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으로 '교횡쇄신' 추구가톨릭교회 최고 목자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대희년인 2000년 3월 12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지난 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참회 예식에서 성경을 들고 있다. 교황은 이날 특별 미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은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1년 10월 21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새로 임명된 추기경으로부터 입맞춤을 받고 있다. 3. 주교 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인 친교의 교회상을 드러내는 훌륭한 수단이다. 사진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1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주교들과 함께 제10차 주교시노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지난 26년간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가졌던 가장 큰 소명의식은 무엇이었을까. 교황이 1994년에 반포한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2000년의 준비는 본인의 교황직에 대한 해석학적 열쇠"(23항)라고 언급한 것처럼 교황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는 다름아닌 '대희년'이다. 아울러 그의 사상과 활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교회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실제로 그는 교황 피선 이튿날인 1978년10월17일 추기경단 앞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실현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처럼 교황 재위 27년은 대희년을 화두로 삼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이 교회와 신자들 삶에 구현되도록 하는 데 헌신하는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1979년에 반포한 첫번째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부터 2000년 대희년과 제삼천년기에 대한 열망을 표시해온 교황은 특별히 교서 「제삼천년기」를 통해 서기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할 것을 전 세계 모든 교회에 권고했다. 교황이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한 것은 지나온 한 천년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기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2000년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하느님 백성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희년 정신을 다시 활짝 피우겠다는 뜻에서였다. 제삼천년기를 맞는 교황의 대응은 1980년대 이래 '새로운 열의, 새로운 방법, 새로운 표현'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한 '새 복음화'가르침에 집약돼 있다. 교황은 1988년에 발표한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 시대적 도전에 직면한 교회는 '새 복음화'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고 천명하고, 교회공동체 구조 개선을 통한 그리스도화를 목표로 한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교황은 특별히 '새 복음화'작업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이후 개최된 전체 교회, 대륙, 지역, 국가, 교구 시노드들이 바로 일련의 새 복음화 과정이라고 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시노드의 공식 결정들을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이 '새 복음화'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 작업이라는 것이다. 교황은 「제삼천년기」에서 "새로운 천년기를 위한 최상의 준비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가르침을 각 개인과 온 교회 생활에 충실하게 적용하려는 새로운 투신이며, 대희년을 위한 직접적 준비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함께 실제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또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가 2000년 희년을 위한 더 직접적 준비를 시작했던 하나의 섭리적 사건이었으며,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의 신비에 초점을 맞춘 동시에 세계를 향한 열린 공의회"라면서 공의회의 의미와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처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충실한 사도임을 자청했다. '새 복음화'를 위한 교황의 노력은 먼저 교회와 신자들이 과거에 범했던 비복음적 과오들을 과감히 인정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한 데서 출발한다. 교황은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이 갈릴레오(1564∼1642년)에 대한 중세교회의 재판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한 데 이어 2000년 3월 '용서의 날' 참회예식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다인 학살에 저항하지 못한 점, 십자군전쟁, 13세기 종교재판 등 교회가 지난 역사 속에서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다. 