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상징]77- 목소리- 그 사람의 특성을 드러내는 요소](//cpbc.co.kr/CMS/newspaper/2010/02/rc/32574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77- 목소리- 그 사람의 특성을 드러내는 요소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가수 바비킴(안토니오) 스토리가 얼마 전 일간지에 실렸다. 바비킴은 준비해 발표한 앨범마다 실패했다고 한다. 음반 제작자들은 한국인이 싫어하는 목소리라고 혹평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공황장애가 나타났다. 부모님은 아들을 병원 대신 성당에 보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외국생활을 했기 때문에 우리말을 못했다. 성당 뒷자리에 앉아 미사 내내 "빨리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학생 여럿이 다가와 성가대에 가입하라고 권했다.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중 1년 만에 기적이 일어났다. 공황장애가 사라진 것이다. 과거에 배척받던 그의 목소리는 지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목소리는 그 사람의 개인적 특징을 드러낸다. 각 사람 음성은 고유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 특별하다. 성경에서도 음성은 그 사람의 특성을 드러내는 요소이다.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아가 2,14). 그래서 예수님 음성도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착한 목자 음성은 안전과 보호의 의미를 갖는다. 사람 목소리는 감정뿐 아니라 성격도 보여준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온순함이나 인내를 나타낸다. 따라서 사람 목소리는 그 사람에 관한 많은 정보를 주고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성경에는 하느님 음성에 대한 언급도 많다. 하느님 음성은 때로는 알기 어렵고 불확실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때에 주님께서 불 속에서 너희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말씀하시는 소리는 들었지만,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다. 너희는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신명 4,12). 하느님 음성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로 여러 번 언급돼 있다. 때로 하느님 음성은 인간과 만남의 통로가 된다. "그러니 당신께서 가까이 가시어 주 우리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모두 들으십시오. 그리고 주 우리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시면, 우리가 듣고 실천하겠습니다"(신명 5,27). 신비로움과 초월성 때문에 엄청난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들이 나아갈 때에는 날개 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고 전능하신 분의 천둥소리 같았으며, 군중의 고함 소리, 진영의 고함 소리 같았다. 그러다가 멈출 때에는 날개를 접었다"(에제 1,24). 이처럼 하느님 음성은 그분 능력을 나타낸다. 또한 하느님 음성은 심판을 암시적으로 연상시켜준다. "그때에는 그분의 소리가 땅을 흔들었지만, 이제는 '내가 한 번 더 땅만이 아니라 하늘까지 뒤흔들리라'하고 약속하셨습니다"(히브 12,26). 하느님 계시는 음성을 통해 온다. 요한 세례자의 '광야에서의 소리'(마태 3,3)나 바깥에서 외치는 지혜의 소리(잠언 1,20)가 좋은 예다. 하느님과 이 세상이 만나는 중요한 순간에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을 때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좋은 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조은일2010.02.09
![[성경 속 상징] 76- 순례- 거룩한 곳으로의 여정을 의미](//cpbc.co.kr/CMS/newspaper/2010/01/rc/324148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76- 순례- 거룩한 곳으로의 여정을 의미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성지순례는 대개 종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 관습이자 전통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성지순례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성스러운 땅, 즉 성지와 순교자들 유해가 안치된 곳이거나 성인들 유적지인 성역을 방문해 경배를 드리는 신심행위를 말한다. 신자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들 성지를 찾아 축제와 예배에 참석하면서 그 장소에 얽힌 종교적 전승을 실존적으로 체험하고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일체감을 확인하게 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의 개입이 분명히 드러난 지역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둘러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순례는 높은 데에서 우리를 굽어보시는 분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어주신 하느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라며 성지순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모든 종교에서 영적 중심지로 가는 여행은 속죄와 정화, 새로운 삶으로 상승을 상징한다. 구약성경에서 순례는 개인이나 가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행되는 절기들에 참여하기 위해 연례적으로 떠나는 여행이 중심이 된다. 신구약에서 순례는 어떤 거룩한 곳으로의 여정을 의미한다. 구약의 순례는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후 널리 행해진 예배 행위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스라엘의 중요한 공동체 예배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행해졌다. 유다인 남자들은 일 년에 최소한 세 차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순례자들이 여행했던 장소는 예배 중심지인 동시에 정치적 중심지였다. 순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성전에 올라가는 15개 시편에서 잘 나타난다(시편 120~134장).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의 순례에 대한 성서적 원형은 아브라함이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따라서 믿음의 삶이란 처음부터 순례의 길로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해 환시로 받은 말씀을 전하면서 순례를 미래의 구원과 연관지어 묘사하고 있다(이사 2,2-4). 복음서에서 순례 이미지는 특별히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여행에서 강조된다. 복음서는 또한 예수님을 순례자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선언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신약성경은 순례자 이미지들을 통해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 삶을 강조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성경의 성조들을 언급하기도 한다(히브 11,8-10). 또한 신자들 공동체는 보통 격리되고 핍박받는 유배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그네나 행인으로 묘사되기도 했다(1베드 1,17). 시공을 초월해서 하느님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신자들은 상징적 의미에서 순례자들로 묘사된다. 이 세상이 바로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이며, 신자들은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여행 중에 있는 백성들이다. 따라서 순례자는 현세 고통을 넘어서 미래 희망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다.조은일2010.01.26
![[성경 속 상징] 71- 사십(40) - 새 세대가 시작하는 기간](//cpbc.co.kr/CMS/newspaper/2009/12/rc/320327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71- 사십(40) - 새 세대가 시작하는 기간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마흔의 나이를 불혹(不惑)이라 한다. 나이 사십이면 사물의 이치와 세상사에 어느 정도 깨달음이 있어 미혹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자신의 의지나 인생관을 확립하는 시기이고, 주변 여건에 흔들리지 않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고대 유다인의 비문들을 살펴보면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나이를 정확하게 몰랐던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묘비에 적힌 나이들이 정확한 나이가 아니라 어림잡은 나이를 새겨 놓은 것이다. 당시에는 정확한 숫자 개념이 없었다. 성경에 셋, 일곱, 사십이라는 숫자가 많이 등장하는 것이 그 증거다. 즉, 셋은 적은 것이고, 일곱은 좀 더 많은 것이며, 사십은 아주 많은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숫자들은 모두 근사치다. 이러한 부정확한 숫자 개념에 따라 유다인들에게 사십의 숫자는 비교적 긴 시간을 의미했다(1사무 17,16). 성경과 유다인의 전통에서 사십의 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40이라는 숫자는 노아 홍수에서 등장한다.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벌하기 위해서 40주야 동안 비를 내리신다(창세 7장).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탈출하고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유랑 생활을 했다. 