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향, 고대 도시 막달라 발굴 현장에서…마리아 막달레나– 고대 막달라에서 얻은 통찰/ 제니퍼 리스틴 / 이창훈(알폰소) 옮김 / 성바오로 「마리아 막달레나 – 고대 막달라에서 얻은 통찰」은 고대 유다인의 도시 막달라와 1세기 유다인 마리아 막달레나를 둘러싼 전승을 깊이 있게 파헤친 글이다. 저자 제니퍼 리스틴은 갈릴래아 호수 서쪽에서 최근 발굴된 막달라 현장에서 2014년부터 일했다. 저자는 고고학·지리·역사에 대한 자신의 연구 조사와 막달라를 방문하는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받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대부분의 학자는 막달라가 예수님 시대에 경제적으로 번성했던 큰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살던 시기에 막달라는 이미 상업적 어업도시로 번성했을 뿐 아니라 동부 갈릴래아의 수도였다. (중략) 하지만 서기 67년 유다인 반란과 로마의 정복으로 그 영화는 끝이 났다. 이후 홍수가 막달라의 북쪽을 덮쳐 거의 2000년 동안 매몰되어 그대로 보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시의 남쪽에는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 그리고 오스만 제국 시대까지 비록 인구는 적었지만 계속 주민들이 있었다는 증거가 남아 있다.”(22쪽) 이 마을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도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향으로서 그 전통을 유지해왔고, 12세기부터 17세기까지 그리스도교 순례자들과 여행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집으로 알려진 아름다운 교회를 발견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이름은 복음서에서 11번 등장합니다. 일부 저자들은 원어 성경 본문이 막달라의(of) 마리아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 이름이 1세기 여성들이 흔히 그랬듯이, 아버지나 남편 이름이 아니라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결론짓습니다. (중략) 그녀가 상당한 세월을 막달라에서 보냈으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미 중년 이상의 나이에 독립적이고 부유한 여성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71쪽) 저자는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막달라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만남의 자리가 될 모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또 마리아 막달레나가 살았던 시대의 생활상부터 성경 구절, 그녀의 삶과 활동에 관해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다양한 이야기와 가설, 예술 작품에 나타난 묘사에 이르기까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관련해 제기된 모든 측면과 이론을 망라한다. 무엇보다 사실과 이론을 넘어 마리아 막달레나의 삶의 경험과 그녀가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를 조화롭게 연결해 오늘날에도 유효한 희망을 제시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인물 전체가 ‘베일에 싸여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인격에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메시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과 받아들임을 체험하고 싶은 깊은 욕구, 삶의 수고와 혼란에서 해방되고 싶은 열망, 주님을 만난 기쁨,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께서 우리를 차지하실 때 우리가 경험하는 굳건함, 우리 삶 전체에 예수님이 주시는 희망입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4.08.07

“현대의 동방박사 되자”… 아시아 교회, 새 복음화의 길 모색아시아주교회의연합(FABC)‘희망의 대순례’, 11월 27~30일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열려 11월 27~30일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열린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희망의 대순례’는 주님 부활 2000주년을 맞이하는 2033년을 준비하며, 아시아 지역 교회 간 만남과 친교를 바탕으로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FABC는 특히 시노드 정신을 토대로 기도와 대화, 문화적 교류를 이어가며, 아시아 전체 인구의 약 3%에 불과한 그리스도인들이 선교를 향한 새로운 희망을 되살리기를 바랐다. 나흘간 이어진 ‘희망의 대순례’ 주요 일정을 정리했다. 말레이시아 페낭=장현민 기자 memo@cpbc.co.kr 교황청 복음화부 첫 복음화와 신설 개별교회부서 장관 직무 대행 루이스 안토니오 고킴 타글레 추기경이 11월 27일 말레이시아 페낭 라이트 호텔에서 FABC 희망의 대순례 개막을 알리며 초에 불을 붙이고 있다. 2033년을 향해 아시아 사람들이 함께 걷는 ‘새로운 길’ “희망의 대순례 시작을 공식 선포합니다.” FABC ‘희망의 대순례’는 11월 27일 말레이시아 페낭 라이트 호텔에서 교황청 복음화부 첫 복음화와 신설 개별교회부서 장관 직무 대행 루이스 안토니오 고킴 타글레 추기경의 선포와 기조연설로 본격 여정의 막을 올렸다. FABC는 이 기간 아시아 교회 지도자들의 연설을 통해 아시아 교회가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나서기 위해 반드시 숙고해야 할 주제들을 참가자들이 묵상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타글레 추기경은 ‘새로운 희망의 순례자들로서 다른 길을 걸어가기’라는 주제 연설에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새로운 길’을 따라가는 우리 시대의 동방 박사가 되자”고 초대했다. 그는 “복음 속 동방 박사들은 눈부신 예루살렘이 아니라 겸손한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이는 열린 마음과 희망, 겸손한 자세로 순례에 나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헤로데는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고, 이는 겸손을 잃은 이가 결국 부패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덧붙였다. 이어 “겸손과 연대의 자세로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간 예수님의 길을 묵상하며, 우리도 ‘현대의 동방 박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레이시아 주교회의 의장 포훈셍(쿠칭대교구장) 대주교도 ‘아시아인으로서 함께 여정을 걸어가기’ 연설에서 “아시아의 복음적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시노달리타스를 바탕으로 모든 피조물,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젊은이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시아는 인구가 가장 많으면서 동시에 가난한 이들이 가장 많은 대륙이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30세 미만인 젊은 대륙이라는 점에서 교회가 이들을 향해 새롭게 헌신하고 대응할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포 대주교는 FABC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작성된 「방콕 문서」를 언급하며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종교·사회 현실을 포용하고 대화·연대·선교의 관점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상호 존중과 개방성, 겸손,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대화는 아시아 복음화의 가장 강력한 도구”라며 “복음 전파는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인정하고 이에 기반을 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FABC 부의장 파블로 비르질리오 다비드(필리핀 칼루칸교구장) 추기경은 11월 29일 ‘예수님의 이야기를 삶으로 실천하고 나누기’ 강연에서 “아시아 교회는 조화·연민·환대·회복력·희망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해온 교회”라며 “강제적 개종의 과거를 반성하고, 시노드 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환대하며 깊은 관계성을 지닌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자체로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2033년을 향해 나아가는 아시아 교회는 이주·빈곤·디지털 환경 변화·환경 문제·청년·여성·원주민 문제 등을 성령의 인도 아래 진지하게 바라보고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타글레 추기경이 11월 29일 말레이시아 페낭교구 성 안나 준대성전에서 FABC 추기경단과 미사를 공동 집전하고 있다 나흘간 이어진 대화와 경청…신앙인들에게 주어진 용기 이번 ‘희망의 대순례’ 현장은 강연뿐 아니라 순례자들이 매일 의견을 나누고 경청하는 ‘시노드 대화의 장’이었다. 특히 11월 28일에는 ‘아시아인으로서 함께 여정을 걸어가기’ 기조연설 이후 각 지역 교회 구성원들이 한 시간 동안 시노드 대화를 진행하며 의견을 교환했다. FABC는 테이블별 논의 내용을 요약해 공개하며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대화에 참여한 이들은 아시아 교회가 일치된 움직임 안에서 새로운 복음화와 깊은 신앙, 용기 있는 선교, 시노드적 친교를 실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룹별 시노드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공동체의 일치는 경청에서 시작되고, 경청은 참여로 이어지며, 결국 변화로 나아간다”면서 “가난한 이들, 이주민, 노인,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해 말뿐이 아닌 증언으로 복음화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희망의 대순례는 그리스도인이 소수인 지역 교회 신자·선교사들에게 큰 용기를 선사한 시간이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페낭교구 신자로 행사 준비에 참여한 제임스 조닉(52)씨는 “무슬림이 다수인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우리 손으로 준비한 행사에서 다른 지역 형제자매들과 대화할 수 있었던 점이 무척 자랑스럽다”며 “우리의 초대에 응해 먼 길을 와준 모든 이에게 무척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대교구 소속 크리스티나 조셉(43)씨는 “처음에는 큰 기대가 없었지만, 행사 규모와 분위기에 놀랐고, 많은 형제자매가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에 더욱 감동받았다”며 “더욱 힘을 얻어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뻐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사도직을 수행 중인 가타리나(가명) 수녀는 “세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은 인도네시아에서 믿음을 지키는 이들을 위해 여러 사람이 연대해 줘 큰 위로를 받았다”며 “이번 순례에서 얻은 용기로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겠다”고 밝혔다. 인도의 생활 성가 밴드 Rexband가 희망의 대순례 문화 프로그램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FABC 희망의 대순례 참가자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성체 조배를 하고 있다. 문화 교류 속 현대 복음화 과제 집중 탐구 ‘집중 토론’ 세션에서는 현대 사회 속 복음화의 다양한 과제를 논의했다. 11월 28일 토론에서는 △디지털 미디어와 인공지능 △청년 사목 △다원화 사회 속 그리스도인의 삶 △다종교 맥락 속 평화·화해·회복 탄력성 △「찬미받으소서」 관점의 통합 생태론 △교회의 시선에서 바라본 여성성 △시노달리타스 등이 논의됐다. 29일에는 △음악·디지털 혁신을 통한 창의적 복음화 △TV 시리즈의 복음화 활용 △젊은이 동반·양성 △일터 선교 △다문화·다종교 상황의 복음화 △교회의 성 정체성 시각 △‘선교 제자 양성’을 위한 새로운 가톨릭 도구 등을 주제로 토론했다. 