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총성 위에 성경을 얹었나?… 트럼프는 왜 전쟁에 하느님 말씀 들이밀까배경엔 미국 내 시민종교와 강력한 복음주의 기독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26년 2월 24일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국정연설을 하고 있다. OSV 미국 정치 지도자들이 전쟁이나 군사 행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장면들이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최근 피터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전쟁 상황 브리핑 자리에서 시편 구절을 인용하며 군사 행동의 정당성을 강조해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전쟁 속 총성 위에 성경을 얹는 미국의 정치적 수사는 단순한 개인 신앙 표현이 아니라, 미국 내 뿌리 깊은 정치 구조와 맞닿아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벨라는 이에 대해 ‘시민종교(civil relig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종교 언어가 공적 영역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 “미국의 시민종교는 국가의 역사와 정치 행위를 초월적 의미와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실제 미국 대통령 연설에서 반복되는 “God bless America”(미국에 신의 축복을)와 같은 표현은 국가 정책을 단순한 정치 선택이 아니라, 도덕적 사명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해왔다. 외교사학자 앤드루 프레스턴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외교 정책은 오랫동안 종교적 언어와 깊이 결합돼 왔으며, 지도자들은 이를 통해 국제 문제를 선과 악의 서사로 설명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서사는 특히 전쟁 상황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전문가들은 “전쟁은 도덕적 정당화가 필요한 행위이며, 종교 언어는 이를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수단이 된다”고 설명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싼 미국 정치에서 전쟁과 종교 언어의 결합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군사 행동과 정치적 갈등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성경 구절과 기도가 등장하고, 심지어 전쟁 상황 중에 백악관 안에서 목회자들이 대통령을 둘러싸고 기도하는 장면까지 연출되면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미군 내 일부 지휘관들은 “전쟁은 주님의 계획”이며 “트럼프는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라는 극단적 언급까지 서슴치 않는다. 대표적인 장면은 2020년 6월 워싱턴의 세인트존스 교회 앞에서 연출됐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 진압 직후 성경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공개하며 강경 대응을 정당화하는 메시지를 던졌다. 정치적 갈등 상황 속에서 종교 상징이 결합된 이 장면은 ‘권력과 성경의 결합’이라는 비판을 낳았다. 트럼프 2기 들어 이러한 흐름은 전쟁 상황과 더욱 직접 연결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2025년 이란 핵시설 공습 발표 직후 그는 “God bless America, God bless Israel”이라고 말하며 군사 행동을 종교적 축복의 언어로 연결시켜 마무리했다. 이어 2026년 초에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대통령을 둘러싸고 안수기도를 하는 장면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한 목사는 “우리 대통령에게 우리나라를 ‘주님 아래 하나의 나라’로 다시 이끌 힘을 계속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 국면에서 국가 권력과 종교 의례가 결합된 장면이 계속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월 미국 주도로 설립한 ‘평화위원회’ 첫 회의에서 여러 국가 지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가자지구 통치와 재건을 감독하기 위해 설립된 기구여서 비판을 받고 있다. OSV 이같은 흐름의 배경에는 미국 정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복음주의 기독교가 자리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개인의 회심과 선교를 중시하는 개신교 흐름으로, 미국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은 정치적 선택에서도 신앙적 가치와 세계관을 중요하게 반영하는 경향이 강하며, 특히 이스라엘과 중동 문제를 성경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의 정치와 종교의 결합은 이른바 ‘정치 문화 + 지지층 결집 + 전쟁 정당화’에 가장 좋은 3축 구조가 되고 있다. 정치 상황에서는 도덕적 정당성에, 전쟁 때에는 ‘선과 악의 싸움’으로 단순화해 전쟁은 정의의 발로이며, 신의 계획이라는 서사 구조를 만드는 데 성경이 이용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미국 내 정치사회학자들은 “특히 미국 정치에서 복음주의 기독교 유권자층은 핵심적인 동원 기반이며, 종교 언어는 이들에게 강한 정체성과 결속을 제공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중동 문제와 이스라엘 정책과 관련해 성경적 해석이 결합되면서 정치인들의 종교적 표현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정치 전략으로 기능하게 된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25년 1월 20일 미국 제47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성경 앞에 선서를 하고 있다. OSV 미국 내 일부 언론들도 교회와 정치가 결합한 현 트럼프발 전쟁 시대를 “교회와 정치가 결합한 성스러운 전쟁(holy war)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미 매체 LA Times는 “미국 역사상 가장 비그리스도교적 대통령 중 하나로 평가받는 트럼프가 계속 자신을 예수님의 외투로 감싸고 있다”며 “이번 사순 시기에는 어느 때보다 더 트럼프와 그를 둘러싼 현실을 회개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의 기도와 포탄 쏟아지는 전장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기도는 다른 걸까?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흐름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 예루살렘 라틴 총대교구 피에르바티스타 피자발라 추기경은 3월 15일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가장 큰 죄”라고 지적하면서 “전쟁은 정치적 이해관계의 산물일 뿐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피자발라 추기경은 이러한 표현을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말하는 유사 종교적 언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고통받는 이들, 억압받는 이들, 침묵 속에서 희생되는 이들과 함께 계신다”고 거듭 강조했다. 미국 교회 지도자들도 계속 우려를 표해왔다. 시카고대교구장 블레이즈 쿠피치 추기경은 3월 7일 전쟁이 영화나 게임처럼 소비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이는 인간의 고통을 가리고 사회를 폭력에 무감각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신앙은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고 평화를 향하도록 이끌어야 하지만, 권력과 결합될 때는 오히려 폭력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이정훈2026.03.20