또한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을 산에서 지낸다. "모세는 구름을 뚫고 산에 올라갔다. 모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그 산에서 지냈다"(탈출 24,18). 엘리야도 호렙 산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 천사가 주는 음식만으로 40일을 보냈다(1열왕 19,8).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을 벌을 상징해 사십 일 동안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 날수를 채운 다음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워서, 유다 집안의 죄를 짊어져라. 하루를 한 해씩으로 쳐서 사십 일 동안이다"(에제 4,6). 요나 예언자는 니느웨가 사십일 만에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이처럼 구약에서 사십이라는 숫자는 시련과 준비, 괴로움, 징벌과 관련이 있다. 성경에서 40년은 특별히 구 세대가 지나가고 새 세대가 시작하는 기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신 것이 가장 두드러진 사건이다(루카 4,1-13).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하신다.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사도 1,3). 여기서 40이라는 숫자 자체보다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중요하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나기 위해 속죄, 보속, 참회, 자신의 쇄신 등으로 준비하는 상징적 기간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교회는 매년 재의 수요일부터 성목요일 주님의 만찬 저녁 미사 전까지 40일 동안 사순절(四旬節)을 지낸다. 사순시기는 예수님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40일 동안 통회와 보속 그리고 희생으로 재(齋)를 지키는 기간을 말한다. 물론 이 40일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재를 지킨 것과 엘리야가 호렙 산에서 금식한 것,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재를 지킨 데서 유래한다.조은일2009.12.22
![[성경 속 상징]64-나팔-죽은 이들의 부활 알리는 소리](//cpbc.co.kr/CMS/newspaper/2009/10/rc/314175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64-나팔-죽은 이들의 부활 알리는 소리 허영엽 신부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나팔은 고대 사회 악기 중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악기였다. 그래서 무엇을 선포하거나 신호를 주는 목적으로 나팔을 자주 사용했다. 나팔은 음정을 낼 수 있는 공기관의 길이가 짧아 음정 수가 매우 제한돼 있다. 나팔은 산양이나 소의 활 모양으로 굽은 뿔로 만들었다. 성경에서도 나팔에 대한 언급은 많이 등장한다. 나팔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주로 전쟁 때였다. 전쟁을 소집하거나 공격의 개시나 마침을 알릴 때 사용했다. 혹은 적들의 공격을 경고하기 위해서도 사용했다. "벤야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한가운데를 떠나 피난하여라. 트코아에서 나팔을 불고 벳 케렘 위에 봉화를 올려라. 북쪽에서 재앙이, 엄청난 파괴의 조짐이 보인다"(예레 6,1). 전쟁의 승리를 선포할 때도 사용했다. "요나탄이 게바에 있는 필리스티아인들의 수비대를 치자, 필리스티아인들이 그 소식을 들었다. 사울은 '히브리인들은 들으시오!' 하면서 온 나라에 나팔을 불었다"(1사무 13,3). 나팔소리는 힘과 능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나팔은 예배 시작 시간을 알렸으며 회중의 찬양에 반주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별한 절기들은 나팔이 울려퍼짐으로 시작되기도 했다. 나팔이 예배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경우는 속죄일이었다. 옛날에는 나팔에 속죄의 기능을 갖고 하느님을 달래는 기능이 있다고 믿었다. 나팔을 길게 불면 백성은 시나이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자는 아무도 손을 대지 말고, 돌이나 활에 맞아 죽게 해야 한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숫양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거든, 백성을 산으로 올라오게 하여라"(탈출 19,13). 어떤 사건들에 대한 공적 관심을 유도하는 목적으로도 나팔을 사용했다. 왕이 등극할 때 나팔을 불었다. "예후는 '그 사람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면서,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임금으로 세운다"고 말하였소.' 그러자 그들은 재빨리 저마다 제 겉옷을 벗어 예후의 발밑 층계에 깔고는 나팔을 불며, '예후께서 임금님이 되셨다!'하고 외쳤다"(2열왕 9,12-13), 혹은 공개적 거부(2사무 20,1)나 집단적 맹세 등을 선포하기 위해서도 나팔을 사용했다. 나팔은 특별한 축제에서 기쁨을 나타내기도 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2사무 6,15). 따라서 나팔은 공적 예식에 사용된 악기였다. 신약성경에서 나팔은 부활을 상징적으로 알린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은 부활해서 영원히 살게 된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2-53). 그래서 중세 미술에서 나팔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예언하는 상징이 된다. 특히 최후의 심판을 그린 작품에 나팔이 등장한다.조은일2009.10.27
![[성경 속 상징]58-별- 밤하늘 별은 하느님 위엄의 증거](//cpbc.co.kr/CMS/newspaper/2009/09/rc/308106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58-별- 밤하늘 별은 하느님 위엄의 증거 요즘 인기있는 드라마는 사극이다. 특히 한 드라마는 별 이야기를 풀어감으로써 극의 긴장도를 높인다. 미개한 민족은 때때로 일어나는 일식ㆍ월식을 두려워해 전쟁ㆍ전염병ㆍ기근 등의 전조라고 믿었다. 별은 예로부터 신비한 존재를 의미하는 상징으로 유명하다. 원시시대 인류에게 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들은 모두 정령적 존재였고, 때로는 신이기도 했다. 바빌로니아 설형문자에서 신이 별 모양인 것도 이러한 사실을 나타낸다. 호주 원주민은 강자가 죽으면 큰 별이 되고, 약자가 죽으면 작은 별이 된다고 믿는다. 에스키모는 별을 조상이 환생한 것 또는 물고기나 짐승이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서양 천문학은 점성술을 모태로 생겨났다. 별의 이동을 자연력 및 농사철을 판단하는 데 이용했으며, 항해자와 여행자가 방위를 판단하는 데 별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동양과 서양의 천문지식이 발전했다. 특히 별과 별자리 기원에 관해서는 신화가 많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 신화가 가장 풍부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별은 자주 거룩함이나 영원성, 불사불멸, 희망 등을 상징한다. 세계 여러 신화에서는 특정한 별이 신과 결부돼 영웅이나 성인 등 신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 것으로 나타난다. 별이 인간에게 영향력을 가진다는 점성술의 신념도 별의 힘을 신의 의지로 관념화하는 데서 연유한다. 점성술에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것을 지배하는 별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기 때문에, 인간의 운명이란 곧 별의 순회인 것이다. 바빌론이나 앗시리아 종교에서 별은 신적 세력들의 계시로 나타났다. 메소포타미아에서도 하늘의 별들에 나타나는 천상 신들 사이에서의 사건과 지상 사건 사이에는 대응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등장했고, 이는 점성술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밤하늘의 별은 하느님 위엄의 증거이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을 지어 주신다"(시편 147,4). 별은 하늘의 거룩한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늘의 아름다움은 별들의 영광이고 별들은 주님의 드높은 처소에서 빛나는 장식이다"(집회 43,9). 또한 하느님께서는 별을 약속의 상징으로 보여 주셨다. "그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요셉의 꿈같은 경우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드러내는 상징이 된다.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창세 37,9). 신약에서 하느님 의지를 나타내는 별의 출현은 중요한 일의 징조가 되기도 했다. 베들레헴의 별은 구세주 탄생을 예고한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다"(마태 2,2). 사도 바오로는 별을 선택받아 부활하는 사람의 비유로 이용하고 있다. "해의 광채가 다르고 달의 광채가 다르고 별들의 광채가 다릅니다. 별들은 또 그 광채로 서로 구별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1코린 15,41-42). 그리스도교 석관의 조각이나 성물 등에서 별은 영원한 축복을 상징한다. 교회 미술에서 별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기도 한다. 조은일2009.09.01
