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을 닮아 서로의 어머니가 되어 줍시다”[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3.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도회 형제들에게 서로 어머니가 되어 줄 것을 당부했다. 치마부에, 네 천사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아 계신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 프레스코,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이탈리아. 15.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대안적 삶 제3의 길① 삶의 전적인 기준이자 삶 전체가 된 복음하느님의 동정심(compassion)은 생각이나 이상으로 그저 내면 안에 조용히 머물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같은 마음을 품으시는 대상인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취하는 행동으로 명확하고 실질적으로 표현되는 실재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신 궁극의 목적은 우리를 당신 생명의 영원한 복과 그 영광으로 끌어올리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 시작은 밑으로 내려가는 여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엄연한 진리가 존재한다.가톨릭 저술가로서 복음서의 말씀들을 새로운 우주론과 연결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주디 카나토(Judy Cannato)는 사람들에 대한 위대한 동정심이 예수님이 가지셨던 제일의 목표였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선포하신 하느님의 세계는 자애와 너그러움, 동정과 치유를 특징으로 하는 곳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 거룩하신 분의 사랑으로부터 배제된 이가 없었다. 부자건 가난한 이건, 남자건 여자건, 종이건 자유인이건, 그 누구도 이 사랑의 어우러짐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외적인 것으로 인한 분열을 넘어 내면 깊숙한 동정의 문화로 모든 이를 초대하셨다. 동정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동정은 치유한다. 동정은 다친 곳을 고쳐주고 잃었던 것을 되찾아 준다. 동정은 소외되었던 이들이나 관계성 속에 들어서는 것을 꿈꿔보지도 못했던 이들을 모아들인다. 동정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끌어내 다른 이의 마음에 들어서게 해준다. 이렇게 해서 동정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신발을 벗어야 하고 경외심을 갖고 걸어야 하는 거룩한 곳에 우리를 있게 해준다. 동정은 유약함(vulnerability)에서 나오고, 친교와 일치로 승리를 거둔다.”(「Field of Compassion: How the New Cosmology Is Transforming Spiritual Life」 8)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초대하시는 새로운 대안적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3의 길, 즉 대안적 삶이란 이미 성경 전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인격을 통해 선포되고 있고, 여전히, 아니 영원히 우리를 그 세상으로 초대하고 있는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시작한 삶이다. 이 삶은 기존의 어떤 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정과 관상, 인내와 순응의 영으로 가득 차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려는 우리의 적극적인 마음 자세와 삶에 의해 영원히 앞쪽으로 펼쳐지는 프로젝트이다.②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감과 서로 간에 어머니가 되어 줌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 서로 간에 진정한 형제애를 구현해야 함을 말하면서 동시에 형제애가 실현되는 근본 자세로서 어머니 성을 매우 강조하여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형제들은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마음 놓고 서로 간에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각자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따라 자기 형제를 사랑하고 기를 것입니다.”(「인준 받지 않은 수도 규칙」 9,10-11)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자상하게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인준 받은 수도 규칙」 6,7)누구에게 어머니가 되어 준다는 것은 강하고 센 힘이 아니라 약하면서도 부드러운 사랑으로 자녀인 상대를 보호해주고 끌어안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의 부드럽고 끌어안는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약함을 취하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고 끌어안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속성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는 삶이고 또한 기도와 신심(헌신)의 영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는 하느님을 어머니로 표현하곤 하였다. 하느님의 자기 내어줌을 통한 우리의 창조와 길러줌 그리고 우리를 당신 사랑 안에 다시 모아들이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어머니와 같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리안나 성녀가 말하듯이,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하느님의 속성이 어머니 같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들이 하느님의 본질을 닮은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해서 얘기하자면 어머니들뿐 아니라 어머니의 속성을 지니신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우리는 모두 어머니 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은 자신의 생명과 자녀들의 생명을 동일화하기에 자녀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길러주고 자녀들을 모두 당신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본질을 지니실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가 서로 어머니가 되어 줄 것을 형제들에게 부탁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서로를 그런 어머니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존중하며 서로를 하느님의 생명으로 이끌어 주라는 권고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간에 필요한 것을 마음 놓고 드러내 보이라는 것은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다른 이들의 도움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으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cpbc2021.10.27

대주교의 권위와 책임, 친교의 상징[가톨릭교회의 거룩한 표징들] (23)팔리움 팔리움은 ‘그리스도의 멍에’와 ‘사도좌와 일치’, ‘관구 지역 교회를 사목하는 대주교의 권위와 책임, 친교’를 상징하는 거룩한 표징이다.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인 6월 29일에는 교황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새로 임명된 관구장 대주교에게 팔리움(pallium)을 수여하는 예식이 거행한다. 팔리움은 ‘그리스도의 멍에’와 ‘사도좌와 일치’, ‘관구 지역 교회를 사목하는 대주교의 권위와 책임, 친교’를 상징하는 거룩한 표징이다.팔리움은 가톨릭교회에서 교황과 대주교가 자신의 직무와 권한을 상징하기 위해 제의(祭衣)를 입고 목에 걸 수 있도록 가운데가 원형으로 돼 있고 앞과 뒤가 긴 띠로 이루어져 있는 고리 모양의 하얀 양털 띠다. 폭은 7.6㎝이고, 가운데서부터 목 앞과 등 뒤로 내리는 띠 길이는 30㎝ 정도다. 팔리움에는 6개의 십자가가 수놓아져 있다. 이는 정의, 용기, 절제, 예지 네 가지 덕행과 라자로의 동생으로 알려진 마르타의 활동적인 삶, 마리아의 관상적인 삶을 표현한다. 대주교에게 팔리움을 수여하는 교회 전통은 1700년이나 된다. 로마의 주교들, 곧 교황들이 4세기 때부터 ‘그리스도의 멍에’를 상징하는 팔리움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인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하지만 새로 임명된 대주교들이 팔리움을 받으러 교황청으로 가는 관례는 최근에 생겨났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4년 대주교들에게 직접 팔리움을 걸어주는 관례를 도입했다. 해마다 새 대주교들에게 팔리움을 수여하는 날을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인 6월 29일로 정한 교황도 요한 바오로 2세다. 그 이전에는 교황 사절이 해당 지역 교회로 팔리움을 갖고 가서 전달하는 게 관례였다.교회법에 따르면 관구장에 서임된 이는 주교 수품 또는 서임 후 3개월 이내에 교황에게 팔리움을 청원하게 돼 있다. 그러나 팔리움을 교황에게 받아야 한다고 명시돼 있지는 않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1월 예전처럼 팔리움 수여식이 바티칸이 아닌 지역 교회에서도 거행될 수 있도록 했다. 팔리움 수여식에 신자들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어 대주교가 지역 교회와 친교를 나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목적 배려에서다. 팔리움을 양털로 짜는 이유는 교회의 전통이기도 하지만 성경의 신앙적 의미도 담고 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어린 양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희생 제물이었다. 제단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1년 된 어린 숫양이 번제물로 한 마리씩 바쳐졌다.(탈출 29,38-39) 그리고 유월절의 어린양은 대속물이었다.(탈출 12,1-14) 신약에서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는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하고 외쳤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은 희생과 속죄라는 신앙적 의미를 지닌 동물이었다. 팔리움의 양털은 목자가 어깨 위에 들쳐 메고 생명의 물가로 인도하는 길 잃고 병들고 약한 양을 상징한다. 인류는 광야에서 헤매는 길 잃은 양이다. 주님께서는 이를 방관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나아가는 모든 여정에서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길 잃은 양을 찾으시기 위해 한걸음에 내달으셨다. 그리스도의 후계자인 교황과 주교는 주님처럼 사람들을 광야에서부터 생명의 장으로, 성자와 나누는 친교로,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는 한 분께로 이끌어야 한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4 이하) 하신 주님처럼 목자들은 기꺼이 그리스도의 멍에를 어깨에 진다.성경 속 이스라엘 민족은 1년에 한 번 양털을 깎았다. 이때 유다인들은 양들을 함께 돌보았던 모든 사람을 초대해 며칠 동안 먹고 즐겼다. 이에 가톨릭교회도 해마다 성녀 아녜스 축일인 1월 21일 교황이 어린 양 두 마리를 축복한다. 교황이 축복한 이 어린 양의 털은 교황이 신임 대주교에게 걸어주는 팔리움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이 양들은 로마 근교 트라피스트회 수도자들이 기른다. 이 양들은 1884년부터 교황에게 축복을 받기 전날 밤 로마 시내에 있는 나자렛 성가정 수녀회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깨끗이 씻겨 미사에 참여한다. 한 마리는 흰색 모포에, 다른 한 마리는 붉은색 모포에 감싸인다. 붉은색은 아녜스 성녀의 순교를 상징하고, 흰색은 성녀의 동정을 드러낸다. 양들은 같은 색의 화관도 쓴다. 이 양들은 먼저 성당 안 아녜스 성녀의 성해가 모셔진 제대에서 축복을 받는다. 그런 다음 어린양들은 바티칸으로 옮겨져 교황궁 우르바노 8세 교황 경당에서 교황에게 다시 축복을 받는다. 팔리움을 만드는 과정도 흥미롭다. 교황의 축복을 받은 어린 양 두 마리는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넘겨받아 성주간이 다가오면 양털을 깎고, 팔리움 제작에 들어간다. 수녀들은 털이 깎인 어린양을 성주간에 잡아서 주님 부활 대축일 축제 때에 사용한다. 어린 양의 털로만 짜인 대주교의 팔리움과 달리 교황의 팔리움에는 어린양 털뿐 아니라 어른 양털도 함께 사용한다. 이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당부하신 예수님 말씀(요한 21,18)을 상기시킨다.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2.10.26
![[제주교구 사목교서] 주님의 뜻을 찾아가는 소공동체](//cpbc.co.kr/CMS/newspaper/2022/12/rc/837289_1.2_titleImage_1.jpg)
