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성경의 대중화 말씀의 생활화 30년, 생활성서사 창립 30돌](//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6849_1.1_titleImage_1.jpg)
[출판]성경의 대중화 말씀의 생활화 30년, 생활성서사 창립 30돌 17일 청담동성당에서 기념행사 월간 '생활성서'를 발간하는 생활성서사(대표 박연례 수녀)가 설립 30주년을 맞아 17일 오후 1시 서울 청담동성당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섭리, 축복 그리고 말씀에 날개를 달다!'를 주제로 한 이날 행사는 생활성서 6월호 표지인물이자 '한비야의 종이비행기'를 연재하고 있는 한비야(비아)씨 특강과 수도자와 함께하는 찬양으로 꾸며진다. 파견미사는 생활성서에 '양승국 신부의 기도레슨'을 쓰고 있는 양승국(살레시오회) 신부가 집전한다.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가 한국 천주교 선교 200주년을 기념하며 설립한 생활성서사는 1983년 9월 1일 월간 '생활성서'를 발행하면서 출발했다. 언론이 통제당하고 각종 간행물이 폐간을 강요받던 전두환 정권 시절이라 생활성서의 창간은 더욱 의미가 깊다. 생활성서 창간 배경에는 광주대교구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광주대교구 사목국장이던 이영수 신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 수감됐을 때 감옥에서 성경을 통독했다. 이후 신자들 눈높이에 맞게 성경을 해설해주는 잡지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광주대교구장이던 윤공희 대주교 역시 이 같은 뜻에 공감하며 성경잡지 발행을 수녀회에 요청했다. 성경의 대중화와 말씀의 생활화에 헌신해 온 생활성서사는 지금까지 월간지 통권 358호를 발행했다. 국내는 물론 해외 40여 개국에도 월간지를 보내고 있다. '쓸모있는 잡지, 기다려지는 잡지'를 지향하며 신자들이 성경과 친숙해지고, 하느님 말씀을 일상생활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잡지 발행 초창기부터 이웃 종교를 소개하는 기획물을 연재하고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의 글도 꾸준히 게재하며 이웃 종교와 늘 함께했는데, 이현주 목사가 대표적이다. 생활성서사는 월간지와 함께 500여 종이 넘는 단행본을 출간하며 신자들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성경, 영성, 전례, 교리 관련 서적 발행에도 노력해왔다. 성경공부교재 「여정 첫걸음」(전 4권), 「여정」(전 11권), 어르신 성경공부교재 「은빛여정」(전 12권) 등은 성경사도직에 힘써 온 수녀회의 풍부한 경험이 빚어낸 작품이다. 어린이 교리교재 「신난다 첫영성체교리」, 「신난다 가정교리」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박준양 신부의 '신학여행시리즈'(전 6권)로 신학 대중화에 문을 열었고, 이태석 신부가 쓴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는 이 신부 선종 후 생활성서사의 대표작이 됐다. 출판사 대표 박연례(솔라) 수녀는 "생활성서사가 30년 간 독자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라면서 "하느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교회 선교사명에 적극 참여해 성경 생활화와 세상 복음화에 더 힘쓰겠다"고 말했다. 문의 : 02-945-3300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조은일2013.06.04
![[성경 속 궁금증] 69.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어떠한 의미인가?](//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8428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69.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어떠한 의미인가?가나안 땅 허락은 신앙의 결과로 주어진 선물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단순히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체이자 하느님 역사의 현장이다. 사진은 사해 근처 이스라엘 땅.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마디로 '땅의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의 땅은 하느님의 땅, 이스라엘인들이 치열하게 살고 전쟁하고 죽어간 땅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가 없던 시대에 가나안과 이집트 사이를 떠돌던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가나안 땅은 단순한 지리적ㆍ정치적 차원을 넘어서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내가 장차 보여줄 땅"(창세 12,1)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이 세켐에 이르러 그 땅에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알았을 때(창세 12,6) 거의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주신다고 약속한다. 따라서 구원사적 입장에서 보면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해 준 것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즉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한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은총이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결과로 주어진 특권이다(창세 22,17-18).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땅에서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땅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해야 한다. 땅은 백성의 종교적 행동을 반영하는 일종의 증거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에서부터 이미 조건은 주어져 있다(창세 15장). 따라서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을 상실한 것은 그들의 죄가 땅에서 그들을 추방하게 한 것이다(창세 15,16).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 땅은 이스라엘 민족을 버릴 것이다(레위 18,28). 따라서 땅으로부터 백성들이 추방됐다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느님 신앙은 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내가 장차 보여줄 땅"(창세 12,1)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본래 자신들의 것이 아닌 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땅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 땅에 대한 처리 권한은 전적으로 하느님에게만 있다. 