![[성경 속 상징]54- 겨자씨- 미소하지만 희망과 인내의 상징](//cpbc.co.kr/CMS/newspaper/2009/07/rc/302497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54- 겨자씨- 미소하지만 희망과 인내의 상징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겨자씨는 성경이나 랍비 문헌에서 가장 작은 것을 가리킬 때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겨자라고 하면 음식점에서 나오는 톡 쏘는 매운맛 향신료를 상상한다. 겨자는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로, 재배식물 중에서 역사가 아주 오래된 것 중 하나다.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에 기록돼 있을 정도다. 성경시대에는 겨자를 기름과 약재로 사용했고, 중요한 향신료로 사용했다. 지금도 버섯에 중독 되거나 독이 있는 짐승에게 물렸을 때 겨자씨를 달여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겨자는 1년생 초본인데 중동지역에서는 3m 이상씩 자라 사람 키보다도 큰 것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들에서 자랐다고 하며, 또 흔하게 재배되는 것이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 이미지를 통해 비유하셨다. 예수님은 실제로 겨자씨를 땅에 심는 것 중에 가장 작은 씨라고 묘사하셨다. 그런데 가장 작은 것의 상징으로 사용된 겨자씨가 실제로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가장 작은 것의 상징으로 사용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갈릴래아 호수 근처와 북쪽에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흔한 식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마르 4,31). 당시 이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은 대단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다윗 성왕의 위대한 왕조를 다시 건설할 정치적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철저하게 그분 능력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인간의 눈에는 신비로운 형태를 지닌다. 보이지 않던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말씀도 처음에는 미약하게 보이지만 점차 엄청난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1-32).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 아주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라서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정원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된다고 역설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점차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누룩의 비유에서도 나타난다(마태 13,33). 이러한 말씀은 박해에 시달리던 초대교회 신자들에게도 큰 희망과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신앙인의 믿음에 대해서도 겨자씨에 비유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예수님이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잣대를 분명하게 언급한 대목이다. 비록 인간의 생각에는 작은 믿음이라 해도 믿음의 능력은 위대한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작고 미소한 겨자씨는 희망과 인내의 상징이 된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그 열매가 맺는 일은 믿음 안에서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겨자씨의 상징은 빨리빨리를 외치고 눈에 당장 결과가 보여야 안심이 되는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조은일2009.07.21
[성경 속 상징] 48-희생- 하느님께는 첫 열매를 바쳐야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위험에 처한 주인을 대신해 목숨을 잃은 충성스런 개 이야기가 가끔 언론에 나온다. 불이 난 집에서 자고 있는 주인을 깨우고 자신은 불에 타 죽은 개 이야기를 TV에서 본 적이 있다. 개처럼 충성스런 동물도 드문 것 같다. 요즘처럼 희생을 모르는 이기적 세상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예로부터 희생은 교환과 연결되는 개념으로 생각됐다. 즉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면 신에게서 그 이상의 것을 받는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인간이 신에게 올리는 희생 제물은 주로 첫 번째로 수확한 과실, 최초로 태어난 동물이나 첫 아이였다. 인간을 산 제물로 바치는 고대 관습은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희생 제사의 최고 형태였다. 그러나 점차 사람 대신 동물을 희생 제물로 드리게 됐다. 근대에 와서는 윤리적 행위를 희생으로 여기기도 했다. 희생은 점차 인간사회 질서 유지와 자신 생명의 안녕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 된 것이다. 성경은 희생을 자주 언급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빈손으로 자신에게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을 인간처럼 생각하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너희는 무교절을 지켜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아빕 달 정해진 때에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그달에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무도 빈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탈출 23,15). 하느님께는 첫 열매를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탈출 13,2). 최초로 태어난 남자 아이는 하느님의 소유물로서 대속하지 않는 한 하느님 백성의 처소에 머물 수 없다(탈출 13,13). 그러나 하느님은 페니키아나 가나안의 신들과는 반대로 인간이 희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대체로 구약의 희생에는 피의 희생으로서 제물을 죽인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 제사를 지낼 때는 제물이 될 동물을 희생시켜 봉헌했다. 죄를 범한 사람이 흠 없는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은 자신의 죄를 그 제물에게로 옮기기 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피를 흘리지 않는 곡식물을 희생으로 드리는 경우에는 고운 가루로 만들었다. "누가 주님에게 곡식 제물을 예물로 바칠 때에는, 고운 곡식가루를 바쳐야 하는데, 거기에 기름을 따르고 유향을 얹어…"(레위 2,1). 그러나 점차 겉으로 드러나는 희생보다는 마음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저의 기도 당신 면전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손 들어 올리니 저녁 제물로 여겨 주소서"(시편 141,2). 신약에서 예수님은 최후 만찬에서 구약의 희생 제물 대신 자신을 구원의 희생으로 바쳤다. 십자가상에서 피 흘리는 모습으로 자신을 바치셨던 것이다(요한 1,29).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1코린 15,20). 하느님이 믿는 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피의 산 제물이 아니라 영적인 산 제물이다(1베드 2,5). 그 사람의 전 존재를 바친다는 완전한 봉헌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로마 12,1). 진정한 희생은 마음의 온전한 봉헌이 전제돼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실제적 행위로 연결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희생은 공허한 것이 된다. 조은일2009.06.02
![[성경 속 상징] 47-피-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계약 맺어](//cpbc.co.kr/CMS/newspaper/2009/05/rc/296362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47-피-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계약 맺어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처음 천주교가 남미나 아프리카 등지에 전래됐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식인종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미사 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체성사를 오해한 데서 비롯됐을 것이다. 피는 불안과 공포, 흥분의 상징이다. 고대인들은 피, 특히 사람 피는 건강에 매우 좋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7세기께 이란 지역 기마전사들인 스키타이족 전사들은 전투에서 적군의 피를 마셨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효심 깊은 자식이 어버이의 병을 고치려고 자기 피를 마시게 했다는 우리나라 민담도 전해진다. 구약성경에서는 단호하게 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한다. 사람의 피는 고사하고 동물의 피를 먹는 것조차 금기시된다(창세 9,3-4). 이러한 금지가 율법에도 그대로 고스란히 이어진다(레위 7,27-28). 짐승의 피를 따로 마셔도 안되고 피가 든 살코기를 먹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사람의 피를 결코 흘려서는 안 된다는 명령도 중요한 율법이다.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나는 어떤 짐승에게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창세 9,5). 남의 피를 흘린다는 것은 물론 살인을 뜻한다. 피는 생명의 상징이다. 짐승의 피를 먹지 못하는 이유는 생물의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피는 먹어서는 안 된다. 피는 생명이고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신명 12,23). 그리고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다. 생물에 생명을 주고 또 거두는 것은 하느님의 절대적 권리이기 때문이다(창세 3,19). 따라서 생명과 직결된 피를 먹지 않는 것은 생명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짐승의 피를 먹는 행위는 하느님의 주권을 거스르는 행위이다(1사무 14,33). 성경에서 살인은 생명에 대한 하느님 주권을 침해하고 하느님 모상인 인간을 죽임으로써 하느님께 직접 도전하는 것이다(창세 9,6).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남의 피를 쏟아 죽이는 자에게 벌을 내리신다(시편 5,7). 월경과 출산도 본의는 아닐지라도 피를 흘렸기에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고 생각했다(레위 12,1-8). 그러나 생명의 상징인 피는 인간에게 속죄와 정화와 해방, 생명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그래서 피는 제단과 성소와 성전을 정화하고 속죄하는 데에 쓰였다(레위 16,15-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하시며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7-28). 여기서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인간에게 완벽한 구원을 가져다 준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로마 3,25).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짐승의 피로 맺어진 계약 대신에, 당신의 피로써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다. 따라서 미사 때마다 신자들은 새 계약의 피를 마심으로써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조은일2009.05.26