[제주교구 사목교서] 주님의 뜻을 찾아가는 소공동체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시노드 여정을 이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식별의 단계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시노드의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새로움’과 ‘친교 공동체의 재발견’을 기치로 하여 쇄신과 변화의 길목에 서 있기에, 과거의 방식으로는 이를 수용하고 감당하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식별’이라는 단어 자체가 신자들에게 아직 생소하고 그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고충을 저 역시 함께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식별’의 의미를 제주교구의 현실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가는 소공동체’의 모습으로 전달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바람직하리라 여깁니다. 주님의 뜻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주님의 뜻의 본질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뺀다면, 주님의 뜻을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 하느님께 드린 예수님의 ‘네!’라는 순명이 우리에게도 ‘네!’라는 사랑의 응답을 재촉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매일 청하는 은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것을 청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몸소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뜻은 신앙생활의 양식이요 영혼의 호흡이기에, 신앙인에게는 매일을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주님의 뜻을 찾고 응답하는 매일의 일상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여, 천국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따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구원 선포의 삶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 땅에서 증거 하는 일입니다. 시노드는 하느님 백성 모두가 같은 신앙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사명을 실천하면서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이러한 여정 속에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는 식별의 과정을 새롭게 경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에 저는 우리가 매일의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을 드립니다. 1. 늘 기도하는 공동체가 됩시다. 시노드 여정에서 함께 걸어가는 우리는 주님께서 섭리 안에 마련하신 은총을 청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여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기도의 힘으로 무장하는 것이 식별의 훈련을 위한 기초입니다. 2. 성경을 가까이에 두고 자주 읽읍시다.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찬례와 함께 새로운 전례에 맛 들이는 가운데, 늘 새롭게 깨닫고 깨어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3. 개인이든 공동체든 모든 일에 앞서 상호 경청과 존중 가운데, 영적인 식별을 하도록 합시다. 이러한 식별을 통해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제주지역의 복음 선포의 사명을 충실히 살아갈 때, 하느님 백성인 우리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 뜻을 실천하는 증언자가 될 것입니다.cpbc2022.12.14
![[전주교구 사목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cpbc.co.kr/CMS/newspaper/2022/12/rc/837287_1.2_titleImage_1.jpg)
[전주교구 사목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 1. 우리 교구의 사목 방향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 교구는 지난 2017년 교구설정 80주년을 맞이한 해를 기점으로, 다가오는 100주년을 뜻깊게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복음화에 매진하기로 하였습니다. 다가오는 2023년에는 교회 생활의 마지막 요소인 ‘사랑의 실천’에 마음을 모읍시다. 2.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거듭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징벌과 파멸보다는 끊임없이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었습니다. ‘성찬례’에서 우리는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2항)을 체험하였습니다. ‘기도’ 안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3.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 이웃에게 마음이 열릴 때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해서 살며 또 그분과 함께 다른 사람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4. ‘사랑의 실천’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증거함으로써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을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사랑의 실천’에 충실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 긴급한 요구에 무조건적인 응답입니다. 둘째, 봉사자의 양성입니다. 셋째, 사랑의 실천은 어떤 수단이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넷째, 이렇게 온전히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자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6. 우리 신앙 선조들은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당시 엄격한 신분제도 속에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박해 시대에 자신의 것을 더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 선조들의 훌륭한 모범을 본받아 우리도 사랑의 실천에 마음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7. 몇 가지 구체적인 사항을 제안합니다. 첫째, 주일미사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날마다 일상 기도를 꼭 바칩시다. 둘째, 본당과 단체 및 교회기관은 사랑의 실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함께 배우는 자리를 마련합시다. 셋째, 본당은 사회복지분과를 활성화하여 관할구역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적극 찾아 나섭시다. 넷째, 지구나 본당은 관할구역 안에 있는 교회의 사회복지기관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집시다. 다섯째, 모든 교우가 적어도 한 개 이상 후원회에 가입하여 교회의 사회복지에 기여합시다. 여섯째, 일 년에 적어도 한 번 교구의 성지를 순례하여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그 훌륭한 신앙을 본받읍시다. 일곱째,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밤 9시 주모경 바치기’ 운동을 앞으로도 지속합시다. 마지막으로, 지구온난화를 막고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교구의 지침에 따라 함께 기도하고 행동합시다.cpbc2022.12.14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 표현한 반원 제단 모자이크 ‘눈길’[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26. 클라세의 산타 폴리나레 대성전 클라세의 산타 폴리나레 대성전 내부. 출처=Steven Zucker 라벤나에서 북쪽으로 5㎞ 떨어진 곳에 클라세(Classe)가 있다. 지금은 전원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작은 마을이지만, 예전에는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라벤나의 항구로서 번영을 누렸다. 지명은 라틴어로 ‘클라시스(함대)’에서 유래했다. 이는 그곳에 로마 제국의 제2함대가 주둔했던 항구 시비타스 클라시스(Civitas Classis)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아폴리나리스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 비잔티움의 라벤나가 가장 번성하던 시기에 가장 웅장하게 지어진 건물이 클라세에 있다. ‘클라세의 산타 폴리나레 대성전(Basilica di Sant‘Apollinare in Classe)’이다. 535년에 시작하여 538년에 세워졌고 549년에 봉헌되었다. 다음 회에서 다룰 산 비탈레 대성전(Basilica di San Vitale)이 봉헌된 지 1년 후다. 전설에 따르면, 1세기 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온 성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가 라벤나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설립하고 첫 주교가 되었으나, 74년에 순교하여 성벽 밖 묘지에 묻혔다. 536년 라벤나 대주교 우르시치누스(Ursicinus)는 은행가 줄리아노 아르젠타리오(Giuliano Argentario)의 기부금으로 성 아폴리나리스의 무덤 위에 아름다운 성당을 세웠는데, 그것이 ‘클라세의 산타 폴리나레 대성전’이다. 외벽은 긴 벽돌로 단순하게 지어졌다. 정면에서 보면 박공지붕 아래로 전면 포치가 있는데, 좌우로 아치창 세 개가 연속해 있다. 원래는 네 면이 포치인 아트리움이 있었는데, 그중 일부가 1870년에 발견되어 근년에 복원되었다. 북쪽에는 높이 38m의 원형 종탑이 성당에서 약간 떨어져 서 있다. 정면에서는 왼쪽으로 멀리 보인다. 10~11세기 로마네스크의 것이다. 탑의 개구부는 위로 올라가면서 단일 창, 이중 란셋 창, 삼중 란셋 창 등을 뚫어 하중을 줄였다. 이 대성전은 3랑식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내부는 산타 폴리나레 누오보 대성전의 디자인을 이어받아 공간이 간결하고 힘이 있다. 폭은 약 30m, 깊이는 악 55m로 ‘누오보’보다 넓다. 측랑이 낮고 좁은 대신 중랑이 넓고, 중랑과 측랑이 널찍한 아치로 통해 있다. 또한 측랑 쪽 벽과 중랑 벽 위에 창을 많이 두어 내부는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반원 제단을 향해 좌우로 각각 12개씩 세련된 그리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원기둥이 늘어서 있다. 유난히 큰 원기둥의 기둥머리는 독특하게도 이오니아식과 코린트식을 섞은 것처럼 보인다. 대리석 원기둥은 높은 정사각형 받침대(pedestal)에 놓여 더 높고 날씬하게 보이는 데다가, 결이 모두 자연스럽게 달라서 그 위에 얹은 아치는 리듬에 따라 물결치는 것 같다. 반원 아치는 부주두 위에 놓여 있다. 다만 ‘누오보’처럼 아치를 잘라서 올리지는 않았다. 그런 아치 위에는 두 층을 이룬 벽면이 수평으로 펼쳐진다. 아래층에는 원형의 메달리언(medallion)이 계속 이어져 있고, 그 안에는 18세기 프레스코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위층에는 벽돌 벽에 고창이 있다. 지금은 모자이크가 벗겨져 있지만, 지어졌을 때는 벽은 대리석으로, 바닥은 모자이크로 덮여 있었으며 천장은 격자천장이었다. 이처럼 원래 내부는 지금보다 훨씬 더 풍부했다. 반원 제단 모자이크, 클라세의 산타 폴리나레 대성전. 출처=Orthodox Arts Journal 제단 중심에 걸린 황금 십자가 두드러져 산타 폴리나레 누오보 대성전은 좌우 벽면이 뛰어난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지만, 반원 제단의 모자이크는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클라세의 산타 폴리나레 대성전은 벽면의 모자이크는 없어진 대신 반원 제단의 모자이크가 대단히 훌륭하다. 이런 점에서 ‘누오보’ 와 ‘클라세’는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클라세의 산타 폴리나레 대성전에는 반원 제단 위를 덮는 반(半) 돔과 그 앞을 한정하는 개선문 아치 벽을 6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여러 시대에 만들어진 훌륭한 모자이크가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반원 제단 위의 화려한 모자이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6세기 그리스도의 신성을 반복해서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한 아리우스파가 맞서 싸워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굳건히 세우고자 한 것이다. 반원 제단에서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중심에 걸린 황금 십자가다. 십자로 교차하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진 메달이 있고, 가로목의 좌우에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쓰여 있다. 