교황은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나 자신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내가 변할 때 세상이 바뀐다"며 교회를 정화하고 면모를 일신하려는 결연한 쇄신의지를 드러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막을 내린 이래 지금까지 개최된 주교대의원회의 대부분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재임시에 열린 것은 교황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구현하는 데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교황은 1980년 네델란드 주교대의원회의 특별회의와 '가정'을 주제로 한 제5차 주교대의원회의 정기총회를 시작으로 6차례의 주교대의원회의 정기총회와 8차례의 대륙(또는 지역)별 특별회의를 개최했다. 이는 모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인 '친교의 교회'를 실현하고자 교황과 주교단이 모여 보편교회와 지역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대안을 모색한 자리였다. 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3년에 반포한 「교회법전」과 1992년에 공표한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가르침이 결정적으로 반영된 공의회 정신의 진수로 꼽힌다. 교황이 '새 복음화'를 통해 달성하고자 한 목표는 개인과 사회 그리고 세계를 그리스도의 힘으로 질적 변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인 '사랑의 문화와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각종 문헌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가르침에 입각해 현대세계의 물질주의를 극복하고 '사랑의 문화' 또는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관성있게 꾸준히 주장했다. 즉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현대 문명의 위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평화와 연대, 자유와 정의 같은 보편 가치들에 기초한 사랑의 문화ㆍ문명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와 같이 제삼천년기를 맞는 현대사회가 제기하는 도전을 직시하고, 교회가 복음 진리를 토대로 내적 변화와 쇄신을 도모함으로써 자기 복음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교회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범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고 '하느님 나라'로서 사랑의 문화를 건설하는 데 진실된 자세로 투신할 것을 촉구했다. 제삼천년기를 늘 의식하고 살았던 교황의 이같은 활동에 면면히 흐르는 것은 곧 교회의 내적 쇄신과 복음 선교를 추구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이었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cpbc2005.04.06

인간사랑 지극한 '그리스도의 대리자'김수환 추기경이 만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1년 3월23일 로마 한인신학원 축복식 참석차 신학원을 방문, 차에서 내려 김수환 추기경의 영접을 받고 있다. 2. 김수환 추기경이 3일 명동성당 지하소성당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향을 사르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추모하고 있다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항상 인간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인간에게 관심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인간과 세계 평화를 위한 모든 정답을 그리스도로부터 구했으며 그분의 모든 가르침과 생각, 말씀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한 '진정한 그리스도의 대리자'였습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재위 전반기인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에 걸친 한국 방문 때에 함께했고, 바오로 2세의 한국교회 사랑을 가장 가까이 지켜본 김 추기경은 교황 선종에 대해 남다른 아쉬움을 피력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김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2세는 '온 세상을 하나로 묶는 엄청난 지도력'으로 점점 세속화되고 가치관이 무너져 개인이나 국가가 확실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와 이 세계를 이끌어 주었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초 교황이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으로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시노드)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문헌 준비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시아 대표로 참석한 나는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 옆에 앉게 되었는데, 그분의 명석하고 뛰어난 능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토론에 참여하면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눈으로는 책을 읽고 귀로는 토론자들 이야기를 듣고 있었죠. 토론 중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당신 의견도 발표하곤 했습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을 보고 참 놀랐습니다." 