희망의 대순례에 참가한 이들은 아시아 교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다시금 체험했다. 11월 28일 밤 열린 문화 프로그램은 인도네시아 대표단의 전통 무용 공연으로 시작됐다. 인도 대표단은 ‘평화·희생’ 등 교회 가르침을 담은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발리우드 스타일의 단체 공연을 펼쳐 박수를 받았다. 홍콩 대표단은 홍콩 출신 사제가 만든 노래를 합창하며 전날 화재로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일본·몽골 대표단은 전통 의상을 착용하고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했다. 인도 출신 생활성가 그룹 ‘렉스밴드(Rexband)’는 전례 때마다 인도 전통 음악을 가미한 공연을 선보여 경건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페낭 그리스도인 신앙의 중심, 성 안나 준대성전 순례 참가자들은 폐막을 하루 앞둔 11월 29일 페낭교구의 성지인 성 안나 준대성전을 순례하며 타글레 추기경 주례와 아시아 교회 추기경·주교·사제단 공동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했다. 이날 미사를 위해 성당을 찾은 순례자와 본당 신자 2200여 명은 말레이시아 전통 가옥 양식을 반영해 만든 성당에서 아시아의 평화와 복음화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1846년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옛 성당과 19세기 말 확장 공사를 거쳐 만들어진 새 성당이 공존하는 이곳은 오늘날까지 페낭교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순례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왔다. 타글레 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처럼 우리 모두를 기다려 주시고 동행해주고 계신다”며 “삶 속에서 혼란과 의심의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주님은 항상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의 두려움과 질문을 풀어주시고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순간에도 우리를 이끌어주고 계신다”고 전했다. 또 “부부는 물론 교사, 공동체 구성원 간에도 삶의 모든 부분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함께 길을 걸어간다는 믿음이 있기에 연대하고 2033년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것”이라며 “2033년은 분명 기념할 만한 때이지만, 이는 복음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교회 대표단 청년들이 11월 30일 FABC 희망의 대순례 행사장에서 말레이시아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국 청년 주솔비씨가 11월 28일 말레이시아 페낭 라이트 호텔에서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홍보하고 있다. FABC 희망의 대순례 기간에 설치된 2027 서울 WYD 홍보 부스. 2027 서울 WYD를 향한 관심과 기대 FABC ‘희망의 대순례’는 아시아 각 지역 교회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를 향해서도 얼마나 큰 기대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자리였다. 많은 청년 참가자들이 이번 행사에서 느낀 친교의 기쁨을 서울 WYD에서도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일본 대표로 참가한 하루토 오구치(19)씨는 “다른 나라 청년들과 대화하고 서로의 어려움을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이 큰 행복이었다”며 “서울 WYD에서 더 다양한 청년들을 만날 생각에 설렌다”고 말했다. 30년 전 마닐라 WYD에 참여했던 이들은 서울 WYD가 한국과 아시아 교회에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필리핀 대표단의 닝 리아레나스(51)씨는 “마닐라 WYD는 제 개인 신앙을 깊게 하면서 필리핀 교회 전체에도 큰 활력을 선사했다”며 “서울 WYD는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 청년에게 만남과 은총의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FABC 희망의 대순례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 한국 대표단은 아시아 신앙인들의 뜨거운 관심에 응답하며 서울 WYD를 적극 홍보했다. 한국 대표단은 부스를 설치해 교회 관계자와 청년들을 직접 만나며 WYD의 의미와 가치를 알렸다. 주솔비(라파엘라, 28, 인천교구 범박본당)씨는 “WYD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전 세계 청년이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하는 특별한 순례의 길”이라며 참여를 요청했다.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김동원 신부는 “아시아의 선교 비율이 약 3.4%에 불과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증언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서울 WYD는 아시아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고 복음화에 헌신하도록 문을 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추기경단도 서울 WYD가 아시아 교회 전체의 복음화에 활력을 불어넣는 대회가 되길 희망했다. FABC 의장 필리페 네리 페라오 추기경은 “서울 WYD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교회에 매우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라며 “전 세계 청년들이 모이는 자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스스로 주님 은총을 증언하는 이들이 되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페낭교구장 세바스티앙 프란시스 추기경도 “전 세계, 특히 한국과 중국·일본 교회는 출산율 감소로 청년 사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한·중·일 교회를 넘어 전 세계 모든 청년이 서울 WYD에서 희망의 빛을 만나고 이를 통해 새롭게 동기 부여를 받았으면 한다”고 기도했다. 장신호 주교(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장) 한국 교회를 대표해 FABC ‘희망의 대순례’에 참석한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장 장신호 주교는 이번 행사에 대해 “한국 교회에 대한 아시아 교회의 기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자리였다”고 밝혔다. 장 주교는 “FA BC는 2006년 치앙마이에서 열린 제1회 선교대회와 2023년 발표한 「방콕 문서」 등을 통해 1000~2000년기 유럽·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선교에 이어 3000년기에는 아시아 교회를 선교해야 한다는 투철한 선교 의식을 밝혀왔다”며 “현재 아시아 전체 복음화율은 3~4% 정도지만, 이를 장기적으로 최소 10%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게 아시아 교회의 잠정적 목표”라고 설명했다. 장 주교는 “각국에서 20~30명씩 대표단이 왔는데, 이들과 대화하며 시노드적 교회로의 전환이 더욱 체감됐다”고 말했다. 실제 이번 ‘희망의 대순례’ 내내 각국 추기경과 주교들은 참가한 평신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했다. 장 주교는 또 “동시에 2029년 혹은 2030년에 한국에서 아시아 선교대회를 개최하고, 한국 교회가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영적·인적·물적 도움을 전하는 주체로서 더욱 나누는 교회로 성장해주길 기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전했다. 장 주교는 아시아 교회와의 교류 활성화에 앞서 한국 교회가 마주한 시급한 과제로 언어 장벽 해소·복음화 질적 성장을 꼽았다. 장 주교는 “FABC, 아시아의 모든 교회와 교류하는 데 있어 언어 때문에 우리가 고립된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면서 “한국 교회 역시 아시아 교회의 꿈에 발맞춰 질적 성장을 위한 복음화 연구, ‘전 신자 성경 말씀 갖기 운동’ 등 내적 복음화 성장을 위한 노력을 계속 이어 나간다면 아시아 교회 전체 복음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말레이시아 페낭=장현민 기자 memo@cpbc.co.kr장현민2025.12.03

환자에게 위로와 용기, 치유의 은혜 주는 성사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38) 병자성사 사제가 병환 중에 있는 신자에게 병자성사를 베풀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DB 병자성사는 중병이나 노쇠의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죽을 위험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며, 주님의 뜻에 따라 치유의 은혜도 주는 성사입니다. 병자성사의 성경적 근거 초기 사도 공동체는 병자를 위해 봉사하는 특별한 의미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그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3) 병자성사의 대상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성인이 받는 성사입니다. 아직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나 태어날 때부터 심한 지적장애가 있어 세례 후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꼭 병자성사를 집전할 이유가 없습니다. 병으로 죽을 위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형수나 죽을 위험이 있는 군인은 이 성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앞둔 고령자는 이 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의 예식 병자성사는 사제가 집전합니다. 주요 예식은 병자의 이마와 양손에 성유를 바르고, 병자에게 필요한 은혜를 청하는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주소서. 아멘.” 예식 후 병자성사 대상자가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는 상태면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병자성사의 효과 병자성사를 합당하게 받으려면 먼저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 트리엔트 공의회를 인용하며 병자성사 효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이 성사는 성령의 은혜인 것으로서, 그 성령의 도유는 아직도 속죄해야 할 어떤 죄가 있다면 그 죄의 결과를 씻어주어, 병자의 영혼을 거뜬하게 해주며 견고하게 하여 그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를 일으켜 줌으로써 병자로 하여금 그 도움을 받아 병고와 고생스러움을 더 쉽게 참으며 영혼의 도움이 될 경우에는 육신의 건강까지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병자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해 그리스도인답게 병고를 이겨내고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또 치유의 은혜를 간구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더 큰 희망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병자 영성체(봉성체) 죽음의 위험에 있는 사람이나 거동할 수 없는 병자, 성당에 와서 미사에 참여해 성체를 모실 수 없는 처지의 그리스도인에게 사제가 공식적·사적으로 성체를 모셔가 영해주는 것입니다. 