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 청년 교류의 다리 역할하는 청년 선교사의 새로운 꿈은‘하느님 자비 복음의 종 선교회’ 유일한 한국인 신은주씨, 9월 종신서원… 하느님 눈으로 사람들 마음 보겠다 다짐 명동대성당에서 2022 한일청년교류를 진행하는 선교사 신은주씨. 한국과 일본 가톨릭 청년들을 이어주는 가교인 ‘한일청년교류’. 이를 진행하는 하느님 자비 복음의 종 선교회 신은주(크리스티나) 선교사는 선교회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인이다. 2009년 입회한 그는 7년 반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했다. 그중 3년간 양성 기간을 거친 뒤, 아르헨티나 빈민촌과 공소 등을 돌며 선교했다. 2017년부턴 한국으로 파견돼 선교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9월 4일 대전교구 송촌동성당에서 종신서원을 한다. “보통은 10년 만에 종신서원을 하는데, 이런저런 일로 좀 많이 늦어졌어요. 그래도 제겐 지금이 제때인 것 같습니다.”신 선교사는 원래 교사가 꿈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편에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다만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살길 원했다. 그래서 주변에서 “수도자가 돼라”고 권유할 때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다. ‘하느님, 제발 저는 부르지 마세요. 남자친구도 있단 말이에요!’ 무사히(?) 대학을 졸업한 신씨는 전공인 일본어를 살려 일본 도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한인 성당을 다니며 신앙생활도 병행했다. 그러던 중 도쿄대교구가 ‘평화 주간(8월 1~2주)’을 맞아 연 심포지엄에서 한국 대표로 발표를 맡았다. 청년 신자의 시각으로 한·중·일 관계를 논하는 자리였다. 그 일을 계기로 일본의 한 수녀원에서도 한일관계에 관한 생각과 체험을 나눴다. 나눔이 끝난 뒤, 서양인 여성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일본에 머물며 한국 공동체 설립을 준비하던 에스텔 팔마 선교사였다. 에스텔 선교사는 하느님 자비 복음의 종 선교회 공동체에 와서도 이야기를 나눠달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선교회 공동체는 신씨가 사는 집에서 가까웠다. 신씨는 ‘그냥 얘기나 하고 오자’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다. 이후 선교사들과 식사를 같이 하고, 성지순례도 다니며 친구이자 가족 같은 사이가 됐다. 그런 와중에 계속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가톨릭 신자가 거의 없어 선교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본에 와서 산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정말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면 이게 가능할까?’, ‘사도행전에 나온 그리스도인 첫 공동체 모습이 바로 이들과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죠. 이제까지 제게 성경은 그저 하느님 말씀이 적힌 종이책이었는데, 드디어 성경이 ‘살아있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다다랐죠.”때마침 선교회 선교사들은 스페인에서 열리는 한 달짜리 피정에 신씨를 초대했다. ‘직장인 보고 한 달 동안 피정을 가라니, 일을 관두라는 거야, 뭐야?’ 속으로 코웃음 쳤던 신씨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피정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54일 기도 끝에 답을 찾은 그는 결국 퇴사하고 피정에 참여했다. 그때 신씨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옛꿈을 떠올렸다. 동시에 시선을 사로잡은 성경 구절이 그의 마음을 확고하게 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그렇게 신씨는 32살에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선교회에 입회했다. 그리고 입회 13년 만에 종신서원을 앞두고 있다. ‘어떤 선교사로 살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가 웃으며 답했다. “눈으로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선물하신 잠재력과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cpbc2022.08.09
![[금주의 성인]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3월 19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3/03/15/y2g1678863193321.jpg)
[금주의 성인]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3월 19일)+1세기경,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의 양부,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의 수호성인 아기 예수님을 안은 요셉 성인의 이콘. 출처=굿뉴스 예수님의 양아버지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요셉 성인에 대해서는 마태오 복음 1―2장과 루카 복음 1―2장에서 나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요셉은 다윗 왕가의 후손이고, 요셉 가문은 유다 지방 베들레헴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요셉은 갈릴리 지방 나자렛에 살면서 목수 일을 하고 있었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했으나 같이 살기 전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와 파혼하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이 시대 풍습으로는 정혼한 이가 아닌 다른 이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기 전에도 마리아의 일을 폭로하지 않고 싶어 했습니다. ‘의롭다’는 요셉의 평판은 그가 법을 어기지 않고 충실히 살아가려고 노력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마리아의 일을 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남몰래 이혼하려고 했던 것은 친절하고 자비로운 성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을 받았고, 율법대로 할례를 베풀고 정결례를 행하는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의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새로운 왕인 메시아가 태어난 것을 두려워한 헤로데 임금은 영아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라고 말해 줍니다. 요셉은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를 지키기 위해 이집트로 갔고, 헤로데가 죽은 뒤에야 가족을 데리고 나자렛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12살이 되던 해에는 매년 하던 대로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을 다녀오다가 아들을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들을 찾기 위해 다시 돌아간 요셉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발견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후 요셉은 루카 복음 4장 22절을 제외하고는 신약성경에서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이전 선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외경인 「야고보의 원복음서」에는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했을 때 이미 노인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셉에 대한 공경은 동방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외경 「요셉 이야기」는 4세기부터 7세기까지 대중에게 사랑받는 인기 서적이었습니다. 서방 교회에서는 ‘주님의 양부’라는 칭호로 9~10세기 일부 지역에서부터 시작해 ‘마리아의 배필’로서 성모님 공경과 함께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12세기쯤에는 3월 19일이 축일로 정착됐습니다. 14세기에는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를 중심으로 요셉에 대한 공경과 축일이 전파되다 1479년 식스토 4세 교황에 의해 성 요셉 축일이 전 교회로 확대됐습니다. 요셉에 대한 신심은 특히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에 의해 보편화됐습니다. 1870년 비오 9세 교황은 요셉을 ‘가톨릭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레오 13세 교황은 1889년 요셉을 가장(家長)의 모범으로 선포하면서 성인들 가운데서 성모님 다음의 위치로 올렸습니다. ‘노동자의 수호자’란 칭호는 베네딕토 15세 교황이 부여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은 ‘사회정의의 수호자’로, 비오 12세 교황은 1955년 공산주의자들의 노동절에 대응해서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제정했습니다. 요셉은 임종자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교회 미술에서 요셉은 일반적으로 백합꽃이 핀 지팡이 또는 목수 일에 필요한 연장을 들고 있거나, 아기 예수님을 안은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2023.03.14

뙤약볕 피해서 책 속으로, 신앙의 공감과 위로에 빠져보자!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올 한 해 절반을 살아내느라 이래저래 힘들었다면 성직자와 수도자가 건네는 공감과 위로로 마음부터 추슬러보면 어떨까. 때때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끌어안는 이야기가 와닿을 것이다. 원래 그런 슬픔은 없다 / 허찬욱 신부 지음 / 생활성서 “‘너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말이 상대방에게는 정작 공감의 말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려면, 타인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 조심스레 물어야 합니다. 타인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지 섬세하게 봐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원래 그런 슬픔’은 없는 거니까요.”(20쪽)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 박사학위(종교철학 전공)를 받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허찬욱(대구대교구) 신부가 월간 ‘생활성서’와 ‘빛’에 연재한 글을 모아 「원래 그런 슬픔은 없다」를 펴냈다. 생각나는 주제로 매달 글을 썼는데, 모아놓고 보니 유독 슬픔에 관한 글이 많았다. 슬픔만큼 보편적인 감정도 없지만 슬픔만큼 다양한 층위를 가진 감정도 없고, 사람마다 슬퍼하는 방식이 다르니 슬픔의 전형, 말하자면 ‘원래 그런 슬픔’은 없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도 이와 같아서, 모호함을 피하려 하면 온통 잘못 읽고 맙니다. 특히 슬픔에 잠긴 마음은 언어가 사라진 텍스트라서 읽기가 더 힘들지요. 언어가 사라진 곳에 펼쳐진 드넓은 행간, 그 사이에 켜켜이 쌓인 불편하고 모호한 감정을 함께 견뎌야 합니다.