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완성, 곧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기준은 그리스도[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0.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프란치스코에게는 복음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더 나아가서는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술탄에게 성경 내용을 설교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안녕과 권리를 깊이 존중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참된 자유는 요원한 그 무엇이 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을 위해 좋은 것 전체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것입니다. 공동선이란 모든 사람에게 존중심을 갖고 가장 불행하고 비천한 이들의 필요에 효과적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생명(삶)은 나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나’가 생명(생명 전체)에 관련된 것이다. 이에 관해 일리아 델리오(Ilia Delio, OSF) 수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원자로 전락시켜 버리고 제도 교회 안에 가두어 버린다면, 그리스도는 문화와 종교의 다양성을 지닌 이 복잡한 세상에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되어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교 정신도 그렇거니와 구원 자체도 개인이나 개별적인 문제가 절대 아니다. 토마스 머튼은 구원이라는 것이 개인(individual)으로부터 인격(person)을 구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다르게는 사랑의 경험을 통해 개인을 인격체(personhood)로 이끌어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느님 안에 살아 있는 인격체(human person)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 혹은 누구인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과 자신, 다른 이들, 그리고 세상과 관계 안에서 누구인가에 기초를 둔 것이다.” 15.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대안적 삶 제3의 길① 삶의 전적인 기준이자 삶 전체가 된 복음!프란치스코에게 있어 복음이 어떤 의미였었는지를 엿보고자 한다면 중세에 있어 성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당시에는 복음이라는 것이 과학적, 신학적 지식을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그때에는 대학은 물론이고 초등학교에서조차도 성경을 기본 교재로 사용하여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데까지 사용했었다. 성경 안에 모든 사실과 질문 가능한 것들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고 생각했었다. 이 때문에 성경에 대한 신비적이고도 경외의 분위기가 생겨나 평신도들은 성경을 접하기 힘들었다.프란치스코 역시도 평신도였으므로 성경을 접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비록 중세 교회가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어도 성경 사용을 제한하고 있었다. 특히 발도파나 알비파 이단 그룹들 때문에 이런 제한은 강화되었다. 그리고 비록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교회가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필사본 성경의 엄청난 가격 때문에 극소수의 평신도들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언어적인 제한 때문에도 평신도들이 성경을 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프란치스코가 성경의 내용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에서의 공부와 예술 작품들, 그리고 전례를 통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는 참으로 실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성경을 그저 지적으로 알고자 하지 않았고 오히려 매일의 삶에서 성경의 메시지를 적용해갔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 번 듣거나 접한 성경 내용을 마치 아들 예수에 관한 일들을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한 동정녀처럼 새기고 또 새겼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실제 삶의 사건 하나하나를 성경 내용들, 특히 복음서의 내용들과 연결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는 대부분의 성경 내용을 꿰차고 있었으며 이렇게 간직한 성경의 모든 내용을 우리 삶에 구체화하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결하였다고 한다.이는 그가 우리 삶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육화하시어 삶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겪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경을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성경의 내용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그의 삶의 기준점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 번은 그가 병중에 있을 때 성경을 읽어주겠다던 어떤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묵상을 하고 마음에 되새겨 보기에 충분할 만큼 이미 성경의 많은 부분을 나의 것으로 삼았습니다. 아들이여, 나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비참하게 달리신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프란치스코에게는 복음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더 나아가서는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에”(요한 14,6)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황들 하나하나에 기준이 되는 분이셨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삶의 완성, 즉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기준은 바로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지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살 것을 요청했던 것은 우리 교회의 편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듯한 인상을 주는 편협한 의미의 선교와는 전적으로 달리 사람들에게 참다운 행복의 현실을 알려주고 이를 살아가게끔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체험한 하느님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삶의 완성, 곧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기준은 바로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cpbc2021.10.06

아름다운 성미술로 꾸며진 소박한 공소[공소 公所] (8)춘천교구 스무숲본당 실레마을공소 춘천교구 스무숲본당 실레마을공소는 고 장익 주교의 관심으로 다시 고쳐져 아름다운 외경과 소성당을 갖춘 공소가 되었다. 아름다운 성미술로 꾸며진 소박한 공소 춘천교구 스무숲본당 실레마을공소는 46번 국도를 타고 강촌에서 춘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금병의숙길 10 현지에 자리한 실레마을공소의 옛 이름은 신남공소이다. 동네 지형에서 따온 마을 이름 조선 시대 춘천의 남쪽을 ‘남부내면(南府內面)’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신남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39년 지금의 동내면과 통합돼 두 면(面)의 앞글자를 따서 ‘신동면’이 됐다. 신동면 증리(甑里)는 「소낙비」 「동백꽃」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의 고향이다. 증리는 한자음 그대로 마을 모양이 마치 산에 묻힌 옴팍한 시루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실레’는 시루를 부르는 이 지역 사투리이다. 2004년 12월 신남역이 ‘김유정역’으로 바뀌면서 신남 증리 동네 이름도 ‘실레마을’로 부르고 있다. 실레마을은 경춘선 김유정역뿐 아니라 동서로 46번 국도가, 남북으로 70번 지방도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마을은 삼악산과 금병산, 드름산, 사자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인근 의암리에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 마을 동쪽에는 사계절 모든 풍광이 비단 병풍처럼 아름다운 ‘금병산’(錦屛山)이 있다. 해발 651.6m인 금병산은 임진왜란 때 강원도 조방장(助防將) 원호 장군이 진을 친 산이라 해서 ‘진병산(陳兵山)’으로도 불린다. 오늘날 실레마을은 김유정 문학촌으로 단장돼 있다. 마을 이름이 바뀌었으니 공소도 당연히 새 이름을 갖게 됐다. ‘실레마을공소’이다. 1960년 7월 7일에 공소가 설립됐다. 처음에는 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 성당 관할이었다가 1969년부터 효자동본당에 속했으며, 2002년 9월부터 스무숲본당으로 편입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때 공소 신자 수가 300여 명에 이를 때가 있었다고 한다. 6ㆍ25 전쟁 후 성당을 통해 구호물자가 한창 보급될 때였다. 지금은 지역 신자가 3명뿐이라 한다. 공소지기 주교 실레마을공소는 제6대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ㆍ제7대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곳이다. 두 분 주교 모두 교구장 퇴임 후 실레마을 공소 주교관에서 거주했고, 또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레마을공소는 2009년 다시 고쳐져 지금에 이른다. 공소 안팎은 아름다운 성미술품으로 꾸며졌다. 공소 입구 앞마당에는 김미영(마리비타,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서울수녀원) 수녀의 ‘성모자상’이, 공소 안에는 김겸순(테레시타, 노틀담수녀회) 수녀의 ‘제대’ㆍ‘독경대’ㆍ‘감실’ㆍ‘십자가 ’ㆍ‘십자가의 길’, 김형주(이멜다) 화백의 '제대 십자가' 와 '성모자화'가 설치돼 있다. 