공복제를 지키지 않아도 되며 필요에 따라 여러 번 행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성당에 올 형편이 안 되는 환자는 미사 참여 의무가 면제되며, 고해성사할 것이 없으면 성사 없이 성체를 영할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는 원칙적으로 한 번밖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병자성사를 받은 다음 병이 완치돼 생활하다가 다른 병으로 또 위험을 겪을 때는 두 번, 세 번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병이라도 완치돼 건강을 회복해 생활하다가 재발했을 때 다시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박모란 교리교사 cpbc2025.02.12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월간 꿈 CUM] 명강론 명강의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집에서 움츠려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성경을 읽으면 어떨까요. 날이 추워 밖에 나가지 않을 때는 성경에 있는 먼지라도 털어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사제관에서 강아지 두 마리와 살고 있는데 ‘호두’와 ‘까기’입니다. 이 녀석들과 가끔 숨바꼭질할 때가 있는데, 내가 숨어서 ‘호두야~’ 하고 불러 나를 찾아보라고 하면 요 녀석은 멀뚱거리기만 합니다. 반면 ‘까기’ 이 녀석은 ‘까기야~’ 하고 부르면 어떻게든 나를 찾으려고 꼬리를 흔들고 왔다 갔다 하다가 기어코 나를 찾아냅니다. 하느님께서도 오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호두’ 강아지인가요? 아니면 ‘까기’ 강아지인가요. 아~ 개를 닮고 싶지 않다구요.(신자들 웃음) 호두가 나를 찾지 않고, 까기가 나를 찾는다고 해서, ‘호두’가 싫고, ‘까기’가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의젓한 ‘호두’와 에너지 넘치는 ‘까기’ 둘 다 사랑합니다. 각자의 예쁨이 있거든요. 우리도 하느님을 섬기는 방식은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참조)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근원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신자들 대답하지 않음) 답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신자들 웃음) 또 이웃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다른 사람 팔이 부러진 것보다, 내 손톱 밑에 가시가 더 아픈데, 과연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시간 및 숫자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일, 용서하는 일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하느님 사랑이 100%라면 우리의 사랑을 몇 %로 표기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완전한 이웃 사랑이 100%라면 우리의 사랑을 몇 %로 표기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호두와 까기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나를 따르고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도 나만이 갖는 고유한 하느님이 내려주신 능력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과연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정량화해서 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 표준은 없습니다. 만약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느님의 사랑의 절대적 표준이라면 우리 모두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가진 것 모두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살아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인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는 우리 각자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호두와 까기가 나에게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세상에 다양한 하느님의 선물이 있듯, 우리도 각자 독특하고 유일하고 또 특별한 존재로서 이 세상에 왔고 그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40년 전쯤 신학생 때의 일입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왔는데 한 신학생이 “와~!”라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제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노을을 봐. 정말 예쁘지 않아?” 그래서 제가 노을을 봤는데, 그냥 늘 바라보았던 평범한 노을이었습니다. “저 노을은 어제도 있었어.” 그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어제랑은 다르지. 오늘 노을은 유난히 예뻐.” 이후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웬만한 꽃만 봐도 “와~!”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만 봐도 “와~!” 그렇게 연습을 하다 보니 제 마음이 약간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꾸는 일은 어쩌면 작은 일을 반복해서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말을 하는 것, 좋은 생각을 하는 것, 좋은 표정을 짓는 것. 이런 것으로부터 이웃 사랑이 시작하고, 하느님 사랑이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요. 가난한 이들에게 전 재산을 나눠주는 것. 매일 10시간 넘게 기도에 매달리는 것.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의 몫은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가장 작은 것부터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그릇 안에서 작은 것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입니다. 지금이 하느님을 사랑할 때입니다. 지금이 이웃을 사랑할 때입니다. 아멘. *이용삼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시려면 유튜브 검색창에서 ‘이용삼 Joseph 신부’를 검색하면 됩니다. 글 _ 이용삼 신부 (요셉, 수원교구 백암본당 주임)cpbc2024.11.05

엔터 업계서 일했던 사제와 평신도… 인문학 강의 함께 만든다 본당 청년회서 만나 20년 이어온 우정...청주교구 이선찬 신부와 레드헤더 윤이섬 대표 20년 우정을 자랑하는 윤이섬 대표와 이선찬 신부. 박민규 기자 삶의 가치와 희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문화예술 콘텐츠가 담긴 새로운 앱이 오는 5월 공개될 예정이다. 관련 서비스가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두 베드로의 20년 우정에서 시작됐다면 어떨까. 음반 제작사 대표였던 이 신부… 친구 따라 전업한 윤 대표 레드헤더 윤이섬 대표와 청주교구 이선찬 신부 이야기다. 동갑인 두 사람의 세례명은 모두 베드로. 20대에 의정부교구 백석동본당 청년회에서 만나 지금껏 남다른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에게는 이색적인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화려하고 상업적인 분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저는 원래 건축 설계를 했는데 같이 엔터 일을 하자고 하더니, 갑자기 신학대에 가더라고요.”(윤 대표) 친구를 업계에 발 들이게 한 뒤 홀연히 떠난 이 신부는 사제가 되기 전 휘성·빅마마·거미 등의 음반을 제작했다. 단순히 제작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제작사 대표로 진두지휘했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해 다수의 광고와 영화도 만들었다. 성직자가 되기 전 다른 전공 및 사회 경험이 있는 사제가 많지만, 특이하기로는 손에 꼽힌다. “엔터 쪽 일을 8년 정도 했어요. 그래선지 청주교구에서 박물관도 만들고 관장도 했네요. 아무래도 너무 자극적인 세계에 염증을 느낀 것 같아요. 그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예술가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예술가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천사다’라는 말씀이 와닿았어요. 신학교에 간 결정적인 계기였죠. 카리타스에서 운영하는 청주지역자활센터에서도 사목하고 있는데, 그분들을 돕기 위한 인문학 강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 대장간·놀이터 등의 개념으로 문화예술을 통한 치유와 연대 프로그램을 활용해왔는데, 부족한 부분도 있고 지속적으로 제공되는 동영상 콘텐츠의 필요성을 느꼈거든요.”(이 신부) 윤 대표 제작·운영, 이 신부 기획 맡아 그렇게 두 베드로는 일터에서 다시 만났다. 최근 윤 대표가 차린 레드헤더라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통해 세상의 빛과 희망이 될 수 있는 콘텐츠를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현재 문학·미술·음악·의학 등 각계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협약 및 계약을 맺고 있는 레드헤더는 사업의 한 부문으로 인문학 강연을 진행할 예정이다. 특히 온라인 구독이 가능한 월간 잡지 형태의 동영상 콘텐츠를 제작해 누구나, 어디에서나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모든 제작 및 운영은 윤 대표가 맡는다. 하지만 기획은 이 신부의 몫이다. 종교색을 드러내지는 않을 방침이다. 살포시 녹여낸다고 할까. 예를 들어 월간 주제는 전례력에 맞추지만, 신앙인 여부를 떠나 누구나 그 가치와 의미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키워드를 제시하고 각 분야 전문가가 저마다의 경험과 지혜로 내용을 채워갈 계획이다. 과거 제작자의 마음으로 기획하되 사제로서의 영성을 담는 셈이다. “‘인문학은 사람이 어딜 향해 걸어가야 하고,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생각하게 하잖아요. 교회 역사 안에서 담아낸 고대 그리스 철학이 결국 르네상스로 연결되기도 했고, 비그리스도인에게 전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문화예술이기도 하고요. 제작된 콘텐츠를 교회 쪽에 가져와서 성경이나 전례적인 설명을 더해 활용하려고도 합니다.”(이 신부) “미혼인데 ‘친구 따라 신학대도 갈걸 그랬나’ 생각해요.(웃음) 아직까지 저와는 달리 순수함이 있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거든요. 레드헤더가 ‘붉은 야생화’인데 ‘평범한 일상에 특별함을 더하자’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이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한 만큼 좀더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싶고, 교회에도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두 베드로가 신앙과 우정을 버무려 짓는 ‘문화 놀이터’가 교회 안팎에 가치 있는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5.03.12

