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사순 제1주일 - 나쁜 것이 실은 좋은 것입니다](//cpbc.co.kr/CMS/newspaper/2023/02/rc/841215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사순 제1주일 - 나쁜 것이 실은 좋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 우리 교회는 언제부터 유혹에 약해졌을까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국교로 선언하고부터라고 합니다. 끔찍했던 박해상황에서 절대 권력의 비호를 받자 승리감에 도취했을까요? 봉사 직분이 권력화되고 성직자들의 재산축적 등이 문제가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식생활의 탐식, 고위성직자들은 제후들의 복색을 흉내 내고 세속의 가치관에 따라 승리를 구가합니다. 악마의 수법이 저절로 먹히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느 정도 박해가 있어야 건강하다는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 스스로 일종의 박해상황을 연출하는 겁니다. 악마의 광야로 예수님을 내몬 것은 사탄이 아니라 성령이었습니다. 1. 유혹에 기죽지 말자예수님도 유혹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유혹은 진저리나고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유혹을 느끼는 것, 그 자체가 죄가 아닙니다. 유혹을 통해 튼튼해질 수도 있습니다. 나약한 자신을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유혹 속에 빠져,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뜻밖에도 따뜻하고 인간적입니다. ‘너는 사십일 동안 곡기를 끊었다. 이젠 건강을 돌봐야 한다. 넌 충분히 먹을 자격이 있다.’ 너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냐고 너스레를 떱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이리저리 끌고 다닐 능력도 있습니다. 거룩한 도성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 영적 세속성(공명심)으로 한껏 부풀립니다. 또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 권세와 재물을 거머쥐는 환상을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칩니다. 2. 양날의 칼인 말씀‘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첫 번째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유혹도 모두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확실한 무기입니다. 그렇다고 그저 도구나 수단이 아닙니다. 말씀은 절개(節槪)를 지켜 받들어야 할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당신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하십니다. 사십일을 굶었지만,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예수님의 기개(氣槪)가 놀랍습니다. 말씀은 양날의 칼입니다. 사탄을 베어내기 전에 내가 베어져 나가도 좋다고 각오해야 합니다. 죽어야만 사는 이치입니다. 성경 공부를 하고 말씀을 이해하는 정도로는 안 되나 봅니다. 악마도 그 정도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 땐, 아예 말씀을 들어 주님을 유혹합니다. 말씀으로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거나 누구를 공격해선 안 됩니다. 그건 악마의 수법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 다소곳이 우리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저는 성경(토라)을 일곱 번 꿰뚫어 읽었습니다. 이제 뭘 해야 합니까?” 스승이 답합니다. “그럼 성경(토라)이 너를 몇 번이나 꿰뚫어 읽었느냐? 히브리서는 말씀의 실체를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리 4, 12)관절과 골수를 가른다는 말씀이 무섭습니다. 가슴을 치는 정도로는 어림없나 봅니다. 말씀 앞에선 벌거벗겨지고 속셈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날이 바짝 선 말씀 앞에 서 계십니다. 광야는 장소라기보다는 말씀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광야의 시간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욕망 속에 숨어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나쁜 것이 실은 좋은 것이다.’ 그리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은밀하게 속삭이는 사탄이 꼼짝 못 하겠지요. 은총의 사순 시기이길 빕니다.서춘배 신부(의정부교구 병원사목위원회) cpbc2023.02.21

소금 이야기삶의 길 (3) 고대사회에서 소금은 아주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값도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소금이 화폐 대신 사용되었고, 월급(임금)도 소금으로 줄 정도였습니다. 고대 로마인들 시(詩)에 보면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태양과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이 없다.” 예수님 시대에도 소금은 금보다 더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소금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첫째, 소금은 ‘순결’과 ‘순수성’을 상징했습니다. 왜냐하면 소금은 순수한 태양과 깨끗한 바다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태양신을 믿었던 로마인들은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마다 반드시 소금을 바쳤습니다. 둘째, 소금은 ‘방부제’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도 소금은 고기나 생선이 썩지 않도록 하는데 사용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소금은 단순히 음식을 썩지 않도록 하는 방부제 역할을 넘어 시신이 썩지 않도록, 영혼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영원성’을 지닌 종교적인 의미도 담고 있었습니다. 셋째,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건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음식의 맛을 내는 다른 조미료나 첨가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소금으로만 간을 맞추고 맛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첫째, 소금이 순결과 순수성의 상징이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깨끗함의 모범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날 같이 정직과 정의가 짓밟히고 사라져 가는 이 세상에서, 양심과 도덕이 타락해 가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만큼은 제발 정직하고, 정의롭고, 양심적이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소금이 방부제 역할을 하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성적으로 점점 타락하고 있는 이 세상이 더 이상 썩지 않도록 방부제의 역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다가 썩지 않는 이유는 3%의 염분 때문입니다. 3%의 염분 때문에 거대한 바닷물이 썩지 않고, 그 속에서 많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이 아무리 썩어도, 세상이 아무리 부패되어도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있기에 세상은 희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셋째, 소금이 음식의 제 맛을 내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가 먼저 인생을 맛있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해서, 믿음을 잃어버린 이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잃어버린 이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잃어버린 이 세상 사람들에게 참다운 인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삶을 통해서 보여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먼저 세상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인생을 맛있게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도 이런 우리의 맛있는 인생을 보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바로 세상의 더러움과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글 _ 이창영 신부 (대교구대교구, 월간 꿈CUM 고문) 1991년 사제 수품. 이탈리아 로마 라테란대학교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교회의 사무국장과 매일신문사 사장, 가톨릭신문사 사장, 대구대교구 경산본당, 만촌1동본당 주임을 지냈다.cpbc2023.10.11