마치 중세시대 영주가 충성한 종에게 하사하는 일종의 봉토로 해석한다.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땅은 후손들에게 계속 유전되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수 없다(민수 36,7). 하느님에게 속한 땅을 얻는 것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계약을 기억하고 계명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땅을 잃거나 얻지 못하는 것과 땅이 생산을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계약을 위반했기 때문이다(신명 4,26). 이러한 관점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이뤄진 유다 백성의 바빌론 유배는 백성이 하느님의 길을 걷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며, 그 심판은 하느님이 주신 땅으로부터 쫓겨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단순히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체이자 하느님 역사의 현장이다.황병훈2013.04.16
 사도 요한과 관계 깊은 에페소](//cpbc.co.kr/CMS/newspaper/2010/05/rc/337598_1.2_titleImage_1.jpg)
[사제의 해-성경의 땅을 가다](6) 사도 요한과 관계 깊은 에페소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성모님의 집에서 봉헌한 야외미사 강론에서 허영민 신부는 "기적은 우리 삶 곳곳에 있으며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기적이란 믿음의 결과가 아닌가.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라고 하셨다(마태 17,20). 우리는 믿음을 청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융 신부 일행이 성모님이 사셨던 집터를 발견한 1891년 당시 이곳에는 6~7세기 비잔틴시대 집 주춧돌만 있었다고 한다. 지금 건물은 1950년 이탈리아 카푸친 수도회에서 건축한 것이다. 미사 후 야외제대 옆 성모님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우리 죄인을 위해 하느님께 대신 빌어주시는 성모님, 아, 어머니! 다시 버스를 타고 에페소 유적지로 이동했다. 고대 에페소는 주민 20여만 명의 그리스 최대 도시였다. 로마 통치를 거쳐 비잔틴 제국, 다시 오스만 터키 지배를 받으면서 옛 영광의 자취는 온 데 간 데 없고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다. 에페소의 원형 음악당은 터키에서 가장 큰 규모로 2만5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무대에서 우리는 가만히 눈을 감고 성가를 불렀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느님을 향한 찬양 소리가 극장 전체를 감싸고 다시 우리 귓속을 울렸다. 요한묵시록에는 에페소 신자들을 향한 칭찬과 꾸중이 기록돼 있다. 요한은 악인들을 용납하지 않는 정의감과 뛰어난 인내심, 노고를 칭찬하신다. 그러나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에페소 신자들을 나무라셨다(묵시 2,1-7). 에페소는 사도 요한과도 관계가 깊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요한에게 성모님을 모시도록 하셨다(요한 19,26-27). 이후 요한은 오래도록 에페소에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사랑의 사도' 요한이 생을 마치기까지 완전한 사랑을 역설한 곳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또한 에페소는 사도 바오로와도 관계가 깊은 곳이다. 2차 전도여행 때 잠시, 3차 전도여행 중에는 27개월 가까이 머물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바오로 사도 당시만 해도 에페소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상업 중심의 항구도시였다. 에페소가 사치와 허영에 빠져 있을 때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타는 열정으로 말씀을 전했다. 바오로 사도가 진정 그렇게 열심히 선교했고 초세기 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소아시아(오늘의 터키 지역) 교회들은 오랜 세기 동안 이슬람 지배 속에 있게 됐다. 지금은 이슬람 사원들만 곳곳에 보일 뿐 찬란했던 교회의 자취는 사라지고 돌무더기로 흔적만 남아 있다. 왠지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조은일2010.05.25
![[성경 속 상징] 65- 숫자 십(10)의 상징-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수](//cpbc.co.kr/CMS/newspaper/2009/11/rc/314956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65- 숫자 십(10)의 상징-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수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우리나라에서 전화번호 2424는 이삿짐 센터에서 인기가 있다. 숫자가 갖는 의미 때문이다. 숫자를 세고 계산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 관한 기록 만큼이나 오래됐다. 숫자는 개수를 나타내는 문자이다. 숫자 역사를 보면 수의 각 단위를 기호로 나타낸 초기 이집트 숫자에서 기호로 수를 나타낸 그리스 숫자로 발전됐다. 숫자는 처음에는 벽이나 지면, 판자 등에 필요한 수만큼 줄을 긋는 것으로 표현됐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수(數)에 따라 분류되고 질서가 잡힌다.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존재 자체의 원리는 수에 있다고 보았다. 어떤 문화에서든지 수에는 제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인류 최초 계산기라고 할 수 있는 손가락의 개수는 열 개다. 십(10)은 만족, 충만의 숫자다. 최고나 정상, 그리고 충족을 의미한다. 십이란 숫자는 소위 전체적 수다. 십이란 숫자는 일괄해서 정리한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 가르침에는 세속의 신자에게 주는 오계와 승려에게 주는 오계 등을 합한 십계가 존재한다. 원시인은 자기 손가락으로 물건의 수를 헤아렸다. 옛날부터 숫자 십은 십진법의 기본이었다. 또한 절대성, 이해력 등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를 수학적 수치보다는 상징적 의미에 중점을 뒀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은 십계명일 것이다. 십계명,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숫자 십은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수로 우선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한 후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열 번째 재앙인 이집트 맏아들과 맏배의 죽음을 경험했다(탈출 12,37-42). 