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례란 무엇인가[월간 꿈CUM] 전례 _ 미사 해설 (01) 스페인 바르셀로나 근교 몬세라트 베네딕토 수도원 대성당 미사 어원 전례(典禮, liturgy)란 말은 희랍어의 ‘레이뚜르기아’(λειτυργια)에서 유래하며 그 본래의 뜻은 민중에 대한 봉사를 의미하였다. 또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교회의 구제 사업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였다.(2코린 9,12) 그런데 민중에 대한 봉사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 사업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페 5,30)에서 공동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훗날에는 교회의 공적인 의식이 전례라는 말로 굳어지게 되었다. 전례의 형성과 뜻 그리스도인은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묵시 1,10; 사도 20,7)에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로 모임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하고 있음을 서로 체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체험에는 먼저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다시 생각하고 기념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생애나 사적들을 기록해 놓았으며 그 결과 복음서가 탄생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는 성경을 봉독하게 되었고 빵을 나누고 기도를 하게 되었다.(사도 2,42) 이것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온 교회의 의식(儀式)인 전례라는 것이다. 전례란 교회가 성경이나 성전(聖傳)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공인한 의식으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시는 그리스도(1티모 2,5)의 사제직을 계속 수행하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드리는 공적(公的) 예배(public worship)이다. 따라서 전례는 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활동하실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며, 세상에 구원의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며 인간의 영혼을 초자연적 생명과 거룩함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전례의 목적 전례의 목적은 하느님께 합당한 영광을 드리고 인간 자신을 성화시키는 데에 있다.(전례헌장 7항) 참된 의미의 전례는 하느님과 인간의 쌍방통행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며, 전례 안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하강적인 면과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며 도움을 청하는 상승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따라서 전례는 하느님과 인간이 주고 받는 대화이며, 이러한 대화의 특성이 전례의 기본구조를 이룬다. 전례의 종류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이어 나간다. 전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희생제사인 미사와 우리를 초자연적 생명에 참여케 하는 성사와 교회가 매일 드리는 성무일도로 이루어진다. 미사(Mass) 그리스도는 당신의 인류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교회 안에, 특히 전례 안에 항상 현존하신다. 그리스도는 미사성제, 특히 성체 안에 그리고 더 나아가 사제의 인격 안에도 현존하신다. 곧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제헌하신 바로 그분께서 지금도 사제의 봉사를 통하여 제사를 봉헌하고 계시는 것이다.(「전례 헌장」 7항) 성사(Sacraments) 교회가 주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교회에 맡기신 은총을 주는 거룩한 표지이며 수단인 성사들을 집행할 때, 그리스도는 그 성사 안에 능력으로써 현존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성사 집행자를 통하여 친히 성사를 베푸시는 것이다.(「전례 헌장」 7항) 성무일도(Liturgy of the hours) 그리스도는 당신 말씀 안에서도 현존하신다.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 자신이요.(「전례 헌장」 7항) 교회가 기도할 때에도 그리스도는 그곳에 현존하신다. 이러한 전례는 우리의 신앙을 감각할 수 있는 표징으로 드러내는 교회의 완전한 공식 흠숭이다. 그러므로 모든 전례 의식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위이기 때문에 가장 거룩한 행위이며, 그 효과도 다른 어떤 행위보다 뛰어난 것이다.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주임을 지냈다.cpbc2026.01.28

세종대왕과 성삼문 : 교황 다마수스와 히에로니무스[월간 꿈 CUM] 교회의 길 _ 예수, 그 이후 베들레헴 성녀 카타리나 성당의 히에로니무스 경당.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성당 바로 옆에 성녀 카타리나 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에 히에로니무스 성인이 성경을 해석하고 번역한 공부방과 경당이 보존되어 있다. 출처: 월간 꿈CUM 우리나라에 세종대왕과 성삼문이 있다면,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교황 다마수스(Damasus I, 366~384 재위, 다마소)와 고결한 선비 히에로니무스(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7?~420, 예로니모, 제롬)가 있다.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세종대왕은 탁월한 리더십으로 조선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발전을 이끌었다. 특히 그는 한글 창제, 과학 기술 발전, 법률 제도 정비, 교육 체계 구축 등을 통해 백성들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런데 이 모든 업적은 혼자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세종대왕은 성삼문, 박연, 장영실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을 발굴, 그 능력과 역량을 십분 활용했다. 교황 다마수스의 재위 기간 역시 조선 초 세종대왕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했다. 정세는 불안했으며, 이단의 난립으로 교회 존립이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에 다마수스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 초기 교회가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몇몇 역사학자들은 교황 다마수스의 업적에 의문을 갖기도 한다. 다마수스가 영적인 차원이 아닌 세속적인 차원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폴 존슨은 「기독교 역사」에서 그가 개종시킨 여성들은 대부분 사교계 여성이었으며, 특히 부유층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적고 있다. 심지어 다마수스가 부유층 여성과 간통을 저지르고, 살인을 했다는 내용의 고발장이 지금까지 로마 공문서 기록에 남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당시 시대상을 제대로 감안하지 않은 오류로 보인다. 당시 교황 다마수스를 상대로 한 간통 및 살인 관련 고발은 교황과 대립하던 아리우스 이단 신봉자들에 의한 것이어서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 또 그가 부유000000층 선교를 위해 주력한 것은 당시 우상숭배가 로마 원로원과 부유층에 만연하고 있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다마수스의 선택은 영적인 차원에만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예수가 세상에 왔듯이 교회도 세상과 보조를 맞추고 세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황은 이를 통해 연약한 교회 기반을 다지고 내실을 튼튼히 하고자 했다. 