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 사목교서] 친교와 말씀의 해](//cpbc.co.kr/CMS/newspaper/2022/12/rc/836900_1.1_titleImage_1.jpg)
[부산교구 사목교서] 친교와 말씀의 해부산교구장 손삼석 주교 지난해들의 사목지침에서 우리들이 선물로 받은 ‘신앙, 성체, 말씀’의 은총을 바탕으로 올해 2023년에는 ‘친교와 말씀의 해’를 지내고자 합니다. ‘친교’는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을 이어주고, 동시에 지상 교회를 천상 교회와 긴밀히 연결시켜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만남을 성사적 차원으로 올려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합니다. 첫째, 하느님과 친교를 우선으로 합시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 살 수 없으며, 주님 사랑과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친교를 통해 더 깊이 깨닫습니다. 성체 앞에 앉아 주님 사랑을 묵상하고, 십자가의 삶을 계속 살아갑시다. 특히 하느님 사랑의 편지인 성경을 매일 읽으며 말씀으로 구원되고 말씀을 통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맺도록 합시다. 둘째, 이웃과 친교를 맺읍시다. 미사와 기도, 말씀과 묵상을 통해 하느님과 맺은 친교는 이웃에게 퍼져나가 ‘이웃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합니다.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의 증거이며 교회를 대표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아름다운 말 한마디, 모범이 되는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가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고 하느님 사랑의 증거자로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셋째, 세상과 친교 합시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셨으니 지구를 보살피고 자연을 보호하는 것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파괴가 아닌 보호를, 욕심이 아닌 나눔을, 나만이 아닌 우리를 지향하고, 소비지향적인 물질주의를 지양하며 세상과 친교 하는 우리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생태적 삶을 작은 것에서부터 계속 실천해갑시다. 또한 올 한 해, 우리 교구는 ‘청소년의 해’를 준비합니다. 청소년은 교회의 미래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특별히 사목자, 수도자, 부모, 조부모의 관심과 지원을 촉구합니다. 그 외 각 본당의 모든 구성원도 청소년이 하느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협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친교 안에 청소년을 초대하고, ‘청소년의 해’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역량을 모아 준비해 보았으면 합니다. <실천 사항> 1. 하느님과 친교 하기 1) 매주 주보에 나오는 성구 외우고 묵상하기 2) 성사 안에서 하느님 사랑 느끼기(미사, 고해성사 등) 3) 창세기와 탈출기 필사하기 4) 1주에 30분 이상 성체조배 하기 2. 이웃과 친교 하기 1) 전 신자 먼저 인사하기 2) 구역, 반 활성화 하기 3) 자선(후원)을 통한 이웃 사랑 실천하기 3. 세상과 친교 하기 1) 회칙 「찬미받으소서」 지속적으로 실천하기 2) ‘지구를 위한 기도’ 바치기 3) 재활용, 재사용 생활화하기 4. 청소년의 해를 준비하며 1) ‘젊은이를 위한 기도’ 바치기 2) 본당 전례에 젊은이 초대하기cpbc2022.12.07
일치 기도 주간 “선을 행하여라. 공정을 추구하여라”한국그리스도교신앙과직제협의회, 18일 저녁 7시 인천 논현동성당에서 일치 기도회한국그리스도교신앙과직제협의회(이하 신앙과직제협)는 2023년 그리스도인 일치 주간(1월 18~25일)을 맞아 담화를 발표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이루는 일치를 통해 모든 사람이 존중받고 마땅한 권리를 반드시 누리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자고 호소했다.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 신앙직제위원회가 정한 올해 일치 주간 주제 성구는 “선을 행하여라. 공정을 추구하여라”(이사 1,17)이다. 신앙과직제협은 주제 성구를 제목으로 한 담화에서 “이제 우리는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며 선을 행하고, 공정을 추구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자”고 권고했다. 신앙과직제협은 이에 성경이 말하는 공의의 의미를 새겼다. “공의란 회복의 정의이며, 침묵 당한 이들을 대변하는 것이며, 불의를 만들고 유지하는 체제를 바꾸는 일이며, 모든 사람이 존중받고 마땅한 권리를 반드시 누리도록 촉진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울러 선을 행하고 공정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존중한다는 의미 △인종, 성별, 종교, 사회경제적 지위 등으로 인해 만들어진 오랜 불이익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라는 의미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모든 사람과 화해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신앙과직제협은 설명했다.신앙과직제협은 이번 일치 주간 동안 △우리 사회에 가장 힘없는 이들은 누구인가 △우리 시대의 악행과 불의에 맞서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대화를 통해 서로의 경험에 대한 인식과 이해와 통찰을 어떻게 증진할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공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를 숙고해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자고 촉구했다.2023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는 18일 저녁 7시 인천 논현동성당에서 열린다. 신앙과직제협은 이날 일치 기도회를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 방송한다.한편,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 신앙직제위원회는 일치 주간 자료집을 간행 배포했다. 올해 일치 주간 자료집은 미국 미네소타교회협의회에서 준비했다. 미네소타는 미국 역사 속에서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지역이다. 최근에도 백인 경찰관에 의해 젊은 흑인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인종 차별이 극심한 지역에서 일치 기도 주간 자료집을 준비해 미국 사회는 물론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동선을 추구하고, 하느님의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되기 위해 힘써야 함을 공감하게 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신앙과직제협은 그리스도인 일치 운동의 활성화와 일치 증진을 위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와 한국 정교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2014년 5월에 설립한 협의회로 대한성공회, 기독교한국루터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구세군,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느님성회가 참여하고 있다. 교황청과 세계교회협의회는 1968년부터 해마다 성 베드로가 로마에 주교좌를 정한 기념일인 1월 18일부터 사도 성 바오로 개종 축일인 1월 25일까지를 ‘그리스도인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갈라진 형제들의 일치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있다.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cpbc2023.01.11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형제 교회[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천주교와 개신교는 다른 종교인가? 1962년 10월 11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요한 23세 교황 주례로 봉헌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미사. 출처=구글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성 요한 23세 교황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을 선포하면서 사도좌로부터 갈라진 동방 교회와 개신교 17개 교파의 35명 대표를 참관인으로 초대했습니다. 이는 동·서방 교회의 분열과 종교개혁으로 갈라진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가 오랜 반목을 뒤로하고, 신앙의 공동 유산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 일치 운동이라는 순례 여정을 함께 걷자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대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한국의 천주교와 개신교는 같은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성경과 교리 해석의 차이를 ‘다름’을 넘어, ‘이단과 오류’로까지 비난하며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이에 가톨릭평화신문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가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함께 어울려 공동의 신앙 고백을 하는 희망을 담아 편찬한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에 담긴 내용을 저작권을 소유한 위원회의 협조를 받아 연재합니다. 천주교와 기독교(개신교)는 서로 다른 종교인가요? 천주교와 기독교(개신교)는 같은 그리스도교로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그리스도, 다시 말해 구원자,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중국을 통해 전래된 ‘기독’(基督)은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음역 한자어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교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천주교’(天主敎)라는 용어도 본래 하느님을 ‘천주’(天主)로 고백해 온 선교 초기 역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중국에 가톨릭 신앙을 전한 예수회 마테오 리치는 중국 유학(儒學)의 정신을 존중하여 서구의 ‘신’(神, God) 개념을 ‘하늘의 주인’으로 번역하여 사용했고, 우리 신앙 선조들도 ‘천주’를 믿는 종교라는 뜻에서 가톨릭교회를 ‘천주교’라고 지칭했습니다. 