공소 내·외벽은 사계절 모든 자연의 빛과 각양각색의 인품을 모두 흠뻑 머금을 수 있도록 흰색 페인트로 마감돼 있다. 공소 안 제단과 회중석, 바닥은 안정감을 주는 원목으로 꾸며져 있다. 성미술을 통해 성경의 의미를 더욱 널리 전해지기를 원했던 장익 주교의 평소 뜻이 담긴 공간이다. 장익 주교는 2010년 퇴임 후 2020년 8월 5일 선종할 때까지 실레마을공소 주교관에서 살았다. 장 주교는 이곳에서 기도와 묵상, 독서를 하고, 텃밭을 가꾸며 소소한 일상을 살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크나큰 주님의 은총으로 여겼다. 장 주교는 생전 “잘 먹고 잘 놀면서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조용한 걸 좋아해서 공소생활이 딱 맞아요”라고 행복해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유언도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을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 116,12-13)라는 찬가였다. 장익 주교의 후임인 김운회 주교도 2020년 12월 교구장 퇴임 후 실레마을공소 주교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운회 주교는 ‘충실한 공소지기’이다. 매일 아침 7시면 공소 미사를 주례한다. 겨울이면 주교관 기도 방에서 매일 같은 시각 미사를 봉헌한다. 지역 내 신자가 3명뿐이지만 신기하게도 미사 참여자는 10여 명 안팎이다. 주변 신자들이 새벽같이 달려오고 있다. 김 주교는 또 공소를 찾는 신자나 여행자들이 연락하면 공소 문도 열어주고 안내도 한다. 텃밭도 가꾸고 과실수도 심어 키우고 있다. 김 주교는 “산을 좋아해서 평소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을 항상 부러워했는데 지금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며 “둘레길을 산책하면서 묵상하고 공소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행복하다”고 만족해했다. 김 주교는 “사목 일선에서 물러난 사목자들이 기력이 다하기 전까지 공소에서 한 10여 년간 신자들과 함께 살았으면 참 좋겠다”라며 공소살이를 추천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2023.02.22

공의회 첫 회기 중 마지막 회칙 「지상의 평화」 발표[부온 프란조!] 21. 성 요한 23세 교황 ④ (제261대, 1881. 11. 25~1963. 6. 3) 공의회 첫 회기의 시작은, 개막식 다음 날인 1962년 10월 12일이었습니다. 교황님, 유전적 가족 내력으로 위암 치료가 불가하다는 의사의 판정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초인적 정신력으로 공의회를 통해 교회가 현대 사회에 다가가고, 그 세상 안에 있기를, 갈라진 형제와 타 종교와의 대화와 일치를, 하느님 말씀인 성경의 영감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공의회 발표 후, “난 지금 죽어도 괜찮아요”라고까지 말씀하셨다니요! 그만큼 공의회가 절실하셨던 것이지요. 전 세계 교부와 신학자 2000여 명 참석자, 공의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2000명이 넘는 교부들과 신학자들을 비롯한 모든 참가자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더군요. 공의회에 전문가(Perito)로 참석한 32세의 젊은 독일 신학 교수였던 라칭거(베네딕토 16세 교황)는 “우리는 공의회에 참석하며 마치 새로운 성령(Pentecoste)께서 오시는 듯 가슴이 벅찼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또 다른 교부는 “제가 대성전의 문을 지날 때 마치 천국을 향해 들어가는 듯했습니다. 저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밀라노대교구 교구장이었던 마르티니 추기경은 “열린 창문으로 느껴지는 정말 맑은 공기와 드디어 교회가 다른 현실들과 마주 설 능력이 있어 보였습니다“라고 공의회 첫날에 대해 훗날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의 이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사도들과 함께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였다.”(사도 15,6) 당시 언론들도 “공의회가 뭔가요?” 하고 어리둥절하였다는데 교황님도 아셨나요? 그 질문에 어떤 이는 “몰라요. 여는 거랍니다. 그냥 활짝 연대요!”라고 대꾸하며, 우왕좌왕하였다는 뒷얘기도 있었지요. 공의회는 라틴어로 통일해 진행되었으니 하루하루의 공의회 진행 사항을 정리해 활자화시켜야 할 언론들은 힘들었을 것이 당연했지요. 공의회 교부로 참석했던 전 인천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1926∼2020)는 “사목에 관한 실제적 안건과 함께 우리 주교들은 머리를 맞대고 평화롭게 회의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로마 언론들은 주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서로 분쟁을 일으켰다고 기사화한 걸 보고 참으로 황당했습니다”라고 전하면서 “물론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룹으로 회의하며 한 분 한 분 정직하게 배려하는 모습에서 전 세계에서 모인 참가자들과의 평화로운 회의 진행에 희망을 품었다”고 하였습니다. 교황님, 한국 교회에서 30대 중반에 참가했던 저의 교구장이셨던 나 주교님의 에피소드 하나 알려드릴까요? 나 주교님 옆에는 나이 드신 수염이 긴 프랑스 주교님이 앉아 계셨답니다. 오전 첫 시간이 끝나면 화장실과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들어오는 게 오전 회의의 일상으로 자리 잡아 갈 무렵, 어느 날 일이 터진 것입니다. “어이, 젊은이! 제발 자리 좀 지키면 안 되겠나? 앉았다, 일어났다, 참 정신 사납군!” 하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기가 죽은 나 주교님이 바라본 프랑스 할아버지 주교님은 공의회 3년 내내 꼿꼿하게 자신의 자리를 흐트러짐 없이 지켰답니다. 아, 보석 같은 16개의 공의회 문헌이 이러한 교부들의 진정성 있는 참가 의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지요. 하느님 진리를 위해서 헌신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요한 23세 교황이 자신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 서명하고 있다. 이탈리아 rai-TV국영방송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평화를 바라는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편지공의회 첫 회기 중, 점점 심해지는 고통에 시달리는 교황님을 진료하러 급하게 달려온 전문의에게 그러셨다죠? “아, 박사님! 저는 박사님께 제 몸을 맡깁니다. 박사님은 제게 당신 영혼을 맡겨 주시면 어떨까요?”라고 하시며 고통 중에도 당신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으셨다는데 정말인가요? 그가 무신론자임을 아셨던 당신의 위트에 진료를 마치고 나온 의사는 펑펑 울었다고 그러더군요. 공의회 개막 다음 해, 첫 회기가 진행되던 1963년 봄부터 건강이 악화하기 시작했지만, 당신은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시기 불과 두 달 전인 4월 11일 성 목요일에 당신의 마지막 회칙인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를 발표하셨지요. 보통 회칙의 첫 시작은, 가톨릭교회 구성원인 주교단과 신자들을 호칭하는데, 여기서는 종교와 상관없이 지상의 평화를 바라는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셨지요. 당신은 이 회칙이 어디에 묵혀지는 걸 바라지 않으시고 정의와 사랑에 대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강력하게 말씀하셨죠. “평화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전임 교황 비오 12세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60년 전에 당신이 ‘평화, 평화, 평화’를 그렇게 외치셨는데, 60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은 평화롭지 못합니다. 당신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1963년 6월 3일 요한 23세 교황 선종아, 당신의 병세는 암 덩어리가 위를 뚫고 나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파파 부오노의 병세를 알게 된 수많은 신자가 광장을 메우기 시작했으며 눈물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 머리맡에 걸린 고향 소토 일 몬테의 사진을 바라보며, 당신 부모 형제들을 떠올리셨겠죠. 일찍이 당신 형제들을 바티칸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셨으며, 비오 10세 교황께서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가셨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당신도 사람들이 그렇게 기억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더는 일어나지 못하게 된 당신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들려오는 신자들의 기도에 감사의 축복을 보내시고는 옆에 있는 이들과 이별을 하셨습니다. 슬픔에 겨워 울고 있는 돈 로리스에게 “돈 로리스, 정말 고마웠네. 아, 소토 일 몬테가 그립군”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에 돈 로리스는 “교황 성하, 꼭 제가 그곳에 가서 살겠습니다” 하고 답변했던 것 기억하시지요? 후에 그 약속대로 돈 로리스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그날 당신이 하느님의 집으로 가던 그때 첫 기적이 일어났다고요. 1963년 6월 3일 저녁 8시 30분께, 하느님을 믿지 않고 교회를 미워하던 밀라노의 한 대학생이 집으로 가던 길에 온 시민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파파의 마지막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며 “뭐, 돌아가시면 다른 교황이 나오겠지” 하고 말하였답니다. 집으로 다다른 대학생은 집에서 들리던 어머니의 통곡소리와 함께 동네 친구가 달려와 자신을 부둥켜안으며 “돌아가셨어, 파파가 돌아가셨다고” 하고 말하며 엉엉 우는 그 친구의 말에 그 대학생도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며, ‘이미 파파는 내 마음에 자리하고 계셨음을, 앞으로 내가 어떻게 세상을 향해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음을’ 고백하는 편지를 교황청에 보냄으로써 그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교황님, 제가 신문지상에 당신을 언급한다는 것이 얼마나 외람된 일인지 송구스럽습니다. 당신과 만나면서 반성도 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사고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공의회 정신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하느님 백성인 저 자신부터 희망을 품고 성숙해지겠습니다. 