[현장 돋보기] 그는 과연 어디 문을 두드렸을까이학주 요한 크리소스토모(신문취재팀 기자) 그리스도교를 믿어볼까 고민하는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가톨릭은 뭐고 개신교는 뭔지, 서로 어떻게 다른지도 모른다. 그저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라는 것만 막연히 인지할 따름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는 성경 구절도 마음에 든다. 요즘처럼 인심이 각박한 세상에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니, 그는 이 말에서 느껴지는 숭고함과 따뜻함이 좋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여전히 정확히 모른다. 궁금증이 극에 달한 그는 가장 먼저 보이는 십자가 달린 건물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 마침 눈앞에 두 곳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런데 각각 상반된 현수막이 내걸린 것이 아닌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든 혐오와 차별, 편견을 반대합니다. 당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당신을 사랑하며 응원합니다.” “만약 당신의 아들이 며느리로 남자를 데려온다면, 당신의 딸이 사위로 여자를 데려온다면, 그래도 동성애를 찬성하시겠습니까?” 전자는 인천교구 은행동성당, 후자는 그 건너편에 있는 개신교 예배당에 걸린 현수막 문구를 인용한 것이다. 먼저 현수막을 내건 쪽은 개신교회였다. 은행동본당 주임 김태영 신부는 지나가다 그 내용을 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제가 만약 결혼해서 너무나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그 아이들이 어느 날 ‘아빠, 나는 사실 동성애자예요.’, ‘아빠, 나는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로 살고 싶어요. 나는 트렌스젠더예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분명 당혹스럽고 괴롭고 자책감에 시달리고 사람들 눈치도 보겠죠. 하지만 결국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고, 그들과 함께 걷게 될 거예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들과 딸이니까요.” 그리스도교를 믿어볼까 고민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랑을 알고자 하던 그는 과연 어디 문을 두드렸을까. 이학주2023.05.31

“종교와의 협력은 과학관 발전의 토대…성당·절·교회 어디든 찾아 갑니다”[이상도 선임기자의 톡(talk)터뷰] 울진 국립해양과학관 김외철(베드로) 관장 울진 국립해양과학관 김외철 관장이 활짝 웃고 있다. 본지는 심층 인터뷰 코너 ‘이상도 선임기자의 톡(talk)터뷰’를 시작한다. 톡터뷰는 가톨릭 신앙 속에 사는 국내 인사, 또는 가톨릭교회가 지향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인물을 때마다 만나 그들의 삶과 일, 인생관, 신앙 이야기를 생생히 전하고자 한다. 첫 인물로 성당 등 종교 기관과 협력을 통해 국가와 지역 발전을 꾀하고 있는 경북 울진 국립해양과학관 김외철(베드로) 관장을 만났다. 과학관 상징 고래인 이유 고래 몸속에서 나오는 쓰레기 기후 위기 심각성 알리는 역할 권위 내려놓고 홍보 앞장 식당·카페 등서 직접 명함 건네 버스 정류장 안내 표지도 바꿔 환경 실천가 텀블러와 손수건 쓰고 30분 거리 걸어서 출퇴근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성당 등 종교시설을 찾는 이유 올해 초 기사 하나가 눈길을 확 끌었다. 해양수산부 산하 국립해양과학관 김외철 관장이 울진군청·노인회 등 군내 각종 단체는 물론, 성당과 교회·절·향교를 방문해 과학관을 찾아달라고 홍보한다는 내용이었다. 국가기관의 수장이 정부나 국회는 물론, 종교기관까지 넘나들며 만나는 열정이 궁금했다. 경북 울진은 아직 고속도로가 연결되지 않은 전국에서 얼마 남지 않은 외진 곳으로, 서울에서 약 4시간 걸린다. 울진군 죽변면 국립해양과학관에 도착한 건 오후 3시 무렵. 1층 관장실에 갔지만, 정작 주인은 자리에 없었다. 관장의 업무를 돕는 비서는 “‘불영사’ 최고 어른인 회주 일운 스님을 만나러 갔다”고 귀띔했다. 불영사는 신라 시대 진덕여왕 5년(651년)에 의상 대사가 세운 천년 고찰로, 울진을 대표하는 절이다. 10여 분 후 도착한 김 관장은 선물로 받은 강정을 내놓으며 “회주 스님이 불자들과 함께 과학관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종교와의 협력은 과학관 발전의 토대”라고 말했다. “알다시피 종교가 있는 사람들에게 종교생활은 ‘일상’입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인데요, 성당에 가면 교우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관장으로 부임해 처음 이곳에 와서 성당·절·교회를 가리지 않고 찾아가니까 일부 직원들은 한편으로 의아한 눈길을 보내더군요. 하지만 성당과 절·교회는 지역 여론에 큰 영향을 주는 곳이기에, 제가 가면 국립해양과학관이 그들에게도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고, 그러면 그분들이 우리 기관을 방문하게 될 겁니다.” 김 관장은 “과학관 고객에 사각지대가 있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누구나 우리의 고객이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틀에 박힌 관념을 흔들고(Shake), 배우며(Study), 국민을 섬기는(Serve) ‘3S 정신’이 필요합니다.” 울진 국립해양과학관을 방문한 불영사 회주 일운 스님과 함께한 김외철 관장. 국립해양관의 상징인 고래를 배경으로 기념촬영했다. 과학관 상징 고래, 해양오염 심각성 전달 국립해양과학관은 국내 유일의 해양과학 전문 교육·전시·체험 기관이다. 2020년 7월 31일 개관했다. 경북 울진에서 국가가 운영하는 유일한 중앙공공기관이다. 축구장 11개를 합쳐놓은 넓은 면적에 10개의 전시실, 393m에 이르는 국내 최장 해상 통로를 지나 바닷속 세상을 만나는 해중전망대, 다양한 심해어류 조형물을 전시한 잔디 광장, 어린이 놀이시설이 있는 해맞이공원 등을 갖추고 있다. 국립해양과학관의 상징은 고래다. 방문객이 처음 도착하는 본관 앞에는 고래의 머리와 몸통뼈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전시실에는 우리 바다에서 잡힌 고래의 뼈가, 파도소리놀이터에는 고래를 응용한 놀이시설이 갖춰져 있다. 관장실 포토존 배경도 고래다. 온 가족이 국립해양과학관을 방문하면 자연을 이해하고, 나아가 아이들이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다. 김 관장은 “고래는 해양 생태계의 최상위 동물로 생태계 보호 및 기후 위기 심각성을 알리는 일등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우리 전시관에는 각 대륙에서 버려진 쓰레기들이 해류를 타고 모여들어 거대한 쓰레기 지대를 형성하는 과정이 전시돼 있습니다. 고래는 지구 상에서 가장 큰 동물로, 해양생태계 최상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고래 몸속에서 해양 쓰레기가 나옵니다. 고래를 통해 아이들에게 해양오염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산화탄소를 몸속에 저장하는 고래는 기후 변화를 크게 완화시킬 수 있는 자연의 도우미 역할을 한다는 걸 아는 이들은 많지 않죠. 제가 곳곳을 다니며 저희 기관을 알리는 것도 모두 자연의 소중함을 전하기 위한 것이죠.” 울진 국립해양과학관 본관 앞 고래 모형. 국립해양과학관의 상징은 고래다. 고래는 해양생태계의 최상위 동물로 해양오염은 물론 기후변화에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립해양과학관 제공 과학관은 지역사회와 ONE-TEAM(한 팀)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인해 과학관은 그간 울진에 사는 지역민들에게도 생소했다. 김 관장은 차관급 관장이란 권위를 버리고 과학관 알리기에 팔을 걷어붙였다. 가장 먼저 해양과학관이 있는 ‘울진 알리기’에 착수했다. 먼저 국립해양박물관 앞에 울진이라는 지역명을 넣어 ‘울진 국립해양박물관’이라 표기했다. 이어 ‘울진’이 들어간 과학관 점퍼를 만들고 명함을 제작했다. 또 울진군에 부탁해 버스 정류장 안내 표지도 바꿨다. 그 후 본격적인 홍보에 나섰다. 기자가 찾은 날도 김 관장은 죽변항 근처 식당과 카페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명함을 건넸다. “취임 후 제가 사는 아파트 입주민들에게 과학관에 꼭 한 번 놀러 오시라고 제일 먼저 명함을 쭉 드렸습니다. 미장원·이발소 문도 두드리며 다녔죠. 얼마 전 동해지구 성당 9곳이 모이는 지구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명함 드리며 방문을 요청했죠. 우리 바다, 우리 자연 보러 오시라고요.” 김 관장은 “해양과학관은 육지의 섬이라고도 불리는 울진에 있다"며 “지역 사회가 외면하면 해양과학관은 ‘울진의 섬’이 될 것”이라면서 지역 사회와의 협력을 강조했다. “울진군은 올해 ‘1000만 관광객 달성’을 군정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해양과학관은 올해 크리스마스 전까지 누적 관람객 100만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지역 내 다양한 인프라를 융합해 국민들이 만족하고 가실 수 있도록 지역 사회와 ‘ONE-TEAM’ 정신으로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포부는 당차다. “국립이란 이름에 걸맞게 전 국민이 찾는 진정한 해양과학관이 돼야 합니다. 임기 3년 동안 지역민들과 소통을 늘리고, 작지만 꾸준히 변화를 추구하겠습니다. 또 학생들이 더 많이 견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들 중에 진짜 세계적인 해양과학자가 반드시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김 관장은 종이컵 대신 텀블러, 그리고 일회용 휴지를 줄이기 위해 페트병 등 재활용 플라스틱을 이용해 만든 손수건을 사용한다 일회용품 줄이기⋯ 신앙과 생활 김 관장은 환경 실천가다. 종이컵 대신 텀블러, 그리고 일회용 휴지를 줄이기 위해 페트병 등 재활용 플라스틱을 이용해 만든 손수건을 사용한다. “우리 화장실엔 손 닦는 일회용 휴지가 없습니다. 한 장이든 두 장이든 그게 나오려면 많은 나무가 희생을 당했을 거 아닙니까? 관장실에서 회의할 땐 머그컵이나 텀블러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실천하지 않으면서 해양 쓰레기를 말하는 건 위선입니다. 그런 짓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관용차를 타지 않고 걷는다.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서다. “저는 매일 아침 관사에서 해양과학관까지 30여 분을 도보로 출퇴근합니다. 그러면 아주 아름답고 평화로운 ‘죽변공소’를 지나게 되죠. 매일 국민들과 우리 해양과학관 임직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니다.” 김 관장의 세례명은 ‘베드로’다. 서울에서는 잠원동본당, 울진에서는 울진본당과 죽변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잠원동 집을 구할 때 유일한 조건이 성당이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마태오 복음 23장 11절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 김외철 관장은 국무총리비서실 정무기획비서관·정무운영비서관·시민사회비서관을 지냈다. 경상북도 서울본부장, 한국인공지능협회 상근부회장을 거쳐 2023년 12월 국립해양과학관 2대 관장에 취임했다. raelly1@cpbc.co.kr 이상도 선임2024.03.27

