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주님의 큰 그림(김정은 로사, 방송작가)](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2/27/zhy1709017084598.jpg)
[신앙단상] 주님의 큰 그림(김정은 로사, 방송작가) ‘나를 만드는 건 결국 나 자신이다.’ 고등학교 시절, TV를 보다가 한 스포츠 광고의 카피 한 줄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15초 안에 마음을 사로잡는 카피라이터가 근사해 보였습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광고 동아리에 들어가 활동하고 각종 공모전에도 도전했죠. 많은 우여곡절 끝에 광고회사 인턴으로 최종 15명 안에 들었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었다는 기쁨도 잠시, 정직원이 되기까지 두 달의 평가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멋진 카피라이터 선배들과 실무에 동참하게 된 저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어필하기는커녕 걱정과 불안에 사로잡혀 잔뜩 위축돼 있었습니다.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밤늦도록 경쟁 PT를 준비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퇴근하던 캄캄한 길, 달리는 택시 안에서 창 밖의 가로등을 촛불 삼아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뜻대로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해 주세요.’ 결과는 탈락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세 명을 뺀 나머지는 정직원이나 계약직으로 채용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수없이 드렸던 그 기도는 진심이 아니었나 봅니다. ‘하느님 뜻대로’가 겨우 이런 결과라는 게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여 후, 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저와 함께 떨어졌던 그 두 명을 추가로 합격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15명 중 유일하게 저만 떨어졌다는 적나라한 현실. 혹독한 광야가 펼쳐졌습니다. 이쯤 되면 카피라이터가 되는 길은 곱게 접는 게 맞을 것 같았습니다. 갈 곳 잃은 저는 방황했고 신앙생활마저 부질없게 느껴졌습니다. 성심껏 봉사한 결과가 고작 이 정도냐며 마치 악덕 고용주를 보듯 십자가 상을 노려봤습니다. 번듯한 직장에 취업한, 소위 잘나가는 정직원에게만 ‘전능하신 하느님’이 찰싹 붙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냉담할 배짱까지는 없던 저는 신앙생활은 유지하면서도 마음은 꼬일 대로 꼬인 채 빈정거리고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뭐라도 되면, 감사 기도밖에 더하겠어?’ 시간이 흘러 어느새 저는 작가로 방송 제작진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경력이 쌓일수록 제 원고는 5분에서 10분, 30분, 50분…. 점점 시간을 늘리며 전파를 길게 타게 되었습니다. 저는 말하기를 좋아해서 수다를 떨거나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나눌 때 늘 시간이 부족한 ‘투 머치 토커’입니다. 그런 저에게 하느님께서 ‘15초 광고는 너에게 너무 짧으니 넉넉하게 50분 방송 시간을 줄게’라고 하시는 듯했습니다. 저보다 저를 완전히 아시는 주님께 저는 결국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께 감사기도밖에 드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 홀로 뚝 떨어졌다는 초라함에 몸서리치던 그 밤길에서도 주님은 제 옆에 딱 붙어계셨고, 성전에서 당신을 빈정대며 노려봤을 때에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저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비뚤어진 분노로 똘똘 뭉쳤던 흑역사도 지나고 보니 어느새 주님과 함께 빙그레 웃으며 꺼낼 수 있는 추억이 됐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한참 답답하고 더디더라도 제대로,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는 주님은 쭉 저와 발걸음을 맞추고 계셨습니다. 제가 볼 수 없는 큰 그림을 그리시면서 말이죠. 김정은cpbc2024.03.26

‘똑바로’는 ‘제대로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의미 아닐까[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77. 똑바로 2001년 서울평협이 진행한 ‘똑바로 운동’ 선포식에 앞서 김옥균(1925~2010) 주교와 평협 임원들이 서울대교구청 마당에서 차량에 ‘똑바로 운동’ 스티커를 부착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똑바로’란 말이 있다.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똑’,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다는 ‘바로’란 뜻으로, 비뚤어지지 않은 곧음을 말한다. 그런데 ‘정확하게’ ‘바르게’ ‘곧게’라는 엄중한 의미의 ‘똑바름’이 무언가를 명령하거나 다그칠 때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참 많아졌다. “똑바로 하세요!” “거짓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하라고요” “똑바로 일하고 있느냐고요?” ‘똑바로’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현장, 바로 국회가 아닐까 싶다. 국회에서 난투극을 벌일 때면 어김없이 서로 손가락질하고 호통을 치면서 ‘똑바로’를 외친다. 그리곤 “국민들이 보고 있어요” “예의를 갖추세요”라는 주문도 이어진다. 아마도 국회의원을 가장 떨게 하는 것은 카메라일 것이다. 불편하고 어색한 감정을 애써 감추며 침착과 인내의 모습으로 ‘똑바름’을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똑바로는 ‘올곧게 선다’는 말이다. 머리는 하늘로 향하여 마음은 솔직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몸은 올곧은 선택을 한다. 시선은 카메라도 타인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을 바라본다. 똑바로(upright)는 또한 정직함과 선함이란 뜻이기도 하다. 정직함과 선함은 자신을 아는 데서 오는 결과다. 그러나 상황을 통제하는 카메라에는 사유나 성찰의 과정이 아닌 보여주기 식의 ’똑바름’을 연출한다. 거기에는 ‘네 탓’ 공방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똑바른’ 인물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사람들이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지식인이고 점잖고 품격까지 갖추며 ‘똑바로’ 살아간다. 마치 카메라 앞에 선 것처럼 절제하고, 단식하고, 선행을 베푸는 똑바른 모습을 잘 연출해내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스승님’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하고 그들 스스로도 자신을 ‘정말 괜찮은 똑바른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동시에 똑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사정없이 손가락질하며 ‘네 탓’이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합의하는 과정보다 드러난 성과물을 보여주고, 양심보다는 타인의 좋은 평가에 기대고, 행동에 대한 책임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에게 예수님 역시 똑바르지 않은, 단죄 받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안식일을 지키고, 죄인들을 멀리하고, 단식하라며 호통치며 손가락질을 한다. 아마도 오늘의 국회 청문회처럼 얼굴을 붉히고 욕설과 고성이 오가지 않았을까 싶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마태 23,27)면서 똑바름을 위장한 ‘위선’을 강하게 책망하신다. 스스로를 똑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못 견뎌 한다. 바리사이는 주님 앞에서 그야말로 비뚤어지지 않고 정확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듯 똑바로 ‘꼿꼿이’ 서서 기도한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질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 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고개는 하늘을 향하여” 그러나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고백한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똑바름’은 머리가 카메라나 남의 시선이 아닌 하늘로 향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바리사이는 똑바로 꼿꼿하게 서 있었지만 고개는 하늘이 아닌 ‘남’(세리)에게 가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 똑바름을 과시하다 보니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남에게 손가락질한다. 