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란과 이단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교회[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30)바크라프 브로지이크의 ‘콘스탄츠 공의회의 얀 후스’ 바크라프 브로지이크, ‘콘스탄츠 공의회의 얀 후스’(1883년), 프라하 구시가지 시청 내 브로지이크 홀 소장. 교회 분열의 후유증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 후유증은 교회 안팎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로마 귀환 이후, 교황이 3명씩 나오는 초유의 사태를 겪는 동안 유럽의 지성계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을 거라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다. 자신의 자리에서 올바른 일을 묵묵히 찾아서 하는 사람들도 있고, 교회를 강하게 비판하며 크게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도 있었다. 100년 후에 일어날 종교 개혁의 선구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파들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개혁이 필요한 시대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도 ‘이단’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극단적이고 반교회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다. 이번에는 이들에 대해서 알아보겠다.영국의 존 위클리프와 반교회 운동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신학자며 종교 개혁가로 불리지만, 원래는 가톨릭교회 사제였다. 옥스퍼드대학교 퀸즈 칼리지를 졸업한 후, 발리올 칼리지에서 교수로, 켄터베리 칼리지에서 원장을 지냈다. 그는 가톨릭교회 교리의 핵심인 ‘실체 변화(transubstantiation)’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후 그가 제기하는 모든 반교회 운동의 근원이 되었다. 그는 1374년 세금 문제로 교황청과 잉글랜드 간 협상이 있을 때,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를 동행하여 사절단으로 아비뇽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가 보기에 교황도 영국 왕실도 문제가 많았고, 영국의 고위 성직자들은 부유했다. 성직자의 절반 이상이 사목에는 관심이 없고, 신학에는 무지했다. 그렇다고 마땅한 해결책도 없었다. 성직자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인구 65명당 성직자가 1명씩 있는 꼴이었다. 또 영국 교회가 유럽의 다른 나라 교회들보다 부유한 것도 문제였다. 영토의 3분 1일이 교회 소유였다. 위클리프가 보기에 수도회들도 위기였다. 수도자들은 돈이 많았고, 권위와 영향력을 앞세워 본래의 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탁발 수도승들을 ‘새로운 이단자’로 규정했다. 백성들은 순례, 성인 유해 공경, 전대사 등으로 신앙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겉으로만 그렇다고 보았다. 위클리프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개혁을 강하게 주장했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야 하고, 후원 시스템을 전면 수정해야 하며, 교회는 사목에만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막 아비뇽 시대를 청산하고 로마로 귀환한 교황청이 부패했다며 개혁을 주장했다. 가톨릭교회의 수도원 제도를 비난하고, 교황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과도한 비판으로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은 이단 행위를 멈출 것을 권고했으나, 그는 계속해서 교황의 권위와 교회의 교리에 공격을 가했다. 1382년,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백성에게 복음의 진리를 직접 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훗날 「위클리프 성경」으로 알려지게 될 바로 그 성경이다. 그때까지 성경은 예로니모 성인이 70인역에서 번역한 라틴어 성경이 전부였다. 따라서 라틴어를 아는 소수의 성직자만 성경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이에 위클리프는 성경이 “백성의, 백성에 의한, 백성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장은 훗날 링컨이 민주주의를 주장할 때 인용하기도 했다. 위클리프의 영어 번역은 히브리어와 희랍어 원문보다는 예로니모 성인의 라틴어 번역본 「불가타」를 기초로 했다. 성경의 영어 번역은 영국 내에서부터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바로 그해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교회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지진 때문에 조기에 종료되는 바람에 일명 ‘지진 회의’로 불리기도 한다. 대주교는 회의에서 위클리프가 주장한 10개 사안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14개 오류를 지적했다. 위클리프는 자신의 본당 루터워스에서 쫓겨났고, 2년 후에 사망했다. 체코의 얀 후스, 설교 금지 당해 그의 영향은 체코의 신학자 얀 후스(Jan Hus, 1372~1415)에게로 이어졌다. 후스는 프라하의 카렐대학교에서 공부했고, 1400년부터 교양학부와 신학부의 교수로 재직했으며, 가톨릭교회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402년, 카렐대학교 총장이 되자 체코인들에게 독일에 맞설 것을 독려했고, 체코어의 철자법을 개혁하여 저술 활동에 활용했다. 설교와 저술로 교회의 타락을 고발했고, 대사 규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본래의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고위 성직자와 독일인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는 위클리프와 달리 대중 설교를 통해 개혁을 주장한 첫 번째 인물이기도 했다.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알렉산드로 5세 교황은 교서를 통해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단죄했고, 프라하 대주교에게 후스의 설교를 금하도록 했다. 그러나 후스는 교황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고, 훗날 프로테스탄트들이 들고 나올 문장들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운명 예정설, 오직 성경·오직 은총, 베드로의 수위권 거부, 교황 권위의 무효 등을 주장했다. 교회는 거룩하지도 않고, 교회에 대한 순명은 성직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교황청은 로마로 직접 와서 입장을 밝히라고 했고, 후스는 거부했다. 1414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하며,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공의회 참여를 독려했다. 후스는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콘스탄츠 공의회는 그에게 30건의 고발 목록을 비준했고, 그의 저작 중 세 개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틀간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체코 대표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바크라프 브로지이크(Vclav Brok, 1851~1901)가 그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해명하는 얀 후스’이다. 체코를 대표하는 화가 브로지이크는 젤레즈니함므로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다행히 이른 나이에 프라하 외곽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크면서 회화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생겼다. 함께 성당에 다니던 친구의 아버지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주선해 준 덕분에 17살에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1871년에는 드레스덴 아카데미아, 1873년에는 뮌헨 미술원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뮌헨 미술원에 있는 동안 독일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칼 폰 필로티(1826~1886)을 만났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76년부터 파리에서 살며, 살롱 드 파리에서 금상을 받으며 파리 문화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는 파리의 부유한 미술품 거래상 찰스 세델메예라의 딸과 결혼하며 엘리트 예술가로 이름을 올렸다. 1893년부터 프라하 아카데미의 교수로 활동하며, 프라하와 파리를 오갔다. 1896년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가 선정한 불멸의 화가 40인에 선정되었고, 죽을 때까지 파리 미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이름을 올린 첫 번째 체코인이 되었다. 말년에는 풍경화, 농민 중심의 인물화, 역사화에 집중했다. 갓 쉰을 넘긴 나이에 지병인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파리의 몽마르트 공동묘지에 있다. 그림 속으로 작품은 원래 브로지이크의 장인이 소장하고 있던 개인 소장품이었다. 작품 속에서 얀 후스는 옥좌에 앉아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 앞에서 왼쪽의 교황과 공의회 교부들에 둘러싸여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교회는 그에게 이단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항들을 철회하라고 명했고, 후스는 거부했다. 그림 속 장면은 암울한 역사적인 순간을 말하는 듯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후스의 강한 의지를 반영한 듯, 고딕 양식의 기둥 배경이 압도적이다. 결국, 후스는 이 자리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415년 7월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의 제자 프라하의 지롤라모는 콘스탄츠로 달려와 지기스문트에게 약속과 다르지 않으냐고 따졌고, 그 역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얀 후스가 30년 전에 사망한 위클리프의 추종자였고, 후스의 이단 논문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이 밝혀져 위클리프의 시신도 다시 파내 불에 태워졌다. 이로써 1414~1418년, 온 유럽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콘스탄츠 공의회는 이단 논란을 종식하는 동시에 지난 40여 년간 세 명의 교황까지 나와 유럽 교회를 흔들었던 서구 대이교 논란을 종식시킨 장(場)이 되었다. 바크라프 브로지이크(Vclav Brok), ‘콘스탄츠 공의회의 얀 후스’(1883년), 프라하 구시가지 시청 내(Praha, Staromstsk radnice), 브로지이크 홀 소장(Brokv sl).김혜경 (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cpbc2020.12.28

