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화와 선교,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34) 왜 천주교에는 개신교의 장로, 집사, 권사가 없나요? 지난 8월 리스본 세계청년대회 ‘십자가의 길’ 연극에 참여한 젊은이들이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장관 케빈 조셉 패럴 추기경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교회와 세상의 복음화와 선교를 위한 봉사 직무는 교파를 떠나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해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OSV 천주교의 교계 제도는 초대 교회부터 내려오는 주교, 신부, 부제를 성직자로 인정하면서 이른바 ‘삼중 직무’(사제직, 예언자직, 왕직)를 간직해 오고 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종교 개혁 이후 교계 제도를 부정하고 ‘만인 사제직’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특별한 인호를 받아 서품되어 직무 사제직을 수행하는 천주교의 성직 제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모두가 교회 안에서 동등하지만 안수와 기도를 받고 교회를 위하여 특별한 봉사를 수행하는 임직(任職)의 전통은 유지합니다. 따라서 개신교에는 사제 성품성사는 없고, 대신에 목사 안수식이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에서 ‘장로, 집사, 권사’는 목회와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 직무와 구분된 평신도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장로’(elder) 또는 ‘원로’란 신약 성경에서 알려진 초대 교회의 직무 형태에 기인하지만(1베드 5,1; 2요한 1,1 참조), 오늘날의 개신교 장로 제도는 장 칼뱅의 개혁 전통을 따르는 ‘장로교’(Presbyterianism)의 전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장로는 목사를 도와 교회 운영에 참여하는 평신도 최고의 직분을 수행합니다. 이들은 교리에 대한 수호와 제재는 물론, 교회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기에 교회 안에서 덕망이 있고 교회 운영에 자질을 갖춘 이들 가운데에서 추천되며 노회(가톨릭의 교구) 또는 지방의회의 승인을 얻어 임직됩니다. ‘집사’는 천주교의 부제직(deacon)에 해당하는 평신도 직무로 초대 교회에는 ‘교회의 봉사자’(콜로 1,7 참조) 또는 사도들을 돕는 자로서 봉사와 구제 사역을 감당하는 직분을 뜻합니다(사도 6,1-6 참조). 바오로 사도는 집사 또한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이’(사도 6,3 참조)여야 한다고 교회 봉사자의 자격을 규정한 바 있습니다(1티모 3,8-9 참조).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집사 직무를, 안수를 받아 평생직인 ‘종신 안수 집사’와 1년직인 ‘서리 집사’로 구분합니다. ‘권사’는 미국 감리회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평신도 직분으로 교역자인 목사를 도와 어려움을 당한 교우를 방문하여 전도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자 힘쓰는 평신도 직분을 뜻합니다. 감리교에서는 신앙이 돈독하고 감리회의 교리에 능통한 남녀 모두가 권사가 될 수 있지만, 장로교에서는 안수례를 받지 않은 여성만이 임명됩니다. 교단에 따라 집사의 자격과 선택의 기준은 다르지만, 교회에서 서리 집사로 5년 이상 봉사해야 하며, 성령 세례의 체험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에 세운 공로가 현저한 사람을 당회의 결의로 임명하여 치하하는 명예 권사가 있습니다. 천주교의 평신도 직분은 신품성사를 받아 직무 사제직을 수행하는 사제와는 달리 일정 기간 본당 공동체의 다양한 분야에서 봉사하는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기에 개신교의 평신도 직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세상의 복음화와 선교를 위한 봉사 직무는 교파를 떠나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해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 cpbc2023.11.29
![[전문] 대전교구장 김종수 주교 2024년 부활 메시지](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3/29/sm01711675807072.jpg)
[전문] 대전교구장 김종수 주교 2024년 부활 메시지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 + 찬미 예수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알렐루야! 우리 모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태초에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당신의 권위를 받아 이 모든 것을 다스릴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하느님의 숨을 받아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광스러운 이 모습에는 큰 위험과 도전이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하느님 뜻 곧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면서도, 늘 스스로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에 대해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5)라고 한 말 안에 인간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가장 큰 유혹이 담겨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대신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아주 분명합니다. 하느님을 닮게 창조된 우리가 하느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배반한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하여라.”(요한 13,27)라고 하셨고, 사도들은 그를 두고 “제 갈 곳으로” 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사도 1,25).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떠나 제 갈 길을 가는 곳이 곧 죽음의 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그렇게 시작된 죄를 말끔히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에 앞장서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참 생명을 깨닫게 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외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에페 2,4-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신 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하신 것은 구원의 역사에서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창조된 인간이 죄로 인해 죽음의 세력에 들자, 하느님의 외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어 죽고 부활하여 그 부활의 생명이 담긴 숨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이렇게 부활은 재창조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고, 다시 부활의 생명으로 재창조된 우리는 이제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하느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살라고 하신 말씀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다고 하느님께서 믿어주신다는 말씀이고,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신뢰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신비로운 존재인지 모릅니다. 부활의 신앙을 지닌 우리는 주님처럼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주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뜻을 설명하자면 수만 권의 책으로도 부족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 안에 주님의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하는 형제자매요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봅시다. 그리고 물어봅시다. 나에게 이웃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 사회에서 생명은 어떻게 존중받고 있고, 특별히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까? 이 세계는 어떠합니까? 많은 이들이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오래 지속되는 전쟁들로 죄 없는 이들, 평범한 삶을 살아오던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런 세계적인 상황에 대하여 “여러 나라에서 자행되었고 지금도 자행되고 있는 박해, 노예 매매, 민족 살상, 그리고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만드는 그 밖의 많은 역사적 사건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언제나, 늘 새롭게, 끊임없이 무뎌지지 않고 기억되어야 합니다.”(교황회칙 「모든 형제들」 248항)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외에도 생태 위기를 극복하자는 말은 무성하지만, 정작 그 실천은 아직 미미합니다. 급속히 발전하는 인공지능은 긍정적인 기대보다 더 큰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자비하심을 배워 선하게 살라고 예수님 안에서 다시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일이든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합시다. 당장 우리의 관심과 도움 그리고 기도가 필요한 이웃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귀한 자녀들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선한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부활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항상 행복하시기를 기도하며 주님의 강복을 전합니다. 대전교구장 김종수 주교 박민규2024.03.29

책꽂이하느님의 사랑학, 신학 장재봉 신부 / 부산가톨릭신학원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안티오키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밝히는데, 주목할 점은 안티오키아 교회가 평신도들에 의해서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중략) 아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평신도들의 ‘예수님 자랑’이 바로 안티오키아 교회의 초석이 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예수님 이야기가 마음에 담긴 것이다.” 부산교구 신학원장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를 겸하고 있는 장재봉 신부가 쓴 초보 신학인을 위한 안내서다. 믿음이 무엇인지, 왜 믿는지부터 성령과 말씀,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신학의 다채로운 주제에 대한 깊이 있으면서도 쉬운 설명은 관성적인 신앙생활도 각성하게 만든다. 시편과 아가 쓰기 노트 가톨릭출판사 정약용은 “진정한 필사는 종이 위에 베껴 쓴 넋이 아니라 영혼 속에 새겨 넣는 것이다 ”라고 했다. 성경을 필사하는 것은 신앙인의 오랜 전통이다. 그 성경 가운데 필사를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책은 ‘시편’과 ‘아가’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인 성경 가운데 ‘시편’과 ‘아가’는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이자 찬미, 노래이기 때문이다. 시의 형태로 되어 있어 문장을 음미하며 필사하기에도 적합하다. 「시편과 아가 쓰기 노트」는 순서대로, 또는 자신의 상황에 맞춰 주제를 골라서 필사할 수 있다. 짧은 묵상 글도 함께 실렸다. 특히 우리나라 최고의 종교 시인 최민순 신부가 옮긴 ‘시편’과 ‘아가’는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원뜻에 가깝고, 우리말이 지닌 아름다움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숨은 행복 찾기 이충무 교수 / 바오로딸 “‘행복’을 의미하는 ‘베아티투도(beatitudo)’. 이 단어는 ‘복되게 하다’라는 뜻의 ‘베오’와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아티투도’가 합쳐진 말이라고 합니다. 베아티투도가 의미하는 행복을 풀어 설명해 보면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우리의 행복이 달려있다’는 뜻일 겁니다.”(95쪽) 극작가, 연출가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건양대 이충무(바오로) 교수의 두 번째 수필집이다. ‘대전주보’에 연재하고 있는 글들을 엮은 책으로, 따뜻한 위로, 기분 좋은 설렘, 짧지만 긴 여운이 담긴 에세이들의 끝에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마주할 수 있다. 글과 함께 더해진 삽화는 작은 재미를 더한다. 정말 하느님이 계시는구나! 