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의 해' 맞아 볼만한 영화- 진흙 속의 진주, 가톨릭적 수작을 찾아신화, 성경 주제 얽힌 '나니아...' 연작, 수도회 일상 담은 다큐 등 추천 수많은 신화와 성경 주제가 얽힌 세계 3대 판타지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작품으로, 2010년에 나온 '나니아 연대기 : 새벽 출정호의 항해'. 최근 들어 노골적으로 종교에 적대적이거나 이단적이고 나아가 반가톨릭적인 영화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지난 1월 개봉한 '파이의 생애(Life of Pi)'처럼 자신이 마주하는 종교는 모두 받아들이면서 힌두교에 대한 믿음을 키워 결국은 '가톨릭 힌두교'라는 자신만의 종교를 갖게 되는 영화도 있고,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처럼 500년 시ㆍ공간을 불교의 환생과 윤회, 인연, 인과응보, 업보 등의 관념으로 여섯 개 이야기를 얽는 형태로 영화를 이끌기도 한다. 그럴수록 영화적 구성이나 내용에서 가톨릭적 특질을 반영하는 진정성 있는 가톨릭 영화가 더 절실해지고 있다. '신앙의 해'를 맞아 가톨릭 통신사들이 추천하는 가톨릭 영화들을 골라 소개한다.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 연작=세대를 뛰어넘어 사랑을 받는 20세기 최고의 판타지 소설인 C.S. 루이스 원작'나니아 연대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2005년에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 2008년에 '나니아 연대기 : 캐스피언 왕자'이, 2010년에 '나니아 연대기 : 새벽 출정호의 항해' 등이 나왔다. 나니아 탄생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화와 함께 성경 주제가 얽혀 있는 세계 3대 판타지 문학의 하나로 꼽히는 역작으로, 수도자들조차 "하느님에 대해 더 깊이 체험하는 계기가 됐다"고 고백할 정도다. DVD로 나와 있다. ▲위대한 침묵(Into Great Silence)=필립 그로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2005)도 관상수도회인 카르투시오회 수도자들의 일상을 담아내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세상과 단절한 채 오롯이 기도와 공부, 노동뿐인 단순한 삶을 수백 년 넘게 이어온 알프스 계곡 카르투시오회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공동체의 일상을 담고 있다. 2장으로 구성된 DVD에는 제작 과정과 전 교황청 문화평의회 의장 폴 포파르 추기경 추천 영상도 함께 실려 있다. ▲신과 인간(Of Gods and Men)=자비에 보부아 감독의 영화 '신과 인간'(2010)은 이슬람권 알제리 산골 수도원을 배경으로 정치적 사건에 의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직면한 프랑스 출신 수사 7명의 고뇌와 갈등을 그린 영화다. 2010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그랑프리 수상작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 그리고 신앙적 결단과 이상이 현실과 괴리를 띠게 될 때 그로부터 빚어지는 갈등에 초점을 맞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지난해 1월 국내에서도 개봉돼 화제를 뿌렸다. ▲잔 다르크의 수난(The Passion of Joan of Arc)=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걸작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이 첫 손에 꼽힌다. 칼 드레이어의 마지막 무성영화로, 비평계에선 잔 다르크라는 성녀를 다룬 가장 뛰어난 영화로 평가했지만 흥행에선 참패했다. 이 영화에서 잔 다르크 역을 맡은 배우 팔코네티는 감독 지시에 따라 아무런 분장을 하지 않고 등장했다. 잔 다르크나 심문자들을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촬영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국내에선 출시된 적이 없어 아쉽다. 다만 최근에 베네딕도 미디어에서 자크 리베트 감독의 '잔 다르크(Jeanne la Pucelle)'(1994)를 출시했다. ▲로메로(Romero)=엘살바도르 로메로 대주교를 다룬 존 듀이건 감독의 '로메로'(1989)도 특기할 만하다. 국내에선 베네딕도 미디어에서 비디오로 나온 적이 있지만,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아마존(www.amazon.com)같은 외국 쇼핑몰을 통해 구입이 가능하다. 늘 "복음이 누구에게 기쁜 소식인가?"하고 물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1980년 3월 피살된 로메로 대주교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전통을 사랑하고 고요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지만, 가난한 이들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한 뒤로 죽기까지 헌신한 그의 죽음은 자유와 평화의 씨앗이 되고 복음적 희망이 실현되는 신호탄이 됐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조은일2013.02.05
![[출판]성바오로딸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어르신 위한 '마태오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출간](//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5807_1.1_titleImage_1.jpg)
[출판]성바오로딸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어르신 위한 '마태오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출간 '새로 나는 성경 공부 '덕에 새로워지는 어르신들 신앙 인생 어르신 성경공부 인기강사 윤영란(일마, 바오로딸수도회) 수녀는 벌써 새해 시간표가 빡빡하다. 월요일은 대전, 화요일은 인천, 수요일엔 전주…. 어르신 성경공부 강의와 봉사자 교육으로 전국을 누비느라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최근 '새로 나는 성경공부' 새 교재 「마태오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가 출간돼 더 바빠졌다. 새 교재는 마태오복음서를 일주일에 1장씩 묵상하고 필사하도록 구성됐다. 또 성경말씀에 비춰 어르신들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알찬 내용(만들기, 노래부르기, 편지쓰기 등)으로 채워져 있다.(바오로딸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학생용 1만 4000원ㆍ교사용 1만 8000원) "바쁘지만 힘이 나요. 어르신들 만나고 오면 늘 감동이고요, 교육받을 때마다 달라지는 봉사자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껴요." 서울 미아동 바오로딸수도회 알베리오센터에서 만난 윤 수녀는 "새로 나는 성경공부 교재는 어르신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지만, 봉사자들과 함께 공부하면 더 좋은 책"이라며 "봉사자 역할이 중요하기에 봉사자 양성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했다. 8주 동안 일주일에 한 번 5시간씩 이뤄지는 봉사자 교육과정은 녹록지 않다. 