이렇게 천주교와 기독교는 모두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를 가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517년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교회로부터 갈라져 나간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개신교’(改新敎)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개항 이후 서양의 선교사들이 개신교 신앙을 전래할 때 자신들이 전하는 종교를 천주교와 구분하기 위해 ‘예수교’ 또는 ‘기독교(개신교)’ 신앙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와 기독교(개신교)가 마치 다른 종교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대다수의 개신교 신자는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지칭하면서 천주교 신자를 다른 종교인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말이 ‘그리스도교’라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해서 천주교 신자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지칭하지도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기독교라는 말이 개신교를 지칭하는 말로 관행처럼 오래 사용되어 왔기에 쉽게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는 모두 이천 년 전 나자렛 예수님을 통하여 참된 구원과 영생의 희망을 얻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천주교의 ‘성당’과 개신교의 ‘교회’는 서로 다른가요? 본래 ‘성당’과 ‘교회’의 원어는 같습니다. 곧 라틴어로는 ‘에클레시아(ecclesia)’이고 영어로는 ‘처치(church)’입니다. 「천주교 용어집」은 “에클레시아는 본디 ‘교회’(하느님의 백성)이지만, 건물을 가리킬 때에는 ‘성당’이라고 한다”고 규정합니다. 이처럼 ‘교회’는 하느님께서 불러 모으신 백성으로 구성된 신앙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반면 천주교 용어 ‘성당’과 개신교 용어 ‘예배당’ 또는 ‘교회당’은 신앙 공동체가 모여 하느님을 경배하고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를 뜻합니다. 이런 구분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건물 또는 장소를 의미하는 ‘성당’의 명칭을 ‘천주교○○동 성당’으로 통일하여 표기합니다. 반면 개신교는 선교 초기부터 일정 시기까지는 ‘○○예배당’, ‘○○교회당’이라고 표기했지만, 현재 대부분 ‘○○교회’라는 표기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가 “○○동 성당에 다닙니다”라고 말하거나, 개신교 신자가 “○○교회에 다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을 밝히는 동시에 자신이 소속된 교회 공동체를 알리는 방식으로 보편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개신교 신학자는 교회 건물에 공동체 명칭으로서 ‘○○교회’라는 현판을 사용하되, 장소를 표현할 때는 ‘○○교회 예배당’이라고 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마치 장소적인 건물로서 인식하는 문제를 피하기 위해 “예배당에 모였다.”, “예배당에 간다.” 등의 표현을 사용할 것을 권고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교회’라는 용어는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모두 신앙 공동체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기에, ‘성당’을 천주교로 대신하고 ‘교회’를 개신교를 대신하는 의미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은 삼가야겠습니다. cpbc2023.03.24

연약함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자모적 사랑 체험[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4.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한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하였다. 피에트로 로렌제티, ‘성모자 사이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와 요한 사도’, 프레스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이탈리아. 15.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대안적 삶 제3의 길②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감과 서로 간에 어머니가 되어 줌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에는 창조와 완성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결합, 혹은 일치가 들어있다. 인간의 연약함과 부서지기 쉬움, 그리고 악으로 쉽게 기울어지는 경향은 인간을 스스로 불행으로 몰아가게 하는 요소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본질 전체에 속하는 한 부분임을 온전히 인정한다면 그 시점부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힘의 작용을 체험하게 된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우리에게 당신 사랑의 손길을 뻗쳐주시는 분이시긴 하다. 하지만 떠오르는 해나 비를 우리가 피할 수 있음도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예수님께서 “원수마저도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은총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고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 현실의 약함 때문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생명과 아름다움, 통합과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주님 영의 현실을 인식하고 체험하며 따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이며 이것은 주님 삶과 말씀으로 이루어진 ‘복음’의 실재에서 드러나는 것이다.하느님께서는 그저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약함과 깨어지기 쉬움 등과 한계들을 모두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분은 모든 이가 당신께로 온전히 되돌아가 그분의 신성에 완전히 결합할 가능성을 열어주셨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셔서 이런 엄청난 은총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셨다면 이 방식이야말로 인간 완성의 근본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인간의 연약한 현실이 본래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해 남용한 까닭에 빚어진 왜곡된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 왜곡된 인간의 현실이 우리의 본질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제2차적 본질을 분명히 직시할 때 우리 인간을 이 제2차적 본성에서 벗어나 제2의 아담인 그리스도에 일치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misericordia)와 사랑을 보게 된다.‘suffering’은 본래 ‘받아들인다’ 혹은 ‘허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르코 복음(8,5)과 루카 복음(9,48)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어린이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머니가 자녀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을 내어주고 길러주는 사랑이 진정한 의미에서 어머니의 사랑(‘suffering’)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들이시며 당신을 내어주시는 자모적 사랑이고, 하느님의 이런 받아들이시는 사랑의 모상을 각인 받은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 중심에는 이런 어머니의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프란치스코가 자기 삶을 마감하며 쓴 유언에서 고백하고 있는 ‘몸과 마음의 쓴맛’이 단맛으로 변하는 데 필요했던 덕이 바로 ‘자비(misericordia)’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자비를 말하는 것이기에,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를 “그분께서는 그들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내게 보여주셨습니다”로 바꾸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그들에게”라고 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서”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여 본다면 이렇게 바꾸는 것이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고 자신과 나환우들 역시 그분 자비의 매개체이자 수혜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프란치스코는 그들을 통해 주님의 자비를 입어 회개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지 않는가!언젠가 이 유언의 어떤 영어 번역본에서 “그들에게서 떠나올 때”를 “그들을 온전히 알게 되었을 때”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렇다. 프란치스코는 나환우를 온전히 알게 되면서 자기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이고, 그것을 보았을 때 비로소 그는 역겨웠던 것을 단맛으로 느낄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그 나환우의 일그러진 외모를 통해 자신의 나환우성을 볼 수 있었던 것이고, 이를 치유해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됐다.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깨달음이나 인식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금방 자신의 연약성을 철저히 인식하고서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시 또 왜곡된 자기 모습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 또한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게 “늘 깨어 있으시오”(마태 25,13)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연약성을 순간순간 직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깨어있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세가 아닐까 한다. 프란치스코는 죽기까지 자신의 약함을 직시하고자 하였고 여기서 자신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였다. 이를 통해 결국 그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변모되었고, 또 다른 이들도 이 변모에 참여하게끔 계속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말하고자 하는 어머니 성의 본질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cpbc2021.11.03