마리아 공경은 인간에게 바치는 최고의 공경[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15)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교회래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으로 물을 술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셨다. 카나의 혼인 잔치를 묘사한 스테인드 글라스. OSV “어떤 학생이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교회라던데 맞나요?’라고 질문하더라고요. 명확하게 알려주고 싶은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교리교사 회합을 하다 보면 ‘학생들이 성모 마리아에 관해 물어볼 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는 이야기가 가끔 나옵니다. 실은 저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숙제를 풀어보겠다고 신부님들에게 여러 번 질문하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또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은 몇 번이나 책을 읽으며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마침내 ‘믿을 교리’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이번에는 가톨릭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공경하는 이유와 그 의미를 하나하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속의 마리아 가톨릭 신앙은 구원의 중심 사건인 강생(신이 인간으로 태어남)의 신비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 역사 안에 들어오셨음을 기본 진리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였습니다.”(갈라 4,4) 가톨릭교회 밖에서는 마리아 교리와 신심·공경을 미신적 행위 또는 우상숭배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인류구원 사건인 하느님 아들 강생의 신비에서 마리아가 전인적(지성·감정 의지를 균형 있게 갖춰 원만한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참여해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마리아를 특별히 공경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당신 어머니의 요청으로 물을 술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신 사건(요한 2,1-8)은 마리아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예수께 인간의 문제점을 대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도록 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바로 어머니의 부탁으로 첫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집니다. 이러한 성경 속 사실에서 우리는 마리아를 통한 기도의 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셨지만, 하느님은 아닙니다. 따라서 마리아 공경은 ‘인간에게 바치는 최고의 공경’입니다. 마리아 공경의 배경 인류 구원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성자의 강생을 위해, 즉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는 한 분의 어머니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라는 여인이 등장했고, 인류 구원에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후손인 인간의 죄를 씻겨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구원 현장에 나타나셨습니다. 구원 사업을 통해 아담의 ‘원죄 나무’ 대신 그리스도의 ‘십자 나무’가 심어졌고, 하와의 ‘불순명‘의 매듭은 마리아의 ‘순명’으로 풀어졌습니다. 곧 마리아는 인류구원 사업에 꼭 필요했던 협력자였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모진 고난에서 벗어난(이집트 탈출) 이스라엘 백성은 날이 갈수록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교훈을 잊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예언자를 파견해 그 민족들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당신 축복의 약속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예언자 중 이사야가 기원전 700년경 최초로 동정 마리아에 대해 예언했습니다.(이사 7,14) 그리고 예언대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태어난 마리아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처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cpbc2024.08.28

예수님과 생활한 열두 사도의 특별함[저는 믿나이다] (23) 열두 사도의 차별성 복음서가 증언하듯이 예수님께서 친히 뽑으신 사도는 모두 열둘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반석이 되어라 하여 ‘베드로’라고 이름을 바꿔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두 명의 야고보를 구별하기 위해 제베대오의 아들을 대(大)야고보, 알패오의 아들을 소(小)야고보라 부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유다의 빈자리는 마티아 사도가 선택돼 채웁니다.(사도 1,15-26) 신약 성경은 이들 열두 사도 외에도 바오로와 바르나바,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와 안드로니코스, 유니아 등을 사도라 부릅니다.(1코린 9,6; 갈라 1,19; 로마 16,7) 이들은 예수님이 직접 뽑은 사도들이 아닌데 어떻게 교회 안에서 사도로 불릴 수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은 주님 부르심을 받고 복음 선포 사명을 띠고 파견된 자들이어서 사도라 불렸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증언에서 사도직의 정당성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부르심을 받고 사도로 파견됐다는 점을 강조합니다.(로마 1,1; 1코린 1,1; 갈라 1,1) 바오로는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을 사람에게서, 곧 교회 전승을 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직접 받았다고 강조합니다.(갈라 1,11-16) 그리고 자신의 사도직 활동 중심에는 하느님의 행위가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바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나의 업적이 아닙니까? 내가 다른 이들에게는 사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사도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 사도직의 증표입니다.”(1코린 9,1-2) 바르나바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 사도들에 의해 안티오키아로 파견됩니다.(사도 15,22-35) 그런데 ‘사도’라 할 때 흔히 열두 사도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뽑으신 이들이 대표성을 지닌 사도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 온다. 교회는 든든한 기초, 곧 어린양의 열두 사도 위에 세워졌으며, 무너질 수 없다. 교회는 진리 안에 확고하게 서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후계자인 교황과 주교단 안에 현존하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69) 열두 사도의 대표성·차별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첫째, 이미 지난호에 설명했지만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사도들이라는 점입니다. 마르코·마태오·루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기도한 다음 사도들을 뽑았다고 합니다. 곧 사도 선별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시던 기도 중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마음에 든다고 무턱대고 뽑은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열두 제자의 부르심은 단순히 기능분담이라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철저하게 신론적 의미를 띠게 된다. 그들의 부르심은 아드님이 아버지와 나눈 대화에서 나온 것이고 거기에 뿌리내리고 있다.”(베네딕토 16세 교황,「나자렛 예수 1」 261쪽)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가르침대로, 열두 사도의 부르심은 예수님께서 당신 의지로 결정한 선택이었지만, 이 결정은 기도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일치된 대화의 결과였습니다. 곧 열두 사도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치된 결정으로 선택된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차별성과 대표성이 있겠습니까! 두 번째 차별성은 열두 사도는 늘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주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이심을 배워 그리스도의 신비와 하느님 나라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양성되었습니다. 사도들도 자신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 것이 사도성의 중요한 요소임을 자각했습니다. 비록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예수님과 열두 사도는 하느님 나라의 친교에 뿌리를 둔 새로운 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유다 이스카리옷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마티아 사도를 선출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족이 된 결속력이 복음 선포를 위한 파견의 원동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존재 전체가 파견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차별성은 열두 사도는 땅 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받고 파견된 이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치유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미 밝힌 대로 사도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주님 부활을 증언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이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도록 선한 권능으로 하느님 표징을 드러냅니다. 사도들은 주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족이 되었듯이, 그들도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모아 하느님의 새 백성, 교회를 이룹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04.16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 - 희년 선포](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1/21/FSy1737440366227.jpg)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 - 희년 선포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12월 24일 2025년 희년을 맞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년 문을 개방하고 있다. OSV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61,1-2)이 적힌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 말씀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하시며 ‘영적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희년’은 레위기(25,8-10) 규정대로 안식년(7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째 되는 해입니다. 희년은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해입니다. 희년이 되면 자신들이 속한 지파의 땅으로 돌아가야 했고, 농사짓던 땅은 조상 때부터 상속되어 오던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게 했습니다. 빚이 있으면 서로 탕감해줬고, 유다인 노예들은 모두 해방시켰습니다. 부자들은 다시 평범해졌고, 가난한 이들은 땅과 가족을 되찾아 새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부의 세습과 가난의 대물림을 막고, 평등한 세상을 주님의 이름으로 경험하게 한 것이 ‘희년’입니다. 