그 후에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다(탈출 20,1-17).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인 살렘왕 멜키체덱에게 드렸다.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창세 14,20). 또 레위기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수확한 것의 십분의 일은, 그것이 곡식이든 과일이든 가축이든, 주님께 바친다는 규정이 적혀 있다(레위 27,30). 십이란 숫자에는 구원의 성취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포괄적이고도 완전한 요구가 결부돼 있다. 십(10)이라는 숫자는 신약에도 등장한다. 열 달란트나 열 처녀의 비유 등이다(마태 25,1-13). 나병을 앓고 있는 열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 치유됐다(루카 17,12-19). 하느님을 거스르는 힘과의 관계에서도 십의 숫자가 등장한다. 불길한 의미로 열 개의 뿔이 나온다. 그것은 사탄의 세력을 표현한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묵시 12,3).조은일2009.11.03
![[성경 속 상징] 63- 씻는다는 것- 물로 씻는 행위는 정화나 치유 의미](//cpbc.co.kr/CMS/newspaper/2009/10/rc/313392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63- 씻는다는 것- 물로 씻는 행위는 정화나 치유 의미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요즘 신종 플루 예방을 위해 외출 후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다녀온 후에는 반드시 손씻기를 생활화하라고 한다. 물로 잘 씻기만 해도 바이러스 침임을 막아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예로부터 씻는다는 것은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중요한 예식이었다. 손을 물로 씻으면 액운과 함께 죄를 씻어낸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의 신전이나 성소 앞에는 손을 씻는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성경에 보면 빌라도가 군중의 소요를 피하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고 군중 앞에서 손을 씻는 장면이 나온다(마태 27,24). 이처럼 고대로부터 손을 씻는 행위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결해짐을 의미한다. 흔히 우리는 일상적으로 손을 씻는다는 표현을 어떤 일에 더 이상 관여치 않겠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인다. 성경에서 물로 씻는 행위는 깨끗하게 하는 정화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시체를 만지거나 해서 부정을 탄 사람은 잿물에 몸을 씻어야 한다(민수 19,1-22). 또 거룩한 만남의 장막에 들어갈 때는 두 손과 발을 씻는 정화예식을 거쳐야 한다(탈출 3,18-20). 이스라엘에서 장막 앞뜰에는 제사장의 정화 의식을 위해 물을 담아두는 놋으로 만든 세면대가 놓여 있었다. 성막에 들어갈 때 손발을 물로 씻어야 죽기를 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탈출 30,20-21). 그런데 결국 인간 마음을 깨끗이 씻어 정화하시는 분은 하느님 자신이다.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시편 51,4). 또한 물로 씻는 행위는 치유로 작용하기도 한다. 나아만은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음으로써 문둥병에서 깨끗하게 됐다.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2열왕 5,14).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 제자들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비난한다. 예수님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없고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고 지적한다. 율법의 씻는 행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신 셈이다(마르 5,1-23). 세례를 받는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로마 6,3). 이처럼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물로 씻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구원의 상징이 된다(로마 6,3-4). 초대교회에도 성당에 들어오기 전 손을 씻어 정화하는 관습이 있어 큰 성당 앞뜰에는 수반이 놓여져 있었다. 이 관습은 후에 성수를 뿌리는 정신의 정화와 세례의 기억을 상징하는 행위로 변화된다. 가톨릭에서 미사 때 봉헌 후에 사제가 손을 씻는 것은 사제가 죄를 씻고 정화된 손과 마음을 갖고 성찬례를 집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조은일2009.10.20

성경 속 꽃들의 속삭임수선화는 ‘영원한 생명’ 금잔화는 ‘성모님의 후광’… 50년간 정원 가꿔온 원예가의 영적 여정 기도의 정원 / 마거릿 로즈 릴리 / 신지현 옮김 / 성서와함께 “예수 탄생 예고 장면에 등장하는 수선화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룬 위업과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한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날 아침에 수선화가 일제히 꽃을 피웠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다시 태어남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암시한다.”(122쪽) 수선화·아네모네·베고니아·칼라·백합·작약·옥잠화⋯. 겉모습은 헷갈리지만 이름은 익숙한 이들 꽃은 일상에서는 물론이고 제단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성경 곳곳에도 피어 있다. 「기도의 정원」은 원예가인 마거릿 로즈 릴리가 정원을 가꾸며 체험한 영적 여정을 담은 책이다. 성 베네딕도회 봉헌 회원으로 원예업계에서 50년 가까이 활동한 저자는 피정 등에서 받은 수많은 질문에 답하며 이 책을 썼다. 꽃, 허브와 과수, 풀과 화초, 나무 등 네 가지 범주로 나눠 그리스도교 예술과 건축에서 비유를 통해 자주 등장하는 식물, 각종 전설과 설화에 언급된 식물을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각 식물이 지닌 상징과 의미를 설명하고, 전례에 사용되는 식물 가운데 이교도적 의미가 있는 경우 해당 식물의 그리스도교적 상징을 재정립해 오해를 바로잡았다. “먼저 ‘부활 백합(Resurrection lily)’이라는 이름에 대한 혼란부터 바로잡도록 하자. 영어권에서는 이 이름을 가진 식물이 여럿 있으며, 각각 다른 이름도 몇 개씩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실은 백합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 그리스도를 통한 새 생명과 주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데 쓰일 수 있다. ‘부활 백합’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꽃은 우리말로 상사화다.”