이 선택은 세종대왕이 고결한 궁궐 속에 갇혀 있지 않고 백성을 위해 아래로 내려간 것, 그리고 국방을 튼튼히 한 것을 연상시킨다. 교황 다마수스는 특히 교회 시스템이 그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378년 즈음 교황은 시노두스를 개최하고 서방교회 주교들이 로마 교구에 복종하도록 했다. 이 결정이 없었다면 로마 교회의 우위성은 확립되지 못했을 것이고, 각 지역 교회별로 뿔뿔이 흩어져 신앙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마수스는 또 그리스어로 진행되던 미사를 라틴어 미사 의식으로 바꿨다. 이는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라틴어 미사를 각 나라말로 집전할 수 있도록 한 것과 같은 혁신적인 조치였다. 획기적인 개혁은 요즘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1600년 전에도 이미 이러한 대담한 개혁 조치들이 있었다. 교황 다마수스의 또 다른 업적은 가톨릭 전례의 정착이다. 세종대왕은 조선 음률을 바로 세우라는 어명을 내렸고, 천재 음악가 박연은 그 명을 받들어 예악을 정립했다. 4세기 말 가톨릭교회는 주류 종교 지위에 걸맞은 전례를 정립해야 했다. 그 일을 해낸 것이 교황 다마수스다. 당시 미사는 사도들의 언행록과 구약성경 낭독, 강론, 평화의 인사,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분배 등 큰 틀에서만 통일되어 있었다. 전례의 구체적인 용어나 체계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지역 교회마다 제각각이었다. 이에 교황 다마수스는 단순했던 미사 의식에 장엄한 요소들을 도입하여 좀 더 체계적인 틀을 갖추도록 했다. 교황 다마수스의 새로운 미사 전례에는 초보적이긴 했지만 찬양이 도입되었는데, 춤은 이교도 풍습이어서 배제됐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다마수스의 업적 중 대표적인 것은 히에로니무스를 시켜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세종대왕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한글 창제이듯, 교황 다마수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성경 완역이다. 원래 신약성경은 희랍어로,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백성을 위해, 교회 전례 통일을 위해 새로운 공식 성경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라틴어 번역본 성경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경우 원문 히브리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아닌, 히브리어를 희랍어로 번역한 70인역(Septuaginta)을 ‘재번역’한 것이어서 원문과 차이가 많이 났다. 이에 교황 다마수스는 히에로니무스에게 라틴어 성경 번역을 명했고, 이후 무려 15년이 걸려(연구자들에 따라 차이를 보이곤 있지만 서기 384년경 4복음서가 번역되었고, 386년경에 신약성경, 391~405년경에 구약성경이 번역되었다) 기적적으로 ‘불가타’(Vulgata)가 탄생한다. 불가타는 ‘대중적’이란 뜻이다. 불가타판 성경은 원문에 충실하고 번역이 정확할 뿐만 아니라, 당시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물론, 불가타 성경에도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모세의 뿔’이다. 구약성경 원문 히브리어 성경에는 모세의 얼굴이 ‘빛나는 얼굴’이 되어있는데, 히에로니무스는 이를 ‘뿔난 얼굴’로 오역했다. 유럽을 여행하 다 보면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등 모세 관련 성화와 조각에 뿔이 달려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모두 불가타의 오류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마수스의 명을 받들어 불가타를 탄생시킨 히에로니무스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히에로니무스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재원이었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어학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수도자 보다 더 철저하게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부부 사이에서도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히에로니무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있어 옮겨본다. “사막의 교부였던 히에로니무스의 회상에 따르면 젊은 시절 그는 넝마 자루를 걸치고 흑인처럼 새까맣게 탄 몸으로 사막에서 혈혈단신으로 수마와 싸웠다. 식단도 비참했다. 냉수와 빵 부스러기 몇 조각이 전부였다.”(「독신의 탄생」, 엘리자베스 애보트 Abbott Elizabeth, 이희재 옮김, 해냄, 2006)에서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였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에 있는 이 말은 원래 히에로니무스가 한 말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삶(고대 그리스어 히에로뉘모스 Ἱερώνυμος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이다)을 살았다. 그에게는 유명한 전설 하나가 전해온다. 성경 번역 작업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엄청난 덩치의 사자 한 마리가 절룩거리며 그에게 다가와 앞발을 내밀었다. 히에로니무스가 자세히 보니 사자 발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사자가 불쌍했던 그는 가시를 빼주었다. 그러자 사자는 히에로니무스가 죽을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고 한다. 베들레헴에 가면 히에로니무스가 성경을 번역했다고 알려진 장소에 경당이 마련되어 있다. 그는 베들레헴 예수님 탄생지 인근의 동굴에 머물며 성경을 번역했고, 소임을 다한 뒤인 서기 420년 9월 30일 선종해 주님 탄생 성당에 묻혔다. 히에로니무스는 번역가들의 수호성인이며, 그가 선종한 9월 30일은 세계 번역의 날이다. 교황 다마수스의 탁월한 선견지명과 리더십, 히에로니무스의 헌신은 성령의 섭리였다. 세종대왕과 성삼문 없는 조선을 생각할 수 있는가. 교황 다마수스와 히에로니무스 없는 교회 역사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들을 움직인 힘은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었다. 교황 다마수스는 자신의 묘비에 새겨질 문구를 직접 작성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다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진정시킬 수 있는 분, 죽어가는 모든 씨앗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분, 죽음의 끔찍한 쇠사슬을 푸실 수 있는 분, 3일 암흑 이후에 마르타의 오라버니를 이 세상에 다시 불러오실 수 있는 분,나 다마수스를 먼지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실 분, 나는 그분을 믿는다.” 글·사진 _ 우광호 (라파엘, 발행인)2025.08.26