이유희 / 비지아이 서울에서 택시기사로 일하는 이유희(바오로)씨의 이야기다. 6·25전쟁 중에 태어나 배고프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저자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현실에 비관해 신앙마저 내려놓는다. 오랜 냉담 중에 철야 기도회에 참석한 그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서, 소소한 일상에서 주님을 체험한 사연들이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하느님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굳이 필요 없는 글이지만 모든 것을 갖고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 모든 것이 부족해서 불행한 사람, 실망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 특히 냉담 중인 교우들에게 하느님을 만난 하얀 기쁨을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윤하정2023.03.17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5주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cpbc.co.kr/CMS/newspaper/2023/02/rc/840048_1.3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5주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복음의 앞 문맥을 살펴보면, 산상수훈 담화문을 시작하는 ‘참행복(진복팔단)’에 바로 뒤이어 나오는 구절들이 오늘의 복음 구절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행복선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 하신 다음에 바로 오늘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씀이 이어지기에, 여기에서 ‘너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참행복의 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금과 빛은 일상생활에서 보거나 성경의 전통에서 볼 때, 굉장히 중요한 은유입니다. 예로부터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낼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첨가물일 뿐만 아니라, 염장(鹽藏)을 통해 식료품을 오래 저장하는 데에 필수적인 물품이었습니다. ‘빛’은 신약성경, 구약성경을 막론하고 익숙하고 중요한 은유인데, 신약성경이 아직 쓰여지기 전인 예수님 당대에는 유일한 성경이었던 구약성경에서는 ‘빛’이 주로 ‘하느님, 메시아,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 토라(율법), 성전, 예루살렘’ 등을 가리키는 은유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청중인 당대의 유다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렸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너희는’이라는 희랍어 원문 표현에서 강조법을 써서 “(예수님 당신을 따르는) 바로 너희 자신이 빛과 소금”이라는 뜻으로 ‘너희’를 강조하여 표현하십니다. 뒤이어지는 산상수훈 담화문(마태 5,17―7,12)의 가르침들이 말하자면, 어떻게 살아야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의 모습을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담화문 대신에, ‘빛’을 모티브로 오늘 제1독서를 복음과 연결지어 읽어 보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곧,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는 길은,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주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가 ‘뛰어난 말이나 (인간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뛰어난 언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복음 선포하셨듯이(제2독서),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 등을 통해 화려함을 자랑하기 바쁜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적으로) 뛰어난 능력이나 인간적인 드러남’으로써 ‘빛’이 되는 게 아니라, 이웃들에게 애덕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거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 자신이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촉구하십니다.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서울대교구장) cpbc2023.01.31

주님, 진실하고 따뜻했던 어머니가 하늘에서 더 행복하게 하소서[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4)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하) 소설가 박완서씨 환갑 기념 축하식 성탄 자정 미사, 기쁨과 감동 솟아올라 박완서가 가톨릭 신앙을 갖기로 결심한 후부터 세례받을 때까지 몇 년 걸렸다. 이유는 동네에 성당도 없었고 성당으로 인도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일에 명동대성당에 가보긴 했으나 신앙과 연결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잠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곳 아파트 단지 내에 성당이 있었다. 그해 성탄절이었다. 텔레비전에 성탄절을 맞은 명동대성당의 모습이 나왔다. 갑자기 성당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아파트에 있는 성당으로 갔다. 상가 4층에 자리 잡은 성당이었다. 신자들도 너무 많아 복도와 계단까지 꽉 찼다. 무질서했다. 그런데 미사가 시작되자 질서가 잡히며 고요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거의 세 시간 동안 성탄 자정 미사를 봉헌했다. 구유 경배 예절까지 하고 나왔다. 밖은 무척이나 추웠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뜨거운 기쁨과 감동이 용솟음쳤다. 그 후, 같은 단지에 사는 교우의 권유로 교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다. 어떤 사람이 박완서에게 종교에 너무 깊이 빠지면 소설을 못 쓴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완서는 ‘생명력 있는 말에는 힘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고, ‘문학과 종교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잘 통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요한 복음서 가장 좋아해 박완서가 신약 성경을 처음 통독한 것은 마흔을 바라볼 때였다. 성경 통독은 종교적인 갈망보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고 시작했다. 박완서는 복음서 중에 요한 복음서를 가장 좋아했다. 왜냐하면 요한 복음서는 서술이 특이하고 힘이 있고, 예수님을 보는 시각이 다른 복음서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고결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용기를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박완서는 복음을 읽을 때마다 깊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놀랍고도 황홀했다. 또한 박완서가 가장 좋아한 예수님 말씀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였다. 그 말씀은 ‘예수님과의 첫사랑’이었으며 ‘예수님께 통하는 관문’이었다. 그리고 또 좋아한 성경 말씀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신분에 상관없이 식탁에 초대했다는 말씀이었다. 초대받은 손님은 거지, 장애인, 세리, 매춘부로 당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면서 깊은 위로와 용서를 받았다. 특히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할 생각도 감히 하지 못하고 그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서 물끄러미 예수님만 바라보던 세리 자캐오에게 예수님께서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깊은 감동을 주었다. 반면에 성경을 읽었을 때 이치에 맞지 않아 화가 났던 말씀도 있었다. 바로 하늘나라를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비유한 마태오 복음이었다. 하루 종일 일한 일꾼, 반나절 일한 일꾼, 오후 늦게 일한 일꾼 모두에게 동일한 임금을 준 것은 화가 났다. 분명히 불공평한 일이었다. 박완서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왜 그들은 온종일 일자리를 못 얻었고 서성거리고만 있었을까. 겉모습이 초라해 보였거나 몸이 약해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주인 눈에 들어올 정도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박완서는 그런 불쌍한 일꾼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꼴찌 인생들에게도 똑같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이라 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인연 박완서는 서울성모병원에 입원 중인 이해인 수녀에게 문병 갔다. 그런데 같은 병동에 김수환 추기경이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꼭 뵙고 싶었다. 그러나 병이 위중해 문병을 사양한다고 하고 또한 편안한 안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뵙기를 단념했다. 박완서는 예전에 어느 신문사 초대로 러시아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구경하러 갔었다. 2층의 자리였다. 김 추기경도 초대받아 그곳에 앉아 있었다. 박완서는 추기경과 나란히 공연을 관람했다. 추기경은 제의(祭衣)가 아닌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무척이나 가볍고 작은 분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공연이 끝나자 추기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뜨겁게 박수쳤다. 계속해서 박수쳤다. 박완서 표현대로 ‘연예인에 열광하는 청소년’과 같았다. 박완서는 추기경의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감동했다. 그 후, 박완서는 추기경을 모시고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앞에 서 있던 추기경은 옆으로 비켜서며 박완서에게 먼저 타라고 했다. 사양하자 “레이디 퍼스트!”라고 했다. 박완서는 그런 말에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먼저 탔다. 그러면서 추기경에게 “영 레이디가 아니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추기경은 “나보다 영(Young)이지요” 했다. 박완서는 추기경의 이러한 모습에서 인간적인 따뜻함과 유머를 느꼈다. 박완서는 추기경을 만날 때마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연상되었다. 집안 식구들은 할아버지 곁에 앉는 것을 어려워해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완서는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받아 늘 같은 밥상에 앉았다. 추기경과 함께 식사할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추기경이 선종했을 때 박완서는 추모하는 글을 썼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시고 나서 접하게 된 그의 어록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바티칸은 지구 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다. 이 작은 나라가 전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제로에 가깝지만,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무한대다.’ 그게 바로 가톨릭 정신이라면 김수환 추기경님이야말로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교회였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소설가 박완서는 의정부교구 구리 토평동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지병으로 선종했다. 박완서씨의 장례 미사에서 조광호 신부가 고인의 관에 성수를 뿌리며 고별 예식을 주례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봉사하는 마음으로 박완서는 서울주보에 ‘말씀의 이삭’을 3년 동안 연재했다. 그 글을 시작할 때 교만한 마음에서 쓰기 시작했다. 세례받은 지 15년이나 되는데 그동안 봉사한 적이 없었다. ‘말씀의 이삭’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나도 봉사라는 거 한번 해볼까’하는 마음으로 승낙했다. 그런데 신앙 글은 글재주만으로 써지는 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부터는 성경을 자세히 읽고 깊이 묵상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을 했더니 비로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기쁘고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박완서는 노년을 경기도 구리 아치울에서 보냈다. 그곳 토평동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성당 1층 작은 쉼터에 자신이 소장한 책을 기증해 본당 신자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박완서는 지병인 담낭암으로 여든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 미사는 토평동성당에서 봉헌되었다. 이해인 수녀가 추모 기도를 했다. “생명의 하느님/ 진실하고 따듯하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지상의 소임을 다하고/ 눈 오는 날 눈꽃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한 생을 마감한 우리 어머니를/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더 행복하게 해 주시기를 부탁드려도 되겠지요.” 참고자료 :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세계사」 2004 ▲박완서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열림원. 2008. ▲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현대문학. 2010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세계사. 2020 ▲공선옥 외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생활성서. 2007 ▲평화신문 엮음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 ▲백형찬 「나의 아름다운 벚꽃동산」 태학사. 2018 ▲백형찬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에게」 태학사. 2015. ▲평화신문(2011.1.30.) ‘한국 문학계 큰별 박완서 작가, 주님 곁으로’ ▲가톨릭신문(2011.1.30.) ‘고 박완서 작가 삶과 신앙’ ▲오광수. 「박수근」 시공사. 2002 cpbc2023.06.14