당신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제2차 바티칸 에큐메니칼 공의회이니, 오늘의 레시피는 유다-로마식 소고기 음식인 스트라코토(Stracotto)이다. 기원전 161년 무렵 로마에 유다인 공동체가 있었다는 기록이 구약성경의 마카베오기(1마카 12,16; 14,18 참조)에 나올 정도로 로마의 유다인 공동체는 유럽 안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의 유다인 공동체는 1만 500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로마시에서도 매력적인 곳에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고 있다. 레시피 : 소고기 스트라코토(Stracotto di manzo)▲준비물 : 소고기 목심 400g, 양파 1개, 샐러리 한 줄기, 당근 1개, 토마토 2개(씨를 빼고 썰어놓은), 적포도주, 소금, 후추. →큰 볼에 양파, 당근, 샐러리를 깍두기 모양으로 썰어 담는다. 세 가지 채소에 쇠고기를 넣고 버무린 다음 고기가 잠길 정도로 포도주를 붓는다. 뚜껑을 덮고 냉장고에 6~7시간 마리네이드(조리 전에 식재료를 술이나 산, 향신료 등에 재우는 것 또는 그 액체)한다. 고기를 꺼내어 약간 약한 불에 올리브유를 두른 깊은 팬에 고기를 넣고 겉면이 바삭해질 때까지 굽는다. →거즈에 천연 향신료 로즈마리와 통후추를 같이 넣고 새지 않게 묶어둔다. →마리네이드한 채소를 포도주에서 건져 고기가 구워지는 팬에 소금을 넣고 같이 익힌다. →남은 포도주와 거즈에 싼 로즈마리, 후추와 토마토를 넣고 약한 불에 대략 4~5시간 고기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익힌다. 고기를 꺼내 접시에 담은 다음, 팬에 남은 채소 소스를 갈거나 그대로 고기 위에 얹어 낸다. ▲모니카의 팁 : 유다인들의 휴일은 토요일이다. 휴일에 먹는 스트라코토는 천천히 오랜 시간을 익히는 섬세한 맛의 유다인 요리이다. 물론 좀 다른 조리법의 스트라코토도 이탈리아 북부 쪽에는 있지만, 돼지고기를 안 먹는 유다인들의 소고기 스트라코토는 아직도 로마시에 있는 그들의 게토 주변의 유다인 식당에서 인기 높은 메인 요리이다. 미리 만들어 놓고, 그 다음 날에 먹으면 더 맛있다고 한다. 전형적인 슬로우 푸드이다. 고영심(모니카) 디 모니카 대표cpbc2022.10.26
![[궁금해요!] 식사 전ㆍ후 기도 꼭 해야 하나요?](//cpbc.co.kr/CMS/newspaper/2022/06/rc/826196_1.2_titleImage_1.jpg)
[궁금해요!] 식사 전ㆍ후 기도 꼭 해야 하나요?일용할 양식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의미 담아 식사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데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CNS 자료사진 Q. 식사 전ㆍ후 기도는 왜 하나요? A.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신자들은 식사 전 항상 기도합니다. 급한 마음에 때로는 밥 한술을 뜨고 나서 ‘아차’ 하면서 기도를 바치기도 하지요. 맛있는 음식을 잘 먹고 나면 식사 후 기도로 식사를 마무리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본적 식생활에도 기도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식사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데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식생활 자체는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식사 때 기도하는 모습은 성경에도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들기 전 늘 찬미를 드리셨습니다.(마태 26,26) 또 갈릴래아 호수에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일으키실 때에도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먹을 것을 나눠주셨습니다.(요한 6,11) 성경 속 예수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식사 전에는 주님께서 주신 음식에 대한 축복을 청하고 감사기도를 바칩니다. 더불어 주님께서 주신 양식으로 먹을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에게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식사 후 기도 중에는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란 구절이 있습니다. 식사 때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머무르는 연옥(煉獄) 영혼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청하는 것입니다. ‘식사 후 기도를 바치면 영혼 한 명을 구원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일 바치는 기도에도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 끼 식사에도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자신의 신앙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834항) “기도하고 일하여라.”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그대들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일하여라.” 우리가 일을 하였어도, 양식은 여전히 우리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아버지께 양식을 청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드리는 식사 전 기도의 의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698항) 교회 전통은 지속적인 기도를 함양시켜 주는 주기적인 기도를 신자들에게 권한다. 어떤 기도들은 날마다 바치는데, 곧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식사 전후의 기도, 성무일도가 그러하다. cpbc2022.06.16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명작 전시… 다양한 성화 함께 선보여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 기념전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국립중앙박물관, 내년 3월 1일까지 The Adoration of the Magi(동방박사의 경배), 베로네세 올해 우리나라와 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빈미술사박물관과 함께 기획된 특별전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이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합스부르크는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한 1273년부터 카를 1세의 왕정이 몰락한 1918년까지 600여 년간 유럽의 중심에 있던 왕가로, 30년 전쟁·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제1차 세계대전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된다. 이들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남다른 철학을 바탕으로 작품을 수집했고, 루벤스·벨라스케스·반 다이크와 같은 걸출한 화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는 가톨릭이 유럽 전역에 확산됐던 시기와도 맞닿아 있는 만큼 가톨릭 신자들에게 더욱 반가운 작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주님 성탄 대축일에 더욱 빛나는 작품들- The Holy Family(성가정): 요셉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간의 애정 어린 관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다. 17세기 중엽 이탈리아 출신 안젤로 솔리메나의 작품으로, 원형의 틀 안에 인물을 고정해 세 사람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 The Adoration of the Magi(동방박사의 경배):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앉은 아기 예수가 경의를 표하는 나이 든 왕을 축복하고, 그 오른쪽에 무어인들의 왕이 허리를 숙이고 있다. 그 오른쪽에는 화려한 상자를 든 세 번째 왕이 보이고, 이들이 타고 온 말과 이국적인 낙타도 그려져 있다. 요셉은 성모 마리아 뒤에서 이 만남의 순간을 바라보고 있다. - The Vergin and Child in a Landscape(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성경의 이야기와 풍경화를 함께 그리던 초기 풍경화 작업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둘러싼 수풀과 꽃은 꽃 정물에 능하던 얀 브뤼헐 2세의 화법으로, 원경을 옅은 색으로 표현해 선명하게 그린 전경의 성 모자와 대비를 이룬다.- Rest on the Flight into Egypt(이집트로 피난 중 휴식): 16세기 화가들은 성가족이 길가에서 쉬어가는 순간을 즐겨 묘사했다. 동판에 유화로 그린 이 작품은 이집트로 피신 도중 휴식을 취하는 요셉과 마리아, 아기 예수를 그렸다. 그들의 머리 위를 맴도는 두 명의 천사는 이 여정이 신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밖에 페루지노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참회하는 예로니모 성인을 그린 작품과, 고대 로마 황제의 근위대장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돕다 순교한 세바스티아노 성인의 성상도 공개됐다. 또 16세기 포르투갈에서 유행했던 원형 접시에는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근대에 접어들기 전까지 유럽의 성당 첨탑에 많이 설치됐던 ‘십자가 모양의 해시계’도 전시되고 있다. 한편, 레오 10세 교황은 라파엘로에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삶과 기적의 장면을 담은 10점의 태피스트리 연작 디자인을 맡겼다. 이 태피스트리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벽면의 하단을 덮도록 설계되었고, 실제로 7점이 설치됐다. 높이만 5m에 달하는 이들 태피스트리 가운데 ‘The Miraculous Draught of Fishes(기적의 물고기잡이)’와 ‘St. Paul Preaching in Athens(아테네에서 설교하는 바오로 사도)’도 이번 전시에서 감상할 수 있다.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전은 내년 3월 1일까지 이어진다. 문의 02-2077-9000, 국립중앙박물관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cpbc2022.12.21
![[전문] 대전교구장 김종수 주교 2023년 부활 메시지](//cpbc.co.kr/CMS/news/2021/07/rc/806737_1.4_titleImage_1.jpg)