그런데 세리는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우러러본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자신의 양심을 바라보면서 ‘남 탓’이 아닌 ‘내 탓’으로 가슴을 친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대중을 의식하는 정치인이나 남들의 시선을 중요시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똑바르지 못한 사람에게 ‘똑바로 하라’고 호통을 친다. 하지만 정작 하느님이 선택한 똑바른 사람은 서민들 속에서 허리가 휘도록 뛰는 정치인이나, 가슴을 치며 용서를 구하는 세리일 것이다. ‘똑바로’가 남을 힐난하거나 꾸짖으면서 보여주기 식의 폭력적인 언어가 되어가는 것 같다. 미디어의 창에서 마이크를 잡고 머리를 카메라로 향하여 ‘네 탓’을 외치는 ‘똑바름’은 똑바르지 않다.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가슴을 치며 ‘내 탓’을 고백하는 정직한 ‘똑바른’ 사람이 그리운 세상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오래전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똑바로’라는 운동을 선포한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시는지요? 도덕성 회복을 위한 똑바로 운동에서 올곧은 생각과 마음 그리고 행동을 하도록 촉구했었지요. 생각과 말과 행동을 똑바로 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똑바로’는 어디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곧게 서다’(straight)라는 뜻입니다. 비뚤어지지 않고 곧게 바르게 서야 합니다. 직각으로 일어서(standing) 있음을 의미하는데요. 그리스어로 ‘스타우로스’(stauros)라는 말이 바로 일어서다는 뜻의 sta와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이 말은 바로 ‘십자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요. 똑바로 선 막대기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똑바로’라는 말은 단호하게 제대로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머리는 하늘을 향하여, 시선은 나의 내면을 향하여, 그렇게 정직하게 ‘내 탓’을 성찰하는 ‘똑바름’을 살고 싶습니다. cpbc2024.07.10
성경 속 문화 배경 이해하기 성경 속 상징들 의미 모아 펴내성경 속 상징 허영엽 신부 지음 / 가톨릭출판사 성경은 오랜 기간 여러 사람에 의해 기록된 책이다 보니, 성경에는 다양한 시대의 역사와 사회, 문화, 관습, 풍속, 상징들이 녹아들어 있다.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성경이 가진 역사 문화에 대한 이해, 다양한 상징을 이해해야 성경의 본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부활절에는 왜 달걀을 먹을까’, ‘재의 수요일에는 왜 머리에 재를 바를까’ 등 평소 신자들이 성경과 연관돼 가질만한 의문들을 모아 펴냈다. 가톨릭평화신문에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엮었다. 「성경 속 상징」은 ‘우리가 머무는 곳’, ‘하느님이 주신 자연’,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문학적 상징들’ 등 모두 8장으로 구성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과 김연아 피겨 선수를 비롯해 성경에 나타나는 상징들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도록 다양한 소재와 넓은 식견을 총동원했다. 허 신부는 머리글에서 “성경에는 아주 다양한 상징들, 언어 표현들이 넘쳐 있고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며 “성경의 상징을 잘 이해하면 성경의 본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저자는 현재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 「지혜로운 삶을 위한 묵상」,「말씀을 따라서」,「성서의 인물」 등이 있다. 이지혜 기자문채현2022.05.11
![[시사진단]창조, 그 시스템과 매커니즘 (김사욱 시몬, 「기후위기와 생태영성」 저자)](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1/24/Rhq1706086036238.jpg)
[시사진단]창조, 그 시스템과 매커니즘 (김사욱 시몬, 「기후위기와 생태영성」 저자)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가르시며, 낮과 밤을 만드시고, 식물과 동물 그리고 절기와 날을 만드시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다. 창조의 마지막 날에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먹을 수 있는 풀과 과일나무를 창조하신다는 이야기다.(창세 1,1-31) 이는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성 요소들, 생명체와 무기물의 집합체인 ‘시스템’을 창조하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번성’하라는 이야기다. 번성한다는 것은 생명체들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증가할까? 바로 먹이를 풍부하게 해주면 늘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부들은 작물을 키울 때 퇴비나 비료를 풍부하게 뿌려서 작물이 잘 자라고 과일이 많이 달릴 수 있게 한다. 식물이 많으면 이를 먹이로 하는 초식동물이 늘어나고 초식동물이 많으면 육식동물이 늘어나며 동시에 인구가 증가하게 된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기본이 되는 식물에서 시작하여 육식동물이나 인간의 방향으로 먹이사슬에 따라 ‘퇴비’와 ‘초지’ 그리고 ‘먹이’라고 정의되는 ‘에너지 이동’이 일어나 번성하게 된다. 이러한 에너지 이동은 ‘열의 이동’이며 오직 한 방향으로만 이동하여 에너지 피라미드를 형성한다. 생물학에서는 이를 ‘열역학 제2법칙’으로 부른다. 열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데 뜨거운 열은 온도가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결국 소비자의 개체 수는 하위 생산자 및 하위 소비자의 개체 수에 의해 자연적으로 조절되어 평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예외라는 점이 생태계의 평형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지구에 생명체가 살기 적합한 환경 구성은 지구 자기장의 작동과 공전과 자전에 있다. 지구 자기장은 대기 중 성층권에 있는 오존층, 대기권이 지구를 이중삼중으로 둘러싸서 우주로부터 오는 방사선과 태양풍에서 지구의 생명체를 보호한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지구 전체 평균온도를 일정하게 하는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의 근원은 무엇일까?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 berg)는 과학의 첫 잔을 마시면 무신론으로 귀결되지만, 그 잔을 다 마시고 난 바닥에는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만물의 각각에 부여한 내적 법칙에 따라 발전하도록 하셨다고 발언하였다. 결국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시스템과 함께 이러한 내적 법칙이 포함된 메커니즘을 창조하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느님이 창조하실 때 가장 마지막으로 창조한 인간이, 하느님이 만드신 메커니즘을 교란시키며 붕괴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한다. 성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찬가’에서 주님은 창조되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고백하였다.(콜로 1,16-17) 또한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으며 비천하게 살 줄도 안다고 하셨다.(필리 4,11-12) 이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분을 ‘향해’ 창조되었음에도 인간의 과욕으로 빚어진 기후 문제에 대한 해법을 성 바오로 사도의 실천적 삶 안에서 보여준다. 그러나 기후 문제의 현실적 정책 주도자인 22대 신자 국회의원들의 기후정책이 보이지 않아 하느님 창조를 유지시키는 메커니즘의 붕괴가 지속되고 있다. ‘경제적 풍요’가 새로운 ‘신’으로 등장하여 하느님을 대체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김사욱 시몬cpbc2024.04.09