봉사자들이 매시간 제출해야 하는 과제 분량도 만만치 않은 데다, 봉사자들은 교재 내용을 단순히 숙지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어르신들이 성경 말씀에 맛들이도록 이끌어주려면 봉사자 자신도 성경말씀을 가슴으로 체득해야 한다. "봉사자들에게 소명의식과 책임감을 강조해요.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성경공부를 통해 남은 삶을 더 기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윤 수녀는 "봉사자들이 교육을 받으면서 오히려 본인들이 성경에 새롭게 맛들이고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또 어르신들과 만나면서 얻는 남다른 감동과 보람에 어르신들보다 (어르신 성경공부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윤 수녀는 "새로 나는 성경공부 교재는 어르신들이 직접 성경을 써보도록 하기도 하고, 색칠하기, 만들기, 기도하기 등 말씀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꾸며진 것이 장점"이라면서 "일상생활에서도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 어르신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갈수록 노인사목이 중요해지잖아요. 어르신들은 신앙심은 그 누구보다 깊지만, 성경 한 번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분들이 대다수에요. 글을 못 읽으시는 분들도 있고요. 하느님 말씀의 참뜻과 참맛을 알려드리고 남은 삶을 하느님과 함께 더 행복하게 사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새로 나는 성경 공부를 강력 추천합니다." 박수정 기자 조은일2012.12.25
![[출판]성경의 대중화 말씀의 생활화 30년, 생활성서사 창립 30돌](//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6849_1.1_titleImage_1.jpg)
[출판]성경의 대중화 말씀의 생활화 30년, 생활성서사 창립 30돌 17일 청담동성당에서 기념행사 월간 '생활성서'를 발간하는 생활성서사(대표 박연례 수녀)가 설립 30주년을 맞아 17일 오후 1시 서울 청담동성당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섭리, 축복 그리고 말씀에 날개를 달다!'를 주제로 한 이날 행사는 생활성서 6월호 표지인물이자 '한비야의 종이비행기'를 연재하고 있는 한비야(비아)씨 특강과 수도자와 함께하는 찬양으로 꾸며진다. 파견미사는 생활성서에 '양승국 신부의 기도레슨'을 쓰고 있는 양승국(살레시오회) 신부가 집전한다.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가 한국 천주교 선교 200주년을 기념하며 설립한 생활성서사는 1983년 9월 1일 월간 '생활성서'를 발행하면서 출발했다. 언론이 통제당하고 각종 간행물이 폐간을 강요받던 전두환 정권 시절이라 생활성서의 창간은 더욱 의미가 깊다. 생활성서 창간 배경에는 광주대교구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광주대교구 사목국장이던 이영수 신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 수감됐을 때 감옥에서 성경을 통독했다. 이후 신자들 눈높이에 맞게 성경을 해설해주는 잡지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광주대교구장이던 윤공희 대주교 역시 이 같은 뜻에 공감하며 성경잡지 발행을 수녀회에 요청했다. 성경의 대중화와 말씀의 생활화에 헌신해 온 생활성서사는 지금까지 월간지 통권 358호를 발행했다. 국내는 물론 해외 40여 개국에도 월간지를 보내고 있다. '쓸모있는 잡지, 기다려지는 잡지'를 지향하며 신자들이 성경과 친숙해지고, 하느님 말씀을 일상생활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잡지 발행 초창기부터 이웃 종교를 소개하는 기획물을 연재하고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의 글도 꾸준히 게재하며 이웃 종교와 늘 함께했는데, 이현주 목사가 대표적이다. 생활성서사는 월간지와 함께 500여 종이 넘는 단행본을 출간하며 신자들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성경, 영성, 전례, 교리 관련 서적 발행에도 노력해왔다. 성경공부교재 「여정 첫걸음」(전 4권), 「여정」(전 11권), 어르신 성경공부교재 「은빛여정」(전 12권) 등은 성경사도직에 힘써 온 수녀회의 풍부한 경험이 빚어낸 작품이다. 어린이 교리교재 「신난다 첫영성체교리」, 「신난다 가정교리」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박준양 신부의 '신학여행시리즈'(전 6권)로 신학 대중화에 문을 열었고, 이태석 신부가 쓴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는 이 신부 선종 후 생활성서사의 대표작이 됐다. 출판사 대표 박연례(솔라) 수녀는 "생활성서사가 30년 간 독자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라면서 "하느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교회 선교사명에 적극 참여해 성경 생활화와 세상 복음화에 더 힘쓰겠다"고 말했다. 문의 : 02-945-3300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조은일2013.06.04
![[성경 속 궁금증] 69.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어떠한 의미인가?](//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8428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69.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어떠한 의미인가?가나안 땅 허락은 신앙의 결과로 주어진 선물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단순히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체이자 하느님 역사의 현장이다. 사진은 사해 근처 이스라엘 땅.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마디로 '땅의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의 땅은 하느님의 땅, 이스라엘인들이 치열하게 살고 전쟁하고 죽어간 땅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가 없던 시대에 가나안과 이집트 사이를 떠돌던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가나안 땅은 단순한 지리적ㆍ정치적 차원을 넘어서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내가 장차 보여줄 땅"(창세 12,1)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이 세켐에 이르러 그 땅에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알았을 때(창세 12,6) 거의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주신다고 약속한다. 따라서 구원사적 입장에서 보면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해 준 것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즉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한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은총이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결과로 주어진 특권이다(창세 22,17-18).