첫 만남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김 추기경은 1978년 10월16일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일어난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피선되면 참석한 추기경들이 교황과 인사를 합니다. 그때 당시 너무나 짧은 재위 기간을 기록한 전임 요한 바오로 1세를 생각해 보니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황님께 인사를 하며 '교황님 건강을 위해서 수영장이 하나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황님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좋아하시면서도, 손으로 당신 뒤를 따르는 비서들을 가리키며 귓속말로 '그런데 저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며 미소를 지어보이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일화가 그냥 일화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2년 후 교황님이 여름 집무실인 카스텔간돌포에 수영장을 마련하셨으니까요.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이 일자 교황님은 '수영장을 만드는 비용이 교황이 서거해서 콘클라베를 열고 취임식을 하는 비용보다는 적게들 것'이라며 특유의 재치로 받아넘기셨습니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재위 1978년 8월26~9월28일)와 그 선대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를 모두 만난 김 추기경은 선임 교황들에 대해 "바오로 6세는 나를 주교품에 올려주시고 최연소 추기경에 서임해 주신 분으로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표현하면서, "요한 바오로 1세는 재위 기간이 워낙 짧아 함께 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김 추기경은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주교로, 또 추기경으로 서임해 주신 것은 바오로 6세 교황님이 한국 교회에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면서 "바오로 6세가 아버지 같은 분이라면 요한 바오로 2세는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아서인지 형님 같은 분"이라고 표현했다. 김 추기경은 그러면서 무엇보다 활발한 해외사목 방문을 한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교회와도 남다른 인연이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2세 취임식에서 한국을 방문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으며, 이는 한국교회 200주년 및 103위 시성식(1984년)과 서울 세계성체대회(1989년) 한국방문으로 결실을 거뒀다. "교황님께서 1984년 처음 한국땅을 밟을셨을 때 제게 '교황 피선 후 나를 가장 먼저 초청해 준 사람이 당신이야'하면서 제 방문 요청을 기억하고 계셨다"고 김 추기경은 회상했다. 김 추기경은 또 교황이 취임식에서 추기경과 인사를 나눌 때 북한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피력했다고 밝혔다. 교황 선출 당시 공산권 국가였던 폴란드 출신인 교황은 한국이 분단국가인데다가 북한이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갖은 이유로 고통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위원회 주교회의 의장으로, 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준비위원장으로 두번의 방한기간 중 가장 측근에서 교황과 함께한 김 추기경은 "교황님이 한국을 방문해 주셨다는 것만으로 너무 기쁜 일이었기에 어려운 점도 없었고 힘든 줄도 몰랐다"면서 "다만 교황님이 더 오래 머물지 못하신 것이 아쉬웠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교황의 한국 방문 당시 김 추기경이 감동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1984년 5월 교황님이 방한하셨을 때 광주, 대구 등지를 가려고 특별기를 함께 탄 적이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교황님께서 측근들과 몇 마디 나누시고는 곧장 성무일도 기도를 바치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뒷자리 수행 비서들도 각자 성무일도를 바쳤습니다. 비행기가 성당이 된 듯했습니다. 교황님이 단순히 방문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순례를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84년 한국 방문 당시 103위 시성식 미사를 한국어로 집전, 김추기경과 전 한국 신자들은 물론 비신자들까지도 감동의 물결로 몰아넣은 바 있다. 당시 교황은 한국 방문을 대비해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장 주교) 도움을 받아 한국어를 익혔는데, 교황의 모국어인 폴란드어 알파벳으로 한국말 발음을 적어 배웠다고 한다. 이후에도 교황은 한국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찬미 예수' '감사합니다' 등으로 인사하곤 했다. 지난 1999년 인도 뉴델리 아시아 주교 대의원회 후속문헌 발표 때에, 그리고 2001년 3월 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 축복식에서, 그리고 2002년 재위 25주년 행사 때에 교황을 알현한 김 추기경은 "교황직에 막 즉위했을 때에는 박진감 넘치는 지도력을 가진 분이셨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너그러워지는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은일 기자 anniejo@pbc.co.krcpbc2005.04.06