이 십자가는 황금색 별이 박혀 있는 파란 하늘을 뒤로하고 우리를 향해 떠오르고 있다. 반짝이는 별은 99개다.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처럼 한 개는 잃어버린 양인 우리이고, 아흔아홉 개는 선한 천사들이다. 그리스도교 예술에서 보통 별은 천사를 상징하는데, 십자가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별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함께할 천사들의 무리를 나타낸다. 푸른 하늘은 보석이 박힌 왕관으로 에워싸여 있다. 이 왕관 주위를 감싸는 황금빛 하늘에는 “MOYSES”와 “HbELYAS”라고 쓰여 있는 두 인물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다. 십자가 아래의 좌우에는 양 세 마리가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목격하도록 ‘높은 산’으로 데려가신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나타낸다. 황금빛 하늘에는 떠오는 햇빛을 받은 구름이 떠 있다. 세 제자를 덮고 있던 “빛나는 구름”이다. 십자가 바로 위에는 손이 그려져 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의 음성을 가리킨다. 반원 제단 오른쪽 모자이크 상세, 클라세의 산타 폴리나레 대성전. 출처=Orthodox Arts Journal 반원 제단 모자이크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편 이 반 돔 위에는 개선문 아치 벽이 있다. 위에는 7세기에 그려진 그리스도 판토크라토와 네 복음사가 있고, 그 밑에는 예루살렘(오른쪽)과 베들레헴(왼쪽)을 나온 좌우 여섯 마리의 양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타낸다. 개선문 기둥에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이 악의 세력으로부터 세상과 교회를 보호하고 있다. 반원 제단 창 사이에는 에클레시우스, 세베루스, 우르수스, 우르시치누스 등 네 명의 주교 성인이 손에 책을 들고 있다. 그 오른쪽 끝에는 아벨, 멜키체덱,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희생 제사를 바치고 있고, 왼쪽 끝에는 7세기쯤에 그려진 ‘콘스탄틴 황제의 선물’이 있다. 둘 다 산 비탈레 대성전의 사례를 따르고자 한 것이다. 이 모든 이미지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를 그린 것이다. 오래전부터 정원을 ‘파라디소(paradiso)’라 했고, 이 말에서 ‘파라다이스(paradise, 낙원)’가 나왔다고 한다. 성경의 “높은 산”은 황금빛 하늘 아래에 푸른 잎이 무성한 정원으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정원이 곧 낙원이다. 정원(동산)은 성령께서 변화시키는 전체 창조물의 소우주인데, 그 안에는 양 열두 마리가 상징하는 모든 신자가 있다. 그런데 후광을 입은 성 아폴리나리스가 한가운데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이처럼 거룩한 전례는 우주적 배경에서 거행되는 것, 그 안에서 주님의 변모와 재림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성전의 반원 제단 모자이크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는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모할 수 있게 이끄신다는 것이다. cpbc2023.06.29

이탈리아 작가 루포, 국내 첫 개인전 ‘인류세’ 개최사회적 문제 조명해온 피에트로 루포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인류·자연의 관계산업 활동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 표현서울 다울랭 갤러리, 2월 18일까지 루포, Anthropocene 4, 2022. 이탈리아 작가 피에트로 루포(Pietro Ruffo)의 국내 첫 개인전 ‘인류세, Anthropocene’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다울랭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낯선 작가일 수 있지만, 루포는 국제무대에서 이민자, 유럽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잔해, 중동 지역의 정치·종교 분쟁 등 현시대를 관통하는 사회 문제들을 조명하는 작품 활동을 펼쳐왔고, 더불어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와도 협업하며 대중 인기도 얻어왔다.이번 전시 ‘인류세, Anthropocene’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인류와 자연 간의 관계 및 인간의 산업 활동이 기후에 미치는 유해한 영향을 표현했다. ‘인류세(人類世)’는 인류로 인해 빚어진 새로운 지질 시대를 칭하는 용어로, 인간이 초래한 환경적 변화가 지구에 돌이킬 수 없는 압도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다는 특징을 지닌다.다소 무거운 주제와 달리 그의 작품들은 획기적이고 신선하다. 직사각형 캔버스 위에 자리하고 있지만, 평면 회화는 아니다. 마치 곤충박제 표본처럼 입체적이며, 얼핏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류와 자연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백 그라운드가 세계 지도나 울창한 원시림을 그렸다면 컷아웃(Cut-Out) 기법으로 정교하게 오려낸 부분은 이집트 문명, 주요 건축물 등 주로 인류가 만들어낸 모습으로, 높이감 있게 핀셋으로 고정해 전체적으로 하나의 화폭을 완성한다. 전근대 거주 지역과 농경사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흔적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선사시대 이후 식량, 보금자리, 생존을 위한 인간의 투쟁과 기후의 연관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낡은 노랑, 갈색의 파편들이 강렬한 파랑, 선명한 보라색 줄기를 만나는 모습은 인간의 개입으로 급변하는 자연계를 상징한다.특히, 여러 작품에서 ‘두개골 형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니타스(허무주의)의 상징이기도 한 해골은 개인의 죽음을 넘어 인류의 멸종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우리의 이기심은 자연을 인간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게 하였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인류의 종말을 야기하지만, 결단코 지구의 종말을 초래할 만큼 강력하지는 않다”고 말한다.남다른 철학이 있는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 바티칸 도서관을 비롯해 브라질 아르테 컨템포러리 박물관, 중국 항저우시 저장 미술관, 미국 워싱턴DC 힐리 어 IA&A 미술센터, 이탈리아 국립 현대 미술관 등에서 소개되었고, 바티칸 박물관, 베를린 도이치뱅크 컬렉션, 루치아노 베네통 컬렉션을 비롯해 여러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허영엽(서울대교구 사목국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원장) 신부는 “피에트로 루포의 작품은 성경의 모든 진리와도 깊이 닿아 있다”며 “그래서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바티칸 도서관에서 개최된 전시회를 직접 관람하시며 그에게 따듯한 격려를 해주셨다”고 전했다.피에트로 루포(1978~ )는 로마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이후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의 이탈리아 고등연구원에서 연구 펠로우십을 시작했다. 2019년 프레미오 카이로 상을, 2010년에는 프레미오 뉴욕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회는 2월 18일까지 갤러리 정기 휴일인 매주 일요일과 월요일을 제외하고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문의 : 02.797.2329, 다울랭 갤러리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cpbc2022.12.27

지구 위기 극복을 위한 정의·평화·창조 보전「JPIC, 예언자의 세상 읽기」 펴낸 조현철 신부 「JPIC, 예언자의 세상 읽기」 펴낸 조현철 신부 JPIC, 예언자의 세상 읽기조현철 신부 지음 / 생활성서‘JPIC’라는 표현이 모두에게 익숙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가톨릭 사회교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JPIC는 정의-Justice, 평화-Peace, 창조 보전-Integrity of Creation의 첫 글자를 묶은 표현이다. 그런데 ‘정의’, ‘평화’, ‘창조 보전’이라는 각각의 단어는 어느 정도 피부에 와닿지만, 이들이 어떻게 한 단어로 연결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죠. 이 세상을 하나의 창조 공동체라고 한다면 공동체에는 질서가 있고, 하느님이 뜻을 가지고 만들어 놓은 그 창조 질서를 따르는 것이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정의를 실천할 때 평화가 온다는 것이 JPIC의 개념이에요. 세 개의 단어지만 통합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서강대 교수면서 녹색연합 공동대표, 비정규직노동자의집 ‘꿀잠’ 대표, JPIC 양성 학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예수회 조현철 신부가 최근 「JPIC, 예언자의 세상 읽기」를 펴냈다. 서강대 예수회 공동체 사제관에서 만난 조 신부는 JPIC의 개념을 설명하며, 오늘날 지구 위기의 원인으로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꼬집었다. 또 그 훼손을 극복하기 위해 창조 질서의 보전, 즉 정의의 실현을 강조한다. 불평등과 불안정이 팽배한 지금의 사회, 기후 변화와 식량 문제 등이 확산되는 오늘날 자연의 위기를 지적하고 창조 질서 훼손의 근원을 구체적으로 파헤친 대목에서 그의 다양한 직함이 결국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 신부는 오늘날 전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 문제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성장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발상을 전환하고 변화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큰 틀의 문제를 지적한 것에 비해 대안은 소소할지 몰라요. 지금 형편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지금과 다른 길을 찾도록 격려하는 것이 무엇일까. 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인 성경 안에 있는 안식일, 안식년, 희년에 초점을 맞췄어요. 창조 질서 보전에 필요한 자발적 자기 제한의 내적 태도를 기르는 원천으로, 예수님 삶의 동력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기도도 마찬가지예요.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움직여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데, 기도는 일단 멈춰야 하죠. 기도 안에 산업 문명이 우리를 끌고 가는 것에 반대되는 역동성, 힘이 있음을 인식하는 겁니다.”이와 함께 수도자의 가난, 정결, 순명 서원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대한 전복적 선언으로, 수도생활은 ‘세상의 심장’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평신도 역시 현실 속에서 세상의 질서를 창조 질서로 변화시키는 ‘소금’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전한다. 특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역할을 맡아 실천해야 하는 예언자로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성경에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경고하고 이끄는 역할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모두가 예언자적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조 신부의 명쾌한 이야기는 오는 9월 2일 오후 6시 서울 마포구 상수동 에이치 스테이지에서 열리는 북 콘서트 ‘지구를 위한 오늘 우리의 선택’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 1부는 가톨릭평화방송 이정민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조현철 신부, 조경자(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 분과위원장) 수녀, 팝페라 테너 임형주씨가 참여해 JPIC에 대한 가르침과 생태적 회심을 음악과 함께 나누며, 2부에서는 유경촌(서울대교구 사회사목 담당 교구장 대리) 주교의 ‘생태 위기 시대, 가톨릭교회의 생태론’ 강의가 이어진다. 1부 내용은 9월 9일(금) 오후 8시, 10일(토) 오전 8시, 11일(일) 오후 7시 가톨릭평화방송TV에서 추석 특집으로 방영될 예정이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cpbc2022.08.23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 바라봄이 곧 복음적 삶[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2.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상은 우리 마음 안에 동정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그림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나환우를 돌보고 있는 ‘franciscan friars’ 삽화. 15.