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희망·사랑에 의지해 살아가라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4) 유다 서간 유다서는 인간 본성만 따라 사는 영지주의적 삶을 경고하고 믿음과 희망, 사랑의 향주삼덕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미카엘 대천사상, 몬트제 성 미카엘 대성당, 오스트리아. 유다 서간(이하 유다서)은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 많은 영향을 준 정경입니다. 그래서 유다서의 중심 내용은 베드로의 둘째 서간과 마찬가지로 ‘거짓 교사들을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릇된 교리를 퍼뜨리고 문란한 생활을 조장해 교회에 분란과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통 교회에 적대적인 자들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천사들을 모독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서는 이들을 ‘불경한 자들’이라고 단죄하고, ‘육욕에 빠진 자’, ‘꿈꾸는 자’, ‘본성만 따르는 짐승 같은 자’, ‘자신만 돌보는 이기주의자’, ‘불평불만꾼’, ‘아첨꾼’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들 거짓 교사들은 아마도 당시 교회 안에서 골칫거리였던 ‘영지주의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정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뛰어난 지식과 완전한 자유를 천부적으로 타고났다고 자부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유일하고 참된 영적 지혜를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육체를 업신여겨 그리스도의 강생도 부정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다서는 이들을 성령이 아니라 자기 본능에 따라 방탕한 생활을 하는 ‘현세적 인간’(19절)으로 규정했습니다. 유다서의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라고 밝힙니다.(1절)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두 명이 있습니다. 바로 타대오(마르 3,18; 마태 10,3)라고도 불리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루카 6,16; 사도 1,13)와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하지만 유다서의 저자는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과 야고보, 요세(요셉), 시몬과 형제인 유다입니다.(마르 6,3; 마태 13,55 참조) 오늘날 근동도 마찬가지이지만 성경에서 ‘형제’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기뿐 아니라 가까운 친척도 가리킵니다.(창세 13,8; 14,16; 29,15; 레위 10,4; 1역대 23,22)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주님의 동생 유다가 유다서를 직접 쓰진 않았으리라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서간의 여러 내용이 사도 시대 이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다서 17절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학자들은 교회 지도자 중 한 명이 유다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빌려 이 서간을 썼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80~90년께 유다서가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유다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카르타고 교회에서 일찍부터 성경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시리아 교회에서는 4세기까지 성경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를 선보인 예로니모 성인은 유다서가 교회에 알려지지 않은 문헌들을 이용했기에 사람들이 경전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게 됐다고 전합니다. 헬라어 성경은 ‘Ιουδα’(유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Iudae’,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유다 서간’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유다서는 모두 25절로 구성돼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공동 구원’에 관해 쓰려했으나 교회에 잠입해 참신앙을 거스르는 내용을 가르치는 불경한 자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거짓 교사들을 경고하고 이들과 맞서기 위한 내용으로 고쳐 씁니다.(3-4절) 영지주의는 오늘날에도 교회의 큰 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하느님 은총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오로지 자유 의지에 따라 구원될 수 있다며 극단적인 금욕을 실천했던 펠라지우스주의와 함께 영지주의를 ‘성덕의 교묘한 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교황은 영지주의는 하느님과 하느님 은총의 신비든, 하느님의 초월성을 인간이 조정할 수 있다고 여겨 결국 그리스도 없는 하느님, 교회 없는 그리스도, 하느님 백성 없는 교회에 이르게 한다고 경계했습니다. 유다서는 거짓 교사를 세 가지 형태로 식별합니다.(1-4절) 첫째, 이들은 불경합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며 주님께서 드러내 주신 진리와 참된 생활양식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둘째, 이들은 방탕합니다. 불륜을 저지르고 변태적인 육욕에 빠진 자들입니다. 셋째,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기본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유다서는 거짓 교사들이 심판을 받고 세 가지 벌을 받을 것이라 합니다.(5-8절) 첫째, 이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후 하느님의 수많은 표징과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자들처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둘째, 이들은 자기 영역을 이탈해 사람의 딸을 아내로 삼은 천사들처럼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셋째, 이들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유황불에 멸망할 것입니다. 유다서는 ‘미카엘 대천사’를 진정 본받으라고 합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자신이 판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긴 겸손한 하느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다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음 세 가지를 당부합니다.(20-25절) 첫째,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라. 둘째,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셋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고 자비를 베풀어라. 이 세 가지 당부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기본 덕인 ‘믿음·희망·사랑’과 일치합니다.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는 이 향주삼덕은 모든 윤리의 기초이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주신 은총입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 선임2024.10.22

평화·순교·생태 영성, 전 세계 청년들과 함께 나누자의정부교구 2027 WYD 발대식 진행 의정부교구 청년들이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와 의정부교구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염원하는 기도를 봉헌하고 있다. 의정부교구는 23일 주교좌 의정부성당에서 ‘2027 WYD 의정부 교구대회 발대식과 발대미사’를 거행하고, 평화· 순교·생태를 중심으로 한 교구의 신앙 가치를 전 세계 가톨릭 청년들과 나눌 것을 다짐했다. 2027 세계청년대회 의정부교구 1기 봉사자 청년들은 발대식에서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청년들로서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전하기 위해 앞장서겠다”고 선언하며 △민족 화해와 일치, 세계 평화를 위해 기여하고 △순교자의 신앙과 용기를 이어받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며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생명의 문화를 확산하는데 힘쓰겠다고 결의문을 낭독했다. 청년들은 대회 주제 성구인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를 참가자들과 세 번 외치며 대회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나눴다. 의정부교구장 손희송 주교는 “대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청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며, 그 기쁨을 언어와 문화가 다른 전 세계 청년들과 신앙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서 나누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손 주교는 이날 2027 WYD 의정부 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이정훈(교구 총대리) 신부와 사무국장 박재범(청소년사목국장) 신부에게 임명장을 수여했고, 조직위원회 사무국과 세 개 지역 사무국(중부·서부·동부) 현판을 담당 사제들에게 전달했다. 