걸을 때마다 옆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을 것이다. 그리고 화려하고 웅장한 신전들이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 북적거리는 번화가의 끝자락에 2만 50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극장이 있다. 이곳은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잊지 못할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그 사건의 내막이 사도행전 19장 23-30절에 자세히 나와 있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 19장 23-30절에 나오는 에페소 야외극장 관광지에 가면 기념품을 파는 곳이 있다. 2000년 전 에페소에도 그런 기념품점이 많았는데, 가장 인기를 끈 기념품은 은으로 만든 아르테미스(다이아나, 다산과 풍요의 여신) 신전 모형이었다. 은으로 만든 이 모형을 부적처럼 들고 다니는 것이 당시 유행이었다. ‘데메트리오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에페소에서 기념품을 팔아 큰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황금알 사업에 찬물을 끼얹은 무리가 있었다. 바오로와 그 동료들이었다. 참다못한 데메트리오스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직업으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바오로라는 사람이 오면서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때문에 우리 사업이 나쁜 평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도 무시를 당했습니다.” 데메트리오스는 바오로 때문에 여신과 관련한 기념품 판매가 저조해졌다고 여겼다. 그리고 군중을 선동했다. 그의 선동은 주효했다. 군중은 이렇게 외쳤다. “에페소인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시다!” 사도행전은 당시 상황을 두고 “온 도시가 혼란에 빠졌다”(사도 19,29)고 기록하고 있다. 다행히 바오로는 체포되지 않았다. 에페소 사람들은 바오로의 동행이었던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스와 아리스타르코스 두 사람을 붙잡아, 야외극장으로 끌고 갔다. 작은 행정관서가 아니라 야외극장으로 끌고 갔다는 점에서 당시 소요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바오로가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해 나서려 했지만, 바오로와 친분이 있었던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 흥분한 군중 앞에 나섰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소란은 서기관이 법정에서 별도로 문제를 다루자며 군중을 설득하기까지 두 시간 넘게 계속됐다. 서기관의 중재와 설득이 없었다면 당시 바오로의 동료는 물론이고 바오로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사도 19,23-30 참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에페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 열기가 상상을 초월했다는 점이다. 에페소 사람들은 원래 그리스 침략을 받기 전에는 풍요와 다산의 여신 퀘벨레를 섬겼는데 그리스 지배 후, 아르테미스 여신으로 갈아탄다. 그런데 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심성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인 후에는 성모 신심으로 연결된다. 실제로 아르테미스 신전 건축에 사용된 돌 및 기둥은 5세기 초 성모성당 건축 및 6세기 성모성당 증축 공사 때 재활용되었다. 유곽 안내 표지. 새겨진 발 크기보다 작은 사람은 입장할 수 없다는 미성년자 출입금지 표지판이라는 설, 유곽의 방향을 가리키는 도로 안내판이라는 설 등이 있다. 에페소에는 성모 마리아가 거주했다는 집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교회 역사상 성모께 최초로 봉헌된 대성당도 에페소에 있다. 더 나아가 431년 이 성모대성당에서 열린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모 신심 관련 계시의 결정체인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Theotokos) 교의가 정리됐다. 에페소에서 유독 성모 신심이 강했던 이유, 그리고 에페소에서 시작된 성모신심이 전 유럽으로 전파되는 과정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할 듯 보인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에페소가 없었다면 바오로의 서기 53~58년경 초기 교회 선교 동력은 약해졌을 것이고, 선교의 속도도 반감되었을 것이다. 에페소는 바오로의 말씀 선포에 귀 기울였고, 바오로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데 서기 100년경에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묘해진다. 바오로 이름이 싹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도 요한의 이름이 들어선다. 이는 그리스 지역(코린토, 테살로니카, 필리피 등)과 달리, 아시아 지역에서는 사도 요한과 그 제자들의 영향력이 바오로보다 더 커졌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사도 요한 계열 제자들이 쓴 요한 묵시록에, 에페소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에페소에는 사도 요한 및 성모 마리아와 관련한 대형 순례지가 많다. 사도 요한의 유해를 모신 성당, 그리고 성모 마리아가 살던 집이 그것이다. 글 _ 편집부2025.08.18

마음 챙기고 영성 다듬는 책과 만날 시간독서의 계절 추천 도서 5권‘등화가친(燈火可親)’, 가을은 등불을 가까이하여 글 읽기에 좋은 시기임을 이르는 말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나들이하는 사이사이, 마음도 챙기고 영성도 다듬을 수 있는 책들도 가까이 해보자. 다시 만나는 구약성서 / 장 루이 스카 신부 / 박요한 영식 신부 / 가톨릭대학교출판부 「다시 만나는 구약성서」는 지난해 소개된 「처음 만나는 구약성서」에 이어 출간됐다.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오경을 강의하며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긴 장 루이 스카(예수회) 신부가 설화와 성경 주석을 통해 구약성경이 담고 있는 깊고 풍부한 의미를 살펴본다. “이 신탁과 레위기 25장의 법들을 비교하면 이 ‘은혜의 해’는 거룩한 해 또는 희년임을 알 수 있다. 감옥에 갇힌 이들과 종들이 해방되어야 하는 해이다. 이 종들은 빚을 갚기 위하여 종들이 된 사람들에 비교되는 유배자들이다. (중략) 이들은 귀환한 유배자들이며 바빌론의 침공으로 파괴된 성읍을 재건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희년과 유배에서의 귀환 사이에 밀접한 연결을 위한 보완적 표시들이 있다. 그러므로 ‘은혜의 해’는 유배를 종식시키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귀환의 문을 연다.”(198쪽) 책은 창조의 시간부터 성조들, 고대 사회의 족보와 사랑, 이집트의 노예제도와 약속의 땅에서의 일에 대한 성찰, 희년과 순례, 원로들과 사제의 역할 등을 짚고, 마지막으로 구약성경에 기묘한 방식으로 나타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설명한다. 감정 학교 / 안셀름 그륀 신부 / 나무의마음 「감정 학교」는 시기심·모욕감·질투·혐오·분노·증오·탐욕·후회·고독·두려움 등 인간의 대표적인 감정 48가지가 어떻게 우리 존재를 규정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 안셀름 그륀(성 베네딕도회) 신부는 잘못된 감정적 대응으로 후회하고 있거나 자책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 속 인물들의 다양한 사례와 융의 심리학을 결합해 감정의 양면성을 통찰력 있게 보여주고 그 본질과 쓸모를 알려준다. “카를 융은 정신분석 치료 과정에서 후회에 젖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에 따르면, 그들은 삶을 바꾸려는 ‘후회의 능동성’을 잊어버린 채 후회라는 감정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융은 이런 마음 자세를 사람들이 추운 겨울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 따뜻한 이불 속에 머무는 것에 비유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후회한다고 말하지만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설명합니다.”(126쪽) 부정적인 감정만 살펴보는 것은 아니다. 사랑·기대감·희망·신뢰·자유·행복·감동·기쁨·자부심 등 타인과 함께하고 나를 안정시키는 기분 좋은 감정들을 천천히 음미하고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도 제시한다. “‘그러므로 너는 기쁘게 네 빵을 먹고, 즐겁게 네 포도주를 마셔라.’(코헬 9,7) 전도자 코헬렛은 인간이 온갖 고통을 겪더라도 기쁨을 느끼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중략) 기쁨은 충만한 삶에서 오는 것이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하지만 의미 있게 사는 노력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264쪽) 영적 위로 / 티모시 갤러허 신부 / 김영의 옮김 / 이냐시오영성연구소 「영적 위로」는 이냐시오 영성 전문가 티모시 갤러허 신부의 대표작 「영의 식별」에 이은 책이다. 「영의 식별」이 신자들의 전반적인 영적 상태를 스스로 감지하고 파악하여 대처할 수 있게 도와주는 내용이라면 「영적 위로」는 더 섬세하고 진전된 상황에서의 영의 식별을 돕는다. 즉 원수가 ‘선을 가장하여’ 지극히 열심한 신앙인들을 속이려는 상황에서는 식별에 새로운 안내가 필요하다. 