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파견 첫 선교사 주문모 신부, 양떼와 함께 기꺼이 순교[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7.주문모 신부의 생애와 사목활동 서울대교구 새남터 순교성지에 있는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 흉상. 한국 천주교회에 공식 파견된 첫 선교사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공식적으로 파견된 첫 선교사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다. 그는 중국 강남 소주부 곤산현 출신이었다. 20세에 혼인한 적이 있지만 3년 만에 자녀 없이 부인을 잃었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다가 이를 포기하고 북경에서 신학을 배우고 구베아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42세의 늦은 나이에 조선 선교사로 파견된 해가 1794년 겨울이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최인길이 마련한 집에서 6개월간 조선어를 배우면서 성무활동을 거행하다가 밀고되어, 피신 생활을 하다가 주로 강완숙의 집에 머물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교우들과 만났다. 따라서 그의 사목활동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회장 제도와 명도회를 활용하고, 한글 번역을 통한 문서 선교에 집중하게 되었다. 회장(會長) 제도는 성직자가 부족한 지역에서 교리교사(catechista, 카테키스타)를 두어 교리교육을 돕도록 하는 것인데, 전교 지역에서는 회장이 단순히 교리교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우촌의 교리교육, 기도생활 지도는 물론이고 유아세례, 신자들의 혼인, 성사 준비 등 사제와 교우들의 중재 역할을 하도록 했다. 조선에서는 특히 여성의 교리교육과 세례 준비를 위해 ‘여회장’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고, 교리교육과 외교인 선교를 위해서 ‘명도회(明道會)’를 만들어 실시하고 있었다. 수원교구 어농성지에 있는 주문모 신부 동상. 비밀리에 성무 집행하며 문서 선교에 힘써 명도회는 주 신부가 북경에서 이미 경험하고 있던 단체를 모방하여 교리 연구 및 전교를 위한 모임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주문모 신부는 교리에 밝은 정약종을 명도회 회장으로 임명하였고, 하부 조직으로 3~4인, 혹은 5~6인의 소그룹 형태의 회(會)를 구성하여 매월 첫째 주일 모임을 하도록 했다. 그들은 한 달간의 활동인 신공(神功), 곧 기도와 선행 등 활동을 보고하고 교리 연구를 했다. 명도회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신자 중에 열심한 이들이 명부에 등록한 후에 1년간의 활동을 주 신부에게 보고한 후 그 평가에 따라 회원 여부가 결정되었다. 이 명도회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이들이 많았고, 이 중 3분의 2가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여성들도 명도회 회원으로 인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리연구와 전교활동을 통해서 나온 교리서가 정약종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다. 정약종은 여러 한문 교리서와 한문 성경 등을 참조해 배우지 못한 이들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매우 쉽고 분명하게 한글로 교리서를 집필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천주(天主)가 계심을 안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하여, 그 세상의 주인을 가리켜 ‘임자’ 곧 주인이라고 지칭하고, 그 천주가 사람에게 고유한 영혼을 부여하여 영원히 살도록 했다는 분명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주 신부는 이 한글 교리서가 완성되었을 때,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에 의해 정교하게 쓰인 한문교리서 「성세추요」보다도 요긴하다면서 바로 인준해 주었고, 처음에는 필사본으로, 이후에는 목판본과 활판본으로 배포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1801년 박해 때 천주교 서적이 압수되어 소각될 때 「사학징의(邪學懲義)」에는 당시 남아 있던 책 제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모두 120종 117권이었고, 그중 83종 111권이 한글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종류도 성경·전례서·성사·기도서·묵상서·성인전·교리서 등 다양한 천주교 서적이 있었다. 주 신부의 문서 선교 노력은 이처럼 많은 열매를 맺고 있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 중인 정약종 초상. 동시대 천주교 신자이자 신유박해 때 함께 순교한 이희영(루카, 1756~1801)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박해 일자 피난길 나섰다가 돌아와 자수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주 신부는 일단 피신하였다. 남구월이라는 시녀가 주 신부를 전동에 있던 양제궁(良宮)으로 피신시켰다. 양제궁은 죄인으로 유배된 은언군의 거처였으므로 폐궁(廢宮)으로 불리었는데, 거기에는 은언군의 부인 송(宋) 마리아와 며느리 신(申) 마리아가 있었다.(은언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는데, 그의 아들 이담이 역모죄에 연루되어 연좌제로 폐출(廢黜)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신유박해 때 부인 송 마리아가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었다는 죄로, 천주교 신자가 아닌데도 연좌제로 사형을 받았다. 후에 그의 손주가 철종으로 즉위하였다.) 송씨와 신씨는 나중에 주문모 신부를 숨겨준 죄로 사약을 받았고, 천주교 신자는 자살할 수 없다고 하여 강제로 사약을 먹게 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주 신부는 힘들게 피난길을 가서 황해도 황주까지 도피하였으나, 마지막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한양으로 되돌아와 자수하였다. 주 신부는 3번에 걸쳐 추국을 받고 여러 번 신문을 당하면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조선 정부가 지적한 그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주문모는 신부·교주를 자칭하면서 종적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면서 수많은 남녀를 속이어 꾀어냈다. 법석을 열고 세례를 주니, 속임에 불과한 학설이 7~8년 사이에 차차 번져서 물들고 그르침이 더욱 깊어졌다. 그 학설이 화가 되고 걱정이 됨은 이적금수의 지경에 모두 빠지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서울대교구 절두산 순교성지에 소재한 조선 왕실의 첫 순교자인 송 마리아와 남편 은언군 이인의 묘비.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 받고 순교 주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신부가 길가 좌우 구경꾼들을 두루 둘러보고 목이 마르니 술을 달라고 하자, 군졸이 술 한잔을 바쳤습니다. 다 마시고 나서 성 남쪽 10리 되는 연무장(한강 모래밭의 이름은 노량)으로 갔습니다. 귀에 화살을 꿴 후 군졸이 죄목이 적힌 판결문을 주어 읽어보게 하였습니다. 그 조서는 꽤 길었는데 신부는 조용히 다 읽고 나서 목을 늘여 칼을 받았습니다…. 목을 베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고 눈부시어, 장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황겁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황사영 「백서」 중) 순교복자 주문모 야고보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는 다블뤼 주교가 수집한 「조선 순교자 역사비망기」에 나온다. “주 신부의 복사 중 한 사람이 꿈에서 피바다를 보고, 폭풍 속에서 흰옷을 입은 한 귀부인이 자신을 구해준 이야기를 전하였다. 주 신부는 다음과 같이 꿈을 풀이하였다. ‘머지않아 큰 박해가 이 나라 안에 일어날 터이지만 그 박해로 천주교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고, 성모님이 붙들고 있는 이상 천주교는 완전히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 복사는 박해를 피하라고 하는 주 신부의 말을 듣고, 1801년에 화를 당하지 않고, 4~5년 후에 평화롭게 죽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주 신부의 말대로 한국 천주교회는 앵베르 주교의 청원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주보(主保)로 모시고 박해를 견디고 발전해 나갔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cpbc2024.02.13

하느님 세상 보여주는 성경 속 숫자들[가톨릭교회의 거룩한 표징들] (7)성경 속 수의 의미 ① 성경에서 숫자 1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수이다. 2는 ‘분열’을 의미한다. 3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권능과 활동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성경에 드러나는 ‘수’(數)의 의미와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3차례에 걸쳐 알아보자. 먼저, ‘하나’ 곧 ‘1’이다. 1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성경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한 율법 학자에게 이렇게 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30)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그 ‘주님’이심을 밝히셨다.(마르 12,35-37 참조)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을 유일하신 분, 하느님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유일하신 분,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 또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에 대한 신앙도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이신 분’이심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한 분이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신앙을 끊임없이 고백한다. “영원하시며, 무한하고, 불변하시며, 불가해하고 전능하시며, 말로 표현할 수 없으신 참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이시나 순전히 하나의 본질,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우리는 확고하게 믿으며 명백하게 고백한다.”(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 이렇게 1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수이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일치’를 드러내는 거룩한 표징이다. 