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땅에서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땅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해야 한다. 땅은 백성의 종교적 행동을 반영하는 일종의 증거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에서부터 이미 조건은 주어져 있다(창세 15장). 따라서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을 상실한 것은 그들의 죄가 땅에서 그들을 추방하게 한 것이다(창세 15,16).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 땅은 이스라엘 민족을 버릴 것이다(레위 18,28). 따라서 땅으로부터 백성들이 추방됐다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느님 신앙은 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내가 장차 보여줄 땅"(창세 12,1)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본래 자신들의 것이 아닌 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땅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 땅에 대한 처리 권한은 전적으로 하느님에게만 있다. 마치 중세시대 영주가 충성한 종에게 하사하는 일종의 봉토로 해석한다.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땅은 후손들에게 계속 유전되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수 없다(민수 36,7). 하느님에게 속한 땅을 얻는 것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계약을 기억하고 계명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땅을 잃거나 얻지 못하는 것과 땅이 생산을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계약을 위반했기 때문이다(신명 4,26). 이러한 관점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이뤄진 유다 백성의 바빌론 유배는 백성이 하느님의 길을 걷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며, 그 심판은 하느님이 주신 땅으로부터 쫓겨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단순히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체이자 하느님 역사의 현장이다.황병훈2013.04.16
 사도 요한과 관계 깊은 에페소](//cpbc.co.kr/CMS/newspaper/2010/05/rc/337598_1.2_titleImage_1.jpg)
[사제의 해-성경의 땅을 가다](6) 사도 요한과 관계 깊은 에페소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성모님의 집에서 봉헌한 야외미사 강론에서 허영민 신부는 "기적은 우리 삶 곳곳에 있으며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기적이란 믿음의 결과가 아닌가.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라고 하셨다(마태 17,20). 우리는 믿음을 청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융 신부 일행이 성모님이 사셨던 집터를 발견한 1891년 당시 이곳에는 6~7세기 비잔틴시대 집 주춧돌만 있었다고 한다. 지금 건물은 1950년 이탈리아 카푸친 수도회에서 건축한 것이다. 미사 후 야외제대 옆 성모님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우리 죄인을 위해 하느님께 대신 빌어주시는 성모님, 아, 어머니! 다시 버스를 타고 에페소 유적지로 이동했다. 고대 에페소는 주민 20여만 명의 그리스 최대 도시였다. 로마 통치를 거쳐 비잔틴 제국, 다시 오스만 터키 지배를 받으면서 옛 영광의 자취는 온 데 간 데 없고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다. 에페소의 원형 음악당은 터키에서 가장 큰 규모로 2만5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무대에서 우리는 가만히 눈을 감고 성가를 불렀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느님을 향한 찬양 소리가 극장 전체를 감싸고 다시 우리 귓속을 울렸다. 요한묵시록에는 에페소 신자들을 향한 칭찬과 꾸중이 기록돼 있다. 요한은 악인들을 용납하지 않는 정의감과 뛰어난 인내심, 노고를 칭찬하신다. 그러나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에페소 신자들을 나무라셨다(묵시 2,1-7). 에페소는 사도 요한과도 관계가 깊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요한에게 성모님을 모시도록 하셨다(요한 19,26-27). 이후 요한은 오래도록 에페소에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사랑의 사도' 요한이 생을 마치기까지 완전한 사랑을 역설한 곳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또한 에페소는 사도 바오로와도 관계가 깊은 곳이다. 2차 전도여행 때 잠시, 3차 전도여행 중에는 27개월 가까이 머물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바오로 사도 당시만 해도 에페소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상업 중심의 항구도시였다. 에페소가 사치와 허영에 빠져 있을 때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타는 열정으로 말씀을 전했다. 바오로 사도가 진정 그렇게 열심히 선교했고 초세기 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소아시아(오늘의 터키 지역) 교회들은 오랜 세기 동안 이슬람 지배 속에 있게 됐다. 지금은 이슬람 사원들만 곳곳에 보일 뿐 찬란했던 교회의 자취는 사라지고 돌무더기로 흔적만 남아 있다. 왠지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조은일2010.05.25
![[성경 속 상징] 65- 숫자 십(10)의 상징-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수](//cpbc.co.kr/CMS/newspaper/2009/11/rc/314956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65- 숫자 십(10)의 상징-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수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우리나라에서 전화번호 2424는 이삿짐 센터에서 인기가 있다. 숫자가 갖는 의미 때문이다. 숫자를 세고 계산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 관한 기록 만큼이나 오래됐다. 숫자는 개수를 나타내는 문자이다. 숫자 역사를 보면 수의 각 단위를 기호로 나타낸 초기 이집트 숫자에서 기호로 수를 나타낸 그리스 숫자로 발전됐다. 숫자는 처음에는 벽이나 지면, 판자 등에 필요한 수만큼 줄을 긋는 것으로 표현됐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수(數)에 따라 분류되고 질서가 잡힌다.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존재 자체의 원리는 수에 있다고 보았다. 어떤 문화에서든지 수에는 제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인류 최초 계산기라고 할 수 있는 손가락의 개수는 열 개다. 십(10)은 만족, 충만의 숫자다. 최고나 정상, 그리고 충족을 의미한다. 십이란 숫자는 소위 전체적 수다. 