시골 마을 둘쨰아들에서 '인류의 스승'으로탄생에서 선종까지1. 유아시절 어머니 에밀리아와 함께 2. 유아시절3. 1920년대 중반, 아버지와 함께 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78년 10월 22일 성 베드로대광장에서 교황 취임식에서 주교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이 취임식에서 교황은 가톨릭신자들과 전세계를 향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남서쪽으로 50㎞ 떨어진 작은 마을 바도비체에서 1920년 5월18일 오스트리아 육군 행정관 카롤 보이티야 시니어(1879~1941)와 리투아니아계 살레지아인 에밀리아 카조로브스카(1983~1929)는 둘째 아들을 얻었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야 (Karol Josef Wojtyla). 그가 바로 나중에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 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보이티야는 여덞살 때인 1929년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4년 뒤에는 형 에드몬드마저 성홍열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보이티야는 활달한 소년으로 성장한다. 11살에 주립 중고등학교에 입학한 보이티야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친구들과 축구하기를 좋아했고, 시와 연극을 사랑한 문학소년이었다. 1938년 크라코프 야겔로니카대 철학과로 진학한 보이티야는 당시 지하조직을 이끌었던 극단 '살아있는 말씀'에 참여했고, 아마추어 연출가로도 활동하면서 학생극단 '스튜디오 39'를 창단해 직접 극본을 쓰고 배우로 활동했다. 당시 쓴 극본 '보석가게' '우리 하느님의 형제들'은 추후 영화 시나리오로 각색되기도 했다. 사제품을 앞둔 1946년에는 첫 번째 시집인 「숨은 하느님의 노래」를 내놓았으며, 50년부터 66년까지 쓴 시를 묶은 「부활 9일기도와 시들」을 출판하기도 했다. 물론 교황직에 올라서도 이런 예술적 문학적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시집 및 책을 출간해왔다. 지난 2월에는 마지막으로 자서전적 책인 「기억과 정체성: 천년간 대화」를 발간하는 등 열정을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카롤 보이티야에게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1939년 9월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대학을 강제로 폐쇄하자 그는 곧 지하대학 폴란드 어학부에 등록해 지하조직에 가담, 유다인들을 도왔다. 지하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1940년 겨울 자크루벡에서 채석장 채석공 및 발파수로, 또 솔웨이 화학공장 인부로 일하면서 고된 육체노동도 경험한다. 전쟁과 더불어 1941년 그에게 또다른 불행이 찾아왔다. 아버지마저 선종했다. 그 충격 속에서 보이티야는 기도를 통해 사제 성소를 깨닫고, 1942년 크라코프대교구장을 찾아가 성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45년 1월 폴란드가 해방되고 보이티야는 야겔로니카대 신학부에 등록, 이듬해인 1946년 11월1일 당시 크라코프교구장 사피에하 추기경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추기경 권유로 보이티야 신부는 로마 안젤리쿰대로 유학생활을 한 뒤 1948년 5월 귀국해 작은 시골 마을의 본당신부로 사목하면서 크라코프 신학교에서 사회윤리학, 신학 등을 가르쳤다. 보이티야 신부는 본당사목 중에도 계속 크라코프대와 루블린대 교수로 활동하면서 120여종의 논문 및 저서를 집필하는 등 학문 활동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보이티야 신부는 1958년 7월4일 교황 비오 12세(1939~1958)로부터 옴비 명의주교이자 크라코프 보좌주교로 임명 받게 된다. 이어 1964년 12월30일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에 의해 크라코프 대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4년 뒤 1967년 6월26일에는 추기경에 서임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년) 준비위원으로 활동하고 공의회 회기에 참석하면서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보이티야 추기경은 1971년에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시노드) 상임위원에 임명되기에 이른다. 그는 자연스럽게 세계 교회 중심에 자리하게 되고, 1978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선종에 이어 후임 요한 바오로 1세까지 33일만에 급작스럽게 선종하자 1978년 10월16일 제264대 교황에 선출된다. 네덜란드 출신의 218대 교황 하드리아노 6세(1522~1523)에 이어 455년 만에 비이탈리아 출신이 교황직에 오른 것이다. 공산권 출신 58살 젊은 교황은 세계를 사목구로 삼아 활발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1979년 1월 중남미 사목순방을 시작으로 2004년 8월 프랑스 루르드 순례에 이르기까지 재위 기간 중 104회에 걸쳐 129개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고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보편 교회 목자로서 교황은 가르치는 직무에도 충실했다. 교황직에 오른 이듬해 1979년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발표를 시작으로 2002년 4월 발표한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에 이르기까지 회칙 14편을 비롯해 수많은 문헌과 강론, 연설 등을 통해 가톨릭 교회 신앙과 윤리적 원칙을 공고히 하고, 시대에 요청되는 사회적 가르침을 제시했다. 교황은 교황과 주교단의 친교 속에 보편교회 또는 지역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대안을 모색는 주교시노드(주교대의원회)를 15차례 개최, 공의회 정신인 '친교의 교회' 상을 구현하는 데도 노력했다. 정교회 수장과의 대화, 로마 루터교회와 유다인 회당 방문, 이슬람 사원 방문, 세차례에 걸친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인 기도 모임 등은 개방과 대화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교황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교황은 평화와 화해의 사도로서 가는 곳곳마다 사랑와 자비를 역설하면서 폭력 종식을 호소했으며, 특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취임 이듬해인 1979년 고국 폴란드를 방문한 교황은 종교자유를 역설하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했다. 