위로하시는 하느님[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_ 위로 (03) 삽화 _ 김 사무엘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이사 40,1-2) 제2 이사야 예언자(전통적으로 이사야서는 기록 시기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1-39장을 제1 이사야서, 40-55장을 제2 이사야서, 56-66장을 제3 이사야서라고 부릅니다)가 나라가 망한 뒤 이방 땅으로 유배를 끌려간 유다 백성에게 전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뿌리 뽑힌 당신 백성을 염려하고 위로하시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들은 이들이 어찌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말씀의 배경은 기원전 540년경입니다. 기원전 587년 신바빌로니아에 의해예루살렘이 정복당해 나라의 주권을 잃은 지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흐른 상태입니다. 특히 철저히 파괴되어 여전히 황폐해진 상태로 남아 있는 성전은 유다 백성에게서 하느님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마저 빼앗아 갔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머무시는 처소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유배를 끌려간 유다 백성은 고향에서 추방당한 고통을 겪었으며 이방 땅에서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마저 박탈당하는 시련을 맛보았습니다. 유다 포로들의 비탄을 시편 137편이 증언합니다.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시편 137,1-4) 이들은 더는 시온의 노래, 즉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이 극단적인 시련의 시기에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가 이루어집니다. 이방 신들의 땅에서 예언자는 이 세상의 주권을 가진 유일한신은 하느님뿐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셨기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씌워진 바빌론의 멍에를 벗겨주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언자의 이 선포를 통해 하느님은 고통 중에 있는 유다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예언자의 선포가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라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사실에 주목합시다. 이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지금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직접 반복해서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움직이시겠다고 말입니다.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해방을 위해서 한 이방 임금을 이용하십니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임금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포로로 끌려와 있던 유다 백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키루스는 놀랍게도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돕기까지 합니다. 이 역사적 사건은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바빌로니아보다 강한 페르시아조차 하느님의 도구라면, 당연히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멸망한 것이 하느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빌로니아가 유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였다는 사실의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이사야의 예언, 즉 하느님의 약속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위로는 그저 연민을 드러내는 부질없는 말 몇 마디가 아니라 실제로 절망으로부터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힘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앞의 글에서 위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에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의 위로로 유다 백성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숨은 곧 생명입니다. 들숨과 날숨의 이어짐이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숨이 끊어졌다고 표현하죠.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흙덩이에 숨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이사 42,5) 하느님의 위로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죽음의 고통을 겪던 유다 백성에게 생명을 돌려주었습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2025.11.12