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하지 않으려면, 이 불편하고 모호한 순간을 견뎌야 합니다.”(75쪽)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숨조차 쉴 수 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인간의 말은 위로가 되지 않고, 하느님은 침묵하는 순간의 짙은 슬픔 말입니다. 그 순간에는 하느님께라도 따져야 합니다. 하느님이라도 원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에게, 신심 깊은 마음만 가지고 늘어놓는 종교적 위안은 슬퍼하는 사람의 마지막 숨통을 막아 버립니다.”(100쪽) 허 신부는 작은 울림이 있는 일상의 ‘작은 이야기’를 성경을 비롯해 문학, 음악, 영화, 미술 작품을 빌려 깊게 성찰한다. 이 과정에서 인용한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쓰시마 유코의 「자카 도프니 여름 집」, 김연수의 「시절일기」,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도 찾아 읽고 싶게 만든다. 특히 슬픔과 고통, 위로와 공감이라는 화두에 관심을 지닌 독자라면 생각 맞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듯 책장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열 가지 생각 / 이해인 수녀 지음 / 마음산책 최근 제26회 한국가톨릭문학상 본상을 수상한 이해인(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는 그간 기도와 시에서 긴요하게 다룬 가치와 개념들을 나누고 엮어 「인생의 열 가지 생각」이라는 책을 펴냈다. “모두 웃고 있을 때 우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 외로운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함께 사는 일일 거예요.”(‘공생’ 중에서) “사랑은 관심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요. 사랑은 상대를 잘 바라보는 데서 시작합니다.”(‘사랑’ 중에서) “저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비범한 희망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 이 시간을 잘 살아내면 괜찮은 미래로 향할 수 있겠지요.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갑니다.”(‘희망’ 중에서) 저자가 말한 열 가지 생각, 즉 ‘가난, 공생, 기쁨, 위로, 감사, 사랑, 용서, 희망, 추억, 죽음’ 등은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하지만, 살아가면서 내내 끌어안고 고민하는 화두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도자이면서 시인으로 반세기 넘게 살아온 저자는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고 더불어 나아가는 삶으로 이들 생각을 연결한다. 책은 이해인 수녀의 시와 산문, 사진과 삽화가 어우러져 더욱 풍성하다. 특히 ‘죽음’에 대한 연약하면서도 단단한 사유는 그녀 역시 나약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원숙한 수도자라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 이해인 수녀는 책머리에 “나쁜 일도 그렇지만 좋은 일 역시 사람의 힘만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무엇이든 은총이니, 끊임없이 기도하고 끊임없이 쓰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남겼다. 왜 남자들은 기를 쓰고 불행하게 살까? / 김정대 신부 지음 / 바오 오랫동안 위기 상황에 내몰린 노동자들과 함께했던 김정대(예수회) 신부는 남성의 삶에 주목했다. 요즘 한국 남자들은 사는 게 쉽지 않다. 가장의 권위는 사라진 지 오래고, 밥벌이도 시원찮고, 주변과 소통도 여의치 않다. 그럼에도 약한 모습은 감추고 ‘남자답게’ 살아야 한다. 왜 한국 남자들은 사서 고생하고 불행을 자초하는 것일까? 김 신부는 「왜 남자들은 기를 쓰고 불행하게 살까?」에서 그 이유를 실감 나게 묘사한다. 저자는 “한국 남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규정하는 남자로 ‘만들어져’ 다시 태어나는 존재”라고 말한다. 유교문화와 군대문화, 국가주의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권위적이고 획일화된 문화와 전통, 관습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순응하는 남성성’은 위계적인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위계적 문화는 군대문화를 통해서, 그리고 군대문화가 이식된 기업문화를 통해서 우리 문화 안에 자리를 잡았다.”(34쪽) 예수회 입회 전 반도체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했고, 수도생활 중 남성학을 전공한 저자는 우리나라의 중년 남성 노동자들이 해고 등의 위기 앞에서 여성 노동자에 비해 훨씬 더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남성들의 관계적 영성’이라는 연구 주제로 이어졌다. 저자는 책에서 남자들이 처한 상황을 역사, 문화, 사회, 심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가톨릭 사제로서 ‘남성의 자리 다시 찾기’를 안내한다. “한국의 중년 남자들이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 속하나?’ 같은 중년기의 인생발달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개성화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필수이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자아를 성장 발달시켜야 하고 함께 진정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98쪽) “영적 성장이란 우리가 관계 안에서 더 진정한 자기가 될 수 있는 인간 성숙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내가 되어가는 개성화는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삶 안에서 자신을 타인과 나누며 관계의 영성을 살아가는 여정이다.”(151쪽)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3.07.03

성탄 구유, 하느님의 자애 드러내는 거룩하고 놀라운 표징주님 성탄 대축일 / 구세주 강생 이야기와 ‘성탄 구유’ 성탄 구유는 하느님의 자애를 드러내는 거룩하고 놀라운 표징이다. 사진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처음으로 성탄 구유를 만들어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재현했던 이탈리아 그레치오 수도원 구유 동굴.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이다. 가톨릭교회는 24일 저녁 성탄 전야 미사부터 주님 세례 축일까지 전례력으로 ‘성탄 시기’라 하여 구세주 강생 신비를 기념한다. 구세주 강생 이야기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 자세히 나온다. 마태오 복음서는 주님 탄생과 함께 동방 박사들의 경배 소식을 알려준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 탄생을 로마 제국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으로 시행된 호적 등록과 연계해 소개한다. 다윗의 후손인 요셉이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 다윗의 도시라 불리는 베들레헴에 가야 했고, 그곳에서 마리아가 주님을 낳았다고 한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2,6-7) 반면, 요한 복음서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의 주님 강생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선포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1,14)구세주 강생에 대한 성경 말씀을 종합하면,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콜로 1,16)되었지만, 세상의 구원자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구세주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는 갓난아기인 주님을 구유에 뉘었다.(루카 2,7) 하지만 목동들과 동방 박사들이 주님을 찾아와 경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성탄 구유’는 구세주 강생의 거룩하고도 놀라운 표징이다. 교회는 “이 가난에서 하늘의 영광이 드러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25항)고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를 돕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가난한 이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은 배척하신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부터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이들의 삶에 참여하셨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되셨다. 나아가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당신 자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44, 2443항 참조)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8-21 참조)성탄 구유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애’를 드러낸다.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와 같이 작아지셨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우리를 찾아 주실 형제, 늘 우리 곁에 계시는 충실한 벗인 당신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다.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에서 구해 주셨다.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탄 구유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구유는 동물의 여물을 담는 통이다. 그런데 지금 그 구유에 자기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빵으로,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참된 양식으로 드러내신 분이 누워 계신다. 그분은 인간에게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다. 이렇게 구유는 인간이 하느님의 빵을 얻기 위해 초대된 하느님의 식탁을 암시한다.”(「설교집189,4)프란치스코 교황도 “구유 앞에서 생명의 양식은 물질적 부가 아니라 사랑이고, 폭식이 아니라 나눔이며, 과시가 아니라 소박함이란 것을 깨닫는다. 생명의 양식인 그분을 받아모심으로써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나고 욕심과 탐욕의 악순환을 깰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탐욕하고 독점하는 삶이 아닌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도록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다”고 설명했다. 성탄 구유는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이 가장 필요한 이들 그리고 가까이 와 주십사 청하는 이들을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난한 탄생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사랑하라는 요청이다. 하느님께서는 구유에서 탄생하심으로써, 상속받지 못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과 존엄을 줄 수 있는 유일하고 참다운 혁명을 몸소 시작하셨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사랑의 혁명, 자비의 혁명”이라고 정의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의미에서 주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성탄 구유를 설치하는 교회 풍습을 장려했다. 성탄 구유 풍습은 1223년 12월 25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레치오의 한 동굴에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재현하면서 교회 안에 확산됐다.구세주이신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 누워서 온유하지만 힘차게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의 필요성을 선포하신다. 이는 아무도 소외되거나 배척받지 않는 더욱 인간적이고 형제애 넘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탄의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될 때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고 가르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526항)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2.12.21