그가 사랑한 시처럼 살다간 아름다운 영혼[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8) 장영희 마리아 (하) 가장 아름다운 목발 장영희(마리아, 張英姬, 1952~2009)의 발자국 소리는 크다. 10m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 낡은 목발에 쇠로 된 다리 보조기까지 합쳐져서 내는 ‘정그렁’ 소리는 크게 들렸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걸으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가장 힘이 들 때는 책을 찾으러 ‘도서관을 헤맬 때’라고 했다. 목발 때문에 책을 들고 옮길 수가 없었다. 또 원하는 책을 찾았어도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그 사람에게 책을 자기 자리까지 옮겨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온종일 책만 옮기다가 하루가 지나간 날도 있었다. 필요한 책을 겨우 찾아 읽고 글을 쓰려고 하면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했다. 장영희는 누가 자신에게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목발’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했다. 장영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목발에 의지했다. 한 번은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목발이 부러지면서 몸이 그대로 땅바닥에 굴렀다. 혼자서는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지나가던 사람이 발견하고는 기숙사로 연락해 룸메이트가 휠체어를 가져왔다. 뉴욕에 사는 오빠는 그 얘기를 듣고 다음 날 달려왔다. 그러곤 독일제 새 목발을 사주었다. 그 목발이 지금 짚고 다니는 목발이었다. 그 목발은 주인과 함께 늙어 몸통이 긁히고, 패이고, 불에 탄 자국까지 생겼다. 언니가 그 낡은 목발을 보고 미제 ‘알루미늄발’을 보내왔다. 세상에서 본 목발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목발’이었다. 어느 여름날, 장영희는 미국 유학 중에 방학을 맞아 집에 다니러 왔다. 동생이 명동으로 쇼핑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구멍 난 낡은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었다. 생전 처음으로 명동에 갔다. 동생이 어떤 가게에 걸린 원피스가 눈에 들었는지 한 번 입어보겠다고 했다. 그 가게의 문턱은 너무 높아 목발을 딛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밖에서 기다렸다. 가게 주인 같은 사람이 가게 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장영희를 보더니 이런 말을 갑자기 내뱉었다. “나중에 와요. 손님이 있는 거 안 보여요?” 장영희는 이 말을 듣고 당황했다. 그 사람은 이어서 “나중에 오라는 말 안 들려요? 지금은 동전이 없다고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동생은 옷을 입다 말고 그 사람에게 우리 언니를 무엇으로 보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느냐고 대들었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장영희는 연구실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평가하고 있었다. 성적을 평가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은 A나 B, B나 C의 경계선에 있는 학생들의 성적이었다. 늘 ‘혹시 그 학생이 청년 가장은 아닐까? 혹시 부친이 실직 중이지 않을까? 혹시 낮은 성적을 주어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등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등의 고민을 했다. 장영희는 ‘어떤 학생’의 영어 발음이 수업 중에 정확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는 B+와 A- 중 어느 것을 줄 것인지 고민하다가 연구실을 나왔다. 다음 날, 출근길 신촌로터리에서 신호등이 바뀔 때를 기다리다가 전철 입구에서 한 노인이 추운 겨울날에 나무 부채와 여성용 스카프를 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가지만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노인에게 다가가더니 부채 두 개를 집어 들고는 돈을 냈다. 노인은 기뻐했다. 그 젊은이는 부채가 필요해서 산 것이 아니라 추위에 떨고 있는 노인이 불쌍해서 그 부채를 산 것이었다. 그 젊은이가 바로 그 ‘어떤 학생’이었다. 연구실에 오자마자 그 학생의 성적을 조금도 망설임 없이 A를 주었다. 안타까운 일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퇴근하려고 연구실 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문 앞에 짧은 머리에 해쓱한 얼굴의 깡마른 학생이 혼자 서 있었다. 오랫동안 복도에서 서성이며 연구실 문을 두드릴까 말까 망설였던 것 같았다. 연구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학생은 죽음까지도 생각하는 심한 강박증을 앓고 있었다. 산다는 것이 고통이며 병원 약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장 교수는 종교를 가지라는 말, 이성 친구를 사귀어 보라는 말 등으로 충고했다. 그러고는 저서 한 권을 주며 독후감을 써오라고 했다. 학생을 다시 오게 하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학생은 장 교수의 수업을 듣는 청강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메일함을 열어보니 그 학생이 보낸 메일이 와있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자신을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어서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독후감을 제출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죄송하다는 글이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유서 같았다. 그래서 서둘러 해당 학과에 연락해 그 학생을 찾으라고 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나서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학생이 지하철 선로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장영희는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빈 껍데기 같은 말로 위로해 준 것이 후회되었고, 끝까지 그 귀한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재현아! 너무 늦게 네 이름을 불러 본다. 재현아, 미안해. 네 믿음에 보답하지 못해서. 네 생명을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수필 ‘재현아!’에서) 장영희의 ‘마리아’ 장영희는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두 번 놀란다고 했다. 첫 번째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두 번째는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에 놀란다고 했다. 장영희는 어렸을 때 유아 세례를 받았다. 사람들이 세례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리아’라고 씩씩하게 답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웃었다. 그러면서 “장 선생님같이 씩씩하신 분이….” 이렇게 말끝을 흐렸다. 방송국 인터뷰에서도 사회자가 “‘마리아’치고는 아주 톡톡 튀십니다”라고 했다. 이렇듯 ‘장영희’와 ‘마리아’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해 장영희는 성경 속의 마리아는 수동적이고 얌전하며 눈물이 많은 여왕이 아니라고 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수태 고지를 받을 때 마리아는 무조건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지 않았냐고 했다. 그리고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정교한 논리로 질문도 하지 않았냐고 했다. 특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로 시작하는 ‘마리아의 노래’는 적극적이고 씩씩한 노래라고 했다. 그래서 ‘마리아’라는 세례명은 자신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죽음의 그림자 장영희는 하버드대에서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세계 최고의 의술을 자랑하는 하버드 메디컬 스쿨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검진 날짜에 병원으로 갔다. 침대에 눕고는 가슴 검사를 했다. 의사는 가슴에서 커다란 돌기가 잡힌다고 했다. 다음 날 더 정확한 검사를 하기 위해 매모그램 검사와 초음파 검사 그리고 조직검사까지 했다. 그 결과, 왼쪽 가슴에 2~3기 정도의 암이 있었다. 의료진은 서둘러 수술했다. 그때부터 암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슴에 생긴 암은 미국 병원에서의 두 번 수술과 귀국해서 받은 방사선 치료로 완쾌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암이 다시 척추로 전이되었다.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2년 동안 힘들게 항암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치료 효과가 좋아 완치되었다. 그런데 또다시 암이 척추에서 간으로 전이되었다. 더욱 강도 높은 항암제를 맞았다. 약명이 아드레마이신인데 ‘빨간약’이란 별명을 가진 약이었다. 암 환자들은 소변까지 빨갛게 나오는 그 빨간약을 보기만 해도 공포심을 느낀다. 다시 발병한 간암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병은 심해졌다. 결국 화창한 봄날에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장영희는 세상과 이별했다. 서강대 성당에서 장례 미사가 봉헌되었다. 운구가 캠퍼스를 돌았다. 장영희 교수의 연구실이 있던 건물에 운구가 들어갔을 때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건물 앞뜰, 장 교수가 씨앗을 심고 목발로 흙을 덮어주었던 그 자리에 예쁜 꽃이 피어있었다. 추모 낭독회에서 터져나온 웃음 장영희가 가장 좋아한 시는 에밀리 디킨슨이 지은 ‘만약 내가’라는 시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 줄 수 있다면/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쳐 있는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이 아니리” 장영희는 시처럼 세상을 살다가 갔다. 장영희 10주기 추모 낭독회가 서강대에서 열렸다. 낭독회에는 가족과 지인 그리고 제자 등이 참석했다. 로만 칼라를 한 어떤 신부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한 번은 만우절에 수도원에서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아름다운 분홍색 봉투에 ‘이소라’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고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었더니 첫 줄에 ‘야 치연아. 나 장영희다. 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수련 받아’라고 적혀있었다고 했다. 신부는 그 편지 덕분에 지금까지 수도생활을 잘할 수 있었다고 했다. 숙연했던 추모 낭독회에 그 신부는 한바탕 맑은 웃음을 선사해 주었다. 참고 자료 : ▲장영희. 「내 생애 단 한번」. 샘터. 2010 ▲장영희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샘터. 2011 ▲장영희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위즈덤하우스. 2012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샘터. 2019 ▲장영희 외 32인 「아버지의 추억」 따뜻한 손. 2010 ▲장왕록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샘터. 2004 ▲채널 예스 뉴스(2019.5.16.) ‘기적을 알려주고 간 사람, 장영희 교수 10주기 추모 낭독회’ cpbc2023.09.21