“믿음은 이성·마음·손을 움직인다”한스 큉, 현대 최고의 종교계 지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문단으로 참가
삶의 근본적 질문을 다양한 주제 나는 무엇을 믿는가 한스 큉 지음ㆍ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올해 4월 독일 튀빙겐의 자택에서 선종한 세계적인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 베네딕토 16세 교황, 칼 라너 신부와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신학 분야 자문단 일원으로 교회가 개혁적 방향을 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신학자였다. 그의 신학적 세계관을 형성한 개인적 신앙고백의 빛깔은 어떠했을까? ‘나는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신뢰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내 삶이 어떤 모습이길 희망하는가?’ 등 삶의 토대를 이루는 근본적 질문을 통해 자신이 지닌 신앙의 핵심을 종합했다.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은 삶에 대한 신뢰를 시작으로 삶의 기쁨ㆍ의미ㆍ힘ㆍ고통ㆍ기술ㆍ비전 등을 주제로 망라했다. 한스 큉은 ‘나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핵심 물음에서 생각의 가지를 뻗어 나간다.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954년 사제품을 받은 신학박사 한스 큉은 1959년까지 스위스 루체른에서 사목하다가 1960년 튀빙겐대학교 기초신학 교수로 초빙된다. 수십 년 동안의 성경과 전통, 철학과 신학 공부는 그의 신앙관을 명료하고 넓어지게 했다. 세계적 신학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철학과 신앙을 녹여낸 책이지만, ‘믿는’ 것을 넘어 ‘알고’ 싶어 하며, 더 나아가 실천적 결과를 낳는 신앙관을 고대하는 이들의 영적 갈망을 채워준다. 이 책은 2009년 튀빙겐대학교에서 그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의 강의 내용을 엮은 것이다.한스 큉은 평생 종교의 평화로운 공존과 상호 존중을 위해 헌신해 온 인물로, 교황의 무류성ㆍ동성애ㆍ여성ㆍ피임 등 현대 사회의 이슈에 대해 진보적 태도를 보여 교도권과 갈등도 빚었다. 그는 “삶의 여정은 갖가지 체험과 갈등을 통해 거듭 도전을 받는 정신의 원대한 모험이었다”고 털어놓는다. “믿음은 교회가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며 “적극적으로 나의 믿음 나의 신앙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믿음은 인간의 이성ㆍ마음ㆍ손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것, 즉 인간의 사유ㆍ의향ㆍ감정 행위를 포괄하는 것이다. 한스 큉이 생각하는 삶의 기쁨은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그는 “실제 체험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슬로건 ‘중요한 건, 내가 행복한 거야’는 아무튼 나의 삶이 원칙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오로지 욕구 충족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향락주의는 지속적인 삶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된 삶의 기쁨을 망쳐버리는 삶의 태도로는 ‘허무주의, 냉소주의, 악의주의’를 꼽는다. 그는 건강한 사람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들, 자녀가 매우 심한 장애가 있는데도 삶의 용기와 기쁨을 발산하는 부모들에게 찬탄한다고 밝혔다.그는 끊임없이 ‘중요한 것은 내가 행복한 것’이며, ‘재미있는 것은 허용되어야 해!’라고 외치는 시대에 온갖 종류의 정보와 지식은 쉽게 얻을 수 있지만 방향 설정에 대한 지식은 결여되어 있음도 지적한다. 환락과 덕 사이의 선택만이 아닌,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선택에서도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두고서 그는 다시 묻는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모든 것이 더 마음에 들고 더 멋지고 또 더 재미있게 되어야 한다’는 세태를 그는 꼬집는다. 교회와 사회 속에서 스스로 ‘외톨이 전사’였다고 고백하는 그는 윤리의 세계화도 강조했다. “인류의 여정은 지난 수십 년간, 의학과 약학부터 우주 비행과 인터넷에 이르기까지의 그 모든 엄청난 진보에도 불구하고, 더 편안해지지 않았다. 모든 윤리를 공산주의는 당의 이익에, 자본주의는 경제의 이익에 희생 제물로 바쳤다. 이제 바야흐로 모든 세계종교에서 많은 사람이 묻고 있다, 어떤 근본 조건들 아래에서야 우리가 인간으로서 이 지구 상에서 생존할 수 있고, 우리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더 인간답게 형성할 수 있는가?”(90쪽) 한스 큉은 지치지 않고 일하는 사람으로 통했다. 스스로 일이 취미라고 말할 수 있는 운 좋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에게 일은 중요한 과제들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그는 읽고 공부하고 쓰는 일에 만족했으며,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 속에서, 수영도 하고 고전음악도 들으면서 일을 할 때는 더 만족한 신학자였다.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평화신문2021.11.10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28)성경 독서의 장소](//cpbc.co.kr/CMS/newspaper/2020/02/rc/773932_1.1_titleImage_1.jpg)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28)성경 독서의 장소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곳을 찾아 허성준 신부 성경은 어디에서 읽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어느 한 장소만을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필자는 다음과 같은 장소에서의 성경 독서는 우리가 집중해서 성경을 읽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분주히 움직이는 일터나 혹은 여러 사람이 수시로 드나드는 개방된 공간은 성경 독서를 위해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선 시대 선비였던 이만부(1664-1732)는 한가로운 생활에서의 독서의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한다. 집안을 물 뿌리고 비질하고, 아침 해가 비쳐들면 향로를 비로소 피운다. 책상을 정돈하고 책을 펼쳐 되풀이해서 읽고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옛사람의 마음을 쏟은 곳을 엿보기라도 하면 이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 말로 형언하기는 어렵고 가만히 혼자 알 뿐이다.” 이렇듯 선비들은 고요한 장소에서 옛 성현의 글을 접하면서 온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으면서 남모르는 기쁨을 만끽하였다. 대개 수도승들은 수도원의 고요한 분위기 안에서 자기 개인의 독방, 공동방, 도서실, 혹은 정원 등에서 성경을 읽었다. 그들은 성독 시간에 누구로부터 방해받음이 없이, 각자 고요한 곳에서 그러한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베네딕도 규칙서」에서는 혹시라도 수도자들이 성독 시간을 불충실하게 보낼 수도 있기에 한 두어 사람의 장로들로 하여금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하라고 권고하였다.(RB 48,17-18) 그 당시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수도원의 여러 곳의 고요한 분위기 안에서 각자 성경 독서의 수행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그러므로 성경 독서를 위해 고요한 분위기가 유지될 수 있는 그러한 공간이 있다면 매우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한 장소는 우리를 쉽게 성경의 말씀에 집중하게 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만든다. 그러한 곳은 바로 영적 투쟁의 장소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이다. 이에 대해 엔조 비안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이 장소에서 당신 마음의 건조한 공백을 풍부한 계곡과 희망의 문턱에로 옮겨 주신다. 그분은 당신의 마음에 직접 말씀하시기 위해 그리고 당신에게 신적인 선물들을 채워 주시기 위하여 당신을 더 가까이 부르신다.” 그곳은 바로 야곱이 꿈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 후에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여기 계시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 하늘 문이로구나”라고 고백했던 베델이라는 곳이다. 즉 우리가 말씀을 대면하고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그곳은 영적인 의미에서 또 다른 ‘베델’이 된다. 고요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장소는 단순히 공간의 크고 작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은 기도하기를 원하는 이에게 말씀하신다: “당신이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당신 아버지께 기도하시오.”(마태 6,6) 여기서의 ‘골방’은 장소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분주하고 시끄럽지 않은 그러한 고요한 공간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 독서를 잘하기 위해서 그러한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도움되리라고 본다. 우리가 선택하려는 장소는 다락방이든 혹은 지하실 방이든 어디든지 좋다. 다만 그러한 장소에 십자가와 촛불 그리고 성경을 앞에 놓고 다소곳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하다. 이러한 공간과 고요한 장소는 우리로 하여금 쉽게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허성준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평화신문2020.02.26