십이란 숫자는 일괄해서 정리한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 가르침에는 세속의 신자에게 주는 오계와 승려에게 주는 오계 등을 합한 십계가 존재한다. 원시인은 자기 손가락으로 물건의 수를 헤아렸다. 옛날부터 숫자 십은 십진법의 기본이었다. 또한 절대성, 이해력 등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를 수학적 수치보다는 상징적 의미에 중점을 뒀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은 십계명일 것이다. 십계명,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숫자 십은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수로 우선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한 후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열 번째 재앙인 이집트 맏아들과 맏배의 죽음을 경험했다(탈출 12,37-42). 그 후에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다(탈출 20,1-17).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인 살렘왕 멜키체덱에게 드렸다.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창세 14,20). 또 레위기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수확한 것의 십분의 일은, 그것이 곡식이든 과일이든 가축이든, 주님께 바친다는 규정이 적혀 있다(레위 27,30). 십이란 숫자에는 구원의 성취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포괄적이고도 완전한 요구가 결부돼 있다. 십(10)이라는 숫자는 신약에도 등장한다. 열 달란트나 열 처녀의 비유 등이다(마태 25,1-13). 나병을 앓고 있는 열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 치유됐다(루카 17,12-19). 하느님을 거스르는 힘과의 관계에서도 십의 숫자가 등장한다. 불길한 의미로 열 개의 뿔이 나온다. 그것은 사탄의 세력을 표현한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묵시 12,3).조은일2009.11.03
![[성경 속 상징] 63- 씻는다는 것- 물로 씻는 행위는 정화나 치유 의미](//cpbc.co.kr/CMS/newspaper/2009/10/rc/313392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63- 씻는다는 것- 물로 씻는 행위는 정화나 치유 의미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요즘 신종 플루 예방을 위해 외출 후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다녀온 후에는 반드시 손씻기를 생활화하라고 한다. 물로 잘 씻기만 해도 바이러스 침임을 막아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예로부터 씻는다는 것은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중요한 예식이었다. 손을 물로 씻으면 액운과 함께 죄를 씻어낸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의 신전이나 성소 앞에는 손을 씻는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성경에 보면 빌라도가 군중의 소요를 피하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고 군중 앞에서 손을 씻는 장면이 나온다(마태 27,24). 이처럼 고대로부터 손을 씻는 행위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결해짐을 의미한다. 흔히 우리는 일상적으로 손을 씻는다는 표현을 어떤 일에 더 이상 관여치 않겠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인다. 성경에서 물로 씻는 행위는 깨끗하게 하는 정화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시체를 만지거나 해서 부정을 탄 사람은 잿물에 몸을 씻어야 한다(민수 19,1-22). 또 거룩한 만남의 장막에 들어갈 때는 두 손과 발을 씻는 정화예식을 거쳐야 한다(탈출 3,18-20). 이스라엘에서 장막 앞뜰에는 제사장의 정화 의식을 위해 물을 담아두는 놋으로 만든 세면대가 놓여 있었다. 성막에 들어갈 때 손발을 물로 씻어야 죽기를 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탈출 30,20-21). 그런데 결국 인간 마음을 깨끗이 씻어 정화하시는 분은 하느님 자신이다.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시편 51,4). 또한 물로 씻는 행위는 치유로 작용하기도 한다. 나아만은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음으로써 문둥병에서 깨끗하게 됐다.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2열왕 5,14).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 제자들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비난한다. 예수님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없고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고 지적한다. 율법의 씻는 행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신 셈이다(마르 5,1-23). 세례를 받는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로마 6,3). 이처럼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물로 씻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구원의 상징이 된다(로마 6,3-4). 초대교회에도 성당에 들어오기 전 손을 씻어 정화하는 관습이 있어 큰 성당 앞뜰에는 수반이 놓여져 있었다. 이 관습은 후에 성수를 뿌리는 정신의 정화와 세례의 기억을 상징하는 행위로 변화된다. 가톨릭에서 미사 때 봉헌 후에 사제가 손을 씻는 것은 사제가 죄를 씻고 정화된 손과 마음을 갖고 성찬례를 집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조은일2009.10.20

귀 막기와 귀 기울이기[월간 꿈CUM] 테마로 읽는 구약 성경 – 듣기 (03) 출처: 월간 꿈CUM 사람은 자기 귀를 막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님 잔소리가 듣기 싫을 때 큰 소리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폰을 쓰는 것처럼요. 귀를 막는 행위는 마음에 벽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이나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등을 돌렸으며,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다. 그들은 만군의 주님께서 당신의 영으로 이전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보내신 율법과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마음을 금강석처럼 굳게 만들었다.(즈카 7,11-12) 예언자들은 이 귀먹음을 할례받지 않은 귀로 표현합니다. 그들의 귀는 할례를 받지 않아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예레 6,10) 예언자들이 말하는 귀의 할례는 마음의 할례를 가리킵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계약맺은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육체의 할례만으로는 부족하고 영적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을 드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십니다. 