박재범 신부는 WYD 의정부 교구대회 영성 운동을 소개하며 “의정부교구는 다른 무엇보다 생태·평화·순교라는 가치를 중심에 두고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청년들과 함께, 주님과 함께 신앙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발대식 후 참가자들은 주교좌 의정부성당 마당에 2027 WYD 의정부 교구대회를 기념하는 나무를 심은 뒤 발대미사에 참여했다. 미사 중 청년들은 대회의 성공적 개최와 각자의 바람을 담은 기도를 봉헌하며, 세계청년대회가 모든 청년에게 희망과 기쁨이 될 수 있기를 기원했다. 교구 청년대표 황지형(세라피나)씨는 “발대식을 하고 나니 앞으로의 시간이 더욱 기대되고 기다려진다”면서 “의정부교구에 온 전 세계 청년들이 언어가 달라도 서로가 하나라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년들에게 특별히 기도 생활과 성경 읽기를 강조한 손 주교는 “세계청년대회가 아니더라도 청년들이 평소 자주 기도하며 주님을 만나고, 성경 말씀을 통해 그분과 가까워져야 한다”면서 “주님을 인생 동반자로 삼고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발대식에는 교구 청년과 조직위원회 위원 사제 및 교구 사제단, WYD 수원 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장 현정수 신부, 교구 평협 고진철(라우렌시오) 회장을 비롯해 이기헌(베드로, 고양시 병) 국회의원, 심홍순(젬마) 경기도의회 의원, 김동근 의정부시장, 박희성(토마스) 의정부 문화재단 대표, 유은혜(아녜스) 김근태재단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2027 WYD 의정부교구대회 발대식 후 내외빈들이 대회 기념 나무에 흙을 덮고 있다. 발대식에 앞서 주교좌 의정부성당에선 본당 설립 80주년을 기념하는 ‘희망과 화합의 80년, 의정부 시민과 함께하는 희년 음악회’가 열렸다. 교구 청년성서모임, 파로스 찬양팀, 밴드 나마스테, 클래식 앙상블 가일플레이어즈가 무대를 장식했고, 마당에선 2027 서울 WYD 체험 부스와 가톨릭 플리마켓이 열렸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박수정2025.11.26

주님과 함께 최광희 주교 사목 표어 확정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된 최광희 주교의 문장과 사목 표어가 확정됐다. 최 주교의 문장은 사목 표어인 ‘주님과 함께(Cum Domino)’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과 복음 선포의 사명을 상징하는 다양한 도안 요소로 구성됐다. 성경에 기반한 사목, 한국 순교자에 대한 깊은 신심, 그리스도 중심의 목자로서의 삶을 시각적으로 조화롭게 표현했다. 문장의 핵심이 되는 표어 라틴어 ‘Cum Domino’는 ‘주님과 함께’라는 뜻으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는 최 주교의 사제수품 성구에서 영감을 받았다. 주님과의 친밀한 일치 안에서 주교직 사명을 수행하겠다는 신앙 고백이 담겨 있다. 문장 상단의 물고기(ΙΧΘΥΣ) 상징은 초대 교회 신자들이 사용하던 표지로, ‘예수 그리스도·하느님의 아들·구세주’를 뜻하는 희랍어 약자다. 이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루카 5,10)는 복음 말씀처럼 신자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사명을 드러낸다. 중앙에 물결 형태로 펼쳐진 성경은 하느님 말씀과 세례의 은총, 신앙 여정을 상징한다. 성서 사도직에 헌신해온 최 주교의 사목 방향을 반영했다. 말씀 안에서 신자들과 함께 걸어가려는 의지가 담겼다. 하단의 성지 가지 모양 잎사귀는 한국 순교자들의 신앙과 희생정신을 기리는 상징이다. 순교 선열의 삶을 본받아 오늘날에도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사목자의 사명을 담고 있다. 성경 옆 알파(Α)와 오메가(Ω)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신 그리스도께서 주교직의 주체임을 고백하는 표지다. 문장에 사용된 진청색은 깊은 믿음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황금색은 주님의 영광과 신성을, 회색은 겸손과 절제, 내면의 성찰을 상징한다. 전체 문장은 종과 횡의 교차를 통해 십자가 형상을 이루고 있으며, 이는 주교직의 여정이 곧 주님과의 동행임을 드러내며, 하느님 백성을 진리 안에서 인도하려는 사명을 상징한다. 최광희 신임 보좌 주교의 주교 서품 미사는 8월 28일 오후 2시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다.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이지혜2025.07.23
![[생활속의 복음]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4/07/wIv1775544825758.jpg)
[생활속의 복음]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마음의 평화’라는 압도적인 입교 동기가 시사하듯 신앙인은 교회 안에서 평화를 갈망한다. 평화는 전쟁의 반대말보다 폭넓은 의미를 함축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건강·성공·복지의 총체적 결실이 평화로 귀결된다. 우리 문화의 인사말은 평화의 유의어인 ‘안녕’을 확인하거나 염원한다. 평화는 구원과 상통한다. 구약 성경은 ‘샬롬’(평화)을 기원하는 인사(탈출 4,18 참조), 축복(민수 6,24-26 참조), 망자와 유가족을 향한 위로(창세 15,15 참조)를 보도한다. “평화의 하느님”(1코린 14,33)은 수난과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와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을 선사했다. 평화의 상실인 불안의 요인은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자기 밖’의 불안은 대외 여건과 주변 정세(전쟁·폭력·재앙)가 직간접적 공포를 조성하는 국면이다. ‘자기 안’의 불안은 질병·사고, 근심·걱정이 정서를 자극하여 과거의 상처나 좌절, 현재의 실패나 갈등, 미래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부정적 영향을 받는 상태다. ‘자기 옆’의 불안은 관계 형성의 미숙함과 타인으로부터 받은 배신감이 깨진 그릇처럼 회복 불가능한 불화를 초래한 경우다. 이 셋의 상호작용은 불안을 극도로 조장한다. 스승의 십자가형 이후 제자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로마인 지배층과 유다교 지도자의 감시 대상(자기 밖)인 제자들은 체포될 위기에 놓였다. 스승의 죽음으로 인한 제자들의 탄식(자기 안)은 과거를 부정하게 하고 암울한 미래를 두려워하게 하였다.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으로부터 촉발된 제자단의 분열(자기 옆)은 동료 사이의 불신을 고착하였다. 이 정황을 여실히 묘사한 문구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이다. 스승의 부재(不在)는 불안의 핵심 사유였다. 수난의 상처를 간직한 스승이 잠긴 문을 뚫고 나타나 제자들에게 인사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불안에 떨던 제자들은 스승을 ‘다시 만남’(부활)으로써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이런 맥락에서 자기 밖·안·옆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은 ‘부활의 증인’(하느님의 자녀)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토마스에게 부활 신앙의 의미를 밝힌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신앙은 ‘만남에 대한 확신’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보지 않고도 이루어지는 만남’은 ‘대면의 만남’(자기 옆)을 넘어선 ‘비대면의 만남’(자기 밖, 자기 안)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확약이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이다. 제자들 ‘안에 머무르는 성령’(갈라 4,6 참조)의 열매 중 하나는 “평화”(갈라 5,22)다. 부활 신앙은 제자들이 스승을 ‘다시 만난 체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어원상 망자의 극적 소생으로 정의되는 부활은 내용상 ‘다시 만남’(재회)이며, 이 ‘다시 만남’을 통해 ‘새롭고 영원한(언제 어디서나 어떻게든) 만남’의 문이 열렸다. 이 만남은 우리 밖/안/옆에서 “세상이 주는 평화”(요한 14,27 : 힘에 의한 평화)와 구별되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기반한 평화를 준다. 활짝 핀 봄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몸짓으로 우리에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 앞으로도 만날게요.’ cpbc2026.04.08
![[성모 성월 특강-1강] 성모님이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이유는](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5/15/NVt1778804357919.jpg)