![[제11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하느님을 만나면서 삶은 다시](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3/12/VUy1710223289768.jpg)
[제11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하느님을 만나면서 삶은 다시서지현(아녜스, 독일 쾰른한인성당) 새벽 4시 어둠 속에서 조용히 호텔 로비를 향해 걸었다. 사위는 어둠 속에 묻혀 있었고 얕은 조명을 깔아놓은 로비는 살짝 흥분한 새벽의 아스라함을 풍겼다. 아직 아무도 나오지 않은 이른 시간, 폭풍 전야처럼 조용했지만 심장의 두근거림이 주위를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 잠시 후 리셉션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저 멀리 이미 익숙해진 가이드의 움직임이 복도 끝에서 보였다. 잘 잤냐는 인사를 입으로 내뱉지도 못하고 눈으로만 말하는 그녀 역시 사뭇 긴장되어 있는 듯했다. 우리는 침묵 중에 새벽 공기를 나누며 다른 일행들을 기다렸다. 베들레헴 주님 탄생 대성전으로 향하는 길은 다른 일정과는 달랐다. 이곳은 러시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함께 성당 소유권이 나누어져 있기에 약간의 분쟁들이 수시로 있고 그래서 미사 참배는 무산될 수도 있다고 했다. 오늘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에 원하는 사람들만 새벽에 내려오라는 안내를 받은 터라 기도하는 마음이 더 간절했다. 5시로 예정되어 있는 작은형제회 수사님들의 구유 동굴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순례 일행들이 하나둘 로비로 모여들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헤드셋으로 속삭이듯 말하는 가이드의 목소리를 따라 우리들은 조용히 그림자처럼 이동했다. 그 누구도 개인적인 질문이나 잡담을 하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대성전의 좁은 문을 지나 긴장된 발걸음으로 성전의 가장 끝 부분에 위치한 주님 탄생동굴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구유 동굴로 향하는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우리들은 잠시 그곳에서 기다리라는 안내를 받고 망연히 그 앞에 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우리들은 다시 주님 탄생 성당과 연결된 가타리나 성당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수사님들의 미사가 시작되어야만 문이 열리기에 그 앞에서 여행자 무리들이 길을 막고 서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개인 기도를 하며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성당은 어두웠다. 그저 희미한 불빛의 벽등과 촛불만이 큰 성당의 실루엣을 드러나게 할 뿐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내가 언제나 그러했듯 성당을 둘러볼 생각도 못 한 채 아무렇게 구겨져 고개를 떨구고 기도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데 눈앞으로 짙은 어둠이 펼쳐졌고 그 어둠 속에서 커다란 뱀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환영처럼 눈앞에 펼쳐진 밤하늘엔 세 개의 붉은 눈을 가진 커다란 용 같은 두 마리의 뱀이 쉬익 쉬익 소리를 내는 듯 생생하게 내 앞에서 날아다녔다. 커다란 몸통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것만 같아 등골이 오싹해져 눈을 뜨려 했지만, 떠지지 않았다. 순간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힘에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아무리 눈을 뜨려 해도, 떠지지 않았다. 이어 헤드셋으로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유 동굴로 이동합니다.” 나는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내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때 가이드가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일이야?” “눈이 떠지질 않아요.” 여행 내내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낸 가이드는 아주 침착하게 나를 이끌고 구유 동굴 입구 문 앞에 세웠다. 또다시 잠시 기다리라는 안내를 받는 동안 나는 성당 문 앞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주님, 문을 열어주세요.’ 닫힌 문 앞에서 죄의 용서를 빌고 자비를 청하는 마음이 아니라 거의 살려달라는 절규였다. 나를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덤벼들어서 오는 공포는 아니었는데 쫓아다니는 그 붉은 눈의 뱀이 무서웠고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문 안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더이상 어떤 공포도 나를 뒤쫓지 못할 거라는 확신, 하느님의 품만이 나의 피난처라는 믿음, 그런 것들이 본능처럼 닫힌 문을 두들겨댔다. 어린 시절의 나는 종종 물건이 되었다. 내가 눈만 감으면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다 생각했고 나는 책상 밑에서 책상이 되었고, 벽에 껌처럼 붙어서 벽이 되곤 하였다. 벽의 세모진 모퉁이에 처박혀 눈만 감으면 다른 세상에 존재했다. 싫다는 소리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가족들은 내게 ‘예스맨’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모든 것에 ‘예’ 하고 답하는 착한 딸. 문이 열렸다. 안에서 수사님들의 라틴어 기도 소리가 천사의 소리처럼 퍼져 올라왔다. 얼굴이 온통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어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내려가는 길은 어둡고 좁았다. 좁은 구유 동굴 안은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 끼여 떠밀리기를 반복하다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엎드린 채 미사를 올렸다. 아쉽게도 우리들은 성체를 모실 수는 없으니 차례차례 줄을 지어 구유 경배를 하고 나오면 된다고 했다. 그제야 큰 산을 넘고 난 듯 감사와 기쁨이 몰려왔다. 신기하게도 나는 몸을 일으킬 수 있었고 눈도 떠졌다. 일행을 따라 앞으로 밀려 밀려 겨우 구유를 경배할 수 있었다.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허락되질 않았다. 예수님의 탄생 터가 온전히 가톨릭 신자들만을 위해 있을 수 없고 종교지파의 이권 다툼으로 얼룩져 있다는 말이 실감 났다. 입구 쪽으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밖을 향해 올라가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제서야 나는 그곳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구유 동굴은 내 상상과는 너무나 다르게 시장통 같았다.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이곳에 천국이 펼쳐져 있을 거라 상상했었다. 예수님 탄생 터 또한 얼마나 성스러울까 잔뜩 기대했지만, 너무나 평범해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어수선한 곳이, 거룩해 보이지도 않는 곳이 내겐 무덤 같았다. 그래서 생명과 죽음이 한순간이구나 싶었다. 그러자 마음 안에 가벼움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저곳에서 눈물로 죄의 더러움을 벗겨냈고 이제 나는 아기처럼 새로 태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은 다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가타리나 성당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또다시 성지순례 일정을 함께 시작하는 다른 일행들을 기다렸다. 깊은 물 속에서 건져 올려진 듯 온몸이 물로 가득 찬 느낌이었지만 나는 매우 순결하고 거룩해진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겨 제대를 정면으로 하고 조용히 앉아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렸다. 감사와 찬미 영광 받으소서, 그 순간 눈앞이 순식간에 밝아지기 시작했다. 눈앞으로 펼쳐진 하늘 위로 펜싱 칼 에페처럼 생긴 길고 가느다란 칼이 불쑥 보였다. 나를 노리던 그 뱀은 보이지 않았다. 아, 하느님! 숨이 막혔다. 그 충만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전율과 환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눈을 뜨자 가타리나 성당의 제대 위쪽의 둥근 창 사이로 온통 빛으로 가득 찬, 빛 자체인 태양이 찬란하게 떠올라 있었다. 어둠을 삽시간에 몰아내고 태양은 자비로 충만한 하느님처럼 그 위용을 드러냈다. 성당 안은 빛의 물결로 거룩해졌다. 열흘간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마치고 첫 평일 미사였다. 성당 가는 길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진 나는 평소에 잘 앉지 않는 제일 앞쪽에 자리를 잡고 잠시 기도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입당 성가를 안내하는 사회자의 소리를 듣고 기도를 마치려는데 눈이 떠지지 않았다. 순간 당황하였는데 또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내리는 통에 너무 당황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까 싶어 닦아낼 수조차 없었다. 이건 뭐지, 그냥 드는 생각에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넋을 놓고 있는데 신부님의 제의가 펄럭거리며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미사가 시작되는구나 싶어 두 손을 모으고 막 성호를 그으려는 순간이었다. 신부님이 ‘성부와’라고 하자 갑자기 눈앞에 베들레헴에서 본 그 칼이 내 심장을 가르며 꽂혀 들어왔다. 세 번의 간격을 두고 쑤욱 쑤욱 깊게 박히는 소리까지 들렸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해버렸다. 칼을 부여잡고 미사를 봉헌하는데 주변이 느껴지지 않았다. 작은 경당에서 봉헌하는 미사는 신자 수가 얼마 되지 않아 오래 걸리지 않았고 미사가 끝나면 그저 고백성사를 해야겠다 싶었다. 이스라엘에서 돌아올 때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거룩한 칼 때문에 성녀가 된 듯 교만했구나 싶었고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때의 나를 보았던 한 자매님은 내 얼굴이 너무 창백해 곧 쓰러질 듯 보였다고 했다. 또 그때 미사 후에 총 고백성사를 한 시간가량 해주신 신부님은 훗날 그 날을 기억하고 계셨다. 미사를 집전하러 들어서는데 맨 앞에 앉아있는 한 자매가 이상하게 불쌍해 보여 시선이 갔다고 했다. 까리따스 일을 하시는 그 신부님은 불쌍한 사람이 많이 만나는데 그 날의 나는 자신이 만나온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해 보였고 그래서 기억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마치고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다는 게 신기했다. 슬프거나 두렵지 않았고 그저 당황스러웠을 뿐이었다. 내게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성지순례를 마치면서 가이드도 그날의 새벽을 기억했다. 이십 년을 넘게 성지순례를 안내하며 많은 신자들을 만나는데, 가끔 하느님께서 무슨 일인가 하시는구나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그날 아침에 그렇게 보여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고 했다. 그랬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는 알지 못하는 일이. 