성경은 마치 하느님께 우리처럼 귀가 있는 듯이 묘사합니다. 백성이 주님의 귀에 거슬리는 불평을 하였다. 주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진노하셨다.(민수 11,1) 바로 이 들음이 하느님과 우상을 구별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 사람 손의 작품이라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시편 115,4-6) 우리의 형편을 굽어살피지도,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도 없는 무능한 우상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 사람이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지문(指紋)처럼 성문(聲紋)이 있습니다. 즉, 모든 목소리는 고유하기에, 우리는 목소리를 통해서 그를 알아차리고, 그를 맞이하며, 그의 현존에 전율합니다. 하느님께도 목소리가 있어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느님께도 목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하느님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은 없고 오직 들을 수 있는 목소리만 있다고 말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불 속에서 너희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말씀하시는 소리는 들었지만,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다. 너희는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신명 4,12) 목소리는 생명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우상(시편 115,5)과 달리 하느님의 목소리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목소리는 때로는 너무 고요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체험한 하느님의 목소리처럼 말입니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2) 이 고요한 목소리는 소란스러운 가운데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침묵 중에 머물러야 합니다. “들으라”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신명기와 예언자들을 통해 수없이 반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령은 잘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내 백성은 말을 듣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나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시편 81,12) 고요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들어라”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여전히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4)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유일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단 한 번에 말씀하셨기에 더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는 방식을 보면 진정한 들음의 학교라 부를만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는 장면을 봅시다.(요한 4) 예수님은 표면적 의미에 집착하여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는 이방 여인의 말을 지치지 않고 계속 들어주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말을 들어주시면, 특히 상처받은 이나 죄인의 말을 들어주시면, 그들 앞에 새로운 미래가 펼쳐집니다. 예수님의 들음은 자캐오에게 무슨 일을 일으켰습니까? 또 니코데모에게는요? 예수님은 이들의 깊은 욕망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욕망이 어떤 것이라도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귀 기울여 다 들으신 뒤 그들이 스스로 진리 안에서 선택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절대 어느 쪽으로 유혹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항상 예수께서는 ‘만일 네가 원한다면’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 삶의 중심을 바꾸고 우리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게 합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아마추어미술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cpbc2026.08.12
![[사제의 해-성경의 땅을 가다] (13) 사람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cpbc.co.kr/CMS/newspaper/2010/07/rc/343345_1.3_titleImage_1.jpg)
[사제의 해-성경의 땅을 가다] (13) 사람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전날 저녁부터 파도가 높아 우리가 타고 있는 크리스탈호도 항해가 쉽지 않았다. 파도를 거슬러 가느라 배가 흔들리다 보니 당연히 목적지를 향하는 속도도 느려질 것이다. 갑판에 서니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 바다와 거친 파도소리에 무서움마저 들었다. 곁에 있던 한 형제님이 나에게 다가와 이야기했다. "그 옛날 바오로 사도도 이런 풍랑 속을 뚫고 조그만 나무배로 전도여행을 하셨겠죠? 파도에 배가 파선돼 죽음의 고비를 넘기셨다고 했는데 정말 상상만 해도 가슴이 울컥하네요." 나도 그 옛날 작은 나무배로 이 넓은 바다를 헤치며 죽음의 고비를 넘기셨던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당한 고난을 이야기하던 중 파도에 배가 부서진 일을 편지에 적은 것이 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3-27). 바오로 사도의 여정에 비춰보면 이런 파도쯤이야 무슨 고난이 되겠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고 그것을 피하려고만 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일정대로라면 지금쯤 성 요한 기사단의 도시 로도스에 도착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거친 풍랑으로 시간이 지체됐다. 선장은 안내방송을 통해 사정상 로도스에 정박할 수 없다는 말을 전한다. 아쉽게도 저 멀리 로도스 섬을 두고 지날 수밖에 없었다. 로도스는 지중해 동쪽, 터키 바로 아래에 붙어 있는 그리스의 아름다운 섬이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청동 거상'으로 기원전부터 유명했던 이 섬은 오스만 튀르크 군에 맞서 싸웠던 요한 기사단으로도 유명하다. 