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상징]55-너울(베일)- 상대방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cpbc.co.kr/CMS/newspaper/2009/07/rc/30320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55-너울(베일)- 상대방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너울, 즉 베일(Veil)은 여자가 얼굴이나 머리를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천이다. 장식이나 보호, 은폐 목적으로 머리나 얼굴에 쓴다. 기원전1200년 아시리아에서는 법령에 따라서 결혼한 부인은 의무적으로 베일을 써야 했다. 그리스 시대나 고대 로마 처녀들도 베일을 썼다. 오늘날에도 무슬림 여성들은 다양한 종류의 베일을 착용하고 있다. 무슬림 여성들에게 베일은 존경과 도덕성, 정체성, 혹은 저항 등 복합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가톨릭에서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미사보는 세례성사를 통해 깨끗해졌다는 순결함을 드러내는 교회의 오랜 관습이다. 얼굴을 베일로 가리면 악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믿음은 원시시대부터 있었다. 상복의 베일은 무서운 악마로부터 지켜주고, 결혼하는 신부의 베일은 음탕한 악마로부터 몸을 보호한다고 생각했다. 성경에서 얼굴을 가리고 덮는다는 것은 조심스러움을 나타내며, 상대방에 대한 경외심과 신중한 태도의 표현이다. 하느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자 그는 얼굴을 가렸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탈출 3,6). 얼굴을 덮고 가리는 것이 강하고 위대한 존재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여성이 머리를 가리는 관습은 구약시대부터 있었다. 구약의 여성들은 자신이 미혼임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를 가렸다. 따라서 여성들은 얼굴을 덮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며 예절이었다. 레베카가 남편이 될 이사악을 만났을 때 너울을 썼다. "들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오는 저 남자는 누구입니까?" 그 종이 "그분은 나의 주인입니다"하고 대답하자, 레베카는 너울을 꺼내어 얼굴을 가렸다(창세 24,65). 너울을 벗기는 것은 창피와 면박을 주는 행동이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나오는 유명한 수산나 이야기(다니 13장)에서 사람들 앞에서 수산나의 너울을 걷게 한 것은 그에게 수모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베일을 쓰고 있었는데, 그 악인들은 수산나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기려는 속셈으로 베일을 벗기라고 명령하였다(다니 13,32). 그래서 중세기에는 베일을 수치심의 방파제라고도 했다. 또한 얼굴을 가리는 베일을 쓰는 것은 판단력의 둔화를 상징하기도 했다. "세상은 악인의 손에 넘겨지고 그분께서는 판관들의 얼굴을 가려 버리셨네. 그분이 아니시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욥 9,24). 초기교회에서 여교우들이 교회 공식 예절 때 머리를 가리는 관습은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공적으로 언급하면서부터 시작됐다(1코린 11,16). 바오로 사도는 베일을 예절의 표시로 간주한다. 여성의 머리는 남편을 상징하기에 교회 전례에 참여할 때 여성들은 머리를 가리라고 했던 것이다. 미사보를 쓰는 것은 교회의 오랜 풍습을 의미할 뿐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신앙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머리에 베일을 쓰는 관습은 그리스도교에서 이어져 오늘날 여성 수도자들은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베일을 쓰고 있다.조은일2009.07.28
![[성경 속 상징]49- 오른쪽- 하느님의 거룩한 성품과 행동](//cpbc.co.kr/CMS/newspaper/2009/06/rc/29800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49- 오른쪽- 하느님의 거룩한 성품과 행동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차들은 오른쪽길 사람들은 왼쪽길' 초등학교 때 좌측통행 규칙을 익히기 위해 자주 불렀던 동요 가사다. '문화인은 좌측통행'이라는 표어도 있다. 그런데 이 보행자 좌측통행이 내년 7월부터는 '우측통행'으로 바뀐다. 좌측통행이 안전도가 떨어지고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는 우리 국민의 신체 특성에 맞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때문이라고 한다. 봉건시대 유럽에서는 말, 마차 등 모든 교통수단이 왼쪽으로 다녔다. 왼손으로 고삐를 쥐고 좌측통행하면 마주 오는 이와 오른손으로 악수하며 인사를 나눌 수 있다. 또한 오른손으로 무기 등을 들기도 수월하다. 그러던 것이 나폴레옹이 유럽지역을 지배하면서 우측통행이 보편화됐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대적했던 연합군 중 영국은 아직도 좌측통행을 유지하고 있다. 예로부터 여러 국가나 문명에서 오른쪽은 왼쪽보다 선호돼왔다. 인도와 유럽 언어에서도 오른쪽은 강하고 선하고 바르다는 긍정적 의미를 포함한다. 고대 그리스어에서도 오른쪽은 행운을 뜻하며 상징적으로는 남성과 관련된다. 또한 맹세와 같은 의미인 악수를 할 때도 오른손을 사용한다. 이것은 오른손으로 악수함으로써 우정과 신뢰가 견고하게 됐음을 뜻한다. 성경에서도 오른쪽의 의미는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오른손은 그분의 능력과 지배의 상징이 된다. "주님, 권능으로 영광을 드러내신 당신의 오른손이, 주님, 당신의 오른손이 원수를 짓부수셨습니다"(탈출 15,6). 모세는 첫 사제의 임직식에서 희생제물로 드린 숫양의 피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랐다(레위 8,23). 이러한 행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자신의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사제의 엄숙한 사명을 다짐하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관습은 악성 피부병 환자의 정결례에서도 나타난다(레위 14,14-18). 아버지가 자식을 축복하는 예식에서도 오른손은 왼손보다 선호된다. "요셉은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프라임의 머리 위에 얹은 것을 보고는 못마땅하게 여겨, 아버지의 손을 잡아 에프라임의 머리에서 므나쎄의 머리로 옮기려 하였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닙니다, 아버지. 이 아이가 맏아들이니, 이 아이 위에 아버지의 오른손을 얹으셔야 합니다'"(창세 48,17-18). 또한 오른손은 특별히 하느님의 거룩한 성품과 행동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사용됐다. "하느님, 당신 이름처럼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세상 끝까지 울려 퍼집니다. 당신의 오른손이 의로움으로 가득합니다"(시편 49,11). 오른편에 있다는 것은 특별한 영예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밧 세바는 아도니야를 위하여 청을 하러 솔로몬 임금에게 갔다. 임금은 일어나 어머니를 맞으며 절하고 왕좌에 앉았다. 그리고 임금의 어머니를 위해서도 의자를 가져오게 하여 그를 자기 오른쪽에 앉게 하였다"(1열왕 2,19).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날 때도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신다는 표현이 나온다(히브 1,3). 주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도 의인은 오른편 축복의 자리로, 악인들은 왼편에 두신다(마태 25,31-46). 조은일2009.06.09