![[2021 결산] 김대건·최양업 신부 영성 기리고, 팬데믹에 지친 마음 치유](//cpbc.co.kr/CMS/newspaper/2021/12/rc/815713_1.2_titleImage_1.jpg)
[2021 결산] 김대건·최양업 신부 영성 기리고, 팬데믹에 지친 마음 치유 아! 미얀마 展’ 개막식에 참가한 염수정 추기경과 관계자들이 미얀마 시민 불복종 운동의 상징인 ‘세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미얀마의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문화예술계는 2021년 한 해 동안 사람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며 몸과 마음이 지친 이들을 다독였다. 코로나19로 하느님께 잠시 멀어져 있는 이들에게 사랑과 기다림을 전했다. 성 김대건 신부ㆍ가경자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한국 교회는 올해 김대건 신부·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을 맞아 다양한 전시와 공연 등을 통해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기렸다. 서울 절두산순교성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은 특별전 ‘오랜 기다림, 영원한 동행’을 열었다. 김대건 신부의 서한을 통해 한국의 첫 사제로서 일생, 나라와 교회의 미래를 내다본 근대 지식인이자 조선 최초의 유학생으로서 걸어온 길을 살폈다.서울대교구는 10월 인형극 ‘가회동성당 이야기’, 연극 ‘마흔 번째 밤’, 콘서트 ‘스물두 번째 편지’, 창작 뮤지컬 ‘우리 벗아’를 선보였다서울 명동 갤러리 1898에서는 9월 특별전 ‘영혼의 벗, 김대건 최양업을 만나다’를 열었다. 두 사제의 삶과 영성을 묵상할 수 있는 시간으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등 교회 공동체 모든 구성원이 작가로 참여했다.가톨릭평화방송은 김대건 신부 발자취를 따라가는 ‘순례, 김대건을 만나다’와 성 김대건 신부의 서한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안드레아의 편지’, 대전가톨릭평화방송은 라디오 드라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제작해 방송했다. 11월에는 최양업 신부를 기리는 오페라 ‘길 위의 천국’이 무대에 올랐다. 최양업 신부가 보냈던 19개 서한을 바탕으로 그의 삶과 영성을 되새겼다.청주 배티성지 최양업 신부 박물관은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을 기원하는 만남과 동행’을 주제로 신자들이 최양업 신부를 보고 느끼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제20회 CPBC 창작생활성가제제20회 CPBC 창작생활성가제가 10월 열렸다. 코로나19로 2020년 성가제가 열리지 못한 만큼, 올해 성가제에 참가한 팀들의 경쟁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참가팀들은 한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기쁨을 함께 나눴다. 대상은 ‘풀꽃의 노래’를 부른 예수성심시녀회 ‘잔꽃송이’가 받았다.광주가톨릭평화방송 ‘1996년 그 후, 다시 유죄’광주가톨릭평화방송이 개국 25주년을 맞아 5월 다큐멘터리 ‘1996년 그 후, 다시 유죄’를 제작해 방송했다. 5·18 민주항쟁 관계자들의 생생한 경험을 담아내며,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의미를 되짚었다. 광주가톨릭평화방송은 ‘1996년 그 후, 다시 유죄’로 제31회 가톨릭매스컴대상 라디오·인터넷 부문상을 수상했다.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서울 명동 갤러리1898에서는 6월 ‘아! 미얀마’ 특별전이 열렸다. 국내 미술 작가들이 작품 기증을 통해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힘을 모았다. 염수정 추기경도 미얀마 사태 해결을 위한 관심과 기도를 호소했다. 또한, 미얀마 국민이 자유와 평화를 누리길 기원했다. 올해 가톨릭 출판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김대건ㆍ최양업 신부’, ‘영성ㆍ치유’였다. ‘김대건ㆍ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교계를 비롯한 일반 출판사는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의 영성과 삶을 소개한 책들을 발간했다. 생활성서에서 펴낸 「성 김대건 바로 알기」, 「성 김대건 바로 살기」는 신자들에게 많이 읽힌 책 중 하나였다. 성 김대건 신부 희년을 맞아 고 정진석 추기경이 옮긴 김대건 신부의 편지 모음집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와 최양업 신부의 편지를 모은 「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 개정판이 발간돼 눈길을 끌었다. 기쁜소식은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신앙과 우정을 그린 소설 「길 내는 목자 수선탁덕 성인 김대건」과 「길 가는 목자 땀의 성자 최양업 신부」를 선보였으며, 특히, 김대건 신부의 소년기를 다룬 동화책 「우리나라 첫 번째 신부 김대건」(주니어 김영사), 「김대건」(비룡소), 「소년 김대건」(마루비) 등이 줄줄이 출간됐다.장기화되는 팬데믹으로 신자들이 영적인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마음을 돌보고, 영성을 길어 올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를 담은 ‘가톨릭 클래식’ 시리즈(가톨릭출판사)와 이영제 신부의 신앙 에세이 「함께 기도하는 밤」(가톨릭출판사) 등도 인기를 얻었다.영성과 함께 ‘치유’는 가톨릭계 출판의 화두였다. 가톨릭출판사가 선보인 「혼자서 마음을 치유하는 법」과 바오로딸의 「치유의 순간」이 많이 읽히고 회자됐다. 생활성서가 펴낸 안셀름 그륀 신부의 고통 받는 이들의 절망 해독서 「마음 돌보는 동반」도 독자들에게 위로를 안겼다. 올 한해도 안셀름 그륀 신부의 영성 에세이들도 꾸준히 번역, 출간돼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생활성서 송향숙(그레고리아) 편집장은 “올 한해 신자들이 김영선 수녀의 ‘성경 인물과 함께하는 치유 여정’ 시리즈도 생각보다 많이 찾았다”면서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여서 신자들이 이런 책들을 필요로 했던 거 같아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고 말했다. 올해 60주년을 맞은 바오로딸은 1998년부터 출간돼, 신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예수회 송봉모 신부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12권의 리커버 개정판을 선보였다. 바오로딸의 「기도, 이렇게 하니 좋네요」와 「45일의 기적」, 「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도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편, ‘시대의 징표를 함께 읽어가는 분도출판사’라는 모토로 설립된 분도출판사는 내년 60주년을 맞는다. 올해는 국제 토마스 머튼 학회가 선정한 최우수 도서 「토마스 머튼의 수행과 만남」, 「세계의 성모 발현 성지를 찾아서」 등이 인기를 끌었다. 이밖에 일반 출판사들이 펴낸 밥 퍼주는 외국인 김하종 신부와 이문수 신부의 삶을 담은 「사랑이 밥 먹여준다」(마음산책)와 「누구도 벼랑 끝에 서지 않도록」(웨일북)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cpbc2021.12.22
![[떠나자! 파울리타 수녀의 유익한 교리여행] (19) 여행지 : 마리아](//cpbc.co.kr/CMS/newspaper/2021/08/rc/807446_1.2_titleImage_1.jpg)
[떠나자! 파울리타 수녀의 유익한 교리여행] (19) 여행지 : 마리아마리 파울리타 수녀(노틀담 수녀회 교리교재 연구소) 인류 역사상 가장 칭송받고 가장 많이 이름이 불리는 여인은 누구일까요? 그 이름은 ‘마리아’일 것입니다. 나자렛 시골 처녀 마리아는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믿음으로 응답하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마리아의 믿음과 순명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면서, 예수님의 공생활과 수난 죽음을 지켜보면서 한결같았습니다. 마리아는 당신 외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어느 어머니보다 고통을 많이 겪으셨지만, 구세주의 어머니로 하느님께 선택됨으로써 그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특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럼 마리아에게로 퀴즈 여행을 떠나볼까요?퀴즈여행 성모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1.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로 구약에 예언되었는데, 가장 먼저 구약 어느 편에 나오는가? 2.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님 잉태를 알렸을 때,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무엇이라고 응답하는가? 3.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임을 기념하는 미사 참여 의무 대축일은 언제인가? 4. 예수님은 돌아가시면서, 당신 어머니 마리아를 누구에게 어머니로 모시라고 하셨는가? 5.