‘하느님의 집’과 ‘하느님 백성의 집’은 나뉠 수 없다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3. ‘하느님의 집’과 ‘하느님 백성의 집’ ‘하느님의 집’과 ‘하느님 백성의 집’은 나뉠 수 없다. ‘성녀 데레사 성당’, 린츠, 오스트리아, 루돌프 슈바르츠 설계, 1962년. 출처=Jamie McGregor Smith 성당은 ‘하느님의 집(domus Dei)’이다. 영어로는 ‘the house of God’이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말로서 성당의 본질이 담겨 있다. 그런데 ‘하느님 백성의 집(the house of God’s people)’이라는 또 다른 표현이 있다. 이 말은 ‘도무스 에클레시에(domus ecclesiae)’라는 말에서 나왔다. 누구를 위한 집인가 교회를 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Ecclesia)라 한다. ‘불러 모음’, 곧 하느님 앞에 모인 선택된 하느님 백성들의 집회라는 뜻이다. 유다인이 모이던 시나고그(synagogue)가 그리스어로 가르치려고 모이는 장소인 것과도 아주 비슷하다. 그런데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는 “집에서 어떤 공공의 장소로 불려 나온 시민들의 모임, 곧 집회”라는 뜻이었다. 눈여겨 읽으면 그 안에는 집회란 어떤 장소 또는 집에 모여야 성립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처럼 교회는 집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도무스 에클레시에’라는 ‘교회의 집’, ‘하느님 백성의 집’이 생겼다. 다만 ‘도무스 에클레시에’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문헌상으로 이 말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역사학자 에우세비우스(Eusebius)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4세기 무렵이니 상당히 오래된 말이다. 학술적으로는 1939년에 건축역사가 크라우트하이머(Richard Krautheimer)가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 예배를 위해 개조하거나 확장한 주택을 ‘도무스 에클레시에’라 불렀다. 그 이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나누었는지를 연구할 때 이 용어는 꼭 등장한다. 그런데 종종 ‘하느님 백성의 집’을 ‘하느님의 집’과는 대조되는 말 또는 반대말로 쓰고 있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성당을 나타내는 두 용어를 이렇게 사용하면 하느님은 그분의 사제와 봉사자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하느님, 그래서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하느님이 되고 만다. 또 ‘하느님의 집’은 성직자 주의와 의례적 형식성만을 강조한 성당인 듯이 보이고, ‘하느님 백성의 집’은 모인 신자들의 공동체를 우선하는 성당인 것처럼 여기기 쉽다. 이렇게 ‘하느님의 집’과 ‘하느님 백성의 집’을 양분해서 바라보면 ‘하느님의 집’은 ‘성전’이라는 건물을, ‘하느님 백성의 집’은 ‘백성’의 모임을 강조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낳게 만든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집’의 궁극적 모델은 예루살렘의 성전일 것이고, ‘하느님 백성의 집’의 궁극적 모델은 퀘이커(Quaker)의 집회소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퀘이커들은 목사 없이 각자 침묵으로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그들의 집회 장소는 주택의 넓은 홀에 긴 의자를 둘러놓은 것이 전부다. 그들에게 교회 건물은 없다. 예배하는 공동체만이 교회다. 성당의 공간은 본질적으로 제단과 회중석으로 나뉜다. 그런데 ‘하느님의 집’과 ‘하느님 백성의 집’을 상반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사제는 하느님께 제사드릴 수 있도록 뽑힌 사람이므로 제단 쪽은 하느님께만 속하는 자리가 된다. 또 평신도들이 함께 미사를 드리는 회중석은 백성인 신자들에게만 속하는 자리라고 여기게 된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자 그리스도의 몸 그러나 제단은 성직자에게, 회중석은 평신도에게만 속하는 자리가 아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방식이 다를 뿐 모두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성직자는 직무 사제직을, 평신도는 보편 사제직을 갖게 된다. 따라서 제단과 회중석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사제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여기는 것과 똑같다. 전례를 거행하는 것은 회중이다. 영어 네이브(nave)를 번역할 적당한 단어가 없어서 이를 ‘회중석’이라고 부르지만, 회중은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 모인 사제, 부제, 시종, 독서자, 성체 분배자 등 미사에 참여한 모든 이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표징으로 나타내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사적으로 ‘하느님의 집’ 안에 머물고 계시고, ‘하느님의 집’에 모인 백성에게 그들과 함께하시려는 성체로 다가오신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자 그리스도의 몸이다.(에페 1,23) 그러니 ‘하느님의 집’과 ‘하느님 백성의 집’을 구분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희생 제사인 성체성사와 공동체 음식인 성체성사는 다른 것이라고 잘못 구별하게 된다. ‘하느님의 집’과 ‘하느님 백성의 집’은 거룩한 공간을 분명히 바라보는 두 개의 렌즈일 뿐이지 상반된 것이 아니다. 영어 ‘church’가 “주님의” 또는 “주님에게 속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키리아코스(kriaks)’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주님께 속하는 ‘하느님이 집’은 주님께 속하는 ‘하느님의 백성의 집’이기도 하다. ‘Deus(하느님)’ 없이 ‘Ecclesia(교회)’가 있을 수 없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공동체는 상호작용했기 때문에 공동체가 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공동체가 먼저 만나 교회가 생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전례에 참여하도록 공동체를 모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다시 말해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겨났고, 성체성사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부름에 각자 응답하여 생긴 것이다. 하느님 백성이 주가 된 성당 건축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성당은 ‘하느님의 집’이요 ‘하느님 백성의 집’이라 하지만, 실제로 성당을 새로 지을 때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집’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고심하여 설계하자는 말은 별로 듣지 못한다. 대부분의 관심은 하느님 백성의 ‘모임’에 집중된다. 사제나 건축위원회만이 아니라 평신도까지도 새 성당은 면적이 늘어야 하고 좌석 수도 지금보다는 많아야 한다, 작은 소성당이나 더 넓고 많은 교리실이 필요하다, 교우들의 교류를 위해 넉넉한 만남의 방을 만들자, 지하 강당은 혼인예식에 대비해 넓게 하고 하객의 주차도 넉넉히 고려해야겠다 등이 그렇다. 이렇게 ‘백성’이 주가 되는 ‘하느님 백성의 집’을 짓는 데 우리는 훨씬 더 관심이 많다. 그러면 ‘하느님의 집’과 ‘하느님 백성의 집’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하느님의 집’은 하느님께서 사람과 회중에 대하여, 회중은 개인과 하느님께 대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수직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성당을 말한다.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집’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형제는 자매에 대하여, 성직자는 평신도에 대하여, 기도 공동체는 교구와 보편 교회에 대하여 수평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성당을 말한다. 성당을 짓고자 하는 이들이 모두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집으로 부르셔서 하느님 백성을 성사적 공동체로 이루셨음을 공간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를 불러 모으신 분은 하느님이심을 자각하는 감각을 장소로 구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요구한 ‘능동적 참여’의 핵심이다. 이렇게 설명하니 어렵게 들리는가? 그만큼 믿는 이들에게 성당이 무엇이며 왜 지어야 하고 그 건축물은 어떻게 지어져야 하는가를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두 성당 건축에 큰 관심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자.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cpbc2023.01.11

열아홉 살에 김대건 신부 초상화 그린 ‘신심 깊은 천재’ 장발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 장발 루도비코 (상) 장발 화백이 그린 성 김대건 신부 성화 중 새롭게 발견된 ‘김대건 신부 초상화’. 장발(루도비코, 張勃, 1901~2001)이 그린 성 김대건 신부 초상화 한 점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이 초상화는 장발이 용산신학교(가톨릭대학교 신학부 전신) 교장 기낭 신부 은경축(사제 수품 25주년)을 기념해 그린 것이다. 장발은 동경미술학교 유학 시절이던 열아홉 나이에 김대건 신부 초상화 두 점을 그렸다. 한 점은 가톨릭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김대건 신부상’인데, 다른 한 점의 소재가 불분명했었다. 그 베일에 가려졌던 작품이 발견된 것이다. 어떻게 십 대에 ‘김대건 신부상’을 그리려고 마음을 먹었을까. ‘김대건 신부상’은 갓 쓴 양반 복장을 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고, 왼손에는 성경을 가슴에 품었다. 김 신부는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은 꼭 다문 채 정면을 향하고 있다. 표정은 조선 최초의 사제답게 경건하기만 하다. 이 작품은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화이다. 시복식의 감동 성화에 담아 장발은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형인 장면(요한 세례자)과 함께 로마 바티칸에서 열린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에 참여했다. 이 행사는 장발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장발은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을 장식한 조선 복자 순교 성화를 보고 크게 감동했다. 그 성화는 장발이 평생 성화를 그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성화는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벽에 걸려 있는 ‘79위 복자화’이다. 그림의 배경은 성 베드로 대성전이다. 