(143쪽) “금잔화속 식물에 ‘마리아의 황금꽃(Mary’s gold)’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12세기 독일의 수녀인 빙엔의 성녀 힐데가르트다. (중략)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귀한 꽃을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의 봉헌물로 삼았으며, 6세기 이후에는 금잔화의 황금빛 꽃잎으로 성모님의 머리 뒤에 비치는 후광을 표현했다.”(223쪽) 저자는 “성경은 에덴동산에서 겟세마니, 그리고 세상의 종말까지 수천 년에 걸쳐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며 “기도의 정원을 매만지고 꾸미는 일은 하느님의 피조물을 매개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우리의 믿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이라고 전했다. 책에는 정원을 가꾸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정보도 적혀 있다. 메리 스프레이그가 그린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세밀화가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가톨릭 전례 꽃꽂이를 배우며 본당에서 꽃 봉사를 담당하는 번역가 신지현씨가 맞갖게 우리글로 옮겼다. 마거릿 로즈 릴리는 성 프란치스코 피정센터 명예 정원관리장을 지냈으며, 미국 미시간주 랜싱교구의 주교 관저와 은퇴 사제관의 조경 사업에도 참여했다. 「정원사를 위한 가톨릭 식물연감」을 펴냈고, 각종 온라인 매체에 정원 가꾸는 법과 영성에 대한 글을 게재하고 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6.02.04
![[사제의 해-성경의 땅을 가다] (13) 사람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cpbc.co.kr/CMS/newspaper/2010/07/rc/343345_1.3_titleImage_1.jpg)
[사제의 해-성경의 땅을 가다] (13) 사람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전날 저녁부터 파도가 높아 우리가 타고 있는 크리스탈호도 항해가 쉽지 않았다. 파도를 거슬러 가느라 배가 흔들리다 보니 당연히 목적지를 향하는 속도도 느려질 것이다. 갑판에 서니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 바다와 거친 파도소리에 무서움마저 들었다. 곁에 있던 한 형제님이 나에게 다가와 이야기했다. "그 옛날 바오로 사도도 이런 풍랑 속을 뚫고 조그만 나무배로 전도여행을 하셨겠죠? 파도에 배가 파선돼 죽음의 고비를 넘기셨다고 했는데 정말 상상만 해도 가슴이 울컥하네요." 나도 그 옛날 작은 나무배로 이 넓은 바다를 헤치며 죽음의 고비를 넘기셨던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당한 고난을 이야기하던 중 파도에 배가 부서진 일을 편지에 적은 것이 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3-27). 바오로 사도의 여정에 비춰보면 이런 파도쯤이야 무슨 고난이 되겠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고 그것을 피하려고만 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일정대로라면 지금쯤 성 요한 기사단의 도시 로도스에 도착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거친 풍랑으로 시간이 지체됐다. 선장은 안내방송을 통해 사정상 로도스에 정박할 수 없다는 말을 전한다. 아쉽게도 저 멀리 로도스 섬을 두고 지날 수밖에 없었다. 로도스는 지중해 동쪽, 터키 바로 아래에 붙어 있는 그리스의 아름다운 섬이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청동 거상'으로 기원전부터 유명했던 이 섬은 오스만 튀르크 군에 맞서 싸웠던 요한 기사단으로도 유명하다. 오늘날 세계적인 지중해 휴양지로 손꼽히는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순례단은 아쉬움을 접고 대신 배 안에서 시간을 갖기로 했다. 특별강의를 듣고 성경 골든벨을 통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강의를 통해 바오로 사도가 체험한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이 바로 성공적 선교의 근본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 사제단의 맏형인 민병덕(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신부님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울이 바오로 사도로 변화한 과정을 통해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민 신부님은 사목 현장에서 경험한 여러 가지 예화도 소개하셨다. 신부님의 열정적 강의 덕분에 사람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이 됐다. 항해 중 선상에서 성경강의를 하는 것은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강사에게도 특별한 체험이 되는 것 같다. 성지순례라는 특별한 체험이 살아계신 하느님 말씀을 더 잘 알아듣게 하는 것은 아닐까. 조은일2010.07.13
![[성경 속 상징]69- 숫자 넷(4)의 상징-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 전체](//cpbc.co.kr/CMS/newspaper/2009/12/rc/318041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69- 숫자 넷(4)의 상징-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 전체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숫자 넷(4)은 한자의 죽을 사(死)와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동양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는 숫자다. 실제로 우리나라 병원 건물 중에는 3층 다음이 5층인 곳도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4층을 표시하는 버튼은 대부분 F로 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4는 완전함을 의미한다. 인도와 중국에서 숫자 4는 땅의 상징이어서 지리학에서도 중요한 요소였다. 보편성을 상징하는 4는 힌두교 사회에서 카스트 계급의 숫자이기도 했다. 피타고라스 체계에서 4는 최초의 입방체, 즉 밑면과 세 변을 가지는 사면체를 이루는 숫자이다.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종교의 힘을 상징하는 사각형은 전 세계 수많은 신성한 건축물의 기초가 됐다. 이집트에서는 미이라를 만들 때 항아리 네 개에 죽은 자의 내장을 담아뒀다. 