[성모 성월 특강-1강] 성모님이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이유는[황창연 신부의 신앙 특강] (1) cpbc 가톨릭평화방송은 5월 성모 성월을 맞아 특강을 기획했다. 황창연(수원교구 성필립보생태마을 관장) 신부가 강사로 나서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을 주제로 4차례에 걸쳐 강의한다. 본지를 이를 요약 정리해 과달루페 성모 발현 이야기와 의미를 전한다. 과달루페 성모. OSV 황창연 신부의 신앙 특강(1강) ▶다시 보기 인류 역사를 바꾼 발현,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뒤 1500년이 넘도록 성모 마리아의 공식 발현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런데 1531년 12월 9일, 그 발현이 예루살렘도 로마도 아닌, 전혀 뜻밖의 땅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일어났다. 왜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였을까. 이 강의는 그 질문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과달루페(Guadalupe)는 '돌 뱀을 쳐부수는 여인'을 뜻한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테페약 언덕은 뱀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자리한 곳이었고, 해마다 수만 명의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치던 피의 의식이 행해지던 장소였다.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이 1500년의 시간을 넘어 그 언덕 위에서 현실이 되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를 부수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 것이다." (창세기 3,15) 성경은 뱀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1531년 과달루페 발현은 아예 돌 뱀을 모시는 언덕 자체에서 이루어졌다. 성모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아즈텍의 우상 숭배를 걷어내시고, 사람을 죽여 바치는 인신 공양을 끊으시며, 생명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살리셨다. 1531년, 성모님이 오실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성모님께서 굳이 1500여 년 만에 그 시골 테페약 언덕에 발현하신 데에도 '때가 찬' 이유가 있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이유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유럽 가톨릭 교회의 심각한 분열과,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의 참혹한 수난이 그것이다. 첫 번째 이유: 교회의 분열과 개혁의 위기 16세기 초 가톨릭 교회는 극도의 타락을 겪고 있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증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벌부(免罰符)를 판매했다. 성직자의 직위가 돈으로 거래되고, 구원이 믿음이 아니라 헌금으로 얻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신앙이 왜곡되었다. 성경의 권위보다 교황과 교회의 전통이 우선시되었고, 고위 성직자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부조리가 교회 전체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이에 맞서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 조 반박문'을 게시하며 면벌부 판매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초기 복음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결국 그리스도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갈라지는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하늘에서 이 분열을 지켜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는가. 루터의 반발로부터 꼭 14년 뒤인 1531년, 성모님은 지구 반대편에 발현하셨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 번째 이유: 아메리카 원주민의 참혹한 수난 같은 시기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또 다른 비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1519년 배 11척, 병사 500여 명을 이끌고 아즈텍 문명을 침략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단 168명의 병사로 8만 명의 잉카 군대를 무너뜨렸다. 총과 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이었다. 히스파니올라 섬(오늘날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의 인구 800만 명은 콜럼버스 도착 후 불과 30여 년 만에 거의 전멸했고, 아즈텍과 잉카 문명에도 천연두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정복자들의 목적은 오직 황금이었다. 1503년부터 1660년 사이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약탈해 간 은만 해도 1만 6000톤, 금은 200톤에 이른다. 잉카의 왕 아타우알파는 가로 7m, 세로 5m, 높이 2.4m의 방을 가득 채울 황금과 그 두 배에 달하는 은을 몸값으로 바쳤지만, 피사로는 몸값을 받고도 그를 처형해 버렸다. 위로가 절실했던 이 대륙에 성모님은 발현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아즈텍 문명의 인신 공양, 그 참혹한 실상 성모님 발현 당시 멕시코를 지배하던 아즈텍 문명에는 충격적인 악습이 존재했다. 바로 인신 공양(人身供養)이었다. 아즈텍인들은 태양신·달신·전쟁신 등의 우상에게 사람의 심장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흑요석 칼로 살아 있는 사람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즈텍 문명에서 한 해 동안 희생된 사람의 수는 무려 5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를 환산하면 하루에 약 150명, 10분에 한 명꼴이다. 아즈텍 제국의 신전을 처음 세운 것을 기념하는 의식에서는 한꺼번에 2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단순한 종교의식을 넘어, 고원 지대에서 가축을 기르기 어려웠던 환경에서 단백질을 얻기 위한 식인 풍습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성모님은 이 참혹한 현실을 눈 뜨고 보실 수 없으셨다. 결국 성모님께서 1531년 발현하신 뒤 100년, 200년에 걸쳐 사람의 심장을 꺼내 알지도 못하는 태양신에게 바쳤던 악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후안 디에고에게 전하신 말씀 1531년 12월 9일 새벽, 테페약 언덕을 넘어 아침 미사를 드리러 가던 평범한 원주민 후안 디에고(Juan Diego) 앞에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성모님의 말씀은 이러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믿으며, 내 도움을 요청하는 지상의 모든 백성의 자비로운 어머니이다. 나는 그들의 비탄의 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나의 사랑과 연민, 구원 그리고 보호를 증거로 제시하는 표시로 내가 발현한 이곳에 성당을 세우길 바라고 있다. 그러니 너는 멕시코 주교관에 가서 이곳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우는 것이 내 소망임을 전하도록 하여라." 성모님께서 스스로를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머니"라 칭하신 것은 가톨릭 신앙의 핵심을 드러낸다. 그리스어로 '테오토코스(Theotokos)', 즉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서, 마리아는 그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로 공경받는다. 성모님의 발현을 증명하는 기적으로, 후안 디에고의 틸마(겉옷)에 성모님의 형상이 새겨졌다. 지금도 과달루페 대성당에 보존된 이 이미지는 과학적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기적으로 남아 있으며, 매년 수천만 명의 순례객이 이곳을 찾는다. 성모 발현을 목격한 성 후안 디에고와 과달루페 성모를 그린 그림. OSV 발현의 역사적 의미와 이후의 흐름 성모님은 과달루페 발현 이후에도 인류 역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꾸준히 나타나셨다.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는 14세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하시어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 라고 밝히시고 치유의 샘을 솟아나게 하셨다. 하루 12만 리터가 솟아나는 이 샘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기적을 이루고 있다.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는 세 어린이에게 발현하시어 죄인들의 회개와 묵주기도, 러시아의 봉헌을 요청하셨고, 이 청원은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이루어졌다.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의 기운으로 1500년을 이어온 교회가, 이제는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 지난 500년간 새롭게 쇄신돼 왔다. 과달루페 발현은 그 대장정의 시작점이었다. 순례자의 눈으로 바라본 과달루페 2026년 2월, 200명의 순례단과 함께 네 번째로 멕시코 과달루페를 순례하며 이 발현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달았다. 태양신과 달신의 피라미드를 오르고, 아즈텍 문명의 시장 흔적과 고추·카카오의 원산지를 탐방하며, 발현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느님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온몸으로 느꼈다. 성모님의 과달루페 발현은 단순히 멕시코 원주민만을 위한 사건이 아니었다. 교회의 분열로 신음하던 유럽, 정복과 전염병으로 쓰러져 가던 아메리카 원주민, 피의 제사로 얼룩진 문명 속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하기 위해 반드시 오셔야만 했다. 그 발현은 2000년 인류 구원 역사의 큰 그림 속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섭리였다. 📍 방송일시 : 첫 방송 5월 2일(토) 오전 7시 50분, 매주 토 오전 7시 50분 / 일 오후 3시·오후 10시 10분 수원교구 성필립보생태관장 황창연 신부가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cpbc 5월 성모특강 화면 캡처 cpbc2026.05.15
![[성모 성월 특강 -4강] 성모님과 함께하는 은총이 가득한 삶이란](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5/21/1O61779328604440.jpg)