![[성경 속 상징]46- 목자- 하느님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cpbc.co.kr/CMS/newspaper/2009/05/rc/29535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46- 목자- 하느님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지난 4월 5일 오전 경기도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지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님을 추모하는 미사가 엄숙하게 거행됐다. 이날 미사 때 김수환 추기경님 묘비를 축복했다. 묘비에는 김 추기경님 사목 표어인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 23,1)는 문구가 간단한 약력과 함께 써 있다. 이 시편 구절은 김 추기경님께서 가장 좋아했던 성경 구절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근동지방에서 양떼를 목초지에서 인도해 들짐승에게서 보호하는 목자는 높이 평가했다. 목자는 가축에게 풀과 물을 찾아주고 도둑이나 들짐승들에게서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목자가 왕과 같은 존재로 나타난다. 예로부터 목자 일은 책임이 크고 때로는 위험한 직업이었다. 그래서 성경에서 목자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하느님께서 친히 다윗을 향해 하신 말씀에도 잘 나와있다. "전에 사울이 우리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2사무 5,2). 그래서 하느님에게 인도된 사람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는다(이사 49,9-10). 또한 백성의 지도자들도 목자에 비유된다.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예레 3,15). 선한 목자의 역할에 대한 분명한 언급도 눈에 띈다.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에제 34,12). 목자에 대한 상징의 절정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로 시작하는 시편 23편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목자'가 임금의 정식 명칭이나 칭호로는 쓰이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는 목자의 상징이 하느님께는 드물게 적용된다(마태 18,12-14).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사명을 착한 목자라는 비유로 드러내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예수님은 착한 목자를 삯꾼과 비교하며 착한목자의 역할을 분명하게 하신다(요한 10,12-13).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군중을 보시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 아픔과 질병을 고쳐주시고 그들을 먹이신다(마태 9,35-37). 붙잡혀 가시면서는 제자들이 목자 없는 양 떼처럼 흩어지리라고 염려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마르 14,27). 초대교회 때 지역 교회 공동체 지도자를 목자라고 불렀다(에페 4,11) 이러한 명칭은 주님의 목자 직무에 동참하고 그분을 대리하여 직무를 수행함을 뜻한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사제를 목자라고 부른다. 착한 목자의 상은,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 빈번히 나타나는 주제로서 고대 로마의 지하묘소 카타콤바 벽화나 석관의 부조, 모자이크화 등에 자주 등장한다. 조은일2009.05.19
![[성경 속 상징] 43-소금-지속성과 변치 않는 충실성](//cpbc.co.kr/CMS/newspaper/2009/04/rc/291093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43-소금-지속성과 변치 않는 충실성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물 위에서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책을 읽는 젊은이 사진을 본적이 있다. 처음에는 합성 사진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실제로 죽은 바다라는 뜻의 이스라엘 사해에 가면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걱정이 없다. 사해 물에는 소금 성분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염분 함유량이 보통 바닷물에 비해서 10배에 가깝다고 한다. 또한 사해에는 인체에 유익한 각종 광물질이 다량 포함돼 있다고 한다. 사해 주변 진흙에는 각종 미네랄 성분이 농축돼 있어 피부 미용에 아주 좋다고 한다. 사해는 죽은 바다가 아니라 사람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바다인 것이다. 옛날부터 소금은 아주 귀한 물건이었고 그래서 귀중하게 취급했다. 로마에서는 관리나 군인에게 봉급을 소금으로 지불하던 때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금을 주고 노예를 사기도 했다.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한 소금은 주요 교역 물품이기도 했다. 그리스인이나 아랍인들은 계약을 맺을 때에 실제로 소금을 나눠 먹었다. 소금은 지속성과 변치 않는 충실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금을 함께 먹는 계약은 영원한 계약을 상징했다. 성경에서도 소금은 인간 생명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물과 불과 쇠와 소금 고운 밀가루와 우유와 꿀 포도즙과 기름과 옷이다"(집회 39,26).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로부터 소금 바다를 중심으로 소금을 채취하거나 제조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인들은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소금을 상대적으로 풍족하게 섭취할 수 있었다. 유다인들에게는 "소금 없는 식사는 식사가 아니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소금은 식생활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는 다행히 생활에 필수적인 소금 바다와 소금 성읍이 있었다. 광야에 있는 성읍들은 벳 아라바, 미딘, 스카카, 닙산, '소금 성읍', 엔 게디, 이렇게 여섯 성읍과 거기에 딸린 촌락들이다(여호 15,61-62). 또한 소금 골짜기라 불리는 곳도 있었다(2사무 8,13). 그런데 소금이 생명에 꼭 필요하지만 너무 많으면 죽음까지 불러올 수 있다. 소금바다인 사해가 바로 그런 말이다. 소금은 생명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황폐와 폐허, 죽음과 저주의 상징이기도 하다(신명 29,22). 또한 이스라엘 율법에 따르면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물 위에도 소금을 뿌려야 했다. "네가 그것들을 주님 앞에 바치면, 사제들은 그 위에 소금을 뿌리고 주님에게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에제 43,24). 소금에는 깨끗하게 하는 정화와 아픈데를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 더 나아가 몸을 튼튼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을 자른 다음에 물로 몸을 씻고 소금으로 문질러줬다(에제 16,4). 소금은 음식의 부패를 막고 맛을 내며, 생명을 지속시키고 강화한다. 소금의 이러한 의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역할을 소금에 비유해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조은일2009.04.14