차츰차츰 악한 영 특유의 해로운 끝으로 이끌어 가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냐시오는 신앙인들이 그 끝을 주의 깊게 관찰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생각의 진행 과정에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시작과 중간과 끝이 모두 선하고 모두 선으로 기울어 있다면 이는 선한 천사의 표지이다. 그러나 떠오른 생각들이 그 진행 과정에서 결국은 어떤 악한 결말에 이르거나, 산만해지거나, 이전에 구상한 것보다 덜 좋은 쪽으로 이끌거나, 이전에 누리던 평화와 안정과 침착성을 빼앗아 심약해지게 하거나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면 이는 우리의 유익과 영원한 구원의 원수인 악한 영에서 나왔다는 분명한 표지이다.”(134쪽) 현명한 이타주의자 / 슈테판 클라인 / 장혜경 옮김 / 페이지2북스 종교인이나 매체에 소개될 정도로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현실에서 이타주의자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독일 출신의 슈테판 클라인은 「현명한 이타주의자」에서 “언뜻 보기엔 시간과 힘, 돈을 자신의 목표를 위해 투자하는 사람이 더 이익일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타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이타주의자가 훨씬 앞서간다”고 주장한다. 생물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이타주의에 대한 정의부터 왜 사람은 남을 돕는 일에 서툰지, 어떤 경우에 남을 돕게 되는지, 왜 이타주의자가 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답변을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뇌과학·경제학 등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다양한 학문과 실험 결과들을 근거로 설명한다. “남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까? 20년 전부터 우리는 핵스핀단층촬영장치 덕분에 느끼고 생각할 때의 뇌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중략) 신뢰는 기분을 좋게 해준다. 타인이 우리를 위해 기대 이상의 것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신뢰를 느끼면 보상 시스템은 마음씨 착한 사람들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환기시킨다. 공정한 행동을 한 사람은 우리 기억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82쪽) 채식주의자 / 한강 / 창비 요즘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책이다.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에 이어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채식주의자」. 소설가 한강씨가 2007년 펴낸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부터 육식을 거부하며 가족들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는 ‘영혜’를 중심으로 남편·형부·언니의 시선에서 서술된다. 가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가부장의 폭력, 그리고 그 폭력에 저항하며 금식을 통해 동물성을 벗어던지고 나무가 되려는 영혜가 보여주는 식물적 상상력이 신선하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72쪽)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국내에서는 두 번째로 노벨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한국인 최초·아시아 여성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자다. 「채식주의자」는 2010년부터 일본·중국·프랑스 등에서 꾸준히 번역·출간되었고, 지금까지 40개국 이상에 판권이 수출되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국내에서는 2009년 개봉했고, 25일 볼로냐에서 초연된 연극은 이탈리아 주요 도시를 거쳐 프랑스에서도 상연될 예정이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신문취재팀 윤하정2024.10.23

막장, 절망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열리는 새로운 시작[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20. 막장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막장 드라마에서나 펼쳐질 법한 범죄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삶의 끝자락, 파국으로 여겨지는 막장은 우리 현실의 단면이기도 하다. 2023년 발생한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묻지마 범죄 현장에서 수사관들이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뉴시스 우리는 종종 드라마를 보며 말한다. “이건 막장이야.” 출생의 비밀, 금지된 사랑, 끝없는 복수⋯. 자극적인 설정에 개연성은 부족하다. ‘욕하면서도 본다’는 말처럼 막장 드라마는 오히려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곤 한다. 그런데 매일 쏟아지는 뉴스를 보다 보면,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묻지마 범죄·층간소음 살인·가정폭력·아동학대에 심지어 국회 청문회조차 ‘막장’ 논란의 무대가 되곤 한다. 이런 뉴스에도 우리는 여전히 본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막장’은 어느새 우리 삶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막장’이라는 말은 가볍게 쓰기엔 그 말의 뿌리가 무겁다. 본래 ‘막장’은 광산에서 가장 깊은 갱도의 끝자락,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끝자리다.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그 어둠 속 현장은 생존의 심장부이기도 했다. 막장은 천박함이 아니라 존엄과 투혼의 상징이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막장’은 비도덕적이고 자극적인 상황을 지칭하는 부정적 수사로 굳어졌다. ‘막장 드라마’ ‘막장 정치’ ‘막장 사회’처럼 상식과 도덕이 무너진 파국의 코드로 쓰인다. ‘막[末]’이라는 말은 내려갈 곳 없는 소진과 절망의 상태를 말한다. 막장·막판·막일·막무가내·막바지⋯. 앞이 보이지 않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작을 뜻하는 고유어 ‘막’도 있다. ‘막’은 끝을 의미하는 절망의 상징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금·갓·지금 바로를 뜻하며 행동의 시작이나 순간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예컨대 ‘막 도착하다’ ‘막 시작하다’ ‘막 지은 밥’ 같은 표현이 그렇다. ‘막걸리’라는 말도 지금 막 거른 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새로운 발효의 기쁨이 시작되는 순간과 맞닿아 있다. 같은 음절 ‘막’이지만, 하나는 끝을, 다른 하나는 시작을 가리킨다. 끝과 시작, 절망과 희망이 이 짧은 말 안에 함께 담겨 있다. ‘막노동’은 천대받는 육체노동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가장 밑바닥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정직한 일이다. ‘막말’은 품격 없고 무례하다는 비난을 받지만, 때로는 그 거침없는 솔직함이 가식 없는 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막’은 규범의 테두리 바깥에서 억눌린 감정과 현실을 여과 없이 내뱉는 언어다. 어쩌면 그것은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는 벼랑 끝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일지도 모른다. ‘막장’도 마찬가지다. 삶의 끝자락. 파국과 절망의 공간이지만, 그 끝에서 역설적으로 진짜 인간의 얼굴이 드러나기도 한다. 막장 드라마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현실에서 억눌렸던 욕망과 상처, 무너진 관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막’은 문명화된 언어의 바깥에서 우리가 외면해온 진실을 들춰낸다. 통제와 품격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졌던 것들이 ‘막’이라는 틈 사이로 흘러나온다. 거칠지만 정직하고, 불편하지만 회피할 수 없는 언어. 그래서 ‘막’은 혐오가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막’은 무질서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질서 이전의 상태, 창조가 시작되기 직전의 혼돈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도 창조는 바로 그 혼돈에서 출발한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창세 1,2) 있지만,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은 “빛이 있으라” 하시며 무질서 속에 새 질서를 여셨다. 무너짐의 끝에서야 진실이 고개를 들고, 더는 갈 곳이 없을 때 비로소 빛이 새어 들어온다. 우리는 때때로 바로 그 ‘막’에서 진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솔직한 얼굴 앞에서 세상과의 관계도 다시 맺을 수 있다. 그러니 ‘막’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리다. 