창세기 속 여성 ‘대등한 존재’로 번역한 선종완 신부 선종 50주기 학술심포지엄 한국 최초 근대 성서학자 재평가 사목 유산 조명, 시복 추진 속도 서울대교구 총대리 겸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장 구요비 주교를 비롯한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 선종 50주기 학술 심포지엄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제공 “사람이 저홀로 있음이 좋지 않으니, 그와 대등(對等)한 돕는 이를 만들어 주겠노라.” 1958년 한국인 최초로 히브리어 구약 성경 본문을 우리말로 옮긴 선종완(라우렌시오, 1915~1976) 신부는 창세기의 여자를 남자와 ‘대등한 존재’로 해석했다. 이는 20년 뒤 서구 여성신학계에서 나온 ‘그에게 어울리는 짝’이라는 표현보다도 한 걸음 앞선 여성 시각의 번역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선 신부가 학력과 경제적 형편 때문에 수도 생활의 기회를 얻기 어려웠던 여성들을 위해 1960년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한 것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교육 사업을 통해 실천해온 복음 정신의 연장선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선 신부 선종 50주기를 맞아 11일 경기 과천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본원에서 ‘말씀으로 산 사제,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를 주제로 열린 학술 심포지엄에서다. 주제 발표를 맡은 이환진(감리교신학대학교 명예교수) 목사는 선 신부를 4세기경 불가타(대중 라틴어 성경)를 번역한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에 빗대 ‘동아시아의 예로니모’라고 불렀다. 이 목사는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하고 수녀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한 선 신부는 성 예로니모를 닮았다”면서 “성인이 바울라 성녀의 헌신으로 불가타를 번역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성경 번역 역시 수녀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동아시아 성경 번역 전통에서 이렇게 여성과 함께 번역하면서 여성 시각의 번역 성경을 내놓은 번역가는 찾기 어렵다”며 “‘그와 대등한 돕는 이’(창세 2,18)라는 번역이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현재 가톨릭 성경은 해당 히브리어 본문 표현을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민석(대건 안드레아)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선 신부는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해 성경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공동체적 모델을 제시했다”며 “이는 성경을 학문적 연구 대상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살아 있는 규범으로 구현하고자 한 시도”라고 역설했다. 이어 “그는 배우지 못한 여성들도 수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라며 성경 번역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수녀회를 설립했다”며 “의료 봉사·교육·사회사업 때문에 학력 등을 입회 자격으로 요구했던 여느 수도회와 달리, 초등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만 갖추면 받아들여 수련을 받게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는 선 신부가 신학교에 다녔던 일제강점기, 한국 교회가 학생들의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무료 교육을 시행하고자 한 분위기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며 “선 신부의 생애는 용소막이라는 굳건한 신앙 공동체와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학교 교육이라는 역사적·제도적 기반 속에 형성된 결과”라고 풀이했다. 주원준(토마스 아퀴나스)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선 신부의 1948~1952년 로마·예루살렘 유학 시절 육필 노트 44권과 구약 성경 번역본 「선종완역」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노트에는 히브리어·그리스어뿐만 아니라 아람어·수메르어·아카드어·이집트어 등 고대 근동 언어를 체계적으로 학습한 내용과 발굴 유물을 스케치한 기록이 담겨 있다. 주 연구원은 이를 토대로 “선 신부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통틀어 고대 근동학과 본문 비평을 가장 먼저 수용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성서학자’라고 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선종완역」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성서 입문서”라며 “가톨릭 전승에 충실하면서도 ‘야훼’나 ‘판관기’ 등 수많은 번역어를 참신하게 제시한 연구서”라고도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와 선종완신부시복추진위원회가 마련했다. 선 신부의 제자인 서울대교구 총대리 겸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장 구요비 주교가 축사를 맡았다. 선 신부는 말년에 원주교구 소속이었으나 1976년 서울 명동 성모병원(현 가톨릭회관 건물)에서 선종했으므로, 그의 시복시성 안건의 관할 주교는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다. 정 대주교는 올해 초 선 신부의 시복시성 추진 요청을 받아들였으며, 청구인인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총원장 정복례 수녀가 수녀회 소속 노경숙 수녀를 안건 청원인으로 지명한 것을 승인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이학주2026.07.22
 전승과 전례](//cpbc.co.kr/CMS/newspaper/2011/06/rc/380079_1.2_titleImage_1.jpg)
[재미있는 가톨릭교리](3) 전승과 전례하느님 말씀, 행적 모든 가르침 전승(傳承)은 넓은 의미에서 한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하느님 말씀과 행적, 교회 가르침과 활동에 관한 모든 것, 곧 성전(聖傳)과 성경(聖經) 모두를 말한다. 하느님에 대한 전승은 바로 하느님의 자기 계시 내지 자기 통교에서 출발한다. 유한한 인간이 하느님의 자기 계시나 자기 통교 없이 무한하신 그분을 알 수 없는 까닭이다. 계시(啓示)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나게 하거나, 감추어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볼 수 없는 인간을 위해 스스로 당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것을 계시라고 가르친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처음으로 인간에게 당신 존재를 드러내셨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역사에 함께하시면서 더 구체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삶에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성장,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통해 완전하게 계시하셨으며,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서도 계속 나타내 보이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분으로 당신을 드러내신 자기 계시의 절정이자 완성이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말씀과 행적, 인격과 삶에서 최종적으로 완결됐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공적 계시가 완결됐다고 가르친다. ▶전승의 내용 1)성전(聖傳) 한처음부터 하느님은 인간과 인간 역사에 개입하셨다. 