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성모 마리아가 무엇에 물들지 않았다고 선포하셨는가? 6.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는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가?7.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는데, 이는 교황의 어떤 특전인가? (정답은 ‘가이드 설명’에서 확인하십시오)답란 1. □□기2. 주님의 □3. □월 □일 4. □한 5. □죄6. 성□7. □□성가이드 설명1. 구약에서 예언된 마리아구약의 인물 ‘사라’, ‘미리암’, ‘유딧’ 안에서 마리아의 지혜나 신앙을 엿볼 수 있기에 이들을 마리아의 예표(예형)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장에 마리아의 존재가 처음으로 예고됩니다. 첫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께 벌을 받을 때, 하느님이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하십니다. 메시아가 악(뱀)을 쳐부수는 것이 예언되는데, 여자의 후손은 메시아이신 예수님, 여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예고하지요. 2. 주님 탄생 예고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리아에게 주님 탄생을 예고했을 때, 마리아는 처녀인 자신이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으로 받아들이면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순명으로 응답하십니다. 이로써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가 되셨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협조자, 구원의 중개자가 되셨습니다. 3.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공식적 명칭이 부여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를 통해서였습니다. 성자(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부와 동일한 신성(神性)을 가지신 분이라고 선포되었고, 이를 부인한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파문하였지요. 이렇게 성자의 신성이 확립되면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Theotokos)라고 공적으로 선포되었지요. 이를 기념하는 날이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데, 미사 참여 의무가 있습니다. 4. 교회의 어머니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옆에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인 요한을 아들로 주셨고, 또 요한에게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셨습니다.(요한 19,26-27) 이때 요한은 예수님의 모든 제자(하느님 백성)를 대표하는 이였기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만이 아닌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지요. 마리아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도 당신의 기도로 교회의 시작을 도와주셨고(「교회 헌장」 69항), 오늘날에도 ‘교회의 어머니’로서 교회를 돌보아 주고 계십니다.5.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가 하느님 아들의 육화를 위한 합당한 자격으로 죄에 물듦이 없음을, 즉 원죄 없이 태어나셨음을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전승되어 오던 이 믿음을 1854년 비오 9세 교황이 “성모 마리아는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라고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지요. 4년 후 1858년 성모님은 루르드에서 발현하시어, 당신 이름을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이다”라고 밝히심으로써 당신이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확인해 주셨습니다.6.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동정이신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였습니다.(마태 1,20; 루카 1,35) 성경에는 마리아의 예수님 탄생 이전의 동정성(童貞性)만을 언급하고 있으나(마태 1,35; 루카 1,34), 교회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공의회(6~7세기)를 통해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선언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형제가 나오나, 여기의 ‘형제’라는 단어는 친형제만이 아니라 친지 형제를 포괄하는 용어이기에, 반드시 마리아의 자녀라고 해석할 수 없지요. 7. 성모 승천 마리아가 어떤 죽음을 맞이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마리아는 원죄가 없기에 죽음에서 벗어나 육신은 소멸하지 않았으리라는 믿음이 오랫동안 전승되어 왔습니다. 마침내,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이 ‘성모님의 승천’을 교황의 무류성에 의한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교황의 무류성이란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관해 공적으로 가르칠 때, 그르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마태 16,18) 마리아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조) 지금까지 교황의 무류성에 의해 선포된 교리는 2가지뿐이다.(원죄 없이 잉태되심, 성모 승천) 여행 옵션 : 노트르담 대성당 (프랑스 파리)프랑스 파리 시테 섬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노트르담(Notre Dame)’은 프랑스어로 ‘우리들의 부인’이라는 말로,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1163년 건축이 시작되어 100여 년 걸쳐 완공되었다. 대성당은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되어있고, 성전 안에 수많은 예술 보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나폴레옹 대관식(1804년)과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로 알려져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그 당시의 성모 공경의 문화를 나타내 주고 있다. 현관 위의 왕좌에 앉은 장엄한 모습과 성전 제단 앞에 예수님을 안은 모습은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2019년 대화재로 성당 첨탑과 지붕이 피해를 보았다.여행 기념품 마리아는 하느님께 선택되어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4가지 특전을 받았습니다. ①하느님의 어머니 ②원죄 없이 잉태되심 ③평생 동정이심 ④승천. 이 사실들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우리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중에서 내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마리 파울리타 수녀(노틀담 수녀회 교리교재 연구소) cpbc2021.08.11
![[수도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2)회 수도자와 렉시오 디비나](//cpbc.co.kr/CMS/newspaper/2019/10/rc/765485_1.2_titleImage_1.jpg)
[수도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2)회 수도자와 렉시오 디비나성경 독서는 이미 기도 행위 허성준 신부 회(會)수도생활의 창시자인 파코미우스(St. Pachomius, 292~346) 성인은 수도생활 안에서 언제나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특별히 수도원에 입회하려는 지원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에 대한 암기력을 시험하였다. 즉 시편 20개와 서간 2~3개를 주어 암기하도록 했다. 그리고 만약 누가 성경을 읽고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수도원 안에 결코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권고하였다. 파코미우스 성인의 수도 공동체인 코이노니아(Koinonia)에서 성경은 수도자들의 실천적인 규율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성생활에 있어 근본적인 영감을 주었던 일차적인 원천이었다. 성경은 수도자들의 삶을 지탱해 주었으며 그들을 안전하게 하느님께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파코미우스 공동체 안에서 그토록 강조되었던 성경에 대한 중요성이 그 이후에 나타난 동방과 서방의 여러 수도 규칙서들 안에서는 그만큼 강조되고 있지 않다.카파도키아의 3대 교부 중의 한 분인 바실리우스(St. Basilius, 329~379) 성인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 성경이 여러 가지 조언들과 축복받는 삶의 길(에페 2,4 참조)을 제시하기 때문에 성경 독서를 하느님을 발견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다. 그는 누구든지 성경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도움을 받으려면, 그 안에 철저히 머물며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동방의 풍부한 수도 전통을 서방에 알려준 요한 카시아누스(Joannes Cassianus, 365~433)에게도 성경은 매우 중요하였다. 저서 「담화집(The Conferences)」 제14권에서 카시아누스는 영적 지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지혜는 말할 것도 없이 모두 하느님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생활 한가운데에 무엇보다도 성경이 놓여져야 함을 강조하였다.