[전문] 대전교구장 김종수 주교 2023년 부활 메시지 +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알렐루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떠올립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여러 가지 기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 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 곧 당신이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고 선언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능력이 아주 뛰어난 분이시니, 세상의 지도자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붙들려 가시자 제자들은 흩어져 도망갔습니다.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신비는 사람들의 이러한 기대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모든 사람이 경탄할 만한 큰 능력을 떨치며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죄 없이 의로우신 그분이 우리 죄를 안고 죽으심으로써, 그 죽음 안에서 우리의 죄 값이 치러지고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는 신비였습니다. 이렇게 의인이 죄인이 되어 죄인을 의롭게 해 주신 이 사건을 교환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의로움과 우리의 죄가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이 신비를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몸에 십자가의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만난 예수님은 죽음의 상처를 당신 몸에 그대로 지니고 계셨고,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 마음속에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를 위해 수난하고 죽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부활하시어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립시다. 이 구원의 신비는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하고 엘리사벳을 만나 불렀던 노래(루카 1,46-55) 역시 아브라함 때부터 이어오는 하느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최고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희생제물로 삼으시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과 다시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자비의 역사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비롭게 살아갈 때 주님 안에 살고 부활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봅시다. 오늘날 물질문명이 넘치게 발전해서 쓰고 버린 쓰레기가 심각한 환경오염이 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음식 쓰레기가 넘쳐나는데, 다른 쪽에는 음식은 물론 깨끗한 물조차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점차 더 병들어 가는 생태계는 자연재해의 규모도 더 크게 만들고, 그 피해는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이 훨씬 더 크게 받습니다.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역의 대규모 지진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많은 희생이 발생하고 있는 지역도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지역들을 위해, 그리고 평소 가까운 이웃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기도로 함께해 주신 형제자매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들 모두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우리와 한 형제입니다. 계속 필요한 지원과 기도에 지치지 말고 주님의 자비를 실천하면서 부활의 은총과 기쁨을 더 깊이 누리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는 우리에게 맡겨진 자연 생태계를 사랑으로 잘 보존하도록 촉구합니다. 이미 여러 본당과 시설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사제 성소를 위해서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제는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의 은총을 세상에 전하도록 축성된 사람 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많은 젊은이들이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사제들이 거룩한 직무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같은 마음으로 수도 성소와 선교사 성소를 기억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는 사람보다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가르 치십니다. 구원의 신비를 깊이 체험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라고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태초에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기에 하느님처럼 자비롭게 사는 소질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 부활을 축하하는 인사를 드리며 주님의 강복을 전합니다. 2023년 4월 9일 예수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박민규2023.04.05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친밀히 만나는 시간[가톨릭 영상 교리] (40) 성체조배 성체조배는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가장 친밀하게 만나는 때이며, 성체조배를 통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살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게 하는 비결이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가 성시간 전례에 참여한 신자들에게 성체 강복을 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미사가 끝난 뒤 남겨둔 거룩한 빵의 형상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은 그 형상이 남아 있는 동안 계속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 안에서만이 아니라 미사 밖에서도 성체 앞에서 기도드림으로써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미사 밖에서 성체 앞에 기도드리는 것으로는 성체조배, 성체 강복, 성체 거동, 성체 현시, 성체 대회 등이 있습니다. 초세기 신자들은 영성체를 위하여 엄격한 규정들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체에 대한 공경이 자연스레 생겨났습니다. 13세기부터 성체조배를 통한 성체 공경 신심이 교회 안에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성체조배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현존하심을 믿으며, 깊은 침묵 중에 그분과 마주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감실 안에 계시며 우리를 부르고, 또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비추고 가르치며,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해주시고 힘을 주시고 위로해 주시며 격려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성체조배는 내 전 존재가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일대일로 가장 친밀하게 만나는 때입니다. 성체조배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가만히 볼 수 있고, 그런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 주시는 예수님의 눈길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가장 깊고도 내밀한 고민을 낱낱이 그분과 나눌 수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살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게 하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성체조배는 나의 모든 시간과 일, 나의 모든 생각과 관계를 예수님 안에서 바로 잡게 하는 통로이며 힘입니다. 그러면 성체조배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미사 전에 성체조배를 하면 개인적으로 미사를 준비하는 기도가 될 수 있고, 미사 후에 하면 예수님과 더욱 깊고 지속적인 일치를 갖게 됩니다. 성체조배는 어떤 정해진 규정대로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 방법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체조배를 위해 성당 또는 소성당으로 갈 때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마음을 모읍니다. 둘째, 성당이나 소성당에 들어갈 때 성수를 찍고 십자 성호를 그으면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바칩니다.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셋째, 자리에 앉기 전에 주님께서 성체 안에 참으로 현존하여 계심을 받아들이면서 성체가 모셔진 곳을 향하여 깊은 절을 합니다. 넷째, 기도를 잘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깊은 호흡을 하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긴장을 풉니다. 다섯째, 주님의 현존을 의식합니다. 주님께 기도하거나 주님이 앞에 있다고 상상하거나 각자 자기에게 맞는 방법으로 주님의 현존을 의식합니다. 여섯째, 주님과 대화합니다. 주님께 하고 싶은 말씀을 먼저 드리고, 침묵 안에서 주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을 조용히 기다립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을 움직이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에 머무르면서 응답을 드리는 기도를 바쳐도 좋습니다. 일곱 번째, 되새김입니다. 성체조배 중에 있었던 내용을 되새겨 보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으면 그에 대해 감사드리고, 어떤 실천을 결심했으면 그에 필요한 은총도 청합니다. 마지막으로, 마침입니다. 성체 안에 계신 주님께 공손히 인사드리고 조배를 마칩니다.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는 성체조배 때 만났던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과 함께 살고자 노력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품에 바싹 기대어 그분의 끝없는 사랑을 느끼는 것은 분명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cpbc2023.02.01