그분 말씀과 행적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됐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셨을 때도 그분 말씀과 행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사도들 가르침과 행적 역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세기를 이어오면서 교회 가르침과 활동 역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이 모든 것이 교회의 거룩한 전승, 곧 성전을 이룬다. 2)성경(聖經) 하느님 말씀과 행적을 글로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과 행적을 전하시기 위해 인간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으시어 구원에 필요한 일들을 기록하도록 하셨다. 3)성전과 성경의 관계 성전과 성경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상통한다. 하느님이라는 동일한 원천에서 비롯됐고, 하느님이라는 동일한 분을 선포하고 전하기 때문이다. ▶전승에 대한 올바른 이해 전승을 올바로 알아듣고 해석하려면 첫째, 하느님 은총과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16). 둘째, 교도권 해석이 필요하다. "기록된 하느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계시헌장」 10항) 있기 때문이다. 셋째, 하느님 말씀과 교회 가르침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자세가 필요하다. 전례라는 말은 그리스어 '레이토우르기아'에서 비롯됐다. 이는 '백성의 일' 또는 '모든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뜻하는데, 기원전 4~3세기께부터 예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됐다. 전례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헌장」 10항)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느님 아버지께 올리고,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공적 경배를 가리킨다. 전례는 교회에서 합법적으로 임명된 이들이 교황청 인준을 받은 예식에 따라 교회 이름으로 거행하는데, 전례에는 모든 성사ㆍ준성사ㆍ시간전례ㆍ성스러운 행렬ㆍ성체 강복식 등이 포함된다. 교회는 일 년을 주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신비를 기념한다. 이를 전례주년이라고 한다. 교회는 일 년 동안 예수님 탄생부터 시작해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기념한다. 전례주년은 성탄과 부활을 중심으로 대림ㆍ성탄ㆍ사순ㆍ부활ㆍ연중시기로 이뤄져있다. 제공=서울대교구 사목국조은일2011.06.14
![[출판] 하느님 말씀의 힘으로 커온 성서와 함께 마흔 잔치](//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3363_1.1_titleImage_1.jpg)
[출판] 하느님 말씀의 힘으로 커온 성서와 함께 마흔 잔치 월간 '성서와 함께' 40돌 기념미사, 19일 성경을 접하는 이들이 하느님 말씀에 맛 들이도록 이끌어 준 월간 '성서와 함께'(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발행)가 창간 40돌을 맞았다. 40돌 기념 로고. 1973년 3월 '가톨릭 성서모임' 성서가족을 위한 소식지로 출발한 '성서와 함께'는 1984년 10월 '103위 순교성인' 탄생을 기리며 일반 정기 간행물로 혁신 창간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이번 3월호(통권 444호)는 '내 나이 마흔'을 주제로 창간 40주년 특집호로 꾸며졌다. 특집호에서는 가톨릭 성서모임 기반을 다지고, '성서와 함께' 창간을 이끈 조화선(미주 가톨릭 성서모임 책임) 수녀와 최창무(전 광주대교구장) 대주교 인터뷰가 실렸다. 또 '성서와 함께'가 걸어온 발자취를 소개했다. 조 수녀는 1973년 창간호를 떠올리며 특히 원고를 일일이 손으로 쓰고, 복사해서 만들었던 기억을 돌이켰다. 또 40주년을 이어온 원동력은 "하느님 말씀의 힘"이라며 지금껏 '성서와 함께'를 도와준 모든 이들의 기도와 격려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성서와 함께'는 성경 공부 과정을 끝냈더라도 계속해서 말씀을 접할 수 있는 매체가 있으면 좋겠다는 성서모임 가족들 의견이 모여 제작됐다. 성서모임 가족들을 하나로 이어주면서, 말씀을 서로 나누는 성격의 회지가 필요하다 데 모두가 공감하고 있던 터였다. 월간지 이름은 하느님 말씀과 '함께' 살자는 의미를 담았다. 조 수녀는 "하느님 말씀에 붙들린 사람, 그 말씀에 헌신하려는 사람들이 마음과 힘을 다해 '함께' 꾸려 나가는 간행물이라는 의미"라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강조한 갈라진 교회와 일치, 타 종교와 타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의 대화를 위해 선의의 사람들이 모두 '성서'와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최 대주교는 "창간호가 나올 때 '성서와 함께'가 40년이나 이어질지 몰랐다"며 "인간이 계획한 것이 아니고 누가 소유한 것도 아니기에 오늘까지 올 수 있었고, 모두 성령께서 이끄신 덕분이다"고 말했다. 무가지로 발행했던 '성서와 함께'는 1984년 정부 인가를 받은 정기 간행물로 혁신 창간하면서 유가지로 전환했다. 발행부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원고료와 인쇄비, 발송비 등 제작비 부담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소식지 발행을 맡은 편집부원들에게 언제까지 재능기부와 봉사를 요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혁신 창간호를 시작으로 '성서와 함께'는 성서모임 가족을 넘어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준(準) 성경전문지로 발돋움했다. 이 때부터 개신교 사목자 글도 실었고, 신자가 아닌 이들의 글도 배제하지 않았다. '성경을 통해 교회 일치와 민족 복음화를 이룬다'는 지향에 더욱 충실했다. 이와 더불어 1989년 1월호부터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랑 나눔 꼭지 '여기 사마리아 사람이'를 만들어 맛 들인 하느님 말씀을 삶에서 직접 실천하도록 했다. 최 대주교는 "'성서와 함께'가 고급스러운 성경 해설서가 되지 말고, 가르치려고만 하는 색깔을 지우고, 하느님 말씀을 체험케 하는 생동감 있는 월간지가 되기를 기대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이해인 수녀는 발간 4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시 '성서예찬'과 함께 "성서를 깊이 읽고 묵상하고 되새기고 생활 속에 실천하는 법을 가르쳐 준 끊임없는 노력과 정성에 감사드린다"는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창간 40주년 감사미사는 1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흑석동 성모교육원 강당에서 봉헌된다. 문의 : 02-822-0125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조은일2013.03.12
![[재미있는 가톨릭교리] (15)-삼위일체 하느님](//cpbc.co.kr/CMS/newspaper/2011/09/rc/390164_1.2_titleImage_1.jpg)