고대 서구 전통에서는 물, 불, 흙, 공기 등 네 가지 원소가 있었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동ㆍ서ㆍ남ㆍ북에서 알 수 있듯이, 넷은 시간 전체, 공간 전체를 나타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4는 견고함, 포괄성, 조직성, 힘, 지성, 정의, 전능을 상징하는 수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숫자 4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 전체를 나타낸다.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그곳에서 갈라져 네 줄기를 이루었다"(창세 2,10). 이처럼 성경 안에서 넷(4)이라는 수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전 우주, 전 세계를 표시한다. 또한 하늘의 하느님 옥좌 둘레에는 네 마리 생물 모습이 있어 전 자연, 전 세계의 힘을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에제 1,4-14 ; 묵시 4,6). 네 생물 모습은 복음사가 각자의 상징을 이루고 있다. 그 상징은 각 복음서의 시작과 관계가 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묵시 4,7). 주님 발현에서 나타나듯이 숫자 4는 신적 요소를 상징하고 있다. "저마다 얼굴이 넷이고, 날개도 저마다 넷이었다. 그들의 날개 밑에는 사방으로 사람 손이 보였고, 네 생물이 다 얼굴과 날개가 따로 있었다. 그들의 얼굴 형상은 사람의 얼굴인데, 넷이 저마다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고 왼쪽은 황소의 얼굴이었으며 독수리의 얼굴도 있었다"(에제 1,4-10 참조). 신약성경에서도 4는 깊은 뜻을 지닌다. 복음서가 네 편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기쁜 소식, 곧 구원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가는 것, 그래서 구원의 완성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12부족은 인간, 사자, 황소, 독수리 등 네 가지 상징으로 분류됐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네 명의 복음사가인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상징이 됐다. 마태오 복음의 상징은 인간 얼굴로,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임을 의미한다. 마르코 복음의 상징은 사자이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설교로 시작하기 때문에 광야의 왕이라 할 사자가 상징이 됐다. 루카 복음은 사제 즈카리야가 지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루카 복음은 번제물의 상징인 황소가 상징이다. 요한 복음의 상징은 독수리이다. 마치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듯이 드높은 하늘의 하느님 곁에까지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네 복음서는 전 세계에 선포되는 복음이며, 구원의 상징이 된다. 조은일2009.12.01
![[성경 속 상징] 67- 숫자 삼(3)의 상징- 완성과 완전함, 하느님의 세계](//cpbc.co.kr/CMS/newspaper/2009/11/rc/31647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67- 숫자 삼(3)의 상징- 완성과 완전함, 하느님의 세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모든 종교에서 3이란 숫자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에서 쓰는 삼세인과(三世因果)라는 심오한 관념을 보더라도 3이란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구체적 효과가 무엇이든지 삼중 반복 형식은 모든 문화를 초월해서 민속 문학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고대신화 속에서도 여신들은 대체로 세 명이 한조로 나온다. 그 이유는 인간의 세 가지 속성을 나타내거나 사람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3차원의 세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점술을 위해 주사위를 던졌을 때도 세 번 연속으로 같은 수가 나오는 것을 길조로 여겼다. 따라서 대부분 문화권에서 3이란 숫자는 행운의 숫자이자, 시작과 중간과 끝을 의미하는 수로 사용했다. 3은 일련의 사건들의 형태가 이뤄지는 데 필요한 최소 숫자이다. 어떤 사건이 한 번이나 두 번 발생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 연속으로 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신호가 된다. 성경에서도 3이란 숫자는 완성과 완전함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3이란 숫자는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 예는 삼위일체 하느님이다. 그래서 숫자 3은 '하느님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하느님이 사제의 축복에 관해 모세에게 명령하시는 장면에서도 축복을 세 번에 걸쳐서 하라고 당부하신다(민수 6,22-27).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차례 유혹을 받으신다(마태 4,1-11). 또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도 3일이다. 여기서 3이란 숫자는 최종적 목적과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9-22). 또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발생한다면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완전히 부인했음을 의미한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의 운명에 관해 물어본다. 세 번이나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다.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러한 반복은 그들의 거절이 매우 단호한 것임을 의미한다(루카 23,13-25).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는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이 예사로 돼 있다. 미사 때 참회예식에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고 세 번 반복하는데, 이는 잘못을 완전하게 참회한다는 뜻이다. 또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 노래하는데, 이 역시 하느님이 가장 거룩하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조은일2009.11.17