[성모 성월 특강 -4강] 성모님과 함께하는 은총이 가득한 삶이란 [황창연 신부의 신앙 특강] (4, 끝)cpbc 가톨릭평화방송은 5월 성모 성월을 맞아 특강을 기획했다. 황창연(수원교구 성필립보생태마을 관장) 신부가 강사로 나서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을 주제로 4차례에 걸쳐 강의한다. 본지를 이를 요약 정리해 과달루페 성모 발현 이야기와 의미를 전한다. 수원교구 성필립보생태관장 황창연 신부가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cpbc 5월 성모특강 화면 캡처 황창연 신부의 신앙 특강(4강) ▶ 다시 보기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 그 뜻을 되새기며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은총이 가득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은총이란 아름다움의 눈부신 매력, 내적인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광휘(빛)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성모님은 그 최고의 은총을 받으신 분이다. 그렇다면 성모님이 은총을 받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 이유를 제대로 안다면 우리도 은총을 받는 삶을 살 수 있다. 4강은 성모님의 삶 안에서 은총의 조건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산드로 보티첼리 작 '주님 탄생 예고', 1489~1490년경 . 첫 번째 조건: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열여섯 살 처녀 마리아의 반응은 흥분도 들뜸도 아니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한다. "그 말뜻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만약 우리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난다면 어떻겠는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두방정을 떨고, 온 세상에 알릴 소식이라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달려가 자신이 특별히 선택된 사람인 양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주 차분했다. 자신의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용히, 깊이 생각했다.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색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분명 기회를 주시고 때로는 채찍질을 치실 때도 있다. 그때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고 계신가. 어떻게 살아야 은총 안에서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허송세월하는 삶은 1년을 100년처럼 살아내는 삶이 될 수 없다. 두 번째 조건: 긍정적인 말과 생각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열여섯 살 처녀에게 임신을 고하는 이 말씀은 어처구니없어도 한참 어처구니없는 선언이었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아기를 가진다는 것은 당시 유다법으로 돌로 쳐 죽이는 중죄였다. 육체적 죽음과 정신적 죽음을 모두 감당해야 하는 요구였다. 마리아는 조용히 물었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천사는 답했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결심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한 마디가 최고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말씀이었다. 만약 마리아가 납득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늘나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과 삶의 방식이야말로 은총을 온몸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성경은 말과 생각의 방향이 운명을 바꾼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모세는 이집트를 탈출한 뒤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였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돌아보고 온 열 명의 보고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도저히 올라가지 못한다면서 자기들이 가서 정탐한 고장은 사람이 살지 못할 곳이라는 소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뜨렸다. 우리가 정탐하고 온 땅에 들어가 살려다가는 도리어 잡혀먹힐 것이다. 거기에는 키가 장대 같은 사람들이 있더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 그 사람들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온 회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 위에 들어가게 하시며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결국 부정적인 열 명의 말을 따랐던 60만 명은 광야에서 죽었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입성했다. 은총이 있는 사람은 똑같은 장소와 시간에 있어도 밝은 면을 바라보고, 은총이 없는 사람은 어두운 면을 바라본다. 긍정적인 말과 생각은 하느님이 기뻐 여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늘 함께하시는 역사(役事)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작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1491년. 세 번째 조건: 하느님의 뜻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 마리아는 그 어렵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먼저 엘리사벳을 찾아갔다. 나이 들어 임신한 친척을 위로하기 위해 무려 석 달을 함께 머물렀다.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었던 늙은 엘리사벳과,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어야 할 처녀 마리아. 이 두 분의 마음고생은 누구보다도 깊었을 것이다. 그 어려운 처지에서 마리아는 먼저 엘리사벳을 찾아가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주었다. 엘리사벳은 이렇게 화답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힘들 때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사람에게서 은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성모님은 당신만 잘난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이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며 모두를 이기게 해 주시는 분이었다. 네 번째 조건: 찬미하는 삶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있다.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이다. 임신한 처녀의 불안한 처지에서, 죽음의 위협 앞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우리는 찬양보다 바람이 훨씬 많다. 이것 해 주세요, 저것 해 주세요 — 하느님께 시키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마음이 설렌다는 표현,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생명을 부여받은 것, 푸른 산과 하얀 눈, 빗소리와 폭포 소리와 단풍,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 그릴 줄 아는 재능, 공짜로 내려주시는 공기와 하늘과 비와 햇빛 —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을 생각하면 어찌 가슴이 설레지 않겠는가. 찬미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찬미하는 사람만이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 맨날 달라고 청하는 사람은 찬미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은총도 덜 받는 것이다. 다섯 번째 조건: 이웃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삶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의 모습이 빛난다. 잔치를 즐기던 성모님은 가만히 살펴보다가 술이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주인의 마음으로 그 어려운 처지를 걱정하며 아들 예수님께 조용히 고했다. 새침하게 차려 놓은 음식만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성모님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걱정해 주고,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려 하신 분이었다. 남의 일을 걱정해 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삶이야말로 축복된 삶, 천당에 갈 수밖에 없는 삶이다. 예수님도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군중 앞에서 어느 누구도 질책하지 않으시고 서로를 뒤돌아보게 하셨다. 여인을 고발하던 이들이 모두 사라진 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들이 네 죄를 묻지 않았다면,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예수님은 승승승(勝勝勝)의 사랑 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이셨다. 당신만 잘난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이를 이기게 해 주시는 분이었다. 은총 가득한 삶이란 성모님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은총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곰곰이 생각하고 사색하는 사람. 둘째, 긍정적인 말과 생각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셋째, 하느님의 뜻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위로가 되는 사람. 넷째, 청하기에 앞서 찬미하는 사람. 다섯째, 이웃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걱정하고 실질적으로 돕는 사람. 가브리엘 천사의 고지에 마리아가 드렸던 그 한 마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이 말씀이야말로 은총 가득한 삶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성모님을 공경하는 삶이란, 결국 성모님처럼 생각하고 성모님처럼 말하며 성모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다. 그렇게 살 때 우리도 은총이 가득한 사람이 될 수 있다. cpbc2026.05.20