시노드 교회를 알차게 살아가며 2027 서울 WYD 준비 원년으로[신년대담]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2024년 갑진년(甲辰年) 새해다. 보편 교회는 올해 10월 예정된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 정기총회 마지막 회기를 앞두고 있다. 한국 교회도 올해 보편 교회의 걸음에 발맞춰 계속해서 시노드 교회를 향한 여정을 이어가야 한다. 올해는 또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 개최를 향해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는 해이기도 하다. 서울 WYD는 한국 교회에 새로운 사목적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하지만 답보상태에 놓인 남북 관계를 비롯해 한국 교회와 우리 사회의 고령화와 청년 문제, 노동의 양극화, 생명 경시 풍조 등 앞에 놓인 과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다. 본지는 새해를 시작하며 서울대교구장이자 평양교구장 서리인 정순택 대주교와의 신년 대담을 통해 한국 교회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가 cpbc 취재진에게 2024년 한국 교회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한국 교회 신자들과 북녘 교회 형제들에게 새해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2024년 갑진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로운 해를 마련해주신 하느님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최근 전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전쟁과 폭력으로 신음하고 있기에, 우리는 모두 평화가 간절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평화를 내려주시길 청하며, 우리 스스로 각자의 자리에서 평화를 일구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아울러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한 이번 시노드의 주제인 ‘시노드 교회를 위하여 : 친교, 선교, 참여’는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활 방식을 제시해 줍니다. 하느님, 이웃, 나 자신과 ‘친교’를 이루고, 세상 논리가 아닌 복음의 논리를 삶으로 증거하는 ‘선교’를 실천하며, 세상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주인공으로 살아가도록 ‘참여’를 증진하는 길, 이 길이 바로 우리가 모두 바라 마지않는 평화로운 세상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시노드 교회’를 향해 걸어가며 복음의 기쁨을 체험하는 행복이 올 한 해 여러분과 가정에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교구장으로서 두 해를 보내셨습니다. 특별히 2023년은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가상 인상 깊었던 일은 지난해 7월 리스본 세계청년대회 파견 미사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다음 개최지로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발표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가 청소년·청년 사목에 있어 새롭게 출발하고 만들어갈 은혜로운 시간을 교황님께서 선물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지난해 10월 한국 주교단을 대표해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 정기총회에 참가했던 기억이 특별합니다. 한국 교회에 시노드 교회를 향한 교황님의 뜻을 잘 전달하고, 또 시노드 교회를 살아갈 수 있도록 다른 주교님들과 깊이 나누려 합니다. ▶한반도와 남북 평화를 위해 한국 교회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남북의 상황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남북 관계에 평화의 씨앗이 다시금 꽃피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할까요? 남북 관계는 지정학적이고 정치적인 요소, 외교적인 접근, 인권에 대한 이슈 등 여러모로 고려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 평화를 이루기 위한 의지, 대화로 풀어가려는 노력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국민적 공감대를 먼저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북한도 머지않아 코로나 종식을 공식 발표할 때가 올 것이라 믿습니다. 인도주의적인 교류를 시작으로 북한이 다시 문을 열길 희망합니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왼쪽)가 11월 17일 한국 교회 최대 순교성지인 서소문 밖 네거리의 순교자 현양탑에서 교황청 국무원 국무장관 에드가르 페냐 파라 대주교(가운데)에게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 ▶지난해는 대한민국과 바티칸이 수교 60주년을 맞은 해였습니다. 양국은 60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완숙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교황청과 동반자적 관계를 더욱 견고히 해나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면 좋을까요? 대한민국이 독립된 국가로 인준 받는 현대사의 과정에서 교황청이 큰 역할을 것이 사실이지요. 교황청의 중추적 역할 덕분에 대한민국의 UN 승인과 6·25전쟁 때 UN군 파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과 바티칸 수교 60주년이라는 역사가 우리 현대사에는 중요한 하나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황청을 포함한 세계 교회를 위해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사제, 수도자, 평신도 선교사들이 파견돼 선교 활동을 펼치는 곳도 많고, 교황청의 여러 직책에 봉사하는 사제, 수도자도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평신도도 일하게 되는 기회가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교황청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를 위해 일하고 선교에 투신하는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많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2024년 교구 사목교서에서 ‘시노드 교회란 선교하는 교회’임을 강조하시면서 “시노드 교회를 향해 계속 걸어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의 뜻과 지향을 우리가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노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시노드 교회가 앞으로 우리 교회가 살아야 할 모습이라고 제시하십니다. 그래서 사제는 교회 안에서 주어진 사제로서의 책임과 권한, 그리고 봉사하고 섬기는 사제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고, 수도자는 수도자대로 본연의 부르심,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평신도들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면서 그 기쁨으로 세상을 바꿔나가는 사도의 역할을 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는 한국 교회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한국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어떤 마음으로 서울 WYD를 준비해 나가면 좋을까요? 지난 리스본 세계청년대회에서 만난 프랑스의 한 젊은 주교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 주교님은 청년 때부터 세계청년대회에 참가해 리스본 대회가 벌써 다섯 번째였는데, 프랑스 교회는 1997년 파리 세계청년대회 이후 청년 신자가 많이 늘어났고, 그 힘으로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프랑스 교회가 이어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주교님은 사제 성소도 세계청년대회를 통해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2027 서울 WYD가 한국 교회 청소년·청년 사목을 질적으로 풍성하게 하고,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길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청소년과 청년이 대회 준비 단계에서부터 주인공으로 함께 참여하고, 그래서 이 대회를 통해 청년리더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께서 ‘하느님의 종’이 되셨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을 비롯해 김수환 추기경님과 방유룡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해 신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현양에 동참해야 할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교우들의 자발적인 공경과 현양입니다. 자발적인 전구 기도가 필요합니다. 교우들이 시복시성을 청하는 기도도 바쳐야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님이나 최양업 신부님을 위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전구를 청하는 기도를 많이 바치면 좋겠습니다. 전구를 청하는 기도 속에 기적의 은총을 입을 수도 있고, 그런 부분들이 시복 과정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교우들을 중심으로 일상 안에서 신앙선조들의 전구를 청하는 습관을 키워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브뤼기에르 주교님을 비롯해 시복시성 단계에 있는 신앙선조들에 관한 자료와 서적을 더 발굴하고 널리 보급해 교우들이 더 알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올해 2024년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며 한국 교회가 창립한 지 2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동시에 103위 성인 시성 40주년입니다. 