![[서종빈 평화칼럼] 하느님의 시간](//cpbc.co.kr/CMS/newspaper/2023/01/rc/839505_1.1_titleImage_1.jpg)
[서종빈 평화칼럼] 하느님의 시간서종빈 대건 안드레아(보도국장) 가톨릭 신자들은 매년 연말과 연초 두 달여 만에 세 번의 새해를 맞는다. 전례력으로 첫 새해인 4주간의 대림 시기와 성탄을 지나 달력상 해가 바뀌는 두 번째 새해 1월 1일(양력설)을 맞았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새해는 22일 음력설(구정)로 이날은 연중 제3주일이며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다. 성경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일상의 거울이고 나침반이다. 그 말씀을 거행하고 성찰하고 전파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축복이다.세 번 맞는 새해에는 성찰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열망이 담겨 있다. 대림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새해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시간이다. 양력설과 음력설은 우리의 일상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삶과 도전을 설계하는 시간이다. 새해라는 시간이 되면 누구나 자신에게 되묻는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삶이 있고 시간은 주어졌는데 가야 할 길은 늘 고민이다.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초침과 분침, 시침대로 멈추지 않고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이는 정해 놓은 달력의 시간이다. 양(量)으로 계량되는 물리적인 시간 즉 크로노스(Chronos)이다. 질(質)로서 우리가 느끼는 상대적인 시간은 카이로스(Kairos)이다. 크로노스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객관적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 주관적 시간이다. 결국,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이를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늘 깨어 무언가를 준비한다. 과거가 흘러오는 곳도, 미래가 시작되는 곳도 ‘오늘’ 현재이다.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간을 나누고 의지와 상관없이 생성과 소멸하지만, 창조주 하느님은 생성도 소멸도 없고 과거도 미래도 없다. 그분의 시간은 오지도 가지도 않고 오직 영원한 현재로만 계신다. 그분에겐 ‘오늘’만 있다. 찰나도 영원이고 영원도 찰나이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시편 90,4) 시간을 창조한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이지만 피조물인 인간에게 영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녕 저희의 모든 날이 당신의 노여움으로 없어져 가니 저희의 세월을 한숨처럼 보냅니다.”(시편 90,9)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늘 공간과 함께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시간은 우리 앞에 언제나 열려 있는 지평의 표현”이지만 공간은 “제한된 현실(공간)을 살아가는 한계”라고 정의한다. 공간이 단절된 시간, 곧 순간의 한계 속에 고정된 세상이라면 공간은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 즉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반면 시간은 태초부터 영원히 흐르는 강물이다. 시간은 흐르면서 매 순간 맞는 공간의 한계를 넘어 진전의 과정을 거친다. “공간을 지배하고 공간을 밝혀주며 쉬지 않고 확장해 결코 퇴행할 수 없는 사슬을 이루도록 엮어준다.”(223항) 그래서 교황은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고 말한다.우리는 늘 바쁘게 산다. 이 일 저 일에 지쳐 있고 성과와 목표량에 치여 신음한다. 질병이 아닌 일이 때론 생존의 경계선에 있다. 2023년 세 번째 새해를 맞았다. 주님 앞에 결심하고 약속했지만 ‘작심삼일’, ‘작심한달’로 끝났다고 조급해 하거나 자학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기억은 살리되 매달리지 말고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워 떨 필요도 없다. 다시 한 번 희망을 품고 또 다짐하고 또 도전하자. 하느님의 시간은 늘 ‘오늘’이다. 오늘을 살아야 한다. 추락과 재기를 반복하며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 ‘오늘’을 주신 주님의 은총에 보답하는 길이다. cpbc2023.01.17

‘가난한 이들 위한 교회’ 몸소 실천한 프란치스코 교황3월 13일, 선출 10주년 맞은 프란치스코 교황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가난한 이들의 교황’, ‘예수님을 중심에 둔 교황’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실현하는 교황’. 가톨릭교회 역사상 최초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서 이름을 딴 프란치스코 교황을 수식하는 말이다. 오는 13일이면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도 어느새 10주년을 맞는다. 가난한 교회가 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임기 초부터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자”고 당부했다. 동시에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교황궁을 떠나 방문객이 머무는 ‘산타 마르타의 집’에 거처를 마련했고, 의복과 장식을 최소화했다. 그 뒤로 마치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처럼 간소하게 흰 수단만 착용해온 교황은 교회를 ‘야전병원’에 자주 빗댔다. 그러면서 “상처 입은 이들을 치유해 세상에 다시 나가도록 도와야 한다”고 꾸준히 강조해왔다. 2013년 7월 첫 사목 방문지로 난민의 무덤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최남단 람페두사 섬을 선택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120㎞가량 떨어진 람페두사 섬은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한 주요 밀항지로, 해마다 난민 수백 명이 물에 빠져 숨지는 곳이기도 하다. 교황은 이곳에서 난민에 대한 형제애를 강조하는 동시에 “경제의 세계화는 무관심의 세계화를 만들어냈다”고 비판했다. 교황은 이후에도 세계 어디를 가든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늘 함께했다. 교황은 2014년 방한 당시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세월호 참사 피해자 유가족들의 손을 잡았다. 가난과 코로나19 팬데믹·기후위기·자연재해로 고통받는 제3세계 국민과 원주민을 만나 위로를 전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인과 미얀마인ㆍ팔레스타인 등을 위한 사랑과 연대를 끊임없이 호소하고 있다. 교황은 제국주의 피해를 본 원주민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기도 했다. 2022년 캐나다를 방문한 교황은 그리스도인들이 열강들의 식민화 사고방식을 지지했던 방식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교황은 노숙인이 추위로 얼어 죽는 것이 더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시대를 개탄했고, 사제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먼저 찾아가라”고 거듭 촉구했다. 그러면서 “물질의 우상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며 가난과 나눔의 정신을 강조했다. 생일에 노숙인을 초대해 미사를 봉헌하고, 성 베드로 광장에 샤워장과 이발소를 설치했다. 교도소와 보육원ㆍ양로원을 방문해 가난과 소외, 무관심과 차별로 고통받는 이웃의 존재를 환기하기도 했다.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와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제정 2015년 자비의 특별 희년(2015년 12월 8일~2016년 11월 20일)을 선포한 것도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 자비를 실천하며 살기를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자비의 특별 희년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제정으로 이어졌다. 교황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장 작은 이들과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리스도 사랑의 훌륭한 징표가 되기를 바란다”며 2017년부터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했다. 교황은 매년 이날이면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교황청 문을 열어뒀다. 이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식사를 나눴다. 행사는 교황 자선소가 주관했다. 교황 자선소는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후 교황 뜻에 따라 바티칸 거리에서 노숙인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을 위한 진료소, 약국도 운영 중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중에도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교황은 코로나19 백신을 어려운 이웃 국가들과 나누고, 전쟁 지역에 긴급구호기금을 때마다 보냈다. 2018년 제주에 온 예멘 난민을 위해 교황청 자선기금 1만 유로를 제주교구에 보내기도 했다. 교황청 부속 기구였던 교황 자선소는 2022년 교황청 구조 개편에서 ‘애덕봉사부’로 승격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앞둔 2019년 11월 15일 교황청 내에 일주일 동안 문을 연 무료 진료소를 방문해 의료진을 격려하고 있다. OVS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 실천 저명한 예수회 신학자 알로이시우스 피어리어스 신부는 이러한 교황의 행적을 두고 ‘새로운 실천’이 아니라고 말했다. 단지 온전하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지시를 실행한 결과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피어리어스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다룬 저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에서 “교황은 복음이 요청하는 ‘복음적 가난’이 지닌 진복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경제적 가난’에 빠져 있지만 온전한 인간성 회복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본인이 야전병원이라 부르는 곳에 투신했다”며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이학주2023.03.10