[재미있는 가톨릭교리] (15)-삼위일체 하느님삼위일체 하느님 서로 사랑, 일치삼위일체(三位一體)란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통해 하느님 구원을 경험한 인간 체험에 바탕을 뒀으며, 오랜 신학적 성찰을 통해 믿을 교리로 선포됐다. ▶성경 가르침 성경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인간 구원 역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원 활동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 구약성경에서는 암묵적으로, 신약성경에서는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구약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은 다음의 성경 구절에서 나타난다. 첫째, 하느님께서 "우리"라고 언급하신 구절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라고 말씀하신 것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둘째, 창세기 18장은 주님께서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세 사람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아브라함은 자기 앞에 나타난 이 세 분을 극진히 대접했다고 전한다. 셋째는 주님께서 명하신 세 번의 축복문(민수 6,24-26), 넷째는 이사야 예언자가 소명을 받을 때 사람들이 주님께 드리는 세 번의 찬미(이사 6,3)다. 신약성경에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가 보다 명시적으로 계시된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나타내는 신약성경 말씀으로는 일반적으로 다음 구절을 제시한다. 첫째, 예수님 탄생 예고 때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라고 선포됐다. 둘째,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며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라는 말씀이 들려온 것이다. 셋째, 예수님께서 수난 전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넷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교회 가르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 서로 단일하고 동등하며, 세 위격적 존재로서 서로 다른 역할과 활동을 통해 상호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성부께서는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성자께서는 계시와 구원 활동을 하시며, 성령께서는 인간 마음에 거하면서 성화, 거주, 내밀함의 활동을 하신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자신의 활동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다른 위격의 활동에도 참여한다. 성부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파견 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며, 인간 구원을 위해 성자와 성령을 세상에 파견한 분이시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파견돼 인간으로 강생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며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이시다. 성령은 성자의 부활과 승천 이후 성자를 통해 성부에게서 파견된 분이시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호칭할 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위를 지켜야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일치하신다.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뤄야 할 사랑의 단일성, 사랑으로 일치를 이뤄야 할 단일성을 말해주고 있다. 교회 공동체와 모든 그리스도인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상호 사랑과 일치로 나아가도록 도와줘야 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한 교의는 인간 능력으로 온전히 깨달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신비다. 따라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으로 존재하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이 되는 삼위일체 신비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고 믿고 고백하도록 가르친다. ▶신앙 고백 그리스도인은 전례 예식을 비롯한 전 신앙생활을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기도문 :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은 신앙 행위의 기본인 십자성호에서부터 영광송, 사도신경 등 모든 기도문에서 드러난다. △성사 생활 :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세례성사를 위시한 모든 성사 생활에서 표현된다. △삼위일체 대축일 :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에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념하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인간 구원 활동에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제공=서울대교구 사목국조은일2011.09.20

헛된 위로[월간 꿈CUM] 테마로 읽는 성경 _ 위로 (02) 삽화 _ 김 사무엘 인간의 위로는 종종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욥의 경우를 봅시다. 욥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습니다.(욥 1,1 참조) 하느님께서도 욥을 땅 위에 다시 없을 사람으로 인정할 정도였습니다.(욥 1,8 참조) 그런데 사탄은 욥의 의로움에 불순한 동기가 숨어있을 수 있다고, 즉, 의로운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복 때문에 욥이 그렇게 행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이익을 위한 욕망에 이용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탄에게 욥에 대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 결과 욥은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마저 잃습니다. 이렇게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친구 엘리파즈, 빌닷, 초바르가 찾아옵니다. 방문의 목적은 위로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그에게 닥친 이 모든 불행에 대하여 듣고, 저마다 제 고장을 떠나왔다. 그들은 테만 사람 엘리파즈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초바르였다. 