모든 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왔다.‘둘’ 곧 ‘2’이다. 성경에서 2는 ‘분열’을 의미한다. 인간이 죄를 지은 결과 ‘하나’가 무너졌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참되신 분이시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써 ‘분열’이 생기게 됐다. 선과 악, 삶과 죽음, 진리와 거짓 등 모든 것이 둘로 갈라졌다. 모든 사람은 첫 인간 아담의 원죄에 연관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든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라고 안타까워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이 문장은 ‘구원은 하느님에게서만 온다’라고 달리 표현할 수 있다. 구원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거룩하고 의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셨다.(로마 5,19 참조) 이를 신학 용어로 ‘구원의 보편성’이라고 하는데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선택한 ‘새로운 아담’이 바로 하느님 자신이셨다. 참인간으로 강생하신 참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셨다.이처럼 구원의 목적은 둘로 분열된 것을 원래의 하나로 되살리는 것이다. ‘셋’ 곧 ‘3’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수이며 ‘시작과 가운데와 마침’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3은 ‘하느님의 세계’를 표징한다. 하느님을 찬미할 때 우리는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세 번을 외친다. 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와 “하느님의 어린양”도 세 번씩 부른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성조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세 명이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세 차례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다. 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께서는 부활하기 전까지 사흘 동안 무덤에 묻혀 계셨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루신 거룩한 업적이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권능으로 예수님을 되살리셨다. 또 성자께서는 당신의 신적 능력으로 스스로 부활하셨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당신 활동을 통해 예수님의 죽은 인성을 되살리시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상태로 부르신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신다. 이렇게 부활 안에서 삼위 하느님께서는 동시에 함께 일하시며 또 각 위의 독자성을 드러내신다. 이렇게 3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권능과 활동을 드러내는 표징이다.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2.06.22

신원[월간 꿈 CUM] 회개 _ 요나가 내게 말을 건네다 (6)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고 어디서 오는 길이오?”(요나 1,8) 우리는 태어나면서 저마다 고유한 이름을 지니게 됩니다. 불리게 될 이름은 자신의 신원과 이름의 뜻이 지닌 깊은 바람을 담고 있습니다. 이름은 그가 어느 집안의 사 람이며, 이름을 지어주신 분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가톨릭’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톨릭Catholic은 ‘보편된’, ‘공번된’이란 뜻이며, 보편교회의 전통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가톨릭은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삶을 따르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성경 말씀과 교회의 교리를 지키겠다는 이름인 것입니다. 또한 가톨릭 신자들은 이름에 걸맞게 ‘보편된’ 넓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편협되거나 이기적이거나, 끼리끼리의 문화에서 벗어나 모두를 포용하는 넓은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이름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같은 소중한 가톨릭의 이름을 살려고 했기에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는 그토록 참혹한 박해를 당했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는 당시 민족과 나라의 구분, 신분과 계급, 죄인과 의인, 남자와 여자, 아픈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하나로 사랑하며 보듬어 안으셨습니다. 이 가르침을 가톨릭 신자들이 철저히 살려고 애썼기 때문에 당대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그토록 처절한 박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톨릭 삶과 정신을 분명히 알고 철저히 지키려 했던 사도 바오로였기에 그는 엄연한 신분의 구분이 있던 냉엄한 시대에 다음과 같은 혁명적인 선언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7–28) 이것이 가톨릭 신자들의 신원이며, 이 보편되고 평등하며, 숭고한 신앙의 가치를 살아야 하는 사명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주어진 이름인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또 다른 이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거룩히 성별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거룩히 성별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온갖 물질적 유혹과 세속의 욕망에서 벗어나 고귀한 품위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기에 대 레오 교황님(400~461)은 일찍이 이런 가르침을 남기셨습니다. “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들의 고귀한 품위를 깨달으시오. 여러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명심하십시오.” 프라 안젤리코 - 성인들과 순교자들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선구자들 우리는 분명 세상에 속하여 살지만 세상 악과는 단호히 구별되는 거룩한 삶으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세례받을 때 영혼의 이름인 세례명을 받게 됩니다. 세례명은 이름의 주인공인 성인 성녀의 삶을 본받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이름이 주어진 것은 그 이름값을 하라는 뜻입니다. 세는 타는 떨기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탈출 3,1–15 참조). 소년 사무엘은 실로의 하느님 성전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1사무 3,1–10 참조).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달려가던 중,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사도 9,1–9). 이렇듯 성경에서, 주님께서 친히 이름을 부르시는 사람들은 또 다른 소명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이름은 진정 그 사람의 신원이자 소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은 「꽃」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하느님은 나의 이름을 매일 부르시면서 세상에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꽃이 되라 하십니다. 이제 요나는 바다에 떨어질 죽음을 앞두고 선원들이 묻는 물음에 답을 해야 합니다. 그 대답은 요나의 것이지만, 우리 모두의 신앙의 근원을 묻는 물음인 것입니다. 요나는 아주 분명히 대답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물을 만드신 주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요나 1,9) 배광하 신부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 바오로) cpbc2023.11.09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72. 왜 타인과 갈등이 생길까 우리는 다름으로 인해 갈등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이는 디지털 세상이나 현실에서나 마찬가지다. 사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군인들이 적군을 향해 포를 쏘는 모습. OSV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김국환의 노래 ‘타타타’ 첫 구절이다. ‘내가 너를 안다’는 말보다 더 오만한 말이 있을까 싶다. 사실 ‘너’라는 타인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다. 우린 그저 나의 관점으로 타인을 이해할 뿐이다. 평생을 함께 살고 사랑한 배우자라도, 외모가 똑같은 쌍둥이로 태어났어도 모두 각자의 가치와 신념으로 남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사랑해서 가까이 다가가지만, 또 미워하면서 언제 이별할지 모를 일이다.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삶의 끝에 죽음이 있듯이 사랑 끝에 이별도 있다. 그 끝이 잠깐의 헤어짐이든 영원한 죽음이든 누구나 사랑하면 상처를 남기고 떠나야 한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Alfred D’Sousza)의 이 시구가 많은 이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린 상처받을 줄 알고, 이별할 줄 알면서도 기어이 사랑하고야 만다. 누구에게나 ‘사랑’은 절대적인 영혼의 음식이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만 한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면 성경은 물론 문학이나 대중가요도 온통 ‘사랑’의 고난을 이야기할까? 사랑은 ‘남’과 한다. 남은 나와 많이 다르다. 그래서 알 수 없고 고통스럽다. 그런데 또 노랫말처럼 ‘다 안다면 재미가 없다’. 달라서 갈등하고 고통을 겪지만, 그 ‘다름’으로 사랑은 더 단단해지고 커간다. 다름이 익숙함으로 건너가기까지 미운 정 고운 정이 섞이고 버무려지고 숙성하는 고난의 길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다름’은 낯설고 불편하다. 그래서 익숙한 ‘같음’으로 만들고 싶은 유혹이 종종 생긴다. 오늘날 우리는 삶을 완전히 바꾼 디지털 혁명의 초연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얼핏 자유롭고 다양성을 중시하는 세상같이 보인다. 그래서 다름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과잉정보 세상이 다른 수많은 세상의 창을 더 열어주는 것 같아서 다름을 이해한다고 착각하게 한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은 더 철저하게 다름을 배척한다. 