교황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고국을 방문, 폴란드 공산체제 붕괴에 물꼬를 텄고, 1989년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만났다. 이 만남 이후 소련이 해체되면서 동서를 갈라놓았던 이념 장벽이 무너졌다. 교황은 또 2000년 대희년을 맞아 교회의 과거 오류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1992년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 갈릴레오(1564~1642)에 대한 중세 교회 재판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한 데 이어 1994년에는 대희년 준비 교서 「제삼천년기」를 통해 교회의 모든 자녀들에게 과거에 대한 잘못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대희년을 합당하게 준비하도록 촉구했다. 그리고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3월 '용서의 날' 참회예식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다인 학살에 저항하지 못한 점, 십자군 전쟁, 13세기 종교재판 등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다. 대희년을 지나 새 천년기를 맞이하고서도 인류 사회에 여전히 전쟁과 폭력의 어두움이 가시지 않자 교황은 2002년에는 묵주기도의 해를 선포, 세계 평화를 위해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쳐줄 것을 당부했으며, 지난해 10월부터 올 10월까지를 특별히 성체성사의 해로 일치와 희생, 나눔의 신비인 성체성사의 신비를 살아가줄 것을 당부했다. 국제사회의 혼란 속에서도 언제나 인류가 가야할 올바른 길을 제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81년 저격범 총탄에도 굴하지 않았던 것처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께서 불러가신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와 세계를 위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조은일 기자 anniejo@pbc.co.krcpbc2005.04.06

김수환 추기경이 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한 '진정한 그리스도의 대리자'1. 5월6일 103위 시성미사를 주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보다 많은 신자들과 만남의 기쁨을 나누고자 김수환 추기경 안내로 제단을 내려서고 있다. 2. 5월3일 방한 직후 절두산 성지순례에 이어 가톨릭대학교를 방문, 도착미사를 봉헌한 후 신학생들을 일일이 포옹해주고 있는 교황.3. 2001년3월24일 교황청에서 사도좌 정기방문중인 한국가톨릭교회 주교단과 함께 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중앙). 당시 한국주교회의 의장 박정일(왼쪽)주교가 주교단을 대표해 교황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25주년을 바라보는 김수환 추기경의 감회는 남다르다. 교황 재위 상반기 부분에 해당하는 84년, 그리고 89년, 두차례에 걸쳐 교황의 한국방문을 이끌어내고 교황의 방한일정을 함께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교회 사랑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김추기경은 '온 세상을 하나로 묶는 엄청난 지도력'을 가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두를 하느님께로 인도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함축해서 표현했다. "세계가 점점 세속화하고 가치관이 무너져 개인이나 국가가 확실한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 말씀으로 우리 모두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16일로 피선 25주년을 지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김수환 추기경의 소회다. 김 추기경은 또 "누가 될지 모르지만 후임 교황님은 굉장히 힘드실 것"이라고 전망(?)했다. 어느 누가 현 교황처럼 세계 곳곳을 사목방문하고 또 온세계를 하나로 묶는 엄청난 지도력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김 추기경은 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무엇보다도 '인간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간과 세계 평화를 위한 모든 정답을 그리스도로부터 구했으며 그분의 모든 가르침과 생각, 말씀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셨다"고 설명한 김 추기경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한 '진정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초 당시 교황 이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으로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시노드)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문헌 준비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시아대표로 참석한 나는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 옆에 앉게 되었는데, 그분의 명석하고 뛰어난 능력에 놀라워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토론에 참여하면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눈으로는 책을 읽고 귀로는 토론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죠. 토론 중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당신 의견도 발표하곤 했습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을 보고 참 놀랐습니다." 