나약함을 인정하고 주님 자비를 느끼자[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47) 용서라는 걸림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난 다툼 중, 가장 큰 다툼은 아마도 원수 사랑의 계명을 듣고서 일어나지 않았을까. 솔직히 예수님의 이 계명은 불가능해 보인다. 기쁘고 행복하기 위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신앙을 선택했는데, 신앙은 왜 나에게 걸림돌로 다가오는가? 그렇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당한 만큼 똑같이 갚아주는 것이 더 정의로워 보인다. 아예 피하거나, 관계를 단절하는 방법도 있다. 예수님이 만약 그렇게 답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과연 그것이 나의 마음을 진정 자유롭게 할까? 예수님의 계명을 ‘존재의 변화’로 접근하면 어떨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 이유는 단순히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해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느님 아버지처럼 변화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신앙을 살아가는 이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마음의 안식을 얻는 길, 그것은 예수님처럼 온화하고 겸손하게 변화하는 것이며,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 길은 예수님을 뒤따라 걷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서 가신 길을 함께 걸으며 제자로 사는 삶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기 위해, 내가 얼마나 큰 자비를 입은 사람인지 깨닫기 위해서 말이다. 그분이 가신 길은 한마디로 ‘사랑으로 하나 됨’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존재가 되셨다. 인간의 모든 것, 나약함과 한계까지도 끌어안으셨다. 바로 거기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난다. 성경의 현실주의에 따라 부정적인 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모호함·불확실함·불완전함은 신앙의 반대말이 아니라 자비가 실현되는 곳, 구원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을 다른 눈으로 보며, 너그러운 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용서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번민하고 분노와 원한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기 자신을 자비로운 아버지의 눈으로 대면할 수 있게 된다. 용서하지 못해도 괜찮다. 나는 나약한 존재이니까.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그렇게 나약함을 인정할 때 오히려 나는 강해진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나기에.(2코린 12,9 참조) 그러한 포기 안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어느 순간 그 모든 아픔이 아무렇지도 않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가장 큰 원수는 타인이 아니라 그가 한 말과 행위로 인해 얽매이고 고통받는 나 자신이 아닐까.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원수가 아닌, 원수가 내 안에 남겨놓은 것들일 것이다. 나의 나약함을 인정할 때 거리를 둘 수 있고, 연민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고, 자유로움을 경험하고 여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아버지의 자비로움을 닮아가는 것 아닐까.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심지어 우리에게 원수가 된 사람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의 경지를 경험할 때 우리는 변화하게 될 것이다. 내 안에서 벗어나 성장의 길을 걸을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처럼 조금씩 변화할 것이며,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것이다. ※ ‘금쪽같은 내신앙’ 코너를 통해 신앙 관련 상담 및 고민을 문의하실 분들은 메일(pbcpeace12@gmail.com)로 내용 보내주시면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한민택 신부이정훈2024.04.23

성 이호영, 103위 성인 중 가장 먼저 체포되고 가장 먼저 순교[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11. 성 이호영 베드로 윤영선 작 ‘성 이호영 베드로’. 출 생 | 1803년 경기도 이천 순 교 | 1838년(35세) 형조 전옥서 / 옥사 신 분 | 회장 꿈속 천사의 말씀에 순종한 성 요셉 3월 19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이다. 성 요셉의 꿈은 인상적이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마리아의 임신 소식에 남몰래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던 요셉은 꿈에서 만난 천사의 말씀 때문에 정반대의 선택을 하게 되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다. 이로써 요셉은 예수님의 양아버지이자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었다. 성경에서 꿈은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상태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니 꿈속 천사의 말씀은 요셉의 선한 의지로도 오염되지 않은 ‘하느님의 뜻’을 말하려는 게 아닐까. 우리의 선한 계획조차 하느님 뜻에 어긋날 수 있다는 지혜를 그의 이야기가 들려주고 있다. 결국, 요셉은 이전에 가졌던 생각과 정반대로 행동하면서 하느님 뜻에 순종하게 되었다. 나의 계획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자신을 돌아볼수록 요셉의 태도가 존경스럽고, 그분의 전구에 더욱 의지하고 싶어진다. 우리 순교자 가운데는 요셉 성인처럼 꿈의 상징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태도를 연상시키는 성인이 있다. 경기도 이천 출신의 성 이호영 베드로다. 꿈이 예견한 대로 순교한 이호영 성인 순교자 이호영의 꿈 이야기는 요셉 성인만큼이나 인상적이다. 1835년 붙잡히기 며칠 전, 베드로는 임금과 친밀한 신하와 사귀며 과거에 오르고, 온몸이 풍류에 젖는 꿈을 꾸었다. 이상한 꿈이라 여기며 다른 교우에게 말하면서도 ‘아마도 순교자가 되려는가?’ 하였다고 한다. 그의 꿈과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 베드로는 곧 체포되었고, 긴 옥고를 치르던 중 1838년에 옥사하였다. 한국 103위 순교 성인 가운데 가장 먼저 체포되고 가장 먼저 순교한 순교자가 되었다. 긴 옥살이 동안 베드로의 인품에 반해 세례를 받은 죄수도 있었다. 선하고 부드러운 성품에도 고문을 당하고 배교를 강요받으면 단호하게 거절하며 고통을 받아들였다. 옥중에서 숨을 거두기 전에 베드로가 말했다. “나는 칼을 받아 죽기를 원하였지만, 이 또한 천주의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꿈이 예견한 대로 순교자가 되었으나, 때와 방식마저 하느님의 뜻이었기를 바랐다. 성령의 비둘기 안고 온화한 미소 지어 12월 눈 덮인 수원교구 단내 성가정 성지 진입부의 오솔길을 걸어 들어갔다. 마치 성인을 직접 만나 뵈러 가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세상일로 고단한 내 마음을 성인에게 기대어 위로받고 싶은 것이었을까.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늘 미소를 잃지 않고 불평 없이 힘든 일을 하신 성인이 성령의 비둘기를 두 손에 안고 아버지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서 계신다. 성가정 성지 앞마당에는 예수님과 성모님 요셉 성인 세 분의 성가정상이 있다. 성가정상 주변으로 성스러운 빛이 감돌고 있는 듯하다. cpbc2024.03.07

주님께서는 시나이산 위로, 그 산봉우리로 내려오셨다.[월간 꿈 CUM] 뿌리 _ 구약이 말을 건네다 (3) 이탈리아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incoli)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1515~1515) 자유(해방)의 여정이었던 이집트 탈출은 무엇보다 이집트 제국이 주었던 부유함의 삶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자유를 찾아 패기있게 떠났지만, 척박한 광야에 들어서자 이집트가 주었던 부유함은 더욱 달콤한 향수로 다가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돌아가지 않았고, 거친 광야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 안엔 하느님의 사람 모세의 위대한 인도가 있었습니다. 부유했지만, 자유가 없었던 삶을 살았던 이집트의 삶,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은 지금 우리에게 근본적인 묵상을 제안합니다. 파스카 여정에 있어서 부유함과 자유는 서로 함께 섞일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한 분이신 하느님과 우상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약 현대인들이 지금처럼 끊임 없이 부유함만을 추구한다면 계속해서 자유를 잃어갈 것이며, 그 안에는 부에 속박된 노역의 삶만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탈출기 파스카의 완성임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자유는 분명 부유함보다 우선하는 가치입니다. 더 나아가 이 자유의 여정 안에 하느님과의 만남이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체험이 있습니다. 장대한 파스카 여정 한가운데에 일어났던 말씀의 사건은 분명하게 시나이산이라는 지리적인 장소를 언급합니다.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 주님께서는 시나이산 위로, 그 산봉우리로 내려오셨다. … 그때에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탈출 19,1-20,1) 어째서 시나이산이었을까요? 어째서 하느님 백성은 다른 곳이 아닌,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시나이산이 지닌 독보적인 순수성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은 척박한 광야였고, 한적한 곳이었으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인간의 계략과 정치적 술수가 없는 오염되지 않은곳이었습니다. 