희망은 어쩌면 바로 그 막막함 속에서 움트는 법이다. ‘막장’, 더 이상 내려갈 데 없는 끝이지만, 동시에 하늘을 향한 비상구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무대 위에 서 있다. ‘지금’이라는 막과 ‘끝’의 막, 그 교차로에 머무르며 이 순간에도 우리의 ‘막’은 이어지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산의 ‘막장’이라 할지라도, 그 끝은 하느님 안에서 다시 시작되는 ‘막’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인생에는 ‘막’이 있습니다. 무대의 막이 오르면 이야기가 시작되고, 언젠가 그 막은 다시 내려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시작과 끝이 맞닿은 경계에 서 있습니다. 신앙도 바로 그 지점에 머뭅니다. 세상에서는 퇴장이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입장이 되는 자리. 순교자들은 그 막을 지나 생명의 시작으로 나아간 이들입니다. 막이 내렸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그들의 피는 땅에 스며든 듯하지만, 교회의 씨앗이 되어 우리의 ‘막’ 위에서 다시 피어납니다. 삶은 늘 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지금 막 시작된 이 순간은 언젠가 마지막 막이 내리는 순간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절망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열리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다.”(터툴리아누스) 죽음을 넘어 생명을 증언한 이들의 ‘막’은 곧 하늘나라의 첫 막이 됩니다. cpbc2025.07.02

토빗이 말하는 신앙 실천은 자선과 선행[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41)토빗기 토빗기는 이스라엘을 떠나 이국땅에 흩어져 살아가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의로운 일을 하고 자선을 베풀라고 당부합니다. 얀마시스, ‘시력을 회복한 토빗’, 1550년께, 유화, 샤르트뢰즈 박물관, 두에, 프랑스.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에스테르기 일부와 다니엘서 일부는 히브리어 타낙 성경에 수록돼 있지 않습니다. 유다교 정경에 없는 이 책들을 ‘제2경전’이라고 합니다. 쉽게 풀이해 제2경전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에는 수록돼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는 책들입니다. 제2경전이라 해서 그 권위나 중요성이 덜한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교회는 경전으로 인정한 책들을 모두 구약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유다교 정경에 속하는 히브리어책들만을 구약성경으로 인정하기에 토빗기를 비롯한 제2경전을 구약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토빗기는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에세네파 쿰란 공동체에서 발견한 토빗기 단편들이 주로 아람어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토빗기 전체 내용이 온전히 보존된 본문은 헬라어로 쓰여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실린 토빗기 역시 헬라어 성경에서 옮긴 것입니다. 토빗기는 헬라어 성경 「칠십인역」에선 ‘Τωβιτ’(토빗)이라고 합니다. 토빗은 “야훼는 나의 복이시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토브야’에서 나온 말입니다. 책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토빗은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이시며 복이심을 가르쳐줍니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Tobias’(토비아스)라고 표기하고,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간행한 우리말 「성경」은 ‘토빗기’라고 쓰고 역사서에 포함해 놓았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토빗기를 유딧기와 마케베오기 사이에 두었으나, 불가타 성경은 토빗기를 느헤미야기 바로 뒤, 유딧기 앞에 배치해 놓았습니다. 토빗기는 기원전 8세기(BC 734년)부터 기원전 4세기 이후까지(BC 587년) 일어난 남북 왕조의 멸망, 예루살렘 함락, 성전 파괴, 바빌론 유배와 유배 시대 이후 유다교 신앙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후대에 토빗기가 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이유는 기원전 2세기께 저술된 집회서와 유사한 부분들(토빗 12,9; 집회 3,30)과 니산 달을 헬라어 이름인 ‘디스트로스 달’(토빗 2,12)로 사용하거나 그리스 화폐인 ‘드라크마’(토빗 5,15)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토빗기에는 부활 신앙이 발견되지 않다는 점, 천사론이 발전돼 전개되고 있다는 점 등을 미루어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전 170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토빗기는 납탈리 출신 이스라엘 사람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어떻게 극복하게 됐는지를 들려줍니다. 토빗기는 크게 토빗에게 닥친 불행(1─3장), 토비야의 여행(4─9장), 토비야의 귀향(10─12장), 토빗의 찬미가(13장), 종결(14장)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친족인 토빗과 그의 며느리가 될 사라의 가족이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아시리아로 유배를 갑니다. 토빗 가족은 현재 이라크에 있는 니네베에서 살고, 사라 가정은 현재 이란에 있는 엑바타나에서 유배생활을 합니다. 두 가족은 유배지에서도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모범 가정이었습니다. 토빗은 선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죽은 동포들의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정에 불행이 닥칩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높은 관직에 올랐던 토빗은 새 임금이 즉위하자 공직뿐 아니라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채 죽음을 피해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 게다가 얼굴도 모르는 동포를 장사 지내주고 난 직후에는 눈까지 멀게 됩니다. 사라는 혼인만 했다 하면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신랑이 죽어 나갔습니다. 이 일이 7번이나 반복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토빗과 사라의 기도를 들으시고 라파엘 천사를 통해 그들을 고쳐주기로 하십니다. 토빗은 아들 토비야의 장래를 위해 전에 자신이 맡겨놓은 돈을 찾아오도록 그를 메디아로 보냅니다. 이때 사람 모습을 한 라파엘 천사가 토비야와 동행하면서 그가 사라와 혼인하도록 이끕니다. 아내 사라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토비야는 라파엘 천사의 인도로 늙은 아버지 토빗의 병도 고치게 됩니다. 그래서 두 집안은 행복을 되찾습니다. 토빗기는 자선을 강조합니다. 토빗이 유배지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실천하는 길은 선행과 자선이었습니다. 그는 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는 입을 것을 주며, 죽어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버려진 동족들을 정성스럽게 묻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실천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토빗에게는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가는 길이었습니다.(토빗 4,11 참조) 토빗기는 이스라엘을 떠나 이국땅에 흩어져 살아가던 당시의 수많은 유다인에게 삶의 지침을 줍니다. 토빗은 죽기 전에 아들 토비야에게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의로운 일을 하고 자선을 베풀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는 이국땅의 유다인들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언젠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불러모아 주시리라 믿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토빗 13장 참조) 이처럼 토빗기는 하느님을 섬기고 선을 행하라고 권고합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9.20