기록된 하느님 말씀과 전해지는 하느님 말씀[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24) ‘성경(聖經)’과 ‘성전(聖傳)’ 이스라엘 쿰란 유적지에서 발굴된 구약성경 사본. 이 두루마리 사본은 당시 최고(最古) 구약 사본보다 최소 1000년 전에 쓰인 것으로 판명났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첫영성체 교리를 하다 보면 아이들 모습에서 얼핏 부모 모습이 보입니다. 그럴 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부모님이 열심히 성경을 읽고 미사 참여도 빠지지 않으며 늘 기도하는 가정은 자연스럽게 아이들도 기도문을 잘 외우고 대답도 잘합니다. 첫영성체 교리과정 가운데에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성경 쓰기가 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쓰고 있다는 한 학생이 “선생님! 성경은 첫영성체 교리 시간에 배워서 알겠는데 성전은 뭐예요?”라고 질문합니다. 성경에 관해서는 첫영성체 교리과정 중에 자세히 배웠는데, 성전이란 말은 처음 접하니 궁금했나 봅니다. 성경과 성전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경(聖經)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하느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총 73권으로, 구약 46권·신약 27권으로 엮여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쓰인 책, 신약 성경은 이후에 쓰인 책입니다. 성전(聖傳)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 위탁하신 하느님 말씀이 기록되는 대신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후세 사도들에게 전했는데, 그들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설교로 충실히 보존하고 설명해 널리 알리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33년간 지상에서 지내시면서 하신 말씀이 네 복음서에 다 기록돼 있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성경 이전에 하느님 말씀이 있었기에 성전이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원천이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 첫 권이 나온 때는 기원후 40년경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10년 쯤 지난 뒤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동안은 성경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그 자리에서 받아적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전도 성경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성전은 계시 진리 등 성경에 없거나 정확히 기록되지 않은 것을 더욱 명확하게 밝혀 줍니다. 예를 들면 연옥에 관한 교리나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관습 등입니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과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유권적 해석의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시로 믿어야 한다고 계시된(「계시헌장」 10항) 모든 것을 신앙으로, 성경과 성전에서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성전, 교회의 교도권은 하느님의 가장 현명하신 계획에 의해 성령의 작용 아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효과적으로 기여하도록 상호 연관돼 있고 결합돼 있습니다. 성전의 내용은 성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요한 21,25) 그런데 가톨릭교회 외에 다른 개신교 교파는 성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전을 인정하게 되면, 결국 성전의 주인공인 가톨릭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있던 성경 중에는 분실돼 지금까지 전해오지 않은 성경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만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은 좁은 소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모란 교리교사cpbc2024.10.29
![[생활속의 복음] 우물과 선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3/04/Zss1772596168429.jpg)
[생활속의 복음] 우물과 선물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안니발레 카라치 작 ‘우물가의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1593~1594년경. 특정 기념일에 나름의 방식으로 정성을 담아 소중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선물은 선물 마련의 수고에 견줄 수 없는 행복을 부여한다. 슬기로운 사회생활을 위한 의례적 선물과 주고받기로 조합된 거래적 선물도 있지만, 진정한 선물은 신뢰를 전제로 형성된 ‘관계의 결실’이다. 이 선물은 선물 자체로 그 가치를 판정할 수 없다. ‘사물’(무엇)이 아니라 ‘관계’(누구)가 표출되는 선물은 멀리서도 가깝게, 대면하지 않아도 보이게 하는 만남을 구현한다. 곧 선물은 ‘관계 유지의 표지’다. 신앙을 전제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기술하는 성경은 ‘하느님의 선물들’을 열거한다. 선물과 유사한 용어가 법률 차원을 넘어선 의미를 함축하는 ‘계약’이다. 옛 계약은 율법을 통해, 새 계약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립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다. 관계 유지의 실태를 ‘의로움’으로 표명하는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화 : 로마 5,1 참조)을 역설한다. ‘물을 통한 하느님의 심판’(창세 7,7 참조)을 언급한 성경은 척박한 대지에 샘솟는 ‘물을 통한 하느님의 선물’(탈출 17,6 참조)도 제시한다. 풍부한 수자원을 보유한 에덴동산(창세 2,10-14 참조)으로부터 첫 인간이 추방된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물 부족 지대에서 유목하다가 정착하였다. 생존의 필수 요건인 식수 확보가 가능한 샘·우물·호수·강 근처에 인구가 밀집되어 마을이 조성되었다. 지역민이 우물에 대한 지분을 선점하더라도 방문객에게 우물물을 제공하는 행위는 당연한 처사였다.(1열왕 17,10 참조) 한 사마리아 여인이 ‘조상 야곱과 관련된 시카르 고을의 우물’(창세 33,18 참조) 부근에서 방문객 예수님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소개된 ‘목마르지 않은 물’로 인해 ‘야곱의 우물’(하느님의 선물)이 재조명된다. 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선물을 사물로 대하듯, 목마르지 않은 물 혹은 생명수(묵시 22,17)를 ‘특별한(신령한) 물’로 대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유의점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하느님의 선물을 대상화하는 태도다. 영성체 예식에서 신앙인은 ‘빵과 포도주’(사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관계)를 먹고 마신다. 복음과 천국은 내용이나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만남) 유지 상태다.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요한 4,14) 하는 생명수는 ‘어떤 물’(무엇)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누구)이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숨을 거두기 직전 예수님의 두 발언은 “목마르다”(19,28)와 “다 이루어졌다”(19,30)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의 목마름은 부재한 듯 여겨지는 ‘아버지에 대한 갈증’이고, 아들의 성취감은 현존하여 함께 있는 ‘아버지에 대한 확신’이다. ‘아들 예수님’에게 목마르지 않은 물은 ‘아버지 하느님’이다. 시편은 시냇물을 향한 암사슴의 그리움을 은유로 이를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42,2-3) 우리의 목마름은 ‘물에 대한 갈증’인가, ‘하느님에 대한 갈증’인가?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목마른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 cpbc2026.03.04