그들은 욥에게 가서 그를 위안하고 위로하기로 서로 약속하였다.(욥 2,11) 친구들이 고통 중에 있는 욥 앞에서 첫 번째로 취한 태도는 침묵입니다. 그들은 이레 동안 밤낮으로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의 고통이 너무도 큰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욥 2,13) 때로는 침묵이 가장 좋은 위로 혹은 유일한 위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들은 욥의 고통에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결국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합니다. 친구들은 욥의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려주려 합니다. 그들의 생각에 욥은 죄를 지어서 하느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욥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면 고통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은 죄가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친구들의 말은 오히려 욥의 고통을 가중할뿐입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는 데 실패합니다. “자네들은 모두 쓸모없는 위로자들이구려.”(욥 16,2) 이제 하느님께서 직접 등장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변호자를 자처하며 위로자 대신 고발자가 되어버린 친구들을 비난하시고, 욥의 의로움을 인정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너희가 나의 종 욥처럼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욥 42,8) 비록 하느님께서 욥의 고통의 원인을 밝히지는 않으시지만, 적어도 친구들의 말처럼 자신의 죄 때문에 겪는 고통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욥의 자녀와 재산을 이전보다 더 풍성하게 돌려주심으로써 그를 위로하십니다. 이렇게 욥기는 진정 위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욥을 위로하신 다음 그제야 가족과 친구들이 욥을 위로한답시고 몰려오는 장면은 해학적입니다. 그의 형제들과 자매들과 옛 친구들이 모두 그의 집에 와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들이닥치게 하셨던 모든 불행에 대하여 그를 동정하고 위로하며, 저마다 은전 하나와 금 고리 하나를 그에게 주었다.(욥 42,11) 시편은 위로자를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을 말합니다. 모욕이 제 마음을 바수어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동정을 바랐건만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시편 69,21) 코헬렛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또 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모든 억압을 보았다. 보라,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을!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그 억압자들의 손에서 폭력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코헬 4,1) 이것은 코헬렛 저자 개인만의 말이 아니라, 기원전 587년 나라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를 겪은 유다 백성 전체의 절망적 부르짖음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애가도 정복당하고 파괴된 예루살렘과 성전을 두고 한탄합니다. “시온이 두 손을 내뻗었건만 위로해 줄 이 아무도 없다오.”(애가 1,17) “그들은 제가 탄식하는 것을 듣건만 아무도 저를 위로해 주지 않습니다.”(애가 1,21) 어떤 사람에게서도 위로를 찾을 수 없어 절망에 빠진 이들을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요? 오직 한 분 하느님만이 참으로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버려짐,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심으로써 위로해 주십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2025.10.23

유혹과 구원의 상징[신지현의 ‘성서와함께’ 가꾸는 기도의 정원] 17. 사과 성서와함께 제공 중요한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등장하는 과일, 바로 사과다. 백설공주의 독 사과, 뉴턴의 눈앞에 떨어진 사과, 빌헬름 텔의 어린 아들 머리 위에 얹힌 사과. 최근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영화 ‘오디세이’의 서막인 트로이 전쟁을 발발시킨 것도 다름 아닌 파리스 왕자의 황금 사과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과는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사과일 것이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유한한 삶을 살도록 한 원흉이니 말이다. 그런데 성경 속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실제로 어떤 열매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성경에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로만 언급될 뿐이며, 서양 회화와 문학 작품에서 사과로 흔히 묘사되다 보니 그 통념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선악과가 석류·무화과·모과 또는 살구라고 주장한다. 성경을 라틴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과가 되었다는 가설, 중동에서 나는 감귤류인 에트로그(etrog, 시트론)가 고대 그리스에서 ‘페르시아 사과’·‘황금 사과’라고 불리다가 서양 문화권에서 사과로 잘못 알려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사과는 지난 수백 년 동안 다양한 예술 작품에서 선악과를 대표하는 과일로 묘사되었다. 창세기 3장의 내용을 그린 성화에서 사과는 유혹과 인간의 타락을 상징하며, 정물화에 썩은 사과가 하나 또는 여러 개 있을 때 이는 원죄를 나타내는 소재로 해석되곤 한다. 반면 성화 속 어린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가 손에 사과를 들고 있는 경우에는 구원·구속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사과가 성경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가서에는 “나의 연인은 숲 속 나무들 사이의 사과나무”(아가 2,3), “사과로 내 기운을 북돋아 주셔요”(아가 2,5) 등 사과라는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여기서 사과는 야생에서 자라는 원생종으로 추정되며, 오늘날 우리가 소비하는 사과는 오랜 세월 수많은 교배를 거쳐 만들어진 품종들로 현재 사과나무속에는 무려 7500가지 이상의 재배종이 있다. 한편 예수님과 황금 사과에 대한 재미있는 전설도 있다. 이탈리아의 성녀 아분단시아가 여덟 살 어린 소녀였을 때, 그녀는 황금 사과를 들고 있는 성화 속 어린 예수님을 보며 그 황금 사과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천진난만한 마음이 사랑스러워 보였던 것일까. 그림 속 예수님께서 아분단시아에게 사과를 건네주었다. 너무 기뻤던 아분단시아는 예수님께 무언가를 드리고 싶어서 한겨울 추위에도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놀랍게도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어 꽃을 꺾어 제대에 바쳤다고 한다. 신지현cpbc2026.09.09