사육제[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40)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정결하고 경건하게 하는 그리스도교의 절기를 말한다. 이 기간 중에 신자들은 매일 성경을 읽고 참회·금식·단식을 병행해야 한다. 가톨릭·개신교·동방 교회는 지내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며, 가톨릭은 재의 수요일부터 성삼일 직전까지다. 사순 시기 구체적인 규정은 종파마다 다르지만 꽤나 엄격하게 지켜져 온 듯하다. 프랑스에서는 이 규정을 어긴 이들을 종종 사형시키기도 했다. 이 고행의 순간에 육류는 엄격하게 제한되었지만, 생선은 허용되었는데, 생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로 생선을 뜻하는 ‘익투스(Ichthus)’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원자’ 각각의 첫 글자를 따 조합한 말과 같아서 두 개의 겹쳐진 물고기 모양은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암호처럼 쓰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이나 이탈리아처럼 삼면이 바다에 접한 몇몇 나라를 빼놓고 생선은 그리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었다. 가톨릭교회의 전례력상 금육일이 116일에 달해 어쩔 수 없이 생선을 먹었지만, 냉장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에 염장·훈제·건조 방식으로 저장되었던 생선 맛이 그리 좋았을 리 없다. 유럽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잉어와 숭어 요리가 발전된 이유도 양식이 가능한 물고기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한때나마 유럽을 지배할 수 있던 것도 사순절과 금육 기간에 대량으로 염장 청어를 수출한 데 기인한다. 근엄하고 엄격한 사순 시기 직전 마음껏 마시고 먹고 즐기는 기간이 있다. 이때는 고기와 술이 허용되고, 가면이나 화장에 기괴하고 색다른 옷차림을 한 사람이나 대형 인형을 앞세워 거리를 행진했다. 이 광란의 축제를 사육제(謝肉祭, Carnival)라 하며 현대에 와서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확장되었다. 프랑스의 니스 카니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카니발,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이 유명하다. 작곡가들이 열기와 즐거움이 가득한 사육제에서 영감을 받지 못했을 리 없다. 특히 유명한 슈만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사육제’는 21개의 소품으로, 전체 길이는 30분 정도다. 비범하고 환상적인 창조력이 넘치는 이 작품은 많은 피아니스트의 사랑을 받아왔다. 에프게니 키신이 연주한 슈만의 ‘사육제’ //youtu.be/t1e2TOseohU?si=vWl2P-WBTRYHl89w 생상스가 작곡한 ‘동물의 사육제’도 유명하다. 1886년 그가 오스트리아에 머무는 동안 사육제의 음악회를 위해 작곡되었다. 각 동물의 특성을 기가 막히게 살린 특색 있는 음악으로 유명하다. 처음부터 모든 곡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고, 시작은 1871년이었다. 생상스의 ‘사육제’는 특히 청소년과 아이들을 위한 입문 음악으로도 유명하며, 제13곡인 ‘백조’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요요마가 연주하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 //youtu.be/3qrKjywjo7Q?si=SlHVaP9P3DI3_O2n 작곡가 류재준cpbc2025.03.05

주님 이름을 모독하지 말며 주일을 거룩하게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27) 십계명(十誡命) ② 제3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켜라”라고 하신 성경 말씀에 따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주일 미사뿐 아니라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내라는 의미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제2계명 :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탈출 20,7) 명하는 법 ①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은 흠숭과 공경을 갖춰 불러야 합니다. ②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거나 개인적으로 하느님에게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금하는 법 ①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지 말아야 합니다. ② 그릇된 맹세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의 명예와 성실, 진실과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이름으로 지킬 생각이 없는 약속을 하거나 맹세를 하고 이행하지 않는다면,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거짓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진실하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잘못입니다. 구약 시대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고(탈출 6,2-8), 예언자와 사제들은 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을 전하고 백성을 축복했습니다.(신명 10,8) 신약 시대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줬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은 우리가 아닌, 하느님의 이름을 존경할 것을 명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은 우리의 청원과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영광으로 존경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나쁘게 말하거나 하느님에 대해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짓은 둘째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제3계명 :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탈출 20,8-9)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구약 시대부터 내려오는 계명입니다. ①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켜라”라고 하신 성경 말씀에 따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주일 미사뿐 아니라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낼 것을 명합니다. ②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 업적과 당신 백성을 위한 구원 업적을 찬미하고 기리는 거룩한 날, 곧 주님의 날입니다. 하느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듯이, 사람들도 일상의 일을 멈추고 쉴 수 있도록 마련됐습니다. ③ 주일은 휴식의 날입니다. 하지만 주일 미사 참여와 자선의 실천·적당한 휴식에 방해되는 일이나 활동은 삼가야 합니다. 주일에 일 때문에 충분한 여가 시간이 없다면 기도와 정성으로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④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성찬례(미사)를 거행하며 주일을 경축했습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경축하는 날로, 교회는 가장 중요한 의무 축일로 지킵니다. 주일 미사는 교회 신앙생활의 중심이기에 성실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다만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는 미사 참여에서 면제되며 고해성사에 임하지 않아도 됩니다. △감옥에 있을 때 △군 복무 중 외출이 자유롭지 못할 때 △병석에 있거나 병석에 있는 환자를 간호할 때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할 때(직장에서 허락을 받아야 할 때) △자연재해로 성당을 올 수 없을 때 △ 수해나 화재를 당한 사람을 급히 도와줘야 할 때 △자신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큰 범죄나 재난을 방지할 수 있을 때 등입니다.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특별한 기도로 주일을 거룩히 보내야 하는 의무는 있습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나온 ‘공소 예절’ ‘묵주기도 5단’ ‘그날의 복음과 독서를 읽고 묵상하기’ ‘선행과 봉사’ ‘주님의 기도 33번’ 등 주교회의에서 결의한 기도문을 바칩니다. 박모란 cpbc2024.11.20
![[이상근 평화칼럼] 아들 덕](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3/19/oOB1742348565743.jpg)
[이상근 평화칼럼] 아들 덕이상근 마태오(미국 테네시 오크릿지 국립연구소 연구원)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에는 묵주기도를 할 때마다 그저 반복되는 기도문에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 그리고 그 사이사이의 ‘영광송’까지. 뭐랄까, 기계적으로 입만 뗐다 하면 끝나는 그런 따분한 기도라고 생각했다.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하는 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냥 신앙생활 중 하나 정도로 여기며 대충 넘기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묵주기도의 ‘묵상’에 대해 알게 되고 체험을 하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단순히 기도문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 생애와 성모님의 삶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며 기도하는 것. 성경 속 장면 그 안으로 들어가 체험하면서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이 점점 하느님께로 향하고, 내 삶의 순간들이 하느님과 연결되는 경험을 하게 됐다. 묵주기도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내 영혼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다리였다. 그렇게 나는 매일 묵주를 손에 들게 됐다. 