‘되찾은 아들’ 선물한 이 대통령, ‘평화의 날 담화’ 선물한 교황이재명 대통령, 레오 14세 교황 예방 레오 14세 교황이 15일 이재명 대통령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선물 교환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Vatican Media 제공 한반도 평화·서울 WYD 협력 논의 양측, 평화·화해 담은 선물 교환 이재명 대통령이 레오 14세 교황을 예방하고, 교황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지와 관심을 재확인했다. 이 대통령은 15일 오전(현지시간) 교황청 사도궁을 방문해 교황을 만나 한반도 평화 정착에 대한 우리 국민의 염원과 정부 구상을 전했다. 교황과 이 대통령은 또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의 성공 개최를 위해서도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이 대통령의 교황청 방문은 한반도 평화와 2027 서울 WYD라는 두 과제를 연결하며, 새 정부와 교황청의 협력 의지를 재확인했다. 교황과 이 대통령은 만남 후 평화와 화해, 그리고 상호 존중의 의미를 담은 선물을 주고 받았다. 이 대통령은 교황에게 ‘하느님의 품’ 조각상과 백자 합을 선물했다. ‘하느님의 품’은 성경 속 ‘되찾은 아들’(루카 15,11-32)의 비유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용서, 화해와 공동체의 회복을 상징한다. 백자 다용도 합은 한국 백자의 정갈함과 절제된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으로, 청빈과 성찰을 중시하는 사제의 삶을 떠올린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선물 이재명 대통령이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에게 들꽃문양 필함을 선물했다. 청와대 제공 이재명 대통령이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에게 홍삼 달임액을 선물했다. 청와대 제공 ‘하느님의 품’ 조각상. 청와대 제공 이재명 대통령이 레오 14세 교황에게 백자 다용도합을 선물했다. 청와대 제공 이 대통령은 또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에게 전통 칠화 기법으로 제작한 들꽃문 데스크 세트와 프리미엄 홍삼 달임액을 선물했다. 필함과 명함집, 펜접시로 구성된 들꽃문 데스크 세트에는 들꽃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통해 겸손과 성찰의 삶을 기리는 뜻이 담겼다. 홍삼 달임액은 파롤린 추기경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과 함께 한국의 전통 건강문화를 소개하는 의미를 담았다. 레오 14세 교황과 파롤린 추기경의 선물 풍요의 뿔, 코르누코피아는 성 베드로 대성당 성체 경당에 있는 바닥 장식을 재현한 것이다. '레오 14세의 제5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파롤린 국무원장은 라파엘로의 유명 프레스코화를 재현한 도자기 작품을 이재명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교황은 이 대통령에게 올해 1월 1일 발표했던 제59차 세계 평화의 날 교황 담화와 사도궁 관련 서적, 풍요의 뿔을 주제로 한 그림을 선물했다. 파롤린 추기경도 장식용 도자기 접시를 전달하며 우의를 다졌다. 양측이 주고받은 선물에는 한반도 평화와 화해에 대한 염원, 그리고 한국과 교황청이 앞으로도 긴밀한 협력을 이어가길 바라는 뜻이 담겼다. 바티칸=김혜영 기자김혜영2026.06.17

서학을 통해 조선 현자들에게 ‘공현’하신 주님[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2) 주어사 강학 권철신과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녹암계 현자들은 1779년 겨울 주어사에서 열흘간 가톨릭 교리를 연구한 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사진은 주어사 터. 2026년 1월 4일은 전례력으로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새 「성경」에 ‘동방 박사’라고 번역된 ‘마고이’ 곧 ‘현자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찾아온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이날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민족에게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드러나셨다고 해서 ‘주님 공현(公現)’이란 표현으로 경축한다. 신약 성경의 언어인 헬라어로는 ‘ἐπιφάνεια(에피파네이아)’라고 한다. 우리말로 ‘스스로 드러내심’이라는 뜻이다.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께서는 별의 인도로 찾아온 동방 박사들 곧 현자들을 통해 당신을 스스로 드러냈듯이, 우리 민족에게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공현’했다. 바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의 인도로 ‘서학’(西學)을 탐독하던 현자들을 통해 구세주의 실존을 드러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 몰약을 바쳤다. 이 선물들은 그리스도의 ‘왕권’과 ‘신성’, 그리고 ‘인류를 위한 희생’을 상징한다. 하지만 글을 통해 아직 희미하게 구세주의 존재를 인식했던 우리의 현자들에게는 구세주 아기 예수의 신비를 상징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 ‘그리움’, ‘고통’ 등을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합당한 자세, 마음가짐이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현자들은 서학에 담겨 있는 글 안에서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자 구세주로 경배할 수 있었다. 이에 동방 박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최초의 이방인’으로 복음서에 등장하듯이, 서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현자들 가운데 세례를 받은 이들은 ‘우리 민족의 첫 세대 그리스도인들’로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 기록되고 있다. 교회의 동아시아 선교와 한역서학서 출간 우리 민족이 한순간 갑자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성경 시대에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연결되는 ‘중간 시기’가 있었듯이,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서학을 수용해 신앙으로 승화하기까지 궤적을 보여주는 사상사적 ‘수용 시기’가 분명 있었다. 서학의 조선 전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가톨릭교회의 동아시아 선교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에 대응해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후 교황들은 유럽 밖의 복음화 정책을 시행했다. 가장 큰 결실이 바로 ‘포교성성’(현 교황청 복음화부) 설립이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선교 지역에 교구와 대목구를 증설했고, 서구 중심의 선교 정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톨릭 신앙에 어긋나지 않는 한 현지인들의 관습에 순응해 ‘토착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과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와 도미니코회 등 여러 수도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 선교를 계획했으나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조선의 쇄국 정책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 서양 문물과 또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해마다 부연사(赴燕使) 일행을 따라 북경에 가서 천주당을 방문하거나 북경 선무문 밖 유리창 상가에서 서양 물건과 한역서학서를 사오는 것이었다. ‘한역서학서’는 16세기 말 이래로 중국에서 활동한 서양 선교사들이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 서양 문물을 전달하기 위하여 가톨릭 교리와 윤리·지리·천문·역사·수학·과학·기술 등을 한문으로 저술 또는 번역한 일체의 서적을 말한다. 