나는 고해성사를 하며 그 칼이 나를 지키는 칼이라 했고 고해 사제는 내게 그 칼이 나를 산산이 찢을 것이라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가톨릭 학교에서 단체로 세례를 받고 대학 다니며 냉담자가 되어 살아온 내가 다시 돌아온 탕자처럼 성당으로 돌아온 지 5년도 안 되었기에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2003년 12월 23일 교통사고가 났다. 아이 둘을 태우고 내가 운전해서 시댁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아들을 잃고 아홉 살 난 딸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나는 몇 군데가 찢어진 상처 말고는 멀쩡하게 살아남아 아들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뇌압이 차면 바로 수술해야 하고 생명이 오가는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려면 반경 2㎞ 내에 있어야 하는 중환자실 보호자가 되었다. 코마 상태의 딸을 살리는데 온통 매달린 나는 아들도 제대로 보내주지 못하고 가슴 밑바닥에 꽁꽁 숨겨두었다. 내게서 아들은 죽지 않았다.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 죽을 수 없다 생각했다. 그 생각은 죽은 영혼을 되돌리는 주문을 외우는 데 전념하게 했다. 불가에서는 49일 동안 영혼이 구천을 떠도는데 그 영혼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주문을 외우면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았다. 내겐 시간이 없었다. 엄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엄마가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녀는 내림굿을 받아야 하는 신기가 있었고 그것을 거부하면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무당이 되느니 불가에 귀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젊은 날을 보냈고 나는 늘 비어있는 집에서 엄마가 그립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았다. 그런 엄마가 드디어 내림굿을 받기로 결정했고 엄마는 집에 신당을 차렸다. 그리고 나는 냉담자가 되었다. 엄마가 집에 없던 시절,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 성모당이 있었다. 가톨릭 학교에 다녔던 나는 성모님을 엄마처럼 생각한다는 종교 시간 수녀님 말을 듣고 종종 성모당을 갔다. 그곳에 있으면 너무나 편했다. 열세 살의 나는 허락도 없이 엄마의 빈자리에 성모님을 모셨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다. 엄마는 내게 엄마로서 자격이 없기에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이제 엄마 행세를 하려는 그녀는 내게서 그 자유를 거두어갔다. 그것이 비록 내 의지였지만 고등학교를 마치고 수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단칼에 잘렸고 예스맨인 나는 바로 생각을 접었다. 매일 새벽 6시 고3 수험생이 성당에 가서 했던 기도는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교통사고로 시각장애인이 된 딸은 어린 시절 화가로서 가졌던 재능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아이는 24시간을 음악과 함께 했고 음악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차 안에서 자신이 요즘 즐겨 듣는 노래라며 들려준 노랫말 안에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나를 쳤다. 누구 앞에서도 심지어 나 자신 앞에서도 울 수 없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여전히 법복 같은 옷을 입고 아들의 죽음으로 울 자격조차 없는 죄인처럼 무릎이 닿도록 매일 백팔 배를 하며 지냈다. 무당으로 비록 3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엄마는 여전히 나의 모든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고 엄마의 말에 무조건 복종했다. 엄마는 ‘죽은 아들을 위해 10년 동안 제를 올려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런 내게 하느님이 다시 찾아오셨다. 내 생각,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2008년 우리는 독일로 이민을 갔다.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영어도 독일어도 못하는 나는 한 살 난 아이를 포대기에 들쳐 업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세 살 딸아이와 시각장애를 가진 열세 살 딸을 데리고 베를린에서 한국식당을 열었다. 인천공항에서 나는 이미 알았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이 땅을 떠나는 순간부터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그 노래로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다시 만났고 딸은 음악적 재능으로 독일 유학을 꿈꾸게 되었다. 아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교 집안에서는 딸만 셋인 내가 한 선택에 찬성했다. 독일에서 유일하게 힘이 되어줄 하느님이 계시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 식당 운영은 힘든 일이었지만 처음부터 주일은 문을 닫는 원칙을 정했기에 내게 주일은 유일하게 하느님과 보내는 날이 되었다. 주변 가게가 주일에 문을 연다고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밤 12시가 다 되어 집으로 향하는 길은 묵주 기도를 5단 바치고 나면 도착했고 비록 성당의 신심단체에서 활동하진 못했지만, 주일은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가게도 안정이 되어가고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고 큰딸은 여러 가지 문제를 겪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넘어가 주곤 하였다. 2015년 여름이었다. 늘 아이들과 함께 지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해서 1박 2일의 주일학교 여름 신앙학교를 매번 참석해 성당행사를 도와왔었다. 그런데 그 해에는 특별히 보조교사로 자청해 봉사를 했다. 그날 밤, 아이들이 모두 텐트로 들어가 잠이 들자 나는 오랜만에 선생님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다 텐트에서 소란스러움이 일었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가고 신부님과 나만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 다시 나를 일으키셨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별이 유난히도 많아 마치 샘이 난 듯 초록의 나무들이 바람 끝을 흔들어댔지만, 그 반짝임이 온 우주를 정지시켜버릴 듯한 여름밤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독일에 오게 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사고 이야기를 꺼냈다. 신부님은 죽은 아들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고 나는 그 순간 말을 잇지 못한 채 펑펑 울었다. 내 안에 꽁꽁 숨겨두었던 봇물 같은 눈물이 밤새도록 흘렀다. 나는 그제야 죽은 아들과 이별을 했다. 사고 때 이미 나는 죽은 존재였고 12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없고 살아남은 자로서 해야 할 책임감과 의무만이 있는 허깨비, 성경에서 말하는 그저 살덩어리에 불과했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신다 했다. ‘딸아,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신청했다. 주방장으로, 또 운영자로서 가게를 열흘간 비우는 일을 불가능했다. 아이들 학교 보내는 일도, 그밖에 떠안은 많은 문제들은 절대로 나를 이스라엘로 보낼 수 없었지만, 하느님께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당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그런 나를 사랑한다는 당신은 누구인지 너무 궁금했다. 그곳에서 모든 의문들을 풀어주고 나를 위로해주실 당신이 기적을 행하시리라 굳게 믿었고 나는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하느님을 만나면서 삶이 다시 시작된다고 하였던가. 이스라엘 성지순례 후 내 삶은 달라지고 있다. 하느님 없이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모든 의사결정에 있어 하느님을 항상 먼저 둔다. 하느님께서 주신 그 칼이 나를 더 산산이 부서뜨리길 기도한다. 내 의지와 생각이 땅바닥에 짓밟히고 사람들이 나를 벌레처럼 취급하고 더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곤두박질치게 할 때 하느님은 항상 함께해 주시며 나를 존귀하게 만드신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순간에도 악을 선으로 이끄시는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기적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숨은 그림들의 퍼즐을 성경에서 하나씩 발견할 때 그 현존하심을 깨닫게 된다. 다 부서져 파편같이 쓸모없이 보이는 사소한 삶의 조각들이 성경과 만나고 제 빛을 찾아가는 매 순간이 내겐 기적이다. 서지현(아녜스, 독일 쾰른한인본당) 2024.03.13

순례는 무엇이며 어떻게 할 것인가순례의 개념과 역사, 오늘날의 방향성 등 정리 순례 패러다임 앙드레 브루예트 신부 지음 권영파(베아트리체) 옮김 이용호 신부 감수 기쁜소식 “순례의 정의에 있어서 핵심 요소는 헌신적인 마음으로 성스러운 장소를 찾아가는 여행(journey)이다.”(24쪽) “순례와 종교는 깊은 관계를 지닌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종교적 이유로 순례를 해왔다. 일부는 참회의 의미로, 다른 일부는 서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많은 사람이 회심과 새로운 목적을 위해 순례를 떠났다. 순례에는 의례와 종교적 상징이 수반되었다.”(‘도입’ 중에서) 그리스도교 성지순례의 역사적인 기원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합법화되면서 성지순례의 문은 활짝 열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지상의 교회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순례자 교회’라는 명칭을 채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지순례의 지속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는 신학적인 측면에서 순례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캐나다 출신 예수회 사제인 앙드레 브루예트(Andre Brouillette)는 「순례 패러다임」이란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순례에 대한 개념과 역사, 오늘날 순례가 갖는 방향성 등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뿐만 아니라 신학이론과 같은 교회의 순례 가르침과 뚜벅이 순례의 간극을 성경과 이냐시오 성인의 순례 및 교황의 실천적 순례 체험으로 메꾼다. “하늘에 있는 교회는 문자 그대로 어떤 장소에 영원히 남아 있는 교회로 묘사되는 반면, 대조되는 순례자 교회는 지상에 단순히 있는 교회가 아니라 움직이는 교회로 제시된다. 순례자, 즉 한 장소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하늘에 종말론적 목적지를 내재한 채 공간을 이동하는 교회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순례자 교회’는 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교회, 즉 ‘순례하는 교회’이다.”(224쪽)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첫 회기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인 1962년 10월 4일, 교황 요한 23세는 거의 한 세기 만에 처음으로 로마를 벗어나 로레토와 아시시로 하루 동안 ‘사도적 순례’를 떠났다. (중략) 그는 이 순례가 봉사와 형제애, 평화와 질서 있고 보편적인 진보라는 영적인 영역 지배를 향한 교회의 여정을 상징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250쪽)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추기경은 추천사에서 “곧 맞이할 2025년 희년의 모토는 ‘희망의 순례자’”라며 “한국과 다른 여건에서 실행하고 있는 순례신학을 성찰하고 숙지하면서 한국교회의 역사, 문화, 전통과 어울리는 순례신학과 영성을 성찰하고 새롭게 나아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저자는 미국 보스턴칼리지의 교수로, 성령론과 구원론에 대한 연구를 순례와 연결함으로써 현대 가톨릭 순례신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갈매못성지와 솔뫼성지에서 20년간 순례자 사목을 담당하며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순례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이용호 신부가 이 책을 찾아내 내용을 감수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3.11.01