“기도는 일상 속 분단의 감정 이겨내는 힘”주교회의 민화위 연구교육분과장·서울 민화위 부위원장 정수용 신부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에페 4,18)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연구교육분과장이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부위원장 정수용 신부는 성경 구절을 소개하면서 “분단은 우리 마음을 어둡고 완고하게 만들며 미움과 폭력을 낳았다”고 말했다. 한 세대를 넘는 갈등을 평화학에서는 ‘고착화된 갈등’으로 여긴다. 정 신부는 “70년간 이어진 분단의 세월은 나와 너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적인지 친구인지 명확히 구분하는 문화를 자리 잡게 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북한을 향한 태도나 일상에 스며든 평화 의식은 신앙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게 조사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 신부는 “그럼에도 혐오와 경쟁, 배척으로 물든 분단의 문화를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교회 전통 안에 있는 환대의 정신”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기도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사제나 신자들과 모임할 때, 밤 9시가 되면 여기저기서 알람이 울립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를 하죠. 회의 중이든, 식사 중이든, 심지어 술자리에서도요. 기억하는 한 살아있고, 기도하는 한 이루어집니다. 기도는 분명 혐오와 증오 등 일상 안에 자리 잡은 분단의 감정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화해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을 당부했다. 정 신부는 “오랜 시간 이어온 한반도 갈등은 어느 한순간 몇몇 정치인이 풀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며 “일상 안에 드러나는 많은 갈등 속에서 성찰과 회개를 통해 화해를 이루는 일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우리는 누구나 미성숙합니다. 그러나 성찰을 하면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고, 회심 또한 이뤄집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도식에서 벗어날 수 있지요. 우리가 무감각한 마음을 깨우고 분단을 극복하고자 할 때 한반도와 우리 일상에는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가 자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 박민규2023.06.21
의정부교구 황주원·이상민·전솔이 신부, 페루·일본 파견 21일 의정부교구 선교 사제 파견 미사에서 (오른쪽부터) 전솔이·황주원·이상민 신부가 선교사로 파견되고 있다. 의정부교구 홍보국 제공 의정부교구는 21일 교구청 경당에서 교구장 이기헌 주교 주례로 ‘2023년 해외 선교 사제 파견 미사’를 봉헌하고, 황주원, 이상민 신부를 페루 트루히요교구에, 전솔이 신부를 일본 요코하마교구에 파견했다. 2004년부터 10년간의 선교 경험이 있는 황 신부는 “또 한 번 선교의 삶을 살게 되었기에 초심을 기억하며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오랜 시간 이주사목 분야에서 사목하면서 이주민·난민과 함께했던 이 신부는 “선교에 대한 열망을 새롭게 펼치게 됐다”고 밝혔다. 전 신부는 “어린 시절부터 선교를 꿈꿨다”며 “선교사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겠다”고 전했다. 이기헌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선교사는 그 지역의 사람, 역사, 문화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기쁨과 활력이 생긴다”며 “파견되는 나라에 대한 존중과 이해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낯설고 때론 외로울 수 있는 환경에서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꼭 필요하기에 성체조배와 성경 읽기, 기도 생활에 충실히 임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선교사로서 소명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행복하고 보람된 선교생활을 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의정부교구는 이번 3명의 사제를 포함해 일본, 캄보디아, 잠비아, 페루 등 지금까지 11명의 사제를 파견하며 해외 선교 사목에 기여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 박민규2023.04.24
![[금주의 성인]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 (9월 3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3/08/29/yIp1693285414086.jpg)
[금주의 성인]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 (9월 3일)540?-604년, 이탈리아 출생 및 선종, 교황, 교황권의 창시자 대 그레고리오 1세 성인은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펠릭스 3세 성인과 아가피투스 1세 성인으로 이미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한 유서 깊은 귀족이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법학 등 고등교육을 받고 573년 로마 시장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는 부모의 저택을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고, 그곳에 입회해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시칠리아에 있는 가족 소유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더 세웠습니다. 578년 베네딕토 1세 교황에게 부제품을 받고, 1년 뒤 펠라기우스 2세 교황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대사로 파견됐습니다. 로마로 돌아와서는 다시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펠라기우스 2세 교황을 도와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펠라기우스 2세 교황이 선종하자 그레고리오는 수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만장일치로 제64대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전염병이 로마를 휩쓸던 시기, 그는 출중한 행정 능력과 깊은 신앙심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레고리오는 교회 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하며 사제와 주교들의 영적 쇄신을 강조, 막대한 경비를 들여 기아와 전염병으로 시달리는 시민들을 구호하기 위한 자선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지혜롭게 교황청 재산을 관리했고,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키며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다인들을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레고리오는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중세 주교와 사제에게 교과서와도 같았던 「사목 지침서」, 「욥의 윤리」 등 각종 성경 해설집과 설교집, 당시의 신학 · 전례 · 역사 · 사회학과 관련한 800여 통의 서한을 모은 「서간집」, 「그레고리우스 전례서」 등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그는 교회의 성가를 재조정하고 그레고리오 성가도 제정하여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게르만족뿐만 아니라 영국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수도원장으로 재임할 때, 로마 시내에 영국에서 온 포로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 대한 연민을 품게 된 게 발단이었습니다. 교황이 된 후 그레고리오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40여 명의 수도자를 영국의 켄트 왕국에 파견했고, 요크 대교구와 캔터베리 대교구, 그리고 12개의 소속 교구를 설정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는 동시에,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함으로써 교황권이 지배가 아닌 봉사하는 특권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베네딕도 수도회를 면속해 교황의 권위 아래 두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대교황’이란 명칭으로도 불립니다. 그는 604년 3월 12일 로마에서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사후 즉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음악가, 가수, 학생, 교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그레고리오는 교회 미술에서 귓가에 비둘기가 자주 그려진 채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방대한 저작 활동을 할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의 귓전에 머무르며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습니다. cpbc2023.08.23