낯설고 불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은 아예 배제하고 내가 만든 내 취향의 세상을 만들어 거기서 거주한다. 디지털 세상은 온통 ‘닮은꼴 축제’의 공간이다. ‘좋아요’, ‘구독’을 누르고 팔로잉하면서 내 취향의 피드로 ‘같음’에 먹이를 주고 동일한 세상을 만들어간다.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을 응원하고, 나의 이념에 맞는 뉴스로 세상을 보고, 내 취향의 연예인이나 이슈를 따라간다. 똑같은 목소리로 같이 흥분하고 분노하고 또 사랑한다. 그리고 나와 다른 낯설고 불편한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이나 연예인과 동료들을 반대편으로 몰아세운다. 그들은 완벽한 ‘타인’이고 ‘적’이 된다. 우린 모두 세상의 이방인이다. 나에게 너는 남이고, 너에게 나도 남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간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은 없다. 단지 ‘내 입장에서’ 이해하고 ‘나 같으면’ 이렇게 저렇게 하리라는 예측을 할 뿐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익숙한 나와 닮은 생각과 취향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우리 뇌는 특별하고 탁월하고 선한 것을 좇지 않고 ‘익숙함’을 선호한다. 가능하다면 내가 좋아하고 나와 생각이 같은 익숙한 것들 속에서 어울리고 싶다. 낯섦을 쫓아내고 익숙함을 좇는 본성을 강화시키는 디지털 세상에서 친구는 폭발적으로 늘고 그만큼 적도 많아진다. 왜 타인과 갈등이 생길까? 나와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기에? 정확하게는 나의 이익을 대변하는 신념과 가치를 포기할 수 없을 때 갈등은 증폭된다. 전쟁은 왜 일어날까? 대한민국 남과 북의 갈등,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이는 모두 국가 간 이익 싸움이며, 정의와 도덕을 삼켜버리는 이기적인 집단의 광기다. 너의 다름을 나와 같은 것으로 만들려는 폭력이다. ‘타타타''. ‘있는 그대로의 것’이라는 의미다. 나의 이익을 좇는 관점 하나, 살포시 내려놓기만 해도 있는 그대로의 ‘남’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산다는 건 참 좋은 거’라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는 첫걸음이 시작되리라. 영성이 묻는 안부 누군들 사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독히도 내 중심적이라서 ‘사랑’도 이기적으로 한답니다.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나 고통받는 배우자 혹은 가족 앞에서 무력하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겁니다. 내가 대신 아파 줄 수 없으니까요. 얼마나 아픈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나의 방식대로 해줄 수 있는 것을 다할 따름입니다. 자신의 아픔은 각자 감당해야 하듯 그렇게 우린 철저히 ‘남’일 수밖에 없나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사랑도 자기방식대로 하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사랑의 매뉴얼을 주셨습니다. 게다가 지독하게 이기적인 나는 남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만, 그 바람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을 종종 잊고 삽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cpbc2024.06.05

“언젠가 성경 작품 무대에 올려 주님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 (36) 공연 제작자 이슬(젬마) 공연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슬씨 이슬(젬마)씨는 예술고등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성악을 전공했고, 영국 유학 후 예술 경영과 기획을 더 배우기 위해 현재 예술학 협동과정 전공으로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그리고 공연제작사 ‘하람컴퍼니’와 예술교육 단체인 ‘듀클’을 운영하는 젊고 당찬 CEO이다. 그녀는 뮤지컬 및 공연 축제를 직접 제작, 기획하고 있으며, 다양한 예술교육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녀는 건강이 크게 위험스러운 순간에도 오로지 하느님께 의지하며 자신이 원한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대단한 의지의 소유자이다. Q. 학창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A.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었어요. 가장 좋아하던 것도 성당에서 노래하던 거였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는 성가대 활동을 정말 열심히 했는데, 학교 마치면 바로 가는 곳도 성가대 연습이었어요. 20대 때도 연희동본당 한푸름 청년 성가대에 나가기도 했었고요. 그리고 부모님이 예술 쪽으로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주셔서 글쓰기와 미술, 악기 등을 익혔습니다. 그때 그냥 재밌게 배웠던 것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고, 여러 콘텐츠를 만들 때 큰 도움이 될 줄 몰랐죠. Q. 쉴 틈 없이 바쁘게 살았네요. 지금 하는 일을 조금 자세하게 설명해주세요.A. 어렸을 때부터 성악을 공부해서 오페라를 할 거로 생각했어요. 노래하는 것도 연기하는 것도 너무 재밌었거든요. 그런데 오페라는 음악적인 표현에 집중하다 보니 극 내용보다는 음악만 귀에 남아서 아쉽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뮤지컬을 관람하러 가게 됐는데, 전율이 흐르는 느낌이었어요. 노래, 춤, 연기가 조합된 종합예술이 제게는 마치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었어요. 다음날 뮤지컬 배우인 남경읍 선생님의 학원을 찾아서 그날 밤 무작정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어요. 선생님께서도 과거 뮤지컬 배우가 되겠노라 시골에서 상경했던 경험이 있어서 늦은 시간까지 절 기다려주셨어요. 그렇게 그곳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원하던 뮤지컬학과에 진학하여 뮤지컬 배우가 되었어요. 그러다가 잠시 공부하러 떠났던 런던에서 많은 공연을 접하면서 “나도 저런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보고 싶다”라는 꿈을 꾸고 귀국 후 공연 제작과 기획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Q. 실행력이 갑이네요.(웃음) 하느님이 주신 재능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A. 부지런함인 것 같아요. 하느님께서 남들보다 한발 느리던 저에게 부지런함을 주심으로 따라갈 수 있었어요. 부지런하게 하다 보면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덜 후회하더라고요. 시간을 쪼개 여행도 많이 다녀요. 일도 휴식도 부지런하게 하는 타입이에요. 여러 곳을 다니며 일해야 하는 제 직업상 너무 감사한 탈렌트죠.Q. 삶에서 가장 큰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A. 코로나 시기에 심리적으로 힘들었는데 하필 그 시기에 패혈증에 걸렸어요. 서울 시내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모두 거절당하다가 지방 병원에 겨우 입원할 수 있었어요. 그때 중환자실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겪었어요. 지금도 병원을 보면 불안감이 불쑥불쑥 올라오고, 길에서 구급차만 봐도 무서워져서 잘 걷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주님께 매달려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지금은 그 기도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했어요.Q. 삶의 길잡이나 지표가 되어준 성경 말씀이 있다면? A.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창세 26,24)란 말씀은 항상 제게 큰 힘이 되어줘요. 오랜 시간 자취를 하면서도, 홀로 외국에 공부하러 떠났을 때도, 제작일을 해보겠다고 무작정 뛰어들 때도 모두 다 저 말씀 덕분에 힘을 내어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야. 함께 해주시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마음먹으니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Q. 청년 성서 연수는 어떤 의미가 됐나요? A. 탈출기 연수가 정말 뜻깊은 시간이었어요. 일에 파묻혀 지내며 바쁘다는 핑계로 성당도 잘 안 나가게 되고 그냥 기계처럼 일만 하던 때였어요. 기도조차 잊고 지내는 저를 발견하고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무작정 정동에서 운영하는 성서모임을 신청했어요. 탈출기 연수도 함께 신청해서 다녀오고 거기서 허영엽 신부님을 만날 수 있었고 강의들은 제 마음을 다시 흔들어 놨죠. 그 뒤로 종종 성서모임 분들과 나눔을 가졌었어요. 냉담에서 탈출할 수 있게 만들어준 귀한 시간이었어요. Q. 살면서 ‘이것이 바로 하느님 기적이다’라고 느꼈던 체험이 있다면?A. 저는 제가 일을 하는 것이 기적 같아요. 제가 뮤지컬 배우로만 살다가 갑자기 공연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거든요. 막연하게 나만의 예술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기획이나 예술경영을 전공하지 않아서 과연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어요. 제가 뮤지컬과 축제를 제작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모두 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올 10월에 두 편의 뮤지컬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그것도 기적처럼 잘 마쳤으면 하고 기도하고 있어요.Q.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적은 언제인가요?A. 지방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단체 공연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공연이 끝난 뒤 어르신들이 “덕분에 이런 문화생활도 해봤다. 감사하다”라고 해주시더라고요. 마을회관에서 하는 초청 행사들만 접해보셨나 봐요. 고생했다면서 한 할머니가 허리 가방에 넣어두셨던 호박 젤리를 주시더라고요. 그 젤리가 참 값지고 달았습니다.Q. 일하면서 언제 기도를 가장 열심히 했나요?A. 공연을 제작하다 보니 아역배우들과 함께할 때가 있는데, 대개 체계적으로 교육된 아역배우가 오게 되거든요. 한번은 재능은 있지만 예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친구들을 직접 가르쳐서 무대에 올려보고 싶었어요. 다문화 학생에게 기회를 주고 공연할 수 있도록 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어린 학생이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을 직접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 연습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죠. ‘이러다 공연 때 큰일 나는 게 아닌가. 