한역서학서는 주로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출간됐다. 16세기 말에서 18세기 말까지 출간된 한역서학서는 400종이 넘는데 그중 가톨릭 서적은 「천주실의」「칠극」「교우론」「기인십편」「직방외기」「성경직해」「성체요리」「천주교리」 등이 유명했다. 조선 학자들이 서학을 대한 태도 한역서학서를 비롯한 서양 문물이 조선에 소개된 것은 17세기 초부터였다. 이후 18세기에 들어 ‘서학’은 학문으로서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수용됐다. 서학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태도는 세 갈래로 드러났다. 첫째, 서양 학문과 기술, 가톨릭 신앙 모두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며 전문을 수용하고 실천한 ‘신서파’(信西派)이다. 이들은 주로 남인계 소장 학자들로 하느님의 종 녹암 권철신(암브로시오, 1754~1785)와 그 문하생들이었다. 둘째, 서양의 과학 기술은 받아들이나 종교와 윤리는 배격하는 ‘비판적 수용론자들’이다. 이들의 주류는 북학파 계열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이었다. 셋째, 가톨릭 신앙뿐 아니라 서학 자체를 거부하고 배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이다. 척사론(斥邪論)을 내세운 안정복, 신후담, 홍정하 등이 주류였다. ‘주어사 강학회’에서 가톨릭 신앙을 수용하다 신서파는 주로 성호학파 가운데서도 좌파로 알려진 양명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명나라 왕양명이 주자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새로이 수립한 양명학을 수용했다. 경기도 양근 지역 권철신의 문하에서 양명학을 공부하던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벽(요한 세례자), 정약전, 정약용(요한 사도), 이승훈(베드로),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윤유일(바오로), 홍낙민(루카), 이총억, 김원성, 권상학 등 녹암계가 이들이다. 1779년 겨울, 권철신 주도로 열린 ‘주어사 강학회’에서 녹암계 현자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열흘간 밤을 새우다시피 한역서학서를 함께 읽고 가톨릭 교리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인 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ἐπιφάνεια(에피파네이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글을 통해 이들에게 스스로 드러내셨다. 그래서 일부 한국천주교회사 학자들은 권철신의 집이 있는 양근 한감개와 강학회가 있었던 주어사를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라고 평한다. 조선의 현자들이 처음으로 구세주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주님께서 이들에게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곳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12.30
![[생활속의 복음]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1/21/CSh1768968175437.jpg)
[생활속의 복음]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연중 제3주일 마태 4,12-23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작 ‘제자들을 부르심’. 체된 양상을 보인다. 한 인간의 변화도 이와 흡사하다. 섬세하게 설계된 교육 제도가 순기능으로 작용하여 한 인간의 긍정적 변화를 유도하더라도, 특정 연령에 도달한 이들의 실질적 변화를 기대하기가 사실상 어렵다. 연중 시기의 시작부를 장식하는 주제어는 대림 시기나 사순 시기와 같은 ‘회개’다. 성경의 전체 맥락이 강조하는 회개를 인간의 ‘죄’와 연동하는 교회의 고전적 해석에 따르면, 회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그런데 그리스어(메타노이아) 어원을 검토하면, 회개는 인생 전반에 걸친 ‘방향 전환’을 함축한다. 회개는 한 인간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역동적 변화이다. ‘인간은 스스로 회개(변화)할 수 있는가?’ 변화의 당위성에 수긍하는 인간은 이 당위성으로 변화하지 않고 변화의 중대성과 시급성으로 변화한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향과 품성, 후천적으로 확립된 가치관은 ‘실증적으로’ 견고한 성벽과 같다. 변화는 이에 상응하는 동기 부여를 요청한다. 손해되면 거절하고 이익되면 화답하는 인간에게는 유동적인 손익 계산으로 인한 임시적 변화와 구별되는 중대한 사유로 일어난 드라마틱한 변화가 실재한다. 갑작스러운 체질 변화처럼 중병으로 죽음을 가깝게 의식하거나 밑바닥을 치는 고충을 감내하며 재기한 이들로부터 종종 체감되는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있다. 이 변화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자극·활력을 포착하여 자기 내면에서 이를 적용·승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회개의 일차적 계기는 ‘자기 밖’에 있으며, 이를 신앙 언어로 ‘은총’이라고 칭할 수 있다. 회개를 강조하는 복음은 ‘변화에 주저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마태 4,16)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고 선포하는 그리스도를 ‘변화의 추동력’(빛)으로 명시한다. 하늘 나라 선포와 병렬로 전개된 제자 선발에서 ‘물고기 낚는(지켜보는) 어부’가 “사람 낚는(돌보는) 어부”(마태 4,19)로 변화(회개)되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늘 나라는 새 시대의 도래를 의미했다. “하늘과 땅”(창세 1,1: 나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업적이 최종적으로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 하늘 나라)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히 유다 지역에 비해 소외되었던 갈릴래아 지역에 변화의 중대성과 시급성을 제공하는 외적 동인, 곧 회개의 근거였다. 하늘 나라가 회개의 주도적 촉매였던 성경의 시대와 달리 오늘날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된다. 하나는 사후에 진입하고 싶은 ‘천상 천국’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에 건설하고 싶은 ‘지상 천국’이다. 강조점을 어디에 두든, 하늘 나라에 대한 담론이 변화의 중대성과 시급성을 촉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로마 8,34) 빛이신 그리스도를 매개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변화의 중대성과 시급성을 제시할 수 있는 교회의 새 언어가 발굴되어야 할 시점이다. 2026.01.21

“대회마다 주제 성구가 있는 것 같아요”[신부님, WYD가 뭐예요?] 교황이 직접 선택한 구절 대회 정신과 방향성 제시 서울 WYD “용기를 내어라~” 오늘날 도전 맞선 믿음 요청 일반적으로 문화·체육뿐 아니라 종교 등이 주최하는 대회는 하나의 슬로건과 공식 로고를 통해 대회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정신과 가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올림픽의 주제와 로고·마스코트 등이 좋은 예입니다.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역시 대회의 본질적 정신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대회마다 주제 성구를 정하고 이를 구현해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27 서울 WYD를 위해 선택하신 주제 성구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입니다. 이는 한국의 순교 성인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보여준 용기를 본받아 젊은이들이 온갖 형태의 불의와 싸워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갖게 되길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제 성구는 성경에서 발췌한 구절 가운데 짧고 기억하기 쉬운 것이 선택됩니다. 