![[성경 속 상징]31-빛- 선과 악을 가늠하는 잣대](//cpbc.co.kr/CMS/newspaper/2008/12/rc/27814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31-빛- 선과 악을 가늠하는 잣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약 400nm-700nm 파장을 가진 전자기파(가시광선)를 빛이라고 한다.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를 광속이라고 하는데,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고 지구에서 달까지 가는 데 1초 정도 걸린다고 한다. 넓은 의미로 빛은 적외선과 자외선 및 엑스선, 감마선까지 포함해 지칭하기도 한다. 인간은 빛이 있어야 사물을 볼 수 있다. 빛은 특히 비육체적, 비물질적인 것의 표현이므로 예로부터 신(神))의 정신, 영성을 상징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세상의 빛을 본다"고 표현한다. 고대 신화에서 빛의 영웅과 어둠과의 전쟁이 자주 등장한다. 신화에는 빛이 어둠에 승리해 세계 창조, 혹은 구원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소개된다. 고대 이집트 여러 신전에서는 신들상 앞에 등불을 밝혔다. 당시 사람들은 이 빛에 생명의 상징뿐 아니라 악마를 쫓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에서 빛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생겨났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 이처럼 빛은 하늘, 즉 신적인 것과 결부돼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구세주 탄생을 예언하며 암흑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빛을 본다고 표현했다(이사 9,1). 그래서 사람들이 빛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과 안전 속에서 사는 것과 같았다. "의인들의 빛은 흥겹게 빛나지만 악인들의 등불은 사위어 간다"(잠언 13,9). 하느님께 반역하는 악인의 몰락을 빛이 꺼지는 것에 비유했다. "정녕 악인들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타오르지 않네. 그 천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를 비추던 등불은 꺼져 버리지"(욥 18,5-6). 이처럼 성경에서 빛은 하느님을 상징한다. 또한 빛은 질서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요한 11,9). 그래서 빛은 사람들이 무질서를 거슬러 싸울 때 그들을 보호해 준다. 이처럼 빛은 생명을 주고 보호하는 특징을 지닌다. 예언자들이 언급하는 큰 빛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규정한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이처럼 빛은 구원을 상징하기도 한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그래서 빛은 선과 악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어 심판적 기능을 갖는다. "불신자들과는 상종하지 마십시오. 의로움과 불법이 어떻게 짝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빛이 어떻게 어둠과 사귈 수 있겠습니까?"(2코린 6,14).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하느님 말씀은 진정한 빛이다"고 했다. 또한 중세 신자들은 고딕 양식의 교회에서 어두운 건물 내부에 들어오는 태양 빛을 그리스도의 상징이고 빛을 받은 창을 성모 마리아의 상징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조은일2008.12.30
![[성경 속 상징]30-안수(按手)- 축복을 전달하는 가시적 표현](//cpbc.co.kr/CMS/newspaper/2008/12/rc/27722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30-안수(按手)- 축복을 전달하는 가시적 표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사제서품식 후 새 사제는 부모님에게 첫 안수(按手)를 한다. 내 경우에도 사제서품 미사가 끝난 후 어머니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안수를 청하셨는데 순간 감격에 겨워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던 기억이 난다. 아마 모든 사제들은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옛날부터 손은 축복을 이끄는 신체 부위로 생각했다. 많은 나라 신화에도 안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구원을 가져오고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많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종교적으로 거룩한 인물인 예언자, 사제와 하느님의 대리자라고 믿었던 왕의 오른손에는 구원과 치유와 축복의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안수는 그리스도교 의식 가운데 하나로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고 능력과 자격을 수여하는 상징적 행위로 정착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 안수는 하느님의 성령을 안수 받는 이에게 준다는 뜻을 갖는다. 성경에서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축복을 전달하는 가시적 표현이다. 야곱은 에프라임과 므나쎄 머리에 오른손과 왼손을 얹고 축복했다. "이스라엘은 손을 엇갈리게 내밀어, 에프라임이 작은아들인데도 오른손을 에프라임의 머리에 얹고, 므나쎄가 맏아들인데도 왼손을 므나쎄의 머리에 얹었다"(창세 48,14). 장자권 상속이나 육체의 건강을 기원하면서도 안수를 했다. 그리고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거나 직책을 임명할 때도 안수를 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써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공동체 최고지도자로 임명됐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데려오너라. 그는 영을 지닌 사람이다. 너는 그에게 네 손을 얹어라'"(민수 27,18). 구약성경은 안수를 통해 죄가 옮겨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레위인들이 황소들 머리에 손을 얹고 나면, 너는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또 한 마리는 번제물로 주님에게 바쳐, 레위인들을 위한 속죄 예식을 거행하여라"(민수 8,12). 이처럼 손을 얹음으로써 죄라는 무거운 짐을 다른 존재에게 떠맡기는 것이다. "아론은 살려 둔 그 숫염소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 곧 그들의 허물과 잘못을 고백하여 그것들을 그 염소 머리에 씌우고서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손에 맡겨 광야로 내보낸다"(레위 16,21).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이 다른 이들에게 성령을 수여할 때도 안수를 했다.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사도 8,17). 또한 안수를 통해 교회의 특별한 직위를 수여했다(사도 6,6).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할 때도 병자에게 손을 얹어 안수를 했다(루카 13,13). 그리고 안수는 축복을 주는 방법으로 사용했다(마태 19,13). 현재 가톨릭교회에서는 세례 지원자에게서 악마를 내쫓을 때, 사죄를 할 때, 병자ㆍ견진ㆍ신품성사 때 안수를 한다. 이때 손을 얹어 기도하는 안수의 동작은 공동체에 대한 봉사를 위한 축성과 거룩한 권능을 전수한다는 표지가 된다. 따라서 안수는 하느님의 성령이 선발된 존재를 세상에서 분리시켜 그에게 직무를 수행할 권위와 능력을 수여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오늘날 안수의 본질은 직분과 그에 따른 능력의 수여 및 직위 계승의 의미가 강하다. 이러한 의미의 안수는 사제 서품 의식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조은일2008.12.23
![[성경 속 상징] 29-혀- 하느님 찬양하는 언어, 무서운 무기](//cpbc.co.kr/CMS/newspaper/2008/12/rc/276055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29-혀- 하느님 찬양하는 언어, 무서운 무기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유다인의 지혜서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나라의 왕이 신하 두명을 불러 서로 정반대 임무를 맡겼다. 한 신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을, 또 다른 신하에게는 가장 악한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이었다. 임무를 맡은 신하들은 온 세상을 두루 돌아본 후에 그 답을 찾아왔다. 그런데 두 신하의 답은 같았다. 그들은 모두 사람의 '혀'라고 답했던 것이다. 왕은 두 신하의 열띤 논쟁을 들어본 후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도 혀요, 가장 악한 것도 혀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혀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도 악도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세치 밖에 되지 않는 혀는 온몸을 다스릴 정도로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혀를 통해 만들어 내는 말 한마디는 행복과 불행의 열쇠가 될 정도니 말이다. 무심코 내뱉은 말은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영향을 주듯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혀는 웅변과 함께 거짓말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람이 혀를 내밀 때는 대부분의 민족이 상대에 대한 우롱이나 경멸의 표시로 여겨진다. 그런데 티베트에서는 존경의 인사가 되고,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에게는 환영의 표시가 된다고 한다. 이처럼 지역마다 다른 풍속을 나타내는데 중요한 것은 혀 자체가 감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혀는 인간의 언어활동 도구다. 혀는 좋은 일에서도 나쁜 일에서도 역할을 한다. 혀는 말을 만들어내기에 일종의 창조 기관으로 간주됐다. 이집트 전설에 의하면 세상은 심장과 혀, 즉 정신의 힘과 창조의 말에 의해 세계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집트 사람들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심장과 혀라고 생각했다. 성경에서 혀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언어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죽음의 형벌에서 저를 구하소서, 하느님, 제 구원의 하느님. 제 혀가 당신의 의로움에 환호하오리다" (시편 51,16). 또한 혀는 인간의 생각과 태도를 나타내기에 삶의 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의인의 혀는 순수한 은과 같지만 악인의 마음은 별 가치가 없다"(잠언 10,20). 인간의 행복은 혀에 달려있다고 단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 18,21). 잠언에서 사람은 혀가 만들어낸 말의 열매를 먹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타인과 자신의 상황에 대해 쏟아내는 우리의 말은 결국 자신을 향하게 된다. 또한 사람의 혀가 무서운 무기로 비유되고 있다. "매에 맞으면 자국이 남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집회 28,17). 그래서 위험한 혀는 독사로 비유된다. "뱀처럼 혀를 벼리고 살무사의 독을 입술 밑에 품습니다"(시편 140,4). 신약에서 야고버 사도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혀를 삼가라고 권면했다. 아무리 신앙심이 깊어도 혀를 제어할 수 없다면, 그 신앙심은 무의미하다고 가르친다.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야고 1,26).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성령이 불꽃 모양의 혀로 제자들에게 내렸다고 전해진다(사도 2,3-4).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불꽃 모양의 혀로 나타난 성령의 모습은 중세 회화에서 즐겨 사용했던 주제다. 이처럼 혀는 비언어적인 메시지를 의미하기도 했다. 조은일2008.12.16