즉, 시나이산은 이스라엘 백성이 외부의 방해없이 하느님과 단둘이서 만나며,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었습니다. 시나이산이 주고 있는 이러한 의미는 이 산이 위치한 지리적 특성에 기인합니다. 하느님 백성이 살아가게 될 가나안 땅은 지리적으로 개방된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농경문화가 발달한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속하였기에 주변의 민족들의 침입이 잦았습니다. 그러나 시나이산은 이 가나안땅에서 따로 떨어져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후, 당신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시나이산에 따로 불러 세우시어 당신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해 주십니다. 이러한 시나이산의 체험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서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믿었던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더 나아가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만들어졌고,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이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수많은 속박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버팀목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속엔 시나이산이 있습니다. 그들은 삶의 시련과 물질적 부유함으로 인하여 믿음이 흔들릴 때, 시나이산을 찾아갑니다. 그 산에서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다시 귀 기울이며 하느님만을 섬길 것을 다짐합니다. 사실 시나이산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읽고 듣는 모든 순간은 시나이산 위에 서 있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시나이산은 성경 그 자체이며, 우리 모두의 산입니다. 말씀 안에서 인도자 모세와 함께 그 위대한 산을 꾸준히 올라 하느님을 오롯하게 만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산 위로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바른 법규와 진실한 율법과 좋은 규정과 계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느헤 9,13) 글 _ 오경택 신부 (안셀모, 춘천교구 성경 사목 담당 겸 교구장 비서) cpbc2023.11.27
![[신앙단상] 보아즈와 룻처럼(김상훈 안드레아, 제주교구 이주사목(나오미)센터 사무국장)](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3/10/04/rz41696383618665.jpg)
[신앙단상] 보아즈와 룻처럼(김상훈 안드레아, 제주교구 이주사목(나오미)센터 사무국장) 구약성경 룻기는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 가족이 기근으로 인해,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뒤 남편과 아들을 잃고 이방인 며느리 룻만 데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기후 이주민’ 나오미가 이방인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함께 정착하는 모습을 보면, 전쟁이나 기후 변화 등의 재난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이주민과 선주민 간의 사회통합은 오랫동안 꾸준히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현 정부가 240만 명에 달하는 이주민의 향후 증가를 고려해 검토하는 이민청 설립과 730만 해외동포를 위해 설립한 해외동포청 또한 사회통합 조치의 일환이다. 올해 7월 프랑스는 외국인 소요 사태로 또다시 홍역을 치렀다. 그러나 소요 사태를 일으킨 외국인들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이주배경 국민, 즉 프랑스 국민이다. 프랑스의 소요 사태는 2005년 프랑스 출장 때 내가 목격했던 ‘파리 차량 방화 사건’과도 매우 흡사해 보였다. 그 후 18년이 지나도록 프랑스는 사회통합에 있어서 전혀 진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에 같은 유럽 대륙 중 하나인 독일은 그동안 난민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다. 그런데도 외국인 소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나라로 프랑스와 대조를 이룬다. ‘포도주의 나라 프랑스’가 단일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동화정책’을 편 것이 이주배경 국민의 가슴 속에 불만이 쌓이게 하였고, 그것이 외국인 소요 사태로 발전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맥주의 나라’ 독일은 다양성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였다. 소외와 배제를 최소화하는 ‘포용적 다문화정책’으로 난민들까지도 짧은 시간 내에 독일 국민으로 변화시켜 정착시키고 있다. 이는 구약성경 룻기에서 본토인 보아즈가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하려고 왔으니”(룻기 2,12)하며 이방인 룻을 포용하는 자세를 연상케 한다. 한편 ‘막걸리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은 ‘다문화(여러 문화 공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주민들이 한국인으로 동화되기를 바라는 듯해서 걱정을 떨쳐낼 수가 없다. 이주민·난민은 ‘이슈’가 아니다. 기록을 경신해 가는 ‘숫자’ 게임도 아니고, 그저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잘 들으려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셨다. 보아즈가 룻에게 “내가 잘 들었다”(룻기 2,11)라며 룻의 기구한 운명을 들어서 잘 알고 있기에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말하고, 룻이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저의 하느님이십니다”(룻기 1,16)라고 고백하는 두 마음을 잘 간직하고 곰곰이 새겨보면 좋겠다. 국제선이 정상화되면서 제주도에 다시 이주민·난민이 들어오고 있다. 큰 홍수와 산사태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인도 북부 사람들과, 내전과 쿠데타로 정국이 혼란한 아프리카 동부의 부룬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부룬디에서 온 친구들은 비행기를 네 번씩이나 갈아타고 왔다고 한다. 처음으로 막 찾아온 사람들의 고단한 이야기를 듣자면 상담 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하지만, 그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 정신을 모토로 일하고 있는 나오미센터 직원들과 보아즈의 따뜻한 마음을 지닌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이 있기에 제주도의 사회통합이 룻의 이야기처럼 잘 이루어질 것임을 믿고 희망도 가져본다. 김상훈 cpbc2023.10.20

피조물 보호, ‘선택’ 아닌 그리스도인 ‘소명’교회, 9월 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지내생태적 회개 촉구, 피조물 보호 위한 돌봄 문화 확산 인간은 자신들의 안락함을 위해 피조물을 상대로 한 무분별한 착취를 이어왔고, 그 결과 기후위기라는 재앙을 초래했다. 기후위기는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은 물론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치명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영화 ‘북극곰 이야기’ 한 장면. 9월 1일은 가톨릭교회가 정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생태 위기 극복과 더불어 교회 일치와 연대를 위해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을 정교회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개인과 공동체에 피조물을 보호할 소명을 일깨우고, 이에 동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이다. 교황은 매년 이날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생태 문제를 성찰하고 기도·회개·행동하며 생태 중심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왜 피조물과 공동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 이는 그리스도교가 ‘창조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피조물에 대한 인류의 책임을 명기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1,26; 2,15) 이처럼 인간은 세상을 ‘다스리고’, ‘돌보기’ 위해 창조됐다. 세상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하느님 나라가 현존하도록 일하는 게 소명이다. 인간은 이 일을 통해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 자격을 얻는다. 