![[성경속 상징]45-황금- 교부들은 하느님 왕권으로 여겨](//cpbc.co.kr/CMS/newspaper/2009/05/rc/293550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45-황금- 교부들은 하느님 왕권으로 여겨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이스라엘 옛 시가지로 불리는 곳에 통곡의 벽으로 잘 알려진 서쪽 벽이 있다. 지금도 많은 유다인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 위에는 마호메트의 승천을 기념한 이슬람의 바위돔 사원이 자리잡고 있다. 황금으로 만든 지붕 때문에 황금사원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메카, 메디나와 함께 이슬람 3대 성지로 꼽힌다. 고대 인도에서 황금은 불사의 상징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순금으로 돼있다고 믿었다. 고대인들이 태양이 황금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고 숭배했던 이유는 오로지 황금만이 스스로 빛을 만들어서 뿜어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광채를 발하고 영원히 색이 변하지 않는 황금의 성질은 모든 것이 변하고 없어지는 세상에서 시간을 초월한다고 믿었다. 황금이야말로 모든 물질과 생명의 가치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에서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언약궤는 모두 순금으로 덮여 있었다. "너는 그것을 순금으로 입히는데, 안팎을 입혀라. 그 둘레에는 금테를 둘러라"(탈출 25,11). 솔로몬 성전은 하느님의 집으로서 황금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솔로몬은 성전 전체를 금으로 덮었다(1열왕 6,20-30). 그러나 황금 자체는 거룩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황금을 신성시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죄에서 생겨난 오류였다. 그런데 황금이 지극히 거룩한 것의 상징이 되는 경우도 있다. "금보다, 많은 순금보다 더욱 보배로우며 꿀보다 생청보다 더욱 달다네"(시편 19,11) 그러나 성경에서 황금이 부정적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았다. 귀금속은 현세의 덧없는 재화에 불과하다. 황금보다 더 귀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라 가르친다(1베드 1,7). 이처럼 황금은 극히 현세적이며 무상한 것이다. 또한 심판날에 불의 시련을 당할 귀금속에 황금이 포함돼 있다. "그 기초 위에 어떤 이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다면, 심판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 한 일도 명백해질 것입니다. 그날은 불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1코린 3,12-13). 세상 종말에 사람의 아들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나타나실 것으로 묘사한다(묵시 14,14). 교부들은 황금을 하느님 왕권의 상징으로 보았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선물도 황금이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 중세 회화에서 황금색 밑바탕은 극히 일반적으로는 초현세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암시한다. 제사장 의복이나 제사도구에 사용된 황금은 영원한 영광의 반영이라 풀이된다. 민간 풍습이나 전승에서는 아기 예수가 황금 관을 쓰거나 황금 조랑말을 타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는 황금을 무조건 숭배하지 않았지만, 황금의 속성을 중시했다. 박사들은 가지고 온 세 가지 귀한 예물, 즉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드렸다. 성경에서 금은 신성한 본성을 상징하며 아기 예수님께서 신성한 본성을 가지셨음을 의미한다. 조은일2009.05.05
![[성경속 상징]26-마음(심장)- 중세엔 사랑과 고통의 구세주](//cpbc.co.kr/CMS/newspaper/2008/11/rc/273384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26-마음(심장)- 중세엔 사랑과 고통의 구세주심장은 주기적 수축과 이완을 되풀이하면서 혈액을 온몸에 보내는 역할을 한다. 휴식상태에서 보통 1분에 60~70회, 하루 평균 약 10만 번 수축한다. 심장 박동이 그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심장은 인간의 외적 측면과는 다른 내면 전체를 나타낸다. 고대에는 심장의 기능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이집트인들은 심장이 모든 정신 작용과 활동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그곳은 오성, 의지, 감정이 있는 곳이며. 더 나아가 생명 그 자체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죽은 자를 미라로 만들 때에도 내장은 모두 제거했지만 심장만은 원래 위치에 그대로 남겨뒀다. 오늘날 우리는 생각과 기억을 뇌와 연관시키지만, 성경에서는 마음과 심장의 기능을 같은 것으로 본다. 성경에서 심장은 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데 인간의 지성, 기억, 감정, 욕구, 의지 등을 단어로 사용했다. 인간의 참된 본질은 그 외면의 아름다움이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존재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진실을 외적 행동으로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고 했다. "거기에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찾게 될 것이다.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 4,29). 그래서 다윗이 주님을 찬미할 때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신다고 기도한다. "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께서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고 정직함을 좋아하시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저는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예물을 바쳤습니다"(1역대 29,17). 성경 저자들은 하느님을 향한 침묵의 기도나 묵상과 같이 내적 대화에 관해 기록할 때 '마음으로'라는 숙어를 사용했다. 하느님도 근심을 하시고(창세 6,6)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시기도 했다고 서술한다(1사무 13,14). 이처럼 심장(마음)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나타난다. 또한 마음(심장)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삶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적 변모를 이룬다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느님은 인간의 굳은 마음을 없애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수 있는 분이다. 성경에서 마음은 인간의 감정이 흘러나오는 근원이다(탈출 4,14). 또한 성경에서 두려움은 낙심으로 표현했고 용기도 역시 마음에서 비롯되는 감정임을 보여준다. 절망이나 슬픔, 신뢰나 분노 등도 모두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들로 나타난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음은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만 아니라 행동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런 점은 예수님 가르침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1-23). 이처럼 신약에서도 심장, 혹은 마음은 영혼과 정신의 중심으로 나타낸다. 또한 사도 바오로도 신앙은 사고나 감정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의 문제라고 가르쳤다(로마 10,10). 중세 그리스도교에서는 심장이나 마음은 점차 그리스도 사랑의 상징이 됐다. 중세 미술에서 예수 성심의 표현은 아주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중세 말기에는 상처받은 심장이라는 이미지로 사랑과 고통의 구세주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조은일2008.11.25
![[성경 속 상징] 20-열쇠- 베드로의 열쇠는 불변하는 마음](//cpbc.co.kr/CMS/newspaper/2008/10/rc/267734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20-열쇠- 베드로의 열쇠는 불변하는 마음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고등학교 때 프랜치스 치셤 신부의 숭고한 일생을 다룬 「천국의 열쇠」(A.J.크로닌 지음)를 읽고 무척 감동을 받았던 생각이 난다. 내가 신학교를 가기로 결심하는 데에 그 책이 적지 않은 영향을 줬던 것 같다. 열쇠는 자물쇠를 열고 닫는 데 쓰이는 금속기구다. 모양은 동서양에서 달랐지만 자물쇠와 함께 문단속을 하거나 귀중품을 간직한 기물을 잠그는 데 사용했음은 같았다. 옛날 사람들은 천국이나 지옥이 모두 문으로 잠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열쇠는 능력과 권세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다. 또한 열쇠는 믿을만하다고 생각되는 이에게 주어졌다. 고대사회에서도 열쇠가 열고 닫는 대상에 비해 열쇠 자체는 매우 작은 것이었기에 힘을 상징한다. 따라서 열쇠에는 힘, 신비, 독점 등의 의미가 함축돼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열쇠는 B.C. 2000년 무렵의 것으로 이집트 사원 벽화에서 발견된 큰 칫솔 모양의 목제열쇠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주부의 열쇠는 가정에서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 어느 시기가 되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열쇠를 물려주는데 이는 며느리가 시어머니 뒤를 이어 집안일을 위임받는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장남에게만 은으로 만든 자물쇠를 물려줬는데, 생명을 장남에게 단단히 이어준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구약에서 열쇠는 그 집안의 청지기, 믿을 수 있는 하인, 가사를 전담하도록 주인이 택한 사람에게 주어졌다. 