이 소중한 깨달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특히 내 아이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들이 “아빠, 이거 왜 이렇게 길어?” 하며 투덜대기도 했다. 그래도 꾸준히, 차근차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차에 오르면 묵주를 꺼내 들고 함께 기도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로 시작해 한 단 한 단,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등굣길을 채웠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묵주기도는 우리 부자의 아침 루틴이 됐다. 아들은 어느새 묵주를 쥐고 기도문을 술술 외우게 됐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루틴이 단순히 ‘아빠가 아들에게 가르쳐준’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아들에게서 더 큰 선물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살면서 누구나 그렇듯 나도 신앙의 열정이 식을 때가 있다. 일이 꼬이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밤잠을 설쳐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운 날들이 있다. 그런 날엔 솔직히 묵주를 들 생각조차 안 든다. ‘오늘은 그냥 넘어갈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차에 타자마자 아들이 묵주를 꺼내 들며 말한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그 순간 나는 웃음이 터지며 얼떨결에 묵주를 쥐고 기도를 시작한다. 아들의 그 작은 행동은 나에게 하느님 뜻을 다시 일깨워준다. 내가 가르친 기도가 이제는 아들을 통해 나를 다시 하느님께로 이끌고 있다. 피곤하고 지친 아침, 기도할 마음이 전혀 없을 때에도 아들의 목소리는 나를 깨운다. 이게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묵주기도를 하면서 깨달은 건, 기도란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함께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아들과의 등굣길 기도는 단순한 습관을 넘어 우리 부자를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묶어주는 끈이 됐다. 그리고 그 끈은 때로는 내가, 때로는 아들이 단단히 잡아주며 서로를 지탱해준다. 꼭 아이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친구, 아니면 혼자라도 좋다. 매일 아침 혹은 저녁, 묵주를 손에 쥐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보시라. 처음엔 어색하고 지루할지 모른다. 하지만 꾸준히 해보면 어느 순간 그 기도가 여러분의 삶을 바꾸고, 누군가와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처럼 여러분도 뜻밖의 순간에 하느님 손길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아들의 작은 목소리에서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cpbc2025.04.23

구원의 보편성[월간 꿈 CUM] 요나가 내게 말을 건네다 (28)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10)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공의회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 착한 사마리아인의 옛 이야기가 우리 공의회의 정신을 이끌어 준 모범이자 규범이었습니다. … 이 공의회의 풍요로운 가르침은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제4항) 1965년 12월 8일 역사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면서 우리 가톨릭교회가 절실히 깨닫게 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받는 세계’였습니다. 사실 세상은 제1차,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고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강도 만난 나그네인데(루카 10,29-37 참조), 교회는 끊임없이 전례와 율법과 구원을 가지고 논쟁만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울부짖고 탄식하며 절규하고 있는데, 또는 거대한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는데, 교회는 성당 안에 보호막을 치고 안주하며 근엄한 전례의 향을 피우며 자신들만의 구원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구원의 최종 결정권자는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구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을”(시편 146,3)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구원이 있음에도 교회가 감히 인간 구원에 대하여 결정권을 가진 듯 오만하였던 것입니다. 이 같은 오류를 바로 잡고자 깊은 반성의 성찰을 한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습니다. 따라서 공의회의 교부들은 시작부터 이렇듯 분명히 밝힙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에서 모인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사람의 시련, 영육의 곤경과 고통과 염원과 희망을 우리 마음속에 지니고 왔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온갖 고뇌에 우리는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관심은 특히 더 낮고 더 가난하고 더 힘없는 사람들에게 쏠립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도 기아와 곤궁과 무지로 고통받는 군중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치고 있습니다.(2코린 5,14)”(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메시지) 인간의 구원은 분명 하느님께 달렸음에도 2천 년 동안 교회는 줄기차게 교회 안에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리하여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라는 명백한 가르침을 잊고,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오류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만의 무서운 단죄와 이단의 죄를 씌워 칼을 휘두른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성령께서는 교회의 오류를 일깨워 주셨고, 교회가 구원의 참 신비와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비로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는 위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이렇게 만천하에 구원의 참된 복음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고(사도 17,25-28 참조),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1티모 2,4)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 제16항) 과연 교회 또한 하느님의 거대하고 웅장하며 장엄한 구원의 방주에 무임승차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향한 생명의 물줄기는 늘 아래로 흐르고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드디어 깨달은 것입니다. 또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명백히 가르쳐 주는 계시의 진리 역시 ‘구원의 보편성’이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그토록 원하신 것이 ‘만민의 구원’이었음을 교회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세우신 우리 교회의 이름이 ‘가톨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바로 보편된 구원을 일컫는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가톨릭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은총의 이름이면서 우리의 지상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 앞에는 세상 그 어떤 것도 소외되거나 열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말을 건넵니다. “사실 저 또한 구원에 대하여 우리 민족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아주 편협된 이기적인 구원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 큰 도시 니네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실 때, 그리고 그 뜻을 따랐을 때 구원의 보편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진정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구원의 문은 만민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 cpbc2025.01.13