따라서 자연을 파괴하고, 자원을 남용하는 것은 “그곳을 일구고 돌보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셈이다. 즉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죄’를 짓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그분의 땅은 고통을 받아 메말라 불모지가 되고, 적으로부터 파괴된다.(레위 18,25.28; 이사 24,4-6; 호세 4,1-4 참조) 성경은 ‘노아의 방주’(창세 6ㅡ9장) 사건을 통해서도 피조물을 보호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는 ‘땅’을 상징하는 방주에 올라탄 모든 생명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 말씀대로 모든 생명을 돌보지 않으면, 세상을 보호할 수 없음을 일깨워준다. 또 성경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의 맏이’라고 밝힌다. 만물이 성자 안에서 창조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만물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고 고백한다.(콜로 1,15-20)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다. 이에 가톨릭교회는 모든 피조물이 저마다 고유한 선과 완전성을 지닌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피조물의 고유한 선을 존중해야 하며, 무질서하게 이용하거나 창조주를 무시해선 안 된다. 교회는 또 모든 피조물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연대하고 상호 보완해야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피조물 보호를 위해 ‘돌봄의 문화’가 촉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 연대와 보조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교리의 원리’를 나침반 삼아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이 돌봄의 문화다. 교회는 피조물 보호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회심도 촉구한다. 이른바 ‘생태적 회개’다. 그 출발은 하느님 안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과 영적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연대와 책임, 배려는 생태적 회개로 나아가는 길잡이다. 그리고 생태적 삶과 회개를 실현해 나가는 첫 단계는 바로 가정이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이학주2023.08.21

성인들이 전해주는 보물같은 이야기 1000여 쪽에 가득13세기 처음으로 출간, 초세기부터 중세 성인들 전기 모아신화와 전설뿐 아니라 당시 역사·문학·예술 등 두루 담겨 황금 전설 야코부스 데 보라지네 대주교 지음 변우찬 신부 옮김 일파소 「황금 전설」이라는 제목만 보면 자칫 금의 기원을 살피는 책 같지만, 실은 성인들의 이야기이다. 라틴어 원서 제목인 ‘Legenda Aurea(레젠다 아우레아)’를 번역하면 ‘황금 전설’인데, 15세기에 이 책이 많이 읽히면서 원래 제목인 ‘성인들의 전기(Legenda sanctorum)’에 황금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로 ‘황금의(aurea)’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당시 ‘전설(legenda)’이라는 단어에는 ‘모으다, 읽다, 낭독하다, 골라내다’라는 뜻도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성인들에 대한 중요한 읽을거리’인 셈이다. 1260년에 처음으로 출간된 「황금 전설」은 당시 도미니코회 수사였던 제노바의 야코부스 데 보라지네(Jacobus de Voragine) 대주교가 집필했다. 그는 신약 이후 천년, 초세기부터 중세까지 희미한 교회의 여러 기록과 전설, 구전되는 이야기를 찾아서 기록했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중세의 사회상을 엮어냈다. 덕분에 성직자들은 강론을 위해, 신자들은 신심 함양을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이로 인해 초판 출간 200여 년 후 서유럽 대부분의 언어로 번역 또는 중역되면서 1500년대에는 성경의 발행 부수보다 이 책의 복사본 수가 더 많았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광기 어린 과시를 밀어붙여 모든 신을 기리기 위해 다른 무엇보다 더 높고 더 놀라운 신전을 세울 지경에 이르렀고, 그것을 ‘모든 신’을 의미하는 판테온이라고 불렀다. (중략) 로마가 그리스도 믿음을 받아들인 지 오랜 후, 포카스 황제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 후 세 번째 교황인 보니파시오 4세 교황에게 위에 묘사된 신전을 양도했다. 보니파시오 4세 교황은 우상 숭배와 관련된 상 등 모든 것을 없애고 609년 5월 12일에 복되신 마리아와 모든 순교자를 기념하는 건물로 축성했다.”(922쪽) 모든 성인들 이콘화 책을 번역한 서울대교구 변우찬(우면동본당 주임) 신부는 “이 책은 신화와 전설만이 아니라 중세의 민속학, 역사, 문학, 예술, 그리고 종교 등 각종 분야를 연구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고 종교사만이 아니라 미술사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전했다. 이미 한글로 번역된 책이 있지만, 가톨릭 용어나 전례, 신심을 이해하지 못한 그릇된 번역이 많아 변 신부는 번역을 결심했다. 이번 책은 2012년에 단권으로 출판된 영어본(윌리엄 그레인저 라이언 번역)을 우리말로 옮겼으나, 이마저도 오역한 부분이 많아 완성까지는 3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변 신부는 “번역을 놓지 않았던 것은 중세 미술, 르네상스 시대 작품, 특히 성경 내용을 그린 그림과 성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책만큼 좋은 자료가 없기 때문”이라며 “배경이나 등장인물, 소품들까지 왜 필요했는지를 안다면, 그 그림을 보다 충실히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성인들의 이야기는 사실상 전례 주년의 주된 구분에 따라 대림부터 성탄, 성탄부터 칠순, 칠순 시기부터 부활, 부활 날부터 성령 강림, 성령 강림의 팔일 축제부터 다시 대림까지로 나누어 축일을 기준으로 실려 있다. 이미지 한 장 없이 1000쪽이 넘는 분량에 다소 압박감이 있지만,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찬찬히 읽어나가면 어떨까. 변우찬 신부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상임이사 겸 부소장, 절두산순교성지 주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초대 관장 등을 역임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3.10.19

신자로서의 정체성 드러내는 표지[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0) 십자 성호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하고 있다. OSV 일부 개신교는 왜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나요? 한국 개신교 가운데 적지 않은 교단이 천주교를 이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단이란 말은 사전적으로 기성 종교의 정통 교의에서 많이 벗어난 교리, 주의, 주장 등의 조작을 두루 일컫는 말입니다. 개신교는 종교 개혁의 정신에 따라 오직 성경에 기록된 것만을 하느님의 계시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그 밖의 것들은 인간의 전통과 관습에서 나온 우상적 요소로서 배척합니다. 따라서 개신교는 천주교가 오랜 역사 속에 교회의 유산이자 전승으로 간직해 온 성모님 공경과 신심, 성인 공경, 성상에 대한 공경은 우상 숭배라고 비난하며, 천주교의 전례와 신심 활동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정통 교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하여 잘못 가르치는 이들이 교회 역사 안에서 나타날 때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교도권에 따라 이들을 식별하고 감독하며 제재하는 권한을 행사하였습니다. 특히 정통 신앙을 위협하고 신앙 공동체의 친교와 일치를 방해하는 이단에 대하여 강력하게 대응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인류 공동체는 배타적 편협성에서 벗어나 보편적 공동선을 지향하는 대화와 화해의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도 시대의 맥락에 맞게 교리를 해석하고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신학과 교회 생활 전반에 펼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신교에 대하여 ‘이단’이란 용어보다는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교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갈라진 형제들’이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일치는 배타적 논쟁이 아닌 대화와 합의를 통하여 서로 올바른 신앙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점은 한국 개신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신념과 오직 성경에서만 올바른 신앙의 전통을 얻는다는 기준을 고수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개신교 교단들 사이에서도 이단 논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성상을 공경하는 천주교의 전통을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성상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완덕의 삶을 보여 준 성인의 신앙적 증거를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비난은 옳지 않습니다. 