이사야서에서 예루살렘을 책망 하시면서 진실한 관리자들이 예루살렘을 돌보게 될 날을 예언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이사 2,22). 이 구절은 새 관리자에게 주어진 권세 외에도 열쇠가 신뢰와 책임의 이미지임을 암시한다. 열쇠를 맡기는 사람 처지에서는 열쇠가 청지기의 성품에 대한 신뢰와 신임의 상징이고 받은 사람 처지에서는 책임의 상징이다. 성경에 나오는 열쇠에 관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는 장면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을 수 있었다. 베드로는 지상에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천국에서의 활동에 책임을 지게 됐다. 왜냐면 베드로가 받은 열쇠는 땅에 있는 것과 하늘에 있는 것을 연결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이 오히려 진실한 하느님에 이르는 길로 가는 것을 방해했다고 개탄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구세주는 하늘나라뿐 아니라 저승과 죽음의 문도 여는 권한과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다.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묵시 1,18). 열쇠는 출입을 통제하기에 그렇게 비유했던 것 같다. 5세기 이후의 석관과 성화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모습이 자주 그려진다. 나중에 시대가 흐르면서 베드로의 열쇠는 불변하는 믿음을 나타내는 상징이 됐다.조은일2008.10.07
![[성경 속 상징] (114) 덧없음- 부활 때 완성되는 삶이 진정한 인생](//cpbc.co.kr/CMS/newspaper/2011/04/rc/374892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114) 덧없음- 부활 때 완성되는 삶이 진정한 인생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얼마 전 평화방송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정진석 추기경에게 애창곡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정 추기경은 몇 년 전 명동성당에서 '인생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두 시간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이때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하숙생'을 노래했다. 또 2007년 가톨릭 문화예술인들과 미사 후 행사에서 가수 최희준씨와 함께 하숙생을 불렀다. 좀처럼 정 추기경이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데, 이렇게 여러 자리에서 하숙생을 부른 것을 보면 이 곡이 정 추기경 애창곡임에는 틀림없다. 하숙생 가사는 마치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한편의 철학 시와 같다. 성경에도 인생의 허무와 덧없음에 대한 언급이 많다. 인생을 피었다 지는 풀과 꽃과 같은 식물에 비유하며 무상함을 표현하는 이미지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들의 영광은 잠시 있다가 곧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그 세월 풀과 같아 들의 꽃처럼 피어나지만 바람이 그를 스치면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아내지 못한다"(시편 103,15-16). 반대로 하느님의 특징은 인생의 특징과 아주 대조된다. 특히 하느님 말씀은 영원하고 지속적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8). 그러나 사람은 늘 염려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간다. 성경은 풀 한 포기가 왕의 영광보다 더 아름답게 자라난다는 비유를 통해 하느님을 믿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언급한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 6,30-31). 또 인생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다. 그림자의 상징은 인생의 덧없음을 극단적으로 나타낸다. "사람이란 여인에게서 난 몸, 수명은 짧고 혼란만 가득합니다. 꽃처럼 솟아났다 시들고 그림자처럼 사라져 오래가지 못합니다"(욥 14,1-2). 심지어 삶의 허무함을 마치 바람을 잡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코헬 2,17). 또한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하는데 시간의 빠른 속도를 강조한다. "저의 날들은 파발꾼보다 빨리 지나가고 행복을 보지도 못한 채 달아납니다. 갈대배처럼 흘러가고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처럼 날아갑니다"(욥 9,25-26). 바오로 사도는 부활 때 완성되는 삶을 진정한 인생으로 강조한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3). 부활의 믿음을 통해 인생의 덧없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은일2011.04.26
 칭찬- 내적인 것에 대한 칭찬받아야](//cpbc.co.kr/CMS/newspaper/2010/10/rc/353207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90) 칭찬- 내적인 것에 대한 칭찬받아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칭찬 한마디의 기적」이란 책에서는 칭찬할 때 쓰기 좋은 말 10가지를 제안한다. '당신은 참 좋은 분입니다', '마음이 참 따뜻한 분이십니다', '일을 참 잘 하셨습니다', '참 지혜로우십니다',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옆에 있는 것이 힘이 됩니다', '앞으로 하실 일이 기대가 됩니다', '언제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당신을 만난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인연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들을 하루에 얼마나 듣고 말하고 있을까. 때로는 칭찬 한마디가 인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칭찬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일치해야 그 사람에 대해 평가할 수 있다. 또 칭찬도 평소에 자주 연습해야 정작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더불어 언어적 칭찬과 비언어적 태도가 일치해야 한다. 말로는 '잘했어!'라고 하면서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면, 상대는 정말로 칭찬받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인간은 누구나 칭찬을 먹고 자란다. 칭찬을 먹고 자란 사람들은 자신감을 배우게 된다. 아이의 작은 성공도 크게 칭찬해주는 부모는 책임감과 자신감을 가진 자녀를 만든다. 특히 구체적 행동에 대한 칭찬은 긍정적 행동을 강화시키는 좋은 자극제가 된다. 성경에는 칭찬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칭찬은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받을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내가 스스로를 높인다면 다른 사람들 눈에 교만한 사람으로 비춰질 것이다. "네 입이 아니라 남이 너를 칭찬하고 네 입술이 아니라 다른 이가 너를 칭찬하게 하여라"(잠언 27,2).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자선을 베풀 때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마태 6,2). 또 진정한 칭찬은 외적이 아닌 내적인 것에 대한 칭찬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사람을 칭찬하지 말고 겉모습을 보고 그를 혐오하지 마라"(집회 11,2). 인간사회에서 칭찬은 그 사람의 위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은에는 도가니, 금에는 용광로, 사람은 그가 받는 칭찬으로 가려진다"(잠언 27,21).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께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이다. "오히려 속으로 유다인인 사람이 참유다인이고,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할례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칭찬을 받습니다"(로마 2,29). 인간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의 눈은 그렇지 않다. 그분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분이시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밝혀지고, 바른 판결을 받는다는 것은 신앙인의 희망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코린 4,5).조은일2010.10.12