포콜라레 영성, 사랑과 일치 안에서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 제시[함께 걷는 시노드 여정] (12·끝) 포콜라레 영성으로 본 시노달리타스 지난해 4월, 포콜라레운동 마가렛 카람 회장과 헤수스 모렌 세페다노 공동회장이 한국을 방문해 한국 포콜라레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문창우 주교 제공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는 교회의 새로운 용어가 아니라 교회의 전통적인 의사결정과 실천방식을 요약한 단어입니다. 곧 시노달리타스는 전통적으로 교회가 어떤 결정을 할 때 신앙감각을 지닌 하느님 백성의 의견을 경청하고 함께 도출된 결론들에 대해 교회의 권위로서 최종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제16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총회 제1회기 보고서는 ‘교회 영성’에 대한 다양한 은사(식별의 도구)를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많은 교회 영성의 사도직 안에서 ‘포콜라레 영성으로 본 시노달리타스’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따뜻함(벽난로)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는 상대방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지속적인 경청을 통하여 자연스러운 신앙감각(Sensus Fidei)으로 식별하여 모두가 한마음을 품는 따뜻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 이전 한국 천주교회는 주일 미사 참례율이 18.3%(2019년)였지만 최근에는 13.5%(2023년)입니다. 코로나가 끝났음에도 참례율이 회복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교회가 따뜻함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따뜻함은 한국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감각인 ‘거룩함의 공동체’를 통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친교·일치) 시노달리타스는 세상을 향해 계속 진행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고, 세상이 교회를 향하려면 하느님 백성들이 친교를 통해 일치해야 합니다. 먼저 세상을 향한 교회는 힘들고 지친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영혼의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입니다. 분쟁과 이념과 대립의 현 시대를 성모님이 하느님께 시선을 돌려 오롯이 봉헌하셨듯이 나라와 민족, 남녀 간 다양성을 인정하고 교회가 먼저 나누며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라는 예수님 기도를 실천하는 일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기(말씀 살기와 참여) 제16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모든 믿는 이가 적합한 자격을 지니고 성령께서 각자에게 주신 선물(은총)을 통해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교회헌장(제12항)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평신도의 참여와 부름의 은총으로 교회 쇄신과 더 폭넓은 교회 건설을 위해 유익한 여러 가지 활동이나 직무(사제직·예언직·왕직)를 받아들이고 준비하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주교, 사제 중심의 성직주의를 버리고 평신도, 수도자와 함께 교회의 본래 모습인 사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 모두는 각자의 소명(서로 사랑하기)과 카리스마(말씀 살기) 안에서 하나 됨의 ‘일치’를 기억하고 희망해야 합니다. 여정의 교회(선교와 사명)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고 성경은 말합니다. ‘식별의 시간’을 가지고,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명하십니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시간) 안에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낳고 가슴 찔리는 고통을 받으신 후 하늘 위로 승천하시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는 이 모든 사건을 품어 안으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배신과 회심처럼 우리네 복잡한 일상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마리아처럼 성령의 거룩한 ‘식별의 시간’을 요구하십니다. 마리아의 시간(신비)과 베드로의 시간(현실)의 여정 안에서 우리의 사명은 종교의 민감한 문제들(성직중심주의·특정주의·성소수자 문제·탈교회화 등)을 반성하고, 환경·인권·기후 위기들을 올바르게 성찰해 교회 공동선을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합니다. 깨어 있기(현 순간을 살아가기) “우리의 모든 노력은, 우리의 손에 주어진 유일한 시간인 현재의 이 순간을 향해 있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이 순간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영혼의 깊은 곳에서 분명히 드러나 보인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 그러므로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하는 것은 ⋯ 우리의 삶이었습니다.”(포콜라레 영성, 이하 ‘영성’) ‘영성’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다른 많은 영성과 나란히 하느님께 도달하는 하나의 길을 제시합니다. 복음에 근본을 둔 ‘영성’은 더불어 살게 하는 강한 공동체적 특성이 있는데, 어디서든지 일치를 이루게 하며, 오늘날 하느님 백성들의 영신적 갈증에도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영성’은 먼저 사랑이신 하느님을 깨닫고 그분 뜻을 식별하고자 노력하며, 이웃사랑을 통해 거저받은 사랑을 그분께 되돌려주고자 합니다. 말씀에서 빛을 받으며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이웃과 서로 간의 사랑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삶에서 오는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일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우리 노력의 답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일치 안에서, 성체를 통해 양분(사랑할 힘)을 취합니다. 교회와의 일치 안에서 마리아처럼 세상에 예수님 현존을 낳아주고자 노력합니다. 이 세상에 우리 가운데 예수님 현존을 가져가는 것이 포콜라레 영성의 소명입니다. 포콜라레 운동(Focolare Movement)은 1943년 이탈리아 북부 트렌토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확산된 가톨릭의 사도직 영성·활동 단체이며 ‘마리아 사업회’라고도 불립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트렌토시가 폭격에 모든 것이 파괴되고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그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없는 하느님을 유일한 자신들 삶의 ‘이상(理想)’으로 선택한 끼아라 루빅과 그의 첫 친구들로부터 이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이탈리아어로 ‘벽난로’를 뜻하는 포콜라레(Focolare)는 분열과 갈등으로 얽힌 세상에 ‘서로 간의 사랑과 모든 이의 일치’를 목적으로 창설된 영성 운동입니다. 포콜라레 공동체는 서로의 성소와 나이·신분·언어·문화가 다르면서도 모두를 하나로 엮어주는 ‘말씀’ 한 구절을 매달 선택해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살면서 서로 형제적 사랑을 나누고자 노력합니다. 저도 주교직을 수행하고 있는 한 신앙인으로서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살아내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훈련과 사랑 안에서 작지만 저의 경험담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가 포콜라레 회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문창우 주교 제공 주교단 ‘일치와 연대’ 한층 높이는 소중한 원동력 <분기별로 열리는 ‘주교 영성모임’> 저는 매년 분기별로 ‘주교 영성모임’에 참가합니다. 주교님들이 이 모임을 자발적으로 시작한 지도 20년이 넘어갑니다. 저는 유흥식 추기경님에 이어 2021년부터 ‘주교 영성모임’에서 봉사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매번 은퇴하신 주교님들을 포함해 모든 주교님께 모임 개최 알림(메일)을 보냅니다. ‘주교 영성모임’을 개최하는 교구에 주교님들 명단과 프로그램을 전달합니다. 이후 모임과 관련한 사항을 조율하고 확인합니다. 1박 2일의 여정에서 주교님들이 기쁘게 참석하고 프로그램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점검합니다. 모임을 마무리하고 회의록을 점검하면서 감사의 편지(Thank you letter)를 보냅니다. 주교님들의 격려와 감사 인사를 받으면서도 가끔 실수를 범하면 봉사를 잘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주님 말씀이 마음에 강하게 울려왔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힘을 느꼈으며, 즉시 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다시 시작했습니다. 제 부족한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주교님들께 양해를 구하기도 하고, 다시 올바르게 점검하면서 원활한 진행을 위해 노력합니다. 저에게는 작은 부담감이 몰려오기도 하고 쉽지 않은 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주교님이 모임에 적극 참여해 진솔하게 나누는 시간과 휴식 시간 동안 전해주시는 다양한 사목적 체험과 노하우가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1박 2일 동안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들이야말로 주교님들 사이 ‘일치와 연대’를 한층 높이는 소중한 원동력임을 경험합니다. 문창우 주교(제주교구장) ※지금까지 ‘함께 걷는 시노드 여정’을 연재해 주신 12명의 필진께 감사드립니다. cpbc2024.06.19

이콘 속 무표정의 예수님, 다 이유가 있었네!설립 20주년 이콘연구소 기념전, 19~27일 명동 갤러리 1898회원들이 오랜 시간 기도로 쓴 작품 50여 점 전시 이콘연구소(소장 장긍선 신부, 회장 김도윤) 설립 20주년 기념전이 19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명동 갤러리 1898에서 열린다. ‘이콘(icon)’이라고 하면 이른바 동방 교회 성화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과거 러시아에서는 집 안에 이콘을 두는 ‘이콘 코너(거룩한 구석)’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콘’은 ‘초기 그리스도교 성화’다. “패션도 시대에 따라 유행이 달라지듯 성화도 시간의 흐름이 따른 부침과 변화가 있었어요. 성화상 파괴 논쟁이라는 혼란을 겪은 뒤 교회가 정한 원칙과 기준에 따라 그린 성화가 이콘입니다. 동ㆍ서방 교회의 분열(1054년) 이후 동방 교회에서는 이 원칙을 고집스럽게 지킨 반면, 우리 서방 교회에서는 특히 르네상스를 거치며 창작적인 성화들이 대거 등장했어요. 성화의 정신이 많이 흐려졌죠. 하지만 1965년 초기 교회의 정신을 되찾고자 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서방 교회에서도 이콘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어요.” 장긍선 신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작가의 창의성과 회화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된 성화라고 말한다.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작품이 주를 이루는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와 그리스, 러시아 지역의 유명 성당이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성화가 상당히 다른 이유이다. 우리나라에도 이콘은 꽤 알려졌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가 짧고, 초기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회화적인 성화가 많이 전해지다 보니, 여전히 이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존재한다. 이콘연구소 설립자로 초기 교회 미술, 당대 신자들의 영성과 정신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장 신부는 “불교에서 불화ㆍ불상을 제작할 때 원칙이 있는 것처럼 성화에도 큰 기준이 있다”고 말한다. 장 신부와 함께 이번에 전시될 주요 작품으로 이콘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살펴본다. 다미아노 십자가 르네상스 시대의 성상이나 성화를 보면 성모님이 눈물을 흘리거나 예수님이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 등 인간의 희로애락이 드러나는데, 이콘에서는 감정을 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표정이 거의 없다. ‘다미아노 십자가’를 보면 예수님이 눈을 뜨고 있다. 몸이 뒤틀리지 않고 이마에 가시관도 없다. 수난에 그치지 않고, 부활도 함께 묘사한 것이다. 이렇듯 초기 교회는 기쁨의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김선경 작 ‘다미아노 십자가’ 삼위일체 안드레이 류플레프 수사의 작품으로 유명한 ‘삼위일체’ 이콘은 전 세계에 수만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작품은 하나도 없다. 성경 필사를 생각하면 된다. 성경의 내용은 같지만 저마다 필체는 다르지 않나. 우리나라에서는 성화를 한번 그려본다는 생각에 먹지를 대고 본을 뜨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이콘이 아니다. 미술적인 재능이 부족해도 직접 그릴 때 이콘이 되고, 이콘의 정신을 담을 수 있다. 이인선 작 '삼위일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일반적인 성화는 예술가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반면 이콘은 색이나 선 하나도 의미가 있어서 마음대로 그릴 수 없다. 그래서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성경의 모든 내용이 이콘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따라서 이콘의 원칙을 지키며 응용하거나 새롭게 그릴 수 있다. 한복을 입은 우리나라 성인이 대표적이다. 17기 공동작품 ‘성 김대건 안드레아’ 대천사 이콘은 슬로우 페인팅이다. 딱 보고 느끼는 게 아니라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바라봐야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미술적인 관점에서 균형이나 음영을 따지면 이상하게 보인다. 하느님 나라, 성인을 그리니까 지상과 기준이 다르다. 금빛이 많은 이유도 하느님의 영광, 아름다움 등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래서 동방 교회에서는 이콘을 ‘그린다’라고 표현하기보다 ‘쓴다’라고, 이콘을 ‘본다’고 하지 않고 ‘읽는다’라고 말한다. 장긍선 신부작 '대천사' 이러한 초기 교회 미술을 구현하기 위해 이콘연구소 과정은 3년, 심화반의 경우 2년이 더해진다. 심화 과정을 마쳐야 정회원 자격으로 1년에 한 번 개최되는 회원전 ‘영혼의 빛을 따라서’에 참여할 수 있다. 제16회 이콘연구소 회원전이기도 한 이번 전시에는 갤러리 전관에 총 50여 점이 소개될 예정이다. 장 신부와 연구소 회원들이 오랜 시간 기도로 쓴 이콘을 깊이 있게 읽어보길 바란다. 전시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3.04.10