농부망서[월간 꿈 CUM] 철학의 길 _ 동양 고전의 지혜와 성경 (5) 중국 우언(寓言, 풍자적이거나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짧은 길이의 이야기)에 ‘농부망서’(農夫亡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농부가 호미를 잃어버리다’는 말인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농부가 밭에서 일을 마친 후 빈손으로 돌아오자 남편을 본 아내가 호미는 어디에 두었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아주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잃어버린 게 아니고 밭에 두고 왔소(田裏).” 화가 난 아내가 팔을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작은 소리로 말해요. 누가 듣고 가져가면 어떻게 해요?” 아내는 남편에게 어서 돌아가 호미를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밭으로 간 농부는 호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달려와 농부가 아주 작은 소리로 아내의 귀에 대고 말합니다. “없어졌소.”(不見了) - 「雅俗同觀」 농부가 밭일을 하다 호미를 잃어버리는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처신이 문제입니다. 위 이야기는 작은 소리로 말해야 할 때 큰 소리로 말하고, 큰 소리로 말해야 할 때 작은 소리로 말하는, 사리분별을 못하는 농부의 한심한 이야기입니다. 관찰자 입장으로 이야기 밖에서 이야기를 바라보면 멍청한 농부가 보입니다. 나는 그 정도 멍청함을 눈치채는 현명한 사람 같아 피식 웃고 맙니다. 그런데 내가 농부가 되어 들어가면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은 내가 왜 이렇게 한심해 보일까요? 우리 사회에서 없어진 호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수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무엇인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희망도 잃어버렸습니다. 일어날 힘도 잃어버렸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자살자가 늘어나고, 직장을 잃어가고, 자존감도 잃어가고, 배려도 잃어버렸습니다. 빈부차는 더욱 심해져 주머니도 비어가고, 집도 잃어갑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호미를 두고 우리의 목소리는 어떤가요? 귓속말로 작은 소리를 내야 할 때 큰소리로 내리지르고, 큰소리로 외쳐야 할 때 귀에 대고 작은 소리를 내는 사이 호미가 없어졌습니다. 언론도, 종교도, 지식인도, 예술인도, 시인도, 노동자도, 학생도 지금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우선 나부터도 귀에 대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없어졌소”(不見了) 하고 있어 한심한 농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조용해야 할 사람은 큰소리로 “밭에 두고 왔소”라고 동네방네 잘났다며 고성을 내고, 크게 세상에 외쳐야 할 이는 입술을 물고 소심하게 벽 뒤에서 “없어졌소”라고 역할 분담하는 사이 누군가 훔쳐 가 우리 사회는 호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우선 나 자신이 현명한 관찰자가 되려 할뿐, 멍청한 당사자라는 것에 부끄럽습니다. 중국 당나라 2대 황제였던 태종의 이름은 이세민이었습니다. 이름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평안케 하라’는 의미로 지어졌습니다. 이름에 걸맞은 업적을 남기기 위해 그는 3개의 거울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외모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청동거울’이요, 둘째는 역사의 흥망사를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역사의 거울’이며, 셋째는 옆에서 직언해줄 ‘충신 거울’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거울’과 ‘충신 거울’이 없어진 채 ‘청동거울’만 남아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큰소리치는 그 자신의 외모를 위한 청동거울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아진 ‘역사의 거울’과 ‘충신 거울’이 다시 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없 어 졌 소!! 글 _ 손은석 신부 (마르코, 대전교구 산성동본당 주임) 2006년 사제수품.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전담사제를 지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전공)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소소하게 살다 소리 없이 죽고 싶은 사람 중 하나. 그러나 소리 없는 성령은 꼭 알아주시길 바라는 욕심쟁이다. cpbc2024.10.07
창간 38돌, 새 필진 새 연재 가톨릭평화신문이 창간 38주년을 맞아 필진을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가톨릭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교회와 사회를 잇는 데 노력하고 있는 환경·생명·평화·교육·지역 공동체·의료 등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합니다. 시사진단을 통해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는 식견을 넓히고, 평화칼럼을 통해 신앙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성찰하는 시간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 시사진단 새 필진 문명희(체칠리아) (사)에코나우 이사 △세종대 환경정책학 박사 △전 세종대 기후환경융합센터 연구위원 △전 한국환경보건학회 이사 △한국녹색제품구매네트워크 이사 △환경부 화학물질평가위원회 위원 △서울시녹색서울시민위원회 위원 △서울시 은평구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위원장 △서울시 도봉구 환경정책위원회 부위원장 △(사)에코나우 환경건강연구소 소장 김경아(마리아) 인천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 교수 △이화여대 간호학 박사 △전 삼성서울병원 중환자실 책임간호사 △전 우송대학교 조교수 △인천가톨릭대 부교수 △여성건강간호학회 교육위원 △대한간호협회 간호조무사 교육훈련기관 지정평가 위원장 △인천가톨릭대 프로라이프대학생회 지도교수 △생명을 위한 40일 기도 한국본부장 △주교회의 생명위원회 위원 조은나(루치아) 박사 서강대학교 아루페인문사회연구소 연구원 △서강대 신학대학원 신학과 교의신학 박사 수료 △세명대·충남대·전남대·경성대학교·부산예술대학교·용인송담대학교 외래 교수 역임 △코리아오페라티브컴퍼니 대표·경기더이음오페라단 이사·극단 각인각색 음악감독 역임 김홍주 신부 계성고등학교 지도사제 △가톨릭 교육 전공 교육학 박사 △가톨릭학교교육포럼 회원 △전)동성고등학교 지도신부 황민호(다니엘) 옥천신문 대표 △(사)커뮤니티저널리즘센터 이사장 △바른지역언론연대 이사 △충북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운영위원 △옥천FM공동체라디오 추진위원장 △옥천 농촌활력지원센터 자문위원 ▧ 평화칼럼 새 필진 조재선(베드로)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상임대표 △노곡중학교 교사 △도서출판 다시문학 편집 주간 △전)동성중학교 교사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디다케’ 편집 자문 위원 역임 △사회복지법인 ‘라쉬 친구들’ 이사 역임 △사회복지법인 ‘호스피스 코리아’ 이사 역임 박효실(힐데가르트) 기자 △스포츠서울 편집국 기자(부장급) 역임 △ ‘서태지-이지아 이혼소송’ 단독보도로 한국기자협회 제248회 이달의 기자상 수상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 출연 △BBC 탐사보도 다큐 ‘버닝썬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출연 가톨릭중앙의료원(CMC) 의학칼럼 가톨릭중앙의료원(CMC) 전문 의료진과 함께 독자들의 건강한 삶을 위한 건강칼럼을 새롭게 선보입니다. 외과·산부인과·성형외과·정신건강의학과·가정의학과 등 각 분야 전문의 및 교수진 9명이 참여하는 이번 연재는 질환 예방과 치료, 올바른 건강상식은 물론, 생명 존중의 가치를 담아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의료 정보를 전할 예정입니다. ▧ 새 코너 연재 프란치스코의 향기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희년’을 맞아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도자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성인이 창설한 남자 수도회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카푸친 작은형제회’입니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세 수도회는 성인을 사부로 모시는 프란치스칸 1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남긴 가난과 평화, 작음과 형제애의 향기는 프란치스칸들의 삶과 현존을 통해 8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연재에서 2026년 오늘을 살아가는 프란치스칸의 눈으로 프란치스코의 삶과 영성을 다시 비춰보고자 합니다. 기후위기와 전쟁, 경쟁과 고립의 시대 속에서 프란치스코의 길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되새겨봅니다. 프란치스칸을 통해 프란치스코의 향기를 전합니다. ‘성서와함께’ 가꾸는 기도의 정원 ‘성서와함께 가꾸는 기도의 정원’ 코너는 최근 동명의 책 「기도의 정원」을 출간한 도서출판 ‘성서와함께’와 동행합니다. 「기도의 정원」은 성 프란치스코 피정센터 명예 정원관리장을 지낸 원예가 마거릿 로즈 릴리가 정원을 가꾸며 체험한 영적 여정을 담은 책으로, 성경 및 그리스도교 예술과 건축에 자주 등장하는 꽃과 나무 등을 소개합니다. 새 코너에서는 책을 번역한 신지현(소피아)씨가 계절과 전례색에 맞춰 식물과 글을 발췌해 다듬고, 책에 실린 메리 스프레이그의 그림을 더할 예정입니다. 다수의 영미 도서를 우리글로 옮긴 신지현 통번역가는 국내외 기관에서 플로리스트 과정을 수료했고, 가톨릭 전례 꽃꽂이를 배우며 본당에서 꽃 봉사도 담당하고 있어 새 코너에 또 다른 싱그러움을 더할 것으로 기대됩니다.장현민2026.05.12