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대안적 삶 제3의 길① 삶의 전적인 기준이자 삶 전체가 된 복음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봄, 즉 관상은 우리 마음 안에 ‘동정(同情, compassion)’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결국, 하느님을 참으로 관상하고 세상을 참으로 관상하는 일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 이 관상을 통해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천부적 일치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특히 인간 존재들과 떼어낼 수 없는 사랑의 연결성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해 드린 ‘interface’, 곧 ‘얼굴을 서로 교환하는 것’, 혹은 ‘두 개체나 두 사람이 공통의 얼굴을 지니는 곳(혹은 지니는 것)’이다.이 깨달음이 우리를 하늘나라의 현실에서 살아가게끔 해주고,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서로 간의 단절과 생태계와 지구 전체의 위기를 극복해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각이고 의식이다. 그리고 복음적 삶이 우리의 대안적 삶이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 투쟁 아니면 도망, 옳음과 그름 등과 같은 이원적 논리가 첫째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자기 비움과 이 비움을 통한 서로 간의 연결이 그 중심에 있게 된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느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즉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곳이다. 이 관상과 서로 간 사랑의 바라봄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선제권을 갖고 계신 우리에 대한 사랑의 응시를 알아차려야 하고, 이 응시의 흐름이 우리 존재를 통해 하느님과 다른 존재들에게 흘러나가도록 ‘나’라는 수로를 잘 비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우선하는 일은 하느님 사랑의 바라봄의 흐름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를 우리는 잘 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과 용서의 자모적이고 자부적인 하느님 이미지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매튜 폭스(Matthew Fox)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동정은 어디에나 있다. 동정은 세상의 가장 풍요로운 에너지의 원천이다. 세상이 지구촌이 된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동정이 더 필요하다. 이는 이타주의나 철학 혹은 신학의 구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의 인류 역사에서 제대로 탐구되지 않고 건드려지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사람들이 바라지도 않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동정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요원하게 느껴진다. 그 옛날 동굴에 거주하던 인간들이 동정 대신 폭력의 경향이 그 무엇이건 간에 산업화 사회의 맹공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동정이 없어진 상황은 이제 세상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이런 동정의 부재 상황을 묵인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인간이 이 우주의 다른 모든 피조물처럼 동정심이 가득한 피조물이라는 창조된 세상과 인간 본성의 충만함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인격체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라도 동정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동정의 부재로 인해 모두 희생자가 되었다. 몇몇 사람이나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희생자이고 더러는 아닌 그런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희생자가 되었고, 동정의 결핍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함께 우리의 인간성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응시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부정적 에너지와 감정은 점차로 자리를 잃고 녹아내려 사라져버릴 것이다. 「나환우 프란치스코(Francis the Leper)」에서 저자들(Joanne Schatzlein, OSF, RN, MA와 Daniel P. Sulmasy, MD, Ph.D.)은 프란치스코가 나환우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며, 심지어는 프란치스코의 몸에 생긴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이 나병의 상처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물론 이 저자들의 이러한 주장이 교회의 신비 전통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또 그 주장이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매우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머레이 보도 신부(Fr. Murray Bodo, OFM)는 이 책의 서문에서 “만일 프란치스코가 자신이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피던 나환우들에게서 병을 얻어 그들과 같은 나환우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무한한 사랑의 대상인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그리스도와의 극적인 동일화가 이루어진 것이고, 그 자체로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한 것”이라는 역설한다. 그러면서 그는 “몰로카이 섬에서 자신이 사랑으로 보살피던 나환우들과 같이 나환우가 되어 삶을 마감한 다미안이 성인으로 추앙을 받는 이유도 바로 그의 자기 비움의 사랑이 하느님의 은총이요 신비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어찌 보면 우리는 매일 강력한 자기 비움의 역설적 메시지를 계속해서 선포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죄 많은 우리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취하실 정도로 터무니없이 겸손하게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우리 구원과 완성의 시작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비천한 모습과 같아지시는 구세주보다는 우리의 원수들을 물리쳐주시는 위대한 장군 메시아를 더 선호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cpbc2021.10.20

뮤지컬배우 마이클리...깊은 신앙심으로 ‘지저스’ 열연 2000년부터 ‘수퍼스타’와 인연 맺은 마이클리 배우. 마이클리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공연 때마다 신앙이 강해진다고 말한다. 블루스테이지 제공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를 떠나 대부분 사람이 이 이야기를, 적어도 등장인물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기 때문이죠.”50주년을 맞아 7년 만에 국내 무대에 오른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이하 수퍼스타)가 서울 공연을 마치고 전국 투어에 나섰다. 뮤지컬의 거장 듀오 팀 라이스(작사)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작곡)가 청년 시절인 지난 1971년에 선보인 ‘수퍼스타’는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7일을 담고 있다. 특히 등장인물들을 인간적인 고뇌와 감정에 사로잡힌 캐릭터로 재해석해 초연 당시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파격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에는 2004년 첫 라이선스 공연으로 소개됐고, 이후 2006년, 2013년, 2015년 네 차례 공연됐다. 마이클리(미카엘) 배우는 2013년부터 지저스를 연기하고 있다.“지저스가 누구인지 다들 알고 계시니까 부담되는 면은 있죠. 저는 죽음에 직면한 한 남자의 현실, 그 진심을 묘사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이번에 선보이는 저의 지저스는 과거 미국이나 일본에서의 지저스와는 매우 다를 겁니다. 겪어온 다양한 인생 경험이 무대의 지저스를 보여주는 데도 영향을 미치거든요.” ‘수퍼스타’의 경우 마이클리 배우만큼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를 드러내기는 힘들 것이다. 미국 뉴욕 태생인 그는 한국에서 활동하기 전인 지난 2000년 브로드웨이에서 시몬 역으로 ‘수퍼스타’와 인연을 맺었고, 2005년 세인트루이스 공연에서는 유다 역을, 2011년 워싱턴 공연에서는 유다와 지저스 역을 번갈아가며 무대에 올랐다. 2021년에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 공연에서도 지저스로 분했다. 그런 그에게도 ‘수퍼스타’의 음악은 난제다. 록과 클래식이 결합된 ‘겟세마네(Gethsemane)’, ‘마음속의 천국(Heaven on Their Minds)’, ‘어떻게 사랑하나(I Don’t Know How to Love Him)’ 등 이른바 관객의 귀를 호강시키는 주요 음악이 배우에게는 어렵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음악적으로 모든 배우에게 정말 어려운 작품입니다. 음이 매우 높거나 낮고, 록(Rock Spirit)적으로 불러야 하거든요. 하지만 ‘수퍼스타’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는 ‘겟세마네’를 제일 좋아합니다. 가장 어렵지만 무척 감성적이고, 작품의 특성을 잘 담고 있어요.” 성경을 그대로 무대화한 작품은 아니기에 모태신앙인 마이클리 배우에게 ‘수퍼스타’는 더욱 어려울 수 있지만, 그는 작품을 할 때마다 믿음이 강해진다고 말한다. “저는 가톨릭 신앙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 독실한 신자여서 저도 가톨릭 초등학교를 나왔고 Altar boy(복사)였어요. 심지어 한때는 신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과 그가 지지하는 모든 것들에 사로잡혀 있었죠. 그래서 ‘수퍼스타’를 공연할 때마다 제 믿음이 더 강해져요. 가톨릭 신자로서 작품이 내포한 ‘예수님이 인간성을 느끼는 것’, ‘운명에 대한 유다의 관점’ 등은 어렵죠. 하지만 이러한 질문과 경험들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공연을 끝내고 잠시 미국에 머물던 그는 태어나 자란 곳에서의 삶을 접고 한국에서 배우로 살아가게 된 것도 기도의 응답이었다고 믿는다. “인생에서 크고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특히 배우가 되어 한국으로 올 때 항상 기도했어요. 비록 진정으로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도는 저의 생각과 의지를 집중하게 하죠. 모든 기도가 지금 제가 걷고 있는 길로 인도했다고 믿어요. 저에게 신앙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 존경, 책임, 그리고 가족을 담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과도 연결해 주죠. 신은 모든 답을 알고 있고, 기도는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는 그저 그것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죠.”그 믿음과 인도로 ‘알타 보이’에서 ‘지저스’가 된 마이클리 배우는 서울과 부산 공연에 이어 수원, 익산, 성남, 안동 등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무대에 오를 것이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cpbc2023.02.08