첫 만남에서 이처럼 깊은 인상을 받았던 김 추기경은 1978년 10월16일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교황과 관련한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피선된 뒤 참석한 추기경들과 한 사람씩 인사를 할 때였습니다. 당시 너무나 짧은 재위 기간을 기록한 전임 요한 바오로 1세를 생각해 볼 때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교황님과 인사를 나누면서 '교황님 건강을 위해서 수영장이 하나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황님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좋아하시면서도, 손으로 당신의 뒤를 따르는 비서진들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그런데 저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며 미소를 지어보이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뜻을 받아들셨는지 1~2년 후 교황님은 여름 별장지인 카스텔간돌포에 수영장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일자 교황님은 '수영장을 만드는 비용이 교황이 서거해서 콘클라베를 열고 취임식을 하는 비용보다는 적게 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더군요." 김 추기경은 며칠 후 10월22일 교황 취임식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한국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이는 1984년 결실을 맺었고 1989년 서울 성체대회 등 두 차례 한국 방문으로 이어졌다. "교황님께서 1984년 처음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에 저에게 '교황 피임후 나를 가장 먼저 초청해 준 사람이 당신이야' 하면서 저의 방문 요청을 기억하고 계셨다"고 김 추기경은 회상했다. 김 추기경은 또 교황이 취임식에서 추기경과 인사를 나눌 때 북한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피력했다고 밝혔다. 당시 공산권 국가였던 폴란드 출신인 교황은 한국이 분단국가인데다가 북한이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는 현실을 가슴아파하면서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재위 1978년 8월26~9월28일)와 그 선대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을 모두 만난 김 추기경은 선임 교황들에 대해 "요한 바오로 1세는 재위 기간이 워낙 짧아 함께 할 시간이 없었고, 바오로 6세는 나를 주교품에 올려주시고 최연소 추기경에 서임해 주신 분으로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나같이 못난 사람을 주교로,또 추기경으로 서임해 주신 것은 한국교회에 대한 바오로 6세 교황님의 남다른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하면서 "바오로 6세가 아버지 같은 분이라면 요한 바오로 2세는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아선지 형님 같은 분"이라고 표현했다. 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위원회 주교회의 의장으로, 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준비위원장으로 두번의 방한기간 중 최 측근에서 교황과 함께한 김 추기경은 "교황님이 한국을 방문해 주셨다는 것만으로 너무 기쁜 일이었기에 어려운 점도 없었고 힘든 줄도 몰랐다"면서 "다만 교황님이 더 오래 머물지 못하신 것이 가장 아쉬웠다"고 말했다. 교황의 방한 당시 김 추기경이 감동했던 일화 하나. "1984년 5월 교황님이 방한하셨을 때 광주, 대구 등지를 가려고 특별기를 함께 탄 적이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교황님께서 측근들과 몇 마디 나누시고는 곧장 성무일도를 펴고 기도를 시작하셨지요. 뒷칸 수행 비서들도 각각 자리에서 성무일도를 바쳤습니다. 비행기가 성당이 된 듯했습니다. 교황님께서 순례하는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시면서 해외사목방문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지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84년 한국 방문 당시 103위 시성식 미사를 한국어로 집전, 김추기경과 전 한국 신자들은 물론 비신자들까지도 감동의 물결로 몰아넣은 바 있다. 당시 교황의 한국어를 지도한 교사는 장익신부(현 춘천교구장 주교). 장신부는 교황의 한국방문을 대비,교황의 모국어인 폴란드어 알파벳으로 한국말 발음을 적어 교황의 한국어 공부를 도왔으며 당시 배운 교황의 한국어는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신자들을 감동케하고 있다. '찬미예수'와 '감사합니다' 등 교황청에서 한복입은 한국인을 보거나 한국인의 알현을 받을 때면 여전히 익숙하게 들을 수 있는 교황의 한국어 실력 때문이다. 지난 1999년 인도 뉴델리 아시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문헌 발표 때에,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2001년 3월 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 축복식 때에 교황을 알현한 김 추기경은 "성당을 가득 메운 한국 신자들의 환호에 응답하고 신자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는 열정적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계셨다"고 말하고, "교황직에 즉위했을 때에는 박진감 넘치는 지도력을 가진 분이셨는데, 25년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너그러워지는 깊이를 교황님에게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교황님이 영육간에 건강하실 수 있도록 신자들의 많은 기도를 바란다"고 당부한 김 추기경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25주년 기념행사와 추기경 회의 참석을 위해 12일 로마로 출국했다 . cpbc2003.10.15