![[성경 속 상징]70- 열둘(12)- 일곱이나 열처럼 완전함 나타내](//cpbc.co.kr/CMS/newspaper/2009/12/rc/319598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70- 열둘(12)- 일곱이나 열처럼 완전함 나타내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열두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조석을 굶는다"는 속담이 있다. 재주가 무척 많은데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12라는 숫자를 가장 크고 많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집이 크면 열두 대문, 산이 커서 1만2000봉, 발이 길어 열두 발 상모라 불러왔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숫자 12를 행운의 수로 생각했다. 그런데 반대로 바빌로니아에서 12는 불운을 나타내는 숫자다. 성경에서도 열둘(12)이라는 수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가장 중요한 숫자들 중 하나이다. 성경에서 이 숫자의 중요성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왔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삼으셨는데, 온 인류의 전체 구원을 위해서였다. 성경에서 열둘이라는 숫자도 일곱이나 열처럼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일 년이 열두 달로 이뤄져 있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모세는 이집트 탈출 후에 열두 지파 수를 따라 시나이 산 위에 열두 개 기둥을 세웠다.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웠다"(탈출 24,4).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돌 열두 개로 기념비를 세웠다. "여호수아는 요르단 강 한복판,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의 발이 서 있던 곳에 돌 열두 개를 세워 놓았다. 그것들은 오늘날까지 거기에 있다"(여호 4,9). 대사제 예복 가슴받이에는 열 두개 보석이 있었으며, 그 위에는 각 지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에 따라, 곧 그들의 이름 수대로 열둘이 되었다. 인장 반지를 새기듯 각자의 이름을 새겨 열두 지파가 되게 하였다"(탈출 39,14). 솔로몬은 이스라엘에 열두 지방관을 두었고, 솔로몬의 여러 건축 사업에는 열둘이라는 숫자와 치수들이 항상 포함됐다(1열왕 4,7).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와 싸울 때도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돌을 열두 개 가져왔다(1열왕 18,31). 열둘이라는 숫자의 중요성은 신약성경에도 나타난다. 우선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신 데서 잘 나타난다(마르 3,13-19). 여기서 12의 의미는 이스라엘 전체 구원을 상징한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열둘의 상징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르 6,43).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언젠가는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열둘이라는 상징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곳은 역시 요한묵시록이다. 하늘에 큰 표징과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다(묵시 12,1). 또 열두 성문의 열두 천사, 도성 성벽의 열두 초석, 어린 양의 열두 사도 이름 등이 등장한다(묵시 21,14). 그 밖에도 12라는 숫자가 수없이 나타난다.조은일2009.12.15
![[성경 속 상징] 60-나무- 아낌없이 생명 주고 주님 은총 전해줘](//cpbc.co.kr/CMS/newspaper/2009/09/rc/310455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60-나무- 아낌없이 생명 주고 주님 은총 전해줘최근 숲의 효능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여가와 휴식을 위한 공간에서 회복과 치유를 위한 공간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식물이 해충이나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스스로 만들어내는 휘발성 물질인 피톤치드는 각종 감염 질환과 아토피 피부염 치료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편백나무는 천연 살균제인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뿜어내는 나무라고 한다. 나무는 잎의 활발한 광합성 작용으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하는 자연의 공기정화기 역할을 한다. 느티나무 한 그루는 1년 동안 이산화탄소 2.5톤을 흡수하고 1.8톤의 산소를 방출하는데, 이것은 성인 7명이 1년간 소비하는 산소량에 해당한다고 한다. 또 나무는 숲의 동식물에게 서식지를 제공하고 강우와 홍수 등 재해 위험을 막아주며 가뭄에는 지하수를 공급해 주기도 한다. 여러 해 자란 나무의 줄기는 좋은 목재가 돼 집이나 가구의 재료로도 쓰인다. 예로부터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고 열매를 맺는 나무는 생명의 상징이 됐다. 나무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생물보다 높이 성장하기에 하늘과 땅을 결합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많은 신화에서 나무는 신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팔레스티나 지역은 건조한 지역이라 나무가 드물다. 그래서 성경시대에 목재로 건물을 짓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나무는 성경에서 우월함의 상징이 됐고, 백향목, 잣나무 등으로 지은 임금의 궁궐은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이 됐다. 성경에서 나무는 자연과 풍성함을 의미한다. 물가에 심어져 가뭄에도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늘 푸르른 나무에 대한 묘사에서처럼 생명의 상징이 된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8). 또한 나무는 하느님이 백성들과 동물들에게 은총을 전해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주님의 나무들, 몸소 심으신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이 한껏 물을 마시니 거기에 새들이 깃들이고 황새는 전나무에 둥지를 트네"(시편 104,16-17). 에덴동산에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와 생명나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창세 2,9).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라고 경고하신다. 더불어 선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주셨으니 에덴동산의 나무들은 축복이 될 수도, 저주가 될 수도 있었다. 구약시대에는 나무에 달려 죽은 이는 저주받은 자라는 오랜 믿음이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인류 구원은 예수님이 지고 가신 나무십자가를 통해 실현됐으니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다. 나무는 또 축복, 선, 건강함의 이미지를 갖기도 한다. 성경은 하느님 축복으로 새로워진 이스라엘을 열매가 풍성한 나무에 비유하기도 했다(호세 14,5-7). 나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을 찬양하며 새롭게 창조된 질서 전체를 대표하기도 한다(시편 96,12-13).조은일2009.09.22