니케아 신경으로 태동된 그리스도 형상[가톨릭교회의 거룩한 표징들] (5)판토크라토르 니케아 신경이 태동시킨 판토크라토르 이콘은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주님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 하느님 곧 전능하신 주 하느님을 표현하고 있다. 판토크라토르, 목판 템페라, 모든 성인들의 수도원 스페체스, 한국 정교회 소장.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그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은 언제나 성미술에서 첫 자리였고, 성자 하느님께 대한 교의가 정리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표현 내용도 더욱 성숙해져 갔다고 설명한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 가운데 신성이 강조되던 고대 교회 때에는 예수님의 형상을 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수염 난 흔적조차 없는 매끈한 얼굴에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을 것 같은 강건한 표정으로 묘사했다. 그러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자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되신 후에도 여전히 하느님으로 계신 우리 구세주이시며, 인성과 신성을 한 실체 안에 모두 지니고 계신 분이심을 교의로 선포한 이후부터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표현하는 내용이 더욱 풍성해졌다. 그 대표적인 이콘이 바로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이다. 판토크라토르는 성경에 모두 185번 나온다. 그중 구약 성경에 175번이나 언급되며, 예언서에 111번 표현된다. 신약 성경에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6,18)에 한 번, 요한 묵시록에 9번(1,8; 4,8; 11,17; 15,3; 16,7; 16,14; 19,6; 19,15; 21,22) 등장한다.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판토크라토르를 ‘주 만군의 하느님’(2사무 5,10; 1열왕 19,14; 시편 80,20 등)과 ‘전능하신 주님’(유딧 4,13; 집회 24,24; 2코린 6,18 등), ‘전능하신 주 하느님’(바룩 3,1; 묵시 1,8 등)으로 옮겨 사용하고 있다. 니케아 신경이 태동시킨 판토크라토르 이콘은 긴 머리에 수염을 풍성하게 기른 근엄한 표정의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판토크라토르의 본 형상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선포하셨다. 판토크라토르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 참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 만군의 하느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판토크라토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며 아버지 하느님의 형상이다. 판토크라토르 이콘 형식은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포세이돈의 이미지와 로마 황제들의 초상에서 많이 따왔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신적 권위와 존엄을 드러내기 위해 황제처럼 굳은 표정의 군림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또 머리카락과 수염이 남성성을 드러낸다는 고대인들의 생각을 반영해 그리스도의 충만한 인간성을 표현하기 위해 주님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풍성하게 묘사했다. 4세기 이후부터 교회 안에 확산된 판토크라토르 이콘은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여러 상징이 장식됐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왼손으로 ‘복음서’(생명의 책이라고도 함)를 왼 가슴 쪽에 들고 계시고, 오른손으로 우리를 강복하신다. 오른손 손가락 중 굽혀진 세 손가락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펴진 두 손가락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한다. 또 어떤 이들은 ‘하늘과 땅의 결합’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의 머리 뒤로 ‘황금빛 후광’을 그렸다. 황금빛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교회는 성화에 문외한 누구라도 주님의 초상을 알아볼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후광에만 ‘십자가’를 넣고 있다. 그리고 후광의 십자가 세로목 위와 가로목 양쪽에 ‘Ο ΩΝ’ 또는 ‘Ο ωΝ’(오 온)을 새긴다. 이 글은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실 때 하신 말씀으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라틴말로는 Ego sum qui sum-에고 숨 퀴 숨)를 헬라어로 옮긴 것이다. 이는 ‘하느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십자가의 죽음으로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생명의 원천’이심을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느님이시며 천지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이셨고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는 거룩한 상징이다.(묵시 1,8 참조) 한마디로 ‘주님의 신성’을 표현한 것이다. 때로는 후광 좌우에 ‘A’(알파)와 ‘Ω’(오메가)를 새겨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심을 고백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의 시초이며 완성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후광 바깥 양면에는 헬라어로 ‘IC XC’(ΙΣ ΧΣ- Ιησουs Χριστοs 예수 그리스도)를 적어 넣는다. 이처럼 판토크라토르 이콘은 전능하신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권능이 하늘에서부터 땅끝까지 펼쳐져 세상 모든 민족이 그 은총을 누리고 구원을 받을 것임을 드러내고 고백하는 가톨릭교회의 ‘거룩한 표징’이다.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2.06.08

세상 향해 교회 문 열고, 복음의 핵심을 현대적으로 제시간추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성 요한 23세 교황이 1961년 12월 25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을 공표하는 문헌에 서명하고 있다. 지난 10월 11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막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여전히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21세기를 위한 21번째 보편 공의회’라고 표현한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실인 교회 쇄신과 현대화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공의회 과정에서 드러난 성령의 이끄심을 간추려 정리했다.2000여 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신앙의 중추가 된 위대한 공의회들은 그 중요성을 깨닫기까지 수세기에 걸친 시간이 필요했지만,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20세기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 전 영역을 ‘현대화’(aggiornamento)하는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모든 민족이 라틴어가 아닌 자기 언어로 미사를 봉헌하게 됐다. 복음 선포와 교회 성장을 위해 성직자와 평신도가 협력하고 봉사하게 됐다. 또 교회 일치를 위해 갈라진 형제들과 대화하고, 타 종교를 이웃 종교로 포용하게 됐다. 아울러 세상을 멀리해야 할 부정적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실현할 복음화의 대상이 됐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쇄신에 대한 책임, 현대 사회의 적응에 대한 사명, 갈라진 형제와 이웃 종교에 대한 이해, 모든 이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연대성과 관심 등을 수용하고 표방했다. 공의회 소집과 준비(1958~1962)성 요한 23세는 교황이 된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58년 1월 25일 로마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 전례를 주례한 후 새로운 보편 공의회 소집을 발표했다. 새 공의회 소집 이유에 대해 교황은 “영혼의 선익을 증진하고 현대의 영적 필요에 분명하고 확고하게 상응하는 새로운 교황직을 수행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냉전으로 핵무기 위기가 세상을 압도하던 당시 교회 또한 매우 긴급한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이 ‘쇄신의 때’라면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교황은 이 공의회가 ‘일치 공의회’가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평신도들과 갈라진 교회 공동체의 대표들을 초대했다.교황은 1960년 6월 5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자의교서 「하느님의 드높으신 뜻」을 통해 새 공의회 이름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고 공식 발표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식이 1962년 10월 1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장엄하게 거행됐다. 전 세계 2449명의 주교가 참여했다. 한국 교회에서도 노기남 대주교를 비롯한 주교 9명이 참가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어머니이신 교회가 기뻐합니다”(Gaudet mater Ecclesia)라는 인사말로 개막 연설을 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모든 이를 위한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 온화하고 인내하는 어머니, 다정하고 자비로운 교회의 얼굴을 증거하길” 희망했다. 그래서 그는 개막 연설에서 “새 공의회는 인류 사회와 인류의 미래와 연관된 교회의 가능성을 폭넓고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며,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와 일치를 이루시는 장엄한 행사”라고 규정했다. 또 “공의회의 빛으로 교회가 쇄신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통하여 영적으로 풍요롭게 성장하고 담대하게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교황은 “단죄가 아니라 자비의 마음으로 교리의 타당성을 보여 주어 현시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사목적 성격의 공의회를 진행해 줄 것”을 당부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1963년 6월 3일 위암으로 선종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고 개최했지만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했다. 후임으로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선출됐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서로 다른 두 교황이 재임하는 동안 계속되었다. 성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결정하고 시작했으며, 성 바오로 6세는 이를 받아들여 지속시켰으며 마침내 완결지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두 4회기로 진행됐다. 공의회 준비 단계에서 12개 준비위원회가 담당 분야별로 초안을 마련했지만 제3회기까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의안은 16개로 늘어났다. 이 중 제2회기에서 「전례 헌장」과 「사회 매체 교령」이, 제3회기에서 「교회 헌장」 「일치 교령」 「동방 교회 교령」이 반포됐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5년 10월 28일 장엄 공개회의에서 「주교 교령」과 「사제 양성 교령」 「수도 생활 교령」 「그리스도인 교육 선언」 「비그리스도교 선언」을, 이어 11월 18일 「계시 헌장」과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공포했다. 「계시 헌장」은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가 “오직 성경만!”을 주장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맞서면서 다소 등한시했던 성경의 중요성을 재인식, ‘성경과 성전’이 계시의 원천임을 천명했다. 교황은 1965년 12월 7일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사제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을 반포했다. 교황은 이날 역사에 남을 또 하나의 선언을 했다. 동ㆍ서방 교회 결별의 결정적 원인이 됐던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하는 공동 선언을 바티칸과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플)에서 동시에 발표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역점을 둔 ‘교회 일치’를 위한 뜻깊은 선언이었다.폐막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주례한 장엄 미사로 폐막했다. 교황은 폐막 미사 후 공의회에 참가한 교부들 이름으로 국가 지도자들을 비롯해 사상가와 학자, 예술가, 여성, 노동자, 가난한 이와 병자와 고통받는 모든 이, 젊은이 등 전 세계 모든 이에게 메시지를 발표했다. 성 바오로 6세는 교황 교서 「성령 안에서」(In Spiritu Sancto)를 통해 공의회의 모든 결정에 대한 교황의 완전한 승인을 다시 표명하면서 모든 신자가 이를 경건히 준수하도록 요구했다. 의미와 평가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20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20차례 열린 이전의 보편 공의회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공의회였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새로운 성령 강림 대축일’ ‘새로운 오순절’이라고 표현했다. 