구약성경 권수가 다른 천주교와 개신교[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7) 성경의 권수 구약성경 열왕기 상권의 첫 페이지가 펼쳐져 있다. OSV 천주교와 개신교는 왜 성경의 권수가 서로 다른가요? 천주교와 개신교는 성경을 같은 경전으로 사용하지만 구약성경의 권수가 서로 다릅니다. 천주교는 구약성경 46권과 신약성경 27권을 통틀어 모두 73권을 정경(正經)으로 인정합니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구약성경 46권 가운데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39권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여 모두 66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합니다. 천주교는 유다교가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다인을 위하여 그리스어로 번역한 이른바 ‘칠십인역’을 초대 교회부터 구약의 정경으로 인정해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로 기록된 7권의 구약의 책(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권, 마카베오기 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도 제2경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가 유다교의 39권만을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들여 독일어로 번역한 뒤로 개신교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지 않는 7권의 칠십인역을 정경이 아닌 외경(外經)으로 간주하였습니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천주교가 7권의 칠십인역을 정경으로 최종 결정하자 개신교 쪽에서는 이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좀 더 분명히 표명하기에 이릅니다. 영국 성공회는 외경이 “교회가 신도에게 생활의 모범이나 교훈을 가르치려고 할 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외경을 근거로 하여 교리를 제정할 수는 없다.”(39개조 종교 조항 제6조)라고 밝히고, 1647년 웨스터민스터 신학자 총회에서 “외경은 영감으로 쓰인 책이 아니므로 정경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외경은 성경과는 달리 교회 안에서 어떠한 권위도 가지지 못하고, 인정되거나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신앙 고백 제1장 3절)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제2경전의 일부가 히브리어로 기록된 필사본이 1947년 사해 부근에서 발견되면서 개신교가 히브리어로만 된 구약을 정경으로 인정하던 논리는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서학자들이 제2경전의 상당 부분이 예수님과 제자들, 또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서도 인용되었음을 밝혀냄으로써, 천주교에서 제2경전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정당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현재 한국 정교회와 대한 성공회는 1977년에 완역되어 출간된 「공동 번역 성서」를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제2경전을 성경의 끝부분에 따로 모아 놓았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일부 개신교단에서도 「공동 번역 성서」를 인용하거나 사용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성경에 대한 출판과 유권 해석은 천주교의 경우 교도권에 맡겨져 있어 성경 번역과 교리 해석에 차이가 없는 반면, 개신교는 누구나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에 해석의 차이로 논쟁과 교단 분열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 cpbc2023.07.18

십자가 사랑 묵상하고 실천합니다주님 부활 대축일·장애인의 날 추천 도서20일은 주님 부활 대축일이자 장애인의 날이다. 교회 안팎에서 십자가 사랑의 의미를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을 골라봤다. 완덕의 길 / 예수의 성녀 데레사 지음 / 최민순 신부 옮김 / 바오로딸 「완덕의 길」은 신비가이며 교회학자인 예수의 성녀 데레사(1515~1582)가 창립한 첫 개혁 가르멜회 성 요셉 수도원의 수녀들에게 남긴 가르침을 담고 있다. 전체 42장으로 수도 생활과 영적 생활 전반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권고에서 신비 체험까지 제시한다. 기도를 위한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덕행들(청빈·순수한 사랑·이탈·겸손 등)을 강조하고, 다양한 기도의 길(구송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 등)과 그 단계를 설명한다. 특히 ‘주님의 기도’ 각 구절 풀이를 통해 기도의 여정과 악의 유혹에 대처하는 방안을 안내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 최민순 신부의 번역으로 1967년에 출간됐고, 이번 개정판은 앞서 개정된 「영혼의 성」과 통일성을 갖춘 판형과 디자인이다. 기존 최 신부의 시적이고 유려한 필치를 보존하되 이해하기 어렵거나 모호한 표현은 일부 수정하거나 설명을 달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습관 / 안셀름 그륀 신부·우신루 지음 / 김혜진 옮김 / 분도출판사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자기 자신과 조화롭게 사는 데 방해되는 습관들이 있다. 죄책감·수동적 공격성·투사·콤플렉스·잘못된 경계 짓기·상처 주기 등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도 상처받는 메커니즘을 반복하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착한 마음과 기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선의와 기도만으로는 이 같은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나를 힘들게 하는 습관」에서는 관계를 방해하는 여섯 가지 유형을 제시하고, 인식을 통해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안내한다. 심리학적 통찰은 물론 성경적 치료법을 통해 관계를 힘들게 하고 때로는 파괴하는 메커니즘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결혼은 하늘나라 가는 예행연습이다 / 백복선 / 기쁜소식 한 여성이자 아내·어머니·교육자로 60여 년을 살아온 저자가 사랑의 다채로운 모습을 97개의 이야기로 전하는 책이다. 저자는 “사람의 사랑하는 방식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방식으로 연습하기 위해 우리는 사랑과 결혼을 하고 그 사랑을 실천한다”며 결혼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와 역할에서의 사랑을 서술한다. 사랑의 다양한 종류와 방식, 사랑으로 겪는 어려움을 푸는 방법,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고별 / 김춘호 / 인문학사 김춘호(프란치스코) 작가의 시집 「고별」이 출간됐다. 196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신문사 기자와 잡지사 편집부장 등을 역임한 저자의 세 번째 시집이다. 제목처럼 ‘고별’과 관련된 작품들을 비롯해 60여 편의 시를 담았다.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지만 어느덧 80대에 접어든 시인은 신의 예정을 벗어날 수 없는, 거스를 수 없는 피조세계를 이야기한다. 중도 시각장애인인 시인은 “스마트폰에 확대경을 들이대 자음과 모음을 겨우 맞춰 이번 시집을 완성했다”며 “불초 소생의 여생 마지막 페이지에 담은 통한의 노스탤지어”라 전했다. 하느님이 토끼라면⋯ / 마틴 발트샤이트·수잔네 슈트라서 / 백다라·백훈승 옮김 / 리시오 “하느님이 토끼라면, 거위구이 대신에 차가운 당근 샐러드를 먹을 거예요. (중략) 천사들은 귀가 길고 코를 씰룩거릴 거예요.”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만약 하느님이 토끼라면, 물고기라면, 구름이라면 어떨까? 글과 그림이 더해진 책은 얼핏 어린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화같지만, 세대를 불문하고 인간 중심의 세계관과 일상의 행동 양식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윤하정 기자윤하정2025.04.16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8주일- ‘내로남불’과 ‘마음의 선한 곳간’](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2/25/l4m1740473054069.jpg)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8주일- ‘내로남불’과 ‘마음의 선한 곳간’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 6장 예수님의 ‘평지 설교’의 한 부분을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첫 부분은 ‘형제 눈 속의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내용이고,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라는 말씀은 두 번째 부분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산상 설교’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작은 차이점은, 마태오 복음은 ‘좋은 열매, 나쁜 열매’를 언급하신 다음,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7,19)라는 심판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는 데 반해, 오늘 루카 복음에서는 ‘좋은 열매, 나쁜 열매’ 언급 후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6,45)라고 ‘마음의 문제’로 결론을 맺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잠시 마태오 복음의 ‘산상 설교’에 나오는 참된 행복 선언을 떠올려 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반면에 루카복음의 행복 선언에서는 단순히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지요. 