![[성경속 상징]41-빵- 빵을 나눠먹는 것은 사랑의 표현](//cpbc.co.kr/CMS/newspaper/2009/03/rc/289399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41-빵- 빵을 나눠먹는 것은 사랑의 표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빵은 밀가루나 호밀가루 등에 소금과 물 등 재료를 넣어 반죽한 뒤 불에 굽거나 찐 음식이다. 빵이라는 단어는 포르투갈어에서 온 말이다. 밀의 원산지인 메소포타미아 가까운 지역에서 밀을 빻아 얇게 굽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000년 무렵까지 올라간다. 밀가루를 발효시켜 만드는 오늘날 같은 빵은 기원전 4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 이집트의 태양, 만물의 신 오시리스는 곡물의 신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보릿가루로 납작한 빵을 만들어 먹었다. 고대 로마에서 제빵 기법은 귀족과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했기에 종교와 함께 확산됐다. 이러한 이탈리아 제빵 기법이 프랑스로 전해져 오늘날 유럽 빵의 기초가 됐다. 한국에는 조선 말엽 비밀리에 입국한 선교사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선교사들이 숯불을 피워 구운 것이 마치 우랑(牛囊)과 같다고 해 우랑떡이라 했다. 8ㆍ15광복과 6ㆍ25를 겪으면서 원조물자로 공급된 빵은 급속도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에는 이미 왕정시대부터 빵 만드는 직업이 있었다(호세 7,4). 예루살렘에는 빵 굽는 거리까지 있었다(예레 37,21). 일반 백성은 집에서 직접 빵을 만들어 먹었다. 가루를 빻고 빵을 굽는 일은 주부의 일상 작업 가운데 하나였다(창세 18,6). 부자의 식탁이나 큰 잔치의 주된 음식은 늘 빵이었다. 손님을 접대할 때에 우선 마련하는 것도 빵이었다(창세 18,5.6). 가난한 서민의 끼니는 빵과 물이 전부였다(탈출 23,25). 빵에다 포도주를 곁들이면 풍성한 기쁨의 잔치를 뜻한다(창세 14,18). 이스라엘인에게 빵을 나눠 먹는 것은 단순히 함께 식사를 하는 것 이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누구와 빵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 사람과 절친한 사이, 곧 친구임을 뜻한다. 또한 빵을 함께 나눔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굶주린 이와 빵을 나눠 먹는 것은 이스라엘인의 큰 의무이며 사랑의 구체적 표현으로 여겼다. 40일간 단식을 마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3-4)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이들을 위해 빵의 기적을 이루시고 직접 빵도 나눠주신다(마태 14,13-21). 빵은 이처럼 예수님 생애와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소개하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예수님께서는 성 목요일 저녁 열두 제자와 함께한 식탁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고 하셨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남김없이 양식으로 내어주신 예수님은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의 빵, 우리의 밥이 되어 주신다. 우리는 매일 삶 속에서 육신을 살찌게하는 빵만이 아니라 영혼을 살찌게하는 생명의 빵, 생명의 예수님을 애타게 찾고 있는가.조은일2009.03.31
![[성경속 상징]40-무덤- 구약에는 묘에 대한 규정 따로 없어](//cpbc.co.kr/CMS/newspaper/2009/03/rc/288648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40-무덤- 구약에는 묘에 대한 규정 따로 없어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외국 장묘문화는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묘지에 수십 평을 사용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오히려 현재 선진국에선 화장률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리스도교 문화권 유럽에서도 화장률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굳이 매장을 하더라도 넓고 높게 쌓아올린 봉분은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죽어 묻히더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생존을 계속한다는 생각을 많은 민족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한 사후 생존은 또 시신이 어떤 식으로 처리되느냐에 달렸다고 여겼다. 구약성경에는 어느 곳에 묘를 써야 한다는 규정이 따로 없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 유배 이후에 정결 규정이 특히 강화되면서 시신은 물론 무덤도 부정한 것으로 분류했다. 성경 시대에 죽음 후 묘지에 제대로 묻히지 못하는 것은 큰 불행이었다(이사 14,19). 패전했을 때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시신이 뒹구는 것을 가장 큰 불운으로 여겼다(이사 34,2-3). 그래서 죽은 자가 묘지에 인장되지 못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큰 죄인에게 내리시는 벌이라고 여겨(신명 28,26) 전쟁에서 진 적군도 묻어주었다(1열왕 2,3). 또한 죽은 자를 장사지내 주는 일은 큰 덕행이었다. "배고픈 이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는 입을 것을 주었으며, 내 백성 가운데 누가 죽어서 니네베 성 밖에 던져져 있는 것을 보면 그를 묻어 주었다"(토비 1,17).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후 삶이 매장과 밀접히 연관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본래 화장을 하지 않았다. 시신을 불태우는 것은 화형에 처할 때나(창세 38,24) 전염병이 있을 때 뿐이었다. 시신을 안치하는 규정은 이스라엘에는 없었다. 매장할 때에는 악취를 없애느라고 무덤 안에도 향을 피우고 향료를 태웠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을 위하여 다윗 성에 깎아 놓은 무덤에 그를 묻었다. 그들은 향 제조술에 따라 만든 온갖 향료로 가득 채운 침상에 그를 눕히고, 그를 위하여 아주 큰 불을 켜 놓았다"(2역대 16,14). 묘실 안에 있던 유골은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함에 넣고 묘실 벽에 판 구멍에 모셔놓아 다음 사람을 위한 장소를 마련했다. 묘지는 일반적으로 성이나 동네 밖에 마련했다. 사후에도 생존이 지속된다는 생각으로 무덤을 죽은 이들의 집으로 여겨 준비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살던 팔레스티나 땅은 주로 바위가 많은 산악 지방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자연 동굴이나 인공으로 판 굴을 묘지로 이용하기도 했다. 생전에 새 무덤을 마련한다는 것은 부유한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보통 묘지는 가문 등이 상당 기간 함께 사용했다. 따로 가족묘를 마련할 수 없었던 서민들은 그냥 땅에 묻기도 하고 공동 무덤을 이용했다. "그리고 아세라 목상을 주님의 집에서 예루살렘 밖 '키드론 골짜기'로 끌어내다가, 그것을 '키드론 골짜기'에서 태우고 가루로 만든 다음, 서민 공동묘지에 뿌렸다"(2열왕 23,6 참조). 예수님 시대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과 예술을 본받아 무덤 입구를 대문처럼 꾸미기도 하고 여러 가지 기념물로 치장하기도 했다(1마카 13,25-30).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요 인물들을 성이나 마을 안에 묻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임금들 무덤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왕궁의 부속지에 마련했다(1 열왕 2,10). 예수님 시대에는 향이 든 병과 향료와 함께 많은 등잔을 매장했다. 이처럼 무덤이나 부장품도 풍속이나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했다.조은일2009.03.24
![[성경속 상징]37-죽음- 믿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문턱](//cpbc.co.kr/CMS/newspaper/2009/03/rc/285826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37-죽음- 믿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문턱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우리 가톨릭 교회 큰 어른 김수환 추기경께서 2월 16일 지상에서 삶을 마치시고 하느님 품에 드셨다. 추기경님 선종에 모든 매스컴은 '큰 별이 떨어졌다'며 위대한 종교지도자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기사를 실었다. 추기경님 선종은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특히 인간의 죽음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주고 혈혈단신 유리관 속에 편안하게 누워계신 김 추기경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사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인양 '웰빙'만을 쫓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죽음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운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김 추기경님은 몸소 답 하셨다. 그분은 가진 것을 남김없이 베풀겠다며 일찌감치 장기기증을 서약했고, 마지막까지 인간 존엄성을 지키고자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하지 말 것을 여러 차례 당부하셨다.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받아들이고, 미리 죽음을 준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추기경님의 아름다운 죽음은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묻고 있다. 