![[성경 속 상징] 66- 숫자 칠(7)의 상징 - 유다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숫자](//cpbc.co.kr/CMS/newspaper/2009/11/rc/31574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66- 숫자 칠(7)의 상징 - 유다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숫자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사람들은 '행운' 하면 제일 먼저 숫자 7을 생각한다. 동양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육체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지는 데는 일곱 단계의 시간 단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7일 단위로 모두 일곱 번 제사를 지냈다. 7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수였다. 아폴로가 세상에 나온 날은 7일이었다. 로마인들에게 7은 길한 수였고 행운의 수여서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에서 많이 쓰였다. 또한 중국에서 7은 여자의 수로 일컬어지는데, 중국인은 칠삭둥이는 살 수 있어도 팔삭둥이는 살지 못한다고 믿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속죄의식을 치를 때 피를 일곱 번 뿌렸다. 결혼식도 7일, 추모기간이나 큰 축제도 7일간이었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는 7년 동안 구도의 고행을 했으며, 명상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보리수 나무를 일곱 바퀴 돌았다. 극락은 일곱 천계로 돼 있으며, 현세에 성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곱 가지 종교적 품행이 요구됐다. 유다인들에게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하다. 1주일 중에 7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또한 7년째 해에는 밭을 갈지 않고 묵혀 쉬게 한다. 그리고 49년째 되는 해는 대단히 경사스런 해로 희년(禧年)이라고도 표현한다. 구약성경에서도 노아의 방주에 짐승들이 들어간 7일 후 홍수가 땅을 덮었으며, 노아는 땅에 물이 걷히고 나서도 7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창세 8,10). 그러나 7이 반드시 희망과 행운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숫자 7이 인간의 일곱 가지 죄악을 가리키기도 한다.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마르 7,22).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숫자 7은 완전수이다. 예를 들면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에 대한 설명에서 7이란 숫자가 자주 나온다(레위 23,6-8). 또한 7이란 숫자는 순결한 신앙(로마 11,4)이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한다.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히브 4,4). 칠 년째 되는 해는 땅에 안식을 주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나 일곱째 해는 안식년으로, 땅을 위한 안식의 해, 곧 주님의 안식년이다. 너희는 밭에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포도원을 가꾸어서도 안 된다"(레위 25,4). 따라서 칠 년마다 농사짓던 밭을 묵히는 규칙이 있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요한묵시록에는 거의 각 장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의 칠은과 7성사 등 일곱은 매우 중요한 숫자로 돼 있다. 이처럼 일곱은 '완성'을 나타낸다.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는 곧 교회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조은일2009.11.10
![[사제의 해 -성경의 땅을 가다] 14-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 평화가](//cpbc.co.kr/CMS/newspaper/2010/07/rc/344100_1.1_titleImage_1.jpg)
[사제의 해 -성경의 땅을 가다] 14-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 평화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오늘은 크루즈 항해 일정을 마치고 하선하는 날이다. 맑은 아침 햇살이 푸른 에게해에 닿아 반짝반짝 빛이 난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장관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침식사 후 선상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공식적으로는 순례객 모두가 함께 모여 드리는 마지막 파견미사라 할 수 있다. 하루 일찍 인천공항을 떠나온 믿음ㆍ희망조는 내일 아침 일찍 아테네공항에서 귀국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각자 지향과 설렘을 안고 집을 떠나왔던 우리들이다. 성지순례를 통해 곳곳에서 체험한 하느님 은총 때문일까,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 평화가 깃들어 있다. 순례에 함께한 신부님들이 미사 중에 짤막한 말씀 나눔을 했다. 믿음조의 민병덕 신부님은 평화의 인사인 '샬롬'에 대해 재미있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신부님 덕분에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하는 인사 '찬미 예수님!' 안에 얼마나 깊고 많은 뜻이 들어있는지 다시 새기게 됐다. 희망조의 허영민 신부님은 "굳게 잠긴 육중한 문을 여는 데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열쇠 하나"라며 "사랑, 희망, 믿음의 열쇠로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의 문을 열자"고 했다. 순례 기간 내내 레크리에이션을 맡아 분위기를 이끌어준 조정래 신부님은 '오늘'이라는 작자 미상의 시를 순례 인사말로 대신했다. "우리네 슬픔의 대부분은 '어제'의 잔재이거나 '내일'에서 빌려온 것일 뿐…. '오늘'은 너의 것이니 하느님께서 '오늘'을 네게 주셨다. 모든 '어제'는 거두어 가셨고 모든 '내일'은 아직 그분의 손 안에 있도다 …. 하루가 끝날 때 '나 오늘을 살았고, 오늘을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라." 그렇다. 우리에게 중요한 시간은 바로 과거도 미래도 아닌 하느님과 함께하는 '오늘' 그리고 '지금'일 것이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순례 총괄을 맡았던 평화신문 이윤자 이사님은 "이번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은 모두 하느님 은총, 그리고 여러분의 이해와 협조 덕분"이라며 순례객, 담당 신부단,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각 조 봉사자들인 평화신문 김원철ㆍ황병훈ㆍ리길재 기자와 유지영 자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 마영주 팀장도 마지막 인사를 했다. 순례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모든 순례 일정을 이끌어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지난주에 크리스탈호에 올랐던 피레우스항에 다시 돌아왔다. 