![[성경속 상징]21-귀- 하느님께 대한 적절한 응답](//cpbc.co.kr/CMS/newspaper/2008/10/rc/268523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21-귀- 하느님께 대한 적절한 응답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나이가 들면 왜 귀가 잘 들리지 않을까? 한의학에서는 귀가 신장 활동의 강약을 나타내는 곳이라고 한다. 노화에 따라 청력도 약해지는 까닭은 신장 기능이 약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포유동물은 외이ㆍ중이ㆍ내이 세 부분으로 구분된 청각기관인 귀를 가지고 있다. 소리를 분별하는 기관인 귀는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기능도 한다. 성경에서 귀는 순종을 의미한다. 히브리 노예가 6년간 일하면 7년째에는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런데 만일 당사자인 노예가 6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주인 집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주인은 그를 재판관에게 데려가서 노예의 귀를 문짝이나 문설주에 다가세우고 송곳으로 뚫는다. 그렇게 하면 그는 평생동안 노예 신분에 머물게 된다(탈출 21,6). 사제를 임명하는 임직식에서 사제 직분을 맡은 사람의 오른쪽 귓불에 희생제물의 피를 바르기도 했다(레위 8,23). 귀는 주변 소리나 정보를 잘 듣고 따르려는 정신적 자세, 즉 마음 준비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래서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얘기하는 상대방에게 마음을 향하는 것이나 마음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잠언 4,20). 귀는 인식하는 기관으로서 마음과 생각의 동의어로 나타난다(잠언 2,2). 듣는다는 것은 귀를 기울이고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 대한 적절한 응답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를 그 고통으로 구하시고 재앙으로 그 귀를 열어 주십니다"(욥 36,15). 마음의 눈이 있는 것처럼 마음의 귀도 존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귀는 예민하다. "주님의 귀는 예민하셔서 모든 것을 다 들으시므로 불평을 속삭이기만 해도 그 귀에 다 들린다. 구원의 날이 오면 귀머거리의 귀가 열려 책 읽는 소리를 듣게 된다"(지혜 1,10).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종종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고 말씀하셨다(마르 4,9).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간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그러나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령을 거역한다(사도 7,51). 예수님께서는 듣지 못하는 이를 고쳐주시기도 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4). 과거 가톨릭 세례식에서는 사제가 "열려라"하고 말하면서 예비신자의 양쪽 귀를 만지는 예식이 있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향해 마음의 귀를 연다는 의미다. 듣는 것은 생명과 축복이요 듣지 않는 것은 심판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적게 이야기하고 남의 말을 열심히 들으라는 뜻이다"는 격언이 있다. 생활 안에서 깊이 생각하며 실천해볼 일이다. 조은일2008.10.14

귀 막기와 귀 기울이기[월간 꿈CUM] 테마로 읽는 구약 성경 – 듣기 (03) 출처: 월간 꿈CUM 사람은 자기 귀를 막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님 잔소리가 듣기 싫을 때 큰 소리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폰을 쓰는 것처럼요. 귀를 막는 행위는 마음에 벽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이나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등을 돌렸으며,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다. 그들은 만군의 주님께서 당신의 영으로 이전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보내신 율법과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마음을 금강석처럼 굳게 만들었다.(즈카 7,11-12) 예언자들은 이 귀먹음을 할례받지 않은 귀로 표현합니다. 그들의 귀는 할례를 받지 않아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예레 6,10) 예언자들이 말하는 귀의 할례는 마음의 할례를 가리킵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계약맺은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육체의 할례만으로는 부족하고 영적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을 드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십니다. 성경은 마치 하느님께 우리처럼 귀가 있는 듯이 묘사합니다. 백성이 주님의 귀에 거슬리는 불평을 하였다. 주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진노하셨다.(민수 11,1) 바로 이 들음이 하느님과 우상을 구별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 사람 손의 작품이라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시편 115,4-6) 우리의 형편을 굽어살피지도,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도 없는 무능한 우상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 사람이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지문(指紋)처럼 성문(聲紋)이 있습니다. 즉, 모든 목소리는 고유하기에, 우리는 목소리를 통해서 그를 알아차리고, 그를 맞이하며, 그의 현존에 전율합니다. 하느님께도 목소리가 있어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느님께도 목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하느님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은 없고 오직 들을 수 있는 목소리만 있다고 말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불 속에서 너희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말씀하시는 소리는 들었지만,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다. 너희는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신명 4,12) 목소리는 생명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우상(시편 115,5)과 달리 하느님의 목소리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목소리는 때로는 너무 고요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체험한 하느님의 목소리처럼 말입니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2) 이 고요한 목소리는 소란스러운 가운데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침묵 중에 머물러야 합니다. “들으라”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신명기와 예언자들을 통해 수없이 반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령은 잘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내 백성은 말을 듣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나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시편 81,12) 고요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들어라”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여전히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4)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유일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단 한 번에 말씀하셨기에 더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는 방식을 보면 진정한 들음의 학교라 부를만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는 장면을 봅시다.(요한 4) 예수님은 표면적 의미에 집착하여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는 이방 여인의 말을 지치지 않고 계속 들어주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말을 들어주시면, 특히 상처받은 이나 죄인의 말을 들어주시면, 그들 앞에 새로운 미래가 펼쳐집니다. 예수님의 들음은 자캐오에게 무슨 일을 일으켰습니까? 또 니코데모에게는요? 예수님은 이들의 깊은 욕망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욕망이 어떤 것이라도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귀 기울여 다 들으신 뒤 그들이 스스로 진리 안에서 선택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절대 어느 쪽으로 유혹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항상 예수께서는 ‘만일 네가 원한다면’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 삶의 중심을 바꾸고 우리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게 합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아마추어미술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cpbc2026.08.12