책꽂이 네 복음서 대조 2. 마르코 복음 3. 루카 복음 / 정태현 신부 등 / 한님성서연구소 「네 복음서 대조」 시리즈가 완간됐다. 제목대로 네 복음서, 즉 마태오·마르코·루카·요한 복음서를 한눈에 대조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앞서 각각 마태오·요한 복음을 기준으로 한 1권과 4권이 출간됐고, 이번에 마르코·루카 복음을 기준으로 엮은 2권과 3권이 함께 나왔다. 기준 복음서를 가장 왼쪽에 넣고, 나머지 세 복음서에서 병행하는 본문을 차례로 실었다. 책의 가장자리에는 복음서와 병행하는 구약성경과 신구약 외경 본문도 배치했다. 책을 펴낸 한님성서연구소(소장 정태현 신부) 측은 “구약성경에서 시작해 신약 외경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믿음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통해 네 복음서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지평이 크게 확장되리라 믿는다”고 전했다. 꼭 알아야 할 미사 통상문 안내서 / 윤종식 신부 / 가톨릭출판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인간이 되게 하시어 그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라는 파스카 사건을 통해서 인간을 죄에서 구하십니다. 그리고 이 구원 사건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예식 안에서 ‘기억’을 통해 지속적으로 현재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드리는 ‘미사’입니다.”(30쪽)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에 모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성찬례에 초대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매주 미사에 참여하면서도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꼭 알아야 할 미사 통상문 안내서」는 미사의 순서와 기도문에 담긴 신학적·전례적 의미를 설명한 책이다. 윤종식(가톨릭대 전례학 교수) 신부가 2017년 한국어판 「로마 미사 경본」 도입 이후 달라진 미사 통상문의 의미와 전례 정신을 풀어쓴 책으로, 최근 전례 내용을 보완해 새로 펴냈다. 말씀의 우물 / 신교선 신부 / 기쁜소식 2025년 가을 인천교구 굴리엘모사제관의 성사전담사제 4명이 교우들을 위한 「사제의 영성나눔」 공개강좌를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가톨릭신문에 26주간 그 내용을 연재했고, 몇 편의 글을 더해 「말씀의 우물」이라는 한 권의 책을 엮었다. 독자들이 신약과 구약 성경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 스스로의 삶과 신앙을 성찰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욥은 고통 속에서도, 실망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찾고 또 찾던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5-6) 욥기는 영원하신 분의 축복으로 끝을 맺습니다.”(207쪽) 이 세상에서 별처럼 / 정남진 신부 / 바오로딸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면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셨다. 새 계약인 신약도 본질은 같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면 땅을 받는다. 바로 ‘천국’이라는 땅, 그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43쪽) 「이 세상에서 별처럼」은 삶의 의미를 묻고 찾는 이들에게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참된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를 안내하는 책이다. ‘토라 이야기 - 출애굽 - 광야 - 약속의 땅’의 여정을 통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향했던 목적지가 어디인지, 사십 년에 걸친 광야 생활 동안 하느님이 그들에게 왜 그토록 ‘거룩함’과 ‘말씀’을 강조하셨는지 성경과 저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원주교구 정남진(배론성지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주임) 신부가 썼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6.08.12
![[출판] 책꽂이- 미사통상문을 위한 라틴어 등](//cpbc.co.kr/CMS/newspaper/2013/02/rc/441382_1.1_titleImage_1.jpg)
[출판] 책꽂이- 미사통상문을 위한 라틴어 등 미사통상문을 위한 라틴어 황치헌 신부 지음/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2만 5000원----------황치헌(수원가톨릭대) 신부가 신학생들을 위해 만든 라틴어 교재다. 여느 교재와 달리 라틴어 미사통상문을 중심으로 라틴어를 익힐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미사통상문에 나오는 라틴어 기도문과 예식들을 해석하며, 상세한 문법 설명을 곁들였다. 또한 미사통상문에 나온 단어 외에도 라틴어로 된 신학 및 교리 용어, 철학용어, 라틴어 전례성가를 풀이했다. 신학, 철학, 전례를 공부하는 신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라틴어 교과서다. 교부들의 성경주해-구약성경Ⅸ, 잠언ㆍ코헬렛ㆍ아가 J,로버트 라이트 엮음ㆍ토머스 C.오든 책임편집/ 박영식ㆍ배승록 옮김/분도출판사/4만 8000원------------ 초기 교부들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삶의 심오한 문제들에 대처하는 가장 뛰어난 지혜가 잠언과 코헬렛, 아가서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교부 주해서 84편에서 발췌한 1385개 본문을 수록하고 이를 세밀하게 분석, 해설했다. 「교부들의 성경주해」는 신ㆍ구약 성경에 관한 교부들의 사상과 신앙 정수(精髓)만을 뽑아 현대어로 옮긴 총서다.주님께 말할래요 소곤소곤 데레사 아메알 글/하케엘 핀예이루 그림/ 김동주 수사 옮김/성바오로/5500원------ '내 아이의 첫 기도'라는 부제처럼 어린이들이 기도할 때 첫걸음을 잘 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기쁠 때 바치는 기도 △화가 날 때 바치는 기도 △여행할 때 하는 기도 △무서울 때 하는 기도 △친구들을 위한 기도 △공부할 때 바치는 기도 등을 소개하면서 일상생활 모든 것이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예쁜 그림과 함께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기도문이 수록돼 있어 아이들이 즐겁게 기도하도록 이끈다.순례자의 기도와 노래김건정 지음/으뜸사랑/1만 4000원--------- 성가대 지휘자의 산티아고 도보 순례기다. 