우리 교회와 신앙선조들을 더 잘 알고, 기도로 더욱 함께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가톨릭교회가 한국의 근현대사에 미친 선한 역할들을 연구하고 고양해 선교에 힘을 실어야 하겠습니다. 또 순교 성인들께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심을 묵상하며 우리도 이 시대에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참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스스로 복음적 삶의 기쁨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라는 인격의 매력에 빠져야 합니다. ▶한국은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고, 교회도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신앙의 전수자요, 지혜를 전할 노인들의 역할 부여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노인들이 많아지고 있기에 교회 안에서도 노인 사목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나 교회 안에서 노인들은 신앙의 전수자로서 역할이 대단히 큽니다. 손자, 손녀 세대에 신앙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분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이기 때문이죠. 노인들 스스로도 이러한 신앙의 전수자로서 책임 의식과 자각을 지니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교회 내에서 여건을 마련하고, 교육도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노인들이 복음을 듣는 담지자(擔持者)만이 아니라,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수하는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사목 프로그램을 더 개발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가 9월 24일 마련한 제109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행사에서 콜롬비아 전통의상을 입은 남미 공동체 이주민들과 정순택 대주교(왼쪽 두 번째), 교구 이주사목위원장 유상혁 신부과 환하게 웃고 있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가 1월 18일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를 방문해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기도를 바치고 있다. ▶노동의 양극화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일터로 나간 노동자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현장에서 죽음을 맞는 일들이 되풀이되어 안타깝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어려움, 노동의 양극화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노동의 양극화는 우리 사회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한 단면으로 굉장히 안타까운 현상입니다. 저는 현대 자본주의가 갖는 한계를 사회가 이미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느님 없는 인본주의는 결국 자본이 하느님 자리에 위치하는, 자본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적 사상 체계를 넘을 수 있는 새로운 인본주의, 즉 신인본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신인본주의는 하느님, 곧 ‘데오 휴머니즘’(Deo Humanism)인데, 이를 통한 현대 사회의 조명과 전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 사회는 노동의 의미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의 본질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노동의 고귀함을 재발견해 재해석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젊은이들도 노동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새롭게 고찰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펼치는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영아 유기와 유령 영아 사건 등 우리 사회에 생명 경시 풍조가 더욱 짙어져만 갑니다. 이런 때일수록 교회가 생명 운동과 활동을 통해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가치를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는 전제이자 대원칙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고귀한 인간 생명에 대해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생명에 대해선 하느님만이 절대권을 갖고 계신다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낙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태아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태아의 생명을 절대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생명과 인권의 측면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좌우명처럼 삶을 지탱해주는 성경 구절이 있으시다면요. 고 최민순 신부님이 번역하신 「최민순 역 시편」의 17편 2절과 20절(구약 시편 18장 2절, 20절)을 좋아합니다. “그지없이 사랑하나이다 하느님 내 힘이시여”(2절)와 “넓으나 넓은 들로 나를 끌어내시고, 사랑하시기에 나를 구해주셨나이다”(20절)입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기에 나를 구해주셨나이다’란 대목을 가장 좋아합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해주셔서 이렇게 존재하게 해주시고, 당신을 알게 해주시고, 만나게 해주시고, 구원해주셨다는 것이 제겐 너무나도 큰 힘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자체에서 가장 큰 힘이 나옵니다. ▶끝으로 신자들과 국민에게 새해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24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한국 교회의 모든 교우 분들과 북한의 형제자매 여러분께 올 한 해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2024년 갑진년은 푸른 용의 해로, 청룡은 우리에게 친숙한 상상 속 동물입니다. 우리 민족 문화에서 네 마리의 수호신 중 하나이기도 하고, 힘찬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요. 교우 여러분께서도 올 한 해 푸른 용처럼 힘차고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주변의 이웃을 배려하고 특히 가장 작은 이를 보살핌으로써 우리 사회를 지켜나가는 한 해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 도재진2023.12.21

성당에 화재… 새 성당 짓기 위해 원주민 전통 공연 다닙니다[선교지에서 온 편지] 대만에서 평신도 선교사 배시현 (하) 본당 행사 때 마당에서 흥겨운 놀이에 참여하고 있다. 도시락과 휴식 대만은 도시락 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뭐든지 포장이 가능하고, 들고 이동하기에 편리합니다. 대만에서 가장 많이 먹는 닭다리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종이로 만든 도시락 용기 안에는 밥 위에 닭다리 하나가 올라가 있고, 서너 가지 채소와 반찬들이 함께 있습니다. 정말 대만에서 먹은 어느 도시락보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는 사람들이 종이상자를 들고 각각 어딘가로 향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하고 난감해 하고 있으니, 신자분이 ‘마홍, 조금 쉬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함께 일하던 분들은 각각 적당한 그늘을 찾아 종이상자를 길게 펴고는 눕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냥 길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저도 따라 누웠습니다. 그야말로 땅이 요가 되고, 하늘이 이불이 되었습니다. 간간이 부는 바람은 눈을 스르르 감게 해주어 휴식하게 만들어줬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의 느낌은 마치 하느님의 부채질 같았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이 못 되어 모두 일어나 다시 오후 귤 수확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절반은 원주민 절반은 대만인 저녁에 출하할 귤의 양을 확인하고는 오후 작업마저 끝내고 우리는 집으로 내려가 귤 포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귤을 상자에 담는 것도 각각 역할을 분담해 일했는데, 수확한 귤 바구니를 분류 기계에 올려놓는 사람, 그 귤을 분류기에서 잘 굴러가도록 돕는 사람, 귤이 크기별로 상자에 잘 담기는지 확인해서 상자를 채우는 사람, 상자에 담긴 귤이 정량으로 담겼는지 확인하는 사람, 상자를 포장하는 사람 등 우리는 각각의 역할에 맞게 일을 해냈습니다. 저는 초보였기 때문에 귤이 크기별로 잘 분류가 되는지, 레일에서 잘 굴러가는지 확인하는 일에 임했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상자에 담겨 포장하는 사람들을 위해 속도를 맞춰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귤을 많이, 그리고 빨리 보낸다고 해서 나의 일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서 속도를 맞춰야 했습니다. 이렇게 함께한다는 것은 보람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각기 다른 크기와 중량에 맞게 귤은 상자에 가득 채워졌고, 상자들은 높이 쌓였습니다. 그렇게 그날 출하할 귤 포장을 마치고, 우리는 둘러앉아 간단한 간식과 포도주, 맥주로 오늘의 수고를 서로 격려했습니다. 신자분들은 저에게 “절반은 원주민이 됐고, 절반은 대만 사람이 다됐다”며 “다음엔 사냥도 같이 가자”고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서투른 손으로 방해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그 말씀을 들으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농작물을 돌보는 분은 모두 아시겠지만, 자연에 순응하고 하느님께 많이 의지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 분들은 언제나 주어진 것에 감사합니다. 귤이 많이 열리면 풍족함에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여느 해보다 적어도 함께 나눌 것은 있다며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 신자분들과 함께하면서 제 삶 또한 풍요로워지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원주민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감사를 배우는 삶입니다. 감사하는 삶은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풍요로워진 우리는 하느님을 닮게 만듭니다. 