하느님 마주한 그 자리가 ‘인간다움’ 회복하는 장소[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0. AI와 종교의 영역 “김 화백은 이제 인공지능과도 경쟁해야겠어!” “아, 그래도 손맛은 못 따라와요.” 화가인 조카에게 툭 던진 나의 말에 자신감이 묻어나는 말투로 화답해왔다. 그러면서 사람의 감성은 따라올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다시 물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성을 흉내 내기 어렵다 하더라도 대중이 그 손맛 감성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러자 조카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어느 시점에 손맛을 더욱 갈망할 겁니다.” AI에게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예술가의 오기와 투지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기계는 지금 인간을 훌쩍 넘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 우리가 잃어가는 인간다움과 생명에 대한 더욱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pixabay 제공 AI가 그림을 그린다. 사람이 온종일 그려도 그릴 수 없는 그림을 몇 초 만에 뚝딱 그려 낸다. 그것도 일반인의 눈엔 손 그림과 구분할 수 없게 말이다. 사고력이나 학습능력은 이미 인간을 넘어선 인공지능이 인간만의 고유영역이라고 믿었던 창의성까지 넘보고 있는 셈이다. 음악을 만들고 시와 소설을 쓰고 그림까지 그린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감성’마저도 더 이상 신비한 인간만의 현상이 아닌, 생화학적 반응의 일종으로 여길 것이라고 한다. 알고리즘에 의해 인간의 감정마저 해킹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서운 말이다. 하기야 이미 인간의 지성은 도난당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알파고보다 더 빨리 연산하고 정답을 찾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는 창의성과 감성의 영역까지 점령을 시도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종교의 영역은? 얼마 전만 해도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이 성직자일 것이라 확신했었다. 하지만 벌써 독일에서 5개 국어로 유창하게 설교를 하는 로봇 목사가 나타났다고 한다. 눈썹과 입이 움직이면서 감정을 표현했고, 성경 구절을 암송하면 잔잔한 배경음악까지 흘러나온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불자들과 시선을 맞추고 합창을 하며 반야심경을 설법하는 인공지능 승려가 등장했다. 미래학자들은 앞으로 더 많은 데이터를 쌓고 종교의 알고리즘을 완벽하게 터득한다면 인간보다 더 종교적인 ‘로봇 성직자’가 나올 것이라고 한다. 인공지능 성직자가 구원의 길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진짜 종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디지털 인간 AI는 컴퓨터를 벽돌로 구워내고 모바일 통신을 역청으로 쓰면서 공간과 언어의 한계 뛰어넘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그 어떤 생명체보다 탁월하지만, 창조주를 넘어서고 싶은 욕망으로 천상 낙원에서 쫓겨났다. 그 이후에도 인간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지배하고 있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창세 11,3) 디지털 인간은 정말로 일을 저지르려나 보다. 컴퓨터를 벽돌로 구워내고 모바일 데이터 통신을 역청으로 쓰면서 공간과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게다가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을 만들어 ‘하늘까지 탑을 쌓자’고 부추기며 디지털 바벨탑을 쌓고 있다. 창조주께서 신을 닮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사람을 닮은 기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기계는 지금 인간을 훌쩍 넘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 AI가 또 다른 바벨탑을 쌓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이에 인공지능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만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은 있기나 하는 것일까? 인공지능이 도저히 탐할 수 없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영역 말이다. 학자들은 인공지능에겐 ‘인간다움’이 주는 감동이 없다고 한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지금은 고인이 된 이어령 선생이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인공지능이 지성, 이성, 감성을 모두 점령해도 하느님의 영역인 영성만큼은 점령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고백하길 낮에는 무신론자처럼 살고 밤에만 하느님을 찾으며 흔들리다가 알파고의 등장으로 더욱 하느님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하느님을 마주한 그 자리가 바로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장소다. 길을 잃을 때 가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처음’이다. 인간이 최초에 머물렀던 하느님과 마주하며 살던 에덴동산을 생각한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인간다움’과 ‘생명’이 넘치는 그곳, 환희와 기쁨의 고향, 하느님과 마주한 ‘에덴’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어쩌면 우린 SF보다 더 SF 같은 현실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늘의 새를 보고 비행기를 만들었어요. 그러나 비행기가 새보다 더 강하고 빨라요. 물속의 물고기를 보고 잠수함을 만들었는데요. 이 또한 물고기보다 훨씬 더 강력해요. 그리고 우린 우리 자신을 보고 인공지능을 만들었어요. 결국 인공지능 알파고가 세계 최정상급 프로기사 이세돌을 이겼네요. 다음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런데요. 원하는 것을 다 이룬 우리 인간은 지금 행복한가요? 가장 인간다울 때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인간다움의 첫 번째 조건은요.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느님 닮은 인간이 가장 인간적이고 행복한 모습일 테니까요. 김용은 수녀(제오르지아, 살레시오 수녀회) 2023.03.10

‘구원의 문’이신 그리스도 드러내는 표징[가톨릭교회의 거룩한 표징들] (18)성당 문 성당 문은 구원의 문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거룩한 표징이다. 사진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5년 12월 8일 자비의 희년 개막일에 ‘거룩한 문’(porta sancta)을 열고 성 베드로 대성전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CNS 자료 사진】 문(門)은 다른 공간으로 이끄는 경계이다. 성경에서도 문은 안과 밖, 어제와 오늘, 거룩함과 속됨, 생명과 죽음의 갈림목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뿐 아니라 단테의 「신곡」과 같은 문학 작품의 영향을 받아 천국과 지옥에도 문이 있다고 상상하며 베드로 사도를 천국의 수문장으로, 루시퍼를 지옥의 우두머리로 소개하며 해학이 가득한 이야기들을 생산해 낸다.창세기는 ‘야곱의 꿈’을 통해 하늘과 땅의 경계에 문이 있다고 한다.(창세 28,10-22 참조)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28,17)라며 머리에 베었던 돌로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면서 그곳을 ‘베텔’이라 했다. 히브리말 ‘베텔’은 우리말로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야곱이 기념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둘러 축복한 것은 ‘자신과 후손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한 행동이었다.요한 묵시록은 새로 완성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12개의 성문이 있다고 한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1-14)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을 ‘구원의 문’이라고 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또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라고 계시하셨다.(묵시 3,20-21)가톨릭교회는 구원의 문이신 주님께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은 제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모든 사람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은 모든 사람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을 품으며, 그리스도를 온 인류의 머리가 되게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제사가 된다.…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셨기’(1요한 4,10)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2코린 5,19)”(「가톨릭교회 교리서」 616-620) 이처럼 그리스도만이 죽음에서, 그리고 사람들을 멸망시키려는 모든 것에서 구해 주신다. 