전례음악합창단 상임지휘자이자 전례음악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patritius) 운영자인 김건정(파트리치오, 66)씨는 지난해 3월부터 약 한 달간 산티아고 길을 걸은 여정을 책으로 펴냈다. 성가대 지휘자답게 방문하는 성당마다 오르간을 유심히 살피고, 수도자들이 부르는 미사곡을 따라 부르며 묵상한 순례기가 눈에 띈다. 김씨는 "평생 바친 기도보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바친 기도가 더 많았다"고 회고했다.가족의 탄생 이설아 지음/북하우스/1만 4000원--------- 생후 한 달 된 남자아이와 다섯 살 된 여자아이를 입양해 키운 엄마가 솔직하게 들려주는 가족 탄생 이야기다. 입양한 두 아이와 완전한 가족으로 거듭나기까지 과정을 가감없이 그려내 감동을 더했다. 엄마 이설아씨는 "그동안 아무도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던 입양의 맨 얼굴, 낯선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겪어내야 할 가슴 아픈 과정을 솔직하게 담아내고자 했다"면서 "보다 현실적인 입양 과정을 입체적으로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조은일2013.02.19

나이 듦은 목적성이 확실한 여정이다[서민선 아녜스 작가의 노년을 읽습니다] 25. 서명옥 「나이듦의 영성」 처음으로 성경을 읽었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의문은 성경 속에 100세를 훌쩍 넘는 인물이 더러 있다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더 낮았을 것 같은데 이상했다. 심지어 100세 넘은 나이에 출산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린 나는 성경에서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칼럼을 쓰기 위해 책을 고르던 어느 날, 성경 속 노인들을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서 다루는 노년은 어떤 모습이고 성경이 노년에게 주는 지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러다 서명옥 작가의 「나이듦의 영성」을 알게 되었다. 딱 내가 찾던 책, 성경 속 인물들의 나이 듦을 다루고 있었다. 영성의 완성에 이르는 길에서 나이란 무엇인지,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러한 맥락에서 책에는 성경 속 스무 명의 인물이 나온다. 나는 이야기책을 읽는 기분으로 흥미롭게 책을 읽었다. 아브라함은 175년, 야곱은 147년, 모세는 120년을 살았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수명은 이에 비하면 더욱 압도적으로 길다. 여기서 오랫동안 살았고 늦게 죽었다는 것은 핵심이 아니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성의 완성에 인간의 나이 듦이 깊이 관계한다는 진리다. 모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나이가 80세였고 토빗이 실명에 이른 나이가 62세였다. 하느님의 역사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이 듦은 바로 목적성이 확실한 여정이다. 나는 야곱과 요셉 이야기에 특히 관심이 갔는데, 먼저 야곱을 보자. 저자는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개울을 몇 번 건넌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야곱이 몇 번의 개울을 건넌 끝에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존재로 인생을 마무리하게 된 것에 집중한다. 개울을 많이 건널수록 타인을 축복할 품이 넓어진다는 것, 그것은 진리다. 그런데 축복이란 것도 해봐야 가능하다. 내 아이가 올해 고3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를 위한 기도를 드릴 때면 나는 망연해진다. 어떤 기도를 드리고 어떤 지향을 해야 할까. 좋은 대학에 가게 해달라고, 아니면 마음 관리를 잘하게 해달라고? 그것도 안 맞는 것 같고 그저 건강하게 해달라고 해야 할까. 아이를 향한 기도는 늘 그렇듯 조심스럽다. 무엇이 진정 아이를 위하는 기도인지 자신이 없어서다. 그래서 결국 “제 아들 프란치스코를 위해 기도합니다”라는 선택을 한다. 다른 누군가를 위한 기도, 특히 타인을 향한 축복을 청함에 있어서는 숙고가 앞서야 한다. 무엇보다 축복이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본인의 인생 전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야곱이 몇 번의 개울을 건너고 나서야 타인에 대한 축복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생을 마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완벽한 결말이다. 다음으로 성경 속 화해의 아이콘 요셉 이야기다. 요셉은 중년의 나이에 본인을 시기 질투했던 형들을 살릴 수 있는 권력을 갖는다. 그리고 요셉의 힘으로 형들을 고향에 돌려보내고 가족과 화해한다.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며 깨닫는다. “초년기 나의 고생, 외롭고 험했던 나의 청년기는 모두 다 이를 위함이었구나. 하느님께서 이를 역사하셨구나.” 나는 요즘 불화에 대해 생각한다. 특히 가족과의 불화. 가족과 불화한 채로 생을 마감하는 많은 가족을 본다. 어느 한쪽의 잘못인 경우도, 함께 잘못한 경우도,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이유의 우위에 힘과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참이다. 작가도 책 속에서 “화해, 그것은 진정 힘 있는 사람, ‘어른’이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제 노년이 되었다면 먼저 안아주고 먼저 용서하여 관계든 사람이든 정리해 보자”고 덧붙인다. 나는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을, 그리고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을 믿는다. 거기에 하나 더 보태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도 역시 믿는다. 한데 나는 이 속담을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 나이 든 사람의 품이 어린 사람보다 당연히 크다는 뜻으로. 나아가 언젠가 내 아이가 사전에서 ‘나이는 못 속인다’는 속담의 뜻을 찾았을 때 이렇게 나왔으면 한다. ‘옛날에는 나이가 쌓이면 겉으로 드러난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시간이 흐르며 그 뜻이 변했습니다. 요즘은 나이 든 사람의 이해심과 관록은 더 어린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나는 인심 좋은 곳간이 되기 위해 돈을 많이 벌고 싶고, 미래의 속담 사전이 바뀔 수 있게 이해심 많고 품이 넓은 노인이 되고 싶다. 작가는 ‘노인은 젊은이의 미래’라는 표현을 썼다.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라는 표현은 많이 들어봤지만 ‘노인은 젊은이의 미래’라는 표현은 매우 낯설다. 밝고 희망차서다. 우리가 흔히 갖는 노인의 이미지에 반한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본 성경 속 나이 듦은 그게 가능하다. 종종 잊지만 우리가 다 아는 성경 속 이야기들은 귀한 메시지를 무궁무진하게 담고 있다. cpbc2026.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