개신교 신자가 천주교를 이단으로 비난할 때, 지엽적인 교리에 대한 논쟁은 전문적인 신학자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에 상대를 충분히 납득시킬 수 없다면 섣불리 대응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대신에 가톨릭 신앙이 지닌 보편성을 강조하며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인류에 봉사하고 하느님 나라를 공동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성호는 천주교 신자만 긋나요? 십자가 모양을 그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짧은 기도를 바치는 성호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그리고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도 십자 성호를 활용합니다. 성호경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인 삼위일체 하느님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동시에, 십자 성호를 긋는 행위로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념하는 축복의 행위이자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본래 십자 성호는 2세기부터 개인이 기도를 드릴 때 엄지나 검지로 이마에만 작게 십자가를 그리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4세기부터 성경과 교회 전통에 따라 이마와 가슴에 작은 십자가를 그리는 전통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십자 성호는 13세기부터 보편화되었습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는 성경과 교리 해석은 물론 교회의 오랜 전통과 관습까지 상당 부분 차이가 생겨났습니다. 개신교는 가톨릭의 오랜 신심과 전례 행위들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고, 하느님 계시의 원천을 ‘오직 성경으로만’을 주장하면서 가톨릭의 관습적 요소들을 개혁 신앙에서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십자 성호가 개신교 전통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전승을 공유하고 있는 동방정교회와 교황권에 대한 반발로 갈라진 성공회는 여전히 십자 성호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제였던 루터는 가톨릭의 예식을 존중하였기에 루터교도 십자 성호의 전통이 있습니다. 다만 장로교를 비롯하여 가톨릭에 반대하는 개혁 신앙을 주창한 노선의 개신교 교단들은 십자 성호를 가톨릭의 관습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동방정교회의 경우에는 가톨릭교회와는 반대로 이마와 배(자궁)에 이어 오른쪽 어깨(선한 양의 무리)에서 왼쪽 어깨(악한 염소 무리)로 십자가를 긋습니다. 이때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을 모으고, 나머지 두 손가락은 손바닥에 밀착시킵니다. 앞의 세 손가락은 삼위일체를, 나머지 두 손가락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 cpbc2023.05.23

간청[월간 꿈 CUM] 회개 _ 요나가 내게 말을 건네다 (9) “아, 주님!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요나 1,14)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어쩌면 이 간절한 청원은 성경의 모든 인물이 주님께 끝없이 드리던 기도의 모든 내용이며 주제였을 것입니다. 원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엎드려 빌고 또 빌며 자신들을 멸하지 말아 달라고 빌었을 것이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말아 달라고 그토록 애원하였던 아브라함의 절절한 간청도 같은 내용이었을 것입니다.(창세 18,16-33 참조) 모세 또한 하느님을 만난 산에서 내려와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를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을 그래도 광야에서 멸하지는 말아 달라고 그토록 애원하였던 간청(탈출 32,11-14 참조), 또한 같은 청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 드렸던 기도 역시 죄인을 멸하지는 말아 달라는 간청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앞에서 인간을 멸하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기도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기도이면서 인류가 끝없이 만나는 대재앙 앞에서 겸손하게 울며 통곡하던 기도였습니다. 인간의 절절한 호소가 담긴 눈물의 이 기도는 단 한 번도 멈추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유럽의 흑사병 대유행, 스페인 독감, 오늘날 사스나 메르스, 그리고 지금 코로나 팬데믹 때에도 인간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습니다. 그리고 참혹한 전쟁 중에도, 혹은 지진과 쓰나미, 기상 이변으로 인한 수많은 재난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간은 그저 망연자실 상태에서 하느님께 울부짖을 따름이었습니다. 죄많은 인간을 제발 멸하지는 말아 달라고…. 그런데 인간이 저질러 놓은 참상 앞에서 인간은 그저 넋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재앙 앞에서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굳게 믿고 헌신적인 봉사와 투신의 박애정신으로 재앙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재앙을 거두시게 되는 것입니다. 알제리 오랑시의 흑사병 창궐의 유행을 배경으로 쓴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흑사병과 싸웠던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흑사병이 물러갔을 때, 재앙 한가운데에서 배운 것을 기록에 남깁니다. 이것은 죽음의 현장에서 인간이 보여준 분명한 사랑과 헌신에 대한 찬사일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 두기 위하여.”(알베르 카뮈, 「페스트」, 민음사, 401쪽) 카뮈의 인간애에 대한 뜨거운 통찰은 계속 이어집니다. 세계의 대재난 현장을 직접 누비며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을 보고 느낀 미국의 레베카 솔닛은 그 감동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지진이나 폭격, 태풍이 닥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타심이 발동해 자기 자신과 가족,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타인과 이웃들을 보살피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재난이 닥쳐오면 인간은 이기적으로 돌변하고 공황에 빠지거나 야만적인 모습으로 퇴보한다는 관점은 그다지 사실적이지 않다. 세계대전 대폭격에서부터 홍수와 토네이도, 태풍에 이르기까지, 많은 재난 속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수십 년 동안 꼼꼼히 연구한 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입증했다.”(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펜다그램, 10~11쪽) 그렇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낙원 에덴의 사랑스런 조화의 질서를 죄로 깨뜨렸듯이, 동생을 잔인하게 죽인 카인의 후손으로서 지금도 피조물에게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인간들이 자신들 스스로 만든 재앙의 폐허 위에서 울부짖고 있지만, 그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느님 사랑의 모상이 깊게 새겨져 있어 선을 향한 몸살을 앓은 적이 많고 또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울부짖으며 간청할 때, 당신의 분명한 답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이사 40,1;66,13) 하느님께서는 다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던 먼 노아 때의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나는 다시 말을 건네옵니다. “사랑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는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배광하 신부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 바오로)cpbc2023.12.04
![[금주의 성인] 성 스테파노 (12월 26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3/12/19/zS71702972356152.jpg)