성 요한 23세는 교회가 새로운 세상을 마주 대하고, 만민 평등과 가난, 정의, 평화, 그리스도인 일치와 같은 신앙의 유산들을 세상에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만남’이 되어야 한다고 희망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의 바람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쇄신하여 현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복음의 핵심 내용을 사목적이고 현대의 감각으로 새롭게 제시하면서, 교회가 현대인들에게 일관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주력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새롭게 인식했다. 교회의 법적 제도적 측면보다 성사적 차원을 우선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위계적 교계 제도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보면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하느님 자녀로서 똑같은 품위를 누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친교의 공동체로 이해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와 세상 안에서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를 이끌었다. 그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갈라진 형제들과 이웃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를 달리했다. 단죄하고 배척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대화하고 협력하는 모습으로 돌아섰다.4개 헌장과 9개 교령, 3개 선언으로 이뤄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6개 문헌은 이전 문헌들에서 볼 수 있는 제재나 단죄, 처벌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시대의 도전과 요구에 대한 하느님 말씀을 바탕으로 한 총체적인 교회의 답변으로 일반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현대화’ 곧 ‘아조르나멘토’이다. 성 요한 23세는 아조르나멘토를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방 안에 가득 채우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런 정신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선포하는 신앙 진리를 새롭게 이해했다. 진리 자체는 불변하지만, 그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시대와 상황에 적합하게 적용돼야 함을 선포한 것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2.10.26

야곱의 사다리는 ‘하느님의 집’인 성당의 공간적 원형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1. ‘하느님의 집’ 원형은 야곱의 사다리 영국의 바스대수도원 성당. 정면 좌우에는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천국과 땅을 열심히 오르내리고 있다. 날개가 있는데도 기어서 오르내린다. 사진=Sat Nav and Cider 성당 건축은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신자는 반드시, 그것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니 성당이라는 건물을 공부하자. 그러면 성당 건축 공부를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을까? 흔히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성당을 자세히 둘러보는 것이 성당 건축 공부의 전부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당의 본질은 그런 건축 양식에 있는 게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주 오래전에 성당 건축의 원형을 보여주셨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이든 비잔틴 성당이든, 아니면 우리가 다니는 성당이나 새로 지어야 할 성당 등 모든 성당의 원형이 된다. 성당 건축 공부는 그 원형을 분명히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야곱, 하느님의 집을 지은 최초의 건축가 영국의 바스대수도원 성당의 정면 좌우에는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천국과 땅을 열심히 오르내리고 있다. 날개가 있는데도 기어서 오르내린다. 야코포 틴토레토가 그린 ‘야곱의 사다리’(1578)에는 사다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건축물에서 보는 돌계단이 한없이 이어져 있다. 그리고 저 끝에서 하느님께서 신비한 구름에 감싸인 채 아래에서 잠자는 야곱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하느님의 집’이라고 제일 먼저 말한 사람은 야곱이었다. 성당은 ‘하느님의 집’이니 하느님의 집을 지은 최초의 건축가는 야곱이었다고 해야 한다. 해가 지자 야곱은 어떤 곳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고,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잤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그 자리에는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때 하느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꿈만 꾸고 길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꿈에서 말씀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약속을 기념하기 위해 머리에 베었던 바로 그 돌을 세웠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창세 28,10-22) 여기에서 중요한 말은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된 “어떤 곳”,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려고 돌 하나를 가져온 “그곳”이다. 바로 그 자리에 층계가 세워져 저 하늘에 닿아 있었고, 그 사이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가 있는 그 장소, 그 자리는 하느님께서 계신 곳에 이어져 있었다. 그러면 야곱이 있었던 그 땅만 그러했는가? 아니다. 우리가 있는 성당에서도 바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다. 하느님의 천사가 오르내리며 땅과 하늘 연결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왜 층계를 만들어 보여주셨을까? 그 답은 다음 절에 나와 있다. 우리말 성경은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영어 성경은 “주님께서 그의 곁에 서 계셨다(there was the LORD standing beside him)”로 번역했다. 하느님께서는 저 높은 데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내려오시어 그의 곁에 계셨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야곱이 꿈에 본 층계는 땅과 하늘을 잇는 것,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이 땅 인간의 곁에 서 계시고, 그들과 함께 있음을 상징한다. 야곱의 사다리는 성당의 공간적 원형이다. 이런 야곱의 사다리가 우리가 매일, 매주 다니는 성당 안에 있다. 미사에서 사제는 “이는 내 몸이다” 하며 축성한 빵을 받들어 올린다. 그리고 손을 올리면서 “마음을 드높이”라고 하고, 회중은 “주님께 올립니다”라고 답한다. “주님께 올립니다”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높입니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부터 성당의 제대 위 공간을 애써 넓고 높게 지었다. 땅에 세워진 층계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자 자기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이 하느님께서 계신 거룩한 장소임을 자각했다. 그리고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면서 두려움에 싸여 말하였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우리가 미사를 드리는 성당이 바로 오늘의 거룩한 땅이요 야곱의 말대로 몹시도 두려운 곳이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며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신을 벗고 성당에 들어가야 한다. 유다인들은 히브리어로 ‘네가 서 있는 그곳’을 ‘마콤(mqm)’이라 불렀다. ‘마콤’의 첫 번째 의미는 창세기의 야곱의 장소나 탈출기의 불타는 떨기와 같이 하느님께서 모세 앞에 나타나시는 선택된 장소다. 그 장소는 하느님께서 계신 자리이니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타내시는 거룩한 장소, 따라서 두려운 장소다. 평범하고 흔한 장소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는 이런 거룩한 장소가 우리가 사는 동네에 성당이라는 건물 모습으로 가까이 서 있다. 하느님이 우리 곁에 계심을 드러내는 ‘성사’ 야곱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고, 이 두려운 장소를 “하느님의 집(Domus Dei, the House of God)”, “하늘의 문(Porta Coeli, the Gate of Heaven)”이라고 불렀다. 야곱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니 “하느님의 ‘집”이라 불렀고, 거룩함이 시작하는 곳이니 “하늘의 ‘문”이라 불렀다. 야곱은 하느님의 거룩한 영역을 감히 사람이 사는 ‘집’과 ‘문’으로 형상화했다. 그러나 야곱은 들판에서 하느님의 현시에 감격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바로 자기가 베고 잤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곳을 하느님의 ‘집’으로 이 땅에 구축했다. 야곱은 하느님을 만난 그 땅에 돌을 세움으로써 그곳을 거룩한 자리로 구별했다. 그가 한 것은 수직으로 기둥을 세운 것뿐이다. 그러나 수직으로 세운 기둥 하나는 ‘세운 것’ 전체를 나타내는 건축 행위였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성당이다. 그러나 돌을 세웠기 때문에 하느님의 집이 된 것이 아니다. 그 자리가 거룩한 땅임을 알았더라면 그곳에 누웠을 리 없고, 꿈에서 천사가 오르내리는 층계를 보지 못했더라면 야곱은 돌을 세웠을 리 없다. 돌을 세우기 전에 이미 그곳에 ‘하느님의 집’은 있었다. 그는 이를 알고 돌을 세움으로써 ‘하느님의 집’을 이 땅에 지었다. 하느님께서는 성당이 세워지기 전 이미 그 자리에 야곱의 사다리로 성당의 원형을 보여주셨다. 그러니 성당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함께 계심을 눈에 보이게 하려고 지은 성사적 건축물이다. 우리가 성당을 설계하고 시공자를 불러 세웠다고 우리가 하느님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는 하느님의 집을 눈에 보이게 해 주는 성당이라는 집을 돌과 콘크리트로 세울 뿐이다. 김광현(안드레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cpbc2022.12.28
![[떠나자! 파울리타 수녀의 유익한 교리여행] (17) 여행지 : 성경 2](//cpbc.co.kr/CMS/newspaper/2021/07/rc/806381_1.1_titleImage_1.jpg)
[떠나자! 파울리타 수녀의 유익한 교리여행] (17) 여행지 : 성경 2 성 아우구스티노는 어느 날 하늘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를 듣습니다. “집어라, 읽어라.” 이 말씀에 옆에 있던 성경을 펼쳤습니다. 눈에 들어온 구절은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로마 13,13)였습니다. 이 말씀에 그는 그때까지의 방탕했던 자신의 생활에 대해 극적으로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우리는 지금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습니까?그럼 두 번째 성경 퀴즈 여행을 떠나볼까요?퀴즈 여행 1 구약은 하느님과 누구와 맺은 계약인가?2 신약은 하느님과 누구와 맺은 계약인가?3 구약과 신약을 같은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①거룩성 ②보편성 ③단일성 ④연대성4 복음서는 몇 권인가? 이 중 공관복음서는 몇 권인가? 5 구약의 모세오경은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무엇인가? 6 요한 복음사가가 기록했다고 간주하는 요한계 문헌은 몇 권인가? 7 성경을 대하는 태도 중 옳지 않은 것은?①성경을 내 임의대로 해석하면서 읽는다. ②성경 위에 다른 것을 올려놓지 않는다. ③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생활로 실천한다. ④성경을 읽기 전 · 후에 성령께 기도한다. 답란1 □□□□ 백성 2 모든 □□3 □번 4 □권, □권5 □□기6 □권 7 □번 가이드 설명1. 옛 계약: 구약구약(舊約)은 예수님 탄생 이전에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옛 계약을 말합니다. 천지 창조부터 예수 그리스도 이전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바를 모아 놓은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당신을 알려주셨으며,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면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들이 하느님만을 섬기면 축복을 받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구약 성경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하여 그들이 얼마나 계약에 충실한지를 또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2. 