실로 엄청난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누구이시며(신원)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는지(사명)를 알려주시며,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한 영적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25년 올해를 정기 희년(2024년 12월 24일~2026년 1월 6일)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정기 희년을 반포하는 칙서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의 순례자’가 되라고 요청하시며, 하느님 자비의 무한함을 발견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희년 대사를 얻고 영적으로 풍성해지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이 뜻깊은 은총의 해를 잘 지내야 하겠습니다. 교우들과의 신앙상담 중에 “신부님, 기도가 안 됩니다” “신부님,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면 저는 다시 질문합니다. “형제님, 기도를 얼마나 하십니까?” “자매님, 믿음이 깊어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십니까?” 대부분 쉽고 편안하면서도 후한 신앙의 결과를 바라곤 합니다. 그러면 저는 아주 단순한 답변을 합니다. “더 많이 기도하십시오”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더 노력하십시오.” 신앙적으로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 해결될 문제입니다. 그런데 교우들 중에는 신앙이 무슨 비법이나 편법을 통해 마술처럼 바뀌기를 바라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세상 일에서 잘되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보다도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성생활에서는 제자리를 유지하는 것을 영적 퇴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나아가지 않으면 뒷걸음인 것이지요. 그런데 유혹자는 곁에서 그만하면 되었다고, 이만큼만 하면 충분하다고 속삭입니다. 주님께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놓고 주시고자 하는데, 유혹과 분심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방해하곤 합니다. 희년에는 하느님 자비와 은총이 더 풍부히 내려집니다. 희년에는 지나간 것은 묻지 않을 터이니, 새롭게 다시 출발하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거룩한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 자비와 평화를 실천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주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졌지만, 아직 모두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닙니다. 은총의 해 희년에 교황님 권고에 따라 우리 모두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갑시다. 그리고 희망의 순례자가 됩시다. 이계철 신부cpbc2025.01.21

성사적 은총 속에 서로를 구원으로 이끄는 혼인[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36) 혼인성사 혼인은 부부의 계약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사’로 만든 것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루는 혼인은 성사가 되므로, 이들의 혼인 생활은 성사생활입니다. 혼인 생활을 시작한 부부는 더는 인간적인 사랑이 아닌, 성사적 은총을 가진 초자연적 사랑을 나눕니다. 이는 서로 상대방을 구원할 수 있는 지극히 은혜로운 사랑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①혼인성사의 성경적 근거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8-9)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1-33) ② 혼인의 본질적 특성(교회법 제1056조) 단일성 : 하느님 뜻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혼인, 곧 일부일처제에 있으며 남녀 동일한 품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불가 해소성 :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혼인은 부부 사이 영속적인 성격을 띠며 죽음 이외에는 결코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③ 혼인의 목적 사랑이신 하느님을 원천으로 하는 부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부부행위의 인격적이며 실제적인 나눔을 통하여 일치로 표현됩니다. 일치는 그 결실이요 열매인 출산으로 이어집니다. ④ 유효한 혼인 형태 적법적 혼인 : 비영세자 남녀 사이 국가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유효하게 맺은 혼인입니다. 자연적 혼인(관면 혼인) : 가톨릭 신자는 신자가 아닌 사람과는 원칙적으로 혼인하지 못합니다. 다만 한국처럼 외교인(믿지 않은 사람)이 많은 나라에서는 두 가지 조건만 있으면 할 수 있는데, 이를 관면 혼인이라고 합니다. 영세자와 비영세자 남녀 사이 적법적 혼인으로, 교회법에 따라 교회 관할권자로부터 필요한 관면을 받은 것입니다. 성사적 혼인 : 영세자 남녀 사이에 합법적으로 유효하게 맺은 혼인으로, 유효한 자격과 함께 혼인 합의가 있어야 하며 교회법적 형식도 갖춰야 합니다. ⑤ 무효장애(조당) 혼인을 유효하게 맺을 수 없는 무자격자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법에 의한 장애와 교회법상의 장애가 있습니다. 전자는 관면될 수 없으나, 후자는 사도좌 또는 권한이 있는 교구 직권자나 사제에 의해 관면될 수 있습니다. 연령장애 : 교회법상 남자 만 16세, 여자 만 14세 이전 혼인은 무효입니다. 성교불능 장애 : 정상적인 방법으로 육체적인 성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장애로, 관면되지 못합니다. 혼인 유대 장애 : 합법적인 혼인을 하면 혼인 유대가 존속하는 한, 두 번째 혼인할 수 없습니다. 미신자 장애 : 신자가 세례받지 않은 사람과 혼인하는 경우 적용되는 교회법상 무효 장애입니다. 단, 본인의 신앙이나 자녀의 종교 교육이 보장될 경우 관면될 수 있습니다. 성품 장애 : 성품은 주교품·사제품·부제품을 말하며, 유효한 혼인을 할 수 없습니다. 관면이 사도좌에 유보된 장애로 교황만이 관면할 수 있습니다. 수도 종신 서원 장애 : 수도회에서 공적 종신 정결 서원을 한 사람은 유효하게 혼인할 수 없습니다. 관면이 사도좌에 유보돼 있으며, 교구 설립 수도회는 교구장 주교가 관면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유괴 장애·범죄 장애·혈족 장애·인척 장애·내연 관계의 장애·양자 관계의 장애 등이 있습니다. 혼인 공시 : 남녀가 혼인하기 전에 그들의 성명과 주소·부모의 성명을 기록한 ‘혼인 공시’를 성당 게시판에 붙이고, 누구든지 이들이 합법적으로 혼인할 수 없는 혼인 장애(조당)가 있음을 알면 본당 사제에게 통보하라고 알리는 것을 말합니다. 박모란 교리교사cpbc2025.01.21

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 한반도 분단 80년 특별 사목 서한 발표 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김주영 주교)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기념하며 ‘한반도 분단 80년 특별 사목 서한’을 발표하고, 분단된 한반도에 참평화가 이뤄지기를 희망했다. 민족화해주교특별위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시편 34[33],15)는 주제의 특별 사목 서한에서 △북한 동포들을 한 형제자매로 존중하고 △북한과 호혜적 협력에 기반을 둔 교류에 적극 나서기를 지지하고 함께하며 △남북이 ‘공동의 집’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모든 이와 연대하며 함께 걸어갈 것을 다짐했다. 민족화해주교특별위는 서한에서 “2025년 희년에 분단 80년을 맞이한 것은 한국 교회에 큰 의미로 다가온다”면서 불의를 바로잡고 공동체 정의와 화해를 이루는 해인 희년의 의미를 일깨웠다. 그러면서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2025년 희년 주제도 우리가 하느님 사랑과 은총 안에서 희망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며 80년간 이어진 한반도 분단 상황에서 희망의 순례자로서 다시 희망을 품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족화해주교특별위는 서한을 통해 해방 직후 한반도가 강대국 편의에 따라 갈라지고, 한국 전쟁으로 분단이 굳어진 역사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더불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제정, 민족화해위원회 설립, 북한 주민 지원과 대북 교류, 북향민 돌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연구와 교육 등 분단 상황 속에서 가톨릭교회가 걸어온 평화의 길을 소개했다. 민족화해주교특별위는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불편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다”며 “교회는 이를 해소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을 당부했다. 이와 함께 “불신과 미움 속에서 무기와 군사력을 방패 삼아 상대를 굴복시켜 얻는 평화는 참평화가 아니다”며 “우리 교회가 전하는 평화는 효율성과 합리성을 넘어서고 무기와 돈의 힘도 뛰어 넘는다”고 설명했다. 또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분단의 고통이 하느님의 은총과 한국 교회 수호자이신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치유되고 참평화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간절히 기도한다”고 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한반도 분단 80년 특별 사목 서한<전문>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시편 34[33],15) 우리 민족은 35년 동안 일제 강점기라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낸 끝에 하느님의 섭리와 성모님의 보호로 마침내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해방의 기쁨은 그리 길지 않았으며 바로 분단되어 그 고통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분단과 우리의 갈라진 마음 1945년 8월,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반도는 강대국의 편의에 따라 분할되었고, 1948년에는 남한과 북한에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분단되었습니다. 그 뒤 3년 동안 벌어진 한국 전쟁으로 한반도의 분단은 물리적으로 고착되었습니다. 한 민족으로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죽고 죽인 이 역사적 경험은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후 남북 관계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990년대부터 시도한 남북 사이의 대화와 협력은 진전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북이 함께 만든 ‘보습과 낫’으로 제대로 곡식을 일구기도 전에 한반도는 또다시 대치 상황에 놓였습니다. 분단 80년의 역사에서 남과 북은 서로 적대감을 품기도 하였고, 평화를 염원하며 분단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지속되는 분단 현실로 말미암아 우리 안의 상처는 온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단의 고착화에서 교회가 걸어온 평화의 길 해방 이후 교회도 분단의 슬픔과 전쟁의 아픔을 함께 겪었고, 그 상처를 이겨 내려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65년부터 6월 25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제정하여 우리 민족의 아픔을 하느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청하고 북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해 왔습니다. 