하늘에서는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내리고 두 천사가 79위의 영광을 노래한다. 가운데는 조선에서 순교한 두 명의 프랑스 신부와 조선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가 서 있다. 그들을 가운데 두고 조선 순교자들이 모였다. 그림 양쪽 맨 앞에는 소년으로 옥사한 유대철 베드로와 참수당한 동정 자매 김효주 아녜스와 김효임 골룸바가 있다. 장발은 시복식에서 받은 감동을 어서 빨리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곧바로 명동대성당의 제대 벽화 ‘14사도’를 제작했고,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 그리고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화를 그렸다. ‘14사도’ 그림을 그릴 때 장발은 경주 석굴암을 둘러보고, 내벽의 원형구조와 본존불 둘레의 10대 제자상 입상 부조를 참작했다고 한다. ‘14사도’는 우리나라 불교와 가톨릭이 자연스럽게 융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와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성화는 현재 절두산순교박물관에 있다.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자매를 기리는 성화이다. 자매는 관군에게 체포되어 고문 끝에 목이 잘려나가는 참수형을 받았다. 이 성화는 자매가 복자로 인정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이고, 자매는 서울 여의도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화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자매가 나란히 서 있는 그림이다. 언니는 노랑 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었고, 동생은 분홍 저고리에 청색 치마를 입었다. 자매가 각각 들고 있는 백합은 ‘순결’의 상징이며, 언니가 들고 있는 종려나무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뜻하고, 동생이 들고 있는 칼은 ‘참수 순교’를 상징한다. 성화의 배경에는 산이 펼쳐졌고 강이 휘돌아 흐른다. 전형적인 조선의 평화로운 풍경이다.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는 김대건 신부의 초상을 전신상으로 그린 성화다. 갓 쓴 조선 선비의 모습으로 오른손은 종려나무를 잡고, 왼손은 성경을 감싸 가슴까지 품어 올렸다.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는 엄숙한 표정이다. 조선의 파란 하늘이 열려 있고, 푸른 산이 저 멀리 보이며 푸른 강이 유유히 흐른다. 좌우대칭의 엄격한 분위기다. 장발은 김대건 신부의 초상을 여러 번 그렸다.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초상’을 그렸다. 또한, 복녀 김 골룸바와 김 아녜스를 소재로 성화도 여러 점 그렸다.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를 그렸고, 평양 서포성모회수녀원의 ‘복녀 김 골룸바와 아녜스 치명’을 그렸다. 또한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를 그렸다.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 작품은 꽃이 가득한 길을 두 자매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으로 천국에 있는 순교자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장발은 성화를 워낙 잘 그려서 여러 성당에서 성화 제작 의뢰를 받았다. 그때 그린 작품들이 평양교구 신의주성당 벽화 ‘성령 강림’과 비현성당 제단 벽화 ‘예수 성심상’, 가르멜수녀원 제단화 ‘예수 탄생 예고’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이다. 성미술전람회 장발은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을 창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서울대와 홍익대 교수들로 서울미술가회를 구성해 ‘성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전람회 개막식에는 당시 서울교구 노기남 주교를 비롯해 가톨릭 주요 성직자들이 참석했다. 당대 미술계를 대표하는 24명의 작가가 참여했는데, 대표적인 전시 작품으로는 장발의 ‘십자가의 그리스도’, 김세중의 ‘복녀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장우성의 ‘성모자’ 남용우의 ‘성모칠고’ 김병기의 ‘십자가의 그리스도’ 김정환의 ‘성모영보’를 들 수 있다. ‘성미술전람회’로 우리나라에 가톨릭 미술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또한, 장발은 혜화동성당 설계를 비롯해서 부조 제작을 총지휘했다. 혜화동성당은 우리나라 건축가와 조각가 그리고 우리나라 자본에 의해 설립된 성당이다. 한국의 가톨릭 미술은 이렇게 장발에 의해 시작되고 꽃을 피워나갔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다 장발은 인천(당시 제물포)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3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지완(志完)이었으나 후에 개명했다. 호는 우석(雨石)이고, 가톨릭 세례명은 루도비코이다. 아버지는 인천 해관(현재의 세관)의 직원이었다. 장발은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개항지에서 살았기에 사물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장발은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최고의 신식 가정에서 자랐다. 이런 성장 환경은 장발의 신앙과 삶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형인 장면 박사는 민주당 정부의 초대 내각 수반(현 국무총리)을 역임했다. 그의 셋째 아들이 장익 주교이다. 동생인 장극 박사는 항공공학의 세계적인 석학이 되었다. 누이동생은 메리놀수녀회의 첫 동양인이었으나 안타깝게도 6ㆍ25 전쟁 때 평양에서 순교했다. 장발에게 깊은 영향을 준 외국 선교단체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와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연합회 그리고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를 들 수 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명동대성당을 신축했는데 장발은 성당 내부의 제단 둘레에 ‘14사도’를 제작했다. 장발의 성화 제작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 로마 바티칸의 ‘조선 순교복자 79위 시복식’이 거행되도록 한 기관도 파리외방전교회였다.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연합회는 성화 제작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장발에게 보이론(Beuron) 화파의 미술 양식을 전해주었다. 그래서 장발의 모든 성화에서는 보이론 화파의 특징인 절제와 균형의 미가 살아 있다. 메리놀외방선교회는 장발 가족 전체와 연관이 있다. 장면·장발 형제가 미국으로 유학 갔을 때 메리놀신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장면은 유학 후 메리놀외방선교회 평양교구에서 외국 신부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누이동생은 신의주 메리놀 수녀회의 일원으로 평양 ‘성모수녀회’ 원장 수녀를 역임했다. <계속>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cpbc2023.01.10

건축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질 드러낸 탁월한 성당[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27. 산 비탈레 대성전 <상> 산 비탈레 대성전 아케이드와 빛. 출처=Wikimedia Commons 비잔티움 건축의 정점인 건물 산 비탈레 대성전(Basilica of San Vitale)은 클라세의 산타 폴리나레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은행가 줄리아노 아르젠타리오(Giuliano Argentario)의 기부금으로 라벤나의 수호성인인 초기 순교자 성 비탈리스의 기념성당으로 지어졌다. 비잔티움(로마) 제국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새로운 비잔티움 문화의 정수가 라벤나에 직접 흘러들어온 것은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이탈리아의 동고트족을 무찔러 게르만족 수중에 들어갔던 이탈리아를 되찾으면서부터였다. 산 비탈레와 산타 폴리나레 인 클라세 대성전은 이러한 시대에 지어졌다. 산 비탈레 성당이 세워졌을 때 라벤나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따라서 산 비탈레 대성전은 라벤나의 다른 성당들과 달리 비잔티움 건축의 정점인 건물이었다. 또한 산 비탈레 대성전은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지어진 성당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당이기도 하니, 이 대성전은 대단히 중요한 성당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정점에 서면 그 이후는 쇠퇴하기 시작한다고 볼 때 이 성당의 소중함은 더해진다. 이 대성전은 라벤나가 번영하던 시대의 정점에서 핀 화려한 꽃과 같은 건물이다. 돔, 입구의 형태, 단을 이룬 탑 등은 고대 로마적 요소이고, 다각형의 반원 제단, 주두, 좁고 긴 벽돌은 비잔티움의 요소다. 그러니 이 성당을 꽃으로 말하자면, 이 성당은 고대 건축의 끝인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와 중세의 시작인 비잔티움이라는 두 시대의 빛을 받고 자란 꽃이다. 그리고 서방 세계인 이탈리아와 동방 세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두 문화적 토양에서 양분을 받고 자란 꽃이다. 밖에서 보면 이 성당은 마치 갈색의 벽돌로 쌓아 올린 산과 같다. 한가운데에서 솟아오르는 8각형의 덩어리를 향해서 제각기 선명하게 베어낸 듯한 다양한 모습의 벽돌 덩어리가 규칙적이고 각을 지으며 겹쳐 있다. 본래는 성당은 독립해 있었고, 북서쪽의 한 변에 입구를 두어 동남쪽의 제단과 같은 축에 두었다. 그러다가 이 축의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정사각형의 아트리움을 두었는데, 지금은 세 변에 있던 열주랑은 없어지고 8각형 평면에 비스듬히 붙어 있는 긴 문랑만 남게 되었다. 긴 문랑을 지나면 삼각형 문랑이 또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2층 갤러리로 올라가는 원형 계단이 붙어 있다. 산 비탈레 대성전 중랑과 제단. 출처=Wikimedia Commons 직선적 외부와 달리 내부는 곡선이 지배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곡선이 지배한다. 8각형 평면 가운데에서 선 8개의 당당한 기둥이 돔을 받치고 있다. 지름 9m, 높이 28.7m인 돔의 천장에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는데 16세기 것이다. 성당 하부의 기둥과 아치는 결을 모두 좌우 대칭으로 맞춘 유색 대리석을 입혀서 마치 기둥에 꽃이 핀 것처럼 보인다. 기둥도 비잔티움 양식이다. 주두는 레이스를 짠 듯이 모양을 도림질 했고, 그런 주두 위에는 부주두를 더 놓았다. 기둥 사이마다 반원형 곡면 벽(엑세드라, exedra)이 주보랑 쪽으로 내밀고 있다. 이 곡면은 세 개의 아치로 된 아케이드가 두 층을 이룬다. 한편 주보랑과 갤러리는 모두 볼트로 덮여있다. 12세기에 목재 천장을 고친 것이다. 그러나 짓기 시작한 것은 526년 동고트 왕국의 황제 테오도릭이 죽은 지 1년 후인 527년부터인데, 이는 540년 고트족에게서 도시가 탈환되기 훨씬 전이다. 이렇게 지어진 사정이 복잡한 것은 산 비탈레 대성전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명확하게 말하는 성당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4세기 아리우스파는 성부만이 본질에서 시작이 없이 영원하며, 성자는 모든 피조물처럼 창조되어 태어났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 이에 교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하고 니케아 신경으로 삼위일체의 신앙을 반포했다. 