새로운 계약: 신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모든 인류와 맺은 새로운 계약이 신약(新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구약을 넘어서서 세상의 모든 사람과 맺은 계약이지요. 신약에는 하느님 아들 예수님께서 강생하시어 우리와 함께 사시다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복음(福音)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말씀이지요. 3. 구약과 신약의 단일성구약에서부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계시되어 신약에서 완성되므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분리하지 말고 같은 맥락에서 알아듣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단일성(單一性)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과 그분 계시의 단일성에서 비롯되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비추어 구약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신약 성경 또한 구약 성경에 비추어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계시 헌장」 16항 참조) 4. 복음서복음서(福音書)란 구원을 위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책이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말씀과 가르침에 대해 기록한 성경을 말합니다. 신약 성경 중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이 각각 기록한 4권의 책이 복음서이지요. 그리고 마태오, 마르코, 루카 세 복음서를 비교 대조해서 읽다 보면, 낱말과 내용 등이 서로 일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 복음사가들이 같은 관점에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고 해서, 이 3권을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은 가장 나중에 기록되었으며, 내용이나 관점이 이들과는 많이 다르지요. 5. 구약의 모세오경 구약의 모세오경(五經)은 구약 성경에서 제일 앞부분에 나오는 5권의 책인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합니다. 주요 내용이 대부분 율법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율법서(토라, Torah)라고도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의 주요 내용을 다루기에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지요. 모세오경이라고 하지만 모세가 직접 적은 것은 아니고, 모세를 저자로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오경의 내용은 우주의 창조, 인류의 시작, 아브라함과 후손들, 이집트 탈출 사건, 시나이 계약, 모세의 생애 마지막 순간, 가나안 입성 전까지의 긴 역사를 다루고 있지요. 6. 요한계 문헌 신약 성경은 먼저 복음서 4권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루카 복음사가가 기록한 사도들의 행적을 다룬 사도행전, 바오로 사도와 그 일행들이 전도 여행 동안 세운 교회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바오로 서간(14권), 바오로 사도가 아닌 다른 사도들(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이 적은 가톨릭 서간(7권)이 나오고, 마지막에 요한 사도가 적은 묵시록이 나옵니다. 이 중 요한 사도가 적었다고 간주하는 요한 복음서, 요한의 첫째 서간ㆍ둘째 서간ㆍ셋째 서간, 요한 묵시록, 이 5권을 요한계 문헌이라고 합니다. 이 책들은 1세기경 같은 시기에 기록되었고, 문체, 용어, 교의 등이 상호 밀접하지요. 7. 성경을 대하는 태도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①성경을 경건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일반 책처럼 성경 위에 어떤 것을 올려놓지 않도록 주의해야지요. ②성경을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합니다. ③성경을 읽기 전과 후에는 성령께 기도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성경 말씀을 알아듣기 위함이지요. ④성경을 내 임의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교도권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자구적으로만 해석하게 되면 근본주의에 빠지게 되지요. ⑤성경을 묵상하여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⑥이것을 실천하여 말씀의 씨가 생활 중에 풍부한 열매를 맺어야겠지요. 여행 옵션: 분당 성 요한 성당수원교구 성남대리구 분당 지역에는 네 복음사가의 이름을 딴 본당들이 있다. 성 요한본당이 중심 본당으로, 본당 설립은 국가의 분당 신도시 계획과 함께 진행되었다. 1993년 성당을 건립하는 기간에도 지역 내 신자들의 증가로, 1995년에 성 마태오본당, 성 마르코본당, 1999년에는 성 루카본당이 설립되었다. 성 요한성당은 3000여 명이 동시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하는데, 2003년 성당 봉헌 당시에는 국내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가장 큰 규모였다. 현대식 로마네스크 양식인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 건축뿐 아니라, 성당 안팎으로 가득한 성 미술로 유명해 ‘성 미술 투어’도 운영되고 있다. 여행 기념품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는 성경으로 숨을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얼마나 성경을 자주 읽습니까? 아니 어떻게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그 안에서 하느님 또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하느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습니까?마리 파울리타 수녀 노틀담 수녀회 교리교재 연구소 문채현2021.07.21
![[베네딕토 16세 선종] “모든 은총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믿음을 굳게 지키십시오”](//cpbc.co.kr/CMS/newspaper/2023/01/rc/838596_1.4_titleImage_1.jpg)
[베네딕토 16세 선종] “모든 은총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믿음을 굳게 지키십시오”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의 영적 유언서 2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을 찾은 신자들이 베네딕토 16세 교황을 추모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교황청은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즉위한 뒤 1년 4개월 만인 2006년 8월 29일에 독일어로 직접 작성한 유언을 선종 당일 공개했다. 교황의 유언은 선종 후에 공개되는 관례에 따른 것이다. 다음은 영적 유언서(Spiritual Testament) 요약.나의 영적 유언서인생의 늦은 시기에 내가 겪은 세월을 돌아볼 때, 내가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무엇보다 나에게 삶을 주시고, 혼란스러운 여러 시기를 헤쳐나가도록 인도해주시며 모든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주님은 내가 미끄러질 때마다 항상 나를 품어주시고, 당신의 얼굴을 비춰주신다. 돌이켜보면 어둡고 힘겨운 여정조차 모두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고, 하느님께서 나를 잘 인도해주신 것이 그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어려운 시기에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나를 위해 분명한 빛처럼 사랑으로 멋진 가정을 준비해준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아버지의 명료한 믿음은 자녀인 우리에게 신앙을 가르쳐줬고, 어머니의 깊은 헌신과 큰 선함은 내가 충분히 다 감사할 수 없는 유산이다. 누나는 수십 년 동안 나를 애정 어린 보살핌으로 도왔다. 이러한 선행과 동행이 없었다면 나는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모든 생애에 걸쳐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많은 친구와 이웃,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감사드린다. 나의 아름다운 조국에도 감사드리며, 고국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그들 속에서 나는 믿음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땅이 믿음의 땅으로 남길 기도하며, 친애하는 독일 국민들이 믿음을 외면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제2의 고향이 된 이탈리아와 로마를 향해서도 특히 감사하다.내가 어떤 식으로든 잘못한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교회의 모든 이에게 말한다. 믿음을 굳게 지키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십시오. 자연 과학과 역사적 연구는 종종 가톨릭 신앙과 상충하는 반박할 수 없는 결과를 제공할 수 있는 듯 보인다. 나는 오래전부터 자연 과학의 변화를 경험했고, 반대로는 신앙에 반하는 확실성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볼 수 있었고, 이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과 관련된 철학적 해석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과학과 대화하는 것 또한 믿음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내가 신학, 특히 성경과학(biblical science)이란 여정에 동참한 세월이 60년 됐다. 그리고 다른 세대가 거듭하면서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이론들이 단순한 가설로 무너지는 것을 목도했다. 그것은 자유주의 세대, 실존주의 세대, 마르크스주의 세대가 해당한다. 나는 이러한 얽힌 가정들 속에서 믿음의 온당함이 어떻게 다시 나타나는지 봤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교회는 모든 부족함에도 진정으로 그의 몸이다.마지막으로 겸손되이 요청한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나의 모든 죄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영원한 거처로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내게 맡겨진 모든 이에게 날마다 나의 진심 어린 기도가 향할 것이다. 정리=이정훈 기자 cpbc2023.01.03

복음적 삶이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체험 나눔[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1.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프란치스칸들은 프란치스칸 삶의 형태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그 만남의 내면적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복음적 삶’이라고 말한다. 15.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대안적 삶 제3의 길① 삶의 전적인 기준이자 삶 전체가 된 복음프란치스코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지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살 것을 요청했던 것은 우리 교회의 편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듯한 인상을 주는 편협한 의미의 선교와는 전적으로 달리 사람들에게 참다운 행복의 현실을 알려주고 이를 살아가게끔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체험한 하느님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복음이었기 때문이다.생각건대, 그리스도인들은 나름대로 하느님의 말씀, 특히 복음의 말씀이 분명히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야말로 복음(福音), 즉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복음을 삶으로 살아가기가 그렇게도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사실 우리는 특별한 해설이 없어도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를 해설해주시는 분이 영으로 바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복음에 대한 강론을 듣거나 강론을 할 때는 이를 감동적으로 설명하고, 참으로 감동적으로 이해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하고 생각하고 말한 바를 삶으로 젖어들게 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설명한다면 좀 무리일까? 