지금이라도 전문 아역배우를 불러와야 하나?’ 고민되었지만, 그 학생의 꿈을 이뤄주고 싶어서 그대로 진행했어요.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을 믿고 학생과 기도도 하고요. 그런데 이 친구가 막상 무대에 오르니까 하나도 떨지 않고 재능을 마음껏 뽐내며 공연하더라고요. 정말 즐겁게요. 이 학생의 간절한 기도가 닿았구나, 이 친구의 꿈을 이뤄주시는구나 싶어서 기뻤어요.Q. 같은 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A. 예술계통은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는 직업군이잖아요. 요행을 바랄 수도 없고요. 그래서 내가 고생하는 기간에 비해서 결과물이 좋지 않거나 그 과정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금방 지쳐서 그만두는 후배들이 많아요.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그 과정이 그저 즐거울 수만은 없을 거 같아요. 힘들겠지만 그 시간을 잘 견뎌냈으면 좋겠다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지치면 잠깐 쉬었다가 충전해서 다시 잘 일어나다 보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도달할 수 있을 거예요. 저 역시 더디지만 천천히 길을 향해 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 그런 얘기들을 해주고 싶습니다.요즘도 특수교육 대상 학생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고 있는 이슬씨는 서툴지만 진심을 담아 노래하는 학생들 모습이 너무 예쁘고 맑고 순수한 친구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최근에는 김천교도소에서 노래 봉사를 했는데 주님이 주신 탈렌트가 얼마나 감사한지 느끼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자신의 목소리로 주님의 말씀을 노래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디라도 기꺼이 가고 싶다는 그는 언젠가는 성경 말씀을 담은 공연이나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찾아가는 공연 봉사를 꿈꾸고 있다.허영엽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원장) cpbc2022.09.20

우리가 거행하는 전례, 알파와 오메가전례를 폭넓게 살펴보는 책 두 권 대림 제1주일을 기점으로 가톨릭교회는 새해가 시작된다. 새로운 해를 시작하며 교회 구성원의 개인적, 공동체적 신앙 표현인 ‘전례’에 대해 되짚어보면 어떨까. 평신도를 위한 흥미로운 내용부터 사목자를 위한 학문적인 글까지, 전례에 대해 폭넓게 살펴볼 수 있는 책이 나란히 출간됐다. 전례에 초대합니다 안드레아 자크만 강대인 옮김 윤종식 신부 감수 가톨릭출판사 왜 미사 때는 성반, 성작을 사용할까? 신부님이 입고 있는 제의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성당에 있는 감실, 고해소는 어떻게 생겼을까? 성당에 가면 교회 밖과는 다른 많은 것을 마주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미사에 참여했던 이들에게는 언제 어떻게 쓰이는지 친숙한 물건과 장소들이지만, 예비신자들에게는 생소할 수밖에 없다. 전례에 익숙한 신자들도 성당 안의 요소들이 왜 존재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으면 구체적으로 대답하기는 힘들 것이다. 「전례에 초대합니다」는 우리가 전례에 참여할 때 성당 안에서 보는 모든 것에 담긴 의미와 상징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책이다. 2007년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성당과 전례 안의 다채로운 모습을 마주하게 된 저자 안드레아 자크만(미국 미네소타 세인트 마이클본당 신앙교육 기획자)이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가듯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성반Paten’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빵을 담아 놓는 거룩한 접시다. 성반이라는 말은 둘레가 낮은 쟁반이나 접시를 뜻하는 라틴어 ‘파테나patena’에서 유래했다. (중략) 미사가 거행되기 전, 성반은 성작 위에 놓아둔다. 그리고 그 위에 성작 덮개를 덮어 주수상 위에 두었다가 성찬 전례가 시작되면 영성체 예식이 끝날 때까지 제대 위에 둔다.”(44쪽) “‘제의Chasuble’라는 말은 ‘작은 집’을 뜻하는 라틴어 ‘카술라casula’에서 유래했다. 이는 제의가 사제의 다른 모든 옷을 다 덮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제의는 로마 제국에서 흔히 입던 세속 옷이 변형된 형태였다. 이 제의는 사제의 발까지 완전히 늘어졌으며, 양쪽을 이어 붙여 팔 전체를 다 덮었다. (중략) 제의는 예수님의 멍에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제의를 입은 사제를 덮어 보호해주는 사랑을 상징한다.”(140쪽) 「전례에 초대합니다」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서위원회와 전례위원회 강대인 위원이 번역했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전례학을 가르치는 윤종식(의정부교구) 신부가 감수했다. 각 성물이나 장소에 대한 다양한 사진, 성경 구절, 교부와 성인들의 말이 더해져 이해를 돕는다. 교회의 전례 홀리안 로페스 마르틴 주교 장신호 주교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전례는 삼위일체의 업적이 전례 거행의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계속되는 것으로, 성경의 계시를 바탕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전례는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기에 인간적 활동의 사회적 종교적 성격의 사건이기도 하다.”(49쪽) 「전례에 초대합니다」가 평신도를 위한 책이라면, 「교회의 전례」는 성직자와 신학생을 위한 도서다. 스페인 레온 교구장 홀리안 로페스 마르틴 주교가 지난 1994년 신학 교과서 ‘신앙의 지혜’ 제6권으로 「교회의 전례」 1판을 출간했고, 이후 발행된 전례 분야 간행물에 관한 참고 문헌을 보완하고 몇 가지 새로운 주제를 더해 2판을 펴냈다. 저자는 “전례가 ‘그리스도 정신을 길어 올리는 첫째 샘이며 또 반드시 필요한 샘’(「전례헌장」, 14항)이 되도록 힘쓰는 데 더욱 관심을 지닌 사목자, 수도자, 평신도들은 전례 거행이 더욱 안정적이고, 신비의 뜻과 더욱 조화를 이루며, 영성적으로도 더욱 깊이를 갖추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이 책은 전례의 본성과 교회 생활 안에서 전례의 중요성과 관련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공의회 후속 전례 개혁의 주요 노선을 취합하려고 노력하였다”고 전했다. 이런 차원에서 이 책은 전체적으로 신학적이지만, 그리스도교 전례를 살펴보는 데 필요한 다른 관점들, 곧 역사적·영성적·사목적·교회법적 관점들을 함께 제시한다. 또 신비의 거행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적 생활의 발전, 인간의 성화, 하느님 경배 등과 관련된 사목적 실천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저자는 1975년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스페인 여러 대학에서 전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94년부터 2021년까지 스페인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 및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2011년부터 교황청 경신성사성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자와 비슷한 학력과 이력을 지닌 대구대교구 장신호 주교가 번역했다. 장 주교는 2002년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박사학위를 받고 2009년까지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전례학 교수로 재직하다 2018년부터 주교회의 교리주교위원회 위원 및 전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2016년에 이어 2022년 교황청 경신성사부 위원으로 재임명됐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3.11.29

위대한 믿음 “YES!”[월간 꿈 CUM] 동행 _ 예수의 일생 (2)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기막힌 이야기를 들은 성모님은 곰곰이 생각하십니다. 성경에는 간단히 이렇게 단 한 줄로 표현되어 있는데, 아마도 성모님은 며칠 기도하시면서 고민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큰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천사님! 아까 제게 은총을 많이 받은 여자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도저히 못하겠어요. 정말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보세요. 저보다 훨씬 신심 깊은 여인에게 가보세요.”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저는 뒤로 발을 뺄 것 같습니다. 왜? 감당이 안되니까요.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처녀가 임신하면 돌에 맞아 죽는 시대였으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천사의 말을 거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합니다. 곰곰이 생각한 성모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성모님의 대답은 ‘YES!’ 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Augustinus, 354~430)은 이 사건과 관련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순간! 성모님의 대답이 어떻게 나올지, ‘예’(Yes)라는 대답이 나올지, ‘아니오’(No)라는 대답이 나올지 모든 피조물이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성모님 입에서 “노!”(No) 라는 대답이 나오면 새롭게 열리게 될 구원의 문이 닫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이 “예스!”(Yes)라고 대답함으로써 이제 새롭게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천사님! 제가 하긴 하겠는데, 만약 이 일로 제가 죽을 위기에 처하면 어떻게 저를 구해주실거죠?” “대책은 마련해 놓으신거죠?” “요셉에게는 대신 어떻게 설명해 주실거죠?” “앞으로 계획에 대해 저에게 자세히 프레젠테이션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우리의 방식입니다. “아! 이해됐습니다. 그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모님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사태를 그냥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믿는 구석이 뭐죠? 바로 가브리엘 대천사의 약속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뭐라고 말했죠?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30)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루카 1,35)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이 말을 성모님은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이 천사의 약속에 자신의 존재와 미래를 다 내어 맡기셨습니다. 