시행착오 거치며 제자리를 찾아가다[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20)자유와 순종 사이에서 (2)하느님의 교육법 예수님의 비유 중에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아버지의 명을 받은 두 아들의 이야기가 있다.(마태 21,28-32 참조)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습니다’하고 답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꿔 일하러 갔고,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하였지만 끝내 가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이는 맏아들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인생 역전’, ‘막판 뒤집기’ 등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에 관한 이야기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하느님도 결코 자녀에게 강요하지 않으신다. 찾고 물으며 스스로 답하기를 바라신다. 당신 뜻을 헤아리며 따를 때까지 기다리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교육법이다. 신앙은 자발적인 순종이다. 처음에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경험을 통해 신앙 안에서 진정한 순종은 자발적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아이가 커서 성인이 되는 과정과 흡사하다. 어렸을 때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한다. 부모님의 세상이 자기 세상이 되고, 부모님의 생각이 자기 생각이 된다. 그러나 커가면서 자기 삶의 책임을 질 준비를 하게 된다. 미래를 꿈꾸고 진로를 준비하며, 스스로 해야 할 것을 찾는 법을 배운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기 생각과 의지에 대해 의식하게 되고, 부모나 선생님의 권위에 도전 아닌 도전을 하게 된다. 양편 모두에게 힘든, 그러나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이 시기를 거치며 아이는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성인이 된다. 그리고 자기 삶을 스스로 살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며, 특히 부모님이 겪으신 것을 하나씩 겪어 나가며 부모의 생각과 뜻이 옳았음을 인정하며 그 뜻을 따르게 된다. 결국 자발적으로 부모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는 부모의 손을 잡고 성당에 다녔지만, 커가면서 신앙을 여러 면에서 불편하고 부자유스럽게 하는 족쇄처럼 느낄 수 있다. 몸과 마음이 성당에서 멀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세상 풍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다 보면, 결국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이 옳았음을, 그리고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분은 하느님과 교회뿐임을 깨달으며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된다. 이 점은 자신이 걷는 신앙의 길을 이해하고, 자녀를 신앙 안에서 키우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어느 순간 자녀가 신앙에 대해 묻고 불만을 표현할 때, 그것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여길 필요가 있다. 부모님의 권위에 따르는 피동적 신앙에서 자기 스스로 하는 자발적 신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그 길을 걸어왔음을 인정하며, 자녀가 경험하는 것을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논증으로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자녀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서로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앙과 삶에 대한 부모의 경험을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녀는 자기 이야기를 경청하며 삶의 이야기를 솔직히 나누는 부모님과의 대화 속에서 계속해서 좋고 옳은 것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만나는 하느님은 교리나 성경 속에 갇힌 분이 아닌, 우리 삶 안에 살아계신 분, 당신 자녀가 기쁘고 행복하기를, 자비롭고 정의로운 멋진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시며, 그분 앞에서 더욱 자유롭고 사랑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아름답고 환희에 찬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 ‘금쪽같은 내신앙’ 코너를 통해 신앙 관련 상담 및 고민을 문의하실 분들은 메일(pbcpeace12@gmail.com)로 내용 보내주시면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한민택 신부 cpbc2023.10.06
![[신앙단상] 노란 화살표(flecha amarilla), 생명과 인연의 표시(정운필 신부, 서울대교구 주교좌 기도사제)](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3/10/31/TS91698732676903.jpg)
[신앙단상] 노란 화살표(flecha amarilla), 생명과 인연의 표시(정운필 신부, 서울대교구 주교좌 기도사제) 정식 표시 말고도 주변에 노란색 화살표가 많이 있다. 포르투갈길에는 반대 방향으로 난 파란 화살표시가 있다. 어느 곳에 Fatima라고 씌여있느 것을 보니, 파티마로 향하는 도보길인가보다. 정운필 신부 제공 모든 산티아고길에는 표지석이나 안내표시 말고도 인쇄되지 않은 노란색 화살 표시가 있다. 이는 ‘생명의 표시’다. 누가 십계명을 “행복에 이르는 가이드 라인”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산티아고길 노란 화살표는 곳곳에 있는데, 화살표를 찾지 못해 심하게 헤매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생명이라고 절감한다. 출발부터 잘못 본 화살표에 반대로 갔지만, 화살표가 보이지 않을 때는 몹시 불안하다. 올바로 가고 있는지 이 화살표가 알려주는 것이다. 가끔 표시가 오래되어 흐리거나 길섶 풀숲에 가려져 있으면 지나칠 때가 있다. 셋째 날, 어둠 속 출발 후 묵주를 돌리며 한참을 가도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다. 특이한 갈림길이나 이상한 길도 딱히 없었는데, 기도에 아무 생각 없었나 보다. 그럴 때는 더 가지 말고 그곳에서 여기저기 우왕좌왕하며 화살표를 찾아야 한다. 최후 수단으로 웹 지도를 확인했지만, 더러는 깊은 산 속에서 소용이 없다. 많이도 잘못 왔다. 급격하게 꺾이는 길 한 귀퉁이 나무 밑에 표지목이 있었다. 특히 동트기 전에 출발하면 랜턴 빛에 노란색이 잘 안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갈림길이 나오면 여기저기 빛을 비춰 꼭 확인해야 한다. 의외로 엉뚱한 길이 많다. 그러면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 만나는 화살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화살표를 못 찾을 때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마을은 표시가 많이 있지만, 벌판이나 산을 갈 때는 화살표를 찾기 힘들다. 그럴 때 지나간 사람들의 흔적을 찾는 것인데, 불법 투기(?)한 휴지다. 이런 휴지와 심지어 진흙이나 흙탕길 발자국마저 화살표 노릇을 한다. 산티아고길에선 ‘쓰레기를 버릴 때는 잘 보이는 곳에 버려라’라는 불문율이 있다. 발자국도 아무 데나 남기면 안 되는 것이 혹여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계명이 부담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계명이 삶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표지라기보다 족쇄로 여기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 정확히 통치자들이 그랬다. 화살표처럼 계명을 곁에 항상 두는 것이 인생을 허투루 살지 않게 한다. 혹여 다른 사람의 비계명적 행위도 타산지석이라고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그러기 위해 일상에서 확실한 기준인 화살표를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한다. 포르투갈길은 제법 화살표만큼은 잘 되어있다. 간격도 적당해 불안해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부주의가 그렇게 만든다. 포르투갈길에는 노란 화살표 말고도 반대 방향으로 파란색 화살표가 더 있다. 파티마로 가는 표시다. 추측하건대 스페인 지역에도 있는 것을 보니 산티아고에서 파티마까지 걷는 표시인가보다. 그 길로 가는 몇몇 사람을 목격하기도 했다. 성당이 있어도 마을 중간에 경당들이 많다. 여기서도 도장을 찍을 수 있다. 정운필 신부 제공 걸으면서 많은 마을을 지나고 많은 사람도 스친다. 이들은 순례자에 인사(주로 Buen Camino!)할 때도 있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무표정이다. 오랜 시간 차량이 거의 없는 길을 운전하다 맞은 편 지나는 차를 보면서 ‘저 사람은 무슨 이유로 어디로 가길래 하필 이곳을 지나는 것일까?’, ‘왜 내가 지나는 바로 이 순간 지나가고 있는가?’ 자못 궁금할 때가 있다. 이런 생각에 대부분 인생무상을 떠올리지만, 그러면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도 뭔가 실낱같은 인연은 없을까 착각한다. 시골의 작은 마을을 지날 때 스친 이 노인은 어떻게 살아왔길래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나를 스치는가? 그의 인생 목적이 무엇이었기에 여기에 있는가?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지만, 나의 길이 바쁘다는, 언어와 습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나치면서 한편 속으로 주님의 축복을 빌기도 한다. 나름의 인생을 살아왔으리라. 상관없는 사람과 기억 못 할 시간에 스치는 것,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위로한다. 스치는 모든 사람이 소중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지금까지 나와 만났던 사람들, 앞으로 만날 이들은 얼마나 더 깊은 인연일까? 더욱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이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면 원상태가 되겠지만, 마음만큼은 이미 더 큰 사랑으로 풍부해질 것이다. 이는 이 순례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왔지만, 여기 사람들은 같은 곳을 향해 걷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쉽게 친해진다. 산티아고 포르투갈길에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으로 인해 깨닫는다. 내가 만나는 세상 사람은 모두 사랑해야 할 인연이라고…. 정운필 신부 / 서울대교구 주교좌 기도사제 cpbc2023.11.01