![[성경 속 상징] (124-끝) 하느님-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신 분](//cpbc.co.kr/CMS/newspaper/2011/07/rc/38394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124-끝) 하느님-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신 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성경에서 하느님처럼 다양한 상징으로 표현되는 존재가 또 있을까? 물론 많은 사람들 생각처럼 하느님에 대한 비유나 상징은 대부분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이미지들이다. 거룩한 장소나 사람, 성물들과 관련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실 어떤 특정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 분이시다. 온 세상과 모든 이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의 하느님도 성스러운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 속 하느님에 대한 언급은 대체로 은유적이다. 그래서 목자(시편 23,1), 설계자이시며 건축가(히브 11,10), 농부(요한 15,1), 혹은 불(신명 4,24)이나 반석(시편 19,15) 등 아주 다양하다. 가장 일반적인 하느님 상징은 왕이나 임금이다. "하느님, 당신께서 바로 저의 임금님이십니다.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시편 44,5). 하느님은 또 종종 율법을 제정하신 분이나 재판관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나는 간음하고 살인한 여자들을 재판하듯 너를 재판하고, 분노와 질투로 너에게 살인죄의 벌을 내리겠다"(에제 16,38). 신약성경에서 가장 인상적인 비유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비유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아버지로 소개해주셨다. 여기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인격적이고 더없이 친밀한 생명의 관계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또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랑으로 상징된다. 이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통해 맺어진 독특한 관계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의 신을 섬기는 것을 불륜을 저지른 관계에 비유하신다고 전한다(에제 16).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고 회개하도록 엄청난 노력을 하신다(호세 2,4). 여기서 하느님은 사랑하는 이에게 깊이 헌신하고 상처받고, 배신당한 애인으로 그려진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신 분, 위로자로 상징된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주 가난한 자, 겸손한 자, 가족을 잃은 자, 여자, 노동자, 외국인, 노예, 고아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 보호자로 묘사된다.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시며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는 분. 주님은 소박한 이들을 지켜 주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시편 116,5-6). 성경은 상징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또한 재밌고 흥미롭다. 이와 같은 상징들은 생활의 모든 영역과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성경의 상징들은 우리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상징은 사람들 생각과 소통의 기본이 된다. 상징 없이 우리는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동안 '성경 속 상징'의 글들이 누군가의 신앙생활에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매우 감사한 일이다. 다음부터는 이 지면을 통해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느꼈던 궁금증을 찾아 함께 풀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조은일2011.07.19
![[사제의 해-성경의 땅을 가다] (11) 겟세마니 대성당에서 미사](//cpbc.co.kr/CMS/newspaper/2010/06/rc/341727_1.1_titleImage_1.jpg)
[사제의 해-성경의 땅을 가다] (11) 겟세마니 대성당에서 미사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이스라엘 아슈도드 항에 밤새 정박한 크리스탈호에서 아침을 맞았다. 오늘은 이스라엘 성지순례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날이다. 이른 아침 순례객을 태운 버스는 올리브 산에 도착했다. 순례객들은 예수님 발자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아까부터 들뜬 분위기다. 하지만 다른 날과 달리 가이드를 맡은 자매님은 쉽사리 '하차 허가'를 하지 않고 주의사항을 두 번 세 번 반복한다. 가이드의 '예언'(?)대로 과연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순례객들로 인산인해다. 올리브 산 중턱, 예루살렘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주님 눈물 성당이 있다.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며 눈물을 흘리셨던 곳(루카 19,41-44)에 세운 성당이라고 한다. 성당 외형도 눈물방울을 닮았다. 우리는 겟세마니 대성당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울창한 올리브 나무들이 먼저 우리를 맞는다. 수령이 이천 년 가까이 된다고 하니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던(루카 22,39-46) 예수님을 지켜보지 않았을까. 대성당 벽은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다. 제대 앞에 있는 넓은 바위는 예수님 고뇌를 그대로 전해주는 듯하다. 우리는 예정된 일정과 다르게 예수님 피땀이 어린 이곳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행운을 얻었다. 미사 영성체 후에는 한 사람씩 제대 앞 바위에 친구하며 주님 고통을 기억하는 은총까지 받았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 통곡의 벽과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등을 순례하고 예수님 수난의 마지막 장소인 '십자가의 길'(Via Dolorosa)를 따라 걸었다.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타 언덕까지 14처를 돌며 예수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는 시간이었다. 기도처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시장 한가운데를 통과하며 언덕을 오르게 돼 있다. 아랍 상인들은 가게 밖까지 기념품을 펼쳐놓고 지나가는 손님을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고맙게도 기도하는 우리 순례객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덕분에 우리는 엄숙하게 기도를 바칠 수 있었다. 주님이 마지막으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동이 밀려온다. 십자가의 길 기도 10처부터 14처까지는 골고타 언덕에 있는 주님 무덤 성당 안에 있다. 성묘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신 곳으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최고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부활하신 예수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조은일2010.06.29
![[사제의 해-성경의 땅을 가다] (7) 사도 바르나바의 고향 키프로스](//cpbc.co.kr/CMS/newspaper/2010/06/rc/338411_1.2_titleImage_1.jpg)
[사제의 해-성경의 땅을 가다] (7) 사도 바르나바의 고향 키프로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우리는 지중해를 건너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파선한 배의 잔해를 붙들고 이 바다에서 견뎌냈다. 목숨을 건 선교여행, 그 옛날 바오로 사도가 지중해를 건넜다고 하니 숙연해진다. 우리는 오랜 항해 끝에 드디어 키프로스에 도착했다. 키프로스는 제주도 다섯 배 정도 크기의 독립 공화국으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지닌 섬이다. 현재 키프로스 3분의 2는 그리스 계통 사람들이 살며, 나머지 지역에는 터키계 사람들이 산다. 두 지역 가운데에 UN이 지키는 지역이 있다고 한다. 키프로스 섬은 아름다운 자연, 그림 같은 마을, 매력적인 해변 그리고 화창한 기후가 특색이다. 우리는 버스로 바닷가를 달리다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는 아름다운 해변에 잠시 내렸다. 피그말리온 효과라 불리는 심리학 용어가 키프로스와 관계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키프로스의 왕이자 뛰어난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은 추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자신 속에 스스로 갇혀 살기를 더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만이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인 갈라티아를 조각했다. 