화재로 전소된 다관성당 모습. 불에 타 전소된 본당 성물들. 목조 성당에 갑자기 화재 감사의 매일을 살던 어느 날 새벽, 이곳 8개 본당 중 하나인 다관(達觀)성당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새벽 3시 반경 불이 났는데, 모두 자고 있던 시각이라 바로 옆 교회 목사님이 제일 먼저 발견해 LPG 가스통만 겨우 빼내 마을에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은 나무로 지어졌고, 성당 내 모든 것이 오래되어 성당 건물은 물론, 모든 성물과 성가 책, 성경, 그리고 미사 경본은 소진되었습니다. 화재 원인은 전기합선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정말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습니다. 이곳 원주민들의 터전, 산에는 1950~1960년대 많은 수도회가 들어와 선교하며 마을마다 성당을 지었습니다. 대략 50~7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당은 노후화되었고, 겨우 유지만 하고 있습니다. 대만은 도교와 불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그리스도교는 개신교를 포함해 전체 인구의 5% 미만입니다. 신자 수도 적지만, 특히 산간 지역이나 원주민 지역은 생활 자체가 녹록지 않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를 돌보고 가꾸는 일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많지 않은 신자들이지만, 매주 열심히 미사가 있던 성당에서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생긴 것입니다. 배 선교사가 본당 신자들에게 성체 분배를 해주고 있다. 다시 성당을 짓기 위해 우리는 다시 성당을 지어야 했습니다. 몇 안 되는 신자들이 과일과 채소를 팔고 봉헌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교구로부터 큰 도움을 받기로 했지만, 그것도 전부는 아니기에 우리는 성당을 지을 방법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원주민들은 대체로 음주 가무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 원주민 지역 산에 갔을 때,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을 때 뭔지 모르는 친근감이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불이 난 다관성당 신자들은 특히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또 잘 부릅니다. 특히 미사 시간에 성가를 부를 때 큰 감동을 줍니다. 원주민들은 노래를 부를 때 자신의 감정을 담아 부르고, 또 자연스럽게 화음을 만들어냅니다. 원주민들은 어릴 적부터 노래하고 춤추는 문화 속에 자라면서 자연스레 원주민의 특별한 문화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다른 본당으로 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6년이 지나 모금액의 절반은 모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중간에 코로나로 인한 자재 가격이 많이 올라서 조금 더 힘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비록 불이 나서 성당이 모두 사라졌지만,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는 것에 감사했고, 또 새로 성당을 지을 힘과 용기를 주심에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저는 원주민들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는지 배웁니다. 이웃이 아프면 정말 그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정말 안타까워하고 함께 마음 아파합니다. 그런 신자들을 통해 저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느낄 수 있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저는 하느님께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선교사로 살면서 기쁨과 행복을 많이 느낄 수 있음에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만났다가 헤어질 때, ‘티엔주바후요(天主保佑)’라고 말하면서 서로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거나, ‘로까’(Lokah, 원주민 말로 ‘힘내세요!’)라고 말하며 응원을 해주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항상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로까! 天主保佑.” 후원 계좌 : SC제일은행 225-20-397949 예금주 : (재)천주교성골롬반외방선교회 평신도 선교사 배시현 소화데레사 / 성골롬반외방선교회 cpbc2023.08.02

“마틴 목사의 책 베낀 「성교요지」는 이벽의 저작일 수 없다”[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3. 「성교요지」와 「상자쌍천(常字雙千)」 윌리엄 마틴 목사의 「상자쌍천」 원본의 원문과 영문 번역 부분, 그리고 베드로의 둘째 서간을 ‘피득 후서’로 표기한 부분과 숭실대본 「성교요지」의 같은 대목을 비교하였다. 「상자쌍천」은 한자 습득을 위한 교재여서 매 낱글자에 대한 분석과 발음이 적혀있다. 서양 명사 및 인물 지명 표기에서 잡힌 발목「성교요지(聖敎要旨)」는 이벽(李檗, 1754~ 1785)의 저술로 알려져 왔다. 초기 교회사의 어떤 기록에도 없던 이 책은 1967년 김양선 목사가 공개한 「만천유고」 속에 섞인 필사본으로 처음 알려졌다. 이벽이 세상을 뜬 지 무려 182년 뒤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앞서 본대로 「성교요지」가 수록된 「만천유고」는 이 책 저 책을 베껴 짜깁기한 조잡한 서적이었다. 다만 「성교요지」마저 가짜라고 단정할 근거가 명확지 않았다. 내용 또한 4언체의 한시 형식이어서 수준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윤민구 신부는 「성교요지」 속의 성경 용어나 인물 및 지명 표기가 거의 예외 없이 개신교 성경의 표기법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점에 의심을 품어,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국학자료원, 2014)에서 「성교요지」가 개신교 쪽에서 지은 책이 분명하여 이벽의 저술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는 「성교요지」를 천주교 주요 문헌으로 믿어온 측의 큰 반발을 불러, 명백하고 타당한 논의였음에도 이후 끝없는 비방과 음해에 시달려야 했다. 예를 들어 「성교요지」 제4장의 주석 중에 “위 단락은 아래의 글을 총괄하는 이 장의 강령이다. 피득(彼得) 후서(後書)에 나온다.(右節總冒下文, 此章之綱領也. 見彼得後書)”라 한 대목이 있다. 여기 나오는 피득 후서는 신약성경 중 베드로의 둘째 서간을 가리킨다.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백다록(伯多祿)으로 적지, 피득이라고는 표기하지 않는다. 피득은 베드로를 영어식으로 ‘피터’라 읽을 때 적을 수 있는 표기다. 실제로 오늘날 중국에서 통용되는 성경에서 베드로의 첫째, 둘째 서간은 가톨릭 성경에서 지금도 ‘백다록 전후서’로 되어 있고, 개신교 성경에는 여전히 ‘피득(彼得) 전후서’로 나온다. 이것은 바오로를 ‘폴’이라 하고, 안드레아를 ‘앤드류’, 마태오를 ‘매튜’로 읽는 차이가 중국어 표기에 반영되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성경 편명으로 영어식 표기를 딴 ‘피득 후서’로 적는 것은 천주교에서는 결코 쓸 수 없는 표기다. 더구나 제대로 된 번역 성경을 본 적도 없는 이벽이었다면 말할 것도 없다.윌리엄 마틴 목사의 「상자쌍천」과 「성교요지」정작 「성교요지」가 이벽의 저작이 아니라는 결정적 한 방은 개신교 쪽에서 터져 나왔다. 2019년 5월, 김현우, 김석주 두 사람이 공동으로 발표한 「소위 이벽의 「성교요지」로 잘못 알려진 W.A.P. Martin(丁良)의 「The Analytical Reader(認字新法 常字雙千)」에 대한 연구 서설」이란 논문이 그것이다. 두 사람은 이 글에서 「성교요지」가 미국 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 1827∼1916) 목사가 1863년 중국 선교사들에게 효율적 한자 교육을 위한 교재로 개발하여 간행한 「인자신법(認字新法) 상자쌍천(常字雙千)」이란 책을 주석까지 통째로 그대로 베낀 것임을 처음으로 밝혔다. 책 제목은, 상용한자 2천 자를 가지고 쓴 한자를 인식하는 새로운 방법이라는 뜻이다. 마틴 목사는 1854년, 개신교 선교사의 저작 중 가장 많은 독자와 만났던 「천도소원(天道溯源)」을 저술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이후 1862년 상하이에서 선교사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중국어 교육에 관심을 가져, 1863년에 이 책을 출간했다. 그는 중국어 단어의 사용 빈도를 꼼꼼히 계산해서 뽑은 윌리엄 갬블의 6000자의 상용한자 중에서 특별히 사용 빈도가 더 높은 2,016자를 뽑아, 4언체의 천자문 양식을 빌어 한 글자도 중복하지 않고 운자로 배열한 2천자문을 최종 완성했다. 당시 그는 남경의 학사(學士) 하사맹(何師孟)이란 중국인을 고용해 그의 도움을 받아 본문을 완성했다.(이에 관한 논의는 계명대 황재범 교수가 쓴 ‘「성교요지」의 원본 마틴 선교사의 「쌍천자문」 연구’(「신학사상」 190집(2020 가을)에 자세하다.) 본문은 4언체 한시가 소제목 아래 단락별로 나오고, 옆면에 영문 대역(對譯)을 실었다. 그런데 2천 자를 단 한 번의 중복을 허용하지 않은 채 엮다 보니, 구문이 비틀리고 억지로 채워 넣은 글자가 적지 않다. 중간중간 주석을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오독과 무지「성교요지」는 「만천유고」 본과 「당시초선」이란 표제로 된 책자에 필사된 「당시초선」본, 이와 별도로 한글본 「성교요지」 세 가지가 전한다. 모두 숭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하성래와 김동원의 번역은 마틴 목사의 영어 번역을 못 본 채 한문본만 보고 번역한 결과 숱한 오역이 발생하였다.지면 관계상, 한두 가지 예만 들어본다. 제3장 「강구(降救)」 중에 “냉가성읍(冷迦城邑), 파미도로(巴米道路). 유태국야(猶太國也), 서내산호(西乃山乎)”의 대목이 있다. 한글본은 이 대목을 “냉가국 셩읍과 파미로 가는 길이 이르면 유태국이라 하나니, 셔내산이라 이르나니”로 풀었고, 하성래는 “냉가성읍과 파미 도로와 유태국과 시내산에서”로, 또 김동원은 “예루살렘 성읍에서, 파미도로 거쳐 가니, 온 유대를 다니시며, 시나이산 이르렀네”로 옮겼다. 영어 번역은 “Jerusalem and Capernaum, a city and town, To Babylon and Media were ways and roads, Judea was a kingdom, Sinai a mountain”이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도시인 예루살렘과 시골 카파르나움엔, 바빌론과 메디아로 가는 길과 도로 있었네. 유다는 왕국이었고, 시나이는 산이었지.” 결국 원문의 ‘냉(冷)’은 예루살렘, ‘가(迦)’는 카파르나움을 가리키고, ‘파(巴)’는 바빌론(Babylon)을, ‘미(米)’는 메디아(Media: 옛 성서에서는 메대)를 나타내는 약호였다. 유태(猶太)는 유다 지방을 가리키는 개신교의 표기이고, 천주교 문헌과 안정복의 「천학문답」에는 여덕아(如德亞)로 나온다. 시나이 산은 시내(西乃)로 적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냉가와 파미가 각각 고대 도시 지명을 한 글자만 따서 축약한 것인 줄을 미처 알지 못했다.또 제10장 「시훈(施訓)」 조의 “학별파지(學別派支) 애전허치(埃田許置)”의 ‘애전(埃田)’은 번역본들이 풀이한 속세나 세상의 뜻이 아니라, 에덴의 음차이다. 「성경직해」에서는 에덴을 그냥 낙원으로 옮겼다. 고유 명사나 특수 용어를 일반적 사전 의미로 풀이한 데서 발생한 오역이다. 이밖에 세부적으로 원서의 영어 번역문과 대비해 보면, 현재 통용 번역에는 맥락을 놓친 오역이 상당히 많다. 