만약 저라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렇게 말했다가 나중에 딴말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성모님은 전적으로 믿으셨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 모두를 살렸습니다. 나중에 엘리사벳 언니도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인류가 지금 구원의 열매를 맛보고 있는 것은 바로 성모 마리아의 위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모님의 용기를 이끌어 낸 것,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글 _ 안성철 신부 (마조리노, 성 바오로 수도회) cpbc2023.09.21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 노인학대 피해 어머니의 마르지 않는 눈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3/05/Omc1709622548874.jpg)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 노인학대 피해 어머니의 마르지 않는 눈물막내아들 술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해...현관 유리 깨지고 보일러도 망가져...급식 봉사하며 도시락으로 끼니 해결 서울시 남부노인보호전문기관장 박진리 수녀가 노인학대를 당한 윤소화(가명)씨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던 막내아들은 10년 전부터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했다. 더 좋은 처우로 이직을 권유받아 회사를 나왔지만, 어째선지 이후부터 일용직을 전전했다. 무력감에 술에 의존하던 그의 증세는 5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더욱 심해졌다. 아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윤소화(가명, 데레사, 85)씨의 집 현관문 유리는 천이 덧대 있었다. 술 취한 아들의 폭력이 남긴 흔적이다. 10평 남짓한 집안은 성한 곳이 없었다. 화장실 타일은 군데군데 깨져있었고, 고장 난 보일러를 고치지 못해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벽 곳곳은 새카만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윤씨는 오직 자식 걱정뿐이다. 곡기를 끊은 채 보름을 연달아 술만 마시던 아들은 건강도 크게 나빠졌다. 당뇨에 간경화로 치료가 시급하지만, 당장 이를 돕지 못해 한스럽기만 하다. 윤씨 앞으로 나오는 기초 연금 30만 원으로는 매달 40~50만 원 되는 아들의 정신병원 입원비를 감당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다행히 큰아들이 돈을 보태주고 있지만, 그 역시 일용직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터라 더 손 벌리기도 어렵다. 고령에다 성치 않은 무릎으로 대신 일할 수도 없다. 노인성 질병으로 복용해야 하는 약들도 먹지 못한 지 오래다. 끼니는 인근 교회에서 급식 봉사를 하며 싸온 남은 도시락으로 때운다. 아들이 아프기 시작한 10년 전부터 매주 4회씩 나가는 급식 봉사는 끊이지 않는 근심 속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가 되고 있다. 한 아들은 생계를 위해 나가 살고, 다른 아들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황에서 신앙생활은 윤씨에게 큰 버팀목이다. 막내아들의 폭력이 나날이 심해져 이웃에게 도움을 구해보기도 했지만, “찾아오지 말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윤씨 집에서 큰소리가 나도 들려오는 건 걱정과 관심이 아닌 ‘시끄럽다’는 듯 냉대하는 이들의 시선뿐이었다. 윤씨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오는 본당 수녀와 교우들 덕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병원에 있는 아들도 엄마를 따라 세례받은 뒤, 입원할 때면 꼭 성경책과 묵주를 챙겨달라고 한다. 아들은 증세가 심해지기 전 몸이 아픈 본당 어르신들을 모시고 성당에 다닐 정도로 의젓했었다. 아들이 겪는 고통이 모두 자신 탓인 것만 같아 윤씨의 눈물은 마를 새가 없다. “그저 막내아들이 순한 양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아들이 제 한 몸 건사해 잘 살아갈 수 있길 하느님께 빌어요.”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 후견인 : 박진리(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수녀/서울시 남부노인보호전문기관장 “노인학대 피해자인 자매님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들의 폭력도 아닌 이웃의 무관심입니다. 성당에 가지 않는 날엔 집 전화기에 스스로 전화를 걸며 외로움을 달래고 계십니다. 자매님께 가장 시급한 지원은 열악한 주거환경, 특히 난방시설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관심과 사랑을 통해 이웃의 온기를 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성금계좌(예금주 : 가톨릭평화방송) 국민 004-25-0021-108 농협 001-01-306122 우리 454-000383-13-102 ※ 윤소화씨에게 도움을 주실 독자는 3월 10일부터 16일까지 송금해 주셔야 합니다. 이전에 소개된 이웃에게 도움 주실 분은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 담당자(02-2270-2425)에게 문의 바랍니다. 박예슬2024.03.06

아찔했던 순간 (2) 밥상머리 문제[월간 꿈 CUM] 예수, 그 이후 (5-2) cpbc 모두의 세례명(천주교 세례명 추천기) 바오로 바오로 사도가 단단히 화났다. 베드로 사도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엄중하다. “당신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단죄받을 일을 했습니다. 위선적이십니다.”(갈라 2,11-14 참조) 바오로 사도의 입에서 ‘단죄’ ‘위선’ 등 자극적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도 교회의 반석, 베드로에게 말이다. 심지어 “복음의 진리에 따르는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다”라며 독설을 서슴지 않았다.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사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문제의 발단은 먹는 일, 곧 ‘식사’(食事)였다. 바오로가 단순히 먹는 것 때문에 쩨쩨하게 베드로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식사만큼 공동체의 결속력을 공고히 하는 것도 드물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에는 함께 식사를 나눈 손님이 주인집 물건을 훔쳐서 도망갔을 경우, 주인은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추격을 시작했다. 함께 나눈 음식이 뱃속에 남아있는 동안에는 형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당연히, 초기 교회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한 식탁에 앉는다는 것 자체가 큰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바오로가 화난 것은 바로 이 식탁에서의 문제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안티오키아 교회에 왔을 때, 처음에는 이방인 신자들(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교 신앙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했다. 그런데 유대계 그리스도교인들이 안티오키아에 오자 베드로의 태도가 180도 바뀐다.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고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바오로가 단단히 뿔이 난 이유다. 물론 베드로의 이런 행동은 유대인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배려였을 것이다. 교회 전체의 선익을 위한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 이방인의 밥상에는 유대인이 먹지 말아야 할 음식들이 있을 수 있었다. 유대인이 식사 규정에 어긋나는 음식을 이방인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오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골수 유대인은 어부였던 베드로가 아니라 유대 지식인이었던 바오로다. 율법을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 한때 바오로는 베드로보다 더하면 더했지만 덜하지 않았다. 게다가 바오로의 기준에서 볼 때, 베드로는 정확히 모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오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4) 회심 이후 율법에 대한 바오로의 관점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바오로는 율법이라는 꽉 조이는 옷이 그리스도가 선포한 복음이라는 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결국 바오로는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한 구원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율법과 관련해 바오로 사도의 관점을 알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율법을 통하여 의로움이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갈라 2,15-21) 바오로는 이렇게 율법과 관련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어정쩡한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했다.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만약 바오로 사도의 확고함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까다로운 음식 규정으로 인해 맥도널드 햄버거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리스도교 국가인 미국에서 맥도널드 햄버거가 탄생하는 일도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율법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적절히 섞인 종교로 변질됐을 수 있다. 초기 교회는 이렇게 아찔했던 순간을 롤러코스터 타듯 넘고 있었다. 그렇게 위태롭게 버티던 교회에 더 큰 시련이 다가온다. 로마의 박해, 이단과 이교의 난립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언급하기에 앞서 또 다른 한 축의 역사를 살펴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재앙이 찾아온다. 로마의 예루살렘 침공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은 이제 민족 전체가 말살될 수 있는 중대한 위기에 봉착한다. 예수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환난을 이미 예고한 바 있다.(마태 24,2 참조) 그리스도교 역사와 무관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당시 세계사의 최대 핫이슈인 예루살렘 함락 사건을 건너뛰고는 이야기를 이어가기 힘들다. 예수 그 이후, 예루살렘에선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글 _ 우광호 (라파엘, 발행인) cpbc2024.04.17