[금주의 성인] 성 스테파노 (12월 26일)+35년경 출생 및 예루살렘 성 밖에서 순교. 초기교회 일곱 부제 중 하나, 그리스도교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의 이콘. 사진=굿뉴스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의 이름은 ‘승리의 화관’, ‘월계관’, ‘영광’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이 그리스식 이름으로 보아 스테파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다인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율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사도 6,11) 그룹에 속했습니다. 스테파노는 성령과 지혜, 믿음과 은총이 충만한 사람으로, 예루살렘의 유다인 출신과 그리스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의 세속적인 요구에 부응하도록 사도들로부터 선발된 일곱 부제 중 한 명입니다. 스테파노는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았고, 백성들 앞에서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을 많이 행했습니다. 또한 그는 키레네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유다인으로 구성된 일명 ‘자유인의 회당’에 속한 몇몇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이들은 스테파노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사람을 매수하여 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결국 스테파노는 체포되어 의회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는 설교를 하게 됐습니다. 스테파노의 말을 들은 의회 회원들은 오히려 분노하며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스테파노는 도시 외곽에서 돌을 맞고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사도 6─7장 참조). 사도행전 8장 2절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냈다고 언급되어 있으나, 그의 무덤이 어디인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415년 8월 3일에는 루키아누스 신부가 예루살렘과 15㎞ 정도 떨어진 카프르 가말라에서 스테파노의 유해를 발견했습니다. 이 유해는 현재의 스페인인 에스파냐 메노르카, 아프리카의 히포, 예루살렘, 시온,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로마 등으로 나뉘어 전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 도시에 보관된 유해 위에 스테파노 기념 성당이 건축되어 이 성당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스테파노 유해에 대한 공경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습니다. 서방 교회에서는 9세기경부터 1955년 공식 전례에서 제외될 때까지, 스테파노의 유해가 발견된 8월 3일을 ‘성 스테파노의 유해 발견 축일’로 기념했습니다. cpbc2023.12.14

세례의 의미 -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월간 꿈 CUM] 꿈CUM 묵상 _ 예수의 일생 (6)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제주 성이시돌 목장 새미은총의 동산 조형물) 사진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시자 요한은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고~ 주님께서 제게 오시다니요. 당치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하자는 대로 좀 합시다”라고 합니다.(마태 3,14-15 참조)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왜 굳이 세례를 받으려 했을까요. 구약의 마지막 위대한 예언자 요한이 주는 세례와, 새로운 약속의 출발점인 예수님께서 새롭게 제정하시는 세례와는 무엇이 다를까요. 사진을 보면 지금 세례자 요한이 작은 조가비에 물을 떠서 예수님의 머리에 물을 붓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물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디를 가시나요. 알람을 끄고 일어나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화장실에 가실 겁니다. 화장실에서 눈곱을 떼고, 입 냄새나니까 양치질을 합니다. 이때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정화의 기능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죄로 더럽혀진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례는 여기에 엄청난 의미가 하나 더 첨가됩니다. 여행 다닐 때 우리는 물을 반드시 챙깁니다. 왜 그럴까요. 목이 마르면 안되니까요. 목이 심하게 마를 때 시원한 물 한 잔 마시면 어떻습니까. “이제 살겠네” 합니다. 물이 없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이처럼 물은 생명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정화의 의미를 지닌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여기에 생명의 의미가 하나 더 얹혀집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새롭게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했을 때,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인 바리사이 니코데모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이고 주님, 새로 태어나야 한다니요. 제가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라는 이야기입니까?”라고 말했습니다.(요한 3,1-21 참조) 니코데모는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육적인 차원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육적인 생명이 아닌 또 다른 생명을 받는다는 것을 말이죠.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딸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면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이 말이 괜히 성경에 쓰여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세례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선물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선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니…. 이런 엄청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의 호적에 올라간다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엄청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내가 엄청난 업적을 쌓아서? 아닙니다. 조상이 3대에 걸쳐서 착한 일을 해서? 아닙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하느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상속을 받습니다. 아들 딸이니까, 호적에 올라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상속권이 생깁니다. 압구정동 아파트는 껌 값도 안됩니다. 우리가 상속받는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작은 아파트나, 땅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상속받습니다. 그것도 하느님 나라를 말이죠. 그래서 사도 바오로 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7) 이제 상속자가 받게 될 선물, 상속자가 누리게 될 혜택 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글 _ 안성철 신부 (마조리노, 꿈CUM 지도신부, 성 바오로 수도회) cpbc2023.11.06