오늘날 세계적인 지중해 휴양지로 손꼽히는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순례단은 아쉬움을 접고 대신 배 안에서 시간을 갖기로 했다. 특별강의를 듣고 성경 골든벨을 통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강의를 통해 바오로 사도가 체험한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이 바로 성공적 선교의 근본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 사제단의 맏형인 민병덕(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신부님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울이 바오로 사도로 변화한 과정을 통해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민 신부님은 사목 현장에서 경험한 여러 가지 예화도 소개하셨다. 신부님의 열정적 강의 덕분에 사람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이 됐다. 항해 중 선상에서 성경강의를 하는 것은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강사에게도 특별한 체험이 되는 것 같다. 성지순례라는 특별한 체험이 살아계신 하느님 말씀을 더 잘 알아듣게 하는 것은 아닐까. 조은일2010.07.13
![[성경 속 상징]69- 숫자 넷(4)의 상징-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 전체](//cpbc.co.kr/CMS/newspaper/2009/12/rc/318041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69- 숫자 넷(4)의 상징-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 전체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숫자 넷(4)은 한자의 죽을 사(死)와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동양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는 숫자다. 실제로 우리나라 병원 건물 중에는 3층 다음이 5층인 곳도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4층을 표시하는 버튼은 대부분 F로 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4는 완전함을 의미한다. 인도와 중국에서 숫자 4는 땅의 상징이어서 지리학에서도 중요한 요소였다. 보편성을 상징하는 4는 힌두교 사회에서 카스트 계급의 숫자이기도 했다. 피타고라스 체계에서 4는 최초의 입방체, 즉 밑면과 세 변을 가지는 사면체를 이루는 숫자이다.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종교의 힘을 상징하는 사각형은 전 세계 수많은 신성한 건축물의 기초가 됐다. 이집트에서는 미이라를 만들 때 항아리 네 개에 죽은 자의 내장을 담아뒀다. 고대 서구 전통에서는 물, 불, 흙, 공기 등 네 가지 원소가 있었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동ㆍ서ㆍ남ㆍ북에서 알 수 있듯이, 넷은 시간 전체, 공간 전체를 나타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4는 견고함, 포괄성, 조직성, 힘, 지성, 정의, 전능을 상징하는 수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숫자 4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 전체를 나타낸다.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그곳에서 갈라져 네 줄기를 이루었다"(창세 2,10). 이처럼 성경 안에서 넷(4)이라는 수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전 우주, 전 세계를 표시한다. 또한 하늘의 하느님 옥좌 둘레에는 네 마리 생물 모습이 있어 전 자연, 전 세계의 힘을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에제 1,4-14 ; 묵시 4,6). 네 생물 모습은 복음사가 각자의 상징을 이루고 있다. 그 상징은 각 복음서의 시작과 관계가 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묵시 4,7). 주님 발현에서 나타나듯이 숫자 4는 신적 요소를 상징하고 있다. "저마다 얼굴이 넷이고, 날개도 저마다 넷이었다. 그들의 날개 밑에는 사방으로 사람 손이 보였고, 네 생물이 다 얼굴과 날개가 따로 있었다. 그들의 얼굴 형상은 사람의 얼굴인데, 넷이 저마다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고 왼쪽은 황소의 얼굴이었으며 독수리의 얼굴도 있었다"(에제 1,4-10 참조). 신약성경에서도 4는 깊은 뜻을 지닌다. 복음서가 네 편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기쁜 소식, 곧 구원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가는 것, 그래서 구원의 완성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12부족은 인간, 사자, 황소, 독수리 등 네 가지 상징으로 분류됐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네 명의 복음사가인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상징이 됐다. 마태오 복음의 상징은 인간 얼굴로,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임을 의미한다. 마르코 복음의 상징은 사자이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설교로 시작하기 때문에 광야의 왕이라 할 사자가 상징이 됐다. 루카 복음은 사제 즈카리야가 지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루카 복음은 번제물의 상징인 황소가 상징이다. 요한 복음의 상징은 독수리이다. 마치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듯이 드높은 하늘의 하느님 곁에까지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네 복음서는 전 세계에 선포되는 복음이며, 구원의 상징이 된다. 조은일2009.12.01
![[성경 속 상징] 67- 숫자 삼(3)의 상징- 완성과 완전함, 하느님의 세계](//cpbc.co.kr/CMS/newspaper/2009/11/rc/31647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67- 숫자 삼(3)의 상징- 완성과 완전함, 하느님의 세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모든 종교에서 3이란 숫자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에서 쓰는 삼세인과(三世因果)라는 심오한 관념을 보더라도 3이란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구체적 효과가 무엇이든지 삼중 반복 형식은 모든 문화를 초월해서 민속 문학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고대신화 속에서도 여신들은 대체로 세 명이 한조로 나온다. 그 이유는 인간의 세 가지 속성을 나타내거나 사람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3차원의 세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점술을 위해 주사위를 던졌을 때도 세 번 연속으로 같은 수가 나오는 것을 길조로 여겼다. 따라서 대부분 문화권에서 3이란 숫자는 행운의 숫자이자, 시작과 중간과 끝을 의미하는 수로 사용했다. 3은 일련의 사건들의 형태가 이뤄지는 데 필요한 최소 숫자이다. 