![[과학과 신앙] (50) 먼지가 되어(전성호 베르나르도, 경기 효명고 과학교사)](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10/15/PWW1728980105959.jpg)
[과학과 신앙] (50) 먼지가 되어(전성호 베르나르도, 경기 효명고 과학교사) 미국 록밴드 캔자스(Kansas)는 1977년 ‘Dust in the wind (바람 속 먼지)’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 곡은 밴드의 한 멤버가 미국 원주민들의 시를 모은 시집에서 ‘우리는 그저 바람 속의 먼지입니다’란 문장과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라는 구약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쓴 가사라 한다. 캔자스는 이 노래에서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우리는 모두 바람 속의 먼지입니다) / Dust in the wind (바람 속에 흩날리는 먼지) /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모든 것이 바람 속의 먼지입니다)’라며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서정적인 멜로디로 표현했다. 이 곡은 1978년 빌보드 인기 순위 6위까지 올라갔으며 전 MBC 라디오 DJ였던 김기덕씨가 네티즌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하고 펴낸 책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곡」(2002년)에도 포함되어 있다. 먼지란 사전적 의미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가벼운 고체 입자’로 바람에 의해 운반되고 중력에 의해 지표면에 퇴적된다. 먼지란 단어 자체는 굉장히 하찮은 뉘앙스를 주지만 인류의 시작은 캔자스의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먼지였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주요 원소는 질량을 기준으로 산소(65%)·탄소(18.5%)·수소(9.5%)·질소(3.3%)가 96% 이상을 차지하는데, 질량비가 아닌 개수로 가장 많은 것은 수소이며 몸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수소는 우주를 구성하는 비율이 75%나 될 정도로 우주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별의 주요 구성 원소가 수소이기 때문이다. 빅뱅과 우주의 진화 과정 이론에 의하면 생명체의 몸을 구성하는 수소는 우주에서 왔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인간의 몸을 이루는 원소들이 별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모두 별의 먼지(star dust)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 말을 통해 인류는 우주와 연결된 존재이므로 별처럼 빛나는 존재여야 하며 동시에 광활한 우주 속에서 겸손해야 함을 강조했다. 구약 성경도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고 하였듯이 인간의 시작과 끝은 먼지다. 그 옛날 권력과 부를 누리던 왕후장상(王侯將相)과 평범한 민초(民草)들도 결국 생을 마감할 때는 먼지로 돌아갔다. 11월 2일 주일은 교회가 정한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다. 나 역시 언젠가는 미래의 누군가에게 과거의 존재로 기억될 것이다. 정호승(프란치스코) 시인은 그의 시 「햇살에게」에서 ‘이른 아침에 / 먼지를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제는 내가 /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시처럼 나도 먼지이리라. 먼지로 시작하여 결국 먼지로 돌아갈 나의 삶이여! 캔자스의 노래처럼 속세의 풍파(風波) 속에서 흩날리는 먼지인 나는 어떤 존재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가? 세상을 흐리게 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황사나 미세먼지 같은 존재가 아니기를, 겸손하고 별처럼 빛나는 별의 먼지이기를 간구한다. 전성호cpbc2025.10.29
![나귀를 타고 오신 겸손한 왕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91)](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5/07/fdT1715067341708.jpg)
나귀를 타고 오신 겸손한 왕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91) 사순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던 이들이 곧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은 언제 생각해도 살벌하고 애처롭다. 고금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사람들의 환호는 종종 질투와 실망의 출발점이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원하는 상을 그려 놓고 열광하다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등을 돌린다.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되어 온 모습이다.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를 외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들이 아니다. 상당 부분 같은 군중이었고,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조차 최후의 순간에 함께하지 못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선택한 믿음이었고 무리의 분위기에 휩쓸린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는 신앙을 통해 자신이 돌봄을 받고 특별히 여겨진다는 경험을 갈구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믿으면 잘살게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세상의 삶이란 유한한 것을 나누는 구조이기에, 누군가가 이득을 보면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고, 어느 나라가 잘살면 다른 한편에는 반드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생긴다. 그러나 이단의 논리 구조는 대개 ‘믿음이 현세적인 성공을 가져오고, 그 성공이 곧 믿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반면 그리스도교 복음의 구조는 전혀 다르다. 믿음으로 주님 뜻에 따라 살며 회개하고, 그 끝에서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 어디에서도 주님이 현세의 성공을 약속하거나 성공을 부활의 조건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 현세에서의 부와 성공을 위한 신앙이라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예수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종려나무를 흔들던 이들이 곧 당신의 죽음을 외칠 것을 아시면서도, 그 운명을 거역하지 않고 나귀를 타고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셨다. 말이나 낙타가 아닌 나귀를 타고 가신 선택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은 힘과 전쟁·지배를 상징하고, 낙타는 부와 높은 지위를 떠올린다. 반면 나귀는 평화와 겸손, 그리고 일상의 짐을 묵묵히 지는 존재를 상징한다. 구약에도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고 예언되어 있다. 이는 주님께서 세속의 왕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것을 미리 알린 말씀이다. 이렇게 분명히 알려 주셨음에도 끝내 세속의 왕을 기대했던 인간의 어리석음 앞에서 혀를 차게 된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는 관현악곡 「로마의 분수」 중 ‘트레비 분수’ 악장에서 나귀가 끄는 마차 소리를 묘사한다. 그는 나귀를 도시의 화려함을 떠받치는, 평범하지만 중심을 이루는 존재로 그려내며, 찬란한 분수와 대비되는 소박한 생명을 드러낸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향해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로 묵묵히 걸어가던 그 나귀의 발걸음을, 이 곡을 통해 투영해본다. 리카르도 샤이가 지휘한 레스피기의 트레비 분수 //youtu.be/u4beF7X69hM?si=siONBndygT8sZI9U 작곡가 류재준cpbc2026.03.24