이어서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이를 확대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선포했다. 그런데도 아리우스파는 동고트 왕국을 세우고 이탈리아를 지배하며 수도 라벤나에 그들의 중요한 성당들을 지었다. 그러나 동고트 왕국이 약해지자 동고트 왕국의 황제 테오도릭이 죽기 1년 전인 525년에 건축으로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명확히 하기 위해 성당을 짓기 시작했고, 548년에 비로소 완공되었다. 그것이 바로 산 비탈레 성당이다. 산 비탈레 대성전 평면. 출처=Wikimedia Commons ‘3’이라는 모티프 반복하고 ‘3’은 하나로 묶여 평면을 보면 외곽에는 주보랑(周步廊)이, 그 안으로는 7개의 반원의 아케이드로 이행하는 구역으로, 다시 그 안 중심에는 8각형의 공간이 중심을 같이하며 한 몸을 이루고 있다. 단면에서도 위아래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안에서 보면 돔 지붕의 아래에 두 층으로 된 아케이드가 서 있어서 전체는 돔, 두 층의 아케이드 등 세 개의 층으로 나뉜다. 또 각 층에서 반원을 이루는 아케이드는 세 개의 아치로 다시 나뉜다. 그러나 이 작은 세 개의 아치와 아케이드는 돔의 받치고 있는 더 큰 아치 안에서 하나로 결합한다. 그런데도 기둥, 벽, 두 층의 아치, 돔은 이음매 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또 이 요소들을 모두 하나가 되어 큰 아치의 볼트 아래까지 높이 올라간다. 그 결과 이 반원의 아케이드는 굽이치는 물결과 같은 중랑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빛도 마찬가지다. 돔에는 중랑에 직접 빛을 비추는 큰 창이 8개 뚫려 있다. 평면은 8각형인데 주보랑과 갤러리의 6개 벽에도 창문을 세 개 두었다. 반원 제단에도 세 개의 넓은 창이 있고 이 창을 묶는 커다란 아치 위에도 작은 창이 세 개 있다. 그런데 이 창에서 들어온 빛은 하나가 되어 주보랑 위를 비추지만, 다시 세 개의 아치로 나뉜다. 성당의 모든 곳에 뚫려 있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공간에 개방감을 주고, 내부 공간 전체에 다채롭고 신비한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이 성당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증명하려는 듯 ‘3’이라는 모티프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그 ‘3’은 하나로 묶인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나뉘지 않는 한 분이시라는 뜻이다. 제단은 길게 주보랑을 관통하여 건물 밖으로 돌출해 있다. 평면은 중심형인데도 방향성을 가진 제단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하면 중심형이 깊이를 갖게 되고, 전례 상의 여러 움직임에도 대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제단의 양 측면과 주보랑은 세 아치로 만든 아케이드로 열려 있고, 제단은 계단 두 단을 두고 회중석에 접하고 있다. 반원 제단 좌우에는 제의와 성경을 보관하는 방 ‘디아코니콘(diaconicon)’과,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는 방 ‘프로테시스(prothesis)’을 두었다. 성소도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단 옆 위에는 아벨과 멜키체덱의 희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희생 제단에 바쳐지고 있고, 그 위로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성부의 손이 그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벽, 기둥, 창, 지붕이라는 건축 요소와 빛도 아리우스파의 수도의 심장부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곧 산 비탈레 대성전은 삼위일체와 육화의 신비 그리고 어떤 하나가 다른 둘에 포함되어 있다는 상호 내재성인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를 건축으로 표현한 탁월한 성당이다. cpbc2023.07.03
![[신앙단상] 그 모든 게 주님 덕분입니다(조양제, 베드로, 대필작가)](//cpbc.co.kr/CMS/newspaper/2023/01/rc/839570_1.1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그 모든 게 주님 덕분입니다(조양제, 베드로, 대필작가) 여러분은 주로 어떤 기도를 드리십니까? 아마 대부분이 하느님께 뭐 해달라고 얘기하는 청원의 기도일 겁니다. 돈 좀 많이 벌게 해달라, 우리 아이 시험에 합격하게 해 달라, 우리 남편 건강하게 해 달라, 올봄에는 좋은 곳으로 이사 가게 해 달라…. 저도 늘 이런 기도였던 것 같습니다. 저만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게 아니라서 여기저기서 간절하게 드리는 청원기도가 하늘로 막 올라갑니다. 하늘나라 입구에 있는 천사는 그 기도들을 접수하느라 몇 날 며칠 야근에 녹초가 되어 있을 겁니다. 사실 인간에게 해준 게 많은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자꾸 더 달라고 합니다. 아침에 일하러 나가기 전에 기도를 드리다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23년에는 그 기도의 방향을 바꾸려 합니다. 방향을 바꾸기보다 사실 기도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겁니다. 청원 기도에서 감사 기도로 방향을 바꾸려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정말 예기치 못한 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온전하게, 건강하게 살아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일을 하러 나가고, 두 다리로 걷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책을 읽고, 가족들과 즐거운 수다를 떱니다. 참 소소하고 별거 아닌 일상이지만 사실 우리의 행복은 이런 소소함이 축적되어 만들어집니다. 내게 주어진 이런 소소함에 감사하지 않으면 그 소소함마저 잃을지 모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하느님은 내일이라도 그걸 다시 가져가실 수 있는 분입니다. 창고에 재물이 가득하더라도 감사함을 잊는 사람이라면 내일이라도 그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한 감사보다 자기에게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큽니다. 그래서 감사기도의 소중함보다 청원기도에 더 매달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테살로니카 1서 5장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감사의 일들을 주시지만 불평하는 게 많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불평거리를 주실 겁니다. 결국, 달라고 하기 전에 지금 손에 쥔 것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 감사기도를 빼먹고 무조건 달라고만 하는 청원기도를 드린 저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신자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88세의 할머니가 성경 필사를 하고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에 더 겸손하게 되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제가 하는 일이 술술 잘 풀릴 때가 있습니다. 직업이 작가라서 글에 대한 평판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보통은 우쭐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제 능력조차도 제 것이 아니라는 걸 감사 기도를 통해 알게 됩니다. 지금 저의 작은 능력조차 주님 덕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일상은 작은 기적들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그걸 감사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기적은 먼지처럼 순식간에 사라질 겁니다. 그 기적을 붙잡으려면 하늘에 계신 우리 하느님께 계속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루에 세 번 일용할 양식을 먹듯이 하루에 세 번 이상은 나의 일상에 찾아온 기적에 감사드리는 한 해를 만들어야겠습니다. cpbc2023.01.18

“하느님을 닮아 서로의 어머니가 되어 줍시다”[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3.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도회 형제들에게 서로 어머니가 되어 줄 것을 당부했다. 치마부에, 네 천사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아 계신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 프레스코,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이탈리아. 15.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대안적 삶 제3의 길① 삶의 전적인 기준이자 삶 전체가 된 복음하느님의 동정심(compassion)은 생각이나 이상으로 그저 내면 안에 조용히 머물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같은 마음을 품으시는 대상인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취하는 행동으로 명확하고 실질적으로 표현되는 실재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신 궁극의 목적은 우리를 당신 생명의 영원한 복과 그 영광으로 끌어올리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 시작은 밑으로 내려가는 여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엄연한 진리가 존재한다.가톨릭 저술가로서 복음서의 말씀들을 새로운 우주론과 연결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주디 카나토(Judy Cannato)는 사람들에 대한 위대한 동정심이 예수님이 가지셨던 제일의 목표였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선포하신 하느님의 세계는 자애와 너그러움, 동정과 치유를 특징으로 하는 곳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 거룩하신 분의 사랑으로부터 배제된 이가 없었다. 부자건 가난한 이건, 남자건 여자건, 종이건 자유인이건, 그 누구도 이 사랑의 어우러짐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외적인 것으로 인한 분열을 넘어 내면 깊숙한 동정의 문화로 모든 이를 초대하셨다. 동정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동정은 치유한다. 동정은 다친 곳을 고쳐주고 잃었던 것을 되찾아 준다. 동정은 소외되었던 이들이나 관계성 속에 들어서는 것을 꿈꿔보지도 못했던 이들을 모아들인다. 동정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끌어내 다른 이의 마음에 들어서게 해준다. 이렇게 해서 동정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신발을 벗어야 하고 경외심을 갖고 걸어야 하는 거룩한 곳에 우리를 있게 해준다. 동정은 유약함(vulnerability)에서 나오고, 친교와 일치로 승리를 거둔다.”