이에 교회도 주님께서 당신 스스로 밝히신 것처럼 주님을 ‘구원의 문’이라고 신앙 고백을 한다. 성당은 전례를 거행하는 거룩한 공간이다. 여타의 공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이 공간에서 성찬례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명백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성당은 하느님의 집이며 인간의 집으로 불린다. 이 거룩한 공간과 세속을 구분하는 경계가 바로 ‘성당 문’이다. 이 문은 ‘구원의 문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거룩한 표징이다. 그래서 미사를 봉헌할 때 성당의 가운데 문으로는 전례 집전자인 성직자들만 출입한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회중들은 항상 성당을 드나들 때 가운데 문이 아닌 옆문을 이용한다.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선 속된 것을 떨쳐내고 하느님을 경배할 수 있는 정화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무심히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다. ‘새 성당 문 축복 기도’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당에 들어가야 하는지 잘 새겨준다. “주님 간구하오니, 이 문을 통과하는 당신의 신자들이 당신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같은 성령 안에서 성부께로 나아가며, 당신 교회에 함께 모여 교회의 신앙을 통하여 신뢰하는 마음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항구히 따르며, 같이 성체성사를 나누어 모시며, 기도에 항구함으로써 나날이 천상 예루살렘 건설에 힘쓰게 하소서.”성당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누구든지 구원의 문이신 주님께 청할 수 있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마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열린 교회 안에서 모든 이는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소음 가득한 거리나 TV와 컴퓨터가 켜진 집보다 고요함과 침묵이 깔린 성당 안에서 더 쉽게 하느님의 귀에 전달된다.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2.09.20

주님 부활, 새 생명의 길 열어주님 부활 사건과 부활하신 주님의 실재 주님 부활 대축일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토대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라는 선포는 신앙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믿음이 아니다. 주님 부활은 인간 역사 안에서 일어난 유일무이한 실제 사건이다. 신약 성경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았던 이들의 증언과 고백이 담겨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보았다”고 말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성경 속 주님 부활의 증인들을 통해 주님 부활 사건과 부활하신 주님의 실재를 정리해 보았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5장 내용을 새겨보자. 네 복음서가 쓰이기 훨씬 이전인 서기 52~57년 사이 어느 해 파스카 축제가 가까운 봄에 바오로 사도가 쓴 이 서간에는 ‘주님 부활’에 관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다양한 증언과 고백이 정리돼 있기 때문이다.“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3-14) 주간 첫날에 일어난 파스카 사건성경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부활하셨다고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사흘 곧 3일은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아브라함은 사흘째 되는 날에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칠 장소를 보게 된다.(창세 22,4) 또 요셉은 사흘 만에 그의 형제들을 옥에서 풀어주었고(창세 42,18), 요나는 사흘 밤낮을 하느님께 기도드린 후에야 물고기 배 속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요나 2,2) 이렇게 구약 성경은 사흗날을 ‘해방’ ‘구원’ ‘죽음으로부터의 승리’를 의미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흗날에 부활하신 것은 그 자체가 ‘구원의 결정적 사건’임을 드러낸다. 빈 무덤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묻히신 지 사흗날 곧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예수님의 시신을 염습하기 위해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빈 무덤이 주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이고 확실한 증거는 될 수 없다. 하지만 빈 무덤은 주님 부활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며 핵심적 징표임은 분명하다. 시신이 남아있는 무덤에서 부활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의 빈 무덤을 목격한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에 주님 부활에 관해 군중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설교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29-36) 빈 무덤은 또한 예수님의 육신이 썩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부패와 부활은 양립할 수 없다. 부활은 주님께서 죽음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그분의 존재 안에서 생명이 죽음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 놓여 있었더라면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목격 증인들주님 부활의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다. 성경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본 목격 증인들이 나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먼저 케파 곧 베드로 사도에게 발현하셨고, 이어 사도들에게, 또 한 번에 500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에게도 발현하셨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오로 서간 등 신약 성경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갈릴래아, 그리고 엠마오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목격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밝힌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만지게 하시고,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신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이끄시며(루카 24,39 참조),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나타나 부활하신 당신 육신이 수난의 흔적을 아직 지니고 있는,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육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요한 20,20.27 참조)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느 인간과 같은 인간으로서 목격자들 앞에 나타나셨다.눈여겨볼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본 이들이 하나같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루카 24, 16; 요한 21,4 참조) 심지어 베드로 사도도, 사도들도, 마리아 막달레나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주님께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이가 없었다. 자신들 앞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요한 21,12 참조)부활하신 주님의 모습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은 돌아가시기 전 수난의 흔적을 당신 육신에 그대로 지니고 계셨는데 왜 부활하신 주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을까? 교회는 이 물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과 같으신 분이시지만 부활을 통해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지셔서 당신의 신성을 더욱 드러내시는 새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 참되고 실제적인 육신은 영광스러운 육신의 새로운 특성들도 함께 지니고 있다. 이 육신은 이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원하는 곳에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나타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인성은 더 이상 지상에 매여 있지 않고 다만 성부의 신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정원지기의 모습이나 제자들에게 친숙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 등 얼마든지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이는 분명 그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45항)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수난 전에 야이로의 딸, 나임의 젊은이, 라자로 등을 다시 살리신 것처럼 지상의 삶으로 돌아오신 것이 아니다. 이들은 주님의 권능으로 지상의 정상적인 삶을 되찾았을 뿐이다. 이들은 다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들의 되살아남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주님의 부활은 지상으로 회귀하는 기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당신의 육신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른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신다. 