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us, 354~430) 성인은 암브로시우스 성인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아 마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고향인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로 가서 그의 친구 알리피우스와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후에 히포의 주교로 피선되었다. 그는 성경 독서가 기도를 준비시켜 주며, 또한 그것은 이미 기도 행위 자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성경 독서 중에 하느님은 이미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며 동시에 우리는 기도 안에서 그분께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성경 독서를 위해 따로 떼어진 여유로운 시간(seposita tempora)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이와 같이 수도자들에게 중요시되었던 성경 독서는 이제 아우구스티누스나 펠라기우스(Pelagius, 350~425)에 의해서 구체적인 시간과 함께 수도원 일과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특히 펠라기우스는 데메트리아스(Demetrias)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되새겨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을, 다시 말해 하루의 제3시(오전 9시 정도)가 될 때까지 영혼은 매일 수행해야 할 영적 싸움으로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 후에 여러 수도원에서는 적어도 그 날의 중간이나 끝에 최소한 2~3시간을 성경 독서를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도와 일과 성경 독서를 큰 축으로 하는 수도자들의 일과표가 형성되게 되었다.허성준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평화신문2019.10.29

무너진 ‘하느님의 집’ 복구는 인간 정체성 회복에서 시작[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4. 하느님의 구원경륜① - 인간의 정체성 회복 인간이 하느님의 집을 복구하가 위해서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 ‘천지창조’ 중),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지난 연재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무너진 집에 대한 복구는 우선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으로서 영과 육을 잘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의 정체성이 회복돼야 하느님의 집이 복구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사회 공동체가 상생의 집이 될 수 있도록 돌보는 사명과 지구환경이 훼손되지 않고 모든 생명체가 그 안에서 건강하게 번성할 수 있는 집(생태계)이 되도록 돌보는 사명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정체성은 한 인격체로 살아가게 하는 핵심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 가지 차원의 집에서 가장 중요하고 토대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집’으로서 인간생태이다. 따라서 무너진 집에 대한 복구는 인간생태의 복구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생태를 어떻게 복구해 나갈 것인가? 이에 대한 해법은 인간의 정체성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나는 누구인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깊이 성찰하지 않고 살아지는 대로 살아간다. 요컨대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인해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인간의 참된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거나 정체성 혼란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한 인격체로서 바로 설 수 없다. 우리에게 참된 정체성이 형성되는 것은 생명체의 최소단위인 세포에서의 핵이 기능하는 바와 같이 인간을 한 인격체로 살아가게 하는 핵심이다. 참다운 정체성 형성의 중요성을 생각해보게 하는 짧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아기 호랑이가 엄마 호랑이에게 물었다. “엄마, 나 호랑이 맞아?” 아기 호랑이의 물음에 엄마 호랑이가 “너는 호랑이가 맞다”라고 대답하지만 아기 호랑이는 확신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 정체성을 깨닫기 위해 길을 나섰다. 길을 떠나 코끼리 아저씨, 염소 할아버지, 곰 아주머니 등을 만나며, 자기가 호랑이가 맞느냐고 묻는다.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자, 비로소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에 이르렀고, 기뻐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가까이 도착했을 때, 저 멀리서 엄마 호랑이가 보였다. 아기 호랑이는 엄마 호랑이에게 달려가면서 “엄마, 드디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어요!” 하고 소리치며 엄마 호랑이 품에 달려와 안겼다. 그때 엄마 호랑이가 아기 호랑이를 반기며 “장하다, 내 강아지!” 하고 아기 호랑이 엉덩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말에 아기 호랑이는 그만 다시 자기 정체성 혼란에 빠졌다. ‘아이고, 내가 호랑이가 아니라 강아지란 말인가!’라고 되뇌며 절망에 빠져 가출했다는 우습고도 슬픈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나의 정체성이란 타인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이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우리 자신도 아직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거나, 혹은 상황에 따라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때, 부초처럼 떠다니는 인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좌표를 확실히 파악하는 것이 내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며, 앞으로 살아갈 삶의 방향성을 결정짓고 무의미한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 요즘 온 세계 인류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라는 감염체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 자각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 안에 ‘세포의 핵’과 같이 우리 존재의 근원과 구심점에 대한 확고한 자각 없이는, 우리는 핵 없는 바이러스처럼 생명체가 못되고 이리저리 숙주를 찾아 떠돌면서 한 인격체로서 살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기생하며 해를 끼치며 살아가게 된다.하느님과 관계 안에서 참된 정체성 드러나평소 생명살이를 하는 모든 존재의 이름이 그 존재와 어울리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를 통해서 우리가 꽃을 “꽃”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은 “꽃”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이 시가 암시하는 바를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겠다. “하느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하느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하느님께로 와서 꽃이 되었다.”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심으로써 비로소 우주 만물에서 참으로 색다른 생명체인 인간 존재로서의 나의 참다운 정체성이 드러난다. 이때 우리는 무한한 자존감으로 충만해진다. 여기에서 자존감은 무엇을 소유하거나 어떤 지위가 있기 때문에 즉 자기 욕구가 채워져서 얻어지는 자존감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놀라움에서 비롯된 자존감이요, 무상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자존감이다. 이러한 내적 자존감으로 충만해져야 외적인 것에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구나 타인의 인정에 매달리는 애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삶 속에서 진실한 모습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견뎌내며 살아가야 할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본인에게 부여된 사명과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참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토대이며 성경에서 말하듯이 바위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소년 예수님께서도 열두 살 때, 성전에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깨달았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cpbc2021.12.15

다른 사람 돌보느라 자신을 잃어버린 이들을 위한 책상호의존 관계 회복하는 법 제시