(「Field of Compassion: How the New Cosmology Is Transforming Spiritual Life」 8)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초대하시는 새로운 대안적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3의 길, 즉 대안적 삶이란 이미 성경 전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인격을 통해 선포되고 있고, 여전히, 아니 영원히 우리를 그 세상으로 초대하고 있는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시작한 삶이다. 이 삶은 기존의 어떤 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정과 관상, 인내와 순응의 영으로 가득 차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려는 우리의 적극적인 마음 자세와 삶에 의해 영원히 앞쪽으로 펼쳐지는 프로젝트이다.②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감과 서로 간에 어머니가 되어 줌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 서로 간에 진정한 형제애를 구현해야 함을 말하면서 동시에 형제애가 실현되는 근본 자세로서 어머니 성을 매우 강조하여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형제들은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마음 놓고 서로 간에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각자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따라 자기 형제를 사랑하고 기를 것입니다.”(「인준 받지 않은 수도 규칙」 9,10-11)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자상하게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인준 받은 수도 규칙」 6,7)누구에게 어머니가 되어 준다는 것은 강하고 센 힘이 아니라 약하면서도 부드러운 사랑으로 자녀인 상대를 보호해주고 끌어안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의 부드럽고 끌어안는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약함을 취하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고 끌어안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속성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는 삶이고 또한 기도와 신심(헌신)의 영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는 하느님을 어머니로 표현하곤 하였다. 하느님의 자기 내어줌을 통한 우리의 창조와 길러줌 그리고 우리를 당신 사랑 안에 다시 모아들이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어머니와 같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리안나 성녀가 말하듯이,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하느님의 속성이 어머니 같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들이 하느님의 본질을 닮은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해서 얘기하자면 어머니들뿐 아니라 어머니의 속성을 지니신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우리는 모두 어머니 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은 자신의 생명과 자녀들의 생명을 동일화하기에 자녀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길러주고 자녀들을 모두 당신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본질을 지니실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가 서로 어머니가 되어 줄 것을 형제들에게 부탁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서로를 그런 어머니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존중하며 서로를 하느님의 생명으로 이끌어 주라는 권고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간에 필요한 것을 마음 놓고 드러내 보이라는 것은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다른 이들의 도움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으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cpbc2021.10.27

대주교의 권위와 책임, 친교의 상징[가톨릭교회의 거룩한 표징들] (23)팔리움 팔리움은 ‘그리스도의 멍에’와 ‘사도좌와 일치’, ‘관구 지역 교회를 사목하는 대주교의 권위와 책임, 친교’를 상징하는 거룩한 표징이다.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인 6월 29일에는 교황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새로 임명된 관구장 대주교에게 팔리움(pallium)을 수여하는 예식이 거행한다. 팔리움은 ‘그리스도의 멍에’와 ‘사도좌와 일치’, ‘관구 지역 교회를 사목하는 대주교의 권위와 책임, 친교’를 상징하는 거룩한 표징이다.팔리움은 가톨릭교회에서 교황과 대주교가 자신의 직무와 권한을 상징하기 위해 제의(祭衣)를 입고 목에 걸 수 있도록 가운데가 원형으로 돼 있고 앞과 뒤가 긴 띠로 이루어져 있는 고리 모양의 하얀 양털 띠다. 폭은 7.6㎝이고, 가운데서부터 목 앞과 등 뒤로 내리는 띠 길이는 30㎝ 정도다. 팔리움에는 6개의 십자가가 수놓아져 있다. 이는 정의, 용기, 절제, 예지 네 가지 덕행과 라자로의 동생으로 알려진 마르타의 활동적인 삶, 마리아의 관상적인 삶을 표현한다. 대주교에게 팔리움을 수여하는 교회 전통은 1700년이나 된다. 로마의 주교들, 곧 교황들이 4세기 때부터 ‘그리스도의 멍에’를 상징하는 팔리움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인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하지만 새로 임명된 대주교들이 팔리움을 받으러 교황청으로 가는 관례는 최근에 생겨났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4년 대주교들에게 직접 팔리움을 걸어주는 관례를 도입했다. 해마다 새 대주교들에게 팔리움을 수여하는 날을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인 6월 29일로 정한 교황도 요한 바오로 2세다. 그 이전에는 교황 사절이 해당 지역 교회로 팔리움을 갖고 가서 전달하는 게 관례였다.교회법에 따르면 관구장에 서임된 이는 주교 수품 또는 서임 후 3개월 이내에 교황에게 팔리움을 청원하게 돼 있다. 그러나 팔리움을 교황에게 받아야 한다고 명시돼 있지는 않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1월 예전처럼 팔리움 수여식이 바티칸이 아닌 지역 교회에서도 거행될 수 있도록 했다. 팔리움 수여식에 신자들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어 대주교가 지역 교회와 친교를 나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목적 배려에서다. 팔리움을 양털로 짜는 이유는 교회의 전통이기도 하지만 성경의 신앙적 의미도 담고 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어린 양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희생 제물이었다. 제단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1년 된 어린 숫양이 번제물로 한 마리씩 바쳐졌다.(탈출 29,38-39) 그리고 유월절의 어린양은 대속물이었다.(탈출 12,1-14) 신약에서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는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하고 외쳤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은 희생과 속죄라는 신앙적 의미를 지닌 동물이었다. 팔리움의 양털은 목자가 어깨 위에 들쳐 메고 생명의 물가로 인도하는 길 잃고 병들고 약한 양을 상징한다. 인류는 광야에서 헤매는 길 잃은 양이다. 주님께서는 이를 방관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나아가는 모든 여정에서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길 잃은 양을 찾으시기 위해 한걸음에 내달으셨다. 그리스도의 후계자인 교황과 주교는 주님처럼 사람들을 광야에서부터 생명의 장으로, 성자와 나누는 친교로,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는 한 분께로 이끌어야 한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4 이하) 하신 주님처럼 목자들은 기꺼이 그리스도의 멍에를 어깨에 진다.성경 속 이스라엘 민족은 1년에 한 번 양털을 깎았다. 이때 유다인들은 양들을 함께 돌보았던 모든 사람을 초대해 며칠 동안 먹고 즐겼다. 이에 가톨릭교회도 해마다 성녀 아녜스 축일인 1월 21일 교황이 어린 양 두 마리를 축복한다. 교황이 축복한 이 어린 양의 털은 교황이 신임 대주교에게 걸어주는 팔리움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이 양들은 로마 근교 트라피스트회 수도자들이 기른다. 이 양들은 1884년부터 교황에게 축복을 받기 전날 밤 로마 시내에 있는 나자렛 성가정 수녀회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깨끗이 씻겨 미사에 참여한다. 한 마리는 흰색 모포에, 다른 한 마리는 붉은색 모포에 감싸인다. 붉은색은 아녜스 성녀의 순교를 상징하고, 흰색은 성녀의 동정을 드러낸다. 양들은 같은 색의 화관도 쓴다. 이 양들은 먼저 성당 안 아녜스 성녀의 성해가 모셔진 제대에서 축복을 받는다. 그런 다음 어린양들은 바티칸으로 옮겨져 교황궁 우르바노 8세 교황 경당에서 교황에게 다시 축복을 받는다. 팔리움을 만드는 과정도 흥미롭다. 교황의 축복을 받은 어린 양 두 마리는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넘겨받아 성주간이 다가오면 양털을 깎고, 팔리움 제작에 들어간다. 수녀들은 털이 깎인 어린양을 성주간에 잡아서 주님 부활 대축일 축제 때에 사용한다. 어린 양의 털로만 짜인 대주교의 팔리움과 달리 교황의 팔리움에는 어린양 털뿐 아니라 어른 양털도 함께 사용한다. 이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당부하신 예수님 말씀(요한 21,18)을 상기시킨다.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2.10.26
![[제주교구 사목교서] 주님의 뜻을 찾아가는 소공동체](//cpbc.co.kr/CMS/newspaper/2022/12/rc/837289_1.2_titleImage_1.jpg)