![[이상근 평화칼럼] 태아와 인공지능](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3/11/29/Im51701224096562.jpg)
[이상근 평화칼럼] 태아와 인공지능이상근 마태오(미국 테네시 오크릿지 국립연구소 연구원) 낙태 허용을 주장하는 프로 초이스(Pro-Choice) 진영은 여성의 낙태 선택 권리를 강조하며, 여성 개인의 ‘몸에 대한 결정권’이 ‘태아의 생존할 권리’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회적·경제적 혹은 기타 이유가 낙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라고 보면서도, 같은 이유들이 태어나 숨 쉬는 아이의 생명을 박탈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인간에게는 특별한 가치와 권리가 있으며, 이러한 기본권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 결국 프로 초이스 진영과 상반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핵심 차이는 태아를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하는지 여부에 있다. 프로 초이스 진영이 하는 주장의 바탕에는 태아가 완전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능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으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실제로 ‘능력의 관점’에서 볼 때, 특정 시기 이전의 태아는 뇌 활동이 없으며 의사 표현 능력이 없고, 자궁 밖에서 스스로 생존할 능력도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을 살펴보면, 인간과 유사하거나 그 이상의 성과를 내는 인공지능의 예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언어 이해와 창작, 전문 분야의 지식 테스트, 때로는 감정을 모사하는 능력까지 인공지능은 점점 발전하고 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예술의 영역도 인공지능이 해내고 있는 상황이다.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서 불과 몇 달 전의 인공지능과 오늘의 인공지능의 차이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태아와, 인간보다 더 인간이 하던 일을 잘해내는 인공지능을 보며 우리는 인간의 가치가 무엇에 기반하는지 자문해야 한다. 대부분의 방면에서 태아보다는 인공지능이 더 뛰어난 인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더 큰 ‘인간의 가치’를 가질까? 태아에게 없는 뇌 활동, 인지 능력,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 가치의 필수 요소라고 한다면, 심각한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인간 가치를 폄훼하게 될 것이다. 만일 창작하고, 언어를 구사하는 존재여야 그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수십 가지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세상 모든 화가의 그림 스타일로 뭐든지 그릴 수 있는 인공지능이 이제 말문을 튼 어린아이보다 더 큰 인간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하는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하느님께 부여받은 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지,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어떤 기준을 세우더라도 인간의 가치를 폄훼하거나 인간이 아닌 것에 인간의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태아는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하느님의 창조물이며,(창세 1,27) 인공지능은 인간 삶을 돕기 위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창조물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의 태아는 사람이 만들어 낸 인공지능보다 무한히 큰 가치를 지닌다. 태아는 인간이기에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존재일 뿐 아니라, 생존 능력조차 가지지 못한 가장 약한 존재이기에 더 큰 보호가 필요하다. 성경은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잠언 31,8-9) 약한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상기해야 한다. 앞으로 점점 더 인간과 비슷한 혹은 대부분의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들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인공지능이 세상에 가져올 긍정적인 변화들도 있을 것이며, 무조건적으로 인공지능을 적대시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며, 신앙의 눈으로 세상의 변화를 지켜봐야 할 때이다.cpbc2024.03.20

평양 출신의 한 목자가 48년간 외친 평화의 노래이기헌 주교, 사제 생활 회고록 「평화를 주소서」 발간 자신의 생애와 신앙 여정을 담은 책 「평화를 주소서」를 발간한 이기헌 주교가 북한이탈주민과의 만남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밝히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아선 안 됩니다. 기도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가 사제로 24년, 주교로 24년의 생활을 돌아보며 엮은 「평화를 주소서」를 펴냈다. 일종의 회고록이지만, 분단의 역사 속 한평생 평화를 외치고 성찰한 기록물에 더 가깝다. 이 주교는 6·25 전쟁 전인 194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교구에서 사목하다 순교한 하느님의 종 이재호(알렉시오) 신부가 이 주교의 작은 아버지다. 이렇듯 북녘의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난 배경 탓에 이 주교는 통일을 간절히 염원하며 자연스레 평양교구 신학생으로 입학했다. 일생을 헌신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사제가 된 이후 이 주교가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깨달은 결정적 계기는 1989년 중국으로 떠난 성지순례에서다. 이 주교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탄압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큰 집단을 이룬 연변, 도문, 용정에서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며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아프고 외롭게 살아야 했던 동포들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고 회상했다. 또 5년간 일본 교포사목을 하면서 차별받고 어려움에 처한 재일교포들과 함께하고, 사할린에서 징용으로 끌려온 동포들을 만나며 더 깊은 차원의 평화를 성찰했다. 이후 이 주교는 2010년 최북단 교구인 의정부교구 교구장에 착좌하고, 2012년에는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장에 선임되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교회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책에는 일련의 과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주교는 “50년 가까이 사목 활동을 하면서 늘 마음 한구석에 분단이라는 현실이 아프게 남아 있었는데, 책 출간을 위해 전체적인 생활을 정리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홀가분한 기분도 들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그리 긍정적이지만 않았다. 이 주교는 “국내 정치의 이념 논쟁과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으로 한반도 평화가 항구하게 진행된 적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결국 평화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평화를 주소서’를 책 제목으로 정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이 주교는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막막한 한반도 현실에 무관심으로 돌아서고 체념하는 것”이라며 “그럼에도 우리 신앙인은 희망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주교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수난, 죽음, 부활은 모두 평화로 이어진다”면서 “평화는 결국 성경으로 귀결된다”며 성경 안에서 평화를 성찰할 것을 권유했다. 이어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깊이 성찰해보면, 평화란 적대감을 없애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평화이십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 안에 적대감을 없애고 연대해야 합니다.” 주교들은 만 75세가 되면 교황에게 사임서를 내고 은퇴를 기다린다. 이 주교도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 후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이 주교는 “사목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났을 때”라며 은퇴 후 중요한 계획 중 하나도 북한이탈주민들과 만남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 주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요한 1서의 말씀처럼, 사랑이 필요한 그들을 사랑할 때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하기 힘든 기쁨과 행복이 샘솟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가장 중요한 계획은 ‘기도’라고 밝혔다. “인간적으로는 75년이라는 세월을 큰 병 없이 지내게 해 준 것에, 사목자로서는 무탈하게 지나온 데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기도를 통해 채워나가야겠지요. 그리고 지금껏 그래 왔듯 제 삶의 첫 자리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 박민규2023.10.25