희랍어 원문의 표현을 찾아보면, 오늘 루카 복음에서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마음의 문제’를 언급할 때 ‘마음’은 ‘심장’(καρδία, 카르디아)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마태오 복음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할 때의 ‘마음’은 ‘영’(πνεύμα, 프네우마)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성경의 세계에서 ‘심장’은 ‘육체적 생명의 자리’로 이해되고, ‘영’은 ‘육체에 생명을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생각합니다. 이제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을 다시 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6,41)라는 예수님의 아픈 질타를 묵상하면서, 어쩌면 이런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공통된 인간 속성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내로남불’을 넘어서서, 마음에 선한 곳간을 가꾸는 제자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6,45) 이기적이고 나약한 우리가 선한 마음의 곳간을 짓기 위해서는 하느님 영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마음의 선한 곳간’을 넓혀가려는 우리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겸손되이 하느님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 봅니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아멘.”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cpbc2025.02.26

하느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법[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45) 시서와 지혜서 시서와 지혜서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대한 인간의 응답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콘은 시편의 저자로 일컬어지는 다윗 임금. 가톨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구약 성경 정경 46권은 오경ㆍ역사서ㆍ시서와 지혜서ㆍ예언서 순으로 배열돼 있습니다.(유다교 성경은 토라, 예언서, 성문서 순으로, 개신교 구약 성경은 오경, 역사서, 지혜서, 예언서 순) 그중 시서와 지혜서는 욥기, 시편, 잠언, 코헬렛, 아가, 지혜서, 집회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배열한 이유는 주요 인물들의 활동 시기를 순서대로 나열했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고대 인물인 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편은 다윗 임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과 코헬렛, 아가는 솔로몬의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지요. 이어 구약 성경 시대 말엽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지혜서와 집회서가 배치됩니다. 시편과 욥기, 잠언, 아가는 유다교 히브리어 타낙 성경 정경에 속해 성문서로 배열돼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서와 집회서는 제1경전인 히브리어 구약성경 정경에 없어 제2경전이라고 하지요. 가톨릭 구약 성경은 시서로 시편과 아가를, 지혜서로 나머지 5권을 분류합니다. 가톨릭교회가 시서와 지혜서를 예언서 앞에 배열한 까닭은 구약 성경 다음으로 신약 성경이 바로 연결된다는 점과 연관이 있습니다.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예언서들을 구약 성경 마지막에 배열해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와 직접 연결하려는 교회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 내용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유다교 신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이 신앙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으로 성사됩니다. “‘주님’께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당신을 계시하셨고 이 백성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셨다는 데에는 늘 일치를 보인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모세의 인도로 자신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그를 통하여 계약을 체결하셨으며, 끝내 성조들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땅으로 자신들을 이끌어 가셨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경신례를 통하여 현재화시켜 나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처럼 유일하신 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펼쳐진 역사였으며, 이 관계 자체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었다.”(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주석 성경」 1359쪽) 구약 성경 중 오경과 역사서, 예언서는 이처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펼쳐진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서와 지혜서의 경우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내용이 전개됩니다. 곧 계약과 율법, 사제와 성전에 관한 관심보다 하느님을 어떻게 하면 잘 찬미할 수 있고, 참 지혜를 간구해 슬기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서와 지혜서는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라고 노래합니다.(시편 111,10; 욥 29,28; 잠언 1,7; 집회 1,14 참조) 이처럼 시서와 지혜서는 하느님의 가르침과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유다인들 사이에 지혜 문학이 발전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이미 유다교는 조국이나 성전, 왕조와 같은 역사적이고 물질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을 재건하겠다는 마음은 이미 없어졌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나라를 잃고 노예살이를 했지만, 율법을 통해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 역사적이고 물질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노예살이를 면하고 자기 땅으로 돌아와 비록 옛날처럼 왕국을 건설하지 못했지만 해방된 민족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겐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이라는 의식 대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이란 의식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민족이 우선이 아닌 개개인을 중시하는 풍토가 유다 사회 안에 확산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지혜 문학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지혜서는 인간의 지혜가 하느님에게서 기인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시편 104,24; 잠언 3,19), 창조된 세상 안에 내재하며 그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의 지혜는 세상과 하느님을 연결시킵니다.(잠언 8장 참조) 따라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지혜를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욥 28,28; 잠언 9,10; 집회 1,14) 유다인들은 바빌론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을 구원하고 해방시켜주실 하느님께 희망의 시를 지어 노래했습니다. 찬양과 탄원, 신뢰와 감사, 교훈 등 다양한 주제가 담긴 시편 기도는 이스라엘의 경신례에 자리 잡게 됐고, 그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중요한 기도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서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 심성을 시적 운율 안에서 결정체를 이룬 문학 작품입니다. 따라서 시서에는 구약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가 집약돼 있습니다. 그래서 시서를 특히 ‘시편을 구약 성경의 요약집’이라고 합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10.25