신앙과 문명[월간 꿈 CUM] 회개 _ 요나가 내게 말을 건네다 (18)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요나 3,2) 기원전 이스라엘 민족은 주변 강대국들의 엄청난 문명에 놀라 수없이 쓰러진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의 찬란한 문명 앞에 노예로 살면서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그 경이로움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회개를 외쳤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도 그 놀라운 문명을 경험하였을 것이고, 바빌론 유배에서 찬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웅장함을 또다시 초라한 노예의 슬픈 눈길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페르시아 문명과 그리스 대제국, 로마 대제국의 위용 앞에서는 넋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신들의 선민사상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혼란과 갈등 속에 숱한 번민의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목숨처럼 느끼며 지켜온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야훼 신앙에 대한 불신으로도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격동의 처참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자신들의 유일한 희망인 야훼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가 더욱 험난해져도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현자들은 더욱 소리 높여 마지막 희망은 하느님뿐이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쳤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는 딸 것이 없고 밭은 먹을 것을 내지 못할지라도 우리에서는 양 떼가 없어지고 외양간에는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 주 하느님은 나의 힘.(하바 3 ,17–18) 미국의 저명한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1928~2016)는 「제3의 물결」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인류가 직면했던 거대한 문명의 물결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 첫 번째 물결은 1만 년 전에 일어난 ‘농업혁명’이고, 두 번째 물결은 300년 전에 일어난 ‘산업혁명’이며, 세 번째 물결은 다양한 에너지 자원, 과학기술, 지식 정보의 위상, 매스미디어의 탈대중화 등을 꼽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권력은 미래의 변화를 예견하고 주도하는 쪽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부분 엘빈 토플러의 주장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 문명의 거대한 제3의 물결이 세상을 삼킬 듯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AI가 인간과 바둑을 두어 이기고, 챗GPT로 논문을 쓰고, 시를 지으며, 그림도 그리는 등, 세상이 황홀경에 놀라워 열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대한 과학 문명 시대에 성당에서 고리타분한 성경을 낭송하고, 계명을 지키라 하고, 성가를 부르며 “제 탓이오!”를 외치며 가슴을 치는 전례 행위가 과연 젊은이들에게 어떤 뜨거운 신앙으로 다가올 수가 있을까요? 제의를 입은 사제가 경건하게 미사를 집전하며 강론을 한다고 감동의 울림을 줄 수 있을까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밀려오는 강대국들의 거대한 문명 앞에서 그토록 신앙의 정체성에 갈등했던 모습이 마치 재현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안다’ 하였으니 옛 신앙인들이 거듭 반복하여 깊이 깨달았던 고귀한 신앙의 교훈을 오늘 우리가 또다시 배워 깊은 묵상과 성찰을 통해 얻게 된 생명의 믿음을 굳건히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밀려오는 과학 문명이, AI가, 챗GPT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세상 그 어떤 놀라운 문명도 영원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존귀한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집회서의 현인은 밀려오는 쓰나미 문명 앞에 갈등하는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확고한 신앙의 선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집회 15 ,16–18) 과연 세상 그 모든 것 앞에 하느님께서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요나는 또다시 말을 건넵니다. “제가 그 옛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 보았던 웅장하고 거대한 문명도 나를 그곳으로 파견하신 주님의 권능에 비추어 보면 한낱 먼지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결국 사라질 먼지에 불과하였습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cpbc2024.05.09

10만 전도 물불 안 가리는 신천지 ‘각별한 주의’ 필요 신천지 포교활동 다시 고개 들어, 피해 발생 사례 늘어
청년 대상 상담이나 성경공부 언급하는 경우 경계해야 신천지가 지난해 11월 대구 스타디움에서 개최한 10만 수료식 모습. 이후 신천지는 서울역 광장 등 곳곳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과시하고자 거리에서 수료식 사진전을 펼치며 홍보하고 있다. 유튜브 영상 캡처 “퇴근길에 신천지 신도들한테 잡혀서 몇 시간 씨름했네요.”“신천지 사람들이 아파트 공동현관에서 무작위로 세대 호출을 하면서 피해를 주는데 스트레스에요.”최근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이 대대적인 거리 홍보와 포교활동에 나서고 있다. 그만큼 신천지로 인한 크고 작은 피해들도 다시 늘고 있다. 이를 감지한 일부 개신교회들은 입구에 ‘신천지 아웃’이 적힌 경고 스티커를 다시 내붙이기 시작했다.지난해 11월 대구 스타디움에서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3년여 만에 ‘10만 수료식’이라 자칭하는 새 신도 입교 행사를 기점으로 전방위적인 신천지 포교활동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이상하리만큼 10만이라는 숫자에 집착하며 거창한듯 선전하고 있는 신천지는 이를 내세워 온·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공격적인 홍보와 포교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신천지임을 밝히고 거리의 시민이나 지인에게 접근하는 ‘오픈전도’부터 중고거래 앱이나 과외 소개 앱을 통해 신분을 속이고 현혹하는 ‘모략전도’를 물불 가리지 않고 쓰고 있다.아울러 신천지는 과거 카페나 공부방, 학원으로 위장해 신학원센터를 운영하던 행태를 올해 1월부터 다시 시작한 것으로 파악됐다. 신천지 입교 관문인 위장 센터가 서울 등 곳곳에서 암암리에 다시 운영되고 있으며, 마치 일반 강연이 열리는 곳으로 속여 신청서를 받아 개인정보를 얻고 있다.또 젊은이들이 많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문학 강연을 열고, 괜히 사전 상담을 유도한 뒤 수강자들을 센터로 연결시키고 있다. 학생들이 과외 소개 앱을 이용하다 ‘과외 선생님 탈’을 쓴 신천지 신도와 연결되는 경악스러운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가정주부들의 친목 모임이 어느 날 성경 공부 모임으로 전환돼 피해가 발생하는 사례도 일어나는 등 세대 불문하고 포섭에 열을 올리고 있다.‘소통’, ‘행복’, ‘새로운 인생’ 등 솔깃한 주제들로 지역 곳곳에서 세미나, 강좌를 여는 것도 이들의 특징이다. 그럴싸한 문구로 유혹하지만 모두 위장 신천지 행사다. 강연에 참여하기 전에 주최자가 누구이며, 어디에 소속된 기관인지 잘 살펴야 하는 이유다. 자신들이 말하는 진리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끈다면서 온통 위장된 사기 행세로 사람들을 꾀는 과거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개별 개신교회를 향한 무작위 살포형 홍보도 자행되고 있다. 신천지는 코로나19 기간 동안 재정비하면서 목사들에게 마구잡이식으로 편지를 보내 협력 관계(MOU)를 시도하고 있다. 신천지는 총회장 이만희의 지시에 따라 각 지파가 개별 교회의 연락처와 이메일을 구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면서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신천지에 진리가 있음을 알려야 한다고 주입한다. 심지어 “신천지의 성취를 자랑해야 한다”, “교회 담임, 강사, 전도사에게 이를 전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 하면 된다”고 신도들을 종용하고 있다. 실상 말씀은 없고, 포섭 작전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그러다 실제로 천주교 본당 사제에게 ‘목사’라고 오기(誤記)해 쓴 편지가 배달되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봉투엔 버젓이 신천지 교회 주소와 지파명이 기재돼 있다. 천주교 사제인지, 개신교 목사인지 분별없이 편지를 발송하는 것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기본 지식조차 결여된 채 ‘채찍질 포교’를 당하는지 알 수 있다.이단 전문가들은 “신천지가 코로나19 동안 움츠러들었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매우 공격적으로 세력 넓히기와 내부 결속 다지기에 들어선 것”이라고 우려했다.한 이단 전문가는 “‘신천지는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며 “낯선 이의 접근, 처음 접하는 MBTI, 상담, 모임에서 개인정보를 요구하거나 성경 공부를 언급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전했다.한국 천주교 유사종교대책위원회 위원장 이금재 신부는 “늘 새로운 신자 영입에 목메는 신천지가 특히 대학가 청년들에게 공격적으로 손을 뻗고 있다”며 “천주교 신자들은 세례와 견진성사로 이미 주님의 자녀로서 구원받은 존재라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 교회 공동체에 속해 말씀과 기도 안에 사는 것이 사이비와 이단을 물리칠 유일한 힘”이라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평화신문2023.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