조선의 ‘평신도 신학자’ 김기호 회장의 신앙 조명초기 한국 교회 확장에 큰 기여, 선교사에게 조선어 가르치며 교리 관련 저술에 선구적 활동 제13회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학술 심포지엄 참가자들이 11월 19일 교구 가톨릭회관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춘천교구 제공 ‘평신도 신학자’ 김기호(요한, 1824 ~1903) 전교회장의 신앙과 신학적 성과를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소장 신정호 신부)는 11월 19일 교구 가톨릭회관에서 ‘개항기 평신도 신학자 김기호’를 주제로 제13회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김기호 전교회장은 초기 한국 교회 확장, 특히 교리 관련 저술에 있어 선구적 활동을 펼친 인물로 평가된다. 황해도 수안 출신으로 30세에 서울에서 홍봉주에게 교리를 배우며 신앙에 눈을 떴고, 이후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아 관서 지방 등에서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특히 1876~1890년 블랑 주교를 도와 전교 활동과 교리서 저술, 공소회장 교육 등에 봉사했고, 말년에는 47년간 이어진 자신의 전교활동을 회고한 「봉교자술」(奉敎自述) 을 남겼다. 그의 고손(高孫·5대손)이 전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다. 심포지엄 발제자들은 초기 교회에서 보기 드문 평신도 신학자의 활발한 저술 활동에 주목했다.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금경숙(마르가리타) 박사는 “김기호 회장의 「봉교자술」 저술은 그가 전교 여행 때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기록을 남겼기에 가능했다”면서 “그의 행적에서 기록을 통해 후손들과 대화를 나누는, 한국 교회에서는 독특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고 전했다. 조광(이냐시오) 고려대 명예교수는 “김기호 회장은 사상적ㆍ문화적으로 극심한 변동이 일어나던 시대에서 신앙만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박해의 물결을 이겨나갔다”면서 “조선을 찾아오는 선교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고, 조선인 회장들을 지도한 것은 물론 「구령요의」, 「소원신종」, 「성경직해」 등을 저술, 번역해 천주교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의 신학에 대한 올바른 분석이 이뤄진다면 개항기의 천주교 신앙이 갖고 있는 특성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영파(베아트리체) 해미신앙문화연구원 박사는 “김기호 회장의 저작은 한국 교회가 신앙인의 삶을 통해 복음을 증거한 역사를 확인시켜 준다”면서 “특별히 평신도 신학자들이 뒤따라야 할 신앙의 모범을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장현민 기자 memo@cpbc.co.kr 장현민2023.12.06
[갤러리 1898] 여선주·권은정·이산하 개인전, 9~17일 전시 여선주 작 ‘Heavenly path’, 2023년. 이산하 작 ‘이면의 대화’, 2023년. 서울 명동 갤러리 1898에서 여선주, 권은정, 이산하 개인전이 9~17일 열린다. 먼저 제1전시실에서는 여선주(아녜스) 작가의 ‘자연에서 배우다’ 전이, 제2전시실에서는 권은정(로사) 작가의 ‘기억 속의 선물’ 전이 개최된다. 여 작가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무한한 지혜와 아름다움을 아크릴, 수채화, 칠보 작업 등으로 표현했고, 권 작가는 자신의 그림책 「정육점 엄마」, 「박치기 발차기」의 원화 50여 점과 책에 미처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제3전시실에서는 지난 2월 개최된 ‘갤러리 1898 성미술 청년작가 공모전’에서 뽑힌 두 명 가운데 이산하(미카엘라) 작가의 작품이 소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성경 속몇몇 생물을 평면과 입체 작품으로 표현해 동식물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겨보는 계기를 마련할 예정이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3.08.02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31)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주님 성탄 (작품 1) 착한 목자 : 프레스코, 270년경, 코에메테리움마이우스, 무덤 천장화 일부, 로마, 이탈리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밤 새워 양 지키는 목자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상징 목자들에게 주어진 기쁜 소식 전해야 할 의무에서 사도들의 모습도 연상 <앞글에 이어> 그 근방의 들판에서 밤을 새워가며 목자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두루 비치면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목자들이 겁에 질려 떠는 것을 보고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루카 2,8-10) 목자들? 왜 목자들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권력이나 재력이 있는 모든 고관대작을 제치고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목자, 또는 목동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할까? 여기서 목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밤을 새워가며 양을 지키는 그들은 새벽이 오기를 누구보다도 기다립니다. 들짐승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해야 하는 그들의 처지에서는, 새벽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어둠 속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민족도, 또 수천 년 동안 구세주를 기다리며 백성을 이끌어야 했던 예언자들 모습도 연상됩니다. 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 ‘주님을 기다리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에게 오시는 빛, 밝은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물가로 양들을 이끌어 마른 목을 축이게 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그들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착한 목자의 전조처럼 보입니다.(이사 40,11; 요한 10,11-16)(작품 1) 그들에겐 이 복음을 알려야 할 의무도 주어집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여야 합니다.(루카 2,17) 이들에게 주어진 의무에서 훗날 사도들의 모습도 연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작품 2) 천사들은 목동들을 진정시키면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1-12)라고 했습니다. 구유는 알아볼 수 있는 표징으로 등장합니다. 실제로 아기를 낳아 구유에 눕히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구유에 눕힌 것은 ‘표징’의 의미로서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 이콘에는 피리를 부는 목동과 짖어대는 개를 등장시켜 이 기쁜 소식을 더욱 강조합니다. 이는 하늘의 노래와 지상의 기쁨을 대치시키는 모습입니다. (작품 2) 사도들을 보내심 : 템페라, 76,5 x 51cm, 1600년경, 레클링하우젠 이콘 박물관, 독일. 예수님께서 제자를 보내시는데,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의 약간 두려워하는 듯한 표정이 보인다. (작품 3) 라자로를 살리심: 템페라, 24 x 19cm, 15~16세기 초, 노브고로드 박물관, 러시아. 동굴·성모·아기·동물 이콘의 중앙에 있는 산에는 열린 동굴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이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는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물 방이 없었다.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혔다’(루카 2,7 참조)라고 되어 있습니다. 방이 없어 구유에 눕힌다는 것은 절박한 상황임을 드러냅니다. 근처에 아무도 살지 않는, 즉 목동들이 양을 치는 외진 곳임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관 밖에 자리한, 여행객들이 타고 온 말들을 관리하는 외양간일 수도 있고, 투숙객이 가축 냄새를 피할 수 있도록 한 외진 곳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이 동굴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콘에서는 사실적 표현보다는 관계된 많은 것들을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아마도 이 이콘에서는 외양간을 동굴로 상징화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콘에서 성모 마리아는 동굴 밖에 등장합니다. 몸을 반쯤 구부린 채 피곤한 모습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성모님은 아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 쪽으로 향해있으며,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급박한 상황에서 임신한 몸으로 겪은 힘든 여정, 목동들의 천사 목격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천사의 알림 등을 떠올리는 듯합니다. 또 아드님의 초라한 탄생의 의미, 무언가 고민에 빠져있는 듯한 요셉의 표정 등 많은 것을 생각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상황에 관한 생각이라기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본인에게 다가왔던 하느님의 섭리와 주변 상황에 대한 전체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모습에서 기쁨만이 아니라 어머니로서 인간적인 고뇌, 슬픔 등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산 중간 아기 예수 곁에 있습니다. 산은 앞서 말한 대로 하느님을 의미하기에, 아기 예수와 가장 가까운 분임을 드러냅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가까이 그릴 수는 있으나 여기서는 ‘가장 가까우신 분’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모님의 눈은 하느님의 눈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자색 겉옷(마포리온)의 머리와 양어깨에서는 상징적인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선택한 완전한 은총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을 잉태하신 분으로서 탄생 이전이나 임신 기간이나 탄생 이후에도 영혼 안에서, 육체에서도 영원한 동정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녀가 낳으신 분은 하느님이셨기에 그 본성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고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찬양하였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염할 때에는 먼저 온 몸을 깨끗이 씻기고 얼굴을 곱게 다듬은 뒤 정갈한 옷을 입힙니다. 그리고 옷과 주변 매무새를 잘 정리하고 탄탄하게 묶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정녀와 동굴 입구 사이의 아기를 보면 흡사 시신을 묶듯 포대기로 차곡차곡 감아서 마치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면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이 표징이라는 말을 전합니다.(루카 2,12) 금방 태어난 아기를 구유에 눕힌 것이 어째서 ‘누구인지 또는 무슨’ 표징이 될까? 현실은 마땅히 쉴 만한 방이 없어서 구유에 눕혔을 터이지만, 하느님의 특별하신 의도가 함께하심을 알게 됩니다. 구유는 ㅡ ‘돌아가심을 그리고 동굴 밖에 내어놓으므로 부활하심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ㅡ 시신을 담는 관(棺)을 의미합니다. 죽은 사람처럼 천으로 십자형으로 또는 엮듯이 감아놓은 모습은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요한 11,34-44)의 모습과 같습니다.(작품 3) 동굴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옛 교부들의 찬미 노래와 복음서 일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마스쿠스 성 요한은 복음을 인용하여 “동정녀에 의해서 영광의 왕이 나셨습니다. 그는 자주색 옷을 두르시고 억눌린 자를 찾아보시며 어둠 속에 갇혀있던 그들의 해방을 알리십니다”(루카 4,18-19 참조)라고 하였고, 예루살렘의 키릴(315-387)1)은 “주께서는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고 그의 몸은 죽음이라는 용을 유혹해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 쓰였습니다. 그 용은 그를 삼키러 나왔으며 삼켰다고 자만했지만, 다시 토해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동굴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동굴은 아기를 삼키려고 열려있는 괴물의 아가리이며, 죽음이고, 무덤 속입니다. <계속> 각주 1)예루살렘의 주교, 성 키릴루스 또는 치릴로. 이단을 단호히 배척하고 성삼교리 확립에 대한 공헌과 성체성사에 참된 현존을 명확히 가르침. 김형부 마오로cpbc2024.08.14