어떤 사건이 한 번이나 두 번 발생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 연속으로 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신호가 된다. 성경에서도 3이란 숫자는 완성과 완전함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3이란 숫자는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 예는 삼위일체 하느님이다. 그래서 숫자 3은 '하느님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하느님이 사제의 축복에 관해 모세에게 명령하시는 장면에서도 축복을 세 번에 걸쳐서 하라고 당부하신다(민수 6,22-27).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차례 유혹을 받으신다(마태 4,1-11). 또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도 3일이다. 여기서 3이란 숫자는 최종적 목적과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9-22). 또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발생한다면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완전히 부인했음을 의미한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의 운명에 관해 물어본다. 세 번이나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다.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러한 반복은 그들의 거절이 매우 단호한 것임을 의미한다(루카 23,13-25).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는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이 예사로 돼 있다. 미사 때 참회예식에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고 세 번 반복하는데, 이는 잘못을 완전하게 참회한다는 뜻이다. 또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 노래하는데, 이 역시 하느님이 가장 거룩하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조은일2009.11.17
![[성경 속 상징] 66- 숫자 칠(7)의 상징 - 유다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숫자](//cpbc.co.kr/CMS/newspaper/2009/11/rc/31574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66- 숫자 칠(7)의 상징 - 유다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숫자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사람들은 '행운' 하면 제일 먼저 숫자 7을 생각한다. 동양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육체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지는 데는 일곱 단계의 시간 단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7일 단위로 모두 일곱 번 제사를 지냈다. 7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수였다. 아폴로가 세상에 나온 날은 7일이었다. 로마인들에게 7은 길한 수였고 행운의 수여서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에서 많이 쓰였다. 또한 중국에서 7은 여자의 수로 일컬어지는데, 중국인은 칠삭둥이는 살 수 있어도 팔삭둥이는 살지 못한다고 믿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속죄의식을 치를 때 피를 일곱 번 뿌렸다. 결혼식도 7일, 추모기간이나 큰 축제도 7일간이었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는 7년 동안 구도의 고행을 했으며, 명상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보리수 나무를 일곱 바퀴 돌았다. 극락은 일곱 천계로 돼 있으며, 현세에 성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곱 가지 종교적 품행이 요구됐다. 유다인들에게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하다. 1주일 중에 7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또한 7년째 해에는 밭을 갈지 않고 묵혀 쉬게 한다. 그리고 49년째 되는 해는 대단히 경사스런 해로 희년(禧年)이라고도 표현한다. 구약성경에서도 노아의 방주에 짐승들이 들어간 7일 후 홍수가 땅을 덮었으며, 노아는 땅에 물이 걷히고 나서도 7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창세 8,10). 그러나 7이 반드시 희망과 행운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숫자 7이 인간의 일곱 가지 죄악을 가리키기도 한다.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마르 7,22).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숫자 7은 완전수이다. 예를 들면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에 대한 설명에서 7이란 숫자가 자주 나온다(레위 23,6-8). 또한 7이란 숫자는 순결한 신앙(로마 11,4)이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한다.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히브 4,4). 칠 년째 되는 해는 땅에 안식을 주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나 일곱째 해는 안식년으로, 땅을 위한 안식의 해, 곧 주님의 안식년이다. 너희는 밭에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포도원을 가꾸어서도 안 된다"(레위 25,4). 따라서 칠 년마다 농사짓던 밭을 묵히는 규칙이 있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요한묵시록에는 거의 각 장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의 칠은과 7성사 등 일곱은 매우 중요한 숫자로 돼 있다. 이처럼 일곱은 '완성'을 나타낸다.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는 곧 교회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조은일2009.11.10
![[사제의 해 -성경의 땅을 가다] 14-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 평화가](//cpbc.co.kr/CMS/newspaper/2010/07/rc/344100_1.1_titleImage_1.jpg)