바벨탑(The Tower of Babel)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월간 꿈CUM] 그리는 꿈CUM _ 미술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 1525~1569), 바벨탑, 유화, 참나무 패널, 114×155cm, 1563,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창세 11,4) 하늘 높이 탑을 쌓으려는 인류의 욕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99년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세워진 ‘페트로나스트윈 타워’(452m)는 미국이 독점해온 세계 최고층 타이틀을 처음으로 빼앗아 왔다. 하지만 이 건물을 곧바로 2위로 밀어낸 건물이 2004년 대만에서 나왔다. 101층, 508m 높이인 ‘타이베이 101’이 그것이다. 이 기록을 깨고 현재까지 세계 최고층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버즈 칼리파’(829.84m)다. 2024년 9월 현재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은 높이 679m의 말레이시아 ‘메르데카 118’ 빌딩이다.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의 ‘바벨탑’(The Tower of Babel)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바벨탑을 향한 인간 욕망에 대한 경고다. 그림 속 바벨탑의 중앙축이 기울어져 있는 것은 인간의 허영과 욕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드러내고 있다. 곧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움.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라는 경고. 이것이 화가가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였다. 화가는 또 바벨탑이 지닌 이중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인간의 욕망이 스스로를 억압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림 속 바벨탑은 그 아래 도시의 모든 생명을 눌러버릴 듯한 기세다. 하지만 바벨탑을 반드시 인간의 악이 초래한 절망적 사건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욕망의 꺾임 속에서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성경에 또한 녹아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바벨탑 이야기 바로 뒤에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다. 인간이 바벨탑을 지어 하느님께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결국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 선으로 이끄시는 노력을 멈추지 않으신다. 여기서 우리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인간 : 그 인간을 위해 낮은 곳으로 오시는 하느님’이라는 ‘상승하강 구조’를 읽을 수 있다. 낮은 인간은 바벨탑을 지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는데…, 높으신 하느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다. 우리를 인간적 욕망의 꼭대기가 아닌, 참 하늘로 올라가도록 하기 위해 아기 예수님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다.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에페 4,9) 2025.09.15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저는 믿나이다] (51) 한 분이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며 전능하시고 유형무형의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미켈란젤로, ‘천지 창조’, 프레스코화, 1511,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은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좀더 구체적이고 교리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본성과 실체와 본질에서 오직 한 분이시다”라고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어떻게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알 수 있느냐고요?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통해,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이 유일하신 분이심을 확실하게 알려주셨기 때문이죠.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 곧 “야훼”라는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을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써 당신이 누구이시며 어떤 이름으로 당신을 흠숭해야 할지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이름으로 당신만이 영원히 있는 분으로 모든 것의 시작이시며 마지막이심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고 일깨워줍니다. 그리스도교, 유다교, 이슬람교 등 야훼 하느님을 믿는 종교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주로서 만물의 근원이시며 초월적인 권위를 지니셨기 때문에 ‘아버지’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 분’(탈출 34,6)으로 당신의 모든 자녀를 자비와 사랑으로 보살피시기에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구세주이시며 아버지 하느님과 한 하느님이시다고 믿는 그리스도교는 유일하게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계시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당신 외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그 아들은 오직 당신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서만 영원히 아들이시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가톨릭교회 교리서」 240)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전능하심’은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을 ‘무한한 사랑’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다. 그분의 부성애와 전능은 서로를 밝혀준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심으로써(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에게 아들딸이 되리라 - 2코린 6,18), 그리고 무한한 자비를 통하여 아버지로서 전능을 보여 주신다. 당신 자비로 죄인들을 자유로이 용서하심으로써 그 권능의 극치를 드러내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70) 하느님의 전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부활과 영광을 통해 신비가 아닌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명료함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문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전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 어떻게 성부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성자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가톨릭교회 교리서」 278) 그리스도교는 아버지 하느님이 ‘창조주’이심을 믿습니다. 성경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하느님께서 유형무형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인간과 우주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기원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인간과 모든 만물의 존재 목적이 하느님께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동시에 우리의 행복을 돌보시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고백합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교 교령 「만민에게」 2 참조) “당신의 선하심으로 그리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유일하신 참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행복을 더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당신의 완전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들에 부여하신 선을 통하여 당신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가장 자유로운 계획 안에서, 모든 것을 한 번에, 한처음에, 유형무형의 피조물 하나하나를 무에서 창조하셨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드님」 1장) 교회는 창조의 업적을 아버지 하느님께 돌리기는 하지만,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창조의 유일하고 분리될 수 없는 근원이시라고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구약 성경 안에 암시되고 새로운 계약 안에 계시된, 성부의 창조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성자와 성령의 창조 활동은 교회의 신앙 규범으로 분명하게 확언된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 그분은 아버지이시고, 그분은 하느님이시며,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그분은 주인이시며, 그분은 만드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 자신, 곧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지혜를 통하여, 당신의 두 손이신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조는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공동 업적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92)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11.11