희망이 있기에 살아가는 삶[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95) 평안하냐?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장면들을 살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의 반응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아마도 스승의 부활이 제자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사고 안에, 기다림의 지평 안에, 그분이 되살아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를 빌어주신다. “평안하냐?”(마태 28,9)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요한 20,19) 이 말씀은 좌절과 절망, 슬픔과 시름 속에 빠진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표현이었다. 당신 죽음으로 인해 겪었을 마음고생을 헤아리며 진정으로 평화가 제자들 마음에 찾아오기를 바라는 말씀이셨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의 그러한 마음을 발견한다.(루카 24,13-35 참조) 두 제자는 스승을 잃고 실의에 빠진 채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살아온 삶에 관해 물으시며, 성경을 바탕으로 당신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자상하게 설명해주신다. 그들의 초대에 응해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빵을 나눠주실 때 비로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분은 곧 사라지셨지만, 그분과 함께한 길에서 경험했던 마음 뜨거움은 강렬히 남아있었다. 이 모든 것은 ‘희망’이라는 말로 귀결되는 듯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바로 그 희망이 가져다주는 은총의 선물일 것이다. 그 희망은 좌절과 절망의 절벽을 넘어 새로운 하늘을 향해 열린 창문을 마주하는 것이며, 어두운 지평선 너머로 새로운 여명이 밝아옴을 발견하는 것이다. 희망,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삶 그 안에서 찾아야 할 무엇, 주어지는 무엇이다. 그렇기에 그 희망은 역설적이다. 절망스럽고 어두운 현실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 희망은 고난을 경험한 끝에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6) 이 말씀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난이 희망찬 내일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고난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가능케 하고,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한다. 고난이 나의 죽음을 위해 필요했던 순간임을 깨달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희망을 놀라운 눈으로 발견할 수 있다. 부활을 맞은 우리 역시 주님과 다시 걷도록 초대되고 있다. 기쁨과 환희, 고통과 절망이 교차하는 평범한 일상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다.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은 우리의 다양한 경험, 특히 위기와 시련, 고난과 괴로움, 슬픔과 절망의 순간을 달리 바라보게 해줄 것이며, 새로 태어나는 부활의 기쁨과 환희는 바로 그러한 순간들을 겪어내지 않고선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온 삶이 전혀 무익한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이다. 삶의 애환, 고통과 근심, 괴로움과 외로움, 우울함과 초라함 등을 모두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말씀을 건네신다. “그래, 많이 힘들었지? 이제 괜찮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아니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아직 기회가 있다. 나를 찾고, 나를 온전히 실현할 기회가. 나를 향해 서 있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가 살아온 삶에 희망이 있다. 또한 앞으로 살아갈 삶에 희망이 있다. 우리가 계속해서 걸어야 하는 이유다. 한민택 신부cpbc2025.04.16

서예가 신부 4인의 붓끝에 담긴 기도의정부교구 정성훈·도현우·한만옥·용하진 신부 계주 개인전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한만옥·정성훈·도현우 신부가 각자의 작품 옆에 서 있다. 오른쪽 벽면에 걸린 두 점은 용하진 신부 작품이다. 축성(祝聖)의 서예가, 심성필성(心聖筆聖) 작품 총서 출판기념전’ 20일 개막 두달간 서울 명동 갤러리 1898 사제 네 명의 계주 개인전이 두 달간 서울 명동 갤러리 1898에서 개최된다. 바로 ‘ 릴레이 주자는 의정부교구 정성훈(안식년)·도현우(교하본당 주임)·한만옥(성사전담)·용하진(제7지구장) 신부다. 이들은 서예가이며 미술품 감정학 박사인 이동천 선생에게 오랜 기간 왕희지·김정희 등 거장들의 필법인 전번필법과 신경필법을 배우고 있다. 개막에 앞서 지난 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들 사제는 ‘서예가 기도와 닿아 있다’고 말했다. 한 신부는 “제가 나이가 가장 많은데, 정말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기도할 때도 분심이 들었다”며 “하지만 붓글씨를 쓰는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어 이를 응용해 기도와 수양에도 도움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정 신부 역시 “우리에게 붓글씨는 취미가 아니라 하나의 기도생활”이라며 “준비 없이 끄적이는 게 아니라 서예를 통해 묵상하고 집중하기 때문에 사목할 때에도 더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 신부는 “종교성과 예술성은 상당히 공통된 부분이 많다”며 “미사도 서예도 어떻게 보면 반복되는 작업인데,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면 같은 동작인데도 새로운 의미로 더 깊게 들어가게 된다”고 전했다. ‘축성의 서예가, 심성필성’이라는 제목 역시 종교와 예술의 조화와 연결된다. 도 신부는 “‘심성필성(心聖筆聖)’은 ‘마음이 거룩하면 글씨도 거룩하고, 글씨가 거룩하면 마음도 거룩해진다’는 의미”라며 “우리 자신부터 붓글씨를 통해 축성되기를 바라고 다시 우리를 통해 주변을 축성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동천 선생이 사제인 우리를 ‘축성의 서예가’로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 신부는 “가톨릭 신자는 모두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고, 거룩해진다는 건 우리 모두의 소명”이라며 “글씨가 거룩해진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고, 신앙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우리는 서예라는 도구를 통해 담아내는 것“이라고 설명을 더했다. 「축성의 서예가, 심성필성 작품 총서」는 총 4권으로, 이들 사제가 각각 20개 작품을 붓글씨로 쓰고 묵상하는 글을 더한 책이다. 한 릴레이 전시에서는 정성훈 신부(6.20~29)를 시작으로 도현우(7.4~13)·한만옥(7.18~27)·용하진(8.8~17) 신부의 작품 총 80점이 4회에 걸쳐 소개된다. 이들은 지난해 사순 시기에도 갤러리 1898에서 단체전을 열었다. 그러나 올해는 마치 자기색이 짙어진 아이돌 멤버들이 솔로 활동에 나서듯 개인전으로 돌아섰다. 같은 스승을 둔 만큼 이들의 서체는 닮은 듯 다르다. 자신만의 글씨 안에 각자의 생각도 담았다. 먼저 정 신부는 가톨릭 신앙행위의 핵심을 이루는 미사와 관련된 성경구절과 미사경문을 주제로 작품을 구상했다. ‘미사성제’부터 ‘아멘’ ‘천주적고양’ 등을 선보인다. 도 신부는 서예 필법을 넘어서는 마음의 수양, 곧 종교성과 예술성의 친밀한 조화로움을 지향하며 작업했다. 시편의 말씀을 중심으로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노기폐심지목’ 등을 준비했다. 한 신부는 오늘날 심각한 문제인 환경폐해에 직면해 ‘생태적 회개’를 바라며 ‘천지창조’를 주제로 삼았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잘 보존하고 가꾸고, 우리만 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넘겨주자는 의미에서 관련된 작품을 전시한다. 마지막으로 용 신부는 인생에 녹아 있는 수많은 만남 중 삶의 큰 변곡점이 되고 긴 여운을 주는 만남과 그로 인한 변화의 순간을 작품에 담았다. 대표작으로 ‘나는 있는 나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쉬자’ 등을 꼽았다. 의정부교구장 손희송 주교는 “사제는 말씀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이며, 그 사명의 수행은 다양한 방법으로 수행될 수 있고, 또한 수행되어야 한다”며 “네 신부님들은 더욱 정진하여 개인의 성장뿐 아니라 제단 밖에서의 복음 선포에도 더욱 열성적으로 임해주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축성의 서예가들이 선보이는 글씨는 붓을 굴리고 뒤집어서, 즉 붓 전체를 사용해서 나온 모양이라고 한다. 신부들은 서예 대가들의 필법을 알리기 위해 전시마다 개막식에서 붓글씨 시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담은 굿즈도 판매하며, 모든 수익금은 전액 기부할 계획이다. 전시 기간 매일 오전 10시~오후 6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문의 02-727-2336 네 사제의 작품은 9월 15~20일 일본 도쿄 오즈갤러리에서 열리는 ‘일기일회(一期一會)’전에도 전시될 예정이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5.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