표기법만 두고 볼 때, 예루살렘을 야로살냉(耶路撒冷), 카파르나움을 가백농(迦百農), 바빌론은 파비륜(巴比倫), 메대는 미태(米太), 유대를 유태(猶太), 시내를 서내(西乃), 에덴을 애전(埃田), 아벨을 아백(亞伯)이라고 동시에 표기한 것은 1854년에 중국에서 간행된 개신교의 이른바 위판역본(委辦譯本) 성경이 유일하다. 1635년에 알레니(艾儒略)가 펴낸 「천주강생언행기략(天主降生言行紀略)」이 예루살렘을 협로살릉(協露撒)으로, 카파르나움을 갈발옹(葛發翁)으로 적고 있는 것과 다르다. 이벽이 예루살렘과 카파르나움의 약호를 썼다면 ‘냉가(冷迦)’가 아닌 ‘릉갈(葛)’이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위판역본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포교 활동이 공식 허용되기에 앞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해 집체 작업으로 함께 번역한 것이다. 이후 개신교의 성경 속 명사 표기는 이 책의 표기로 통일되었다. 1863년에 「상자쌍천」을 펴낸 윌리엄 마틴 목사가 이 성경의 명사 표기를 따른 것은 당연하다. 「성교요지」 속 모든 고유명사 표기는 전적으로 1854년 위판역본, 즉 개신교 성경번역위원회가 마련한 번역본과 일치한다. 그러니 전체 성경, 특히 구약 성경의 온전한 번역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점에 살았던 이벽이, 그가 사망한 지 78년 뒤에 간행된 위판역본 성경의 표기체계를 그대로 받아 모든 명사 표기를 여기에 일치시킨다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론은 이렇다. 「만천유고」에 수록된 「성교요지」는 절대로 이벽의 저작일 수 없다. 사실 이 점은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이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시성시복 자료집에서조차 「성교요지」 관련 사실을 뺀 것이 그 분명한 증거다. 이 책은 1863년 윌리엄 마틴 목사가 쓴 「인자신법 상자쌍천」을 베낀 것에 불과하다. 황재범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그마저도 1863년 초판본이 아닌 1897년 재판본을 베꼈다. 나란히 실린 「만천시고」가 1893년에 나온 양헌수의 「하거집」의 시 23수를 베낀 것으로 보아, 이 책 전체는 20세기 이후에 누군가가 불순한 의도로 베껴 쓴 것이 명백하고 확실하다. 이렇게 「성교요지」가 마틴 목사의 책으로 밝혀지자 최근 일각에서 다시 해괴한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당시초선」 본 「성교요지」에 손을 다쳐 왼손으로 이 글을 필사했다고 적혀 있는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중국 강남에 들어갈 때 이벽의 책을 베껴 가져갔고, 이것이 유통되다 마틴 목사에게 채집되어 「상자쌍천」이 되었다는 희한하고 놀라운 논리다. 기존의 잘못을 더 큰 거짓으로 덮으려는 궁여지책에서 나온 논리요 행동이다. 모르고 한 잘못은 인정하면 그뿐인데, 가짜 책 「성교요지」를 지키겠다고 진짜 저자인 윌리암 마틴 목사까지 도둑으로 내몰려 한다. 언어도단이다. 이는 천주교계를 위해서도 이벽을 위해서도 결코 득 될 일이 아니다. 「성교요지」는 이벽의 저술이 아니다. 차고 넘치는 증거를 외면하고, 독선의 외고집을 부리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상적 흐름을 저해하는 최악의 선택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이벽의 위상은 가짜 책 「성교요지」가 아니래도 우뚝하다. 이 책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이 재연되는 것을 교회가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최근 교구의 인준을 받아 간행된 김동원 신부의 「한국의 천학과 영성」이란 책자에서 「성교요지」가 변함없이 한국 천학 영성 자료의 첫머리에 놓인 것을 보고 나는 실로 경악했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cpbc2022.03.30
![[생활 속의 복음] 부활 제3주일-당신 자신이며 일상인 빵](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3/04/19/8701681867077032.jpg)
[생활 속의 복음] 부활 제3주일-당신 자신이며 일상인 빵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3,30)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희망이었던 스승이 그만 십자가형으로 죽었습니다. 터덜터덜 낙향 중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일어난 절망스러운 사태를 되짚어보고 있었을까요? 여자들이 천사를 통해 들었다는, 바로 그분이 살아계시다는 말은 또 뭔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때 주님이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눈이 가리어졌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왜 눈이 가리어졌을까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근심과 걱정뿐이어서 그럴까요? 뭔가에 사로잡혀 있다면 여간해서는 제대로 보기 어렵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없는 분입니다. 없는 분을 볼 수는 없었겠죠. 1. 알아보자마자 사라지신 예수님 예수님이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요술 게임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다는 건 일종의 깨달음입니다. 예수님에게 빵은 그냥 빵이 아닙니다. 당신 자신입니다. 빵의 속성은 나누어지고 건네져 먹혀야 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장 참조) 제자들은 그동안 빵을 떼어 건네시는 주님을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5000명을 먹이신 주님 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배수진을 치고 하느님 아버지께 하소연하는 주님 모습입니다. 그때 나누어진 것은 단순히 빵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더 결정적입니다. 수난 전날 마지막 만찬 때 일입니다.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하십니다. (마태 26,26) 첫 번째 성찬례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지금도 이 예를 행하고 빵을 받아먹습니다. 그 순간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몸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제2의 그리스도,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먹고 바오로 사도처럼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라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회심이고 일깨움입니다. 2. 주님이 우리 맘속에 살아있는 분으로 모셔져 있는가? 그들의 눈이 열렸는데, 주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절) 주님이 들려준 말씀은 처음 듣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전에 자주 들려주시던 말씀입니다. 그래서 ‘왜 그리 믿는 데에 굼뜨냐’고 주님으로부터 야단까지 맞습니다. 제자들 맘속에 각인된 뭔가가 있고, 빵을 떼는 행위로 그것들이 작동됩니다. 끊어졌던 기억이 연결됩니다. 주님이 들려준 말씀이 되살아났고 빵을 떼어 주시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주님과 함께 나눈 형제애였고 일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면 ‘나그네와 하룻밤 동숙’으로 그쳤을 것입니다. 육신의 눈에는 언제나 길가는 나그네요 이웃일 뿐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이 우리 맘속에 살아있는 분으로 모셔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느 순간 ‘주님이시다’ 하고 깨닫게 됩니다. 빵은 떼어 나누어져야 합니다. 이는 실재이면서 상징입니다. ‘아하!’ 탄성의 순간, 형체를 지닌 주님은 사라지십니다. 그러나 새로워졌습니다. 용기를 내 삶으로 들어갑니다. 두 제자는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그들이 처한 여건은 여전히 어둡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실망과 좌절, 두려움이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다른 열한 제자와 동료들과 비슷한 체험을 서로 나눕니다. 우리도 비슷한 체험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오늘 두 명의 제자는 바로 우리입니다. 만약 두 제자가 낯선 이와 말을 섞지 않았다면, 그의 말에 경청하지 않았다면, 저녁나절인데도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면, 식탁에 함께 앉아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부활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cpbc2023.04.13
![[김광숙 노엘라의 생명의 빛을 찾아서] (9)](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3/02/22/6791677047384795.jpg)
[김광숙 노엘라의 생명의 빛을 찾아서] (9)영적 여정의 길 꼬미마을 뒷동산 오르막길을 안내하는 팻말. 2020년 9월 말 고향으로 돌아와서 몇 개월 보내고 난 후 첫 새해를 맞이하였다. 새 삶 터에서 어떤 부르심이 있으실까? 전·진·상(全眞常) 영성수련 7박 8일을 기획해서 집에서 개인 피정을 시작하였다. 8일간의 식단을 미리 짜놓고, 규칙적인 몸 기도, 산책, 청소, 성무일도(Divine Office), 미사와 다섯 번의 기도 시간을 포함한 일정표에 따라 수련을 시작하였다. 첫째 날은 몸과 마음의 긴장 풀기, 둘째 날은 오감으로 창조세계 관상, 셋째 날은 타격아(打擊我, 포기), 타도아(打倒我, 겸손), 타사아(打死我, 순명), 넷째 날은 온전한 비움(全犠牲), 다섯 째날은 진실한 사랑(眞愛人), 여섯 째날은 항구한 기쁨(常喜樂), 일곱 째날은 삶의 자리에서 참 행복(眞福八段), 여덟 째날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Finding God in all things)에 관한 성경 구절들을 묵상했다. 넷째 날, 버림과 따름에 대한 묵상을 하다가 뒷동산 길 이름이 떠올랐다. 뒷산은 3가지 형태의 길이다. 오르막길이 15분, 평평한 둘레길이 10분, 그 후 내리막이 10분 정도이다. 반환점을 돌아오면 왕복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산책길이다. 오르막은 숨을 헐떡이며 정상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이 일어나고, 둘레길은 안정되고 평탄한 쉼의 여정, 내리막은 비우고 내려놓아 또 다른 형태의 삶을 누리는 순간이다. 마치 우리의 인생길과도 같고, 영적 여정과도 어울린다.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하여 세속적인 가치를 벗어나 하느님께 의탁하는 교회의 전통적인 영적 성숙의 여정, 성덕 진보의 3단계가 떠올랐다.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이다. 이 여정은 모든 그리스도 신앙인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성령에 자각된 자아는 이 길을 걷고자 한다. 보나벤뚜라(1217~1274)는 정화되고 싶다면 양심의 가책에 의지하여 자신을 단련시키라고 한다. 조명되고 싶다면 지성의 빛에 의지하여 죄를 용서받았음을 드러내라고 한다. 완전한 일치를 얻고 싶다면 지혜의 작은 불꽃에 의지하여 피조물에 대한 모든 사랑을 우리 마음에서 남김없이 뽑아버리라고 한다. 3가지 길로 나아가는 방법은 묵상(독서), 기도, 관상이라고 말하고, 내적 여정의 목적은 평화의 안식(좌품천사), 진리의 빛(케루빔), 사랑의 감미로움(세라핌)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꼬미 마을 뒷동산 오르막길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의 정화를 꿈꾼다. 지은 죄 때문에 수치스러워하며, 유혹에 맞서 싸우고, 적극적으로 십자가 따름을 열망한다. 둘레길, 조명의 길에서 고통을 받고 계신 분이 누구신지 생각하고 믿음으로 자신을 내맡기며, 깊은 통찰력을 갖고, 용서받은 잘못에 대한 은혜의 빛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내리막길을 걸어가면서 하느님과의 합일, 일치를 희망하며, 영혼의 친교 안에서 늘 주님을 바라고 찾고, 열망하며 기뻐하고 매달리고 있음을 고백한다. 피정을 마치고, 아버지께 왕복 길을 안내하는 팻말을 부탁드렸다. △오르막 : 정화의 길, 포기의 길, 십자가의 길 △둘레길 : 조명의 길, 겸손의 길, 부활의 길 △내리막 : 일치의 길, 순종의 길, 육화의 길이다. 꼬미 마을은 이제 우리만의 공간을 넘어서서 지친 영혼의 쉼터, 안식처가 되고자 한다. 지금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관솔과 함께하는 쉼 & 회복 여정이 마련되어 있다. 산길을 오를때마다 성모님처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뛴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2023.02.22