종교적 경계 넘어 보편적 가치 담은 조각들유영교 조각가 ‘구도’ 전시회 서소문성지 첫 작고작가 회고전 역사박물관서 26일까지 무료 관람 '구도'전이 열리고 있는 기획소강당.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제공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특별 초대기획전 유영교 조각가의 ‘구도(求道)’가 3일 개막했다. 유영교 로렌조(1946~2006) 작가의 작품을 한데 모은 이번 전시는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여는 첫 번째 작고작가 회고전이다. 유 작가는 홍익대 미술대학과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했고, 1974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국회의장상, 1975년 동 미술대전 특선을 수상하며 명성을 쌓았다. 1978년부터 8년간 이탈리아 로마와 카라라 등지에서 수학하며 다양한 돌의 물성과 국제적인 감각을 키웠다. 귀국 후 세계 각지의 돌을 이용해 인체의 단순함과 소박함을 표현한 조형물을 제작했고, 종교를 초월한 작품 활동을 통해 구도적 삶의 길을 걸었다. 실제로 1982년에 제작한 ‘베드로의 소명’, ‘욥’, ‘천신과 싸우는 야곱’ 등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작품인 반면 같은 시기에 제작된 ‘구도자’ 시리즈는 불교의 지혜와 깨달음의 세계를 갈구하는 인물상들이다. 부처의 깨달음과 바오로의 회심.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제공 대학원에서 유 작가를 만나 함께 유학길에 오른 아내 이은기(목원대학교 명예교수)씨는 “로마에서 당시 부제였던 유흥식 추기경의 도움으로 각각 로렌조, 엘리사벳이라는 세례명을 얻었다”며 “유 작가님이 성당에 열심히 나가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많이 읽었고, 따로 성미술에 집중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작품에 그 세계를 투영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유 작가가 삶과 작품세계에서 지향했던 ‘구도(求道)’를 주제로 여러 곳에 소장돼 흩어져 있던 그의 작품 35점을 모았다. ‘성경 주제의 작품들’, ‘구도자’, ‘열반’ 등의 시리즈 작품을 통해 불교에서 가톨릭까지 종교적인 경계를 넘어 작가가 추구했던 보편적인 가치를 소개한다. 또 다양한 ‘얼굴’의 모습을 담은 조형물은 자아와 타인에 대한 이해와 마주할 수 있도록, ‘샘’ 시리즈를 통해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천신과 싸우는 야곱. 홍익대박물관 제공 유영교 조각가의 ‘구도’전은 오는 26일까지 서울 중구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정기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원종현 관장 신부는 “스스로의 길을 찾고자 했던 수많은 노력을 예술이라는 조형언어에 담아주셨음에 감사드리고, 이 작품들을 통해 고 유영교 작가의 숭고한 뜻이 전시를 마주하는 모든 분에게 전달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문의: 02-3147-2401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22023.03.10

브뤼기에르 주교, 조선 땅 밟지 못하고 내몽골 마가자에서 선종‘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발자취를 따라서’ 중국 순례기 <하> 1931년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를 모시고 장엄 미사를 거행한 심양대교구 주교좌 예수성심대성당 입구 앞에서 순례단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조선을 찾아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출발해 중국을 종단하는 여행을 떠난 지 3년 만인 1835년 10월 7일.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달단(몽골) 땅 서만자에서 1년간 재정비한 끝에 마침내 조선으로 출발했다. 이듬해 1월 조선과 만주 국경지대에서 조선 신자들과 합류,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비밀리에 입국할 심산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그렇게 매년 겨울, 한 명씩 조선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가 떠난 지 24일 뒤인 1835년 11월 1일, 서만자에 남아 차례를 기다리던 동료 선교사 모방 신부에게 들려온 소식은 기대하던 내용이 아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0월 20일 저녁 8시 15분경 내몽골 마가자(馬架子) 교우촌에서 선종했다’는 비보였다. 혹독한 추위, 지독한 병마와 싸우며 10월 19일 마가자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찾아온 비극이었다. 향년 43세. 조선 교회 첫 목자는 그렇게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당시 펠리쿠(別拉溝)라고도 불린 마가자는 현재 내몽골 자치구에 속한 적봉시 동산향이다. 서만자교구와 동쪽으로 맞닿은 적봉(赤峰)교구 관할이다. 순례단은 브뤼기에르 주교 발자취를 따라 서만자를 떠나 4월 18일 마가자로 향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1897년 찍은 마가자 브뤼기에르 주교 묘비(위 사진)와 2005년 복원된 묘지.(아래 사진) 브뤼기에르 주교, 마가자에서 선종 서만자에서 하북성과 내몽골 자치구 경계를 넘어 무려 700㎞쯤 가야 마가자에 다다른다. 거침없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서한집」을 펼쳐 브뤼기에르 주교 생애 마지막 순간을 복습했다. 추위로 병세가 심해져 평소 좋아하던 우유조차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브뤼기에르 주교. 생애 마지막 날 그는 저녁 식사 후 머리카락을 땋던 중 돌연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침상에 누워 괴로워하며 불어로 말한 ‘예수·마리아·요셉’이 유언이 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간 고된 여정으로 인해 서만자를 떠나기 전 이미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평지가 아닌 곳을 걸을 때는 15분마다 쉬어야 했고, 두통과 구토로 몹시 괴로워했다. “저는 주교님의 죽음을 예견하고 두려워했었습니다.” 곁에서 지켜본 모방 신부 표현이다. 비보를 접하고 곧장 마가자에 온 모방 신부가 장례 예식을 주례했다. 장례 미사 후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신은 마가자 교우들 묘지에 안장됐다. 1835년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이었다. 모방 신부 요청에 따라 교우들은 무덤에 묘비를 세웠다. ‘탁수(鐸首) 소공지묘(蘇公之墓) 도광 15년 8월 29일립(道光十五年八月二十九日立)’이라 새겼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1835년 8월 29일(양력 10월 20일) 선종’이란 뜻이다. 소(蘇)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식 성(姓)이다.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주교 유해가 한국으로 이장된 뒤에도 묘비는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1960년대 문화대혁명에 휘말려 사라진 것으로 한때 알려졌다. 사실 묘비는 이웃 마을에서 섬돌로 쓰이고 있었고, 선종 170년 만인 2005년 발견돼 본래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은 비석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1912년 지어진 심양대교구 주교좌 예수성심대성당. 순례단, 난관에 부딪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내몽골 자치구 정부가 순례단 진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절차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은 없었다. 순례단과 적봉교구 차원에서 각각 방문신고를 했고, 우려할 만한 행동도 하지 않겠다고 알렸다. 그러나 끝끝내 진입 허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계획했던 마가자와 적봉 주교좌성당 탐방은 무산되고 말았다. 눈치를 살피며 잠시라도 둘러볼 수 있었던 서만자와 달리, 방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특히 새 순례길 개척에 대한 기대가 컸던 순교자현양회 성지 해설사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 원종현 신부가 순례단을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순례가 길을 열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지속되고 관심을 갖는다면 언젠가 문이 열리겠죠. 그 마음을 갖고 꾸준히 발걸음을 지속합시다. 마태오 복음서 7장 7절을 기억하자고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브뤼기에르 주교가 「여행기」에 남긴 문장이 떠올랐다. “내 계획에 맞서게 될 무수한 어려움에 대해 환상을 키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들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서는, 가서 그들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과연 순례단이 지금 처한 상황이 190년 전 브뤼기에르 주교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난관 끝에 고대하던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결국 멈춰버린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래서 오히려 브뤼기에르 주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뜻깊은 순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순례에 함께한 김기혁(베르나르도)씨도 “순례가 계획대로 쉽게 흘러갔다면 오히려 기억에 남지 못할 것”이라며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조선 사랑을 더 깊이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 원종현 신부가 심양대교구 주교좌 성당에서 우연히 미사에 참여한 중국 동포 신자와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이송로 따라 심양으로 순례단은 마가자를 건너뛰고 다음 행선지인 요녕성 성도 심양(瀋陽)으로 향했다. 