죽음은 부나 권력, 나이에 아무런 상관이 없이 인간이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최고의 고통이며 공포이다. 죽음은 냉혹하고 현실적이다. 죽음은 인간 삶의 가장 큰 적이며 모든 삶을 무력화시켜버린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죽음은 돌아올 수 없는 땅이나 도망칠 수 없는 지하 세계의 감옥이라고 생각했다. 가나안 신화에서는 죽음을 인간 육신을 끊임없이 탐욕하는 신으로 의인화했다. 구약성경은 죽음의 영역이 지하 세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출입문을 깊은 구덩이로 묘사한다(시편 88,4-6). 하느님께서는 그의 계시된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위한 궁극적 징벌로서 죽음을 선포하셨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7).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반역하였을 때 죄와 죽음이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 이래로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로마 5,12-21). 성경에서 죽음은 모든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무섭고 잔인한 원수로 묘사한다. "누가 영원히 살아 죽음을 아니 보겠습니까? 누가 저승의 손에서 자기 영혼을 빼내겠습니까?"(시편 89,49) 죽음에 대한 가장 충격적 이미지는 코헬렛에서 극치를 이룬다. 늙음과 죽음은 인간 삶을 모두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코헬 12,1). 그러나 죽음의 엄청난 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엔 하느님이 죽음을 이길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한 희생적 죽음을 맞으셨을 때, 그분은 죄를 정복하셨다(로마 5,12-21). 그래서 예수님 부활은 미래에 있을 그의 백성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과연 그 큰 죽음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해 주셨고 앞으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 또다시 구해 주시리라고 희망합니다"(2코린 1,1).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하는 믿음을 통해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은 이미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의 나라로 건너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그래서 부활을 믿는 신앙인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의 부활 신앙이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 죽음이란 희망의 문턱이요 시작이 된다.조은일2009.03.03
![[성경속 상징]28- 십자가- 고난, 순교로 이어지는 사도의 신분](//cpbc.co.kr/CMS/newspaper/2008/12/rc/275239_1.2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28- 십자가- 고난, 순교로 이어지는 사도의 신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얼마 전 세계적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 선수의 경기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봤다. 지난 5월 마리 스텔라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 김연아 선수. 경기에 앞서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격스럽고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성호경은 아주 훌륭한 기도이며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신앙고백의 행위다. 가톨릭 신자는 손으로 자기 몸에 십자 모양을 그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기도를 바친다. 이때 십자 모양을 긋는 것을 '십자성호', 함께 바치는 기도문을 '성호경'이라고 한다. 기도하기 전이나 음식을 먹기 전에 바치는 성호경은 가톨릭 신자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주님이요 하느님'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십자가는 예수님 시대 이전부터 근동 아시아와 로마 제국에서 사형(死刑) 도구로 사용됐다. 십자가에 죄인의 몸을 매달고 때로는 두 손을 못으로 박기도 하는 처형방법은 페니키아를 비롯한 고대 여러 나라에서 행해졌다. 로마제국에서는 중죄인, 특히 제국의 반역자들이나 흉악범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희생자가 십자가에 달리면 그 시체는 십자가에서 썩어질 때까지 두거나 야생 동물 먹이로 내버려 뒀다. 성경에서 십자가는 무거운 짐과 고난을 뜻한다(마태 10,38). 수치스러운 죽음이나 굴욕을 인내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히브 12,2). 사도 바오로에게 십자가의 의미는 속죄에 있다(1고린 1,17-18). 그에게 십자가는 하느님 능력과 지혜를 드러내 주는 계시다. 십자가의 죽음에는 하느님과 화해라는 속죄사상이 나타나 있다(에페 2,16). 십자가가 그리스도교 상징이라는 것은 박해 당시 지하묘지인 카타콤바에 세워진 교회 벽 등에 그 형태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복음에 나오는 십자가 이미지는 고난과 어떤 경우에는 순교로 이어지는 사도의 신분 표시였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마르 8,34). 또한 루카는 십자가에 대한 매일의 결단을 강조하고 있다(루카 9,23 ).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고난받을 것과 십자가에 못박힐 준비를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십자가만이 제단에 놓였으나 나중에는 십자고상(十字苦像)도 놓이게 됐다. 이것은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에서 인류 구원를 위해 속죄하는 고난의 그리스도로라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십자가는 초대교회 때부터 무덤을 비롯해 기념비나 동전, 관공서 서류 등 곳곳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가 4세기 말 로마제국 국교가 되면서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이 됐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마나 가슴에 하던 십자표시를 이마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두 어깨를 연결하는 큰 십자가 표시로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전해서 오늘날 천주교 신자들이 기도를 바칠 때나 식사를 할 때 긋는 십자성호가 됐다. 우리는 성호경을 바칠 때는 언제나 이 십자성호를 긋는다. 성호경을 바치는 이 행위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성령 안에서 행동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한다. 십자성호를 그을 때마다 정성을 다해 기도를 바쳐야겠다. 조은일2008.12.09
![[성경속 상징]24-무릎 꿇는 동작-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경배](//cpbc.co.kr/CMS/newspaper/2008/11/rc/271851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24-무릎 꿇는 동작-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경배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고대 희랍인들은 무릎을 꿇는 것은 자유인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야만인이나 하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릎을 꿇는 것은 아주 긍정적 의미도 담고 있다. 억지로 하는 비굴한 자세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극진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자세이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나설 때에는 자연히 경배의 자세로 무릎을 꿇게 된다. 무릎을 꿇는 행위 안에는 모든 기도가 내적으로 지녀야 할 기본적 자세를 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사나 전례, 기도에서 무릎 꿇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동작이다. 우리나라 전통 예절 중 하나인 큰절을 할 때도 무릎 꿇는 동작을 먼저 한다. 이처럼 무릎을 꿇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며 존경과 겸손을 드러내는 동작이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속죄, 통회의 의미도 있다. 