의심을 넘어 더 단단한 믿음으로[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2)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의심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느님의 존재, 내세의 삶, 육신의 부활 혹은 예수님의 기적이나 부활, 승천 등에 대해 의심이 들 때가 있는가 하면, 신앙 자체에 대한 의심이나 회의가 들 때도 있다.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는데, 내가 계속 믿는 것이 맞는가? 의심은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중요한 문제다. 먼저 의심은 신앙에 늘 뒤따라오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신앙에서 의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은 의심과의 공존이며, 의심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이 그러하다.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완벽한 믿음이 아닌, 종종 의심에 싸이며 길을 잃고 헤매는, 그렇지만 그러한 계기를 통해 성장해가는 믿음을 보여준다. 일례로 베드로 사도가 그러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뵈러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에 빠지게 되자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사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이 말씀은 믿음이 약한 베드로 사도에 대한 꾸중이지만, 믿음이란 늘 의심과의 싸움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말해주기도 한다. 믿음에 종종 찾아오는 의심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믿음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베드로 사도는 이후에도 수많은 의심의 순간을 맞았지만, 의심을 딛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었으며, 결국 예수님과 일치하는 순교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나약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에 못지않게 우리의 믿음도 나약함과 한계로 각인된 믿음이며,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의심을 딛고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면, 언젠가는 사도들처럼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하는 삶으로 마감할 수 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정반대의 경우로 바오로 사도를 들 수 있다. 그는 믿음이 너무 과해서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일까지 동조하였다. 이는 과도한 확신이 믿음에서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러 가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그 만남은 그의 과도한 확신에 철퇴를 가했다. 그의 그릇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갖게 된 믿음은 자신의 나약함을 충분히 인식하는 겸손한 믿음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나약함을 자랑할 수 있었고, 나약함 안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확신을 전해줄 수 있었다.(2코린 12,5-10 참조) 믿음은 처음부터 의심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 의심의 순간을 거치며 조금씩 확신에 다다른다. 따라서 의심이 없는 믿음보다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의심이 어떤 것인지 솔직하게 대면하고 이를 딛고 일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내와 용기를 청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의심은 나의 신앙에 더욱 확신하게 하는 디딤돌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 곧 신앙의 길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의심은, 믿음을 마비시키고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회의 섞인 의심과는 다르다. 이 믿음의 의심은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나약함에 연결되어 있다. 나약함에서 오는 의심은 관계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관통해야 하는 순간들이다. 이 길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의심의 순간들을 관통하며 더욱 밝고 환희에 찬 믿음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실 것이다. ※ ‘금쪽같은 내신앙’ 코너를 통해 신앙 관련 상담 및 고민을 문의하실 분들은 메일(pbcpeace12@gmail.com)로 내용 보내주시면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한민택 신부 cpbc2023.08.09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경청과 나눔, 희생의 삶 다짐이용훈 주교와 사제단 미사본당 24개 → 222개로 늘어 성장 이끄신 주님 은총 감사로 성장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 미사가 10월 6일 정자동 주교좌성당에서 이용훈 주교 주례로 봉헌되고 있다.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 미사가 6일 수원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 이용훈 주교 주례와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거행됐다. 미사에는 교구 총대리 이성효 주교와 교구장 대리 문희종 주교를 비롯해 초대 교구장 윤공희 대주교, 제3대 교구장 최덕기 주교, 교구 사제단, 교구 진출 수도회장상, 수도자, 교구 평협ㆍ평단협 단체장, 본당 총회장 등 1000여 명이 참여해 그간의 세월을 주님께 감사했다. 이용훈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교구 설정 당시 우리 교구는 사제 27명, 본당 24개, 신학생 26명, 신자 수 4만 2500여 명의 작은 농촌 교구에서 오늘날 사제 560명, 본당 222개, 신학생 152명, 신자 94만 5000여 명에 이르는 큰 신앙 공동체가 됐다”며 “세계 여러 교구와 단체로부터 도움을 받는 교구에서 이제는 국내외 여러 교구와 단체를 위해 우리의 인적, 물적 자산을 나누는 교구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 주교는 “최근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로 기울어진 세태는 교회 안팎으로 암울한 분위기를 부추기고 있다”며 “주일 학교의 침체, 청소년 신앙생활 약화, 여러 신심단체 회원의 급감, 주일 미사 참여자 수 감소 등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이어 “교구는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시노달리타스를 기본 원리로 하는 통합 사업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며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복음적 동반자로 인식하고, 인내로 경청하며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식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주교는 성실한 성사생활과 성경 말씀의 생활화를 강조하면서 “이웃을 향한 나눔과 선의, 희생 또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실로 나타날 것”이라며 “이러한 노력들은 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은 우리 교구 공동체 구성원들이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리매김하는 원천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울러 “교구의 모든 신앙 공동체가 미사 참여와 일상 기도에 정진하시길 거듭 당부드린다”고도 말했다. 수원교구는 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아 기념 미사 외에도 다양한 행사를 진행 중이다. 13~14일 이틀간 교구청에서는 교구 여성연합회 주관 ‘희망 나눔 바자’가 이성효 주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됐다. 또 교구 설정 60주년 기념 성음악 축제가 지난 8월 29일부터 시작해 11월 7일까지 북수동ㆍ비전동ㆍ동판교ㆍ분당야탑동ㆍ신장ㆍ오전동ㆍ월피동성당 등에서 열리고 있다. 이상도 기자 raelly1@cpbc.co.kr 이상도2023.10.11

책꽂이생명 주일을 맞아 삶과 가족에 대해 되새길 수 있는 책들을 골라봤다. 태아 맞이 축복 기도 / 김경순 수녀 지음 / 바오로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사도적 서한 「여성의 존엄」) 18항과 19항을 보면, 태아의 생명은 어머니 태 안에서 생리학적(유전론), 심리학적(태내 환경론)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과정 모두가 하느님 자녀들의 등장, 즉 새로운 아기의 인간성 자체를 조건 짓는다고 함으로써 태아 맞이 준비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19쪽) ‘태아 맞이’란 무엇일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정과 생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경순(사랑의 씨튼수녀회) 수녀가 쓴 「태아 맞이 축복 기도」는 하느님이 부부에게 부여하시는 새로운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느끼도록 이끄는 안내서다. 책은 태아 맞이란 무엇이며, 태아 맞이 준비가 왜 필요한지 설명하고, 임신 준비부터 임신 기간 부부가 함께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특히 3부에는 임신 후 열 달 동안 태아의 성장 단계별로 바치는 기도, 성경 말씀과 묵상, 감사와 은총을 청하는 엄마와 아빠의 기도, 그리고 사랑하는 아기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나 사진을 남길 수 있는 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예비 부모들이 거룩한 은총의 시간으로 채울 수 있도록 안내한다. 건달바 지대평 / 구자명 지음 / 나무와숲 제목만 봐서는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기 힘든 「건달바 지대평」은 1997년 건달의 삶과 철학을 녹여낸 단편 「뿔」로 등단한 구자명(임마쿨라타) 작가가 그 후 25년에 걸쳐 쓴 건달 연작 6편을 묶은 책이다. ‘건달바’는 향기만 먹고 살며 음악을 관장하는 천신으로, 우리말 ‘건달’의 어원이기도 하다. 아버지(구상 시인, 요한 세례자)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 유난히 예술가형 인간이 많은 환경에서 자랐다는 작가는 “그들이 자신의 예술에 골몰한 나머지 외양적으론 건달과도 같은 삶을 영위하는 경우를 흔히 접했고, 그들과 비슷한 과(科)로 분류될 만한 철학자형 또는 종교가형 인간들을 근거리에서 살펴볼 기회 또한 적지 않았는데, 어느 시점에 별나다고만 생각했던 그들이 나와 별다른 존재가 아니며, 그들과 함께할 때 내가 가장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는 건달 소설을 쓰게 됐다”고 말한다. 주인공 ‘지대평’은 자칭 건달이다. 비명횡사한 아버지와 과로사한 형의 죽음을 계기로 ‘무엇을 기를 쓰고 성취하는 것이 반드시 최선의 인생은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힘들게 노력해야 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살겠다’고 결심한 뒤 줄곧 ‘건달’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삶의 방법으로 시작해 삶의 의미, 본질, 가족과 사회 문제 등 결국 예술부터 종교, 철학이 다루는 모든 주제를 건달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 이병인 장유니 지음 / 아이러브 북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지만, 오랜 세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하나가 되기는커녕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혼돈의 장에서 두 마음을 하나로 모아 책을 출간한 부부가 있다. 바로 시인 이병인, 장유니씨다. 제목인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는 성경의 한 구절로, 개신교 신자이면서 부부 시인으로 활동 중인 이들의 깊은 신앙심을 엿볼 수 있는 시집이다. 이해인 수녀는 추천사에서 “하나의 성구를 뽑아 각자 같은 구절을 묵상해 서로 다른 자기만의 생각을 진솔하게 표현한 한 편의 신앙시이자 생활시이며, 일상의 삶이 구체적으로 녹아 있는 아름다운 영성의 러브레터”라고 전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3.05.04