서로 협력 관계로 나아가는 데 도움 나는 내 인생을 살거다,너도 네 인생을 살아라문종원 신부 지음 / 기쁜소식인간은 부모와 자식, 배우자, 친구, 연인, 동료 등 수많은 관계 안에서 얽히고설킨 채 상호의존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상호의존 관계에서 벗어나야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수십 년간 관계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온 문종원(서울대교구 사목상담 담당) 신부가 이러한 상호의존 관계에서 회복하는 법을 다룬 책을 펴냈다. 상호의존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느라 자신을 잃어버리는 역기능 관계다. 상호의존 관계에 빠져들면 자신의 필요와 느낌을 무시하고, 상대방 문제에 끼어들어 걱정하며 해결해주려고 한다. 즉,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 사람은 상대방이 원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투자한다. 문 신부는 특히 상호의존과 중독에 집중한다. 흔히 중독자를 도와주는 사람이 중독을 더 깊게 한다. 중독자와의 관계에 중독되어 가는 것이다. 가령, 배우자가 사는 게 힘들어서 음주를 하는 것이라며 배우자의 음주를 정당화하거나 약물 의존이 심한 연인을 대신해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약을 대신 받아오는 것이다. 모든 관계는 서로 주고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처럼 상호의존적인 돌봄은 균형을 깨지게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게 되면, 주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고 만다. 그렇다고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상호의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경계선을 설정하고, 자기 자신을 돌보라고 조언한다. 서로 건강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 적절한 시간 동안 분리되어 건강한 거리를 지키는 것이다. 문 신부는 상호의존으로부터 진정한 회복은 어떻게 가능한지, 성경에서 본 상호의존, 상호의존을 극복하고 협력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과 방법, 뿌리 치료에 대한 전략 등을 다뤘다.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우리가 인격과 영적인 삶을 통합시킬 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더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서 “삶을 힘들어하는 독자들이 상호의존 관계에서 벗어나 건강한 관계를 맺으며 행복한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기대했다. 이해인 수녀 시인은 추천사에서 “행복한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자기인식과 끝없는 성찰과 쇄신이 필요함을 다시 알아들음으로써, 성장에 방해가 되는 여러 종류의 중독들을 치유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고 썼다.문 신부는 미국 로욜라대학에서 사목학, 사목상담, 영적 지도를 공부했으며, 현재 교구 사목상담 담당 사제로 우울증ㆍ수치심ㆍ죄책감ㆍ분노ㆍ좌절 등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지혜 기자 평화신문2021.07.07

“존경심을 갖고 다른 이를 바라보는 덕을 수양하라”[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7.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과 존재적 앎 프란치스코 성인은 먼저 존경심을 갖고 다른 이를 바라보는 덕을 수양하라고 수도 형제들에게 가르쳤다. 사진은 이스라엘 웨스트뱅크 지역에서 한 작은형제회 수도자가 라마단 기간 동안 금식을 하는 무슬림 팔레스타인들에게 음식 섭취가 허용된 밤 시간에 빵과 물을 나눠주고 있다. 【CNS】 프란치스코는 ‘주님’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종이쪽지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소중한 곳에 모셨다고 한다. 그 안에 주님의 현존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그런 자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인간의 말이 쓰인 글을 발견하면 길에서나 집에서나 땅바닥에서나 대단히 공손한 태도로 그것을 집어서, 거룩한 장소나 합당한 곳에 가져다 놓곤 하였다. 주님의 이름이나 성경 말씀과 관련된 글들이 그러한 곳에 적혀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어느 날, 한 형제가 그에게 질문하기를, 주님의 이름이 비치지도 않은 글이나 이단자들의 글까지도 그렇게 지성으로 줍느냐고 하였다. 그가 대답하였다. ‘아들이여, 주 하느님의 지극히 영광스러우신 이름을 쓰는 데 사용되는 글자들이 그중에 같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선(善)이 들어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방인들의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것도 아니며, 오로지 모든 선이 깃들어 있는 오로지 하느님의 것입니다.’”프란치스코의 이런 존경심의 자세는 본래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해주도록 창조된 존재 모두에게 향해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최우선으로 필요한 것은 물리적인 함께함보다 먼저 ‘존경심을 갖고 다른 이(다른 모든 피조물)를 바라보는 덕’을 수양해 가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 곧 현재의 내 자리에서 주님과의 관계성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또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의식해 보아야 한다. 나는 내가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만나는 이들을,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 주님께서 그들에 대해 지니신 사랑과 존경심을 가지고 각 사람을 존경하고 있는가? 내가 존경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인간 인격에 대한 존중은 어떤 차별도 없는 것이다. 누가 인격들인가? 내가 함께 일하기를 원하는데 누구도 함께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 그런 인격들이 있는가? 우리는 이 사람들을 주님께로 데려가서 그분의 사랑과 인내, 겸손, 존경심 등으로 치유하기 위해 우리 각자의 느낌에 어떻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우리 서로를 통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데, 그 문의 문고리는 문 안쪽에 달려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내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 놓는 그런 개방성을 지니고 있는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어서 들어오십시오!”라고 하며 기쁘게 맞아들이는 행위이다. 우리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 놓는다는 것은 무언가 신성한 것, 곧 하느님의 속성이며, 또한 다른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마음의 자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의 거룩함과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존중하는 일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상호 교환성을 지니고 있다.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에게 선생님도 되고 학생도 되는 것이다.다시 반복하여 말하자면 이렇듯이 덕을 지닌다는 것은 그 덕의 원천이시며 그 덕을 당신의 모상과 유사함으로 창조해 주신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이렇게 실질적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 혹은 수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존재적인 앎, 혹은 온몸으로 아는 지식인 것이다.사람들 대부분은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자기 삶의 방식이 바뀌기를 바란다. 하지만 생각이나 사고만으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일 수 있다. 오히려 실질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긍정의 덕을 행할 때 우리의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또한 이것이 바로 우리 존재를 변화시켜 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참여적 앎과 존재적 앎이 의미하는 바이다.그러므로 마음에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수양은 덕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고, 결국은 이런 수양은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는 일이며, 결국 우리 삶과 존재가 성령의 일치하시는 힘으로 인해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변모하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통 전체의 핵심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계속해서 해주시는 초대가 아닐까 한다.언젠가 어떤 신부님이 필자에게 이런 기도를 바칠 것을 권한 적이 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 저를 바라보아주시는 그 눈으로 저도 저를 바라보게 해주시고 온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소서!” 이 기도의 주된 목적은 ‘의식’에 있다. 바라본다는 것은 사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생각할 때 의식함 없이 바라본다면 그것은 그저 ‘생각하는 것’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마음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의식하며 바라본다면 그것은 정확히 ‘행하는 것’, ‘수양하는 것’이 된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cpbc2021.06.23