주님의 날을 준비하여라[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5·끝) 요한 묵시록 신약 성경의 마지막 정경인 요한 묵시록은 주님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라고 권고한다.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 1536~1541,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요한 묵시록은 읽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정경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성경의 여느 정경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많은 상징을 담은 ‘환시’를 통해 종말에 드러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를 전달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요한 묵시록을 읽고 그 내용을 제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의 권위 있는 주석과 주해를 바탕으로 요한 묵시록을 대해야만 이 정경을 제대로 읽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신약 성경의 마지막 정경입니다. ‘계시’ ‘묵시’ ‘묵시록’으로 번역된 헬라어 성경 본문을 ‘아포칼립시스(Αποκαλυψιs)’라고 합니다. 아포칼립시스는 우리말로 ‘가려져 있는 것을 열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곧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묵시문학과 예언서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묵시문학에서는 한 인물에게 어떤 초월적인 내용이 전달됩니다. 그 내용은 시간적으로는 종말에 관해, 공간적으로는 천상 세계에 관해 계시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계시받는 사람이 그 받은 내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천사나 다른 어떤 존재가 해석해 줍니다.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 묵시록이 묵시문학에 속합니다. 물론 예언서에도 환시가 등장합니다. 아모스·예레미아 예언자가 환시를 보았지요. 또 예언서도 ‘주님의 날’인 종말에 관해 말합니다. 아모스·즈카르야·말라키 예언자가 종말을 경고했지요. 하지만 묵시문학의 종말은 예언서의 그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예언서는 종말을 말하지만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고한 종말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의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의 종말은 현재의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 역사의 흐름이 단절되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시작됨을 나타냅니다. 묵시문학은 미래에 닥칠 종말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세사 전체를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앞이 보이지 않는 현재를 하느님의 계획 일부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Αποκαλυψιs Ιωαννου(아포칼립시스 요안누)’,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Apocalypsis(Apocalypsis B. Ioannis Apostoli)’, 한국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요한 묵시록’으로 표기합니다. 교회는 요한 묵시록의 저자를 넷째 복음서를 쓴 요한 사도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과거부터 넷째 복음서와 묵시록은 한 저자가 썼다고 하기에는 문체와 신학이 너무 다르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 예로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의 그리스도론이 중심인데 반해 요한 묵시록에는 육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성경학자 중에는 팔레스티나 지역에 살다가 유다 전쟁(66~73년) 이후 소아시아 지방으로 이주한 유다인 출신 순회 예언자 중 한 명이 묵시록을 저술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로마의 황제 숭배 의식이 강요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말기의 박해 상황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어 95년께 쓰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요한 묵시록의 수신인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입니다.(1,4.11; 2─3장) 에페소·스미르나·페르가몬·티아티라·사르디스·필라델피아·라오디케이아 교회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요한 묵시록은 이 일곱 교회에만 보내진 종말에 관한 계시가 아니라 소아시아 전체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이라고 설명합니다.(22장 참조) 가장 큰 이유는 ‘7’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일곱, 곧 7은 하느님의 세상 창조에 필요했던 시간으로 이후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약속된 것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부터 주어진 하느님의 구원을 위한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을 드러냅니다. 요한 묵시록은 22장으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짧은 편지(1─3장)와 환시들(4─22장)로 구성돼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일곱 교회에 ‘니콜라오스파’를 경계하라고 경고합니다.(2,6) 이들은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2,2), “사탄의 무리”(2,9),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2,14), “이제벨이라는 여자”(2,20), “사탄의 깊은 비밀”(2,24)로 우상 숭배를 조장하고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환시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환시는 ‘어좌에 앉은 분’과 ‘어린양’에 대한 환시로 이뤄져 있습니다. 어좌에 앉은 분은 하늘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어린양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12번에 걸쳐 표현되는 스물네 원로는 천사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과 성가대를 나타내는 숫자에서 왔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1역대 24─25장 참조) 또 사자·황소·사람·독수리로 묘사된 네 생물은 네 복음서를 상징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종말의 모습을 악의 세력과의 전쟁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사이에 ‘천 년 통치’라는 중간 시간을 계시합니다. 이 시기는 ‘평화의 시대’(이사 11,1-9)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실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환시입니다.(마태 19,28) 신약 성경의 마지막 정경인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주님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리길재 선임 기자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4.10.29
나는 주님을 찾습니다[월간 꿈CUM] 평신도 기도 출처: 월간 꿈CUM 우리의 희망이신 주님!나는 주님을 찾습니다. 그 얼굴, 그 모습을 형제들 가슴속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사랑, 기쁨) 그러나 무엇을 했나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루를 지내고 주님 앞에 앉아 뒤돌아볼 때 깊은 기도, 묵주 기도, 성경 읽기, 미사참례를 제외하고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한 일이 떠오르지 않지만 소소한 일을 꺼내보면, * 황톳길 걷다가 지렁이가 보이면 흙으로 보내주기 * 지인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며 이야기 나누기 * 교사들과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사랑 표현 많이 하기 의지적으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해 보기로 결심해 봅니다.그런 행동이 곧 열매이고, 기도하고 생활한 제물이 되어 봉헌될 테니까요. 말씀을 들으라 하셔서 듣기를 원했지만 주님은 언제나 침묵하십니다. 문득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이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침묵으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오감을 열어놓습니다. 들으려고만 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깊이 생각할수록 많은 지혜들이 생겨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희망의 시간을 보내면서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물은 마셔야 갈증이 해소되고, 밥은 먹어야 배고픔이 사라지고, 와서 보고 경험을 해봐야 깊을 맛을 느끼게 되겠지요? 아직은 미숙하지만, 언젠가 주님과 마주 보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날을 꿈꾸며 오늘도 하염없이 주님을 바라봅니다. 밝은 빛으로 눈을 뜨게 하시고, 생명의 말씀으로 귀를 열게 하시고, 아름다운 찬양으로 입을 열도록 끊임없이 이끄시며, 도움 주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기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글 _ 구정회 (프란체스카, 서울대교구 수락산 본당)2025.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