복음화에 앞장선 이들이 펼치는 사랑·용서·평화의 파노라마전교 주일에 읽으면 좋을 책들 그리스도인의 선교 사명을 되새기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전교 주일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제자. ‘복음화’에 앞장선 이들이 전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를 책으로 만나보자. 오늘 하루도 선물입니다 김하종 신부 니케북스 “주여, 저는 내일도 언제나 제가 수십 년 동안 해왔던 것처럼, 쌀을 씻어 안치고 국을 끓이고 설거지를 하고, 갓 지은 밥을 가난한 형제들과 나누겠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섬기겠습니다.”(91쪽) ‘안나의 집’ 창립 25주년을 맞아 김하종(본명 빈첸조 보르도, 이탈리아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 신부가 산문집 「오늘 하루도 선물입니다」를 펴냈다. ‘안아주고 나눠주고 의지하는 집’이라는 뜻에 걸맞게 안나의 집은 그간 배고픈 이들에게는 넉넉한 식당, 외로운 독거노인에게는 의지할 가족, 가출 청소년에게는 따스한 둥지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하루 평균 750명, 25년간 300만여 명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후원 회원은 1만 명, 월 5000원 소액 후원자가 대부분이다. 여기에 지자체 지원과 ‘우연히 들어오는 목돈’으로 꾸려왔다. 이 책은 오랜 시간 사랑과 헌신으로 동행한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들을 위한 헌사에 가깝지만, 안나의 집을 운영하면서 느낀 김 신부의 깊은 고뇌와 번민, 감동과 희망, 사랑과 감사의 고백이기도 하다. 안나의 집을 통해 자립에 성공하거나 상처를 치유한 이들의 후기도 실려 있어 감동을 더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도달할 수 없는 저 먼 곳의 신비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이곳에서 내 곁의 형제와 이웃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들의 사랑 또한 주님이 보여주시는 태양의 빛나는 햇살과 같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은 이해하기 힘들고 우리를 괴롭히는 어둠을 지우고, 새 삶을 선물할 것입니다.”(111쪽) 1987년 사제품을 받은 김 신부는 아시아 선교의 꿈을 품고 1990년 우리나라에 왔다. 1992년 경기도 성남에서 사목을 시작했고, 1998년 IMF 이후 급증한 노숙인들을 위해 급식소 ‘안나의 집’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2015년 특별 공로자 자격으로 한국 국적을 받았고, 2007년 고향 피안사노에서 주는 금빛 심장상, 2011년 국제나눔실천 나눔인상, 2015년 이원길 가톨릭 인본주의상, 2018년 아시아 필란트로피상, 2019년 국민훈장 동백장, 2021년 만해대상 실천대상, 인문가치대상 개인 부문 대상 등을 수상했다. 그리스도를 입다 안토니오 피타 신부 성염 옮김 바오로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입었으며(갈라 3,27 참조), 나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라는 권고를 받는다.(로마 13,14 참조) 특별하면서도 과감한 이 은유는 연기하는 인물의 의상을 입어야 하는 연극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시사한다.”(19쪽)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에서 신약성경 주해를,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바오로 서간을 강의하고 있는 성서학자 안토니오 피타 신부의 해설과 묵상이 한 권의 책에 담겼다. 바로 「그리스도를 입다」.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라 할 수 있는 바오로 사도는 열두 제자의 무리에 속하지 않았다. 주님을 직접 뵌 적이 없는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본받음’ 또는 ‘일치’라는 패러다임을 선택했다. 이 책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정의 참된 의미이자 바오로 서간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인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를 강조한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사람은 주님을 닮아간다.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르기 시작하면, 천천히 그리고 단계적으로 정체성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온갖 상처와 인간적인 나약함 가운데서도 이루어지는 거룩한 변화의 여정이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건 날마다 옷을 갈아입는 일과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마침내 그분을 마주 뵙는 순간까지 계속될 ‘닮음의 여정’을 살아가며, 하루하루 ‘그리스도의 성령을 입는다’는 뜻이다.”(176쪽) 천국을 향하는 순례자가 만난 예수! 루카복음 곽승룡 신부 지음 기쁜소식 “‘복음을 전하셨다.’(루카 8,1) 그리스말 Evangelios(복음)은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중략) 우리도 인내하며, 그리스도를 닮아 우리 안에서 그분이 활동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되길 기도하자. 우리도 그리스도의 모든 선과 아름다움이 지속적으로 실현되는 복음 선포, 기쁜 소식 전달자가 되도록 살아가자.”(187쪽) 곽승룡(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신부가 개인 및 그룹 성경공부 안내서 「천국을 향하는 순례자가 만난 예수! 루카복음」을 펴냈다.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곽 신부는 “복음 전파에서 평신도가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맡도록 부름 받고 있다”며 평신도의 효과적인 사도 활동을 돕기 위해 루카 복음을 상세히 풀어썼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질문과 답변, 기도와 실천의 과정을 반복하며 스스로 성찰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사랑과 혁명 김탁환 해냄 김탁환 작가의 장편소설 「사랑과 혁명」이 출간됐다. 이 책은 19세기 초 정해박해를 배경으로 스스로 목숨을 내걸고 천주교를 믿으며 ‘인간다운 세상’으로 나아가려 했던 민초들의 믿음과 사랑, 희망을 담고 있다. 정해박해는 1827년 전라남도 곡성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옥사로, 곡성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범위가 한양까지 확산되어 500여 명의 교인이 체포되고 지독하게 고문받았다. 하지만 정해박해는 교회사에서도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에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역서학서 「천주실의」,「직방외기」,「칠극」 등을 비롯한 방대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고증, 작가적 상상력을 더해 19세기 조선에서 천주교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원고지 약 6000매, 전 3권으로 엮어냈다. 1권 ‘일용할 양식’에서는 곡성 교우촌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옹기를 만들며 사랑을 빚는 시간을, 2권 ‘천당과 지옥’에서는 천주교인과 첩자, 군관이 숨고 달아나고 쫓고 쫓는 추적의 시간을, 3권 ‘나만의 십자가’에서는 옥 안팎에서 다시 신부를 모셔오기 위한 움직임과 기다림의 시간을 재현했다. 김희중 대주교는 추천사에서 “조선 시대 순교자들은 진리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뿐인 생명을 포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증명하려 했다”며 “이렇게 깊이 있고 아름다운 글로 우리 선조들의 신앙과 삶을 재현해 주어서 고맙다”고 전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3.10.18

전 지구인에게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실효적 행동 나설 것을 시급히 촉구 [특별기고]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우선 지난 10월 4일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후 위기’에 관한 사도 권고 「하느님을 찬미하여라」(이하 권고)를 ‘모든 선의의 사람’에게 내놓았는데, 이 문헌의 특징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해보았다. 첫째, 권고는 교황이 2015년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 전야에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는 삶’에 관한 사회 회칙 「찬미받으소서」(이하 회칙)를 발표한 지 8년 만에 나온 문헌이다. 회칙이 ‘생태 위기의 엄중함’이라는 포괄적 접근의 배경에서 생태적 전환의 삶을 호소했다면, 권고는 특별히 ‘기후 위기’라는 현안이 지닌 그 ‘시급성’의 배경에서 근본적이며 실효적인 해법 마련의 ‘절박함’을 호소한다. 그 점에서 권고는 회칙의 제1장 제1절 ‘오염과 기후 변화, 공동 재화로서의 기후’ 부분에 관한 일종의 ‘행동 지침’이라 할 만하다. 둘째, 문헌의 형식은 ‘사도 권고’이지만, 그 내용과 구조는 ‘사회교리’ 회칙이라 봐도 무방하다. 일반적으로 사회교리는 사회 현안, 곧 시대의 징표(권고, 제1장 기후 위기)에 대해 보편 교회가 성경과 교회의 전승(신앙, 제6장 영적 동기들)을 토대로 하여, 철학·문화적 성찰과 비평(제2장 기술관료주의 패러다임의 확장), 과학적 발견(사회과학, 제3장 국제 정치의 약점), 인류의 경험(제4장, 유엔기후협약 당사국총회(COP), 그 진척과 불이행)과 만나 대화함으로써 인류가 나아갈 길을 제안하기 때문이다(제5장, 두바이 COP28에 거는 기대). 물론 각각의 장(章)에도 시대의 징표 탐구, 신앙과 이성의 빛에 따른 식별(성찰), 나아갈 길 제안이라는 사회교리 구성 요소들을 담고 있다. 셋째,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권고한 그 형식은 근대 이후 교도권의 문헌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 회칙이나 권고는 ‘교회의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했지만, 특히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선의의 모든 사람’까지 그 대상으로 확대하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올해 11월 30일부터 12월 12일까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개최되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라는 특정 프로그램을 겨냥하여 그 실효적인 결실을 낳을 수 있도록, 근본적으로는 기후 위기라는 현안의 시급성·그 세계 차원 그리고 회복 불가능할 수 있는 그 재앙의 영속적 특성 때문에 반드시 모든 분야의 모든 선의의 사람이 결합하여 ‘실효적으로’ 행동해야 함을 호소한다. 절대 다수의 기후학자들은 분명히 ‘인간의 활동’이 오늘날 기후 변화와 그 위기의 가장 큰 요인이라 밝힌다. 그 인간의 활동 능력을 무한히 확대할 수 있다는 그릇된 신념을 강화하는 토대를 권고는 과학 기술과 경제적 이익이 결합한 ‘기술관료주의(전문가 중심의 배타적 지배구조) 패러다임’과 ‘능력주의 사회’ 또는 ‘엘리트 중심 사회’의 확장에서 찾는다. 회칙에서는 이를 ‘과도한 인간중심주의’ 또는 ‘일탈한 인간중심주의’로 진단한다(제3장, 생태 위기의 인간적 뿌리들). 근본적으로는 근대의 인간관과 세계관에서 그 뿌리를 찾는데, 오로지 독립된 ‘주체’로서의 인간이 타인과 사회와 창조 세계를 철저하게 자신의 욕구 및 힘의 행사 ‘대상’으로만 삼음으로써(객체화), 마침내 ‘참 보기 좋았던’ 그것들 사이의 온전한 관계망(질서의 고요함-평화)을 파괴할 정도의 지경, 곧 공동의 집(생태)을 허물어뜨릴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권고는 기후 위기를 초래한 이 파괴적 패러다임을 극복할 길을, 곧 인간의 힘을 윤리적으로 절제시킬 그 구체적 길을, 국제 정치와 외교문화 분야에서, 특히 유엔기후협약 당사국총회를 통해서 모색·제안한다.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 cpbc2023.11.29
![[전문]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 2023년 부활 메시지](//cpbc.co.kr/CMS/news/2013/05/rc/456128_1.0_titleImage_1.jpg)