또한 양 무릎을 꿇는 것은 자기보다 강한 자에 대한 굴복을 나타낸다. 특히 신적 존재에게 경배할 때에는 이 자세를 취했다. 앗시리아에서는 왕도 제단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덜덜 떠는 무릎의 흔들림은 불안과 두려움 혹은 연약함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죄책감의 표시, 간절히 바라는 동작, 공손함의 표현으로 간주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자세이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치고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했다(2역대 6,13). 에즈라는 저녁 제사 때에 단식을 그치고 일어나서, 의복과 겉옷은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 번민의 기도를 올렸다(에즈 9,5). 예수님께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올리브 동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셨다.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루카 22,41). 예수님이 무릎을 꿇은 자세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염원하는 기도를 바치는 예수님은 무엇이 참된 자유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또한 무릎을 꿇는 것은 경외심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10-11).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경배의 표시로써 무릎을 꿇는다. "이렇게 대답하여라. '그것은 주님을 위한 파스카 제사이다. 그분께서는 이집트인들을 치실 때,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을 거르고 지나가시어, 우리 집들을 구해 주셨다.' 그러자 백성은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다"(탈출 12,27). 또한 무릎을 꿇는 것은 간절히 무엇을 바라는 사람의 태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비를 청할 때 무릎을 꿇는다. 나병을 고치기를 바라는 사람(마르 1,40), 아들의 간질병을 치유하기를 바라는 부친 등이 그렇다(마태 17,14-15). 초기 유럽 교회에서는 번민, 혹은 속죄의 성격을 가진 날에만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중세 말부터는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의 기본자세가 됐다. 겸손과 통회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무릎을 꿇는 동작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보다 심오한 흠숭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첨가됐다. 조은일2008.11.11

'신앙의 해' 맞아 볼만한 영화- 진흙 속의 진주, 가톨릭적 수작을 찾아신화, 성경 주제 얽힌 '나니아...' 연작, 수도회 일상 담은 다큐 등 추천 수많은 신화와 성경 주제가 얽힌 세계 3대 판타지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작품으로, 2010년에 나온 '나니아 연대기 : 새벽 출정호의 항해'. 최근 들어 노골적으로 종교에 적대적이거나 이단적이고 나아가 반가톨릭적인 영화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지난 1월 개봉한 '파이의 생애(Life of Pi)'처럼 자신이 마주하는 종교는 모두 받아들이면서 힌두교에 대한 믿음을 키워 결국은 '가톨릭 힌두교'라는 자신만의 종교를 갖게 되는 영화도 있고,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처럼 500년 시ㆍ공간을 불교의 환생과 윤회, 인연, 인과응보, 업보 등의 관념으로 여섯 개 이야기를 얽는 형태로 영화를 이끌기도 한다. 그럴수록 영화적 구성이나 내용에서 가톨릭적 특질을 반영하는 진정성 있는 가톨릭 영화가 더 절실해지고 있다. '신앙의 해'를 맞아 가톨릭 통신사들이 추천하는 가톨릭 영화들을 골라 소개한다.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 연작=세대를 뛰어넘어 사랑을 받는 20세기 최고의 판타지 소설인 C.S. 루이스 원작'나니아 연대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2005년에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 2008년에 '나니아 연대기 : 캐스피언 왕자'이, 2010년에 '나니아 연대기 : 새벽 출정호의 항해' 등이 나왔다. 나니아 탄생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화와 함께 성경 주제가 얽혀 있는 세계 3대 판타지 문학의 하나로 꼽히는 역작으로, 수도자들조차 "하느님에 대해 더 깊이 체험하는 계기가 됐다"고 고백할 정도다. DVD로 나와 있다. ▲위대한 침묵(Into Great Silence)=필립 그로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2005)도 관상수도회인 카르투시오회 수도자들의 일상을 담아내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세상과 단절한 채 오롯이 기도와 공부, 노동뿐인 단순한 삶을 수백 년 넘게 이어온 알프스 계곡 카르투시오회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공동체의 일상을 담고 있다. 2장으로 구성된 DVD에는 제작 과정과 전 교황청 문화평의회 의장 폴 포파르 추기경 추천 영상도 함께 실려 있다. ▲신과 인간(Of Gods and Men)=자비에 보부아 감독의 영화 '신과 인간'(2010)은 이슬람권 알제리 산골 수도원을 배경으로 정치적 사건에 의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직면한 프랑스 출신 수사 7명의 고뇌와 갈등을 그린 영화다. 2010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그랑프리 수상작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 그리고 신앙적 결단과 이상이 현실과 괴리를 띠게 될 때 그로부터 빚어지는 갈등에 초점을 맞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지난해 1월 국내에서도 개봉돼 화제를 뿌렸다. ▲잔 다르크의 수난(The Passion of Joan of Arc)=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걸작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이 첫 손에 꼽힌다. 칼 드레이어의 마지막 무성영화로, 비평계에선 잔 다르크라는 성녀를 다룬 가장 뛰어난 영화로 평가했지만 흥행에선 참패했다. 이 영화에서 잔 다르크 역을 맡은 배우 팔코네티는 감독 지시에 따라 아무런 분장을 하지 않고 등장했다. 잔 다르크나 심문자들을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촬영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국내에선 출시된 적이 없어 아쉽다. 다만 최근에 베네딕도 미디어에서 자크 리베트 감독의 '잔 다르크(Jeanne la Pucelle)'(1994)를 출시했다. ▲로메로(Romero)=엘살바도르 로메로 대주교를 다룬 존 듀이건 감독의 '로메로'(1989)도 특기할 만하다. 국내에선 베네딕도 미디어에서 비디오로 나온 적이 있지만,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아마존(www.amazon.com)같은 외국 쇼핑몰을 통해 구입이 가능하다. 늘 "복음이 누구에게 기쁜 소식인가?"하고 물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1980년 3월 피살된 로메로 대주교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전통을 사랑하고 고요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지만, 가난한 이들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한 뒤로 죽기까지 헌신한 그의 죽음은 자유와 평화의 씨앗이 되고 복음적 희망이 실현되는 신호탄이 됐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조은일2013.02.05
![[출판]성바오로딸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어르신 위한 '마태오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출간](//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5807_1.1_titleImage_1.jpg)