프란치스코 교황의 ‘통합생태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3.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2-2) 하느님은 인간에게 창조질서에 따라 하느님의 경륜을 실천하는 사명을 받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사명을 외면함으로써 집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루카스 그라나흐 작 ‘에덴 동산’. 출처=위키디피아 지난 연재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오늘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향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창한 ‘통합생태론’을 깊이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의미론적으로 ‘세 가지 차원의 집’에 대한 창조로 파악할 수 있으며, 또한 이 집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생태’, 인간 공동체의 ‘사회생태’ 그리고 모든 생명체를 포괄하는 ‘환경생태’, 이 세 가지 차원의 집을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임시로 분양받아 살아가고 있다.임시 분양받아 살아가는 세가지 차원의 집이를 전제로, 인간은 오늘날의 인간과 공동체, 생태계 위기를 바라보아야 하며 이에 관한 문제 해결을 위해 하느님에게 부여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각기 자신의 목적과 가치에 부합하도록 그리고 잘 유지되고 고양되도록 세 가지 차원의 집들을 잘 돌보라는 사명을 내리셨다. 이와 관련해 창세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여기서 ‘에덴을 잘 돌보라’는 뜻은 하느님의 집으로써 ‘인간 생태’, 공동체 상생의 집으로써 ‘사회생태’는 물론, 이를 떠받치는 토대로써 모든 생명체의 공동의 집인 ‘환경생태’까지도 인간이 총괄적으로 책임지고 관리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 내리신 돌봄의 사명은 각각의 집의 목적에 맞게 그리고 그것을 통합적으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창조 목적에 맞게 유지, 보호되도록 힘쓰라고 주문하신 것이다. 또한 집을 잘 돌보라는 사명은 ‘Economy(경제)’라는 용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래 Economy(경제)라는 말의 어원은 희랍어 Oikos (Eco) + Nomos(nomy)의 합성어로 ‘원리’나 ‘질서’에 따라 ‘집을 돌본다’는 뜻이다. 즉 서양어 경제(Economy)란 용어에는 생태론(Ecology)이란 용어가 그렇듯이, 이미 ‘집’이라는 개념 자체가 포함돼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Economy)와 생태론(Ecology)이란 용어가 서로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돌봄의 사명은 어원적으로 집을 돌보는 것, 곧 ‘경제’(Economy)라고 할 수 있다. 단, 집을 돌보라는 사명이 인간의 자의적 판단이나 탐욕에 의해 돌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신 집들의 질서’인 통합생태론(Integral Ecology)에 따라 돌보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부여하신 돌봄의 사명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돌본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경제(경륜)’(경제(Economy)라는 용어를 교회에서는 주로 ‘경륜’으로 번역한다)를 실천하는 것이다.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돌봄의 사명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은 부여받은 사명, 즉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하느님의 경륜(경제)’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다. 창세기 3-4장에서 인간은 자기 범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부여하신 돌봄의 사명을 외면함으로써 집들이 무너지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라고 물으실 때 아담은 두려워서 숨었다. 또한,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라고 물었을 때, 카인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하느님께 반발한다. 이때부터 이미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질서 구상(Ecology: 생태론)에 따른 하느님 집의 돌봄이라는 ‘청지기’의 사명을 어기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생태계의 관계’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음에도 인간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계약을 통해(창세 9,9) 훼손된 관계와 붕괴한 집들을 복구(구원)하기 위해 먼저 손을 내미셨다. 이러한 하느님의 업적을 ‘하느님의 구원 경륜(경제, Economy of Salvation)’이라 일컫는다.성경의 신약과 구약은 ‘하느님의 구원경륜’의 역사, 즉 하느님께서 무너진 집을 바로 일으켜 세우시려는 복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무너진 집을 복구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십계명’을 주시고 예언자들을 파견하시고 마침내 당신의 외아들마저 이 세상에 내어 놓으셨다.(요한 3,16) 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경륜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은 나머지 “하느님의 집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본래의 사명을 또다시 망각하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후기 산업시대를 맞아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의 위기, 사회 공동체의 위기, 지구환경의 위기의 가속화에 봉착하였다.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통합생태론’에 기초를 두고,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돌봄의 사명, 즉 ‘하느님의 경제(경륜)’을 깨닫고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인간 스스로 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오만한 생각으로, 같은 인간에게 하느님 창조질서에 어긋난 행위를 자행하거나, 물질문명에 함몰된 나머지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무한 경쟁체제만을 추구하거나, 생태계를 무분별하게 개발하려는 시도 등은 모두 하느님의 경륜(경제)에 어긋난다고 하겠다. 또한 ‘하느님의 구원 경륜(경제)’에 힘입어 온갖 죄로 물든 우리 ‘인간성’이 먼저 치유되고 복구되어야 한다.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cpbc2021.12.08
![[떠나자! 파울리타 수녀의 유익한 교리여행] (7) 여행지 : 승천&천사](//cpbc.co.kr/CMS/newspaper/2021/05/rc/801980_1.3_titleImage_1.jpg)
[떠나자! 파울리타 수녀의 유익한 교리여행] (7) 여행지 : 승천&천사마리 파울리타 수녀(노틀담 수녀회 교리교재 연구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대해 거듭 말씀하시고, 그들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승천(昇天)’이라는 말은 지상에서 하늘로 오름을 말하지요. 예수님은 지상 과업을 마치시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부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기쁨에 차 있었던 제자들은 다시 예수님과 헤어지는 슬픔을 경험하지만, 이 이별은 다른 차원의 새로운 만남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기에, 이제 우리는 이 만남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늘 하늘로 향하도록 하고, 천상병(시몬) 시인이 노래한 ‘귀천(歸天)’을 읊어야겠지요?“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퀴즈여행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1.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며칠 후에 승천하셨나?2. 예수님께서는 어느 산에서 승천하셨나? 3.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무엇에 대해 예고하셨나? 4. 예수님은 승천하시어 성부 하느님의 어느 편에 앉으셨나? 5. 주님 승천 대축일은 날짜로 목요일인데, 우리나라는 부활 제 몇 주일에 지내는가? 6. 천상의 존재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인간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자는? 7. 성경에 나오는 대천사는 미카엘, 라파엘, 그리고 누구인가? 정답 1 □일 2 □□□ 산 3 □림 4 □□편 5 부활 제□주일 6 □□7 □□□엘가이드 설명1. 부활 후 40일 후의 승천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이미 영광에 도달하셨지만, 지상에 남아있는 제자들과 믿는 이들에게 전과 같이 변함없이 체험할 수 있는 분으로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셨습니다.(사도 1,3) 성경에 나오는 40일이라는 숫자는 수리상의 의미보다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때 40주야 비를 내리셨고(창세 7,12),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간 재를 지냈지요(탈출 24,18). 40일은 이런 정화와 준비의 기간을 말하고, 40(4×10)은 충만하고 완전한 수를 뜻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지상에서 제자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올리브 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올리브 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사도 1,12)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보다 90m 정도 높아서 예루살렘에서 보면 큰 언덕이나 동산처럼 보입니다. 올리브 산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동산이 예수님께서 수난 전 밤새 기도하셨던 겟세마니 동산이라고 합니다.