예수님의 몸은 부활을 통해서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진다. 예수님의 몸은 그 영광스러운 상태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하늘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46항)주님 부활은 인류 부활의 원천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라고 선포했다. 그러면서 바오로 사도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라고 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과 연결되는 이유는 뭘까?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당신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 부활의 근원이며 원천이다. 이에 교회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첫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은 우리 영혼을 의화시키심으로써, 장차에는 우리 육신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 자신 부활의 근원이 되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58항)라고 고백한다.이는 주님의 부활이 세상의 종말 곧 그리스도의 재림과 긴밀히 연관돼 있음을 보여 준다. 주님의 재림이 모든 인간의 부활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이끌려 간다. 이는 우리가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2코린 5,15) 이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우리가 깨어 있는 마음으로 증거자들에게 귀 기울이고, 주님께서 당신 자신과 증거자들을 언제나 새롭게 공적으로 증거해 주시는 표징들에 우리 자신을 열 때, 우리는 그분이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강조했다.(「나자렛 예수」 2권 344쪽 참조)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cpbc2022.04.13

극단적 선택 앞 청년들, 교회 공동체가 울타리 돼줘야인권 주일 -청년 자살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극단적 선택을 고민했던 2030 청년들은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사실은 “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인간 생명의 존엄을 회복하고 인권을 보호하는 것은 교회와 사회가 우선으로 할 일이다.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을 맞아 늘어가는 청년 자살 문제를 들여다봤다. 청년의 현실 돌아봐야전문가들은 급증하는 청년 자살률 증가를 사회 문제로 보고 있다. 서울대 인류학과 박한선 교수는 자살의 요인을 크게 세 가지를 꼽았다. 우선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수단의 부재다. 이는 힘든 상황을 겪는 청년이 자신의 고통을 극단적 선택이 아닌 다른 곳으로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여행이나 취미를 통한 즐거움일 수도 있고 또 업무 등을 통해 다른 스트레스를 만들어 당장의 극단적 선택에 대한 충동을 막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는 접하기 쉬운 방안이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거나 취업 준비기 청년에게는 어렵기만 하다. 두 번째는 공동체의 와해다. 소속된 공동체에서 맡은 역할과 그로부터 오는 책임감은 자살 행동을 지연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핵가족화, 개인주의 경향으로 집단적 결속이 약화하는 오늘날, 이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편향적인 자살예방정책이다. 박 교수는 “현재의 예방정책은 자살 고위험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실제 자살 시도를 하는 사람 가운데 72%가 자살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었고, 자살 사망자 대부분이 저위험군에서 발생하는 것을 볼 때 여러 접근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인하대 사회복지학과 황순찬(서울시 자살예방센터장 역임) 교수도 “경제적인 어려움, 가족 해체, 외로움을 비롯해 고용·주거·관계의 불안정 등 청년 자살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며 “이를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로 본다면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인간이 살아갈 때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청년들에게 필요한 부분들을 같이 고민하고 이에 맞는 자살 예방 대책이나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자살 예방 교육과 공동체성청년 자살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10월 보건복지부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 주관하는 2022 자살예방 인문 공개토론회에 참석한 국내·외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청년 자살 문제를 진단하고 더 나은 예방법을 모색했다.일본에서 온 시미즈 야스유키 대표는 우리나라와 유사한 일본의 청년 자살률 현황을 전하며 국가적 차원의 예방법을 소개했다. 그는 비영리 법인 자살대책지원센터 라이프링크에서 정부와 함께 자살예방에 힘쓰고 있다.라이프링크에는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이를 대상으로 SNS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나 내담자의 사정에 따라 정부부처·기관·단체·전문가를 연계하는 데 차이가 있다. 인식개선 활동도 활발하다. 시미즈 대표는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등 대중적인 매체를 통해 고통을 겪는 청년이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모범 사례를 확산하려 한다”고 했다. 죽을 만큼 힘들어도 죽는 것 외의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는 “청년이 된 후에는 예방 정책의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에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관련 교육을 시행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밝혔다. SOS를 요청하는 방법이나 정신질환에 대한 지식을 미리 제공해 청년이 되고 찾아오는 위기에 대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종교 또한 청년을 포함한 전 연령대의 극단적 선택 문제를 예방하는 데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박한선 교수는 “경제ㆍ사회ㆍ문화 등 모든 분야가 침체한 IMF 시기에도 지금보다 자살률이 낮은 것을 보면, 고통의 강도가 극단적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의문”이라며 “집단적 접근을 확충해야 한다”고 전했다. 집단적 접근의 핵심은 공동체성이다. 사회적 관습과 규율 등 단체 행동에서 오는 억압감이 극단적 행동 양상을 억제하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라는 의미다. 그는 “과거 구심점이 됐던 농촌 공동체는 우리나라에서 와해된 지 오래고 이미 복원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며 “이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은 종교”라고 했다. 특히, 보편성을 의미하는 ‘가톨릭’의 지향은 전체적인 자살률 감소에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 교수는 그 근거로 “집단의 가치를 강조하는 전통 신앙이나 가톨릭을 믿는 국가의 자살률이 그렇지 않은 국가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것을 들며 “가톨릭이 다수를 차지하는 남미 국가들의 낮은 자살률은 경제적 수준이나 범죄율 등을 고려할 때 고통의 정도보다 종교로부터 오는 결속력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려 준다”고 말했다.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 “성당 사람들에게조차 고민 털어놓기 쉽지 않아”성당 열심히 다니는 청년 유씨 성경공부·고해성사로 위로 받아 청년 눈높이 맞춘 접근법 필요 평소 성실하게 성당을 다녔던 유씨는 극단적 선택을 고민했을 당시 신앙에 의지하지 못했다. 유씨는 그 이유에 대해 “원래도 타인에게 힘든 내색을 하지 못하는 성격인데, 오랜 기간 신앙 공동체에 몸을 담다 보니 성당에서 만난 사람들 또한 사회생활의 일부가 돼버렸다”고 설명했다. ‘내가 지금 너무 힘들어’라고 호소하고 싶었지만, 매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은 탓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성당 다니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는 점이었다. 공교롭게도 ‘살아 보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 계기 역시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못하는 상황에서 성당에 갔다가 청년 성서모임을 알게 됐다”고 했다. ‘성서모임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비밀이 원칙’이라는 말이 위안이 됐다고 한다. 성경을 읽고 느낀 바를 공유하는 ‘나눔’에 있어 피드백을 하지 않는 시스템도 도움이 됐다.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을 보고 밖에서도 말을 해볼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어요. 고해성사 때는 응어리 맺힌 게 울컥 터져 나왔죠. 그 뒤로 서툴더라도 말하는 연습을 하게 됐어요.” 유씨는 “청년에게만큼은 교회의 접근 방식이 달랐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청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방식이다. 그는 “이미 교회에는 청년을 위한 양질의 프로그램이 다양하지만, 다소 깊은 영성을 요구하곤 해 그들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청년의 구미를 당길 수 있도록 청년 입장을 반영해 다듬을 필요가 있다”며 “바로 3박 4일 피정을 권하기보다는 맛보기로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여러 가지 마련한 뒤 청년 스스로 맛을 들여 한 단계씩 시도해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 cpbc2022.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