그러다 조각상 여인을 정말 사랑하게 됐고, 조각상 여인이 진짜 사람이 됐으면 하는 소원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아프로디테 축제 날이 됐는데, 그는 이러한 자신의 소원을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집에 돌아온 그를 맞이한 것은 진짜 사람으로 변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그 후 피그말리온은 갈라티아와 결혼해 딸 파포스를 낳고 행복하게 산다. 오늘날 심리학에서 피그말리온 효과는 일종의 자기암시로 무언가에 대한 믿음, 기대, 예측이 실제로 일어나는 경향을 말한다. 키프로스는 위대한 사도인 바르나바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 바르나바는 열두 사도와 아주 가까웠던 인물이다. 그는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르나바라고 불리웠다. 바르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쳤다(사도 4,32-37). 그는 바오로 사도를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소개했다. 안티오키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가 발전하자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예루살렘 모교회의 공식 대표로 파견됐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제1차 전교여행 때 키프로스에서 전교했다(사도 11,19 이하). 스테파노 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던 첫 번째 박해 때 그리스도인들이 피해온 곳이 키프로스였다. 그런데 바닷길의 위험과 어려움을 포함해 그들의 전도 여정은 정말 참혹하고 처절했으며 목숨을 건 고난의 길이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온 섬을 가로질러 파포스에 다다랐을 때 마술사 한 사람을 만났는데, 유다인으로 바르예수라고 하는 거짓 예언자가 있었다. 그는 세르기우스 바오로 총독의 수행원 가운데 하나였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기적을 체험한 총독은 세례를 받았다(사도 13,4-12). 우리는 서기 300년께 세워진 바오로 사도 기념교회인 일명 채찍교회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 교회 뜰 왼쪽에 박혀있는 큰 대리석 돌기둥이 우리 눈을 붙잡았다. 그 돌기둥이 바오로가 채찍을 맞아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린 바로 그 현장이라고 생각하니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조은일2010.06.01
![[성경 속 상징]75- 결혼-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거룩한 행위](//cpbc.co.kr/CMS/newspaper/2010/01/rc/323411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75- 결혼-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거룩한 행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요즘은 결혼을 꼭 하지 않아도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많다고 한다. 또한 결혼 연령도 점차 늦어지는 추세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문제와 개인주의적 가치관, 육아문제 등이라 한다. 전통적으로 결혼은 인간이 지켜야 할 중요한 규범이었고 유다인들에게 결혼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었다. "아내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는 탈무드 대목처럼 유다인들은 결혼을 해야 한 인간으로 온전해진다고 생각했다. 성경에서 결혼은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거룩한 행위이다(창세 1,28). 일반적으로 유다인들은 동족끼리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다(창세 24,3-4). 그래서 가족은 씨족의 일부였으며, 조부모, 부모, 형제, 자매와 사촌들로 구성됐다. 예외적으로 다른 종족과 결혼을 하는 경우(창세 41,45 참조)는 정치적 이유가 대부분이었다(1열왕 11,1 참조). 그러나 유다인은 종교적 이유로 이방인과 결혼할 수 없었다(1열왕 11,4). 유다인들에게 결혼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자녀 출산에 있었다. 유다인 여성이 아들을 낳는 것은 사회적, 법적 지위를 얻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래서 성경에는 자녀 출산에 집착하는 여성들이 많이 등장한다. 자녀가 여성의 미래를 보장해줄 보험과도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남녀가 가정을 이뤄 자녀를 낳는 것은 하느님의 가장 큰 축복이었다(창세 1-2장 참조). 성경에 보면 형이 세상을 떠났을 때 형수와 결혼하는 제도가 있었다(창세 38,8). 이런 관습은 가문의 대를 잇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성경시대에도 결혼이란 남녀 당사자의 문제일 뿐 아니라 두 집안, 가문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래서 당시 결혼은 대개 중매라는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 재미있는 것은 중매로 결혼하게 된 신부 얼굴은 결혼식 당일이 돼서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결혼식은 가족 전체와 마을, 그리고 손님들과 행인들에게도 베푸는 큰 축제로 진행됐다. 결혼식 연회, 노래, 춤이 계속해서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결혼식에서는 결혼예복을 입는 것이 중요한 풍속이었다. 부잣집 잔치에는 손님들에게도 결혼예복이 제공됐다(마태 22,12 참조). 예수님은 설교에서 혼인예식 예복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회개에 비유하셨다(마태 22,2-14 참조). 잔치에 참가하는 손님들은 결혼이 성립하는 데 중요한 증인 역할을 했다(창세 29,22-23 참조). 이처럼 혼인잔치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부부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여기에 참석한 이들이 공식적으로 혼인 증인 역할을 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한 것도 카나 지방 혼인잔치에서였다(요한 2,1-12). 우리 삶에서 결혼식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모든 사회적 통계를 보면 결혼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에 이혼은 증가하고 있다. 심지어 결혼 후 자녀를 갖지 않는 부부들도 늘고 있는 추세이다. 서구적이고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빠르게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조은일2010.01.19
![[성경 속 상징]59-물- 소생케 하는 힘이나 하느님 은총](//cpbc.co.kr/CMS/newspaper/2009/09/rc/309663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59-물- 소생케 하는 힘이나 하느님 은총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물은 인간 생명을 위해서나 동식물을 위해서나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초기 문명은 물을 쉽게 공급받을 수 있는 곳에서 발달했다. 예로부터 물에는 성스러운 힘이 있다고 여겨졌다. 또한 옛날 사람들은 물에는 몸과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영적 위력이 있다고 믿었다. 성경의 땅인 팔레스티나 지역은 물이 귀하다. 북쪽에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거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요르단 강이 있다. 그러나 이 강은 비가 얼마 내리지 않고 요르단 계곡을 관통해 사해(死海)로 흘러든다. 그런데 이스라엘인들이 살던 곳은 주로 이 계곡의 서쪽 산악 지방이었다. 다른 하천들도 규모가 작고, 많은 하천이 우기에만 물이 있다. 성경에서 물은 생명의 원천, 소생케 하는 힘이나 하느님 은총의 상징한다. 또한 성경에서 물은 정화의 의미도 지닌다. 그래서 시체를 만지거나 해서 부정을 탄 사람은 잿물에 몸을 씻어 부정을 벗어야 했다(민수 19,1-22). 물이 귀한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물을 얻는 문제는 농사짓는 사람들과 양치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분쟁의 핵심이었다(창세 4,2). 물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노아의 홍수에서 보듯이 심판을 상징하기도 한다(창세 7장). 하느님께 불충실할 때 가뭄이나 홍수가 징벌의 도구로 자주 등장한다(1열왕 17,12).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지면 하늘은 비를 내리지 않아 땅을 메마르게 한다(신명 11,17). 그러나 물은 무엇보다 더러운 것을 씻어 청결하게 한다(에제 16,4-9). 이런 물의 사용은 손님을 접대할 때 주요한 관습의 하나였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창세 18,4). 신약에서 물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생명수이다.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1코린 10,4). 그리스도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물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물의 상징적 의미는 그리스도교 신자 세례에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세례는 신체가 아니라 영혼과 양심 그 자체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1베드 3,21). 이처럼 생명수로서 물의 상징적 의미는 세례 안에서 아주 충만하게 표현된다. 세례의 물을 통해 신자들은 영혼의 죄를 씻어 버리고 그리스도 자녀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세례 때에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은 세례를 받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로마 6,3)조은일2009.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