[전문]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 2023년 부활 메시지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루카 24,2) 짙은 어둠을 뚫고 빛이신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예수님 부활의 기쁨을 의정부교구 모든 형제자매들과 나누며, 부활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이 힘겹게 세상을 살며 삶에 지치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전하는 부활의 기쁜 소식이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웃들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빈 무덤을 가로막았던 큰 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준 첫 증거는 빈 무덤이었습니다. 새벽녘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돌을 치우고 무덤에서 나오신 것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전해졌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은 죽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제 그 돌이 옆으로 굴려져 치워진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가르고 주님과 우리를 막아선 큰 돌은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이 안고 있는 죄와 같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불평등이 심해졌습니다. 소수의 부가 다수의 가난을 양산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기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불평등으로 소외되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관심은 점차 줄어드는 듯 보입니다.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와 나라들 사이에서도 팽배해지는 이기주의에 공동선은 설 곳을 잃은 듯한 느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복음의 기쁨」에서 이 같은 불의를 지적하셨습니다. 굶주리는 이들을 외면하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배척의 경제(53-54항), 오직 경제적 이득을 최우선으로 하는 돈의 우상화(55-56항), 봉사하지 않고 지배만 하는 금융 제도(57-58항), 폭력을 묵인하는 사회 구조(59-60항), 신앙과 교회를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하려는 세속화(64-67항) 등이 그러합니다. 이 모두는 ‘죽음의 문화’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이제 우리는 새로운 길로 나가야 합니다. 이 길은 예수님에게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완성되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돌이 굴려진 무덤이 죽음이 아닌 부활의 장소가 되었듯, 죄를 걷어냄으로써 이 세상에 어둠이 아닌 빛을 드리워야 할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려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만나면서 느꼈던 뜨거움을 루카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24,32)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서 성경에 관한 말씀을 들으며 기쁨 가득하였습니다. 이는 성경 말씀에 머물고 기도 안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새롭게 힘을 얻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들의 내달음이 밤길 어둠이 아닌 벅찬 희망이었듯, 우리 역시 기도와 말씀으로 힘을 얻을 때 절망이 아닌 기쁨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아울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가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두 제자는 스승의 죽음이라는 절망스러운 현실에서도 함께 슬픔을 나누었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알아보지 못했을지라도 예수님을 만나 걸을 때도 함께였고, 말씀을 나눌 때도 함께였으며, 빵을 나눌 때도 함께였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의 부활을 깨달은 순간에도 함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해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왔고 앞으로 계속 걸어갈 시노드 여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앞에 놓인 큰 돌, 곧 우리 자신과 주변 곳곳에 쌓인 부조리와 죄악은 깨끗이 굴려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언제나 이웃 형제자매들과 함께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의 결실은 구체적인 사랑의 나눔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의정부교구가 신앙과 사랑의 연대를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하며,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2023년 주님 부활 대축일 + 이기헌 박민규2023.04.05

술은 약인가? 독인가?[월간 꿈 CUM] 삶의 길 (9) 술에 관한 프랑스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악마가 사람을 찾아다니기에 바쁠 때는 그의 대리로 술을 보낸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탈무드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술이 머리에 들어가면 비밀이 밖으로 밀려 나간다.” 인류가 언제부터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술의 기원이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이 세상의 최초 인간이 포도 종자를 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악마가 그것을 보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인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훌륭한 식물을 심고 있습니다. 이 열매는 달고 향기로워서 그 즙을 마시면 누구든지 기분이 좋아지고 황홀해져서 더없이 행복해집니다.” 이 말을 듣고 인간의 행복을 질투한 악마는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면 나도 제발 한 몫 끼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악마는 인간 몰래 양과 사자와 원숭이 그리고 돼지를 잡아다가 그 피를 포도나무의 비료로 뿌렸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술을 마시게 되면 다음과 같은 단계적인 증상이 나타납니다. 제1단계는 술을 조금 마셨을 때입니다. 이때 인간은 양과 같이 온순해집니다. 제2단계는 술을 조금 더 많이 마셨을 때입니다. 이때 인간은 갑자기 사자처럼 무서운 모습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아무나 붙잡고 시비 걸고 싸움질하고 욕을 내뱉기도 합니다. 제3단계는 2단계보다 좀 더 술을 많이 마셨을 때입니다. 이때 인간은 원숭이가 술에 취한 것처럼 허둥대고,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미친 사람처럼 아무나 보고 히죽 웃기도 하고, 옷을 벗기도 하고, 탁자를 엎어 버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밤새도록 전봇대를 끌어안고 싸우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4단계는 3단계보다 좀 더 술을 많이 마셨을 때(만취 상태)입니다. 즉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을 때입니다. 이때 인간은 돼지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똥오줌도 못 가리고, 아무데서나 누워서 고함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심지어는 안방을 놔두고 개집에서 편안히 잠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술이란 본래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좋은 선물이지만, 인간의 무절제한 방종 때문에 오히려 더럽고 추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술은 적당히만 하면 약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절제하지 못하게 되면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음주량은 현재 세계 최상위권에 속한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가 가르치고 있듯이, 인간 법도가 무너져 가는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술을 더 무절제하게 마시게 됩니다. 경직된 독재 사회는 물론이고 무절제한 탐욕으로 병든 사회일수록 술의 위력은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고려 후기 문신이었던 추적(秋適)이 중국 고전에 나오는 선현들의 금언(金言)과 명구(名句)들을 엮어 만든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보면 이런 좋은 말이 있습니다. “渴時一滴(갈시일적)은 如甘露(여감로)요, 醉後添盃(취후첨배)는 不如無(불여무)니라.” 즉 “목마를 때 마시는 한 방울은 달디 단 이슬 같고, 취한 후에 더 마시는 것은 마시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글 _ 이창영 신부 (바오로, 대구대교구 대구가톨릭요양원 원장, 월간 꿈CUM 고문) 1991년 사제 수품. 이탈리아 로마 라테란대학교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교회의 사무국장과 매일신문사 사장, 가톨릭신문사 사장, 대구대교구 경산본당, 만촌1동본당 주임을 지냈다. cpbc2023.12.14

한반도 평화 위한 교황청 지지, 신앙 활력과 선교로 답했다 ‘대한민국 교황청 수교 60년’ “교황청, 한국인 희망 지지하고 포용” “한국 교회 선교적 헌신에 감사” 주교회의(의장 이용훈 주교)는 11월 2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대한민국과 교황청 수교 60주년을 맞아 추진해온 ‘한국-교황청 관계사 발굴 사업’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교황청 국무원 외무장관 폴 리차드 갤러거 대주교와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 정순택 대주교 등 관계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교황청은 한반도 평화를 향한 한국 국민의 염원에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모든 한국인이 형제자매이며, 한 가족 구성원이라는 더 큰 인식을 지니도록 모든 노력을 지지합니다.” 대한민국과 교황청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청 국무원 외무장관 폴 리차드 갤러거 대주교는 11월 2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한국-교황청 관계사 발굴 사업’ 학술 심포지엄에서 “교황청은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에 진정한 협력과 세심한 배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며 “여기에는 국민의 심오한 소망을 지지하고, 그들의 관심사를 이해하며 그들의 희망을 포용하는 것이 담겨 있다”면서 양국이 반세기 넘게 함께 걸어온 역사의 가치를 드높였다. 한국과 교황청 간의 관계를 재확인해준 것이다. 갤러거 대주교는 “교황청은 한국에 감사할 이유가 결코 모자라지 않다”면서 “지역 가톨릭 공동체, 특히 그 공동체가 증언하는 신앙과 활력, 점점 커지는 선교적 헌신과 보편 교회 생활에 더욱 권위 있는 참여에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60년 동안 한국은 진보와 변화의 도전적인 길을 걸어왔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신흥 국가로 출발한 한국은 눈부신 변화를 이뤘습니다. 같은 기간 복음은 이 나라에 큰 활력으로 뿌리내렸고, 한국은 이제 수많은 복음 전파자들의 출발지가 되었습니다.” 갤러거 대주교는 “한국 문화에서 ‘60’이란 숫자는 새로운 삶의 주기를 향한 건너감과 더 큰 완전함의 시기에 들어감을 상징한다”면서 “성경에서 ‘60’은 상부상조와 상호연결의 의미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가톨릭교회와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서로 만나 교황청과 대한민국의 수교를 이룸으로써 한민족 전체의 영적 성장에 유익한 도움이 돼왔다”며 “이 관계가 계속 성장해 우리를 더 풍요로운 협력으로 인도하리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갤러거 대주교는 “교황청 외교는 안정, 안보, 평화에 대한 공통된 소망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면서 “교황청은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진지하고 겸손한 소망으로 인류 문제에 섬세한 자세로 귀 기울이는 경청자가 되길 추구한다”고 전했다. 한국 교회는 대한민국-교황청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이날 주교회의 주관으로 ‘한국-교황청 관계사 발굴 사업’을 마무리하는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양국의 60년 관계사를 재조명했다. ‘한국-교황청 관계사 발굴 사업’은 2019년부터 바티칸 도서관, 사도문서고, 국무원 제2문서고(외교문서고) 및 복음화부 역사문서고 등 교황청 내 한국 관련 문서보관 기관이 보유한 사료를 발굴ㆍ정리ㆍ보존ㆍ연구하는 사업으로 추진돼왔다. 심포지엄에는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 유인촌(토마스 아퀴나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관계사 발굴 사업 관계자, 교회사 연구자들이 참석했다. 갤러거 대주교는 심포지엄 후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기념 미사도 주례했다. 11월 22일에는 경복궁·청와대를 관람, 한덕수 국무총리를 만난 후 23일 로마로 출국했다.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이지혜2023.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