복음 말씀은 모두가 사실 어떤 한 가지 상황 혹은 몇 가지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데도 그 한 가지에만 적용하거나 아예 그것이 적용되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폭을 좁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은 사람들의 가진 바를 나누는 힘이 그러한 하느님의 표징을 드러나게 했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사람들은 가슴 깊이 공감하면서도 그러한 나눔에 자기식의 한계나 제한을 둔다. 즉 ‘이런 사람들에게까지만’, 혹은 ‘이 정도까지만’ 등등의 제한을 두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참된 나눔이 불가능해지거나 아예 나눔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한 가지 상황에 완전하게는 적합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은 한계성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프란치스코는 한 가지를 알아들으면 그것이 모든 삶에 적용되는 지침이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복음의 말씀 하나가 모두가 되었고 그 모두가 그 하나로 집약될 수 있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선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해석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죄로 인해 스스로가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던 삶을 용서해주고 치유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코에게는 하느님이 우리의 죄와 어둠마저도 우리 구원을 위해 활용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그에게는 어떤 것도 복음을 살아가는 데 제약이 되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복음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서 자기 삶에 깊이 들어설 수 있었다. 자기 삶에 깊숙이 들어선 그 복음의 인격에 힘입어 또 다른 그리스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복음 전체를 받아들여 삶 속에 젖어들게 하였던 사람이다. 이를 통해 그는 하느님 나라의 체험, 즉 참 기쁨을 체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기에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Vita Evangelica)’이 지닌 핵심은 어떤 특수한 사도직이나 물리적 공동 현존(기도와 일 모두)을 첫 자리에 두는 삶이 아닌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교회의 수도생활과 관련한 문헌들을 보면 수도생활의 형태를 크게 두 가지, 즉 ‘수도승적 삶(Vita Monastica)’과 ‘활동 사도직 삶(Vita Apostolica)’으로 분류하는데, 엄격하게 말한다면 프란치스코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시를 받아 시작한 삶은 이 두 가지 수도생활의 형태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교회가 수도생활의 형태로 명시하지 않는 삶이긴 하지만 우리 프란치스칸들은 프란치스칸 삶의 형태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그 만남의 내면적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복음적 삶’이라고 말한다.이 ‘복음적 삶’의 토대에는 본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또 다른 그리스도로의 인격으로 창조되었지만, 우리의 연약함과 죄로 기울어지려는 경향과 그 죄 때문에 지금은 왜곡된 우리의 인격을 또 다른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되돌려야 할 과제가 들어있다. 이 왜곡은 어떤 물리적인 왜곡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바라봄’의 왜곡이므로 이를 회복하려면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의 눈으로 하느님의 선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과 다른 인격체들을 바라보려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수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인격의 원형인 그리스도께 은총을 청하며 수양을 해가면서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다른 이들과 다른 존재들이 결국은 하나로 연결된 존재의 위대한 사슬의 부분들이요 전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cpbc2021.10.13
![[대구대교구 사목교서]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cpbc.co.kr/CMS/newspaper/2022/11/rc/836443_1.1_titleImage_1.jpg)
[대구대교구 사목교서]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 우리 교구는 2030년까지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노력으로 지난 두 해 동안 ‘하느님 말씀을 따라’라는 주제로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고, 말씀으로부터 힘과 희망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이 기간에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알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두 해 동안에는 ‘친교’의 가치를 더욱 깊이 깨닫고 활성화하는 데 역점을 두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 교구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교회는 제16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이하 시노드)를 준비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구호로 축약되는 시노드 정신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고 그분의 신비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서로를 향해,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시고, 교회는 그러한 하느님의 친교를 본받아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시작부터 온 세상의 일치를 증거하고 촉구하는 가운데 삼위일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삶과 사명은 코로나19 사태를 겪는 가운데 더욱 절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나야 하고 또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를 살고 증거하는 사명을 실천하는 데 앞장서야 하며 친교의 영성을 익히는 데 힘을 쏟아야 합니다. 친교의 영성은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양보하며, “서로 남의 짐을 져 주고”(갈라 6,2),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붙어 다니면서 경쟁심과 출세욕, 불신과 시기를 불러일으키는 이기심이라는 유혹을 물리칠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친교의 영성은 다른 사람과 공동의 집인 지구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서로를 향해,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살 때 비로소 우리 삶의 의미와 보람을 얻게 된다는 점을 알려 줍니다. 따라서 우리 교구는 앞으로 두 해 동안 성령을 통한 대화와 경청이라는 시노달리타스의 원리를 통해 친교로 나아가는 모습을 더욱 명확하게 실현함으로써 교회가 세상에 친교를 살아가는 성사임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는 특별히 복음적 친교를 살아가고 있는 수도공동체들의 가치에 주목하고 많은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복음 삼덕을 살아가는 수도공동체들은 친교의 삶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수많은 영성적 보화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친교를 살아가는 모범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함께 기도하고 경청하며 대화를 나누는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수도공동체와 본당, 그리고 교구 내 기관들과 단체들이 서로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선 교구장인 저부터 시노달리타스를 통해서 친교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교구 내 모든 공동체는 시노달리타스의 삶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극복하면서 친교의 영성을 드러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고 실천하는 데 노력합시다.cpbc2022.11.30
![[의정부교구 사목교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cpbc.co.kr/CMS/newspaper/2022/11/rc/836442_1.2_titleImage_1.jpg)
[의정부교구 사목교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신앙과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우리 교구 내 공동체, 특히 각 본당이 활기를 띨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1. 행복한 신앙 체험을 위해 노력하는 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여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을 바라고 만난 이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힘차게 살아가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성경 말씀은 주님을 만난 이들이 얻게 되는 행복과 기쁨 그리고 힘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본당 신부님들이 ‘기도 사제’가 되어 신자들이 기도함으로써 행복을 얻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시노달리타스의 지속과 활성화를 위하여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가 반드시 지속되어야 합니다. 함께 참여하는 전례나 행사를 비롯하여 본당의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서로 대화하며 의견을 교환하고 공유하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여러 교우 분께서 지금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에 참여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모든 신자가 자발성을 갖고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본당 공동체 일에 지금보다 많은 이가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면, 우리 공동체는 머지않아 아름답게 회복되리라 생각합니다. 3. 시대가 요구하는 사목을 향하여 1) 지금 요청되는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사목은 기후 위기와 생태환경 보호에 관한 것입니다. 기후 위기는 우리 모두의 위기입니다. 우리 교회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생태환경 보존과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고, 교회가 벌이는 캠페인에 열심히 참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2) 오늘날 많은 신자는 교회가 나아갈 방향으로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다가가는 일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하느님 백성 모든 이가 함께해야 할 과제입니다. 형제자매님들도 주변의 어려운 이들, 특별히 이주민과 난민,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에게 먼저 다가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3) 점점 고령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우리 교회는 노인에게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사회의 진행 속도보다 한층 빨리 고령화되고 있는 우리 교회는 더더욱 노인이 기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인 사목에 힘쓰고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어느 시대보다 힘든 상황에 내몰린 청년들이 교회를 찾아와 휴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공동체, 특히 본당 공동체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메마른 삶 가운데 있는 청년들에게 샘터가 될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cpbc2022.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