[제주교구 사목교서] 주님의 뜻을 찾아가는 소공동체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시노드 여정을 이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식별의 단계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시노드의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새로움’과 ‘친교 공동체의 재발견’을 기치로 하여 쇄신과 변화의 길목에 서 있기에, 과거의 방식으로는 이를 수용하고 감당하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식별’이라는 단어 자체가 신자들에게 아직 생소하고 그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고충을 저 역시 함께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식별’의 의미를 제주교구의 현실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가는 소공동체’의 모습으로 전달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바람직하리라 여깁니다. 주님의 뜻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주님의 뜻의 본질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뺀다면, 주님의 뜻을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 하느님께 드린 예수님의 ‘네!’라는 순명이 우리에게도 ‘네!’라는 사랑의 응답을 재촉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매일 청하는 은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것을 청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몸소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뜻은 신앙생활의 양식이요 영혼의 호흡이기에, 신앙인에게는 매일을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주님의 뜻을 찾고 응답하는 매일의 일상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여, 천국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따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구원 선포의 삶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 땅에서 증거 하는 일입니다. 시노드는 하느님 백성 모두가 같은 신앙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사명을 실천하면서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이러한 여정 속에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는 식별의 과정을 새롭게 경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에 저는 우리가 매일의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을 드립니다. 1. 늘 기도하는 공동체가 됩시다. 시노드 여정에서 함께 걸어가는 우리는 주님께서 섭리 안에 마련하신 은총을 청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여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기도의 힘으로 무장하는 것이 식별의 훈련을 위한 기초입니다. 2. 성경을 가까이에 두고 자주 읽읍시다.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찬례와 함께 새로운 전례에 맛 들이는 가운데, 늘 새롭게 깨닫고 깨어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3. 개인이든 공동체든 모든 일에 앞서 상호 경청과 존중 가운데, 영적인 식별을 하도록 합시다. 이러한 식별을 통해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제주지역의 복음 선포의 사명을 충실히 살아갈 때, 하느님 백성인 우리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 뜻을 실천하는 증언자가 될 것입니다.cpbc2022.12.14
![[전주교구 사목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cpbc.co.kr/CMS/newspaper/2022/12/rc/837287_1.2_titleImage_1.jpg)
[전주교구 사목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 1. 우리 교구의 사목 방향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 교구는 지난 2017년 교구설정 80주년을 맞이한 해를 기점으로, 다가오는 100주년을 뜻깊게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복음화에 매진하기로 하였습니다. 다가오는 2023년에는 교회 생활의 마지막 요소인 ‘사랑의 실천’에 마음을 모읍시다. 2.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거듭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징벌과 파멸보다는 끊임없이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었습니다. ‘성찬례’에서 우리는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2항)을 체험하였습니다. ‘기도’ 안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3.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 이웃에게 마음이 열릴 때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해서 살며 또 그분과 함께 다른 사람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4. ‘사랑의 실천’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증거함으로써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을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사랑의 실천’에 충실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 긴급한 요구에 무조건적인 응답입니다. 둘째, 봉사자의 양성입니다. 셋째, 사랑의 실천은 어떤 수단이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넷째, 이렇게 온전히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자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6. 우리 신앙 선조들은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당시 엄격한 신분제도 속에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박해 시대에 자신의 것을 더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 선조들의 훌륭한 모범을 본받아 우리도 사랑의 실천에 마음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7. 몇 가지 구체적인 사항을 제안합니다. 첫째, 주일미사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날마다 일상 기도를 꼭 바칩시다. 둘째, 본당과 단체 및 교회기관은 사랑의 실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함께 배우는 자리를 마련합시다. 셋째, 본당은 사회복지분과를 활성화하여 관할구역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적극 찾아 나섭시다. 넷째, 지구나 본당은 관할구역 안에 있는 교회의 사회복지기관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집시다. 다섯째, 모든 교우가 적어도 한 개 이상 후원회에 가입하여 교회의 사회복지에 기여합시다. 여섯째, 일 년에 적어도 한 번 교구의 성지를 순례하여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그 훌륭한 신앙을 본받읍시다. 일곱째,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밤 9시 주모경 바치기’ 운동을 앞으로도 지속합시다. 마지막으로, 지구온난화를 막고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교구의 지침에 따라 함께 기도하고 행동합시다.cpbc2022.12.14

이탈리아 작가 루포, 국내 첫 개인전 ‘인류세’ 개최사회적 문제 조명해온 피에트로 루포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인류·자연의 관계산업 활동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 표현서울 다울랭 갤러리, 2월 18일까지 루포, Anthropocene 4, 2022. 이탈리아 작가 피에트로 루포(Pietro Ruffo)의 국내 첫 개인전 ‘인류세, Anthropocene’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다울랭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낯선 작가일 수 있지만, 루포는 국제무대에서 이민자, 유럽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잔해, 중동 지역의 정치·종교 분쟁 등 현시대를 관통하는 사회 문제들을 조명하는 작품 활동을 펼쳐왔고, 더불어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와도 협업하며 대중 인기도 얻어왔다.이번 전시 ‘인류세, Anthropocene’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인류와 자연 간의 관계 및 인간의 산업 활동이 기후에 미치는 유해한 영향을 표현했다. ‘인류세(人類世)’는 인류로 인해 빚어진 새로운 지질 시대를 칭하는 용어로, 인간이 초래한 환경적 변화가 지구에 돌이킬 수 없는 압도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다는 특징을 지닌다.다소 무거운 주제와 달리 그의 작품들은 획기적이고 신선하다. 직사각형 캔버스 위에 자리하고 있지만, 평면 회화는 아니다. 마치 곤충박제 표본처럼 입체적이며, 얼핏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류와 자연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백 그라운드가 세계 지도나 울창한 원시림을 그렸다면 컷아웃(Cut-Out) 기법으로 정교하게 오려낸 부분은 이집트 문명, 주요 건축물 등 주로 인류가 만들어낸 모습으로, 높이감 있게 핀셋으로 고정해 전체적으로 하나의 화폭을 완성한다. 전근대 거주 지역과 농경사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흔적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선사시대 이후 식량, 보금자리, 생존을 위한 인간의 투쟁과 기후의 연관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낡은 노랑, 갈색의 파편들이 강렬한 파랑, 선명한 보라색 줄기를 만나는 모습은 인간의 개입으로 급변하는 자연계를 상징한다.특히, 여러 작품에서 ‘두개골 형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니타스(허무주의)의 상징이기도 한 해골은 개인의 죽음을 넘어 인류의 멸종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우리의 이기심은 자연을 인간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게 하였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인류의 종말을 야기하지만, 결단코 지구의 종말을 초래할 만큼 강력하지는 않다”고 말한다.남다른 철학이 있는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 바티칸 도서관을 비롯해 브라질 아르테 컨템포러리 박물관, 중국 항저우시 저장 미술관, 미국 워싱턴DC 힐리 어 IA&A 미술센터, 이탈리아 국립 현대 미술관 등에서 소개되었고, 바티칸 박물관, 베를린 도이치뱅크 컬렉션, 루치아노 베네통 컬렉션을 비롯해 여러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허영엽(서울대교구 사목국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원장) 신부는 “피에트로 루포의 작품은 성경의 모든 진리와도 깊이 닿아 있다”며 “그래서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바티칸 도서관에서 개최된 전시회를 직접 관람하시며 그에게 따듯한 격려를 해주셨다”고 전했다.피에트로 루포(1978~ )는 로마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이후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의 이탈리아 고등연구원에서 연구 펠로우십을 시작했다. 2019년 프레미오 카이로 상을, 2010년에는 프레미오 뉴욕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회는 2월 18일까지 갤러리 정기 휴일인 매주 일요일과 월요일을 제외하고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문의 : 02.797.2329, 다울랭 갤러리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cpbc2022.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