그런데 이 주제 성구는 교황님께서 직접 결정하신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세계적 상황과 청년들의 현실, 교회의 사목적 방향을 고려해 성경의 한 구절을 주제 성구로 정하시어 청년들이 이 말씀을 중심으로 신앙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발견하도록 촉구하십니다. 매 대회가 이뤄지는 시점에서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도전에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르침을 압축한 것이 바로 주제 성구입니다. 제1회 대회는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렸습니다. WYD를 제정하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정한 주제성구는 “너희 안에 있는 희망에 관하여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1베드 3,15)였습니다. 다음해 198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회 때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였습니다. 이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젊은이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 진리를 토대로 한 여러분 삶의 증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의 증언에 감사드리며 여러분이 언제나 하느님 사랑의 증거자,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되길 격려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주제 성구들은 기본적으로 청년들이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 안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공동체 안에서 그 사랑을 배우고 키워나가도록 이끌어줍니다.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의 붕괴가 임박한 격동의 시기에 열린 1991 폴란드 쳉스토호바 WYD때는 “여러분은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성령을 받았습니다”(로마 8,15)였습니다. 이는 혼란한 국제정세 속에서 전 세계 젊은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간직하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습니다. 2000년 대희년에 개최된 로마 WYD에서는 새천년을 시작하는 시점에 더욱 그리스도께 의탁하고 그분을 따르도록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가 선택됐습니다. 2016년 자비의 희년에는 자비의 성녀 파우스티나 코발스카의 땅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로 정해졌습니다. 아울러 2023년 포르투갈 리스본 WYD는 “마리아는 서둘러 떠났다”(루카 1,39)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모 발현지인 파티마를 중심으로 성모님의 굳건하고 실천하는 믿음을 젊은이들이 닮게 되길 바라셨습니다. 이처럼 청년들이 직면한 다양한 형태의 도전 앞에 신앙을 굳건하게 살아가도록 힘을 주는 주제로 성구가 결정됐습니다. 이준태 2026.02.24

회개와 절제의 40일, 죽음 너머 생명의 길사순 시기 추천 도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며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는 사순 시기다. 회개와 절제의 시간, 길잡이가 될 책들을 골라봤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 쿠르트 코흐 추기경 / 황미하 옮김 / 바오로딸 사순과 부활 시기에 관한 영적 안내서다.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 시기 전반의 의미를 다루고,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부터 주님 부활 대축일에 이르는 파스카 성삼일, 주님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동반한다. 그야말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장별로 각 전례 시기의 주제 및 의식과 관련된 교리적 내용을 전례·성경·신학·영성적 바탕 위에서 폭넓게 조명해 사순과 부활 시기의 의미에 깊이 머물도록 안내한다. “예수님은 인간이 겪는 무력함과 고통과 죽음, 그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알지 못하신다. 예수님은 이 길을 택하신다. 그 길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영원한 길이기 때문이다.”(67쪽)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부 장관인 저자는 앞서 스위스 루체른대학교에서 교의신학 및 전례학 교수로 재직했다. 사순 시기란 / 미셸 존스 슈뢰더 / 서영필 신부 옮김 / 성바오로 “재의 수요일 몇 주 전부터 우리는 보속을 정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중략) 무엇을 ‘포기할지’, 더 정확히 말해 사순 시기 보속으로 무엇을 봉헌할지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가로막는 삶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종종 사순 시기 희생을 새해 결심의 두 번째 기회처럼 취급합니다.”(42쪽) 사순 시기의 진정한 의미를 쉽고 간결하게 소개한 책이다. 책은 사순 시기가 지극한 슬픔을 느끼는 때이지만, 동시에 영적으로 더욱 깊게 성장할 수 있고 그 슬픔을 통해 영원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평신도인 저자는 기도·단식(희생)·자선의 의미와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피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도 설명한다. 이를 통해 수년 동안 무심코 한 일들이 어떻게 천국의 길로, 부활로 이끄는지 깨닫게 한다. 죽음의 신비 /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 조규홍 옮김 / 가톨릭출판사 신비가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가 ‘죽음’을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죽음을 ‘인간 실존의 가장 두려운 한계’이자 동시에 ‘하느님 섭리가 가장 깊이 드러나는 자리’로 설명한다. 신앙의 전통 안에서 죽음은 인간의 죄로 인한 처벌이지만, 하느님께서 그 처벌마저 은총으로 바꾸셨음을 성경 말씀과 그리스도론·죄론·구원론·종말론·삼위일체론의 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풀이한다. 특히 성인과 성사,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통해 부활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그들은 사랑의 하느님, 은총의 하느님은 잊고 오직 정의의 하느님만을 마주하였다. 낙원에 관한 생각은 일찌감치 사라졌고, 그들 앞에는 외면할 수 없는 죽음이 위협적으로 떡하니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곳에는 그들을 위해 마련된 하느님의 계시가 있었다.”(56쪽) 십자가의 길 / 조재형 신부 / 생활성서 사순 시기하면 ‘십자가의 길 기도’가 바로 떠오른다. 예수님의 골고타 여정을 담은 14처를 돌며 바치는 기도다. 그 십자가의 길을 기도와 함께 색을 칠하며 묵상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수원교구 조재형(궁리본당 주임) 신부가 작업한 컬러링북으로,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을 나누고 그 안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묵상 글도 수록했다. “청하오니 주님, 당신의 십자가의 걸음을 따를 용기를 주소서.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이웃의 짐도 함께 져 주며 마침내 세상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낼 용기를 허락하소서.”(14쪽)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6.02.24