헬스케어 디지털 전문가이자 하느님께 지혜 청하는 신앙인 [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 (35) IT 전문가 김승현 데레사 김승현씨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외국어 통역 봉사자로 활동했다. 부모님 신앙을 따라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었고, 여섯 살 때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김승현(데레사)씨. 김씨는 외국계 제약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IT 전문가이다. 환자 중심의 디지털 생태계를 만들고자 글로벌 부서들과 협업하여 프로젝트도 하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한국 헬스케어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 사회과학 분야 공부를 했지만, 경력은 정보 기술 분야로 쌓아오면서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김씨는 서로 다른 듯 연결되어있는 두 학문과 분야를 융합해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한다.그를 처음 만난 때는 10여 년 전 청년성서모임에서였다. 이후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김씨가 외국어 봉사자로 참여하고, 수백 명의 봉사자를 관리하는 책임자로서 그와 다시 만났다. 김씨는 작년 명동에서 봉사 중에 외국 회사들과 30분가량 스마트폰으로 회의하기도 했다. 이처럼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봉사에 시간을 아끼지 않고 참여하며 인연을 이어 나갔다.Q. 학창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A. 친구들 만나는 것이 좋고 선생님도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어서 학교 가는 게 참 즐거웠어요. 방학하면 개학을 언제 하는지 물어봤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학교에서 구구단을 외워오라고 한 이후부터는 방학을 언제 하는지 물어봤어요.(웃음) 성실하고 명랑한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다양한 것에 호기심이 많고 많은 걸 경험하고 싶었어요. 학년이 올라갈수록 모든 과목을 모두 잘해야 하는 고등학교 때보다, 제가 관심이 있고 잘하는 과목에 집중할 수 있는 대학교 때 공부가 더 재미있었어요. Q. 하느님께서 어떤 재능을 주신 것 같나요? A. 항상 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돌아보는 건 어려운 것 같아요. 돌이켜봤을 때 제가 재미있어하고 잘했던 건 언어 쪽이었던 것 같아요. 보이는 글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글을 깨우치고, 외국어도 뭐라고 얘기하는지 모르면서 따라 하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다가 관심을 지니게 되었어요. 지금 하는 일도 비즈니스에서 하는 언어를 이해하고 기술 분야에서 하는 언어를 알아서 서로가 이해하는 언어로 풀어내는 일이에요. 업무 용어나 사업에 대한 이해 등도 모두 내가 좋아하는 언어와 관련해서 쉽게 풀어낼 수 있으니 재미있게 할 수 있어요. 이러한 재능이 갈등을 싫어하고 부드럽게 잘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 성향과 맞물려서 사회에서나 개인적으로나 미약하게나마 역량을 발휘해 나가는 것 같아요.Q.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A.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중 하나는 ‘조화’예요. 한 사람이 모든 걸 다 잘할 수는 없어요. 또한,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여러 가지 각기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지요. 살아가다 보면 혹은 일하다 보면 이해가 충돌되거나 감정이 개입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걸 조화롭게 풀어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Q. 삶의 길잡이나 지표가 되어준 성경 말씀이 있다면? A. 창세기에 나오는 “보시니 참 좋았다” 이 말씀이 오랜 여운이 남아요. 그렇게 하나하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사랑으로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 주신 곳에서 우리가 사는 거잖아요. 모든 생명체 하나하나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구절이에요.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더 잘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Q. 성서 모임과 연수는 삶 속에서 어떤 의미가 되었나요? A. 성경 공부를 통해 막연했던 성경 말씀이 생활과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특히 탈출기 공부했을 때가 생각나요. ‘광야’ 하면 끝도 없는 사막에 끝 날에 대한 기약도 없는 시련이었는데 이것을 삶 속에서 연계해서 생각해보니 많은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어요.Q. 살면서 ‘이것이 바로 하느님 기적’이라고 느꼈던 체험이 있나요?A. 어렸을 때 첫영성체 준비하던 때가 떠올라요. 교리 공부할 때 신부님께서 매일 묵주기도를 드리면 하느님께서 예쁘게 보실 거라고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매일 밤 자기 전에 무릎 꿇고 두 눈 꼭 감고 묵주기도 5단을 드렸어요. 첫영성체 며칠 전에는 여름밤 방문을 닫고 묵주기도를 드리는데 양팔 옆에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어요. 묵주 알을 하나하나 넘기며 기도드릴 때마다 하얀 구름 같은 것이 펄럭이면서 예쁜 빨간 장미꽃이 한 송이씩 놓이는 게 눈을 감았는데도 보였어요. 그리고 첫영성체 바로 전날 밤 꿈에 성모님이 보였는데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성모님 모습이었어요. 집이나 성당에서 봤던 성모상은 두 손을 기도 손으로 모으고 먼 곳을 바라보시는 성모님이었는데 꿈에서는 두 손을 양옆에 펼치고 계셨어요. 꿈에서 깬 후 그때까지 본 적 없는 성모상을 꿈에서 봐서 신기해하며 첫영성체를 하러 성당에 갔어요. 성체를 잘 모시고, 성당에서 선물로 작은 성모상을 주셨는데 바로 꿈에서 뵈었던 성모님 모습을 하신 성모상이었어요. 신기해서 계속 기억에 남아요. 그때 기억이 담긴 성모상이라 잘 간직하고 있어요. 야광이라서 밤에는 환하게 빛나신답니다.Q. 일하면서 언제 가장 보람됐나요?A. 직접적으로 신약을 개발하지는 않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의 건강과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끼며 하고 있어요. 가끔은 일 자체만 집중하지만 넓게 보면서 더욱 편리하고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은 없는지 다시 되돌아보게 되어요.Q. 일하면서 기도도 열심히 하나요? 어떤 기도를 하나요?A.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잘해나갈 지혜를 허락해 주시길 기도드려요. 그러면 그 지혜를 저에게 주실 때도 있고 지혜로운 조력자를 보내주실 때도 있었어요. 지나고 보니 스킬이나 언변, 지식, 인복 모두 중요하지만 모든 걸 지혜롭게 조화시키고 지혜로 헤쳐나갈 에너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항상 기도해요.Q. 특별히 생각나는 봉사가 있나요?A. 예전에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일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어떤 봉사를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픈데 돈이 없어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정말 비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관련 기관이나 단체를 알아보았더니 마침 ‘라파엘 클리닉’이라는 이주 노동자 무료 진료소를 알게 되어 정기적으로 봉사했어요. 언어가 달라서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분들에게 간단하게 통역하는 도움을 드렸습니다. 또 영상의학과에서 초음파 진료를 도와드리거나 초음파나 엑스레이 영상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봉사를 했어요. 김씨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여름휴가를 내고 프레스센터에서 기사를 번역하는 봉사를 했다. 그녀는 기사를 번역하면서 성경 용어도 많이 알고, 기사 쓰는 법도 알게 되어 봉사가 오히려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되었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가끔 유기견 보호소 봉사나 헌혈 등 그때그때 도움이 필요하겠다 싶은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찾아가고, 더 많이 봉사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질수록 우리가 사는 사회는 더욱 밝고 따뜻해질 것 같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원장) cpbc2022.09.13