![[영화의 향기 with CaFF] (243) 나의 올드 오크](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1/09/qiJ1704779112839.jpg)
[영화의 향기 with CaFF] (243) 나의 올드 오크이주민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켄 로치 감독의 ‘나의 올드 오크’는 시리아에서 온 난민 소녀 ‘야라’와 더럼(Durham)이라는 영국 북동부 작은 탄광촌에서 쇠락해가는 펍 ‘더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나아가 이 둘로 대변되는 시리아 난민 공동체와 원주민 공동체의 관계를 다룬다. 이 영화는 켄 로치 감독의 전작들과 그 궤를 같이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는 관공서의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 때문에 정작 필요할 때 사회복지의 혜택을 못 받는 이슈를 다루었고, ‘미안해요, 리키’에서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내몰리는 택배 노동자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번에 감독은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시선을 세계적 정세로 넓혔다. 더럼에서 벌어지는 이 일은 세계 곳곳에 이주한 시리아 난민들과 원주민들의 관계이기도 하다. 야라가 이주해오던 날, 난민들의 이주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한 주민이 야라의 카메라를 고장 내고, TJ가 야라의 카메라 수리를 도와주면서 둘의 우정은 시작된다. 이 우정을 시작으로 원주민들에게 사랑방 같은 곳이었던 ‘더 올드 오크’에 시리아 난민들이 오가게 되고, 이곳에 난민들과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의 공간이 마련된다.(이 장면은 흡사 성경 속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공간을 빼앗긴 기분을 느끼며, 이런 상황을 고깝게 여기게 된다. 원주민들은 TJ를 비난하며 펍에 오지 않겠다고 하고, 시리아 난민 공동체와 원주민 공동체의 갈등은 깊어만 간다. 누군가 이주해오면, 원래 살던 주민들의 불만이 생길 수 있다. 그러지 않아도 힘든데 이주민들이 와서 더 힘들어진다고, 자기들의 몫을 빼앗아 간다고, 아무것도 없이 와서 혜택을 받는다고, 원주민들은 이주민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라를 잃고 낯선 곳에 정착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팍팍할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감독은 그들을 미화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으면서 상황을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으로 보여준다. 그의 영화는 사회 곳곳의 외면당하기 쉬운 문제들을 바라보게 하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한다. ‘나의 올드 오크’에서는 시리아 난민 공동체와 원주민 공동체가 사실 모두 같은 처지에 있으며, 서로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올해 88세가 된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이번 영화가 그의 마지막 장편 영화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켄 로치 감독의 장편 영화를 다시 못 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 ‘미안해요, 리키’에 이어 ‘나의 올드 오크’를 볼 수 있어 행복했다. 그에게 감사와 존경을 전한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 20) 1월 17일 극장 개봉 서빈 미카엘라 (가톨릭영화제 프로그래머 극작가, 연출가) cpbc2024.01.10

정치적 직분은 금하지만, 공동선 위한 참여는 가능[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2)성직자의 정치 참여 이념과 종교를 초월한 국회의원들이 포콜라레 정신으로 일치를 향한 정치인 모임을 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DB 성직자가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이 될 수 있나요? 우리나라 헌법에는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국가와 교회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는 상호 관계성이 명시되어 있습니다(헌법 제20조 2항 참조). 국가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특정 종교를 보호하거나 특권을 부여하거나 지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종교 단체들이 정당을 구성하여 활동하거나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것까지 법으로 금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국가의 안전 보장과 질서 유지, 공공복리를 위하여 종교의 정치 활동을 일부 제한할 수 있으며, 종교 행위가 명백하게 공동선을 해치며 사회악을 일으키거나 국민의 기본 의무를 회피하는 경우에는 종교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습니다. 개신교의 경우, 어떤 보편적인 규범이 없기 때문에 교단의 규정과 법규에 따라 목회자의 정치 활동을 일부 허용하기도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신자들의 정치 활동을 권장하면서도, 성직자의 경우에는 정치 참여가 가져올 혼란을 염려하여 교회법에서 이를 명백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법 제285조 3항은 성직자가 국가 권력의 행사에 참여하는 공직을 맡는 것을 금지하고, 제287조 2항은 성직자가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지도층에서 능동적으로 역할을 맡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사도좌 또는 교구장의 승인 아래 정치권력과 관계없이 복음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한시적 정치 자문 위원이나 정부의 특별한 역할을 맡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천주교 성직자의 정치 활동 금지는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어떤 직분을 가지는 것을 금지한 것이지, 복음의 빛에 따라 공동선을 증진시키고자 성직자가 공적 발언을 하거나 공개적 행위를 하는 것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세상 속 교회로 살아가면서 교회 구성원의 사회 참여를 독려하고 있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예언자적 소명을 다하라고 가르칩니다. 신부의 미사 강론과 목사의 예배 설교는 어떻게 다른가요? 신부의 미사 강론이나 목사의 예배 설교는 그리스도교 전례와 예배 행위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미사 때의 “강론은 설교의 여러 형식 중에서 탁월한 것으로 전례의 한 부분이며 사제나 부제에게 유보”(교회법 제767조 1항)된 것입니다. 강론은 주례 사제가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필요한 경우 공동 집전 사제나 부제에게 위임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신도에게는 결코 맡길 수 없습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66항 참조). 강론이 탁월한 이유는, 그것이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로 구성된 미사에서 신자들을 거룩한 성찬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돕는 전례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강론은 말씀의 신비를 신자들에게 알기 쉽게 풀어주고, 그 말씀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해주는 것이기에 성경 해석, 교리 이해, 설교의 성격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말씀 전례에서 3년 주기로 전례시기에 맞추어 미리 정해진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미리 읽고 묵상한 다음 신자들에게 올바르게 해설해 줄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영적 유익에 도움이 되는 설교로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강론은 경우에 따라 생략되어도 신자들의 미사 참례의 본질적인 면을 침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예배에서 찬양과 함께 목사의 설교는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개신교 목사는 예배에 참석한 이들이 하느님 말씀에 충만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성경 구절을 정하여 교인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며 격려하는 설교의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는 대부분 주일 예배에서 봉독되는 성경 구절을 공통적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개신교 일부 교단은 천주교처럼 전례력에 따른 독서와 복음이 정해진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교단은 목사 자신의 체험과 시대의 흐름 가운데 임의적으로 선택한 설교 주제에 따라 성경 말씀을 선택하여 해석하고 신자들에게 가르치며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 cpbc2023.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