[출판]성바오로딸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어르신 위한 '마태오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출간 '새로 나는 성경 공부 '덕에 새로워지는 어르신들 신앙 인생 어르신 성경공부 인기강사 윤영란(일마, 바오로딸수도회) 수녀는 벌써 새해 시간표가 빡빡하다. 월요일은 대전, 화요일은 인천, 수요일엔 전주…. 어르신 성경공부 강의와 봉사자 교육으로 전국을 누비느라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최근 '새로 나는 성경공부' 새 교재 「마태오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가 출간돼 더 바빠졌다. 새 교재는 마태오복음서를 일주일에 1장씩 묵상하고 필사하도록 구성됐다. 또 성경말씀에 비춰 어르신들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알찬 내용(만들기, 노래부르기, 편지쓰기 등)으로 채워져 있다.(바오로딸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학생용 1만 4000원ㆍ교사용 1만 8000원) "바쁘지만 힘이 나요. 어르신들 만나고 오면 늘 감동이고요, 교육받을 때마다 달라지는 봉사자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껴요." 서울 미아동 바오로딸수도회 알베리오센터에서 만난 윤 수녀는 "새로 나는 성경공부 교재는 어르신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지만, 봉사자들과 함께 공부하면 더 좋은 책"이라며 "봉사자 역할이 중요하기에 봉사자 양성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했다. 8주 동안 일주일에 한 번 5시간씩 이뤄지는 봉사자 교육과정은 녹록지 않다. 봉사자들이 매시간 제출해야 하는 과제 분량도 만만치 않은 데다, 봉사자들은 교재 내용을 단순히 숙지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어르신들이 성경 말씀에 맛들이도록 이끌어주려면 봉사자 자신도 성경말씀을 가슴으로 체득해야 한다. "봉사자들에게 소명의식과 책임감을 강조해요.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성경공부를 통해 남은 삶을 더 기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윤 수녀는 "봉사자들이 교육을 받으면서 오히려 본인들이 성경에 새롭게 맛들이고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또 어르신들과 만나면서 얻는 남다른 감동과 보람에 어르신들보다 (어르신 성경공부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윤 수녀는 "새로 나는 성경공부 교재는 어르신들이 직접 성경을 써보도록 하기도 하고, 색칠하기, 만들기, 기도하기 등 말씀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꾸며진 것이 장점"이라면서 "일상생활에서도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 어르신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갈수록 노인사목이 중요해지잖아요. 어르신들은 신앙심은 그 누구보다 깊지만, 성경 한 번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분들이 대다수에요. 글을 못 읽으시는 분들도 있고요. 하느님 말씀의 참뜻과 참맛을 알려드리고 남은 삶을 하느님과 함께 더 행복하게 사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새로 나는 성경 공부를 강력 추천합니다." 박수정 기자 조은일2012.12.25

아,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욥 31,35)[월간 꿈CUM] 테마로 읽는 구약 성경 – 듣기 (01) 렘브란트,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안은 시메온, 1669년, 캔버스에 유채, 98x79cm, 국립미술관, 스톡홀름, 스웨덴 우리 시대에는 말이 끊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새벽 시간만큼은 티브이도 말을 멈추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밤낮 없이 말과 말 사이의 틈새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말이 넘쳐난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대부분은 티브이, 라디오, 공공장소의 확성기 등을 통해 흘러나오는 일방적인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들어주지도, 응답하지도 않습니다. 소통을 위한 말이 아니죠. 그래서 우리가 고독, 불행, 정신적 충격 등에서 벗어나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처럼 들음이 없어 대화로 나아갈 수 없는 말은 단순한 정보전달 이상을 넘어서기 어려운 한계를 지닙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에게 들으라고 말씀하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생명을 낳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즉, 말씀은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루카 7,15) 또한, 말씀은 우리보다 먼저 있으며, 우리가 자신의 기원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요한 복음서는 하느님을 말씀과 동일시하며,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가 그러하듯이, 인간은 말씀을 듣고 응답함으로써 인간답게 되어갑니다. 그러니 말씀은 인간의 표지인 동시에 신의 표지인 것입니다. 나의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값진 선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선물을 받지 못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지 않은 지독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런 욥을 위로하기 위해 세 친구가 찾아오지만, 그들은 정작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의 말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욥은 흠 없고 올곧은 인물입니다.(욥 1,1)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의로움에 합당하지 않은 지독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런 욥을 위로하기 위해 세 친구가 찾아오지만, 그들은 정작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의 말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게나, 죄 없는 이 누가 멸망하였는가?”(욥 4,7) 고통 중에 있는 이와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갇힌 이들이 만나면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이가 하는 말과 무관하게 그들의 입술에는 이미 정해진 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을 정당화하려는 목적만을 가진 그들에겐 말이 너무 많아서 들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만남은 대화보다는 자백을 강요하는 심문에 가깝게 됩니다. 이것은 고통받는 이에게는 쓸모없는 말일 뿐입니다. 욥은 제발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부르짖습니다. 내 말을 귀담아듣게나. 그것이 바로 자네들이 나를 위로하는 것이네. 참아 주게나, 내가 말을 하게. 내 말이 끝난 뒤에 비웃어도 좋네.(욥 21,2-3) 하지만 욥의 친구들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불편한 말 앞에서 귀를 닫곤 하죠. 자신을 보호하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들의 모습이 욥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보십시오. 그러나 자네들은 거짓을 꾸며 내는 자들, 모두 돌팔이 의사들일세. 아, 자네들이 제발 입을 다문다면! 그것이 자네들에게 지혜로운 처사가 되련마는.(욥 13,4-5) 마치 손을 댈수록 환자를 더욱 고통스럽게만 하는 돌팔이 의사처럼 친구들이 말을 하면 할수록 위로가 아니라 괴로움만 더해집니다. 이제 욥의 말을 들어줄 분은 하느님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분께 여쭙고 하느님께 항변하고 싶을 따름이네.(욥 13,3) 과연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귀를 기울여주실까요? 네! 하느님께서는 욥의 말을 다 들어주십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가운데 하나인 하느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응답하셨다.(우리말 성경에는 ‘말씀하셨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욥 38,1) 응답은 들음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욥은 깨닫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한 그에게까지 몸을 낮춰 말씀을 다 들어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제 욥은 절망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욥의 말을 들어주시고, 욥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우리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우리 말을 들어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아마추어미술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 cpbc2026.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