(마태 26,36; 마르14,32; 루카 22,39) 겟세마니(히브리어)의 뜻은 ‘기름을 짜는 기구’이기에, 이곳에 올리브기름을 짜는 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요. 3. 예수님 재림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동안 사도들이 유심히 하늘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사도 1,6-11) 이 말씀은 세상 마지막 날의 예수님 재림을 의미합니다. 승천은 재림의 시작이며, 육신으로 승천하셨던 예수님이 육신으로 다시 오심을 예고합니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예수님을 깨어 기다리며, ‘마라나타’(오십시오, 주 예수님, 묵시 22,20)라고 늘 기도할 수 있어야 하지요. 4. 성부의 영광에 들어가심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느님의 천상 영역으로 결정적으로 들어감을 나타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십니다.(마르 16,19; 사도 2,33) 성부 오른편이라는 말은 천주성의 영광과 영예를 말하며, 성자로서 본래 누리던 삼위일체의 영광을 다시 입음을 말합니다.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은 메시아 나라의 시작, 곧 다니엘 예언서가 말하는 세상 마지막 날의 하느님의 영원한 통치의 예언이 성취됨을 의미합니다.(다니 7,14) 참조)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 부활이 지금 중간 상태, 곧 새로운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며, 부활하신 분의 현양(성령 강림)을 위한 하나의 준비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승천 교리: 가톨릭 「교회 교리서 659-667」 참조) 5. 주님 승천 대축일주님 승천 대축일은 주님 부활 대축일 후 40일째 되는 부활 제6주간 목요일에 지내지만, 이날이 미사 참여 의무일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는 부활 제7주일로 옮겨 지냅니다.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면서 주님의 승천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승천도 기념하지요.(에페 2,6)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승천 감사송) 6. 천상의 존재 많은 사람이 천사를 허구적이며 동화적인 비실존적 존재로 여기나, 천사는 하느님께서 실제로 창조한 영적인 존재입니다. 천사(天使)는 그 말 뜻 ‘하느님의 심부름꾼’처럼, 천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토빗 12,12) 하늘과 땅을 연결해 줍니다. 천사는 때로는 하느님 대신 발현하며(창세 16,10; 탈출 3,2; 마르 16,5), 사람을 인도하고 지키거나(창세 24,7; 시편 91,11) 사람을 징벌하지요(2사무 24,16; 시편 78,49).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날 때부터 ‘수호천사’(守護天使)를 주셨기에, 교회는 수호천사 기념일(10월 2일)을 제정하여 천사 공경을 장려하고 있습니다.7. 3대 천사성경에 나오는 3대 대천사(大天使)는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입니다. ‘미카엘’(의미: 누가 하느님과 같으냐?) 대천사는 신구약에 모두 등장하는데(다니 10,13; 묵시 12,7), 천상군대의 우두머리로 병사들의 수호자로 공경하지요. ‘라파엘’(의미: 하느님이 낫게 하셨다) 대천사는 토빗기 전반에 나오는데, 여행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합니다. ‘가브리엘’(의미: 하느님의 영웅) 대천사는 즈카르야와 성모 마리아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기에(루카 1,19.26), 우편부의 수호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답니다. 3대 대천사의 축일은 9월 29일이지요.여행옵션: 예수님 승천 기념 성당(이스라엘)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 정상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추정한 자리에, 예수님 승천 기념 경당(이슬람교 소유)이 세워져 있다. 380년경 이곳에 소성당이 봉헌되었으나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후, 십자군 전쟁 당시 이곳에 지붕이 없는 팔각형의 성당을 다시 세웠다. 그런데 무슬림인 사레센인들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이 성당의 천장에 둥근 지붕을 씌워 모스크로 개조하였다고 한다. 참조) 예루살렘은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3대 종교의 성지이다. 유다교에게는 솔로몬이 세운 성전이 있고, 그리스도교에게는 예수님이 수난에서 부활, 승천하신 곳이고, 이슬람교에게는 창시자 모하메드가 승천한 곳이기 때문이다.여행 기념품예수님의 승천은 우리는 지상의 순례자이며 우리의 고향은 하늘나라이고, 우리의 삶은 하늘나라를 향하여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마리 파울리타 수녀(노틀담 수녀회 교리교재 연구소) cpbc2021.05.12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0)교부들과 렉시오 디비나](//cpbc.co.kr/CMS/newspaper/2019/10/rc/764532_1.0_titleImage_1.jpg)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0)교부들과 렉시오 디비나초기 교부들, 한결같이 성경 강조 허성준 신부 교회의 많은 교부가 기도와 하느님 체험을 위한 탁월한 길로서 성경 독서의 방법을 실천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 백성 가운데 급속히 확산되었다. 특별히 2~3세기에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에 대한 독특한 우의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성경 본문이 제시하는 것 이외의 다른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찾는 것으로, 후대의 성경 연구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항구하고 겸손하게 읽고 맛들이는 전통을 발전시켰는데,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이다. 오리게네스는 ‘로고스(Logos)’가 성경을 통해 언제나 역사 안에 현존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의 영성생활을 돕는 어떤 부수적인 도구가 아니라 근본적인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독서나 묵상은 모든 지혜의 기초이며, 이것은 단순히 신심 행위 차원을 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그는 보았다. 성경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강조하였던 오리게네스는 성경 독서의 수행을 설명하면서 ‘프로세케인(proschein)’이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이 동사는 ‘자기 마음을 돌리다’, ‘주의를 집중하다’, ‘헌신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성경 독서가 다른 진지한 금욕 생활의 기초라고 보았으며 특별히 여기에는 주의 집중, 항구함, 기도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성경에 대한 독서와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씩 세상사의 걱정거리로부터 멀어지게 된다고 그는 보았다. 콘스탄티노풀의 주교였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St. Joannes Chrysostomus, 347~407)는 성경을 하느님이 쓰신 편지라고 보았다. 성경은 구원을 위한 조건이기에 성경으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그는 말하였다. 한편, 서방 라틴 교회에서도 성경 독서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성 치프리아누스(St. Cyprianus, 200~258)는 성경 독서를 ‘주님의 독서’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또한, 성경학자였던 성 히에로니무스(St. Hieronymus, 347~420)는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성경은 천상적인 음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독서 중에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성경에 대한 사랑이 수도자들의 유일한 열정이 되어야 함을 늘 강조하면서, 렉시오 디비나를 자기 정화의 수단으로 제시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St. Ambrosius, 339~397) 주교 역시, 성경은 그리스도의 소리로서 모든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또한 우리에게 교훈적인 가르침을 주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성경을 먹고 마셔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교부들은 한결같이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어찌 보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의 분위기 안에서 호흡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특히 교부들에게 있어 성경은 ‘생명의 책’이었으며, 그들을 하느님과의 친교에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특별히 교부들은 성경 독서를 할 때, 개인적인 관점이 아니라 더 넓은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음미하며 직관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이렇게 접근했던 교부들의 시대 이후에, 불행하게도 성경에 대한 독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으로부터 차츰 멀어지게 되었다. 반면에 수도승 전통 안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여 더욱더 훌륭히 꽃피우게 되었다.허성준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평화신문2019.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