이 기도의 날은 1992년부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구마다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경제난과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 주민들을 여러 방면으로 지원하고, 대화를 통한 교류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99년에 ‘북한선교위원회’를 ‘민족화해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민족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평화를 위한 더욱 폭넓은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2000년 이후에는 여러 수도회와 교구를 중심으로 남한 사회에 정착한 북향민을 돌보는 활동을 활발히 하였고,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다양한 연구와 교육을 통해서 교회 안팎으로 평화의 목소리를 키워 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불편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교회는 이를 해소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불신과 미움 속에서 무기와 군사력을 방패 삼아 상대를 굴복시켜 얻은 평화는 참평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교회는 당신 자신을 바치시어 참된 평화를 이룩하신 그리스도를 닮아 다음 세대에게 평화의 나라를 물려주고자 지금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한반도 ‘공동의 집’을 향한 희망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위기에 놓인 지구를 인류 ‘공동의 집’이라고 일컬으시고 이 ‘공동의 집’을 함께 지켜 나가자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반도도 남북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의 집’입니다. 그러나 80년 전에도 그러하였듯이 한반도 분단이 불러온 증오와 적대감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25년 희년에 분단 80년을 맞이한 것은 한국 교회에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희년은 빚을 탕감하고 노예를 해방하듯이(신명 15,1.12 참조), 불의를 바로잡고 공동체의 정의와 화해를 이루는 해를 뜻합니다.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2025년 희년의 주제도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희망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라는 말씀은 세상의 이해관계와 논리에서 가능하지 않을 일들이 하느님의 뜻 아래에서는 가능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80년 동안 이어진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 절망도 하지만, 희망의 순례자로서 다시 희망을 품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다음과 같은 희망을 선포하고 그 길을 걸어갈 것을 다짐합니다. 첫째, 서로 다른 문화와 사상을 가진 이들도 형제자매로 서로 존중하듯이 우리도 북한 동포들을 한 형제자매로 존중하겠습니다. 둘째, 북한과 호혜적인 협력에 기반을 둔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지지하며 함께하겠습니다. 셋째, 교회는 남북이 ‘공동의 집’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모든 이와 더욱 연대하고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세상에는 평화를 외치는 이도 많고, 자신의 방법만이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키고 바라는 평화는 세상의 것과 같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전하는 평화는 효율성과 합리성을 넘어서고 무기와 돈의 힘도 뛰어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분단 80년을 맞아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특히 한반도에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고 또 추구”(시편 34[33],15)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분단의 고통이 하느님의 은총과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신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치유되고 참평화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2025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김 주 영 주교 위원 조 환 길 대주교 옥 현 진 대주교 정 순 택 대주교 손 희 송 주 교 박 현 동 아빠스 박수정2025.08.07

예수님의 믿음직한 제자들, 야고보와 요한[저는 믿나이다] (26) 야고보와 요한 사도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사도들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들을 ‘교회의 기둥들’이라고 불렀다. 루벤스 작 ‘야고보 사도’(왼쪽) ‘요한 사도’, 1612년/1611년, 스페인 프라도미술관. 야고보와 요한 사도는 베드로·안드레아와 함께 예수님의 첫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어머니 살로메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입니다.(마태 27,56; 마르 15,40; 16,1 참조) 그들은 베드로·안드레아와 함께 고기잡이하던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로 삼기 위해 찾아갔을 때 그들은 아버지와 삯꾼들과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마태 4,18-22; 마르 1,16-20) 아버지가 삯꾼을 부릴 정도이고, 어머니가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지방 일대를 따라다닌 것(마태 27,55-56)으로 보아 처가에 얹혀 살던 베드로에 비해 경제적으로 집안 형편은 더 나은 듯합니다. 살로메는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아주 현실적인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라고 거침없이 청탁했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신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주십니다.(마르 3,17) 우리말로 ‘천둥의 아들들’이란 뜻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이름을 그들의 격정적인 기질을 드러낸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실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 사마리아인들이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는 과격한 말을 내뱉을 만큼 성격이 불같았습니다.(루카 9,51-56)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타볼산에서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것을 목격한 제자입니다.(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 또 주님께서 수난 전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마태 26,36-46; 마르 14,32-42; 루카 22,39-46),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마르 5,35-43) 이들 셋만 따로 데려가셨지요. 이처럼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가장 믿음직한 제자였을 뿐 아니라 가장 사랑받은 제자였습니다. 대 야고보 형인 야고보는 주님의 사도 가운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 ‘대(大) 야고보’라 부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함께 있었습니다.(요한 21,2) 또 그는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의 이층 다락방에서 사도들과 함께 성령이 오시길 기도하며 생활했습니다. 그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할 마티아를 사도로 뽑는 데 있었으며,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사도 1─2장) 그는 스테파노의 순교를 시작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할 때에도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사도 8,1-2) 그는 유다인의 환심을 사려고 교회를 박해했던 헤로데 아그리파 1세 임금에 의해 44년께 순교합니다.(사도 12,2)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 그리고 스페인에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다 유다 지방으로 돌아왔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시신은 그의 제자들이 스페인 서북부 지방 들판에 매장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무덤이 무슬림들의 침입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9세기 무렵 별빛이 쏟아지는 들판의 한 동굴에서 발견됐고, 그 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입니다. 요한 요한 사도는 베드로·안드레아·형 야고보와 함께 언제나 첫 자리를 차지합니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시몬과 야고보에 이어 세 번째(마르 3,17)로,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서는 베드로·안드레아·야고보에 이어 네 번째(마태 10,2; 루카 6,14)로 나옵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 다음으로 요한이 언급됩니다.(사도 1,13) 이는 요한이 열두 사도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을 잘 드러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총애를 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지시에 따라 베드로와 함께 파스카 음식을 준비했고(루카 22,8),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마지막 만찬을 했습니다.(요한 13,23; 21,20) 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십니다.(요한 19,27) 아울러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고(요한 20,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 나타나셨을 때 가장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알려줬습니다.(요한 21,7) 요한은 형 야고보와 달리 겸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단 한 번도 ‘요한’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아울러 요한이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확신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성령 강림 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교회 지도자로 전면 등장합니다. 그는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불구자를 고쳐주고(사도 3,1-10), 최고의회에서 담대한 설교로 복음을 전합니다.(사도 4,1-22) 이에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와 야고보·요한 사도를 “교회의 기둥”(갈라 2,9)이라고 인정합니다. 요한 사도는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 중에 묵시록을 썼고(묵시 1,9), 유배에서 풀려난 후 에페소에서 성모님을 모시고 살다가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인 100년께 선종했다고 합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05.07