[사제의 해 -성경의 땅을 가다] 14-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 평화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오늘은 크루즈 항해 일정을 마치고 하선하는 날이다. 맑은 아침 햇살이 푸른 에게해에 닿아 반짝반짝 빛이 난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장관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침식사 후 선상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공식적으로는 순례객 모두가 함께 모여 드리는 마지막 파견미사라 할 수 있다. 하루 일찍 인천공항을 떠나온 믿음ㆍ희망조는 내일 아침 일찍 아테네공항에서 귀국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각자 지향과 설렘을 안고 집을 떠나왔던 우리들이다. 성지순례를 통해 곳곳에서 체험한 하느님 은총 때문일까,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 평화가 깃들어 있다. 순례에 함께한 신부님들이 미사 중에 짤막한 말씀 나눔을 했다. 믿음조의 민병덕 신부님은 평화의 인사인 '샬롬'에 대해 재미있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신부님 덕분에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하는 인사 '찬미 예수님!' 안에 얼마나 깊고 많은 뜻이 들어있는지 다시 새기게 됐다. 희망조의 허영민 신부님은 "굳게 잠긴 육중한 문을 여는 데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열쇠 하나"라며 "사랑, 희망, 믿음의 열쇠로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의 문을 열자"고 했다. 순례 기간 내내 레크리에이션을 맡아 분위기를 이끌어준 조정래 신부님은 '오늘'이라는 작자 미상의 시를 순례 인사말로 대신했다. "우리네 슬픔의 대부분은 '어제'의 잔재이거나 '내일'에서 빌려온 것일 뿐…. '오늘'은 너의 것이니 하느님께서 '오늘'을 네게 주셨다. 모든 '어제'는 거두어 가셨고 모든 '내일'은 아직 그분의 손 안에 있도다 …. 하루가 끝날 때 '나 오늘을 살았고, 오늘을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라." 그렇다. 우리에게 중요한 시간은 바로 과거도 미래도 아닌 하느님과 함께하는 '오늘' 그리고 '지금'일 것이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순례 총괄을 맡았던 평화신문 이윤자 이사님은 "이번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은 모두 하느님 은총, 그리고 여러분의 이해와 협조 덕분"이라며 순례객, 담당 신부단,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각 조 봉사자들인 평화신문 김원철ㆍ황병훈ㆍ리길재 기자와 유지영 자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 마영주 팀장도 마지막 인사를 했다. 순례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모든 순례 일정을 이끌어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지난주에 크리스탈호에 올랐던 피레우스항에 다시 돌아왔다. 항구의 모든 것들은 며칠 전 배를 탈 때 그대로였다. 변한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각자 마음일 것이다. 그 변화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두고두고 발견될 것이다. 배에서 내린 우리는 아티카반도 끝자락에 있는 그리스의 절경 수니온 곶으로 향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포세이돈 신전이 있다. 지중해를 무대로 활약한 그리스인들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 태풍을 부르거나 가라앉히고 해안을 뒤흔들기도 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포세이돈 신전은 지금은 폐허처럼 남아 있다. 포세이돈 신전이 있는 절벽 사이로 지는 붉은 석양, 그리고 잔잔한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순간순간 하느님 은총이 가득했던 우리 순례 일정도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조은일2010.07.20
![[성경 속 상징] 68- 숫자 일(1)의 상징- 그리스도는 한분, 성령 믿음도 하나](//cpbc.co.kr/CMS/newspaper/2009/11/rc/317280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68- 숫자 일(1)의 상징- 그리스도는 한분, 성령 믿음도 하나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일반적으로 전체성을 의미하는 숫자 일(1)은 태양이나 빛, 생명과 자연의 기원을 나타낸다. 일(1)은 창조와 시작을 뜻하는 유일한 수로 권위와 리더십을 상징하기도 한다. 서구 전통에서 1은 그 자체로서 남성적이고 공격적이며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 피타고라스학파에게 1은 점, 모든 계산의 공통적 기초였다. 따라서 숫자 일(1)은 시초와 자아, 고독의 상징이다. 이집트에서 1은 위대한 태양신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일신교에서 신을 나타내는 숫자인 1은 원초적 통일성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인들은 일(1)이란 수를 불행의 수로 여겼다. 성경에서 '하나'라는 수는 특히 한 분이신 하느님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사실 구약시대 근동지방에 있던 종교들은 신들의 활동 영역에 제한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당시 그들은 유일신에 관해서는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 유일신 신앙은 유다인의 가장 큰 특징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 우선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으로 다른 신들 위에 존재하기에 다른 신들에게는 예배를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6).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는 전체와 첫째이자 으뜸을 가리키며 모든 것의 근원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 성경에서 숫자 일은 절대 불가분의 기본적 수로서 시작을 상징한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5). 또 하느님의 유일성(마태 19,17)이나 신앙의 유일성(에페 4,5-6)과 같은 것을 나타내는 데도 숫자 일을 잘 사용했다. 하나라는 숫자는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장에 대해 유다인들은 신성모독이라 하여 돌로 쳐서 죽이려 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요한 10,30-31). 사도 바오로도 모든 인류의 단일성과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치를 주장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에페 4,4-5). 예수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 뜻을 완전하게 계시하셨다. 그리스도 희생으로 우리 신자들은 그분과 한 몸이 되는 영광을 지닌다(1코린 10,16-17).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과 돌봄, 자비, 일치된 마음, 겸손 등을 가능하게 한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인간의 독특함을 보여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가르침은 잃어버린 양과 동전의 비유에서 잘 표현했다(루카 15,1-l0). 특히 예수님은 병자들,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임을 더욱 분명하게 강조했다.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조은일2009.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