시(詩)와 예(禮)로써 도둑질한다고?! 정말?[월간 꿈 CUM] 철학의 길 _ 동양 고전의 지혜와 성경 (9)태양 볕이 내리쬐는 팔레스티나 촌구석에서 예수님은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왜 뽀얀 유럽 백인의 얼굴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 절대적 가치가 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자신들의 얼굴로 만들었습니다. 백인의 얼굴 속에 절대적 가치의 기준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월한 백인은 이제 세상을 지배할 정당한 권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얼굴을 집어넣은 예수님의 얼굴로 그들은 세상을 보편 법칙으로 지배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권력과 이익의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이런 기만적 행동은 서양 제국주의 시대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기만적 행위가 일어날 수 있음을 장자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어떻게 자리하고 있을까요? 푸르디푸른 보리가 비탈진 무덤가에 무성하구나. 살아서 남에게 베풀지 않았는데 어찌 죽어 입에 구슬을 물고 있는가. 靑靑之麥 生於陵陂 生不布施 死何含珠爲 이 구절은 유자(儒者)가 부유하게 살다 입에 구슬까지 물고 죽은 자를 보며 그의 욕심과 사치를 『시경』의 내용을 읊으며 풍자, 비판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그가 남긴 재물로 인의(仁義)를 실천코자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장자』의 「외물」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전체 내용을 보면 오히려 유자들을 비판하는 장자의 반전 드라마입니다. 유학자들이 입에 구슬을 물고 죽은 자의 무덤 앞에서 도굴을 시도합니다. 스승쯤 되는 자가 자기 권위로 제자들을 재촉합니다. 그러자 제자쯤 되는 자가 위의 구절을 읊으며 서둘러 입 안의 구슬을 도둑질합니다. 경전의 구절을 읊고 있지만. 자기들 구미에 맞는 구절들로 도둑질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을수록 정의를 구현하는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장자는 유자의 위선적 행위로 지적합니다. 세상은 지식이 많을수록 지도자의 위치가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높이 쌓은 지식이 도덕적 가치, 사랑의 가치도 높여줄까요? 장자는 말합니다. 유자들은 시와 예로써 무덤을 도굴한다. 『장자』 「외물」 儒以詩禮發冢 앎(知)이 많다고 모두가 도둑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도층이 권력이든, 명예든, 재물이든 정의보다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면 지식은 이익을 위한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높은 법률가는 법으로 도둑질하며, 높은 정치인은 정치로 도둑질하고, 높은 의사는 의술로 도둑질하며, 높은 성직자는 경전으로 도둑질하고, 높은 경찰은 국민의 안전을 이유로 도둑질합니다. 적극적 도둑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안위와 자리보전을 위해 도망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권위만 누리려는 ‘자리 도둑질’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유자들을 비판하는 장자를 유자들의 아버지 공자에게 물어보면 어떤 말을 했을까요? 공자 또한 그들을 소인이라 나무랐을 것입니다. 공자는 “군자는 정의로움(義)에서 깨우치고 소인은 이로움(利)에서 깨우친다.”(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 『논어』 「이인」)고 했으니까요. 예수님은 구원받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고 하시며,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인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며 그들을 ‘불의’한 자라고 말할 것이라 합니다.(루카 13,22-30 참조) 불의한 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 들어가려 힘쓰지 않는 자입니다. 여기서 ‘힘써라’(아고니제스데)는 운동경기장이나 투기장에서 전력투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온 마음과 몸과 정신을 다한 투쟁적 행동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탈란트를 맡기고 여행을 떠난 이야기에서 셋째 종이 쫓겨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마태 25,14-30 참조) 셋째 종은 돈을 잃는 것이 두려워 땅에 묻어두었다 쫓겨납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 사투를 벌이고 인내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정의가 아니라 이익을 생각하면 행동하는데 두려워합니다. 아마도 그런 이들은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말씀의 지식(知)으로 정당화해 높은 지위를 도둑질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 하면서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반석의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루카 6,49 참조) 세상의 강물이 곧 들이닥치면 겁먹고 무너질 사람들인 것이죠. 유자들은 시와 예로써 도둑질하는데 당신은 무엇으로 도둑질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나 자신이 스스로 그 당신이 되어 자문해봅시다. 무덤 앞에서 망자를 위해 기도하는가? 망자의 구슬이 탐나 기도하는가? 시와 예, 법, 경전, 정치, 생명, 자유, 평등, 인권의 얼굴은 망자의 옥구슬이 아닙니다. 글 _ 손은석 신부 (마르코, 대전교구 산성동본당 주임) 2006년 사제수품.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전담사제를 지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전공)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소소하게 살다 소리 없이 죽고 싶은 사람 중 하나. 그러나 소리 없는 성령은 꼭 알아주시길 바라는 욕심쟁이다. cpbc2025.01.06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월간 꿈CUM] 꿈CUM 환경 출처: 월간 꿈CUM 제2장 창조의 복음 : 개괄 (02) 1시간 전에 안경을 어디에 뒀는지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어제 또는 지난주에 안경을 어디에 뒀는지는 잊어버려야 합니다. 옛 기억을 잊어야 지금 필요한 기억을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같은 장소에 매번 둔 경우는 예외로 말이죠.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제2장 창조의 복음’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 이성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날 때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신앙적 차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복음’이라는 제목을 붙인 2장에 대해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유다-그리스도교 전통’(「구약과 신약의 전통」 76, 78항 참조)에서 이해하는 ‘창조’ 혹은 ‘세상’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황님이 ‘가톨릭 신앙에서 이해하는 전통’이라고 말하지 않고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이라고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교, 정교회, 개신교 등 모든 종교를 초월한 관심과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도는 뒷부분 ‘제5장 접근법과 행동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스스로 믿는 이들이라 고백합니다. 