명작보다 성화 복원할 때 가톨릭 신자로서 더 큰 보람[김주삼의 복원, 미술의 시간을 되돌리다] (23·끝) ‘성 김대건 신부’ 초상화 장발 화백이 그린 성 김대건 신부 초상화. 수원교구 제공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한국 교회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많은 화가가 성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중 최초의 초상화는 장발(루도비코) 화백이 19살이던 1920년에 그린 두 점으로 알려져 있다. 한 점은 가톨릭대학교 전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다른 한 점은 그간 행방이 묘연했다. 그러다 2022년 한 교우가 수원교구에 기증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따르면 이 작품은 장발 화백이 1920년 5월 용산신학교 교장 기낭 신부의 은경축을 기념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양반 복장을 하고 오른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품은 모습이다. 그런데 기사에 실린 초상화를 보는 순간 직업상 작품의 상태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십수 년 전에 본 적이 있는 작품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작품은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는데, 마치 수류탄이나 포탄의 비산된 파편 때문인 듯했다. 과거 이 작품을 보여주신 여성분은 주위로부터 가짜라고 의심받는 것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에서 의뢰해 필자가 복원을 마친 성 김대건 신부 초상화.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다른 김대건 신부 초상화와 조우하게 되었다. 원효로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이 사적(史跡)으로 지정되어 보수 공사가 진행되는 시점이었는데, 성당에 걸려 있던 ‘김대건 신부 초상화’와 ‘유대철 치명도’에 대한 복원 의뢰가 들어왔다. 장발 선생의 작품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으나, 사전조사 과정에서 장발 선생의 필치와는 전혀 달라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과연 누가 이 그림을 그렸는지 의문이 생겼다. 수소문 끝에 한국전쟁 당시 성당이 폭격을 당해 장발 화백이 그린 ‘김대건 신부 초상화’도 심하게 손상됐고, 이후 성심여중고에 근무하셨던 한 미술교사가 원본을 토대로 새로 그린 작품이 성당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분이 그린 초상화는 재작년 수원교구에 기증된 장발 선생의 원작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기법적인 차이뿐만이 아니었다. 무궁화와 백합꽃을 그려넣었고, 작품 하단에 김대건 신부의 순교 연도와 시복 연도를 추가했다. 물론 이 작품도 오랜 세월로 인한 손상이 있어 정성스레 복원했던 기억이 있다. 지난 6개월 동안 미술품 복원에 대한 이야기를 썼는데, 의사가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 생명 연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복원가들은 사고나 노화에 의해 훼손된 작품을 되살리는 일을 한다. 피카소·샤갈·박수근·이중섭 등의 걸작을 직접 냄새 맡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부수적 즐거움과 작가 외에는 모르는 작품의 비밀을 캐내는 재미가 짜릿하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로서 가장 큰 보람은 명작보다는 성화를 복원할 때 느낀다. 미천한 재주이지만 교회를 위해 봉사할 일이 아직 많이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cpbc2024.12.18

주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 정복하고 정착[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33) 여호수아기 여호수아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 이야기 일부를 전해준다. 여호수아는 시나이 산에서는 모세의 시종을 들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 그의 공식 후계자가 된다. ‘십계명을 받는 모세’, 그랑드발 필사본 성경 삽화, 840년, 대영박물관, 런던. 여호수아기는 구약 성경에서 모세 오경 바로 다음에 나오며, 역사서 가운데 첫 번째 작품입니다. 여호수아기의 히브리어 성경 명칭은 ‘예호슈아’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고 들어간 영도자의 이름이며 우리말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성경인 「칠십인역」도 ‘Ιησουs’(이에수스)로,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도 ‘Josue’로 표기합니다. 여호수아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 이야기 일부를 전해줍니다. 이 이야기는 기원전 1250년부터 1225년까지 가나안 지역에서 일어난 이스라엘의 전쟁과 그 후 정복한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팔레스티나 지역 초기 거주민들은 ‘아모리인’과 ‘가나안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모리족은 산악 지방의 사람들, 가나안족은 평야 지대의 사람들을 일컫습니다.(민수 13,29; 신명 1,7 참조) 특히 가나안 사람들은 비록 기원전 13세기에 몰락하지만, 반유목민이던 히브리인들보다 훨씬 우월한 문명과 문화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읍에 요새와 수로, 배수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도시국가를 이루고 살았는데 여호수아기는 그 지도자들을 ‘임금’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여호10,1-5 참조) 이스라엘의 새 영도자 여호수아는 이미 모세 오경에 등장합니다. 그는 아말렉족과 싸운 지휘관(탈출 17장)이자, 시나이 산에서는 모세의 시종(탈출 24,13; 32,17)을 들었으며, 약속된 땅을 정탐하기 위해 임명된 정탐대원 가운데 한 명이었다.(민수 13,1-16)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됐고(민수 27,18), 그의 공식 후계자가 됩니다.(신명 31,23) 여호수아기는 신명기에 묘사된 마지막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신명 34장 1-9절은 모세의 죽음과 여호수아의 계승을 기록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기는 신명기 마지막 장면, 곧 이스라엘 군대가 죽은 모세를 애도하는 기간이 끝나고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하기 전 모압 평야에 진을 친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여호수아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가나안 정복(1─12장), 둘째, 12지파들에게 약속된 땅 분배(13─21장), 셋째, 요르단 동쪽 지파들을 돌려보낸 후 여호수아의 유언과 죽음(22─24장)입니다. 첫째 부분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예리코 지역을 정탐한 후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을 건넙니다. 길갈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그곳에 12개의 돌로 기념비를 쌓고 가나안 땅에서 맞는 첫 번째 과월절을 지냅니다. 이후 예리코 점령을 시작으로 가나안 땅 중앙, 남부, 북부 지역을 차례로 점령해 나갑니다. 둘째 부분은 가나안 땅 분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12지파별로 땅을 나눠줍니다. 그 밖에도 도피 성읍들을 정해주고, 레위인들을 위해 각 지파가 소유한 48개 성읍을 떼어줍니다. 셋째 부분은 요르단 동쪽 지파들이 돌아간 이야기와 여호수아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호수아기의 핵심 내용은 1장 6-7절에 집중돼 있습니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줄 사람은 바로 너다. 오직 너는 더욱더 힘과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율법을 명심하여 실천하고,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여호 1,6-7) 여호수아기는 신명기 7장처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느님께서 내리신 명령에 순종해야 함을 강조합니다.(여호 1,6─9. 16; 24,16-26 참조) 여호수아기는 하느님께서 몸소 가나안 땅을 정복하시고, 이스라엘에 이 땅을 주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나안을 정복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이 땅을 나눠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선조들과 맺으시고 모세를 통해 새롭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여호 1,3.6.11; 23,5.14)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신 까닭은 주님께서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약속의 땅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눈에 보이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도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해야 할 의무가 뒤따릅니다.(여호 1,6-9; 8,32-35; 11,15) 신약 성경 저자들과 초대 교회 교부들은 여호수아기를 신약 시대의 예표로 종종 인용하였습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예수’의 예표이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된 것을 유다교의 율법을 이어 주님의 복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또 요르단 강을 건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을 세례를 통해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으로, 예리코 성의 함락을 사탄의 세력이 무너지는 것으로, 이방인 라합의 가족이 구원받게 된 것을 교회가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구원의 새 백성이 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김정훈 신부, 「역사서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성경 묵상」 38-39쪽 참조, 바오로딸)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사진말- 여호수아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 이야기 일부를 전해준다. 여호수아는 시나이 산에서는 모세의 시종을 들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 그의 공식 후계자가 된다. ‘십계명을 받는 모세’, 그랑드발 필사본 성경 삽화, 840년, 대영박물관, 런던. 리길재2023.07.18