공교롭게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 발자취를 밟은 셈이 됐다. 앵베르 주교도 서만자에서 바로 심양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전임자를 보고 한겨울 내몽골 초원 지대를 건너는 것이 극히 위험함을 깨달아서다. 심양은 북경과 한양을 오가는 조선 사신들이 반드시 들르는 도시였다. 과거 봉천·묵덴·성경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 곳으로, 청나라 초기 수도이기도 하다. 그 위치는 우리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만주 요동(요하 동쪽)이다. 과거 고조선과 고구려·발해가 다스렸던 땅이다. 오늘날에도 동포가 많이 살아 ‘한인촌’이 형성돼 있다. 심양을 찾은 까닭은 1931년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이송로에 속하기 때문이다. 1931년 8월 8일 조선대목구가 동몽골대목구에 협조 서한을 보내고, 10월 15일 마침내 서울 용산성당 성직자 묘역에 유해가 묻히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당시 만주와 한반도는 일제가 부설한 철도로 이어져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마가자에서 심양까지 옮겨진 뒤 기차에 태워져 서울로 이동했다. 봉천역(현 심양역)에서 안봉선을 타고 안동(현 단동)역까지 간 다음, 압록강을 건너 다시 신의주역(현 신의주청년역)에서 경의선을 타고 경성역(서울역)으로 향하는 경로였다. 동몽골대목구청이 보낸 유해는 1931년 9월 17일 봉천(심양)교구장 블루아 주교에게 전해졌다. 일제가 심양 근교에서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고작 하루 전 일이었다. 유해는 9월 22일 심양역에서 기차에 실려 조선으로 떠났다. 그리고 이틀 뒤인 9월 24일 마침내 서울에 도착했다. 그렇게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종 96년 만에 그토록 그리던 한국 땅을 밟게 됐다. 가슴 벅찬 역사의 현장인 심양역은 1910년 지어진 서양식 근대 건물이었다. 지금도 새 역사와 함께 기차역으로 쓰이고 있다. 붉은 벽돌과 청동 돔은 1925년 준공된 옛 서울역(문화역서울284)과 닮았다. 도쿄역을 비롯한 일제 초기 건축물의 특징이다. 만주가 여러모로 우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란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심양대교구 주교좌 예수성심대성당은 유해가 서울로 가기 직전 모셔진 곳이다. 이곳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위한 장엄 미사를 거행했다. 순례단은 1912년 지어진 이 웅장한 고딕 성당에 들어가 중국어 미사에 참여했다.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 신자도 많이 보였다. 40분이 넘는 강론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일부 신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경청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사 후 통역에게 묻자 가정과 국가에 충성하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성당 경내를 둘러보니 ‘중국몽’과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등에 관한 문구가 여러 군데 적혀 있었다. 심양에서 유해를 태우고 출발한 기차는 1911년 지어진 압록강 철교를 지나 한반도에 들어왔다. 압록강 철교는 반쯤 끊어진 채 지금도 신의주 건너편 국경도시 단동에 남아있다. 6·25 전쟁 때 중국의 북한 지원을 막기 위해 미국이 폭파한 흔적이다. 지금은 ‘압록강 단교’로도 불린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는, 과거와 달리 이젠 건너갈 수 없는 압록강을 바라보며 이번 순례를 되새겼다. 그리고 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1911년 지어져 6·25 전쟁 때 끊긴 압록강 철교(오른쪽) 너머로 북한 신의주가 보인다. 왼쪽에 있는 온전한 다리는 1943년 준공된 ‘조중우의교’다. 압록강 철교와 함께 파괴됐으나 이후 중국 정부가 복원했다. 압록강 바라보며 브뤼기에르 주교를 생각하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정은 결코 실패가 아닌, 미래를 위해 가치 있는 크나큰 도전이었다. 그를 대신해 국경으로 향한 모방 신부는 1836년 1월 13일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인 선교사가 됐다. 그리고 모방 신부가 선발한 조선인 신학생 중 2명은 훗날 한국인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제가 됐다. ‘피의 순교자’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땀의 증거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다. 모방 신부에 이어 1836~1837년 샤스탕 신부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잇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세 선교사는 목자 없이 30년 넘는 세월을 버텼던 양 떼를 돌보다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 마침내 성인품에 올랐다. 이후로도 더 참혹한 박해를 겪었지만 한국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성장해나갔다. 그리고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선도적인 지역 교회로 거듭났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2년 조선을 향해 떠나며 예언한 바가 끝내 이뤄진 것이다. “가톨릭교회 확장을 바라는 이들에게 조선 선교가 중요시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로 신앙의 뿌리가 조선에 깊이 내린다면,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 거기서부터 복음의 빛이 북쪽 몽골과 조선 인근 여러 섬으로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빛은 예소 섬(홋카이도)과 일본에 두 번째로 비칠 것입니다.”(「서한집」) 2031년은 조선대목구 설정 200주년이다. 이때를 전후로 많은 신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자 할 것이다. 훗날 그들에게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와 떠난 이번 순례가 분명 도움이 될 터다. 190년 전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정이 그랬듯이. 「서한집」에 적힌 문구로 순례기를 마친다. “복음의 씨앗이 이미 백 배의 열매를 맺은 이 낯선 땅에서 장차 복음이 크게 발전할 게 틀림없습니다. 이런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이학주2024.05.22

책 읽기 능력 향상은 훈련·학습에 의해서만 가능[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26. 스크린 훑기와 책 읽기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에게 종이책 읽기 회로는 사라지고, 디지털 읽기 방식의 뇌 회로에 의해 삶의 소통방식이 변화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태블릿 PC를 이용하는 모습. OSV 한 수련자가 “영적 독서 시간만 되면 졸리고 묵상 시간이 너무도 지루하고 힘들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는 중학생 때부터 오랫동안 게임중독에 빠져 살아왔다. 중독 상태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게임중독자의 뇌는 기억과 감정을 담당하는 뇌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그렇기에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지고 충동조절도 어렵다. 빠른 보상에 익숙해진 뇌가 멈춰서 깊이 읽고 천천히 사색하는 독서와 기도가 힘겨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디지털 매체의 등장으로 독서 감수성이 아주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누군가는 진화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퇴화라고 할 것이다. 독서 인구가 많이 감소하고 있다. 동시에 원하는 정보만 읽는 전자책 발췌 독서 인구는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추천 알고리즘’에 의해 편리함과 편향이 책 읽기까지 영향을 주면서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부분만 발췌해서 읽는 추세다. 요즘처럼 검색과 전자책이 대세라면 완독을 해야 하는 종이책 읽기만을 고집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늘어가고 있다. 시대에 따른 보편적 감수성이 있으니 기존의 독서경험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라는 것이다. 종이책과 전자책에 대한 논란은 이미 식상한 화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요즘 누가 종이책 읽느냐?”며 무거운 종이책보다는 웹툰과 전자책이 익숙해지고 있는 시대라고 소리를 높인다. 하기야 몇 년 전만 해도 미사 중에 스마트폰 만지작거리는 행위를 보면 불경스럽게 보였는데, 최근에는 대놓고 스마트폰 꺼내 들고 성경 말씀을 읽기도 하고 성가를 부르는 것이 꽤나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사제가 태블릿 피시를 보면서 강론을 하거나 알림을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나 역시 수녀원 아닌 곳에서는 스마트폰으로 기도한다. 그런데 기도했다는 의무감에서는 해방되었는데 뭔가 모르게 불편하다. 나의 감수성이 또 어떻게 변화될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무거운 성무일도 책에서 느껴지는 특유한 향기, 종이를 만지는 손끝에서 전달되어오는 경건함이 좋다. “우리 뇌의 읽기 회로가 사라지고 있다.” 인지과학자인 매리언 울프의 말이다. 디지털 매체가 우리의 읽기 방식을 바꾸면서 ‘깊이 읽기’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한다. 