이 사실이 자연 보호, 가난한 이들의 보호, 존중과 형제애의 관계 구축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를 서로 나누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학문들 사이의 대화도 역시 시급합니다.”(201항) 이처럼 회칙 제2장은 복합적인 생태 위기가 영성과 종교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와 학문의 대화를 요구한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합니다. 더 나아가 제2장은 신앙이 ‘자연’과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할 이유와 동기를 제공한다고 강조합니다. 또 자연에 대한 책임감은 ‘신앙의 일부’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렇다면 제2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Ⅰ. 신앙이 주는 빛(63~64항) Ⅱ. 성경 이야기의 지혜(65~75항) Ⅲ. 세상의 신비(76~83항) Ⅳ. 창조의 조화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전하는 메시지(84~88항) Ⅴ. 보편적 친교(89~92항) Ⅵ. 재화의 공통적 목적(93~95항) Ⅶ. 예수님의 눈길(96~100항) 이 내용들은 단순히 환경 문제와 생태계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시각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서 좀 더 넓은 시야를 갖도록 할 것입니다. 이제 그 각 내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글 _ 이용훈 주교 (마티아, 천주교 수원교구장) 1979년 3월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1988년 로마 라테라노 대학교 성 알폰소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 주교로 서품되었다. 저서로는 「그리스도교와 자본주의」, 「삶에 대한 이야기」 등이 있다.cpbc2026.05.20
![[사도직 현장에서] 내 안에 계신 아버지](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4/29/JgK1777441609546.jpg)
[사도직 현장에서] 내 안에 계신 아버지어렸을 때는 사실 아버지에 대한 정을 잘 모르고 살았다. 아버지·어머니는 부지런하셨고, 자식들 남 부럽지 않게 살게 하려고, 밤늦게까지 평생 일만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퇴직할 즈음에 나는 서울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었고, 나중에 청원자 휴가 때 가보니, 아버지께서 목포 경동성당에서 성 이레네오를 주보로 세례를 받으셨다. 엄마도 뒤따라 신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계속 성경공부 등을 하시다가 아예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에 등록해 큰오빠 집에서 늦깎이 공부를 하며 2년을 다니셨다. 그리고 2002년경 선교사가 되어 영월 상동공소에 파견되어 열악했던 공소 건물을 고치기 위해 여기저기 도움을 받으셨고, 비가 샜던 지붕과 먼지로 뒤덮인 성전을 깨끗하게 보수하셨다. 아버지는 주일이면 공소예절도 하고, 밥도 짓고, 커피도 끓여 신자들과 드시곤 하셨다. 그땐 요즘처럼 성가 반주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수원 유치원에 근무하던 시절, 수녀원에 전화해 음을 잡기 어렵다고 성가를 어떻게 부르는지 불러보라고 하셔서 불러드리면 어설픈 음을 따라 부르셨다. 그 상황에 대해 함께 살던 수녀님들이 두고두고 배꼽을 잡으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영월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휴가를 가면 버스가 어디서 정차하는지 모르셔서, 엄마는 공소 근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아버지는 밤 운전을 해가며 태백터미널까지 마중을 나갔다 돌아오신 적도 있다. 밤늦게까지 딸이 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이쪽저쪽에서 기다리는 두 분을 보고서야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깨달았다. 아버지는 이후 고향 근처 전라도 압해도 신장공소로 옮겨 1~2년 신자들과 함께하며 선교사로 지내셨다. 건강이 안 좋아져 은퇴하신 후엔 목포 옥암동에서 사셨다. 옥암동성당 성전 신축 땐 음식을 만들어 수익을 봉헌하고, 폐휴지와 빈 병을 수거해 보태셨다. 요즘 거울을 보면 이마에는 냇물처럼 잔주름이 흐르고, 얼굴에는 북두칠성처럼 큰 점들이 또렷하게 박혀있는 내 모습을 본다. 눈도 작아져 아버지 나이 드셨을 때 눈과 똑 닮았다. ‘세월은 못 막는구나’를 깨닫고 언제라도 주님이 부르실 때 “네, 여기 있습니다” 하며 하늘나라로 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천천히 행동으로 옮기며 지낸다. ‘비움의 미학’을 살기 위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 cpbc2026.05.19

판테온 꽃비, 성령의 불꽃[‘성서와함께’ 가꾸는 기도의 정원] 2. 작약 작약(Peony). 성서와함께 제공 성당 회중석에 서서 ‘오소서 성령이여’를 듣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성가가 절정에 이른 순간 성령의 불꽃을 상징하는 붉은 작약 꽃잎이 공중에 흩날리고, 성령이 영혼을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에 온몸에 전율이 인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40일째 되는 날은 주님 승천 대축일(지난 주일), 그로부터 10일 뒤는 주님의 성령이 지상에 내려온 것을 기념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오늘)이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영어로 ‘펜테코스트(Pentecost)’라고 하는데, 이는 ‘50번째’라는 뜻의 그리스어 ‘πεντηκοστή(펜테코스테)’에서 유래했다.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은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기도 하다. 이 거룩하고 특별한 대축일날 로마 판테온에서는 돔 한가운데 뚫린 거대한 천창(天窓)에서 꽃비를 내리는 전통이 10세기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데, 이때 흩뿌려지던 꽃이 작약이다. 오늘날에는 주로 붉은 장미 꽃잎을(때로 흰색 꽃잎을 섞어) 뿌리는데, 이 꽃비는 사도행전 2장에서 언급되는 불꽃 모양의 혀를 형상화한 것이다. 작약이 이같이 사용된 데는 성령 강림 대축일이 있는 5월에 만개하는 개화 습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권 국가에서는 작약을 ‘성령 강림절 장미(Pentecost rose)’라고 부른다. 또 5월은 성모 성월이므로 ‘성모 마리아의 장미(Our Lady’s rose)’로도 불린다. 작약의 라틴어 속명 ‘페오니아(Paeonia)’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치유의 신 ‘페온(Paeon)’이 어원으로, 작약의 씨앗과 뿌리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약재로 널리 쓰였다. 서양의 경우 작약이 약초로서 재배된 기록은 무려 1세기부터 존재하지만, 화려한 외형의 겹꽃 품종을 앞세워 관상용으로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8~19세기의 일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작약이 약용으로 유익할 뿐만 아니라 악령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작약은 하느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을 상징하므로 흰색·붉은색·분홍색 등 색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성경 정원이나 기도 공간에 잘 어울린다. 꽃은 분홍색이 향기가 가장 진하고, 색깔이 진할수록 향기가 약해진다. 제철인 5월에는 성전 안 꽃꽂이에도 자주 활용하는데, 겹겹이 풍성하고 소담하게 피는 작약의 모습은 늘 ‘충만함’을 상기시킨다. 화려한 작약의 풍성한 모습에서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cpbc2026.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