최후의 만찬[월간 꿈 CUM] 복음의 길 _ 제주 이시돌 피정 (4)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의 집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마태 26,26-30) 누군가와 식사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그와 하나로 묶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예수가 말한 여러 우화들 중에, 왕이나 영주로부터 초대를 받았지만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여러 변명을 댔지만, 실제 이유는 아마도 그가 그 왕과 한편으로 얽히면 다른 왕들과는 소원한 관계가 될까봐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어떤 편을 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가 제자들과 나눈 이 식사는 매우 특별했습니다. 유대민족이 종살이에서 해방됨을 기념하는 식사이고, 이는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였습니다. 이 식사는 자신들을 해방으로 이끄신 하느님의 위대함을 새로이 되새기는 자리였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기념일인 셈이지만, 예수는 잠시 후면 자신이 체포되고, 고문 받고, 죽임 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는 당연히 두려웠겠지만, 자신의 민족을 해방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여전히 굳게 신뢰했습니다. 또한 예수는 제자들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것임을 알았지만, 여전히 그들과 이 매우 특별한 밤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사랑(결국 우리들에 대한 사랑)은 조건적이지 않았으니까요. 원래 이 축제의 식사에는 특별한 음식이 마련됩니다. 노예 생활의 가혹함을 나타내는 쓴 허브, 봄과 생명의 순환을 뜻하는 달걀, 사람들을 대신해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을 드러내는 어린 양 같은 상징적 음식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오직 두 가지 특별한 것이 언급됩니다. 빵과 포도주가 그것이지요. 그 당시에 주식이었던 빵은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필요한 기본적 음식이었습니다. 이는 유대민족이 사막에서 굶주림으로 곤경에 처해있을 때 하느님이 주신 만나를 연상시킵니다. 물 또한 기본적인 필수품이었지만, 예수는 물이 아니라 포도주를 나눠줍니다. 포도주는 마음을 기쁘게 하고 축제 같은 때에 취하게도 하는 그런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를 생각해볼 수 있지요. 최후의 만찬 예식에서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사용함으로써 기본적인 것만을 나누는 것을 넘어서 차고 넘치는 관대함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는 제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의 징표로 빵을 나누고 포도주를 나눠주는 단순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부서지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 또한 표현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으로써 이 예식을 실제로 실행합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는 예수의 요청은 이러한 전례를 반복하라기보다도, 목숨 내놓음을 제자들이 잊지 말고 본받으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는 우리들에게도 그 대가가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나누라고 요청하십니다. 그것이 매번 행해지는 전례에서 우리가 예수를 기억하는 방법이라고요. 예식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졸업식, 결혼식, 신년식, 군사훈련소 수료 등의 예식이 예가 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예식들은 어떤 특정의 시점을 표하기보다는 새로운 삶으로 뛰어오르는 출발대로서 기능합니다. 이것들은 어떤 새로운 시점을 표시한 후 그 예식이 끝나는 시점에 같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식에서 표현된 본질적 가치는 우리들 일상 속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졸업식을 마치고 나면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사회 속으로 들어가 듯이요. 우리의 영적 삶은 단지 영성체를 모시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성체성사를 마치고 나서 이어지는 미사의 마지막 부분이 바로 우리가 세상 속으로 파견되기 위한 기도입니다. 나눔으로써 예수는 성체 안에서 우리에게 현존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눔을 할 때마다 역시 우리에게 현존합니다. 글 _ 이어돈 신부 (Michael Riordan,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제주교구 금악본당 주임, 성 이시돌 피정의 집 담당) cpbc2024.10.08

순례길에 즐긴 여행, 여행길에 만난 하느님책으로 떠나는 성지순례본격적인 휴가철이다.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국내로 훌훌 떠나고 싶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못한다면 책으로 대신하면 어떨까.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희망하는 이스라엘과 이탈리아 순례기가 나란히 출간됐다. 엄마는 순례길 딸은 여행길 / 박지현·신솔잎 / 바오로딸 「엄마는 순례길 딸은 여행길」은 제목처럼 엄마와 딸이 이탈리아에서 보낸 17일간의 기록이다. 20여 년간 방송작가로 활동해 온 엄마 박지현(요세피나)씨와 직장생활에서 처음으로 번아웃을 경험한 딸 신솔잎(요세피나)씨는 체력만큼이나 벌어진 세대 차이, 누구보다 가깝고도 먼 모녀 특유의 갈등으로 이탈리아에서도 내내 불안하다. 게다가 숱한 돌발상황을 마주하며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여행이지 않던가. 다소 위태로운 이들의 여행은 주요 명소뿐 아니라 동네 어귀에서도 하느님의 공간을 마주할 수 있는 이탈리아 곳곳에서 자연스레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안에서 해답을 찾으며 이어진다. 순간순간 체감했던 하느님과 성모님의 현존, 일상의 소중함을 새롭게 발견한 기쁨, 주님 안에서 각자의 고유함을 받아들이는 깨달음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해 관계를 회복하는 값진 선물까지 허락한다. 로마·아시시·피렌체·밀라노 등을 둘러보며 모녀가 번갈아 글을 써 엄마와 딸의 입장과 생각을 저마다의 시선으로 확인할 수 있다. “딸, 너 자신으로 살아. 엄마의 짐은 엄마에게 주고, 너의 짐, 너의 십자가만 지고 가렴. 주님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랑으로 오르려무나.”(185쪽) “엄마는 순례길, 딸은 여행길. 그 길에서 엄마는 덤으로 여행을 즐겼고, 나는 덤으로 하느님을 만났다. 새록새록 순례의 소중한 시간들이 선물 같아서 나를 미소 짓게 한다.”(188쪽)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 이건리·김연희 / 지식과감성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는 43년 전에 만나 38년을 함께 산 부부의 이스라엘 성지 순례기다. 저자 이건리(시몬)·김연희(베로니카)는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 배우자를 만난 것이라고 말한다. 배우자를 통해 하느님도 만나게 됐다. 서로의 믿음을 공유하면서 예수님께 더욱더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의 동반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쉬움이 많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생활하시고 돌아가셨다 부활하신 그곳,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예순 살의 그들은 예수님의 숨결, 손길, 아니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중병이 나으리라 믿었던 여인처럼 예수님의 그림자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이스라엘로 떠났다. 지난해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 예루살렘·베들레헴·나자렛·카나·타브가·카파르나움·티베리아스·예리코 등에서 성경의 배경이 된 장소와 주요 성당 등을 방문하고 특별한 장소에서 새롭게 느낀 생각을 기록했다. 지도와 풍성한 사진이 이해를 돕는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까닭은 무엇일까요? 지금의 사람들, 순례·관광·여행 와서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 각자가 하는 생각·행동을 보시고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예수님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계신가요?”(49쪽) 윤하정 기자윤하정2024.08.07

새해를 맞으며[월간 꿈 CUM] 행복의 길 (8)해가 바뀔 때가 되면 여러 가지로 마음이 교차(交叉)되곤 한다. 아쉬움과 잘못에 대한 반성, 좋은 일에 대한 기쁨, 그리고 도움을 준 일과 도움을 받은 일에 대한 감사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용서와 화해를 구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도 있다. 이 모든 일이 이제는 과거 속으로 흘러갔다. 12월 31일이나 1월 1일은 똑같은 하루다. 오늘 이 시간도 1년 365일 중 같은 하루의 시간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감회에 젖는다. 그것은 시간이 구분되어 있고,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독일의 고전주의 극작가요, 시인이며,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쉴러(Johan Christoph Friedrch von Schiller, 1759~1805)는 “시간의 걸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영겁(永劫)의 흐름 위에 연(年), 월(月), 일(日), 시(時), 분(分), 초(秒)라는 눈금을 새겨놓고 시간을 구분하면서 그 의미를 헤아리고 있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는 우리에게 개념상으로 존재하지만, 포착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는 그 순간에 곧장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성경 시편 90장 12절에서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라”라고 했다. 여기서 날수를 셀 줄 안다는 말은 나의 삶이 어디쯤 왔으며, 또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즉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동시에 나의 삶이 얼마쯤 남아있으며, 그리고 부모와 자식과 신앙인으로서 제 자리에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래야 슬기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생일, 회갑, 결혼기념일, 졸업식, 시무식 등을 갖는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470~BC399)는 재판 과정에서 “철학을 포기하면 살려주겠다”라는 아테네 법관들의 회유에 “음미(吟味)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찌개를 끓이고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수시로 맛을 봐 가며 양념을 넣기도 하면서 간을 맞춘다. 우리의 삶도 요리하듯이 제대로 맛을 내고 있는지, 가끔 철학적인 사고로 음미해봐야 한다. 또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느님 말씀의 거울에 비춰가면서, 간도 맞춰봐야 한다. 새해를 맞이하여 자라가 나이 많은 거북이에게 세배하러 갔다. 늙은 거북이는 절을 받으면서 “늘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며 충실히 살아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자라가 “작은 것이라니요? 큰 것에 신경 쓰고 살아야 하지 않은가요?”하고 물었다. 거북이는 “아니야,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결과라네. 너도 느리더라도 한 걸음씩 열심히 기어가면, 껑충껑충 뛰는 토끼도 이길 수 있다네”라고 했다. 그렇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라는 노래 가사처럼, 힘이 있고 시간이 있고 의욕이 있을 때 작은 일에 충실하며 인생을 열심히 잘 살아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한 살씩 더 먹은 자로서, 올 한 해도 ‘날수를 세어가면서’ 복 받는 삶이 되도록 하자. 글 _ 최봉원 신부 (야고보, 마산교구 원로사목) 1977년 사제품을 받았다. 1980년 군종장교로 임관, 군종단 홍보국장, 군종교구 사무처장 겸 사목국장, 관리국장, 군종참모 등을 지냈으며 2001년 군종감으로 취임, 2003년 퇴임했다. 이후 미국 LA 성삼본당, 함안본당, 신안동본당, 수산본당, 덕산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했으며, 마산교구 총대리 겸 사무처장을 역임했다. cpbc2025.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