항구의 모든 것들은 며칠 전 배를 탈 때 그대로였다. 변한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각자 마음일 것이다. 그 변화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두고두고 발견될 것이다. 배에서 내린 우리는 아티카반도 끝자락에 있는 그리스의 절경 수니온 곶으로 향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포세이돈 신전이 있다. 지중해를 무대로 활약한 그리스인들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 태풍을 부르거나 가라앉히고 해안을 뒤흔들기도 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포세이돈 신전은 지금은 폐허처럼 남아 있다. 포세이돈 신전이 있는 절벽 사이로 지는 붉은 석양, 그리고 잔잔한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순간순간 하느님 은총이 가득했던 우리 순례 일정도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조은일2010.07.20
![[성경 속 상징] 68- 숫자 일(1)의 상징- 그리스도는 한분, 성령 믿음도 하나](//cpbc.co.kr/CMS/newspaper/2009/11/rc/317280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68- 숫자 일(1)의 상징- 그리스도는 한분, 성령 믿음도 하나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일반적으로 전체성을 의미하는 숫자 일(1)은 태양이나 빛, 생명과 자연의 기원을 나타낸다. 일(1)은 창조와 시작을 뜻하는 유일한 수로 권위와 리더십을 상징하기도 한다. 서구 전통에서 1은 그 자체로서 남성적이고 공격적이며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 피타고라스학파에게 1은 점, 모든 계산의 공통적 기초였다. 따라서 숫자 일(1)은 시초와 자아, 고독의 상징이다. 이집트에서 1은 위대한 태양신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일신교에서 신을 나타내는 숫자인 1은 원초적 통일성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인들은 일(1)이란 수를 불행의 수로 여겼다. 성경에서 '하나'라는 수는 특히 한 분이신 하느님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사실 구약시대 근동지방에 있던 종교들은 신들의 활동 영역에 제한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당시 그들은 유일신에 관해서는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 유일신 신앙은 유다인의 가장 큰 특징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 우선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으로 다른 신들 위에 존재하기에 다른 신들에게는 예배를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6).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는 전체와 첫째이자 으뜸을 가리키며 모든 것의 근원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 성경에서 숫자 일은 절대 불가분의 기본적 수로서 시작을 상징한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5). 또 하느님의 유일성(마태 19,17)이나 신앙의 유일성(에페 4,5-6)과 같은 것을 나타내는 데도 숫자 일을 잘 사용했다. 하나라는 숫자는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장에 대해 유다인들은 신성모독이라 하여 돌로 쳐서 죽이려 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요한 10,30-31). 사도 바오로도 모든 인류의 단일성과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치를 주장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에페 4,4-5). 예수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 뜻을 완전하게 계시하셨다. 그리스도 희생으로 우리 신자들은 그분과 한 몸이 되는 영광을 지닌다(1코린 10,16-17).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과 돌봄, 자비, 일치된 마음, 겸손 등을 가능하게 한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인간의 독특함을 보여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가르침은 잃어버린 양과 동전의 비유에서 잘 표현했다(루카 15,1-l0). 특히 예수님은 병자들,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임을 더욱 분명하게 강조했다.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조은일2009.11.24

말씀의 위로[월간 꿈CUM] 테마로 읽는 구약 성경 – 위로 (09) 두초, 그리스도의 탄생, 1308~1311년, 패널에 템페라, 43.5x44.5cm, 국립미술관, 미국 워싱턴 D.C.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성령만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와 동반할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위로가 교회를 통해서뿐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도 주어진다고 합니다.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로마 15,4)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이래 홀로 버려두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 백성의 역사에 개입하셨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믿는 이들을 찾아오신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위로하시며, 지탱해 주십니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가 살아갈 희망을 줍니다. 히브리서는 이 희망을 우리가 거센 파도에 목적지를 잃고 표류하더라도 자포자기하지 않게 해주는 ‘영혼의 닻’(히브 6,19)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성경은 말씀에서 희망을 얻은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미디안족의 약탈이 두려워 숨어서 추수하던 힘 없는 가문 출신의 젊은 기드온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맞서 싸울 희망을 품게 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이 말씀입니다. “너의 그 힘을 지니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판관 6,14) 위로에 탁월한 힘을 발휘하는 말씀은 단연코 시편입니다. 사람이 평소 살아오면서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큰 고통을 겪으면 말문이 막힙니다. 