깊이 읽기는 반성하고 사유하고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는 능력을 향상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깊이 읽기가 안되면 인지적 인내심도 서서히 잃게 되고 비판적 분석능력도 사라지고 무엇보다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도 잃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깊이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종이책을 읽으려면 몸과 마음이 멈춰야 한다. 그리고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집중해야 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에 따라 뇌도 마음도 차근차근 선형적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디지털 읽기는 다르다.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빠르게 이동한다. 무엇보다 비선형적인 하이퍼텍스트의 구조로 인해 산만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디지털 읽기 방식에 익숙해지면 종이책도 스마트폰 스크린을 훑듯이 빠르게 핵심만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을 읽을 때에도, 기도할 때에도, 미사에 참여할 때에도 스마트폰에서 정보를 훑어보듯 우리의 행동방식도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된다. 「다시, 책으로」에서 매리언 울프는 이런 현상을 ‘블리딩 오버(bleeding over)’라고 한다. 뇌의 가소성 원리에 의해 종이책 읽기 회로는 사라지고 디지털 읽기 방식의 뇌 회로에 의해 우리 삶의 소통방식이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책 읽기 능력 향상은 훈련과 학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스크린 훑기에 익숙해지면 책 읽기의 뇌 회로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디지털 읽기 방식으로 읽기를 배운 아이가 어른이 되어 신학교나 수도원에 들어와 신학이나 영성분야의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할 때, 혹은 긴 시간을 묵상해야 할 때 그들에게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과정이 될지 헤아려본다. 어쩌면 종이책 읽기는 단순히 정보습득을 위한 행위가 아닌 바로 영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어야 할 것 같다. 영성이 묻는 안부 어느 신경정신과 의사에 의하면 전자책을 읽는 사람의 뇌에서 마치 게임을 할 때처럼 비슷한 뇌파검사 결과가 나온다고 해요.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다른 중독성 있는 프로그램을 접속한 경험을 뇌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마치 게임중독자가 컴퓨터 켜는 소리만 들어도, 알코올 중독자가 소주 사진만 봐도, 담배 피우는 사람이 담배 연기만 맡아도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호르몬이 나온다는 연구결과와 상통하는 지점이 있지요. 디지털 시대에 종이책만 고집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노력하지 않아도 디지털 스크린엔 손이 가는데, 종이책은 의지적으로 선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네요. 지루하더라도 두꺼운 책에 손을 얹고 책의 속도에 맞춰 삶의 시간을 늦춰보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에서 견디기 힘든 고독을 품고 또 품어 ‘산만함’의 진통을 깨고 나온 ‘견딤’과 ‘멈춤’의 기쁨을 누려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즐겁게 춤을 추는 것보다 멈춰 느리게 존재하는 일이 더 즐겁고 행복할 수도 있으니까요. cpbc2023.06.28

“제가 이 일을 맡고 싶습니다. 제가 조선에 가고 싶습니다”[‘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10. 방콕에서 조선 선교 관할 여부 묻는 소식을 듣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샴대목구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 주교관에 머물며 신학교 교수로, 본당 사목자로,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선교사로 2년간 활동했다. 1922년 방콕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 Kraus, Johansen. 1827년 방콕 도착 후 곧바로 선교사로 활동 1827년 6월 3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방콕 도착 후 곧바로 선교사로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샴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님께서는 저의 첫 소임으로 신학교 운영을 맡겼습니다. 무엇보다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전 프랑스 카르카손교구 대신학교 교수로 오랜 기간 재직한 바 있어 신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 거의 모든 과목을 가르쳐야 했기에 힘들었습니다. 매일 철학과 신학 2시간·라틴어 수업 4시간, 매주 성경 2시간을 강의했습니다. 저는 소임 중 가장 우선으로 사제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현지인 사제를 양성한다는 파리외방전교회 설립 정신을 따르는 것일 뿐 아니라, 교구의 운명이 사제 양성에 달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방콕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3명뿐이었으나 22개월이 지난 1829년 4월 지금은 22명으로 늘었습니다. 저의 두 번째 소임은 본당 사목입니다. 방콕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 성 십자가 성당, 묵주의 성모 성당, 성모 승천 대성당 등 네 곳이 있습니다. 성모 승천 대성당은 성 십자가 성당에 주로 거주하시던 플로랑 주교님께서 주교좌 대성당으로 신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샴대목구의 모든 주요 전례와 행사가 이곳에서 거행됩니다. 저는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 주교관에 거주하면서 신학교를 운영하고, 주일이면 방콕 시내 네 성당에서 차례로 미사를 주례하고 성사를 집전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소임은 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님을 대리해 교구 행정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황청 포교성성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오가는 각종 문서를 처리하고 교구의 주요 살림살이를 챙기는 것이 주된 일입니다. 한마디로 총대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플로랑 주교님으로부터 받은 소임은 아니지만, 저는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아이에게 세례성사를 베푸는 일을 빼놓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선교사로서 제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방콕에 도착한 이래로 1600명의 어린이에게 세례를 줬습니다. 그들 모두는 외교인 부모의 자녀들입니다. 방콕뿐 아니라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많은 외교인 자녀들이 여러 질병으로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부모에게 허락을 받고 아이들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부모들에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현지인 신학생을 사제로 양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프랑스인 사제가 선교사로 이곳에 오면 수많은 현지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틈날 때마다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로 지원하라”는 편지를 조국의 신학생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플로랑 주교, 부대목구장 주교로 임명 청원 2년간 저를 지켜본 플로랑 주교님께서는 1829년 교황청에 한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저를 당신의 후임으로 샴대목구장 계승권을 가진 부대목구장 주교로 임명해 달라는 청원서였습니다. 얼마 후 플로랑 주교님께서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1828년 1월 6일 자로 작성한 공동 서한을 받았습니다. 주요 내용은 교황청 포교성성이 조선 선교지를 파리외방전교회가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플로랑 주교님께서는 공동 서한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서한을 읽는 동안 저는 조선을 향한 선교 열망이 다시 불 지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30년 전부터 보편 교회의 도움을 간청해온 이 불행한 이들에게 내 동료들과 헤어지지 않고도 도움을 주러 갈 좋은 기회가 왔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복받쳐오는 감정으로 후끈 달아올라 제 몸은 전율했습니다. 저는 플로랑 주교님의 두 손을 움켜잡고 주교님께 “제가 이 일을 맡고 싶습니다. 