해설서와 함께 마르코 복음 더욱 깊게 음미해보자마르코 복음서 이해 돕는 도서 나란히 출간 마르코 복음서의 이해를 돕는 도서가 나란히 출간됐다. 입문자를 위해 다양한 일화와 해석이 곁들어진 책도 있고, 말씀 그 자체에 집중한 책도 있다.마르코 복음 기쁨의 문을 열다손희송 주교 지음 / 생활성서마르코 복음서의 주요 메시지를 신학적 토대 위에 다양한 일화와 묵상을 곁들여 이해하기 쉽게 안내해 주는 「마르코 복음 기쁨의 문을 열다」가 출간됐다. 서울대교구 총대리 손희송 주교의 「주님은 나의 목자」 최신 개정판으로, 손 주교가 지난 2005년부터 매년 한 차례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 ‘마르코 연수’에서 강의했던 내용을 다듬고 보탰다. 손 주교는 개정판에 특별히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저서 「나자렛 예수」를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바를 더했다. “교황님의 책을 미리 읽었더라면 보석과 같은 그분 생각을 일부라도 제 책에 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고, (중략) 2022년은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이 시작된 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런 뜻깊은 때에 청년 성서 모임에서 봉사한 결실로 얻은 책을 새롭게 단장해서 내놓게 되어 더욱 기쁩니다. 앞으로도 성서 모임을 통해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루카 8,15) 청년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기원합니다.” 신앙에 들어서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는 손 주교는 ‘문을 열다’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펴내고 있다. 「마르코 복음 기쁨의 문을 열다」는 「미사 마음의 문을 열다」, 「칠성사 믿음의 문을 열다」에 이은 세 번째 책으로, 성경 말씀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묵상과 다양한 일화를 곁들여 설명한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말씀을 곱씹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로마 2,11)고 모든 이를 품어 주는 분이시다. 인간처럼 사람을 가려서 마음에 들고, 능력 있고, 어여쁜 이들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부족하고 못난 이들도 똑같이 사랑하신다. 마치 부모가 공부 잘하고 성공하는 자식만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자식도 아끼듯이. 어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건강한 것만으로도 고맙고, 공부 잘하는 아이는 신통해서 고맙고, 말썽꾸러기 아이는 그 힘찬 고집이 고맙다.” 아마 하느님의 마음도 이러하실 것이다.(25쪽)성경을 처음 공부하는 이들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으면서 예수님 일생의 맥을 잡을 수 있도록 핵심 줄거리를 굵직하게 기록한 마르코 복음서를 이해하고 나면 다른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손 주교는 마르코 복음서를 주로 해설하면서 동시에 다른 공관 복음서의 이야기도 곁들여 소개해 말씀의 참맛을 느끼게 해 준다. 1986년 사제품을 받은 손희송 주교는 1992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교에서 교의신학 박사 과정을 수료, 1996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교의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 서울대교구 사목국장을 역임했으며, 2015년 8월에 주교품을 받은 뒤 현재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다.마르코가 전하는 기쁜 소식 클레멘스 슈톡 신부 지음염철호 신부 옮김 / 성서와함께「마르코가 전하는 기쁜 소식」은 마르코 복음서의 현재 본문에 집중한 책이다. 자료 비평이나 양식 비평이 주목하는 원본문이나 배후의 자료 등 과거 자료들을 배제하고, 지금 마르코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그 자체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해설서다. 이와 동시에 복음서의 개별 단락들이 문맥 안에서 어떻게 설명되고, 그 단락들이 배치된 구조가 문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본다. 여기에는 각 본문의 개별성과 하나의 작품이라는 복음서의 전체성을 균형 있게 풀어내려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눈먼 이의 치유 이야기가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벳사이다(8,22-26)에서, 다른 한 번은 예리코(10,46-52)에서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가 눈먼 사람이 볼 수 있게 치유 기적을 행하는 이야기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벳사이다의 눈먼 이는 스스로가 아닌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오지만, 예리코의 눈먼 이는 잠자코 있으라는 사람들의 꾸짖음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께 자비를 청한다. 또 벳사이다에서는 치유의 과정이 묘사되지만, 예리코에서는 치유와 관련된 행위나 말 대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로 눈먼 이가 앞을 보게 되고, 예수님의 여정에 동참한다.또 두 이야기는 각각 다른 문맥에 배치되어 있다. 벳사이다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 마지막에, 곧 제자들에 대한 질책성 질문과 예수님 자신의 신원을 묻는 이야기 사이에 위치한다. 반면 예리코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마지막에, 곧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 사이에 위치한다.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마르코 복음서 전체를 해설하면서, 각 이야기의 개별성과 이야기가 문맥과 맺는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생애와 활동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복음서가 이야기하는 모습 그대로 경청하고, 이야기 자체와 전체 맥락의 고유하고 특별한 관점을 알도록 안내한다. “예수님의 활동과 수난에 관한 마르코 복음서의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고 의미심장하다. 이야기의 개별성과 그 이야기가 문맥과 맺는 관계에 관심을 집중하다 보면 그 풍성함과 의미심장함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이런 작업은 일종의 주석적 독서라기보다 예수님 생애의 신비(mysteria vitae Iesu)를 이야기하는 일종의 영성적 독서이자 신학적 독서이다.”(18~19쪽)저자 클레멘스 슈톡 신부는 독일 예수회 회원으로,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과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신약성경 주석을 가르쳤고, 2002년부터 2014년까지 교황청 성서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책을 번역한 염철호 신부는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cpbc2022.09.28

신을 다르게 부르는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3) 하느님과 하나님 2022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에 참여한 한국그리스도교신앙과직제협의회 회원들이 교회 일치와 인간 존엄과 정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고 있다. 주교회의 교회일치와종교간대화위원회 제공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고, 개신교에서는 왜 ‘하나님’인가요?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의 일치에 첫 번째 걸림돌은 신의 이름을 ‘하느님’과 ‘하나님’으로 다르게 부르는 것입니다. 신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엘로힘’, 그리스어 ‘테오스’, 라틴어 ‘데우스’, 영어 ‘갓’을 천주교와 개신교가 다르게 번역하는 경우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천주교는 본래 가톨릭 신앙의 보편성을 뜻하는 하늘의 주인을 섬기는 종교라는 의미로 하느님을 ‘천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1977년 「공동 번역 성서」가 발간되면서 이전부터 널리 사용해 온 순수한 표준어인 ‘하늘님’의 국문법적 표현으로 ‘하느님’이란 용어가 교회 안에 자연스럽게 정착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은 ‘하늘’이 곧 ‘유일한 분’이시며, ‘하느님’이든 ‘하나님’이든 이름에 내포된 ‘하늘’은 초월적이고 유일한 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가장 겸허한 방식임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국에 전래된 천주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천명한 종교를 뜻합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경우는 선교 초기부터 천주교와 구별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전하고자 한국 사회에 만연한 보편적 신(神) 신앙과는 다른 절대적이고 초월적이며 성경에 계시된 유일한 신을 강조하여 ‘하나’라는 수사적 표현과 존칭인 ‘님’의 합성어인 ‘하나님’을 공식적인 하느님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나님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신, 곧 히브리어 엘로힘, 그리스어 테오스, 라틴어 데우스, 영어 갓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이해하고 강조하는 관점에 대한 차이가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사상적 차이를 만들기도 합니다. 개신교 목회자와 신자 중에는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불어야만 한다고 강조하면서 독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에도 전례나 대화에서 어쩌다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편견과 오해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치에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부와 목사는 어떻게 되나요? 천주교에서 신부가 되는 과정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사제 양성 교령’(1965년)이 발표된 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정되어 온 「사제 양성 지침」을 따릅니다. 물론 사제 양성 과정에 지역 교회의 특성이 존중되지만, 보편 교회의 지침에 따라 매우 엄격하고 긴 양성 과정은 공통적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현재 6개 대신학교(서울, 대구, 광주, 인천, 수원, 대전)에서 7년의 정규 교육 과정(대학 4년과 대학원 2년, 부제반 1년)과 별도로 1년의 사목 실습, 그리고 2년의 병역 의무(현역 또는 대체 복무)를 거쳐 사제 후보자를 선발합니다. 신학생은 양성 과정 중에 신학교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방학 때는 다양한 사목 현장에서 사목 실습을 한 뒤, 엄격한 성소 식별 과정을 거쳐 부제로 서품되어 성직자가 됩니다. 이어서 소속 교구장 주교나 그 권한을 위임받은 주교로부터 안수를 받아 사제가 된 다음에 성찬례와 성사를 집전하는 직무 사제직을 수행합니다. 반면 개신교는 교단의 특성에 따라 목사가 되는 과정이 매우 다양합니다. 한국 개신교의 주류 교단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경우 일반 대학 과정(장로회 신학대학교, 4년)을 마친 다음 장로교단에서 인정하는 신학대학원(3년)을 이수하고 일정 기간 전도사 생활과 ‘목사 고시’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경우 소속 대학교(감리교 신학대학, 목원대학교, 협성대학교)에서 대학 과정(4년)을 밟더라도 신학대학원(3년)을 졸업한 다음 교단의 규정에 따른 교육 과정을 이수한 뒤 목사 고시를 거쳐 목사가 됩니다. 이 밖의 다양한 개신교 교단에서는 자체 신학교를 운영하여 목사를 양성하고 있고, 외국의 신학 대학을 졸업한 다음 목사 고시를 통해 목사 안수를 받기도 합니다. 개신교의 목사 양성은 교단마다 기간과 과정이 서로 달라 통합된 교육 과정이 없습니다. ‘성직자’라고 불리는 가톨릭 사제와는 달리 장로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 목사는 루터의 만인 사제설을 바탕으로 목사 안수 이후에 설교와 예배를 인도하는 ‘교역자’, ‘목회자’로 불립니다. 그리고 장로와 집사들이 통상 교회의 운영을 맡는 것이 천주교와는 다릅니다.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 cpbc2023.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