고통에 말을 빼앗겼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게 됩니다. 이럴 때 도와주는 말씀이 바로 시편입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당신 계명을 기억하며 주님, 저는 위안을 받습니다.”(시편119,52) 그렇습니다. 신앙의 전통 안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온 시편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위로를 청하고 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저자와 함께 소리 높여 부르짖습니다. “제 눈이 당신 말씀을 기다리다 지쳐 제가 아룁니다. 언제 저를 위로하시렵니까?”(시편 119,82) 혹시 이 말씀이 거칠다 생각된다면, 다음의 아름다운 말씀도 있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2-3) 그런데 시편보다 더 큰 위로의 힘을 가진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말씀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특히 자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가장 큰 위로를 줍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이 위로받을 수도 있지만, 말씀으로 다른 형제자매를 위로할 수도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2테 살 2,16-17) 지금까지 성경이 말하는 위로, 곧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무자비한 주인 앞에 서서 전전긍긍하는 종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비탄과 고뇌에 빠진 당신 백성을 염려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십니다. 당신 아드님을 보내주시기까지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위로받습니다. 실의에 빠져 울고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뵙고 ‘라뿌니’(요한 20,16)라며 기쁨의 환성을 질렀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에도 하느님의 위로는 멈추지 않습니다. 위로자 성령께서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빼앗기지 않는 내적 기쁨을 줍니다. 물론 세상 마지막까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위로의 말씀도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는 거래 관계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우리의 노력으로 값을 치름으로써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위로는 우리 아버지신 하느님께서 자녀들의 행복을 바라시기에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께 받은 위로를 혼자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그 위로가 절실한 다른 이들과도 함께 나눠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이 맞는 도리 아니겠는지요.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아마추어미술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2026.05.20

가톨릭·개신교 학자 공동집필한 신약성경 입문 신약성경 입문 / 다니엘 마르그라 / 김건태·백운철 신부 등 옮김 /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하느님 아들의 생애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말씀을 전한다기보다는 인류 역사의 틀에 그분의 생애를 삽입하는 것을 말한다. 이야기로 기술하는 것은 강생의 논리에 부응하며, 하느님께서 인간의 희망과 불행의 총체적 난국인 이 세상에 어떻게 들어오시는지를 보여준다. 복음은 사람들 가운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역사이다. 역사의 망각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심론적 일탈에 빠지게 하여, 구속 신화의 구체화와 예수님의 도래를 혼동하게 할 것이다.”(44쪽)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라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사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새로운 계약에 대한 믿음과 체험을 서술한 책이다. 그래서 신약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경 전반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신약성경 입문」이 출간됐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신약은 때로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진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서간·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책들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 안에서 기록된 것인지, 구약과는 어떤 연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신약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가르침을 얻어야 하는지 한눈에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신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 어떻게 기억되고 전해졌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파악하고,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프랑스어권 가톨릭·개신교 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입문서로, 신약성경 27권을 역사적 배경과 집필 당시의 상황, 문학적 구성, 신학적 목적 등 여러 관점을 통해 균형 있게 살펴본다. 성경 각 권은 고전적으로 인정받아온 문집, 곧 공관복음과 사도행전, 바오로 문학, 요한계 전승, 가톨릭서간에 따라 규합되었다. 각각 문학적 소개로 시작하여 저술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이 신약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용어 해설을 더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책임 저자 다니엘 마르그라는 스위스 로잔대학교에서 신약성경 교수로 재직했고, 전통적인 역사비평 방법론에 설화적 방법을 접목해 성경 본문 주해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여러 신학대학에서 강의하며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윤하정 기자윤하정2026.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