제가 조선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주교님께서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시면서 제 청을 기꺼이 받아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대가 조선 선교를 원하고 실행하고자 한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플로랑 주교님께서는 당신 교구가 풀어가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도 하나뿐인 일꾼을 주님의 새로운 포도밭을 위해 기꺼이 내놓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교황청은 사제를 보내달라는 조선 교우들의 울부짖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1824년(혹은 1825년) 조선 교우들이 레오 12세 교황에게 보낸 청원을 고려해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해 대목구로 독립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포교성성 장관 바르톨로메오 알베르토 카펠라리(Bartolomeo Alberto Cappellari) 추기경은 1827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조선 선교를 맡아달라는 편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조선 교회 재건을 위해 사제를 파견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펼쳤다. 1811년 프란치스코와 조선의 교우들이 비오 7세 교황에게 보낸 서한. 포교성성, 파리외전에 조선 선교 담당 요청 포교성성은 조선 선교를 위해 이미 여러 차례 다양한 시도를 펼쳐왔습니다. 교황청은 1807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로부터 1801년 신유박해로 조선 교회가 초토화됐다는 보고서를 받은 후 처음으로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조선 선교지를 맡기는 데 따르는 위험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포교성성 장관 레오나르도 안토넬리(Leonardo Antonelli, 1730~1811) 추기경은 북경교구장 알렉산더 드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1751~1808) 주교에게 가능한 한 빨리 사제 한 명을 조선에 보낼 수 있도록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요청하고, 북경 신학교에서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아울러 중국과 조선의 국경 지대에 비밀 연락소(교우 공동체)를 설치해 서로 편하게 교회 사정을 교류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제안했습니다. 교황청의 이러한 권고는 구베아 주교가 1808년 7월 6일 선종하면서 성과 없이 흐지부지돼 버렸습니다. 이후 교황청 포교성성은 1815년 12월 30일 구베아 주교 후임으로 북경교구장에 임명된 요아킴 데 수자 사라이바(Joaquim de Sousa Saraiva, 1744~1818) 주교가 보내온 편지를 접수합니다. 그 편지에는 프란치스코와 조선의 다른 교우들이 쓴 1811년 음력 10월 24일(양력 12월 9일) 자로 교황께 보내는 서한이 들어있었습니다. 조선 교우들이 교황께 보낸 서한에는 “성직자를 보내 줄 것”과 “선교사들이 어려움 없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최선책은 교황이나 포르투갈 임금이 파견한 사절단이 선교사와 함께 배를 타고 오는 것”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포교성성 관계자들은 이 서한 내용을 보고 경탄했습니다. 조선 교우들의 열정과 신앙심에 감복했습니다. 모두 조선 선교지에 시급하게 사제를 파견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포교성성은 선종한 북경교구장이 갖고 있던 조선 선교지 관할권을 누가 이어받을지, 선교사들을 직접 조선에 보낼지, 포르투갈 왕실 사절단을 요청하는 우회로를 이용할 것인지 등을 논의한 끝에 중국 현지 사정에 밝은 마카오의 포교성성 극동 대표부장 마르키니 신부에게 북경에서 추방된 이들 가운데 조선에 보낼 선교사 한 명을 선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조선 교우들의 열정과 신앙심에 감복 교황청 포교성성이 조선에 사제를 파견하려고 다각적인 노력을 보이자 중국의 선교 보호권을 행사하던 포르투갈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금교령으로 자신의 사목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경에 머물고 있던 북경교구장 사라이바 주교는 남경교구 신 플로리아노 벨로조(Xin Florien Vellozo, 43) 신부와 밤 요한(Vam Jean, 29) 신부를 즉각 조선으로 보냅니다. 조선 선교지를 교황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라이바 주교는 밤 요한 신부를 조선 선교지 총대리로 임명하고, 북경교구장이 갖는 권한 안에서 모든 상시적 권한과 특별 권한(혼인 장애 관면, 이동 제대 축성 등)을 그에게 위임했습니다. 또 밤 신부의 유고나 부재 시 신 신부가 그 권한을 승계할 수 있도록 허가했습니다. 이들의 첫 임무는 조선인 신학생을 선발해 포르투갈 수도회가 운영하는 마카오 신학교에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두 신부는 1817년 1월 4일 남경에서 배를 타고 조선으로 출항했지만, 입국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신 벨로조 신부는 병에 걸려 조선 관문에서 선종했고, 이 때문에 밤 신부는 남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제가 마카오에서 듣고 본 1824년(혹은 1825년) 조선 교우들이 레오 12세 교황에게 보낸 편지를 계기로 교황청 포교성성이 직접 조선 선교지를 챙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2024.03.27

운명[월간 꿈 CUM] 회개 _ 요나가 말을 건네다(4)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요나 1,7) 13세기 페르시아의 수피 사아디(Sa'di)가 들려준 우화에 이런 지혜의 글이 있습니다. “딱 한 번 나는, 나의 불행한 운명을 원망하여 불평한 적이 있다. 당시 너무나도 가난하여 신발을 마련할 수 없었기에, 아린 맨발로 투덜거리며 쿠파 신전으로 들어갔다. 그때 거기서 나는 발 없는 사람을 보았다.”(사아디, 「사아디의 우화정원」 아침이슬, 21쪽)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그 운명이 반드시 그렇게 살도록 미리부터 주어진 예정론은 아닙니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든,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든, 도시에서, 혹은 시골에서, 또는 부잣집 금수저로 태어났든, 흙수저로 태어났든,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의해 선택받은 경우에는 계속 그 길을 걸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를 ‘부르심의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구약의 아모스 예언자는 자신의 뜻이 아닌, ‘부름 받은 운명’을 이렇게 항변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아모 7,14-15) 아무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오던 자신을 하느님께서 부르시어 예언자로 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아모스의 운명은 바뀌지 않습니다. 더구나 비탄과 탄식의 예언자라고 부르는 예레미야 예언자는 부름 받은 자신의 운명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울부짖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8–9)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불리움 받은 운명이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아픔을 주더라도 끝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장한 죽음의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한결같이 그 거룩한 운명을 힘들어하거나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더라도 끝내는 부르심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장엄한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2천 년 교회 역사의 수많은 성인들도 똑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던 거룩한 분들이셨습니다. 사제직의 부름을 받은 이들도 저마다 소중한 부르심의 운명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제들이 한 번도 사제직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운명처럼 부르심이 자신에게로 울려와 빨려가듯이 사제직에 몸담게 되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저 또한 그러합니다.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사제와 수도자가 많았지만, 결코 사제가 되겠다는 꿈조차 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인생을 함부로 살며 방황하여 집안에 큰 근심거리로 전락하던 한없이 부족한 저를 그야말로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셨고 운명처럼 이 길을 걷게 해 주신 것입니다. 실로 돌아보면 인생의 발자국마다 온통 은총이었습니다. 요나는 부르심의 운명을 거스르다가 끝내 하느님 진노의 풍랑을 만나게 되고, 제비뽑기에서 재앙의 원인으로 지목받는 가련한 처지에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커다란 짐으로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느님 부르심의 운명에 나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우리는 더 큰 자유와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 놀라운 자유와 평화를 일찍이 깨달았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 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1코린 9,19) 그래서 요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건넵니다. “주님 부르심이 제게 울려왔을 때, 저는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아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주님 부르심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운명을 받아들일 때, 내게 참다운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있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 바오로) cpbc2023.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